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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정태춘과 박은옥

by 이성근 2019. 3. 20.


노래를 팔고 싶지 않아요

정태춘이 인생의 전부라던 음악을 놓고 붓을 든 이유

데뷔 40주년 맞은 아내 박은옥과 함께 올 한 해는 재밌게 놀아보자

 

사무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탁자 위에 둘둘 말린 종이 꾸러미가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인터뷰하기 전 그걸 조심스레 하나씩 펼쳐 보이며 설명이 이어졌다. 요즘 말로 캘리그래피라 하는, 작가 스스로는 붓글이라 하는 작품들이었다. 한자로 쓴 작품은 하나하나 해석해주고, 마치 잠언처럼 짧게 쓰인 문구는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10여 분 동안 음악가정태춘 대신 붓글 작가정태춘이 있었다.

 

그 안에는 언제나 저 슬픈 고향

“15년쯤 됐을까. 세계화, 김영삼 정부부터 그런 흐름이 있었죠. 그게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면서 과거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가 국경을 초월하는 자본주의로 바뀌고, 그것들이 인간의 삶 양식 전반에 문명사적 변화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죠. 예술이든 철학이든 담론이든 시장에서 이윤가치를 가지지 못한 것은 모두 사라지는 상황 변화 속에, 내부적으로는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가 진척되면서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는데 난 그것에 동의하고 따라가기가 어려웠어요. 내 노래는 그런 시장에서 시장가치가 없다, 그러니 이제 창작을 접자고 생각한 거죠. 직접적으로는 그때 발표한 음반 두 장이 피드백이 없고 안 팔리고 하니까 계속 만들 수가 없었어요. 그럼 나는 시장에서 빠져나온다, 이 산업주의 신문명에는 같이 갈 수 없다, 뛰어내리자, 뛰어내리면서 엄살을 조금 섞어 다쳤다, 피가 좀 흐른다, 하면서 우울한 시간을 보낸 거죠.”

 

그는 기타를 치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고 음악을 놓았다. 대신 사진을 찍고 가죽공예를 하고 한자 공부를 하고 붓글을 썼다. 그는 스스로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사람이라 말했다. 삶이든 세상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사람인데, 과거엔 그게 노래를 통해 나왔다면 이제는 붓을 통해 나온다. ‘시마’(詩魔)라고 표현할 만큼 붓글에 빠져 노래 대신 텍스트로 표현하고 정제하고 조탁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노래는 붓글로 바뀌었지만 그 안의 정서나 메시지는 여전하다. 붓으로 쓴 글씨 안에 그가 줄곧 노래해온 저 슬픈 고향이라는 그리움의 대상이 있고, 분노가 있고, 메시지가 있었다. “유년기·소년기 때 고향(경기도 평택)에서 봤던 들판과 바람과 큰 나무 하나 없는 겨울의 황량함, 서해 바다와 갯벌이 원체험처럼자리잡은 이가 만들어낸 예술은 표현 매체가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정태춘씨는 201211집 발매 이후 음악을 그만두고 붓글에 빠져 지냈다.

 

1시인의 마을뒤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사춘기 때 김민기나 서유석 같은 한국 초기 포크 음악을 많이 들었고, 그전엔 클래식에 심취했죠.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형님이 사다준 클래식 전집 안의 이탈리아 가곡부터 오페라 아리아까지, 피아노·바이올린 소품부터 교향곡까지 클래식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또 시골 마을의 풍물, 평택이 풍물이 센 곳이거든요. 그런 풍물의 기억도 아주 밑바닥에 들어와 있었죠.”

 

정태춘이란 가수가 처음 등장하며 신선함을 주었던, 그리고 음반을 발표할수록 더욱 짙어졌던 토속적느낌은 이런 원체험에서 비롯됐다. 들판과 바람과 큰 나무 하나 없는 겨울의 황량함이 정서적 부분이었다면 한국 포크와 고전음악, 풍물은 음악적 자양분이 돼주었다. 시골에 살면서 들은 많은 구전 이야기도 그의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유년기 체험이 자신이 직접 겪은 건지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를 다 끌어와서 창작한 건지 헷갈려할 만큼 그때의 기억은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새로운 가수의 등장을 모두가 반겼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가득 밴 가사는 아름다운 선율에 실려 전달됐고, 노래와 함께 자연스레 드러나는 토속적 정서는 정태춘이라는 신인가수를 우뚝 서게 했다. 첫 음반 시인의 마을(1978)은 가수 스스로 상당한 성공” “대단한 출발이라 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신인가수상과 작사상을 받을 만큼 단순한 인기 가수가 아니라 동시에 문학적이고 시적인 싱어송라이터라는 훈장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태춘은 주류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시상대에 올라가면 당당하고 멋있게 연출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부족했다. 인기라는 조명을 받으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편한데하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징적인 예가 MBC <명랑운동회>였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처럼 뛰고 구르고 밀가루 속에서 찹쌀떡을 찾아 먹어야 하는 프로그램에서 정태춘은 결코 명랑하지 못했다. 회사에선 이거 조금만 하면 되는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케줄을 잡아왔지만 정태춘은 점점 시스템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당시엔 내가 결혼했음에도 상업적인 결과 같은 건 신경을 안 썼죠. 1집이 히트하면서 그 보상이 컸어요. 일단 먹고사는 데 문제없고 회사에서 생활비 대주고, 정말 행운아죠.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노래만 골라서 2, 3집에 담았는데 그걸 다 회사에서 받아줬어요. 그런데 두 음반 다 실패한 거죠.”

 

음악 역시 대중과 멀어졌다. 첫 음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태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2집과 3집에 담았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더 강해진 토속적 기운과 적극적으로 차용한 국악 요소를 대중은 외면했다. 뚜렷한 음악적 청사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때그때 심취했던 관심사를 바로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당시 그는 국악에 빠져 있어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생활고가 눈앞에 다가왔다. 4년 전속 계약에 800만원이라는 형편없는 조건에 새로운 회사와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4·5집의 노래는 2·3집보다 덜 어둡고 덜 가라앉아 있었다. 부인 박은옥과 함께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 같은 달콤한노래가 다시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같은 노래가 다시 한번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대중 앞에 호출했다. 단순히 대중적인 성공만은 아니었다. <북한강에서>를 통해 들려주는 정태춘의 세계는 더욱 깊어져 있었다.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가 노래 안에 치열하게 자리했다. 하지만 개인의 고뇌는 여기까지였다. 시대는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0년대 후반으로, 다시 1990년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고민에서 사회의 고민으로

개인적 고뇌를 하던 시기가 있고, 실존을 고민할 때가 있고, 사회적 고민을 할 때가 있고, 난 그게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비로소 어른으로, 한 시민으로 깨어났구나 생각하죠.”

 

1988년 발표한 음반 무진 새 노래에는 <그의 노래는>이 담겼다. 그는 노래의 의미와 쓰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슬픈 환락과 전도된 가치 속에서라는 후렴구를 통해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렸고, 1988년 겨울 청계 피복노조의 집회에 참여해 노래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거리에서 노래할 것임을 알렸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란 제목의 노래극을 하며 전국을 돈 것도 같은 해였다. 왜 교과서에 실리는 동요에 누렁송아지가 아니라 얼룩송아지가 있느냐는 항의의 의미로 지은 제목처럼, 그는 한창 민족주의에 경도돼 있었다.

 

가사가 심의에 걸리면 다시 수정하면서 수정 의견을 써서 올리고, 그러면 심의위원들은 반려하면서 반려 의견을 보내고, 그게 너무 반복되다보니 심의 당국의 사무국장과 친분이 생길 정도였어요. (웃음) ‘이러지 말고 정형이 직접 와서 심의위원들한테 한번 설명도 하시라고 해서 심의실에 들어가면 잔소리가 쏟아져요. ‘노래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합니까?’ ‘이런 얘기를 꼭 해야 합니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무국장이 옆방에 가서 같이 고치자고 얘기해요. 그런 실랑이를 거치며 미뤄놓고 미뤄놨던 노래들이 일부 무진 새 노래에 실렸죠.”

