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재판에 목숨 빼앗긴 조봉암
잃어버린 진보의 꿈’이라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1959)은 잘못된 재판(법)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지 52년 만인 2011년 1월20일 대법정에서 대법관 전원일치로 국가변란죄 무죄, 간첩죄 무죄, 불법무기소지죄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세기 동안 역사의 그늘에 갇혀 있던 조봉암이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소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이 무죄를 확인받은 대법정에서 오랫동안 그와 함께 고초를 겪었던 동지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정한 세월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침묵을 강요받았던 유족들은 이제 눈물조차 말라버려 재판정은 무거운 침묵만 길게 이어졌다.
당시 주심은 <기울어진 저울-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참여정부 초기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등용된 ‘독수리 5형제(이홍훈·박시환·전수안·김영란·김지형 대법관)’ 중에서도 가장 개혁적 법관이라 할 수 있는 박시환 대법관이었다.
민주주의란 곧 ‘법에 의한 통치(rule of law)’를 의미하며 법치주의란 국가가 공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통치원리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 가운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법치주의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국가 권력을 구속시킴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원리로, 어떤 통치자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비관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정치제도이다. 민주주의는 국가 권력의 작용을 입법·행정·사법의 셋으로 나누어, 상호간 견제·균형을 유지시킴으로써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려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을 통해 유지된다.
삼권분립이란 말은 역설적이게도 사법권 역시 국가 권력의 하나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사법권은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행정권·입법권과 달리 유일하게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법과 규범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법권이야말로 그 어떤 권력보다 독립적이고 불가침적인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오늘날 ‘권력의 인격화’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제도로 고안되었던 법치주의가 자족적 권력으로 변질되고, 변질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현실은 법치주의의 아이러니다.
왜 사법 권력은 이토록 완강한가
해방 이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법부는 권력의 하수인이었다는 지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사법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제대로 사과한 적도, 성찰한 적도, 스스로를 개혁한 적도 없다. 정치권력도, 기업권력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시민 권력에 의해 견제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사법 권력의 견제와 개혁은 왜 이토록 어려울까? 법조팀 기자로 잔뼈가 굵은 두 저자 역시 이 같은 의문을 품었고, 그들이 지난 10년간 사법 개혁의 시도와 좌절을 정리한 탐사보도(investiga– tive reporting)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룬 책일수록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어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이해하고 논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개혁이 진행되는 장면은 조자룡이 적진을 돌파해 유비의 자식을 구출하는 대목만큼 흥미진진하고, 개혁이 좌절되는 대목은 관우가 육손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는 장면만큼 서글프다. 어쩌면 우리 사법부가 원래 그런 곳이었는데 나만 몰랐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2013년 04월 12일(금) 시사인 제289호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잔인한 나라에서 일군 죽산의 시대정신
- 조봉암은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한 초대 농림부 장관이다. 그는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하고 이승만의 표적이 되어 스러지고 말았다.
관운(官運)이 좋아서 여러 직책을 두루 거치고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한 이에게 “경험한 자리 중 제일 좋은 데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국회의원!”이라고 답했다는구나. 그에게는 직접 행정 일선에 나서는 공무원들보다 편하고, 국정 감사권을 쥐고 사법부와 행정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아 ‘끗발 있는’ 자리였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야. 의정 활동 중에도 127건의 법안을 내고 34건을 통과시키거나 대안에 반영시켰던 고 노회찬 의원 같은 분도 있거든. 오늘부터 몇 주간은 그렇듯 국회에서 훌륭히 제 몫을 하며 깊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를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고, 국회의원 198명(투표가 이뤄지지 않은 제주도 2명 제외)이 선출됐어. 그 가운데 인천 을구에서 당선된 조봉암 의원도 있었지.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까지 한 엘리트 공산주의자였어. 혹독한 감옥살이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를 잃으면서도 투쟁을 지속한 강골이었지.
ⓒ연합뉴스 1958년 10월25일 조봉암(흰 한복 입은 이)·진보당 사건을 선고하는 고등법원 재판정.
하지만 해방 이후 그는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던 박헌영과 각을 세웠고, 급기야 “현재 조선 인민은 공산당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선언으로 공산당과 공식 결별한단다. 그가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한 이유는 “가능한 지역에서 ‘우리의 독립정부’ 수립은 오히려 시급한 과제이며 통일정부 수립도 우리의 독립정부에 의해 제2단계로 모색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었지. 분단이 현실이라면 그를 수용하되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는 얘기였어.
당선 후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조봉암은 헌법 내 인신보호 규정을 놓고 다른 의원들과 크게 충돌해. 인신보호 규정이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속영장 제도, 구속적부심,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에 대한 조항들을 말하지. 원래는 “현행범인 경우에 한하여 영장 없이 체포가 가능하다”라는 예외 조항만 있었는데, 권승렬이라는 의원이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도 사후 영장 청구로 대체할 수 있다”로 슬쩍 영장 없는 체포의 범위를 넓히더니, 김준연 의원은 “내우외환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인신보호 관련 규정 일체의 적용을 법률로써 정지할 수 있다”라는 규정을 넣자고 우겼어. 그것도 모자라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을 삭제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어.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경험하고 혹독한 옥살이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 일곱 개를 잃었던 조봉암은 여기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후 영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으며, 고문과 잔혹한 형벌은 당연히 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준연씨는 예외 규정을 두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에 준할 ‘비상사태의 경우’ 등은 집회에도 적용될 우려가 다분히 있으니 어찌 이를 당연하다고 하는가? 이 천하가 언제나 너의 천하가 될 줄 아느냐? (<프레시안> 2017년 7월8일)”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거해 존엄과 인권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 조봉암은 권리의 예외를 확대한다면 모든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가며, 예외를 주장하는 이들 역시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거야.
이후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돼.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지. 여러 분석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농림부 장관으로서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균등한 토지 소유를 실현함으로써” 농민의 소득수준을 높이고 지주층을 없애 성공적인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거니와 한국전쟁에서 남한 농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근거를 마련해주었어. 북한의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 “당신,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다 어디로 갔는가.”
1950년 5월30일 실시된 2대 총선에서 조봉암은 재선됐고 국회 부의장을 맡았어.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던 시각,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결의안’을 의결하는데 이승만 정부는 6월27일 새벽 1시,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어. 국회가 싸우자고 목울대를 세우던 때, ‘우리가 승리한다’고 호언장담하던 정부는 피란을 개시한 거야.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이 결의문을 들고 경무대(청와대)에 갔으나 대통령은 도망간 뒤였지.
ⓒ오마이뉴스 조봉암 59주기인 7월31일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망우리 묘역에 놓여 있다.
국회의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국회의장 신익희도 다급히 한강을 넘어갔어. 그런데 조봉암은 적에게 넘어가면 안 될 문서들을 챙기기 위해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고, 북새통 속에서 그는 가족을 건사하지 못했단다.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는 일제강점기에 남편 못지않게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 운동가였어. 조봉암을 배신자로 벼르고 있던 북한은 피란을 떠나지 못한 부인 김조이를 대신 납치해 갔다. 전세가 역전된 뒤 조봉암은 평양까지 달려갔지만 아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해.
사형 후 5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
서울을 탈환한 뒤 국회는 정부만 믿고 피란을 가지 않아 고초를 치른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요구를 의결했어.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 장택상 의원 등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거절해.
국회의원들이 거듭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답은 참으로 파렴치한 것이었단다.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를 하려면 당신들이 하시오.” 정부 문서를 챙기려다 가족마저 챙기지 못한 국회의원 조봉암은 이 능글맞고 뻔뻔한 대통령에게 몇 년 전의 호통을 다시 내지르고 싶지 않았을까? “이 천하가 언제까지고 너의 천하일 줄 아느냐?”
이후 조봉암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유력한 경쟁자로 떠올라. 이 대통령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정치인을 고이 놔둘 사람이 아니었어. 이승만 정권은 ‘평화통일’ 자체가 이적성이 있다며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들었고 급기야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 1959년 7월31일 용맹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전향한 이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소임을 다한 조봉암은 교수형으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단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조봉암의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지난한 고생을 했어. 1980년대까지도 이사를 하면 경찰이 나타나 한바탕 쓸고 지나갔고, 조봉암의 아들은 신원 조회에 걸려 평생 해외에 나가지 못했다니 알 만하지. 2011년, 52년 만에 대법원 판사 전원 합의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내려졌을 때 조봉암의 딸은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단다. “이제 아버지의 비에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겠다.” 망우리에 묘지를 조성할 때 경찰은 비석조차 세우지 말라고 막아섰고 어찌어찌 비석은 세웠지만 비문은 새기지 못했다고 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잔인하고 배은망덕한 나라였는지 아빠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구나.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8년 08월 16일(목) 시사인 제569호 김형민 (SBS CNBC PD)
불후의 업적 토지개혁을 추진한 초대 농림부 장관
1948년 8월 2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 농지개혁법을 입안했고,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놓았다. 또한 곡식의 잉여생산량을 정부에서 매입하는 양곡매입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는 시장경제논리에 어긋난다는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상정하여 48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농업협동조합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1949년 2월 22일 농지개혁에 반대하는 한민당의 견제로 인한 관사 수리비 유용혐의로 농림부장관직을 사임하였지만, 이후 무혐의로 밝혀진다. 7월 23일 아들 규호가 출생했다.
1950년 인천병구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국회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24명의 의원들이 전란 속에 납북되거나 월북했고 나머지는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 국회의 품위를 지킨 건 부의장 조봉암이었다.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했다. 그 때문에 정작 자신의 부인을 데려오지 못했고, 서울에 남은 부인 김조이 여사는은 나중에 북한군에 강제로 납북돼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방이 붙여져 있었다. 8월 26일 윤봉림과의 사이에서 딸 의정이 출생하였다.
1952년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에 재선되었고,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등으로 낙선하였다. 1954년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등록에 실패하였다.
1954년 11월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다. 1955년 1월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다. 결국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1955년 12월 22일 서상일,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 등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 인천병구에 입후보하려는 조봉암 벽보
1956년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 등을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논의 중에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였고, 5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얻어 2등으로 낙선하였다.
11월 진보당 창당대회를 열고 개회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체포, “평화통일론이 북진통일이라는 국시의 위반이며 간첩 박정호와 접선했다”는 조작된 혐의를 모두 부인하였다. 7월 2일 1심 결심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9월 4일 2심에서는 양이섭이 1심 진술을 번복해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으며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지 않았고 조봉암에게 준 돈은 후원금이지 공작금으로 준 <![endif] -->
게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10월 25일 2심 결심 공판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간첩행위를 했다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장택상과 윤치영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였고, 7월 30일 재심청구를 기각하고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8월 2일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북한에서 6.25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에 찍히고 공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는 조봉암의 명예회복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1991년 윤길중 의원이 “죽산 조봉암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작성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하였다. 2001년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권유하였다. 2008년 8월 15일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사회원로와 여야 정치인 145명이 “죽산의 명예회복 청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봉암이 떠난 지 60년, 딸의 간절한 염원
올해는 이승만 정권의 사법 살인 피해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이 서거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조봉암 선생의 신원(伸冤)과 재평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맏딸 조호정 여사(사진)를 만났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중략)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보당 창당과 관련한 이 사건 재심 대상 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는바,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고, (중략) 이상과 같은 이유로 관여 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어 주문과 같이 (간첩죄 무죄) 판결한다(2011년 1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는 이승만 정권의 사법 살인 피해자 죽산 조봉암 선생이 서거한 지 6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죽산은 생전에 1남3녀를 두었다. 그중 3·1운동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첫사랑 김이옥과의 사이에서 얻은 맏딸이 조호정 여사(91)다.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의 신원(伸冤)과 재평가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자락 아담한 주택에서 기자를 맞은 조호정 여사는 처음에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첫사랑 김이옥, 딸 호정
죽산, 일제의 고문으로 손가락 7개 잃어
1899년 강화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스무 살 때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의 첫사랑을 만났다. 강화 부농의 딸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 출신 김이옥이다. 둘은 3·1운동 유인물을 등사하고 군중에 돌릴 태극기를 만들었다.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수감되자 어머니가 자주 면회를 다니면서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어머니 집안에서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첫사랑을 뒤로하고 192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셨다.”
조봉암은 일본에서 엿장수를 하며 주오대학(中央大學) 정경부에 입학한 뒤 박열·김약수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다. 관념적 운동에 염증을 느낀 그는 조직력을 갖춘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25년 경성에서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무렵 죽산은 혁명 동지 김조이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조봉암은 여운형·홍남표 등과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한인 지부를 결성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조봉암은 1927년 상하이에서 첫사랑 김이옥과 재회한다. “어머니는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폐결핵에 걸리자 죽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겠다고 여비를 꾸려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토록 보고 싶은 이를 생전 마지막으로 보겠다는 어머니의 뜻을 가엽게 여겨 주변에서 도와줬다고 하더라.”
상하이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두 사람. 이듬해 딸 조호정이 태어났다. 두 사람의 행복은 짧았다. “1932년에 아버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되자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강화도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폐결핵이 급격히 악화해 1934년 세상을 뜨셨다. 그 뒤 나는 큰어머니(김조이 여사) 손에서 자랐다.”
ⓒ연합뉴스 1959년 2월 조봉암 선생은 간첩죄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사진은 1958년 10월 ‘진보당 사건’ 재판정의 조봉암 선생(맨 왼쪽).
조봉암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때 손가락 7개를 잃었다. 7년 동안 복역하다 1939년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수세에 몰린 일제는 1945년 초부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전력자들을 예비검속해 헌병대 감옥에 가뒀다. 딸 조호정은 아버지가 석방되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해 1월 끌려간 아버지는 해방된 다음 날인 8월16일 풀려났다. 그날 몽양 여운형 선생이 몸소 찾아와 출소하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광복 직후 조봉암은 인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과거 조선공산당 활동을 함께한 동지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과 결별을 선언한다. 조봉암은 1948년 인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 의원에 당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민이었고, 이 가운데 80%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주창한 남로당계에 동조했다. 조봉암의 평소 지론은,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이었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은 전문가 30여 명으로 ‘농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농지개혁법 기초를 마련했다. 지주에게 불리하고 소작농에게 유리한 농지개혁법이 현실로 다가오자, 지주계급이 주축이던 한민당의 반감이 극심했다. “농지개혁법 초안을 마련한 뒤 아버지는 한민당계가 장악한 감찰위원회로부터 보복을 당했다. 장관 관사 수리비에 공금을 사용한 것을 비위 행위라고 몰아세웠다. 결국 6개월 만에 농림부 장관직에서 물러나셨다.”
조봉암은 1950년 5월 2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한 뒤 장택상과 함께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이 무렵 대학을 졸업한 조호정은 아버지 선거를 도운 뒤 국회부의장실에 비서로 들어갔다. “장택상 부의장 비서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어서 비서끼리 만난 적도 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청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아버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소용없었다.”
조봉암은 1952년 무소속으로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당시 이승만 후보는 500만 표를, 조봉암 후보는 80만 표를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승만 대통령 세력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는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출마했다. 딸 조호정도 아버지 대선 유세를 적극 도왔다. 노골적인 부정 행위가 판친 선거였지만 조봉암은 득표율 24%에 216만 표를 얻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3선에 도전해 개표 부정까지 일삼던 이승만 후보는 504만 표를 얻었다. 대선 패배 후 조봉암은 수탈 없는 경제, 책임정치, 평화통일 등 3대 정강정책을 내걸고 진보당 창당에 매진했다.
북진통일 대신 평화통일을 내건 조봉암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 대통령은 1956년 8월28일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임이 틀림없다. 이런 위험분자는 제거돼야 할 것이다”라고 훈시했다.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이 시작됐다.
징역 5년 선고한 1심 재판관 재임용에서 탈락
1958년 1월 초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 전원에 대해 검거령을 내렸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조봉암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그해 2월 이승만은 진보당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정권은 평화통일론만으로는 형사처벌이 어렵자, 공작에 나선다. 육군첩보부대(HID) 소속 공작원 양명산을 내세워 죽산에게 접근했다. 양명산이 남북을 오가며 김일성과 조봉암을 연결했다는 것이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양명산 아저씨는 아버지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때부터 재정 후원을 하던 사업가”로 조호정은 기억한다.
조봉암 사건 1심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 등이 북의 지령을 받고 이에 호응했다거나 간첩과 밀회했다는 등의 공소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라며 간첩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유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만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유 판사는 이 판결로 미운털이 박혀 그해 말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 2심 재판에서는 핵심 증인 양명산이 법정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특무대에 불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조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조봉암이 간첩 행위를 했다고 허위 진술했다”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2심 재판부는 양명산의 진술 번복을 이유 없다며 배척했다.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2월 간첩죄로 사형 확정판결이 났다.
같은 해 7월31일 조봉암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대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책임정치, 수탈 없는 경제, 평화통일 이 세 가지를 주장한 죄밖에 없소.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이 세상에서 골고루 잘 살고자 한 일인데 이렇게 가니 미안할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이원규, <조봉암 평전>).”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붕괴됐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한탄밖에 안 나오더라. 아버지 재판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조호정은 순리대로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질 줄로 믿었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죽산 가족을 연좌제의 고리에 얽어맸다. 유가족에겐 항상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다. 특히 조호정 여사의 남편 이봉래 영화감독에 대한 당국의 감시는 극심했다. 이씨는 군사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한국예총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유가족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진 때는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였다. 노태우 정권 시절, 처음으로 조봉암에 대한 복권 여론도 일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조비오 신부,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 강원룡 목사, 이수성 전 총리 등이 나서서 조봉암 사면 복권을 청원했다. 그러나 매번 재심의 문턱에 걸렸다. 유가족과 죽산을 추모하는 이들은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를 꾸렸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 재조사 신청서를 접수했다. 진화위는 2007년 9월 결과를 발표했다. “진보당 사건은 1956년 대선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 정치인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가 작용해 처형에 이르게 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이었다.”
진화위는 국가의 사과와 적절한 조처 외에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2011년 재심에서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확정하면서 50여 년 만에 사법적 명예회복이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진화위가 권고한 적절한 명예회복 조처(건국훈장 추서)와 독립유공자 인정 등은 아직 요원하다. 죽산의 유가족이 바라는 온전한 명예회복도 바로 이것이다. 무죄판결 이후에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권고를 철저히 외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31일 죽산 기일에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모 화환을 보냈다. 2018년 59주기에도 대통령 추모 화환이 놓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에 ‘난색’
하지만 서훈심사 주무 부서인 국가보훈처는 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제 말기 국방헌금 납부 등 행적 불분명’이라는 이유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41년 12월23일자의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라는 기사가 근거였다. 유가족은 펄쩍 뛴다. “7년형을 살고 나온 아버지에겐 당시 그런 큰돈이 없었다. 주소도 다르다. 아버지는 당시 일제에 골치 아프고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정말 그런 돈을 냈으면 총독부에서 대서특필하고 죽산을 크게 이용했을 거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보완하는 자료를 추가 제출하면 서훈 심사를 다시 할 수 있다”라고 여지를 남겼다.
올해 아흔한 살, 평생 아버지의 신원을 위해 뛰어온 조호정 여사는 죽산 서거 60주년을 맞아 간절한 염원을 내비치면서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올까. 아버지의 명예가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채 이대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거 같다.”
