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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빌리 홀리데이

by 이성근 2019. 2. 10.

빌리 홀리데이 :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 도널드 클라크 (한종현 역, 을유문화사 2007)

 

도널드 클라크는 1940년 위스컨신 주 케노샤에서 태어났다. 10년간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 뒤 위스컨신 대학에 진학했고 1973년 초등학교 임시 교사 자리를 얻어 영국으로 건너갔다. 당초 10주로 예정되었던 체재 기간은 25년으로 늘어났고 그동안 클라크는 존경받는 음악 저술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확립했다. 언론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이 책 빌리 홀리데이역시 그간의 산물이다. 1998년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이 책의 신판 머리말에 언급된 주소지인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살았다. 2003년부터 그는 아내와 함께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살고 있다. 그의 아내 에니아 클라크는 정원과 조경 분야에서 이름난 저술가이다. 도널드 클라크의 다른 책으로는 펭귄 대중 음악 백과사전The Penguin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1989, 1998 2), 대중 음악 흥망사The Rise And Fall of Popular Music(1995), 전부 아니면 무(): 프랭크 시내트라의 삶All Or Nothing At All: A Life of Frank Sinatra(1997)가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한국어판 머리말

초판 머리말

신판 머리말

 

1. 아프리칸-아메리칸 민족

2. 볼티모어

3. 포인트

4. 할렘

5. 레코드 데뷔와 아폴로 극장의 대성공

6. 테디 윌슨 시대

7. 잠들지 않는 거리

8. 빅 밴드와의 동행

9. 1937~1939: 이상한 열매

10. 전시(戰時)

11. 영욕의 시간

12. 전과자

13. 깡패와 베이시스트

14. 마지막 10년의 시작

15. 좌충우돌: 해프닝과 에피소드

16. 운명의 전조(前兆)

17. 레이디 데이의 장대한 몰락

18.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여인

19. 코다: 시대의 우상 빌리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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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매우 어둡다. 이미 생전에도 그녀는 마약 중독으로 유명하였고, 선정적인 언론들은 그녀를 음악가라기보다는 흥미로운 기사거리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삶을 편견 없이 재구성하겠다는 지은이 도널드 클라크가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우상에 흠집을 내는 짓을 애써 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734페이지)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라는 울타리를 넘어 20세기 최고의 여가수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재즈와 대중 음악 전반에 걸쳐 그녀의 목소리는 측량하기 어려운 크기의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신화화된 빌리 홀리데이의 이미지이며, 그녀의 삶의 색깔이 어두웠던 것 못지않게 그녀 삶의 많은 부분이 어둠 속에 묻혀 있기도 하다.

 

헤로인 중독자로서 빌리 홀리데이는 죽을 때까지 반평생을 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그처럼 마약에 매달린 것에는 그녀가 근본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한 타입이었다는 것과, 어린 시절 당한 폭행으로 자기 존중감을 가질 수 없었고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는 이유가 제시된다. 그녀가 인간 대신 의지하기로 했던 대상이 바로 마약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빌리 홀리데이라는 구체적 인물의 진실이라기보다는 편리한 설명에 불과할 것이며, 지은이가 성실하게 수록하고 있는 관련 인물들의 엇갈린 증언들은 알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그녀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복잡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누가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할까?’ 주저하는 것처럼 청중에 대한 소심한 태도 같은 것입니다. …… 빌리는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분명히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청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고, 친구를 잘못 사귄 점도 있겠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그녀가 그릇된 용기를 주는 마약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공격적으로 노래하고 청중 앞에서 위세 당당한 레나 혼 같지 않았습니다. 엘라도 소심했지만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확신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디 데이는 자신이 보여 줘야 하는 것에서도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51페이지. 빌리 홀리데이의 이러한 수줍음과 자신감 상실은 여러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서 그녀의 인생을 해명하는 중요한 열쇠의 하나이다.)

 

확실히 빌리는 거장이다. 그녀 때문에 미국 대중음악에서 보컬 음악의 질이 향상되었다. (174페이지)

 

아주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국의 중요한 팝 가수들은 모두 어떻게든 그녀의 천재성에 영향을 받았다. 나에게 단 하나, 지대한 음악적 영향을 주었고 여전히 그러한 사람이 바로 빌리 홀리데이이다. 레이디 데이는 분명히 지난 20년간 미국 팝 보컬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1958년에 한 말. 176페이지)

 

무명의 실력파 가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라 본, 디나 워싱턴, 페기 리, 딕 헤임스, 페리 코모 등이 모두 빌리의 영향을 받았다. 시내트라가 세계 최고의 살롱 가수라고 평가한 실비아 심스는 빌리를 우상으로 숭배했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독특하고 색다른 재능의 소유자인 대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틀림없이 빌리의 노래는 열심히 들었을 것이다. (177페이지)

 

그녀는 곡을 신청해도 내키지 않는 곡이면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그녀 방식이었죠. (비어 콜트의 증언. 191페이지)

 

빌리는 섹스를 통해서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녀에게 흔히 말하는 콤플렉스는 없었지만, 유년 시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지만 받지는 못했다. 그녀의 취약점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속내를 드러내는 걸 겁냈기 때문에 그 깊은 상처를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해가 갈수록 그녀는 파행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207페이지)

 

빌리는 초창기에 할렘에서 일할 때부터 종종 레이디로 불리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팁을 줍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216페이지)

 

온 세계 최고로 진귀한 상품들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체험으로 터득한 두 개의 단어가 있답니다. 밥과 사랑이죠. 인생을 놓고 수백만 마디의 설교보다 더 필요한 것은 밥과 사랑이랍니다.” 빌리 할리데이 (Billie Holiday 1915. 4. 7 ~ 1959. 7. 17)

 

삶이 만들어 낸 비극적 목소리

임권택 감독의 1993년에 만든 영화 <서편제>에는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창을 할 때 기교를 넘어선 ()’의 정서를 얻기 위해 잘 보이는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예술의 완성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눈이 먼 여주인공 송화의 가슴 속 한()이 깊어져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릴수록 그녀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는 내용은 예술과 삶이 같이 갈 수 없음-같이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는 여자는 목소리가 고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목소리가 굵고 탁하면 박복하고 고된 삶을 살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할머니는술집 여자처럼이란 말로 마무리하시곤 했다. 할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할머니 세대의 술집 여성들이 제대로이건 흉내이건 간에 판소리 창법으로 노래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들은 술집에서 일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고된 삶을 산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하나의 개성이자 매력이 되었다. 특히 재즈에서 많은 보컬들은 허스키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모키한 목소리를 갖고 싶어한다. 또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한다고 해서 힘든 삶을 살지도 않는다.

 

하지만 빌리 할리데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음악은 삶을 희생한 끝에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같은 시간을 살아간 많은 흑인 재즈인들이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녀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그리고 비참해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갈라졌고 노래는 슬퍼졌다. 또한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에 감동했다. 이 무슨 새디즘적인 취향이던가?