 

일부가 무진 새 노래에 실렸지만 검열의 가위질을 피해가진 못했다. 앞서 언급한 <그의 노래는>에서 시영아파트후미진 아파트, “서울 변두리 검은 하천엔 썩은 물만 흐르고/ 역한 냄새 속에서 웃지도 않고 노는 애들이란 가사는 서울 변두리 학교 앞에는 앳된 병아리를 팔고/ 비닐봉지에 사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애들로 바뀌었다. <고향집 가세>에서는 문둥이미군부대란 낱말이 들어 있단 이유로 노래의 한 절()이 통째로 들려나갔다.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때부터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뀌는 구원(舊怨·오래된 원한)이 있었다. 고독해서도 방황해서도 안 되는 시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었다. 무진 새 노래가 힘들게나마 일부 통과됐다면 , 대한민국(1990)은 다 반려당하고 <한여름 밤> 한 곡만이 통과됐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그동안 쌓여온 심의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면서 이제 싸움이다란 결행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많은 반대가 있었어요. 선배 작품자들 중에서도 태춘아, 네가 잘 모르는 거야’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야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 문제로 전화하면 전화를 아예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불안한 싸움이었죠.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내가 이렇게 해서 60년 된 제도가 무너지는 게 쉽지는 않다는 걸 알았고, 또 가요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게 당시엔 일반적인 생각이었어요. ‘모든 걸 다 놔두라는 거냐?’ ‘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냐?’ 사실 이런 것들과의 싸움이었죠. 심의가 없어진다면 별 이상한 게 다 나올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나는 별 이상한 게 다 나와야 한다고 말했죠. ‘너 이상한 노래 하려는 거잖아이런 분위기였는데, 내가 그동안 부드러운 가사를 써왔다면 동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서 고립되는 기분이었죠.”

 

정태춘씨가 312일 서울 마포구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사무실에서 자신의 노래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 파괴하는 시장에서 빠지겠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태춘은 음악가로서 홀로 싸웠다. 사전심의 폐지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불법음반 두 장을 제작하고, 토론회에 나가고, 국회의원을 만나고, 국회로 문화체육관광부로 쫓아다니며 외롭고 지난한 싸움을 했다. 안타까운 건 기자회견장에 찾아온 강산에 정도를 빼고는 음악가 그 누구도 연대나 지지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전심의 철폐 과정을 설명하며 반복한 어려웠다힘들었다는 말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됐다. 지금 그 수혜는 모든 음악가가 받고 있다.

 

한 시대를 거치며 1990년대를 맞은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정동진/건너간다를 발표한다. 각 음반의 대표곡인 <92년 장마, 종로에서><건너간다>에는 공통적으로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란 가사가 나온다. 또 두 음반에는 회한과 희망이 교차한다. 그에게 90년대는 그렇게 두 감정이 교차하는 애매한 시기였고, 90년대 후반엔 더 패색이 짙어지고 나빠지고 있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자본에 의한 차별이나 야만은 더 심해지고 그 과정에서 나의 완고함 같은 것이 대중에겐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좀더 섬세해지는 나의 미의식을 나만의 음악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도 시장에서 잘 안된 거죠. 시장은 대량소비를 위한 공장으로 바뀌는 큰 변화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내가 같이 동의해 따라갈 수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어요. 시장의 변화를 예술을 파괴하는 무언가로 봤기 때문에 나는 그만두련다, 나는 다른 거 하고 싶다, 이렇게 된 거죠.”

 

지금껏 함께해준 사람들을 위해

다시 얘기는 앞으로 돌아간다. 2000년대 들어 정태춘은 침묵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으로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그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사적인 참여라고 밝혔다. 그동안 사진 찍고 가죽공예 하고 한자 공부하고 붓글을 썼다.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함께 활동한 지 40년이 될 것을 기념해 올 한 해 많은 행사가 열린다. 그는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를 많이 도와주고 함께해준 사람들이 제안해, ‘그래, 올 한 해는 재미있게 놀아보자고 마음먹었다. 3월부터 11월까지 콘서트, 음반, 출판, 전시, 학술, 아카이브(기록 보존), 트리뷰트(헌정) 프로그램이 전국에서 진행된다. 전시에 나올 붓글 가운데는 그런 민망함을 담은 나를 시장에 내놨다. 나를 팔고 있다는 글귀가 있다. ‘반산’(反産)이란 제목의 연작도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이야기하고 있다.

글 김학선 음악평론가 한겨레21 12543.20

 

정태춘 1/ 1978

시인의 마을 (서라벌 레코드사 제작)

박은옥 1/ 1978

회 상 (서라벌 레코드사 제작)

정태춘 2/ 1980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서라벌 레코드사 제작)

박은옥 2/ 1980

양단 몇 마름 (서라벌 레코드사 제작)

정태춘 3/ 1982

새벽길 / 우네 (대성음반 제작)

정태춘 박은옥 4/ 1984

떠나가는 배 / 사랑하는 이에게 (지구레코드사 제작)

정태춘 박은옥 5/ 1985

북한강에서 / 봉숭아 (지구레코드사 제작)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힌 먹구름이

밤새 당신머리를 짙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나와 그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이름과

또 당신이름과 그 텅빈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속으로 새벽강은 흐르고

나는 그강물에 여윈 내손을 담그고

산과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딫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강으로 되돌아 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 이후, 정태춘 박은옥 자체 제작 앨범들 ---

 

정태춘 박은옥 앨범 제 6/ 1988

무진 새 노래 (삶의 문화 제작)

정태춘 앨범 제 7/ 1990

, 대한민국... (카셋트로 삶의 문화 제작 / 비합법 발매)

정태춘 박은옥 앨범 제 8/ 1993

92년 장마, 종로에서 (LP, 카셋트로 삶의 문화 제작) / 비합법 발매)

정태춘 박은옥 앨범 제 9/ 1998

정동진 / 건너간다 (삶의 문화 제작)

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 1. (삶의 문화 제작 / 1987)

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 2. (삶의 문화 제작 / 1991)

(음원에 관한 권리 확보를 위해 이전 곡들 재 녹음, 발매)

정태춘 박은옥 앨범 제 10/ 2002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삶의 문화 제작)

<정태춘 박은옥 20년 골든앨범> (2CD / 2002/ 삶의 문화 제작)

정태춘 박은옥 앨범 제 11/ 2012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삶의 문화 제작)

 


2001년 월간 말 인터뷰

문호근씨는 천국으로 가고 /

거리엔 황사만이도올 선생은 어느 날 잠적하고(떠날 때를 아는 사람)정동영씨는 조심성 없이(권노갑, 또 아무개 씨바좋아) /

노무현씨도 조심성 없이(좃썬일보 씨바, 일갈! 좋아요) /

이회창씨는 늘 당당하게(기득권 수호 씨바, 메인스트림 수호 씨바) /

백태웅이 부부는 미국으로 공부 가고 /

, 박노해 김진주 사노맹은 어언 신화가 되고김지하씨가 기만한 거냐(아니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배반한 거냐 /

아무도, 강준만씨도 침묵하고(“죽음의 굿판은 그렇게) 얼렁뚱땅 정리되고, 사람들 음, 사람들

 

정태춘이 사람들을 발표한 지 10여 년 가까이 되어 다시 화제에 올랐다. 지난 69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렸던 백기완 선생의 노나메기후원을 위한 통일, 그날 음악회에서 정태춘은 사람들의 개사곡을 발표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지난 1993불법음반으로 발매되었던 자신의 6"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됐던 사람들90년대를 맞아 그 시대의 풍경을 날카로운 풍자와 회한으로 담아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2001년 여름, 예의 그 풍자는 더욱 날이 서고 80년대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진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 79일 화창한 오후. 올림픽 공원 부근의 전망 좋은 카페에서 정태춘씨를 만났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정 선생님도 많이 늙으셨는데요. 머리도 희끗희끗하시고.”