2019년 01월 25일(금) 제592호
'죽산 조봉암' 선생 비서 김제영 선생 별세
7일 영결식... 소설가·미술인·언론인으로 활동
▲ 김제영 선생의 영결식이 지난 7일 열렸다. 고인은 지난 4일 오후 9시 30분 향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사진은 지난 7월 31일, 서울 망우리 묘역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59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헌화 후 흐느끼고 있는 고인의 모습. ⓒ 심규상
죽산 조봉암 선생의 비서이자 소설가·미술인·언론인으로 활동해온 김제영 선생의 영결식이 지난 7일 열렸다. 고인은 지난 4일 오후 9시 30분 향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고 김제영 선생은 1946년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죽산 조봉암 선생이 농림부 장관으로 일하던 당시 비서로 활동했다.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석려)로 등단 등단한 뒤 민국일보 기자, ‘무용한국’ 편집고문, ‘월간음악 객원’ 편집인, ‘미술21’ 편집고문, ‘미술세계’ 객원편집인 등을 역임했다. 특히 그가 남긴 단편소설 ‘역전소묘’는 1960년대 조치원역을 배경으로 서민의 삶을 깊이 있게 다뤘다.고 김제영 선생은 영명학교 교사로 일하다 ‘공주읍내장에서 3.1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관회 선생(당시 33세)의 딸이다. 부친인 김관회 선생은 3.1만세 시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오마이뉴스 18. 12.8
보수단체 “맥아더 동상 수호, 조봉암 건립 반대”
자유공원서 국가안보결의대회
보수단체 맥아더장군동상보존시민연대는 24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맥아더장군 동상 보존과 국가 안보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인천지역 황해도민회 등 보수단체로 구성된 맥아더장군동상보존시민연대는 24일 중구 자유공원에서 ‘제15차 국가안보결의대회’를 개최하고 조봉암 동상 건립을 저지하겠다고 나섰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황해도민회 회원 등 2천500여 명이 참석해 ‘맥아더 동상 수호와 조봉암 동상 건립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구호를 외쳤다. 이 자리에서 류청영 황해도민회 인천지구 회장은 “맥아더 동상은 자유수호를 위해 싸우다가 숨진 병사들을 기리는 중요한 건축물이자 상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이 동상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잘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한미군이 있어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공산당을 만들었던 조봉암 동상 건립을 결사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이날 보수단체와 진보단체 간 충돌에 대비해 집회장소에 2개 중대를 배치했다. 앞서 23일 반미성향 단체인 평화협정운동본부는 맥아더 동상 옆에서 헝겊 더미에 불을 지르고 ‘신식민지체제 지긋지긋하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 단체 상임대표는 7월에도 동상에 불을 질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바 있다. 경기 18.10.24
죽산 조봉암 평전 김삼웅 저 | 시대의창 | 2010년 01월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
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김근태 평전』, 『독부 이승만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나는 박열이다』, 『박정희 평전』, 『신영복 평전』 등이 있다. 최근의 저서로는 『현민 유진오 평전』이 있다
조봉암의 삶은 암울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시기에 3.1운동 주동자로 지목돼 1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민족과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조봉암이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모체인 화요회에 뒤늦게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으나 해방 이후 과격 공산주의운동과 결별한 조봉암은 분단정부에 참여해 제헌의원에 당선되고 아울러 이승만 내각에서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된다. 하지만 제2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이승만과 대립하게 되고 노골적인 이승만 정부의 탄압 그리고 보수 야당의 견제 등으로 힘겨운 길을 걷다 진보당 창당과 진보당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고 만다.
제1장 사법살인 당한 독립운동가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
용공의 너울
서대문 형무소의 ‘봉암새’와 ‘죽산조’
평화통일론의 탄압
서대문 형무소의 모범 사형수
마지막 순간
제2장 불우한 젊은 날 그리고 3.1운동
민족 수난의 현장 강화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진학 포기와 교회 생활
3.1운동에 참여
옥중에서 외친 만세
서울로 상경, YMCA 중학부 입학
제3장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사상에 심취
호랑이 굴, 일본
사상의 홍수에 빠져들어
아나키즘에 이어 사회주의사상에 경도
의식의 변화 겪고 귀국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유학
폐결핵 앓고 일본 거쳐 귀국
제4장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
사회주의 단체의 확산과 분열
조선공산당의 모체와 화요회
사회주의 동지 김조이와 결혼
전국순회강연 연사로 활동
민중 중심의 사회운동 노선 추구
조선공산당 창당에 적극 참여
한때 신문기자로 활동
신의주사건
제5장 해외 망명, 국제공산주의와 연대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 전개
국내세력과의 마찰
종파주의자라는 오명
상해 한인 반제동맹 결성
옛 애인과 재회
제6장 피체와 투옥
상해에서 피체
국내로 압송돼 1년간 혹독한 수사받아
신의주 법원에서 7년형 선고
고난의 감옥살이
인천에 정착
조봉암의 전향 의혹
제7장 해방정국, 공산당을 떠나다
해방 앞두고 예비검속 당해
해방과 함께 다시 인천으로
과격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회의
공산독재와의 몌별 선언
‘친애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제8장 본격적인 정치활동
일체의 계급독재·자본독재 부정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민주주의독립전선 창립 주도
분단정부에 참여, 제헌의원 당선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
초대 농림부장관에 발탁
농림부장관 발탁 배경에 대한 몇 가지 설
농지개혁방안 마련
한민당의 공격
제9장 정치인으로 부상 그리고 대선 출마
국회부의장으로 선출
전쟁 일어나자 주요자료 챙겨 피난
전쟁 중에 이승만 적극 지원
이승만, 재선 위해 정치파동 일으켜
발췌개헌안 지지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대선 패배와 민국당과의 대립
제10장 보수야당, 붉은 딱지 붙여 참여 배제
휴전협정 체결과 굳혀진 냉전체제
제3대 민의원 선거 등록 방해
신당창당운동에 참여
신당 참여를 둘러싼 갈등
조봉암의 신당 참여 배제
북진통일론 대응 못한 민주당의 한계
제11장 이승만과 사활을 건 대결
진보당의 모태 ‘광릉회합’
간부 선정, 취지문·강령 채택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운동
후보 단일화에 대한 유연한 태도
신익희로 단일 후보 원칙 합의
해공 서거와 신변의 위협
잠적 그리고 대통령 선거
득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다
제12장 혁신정당 진보당 창당
혁신정당 대동단합의 분위기
혁신정당의 조봉암 배제
진보당 창당대회
이례적인 ‘묵념시’ 낭독
개회사에 담긴 조봉암의 신조
자유민주체제 내외에 과시
진보당의 혁신정책
북한에 ‘전한국위원회’ 구성 등 제의
지구당 창당에 대한 탄압
제13장 조작된 진보당사건
권력욕의 제물이 되다
지방당 결성에 폭압적 탄압
조봉암 제거 음모
날조된 검찰의 기소내용
진보당 간부에 대한 혹독한 고문
의문의 인물, 양명산의 정체
변호인단, 날조사실 밝혀내
끊임없는 조작
정치재판으로 변질
이승만의 노골적인 재판 관여
사형 선고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
제14장 구명운동 그리고 평가
조봉암 구명을 위한 노력
“비루한 구명운동은 말아달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명예회복
부록
- 구명운동과 추도문
- 조봉암에 대한 평가
- 조봉암 선생 연보
권력욕의 제물이 된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
2009년 7월 31일은 죽산 조봉암 선생이 처형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여당과 야당은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며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을 촉구했고 언론 역시 그 어느 해보다 조봉암의 50주기를 관심 있게 보도했다. 조봉암 50주기를 떠나 한국현대사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는 조봉암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산 조봉암은 한국현대사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이승만과 여기에 기생하는 검찰·법조인 등 기득권 세력들은 용공좌경의 딱지를 붙여 조봉암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법은 1950년대에서 끝나지 않고 박정희, 전두환 시대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저자는 서문에서 “5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통일은커녕 평화가 심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라고 말한다. 즉 조봉암에 대한 정치보복이 이후 ‘한국현대사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죽산 조봉암 평전』은 바로 이 ‘시작점’을 다룬 책이다.
오는 7월은 죽산 선생이 돌아가신지 50주년이 됩니다.
제가 평전에서 열거한 대로 그는 애국자이고 반공주의자이며 평화통일론자입니다. 때론 권력과 타협하기도 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이 땅의 민중을 아꼈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은 ‘평화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열매는 후대에 맡긴다고 말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통일은커녕 평화가 심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역사는 시간을 따라 흘러오지만 역사의식은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사법살인’되거나 ‘권ㆍ검ㆍ언 합작 살인’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권리는 스스로 지키는 힘이 없으면 빼앗기게 된다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이 교훈이라면 교훈입니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죽산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그의 시련에 찬 항일운동을 평가하고, 사법부는 부끄러운 선배들의 죄상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재심청구를 통해 ‘사법’의 올가미를 벗겨주었으면 합니다.
심포지엄 지상중계/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길
- 죽산 조봉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죽산 조봉암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어 오던 현실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행사는 죽산에 대한 최초의 공개 행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민의 정부라는 현정부의 대북 햇볕정책 혹은 대북포용정책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동서간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된지 10여년만에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내에서 금기시되어 오던 한 인물의 역사적 재평가 내지는 학문적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59년 7월 31일 자신의 환갑을 불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상태에서 제1공화국에서 함께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조봉암의 사망 주기 역시 올해로 4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의 묘지는 서울의 동쪽 끝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데 현재까지도 그의 묘비에는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岩先生之墓)'란 비문만 새겨 있을 뿐 그의 행장(行狀)이나 사망일, 탄생일 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묘지에서 바라보면 언덕 아래로 한강이 굽이쳐 그의 고향인 강화와 황해에 이른다. 그러나 조봉암의 묘지가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반쪽이자 냉전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북한의 평양직할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는 시신없는 그의 묘가 하나 더 있다. 애국열사릉이란 북한이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가와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던 중요인물 250명의 묘와 묘비를 만들어놓은 곳이다. 그곳엔 조봉암 이외에도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벽초(碧初) 홍명희(洪命喜), 백남운(白南雲) 등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고르디오스의 매듭 같은 우리 역사 속에서 그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가 남과 북으로 갈려 진행되어 온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식민지하의 근대사와 해방정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단되어왔다. 편협한 방식으로 기술되거나 아예 그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그 자체가 냉전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전장(戰場)으로 남아있는 우리 한반도에 해빙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조봉암을 기억하는 사람들
심포지엄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부는 죽산에 대한 추모시 낭송 등 그를 기리는 자리였고, 2부는 강만길, 김학준, 조영건 교수의 논문 발표, 3부는 이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심포지엄의 주최측으로 인사말을 한 주비위원회 신창균 대표는 항일독립의 혁명투사이자 건국의 공로자였던 죽산을 기리고 그를 희생시켜야 했던 민족적 과오를 반성하자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학술 토론회를 5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나 시기의 성숙을 기다려야했다는 경과보고를 통해 조봉암이란 한 인물이 역사적으로 복원되기에 앞으로도 얼마나 더 먼길을 가야할지 느껴졌다. 뒤이어 이강훈 전(前)광복회 회장, 백범의 수행비서로 평양에 다녀왔고 죽산과 진보당 활동을 했던 심창균, 제2건국위 상임의장인 변형윤 교수 등의 축사와 기념사가 이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이들의 기념사와 축사를 들으며 느낀 소회(所懷)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말이었다.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들이 그들의 벅찬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순간 장내는 숙연해졌다.
죽산은 생전에 1남3녀를 두었는데 그의 첫 부인 김이옥은 죽산이 상해에 있는 동안 함께 지냈고 첫 아이를 상해에서 얻어 상해의 고명(古名)인 호( )를 따 이름을 호정이라 지었다. 그 후 김이옥은 죽산이 신의주 감옥에 있을 때 병사했다. 행사는 유가족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심포지엄 행사로 진행되었다.
현대사 속에서의 조봉암 재조명
심포지엄 사회를 맡은 최상용(崔相龍: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개회에 앞서 이번 학술토론회를 조봉암에 대해 공개적인 행사로는 최초로 행해지는 대단히 역사적인 자리라고 자평했다. 1부 행사가 추모 분위기의 다소 들뜬 분위기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교수는 "먼저 이런 토론회는 기념사업회 보다는 학자들의 모임인 학회가 주최를 해야 더욱 객관적인 것이 될 터인데 우리 나라의 많은 학회가 아직도 이런 학술회의를 할만한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유감" 이라며 말문을 열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강 교수는 해방 후 민족사회가 분단됨으로서 남쪽에서는 좌익노선이 북쪽에서는 우익노선이 그 역사적 위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런 경향은 6.25 전쟁 후 더욱 심화되어 갔으나 최근의 추세는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좌우익 통일전선 노선이 새롭게 발굴되고 주목되어 그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가고 있는 중" 이라고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을 전했다.
일제 강점시대의 활동에 대한 재조명
조봉암은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해외활동, 그 중 특히 코민테른에서의 활동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에 참가했으며 그때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카우트브(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일제 강점시대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한 것은 코민테른의 노선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로 첫째 유럽사회주의 운동에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조건에서의 통일전선은 비타협적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협동전선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발달이 늦은, 따라서 노동자 . 농민의 양적 . 질적 . 계급적 성장이 늦은 일제 강제 지배 아래서의 조선의 경우,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자와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이 지향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임시정부가 침체되고 민족세력의 우파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돌아선 192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 관내지역을 시작으로 좌우합작의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어 만주지역에서는 참의부 등 3부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강 교수는 1920년대 후반기 조봉암이 상해에 있는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대표로 있었다면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최좌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그가 이 시기에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자문했다.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강 교수는 첫째 1920년대 코민테른 노선이 아시아지역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사례의 경우 중국 국공합작노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세력만의 민족해방운동이 아닌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을 지향했고, 조봉암의 경우 이 같은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둘째 정태영이 지적한 것과 같이 "조봉암은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했지만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를 전후해서 여운형과 같은 민족노선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강만길 교수의 지적 중 두 번째 이유가 좀더 타당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경우 국공합작 노선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독자노선에 가깝고 코민테른의 경우엔 오히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거나 이삼립(李三立)주의를 지지하는 등의 판단착오를 빈번하게 일으키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코민테른이 당시 일제 강점하의 조선에 대해 바른 정세판단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런 이유들이 죽산이 후에 공산당을 이탈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 교수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사실상 와해된 후 조봉암이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1932년 9월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7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의 활동은 일단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때 체험은 후일 해방 정국에서 미 . 소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좌 . 우익으로 분열되어 우익은 극우화되고 좌익은 극좌화되는 상황에서 중도 내지 제3전선을 형성하여 통일민족국가 수립노선으로 나아가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공산당에서 이탈하는 과정에 대한 재조명
죽산이 공산당에서 이탈하는 과정에 대해서 강만길 교수는 조봉암의 글을 인용하여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 . 1운동 이후로 많이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독립을 위한 사회주의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을 불고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서두를 열었다.
해방 직후 조봉암의 정치적 견해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는 「존경하는 박헌영동무에게」가 있는데 해방 전 이미 중국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바있는 죽산이 해방 직후 공산당 활동보다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좌익중심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활동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1945년 1월에 일본헌병사령부에 검거되었던 조봉암은 8.15해방까지 감옥에 있었다. 위의 글에서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공산당원이 다수를 차지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박헌영의 시도를 비판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잘된 줄 아오 마는 역시 통일전선으로서는 너무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원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보오. ......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 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되오"-결국 1946년 6월 출당 처분을 받게 된다. 그는 출당 처분을 받기 전까지 공산당 인천지구당 위원장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구 의장을 지냈다.
이후 1946년 6월 11일 인천의 미군방첩부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다음날인 23일 인천에서 여운형, 이강국, 김원봉, 성주식 등이 참가한 '미소공위 촉진 시민대회'가 열렸고 죽산은 이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조봉암은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공산당과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데 이후 여운형 등이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공산당이 독점하게 되고 통일전선체적 성격을 잃게 된다.
강 교수는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지 반세기가 된 지금에 와서야 '해방공간'에서의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노선이 옳았는가 아니면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노선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를 조금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38선이 확정되고 미 . 소 양군이 분할점령 한 현실적 조건 아래서 남북을 통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은 대외적으로는 친미반소노선도 아니며 반대로 친소반미노선도 아닌 국가가 될 수밖에 없으며 대내적으로도 순수 자본주의체제도 아니고 순수 사회주주의 체제도 아닌 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조봉암의 공산당 이탈에 대한 요인은 해방 이전부터 싹터왔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공산당 내부의 역학 관계가 작용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현실적 방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미 . 소 양국이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좌익 세력이 극좌화하고, 우익 세력이 극우화하는 대립 상황에서 어느 한 쪽 일방의 주도에 의한 통일국가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밑받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실제로 조봉암이 쓴 「평화통일에의 길」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6.25전쟁 후 불과 3년만에 진보당을 창당하면서 '평화통일론'을 다시 공론화하여 그것이 정착되는 단초를 열었던 것이 결국엔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선 . 단정 참가 과정에 대한 재조명과 조봉암에 대한 평가
강 교수는 공산당을 떠나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을 펴던 조봉암이 남한 단독정권에 참여한 일에 대해 후대의 해석이 두 갈래로 나왔는데, "그 중 하나는 정태영의 것으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들이 남한 단독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출현을 방지하는 동시에 보수적 반동이 아닌 혁신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와 혁신의 연립정권이 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좌우합작운동이 왜 실패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박태균의 것으로 "조봉암은 단정 수립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후 그의 정치활동에 오점으로 활동을 제약했다는 주장"에 대해 강 교수는 미군정에 뒤이어 친일 경찰과 관료층 등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 문제에 큰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참가했던 조봉암이 이승만 단독정권에 참여함으로서 그 정권의 명분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석했다. 결국 공산당을 이탈한 조봉암으로서는 북쪽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남쪽에서 한독당의 김구나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등과 행동을 같이 할 상황이 못 되었던 터라 정치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김약수 등 일부 온건좌파세력과 함께 결국 단선단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서 조봉암의 업적은 그의 대통령 선거 출마와 진보당 결성을 통해 뚜렷한 것이 되었고, 남북분단과 6.25전쟁을 통해 흩어졌던 중도파 세력 및 온건좌파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민주주의 노선 세력으로 발전시킨 일이며 동란 이후 이적론(利敵論)으로 간주되었던 평화통일론을 다시 공론화했다는 데 있다며 말을 마쳤다.
죽산 평화통일론의 재조명
김학준(인천대 총장, 정치학) 교수는 '진보당 평화통일노선의 재평가'와 '조봉암의 정치이념의 형성과정 및 내용과 관련하여'란 소주제를 가지고 발제하였다. 그는 먼저 죽산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에 대해서 "1959년에 '북한간첩'으로 처형된 그와 1958년에 불법화된 진보당은 지난 날 냉전체제적 제약 아래서 자연히 객관적 연구 대상으로 금기시됐기에 오직 그와 진보당에 대해 비판적인 책만이 출판될 수 있었거나 외국에서의 학위논문"에서만 다뤄질 수 있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해빙 무드를 타고 진행되어 온 그에 대한 연구를 정리했다.
일제 치하에서의 독립운동 또는 공산주의 운동
김 교수는 죽산의 이념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전기(轉機)로 그가 스무살 무렵이던 1919년에 일어난 3 . 1 만세운동을 주목하고, 죽산이 강화에서 3 . 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1년 동안 투옥된 시기가 그를 항일민족운동의 투사로 변모시켰다고 말한다. 그 후 그는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가 YMCA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곧바로 일경에 체포되어 2차 투옥 된다.
1921년 조봉암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경으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김학준 교수는 죽산의 동경 생활은 그의 이념 형성에 김찬(金燦)을 비롯한 항일 투사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 서클을 조직하게 된 것과 광범위한 독서 가운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이후 그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죽산은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으나 아나키즘은 현존 체제의 파괴만을 염두에 두는데 반해 볼셰비즘은 현존 체제의 파괴 이후 사회주의의 건설을 지향한다는데 착안하여 볼셰비즘에 기울게 된다.
