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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이오덕

by 이성근 2020. 3. 11.

글쓰기만큼 좋은 인간 교육은 없어아이의 눈망울 가졌던 교육자

이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아이의 글은 어른을 감동시키고, 아이의 삶은 곧 시가 된다. 이오덕은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 교육에 생애를 바쳤다. 위부터 198411월 경북 성주군 대천동 아이들과 함께 미소를 짓고 있는 이오덕, 아동문학가 권정생과 함께한 청년시절의 이오덕(왼쪽), 1988년 제3회 단재상 수상식에 문익환 목사와 함께 참석한 이오덕(오른쪽). 경향신문 자료사진·양철북 제공


좋은 인간 교육은 글을 쓰게 하는 것

생애에 걸쳐 삶의 교육을 실천한 이오덕(李五德, 1925~2003) 선생은 아이들 글과 글쓰기 교육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선생이 1977년 엮어낸 <일하는 아이들>에 수록된 아이들 글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아이들의 삶이 시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린이의 말과 행동, 느낌과 생각은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린이는 시인임을 나는 믿는다. 글을 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인간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봄이었다. 선생의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읽었다. 어린이교육과 어린이문학의 신세계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1979년에 나는 <삶과 믿음의 교실: 이오덕 교육 수상집>을 펴냈다. ‘오늘의 사상신서7권으로 기획했다. 선생이 삶의 교육현장에서 써낸 글은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사상이었다.

 

교육이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사랑 없이 생명을 피어나게 할 수 없는 것은 태양 없이 풀싹을 돋아나게 할 수 없는 이치다. 물질만을 추구하기에 미쳐 있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근원적인 문제다.”

 

일선 교육자들의 편지 모음인 <우리 언제쯤 참선생 노릇 한번 해볼까>(1988)<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기는 교실>(1989)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참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교육자들의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편지들은 아이들의 눈망울처럼 맑다.

 

학교란 지식만 가르치는 곳일까요. 담을 쌓고, 집을 짓고, 채소를 가꾸고,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작업하면서 정도 들고 인격도 쌓아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유욕과 생명 경시로 치닫고 있는 문명 속에서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먼저 참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먼저 내가 소유욕을 버리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찌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하는 아이들수록된 아이들 글

어린이 삶이 시가 된다 일깨워

이오덕 참모습 보여준 교육일기

자연과 함께 살아 숨쉬는 교육

아이들과 뛰노는 모습 담아내 

 

권정생 선생과 주고받은 우정의 편지

이오덕 선생은 우리 아동문학사의 한 봉우리를 이루는 권정생 선생(1937~2007)과 젊은 시절 주고받은 편지를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 편지들이 너무 아름다워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2003)가 그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빛나는 우정의 편지가 또 어디에 있을까.

 

이오덕: 어느 골짜기 양지바른 산허리에,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권정생: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살아도,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나는 선생과 만나면서 우리 삶에서 편지와 일기의 중요성을 토론했다. 편지와 일기로 구성되는 잡지 같은 것을 구상해 보기도 했다. 1989년 출간된 <이오덕 교육일기>(2)는 교육자 이오덕, 어린이문학가 이오덕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19629월부터 19727월까지의 교사일기장을 정리한 것인데,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삶의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의 정신, 자연 속에서 노래하면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와하! 하고 아이들은 산으로 달려간다. 아이들도 즐겁고 나도 즐겁다. 숲이 꽉 우거져 있는 산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나는 턱도 없이 좋아서 노래부르고 지껄여댔다.”

 

가난한 시절의 저 산골학교, 교사 이오덕은 아이들과 함께 교정에 심은 나무의 둘레를 줄자로 재고 있었다.

 

내년에도 재보고, 내후년에도 재보자. 10년 후에 와서도 재보면 좋겠다.”

 

한길사는 1987<현복이의 일기>를 펴낸다. 서울 변두리 개화초등학교 5학년 신현복군이 1985년과 6학년인 1986년에 쓴 103일 동안의 일기인데, 책은 나오자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복이의 일기를 발견한 이오덕 선생은 책 머리말에서 썼다.

 

나는 현복이한테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현복이는 내가 읽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책, 내가 읽기를 바랐던 책들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이 아이가 일기에 적어 놓은 이 착한 마음,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태도, 소박하면서도 비뚤어지지 않은 생각, 풍부한 감정과 섬세한 느낌을 적은 말들, 이런 것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현복이 같은 아이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 같기도 하다.”