, 난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허허

 

외모를 화제로 대화를 풀어 나가려다가 그만 어긋나고 말았다. 딸 정새난슬 양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가 아니, 벌써?”라고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과격한 운동권 투사로 보이지도 않는다. 깔끔한 감색 티셔츠와 잘 빗어 넘긴 머리에서 세련된 중후함이 풍겨왔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봄이라서 공연들이 쭉 있었고 엊그제 삼척공연까지 끝을 내면서 이제 막 휴지기에 들어선 상태지요. 주말엔 일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이제 새 노래를 준비해야죠.”

 

요즘에도 실천문학을 보십니까?

아니오, 전혀 못 봅니다.”

 

한때 모 방송국의 신인가수상까지 수상했던 서정가수정태춘이 의식화(?)되는 데에는 실천문학의 역할이 컸다. 80년대 초 명랑운동회같은 곳에 출연해 얼굴이 너무 뻣뻣하다고 핀잔을 들어야 했던 선천적인 비제도권 가수에게 실천문학은 저항가수로 발전(?)하는 정서적 뒷받침을 했다. 1993사람들을 발표할 즈음 이미 그는 문화운동판의 대부가 되어 있었다.

 

2001년판 사람들은 언제 만드셨습니까?

“69일 공연 며칠 전에 만들었어요. 공연 바로 전날에도 손을 봤죠.”

 

원래 예정에 있던 게 아니었죠?

그랬죠. 애초에 백 선생님이 제안하실 땐 나하고 전인권, 장사익씨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공연이었죠. 이런 공연이라면 참 재미있는 카드겠다 싶어서 한번 해보려고 했었죠. 나중에 공연내용이 좀 달라졌어요. 여러 밴드들이 많이 나오고 전인권이가 또 빵빵하게 할 테니까 난 앞부분에서 소박하게 해야겠다 싶어 사람들을 부르기로 한 거였죠. 노래가 잘 나오지는 않았어요. 가사들이 입에 척척 달라붙지도 않았고.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실은 좀 실패했다 생각했죠.”

 

그래도 그날 호응은 대단히 좋았습니다.

내 나름대로 포크라는 건 이런 거야하고 보여주고 싶었죠. 중간에 아예 음악을 끊고 말로 하는 부분도 굳이 절제나 압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일 또 이 노래를 해야 한다고 하면 아마 내용이 또 달라질 거예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386에 관련된 부분들은 한동안 계속해 나갈 작정입니다.”

 

사람들에서 그가 주요하게 말을 건 대상 중 하나가 바로 386세대였다. 그는 노래말을 통해 “386이야말로 해방정국과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이념적 상상의 지평이 넓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뜨겁게 타올랐던 시기의 빛나는 세대 사람들 아냐?”라고 물으며 이대로 저 추악한 기득권 그룹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말고 미래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 나서, 나서야지하고 당부했다.

 

어떤 구상을 하고 계신 건가요?

일단 문화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386이 나설 수 있도록 앞에서 (문화로서) 부추기고 선동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선, 정계개편의 상황에서 이제 386이 세대교체를 슬로건으로 들고 나서야 해요. 이 세대교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남한사회 전체의 세대교체를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이나 내용은 그들이 알아서 할 수 있으리라 보고 우리는 다만 계기가 되자는 것이죠

 

그는 문화예술운동쪽에서도 이미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그러나 한 사람의 개혁적인 대통령보다 개혁세대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0년 간 침묵했던 386이 그 묵비권을 깨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대협 세대의 문화와 미학과 진보예술로서의 일정한 성취를 함께 녹여내 그 그룹들 전체가 정서적으로 아우러질 수 있는 그런 틀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386의 부활이랄까 이런 겁니다. 아직 어떤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진 않았지만요. 이게 하나의 꿈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 행복한 꿈에 한동안 젖어볼 생각입니다.”

 

여전히 386에 희망이 있다고 보시는군요?

그래요. 이들은 상상, 열정, 실천을 통해서 우리 근현대사를 옥죄어 왔던 어떤 틀을 깨려고 노력한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물론 통합하기 힘든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적어도 1백만 명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기존의 주류문화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를 거의 완성했던 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단결된. 그 문화나 미학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공간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386에 대한 희망을 말씀하셨지만 백태웅씨나 박노해씨에 대한 노래말에서는 어떤 절망이나 환멸이 느껴지는데요

처음에 이 노래 만들었을 때는 감옥에 있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느낌을 담았었는데. 지금은 이 사람들이 다 나왔죠. 하지만 뭐 백태웅씨 부부는 미국으로 갔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전혀 사견이 없어요. 사실만 나열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박노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 느낌을 담진 않았어요. 주위의 친구들은 여기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코멘트는 해야지 하는. 그런데 저는 박노해 스스로 자기는 강철지식인이라고 했던 그 말을 아직은.”

 

1993사람들을 만드셨을 때까진 박노해씨나 백태웅씨를 만난 적이 없으셨죠?

그렇죠. 백태웅씨의 부인만 행사 때문에 늘 만났었고, 박노해씨는 사노맹할 때 돈 좀 내놓으라고 해서 내가 돈을 조금 내놨고, 그걸로 인해서 한겨레신문에 1면 톱으로 나온 적이 있죠. 그 후에 박노해씨가 감옥에서 책 보내주고 그런 정도였죠. 애정은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 선생님도 그렇게 좋게는 이야기 안 하시더군요. 백 선생님을 좀 돕자는 공연이었는데 박노해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직은좀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죠.”

 

그는 박노해나 백태웅씨 이야기 부분에서 계속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아직 그렇게 섣불리 매도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거기에 비하면 김지하씨 부분을 쓰는 데는 사실 용기가 필요했죠.”

 

김지하씨는 그래도 과거에 대해 잘못을 시인한다는 언급도 했는데요.

지금 그분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 그러나 거기에 대해 책임을 묻자는 차원이 아니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진보적인 문예운동단체로서 그 정도로 넘어가는 게 올바르냐 하는 것이었죠. 이것도 서준식씨가 유일하게 했던 이야기고, 게다가 강준만씨마저 침묵하고 있는 게 안쓰러웠어요. 그래서 서준식씨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생겼죠(웃음).”

 

노무현씨와도 친분이 좀 있죠?

친분은 있죠. 그런데 만일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는 할 이야기도 없지 않아 있고. 하지만 노래로 그 사람을 이야기할 때는 정치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부분으로 접근하고 싶었죠.”

 

혹시 문화예술운동쪽에서 내년 대선 때 밀 후보가 노무현씨 아닌가요?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어요. 허허.”

 

정태춘씨가 지난 변혁의 시대와 또 변혁의 세대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과 믿음은 생각보다 더 커 보였다. 그러나 더러는 그것이 좋았던 옛날에 대한 미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현재가 궁금했다.

 

혹시 요즘 안티조선 노래를 부르는 디지나 젠 같은 신세대 가수를 아십니까?