김 교수는 죽산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혁명가들이 볼셰비키였다는 사실과 그들이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조선 혁명가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죽산은 '사회주의 혁명가이며 독립을 위한 실제적인 일꾼'을 자처하며 국내는 물론 소련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연락하는 가운데 항일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국내 사회주의 운동 또는 공산주의 운동은 여러 갈래로 펼쳐지고 있었는데 코민테른은 1국 1당의 원칙을 앞세워 이들의 통합을 유도했다. 부하린(Bukharin)등이 중재하려 했으나 각 파벌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였을 뿐 실질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봉암은 1923년 9월말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라는 합법적 지위를 확보한 뒤 김찬 및 김재봉(金在鳳) 등과 손을 잡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동문수학한 박헌영을 휘하에 두고 기존의 사회주의 계열 서클들 및 단체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김 교수는 이 시기 조봉암의 조직 통합작업 중에 적지 않은 적을 만들게 되고 이는 이후 그가 활동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조봉암의 국내외적 위상에 대해서 김 교수는 1925년에 창당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의 두 조직 모두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조봉암과 김찬 두 사람뿐이었다는 점, 죽산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코민테른 승인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할 무렵 코민테른 극동국 중국위원이 중국공산당 초대당수인 진독수(陣獨秀)였고, 극동국 일본위원이 일본공산당 창당원이었고 이론지도자인 사노마나부(佐野學)이였음을 고려할 때 조선 공산주의 운동계에서 그가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자전을 인용하여 그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였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였다고 회고하면서 "내 나라 내 겨레는 잊어버린 채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와 이유에 대해 죽산이 신의주에서 7년간 투옥된 시기였다는 주장(曹敏;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죽산이 코민테른 노선과 볼세비즘 노선에 대해 회의를 점점 더 많이 품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정치활동
김 교수는 전후의 냉전질서가 만들어낸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조봉암의 정치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방과 동시에 남한 정계에 가장 먼저 등장한 지도자는 죽산과 상해에서 함께 일하는 등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일부 이양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하고 전국 각처에 인민위원회 또는 치안유지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건준에 침투하여 이 기구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런 인공에 참가하지 않고 인천으로 내려와 인천치안유지회를 조직하여 인천의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치안유지에만 힘썼다. 김 교수는 이런 사실들이 "조봉암이 여운형의 노선에는 찬동했으나 공산주의운동과는 이미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 죽산은 1941년 출옥이후 해방되기 까지 4년간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던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조봉암이 1945년 1월에 일본헌병사령부에 재검거되어 8.15해방 때까지 감옥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여 모종의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거나 또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 같다.
김 교수는 조봉암이 그가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게 된 이유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반대대회를 열어놓고 신탁통치 찬성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혀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다고 말한 조봉암의 회고를 빌어 이런 시점(1946년 3월 무렵)에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사신을 쓰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사신은 뒷날 미군 방첩대(CIC)에 빼앗기게 됐고 일부 신문에 의해 1946년 5월 7일 게재된다. 이 사신에서 조봉암은 "나 자신이 좋은 볼셰비키가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사신이 공개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조선공산당원이므로 당이 어떤 제재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조봉암은 그 후 40여일 이 지난 1946년 6월 23일에 각 신문에 「공산당과 그 지도 아래 있는 모든 정치활동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해서 공산주의와는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 시기의 조봉암이 공산주의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흔히 공산당에서 이탈한 다른 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위의 성명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죽산의 사상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가 공산주의를 부인하기는 했으나 '민주의원의 독점 정부'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소 의존 일변도의 노선을 배격했지만 연합국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소련을 의식하고 건국을 위해 소련과 협력해야 할 것은 협력해야 한다는 믿음을 표시했고, 그 스스로는 이런 모습을 '사상적 성숙' 또는 '이념적 발전'이라고 표현하고 '전향'으로 말해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조봉암이 공산주의를 버린 후 참여한 정치운동은 좌우합작운동에서 시작해 민전으로 이어졌고 민족자주연맹으로 귀결됐다. 이 세 운동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궤 위에 있는데 그것은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중간노선이었다.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중간노선을 바탕으로 그는 '비미비소(非美非蘇)의 민족자주노선'을 걷는 정당을 창당하려 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정 아래서의 정치활동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고, 조봉암은 6월 1일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우익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무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6 . 1구락부와 비슷한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의 결집체인 민우(民友)구락부를 통합시켜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한다. 당시 무소속 구락부에 속한 의원은 72명으로 이것은 제헌의회 의원 207명 가운데 3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김 교수는 조봉암이 당시 원내 세력을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눴는데 미 . 소 양군 철수와 남북협상에 의한 남북통일 이전에 정부를 세우는 데 반대하는 제1그룹, 미국과 국제연합 및 이해 당사국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제2그룹, 내전이 일어나건 말건 즉각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제3그룹이 그것이었다. 조봉암은 제1그룹은 극소수이고 한민당 계열이 제3그룹, 자신이 속한 무소속구락부는 제2그룹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무소속구락부는 그가 해방 이후부터 계속 추진해온 중간정당의 출범 기반이 될만했으나 정부 출범 이후 정파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무소속 구락부는 해체되고 만다.
김 교수는 정부수립 전후의 정치 정세를 조봉암의 말을 빌어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제1공화정 당시의 통일관은 통일이라는 목적을 절대시하고 당위시하는 주장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이 어떤 타협과 절충을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그 윤리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적인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김 교수는 당시의 이런 통일지상론의 의식 바탕에는 첫째, 남북한의 상호보완성. 남한은 농경지대이고 북한은 공업지대이므로 남북한이 통일함으로써 상호보완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북한 주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자유십자군적 인식. 북한은 악마가 지배하는 곳인 만큼 굶주림과 학정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을 하루빨리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다. 셋째, 월남민(越南民)들의 애향심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데 이런 통일론은 북한부인론(北韓否認論)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설명한다.
당시의 국민 의식은 북한 정권이 소련의 위성국가이며 괴뢰도당이므로 북한의 정치적 실체는 전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80년대 초까지 이런 식의 사고는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진보당은 창당선언문에서 "민주적 국토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것"을 다짐한 데 이어 강령을 통해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 통일의 실현을 기한다"고 선언했고, 정책을 통해서는 "대한민국 주권 하에 유엔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학준 교수는 당시는 불온하게 여겨졌던 진보당의 이런 평화통일론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경험적 자료들은 거의 발견하기 힘들지만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평화통일론을 비롯한 혁신적 정책들을 표방하고 출마한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조봉암이 무려 2백16만 3천8백8표를 얻음으로써 유효 투표의 22.5%를 차지했다는 것은 평화통일론이 국민들 사이에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징표로 풀이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진보당이 표방한 평화통일론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론인 무력통일론과는 정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근저에는 북한을 대하는 인식의 태도 차이가 깔려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국제연합의 뒷받침 아래 탄생한 대한민국은 자신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국가이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반(反)국가단체라는 법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입장의 대한민국에서 남 . 북한의 통일이란 결국 반국가 단체가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북한 지역을 해방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반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때마침 강대국들의 평화적 공존 분위기와 함께 남 . 북 관계의 평화적 공존의 길을 찾으려는 모색"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58년 당시 검찰이 조봉암을 기소할 때 "우선 북한 괴뢰 집단이 서기 1954년 4월 24일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남 . 북한의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을 보면 ...."으로 시작하는 공소장을 살펴보면 진보당과 죽산의 이런 평화통일론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하고 있다. 법원은 정부당국의 이런 주장을 면밀히 검토하고 위헌성 여부를 살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 교수는 조봉암의 평화통일 노선은 민족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이념과 투쟁 경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노선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평화적이면서 민주적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담은 선각자적 노선으로 냉전적 대결구도의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고 평가하며 이는 뒷날 역대정권이 모두 그의 평화통일 노선을 뒤따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표현을 빌려 조봉암을 "세계 역사상 공통적으로 나타난 선두주자에게 가해지는 매"를 맞은 사례라고 말하며 그는 결코 '이념의 인간'이 아니었으며 '행동의 인간'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죽산 사상과 개혁론 재조명
조영건(曺永建. 경남대) 교수는 죽산의 생애와 그의 사상 형성에 관한 발제에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했던 에릭 흡스봄(Eric Hobsbawm)의 말로 극우와 극좌 양쪽을 다 배제하고 중도의 길을 걸으려 했던 조봉암이 살아야 했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죽산이 스스로의 일생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자전해놓은 것으로는 「내가 걸어온 길」(1957년 『희망』 2,3,5,월호)과 「나의 정치백서 -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신태양』 1957년 5월호 별책)이 있다. 조 교수 역시 이 두 자료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인간 죽산과 그의 사상
1899년 9월 25일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난 죽산의 6-7살 무렵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해오는 시기였다. 1904년엔 러 . 일 전쟁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인 1905년엔 제2차 한일협약 일명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강화군청 고용원으로 면서기, 대서보조원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3 . 1 만세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조 교수는 이 시기의 죽산에게 고향과 지역공동체는 그의 인간적 성장과 사상적 태동을 위한 넉넉한 보금자리였으며 죽산이 열살 무렵에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1959년 7월 31일, 그 전날의 재심기각이 있고서 하루만에 전격적인 사형집행 직전 조봉암은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아라 한데 ...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를 읽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죽산에게 사형선고가 내리자 그는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는 말로써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초월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죽산 사상의 제1기는 죽산사상의 맹아기로 당시 시대상황의 요구에 부응하는 안티 테제로서의 사회주의 사상,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적의한 수단으로서 혁명적 실천론이었다면 제2기는 죽산 사상의 성숙과 심화기로, 제3기인 죽산 사상의 완성기는 건국과정과 분단 지양의 통일과정 그리고 수구와 시폐(時弊)를 혁파하는 시기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봉암에 대한 앞서 강만길 교수와 김학준 교수의 발제와는 달리 인간 조봉암에 대한 논의가 주조를 이루는 관계로 조영건 교수의 발제는 다소 격한 감이 있었다. 조봉암이 3 . 1 만세운동을 겪으며 사상적 전기를 마련하고 동경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긴 했으나 그 무렵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조봉암 역시 사회주의 그 자체를 위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조 교수의 주장이었다. 조 교수는 "이데올로기는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고 당시 동아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와 변혁론은 공산주의의 기계론적 투입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그런 점에서 조봉암이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조 교수는 죽산 개혁론의 실체를 실학에서 찾고 죽산 개혁론의 요체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이며 이런 그의 개혁론은 사상의 진화와 객관적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이 채워지며 연속적으로 발전하여 1950년대 의회활동과 대선과정에서 표출되었다고 말한다. 끝으로 조영건 교수는 오늘날 죽산이 남겨준 유산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4월 혁명의 테제 자주, 민주, 통일의 종국적 완성의 대도(大道)를 그어주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주의, 개혁, 사회진보의 대도를 그어주는 것이라고 보고, 그것은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의 우리 민족사회의 현대적 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임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마치며
강만길 교수의 발제에 대한 토론자로 박태균(朴泰均, 서울대 강사)과 유재일(劉載一. 대전대) 교수, 김학준 교수의 토론자로 이문승(李文勝. 연합통신 전 논설위원 고문)과 조민(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조영건 교수의 토론자로 유종완(柳鍾完. 전북대 명예교수, 한국사회경제학회 명예회장), 김진균(金晉均.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이 나섰다. 발제가 끝나고 이에 대한 종합토론이 이루어졌으나 지면관계상 모두 수록하기 어려운 관계로 다음 기회를 기약해본다.
이번의 심포지엄은 조봉암 사후 최초로 행해진 공개적 행사라는 측면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몇 가지 점에서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우선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넘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과 앞서 강만길 교수도 지적했듯이 학회에 의해 진행되지 못하여 객관적인 연구성과를 토론하는 분위기보다는 추모 분위기에 휩쓸린 느낌이 그것이다. 조봉암이 제1공화정에 참여하여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며 기초를 다진 주요 성과인 토지개혁은 6.25 전쟁 중 농민의 좌경화를 막은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토론이 부족했던 점과 조봉암의 죽음과 관련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의 부족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이제는 돈만 있다면 금강산의 비경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남북한 분위기로는 통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을 보면서 느낀 것은 통일에 대한 준비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 아니라 학문적 영역, 역사적 영역 등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통일이란 것의 사전적 의미가 "나누어진 것들을 몰아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만듦"이란 뜻이 맞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통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둘로 나뉜 민족의 운명이 하나의 역사 안에 채워지기에는 아직도 비어있는 공간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망우리 공동묘지의 조봉암 묘역임을 표시하는 비석에 새겨진 그의 말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대의를 위해 싸운 이들을 너무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1999년 여름(23)호 계간 『황해문화』
내가 걸어온 길 조봉암
* 이 글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월, 3월, 5월호에 조봉암 선생이 직접 연재했던 자서전이다. 어린시절부터 1930년대 7년간의 수형생활 장면까지 서술되다가 중단되었지만 사료적 가치는 높다. (편집자 주)
구차한 집 차남으로!
나는 강화도 남쪽 선원면이라는 촌에서 나서 강화읍에서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살대 독자이신데 우리는 사남매 중에 삼형제이다. 나는 그 둘째 아들이다. 내 애명은 세 봉(鳳)자 봉암인데 중간에 받들 봉(奉)자 봉암으로 행세했다.
원래는 빛날 환(煥)자가 소위 돌림자인세 우리 삼형제는 바위 암자 돌림이다. 어째 그리 된고 하니 내 맏형 위로 두 아들을 잃으신 우리 부모님께서는 셋째로 얻은 아들의 명이 길라고 바위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차마 바위라고 부르시기는 부끄러우셨던지 목숨 수자 수암이라고 부르셨다. 그 다음 나를 나으실 때는 꿈에 봉을 보셨으니 새 봉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으라는 어머님의 명령으로 형이 수암이니까 봉암이라고 했고, 내 아우는 용을 보셨다 해서 용암이라고 부르고 보니 암자 항렬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집은 구차하기는 해도 평화스러웠다. 어머니는 좀 사나우신 편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거의 절대적인 평화주의자 이셨다. 그저 착하기만 하셔서 집안사람에게나 동리 사람에게나 도무지 남과 시비를 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그 덕분으로 나는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기는 해도 마음에 구김살 없이 의젓하게 자랐다.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는 공부할 것은 단념해 버리고 열네 살 때부터 직업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6년제 학교라고 다니기는 했는데 성적을 결코 양호한 편이 아니었다.
아침에 책보를 들고 학교로 가서 책보를 펼쳐 놨다가 하교할 때 책보를 싸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책보를 펴보지도 않고, 그 이튿날 그 책보 그대로 들고 학교에 간다. 나는 6년 동안에 몇 번쯤, 우리 형님에게 붙들려서 머리를 쥐어 박히면서 몇 십분 씩 무엇을 좀 읽어 본 것 외에는 복습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성적이 양호하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늘 아주 꼴찌는 면했었다.
장난꾸러기 봉암
공부하는 성적은 그러하나 장난꾼으로는 실력도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학교에 유리창이 깨지면 먼저 조봉암을 부르고 어디서나 학생이 울고 있으면 조봉암을 불렀다. 형세가 이쯤 되고 보니, 동리 아이들이 머리를 터져도 먼저 봉암이를 부르게 되고, 동리 장독이 깨져도 먼저 봉암이를 찾게끔 되었다.
먼저 말씀 드린 것 같이 우리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대해서도 전영 불간섭주의시니까 꾸중을 듣는 일도 없지만은 어머니께서는 나를 몹시 사랑하셨지만 입에서 꾸중하는 말씀이 떠날 새가 없으셨고 부지깽이를 들으시고 대문 밖까지 쫓아 나오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봉암이가 우리 애 머리를 깨었소, 우리 집 돌담을 허물었소, 우리 애 옷을 찢었소 하고 동리 여인들이 날마다 백활을 하게 되니 우리 어머니는 날마다 집집에 찾아 다니며 사과를 하고 큰 것은 배상을 해주어야 되고, 작은 것은 고쳐주어야 되었으니 역정이 안 나실 수가 없고, 꾸지람이 아니 나실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두려워 하지 아니했다. 꾸중을 하시면 다소곳이 듣고 자막대기로 좀 치실 때는 엄살을 해가며 맞기도 하지만 부지깽이로 단단히 치실 듯하면 밖으로 튀어 나갔다가 한 두 시간 뒤에 슬금슬금 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 동안에 모든 것을 다 잊으신 듯이 부지깽이도 안 들으시고 꾸지람을 안 하시고 밥 때면 밥상을 놓아 주시고 잘 때면 이부자리를 보아 주시는 우리 어머니였다.
호랑이 같은 형님
그러나 우리 형님은 무서웠다. 자기 사정에 바빠서 집안 일은 잘은 모르지만 내 장난이 심해서 어머니께서 몹시 걱정을 하시고 고생을 하신다는 것쯤은 물론 잘 아는 터이고 또 공부라고는 도무지 안 한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는 까닭에 언제든지 나를 만나기만 하면 몹시 꾸짖기도 하지만 가끔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장난질하다가 왼 팔을 삐어서 끈으로 팔을 둘러 메고 있을 때 형님을 만났다.
우리 형님은 그러지 않아도 좀 때려줄 일이 있었던 판에 또 무슨 못된 장난을 쳐서 팔까지 메고 있는 내 꼴을 보니 더욱 미움이 북 바쳐서 다짜고짜로 때리기 시작한다. 나는 형세가 급함을 직감하고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만약 얻어 맞기나 하면 또 모르겠는데 도망쳐 달아나는 것을 보니까 더욱 미워서 사랑방 헛 아궁에 있던 고무래를 들어서 힘껏 던졌다. 그런데 그 고무래 자루가 마침 뛰어 다리고 있는 내 명치뼈 끝에 맞았다. 어찌 아픈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다가 다시 급히 일어나서 뛰었는데 뛰면서 보니까 지금까지 아파서 못 견디던 왼팔이 거뜬해져서 두 팔로 활개를 치며 달릴 수가 있었다. 위골이 된 것을 엄살을 부리고 맞추지 않고 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뼈가 도루 들어 마친 것이었다. 노여움이 상투 끝까지 올랐던 우리 형님도 이 꼴을 보고는 한참이나 껄껄대고 웃었다.
우리 형님은 내 장난이 심한 것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내가 공부도 아니 하려니와 좀 바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또래의 누구누구를 가리키며 그 애들은 머리가 좋고 무엇도 알고, 무엇을 잘 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그 애들이야말로 머리도 그리 좋지 못하고 무어 별로 잘하는 것도 없는 패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형님이 내게 대해서 약간 인식부족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형님이 꾸짖고 때려도 한번도 항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우리 형님이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부터는 또 너무 과하게 그야말로 과대평가를 해 가지고 세상에는 없는 동생같이 아끼고 사랑하기를 마치 늙은이가 막둥이 사랑하듯 했었다. 그러던 그 형님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지하에서나 이 장난꾼 동생의 회고담을 듣고 웃어 주실는지…… .
일급 10전의 급사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집안 살림형편이 극난해서 서울 가서 중학(그때는 고둥보통학교)일망정 제대로 공부할 가망은 전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깨끗이 단념해 버리고 밥벌이라도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러나 그 밥벌이라는 것이 이제나 그제나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또 장안에 팔려서 이럭저럭 하다가 열여섯 되던 해 봄에 일급 십전을 받고, 강화군청에서 심부름을 했고 열여덟 살 되어서는 월급 십원 짜리 고원이 되었다.