 

정말 그녀의 삶은 <서편제>의 여주인공 송화만큼이나 불행했다. 19154710대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10살의 나이에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인종차별로 인해 오히려 감화원에 수감되어야 했으며 2년의 수감 생활 끝에 출소한 후 다시 성폭행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가난한 삶에 이끌려 14세의 어린 나이에 뉴욕 할렘의 거리에서 몸을 팔아야 했다. 또 이로 인해 다시 한번 감옥에 가야 했다. 운 좋게 가수가 되면서 거리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지만 평생 인종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그 차별은 이런 것이었다. 그녀는 백인 밴드와 공연을 해야 할 때는 흑인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분홍색 물감을 칠해야 했으며 흑인 밴드와 공연을 할 때는 흑인에 비해 피부가 희다는 이유로 검은 물감을 칠해야 했다. 또한 환호성 속에 무대에서 내려오면 백인 밴드 멤버들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으며 혼자서 흑인을 받아주는 호텔을 찾아 밤거리를 누벼야 했다. 심지어 무대에 오를 때조차도 클럽의 뒷문을 이용해야 했다. 사랑? 그 또한 비극적이었다. 그녀의 첫 남편 제임스 먼로는 바람둥이에 아편중독자였으며 두 번째 남편 존 레비는 그녀의 모든 수입을 갈취했다. 세 번째 남편 루이스 맥케이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불행한 삶을 잊기 위해 그녀는 마약을 복용했다. 이로 인해 다시 그녀는 감옥에 가야 했으며 이후 마약 복용자란 이유로 뉴욕의 클럽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삶이 힘들어질수록 마약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고 그 결과 195971744세의 이른 나이에 인종차별로 인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했다.

 

살펴본 대로 그녀는 성숙이 아니라 파멸을 향해가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노래는 더욱 깊은 맛을 냈다. 특히 짙은 허스키 목소리가 그랬다. 빌리 할리데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무분별한 마약 복용, 음주로 인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그녀의 비극적 삶이 만들어낸 목소리라 하겠다. 실제 초기 그녀의 목소리는 후기처럼 거칠거나 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말년의 어두움과는 다른 밝음이 있었다. 비극적인 자신의 현실을 감추려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종의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이리 힘들게 살지만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라는 희망. 그 희망만큼 인종차별의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자존감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녀의 별명숙녀 Lady Day’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자존을 지키는 행위였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검둥이취급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백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에 감동했다. 그러므로 비극적인 삶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행복은 노래하는 것이었다.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보다는 느리고 슬픈 발라드로 감상자를 사로잡았다. 그 가운데 ‘Strange Fruits’는 그녀를 대표하는 노래로 꼽힌다. 탈출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후 나무에 매달려 이상한 과일처럼 흔들리는 흑인 노예의 시체를 이야기하는 이 노래를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듯 눈물을 흘려가며 불렀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 곡을 노래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경청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며 불평하곤 했다.

 

그녀의 노래는 ‘Lover Man’을 거쳐 ‘I’m A Fool To Want You’에 이르는 동안 갈수록 어둡고 우울해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노래에는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 대신 삶에 대한 체념의 정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 그냥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느낌. 특히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녹음된 앨범<Lady In Satin>은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그녀의 한()을 다양한 실연의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사실 빌리 할리데이가 엘라 핏제랄드, 사라 본과 함께 재즈사를 빛낸 3대 디바로 추앙 받는 것은 삶을 그대로 노래에 투영한 듯한 깊은 정서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보컬들처럼 그녀 또한 기교적인 측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녀의 삶과 슬픈 노래들은 그러한 음악적인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분위기로 감상자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우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빌리 할리데이의 노래를 즐겨 듣지 않는다. 들을 때마다 감동하게 되지만 그만큼 우울에 빠지는 것이 싫다. 그리고 비록 그녀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체념 가득한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슬픔을 공감하고 도와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렇기에 그녀의 노래를 낭만적인 배경음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다. 하긴 그녀의 시대에도‘Strange Fruits’을 그저 분위기 좋은 발라드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뭐라고 할 일만은 아니다. 반면 우울할 때 그녀의 노래는 상처받은 마음의 틈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와 좋은 위안을 준다.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힘을 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우리의 모든 슬픔을 짊어졌던 순교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노래가 사랑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출처: http://www.jazzspace.net

 

단언컨대 가장 처절한 삶을 살았던 여가수 - 빌리 홀리데이 (1)

 

<한겨레> 자료 사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아주 좋은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은 <그린북>.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 내에서 아직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명망 있는 흑인 피아니스트가 용기를 내어 남부 지역을 돌며 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알다시피 미국 내에서도 남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인종차별이 훨씬 더 심했기에 당연히 위험한 여정이 될 터. 그래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술집 기도 출신의 백인을 고용해 순회공연을 떠난다. 성공한 흑인과 가난하고 못 배운 백인. 두 남자가 묘한 갈등들을 극복하며 우정을 쌓아나가는 이야기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의 삶을 극화한 영화인데, 그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면서 유족들이 반발하는 논란도 있었다. 그 문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이 영화를 보면 아무리 성공한 흑인이라 할지라도 겨우 피부색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수모를 당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백악관에 여러 번 초청될 정도로 저명한 인물인데도 동네 술집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거나, 호텔에 숙박 거부를 당하거나, 식당에서 출입 금지를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영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흑인 여행자들이 거부당하지 않고 먹고 잘 수 있는 숙소와 식당들을 안내해준 당시의 실제 책자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배우들이 연기한 실제 인물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자꾸 떠올랐다. 그 역시 흑인이다. 재즈의 여왕으로 추앙받지만 실제 삶은 비참하지 그지없었던 빌리 홀리데이가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20대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다. 재즈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의 팬은 삶의 연륜이 쌓인 아재들이 많다. 그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도 이 칼럼을 읽고 노래를 찾아 들어준다면 좋겠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100년이 넘었다. 본명은 일리노어 페이건. 출생부터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떠돌이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는데 빌리 홀리데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의 나이는 16, 빌리 홀리데이를 뱃속에 갖고 있던 어머니의 나이는 13!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역시 빌리를 버렸고, 그는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겨우 10살의 나이에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데도 남자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빌리가 도리어 감화원에 갔고 또 성폭행을 당했다. 이번에도 가해자는 백인 남성이었다. 그런 처지에 놓인 흑인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는 하루 하루 몸을 팔아 밥벌이를 하는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한 사람이 평생 겪어내기도 힘든 비극을 겪고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의 나이가, 요즘은 어린이라고 부르는 10대 초반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경제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다. 나라가 어려워지면 하층민의 삶이 더 각박해지는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빌리는 하루 종일 몸을 팔아도 굶주림을 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집도 없이 싸구려 모텔과 경찰서 유치장을 들락거리던 그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댄서로 지원했다가 떨어진 뒤 궁여지책으로 택한 일, 더 이상 절박할 수 없는 투잡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오래 전 그날 밤. 아마도 클럽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을 거다. 술에 취한 손님들이 듣거나 말거나, 어린 빌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라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겠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슬픔을 영혼에 새긴 채 살아온 소녀의 노래는 단숨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싸구려 술집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미치도록 노래를 잘 하는 흑인 소녀가 있다는 소문이 음악 관계자들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그렇게 그는 정식으로 가수가 되었다. 음반을 취입하고 가난에서 벗어난 것으로 성공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린 재즈 가수가 되었고,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펼치고, 역사상 최초로 <타임>지에 사진이 실린 흑인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차지했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더라면 좋았겠지만, 멀리 가버린 줄 알았던 불행의 파도가 다시 밀려왔다. 극심한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흑인 유명 인사였던 그에게는 더욱 모진 차별대우가 쏟아졌다. 노래를 부를 때만 빼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더러운 검둥이 계집이라고 불렀다. 호텔에서는 흑인을 재울 수 없다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하고 공연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뒷문으로 공연장을 드나들어야 했다. 개인사도 순탄치 않아서 두번의 결혼생활 모두 실패로 끝나고 결국 술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40대인 창창한 나이였던 1959, 빌리는 쓰러진 채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 왔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본명인 일리노어 페이건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쓸쓸한 병상에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 / 이재익 SBS PD 18.1.19 한겨레