노래를 직접 들어보진 못했지만 신문에서 봤어요. 그런데 난 좀 약하다고 생각해요. 그 나이 또래라면 사실 더 전복적이길 바라요. 내가 좀 과격해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신세대나 신세대 가수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팍팍 건드려 줬으면 해요. 고정관념과 금기를 확 깨는. 하다못해 섹스에 대한 음반을 낸 박진영 같은 경우도 장삿속이다라고 몰 수 있지만 그렇게 금기를 깨는 사람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봐요. 그 친구가 또 정치학을 공부했다니까 사회일반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금기를 깨듯이 자기발언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태춘씨는 신세대에 대해 반역의 깃발을 들지 못하는 상상력은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10여 년 전 이제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고 흐느꼈던 그는 다시 한 번 미래의 물줄기를 바꿀 깃발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 여름. 저녁 뉴스에선 서울이 다시 장마권에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은옥] 왜 박은옥만 만났냐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노래하는 여가수정태춘이 보면 조금 기분나쁠 이야기를 나누다

 

박은옥을 만났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사람들은 누구한다. “정태춘, 박은옥의 그 박은옥해야 그제서야 사람들은 ! 그 박은옥!” 한다. 그러고 또 내게 묻는다. “왜 박은옥만 만나인터뷰 끝에 그녀도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듀엣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난 한번도 그들을 듀엣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각자 솔로가수이긴 하지만, 다만 박은옥은 노래만 부르고 정태춘은 노래까지 만들며 박은옥의 노래 대부분이 정태춘의 곡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그들은 부부인데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음색 궁합이 잘 맞아서 가끔 듀엣곡을 불렀을 뿐이다. 음반을 함께 낸 건 항상 같은 음반사와 일했기 때문일 뿐이고.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반보 뒤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정태춘 노래를 듣고 숙연해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나 역시 그의 노래는 김민기의 그것처럼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내 얼굴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다시 쳐다보게 하는, 무서운 힘을 가진 정신이었다. 하지만 투사가 노랠 하는 건지 가수가 투쟁을 하는 건지 헛갈리는 그에게서 받는 감동 못지않게 가짓수는 부족하지만 <봉선화> <회상> 등의 노래로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던 박은옥의 노래 역시 내겐 정신이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매스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반보 뒤였고 인터뷰 속 그녀의 얘긴 정태춘에게 온갖 존경과 찬사를 마친 뒤 부록처럼 간결하게 다뤄질 뿐이었다.

 

자신은 그저 반보 뒤가 편할 뿐이라면서 첫 만남 같지 않게 서로에게 친숙함을 느낀 여가수와 여배우의 대화는 시작됐다. 20년 골든앨범에 수록할 곡들을 고르던 중 그녀는 감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예술가로서 남편의 능력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보는 살리에리 같은 심정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사람의 곡을 받을 수 있고 함께 노래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으로선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단다. 이유는 외로움을 느낄 정도로 무뚝뚝한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세상을 향해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아내를 향해선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는 도를 지나친 그의 무던함에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결혼이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그에게 왜 결혼했느냐 물었고, 그는 아주 담담히 상대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잔소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난 그 가장 큰 선물을 당신에게 줬을 뿐이다라고 하더란다. 거대한 가인의 거대한 결혼관이다.

 

정태춘의 노래 중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가 많다. 특히 맞벌이 영세부부가 일 나간 사이 불이 나 어린 남매가 밖으로 잠긴 문을 열지 못해 타죽은 사건을 노래로 만든 <우리들의 죽음> 같은 노래는 도저히 끝까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노래들은 사람들더러 즐기라는 건지 열 받고 절망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불편하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너흰 금방 잊어버리잖아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이 세상 모든 투사들이 누구누구처럼 변질된다 해도 끝까지 투사로 남을 것 같은 사람 정태춘. 그리고 그의 아내 박은옥. ‘투사의 아내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 물었다. 다소 불편한 건 있지만 불만은 없다, 오히려 남편이 존경스럽단다. 그러다 이내 장난스레 푹 웃는다. 까닭을 물으니 집안에선 별로 민주적이지 못한 남편이라고 한다. 자기 딴에는 가사노동을 분담한다고 하고 있으나 남자로 누리는 삶을 교육받아온 한계가 없지 않다는 거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알아서 기는 여자로 교육받아온 것이 없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살림에 대해 뭐라고 잔소리하는 법도 없고 자신의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가수의 길을 걷는 아내 박은옥과 비교했을 때 그의 가사노동량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언행일치를 해라고 농을 한다고 한다.

 

사진/ 그를 만나며 자신도 훌륭한 예술가였지만 더 훌륭한 예술가와 사랑에 빠져 그저 평생을 그 남자의 그늘에 가리워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생각났다.

 

젊을 때 좀더 치열했더라면

게다가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한다고 말하는 자신을 향해 위로는 무슨 놈의 위로, 세상을 바꿔야지라고 타박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박은옥, 그녀 자신은 지금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래를 하는 건 그저 그 사람의 몫일 뿐, 자신은 그런 남편을 믿어주고 바라봐주는 동료이며 앞으로도 전체가 아닌 개인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할 거란다. 어느 인터뷰에서 정태춘은 노래가 현실을 피해간다면 그건 그저 레크레이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데 그는 언제나 아내 박은옥에게 현실을 피해가는 노래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전혀 레크레이션 같지 않다. 정태춘은 말은 그렇게 해도 이 세상엔 개인을 위로하는 딴따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게 일상이듯이 노래가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 역시 세상을 바꾸는 일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제일 고민되는 것이 뭔지 물었다. 2년 동안 심적 슬럼프에 빠져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거란다. 내가 남편 얘길 많이 물어보긴 했지만 그녀는 마치 정태춘 대변인인 것처럼 모든 얘길 그와 결부해서 대답했다. 마치 자신은 정말 아무런 스토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다시 물었다. 박은옥 자신의 고민을 말이다. “내 개인적인 고민이라잠시 낮은 한숨을 쉰 뒤 그녀는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음악인으로 태어나서 치열하게 음악만 해보고 싶다. 왜 젊었을 때 좀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다 내 잘못이다. 아무도 방해한 사람 없고 붙잡은 사람 없었다. 그저 내가 스스로 더 이상 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일보다 가정을 택한 것도 다 내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니 후회된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음악만 하고 싶다. 정태춘씨가 그런 것처럼.”

 

까미유 끌로델을 떠올리다

자신도 훌륭한 예술가였지만 더 훌륭한 예술가와 사랑에 빠져 그저 평생을 그 남자의 그늘에 가리워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생각났다. 까미유 끌로델 같은 여자 말이다. 박은옥 부부가 먹고 살 일이 난감해졌을 때 정태춘씨는 그저 세상을 어떻게 해야 구원하는지에 대한 고뇌만 하였고 이곳저곳의 밤무대를 보따리 장사하듯 뛰어다니며 노래품을 파는 건 박은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태춘은 남의 노래도 할 줄 모르고 팝송은 더더군다나 할 줄 모르니 방송이건 밤무대건 환영받는 가수가 아니었다. 정태춘 없는 박은옥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박은옥 없는 정태춘 역시 상상할 수 없음이다.

 

인터뷰 끝에 그는 요즘 회자되는 무속인에 대한 다큐영화 <영매> 얘길 했다. 연신 웃다가 울다가 하며 봤다고 참 좋았다는 거다. 죽은 가족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굿을 한다지만 굿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아 있는 자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것이고, 무당은 그 중재자인 것이다. 노래로 상처를 위로해주는 그녀 역시 훌륭한 무당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당골들의 삶이 가깝게 느껴졌을 거다. 난 그녀가 앞으로 더 많은 굿을 했으면 좋겠다. 혁명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세상이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닐까오지혜 | 영화배우/ 사진 |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03.10.23 한겨레21

 

“5년의 침묵인간에게 희망 있나 회의했다

      


5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정태춘씨는 예술가들이 시대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대중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슬로건을 가지고 혼자 치고 나갈 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대중과 유리되더라도 진정한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자본의 독재 외면

상상력이 정당에 머문다는건 현 세상 극복 포기

데뷔 30주년 공연 앞둔 정태춘·박은옥 부부

부부 가수 정태춘·박은옥씨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1027~111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으로 마련되는 이번 공연의 주체는 사회·문화·예술계 인사 100명으로 꾸려진 기념사업 추진단. 배우 권해효·오지혜씨와 가수 강산에·윤도현씨, 작곡가 김호철·윤민석씨, 시인 도종환·백무산씨, 영화감독 임순례씨와 영화제작자 이은씨 등이 참여했다. 2004년 콘서트 이후 5년 남짓 공식 무대에 서지 않았던 정태춘·박은옥씨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두 사람은 그동안 대중이 더 이상 자신들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해 노래도 만들지 않았고, 무대에 서지도 않았다고 한다.