고원으로서 특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한가지 주산에 빠르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주단을 썩 달 부르는 사람이 여섯 줄까지를 최고속도를 맞추고 통계를 내느라고 날마다 수십 명씩 동원이 되었다. 한 개의 확실한 숫자를 내기 위해서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같이 해서 두 번 이상 합치된 숫자가 나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 혼자서 한번 놓는 것으로 족하다고 해서 한 사람이 십인 이상의 능률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재무계 주임이란 자는 나를 몹시 좋아하고 보배로 알아서 진중했지만 심술꾸러기 서무주임과는 사사건건 충돌을 일삼다가 일년 이내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기독교 예배청년회에서 일을 보았고, 교회에도 잘 나갔을 뿐 아니라, 교회 일도 많이 돌보았다.
나는 열살 때 세례교인인데 교회에는 별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가 의외에 열성적으로 일을 보게 되니 목사(당시 김광국씨)이하 여러 노인 전도사 권사님들이 나를 퍽 사랑하시고 믿어서 명목도 실력도 없는 나를 권사라고까지 불렀다.
뒤의 일이지만, 고학이라도 한다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부터는 생활에 쪼달리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사상에 물이 들어서부터는 다시 교회를 잊어버린 뒤에 오늘에 이르렀고, 내가 동상(凍傷)으로 손가락이 여러 개 잘라진 뒤에 우리 어머니께서
『헤엄 잘 치는 놈이 물에 빠지고, 나무 잘 타는 놈이 떨어진다더니 네가 주산 잘 한다고 소문이 나더니 손가락이 잘라지는구나.』
하시며 한숨 쉬시던 일이 생각이 난다.
3·1만세와 투옥
삼일 독립운동 때 젊은 동지 열두 명과 더불어 일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 천명이 태형(볼기 맞은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선행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했다.
유선생은 오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일년 살았다.
3.1운동 때 감옥 안에서 일어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원산 이가순씨의 일은 영원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인격, 풍채, 언변, 식견 등등 그 어느 편으로 보던지 훌륭하고 출중했고 또 독립운동에도 물론 영도자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놀랄만한 기백,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추상 열의 같은 기백에 대해서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만세를 부르기 시작한 날부터는 일본인에게 절대로 경어를 쓰지 않았다. 재판장에게도 꼭 ‘해라’를 했다. 왜놈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끼리는 간혹 타협도 있고, 교섭도 있을 법한 일이지만 이가순씨는 단 한번도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철저한 원수대접이었다. 7년 징역의 형이 결정되어 복역을 하게 되니까 붉은 수의를 입히고 수염을 깎으려고 덤벼드니 이선생은 대노하여 일갈하시기를
『이 머리는 깎을지언정 이 수염은 못 깍는다.』
라고 했다. 한말에 단발령이 내리니까 유생 일부가 반대하는 상소문 중에 ‘차두 가단 차발 불가단’이란 말이 있었지만 옥중에서 이렇게 철저히 싸운 분도 그리 많지는 못할 것이다.
만세와 바꾼 매질
그때, 옥중에서는 가끔 만세소동이 있었다. 외부에서 이 땅의 독립에 대한 무슨 기쁜 소식이 들려 온다든지 옥내에서 애국자들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들린다든지 하면, 전 감옥이 들석들석 하도록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방마다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지르고 감방문을 두들기고 야단이 난다. 그런 뒤에는 의례히 한 감방 안에서 몇 사람씩 끌어내어서 여러 가지 형식의 고문도 하고 마구 두들겨 패기도 했다.
나도 그 사건에 가끔 걸려들어서 매여 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니까 놈들은 독사같이 약이 바싹 올라가지고 발길로 차고 혁대로 갈기면서
『이 놈의 자식 만세 한번에 혁대 한번씩 해보자, 어느 편이 이기나 보자.』
한다. 그래서 나는 몹시 빨리 만세! 만세! 만세!하고 한 삼·사십 번을 연해 불러 됐더니 놈들도 기가 막혔든지
『참 할 수 없는 자식이로군.』
하고는 때리는 경쟁은 그만 두었으나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기절한 채 콘크리트바닥에서 하룻밤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살이었다.
출옥, 애국심, 향학열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서대문 형무소로 갈 때의 나와는 전연 딴 사람이었다.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 놈이 우리 조선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이 불타게 됐다.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나는 완전히 심기가 일전되었다. 어떻게 하면 직업이나 얻어볼까 하던 생각은 아예 없어졌고, 그 환경에서 그대로 살 생각은 아니했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서 알기 위한 노력, 싸우기 위한 기회를 가져야 되겠다고 작정했다.
감옥에서 나와서 얼마 안되어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덮어놓고 어는 학생을 제대로 대접해 줄 학교라고는 생겨나지를 안 했으니까, 어디나 붙여주는 대로 들어가 볼 수밖에는 없었다.
비교적 인심이 좋은 YMCA 중학부에 들어갔다. 그때 심경을 지금 돌이켜 보면, 한편으로는 공부할 욕심에 불탔고 다른 편으로는 일을 해볼 욕심,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열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나는 그 중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고 오직 월남 이상재(李商在)선생께서 백발을 휘날리시며 청년들의 의기를 기르고 용기를 북돋아주시느라고 심혈을 경주하여 애쓰시던 모습이 영원히 잊혀지질 않는다.
고문과 싸운 평양사건
서울에서 고학이 될 리도 없고, 또 시덥지 않게 생각되는 점도 있어서, 일본으로 건너갈까 하던 참에 의외에 평안남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잡혀서 가보니,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학감 최선생님과 유도왕인 강낙원, 이제민 등 명사 여러분이 한 테 얽혀있었다.
나는 평소에 그분들을 존경했고 친히 지냈을 뿐이지, 무슨 일을 구체적으로 의논해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잡혀가던 날부터 가지각색의 고문을 당하면서, 듣고 보니 우리들이 폭발탄을 많이 만들어서 어디다 감추어 두었고 ○월 ○일에 YMCA를 중심 해서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모르니까 그저 모른다고만 했다. 그때 평안도에서 제일 간다는 형사 나까무라(中村)라는 놈이 담당이 되어 날마다 고문을 하는데
『이 새끼 여기가 어디인 줄 아니 평양경찰서다. 대동강 돌맹이도 여기에 들어오면 바들바들해진다. 취조 받다가 뒈진 새끼가 얼만지 아니 이 새끼!』
욕지거리도 어찌 그리 많은지, 한국인인 나도 모를 욕이 수두룩했다. 비행기를 태운다고 해서 두 팔을 뒤로 묶고서 그 묶인 두 손목을 끈으로 매어서 천정으로 끌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옛날 말로는 주릿대 방망이에 학춤을 춘다는 것이고, 또 둥근 의자에 눕혀놓고 혁대 혹은 검도용 죽도로 마구 두들겨 패고 벌거벗겨진 궁둥이를 담뱃불로 바싹바싹 지지기도 했다. 견디다 못해서 기절을 하면 냉수를 이마로부터 뒤집어 씌운다. 그러면 사오 분 뒤에는 소생한다. 기절했다가 냉수를 뒤집어쓰고, 다시 제 정신이 돌아설 때처럼 서글픈 일은 없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때에 눈물짓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고문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소감이었다.
별 짓을 다하던 나까무라(中村)란 놈은 나중에는 나를 유도장으로 끌어가더니 다짜고짜로 수십 차례 메쳐 꽂았다. 소위 ‘고시나게’라는 것이다. 하도 여러 번 똑 같은 방법으로 둘러 메치니까 쓰러질 때에 좀 덜 상하고 덜 아프게 쓰러지려고 정신도 차리고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차차 꾀가 늘어서 아무리 동댕이를 쳐도 그저 나무토막처럼 넘어가지는 않고, 머리도 가리고 두 팔로 몸뚱이를 어느 정도 보호하게끔 되었다.
제 몸이 지치고 땀이 흐른 뒤에야 그 놈은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다시 따지기 시작한다.
『이 새끼야! 맛이 어떠니? 그래도 말을 않겠냐?』
하며 뺨을 치기도하고 가죽띠로 후려 갈기기도 한다. 하도 여러 번 맞다가 한번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는 유도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 드는 줄은 몰랐소. 그래도 조금만 더하면 나는 당신 덕분에 유도 초단 쯤은 될 것 같소.』
그랬더니 그 놈이 껄껄 웃으면서
『참 할 수 없는 새끼로군!』
하더니 그 후로는 유도장으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 십오일 간을 이런 곤경을 치루고 나니, 꽤 단단하다고 자부하던 나도 파김치같이 되었으니, 다른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최선생님은 비행기를 잘못 타셔서 왼팔이 부러진 것을 바로 맞추지 못하여 일생을 불구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일행은 이 평양사건이 내가 왜놈들에게 붙잡혀서 고초를 겪은 두 번째 일인데 그것이 어떻게 혹독했던지, 그 후에 수차의 감옥살이, 수십 차의 유치장 살이를 해 보았지만 평양 때보다 더 어려운 고비는 별로 없었다.
엿장수 일본 중앙대학생
평양에서 그 일을 치르고 서울에 와서부터는 평양으로 잡혀가기 전보다 훨씬 더 민족적 감정이 높아지고 일본통치에 대한 반항심이 더 강해지고 애국열이 더욱 고조되었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안하고는 못 배기겠고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때 서울 형편에 나로서는 아무 일거리도 찾아낼 수가 없었고, 그럴듯한 동지자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공부할 열의도 없어졌고 또 계속할 형편도 못되었다.
그래서 호혈(虎穴)에 들어가는 심경으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홀로 기차표 한 장만 들고 적수공권으로 동경에 들어섰다. 그때 동경에 있던 지인으로는 동향인 유찬식군(지금 고등전기학교 교감)이 고학을 하면서 동경물리학교에 다녔고, 그때 유군은 이성구, 홍순복, 양군과 또 이미 고인이 된 수암 김찬씨와 같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거기서 신세를 졌다.
수암 김찬씨는 그때부터 그가 작고하던 날까지 일생을 통해서 꼭 동지로서 같이 의논하고 같이 투쟁했다. 그리고 유, 이, 홍 세 친구(지금 세분이 다 서울에 건재한 교육가이다)는 결사(結社)를 같이 했거나 일선에서 같이 투쟁한 일은 없었지만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한결같이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다. 나는 이 세분 교육가를 친구로 가진 것을 마음속 깊이 기뻐하며 영광으로 알고 지낸다.
그때, 나는 이 네 분 선각자들로부터 동경에서 고학하는 비결을 배웠다. 많은 방법가운데서 밑천 없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엿장수였다. 고향식으로 엿을 만들어서 십전짜리로 갈래를 지어서 팔게 된 것인데, 그 엿에 인삼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 인삼엿이라고 하면서 팔게 되었다. 재일(在日) 우리 동포들 중에는 그 엿을 목판에 담아서 길에다 놓고 심지를 뽑는 내기를 해가면서 팔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고학생들은 깨끗한 상자에다가 맵시 있게 넣어가지고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며, 공장, 학교, 혹은 가정에 들어가서 팔게 마련이었다.
전기 세 친구들은 하루 장사를 하면 일주일 동안은 장사 안하고도 공부할 수가 있어서,매주 토요일 하루만을 장사하는 날로 정했다는데 나는 그 상재(商才)나마 없어서, 그 친구들의 예정대로는 되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항일이 나를 사회주의자로
그래도 그 엿장사를 해서, 먼저 정규 영어학교에 입학해서 영어를 좀 배운 뒤에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적을 두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동경에 가니까, 평소에 읽고 싶어하던 책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처음 보는 좋은 책이 어찌 많은지 그저 그 책에 취해서 장사도 하기 싫고 강의도 듣기 싫어져서 그저 책만 붙잡고 늘어졌다. 설마 굶어 죽지는 않을테지 하고 먹는 걱정, 입는 걱정은 안하고 그저 책만 읽었다. 아마 내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 열심으로 또 그렇게 많이 독서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 겸 처음일 것이다.
원래 지식에 주리고, 목마르던 참이니까 좋은 듯한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대별해보면 처음에는 주로 문학작품을 읽었고, 다음은 사회과학 방면의 것을 읽었다. 젊은 학도로는 누구든지 거의 그렇지만 처음에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읽어보니까, 어찌 그리 마음에 탐탁하고 기쁘던지 이루 형언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진리가 있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했고 통분하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정열을 다해서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이 완전한 진리이고 내 마음 가운데 항상 꿈틀거리고 용솟음치던 생각과 백 퍼센트 일치되는 때에 무한한 만족과 법열을 느겼다.
나는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사회주의자가 되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도 같은 침략과 민족적 수탈이 어째서 생기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게 되었고 우리 민족이 어째서 이렇게 압제를 당하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못살게 되었는가도 알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이 독립을 전취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이 독립되어도 일부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잘살고 호사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잘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파동 치던 일본의 사조
동경에서 조석을 가리지 않고 오직 책 속에 틀어박혀 있기를 일년 남짓했다.
그때 일본의 사상계는 혼란기였다. 일본에 본래부터 있던 사상계 분야는 그만 두고라도 자유주의, 민본주의 등등, 요새 흔히 말하는 ‘데모크라시’의 사상이 상당히 왕성한 위에 새로 수입된 여러 가지 사상이 짧은 시일 내에 한꺼번에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고토쿠(幸德秋水, 일본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황실 부인론자이다)가 불경죄로 처벌을 당한 이래로 일부 지식층간에 아나키즘의 뿌리가 박혔고 내가 동경에 있던 1921년부터 몇 해 동안은 오오스기 사카에(大杉 榮)를 중심으로 해서 와다(和田), 이토오(伊藤) 등 쟁쟁한 투사들이 선두에 서서 언론으로 사상계를 리드하고 일부 노동운동을 지도했으며 그러한 혼란기에는 의례히 있듯이 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저의 나라의 재래에 있던 일체의 것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아나키즘을 숭상하는 경향도 많아서 한 때는 아나키즘 전성을 이룬 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오오스기 사카에는 1923년 동경 대지진 때에 당시 계엄사령부 소속인 아마카스(甘粨)란 자에게 일가와 더불어 몰살을 당했고 그 아마카스란 자는 그 뒤 만주에서 고관으로 거들거리고 지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이 그렇게 전성했다는 것은 아나키즘으로는 그때가 전성시대였다는 뜻이고 다른 많은 종류의 주의사상이 위축되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한편에서 아나키즘이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사회주의를 내걸고 웅성거렸다. 그때 흔히 떠들던 ‘생디칼리즘’ ‘페비아니즘’ ‘소시알 데모크라시즘’ ‘니힐리즘’ 그리고 그때에야 유행어처럼 된 ‘볼셰비즘’ 등등 세상에 있는 주의사상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일본 사상계에서 북데기를 쳤다.
혁명가로 자처
그러나 사카이 도시히코(堺 利彦), 야마카와 히토시(山川 均), 그리고 야마카와의 아내인 야카와 키구에(山川 菊榮) 등이 중심이 된 ‘소시알리즘’을 내세운 패들이 통칭 사회주의 운동의 총수 격으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카이 도시히코는 그 방면의 사실상의 원로로 초보의 사회주의 개념을 널리 보급시킨 공로자였다. 그이 많은 저서 중에는 유머러스하고 유토피아적인 것이 대부분인데 그런 저술들이 대중의 환영을 받았었다. 그러나 사카이 도시히코가 과연 무슨 주의자인지 어느 계통의 어느 파에 속하는 사회주의를 신봉했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밝히거나 알 길이 없으나 다만 볼셰비즘을 반대한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본 패전 얼마 전에 작고했다. 야마카와 히토시, 야마카와 키구에는 지금도 건재하는 일본 사회당의 고문이고, 언제나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정치평론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볼셰비즘은 반대이고 독일계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지 당시 일본 유학생의 거의 대부분이 그 소위 신 사조에 휩쓸려서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나 자신의 경우로만 보아도 그러한 영향이 확실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일본의 현실을 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상적인 모든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청년들과 같이 휩쓸려 다녔지만 박열, 신용우, 방한상 등 맹장들과 ‘흑도회(黑濤會)’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해 가지고 우리들만이 사상계에 있어서 최첨단을 걷는 선구자인 것처럼 뽐내고 우쭐대던 것이 기억된다. 그때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관념적 유희에 만족했을 뿐이고 아무 일도 하려고도 못했다. 그저 모든 면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론이 시종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박열이 그의 처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큰 소시를 했는지, 그것이 불경죄가 되어서 수년을 두고 일본 조야에 큰 파문을 던지어 말썽거리가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열은 십여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일본 패전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흑도회’까지 조직하기를 했으나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생각에도 지식적 충족이나 관념적인 만족으로가 아니고 무슨 조직을 가지고 힘을 만들어서 일본 놈과 싸우고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되고 또 독립이 된 뒤에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된다고 생각이 되었다.
‘아나키즘’으로부터 ‘볼셰비즘’으로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으로부터 볼셰비즘으로 기울어졌다. 러시아는 1917년에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되었고, 그것을 영도하는 자가 레닌, 트로츠키 등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주의가 볼셰비즘이고, 그 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이 독립 원조자금이 잘못 사용되어서 뒤에 말하는 소위 사기 공산당사건이 생겼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 그때에 우리들과 완전히 공명한 사람들은 김찬, 정재달 등이 있었고 그 뒤에 합세된 사람들이 김약수, 정우영이었다. 김찬, 정재달은 유학생계 정화를 위한 의거단을 조직한 일도 있었고, 재 일본 한국사람 노동자들의 조직체를 만드는 일도 같이 한 선구자이며, 몇 개의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었다. 김약수가 무슨 잡지를 발간했는데 그 발간사 중에 “우리들은 이미 전선(戰線)에 나선 전사다. 탄환이 한발밖에 없다고 해서 안 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들은 그 한발을 쏜다”고 해서 준비 없이 구차한 발간이지만은 우선 한 권이라도 내놓는다는 뜻을 표시한 것인데, 그때에는 그것이 꽤 명구라고 해서 내외 인간에 회자되었었다.
조국 광복이 싹틀 무렵
나는 일본에 삼 년 있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얻어 배운 것은 물론 큰 지식이 될 것도 아니고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만한 것이라도 대견했고 또 그만하면 일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고, 따라서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는 자기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했었다.
공부도 못하고 시골에 묻혀서 세상을 모르고 세월만 보내다가 3.1운동 덕분에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환기되었고 독립운동만이 삶에 의의 있는 유일한 길인 줄만 알아오던 내게는 그 삼 년이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우리 몇몇은 스스로 혁명가를 자처하고 독립을 위한 실제적인 일꾼으로 자부했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이던 장발에 굵은 스틱을 짚고 다니는 패들을 철부지로 알고 경멸했었다. 생각이 그렇게 되는 것만치 일본 안에서도 조직에 힘썼고 국내 각 파와도 연락을 가질 뿐 아니라 상해, 만주, 러시아에도 손 닿는 대로 연락을 취하고 정보를 교환했다. 그래서 드디어 나와 김찬, 정재달 등 실천파는 동경을 떠나서 국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때의 우리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포부도 컸지만 용기도 대단했었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일은 안될 것이 없을 듯하였다.