 

음악 성향

초기 그녀의 음색은 팬들이 기억하는 말년, 즉 그녀가 삶을 마감하면서 부른 음반 Lady in Satin에 비하면 감성을 극으로 쥐어짜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회색빛이 가득한 굉장히 특이한 보컬임에는 분명했다. 그런 그녀에게 훗날 기자들이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에게 묻자, 블루스 싱어인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 외에 별다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다 라고 말한 것은, 그녀의 특이한 목소리는 다분히 천성적인 것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음악적으로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만난 레스터 영과의 상성이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빌리는 그를 향해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약자인 "Pres"라 부르고, 레스터 영은 그녀를 "Lady day"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했다. 실제로 영이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 콰르텟과 함께한 1956년 발매된 음반명은 Pres and Teddy.

 

그녀의 가창력과 정교함은 엘라 피츠제럴드에 비교할 수가 없었으며, 세라 본의 아름답고도 풍부한 음색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여성 재즈보컬 가운데 그녀가 최고로 꼽히는 이유는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창력과 음색 같은 것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어디에서 들어본 말같은데... 실제로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언가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블루스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라고도 평했다.

 

1957CBS의 텔레비전 재즈 프로그램 '재즈 소리 The Sound of Jazz'에 출연해 자작곡인 Fine and Mellow를 부르는 역사적인 영상. 말년의 연주라 목소리 톤도 많이 노쇠해지고 음역도 좁아졌지만, 얼핏 냉소적으로 들리면서도 뭔가 울컥하는 감정을 전해주는 특유의 클래스는 여전한 모습이다. 반주를 맡은 밴드 멤버들도 대부분이 재즈 계에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였다는 점에서 말년까지도 빌리가 얼마나 거물급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

 

혼 섹션은 빌리의 노래에 이어지는 솔로 순서대로 벤 웹스터(테너색소폰)-레스터 영(테너색소폰)-빅 디킨슨(트롬본)-제리 멀리건(바리톤색소폰)-콜맨 호킨스(테너색소폰)-로이 엘드리지(트럼펫). 이외에도 노래가 나오는 동안 덕 치섬이 약음기 끼운 트럼펫으로 솔로 오블리가토를 곁들이고 있고, 리듬 섹션에서는 대니 바커(기타), 밀트 힌턴(베이스), 맬 월드런(피아노), 오시 존슨(드럼)이 연주하고 있다.

 

평가 및 영향력

대체적으로 그녀의 삶이 워낙에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보니, 재즈 보컬 가운데 가장 감성을 극대화 시키는 보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엘라 피츠제럴드나 세라 본, 카멘 맥레이, 에비 링컨과 같은 동시대의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 역시 그다지 순탄한 삶을 산건 아니지만 [1] 확실히 빌리 홀리데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굴곡많은 삶을 산 것은 확실하다. 20세기 초 흑인+미혼모+창부+이혼녀+약물 크리가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아픔을 공유할수 있는 지점이 있어서 인듯.

 

실제로 과거 비구니였던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은 원래 비구니(여승)였지만, 홀리데이가 부른 I'm a Fool to Want You를 우연히 듣고 비구니 생활을 청산한 뒤 재즈 보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국내 재즈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일화로, 실제로 웅산은 한국에서 빌리 홀리데이와 비슷한 느낌의 보컬로 불린다.

 

[1] 사실 세라는 큰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엘라는 결혼 생활이 굴곡이 있고 말년에 병으로 고생했지만, 세라처럼 자기관리가 확실해서 비교적 깔끔했던 편이다. 반면 빌리 홀리데이는 이 둘에 비해 상당히 불행했고, 자기관리도 잘 되지 못했다. 출처: 나무위키

 

Strange Fruit (1939)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가 매달린 채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멋진 남부 풍경에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 그리고 어디선가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 까마귀가 뜯어먹고 비를 맞고 바람을 빨아들이면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네.”1)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

포플러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들

멋진 남부의 전원 풍경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달콤하고 상쾌한 매드놀리아 향

그러고는 갑자기 풍겨 오는,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

여기 까마귀들이 뜯어 먹고

비를 모으며 바람을 빨아들이는

그리고 햇살에 썩어 가고 나무에서 떨어질

여기 이상하고 슬른 열매가 있다

 

Southern trees bear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Scent of magnolias, sweet and fresh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Here is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s to drop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Strange Fruit”은 본래 노래가 아닌,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에이블 미어로폴(Abel Meeropol, 1903-1986)은 백인 구경꾼 무리에 빙 둘러싸여 나무에 매달려 있는 두 흑인 남성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펜을 집어 들게 되었다고 한다1). 그가 써내려간 것은 한 편의 시였다. 거기에는 백인 자경단원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가한 린치 행위에 반한 저항의지가 담겨 있었다.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남쪽 나무에는 이상한 과일이 열려 있네)”라는 구절은, 이 사진이 실제로 인디애나주 북부 마리온시에서 촬영됐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한 채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하려는 것 같다.

 

곡을 녹음하려던 시도는 컬럼비아 레코드사 간부들과의 문제를 야기했다. 컬럼비아는 이 곡의 주제가 너무나 큰 논란으로 불거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자 라이벌 레이블 코모도어에서 콜럼비아가 디뎌보지 못한 영역을 개척하려 했다. 홀리데이가 이 곡을 공연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려는 방송국과 공연 기획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실현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한 편의 히트 곡을 거머쥐게 된다. 미어로폴의 시와 홀리데이의 리코딩은 깊은 호소력을 발산했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표현력과 전달 방식에 힘입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보컬과 반주를 통해 12줄로 길게 늘인 은유가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린다. 이 곡은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노래였음에도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가 없다. “Strange Fruit”은 여전히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Strange Fruit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 2013. 1. 10., 마로니에북스)

 

199912월 말 타임>지는 ‘20세기 최고의 노래[이상한 열매]를 선정했지만, 미어로폴은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그는 [이상한 열매] 외에도 흑인 민권운동을 위해 다른 많은 일들을 했지만, 민권운동사엔 그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상한 열매: 어느 노래의 역사(Strange Fruit: The Biography of a Song)](2001)라는 책을 쓴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마골릭(David Margolick)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공산주의를 경멸할 백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미국 공산주의는 민권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2)

 

[네이버 지식백과] 누가 빌리 홀리데이의 이상한 열매를 만들었나? - 백인 남성들의 성기 콤플렉스가 빚은 비극 (주제가 있는 미국사)

 

흑인 성기에 대한 백인들의 병적 강박과 공포는 자주 흑인에 대한 폭력으로 비화되곤 했는데, 이를 잘 보여준 것이 조지아주 코웨타 카운티(Coweta County)에서 일어난 샘 호스 사건이다. 샘 호스(Sam Hose, 1875-1899)는 백인 알프레드 크렌포드(Alfred Cranford)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일을 하던 일용직 흑인 노동자였다. 두 사람은 1899412일 임금문제로 다퉜다. 크렌포드가 총으로 겨냥하자 호스는 도끼로 내리쳐 크렌포드를 살해했다.