 

공연과 함께 1028~113일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에서는 전시회도 펼쳐진다. ‘정태춘 박은옥 트리뷰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이 전시에는 배병우·박재동·임옥상·이철수·류연복·김홍희·노순택씨 등 화가 및 사진작가 40여명의 작품 50여점이 나온다. 아울러서 정태춘·박은옥씨가 직접 찍은 풍경 사진과 이들의 과거 음반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

 

서울 송파에 있는 정태춘씨의 작업실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앞두고 있는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문화평론가 김규항씨가 맡았다.

 

-아무래도 지난 몇해 동안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중단한 사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 선생은 원래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멤버였지만 막상 선거 때는 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요?

나는 노문모가 노무현이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견인할 어떤 세대의 세력화를 이루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문건으로 제출했고 토론도 했지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곳을 탈퇴했습니다. 선거 때는 고민 끝에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지요.”

 

-예술가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90년대 이후 사회운동가, 아니 정치인의 상상력을 뒤쫓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당선 가능성이라든가 현실적 실현 가능성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의 최대치가 제도정당의 그것에 머문다는 건 우리가 현재 세상을 넘어서길 포기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상상력의 빈곤이 답답했어요.”

 

-예술가들의 그런 모습은 거대한 사회변화와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요?

김대중 정권 즈음에 다들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시담론이 중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반대 생각이었어요. 거대한 것이 밀려오고 있었어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인 변화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래서 이전보다 오히려 더 큰 거대담론이 필요한데 그 변화를 읽지 못하고 시민의 일상, 지역의 문제 같은 미시적인 문제만 중요시했지요.”

 

-80년대 진보운동의 거대담론 편향에 대한 반성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반성이 반대의 편향, 말씀하신 대로 미시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편향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90년대 이후 각광 받은 대형 시민운동들에서 그런 모습을 적잖이 볼 수 있는데요?

변혁을 말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너뜨리려 했던 주류 질서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권력이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권력은 시민이 아니라 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지요.”

 

-거의 예외 없이 그렇게 빠져들어갔죠. 한국의 진보운동은 대학 때 학생운동에서 출발해서 어떤 큰 흐름을 함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80년대의 변혁운동이 90년대의 시민운동으로 바뀐 것도 그렇고요. 선생이 대학을 다니지 않은 게 그런 면에서 좀더 특별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급진적인 세력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메인 스트림 속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메인 스트림에 한 발 걸친 운동으로 갈아탈 조건을 가졌다는 건 분명히 그들의 약점일 수 있었죠. 그런 면에서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나는 변혁운동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음악가로서 개별적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개별성이 변화하는 상황을 그나마 내 나름의 눈으로 보게 했던 것 같기도 해요.”

 

-대학을 다닌 음악가들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웃음) 선생의 현실 인식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것이었음에도 함께하던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2002년 이후 일체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언제까지나 뜻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대중들도 더 이상 내 이야기나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흡수되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대중들과 호흡하며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도 어려웠지요.”

 

인류문명에 자부심 버렸지만 포기못할 투쟁 있어

예술가는 대중과 유리되더라도 이상주의자 돼야

 

-아내이자 오랜 동지인 박은옥 선생 보시기엔 어땠는지요?

()“너무 힘들어하니까 보는 나도 많이 힘들었어요. 이 사람이 반복해서 말했어요. 군부독재가 물러났지만 이젠 더 공고하고 사악한 자본의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변화에 대해선 외면하고 그 질서 속에 들어가 명랑한 얼굴로 개혁을 말하고 민주화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런 부정확한 현실 인식이 우리 사회를 내내 힘들게 만들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전에 함께하던 분들과 인간적인 갈등은 없었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건 없었죠.”

()“남에게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서운함이나 고립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경기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 하다가 논구덩이에서 플래카드에 목이 졸려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거기 병원에 쫓아온 후배가 그랬대요. 형님은 아직도 이러고 사시냐고, 세상 좋아졌는데 이제 그만하시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그러더래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왔다고? 그 세상이 왔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박은옥씨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사회활동을 일체 중단한 상태에서 대추리 싸움은 예외가 되었는데요?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는 결례가 될 말이지만, 나로선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사적인 참여였습니다. 내 서정의 본향이기도 한 그 들판에 대한 마지막 헌신이랄까.”

 

-대추리 싸움에 관심이나 연대가 참 적었습니다. 양극화나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서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변화가 많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보통 사람들의 내면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20,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죠.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을 윤리적인 잣대로 비난할 순 없지만 그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 변화에 실망하고 화가 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젠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예술가들이 시대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시대엔 대중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슬로건을 가지고 혼자 치고 나갈 수도 있는 거죠. 예술가들이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더라도 진정한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대중성을 좇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중성이라는 말이 상품성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쉬는 동안 뭘 하고 지내셨습니까?

시를 쓰고 사진도 찍고 가죽 작업도 하고, 나름대로 바쁘고 재미있게 지냈어요.”(천진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는 <노독일처>라는 시집을 낸 바 있고 사진과 가죽공예 또한 전문가 수준이다.)

 

-재미있었다고 하시지만 노래를 만들지 않는 정태춘이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진 않으셨습니까?

 

가끔 좋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땐 나도 곡을 써야 한다, 또 어떤 특별한 화두가 떠오르면 그걸 곡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때가 있죠. 그러나 더 이상 노래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아내 박은옥씨에게) 뭐든 안 하면 퇴보하게 되는데요, 음악 작업은 더욱더 그렇지요. 무례한 질문일 수 있는데 정 선생의 작곡 능력이 여전한지, 혹시 확인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전혀 하지 않아서 나도 알 수 없었는데, 확인하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이번 공연 준비하는 후배들이 공연의 배경 음악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내는데, 아주 비장한 게 참 좋더라구요. 역시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신은 참 불공평하구나 싶기도 했어요.(웃음)”

 

-박 선생은 정태춘·박은옥이라는 듀오와는 별개로 매우 특별한 스타일을 가진 보컬리스트이고 팬들도 많습니다. 정 선생이 오랫동안 노래를 만들어주지 않아 원망스럽진 않았습니까?

그런 마음도 들긴 했지만 음악 작업을 중단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원망을 할 수는 없었어요. 정태춘씨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알아보자고도 했지만 열심히 알아보게 되지 않더군요.”

 

정태춘·박은옥 부부

 

-남편으로서 정태춘은 어떠신가요?

예술가로서는 음악적인 능력 면에서나 그 안에 담긴 사상의 면에서나 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해요.”

 

-남편으로서 어떠냐고 질문했습니다.(웃음)

딸이 독립해서 둘이 살거든요. 식탁에서 둘이 밥 먹으면서 세상의 미래에 대해, 인간이라는 종이 희망이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부부는 우리밖에 없을걸요.(웃음)”

 

-(다시 정태춘씨에게) 정 선생님은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런 유별난 진지함과 고뇌를 아내에게서조차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없었다면 어쩔 뻔하셨어요?

감사합니다.(웃음)”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뭔가요?

이 사람(박은옥)<정동진/건너간다>(1998), 나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내 능력 이상으로 구현해본 앨범이라서 음악적으로 만족해요.”

 

-대중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요?

그랬죠. 그런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대중적인 가수가 아니었어요. 대중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건 행운이었고 고마운 일이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죠. 운동을 하면서도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한 곡도 만들지 않았죠. 대중 앞에서 부르는 노래만 만들었죠.”