‘위(僞)공산당 사건’
동지들의 연락을 받고 내가 서울에 온 것은 1922년 8월 내가 24살 때였다. 그때 서울에는 김한(金翰)·원우관(元友觀)·신자관(申慈觀) 등이 소위 ‘무산자동맹’이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고 계몽운동에 착수하고 있었으며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등은 소위 ‘서울청년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서울청년회’는 본시 민주주의적 청년단체였으나 지도부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위에서도 잠시 말을 비친 적은 있지만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서 볼셰비즘의 국제기구인 소위 제3인터내셔날, 약칭 코민테른이 1919년에 모스크바에서 결성되고 그것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당시로는 전세계 공산혁명분자들의 총본부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코민테른에서는 소위 제국주의 반대가 그 주요 ‘모토’인 만치 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끔 되어 있었고 따라서 우리들의 민족독립을 정책상 절대 지지하며 지원하기로 되어 당시 상해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를 통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 원조자금으로 미화 70만 불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원조자금이란 것이 정식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입금이 안되고 김립이란 자가 자의로 처분을 했기 때문에 그 사건이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첫째로 김립이란 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매국적이라 하여 처형을 당하였고, 그 돈의 일부가 모 요인을 통해서 국내로 들어 왔는데 그것을 당시 동아일보 주필이던 장덕수(張德秀)와 소위 ‘청년연합회장’인 최팔용(崔八鏞) 등이 착복했다고 해서 그 사건을 ‘위공산당사건(僞共産黨事件)’이라고 불렀고 모든 사회주의 계통의 단체와 개인이 총동원해서 그들에 대한 규탄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이 전기 소위 ‘무산자동맹’과 ‘서울청년회’이며 일본에 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일부러 입국해 가지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시켰다. 그래서 저 장(張)·최(崔) 등은 많이 욕을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필경은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미국 등지로 떠나버렸고 그로써 그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일이 한 사건으로서 중대성을 가진 것은 전기 장, 최 등은 사회주의자도 공산당도 아인데 공산당인 체하고, 또는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체하고 러시아의 돈을 받아먹었으니 그것이 위공산당이라는 것이며 부당하고 또 횡령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보다도 우리의 주의를 끈 것은 소위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인물들의 놀랄만한 투지와 굳은 행동통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위공산당 타도운동’은 확실히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중대 사건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 사건이 거의 끝나고 흥분이 좀 가라앉을 무렵에 나는 몇몇 동지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이 사건은 이 시상 더 크게 확대시키지 말고 이 여세를 대중적 선전과 대중조직으로 내밀어야 된다. 만일 사건을 더 확대시키면 왜놈을 기쁘게 하고 민족적인 손실이 올 것이고 또 그대로 흐지부지 내버려두면 지금까지 싸워오던 친구들의 투쟁의식을 상실케 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울 형편은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대중 앞에 서서 사회주의를 설명하고 선전다운 선전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고 대중조직도 뜻과 같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산재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서로 알게 되었고 집단의식이 생겨서 후일에 사회주의운동이 대성하고 공산당 조직에까지 발전한 단초(端初)가 된 것은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서울에서 사회주의운동이라면 김한, 김사국 양인이 각각 일방의 웅(雄)으로 드러나 있었는데 김한은 책사형(策士型)이고 김사국은 투사형(鬪士型)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꼭 같은 점은 둘이 다같이 강렬한 민족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를 말하고 소비에트혁명을 구가하는 것이었다.
후일 이 두 사람은 우리나라 안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분열, 상쟁하는데 중심인물이 되었으니 김한은 이르쿠츠크파로 알려졌고 김사국은 상해파로 되어 있었다.
서울의 형편이 이러할 즈음에 해외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자들은 소비에트정부와 연락을 짓기 위해서 각각 공산당을 조직하고 서로 우열을 다투던 중인데 코민테른에서 합하라는 지령이 있어서 그 연합대회의 준비를 위한 백열적인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베르흐네우딘스크(Verkhneudinsk)대회(1922. 10. 21)
나는 일본에서 서울로 온지 두 달도 못되어서 서울을 떠나게 됐다. 위에 말한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사상에 있어서 한 에폭(epoch)을 그은 중대한 사건인 만치 그 경과를 좀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식 혁명이 성공된 후 코민테른이 창설될 때가 바로 우리나라 안에서는 역사적인 3.1혁명운동이 일어나서 전 민족이 뒤끓어 일어서고, 전세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던 1919년이었다. 코민테른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는 것이 확실해지니까 1919년에 일본제국주의의 우리나라 침략이 확증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떠나서 일념 조국광복에 헌신하던 많은 애국자들이 혁명 러시아와 제휴해서 조국광복의 숙원을 달성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소비에트식 혁명을 성공적으로 영도한 사람은 레닌과 트로츠키 등이며 그들이 내세운 정당이 공산당이니까 자기네들도 공산당을 조직해 가지고 강력한 독립운동을 해야겠고, 또 러시아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서 러시아 땅에서 살고 있던 인물들은 이르쿠츠크라는 곳에서 소위 ‘한인공산당’이라는 것을 조직했었다. 처음에는 각각 자발적으로 필요에 따라서 조직했던 것 뿐이지만 한 나라에 공산당이 둘씩이나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은 기왕 조직을 가지고 보니까 제각기 자기 조직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자기만을 인정하고 다른 조직은 부인하게끔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코민테른에서는 한 나라 안에 공산당 둘을 인정할 수도 없고 또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 내리기도 곤란했던지 무조건하고 합쳐서 단일 정당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이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의 지시 아닌 명령이었다.
우리들은(나와 정재달, 정우영) 해외에서 조직한 두 개의 공산당 외에 국내에서 조직을 가진(그 조직은 공산당이 아니고 사회주의 분자들이 서클이다) 서클의 대표로 참석했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대회에 참석하고 보니 그 두 파의 알력은 상당히 심각한 바가 있어서 한 파가 다른 한 파를 완전히 제압해서 굳은 영도권을 가지지 않고는 마지않을 기세였고, 대회를 원만히 해서 통일된 단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분위기를 어디서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정세만 관망하고 있었더니 결국은 상해파(상해에서 조직한 공산당은 ‘상해파’라 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것은 ‘이르쿠츠크파’)가 이르쿠츠크파를 거세하려 하니까 이르쿠츠크파에서는 대회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항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상해파 대회가 되어 버렸다. 나는 “연합대회가 못되고 어느 일파의 대회로만 진행하는 데는 우리는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두 친구와 같이 대회장을 나와서 그 경과를 코민테른에 전보로 알렸다.
정세를 판단한 코민테른에서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의 모든 회합을 중지하고 각 그룹의 대표자는 모스크바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렸다. 그래서 상해파에서는 이동휘(李東輝) 노인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김만겸(金萬謙) 등이, 그리고 국내 서클로는 정재달, 정우영과 내가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모인 각 대표는 저 부하린과 동석해서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 석상에서 각 대표는 각기 자기네 그룹만이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집단이며 참된 조직을 가지고 또 공산주의적인 활동을 했노라고 떠들어댔다. 모든 보고를 다 듣고 난 부하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동무들이 각기 자기네 그룹만이 공산주의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은 내가 보기에는 같소. 더는 이론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고 무조건 합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우시오.”
그래서 즉시 각 파의 조직을 해체하고 오르르뷰로(소위 조선공산당 조직총국이라는 이칭)를 조직하기로 했다. 뒤의 이야기지만 이 오르그뷰로는 또 한번 실패해서 그 다음 해에 꼬르뷰로로 개조되었고 그 꼬르뷰로라는 것도 지지부진하던 중에 처음으로 코민테른의 정식 지부(支部)가 되었다. 나는 그 오르그뷰로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하고, 그때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까우트부(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로 했다.
여기서 한마디 더 알릴 것은 대회장소인 베르흐네우딘스크라는 곳은 치타와 옴스크 중간에 위치한 곳인데 당시 소비에트혁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려하니까 연합군(英·美·伊·日 등)이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옴스크까지 진출해서 그 혁명을 방해하려 하였고 국제적으로 빈번히 사건이 발생하므로 소비에트정부에서는 치타에다가 완충지대를 만들어서 연합군과 절충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던 시절인 까닭에 치타 위에 있고 옴스크 아래에 있는 베르흐네우딘스크를 대회장으로 택한 모양이었다. 그때 쯤만 해도 치타 아래쪽에서는 소위 적위군(赤衛軍)과 백군과의 전투가 치열했었고 적군과 연합군과의 충돌도 끊일 새가 없었다.
모스크바 유학 당시
내가 입학하게 된 ‘까우트부’란 것은 이름은 공산대학이지만 기실 내용은 그리 충실치 못한 편이었었다. 중국사람을 위해서는 소위 레닌대학이 있었는데 소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란 것은 소련권 내에 있는 수십 개 민족과 우리나라 일본, 쟈바 등 원동의 몇 개 민족이 한데 모여서 초기에는 통역을 세우고 강의를 듣고 노어(露語)가 능통하게 되면 제법 학술적인 공부가 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은 일종의 사회주의 강습소 같아서 서투른 통역으로 듣는 소위 러시아혁명사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통역 중에는 ‘데몬스트레이션’이란 말을 번역 못해서 ‘길바닥에서 오부재기 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만하면 그때 통역의 실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오십여 종족이 모여 있어서 복데기질을 치니까 학교라는 것보다는 인종전람회 같았다. 가지각색의 언어, 의상, 풍속, 습관과 서로서로의 흥미 있고 기이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서 언제나 서로 다감하게 호의적이고 새 맛이 있어서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 중 몽고족과 뿌럇드족은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네와 유사하고, 대체로는 동양적이지만 그 밖의 민족들은 모두가 동양적이 아니고 그렇다고 서약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중간치기여서 깊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길기쓰족과 퉁구쓰족은 외모는 확실히 동양인인데 사고방식과 행동은 아프리카 토인과 꼭 같고 , 딸라트족과 터어키(土耳其)족은 생김생김은 분명히 서양적인데 행동과 감정은 다분히 동양적이었다.
많은 종족 가운데서 그 중 활발하고 명랑한 것은 카프카즈(高可索)족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길을 걸을 때에도 입으로 노래 곡조를 중얼대고, 걸음걸이도 항상 리드미컬하게 걷는다. 저네들이 자기네 방에 모여서(한방에 이삼십 명씩 합숙했다) 공부할 때에 우리네 장난꾼들이 일부러 놀러 가서 가만히 자기네가 좋아하는 노래 곡조를 부르면 반드시 몇몇이 역시 조용조용히 그 곡을 따라 부르고 그 수효가 하나하나 더 늘면 점점 목청이 굵어지다가 나중에는 그 전부가 제법 목청을 뽑아서 ‘나이 나나 나이나’하고 합창을 하게되며 그 합창이 한 십분 동안 계속되면 모든 사람이 책을 걷어치우고 일어서서 손뼉을 딱딱 치며 그 독특한 발놀림으로 발장단을 치며 카프카즈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춤을 ‘꼭빡춤’이라고 하는데 여럿이 함께 추는 것이 아니라 그 중 흥 많고 잘 추는 치가 앞장서서 한참을 춘 뒤에는 또 그만치나 자신 있는 여성이 툭 뛰어들어서 춤판을 어울려 놓는다.
우리 동양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면 흥이 나서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춤추는 사람은 추고 거기에 가락이 맞고 멋이 나면 ‘좋다’한다든지 무릎을 친다든지 하는 것이고, 그 외에는 그저 빙그레 웃고 앉았거나 덤덤히 보고만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되었든지 춤을 추기 시작만 하면 그 정원이 흥을 내고 그 전원이 손뼉을 쳐서 장단을 맞춰준다. 목청을 뽑아서 ‘나이 나나 나이나’를 부르다가 그 속도가 차차 빨라지고 나중에는 ‘나이 나나 나이나’도 그만 치워버리고 마치 일본 놈의 ‘미꼬시’ 제기처럼 ‘앗싸 앗싸’하고 그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치고 발장난을 쳐준다. 우리 ‘까우트부’학생들이 거리를 걸으면 러시아 아이들과 또는 ‘바로시냐(젊은 처녀)’들이 ‘나이 나나 나이나’라 하거나 ‘앗싸 앗싸’하고 손뼉을 치며 놀려대기도 했다. 그만치 카프카즈인들은 명랑했고 인기가 있었다.
학교라고 일년 남짓이 있으려니까 몸이 좀 이상해지고 입맛이 없어지고 간혹 미열이 있었다. 좀 걱정이 되는 점도 있어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걱정되는 그대로 ‘결핵(T·B)’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때 학교에는 전속의사가 있었는데, 먼저 본 의사가 결핵의 징조가 있다고 진찰이 되면 다음 전문의사에게 보게 하고 또 그 의사가 다음 한 의사에게 보게 해서 셋이 다같이 같은 진단을 내리게 되면 그때에는 무슨 병임을 확인하게 된다.
모스크바의 기후는 물론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정도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겨울이 되면 어느 때든지 영도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침 열 시나 되어서야 해 구경을 하게 되고 오후 네 시 전에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날씨가 좋을 때 이야기고 구월 말로부터 이듬해 오월까지는 늘 흐리고 눈이 오니까 맑은 날씨라고는 좀처럼 구경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겨울이야기이고 유월 초부터 팔월까지는 햇볕 따가운 맛이 우리나라 유가 아니지만 저녁때부터 어느 때든지 그리 더워서 못 견디는 일은 별로 없고 칠·팔월 두 달은 소위 백야(白夜)라고 해서 밤 열한 시 반부터 한 시 사이가 마치 으스름 달밤같이 어둑어둑할 뿐이고 도무지 밤 같지가 않다. 기후가 이 꼴이니까 모스크바 주민의 팔십 퍼센트가 폐결핵 환자고 학교에도 거의 반수가 결핵으로 선언을 받은 작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슬그머니 걱정이 되던 판에 그 선고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리미아반도나 카프카즈로 전지요양을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폐환자로서의 치료방법은 아무 특별한 묘안도 없고 오직 한 가지 전지 요양법이 있었을 뿐인데 그 경과를 보면 카프카즈에 가서 말젖이나 먹으면서 몇 달 동안 편히 쉬고 있으면 살이 뿌옇게 찌고 좀 생기가 돈다. 그러면 다 나았거니 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한 2, 3개월 지나면 또다시 재발을 해서 죽을 지경이 되고 그러면 또 전지요양을 시키곤 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웬만한 작자들은 이미 병은 고맹에 들었는지라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사람은 거의 초 죽음이 되어서 기어 다니게 된다.
이런 꼴을 뻔히 보고 알고 있으면서 그 짓을 되풀이하기도 싫고 또 쌍말로 내가 조선놈으로 낳았다고 고기값도 못하고 병신으로 이국 귀신이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이 돼서 조국으로 돌아가서 일하다가 죽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소위 모스크바 학생생활 일년 반 만에 우리나라로 기어들었다. 뒤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와서는 일에 대한 성과 열도 컸지만 책임도 중차대해서 그야말로 남선 북마에 자리가 따뜻할 새가 없이 뛰어다니다가 그 뒤 일년 반 만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진찰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우리나라 안에서는 약 한 첩, 주사하나 쓴 일이 없었는데 폐첨에 조그마한 흑점이 하나 있을 뿐이고 폐병은 씻은듯이 나았고 그 후 30여 년간 꽤 많은 고생살이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폐에 말썽을 일으킨 일은 없었다.
동경대지진 사건과 한인 학살
내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 것을 단념하고 귀국할 것을 결정한 뒤에 해외의 우리 동포들의 정치적 동향을 살펴보니 내가 모스크바에 체제 해 있을 동안에 더욱 난맥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술한 소위 오르그뷰로 조직 후에도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파쟁은 의연히 계속되었었고, 상해에서 개최되었던 국민대회의 성과도 보잘 것 없이 되었을 뿐 아니라 위의 양파의 파쟁이 거기까지 연장이 되어서 그 대회까지도 양파로 분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그 양파의 싸움은 국내 각계에도 침윤되어 국내에서도 분파적인 경향이 뚜렷했었다. 그래서 그때 코민테른에서도 모든 정세를 검토한 결과 금후 우리나라의 조직운동은 국내를 중심으로 할 것과 종래의 상해파, 이르쿠츠크파는 인정치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소위 ‘조선공산당’은 미조직 상태로 국제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위 ‘고려공산청년회’는 소위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정식 지부로 되어있었고 그 대표는 노령(露領)에 있던 조훈(趙훈)이었다.
나는 국내로 돌아와서부터 그 소위 공청(共靑)을 대표해서 활동했다. 내가 비밀결사의 밀령을 받아서 전술한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에도 참석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이라는 명칭 하에 공부도 했고, 또 공청의 밀령을 받아서 그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때 왜경 밑에서도 버젓이 합법적으로 공개활동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국내에서 밀령을 받고 떠날 때부터 그 후 해외 망명생활 8년 동안은 박철환이란 이름으로 행세를 했었고, 내가 노령으로부터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에 상해를 거쳐서 일본으로 갔었는데 그때 마침 일본동경에 큰 지진이 나서 동경 전토가 회진되는 저 유명한 ‘동경대진제’가 생긴 다로 그 이튿날 장기(長崎)에서 배를 내려서 문사(門司)로 가니까 신문호외가 돌고 무언지 모르게 좀 웅성웅성하는 것이 알려졌다.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라. 일본에 있던 2, 3년간에도 여러 번 지진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그저 그런 종류의 흔한 것이거니 했었다. 그러나 호외가 계속해 나는데 동경이 부서지는 모양이었고, 의외로 놀란 것은 우리 동포들이 그 지진을 틈타서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퍼 넣고 요인들을 암살을 한다는 보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호외보도를 읽으면서도 원래 동경에 들었다가 귀국한다는 내 계획을 실천할 작정으로 선편(船便)으로 명고옥(名古屋)에 내렸다. 선편을 이용한 것은 ‘세도아니카이(瀨戶內海)’를 구경할 겸 또 그 근방에서 장사도 하고 있었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명고옥에 내려보니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이 형사였다. 내가 동경에 고학하는 중이고 ‘세도나이카이’ 방면에서 학자를 얻으려고 행상을 하다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더니 그 자가 대단히 친절히 굴면서 지금 동경으로 가면 위험하니 바로 귀국하는 것이 상택이라고 권하며 일부로 차표를 끊어주고 차를 태워주었다. 그래서 나는 동경지진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귀국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고, 따라서 국내에서의 활약이 버젓이 합법성을 띠게 된 것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동경대지진’사건을 조금 알리고 넘어가고 싶다. 전술한 바와 같이 대지진이 나서 전 동경이 끓어 빠지게 되니까 일본에서도 특히 반동적인 군부에서 이 사건을 계기해서 저희 국내에서 날로 팽창해 가는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등 반일본적 사상을 가진 자들과 일본 안에 있는 우리 동포를 저희 놈들이 말하는 소위 불령 선인들을 일거에 학살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워 가지고 “조선 사람과 사회주의자들이 일부러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퍼 넣고 살인계획을 했다’고 거짓말을 만들어내서 선전하고 재향군인회 우익청년단을 동원해서 한국사람만 보면 무조건하고 때려 죽였다. 단도, 몽둥이, 죽창을 가지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찔러 죽였다. 이 판에 우리 동포가 학살된 것이 수천 명(그때 우리 국내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극단으로 분격해서 들고 일어섰으나 모두 왜경에 탄압되었고 조사위원단을 파견해서 실정을 조사케 했으나 학살당한 자의 수효도 몰랐고 또 조사보고회도 개최할 수가 없었다. 이곳 일본놈 중에서 일본말 서투른 놈, 후꾸오카(福岡)근방과 구마모도(熊本)근방 놈이 상당히 많이 한국사람으로 몰려서 학살되었고, 또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중에는 저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오오스기 사까에 부부가 있다. 오오스기 사까에(大杉 榮)부부와 그이 조카인 7세 된 아이까지 묶고 목을 졸라매어서 우물 속에다가 넣어 버린 것이다.
이 지진사건을 그때 우리 동포끼리는 ‘동경대학살사건’이라고 불렀었다. 왜경의 악독성, 왜놈의 잔인성을 알기에는 몇째 안가는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저놈들의 잔학성의 많은 실례가 있지만 너무 장황해서 그만두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국내로 돌아와서 합법적 존재로서 비밀공작을 했었고, 대중운동에도 나설 수가 있었다.