 

여기까지는 사실인데, 이후부터는 소문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건이 되었다. 지역신문들이 소문을 근거로 호스가 주인의 아내를 강간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흑인이 감히 백인 여성을 강간하다니! 흥분한 백인들은 호송 중이던 호스를 기차에서 끌어내 성기를 비롯한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얼굴가죽을 벗겨냈으며 그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산 채로 불에 태웠다. 불에 탄 호스의 시신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호스를 죽이는 현장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천명의 백인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 모인 백인들에게 숯덩이로 변한 호스와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았으며, 그의 성기를 비롯한 신체 일부를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이와 관련, 박진빈은 이 시대에 린치는 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갖춘 공동체 행사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많은 사진이 증명하듯, 행사의 참석자 중에는 백인 성인 남성만 있지 않았다. 3-4세의 남녀 아이들,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와 그 파트너, 일요일에나 입을 법한 단정한 성장 차림의 남녀노소들이 이 공동체 행사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잔혹한 화형식을 배경으로 즐거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일부러 사진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이 일을 기념으로 남기려 했다. 심지어 그 사진이 박힌 기념 엽서를 사서 다른 지역에 사는 일가친척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시각적 표현을 중시하는 당대의 새로운 상업문화 속에 린치도 나름의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4)

 

호스가 화형을 당한 나무 주변에는 우리 남부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호스의 심장 한 조각은 조지아 주지사에게 배달되었는데, 기념품을 받은 주지사는 호스에 대한 엽기적인 린치가 아니라, 호스가 한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범죄 가운데 가장 사악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호스의 처형 이후 재개된 사건 조사 과정에서 크렌포드 부인은 강간은 없었으며 호스가 자기방어를 위해 남편을 죽인 후 곧 현장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잔혹한 린치

샘 호스 사건의 심리적 배경이 된,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성기 공포증20세기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902애틀랜타 의학 저널>흑인 생식기의 특이한 점(Genital Peculiarities of the Negro)’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흑인 생식기의 악명 높은 비대흑인의 특징인 지나친 성적 리비도에 대해서 경고했다. 1908년 평소 백인 여성을 밝힌데다 성기가 엄청나게 큰 것으로 알려진 잭 존슨(Jack Johnson, 1878-1946)이 최초의 흑인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 되자 전국적인 항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6)

 

미국 현대 영화의 탄생으로 일컬어지는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W. Griffith, 1875-1948) 감독의 역사적 서사극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1914)도 백인의 흑인에 대한 성기 공포증을 다시 자극했다.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iedman)은 이 영화가 사실상 전달했던 메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흑인은 백인 처녀의 순결을 빼앗고 싶어서 침을 흘리는 색마이자 위협이다. 거대한 짐승 같은 물건을 백인 여성에게 삽입하고 싶다는 생각만이라도 감히 함으로써 백인 여성의 여성성을 우롱하는 흑인은 모두 고자로 만들어버리겠다. 흰 두건을 쓰고 칼을 찬 말 탄 기사들만이 그 위협을 저지할 수 있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 찬 장황한 이야기였다.”7)

 

그런 인종적 편견으로 인해 1920년대엔 흑인들에게 집단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백인들의 폭동이 많이 발생했다. 예컨대, 플로리다주에서 일어난 로즈우드 사건을 보자. 걸프만의 작은 공장 마을 로즈우드(Rosewood)에는 태반이 흑인인 12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인근 섬너 마을 백인들과 평화공존하고 있었는데, 192312일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백인 남자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총격과 방화가 1주일간 계속됐다. 흑인들은 도피했지만 최소한 6명의 흑인이 살해되었다. 그 중 몇 명은 교수형을 당하거나 신체를 절단당했다. 싸우는 와중에 백인 2명도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로즈우드 마을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8)

 

1930년 인디애나주 마리온(Marion)에선 흑인 청년 토머스 쉽(Thomas Shipp)과 애브럼 스미스(Abram Smith)가 강도·살인·강간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이 백인인 클로드 디터(Claude Deeter)를 살해하고 그의 백인 애인인 메리 볼(Mary Ball)을 강간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성난 백인 군중이 감옥에 난입해 두 흑인 청년을 끌어낸 뒤 린치를 가한 후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나중에 메리 볼은 강간을 당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지만, 이미 두 청년의 목숨은 사라진 뒤였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두 흑인 청년의 시체와 그 앞에 몰려든 백인 구경꾼들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가 로렌스 바이틀러(Lawrence Beitler, 1885-1960)가 찍은 이 사진은 한 장당 50센트의 가격으로 수만장이 팔려 나갔다.

 

1934년엔 닐의 음경 절단 사건이 일어났다. 클로드 닐(Claude Neal, 1911-1934)이라는 한 흑인 노동자가 플로리다의 농촌지역 잭슨 카운티에서 고용주의 딸인 10대의 롤라 캐니디(Lola Cannidy)를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그는 감옥에서 백인 자경단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다음날 지역신문에는 플로리다 흑인 화형 예정. 브루턴 감옥에서 잡힌 성범죄자가 범죄행위에 대한 복수로 몸이 절단되어 화형에 처해질 예정이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화형장으로 몰려 들었다.

 

닐을 데려온 위원회는 폭동을 염려해 군중 앞에 닐을 내놓지 않고 숲 속에서 직접 그를 살해했다. 새벽 한 시 자동차에 매여 도로를 따라서 끌려다니던 닐의 벌거벗은 몸이 농장에 도착하자 롤라의 아버지는 세 발의 총알을 닐의 머리에 쏘았고, 자식들은 시체에 날카로운 막대기를 쑤셔박았으며, 몇몇 사람들은 그 위로 차를 몰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귀와 손가락을 기념품으로 잘라냈다. 동틀 무렵 닐의 남은 부분이 법정 앞 나무에 매달려 있었는데, 한 사업가가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후 나중에 사진엽서를 50센트에 팔았다.

 

닐이 죽은지 10일 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한 백인 조사관이 그 위원회 지도자 몇 명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들은 자랑하듯이 자신들의 행동을 이야기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닐이 겪은 최후의 몇 시간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은 그의 음경을 잘랐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을 먹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고환을 자른 후 그것도 먹게 하고는 그것이 맛있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누가 빌리 홀리데이의 이상한 열매를 만들었나? - 백인 남성들의 성기 콤플렉스가 빚은 비극 (주제가 있는 미국사)

 

흑인들의 민권운동 바람이 거세게 불던 1950년대에도 흑남백녀(黑男白女)의 관계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와 분노는 건재했다. 195512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장장 382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촉발시킨 현대 민권 운동의 어머니로자 파크스(Rosa Parks, 1913-2005)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사례들을 들어가며 이렇게 결론내린다. “백인 여자들 때문에 흑인 남자들이 뒤집어 쓴 억울한 누명과 무고한 희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11)

 

[네이버 지식백과] 누가 빌리 홀리데이의 이상한 열매를 만들었나? - 백인 남성들의 성기 콤플렉스가 빚은 비극 (주제가 있는 미국사)

 

 

주석

1 김용관, [탐욕의 자본주의: 투기와 약탈이 낳은 괴물의 역사](인물과사상사, 2009), 223.