 

-정태춘·박은옥의 팬들은 대개 <, 대한민국>(1996)이나 그 이전의 서정적인 노래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요즘 젊은 세대는 아예 두 분의 음악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난번 ‘<고래가 그랬어> 후원의 밤에서 그런 세대들이 선생의 노래에 감동하는 걸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번 30주년 공연을 계기로 정태춘의 복귀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도 될까요?

나는 작년에 30주년이었고 이번 공연은 원래 박은옥씨의 30주년 공연에 출연하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이젠 두 사람의 공연으로 생각하면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내가 뭔가 변화를 보이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창작 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분노나 좌절감이 아직 남은 겁니까?

이젠 괜찮아요. 시간이 지난 것도 있지만 나를 좀더 객관화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역사를 보면 시대의 진보성이라는 게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진보가 주류 사회로 체제내화하면서 그보다 급진적인 것들은 철 지난 이야기들’, ‘불편한 존재들로 폐기되는 거잖아요. 그런 처지를 당하는 사람은 한때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듯이.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세대들은 인생에서 그런 격동기를 아예 체험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가죠. 그러니 인생에서 그런 역사적 격동, 변화의 시대라는 공공적 열정의 체험을 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정은 이제 식은 건가요?

좀더 나은 세상요? 그에 관한 생각도 좀 바뀌었고지난 몇해 동안 시사 문제에 일체 관심을 끊고 세상을 타자의 눈으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관념적으로 들리겠지만 인간이라는 종, 그들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도 버리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포기할 수 없는 투쟁과 그 새로운 아이디어들있죠, 그런데.”

 

-들려주시지요.

그저, 한 이상주의자의 몽상이에요.”

 

-조금만 들려주시지요.(웃음)

기본적인 뼈대는 역시 오늘 우리가 매여 살아가는 이 자본의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겠죠. 어떻게 하면 그 체제에 불복종하고 그 체제에서 이탈해서 좀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그런 고민의 국제적인 실천과 연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당신들의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말하면서 고작 그 비상구 앞에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현재 내 모습이죠.”

 

-전혀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이 캄캄한 현실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민하는 예술가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게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예술가가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게 더 많이 아쉽습니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 꾸며집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저희가 받은 박수와 환대는 정말 과분했어요. 많은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을 골랐고요, 거기에 우리 두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보탰어요. 그 노래들 사이사이에 내 시와 사진들을 넣어 지난 5년여 동안의 내 시선의 일부를 보여드리려 합니다.” / 김규항 문화평론가 한겨레 09.10.23

 

 

"시대가 내 음악 바꿨지만...그저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데뷔 40주년 맞은 '음유시인'

'시인의 마을' 등 서정적 가수서

사회현실 리얼하게 고발하기 위해

전교조 지지 등 노래 운동가 변신

'가요 사전심의제' 폐지도 이끌어

대중음악, 거대 산업주의가 지배

'시대와 안 맞는다' 생각에 무대 떠나

음악인생 40년 천천히 돌아보며

이제 '시장 밖 예술' 이야기할 것

 

그냥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대중가수 정태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음유시인, 사회 변화를 갈망한 이상주의자,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함께한 시대의 메신저, 표현의 자유를 지켜낸 문화운동가 등 그는 한 세대를 풍미한 인기 가수이자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단순히 가수라고 지칭하기에는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들의 울림이 너무나 묵직하다. 하지만 최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정태춘·박은옥 40주년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만난 정태춘은 노래로 많은 이야기와 행동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저 노래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외부의 과분한 평가라는 겸손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 1978년 서정성 짙은 자작곡 시인의 마을로 데뷔했다. 이후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등 시적이며 목가적인 히트곡을 내놓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87년 서울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 이한열 열사 사건을 보면서 분노했다. 이후 음유시인은 거리의 시인이자 투사가 됐다. 전교조·전노협 등을 지지하는 공연을 펼치는 등 사회운동 현장에 참여하는 노래 운동가로 변신했다.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음반 사전심의 철폐다. 정태춘의 7집 앨범 , 대한민국(1990)’은 사전심의에 공식 저항한 최초의 음반이다. 이후 1992년 두 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결국 1996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이후에도 경기도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장 이전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고향 주민들과 함께 대추리 평화예술운동을 진행하는 등 행동하는 예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처음에는 우수에 젖은 노래를 했지만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사람으로서 각성하려면 현장을 봐야 하고, 거침없이 쓸 수 있어야 하고, 겁먹고 쭈뼛쭈뼛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정태춘은 지금 생각해보면 저항가수나 혹은 어떤 가수가 되겠다는 계획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그냥 솔직하게 나오는 분노를 담아낸,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의 앨범이었다고 말했다.

 

부인이자 음악 동지인 박은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분노와 불평이 지금의 나를 만든 동력이 됐다고 말한 기사를 봤다정태춘씨도 분노와 불평을 계기로 뭔가를 바꿔 나가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태춘은 앨범 , 대한민국은 독선적이고 거칠고 조절되지 않은 감정을 담아 지금 내가 들어도 불편하다면서도 그 당시에 저항적인 노래와 운동 진영의 노래가 많이 나왔지만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더 리얼하게 우리의 현실을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저항하던 음유시인은 어느 순간 대중의 곁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 시장에서 상품성이 없는 존재가 됐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시장에서 가장 대중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서 이윤을 내지도 못하는 존재가 됐다는 회의감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정태춘 200210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이후 사실상 작품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10년 후인 2012년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박은옥을 위한 앨범이었다. 정태춘은 작품과 방송활동을 모두 접고 생계를 위한 초청공연 정도만 응했다붓글·사진·가죽공예 등 음악이 아닌 다른 활동으로 지난 시간을 채웠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음악활동을 접은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세계화와 산업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낙관론에만 빠졌고 기대했던 노무현 정부도 사회 내부의 차별이나 갈등·야만성을 해결하지 못했다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세계화가 절대적인 가치로 사회를 지배하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산업을 위해 (사람이나 자원을) 재배치하고 동원하고 통제를 하는 상황이 됐다그런 변화와 야만성·비윤리성에 동의할 수도, 그것을 따라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고 설명했다. “대중음악가라면 대중의 생각·기호·취향을 따라가야 하지만 되레 내 생각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이 오랜 시간 팬들과 거리를 뒀는데도 대중과 문화예술계는 정태춘·박은옥을 잊지 않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2009년 데뷔 30주년 프로젝트에 이어 올해도 데뷔 40주년 프로젝트를 꾸렸다. 영화·문학·미술 등의 분야에서 144명이 모여 유례없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특정 아티스트를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집중조명하고 분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정태춘은 재미있게 놀아보자, 내가 가진 것이 뭔가 있다면 다 가져가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학술로든 전시로든 앨범으로든 콘서트로든 다 꺼내서 다 보여주고, 평가받고, 정리하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남들에게 좋게 평가받고 나를 자랑하고 전시하려는 마음을 놓을 만큼의 나이가 됐어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노래가 이런 것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싶고 젊은 작품자들에게 작게나마 영감 같은 것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할 것도 없고 너무 과하지 않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변의 관심이 과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천천히 1년을 가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40주년 프로젝트에는 콘서트는 물론 기념 앨범, 전시, 학술, 트리뷰트 프로그램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다. 40주년 기념 앨범에는 20년 전에 만들었다가 발표하지 않은 외연도에서와 올해 1월 가족을 위해 만든 연남, 봄날등 신곡 2곡이 들어간다. 앨범 테마는 노인의 목소리로 젊은 시절의 노래를로 가수인 딸 정새난슬과 함께 부르는 곡들도 수록됐다.