 

선생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생애의 일이었다. 자연과 함께 살아 숨쉬는 교육, 살아 숨쉬는 삶의 글쓰기로 실천하려 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닭장에 갇혀 있는 동물의 신세가 되어 병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아이들과 우리 겨레를 살리는 길은,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 되는 삶을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1989우리글 바로쓰기출간

우리말 왜곡하는 현실 고쳐나가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글은 우리말로 쓴 정직한 글이다

1980년대 선생은 안암동 우리 출판사를 자주 방문했다. 나는 선생과 우리말, 우리글을 이야기했다. 선생은 우리말, 우리글을 잘 구사하는 분이 함석헌 선생이라고 했다. 함 선생의 글과 말에 대해 책으로 쓰겠다고도 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연구하고 쓰는 일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큰일이라고 했다. 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하찮게 여기고, 조국이 가르쳐준 말을 왜곡하는 현실을 고쳐나가고 바로 쓰게 하는 운동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1989<우리글 바로 쓰기> 1권이 간행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한번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으로도 할 수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1992년에 <우리말 바로 쓰기> 2권을, 1995년에 제3권을 펴냈다.

 

나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모든 실상과 거기 얽힌 문제를 푸는 열쇠를 에서 찾아내었다. 위대한 우리 조국의 말, 배달말은 위대한 글자 한글을 낳았고, 이 말과 글은 내게 모든 것을 환히 비춰 보여주는 햇빛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조용환 변호사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바 있다. “우리에게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해방전후사의 인식> 못지않게 중요한 책이라고. <우리말 바로 쓰기> 4·5권은 선생이 서거한 이후 출간되었다.

 

나는 <우리말 바로 쓰기>와 나란히 <우리 문장 쓰기>(1992)를 기획했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결로 이어 놓은 뜻은 우리말로 쓰는 정직한 글,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쓴 글이 가장 귀한 글이고 가치가 있는 글이란 믿음이다.”

 

선생은 우리 문학은 겨레의 삶과 말에서 멀리 떠나 있다고 했다. “방 안에 앉아 글을 쓰는 데서 오는 필연의 결과다.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삶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쓰기가 특수한 사람만이 즐기는 기술이 되어서는 안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씌어진 글이 문학이 아닌 삶의 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03년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 고든박골 앞에 선 이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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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단재상 수상연설서

자신의 글쓰기 정신·방법 천명

아이들 정직하게 쓰며 깊이 생각

이것이 곧 삶을 가꾸는 교육

 

글쓰기가 아이를 참된 인간으로 키운다

1988년 제3회 단재상이 이오덕 선생에게 주어졌다. 선생은 자신의 교육철학과 문학사상, 글쓰기의 정신과 방법을 천명하는 수상연설을 했다. 문익환 목사 등 하객 200여명은 선생의 신념에 찬 연설을 숙연하게 경청했다. 선생의 단재상 수상연설은 녹음되어 전국의 참교육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글쓰기 교육은, 아이들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고 정직하게 쓰는 가운데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는 데에 글쓰기가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된다고 믿습니다.”

 

선생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는 듯할 때 선생은 여러 구상을 말씀하기도 했다. 나는 선생에게 회고록 집필을 권유했다. ‘삶의 문학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했다.

 

선생은 2001<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권태응 동요 이야기>를 펴냈다. 1918년 충주에서 태어나 195133세로 요절한 권태응.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여섯 해 동안,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병마와 싸우면서, 동요만을 써낸 권태응의 문학세계를 432쪽이나 되는 큰 책으로 지었다.

 

반세기 전 이 땅에 한 시인이 있어 겨우 6년 동안 병상에서 동요를 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권태응입니다. 동요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요, 아이들이 읽는 시이지요. 그런 글을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마치 자기가 동요를 쓰기 위해 세상에 잠깐 왔다는 듯이, 밤중에도 쓰고 새벽에도 썼습니다.”

 

20027월 선생의 <문학의 길 교육의 길><어린이 책 이야기>를 동시에 펴냈다. 정신력으로 써낸 선생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경북 청송에서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난 이오덕 선생은 2003825일 새벽, 향년 78세로 충주시 신내면 무너미 마을 고든박골에서 돌아가셨다. 선생은 풀··나무··바람,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했다.

 

2005년 선생의 서거 2주기를 맞아 나는 선생의 시집 <무너미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를 펴냈다.

 

나는 올해가 일흔이 꽉 찬 나이인데도 아직도 어린애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산속에 가서 한 포기 풀같이 살아가는 꿈, 산속에 가서 한 마리 새같이 살아가는 꿈. 간밤에도 자리에 누워 가슴 두근거리며 잠을 못 잤다. 아침 햇빛을 받아 온몸을 떠는 풀이 되어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나뭇가지에 눈 감고 앉아 있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돌이켜보면 한 출판인으로서 나는 이오덕 선생과 25년을 만났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 교육을 이야기했다. 수많은 책을 기획했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세상에 존재시키는 일이란 아름답고 존엄하다는 체험을 늘 하게 되지만, 선생과 더불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날은 늘 밤이 깊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처음이에요 이렇게 좋은 건 - 란(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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