2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iedman), 김태우 옮김, [막대에서 풍선까지: 남성 성기의 역사](까치, 2001/2003), 130-131.

4 박진빈, [백색국가 건설사: 미국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앨피, 2006), 158-160.

6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iedman), 김태우 옮김, [막대에서 풍선까지: 남성 성기의 역사](까치, 2001/2003), 133.

7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iedman), 김태우 옮김, [막대에서 풍선까지: 남성 성기의 역사](까치, 2001/2003), 144.

8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책과함께, 2003/2004), 368-369.

 

11 로자 파크스(Rosa Parks) 짐 해스킨스(Jim Haskins), 최성애 옮김,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미국 흑인 시민권운동의 어머니](문예춘추사, 1997/2012), 100.

 

간혹 젊은 사람들에게 "재즈는 어떤 음악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난데없이 마치 콘크리트 벽에 고무점토를 내던지듯 물어오면 이쪽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공연히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순문학이란 어떤 문학인가요?"라는 질문과 같아서 "그건 이런 것입니다"하고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있는 깔끔하고 구체적인 정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정의가 없다 해도 어느정도 재즈를 들어온 사람이라면 음악을 아주 잠깐만 들어보고도 '아하, 이건 재즈다' '아니, 이건 재즈가 아니야'라고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재즈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일일이 칼같이 적용한 결과는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재즈에는 재즈 고유의 향기가 있고, 고유의 울림이 있으며, 고유의 감촉이 있다. 재즈와 재즈가 아닌 것을 비교해보면 향기가 다르고 울림이 다르고 감촉이 그리고 마음을 흔드는 방식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는 실제로 그 차이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말로 전달하는 일은 실로 지난한 과제다.

 

그러나 나는 일단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인간이므로 '그건 경험이 전부야. 설명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뭐든 좋으니 재즈 CD를 열 장쯤 차분히 듣고 나서 다시 찾아와'라는 식의 깐깐한 노인네 같은 언사를 무작정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해 버리면 편하겠지만(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정당한 대응일 거라는 생각도 있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내치듯 단정해버리면 대화는 벽에 부딪쳐 툭 끊기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글쟁이가 취할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를 해보자.

아주 먼 옛날,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도 더 지난 옛날. 내가 아직 소설가가 되기 전, 그렇다기보다 내 머릿속에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이것은 진짜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 무렵 도쿄 고쿠분지 역의 남쪽 출구에 있는 작은 빌딩지하에서 재즈 바를 하고 있었다. 열다섯 평쯤 되는 가게로 한쪽 구석에는 업라이트피아노가 놓여 있고 주말이면 이따금씩 라이브 연주도 했다(나중에 센다가야로 이전할 때 간신히 그랜드피아노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꽤 많은 빚을 떠안고 있었고 일 자체도 힘들었지만, 솔직히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직 이십대 중반이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가난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좋아하는 음악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고쿠분지는 다치카와와 가까워서 아주 자주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미국인 병사가 불쑥 가게를 찾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 아주 조용한 흑인이 있었다. 그는 대체로 일본인 여성과 둘이 왔는데,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인지 친구인지는 내가 알 길이 없지만 굳이 얘기하자면 '친한 친구'가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그 커플을 또렷이 기억하는 까닭은 옆에서 보기에도 그런 미묘한 거리감이 매우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끈쩍끈적한 분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생판 남처럼 딱딱하게 대하지도 않고, 그들은 가볍게 술을 마시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재즈를 들었다. 그는 가끔 나를 불러서 "빌리 홀리데이의 판 좀 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 빌리 홀리데이 음악이면 뭐든 좋아요.

 

딱 한 번 그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으며 흐느껴 울던 기억이 있다. 밤늦은 시간이었고 다른 손님은 별로 없었다. 그때 그가 혼자 있었는지, 늘 같이 오던 여성과 함께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빌리 홀리데이의 어떤 레코드를 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하튼 그는 카운터 구석 자리에 앉아서 큼지막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떨며 조용히 울었다. 나는 물론 되도록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가 다 돌아가자,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계산을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 같다. 그후 일 년쯤 지나 내가 그 흑인 병사를거의 잊어갈 무렵, 종종 그와 함께 오던 여성이 우리 가게에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였다. 비 내리는 밤이었다. 그날도 가게에는 손님이 적고 한산했다. 그녀는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때 내렸던 비와 그녀의 레인코트 냄새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계절은 가을이었던 것 같다. 비 내리는 가을밤, 그리고 가게 안이 조용할 때면 나는 자주 사라 본이 노래하는 '9월의 비'를 테이블에 올렸다. 아마 그날 밤도 그랬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 타입의 밤이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내 얼굴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녀는 위스키를 주문했다. 나는 술을 준비해 건넸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그 흑인 병사가- 얼마 전에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우리 가게에 와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었다고. 우리 가게를 마음에 들어했다며, 그녀는 그리운 듯 추억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지난번에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자기 대신 그 가게에 가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달래요." 그리고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레코드장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오래된 레코드 한 장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슈어에서 나온 타입 III 바늘을 레코드 홈 위에 살며시 얹었다. LP판은 멋스러운 물건이다. LP를 걸 때 우리가 취하는 일련의 동작은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주위의 다양한 형태의 행위와 어딘가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LP가 언젠가는 시대에뒤처진 물건이 될 줄, 그 무렵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내가 소설가가 되고 언젠가 나이를 먹을 거라는 사실 역시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가 끝난 후, 나는 바늘을 들어올리고 레코드를 재킷에 넣어 다시 진열장에 넣었다. 그녀는 남아 있던 위스키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마치 바깥 세계로 나서는 특별한 준비를 하듯 레인코트를 조심스럽게 걸쳤다. 그녀는 밖으로 나갈 때,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고 나서 "저야말로"라고 대답했다.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 당시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좀더 제대로 된 말을, 뭔가 좀더 확실하게 마음이 담긴 말을 건넸어야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내 머릿속에는 도무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이별의 대부분은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영원히 갈 곳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용했던 그 흑인 병사를 자주 떠올린다. 멀리 떨어져 고국을 그리며 카운터 한쪽 구석에서 소리 죽여 흐느껴 울던 남자의 모습을. 그 앞에서 조용히 녹아들던 온더록의 얼음을. 그리고 멀리 떠나간 그를 위해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러 왔던 여성을. 그녀의 레인코트 냄새를.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젊고 필요 이상으로 내성적이며, 그런 주제에 두려워할 줄 몰랐던 나 자신을. 그러면서 누군가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적절한 말이라곤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던 나 자신을.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런게 바로 재즈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재즈란 그런 존재다. 꽤나 긴 정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재즈라는 음악에 대해 이보다 더 유효한 정의는 알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인종차별 속에 스러져 간 영원불멸의 레이디 데이(Lady day)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상념도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의 목석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인이 우리의 판소리나 창을 들으며 뭔가 회한에 젖는 표정을 보이는 것처럼 언어가 수반되기 마련인 보컬의 가사 전달과 무관하게 노래하는 이의 음색이나 음성의 애절함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김소희 여사의 소리 한 대목을 듣노라면 비록 한국인이 아니라도 그 애절함과 한의 정서를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여간해서는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인생이 음성에 담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보컬이 들어간 재즈를 발라드 재즈로 분류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재즈에서 보컬이란 요소는 엄밀히 따지자면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재즈에서 보컬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이들은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 등 여성 보컬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예술과 예술가의 삶을 분리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을 만나곤 한다. 시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썼다는 어느 시인이나 귀머거리에다 반벙어리에 가까웠던 어느 화가의 생애와 작품을 옹호하고자 하는 예술 지상주의자들의 순수 예술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순수'란 말이 어디 그럴 때 쓰이는 말이던가! 우리는 빌리 홀리데이의 삶이나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예술가의 삶이 결코 시대적 조건과 사회 환경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남다른 것이 될 수도, 남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적 성취에 대해 "나를 키운 팔할은 바람이었다"고 하지만, 그 팔할의 바람조차 사회와 시대적 한계 안에서 불어온다.