 

정태춘 박은옥 /사진 제공=정태춘 박은옥 40프로젝트 사업단

 

정태춘에게 지난 40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인지 묻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특별히 기억날 만한 것, 소회 같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최근 KBS ‘불후의 명곡녹화장에서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외국에 온 것 같다고 대답했다가수생활을 접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후배들이 내 노래를 부르는데 제3자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태춘에게 2019년의 대중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내가 잘 모른다고 운을 떼면서도 지금의 대중문화는 문화라기보다 산업이라고 꼬집었다. 엔터테인먼트만 남고 아트는 없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아트란 작가정신이나 작품자의 창작 의지가 담겨 작가들의 개별적인 미의식을 담아내는 것이라며 지금은 거대한 엔터테언먼트의 파도에 휘말려서인지 이런 작가 의식을 가진 아티스트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직접 사회운동을 실천한 만큼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정치는 예술가들의 사변(다양한 생각들을)을 풀어낼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시인이 정치가가 되면 예술적인 영감이나 그것을 말로 풀어내는 사변이 사라진다오직 정치는 힘의 싸움,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는 정치인이 되지 못하고 정치인이 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정태춘은 앞으로 별다른 목표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태춘은 이제 네 번째 깃발을 준비 중이다. 그는 첫 번째 깃발이 전교조 합법화 싸움, 둘째가 검열(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 셋째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이었다면 네 번째 깃발은 시장 밖 예술’”이라며 이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하지 않고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문화, 시장 밖 예술을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19.3.15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시가 되다

시인의 마을’ ‘촛불로 떠오른

탁월한 싱어송라이터 정태춘

음악·삶의 동반자 박은옥

소외되고 짓눌린 약자들 위로

거리 민중 위해 목청 높이고

검열로 억압하던 정부에 맞서

음반 사전심의 철폐 이끌어내

 

1993년 한국방송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서 노래하고 있는 정태춘·박은옥 부부. 김승근 사진가 제공

 

이달 초 나오는 시 전문 계간지 <시작> 봄호에서 문학평론가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시스템과 불화하고 저항하는 주체로서 음악만큼이나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두 거장의 예술적 자취를 분석한다. 1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스타 가수이지만 주류 음악계에서 늘 비껴나 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노래 속에 거리의 삶을 끌어들였다.” 정태춘은 1978년 데뷔작 <시인의 마을>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연예인의 길을 가는 대신 자신만의 포크로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나가며 그로 인해 공허한 사랑 노래로 인식되던 대중문화는 삶의 노래로 지평을 넓혀나갔고, 얇고 얕은 감성으로 치부되었던 대중문화는 사회, 정치적 성찰의 심도를 갖기 시작하였다.”

 

지난 1월 말 발족된 정태춘·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면면만 보더라도 정태춘이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의 넓이와 깊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이은 명필름 대표가 공동 추진위원장을 맡았고, 방송인 김제동, 사진작가 김홍희, 영화배우 명계남·문성근, 영화감독 임순례·정지영, 소설가 박민규, 화가 박불똥·임옥상·홍성담, 연출가 유수훈, 판화작가 이철수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추진위원 144명의 명단에는 1970년대 이후 문화판의 변화를 주도해온 이름들이 망라되어 있다.

 

문화예술계 인사 144명 모여

데뷔 40돌 기념사업 추진위 발족

문학·예술성 빼어난 노래 재조명

시집 발간·순회 공연·헌정 전시 예정

 

정태춘 팬들 위해 기념 앨범 제작

요즘은 붓글로 내 안의 얘기 전달

올 한해는 소통하며 놀아볼 생각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시인의 마을)

 

어쩌면 정태춘은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삭막한 공간 중 하나일 군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써내려갈 수 있었을 테다.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정태춘은 음대 입시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간 군대에서 첫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 노래들로 발표한 앨범이 <시인의 마을>(1978)이다.

 

데뷔작에서 시인의 마을’, ‘촛불등이 히트하면서 그는 대번에 주목받았다. ‘쎄시봉으로 상징되는 포크 문화의 향취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 그의 노래는 서양 노래 번안곡과 차별화된 한국적 정서와 노랫말을 품고 있었다. 1979<문화방송>(MBC) 신인가수상과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 상까지 받으면서 인기가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명랑운동회>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 먹고 해야 하는 연예인의 활동에 적응하지 못했다.

 

1집의 성공 이후 그는 보다 깊은 음악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2(1980)에선 불교의 정서를 녹여냈고, 3(1982)에선 국악의 요소를 접목했다. 대중성보다 자신만의 독창성과 예술성에 몰두한 결과물은 흥행 실패로 귀결됐고, 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음악과 삶의 평생 동반자 박은옥과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박은옥은 부산에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다. 서울로 올라와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중 음반사에서 정태춘을 처음 만났다. 박은옥은 정태춘의 곡을 받아 1978년 데뷔 앨범 <회상>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 둘은 1980년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낳아 기르던 시기에 닥친 궁핍은 고통스러웠다. 이때 또다른 음반사가 손을 내밀었다. 4년 전속 계약에 800만원이라는, 다소 굴욕적인 조건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음반이 4<떠나가는 배>(1984). 이때부터 둘은 정태춘·박은옥부부 이름으로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4집에 이어 5<북한강에서>(1985)까지 잇따라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부부는 힘겨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거 거리 집회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는 정태춘.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상업적 성공에 취할 법도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거리의 민중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태춘은 청계피복노조 지지 공연에 참여한 이후로 거리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전교조, 전노협 등을 지지하며 노래했고, 새로 발표하는 음악에도 사회적 목소리를 녹여냈다. 대표적인 노래가 8(1993) 타이틀곡 ‘92년 장마, 종로에서.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시선은 억압받는 자, 짓눌린 자,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자, 약자, 빈곤한 자, 소외된 자, 노동자에 있다. 두 사람은 한평생 이들을 감싸 안고 지키기 위해 목청 높여 노래했고 외쳤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특히 자신의 고향인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 싸움에 온몸을 던졌다.

 

20063월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 농성을 벌이다 전경에 강제 연행되고 있는 정태춘. 노순택 사진가 제공

 

정태춘의 싸움 중 단연 두드러진 성취는 음반 사전심의를 철폐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부 산하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으면 음반을 발매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가사가 난도질 당하기 일쑤였다. 정태춘은 자신의 일곱번째 앨범 <, 대한민국>(1990)을 심의를 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제작해 내놓았다. 사전심의에 공식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음반이었다. 정부와 검찰에 의해 고발·기소 당하자 그는 위헌법률심판제청으로 맞섰다. 결국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이는 문화예술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은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나의 시를

써야겠다

나의 바다는

저물면서도 빛나지 않는다

(<노독일처> ‘황지우처럼)

 

음악인으로, 사회운동가로 치열하게 살아온 정태춘은 밥 딜런에 비견되는 노랫말에서 볼 수 있듯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2004<노독일처>라는 시집을 발표했고, 올해 두번째 시집도 낼 예정이다. 최근 들어 상대적으로 덜 관심 받았던 그의 문학적 성취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새로운 창작 활동으로 붓글을 쓰고 있는 정태춘.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시작> 봄호는 정태춘의 문학적 측면을 특집으로 다룬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기고를 통해 나로서는 정태춘이 직접 노랫말을 쓰고 곡을 입혀온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이고, 그 점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시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고 밝혔다. 최재봉 <한겨레> 문학 담당 기자는 정태춘의 노래가 초기의 토속적 낭만주의에서 중기의 치열한 현실 비판을 거쳐 관조와 심화 쪽으로 변화를 보였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가사의 시적 특성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고 썼다. 박은정 천년의시작 편집장은 정태춘의 노래는 많이 알려졌어도 가사에 담긴 문학적 성취는 덜 주목 받았기 때문에 이를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와 함께 4월 초 과거 시집 <노독일처>를 복간하고 신작 시집 <슬픈 런치>와 가사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도 발간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40돌 기념사업이 예정돼 있다. 정태춘·박은옥은 4~11월 제주, 서울, 부산 등 전국 15개 도시를 도는 순회공연 날자, 오리배를 펼친다. 40돌 기념 앨범 <사람들 2019>도 발표한다. 한국대중음악학회와 한국음악산업학회가 관련 연구와 포럼을 진행하고, 미술가들의 헌정 전시 다시, 건너간다411~29일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린다. 여기엔 요즘 정태춘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붓글작품들도 전시된다. 한때 사진과 가죽공예에 몰두했던 정태춘은 요즘 붓글씨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정태춘이 광고를 두고 과장, 거짓말, 사기라고 비판한 붓글 작품.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정태춘은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음악을 다시 시작한 건 아니고, 팬들을 위한 마음을 담아 예전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신곡 두 곡을 더한 소박한 기념 앨범이다. 정식 앨범을 낼 계획은 여전히 없다. 대신 요즘은 붓글로 내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동안 조용히 지냈는데, 올 한해는 여러분들과 소통하며 재밌게 놀아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한겨레 19.3.4