당시의 사회운동 편모
그때 서울에는 전술한 소위 ‘무산자동맹’ ‘서울청년회’외에도 ‘화요회(火曜會)’ ‘북풍회(北風會)’ ‘신사상연구회’ ‘신흥청년동맹’ 등이 표면에 간판을 붙이고 대중집회를 가지며 선전운동과 조직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신사상을 운운하며 소위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전국적으로 대중적 집회, 연설회, 좌담회 등을 개최해서 초보적인 사회주의 계몽운동과 아울러 인권존중과 민족자주의 정신을 고취했고, 반일감정을 높이어 반일본제국주의 투쟁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때 왜놈들은 연설회장마다 임관이라 하여 고급 정복경관을 배치하고 연설의 문구마다 “변사 주의”를 연발했었고, 조금만 과격한 듯한 말이 나오면 즉시 ‘사베루(칼)’로 마룻장을 구르며 “변사 중지!”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을 못하게 했었다.
사상운동과 청년운동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농민운동 소작쟁의가 퍽 힘차게 계속되었고 노동운동도 급속도로 발전했었다. 나는 비밀결사로서의 소위 ‘공청’조직도 힘썼지만 이들 대중조직운동에 몰두해서 1925년 4월에는 노동장 농민운동의 총 본영인 소위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고 청년운동의 총 집결체로서 소위 ‘조선청년총동맹’을 만들어 냈다. 나는 ‘노동총동맹’ 조직에도 관여했지만 ‘청년총동맹’에는 직접 문화부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나는 책임이 중하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공청’책임은 그 전년에 출옥되어서 당시 조직운동을 하는 한편 소위 ‘청총(靑總)’운동에 전념했었다. 그래서 1925년 5월에는 수십만 조직군중 속에서 단 108명으로 비밀결사 소위 ‘조선공산당’을 조직했고, 곧 이어서 ‘공산청년동맹’도 정식으로 조직이 되었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조직의 간부였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소위 ‘민중운동자대회’를 열었는데 왜경의 탄압으로 집회가 못되었다. 그래서 수천 군중을 동원해서 종로야시(鍾路夜市)를 이용해 가지고 ‘일본경찰의 민중탄압반대’ ‘일본제국주의반대’ 등의 구호를 들고 종로 네거리로부터 동대문 앞까지 군중시위를 감행했다.
이것이 소위 ‘적기사건(赤旗事件)’이라는 것이고 그 시위행렬의 주모자로 된 나는 숨어서 일하다가 조직된 ‘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과의 정식 연락공작의 임무를 가지고 다시 모스크바로 밀행을 했다. 동지 일곱은 징역 일년 반씩 치뤘다.
제제다사(濟濟多士)
1924, 5년 두 해 동안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사회주의 운동과 대중조직운동의 창시기라고 말할 수 있고 소위 ‘조선공산당’사건이 드러나서 수백 명이 체포된 후 탄압이 강화되어 표면이 대중운동과 조직운동은 거의 질식상태에 빠져 있었다.
1927년 이후, 즉 소위 ‘제1차 공산당 사건’과 그 제2차 간부의 체포 이후 일본에서 유학하던 신진학도들, 그 중에서도 안광천(安光泉), 한위건(韓偉健), 홍기문(洪起文) 등이 ‘ML당’이란 것을 조직했는데 ‘ML당’은 소위 칼 맑스라는 M자와 레닌이라는 L자를 따서 ‘맑스·레닌당’이라 했다. 이 학도들은 당은 소위 순이론파인데 일본에서도 순이론파로 말썽이 많던 ‘후꾸모도(福本)이즘’의 시조인 후꾸모토 모도오(福本 和夫)의 제자들로서 대로는 자기네 이외의 과거의 모든 조직을 부정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나라 자치운동을 해야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비밀조직체가 있다는 것이 일경에 알려져서 안광천, 한위건 등이 해외로 망명한 뒤에 일시는 김준연(金俊淵)이 그 ‘ML당’의 책임자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ML당’과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것이 소위 ‘신간회(新幹會)운동’이고 그 ‘신간회운동’도 왜경의 극단의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1930년에는 집회금지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사회주의운동 초창기에 있어서의 많은 인재의 배출에 대해서다. 사람마다 그 주관이 다르니까 각양각색의 표본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서 그 몇 해 동안에 많은 인재가 드러났다는 것만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제제다사(濟濟多士)였다.
망명지 상해에서 만난 아내
나는 1925년부터 1932년 왜경에게 잡힐 때까지 7년 동안을 상해를 중심 해서 살았다. 중국조직에 관계를 맺었지만 우리끼리의 조직을 가지고 일했었다. 그때 우리 동지들은 그 대부분이 국내로부터 망명한 사람들이 만주, 노령(露領), 광동 등지에 있던 분들이 모이기도 해서 항상 5,60명으로부터 백 명 내외의 동지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노상해(상해에서 오래 살던 사람)로는 몽양 여운형·최창식·강매련·현진건 등과 1925년 이후에 국내로부터 망명한 사람으로는 홍남표·김형선·김명시·김조이·김찬·정백·한위건·안광천·김단야·원우관·최원택·김동명·김달삼 등과 광동에서는 양명·최추해·팔선재·장래홍·마일명·무정 등 그리고 만주 노령 등에서서는 성시백·김명희·주복 등이 생각이 난다.
우리들은 끝내 표면단체는 가지지 않았었고 ‘한인청년동맹’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해서 청년 교양에 주력했었다. 그 한인청년동맹의 위원장이던 조○○은 1926년에 왜경에게 잡혀 5년 징역을 치뤘다.
상해에는 두 개의 조계(租界)가 있어서 중국을 무시한 딴 나라 정치를 하고 있었으니 그 하나는 ‘공동조계지’라 해서 영국인인 중심이 되어 통치했고, 다른 하나는 ‘불란서 조계지’라 하는데 명칭대로 불란서의 통치구역이다. 우리 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모든 반일본적인 인사들은 전부 ‘불란서 조계지’ 안에 거주했고, 또 사실상으로 불란서 당국의 보호 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불란서 치들이 1928년 이후에는 현저히 친일정책ㅇ르 써서 가끔 일본놈과 타협하고 합세해서 우리나라 애국자들을 체포하는 수가 있었으니 여운형(呂運亨)씨도 공설운동장에서 체포되었고, 안창호 선생이 숙소를 불의습격을 당해서 체포되었고, 나는 불란서공원(고가택공원) 안에서 일·불 경찰에 잡혔다. 그 뒤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불란서 조계지’에서 잡혔기 때문에 모두들 숙소를 감추거나 ‘조계’를 벗어나서 중국거리로 들어가거나 또는 남경 등지로 옮기었다.
내가 상해에 있는 동안에 내 처가 찾아와서 5년간 동거했고 딸을 하나 낳아서 이름을 호정이라고 지었는데 상해의 고명이 ‘호’이기 때문에 상해에서 얻었다는 뜻으로 호정이라고 했다. 호정의 모친은 김이옥인데 내가 신의주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에 귀국해서 병사했다.
상해에서 사십여 경관에 체포
내가 상해에서 잡힌 것은 1931년 6월인데 위에서도 말했지만은 그때 불란서 당국은 일본과 협력하고 합세해서 우리 동포들을 괴롭히고 또는 체포케 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에 각자가 숙소를 엄중히 비밀에 붙이고 거의 교묘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기 때문에 극히 주의해서 지냈지만 두 번이나 비밀숙소를 습격당하고도 몸을 피할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안전지대라고 믿고 지내던 불란서공원 안에서 잡힌 것이다.
그날 우리 몇몇 동지가 불란서 공원 안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중국의복을 입고 약속한 정각에 공원 동북 편 길가 벤치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서○○군이 와서 앉아있었고 공원 밖으로 나갔으니 곧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서군과 같이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있었고 전후 좌우에 양복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맨 놈들이 내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일이 잘못된 것을 직감한 나는 사면을 다시 훑어보고 즉시 행동을 취할 것을 생각하는 판에 공원 밖으로 나갔었다는 정모가 내 앞을 가로막고 “박철환 동무 잠깐 앉으시죠.”(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해외에서는 ‘박철환’이란 이름으로 행세했었다) 하자 나는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불란서인 형사와 문답이 시작됐다. 중국인 형사가 중국어로 통역한다.
“성명은?”
“정상태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중국인이다.”
“무엇 하러 공원에 왔더냐?”
“놀러 왔었다.”
“너 무기를 가졌느냐?”
“없다.”
이런 문답이 진행되자 일본인 중 한 자가(나중에 알고 보니 총지휘자인 아카오(赤尾)라는 자였다) 앞으로 나서면서 영어로 주워섬기는데, “이 자의 대답은 전연 거짓이요. 이 자의 본명은 조봉암이고, 별명은 박철환이고, 공산당 수괴고 불란서 조계 안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의 총지휘자이고, 중국공산당과도 관련을 가진 자로서 당신들에게 미리 제시한 바와 같이(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신장은 오척 오촌, 얼굴빛은 검고, 눈이 크고, 귀가 두텁고, 이마가 넓고, 모발이 검은 것이 조금도 틀림없는 본인입니다.”라고 했다.
전 공원 안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기저기서 왜놈, 왜놈하며 불란서 놈에 대한 욕설이 들린다. 아카오의 말을 다 듣고 난 불란서인 형사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중국어로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슨 소린지 전연 모르겠다.”고 했다. 일인과 불란서인 간에 한참이나 숙의한 끝에 어쨌든지 일단 연행하자고 해서 불란서인이 나를 공무국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까닭 없이 연행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져 들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성원해 주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강약이 부동이어서 나는 일본인 삼십 명과 불란서 공무국 형사대 십여 명 도합 사십여 명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서 자동차에 실리워졌다.
불란서 공무국에서는 경찰책임자인 불인이 즉시 심문을 시작했고 그 문답 내용은 대개는 공원 안에서 불란서 형사와의 그것과 같은 것이며, 나는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과 공원에 산책 갔었는데 까닭 없이 불법 연행을 당했으니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일인 아카오와 공원까지 왔던 불인 형사는 내 진술은 허위라는 것과 아카오가 말하던 모든 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란서인 책임자와는 그렇게까지는 양해가 못되었던지 그 책임자는 말하기를,“이 사람이 중국인이라 하는데 중국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고, 또 당신들은 이 사람이 조선사람이고 박철환이라고 하나 그 역시 우리로서는 증거할 것이 없으니 지금 넘겨 보낼 수는 없소. 자세히 조사한 뒤에 좌우간 결정짓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형사들은 뒤통수를 치고 돌아가고 나는 불란서 공무국에 잡힌 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불란서 공무국에는 한인 형사가 두 사람이나 현직으로 있었고, 일본 놈들은 중국인 정상태라는 것이 한인 조봉암·박철환과 동일인이라는 증거서류를 수백 매 만들어서 불란서 경찰에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국에 입적했었다고 주장해 보았으나 그 증거서류도 제출할 수가 없었다.
열 하루 만에 중국 상해주재 불란서 영사와 만나서 자유의 심볼인 불란서와 그 영지에서 우리에 대한 정치적 처우가 만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해서 공격도 하고 중국인으로 대우함이 당연하다는 주장도 했었다. 그러나 불란서 영사는 최후로 이렇게 권고했다. “당신이 중국에 입적했다는 증거도 없고 또 설혹 입적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1916년 일본제국의 동의 없이는 그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만일 지금 당신을 중국인으로 인증한다면 장개석 정부가 당신을 인수하겠다 하니 중국에 인도되는 경우면 생명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좀 불만 있더라도 일본으로 가시는 것이 좋소.” 그리고 즉석에서 판결을 내려서 일본으로 인도하라 했다.
그래서 불란서 공원 안에서 체포된 지 열 이틀 만에 일본경찰로 다시 인도되었고 상해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서 이십여 일간 갖은 곤경을 겪은 위에 평안북도 경찰부로 옮겨서 다시 삼십여 일간을 시달렸고 또 예심에 걸려서 일년 간을 허비한 끝에 징역 7년 형의 언도를 받고 불복공소도 하지 않고 복역해 버렸다.
신의주 감옥살이
나는 누구에게나 소위 경험담이라고 해서 중언부언 말하는 것을 즐겨 하지 않는 편이지만 더욱이 그 지긋지긋한 감옥살이 이야기를 하란다든지 무슨 소감 감상 같은 것을 말한다든지 하는 것을 특히 싫어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적어 보려 하니 내 일생에, 그 중 중요한 장년시대의 거의 전부라 할만한 삼십 대로부터 사십 대에 걸치는 7년 동안을 감옥살이만을 하고 지냈으니 그것을 빼고 나면 너무 생활에 공백이 커지겠으므로 부득이 간략하게라도 쓰는 수밖에 없다.
내가 상해에서 왜경에 체포된 것은 1931년인데 몇 군데의 취조니 예심이니 하는 것으로 일 년여를 보내고 1932년 12월에야 7년 징역의 형을 받고 붉은 수의복을 입었다.
나는 3.1운동 때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보았고 우리나라 안에서나 또는 일본에서 수십 차의 유치장 생활을 해보았고 별별 고문을 다 당해 보았다. 그러나 이번 같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은 처음인 만치 생각이 많았다. 사람이 7년 동안을 감옥생활을 하는 수가 있을까, 감옥생활을 실컷 해주다가 중도에 옥사라도 한다면 그건 더 분하고 원통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들이 아는 바로도 우리 애국자, 선구자들 중에는 지금도 10여 년 내지 20여 년을 감옥살이를 하고 계시고 또는 감옥살이를 치르고 무사하게 살아 계신 분도 있느니 만치 나도 7년쯤 치러주고 무고하게 출옥해서 장래를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지 얼마 동안 살아보면서 무슨 구체적인 방침을 세우기로 하되 한가지 결심을 했었다. 그 결심이란 것은 이렇다. “우선 살아가는 도중에 내 인격이 무시되고 금수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경우면 언제든지 그자와 일대일로 사생을 결단 짓는다.” 즉, 무리한 욕설이나 따귀 한대만 맞더라도 그 놈을 죽여버릴 결심을 했던 것이다.
감옥살이는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많다. 견디기 어려운 규칙과 명령이 있다. 그 규칙, 그 명령을 규칙적으로 지켜주고 그 외의 무리에 대해서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고 싸운다. 속히 생명을 끊기 위한 수단으로 믿고 결사적으로 싸운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붉은 수의를 입었다. 그러니 만치 나는 징역 7년 동안에 단 하루도 방심한 일이 없고 항상 긴장했었다. 또 그런 만치 나는 감옥살이 7년 동안에 단 한번도 무리한 욕을 먹거나 따귀 한대도 맞은 일이 없었다. 사람이 어떤 중요한 결심을 하고 그것을 굳게 실천하려 들면은 그 굳은 결의가 얼굴에까지 나타나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섣불리 달려들지를 못한다는 것을 나는 내 체험에서 알았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렵고 되어지기 어려운 몇 가지 기록을 냈다. 첫째, 나는 7년 동안에 단 하루도 병감에 누워본 일이 없고 단 하루도 휴역(중병은 아니나 일할 수 없는 수인에게는 휴역을 시키는 것이다)을 한 일이 없고, 단 한번도 처벌을 당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붉은 수의복을 입은 그 봄에 체중이 57킬로였는데 7년 뒤 만기 출옥하는 날은 56킬로였다. 이런 사실은 물론 내 건강이 좋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각오와 결의로부터 생긴 긴장상태의 지속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보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감옥 안에서는 사람으로는 당할 수 없고 사람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이 많다. 어떤 자는 돼지고기를 한 점만 먹으면 살 것을 그것을 못 얻어먹어서 죽는 자도 보았고, 어떤 독립운동자는 10년 징역을 다해주고 만기 출옥하는 전날에 병사하는 것도 보았다.
나는 7년 징역을 받고 1년 감형(소위 황태자가 생겼다는 은사)되어서 실형은 6년이 되었지만 예심 기타 것을 합하면 결국은 에누리 없는 7년 감옥살이를 치렀는데 위에서 말한 것 같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살아주었으니까 정미 7년 살이가 되고 완전복역이 되는 셈이다.
독방서 바느질도 하고
나는 붉은 수의를 입자마자 독방 생활이 되었고 독방에서 소위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딴 것이 아니라 바늘을 가지고 걸레를 깁는 일이었다. 사방 한자 정방형 되는 걸레감을 가지고 바늘로 가로 세로 누벼 놓는 일이다.
먼저도 이야기를 했지만 동상으로 인해서 손가락을 여러 개 잘라버렸다. 그러니 그 손가락을 가지고 바늘을 쥔다는 것은 난사 중에 난사였다. 더욱이 신의주 겨울은 의례히 영하의 추위고 독방은 바깥보다 더 춥다. 거기서 그 손가락을 가지고 바느질을 한다니 그건 실상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또 경험이 있는 분은 다 아는 일이지만 동상을 당한 부분은 특히 추위를 타서 엄히 경계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즉시 피부 빛이 퍼렇게 되고 감각을 잃게 되며 조금만 그 시간이 길게 되면 거듭 동상화해서 피부가 부풀어오른다. 그런데 거기서 그 손가락으로 바느질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살이라는 것은 그것을 해야 되고 하는 체 해야 되는 것이다. 형리(刑吏)들도 그런 사정을 알아서 그런지 손이 시려서 걸레를 깁다 말고 팔짱을 끼고 앉았어도 일 않는다는 시비를 하거나 많이 하라는 독촉도 아니했었다.
한 6개월 동안 독방에서 그 꼴을 하고 있으려니까 전옥(典獄)이 동정인지 규칙인지 몰라도 밤에는 독방에 있고 낮에는 공장에 나가서 일하라는 명령이었다.
독방에 혼자 앉아서 걸레와 씨름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사람들 있는 공장에 나가서 일하며 지내는 것이 좋다고도 생각이 되어서 아무 말 없이 나갔었다. 나가보니 그 작업이란 것이 보철공(補綴工)이라는 것인데 역시 바늘을 가지고 걸레를 깁고 헌 털뱅이 수의복을 깁고 고치는 일이었다. 나는 전옥 면회를 청해 가지고 불복항의를 해보았다. “신체적 조건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작업만 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요.”라고 했더니 전옥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공장은 사람도 많지 않고 조용하고 작업도 힘들지 않은 곳이니 휴양하는 셈치고 나가 있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 같은 불온사상을 가지고 또 선전 선동력이 있는 수인을 젊은 수인이 많은 큰 공장에 보내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나간 보철공이란 것은 늙은이, 병자, 유약자만이 모이는 곳이고 일깨나 하고 제법 부려먹을 만한 놈은 한 놈도 보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6년 동안 보철공이라는 직업으로 바느질, 걸레 깁기, 헌 털밸이 꿰매는 일을 했었다.
감옥살이하는 가운데 몇 가지 기술을 익혀서 그 덕으로 출옥한 뒤에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무슨 일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재미도 불고 시간가는 것도 빠를 것인데 헌 털뱅이 꿰매는 일이란 결코 기술될 것도 없고 재미 붙을 리도 없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람은 무슨 일이나 한가지를 오래 꾸준히 계속한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꾸준히 계속하는 데서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생기고 권위가 생긴다는 것이다.
수인전옥(囚人典獄)이라 불리우며
나 자신은 잡역 한번도 되어본 일은 없지만 어는 담당간수라도 내 의견을 물어서 잡역을 내었고 내 의견을 듣고서야 작업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내가 잘나고 내 지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일을 잘 알고 저희들이 일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이것은 일반 사회나 어느 단체생활에 있어서도 꼭 같다. 급작히 지위를 차지한 사람보다고 실제의 일을 잘 알고 잘하는 사람이 거기에 주인이 되는 법이다.