 

그렇다면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키운 그 팔할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블루스, 재즈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잘 알겠지만 이 분야의 뮤지션들 중에는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워낙 많아 오히려 정상적인 생애를 보낸 사람 찾기가 훨씬 어렵다. 그런 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특히 더 기구했다. (하긴 빌리 홀리데이 못지 않게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에디뜨 비아프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녀의 삶은 운명적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불과 44살에 인생을 마감한 그녀의 일생 중 거의 40여년은 굶주림과 학대, 인종 차별의 두터운 벽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홀대받는 흑인 아기의 출생

빌리 홀리데이는 1910년대 슬럼가 출신 흑인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태어나면서 그녀에게 달라붙은 가난과 불행의 운명은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길까지 떠날 줄 몰랐다. 빌리 홀리데이는 19154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일설에는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라고 하는 이도 있다)의 한 슬럼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전기 작가마다 각기 다르게 말하고 있을 만큼 정확하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인 클라렌스 홀리데이(Clarence Holiday)와 어머니인 새디 페이건(Sadie Fagan)이 나중에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둥 전기작가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이 말은 빌리 홀리데이의 삶이 처음부터 정상적인 가정의 출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뜻이 된다. 말콤 X의 자서전에도 있듯이 슬럼가의 흑인 어린이들이 보내는 어린 시절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런지 모르겠지만, 춘향이와 이몽룡도 아닌 이 흑인 슬럼가의 두 청춘 남녀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빌리 홀리데이를 잉태하고 출산한다. 이 때 아버지는 16, 어머니는 13살이었다. 정식 결혼도 없이 태어난 이 아기는 일단 어머니쪽 성을 따라 엘리노어(Eleanor) 페이건이라 불렀다. 그녀는 당시 교육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 대개가 그러하듯이 백인 가정의 흑인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신한 것이 들통나 그 마저 쫒겨나고 만다.

 

그러나 빌리의 아버지는 그녀를 팽개쳐두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유랑악단을 따라 떠나버리고 만다. 아버지가 없는 중에 빌리를 출산하기는 했지만 어린 빌리를 양욱할 능력이 없었던 빌리의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외가에 맡기고 일자리를 찾아 뉴욕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빌리 홀리데이 유년기의 상처는 평생을 두고 그녀를 괴롭혔다. 훗날 재즈 가수로 명성을 얻어 대중의 각광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평생을 두고 혼자 남겨지게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사랑받지 못한다는 콤플렉스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두 번의 강간과 감옥 생활을 경험한 14살의 창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 아닌 고아 ,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사촌인 아이다와 아이다의 두 아이인 헨리, 엘시와 함께 살게 되었다. 사촌 아이다는 마치 신데렐라의 계모처럼 그녀를 매일 때리고 학대하였다고 한다. 비록 학대받는 괴로운 시절이긴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빌리에게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평소 빌리를 귀여워 해주던 할머니는 외손녀인 어린 빌리를 늘 품에 안고 재워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처럼 할머니의 품에서 잠든 빌리는 무거운 기척에 눌려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차갑게 굳어 버린 할머니는 어린 빌리의 목을 감싸안은 채 숨을 거두었고, 빌리는 할머니의 팔에 감기어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이 때의 충격으로 빌리는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린 빌리에게 잠시 평온한 시절이 찾아왔다. 어머니 새디가 필이라는 백인 남자와 재혼을 하며 그녀를 다시 데려간 것이다. 백인 아버지와 빌리의 관계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던지 빌리는 이 무렵을 그래도 행복한 시절로 기억했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행복을 원치 않았던지 이복 아버지와의 행복도 잠시 뿐이었다.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빌리는 어려서부터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고,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듣곤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축음기는 굉장한 사치품이었고 할렘에서 그런 축음기를 가질 수 있는 여자는 창녀밖에 없었다. 어린 빌리는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듣기 위해 아리스라는 창녀의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도와야 했다. 그녀 나이 열살이던 1925년 빌리는 마흔 살 가량의 백인 남자 딕크의 집에서 일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큰 상처를 입은 빌리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백인 남자를 처벌하지 않고, 어린 빌리를 불량소녀로 몰아 감화원에 보내고 만다.

 

감화원에 갇힌 어린 흑인 소녀 엘리노어 페이건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가 찾아와 빌리는 2년만에 간신히 감화원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더이상 다칠 수 없을 만큼 상처받고 난 뒤였다. 그러나 빌리의 고통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어떤 흑인 남자로부터의 성폭행이었다. 결국 빌리의 어머니는 그 해 여름 자신의 딸을 뉴욕으로 데려갔고, 어린 빌리의 정규교육은 이때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뉴욕에서의 생활이라고 해서 이 두 모녀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빌리는 뉴욕 할렘의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되었고, 그런 삶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풍족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떤 흑인의 강요된 성행위를 거부하다 결국 밀고당해 다시 경찰로 넘겨졌고 어린 빌리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두 차례의 철창행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빌리 홀리데이는 사창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하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도 불어닥친 경제 대공황은 이 두 모녀에게 더이상 벌집 같은 작은 방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두 모녀는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탄생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밀린 방세를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날 쫓겨난다는 절박감을 안고 거리에 나선 빌리 홀리데이는 그저 발길 닿는 데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할렘가에 위치한 '포즈와 제리즈(Pod`s & Jerr's)라는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녀는 지배인을 만나 사정사정하여 댄서라고 속이고 일자리를 청했지만, 운수 사납게도 즉석 오디션에 통과해야만 했다. 춤이라고는 배워 본적도 없는 그녀가 오디션에 통과할리 만무했다. 노발대발한 지배인은 그녀를 당장 내쫓으려 했다. 그때 그녀를 가엾게 여긴 피아노 연주자가 말했다. "노래는 어때?" 엘리노어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홀 안이 쩌렁쩌렁하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노래라면 자신있어요."