 

슬픈 런치

 

잭 스테이크, 5

올림픽 공원 쪽 창가에서

빠알간 야채 수프를 홀짝이고 있었다

 

빗물이 주르르 주르르 흘러내리는

잘 닦여진 유리창 너머로

일기는

촉촉한 오후 안개비 모오드

 

멀리

공원 반대편 끝자락 쯤의 잘 자란 포플러나무들이

늪 뚝방 둔덕으로 커텐처럼 줄지어 서 있고

그 너머

세상에 대해선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안개비와

푸른 나무들 커텐 너머

그저 희뿌열 뿐,

 

거기가 바로

나의 환상이 머무는 곳

때론 가슴 뛰거나

눈물 나게 할 것 같은

자본주의 세상

저 너머

 

호주산 소고기 등심 안심 번갈아 썰어 입에 집어넣고

틀니로 우그작 우그작 씹으며

빗물 주르르

주르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망연히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그 놈의 담배

 

자넨 담배 안펴?”

, 세상 견딜만 헌 모양이지?”

아닙니다. 피웁니다

, 그럼 같이 펴어.

낫살이나 더 먹었다구 맞담배도 못하게 허면

담에 나 또 만나고나 싶겄어?”

, , 퓨우

이렇게 살다가 남들보다 쪼곰 일찍

이 세상 하직하는 겨어

억울헌가?”

뭐 언 미련 있겄어어

, ,

퓨우우 그런데

최근에 영국에서 나온 굉장한 연구 결과에 의하먼

담배로 인해서

10년 수명이 단축된대는겨어 뻑 뻑,

퓨우

퓨우

 

어여 펴어

 

, 목계 나루

바람은 날더러

무엇이 되라 하네

아무 것 될 것 없는

날더러

, 목계 장터 신작로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주홍 나비 파닥이며 휘청거리며

한여름으로 가는데

바람은 날더러

 

나룻터 꼭대깃 자리

신경림 시비가

황토 강물을 등지고 서서

눈치, 향어 뛰어오르는 것도 보지 못하고

길 건너

조선조 아무개들 공덕비만 바라보며

너희는 그래 고작 그것이 되었느냐고

시비나 걸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여기 부재로서

신경림도 이제 역사가 되었는데

 

그 옆으로

의용 소방대 콘테이너 박스를 치고 온

바람은

초로의 날더러 자꾸 너는 장차

무엇이 될라나 묻는 듯

 

옛날엔

횟집 색시집이 즐비하고요

길 가는 평당 백만 원도 넘었다지요

목계 다방 얼굴 검은 마담이

맥심 아이스 커피를 타며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곧 물을 것처럼

저 건너

솔밭에선 인근 외지 사람들 다 놀러와서

개도 잡아먹고

철 내 노랫소리

넘쳤지요, 그런데

 

신경림 선생

지금은

이철수 글씨로도

여기 동네 사람들한테 이제 새삼

말동무도 안 되는데

 

어느 모자 쓴 노인네

남방 단추 다 풀어헤치고

고물 오토바이로 쏜살같이

포장도로를 달려 지나간다

 

목계 분교

애프알피 충무공이

몇 안 되는 아이들더러

역사는 너희더러

나는 너희더러 또 무엇이 되라 하리라 하시는 중인데

장군, 외지 장군님

강이 저 아랜데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고

저기 정거장 일대 집들을 다 덥쳤겠습니까?

그걸 믿으십니까?

어쨌거나,

 

남한강 강물을 거슬러

강 뚝방을 타고 온 바람은

선대 지방 수령들 공덕비 풀숲을 잔잔히 흔들며

지나가며

날더러

무엇이 되라

 

뜨겁거나

허망하거나 그저

남은 생

아무 무엇이라도

되라

하고

 

 

깜짝 놀랜다

한동안 신문이나 방송 뉴스 다 끊었는데

그래

참 편안했는데

집 안 온도가 30도도 넘는 오늘 아침

마누라가 신문을 보며

그동안 뇌경색 같은 거 유발시키는 약들

콘택600 뭐 화콜 이런 거

정부가 이번에 한꺼번에 판매 중단 했다네요

유한양행 뭐

… … .

뭐야,

정부?!”

 

정부 라는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니

 

 

가을 비

초가을

비가

한 이틀

내리더니

 

동네

하수구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 빗물들도

얼마나

맑으던지

 

내 여생도 거기 함께

쓸려 내려갔으면

 

바삐 달아나는

저 맑은 물살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일쑤 아저씨 김 씨

 

베갯잇 바꾼다고

푸라스틱 반짓고리를 열었는데

한 구석에

김씨가 이자를 팍!!! 깎았습니다

라고 인쇄된

메모지 반 접은 것에

조그만 바늘이 하나 끼워져 있었다

 

뒷면;

100만 원=20,000X60--> 100만원=20,000X56

Tel (02)4980-XXX, 017-236-XXXX

목돈 드리고 푼돈 받는 --- 일쑤 아저씨 김씨

 

고마운 아저씨

고마운 자본주의

이렇게 겸손할 수가

 

밀 양

언제더라?

새벽 차로 여기 떨어져서

갈 데가 없어 역전 목욕탕 들어가 목욕하고

상남면 아침 들판 논길로만 헤매다

어느

술 도가 주인을 만나고, 그 동생 집

예림리 동네 목욕탕에 기식하며

새벽마다 방카씨유 보일라 불을 때던

그 밀양

 

강엔 웬 모래가 그리 많던지

 

언제나 이 작은 역을 지나면서

역사 건너편, 하행선으로 좌측을 보면

철로 가까이 검은 바위

작은 단애가 있지

오늘은

그 단애를 뒤로 하고

열차 승강장에 시골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앉아

이 무궁화호가 아닌

다른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나는 나이 들어

여기를 또 지나는구나

 

그 옛날 내 품 속의 사진첩을 꺼내어

이 풍경과 비교하고는

그 사진첩에 오늘 여기를 담지 않고

닫아버린다. 바위나 한 번 더 보고

그 바위에 눈 인사나 하고 떠나는

구마선 완행열차

 

작은 들판 건너 어느 초록의 큰 산

그 놈 중턱에 다짜고짜 허어연 터널을 뚫고

그 터널 입구를 향해 거대한 세멘트 기둥들을 세워 나가는

이 나라 국토의 대 역사를 구경하며 지나가는

무궁화호 완행 열차

 

이제

국토 외진 곳으로만 달리는 누추한 교통수단

단지 이 노회한 열차 안 만이 내 나라 풍경 같은데

언제였더라?

 

아침 나절 밀양 읍내

대가집 같은 술 도가

술 익는 냄새 황홀하던

김 오르는 항아리들

부산한 일꾼들

아야, 니는 내하고 가자.

니 이름이 머꼬?”

 

그 때,

철없던 먼 세기의 그 때

생전 처음 충청 이남

먼 나라

밀양

 

한수라고 불리던

풋 사내의

객지

 

정태춘 시집 <슬픈 런치> 2004/ 미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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