나는 징역살이가 그리 고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주제넘은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보철공은 물론 세탁부에 이르기까지 수인들의 피복관계의 일은 일일이 총찰을 해서 깨끗하게, 든든하게, 보기 좋게 하라도 듣기 싫게 잔소리까지 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신의주의 십일월이 되면 대개는 영하 추위고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는다. 그래도 웬만해서는 수인에게 솜옷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별안간 강추위가 덤벼들어서 수인들이 일은 안하고 손발만 싹싹 문지르고 있게끔 되면 그때는 저희들이 당황하여 솜옷을 내주라고 야단을 치게 된다. 그런 경우에 그 솜옷이 준비되지 못했다면 아무리 감옥 당국이 솜옷을 주고 싶어도 못 주게 되고 수인들은 떨어야 되고 얼어 죽는 수가 많다. 나도 처음 몇 해에는 이런 꼴을 본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솜옷과 솜이불은 늦어도 십일월으로 완전히 준비를 해놓아야 되는데 물자가 못 들어온다. 솜 트는 수인의 인원이 부족하다, 보철공의 인원이 부족하다, 또는 그 보철공이 일을 게을리 한다든지 이을 마구해서 며칠 입으면 헌 솜 뭉치가 꾸역꾸역 나오게 되는 경우, 그런 모든 경우에 나는 핏대를 올리며 형리에게나 수인에게나 듣기 싫게 잔소리를 했고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 자들이 나를 ‘수인전옥’이라고도 불렀다. 즉 징역꾼, 전옥이란 뜻이었다.
나는 지금 이야기한 그 굉장한 헌 털뱅이 깁기 외에 서적 정리하는 것을 했다. 수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준비해 놓은 책자들은 매달 한번씩 수인의 청구에 의해서 돌려볼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이다. 책자를 만지게 되는 만치 다른 수인들에 비해서 좀더 독서할 기회를 가졌었고 따라서 감옥에서 준비한 책이란 것은 대개는 읽었다. 나는 그 안에서 비로소 사서삼경이란 것을 통독해 보았고 한시(漢詩)의 작법이나, 한시가 어떤 것인가도 약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독서의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때 왜경방침은 노어, 영어에 관한 것은 무엇이던 열람금지이고 사회과학에 관한 것은 더군다나 한 책도 없을 때다. 그래서 나는 입옥되자마자 독일어를 시작했었다. 하도 그것만 들여다보니까 동화(童話)쯤은 원서 그냥 읽을 수가 있었고 신약성서는 여러 번 공부를 한 셈인데 출옥해서 몇 해 되니까 아주 깨끗이 잊어버렸고 간혹 영화에서 독일어가 나오면 몇 마디씩 귀 익은 발음이 들릴 뿐이니 그 공부는 완전히 허탕이었다. 1925, 6년 경에는 제법 공부한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헛 징역을 살아준 셈이다.
감옥이란 문자 그대로 생지옥
감옥살이니 만치 고생이 얼마나 되더냐는 것을 묻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다. 자유가 무엇이며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일시 일각이라도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 배가 고픈 맛을 아는 이라면 그것이 한 때 두 때가 아니고 몇 달 몇 해니 그 맛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젊은이들이면 하루 이틀만 독방을 금해도 온몸이 몸살 난 것같이 찌뿌듯하고 좀이 쑤시고 신경질이 되는 법인데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 몇 해라면 그 고난이 얼마쯤은 족히 짐작이 될 것이다. 나는 물론 그 많은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니 그 비슷한 경험을 맛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유의 구속이라는 것 외에는 추위, 고생이 제일 컸다. 신의주 추위는 이름난 추위다. 그런데 수인들은 그 추위에 대해서 거의 무방비상태다. 독방 마루바닥 위에 얇은 거적 한 입을 깔고 이불 한쪽을 덮고 눕는데 밤새 몸이 떨릴 뿐이지 푸근히 녹는 일이 거의 없다. 떨다 떨다 지쳐서 네모난 궤짝 속에 넣어서 파묻는 것뿐이고 요행 죽지 않으면 사는 것이고 살면 징역살이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나는 잡방에도 잠시 있어본 일이 있었는데 1홉 5작방(서울식이라면 칸 반쯤 되는 방)에다가 17,8명 내지 20명쯤 쓸어 넣어 놓으면 앉을 때는 서로 비벼대고라도 앉지만 누우려면 사람의 몸뚱이들만 자리에 부치고 사지는 서로서로 남의 몸 위에 놓게 된다. 5,6월 삼복 중에는 미쳐나가는 놈도 있고 기가 막혀서 죽어나가는 놈도 가끔 있지만 겨울 추울 때는 오히려 그 편이 얼어 죽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서로 비벼대고 비틀고 자고 나면 사방 벽면에 오부씩이나 될만한 두께로 하얗게 성애가 슬어서 마치 사명당 사처방 같이 된다.
새벽에 기상호령이 나면 입고 있던 감방의를 개켜놓고 아주 완전히 알몸뚱이로 조그만 수건 한 장으로 앞을 가리고 공장으로 향한다. 어떤 때는 눈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살점을 여이고 뼈 속을 얼어 붙일 듯한 찬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제친다.
일백오십 미터 내지 오백 미터 되는 공장까지 뛰어가서 콘크리트 바닥에 개켜놓았던 얼어붙은 소위 작업복을 입는 것이고 얼음이 버적하는 한 컵 물로 코끝에 칠하는 것으로 세수한 셈을 치는 것이다. 사람 육체의 조직은 어떠한 야생동물보다도 완강하고 환경에 적응성이 강하다는 것을 나는 깊이 깨달았다. 스파르타의 교육원리도 아마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만하면 감옥살이가 고생이 되느니 안 되느니 하는 말은 더는 길게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끼리 사는 데에는 그 환경여하를 막론하고 서로 살아갈 길을 찾고 살아갈 방도를 알아내는 것이며 또 그리하다 보면 그 안에서도 삶의 의의도 있고 가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도 되는 것이며 더욱이 통계상으로 보면 감옥 안에서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나온 사람의 수가 많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감옥살이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출처] 사) 죽산 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
담뱃불 고문에 매타작…"일본이 날 투사로 만들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3> 조봉암과 진보당, 첫 번째 마당
프레시안 : 조봉암은 1899년에 태어나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국권 상실, 식민 지배, 해방, 전쟁, 독재 등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거듭 겪었다. 조봉암은 그러한 역사의 격류를 헤쳐 가고자 목숨을 내걸고 분투한 인물 중 하나다. 조봉암의 생애를 되짚는 작업을 통해 이 시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역정(歷程)을 찬찬히 다시 살폈으면 한다. 아울러 조봉암과 진보당을 통해, 예전에 '현대사 이야기'에서 부분적으로만 다룬 1950년대 한국 사회와 4월혁명기 진보 세력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짚었으면 한다. 우선 조봉암은 어떤 계기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나.
서중석 : 조봉암의 사회 활동은 1919년 3.1운동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조봉암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한테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지식인, 학생,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던 여러 활동가들이 3.1운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고, 조봉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조봉암은 3.1운동으로 체포돼 1년 정도 투옥 생활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3.1운동 이전에 비해 아주 딴사람이 돼가지고 출소했다.
그 변화에 대해 나중에 조봉암은 "3.1운동을 통해서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됐고 내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그런 청년일 따름이었는데,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 조봉암과 진보당은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살필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사진은 2011년 7월 15일에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 및 업적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 모습. ⓒ연합뉴스
'죽었다'던 한국인을 살려낸 3.1운동…조봉암도 "한 개의 한국 사람"으로 재탄생
프레시안 : 근대에 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나.
서중석 :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적어도 한말 이후엔 민족의식이 왕성해서 1910년대에도 그걸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들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민족이나 민족의식은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이라는 것은 근대적 민족의식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민족이라는 말 자체를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쓴 말을 차용한 것이긴 한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된 후 근대적 민족의식, 애국심, 국가 의식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늘어났다. 그건 사실이지만, 한국인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 숫자는 소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1910년 일제한테 나라를 강탈당한 것 아니겠나.
그런 속에서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1910년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갖게 됐다. 이 점은 해외 이주민, 그러니까 북간도와 서간도에 살게 된 사람들 또는 노령이라고도 이야기하는 러시아령 연해주나 시베리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아울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그런 걸 고취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여전히 아주 소수였다. 1919년 이전으로 따지면 그저 몇 십만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한반도에 살고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아주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1910년 이전에 어렴풋이 느끼거나 알고 있었던 민족의식, 애국심 같은 것조차 마멸된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고양되는데 피압박 민족들, 당하고 억눌리던 민족들의 경우 민족의식이 굉장히 급속하게 확산된다. 그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에 간 유학생들, 미주에서 활동하거나 중국에 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 있던 지식인, 학생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다. 그러나 일반 대중, 한국인의 대다수는 3.1운동 때 "만세!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속에서 민족의식 또는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같은 공동체를 가져야 할 민족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 이런 동일체 의식이 민중 다수한테 강한 형태로 퍼져 나가는 건 3.1운동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3.1운동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였나.
서중석 : 3.1운동 이전에는 '한국인은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뭐냐면 "한국인은 썩어버렸다. 썩어지고 있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해외 이주민들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단 통치 하에서 한국인이 워낙 심한 압제를 받지 않았나. 그러면서 무기력하게 되고 사회 의식 같은 걸 갖기가 어려웠던 상태를 잘 말해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국권 상실 직후인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학교로, 수천 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항일 무장 투쟁의 요람이었다.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등이 주축이 돼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만든 후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그 출발점이다. "썩어지는 우리 민족"이라는 표현은 신흥무관학교 교가 3절에 나온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
우리가 잘 아는 염상섭의 중편 소설 <만세전>, 이건 염상섭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원래 제목은 <묘지>였다. 처음에 그 제목으로 발표됐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 현해탄을 건너 한국 땅에 오면서 느낀 여러 가지를 써놓은 건데, '3.1운동 이전 즉 만세 전 한국이란 그야말로 묘지와 같은 나라다', 그걸 표현한 것이다. 그런 상태를 잘 그린 소설이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3.1운동이 터진 것이다. 만세 운동이 크게 고양되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도 민족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 '내가 한국인이다'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그건 '내가 인간이다'라고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도 자서전과 비슷한 글에서 조봉암과 거의 똑같이 표현했다. "3.1운동을 통해서 내가 민족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3.1절, 광복절을 굉장히 뜻깊은 날로 여기지 않나. 4대 국경일 중에서도 이 두 개가 유독 우리 가슴에 많이 와 닿는 국경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한국인한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런 3.1운동이 조봉암으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만들었고,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저 '일본놈들은 나쁜 놈들이다' 하는 정도의 불평불만을 넘어 3.1운동을 거치며 민족의식, 사회 의식을 갖게 됐다고 조봉암이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봉암뿐만 아니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3.1운동을 통해 그와 같은 자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옥살이와 모진 고문 견뎌내고 일본에서 사회주의와 만난 청년 조봉암
프레시안 : 3.1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은 사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 단체로 알려진 흑도회에도 몸담는다. 이 시기에 아나키즘 관련 단체를 거쳐 사회주의자로 나아간 이가 조봉암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눈에 띄는 경로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직후인 1920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됐다. 이때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조봉암을 '비행기에 태운다'면서 두 팔을 뒤로 묶고 천장으로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혁대나 검도용 죽도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뿐만 아니라 발가벗긴 궁둥이를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고, 기절하면 냉수를 뒤집어씌우고 그랬다. 왜 이런 일을 당했느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폭탄을 많이 만들어서 YMCA 중심으로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허위 제보가 들어가서 조봉암이 그렇게 당한 것이다. 훗날 조봉암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십 차례 유치장살이를 해봤지만 이때보다 더 힘든 일은 없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면서 조봉암은 세계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 민족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21년 조봉암은 일본 중앙대학(주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면서 박열 등과 함께 흑도회를 조직했다고 자료상에 나온다. 대개 아나키스트 단체에는 검을 흑(黑) 자가 많이 붙지 않았나. 그와 마찬가지로 검을 흑 자가 붙은 흑도회가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 단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걸 아나키스트 단체로 여기기 쉽지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우선 관련된 사람들이 과연 아나키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 조직에 들어갔느냐, 이 점이 문제다.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주로 일본 같은 데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하나에 경도됐다',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또 그 시기에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체계화된 형태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한국 아나키스트한테 큰 영향을 끼치는데, 크로포트킨의 주요 사상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건 192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몇 가지를 놓고 볼 때, 이 시기 흑도회가 아나키즘 단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은 왜 사회주의자가 됐나.
서중석 : 우선 당시 일본 도쿄대, 교토대의 주요 청년 학생들 중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울어진 사람이 많았다. 최고 선진분자,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도 그랬고, 아나키즘이 강한 영향을 끼친 중국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조봉암 같은 고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흑도회 같은 데 들어갔다가, '이게 뭐냐.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게 뚜렷하지 않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갖기 쉬웠다. 그와 달리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아주 뚜렷한 세계관을 제시했고 무엇보다도 이론 체계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반제국주의 논리가 분명했다. 조직적으로도 '이렇게 조직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걸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나. 그런 면에서도 아나키즘하고 달랐다.
그러면서 '식민지의 참담한 상황을 볼 때 이런 급진적인 사상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국내외에서 급격히 늘었다. 3.1운동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야말로 정말 새로운 빛이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눈뜨게 만들고 투사로 싸울 수 있게 했다', 이런 것이 폭풍이라고 할까, 굉장히 강렬한 섬광처럼 젊은이들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조봉암도 아주 예민한 20대 초반의 고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이미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확히 알았느냐 하는 건 별개 문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다시 시베리아 거쳐 모스크바로
프레시안 :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인 1922년 조봉암은 조선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조봉암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는데, 이때 어디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1922년 시베리아 베르흐노이진스크(베르흐네우딘스크, 오늘날 울란우데)에서 한국 공산주의자 통합 회의가 열렸을 때 조봉암이 정재달과 함께 국내 대표로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는 당시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운동이 시베리아, 연해주 쪽에서 1917년경부터 파급됐다고들 이야기하는데, 1921년 (고려)공산당이 조직될 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이 두 개로 갈라져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상해파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는 러시아에 이주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와 달리 이르쿠츠크파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나중에 여러 한국인도 이르쿠츠크파로 분류되기는 한다. 그리고 상해파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다시 말해 '덜 볼셰비키적이다', 이런 비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에 비해 이르쿠츠크파는 '공산주의 조직 논리와 이론에 더 철저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반면 '러시아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이러한 양 파가 워낙 심하게 대립, 갈등하니까 러시아 쪽에서 그 갈등을 어떻게든 조정해 양 파가 같이 일할 수 있게 하려 했다. 공산당이 그런 식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보고 통합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바로 깨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조봉암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이제 공산주의 수업을 제대로 받게 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년도 채 안 됐다. 거기서 그렇게 충분히 학습한 것 같지는 않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1921년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 세운 교육 기관이다. 조봉암을 비롯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의 덩샤오핑 등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물들도 이곳에서 교육받았다.)
프레시안 : 베르흐노이진스크 통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지 1년 만인 1923년 조봉암은 다시 귀국한다. 돌아온 후 조봉암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봉암은 귀국 후 1923년부터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당시엔 실제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사회주의자다' 이렇게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의 현장으로 직접 뛰어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노농 단체(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거나 청년 단체의 간부를 많이 했다. 서울파로 불린 서울청년회계도 그랬고 화요파로 불린 화요회계도 그랬다. 1920년대 중반 양대 세력이라고들 하는 이 두 공산주의자 그룹에선 청년 운동을 많이 했다. 박헌영도 그때쯤 되면 감옥소에서 나와 조봉암과 함께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한다. 박헌영은 화요회에서도 조봉암과 함께 활동한다.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어서 단체 이름을 화요회로 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할 때에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들과 함께 강연회, 연설 같은 것을 많이 했다. '새로운 사회 의식에 눈을 떠라. 청년들의 사명은 이러저러한 것들이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 아니었겠나.
그런 속에서 공산당을 조직하는 활동이 이뤄진다.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그전부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있었지만, 특히 이 시기가 되면 그런 것들이 구체화된다. 1924년 4월이 되면 '양대 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는데 두 조직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화요파와 서울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1925년 4월 17일, 화요파가 중심이 돼 아서원이라는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만들어낸다.
제1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약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봉암은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이때 조봉암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간접적인 자료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됐을 때 중앙검사위원 직책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그리고 김찬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러 군데에 나온다. 조선공산당을 만든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의 자매 단체라고 볼 수도 있고 하부 단체라고도 볼 수 있는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가 박헌영 집에서 만들어진다. 이때 조봉암이 사회를 본 것을 통해서나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명이 된 것을 통해서 보더라도 역시 박헌영, 김찬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은 이 두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다음 달인 5월이 되면 고려공청 대표이자 조선공산당 부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떠났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승인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조봉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조선공산당 대표로 조봉암과 함께 간 사람은 조동호다. 자료에 따라 조동우라고도 나오는 사람인데, 활동을 아주 많이 한 인물이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 양쪽에서 승인을 받아내는데, 그와 함께 국제공산청년동맹에 '우리 고려공청의 학생들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받아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래서 유학생 21명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보내는 것을 승인받는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유학생 중에는 권오직(고려공청 제2대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동생)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특히 유명한 여성 활동가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고명자, 김명시, 김조이 등 그 후 쟁쟁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때 교육받으러 러시아로 떠난다. 김명시는 훗날 중국 연안(옌안)에 가서 대단한 활동을 해 김명시 장군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김조이는 조봉암과 부부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돼 있고, 고명자는 나중에 김단야의 애인이 되는 사람이다.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 후 조봉암은 어떤 활동을 펼치나.