 

피아니스트는 <Trav`lin All Alone>이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엘리노어의 노래는 시끌벅적한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훗날 그녀는 그 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꿈같은 정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자리에서는 술잔을 옆에 놓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밤 피아니스트와 반으로 나눈 그녀의 팁은 57달러나 되었다. 나이트클럽의 주급 18달러 짜리 가수가 되자 엘리노어 페이건에게는 새로운 예명이 필요해졌다. 그때 떠오른 이름이 예전부터 좋아하던 배우 빌리 도브였고, 거기에 아버지의 성을 따와 "빌리 홀리데이"라고 정했다.

 

영화 <코튼클럽>(Cotton club은 실존하는 클럽이었고 당대의 쟁쟁한 재즈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이나 대공황기를 다룬 미국영화들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가 거의 온몸을 드러낸 댄서들이 춤을 추고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 손님들의 무릎 위에 앉으며 팁을 받아 챙기는 장면이다. 그런데 빌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님이 던져주는 팁을 받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하는데, 허리를 숙이면 가슴이 다 드러나는 데다 추근대는 손님들이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빌리를 두고 동료들은 자기가 무슨 요조숙녀라도 되는 줄 아나봐 하고 놀려대며 부른 것이 '레이디(Lady)'의 시초였다. 어느날 그런 빌리의 모습을 보다 못한 어느 부자 손님이 빌리에게 떨어진 돈을 주워 직접 손에 쥐어주었고, 이후 빌리의 손님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레이디의 인기는 점차 높아졌고, 할렘의 여러 클럽에서 그녀를 필요로 했다. 이 시절 그녀는 언제나 머리에 크고 흰 치자꽃 한 송이를 꽃고 출연했는데, 죽는 날까지 계속된 이 버릇 때문에 머리카락에 꽂은 하얀 치자꽃은 '빌리 홀리데이의 전설'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하얀 치자꽃 레이디데이와 노래하는 검둥개

빌리 홀리데이는 나날이 명성을 얻어갔고, 할렘의 여러 클럽들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빌리 홀리데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벌어졌다. 음악평론가 존 하몬드가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존 하몬드는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일류 매니저인 조 그래이저를 그녀에게 소개했고 193318세의 나이로 첫번째 음반을 취입하게 된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의 이 첫번째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존 하몬드는 1935년 빌리 홀리데이를 유명한 '테디 윌슨 악단'의 보컬리스트로 음반을 취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이 두번째 레코드는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빌리에게 행운은 연속해서 다가왔다. 같은 해 그녀는 공작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의 보컬을 맡았고, 흑인 연예인이 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던 아폴로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자신의 첫 독집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는데 그 음반이 바로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CBS컬럼비아>였다. 이 시기의 그녀는 주로 '플레처 핸더슨 악단'과 함께 출연했다.

 

1937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빌리 홀리데이는 뉴욕에서 '카운트 베이시 악단(The Count Basie Bands)'과 공연하면서 테너 색소폰의 1인자인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나게 된다. 서로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한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빠지고 만다. 빌리 홀리데이는 레스터를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의미를 담아 '프레즈'라고 불렀으며 레스터 역시 그런 그녀에게 '기품있는 숙녀 홀리데이'라는 뜻을 담아 '레이디데이'라고 불렀다. 이 애칭은 지금까지 빌리 홀리데이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아티 쇼(Artie Show - 음악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그는 그리 비중 있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스윙 음악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당대에 큰 인기를 누린 백인 엔터테이너의 전형이었다.)가 그녀를 찾아와 보스턴 연주 여행에 함께 해줄 것을 제의했다. 흑인 여성 가수인 빌리 홀리데이와 백인 악사 13명을 한 무대에 세운다는 이 제안은 인종차별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회분위기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제의였다. '아티 쇼 악단'의 이런 순회 연주는 흥행에는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빌리 홀리데이는 순회 연주 기간 내내 심각한 인종차별의 벽을 느껴야만 했다.

 

이들의 연주는 재즈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미국 남부의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백인 악단이 흑인 가수의 노래를 반주해서는 안 된다"며 공연을 제지당했고, 뉴욕의 한 호텔에서는 빌리 홀리데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문이 아닌 부엌문으로 출입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사실 빌리 홀리데이에게 이런 인종적 차별의 높은 벽을 느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초창기 공연했던 흑인 밴드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공연할 때 디트로이트의 폭스 시어터(Fox Theater)의 지배인은 그녀보고 흑인치고는 너무 희다는 이유로 얼굴에 검댕을 칠하게 했고, 백인 밴드와 공연을 하게 되자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백인들과 함께 연주하기엔 너무 검다는 이유로 핑크 물감을 강제로 칠했다. 그래도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물론 관객들 중 일부 백인들이 그녀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그녀의 음악성에 공감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 순간부터 그녀는 뮤지션이 아니었고, 백인 악단에 우연히 끼어 든 '한 마리 검둥개'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인종차별의 감옥에 갇힌 그녀는 도시 뒷골목의 싸구려 식당조차 마음놓고 드나들 수 없었고, 같은 단원들끼리 함께 식사할 수도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단원들이 호텔 침대에 피곤에 지친 몸을 누일 때조차 그녀는 잠잘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단원들이 아무리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써도 인종 차별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단원 내에서도 수석 단원이자 당시 인기 최고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주티 싱글턴(Zutty Singleton) 같은 이는 대놓고 빌리 홀리데이를 골탕 먹이기도 했다.

 

미국이라는 사회에 열린 기묘한 과일

그녀가 할렘의 뒷골목에서 노래하는 동안엔 아무도 그녀의 피부 색깔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백인들과 함께 공연을 시작하며 도심에 나타나자 백인들은 그녀를 한 마리 검은 짐승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연주 여행 동안 빌리 홀리데이의 마음이 크게 상처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빌리는 이때 받은 상처 때문에 간간이 마리화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 번씩 손을 대던 것이 여행기간이 길어지면서 마리화나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게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안게 된 빌리는 악단과 함께 라디오 전국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막상 방송이 시작되자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그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녀의 운명을 미리 예견시킬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19372월 그녀가 가수로서 이름을 내기 시작하자 다시 연락이 오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부 순회 공연 도중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그녀의 아버지에게 병실을 내어준 병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 클라렌스 홀리데이는 병세가 악화돼 죽고 만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그녀 앞에 닥칠 운명이었고,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부터 인종차별의 장애물 앞에서 더욱 당당해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성은 더욱 깊어졌고, 1939년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노래 <기묘한 과일 Strange Fruit>을 부르게 된다. 이 노래는 루이스 앨런(Lewis Allen)의 시에 곡을 부친 것으로 흑인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뒤 나무에 매달려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었다.