서중석 : 1925년 11월 유명한 신의주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이 와해된다. 이 사건으로 고려공청과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는데,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 청년들이 (술자리에서) 친일파들을 습격한 것이다. 경찰이 '뭔가 수상하다' 해가지고 청년들 집을 수색하는데, 그때 박헌영이 조봉암 쪽으로 보내는 문서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그 후 조봉암은 김찬,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라는 걸 설치해 거기서 활동한다. 이때 국내에서는 제1차 조선공산당에 이어 비밀리에 강달영을 중심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된다. 그리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서 만주총국을 설치할 때 조봉암은 책임비서라는 요직을 맡는다.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국내에서 1926년 6.10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오설 쪽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조선공산당 해외부는 김단야가 중심이 되고 김찬, 조봉암도 다 연결돼 있었으니 이들이 함께 논의한 것일 텐데, 이걸 '전달'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고 '지시'라고 표현한 것도 있다. 해외부는 주로 상해(상하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실 상해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엔 해외부가 상당히 강했다. (권오설은 조봉암과 함께 제1차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청 책임비서로 활약한 인물이다.) 6.10만세운동 직후인 1926년 7월 조봉암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상해에 있던 코민테른 원동부 위원으로 활동한다. 한국 공산주의자를 대표해 그렇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1924년에서 1926년에 걸쳐 조봉암은 공산주의 활동가로서 대단히 중요한 활동, 어느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2015.04.26
'간첩 무죄' 조봉암, 독립 운동 서훈 못 받은 이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4> 조봉암과 진보당, 두 번째 마당
프레시안 :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 조봉암은 당 재건 활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국내에서 제4차까지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는 동안 조봉암은 만주, 상하이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했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제2차 이후 조선공산당 지도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점이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서중석 : 조봉암이 국내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은 국내에 들어오면 체포될 우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건 김단야나 김찬도 비슷했다고 본다. '특고'(특별고등경찰)를 비롯한 일본 경찰이 이미 조봉암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고, 조봉암의 얼굴을 모를 리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계속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국내 지하 아지트가 튼튼했다면 들어와서 활동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조봉암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 국내에 들어오기는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제2차 조선공산당 쪽과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조봉암만 그런 게 아니라 김단야, 김찬 이쪽이 다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 해외부의 김단야, 김찬, 조봉암은 아주 거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계속 중앙 간부라고 주장하면서 국내 간부들을 지휘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축이었던 제1차 조선공산당은 신의주 사건으로 국내에서 이미 없어지고, 비밀리에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한 제2차 조선공산당을 만든 상태였다. 제2차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자신들 중심으로 당 활동을 하려 한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해외부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식으로 지시라고 할까 지휘하는 것들이 있고, 또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 중앙 간부로 임명한 바도 없는데 해외부 사람들이 중앙 간부로 활동하니 제2차 조선공산당 주축들이 '당신들은 중앙 간부가 아니니 그렇게 활동하지 마라. 우리가 당 중앙이다. 어떻게 우리한테 지시하는 게 있을 수 있느냐', 이런 주장을 편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겪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은 비밀리에 김철수 등을 통해 제3차 조선공산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제2차 조선공산당 후기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김철수당'이 활동하게 된다. 김철수는 원래 상해파여서도 그렇겠지만, 폭넓게 여러 세력을 규합해야만 조선공산당이 곤경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파를 많이 받아들였다. 또 제3차 조선공산당을 ML(마르크스·레닌)파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엔 일본 유학생들이 상당수 들어 있었다. 김철수가 이쪽도 받아들이고 하면서, 이쪽한테 제3차 조선공산당이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화요파는 그전부터 서울파와 심각한 갈등 관계를 맺고 있었고 ML파에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도 '김철수당'이라고 할까, 조선공산당 국내파 쪽과 사이가 원만할 수 없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조봉암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27년 민족 유일당 운동에 동참한다. 해방 후 조봉암이 보인 모습에 비춰보면, 민족주의자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주의자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땠나.
서중석 : 조봉암은 1927년이 되면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는데, 조봉암만 그렇게 활동한 건 아니었다. 이 시기에 많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같이 활동하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신간회를 1927년에 조직했고, 만주에서도 정의부, 신민부 같은 여러 단체가 '유일당을 만들어서 독립 운동 전선을 좀 더 강력하게 통일해야 한다'는 활동을 했다. 거기서도 유일당 운동 또는 유일 독립당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산해관 안쪽)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유일당 운동 또는 유일 독립당 운동을 전개했다. 사실 6.10만세운동을 벌이려 할 때 이미 국내 조선공산당 쪽에서도 유일 독립당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건 국내, 만주, 중국 관내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같이 일어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건 1927년 4월 민족주의자로는 홍진(임시정부 전 국무령)이 대표가 되고 사회주의자로는 홍남표가 대표가 돼서 '전 민족적 독립당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국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상해 촉성회)를 만든다.
조봉암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틀림없다. 다만 이 당시 조봉암이 폭넓은 좌우 합작 또는 국공 합작 비슷하게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협동과 단결을 얼마만큼 중시했는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뚜렷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봉암이 1925년에 쓴 글 가운데 그런 것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6.10만세운동 당시 김단야를 비롯한 해외부의 활동에서 그런 면이 다분히 보인다. 또 조봉암이 상해 촉성회를 만들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활동을 한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29년 10월 조봉암은 구연흠, 홍남표와 함께 사회주의자를 대표해서,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많이 한 이동녕, 조완구 같은 민족주의 원로들과 함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라는 걸 만들어서 활동을 계속했다. 유호(留滬)에서 호는 상해를 가리킨다. 지금도 상해에 가면 자동차 뒤에 '호'라고 쓰여 있지 않나. 즉 유호는 '상해에 머물고 있는'이라는 뜻이다.
어쨌건 이처럼 민족주의자와 조봉암을 비롯한 사회주의자가 함께 유일 독립당 운동을 펴지만, 상해 촉성회는 별 활동을 못 하게 된다.
프레시안 : 어째서 그렇게 되나.
서중석 : 그 무렵 중국의 국공 합작이 깨지고 장개석(장제스)의 국민당 권력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심한 대립, 다툼이 나타난 것이 영향을 끼친 면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상해 쪽은 독립 운동을 위한 물적인 조건이 상당히 열악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컨대 만주만 하더라도 이주민이 상당히 있지 않았나. 정의부, 신민부, 그리고 그보다 나중에 만들어지는 국민부는 모두 그런 이주민들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상해는 그러한 이주민 기반이 대단히 약했다. 한국인 거주민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소수였다.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약했다.
거기다가 여러 독립 운동 세력 또는 민족 해방 운동 세력, 사회주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통합해서 일을 해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통합 세력을 구성해 일을 해나가는 게 상해에서 쉽지 않았다는 건 이 시기에 임시정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거의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상해 촉성회도 일을 해나가기가 굉장히 어렵지 않았겠느냐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조봉암은 1929년에 다시 이동녕, 조완구와 함께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만들어냈다. 그건 계속해서 이런 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이라는 걸 만든다. 여기 들어온 단체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점에서 이 조직을 좌우 연합이나 합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도 전선체였고, 여러 단체를 규합해 전선체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여기서도 소련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중국의 혁명, 이건 사회주의 혁명을 주로 가리키는데 그걸 지지하면서 일제를 타도해 조선 독립을 획득한다는 걸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건 틀림없다. 그 후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 만주가 전반적으로 일제 손아귀에 넘어갈 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가 큰 영향을 받는데, 그럴 때에도 1931년 11월 상해한인반제동맹이라는 전선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상해 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태를 맞이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조봉암도 1927년에 입당해 상해에서 한인 지부를 결성했다. 9.18사변 전인 1931년 1월에 중국공산당 상해지부 서기를 했다고 나온다.
하여튼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이 당시에 활동했는데, 그건 러시아에 가 있던 사람들이 소련공산당원으로 활동한 것하고 유사한 면이 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도 조금 있으면 다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나. 그런 것과 성격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후 조봉암은 해외에서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 유일당 운동 등에 함께했다. 사진은 2013년 7월 31일, 망우리 묘지공원(서울 중랑구)에서 열린 조봉암 54주기 추모제 모습. ⓒ연합뉴스
7년의 수감 생활과 감옥에서 맞은 40대
프레시안 : 조봉암은 33세이던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된다. 그 후 7년간 옥살이를 하며 감옥에서 40대를 맞는다. 조봉암은 어떻게 하다가 체포됐나.
서중석 : 조봉암은 1932년 9월에 체포된다. 그때 체포되는 건 조봉암만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홍남표를 비롯한 주요 공산주의자들 다수가 체포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안창호 등도 체포된다.
이건 무엇 때문이었느냐. 당시 상해 임정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관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해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했고, 사회주의자들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4월, 유명한 윤봉길의 거사가 일어났다. 대단한 폭탄의 위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데 이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상해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과 상해 침공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장에서 바로 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죽인 것 아닌가. 그러자 일제가 '이제 상해에 있는 한국인 활동가들은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가만 놔두지 않겠다',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이 시기에 상당수 체포되고, 그때부터 임시정부도 참 긴긴 세월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이때 체포된 조봉암은 7년 징역형을 받는데 나중에 1년이 감형되기는 했다. 그래도 1939년 7월에 출옥했으니까 거의 7년을 꼬박 채웠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감옥에서 나온 후 조봉암은 해방이 될 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체포된 때부터 따지면 13년의 공백이 있었던 셈인데, 이는 해방 후 조봉암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조봉암은 어떻게 지냈나.
서중석 : 조봉암은 감옥소에서 나온 후 유휴분자로 지냈다. 우리말로는 왕겨연료조합이라고 표현되고 한문으로는 비강조합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했다. 뭐냐 하면 정미소에서 왕겨, 그러니까 쌀 껍데기를 넘겨받아서 연료로 배급하는 작은 회사 같은 곳이었다. 왕겨연료조합은 그런 곳인데, 조봉암은 인천에 있던 비강조합에서 조합장으로 활동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조봉암만 유휴분자였던 건 아니다. 그 무렵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들, 예컨대 해방 직후 장안파 조선공산당의 거물로 이야기되는 최익한, 정백, 이영 같은 사람들도 향리에서 또는 서울에서 유휴분자로 지냈다. 일제가 워낙 철저하게 감시한 것도 있고 여러 조직과 연결이 끊긴 것도 있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장안파로 불린 이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나중에 재건파한테 되게 당한다. '너희는 그때 뭐했느냐', 이런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사실은 재건파 쪽에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었다. 재건파 중에는 일제 말기에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고 감옥소에 들어간 사람도 많기는 했지만, 예컨대 조봉암하고 같이 인천에 있었고 재건파에 속하게 되는 이승엽은 유휴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이 시기에 이승엽이 별다른 활동을 했다는 자료가 안 나온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결성됐다. 장안빌딩에서 결성 모임이 이뤄져 장안파로 불렸다. 그러나 5일 후 결성된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에 주도권을 뺏기고, 재건파 중심의 조선공산당에 흡수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이한 해방
프레시안 : 이 시기에 박헌영은 어땠나.
서중석 : 그러면 박헌영은 활동을 많이 했느냐. 박헌영의 경우 조봉암보다 1년 늦은 1933년에 체포됐다. 그리고 조봉암이 출옥한 직후 출옥했다. 박헌영은 6년 징역형을 받았다. 조봉암이 박헌영보다 형량이 더 많았다. 박헌영보다 조봉암이 공산주의자로서 더 중죄를 지었다고 일제 관헌들이 판단한 모양이다. 6년을 다 살지는 않았고 박헌영도 1년 일찍 나왔다.
그러고 나서 박헌영이 일제 말 공산주의자들의 최후의 조직적 활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성콤그룹 책임자로 맹활약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굉장히 짧았다.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지 1년 조금 지나서 1941년에 들어가면 일본 경찰이 추적하게 된다. 그 때문에 박헌영은 피신하게 되고, 1942년 말이 되면 광주 벽돌 공장 노동자로 들어가서 은거한다. '박헌영이 지방 동지들과 연계를 구축했고 당 재건 준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고 일부에서 쓰고는 있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어디에서도 안 나온다. 몇몇 동지들하고 연락하는 정도의 활동이었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갓 공산주의자가 된 청년들이 계속 잡혀오면서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런 자료는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거물들은 감옥소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조봉암만 활동을 못한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건 조봉암은 이 시기에 아무런 활동도 못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 고문실을 재현한 모습. 일제 때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군사 독재에 저항한 여러 민주화 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대한민국 초대 내각(가운데가 이승만, 바로 뒤 왼쪽이 조봉암)
프레시안 : 조봉암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나. 이와 관련해,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8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조직되는데 여기서도 조봉암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 함께하자는 제안을 여운형 쪽에서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제안이 왔으나 조봉암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서중석 : 조봉암은 1945년 1월경 헌병사령부 예비 검속에 걸렸다. 이때 많이 걸려들었는데, 조봉암의 경우 여러 번 예비 검속에 걸렸다고 자기 글에 썼다. 그래서 그해 8월 15일까지 구금돼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 최익한 등 40여 명의 정치범 출소를 맞으러 오는데, 그때 조봉암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게 된다.
일제 말기에 조봉암이 유휴분자가 되고 활동을 못하게 된 데에는 경성콤그룹과 관계가 나빴다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생각한다. 조봉암은 나중에 주로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경성콤그룹 쪽에서는 해방 이전부터 조봉암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경성콤그룹과 조봉암의 이런 관계는 해방 후 조봉암이 박헌영과 극적으로 갈라서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 것도 작용했고, 또 거물이던 조봉암하고 선을 대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등의 여러 문제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다른 공산주의 조직과 연결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것 때문에도 이 시기에 경성콤그룹 또는 다른 공산주의 조직과 다 연결이 안 되고 결국 조봉암은 유휴분자로 남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판단한다.
건국동맹의 경우 비밀 단체로 아주 은밀하게 조직해야 했다. 그래서 여운형 및 그와 가까운 동지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국 조직 및 중앙 조직을 꾸렸다. 여운형 쪽이 조봉암한테 건국동맹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어떤 자료에도 안 나왔다. 조봉암은 그 당시에 여운형 쪽과 연결될 수도 없었지 않나, 그렇게 보인다.
일제와 유신 체제의 닮은꼴 폭력, 전향 공작…사회주의자는 어떻게?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몇몇 자료를 예전에 볼 때 궁금했던 게 있다. 전향 문제다.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던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가 1930년대 들어 전향하기 시작한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그 수가 많이 늘어난다. 일제가 1936년 12월 사상범 보호 관찰 제도를 도입해 감시와 전향 공작의 강도를 높인 점, 중일전쟁 초기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국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 시기라는 점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주요 활동가들에 관한 자료들을 보면 전향 여부에 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사회주의자는 이른바 '국체'를 명백하게 부정하는 이들인데 그런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전향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장기 감옥소 생활을 한 공산당 핵심 간부들의 전향 관련 자료가 어째서 지금까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당시에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감옥소에 들어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전향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런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친일파로 명백히 돌아선 전향자들, 그자들 자료만 몇 개 나왔다.
당시 전향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던 것 같다. 악질 친일파로,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확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식으로 전향한 자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적당히 당국과 타협해 형식상의 전향만 하거나, 끝까지 감옥소에서 나오지 않고 전향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김남식 선생이 나한테 "일제 시기에는 전향을 하지 않으면 감옥소를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은 전부 다 전향한 것으로 봐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전향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김남식은 현대사 연구자이자 통일 운동가로서 북한을 포함한 한국 현대사 연구에 중요한 여러 자료를 발굴하고 관련 저작을 남겼다.) 그렇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는,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은 다 거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의주 감옥에 있던 사상범들을 조사한 어떤 자료를 보면 '전향을 안 하겠다. 전향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표명한 사람은 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애매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고 다수는 전향한 것으로 돼 있더라.
지금으로서는 조봉암 또는 조봉암처럼 유명한 인물들이 전향했느냐, 이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자료도 없다. 그런데 전향하지 않고 감옥소에서 나올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조봉암의 전향 여부는 그에 관한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프레시안 : 20세기 한국에서 폭력적 전향 공작을 한 건 일제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 정권도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강도 높은 전향 공작을 했다. 견디다 못한 장기수 중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또한 그와 맞물려 1975년에는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사상범 등이 형기를 마치더라도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게 막았다. 한마디로 '전향을 공개 선언하지 않으면 멀쩡히 살아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마라', 이런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전향 공작이 박정희 정권 때 진행된 것보다 강도가 낮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일제 때 사회주의자들의 전향 문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서중석 : 그 부분도 모호하다. 유명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감옥소에서 나온 사람들, 예컨대 박헌영이나 조봉암이 대화숙(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갔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사상범 보호 관찰소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자료도 안 나온다. 이영, 정백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대화숙은 전향자라든가 사상 활동,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을 넣은 곳인데, 안재홍 글을 보면 심지어 여운형한테도 거기에 나오라고 했고 자기도 거기에 한 번 나갔다는 식으로 돼 있다. 그런데 감옥소에서 나온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그에 관한 자료가 안 나온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전향 운용이 일제 말의 그것을 많이 본떴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사상범 보호 관찰소에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자료에 안 나온다. 사상범 보호 관찰소라든가 대화숙 운영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이 나와 있긴 한데, 이런 사람들과 관련해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간첩 혐의 벗고도 독립 운동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훗날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1959년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의 간첩 혐의가 조작됐음을 재심에서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 무렵 조봉암 서훈 문제도 관심을 모았다.
서중석 : 서훈 이야기가 나왔던 건 조봉암이 독립 운동을 워낙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3.1운동에서도 1년 정도 감옥소에서 생활했으면 그건 건국포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직후 YMCA 관련 사건으로 또 감옥에 들어가고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허위 제보로 들어갔던 것이긴 하지만, 어쨌건 독립 운동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6.10만세운동으로 감옥소에 들어갔거나 그 운동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을 보면, 아주 중요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서훈을 했다.
돌아보면,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와서야 김규식(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비롯해 납북당한 사람들에 대한 서훈이 가능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서 서훈된 사람은 김대중 정권 전에는 극소수였다. 대표적인 게 고려공산당 상해파 지도자인 이동휘 같은 사람인데, 이동휘도 1990년대에 서훈됐다(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김대중 정부 때 사회주의자 중 소수가 서훈됐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서훈을 많이 받게 된 건 노무현 정권 때다. 일제 말에 친일 활동을 했거나 해방 후 남로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한 상당수가 그때 서훈됐다. 조동호도 그중 하나이고, 주세죽도 그렇고, 권오설도 그렇고, 1930년대 말 소련 비밀경찰 손에 죽은 김단야도 그때 서훈됐다. 김재봉, 김철수도 이때 서훈됐다. 이 중 권오설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 양반은 상해 해외부 지시를 받아 6.10만세운동에서 공산주의자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감옥소에 들어가 무지하게 고문을 당했고, 그 여독(餘毒) 같은 게 작용해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독립장을 줬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뒤늦게 독립 운동 서훈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에 서훈된 여운형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자들도 많이 서훈을 받으면서 조봉암 서훈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진보당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부분만 풀리면 조봉암도 높은 서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6.10만세운동뿐만 아니라 1927년 유일당 운동을 조봉암처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 드물고, 전선체 활동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옥소에 7년이나 갇혀 있었고 나중에 예비 검속을 당한 것도 포함되는데, 그런 걸 다 합치면 조봉암은 서훈 등급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조봉암은 일제 때도 활동을 많이 한 분이기 때문에 독립 운동 서훈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글로도 쓰고 그랬다. 그래서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을 때, 이제는 조봉암이 서훈될 것이라고 여러 사람이 생각했다. 하지만 서훈이 안 되더라.
프레시안 : 독립 운동가 서훈 문제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매우 뒤늦은 서훈도 그렇고, 임시정부 부주석이자 해방 후 우익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규식조차 6월항쟁 이전에는 서훈을 받을 수 없었던 데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 조봉암에 대한 서훈은 왜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서중석 : 일제 말기는 일본이 성금을 내라는 요구를 많이 할 때다. 내가 어떤 곳에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때 왕겨연료조합장으로 있던 조봉암도 150원을 냈다고 하더라. 그렇게 성금을 낸 건 친일 행동 아닌가. 아무리 독립 운동을 많이 했어도 일제 말에 친일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때는 서훈이 이뤄질 수 없다. 그 점은 확실하다.
당시 150원이면 그렇게 적은 돈만은 아니다. 물론 큰돈은 전혀 아니다. 5000원, 1만 원 또는 몇 만 원 정도 내야 큰돈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을 냈다는 기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아마 조봉암은 이 문제도 정치적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양반은 정치적인 판단을 많이 한 분이다. 예컨대 상해에 있을 때 폭넓게 활동한 것도 그런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저놈은 이상한 놈이다', 이런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도 많이 만나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는 안 만나도 될 사람도 만났다. 그건 여운형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고 그랬는데, 이런저런 것들 때문에 여운형이나 조봉암 같은 대중적 정치가들은 참 비난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성금 문제에 대해서도 조봉암은 '이거 뭐 별거냐. 나에 대한 일제의 감시를 조금 늦추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지 않겠나',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게 결국 이분한테 독립 운동에 대한 큰 서훈을 드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조봉암이 일제에 헌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는 1941년 12월 23일 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이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현재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유족 및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 사업회' 등에서는 당시 조봉암에게 그 정도의 여윳돈은 없었으며,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만큼 기사가 조작됐거나 누군가 조봉암 이름으로 대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프레시안 201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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