 

할렘가의 가난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가수가 되었지만 인종차별의 잔인한 광경을 직접 목도한 빌리 홀리데이는 이 노래 <기묘한 과일>을 부를 때마다 더욱 혼신의 힘을 다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통해 인종차별의 잔인함에 대해 각성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루이스 앨런의 시에 곡을 부친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 God Bless the child> 같은 곡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 송이었다. (후일 존 바에즈가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 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며 함께 한 것처럼 보다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대운동에의 참여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이런 곡들을 분노를 억누르며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부름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가슴에 더욱 호소할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 맘껏 개화한 시기의 이 노래들은 빌리 홀리데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곡이 되었고, 그녀의 이런 노래들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관객들이라면 다른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를 막았다. 그녀는 '레이디데이'라는 그녀의 별칭답게 노래하는 동안 요란한 율동보다는 깊은 고뇌에 잠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본 관객들은 그녀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 노래 <기묘한 과일>은 릴리언 스미스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소설로 옮겨졌고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성과 그녀가 남긴 족적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흑인들의 목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흑인들이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목숨을 잃었고, 전쟁이 끝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1940년대에 이르자 빌리 홀리데이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 바야흐로 그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1944'에스콰이어 재즈 비평가상', 1946'올해의 메트로놈 보컬리스트상'을 받았다. 그녀의 공연 일정은 항상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대중은 그녀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런 인기 속에서도 빌리 홀리데이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을 자신만의 감정을 담아 부르고자 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어려서부터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귀담아 들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빼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어느 누구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단지 베시의 비음과 루이스의 필링을 원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 스타일은 어디서 발전했냐고 묻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만일 여기 어떤 곡이 있어 그것을 부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에 신경 쓰겠지만 나는 단지 느끼려 할뿐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도 뭔가를 느끼지 않겠는가? 생각, 편곡, 연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는 곡만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노래로 부를 수조차 없는 곡도 있었다."

 

사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해 우리는 흔히 재즈 보컬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그녀의 노래는 전형적인 재즈 보컬의 그것은 아니다. 물론 재즈 보컬은 이런 것이다 라고 딱히 정해진 바도 없고, 팝 음악의 많은 보컬들이 알게 모르게 재즈의 영향을 받아 형성돼 왔지만 그녀의 보컬은 블루스와 소울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라는 재즈사의 가장 거대한 위인에 대해서도 다분히 희화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음악이라는 거대한 산맥에서도 가장 높고 웅장하게 솟아있는 봉우리이다. 재즈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과 파급을 불러일으킨 루이 암스트롱에 비견할 만한 뮤지션은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에게 비견할 만한 인물을 들라면 찰리 파커(Chalie Parker), 듀크 엘링턴,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후일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고, 당시 루이 암스트롱에게 쏟아진 비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 비난들은 대개 그가 백인들 앞에서 어리숙한 흑인 광대 노예의 몸짓을 해 보인다는 것과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팝(Pop)적이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가 인정하고 있듯이 트럼펫 주자로 시작한 루이 암스트롱은 후에 로이 엘드리지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재즈 보컬의 기본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대에 펼쳐진 재즈의 화려한 성공은 대부분 그의 공덕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시대에 이르면 재즈는 단순히 크레올들의 정서나 목화밭의 목화 따는 체험이나 정서 이상의 것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이미 도시로 진출했으며 그들이 체험한 도시는 농장에서 목화를 따는 이상의 복잡한 정서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그런 당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라든가 배고픔이라는 낱말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캐딜락과 밍크 코트로 풀리지 않는 체험 - 그것으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두 낱말 안에 들어있다."

 

또한 빌리 홀리데이는 이렇게 가슴 저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필링으로 부르는 섬세하고 애절한 창법뿐만 아니라 마이크로폰(microphone)이 지닌 잠재력을 최초로 실현시킨 가수로서도 중요하다. 그녀는 보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랄 수 있는 마이크에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흘려 넣어야 하는지,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인지 가장 처음 알아차린, 그리고 가장 잘 알고 있는 가수였다. 그녀의 이런 마이크 창법은 그후 모든 장르의 보컬들에게 퍼져 나갔다.


가장 화려했던 순간 저버린 한 송이 치자꽃 빌리 홀리데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재즈(Jazz)라는 장르 자체는 그 출발이 어디에 있었건 간에 록큰롤(Rock & Roll)처럼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듀크 엘링턴 같은 이들은 살아 생전에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결코 재즈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저급한 용어로부터 출발한 재즈일지라도 재즈가 미국에 끼친 사회적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들이 짐승 이상의 그 무엇이고, 동시에 인간으로서 존경받을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문화적 영역에서 최초로 확인시켜주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가 활동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백인들은 흑인들과 함께 식사할 권리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빌리 홀리데이는 백인 악단인 '아티 쇼 밴드'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1932년 무렵엔 'King of Swing' 베니 굿맨과의 교제, 1939년 오손 웰스와의 사랑 등 백인들과 교제를 멀리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그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이후 그녀는 1941년 캘리포니아의 한 나이트 클럽 매니저인 제임스 먼로를 만나 첫번째 결혼을 했지만 그는 바람둥이에 아편 중독자였다. 거기에 겹쳐 빌리 홀리데이의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빌리 홀리데이는 마약에 빠져들었고,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맨하탄의 개인요양원을 찾았지만 이 요양원측의 밀고로 마약단속반원에 체포되고 만다. 결국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 마약상습복용자 명단에 올라 평생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만다. 그녀는 마약법 위반 혐의로 9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한다. 출옥 뒤에 가진 카네기 홀 컴백 공연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뉴욕시는 마약전과자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나이트클럽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새 남편 존 레비는 그녀의 수입을 갈취했고, 공연은 매번 성공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거의 없었다. 1950년 결국 레비와도 헤어진 그녀는 이듬해 루이스 맥케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재기에 성공했고, 1954년에는 유럽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마약수사국이었다. 그녀와 남편 맥케이는 불법무기,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당한다.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다서번째 형무소행이었다. 결국 얼마 안가 풀려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몰아닥친 불행으로 빌리 홀리데이는 정서불안과 음주, 마약 등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만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망가져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리해서 공연과 음반 취입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1959년 그녀는 쓰러졌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평생 마지막으로 체포된다.

 

그녀가 마약을 소지하고 있으리라는 추정만으로 이루어진 체포였다. 경찰은 다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전직 창녀, 마약상습복용자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니그로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들 역시 엘리노어 페이건이라는 본명으로 기재된 그녀의 환자 카드만 보고 환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마약에 찌들대로 찌든 채 병실에 누워있는 검둥이 여자에게 진정제만을 주사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이런 광경은 거의 매일 거듭되는 일상에 불과했다. 1959717. 불과 44세의 나이로 빌리 홀리데이는 숨졌다. 그녀의 진료 기록판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운구 행렬에는 베니 굿맨, 테디 윌슨, 존 하모든 등이 뒤따랐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소리로 일컬어지는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영감에 넘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차별없는 자유를 염원했고, 그녀의 곡 해석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과 더불어 3대 여성 재즈 보컬이라고 일컫는 빌리 홀리데이. 사실, 가창력은 '노래하는 메트로놈'이라는 엘라 피츠제랄드를 능가할 수 없었고, 음색의 아름다움은 사라 본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결국 이 모두를 능가해버린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활활 불태우고 떠나버렸다. 할렘가의 흑인으로 태어나 평생에 걸쳐 계속된 흑인으로서의 차별과 모욕을 피해 그녀는 죽음으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지금은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 없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각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blog.naver.com/kkh10200/60012129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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