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이희호의 별명은 독일어 ‘다스’…다시 보는 이희호 평전 10장면
2015년 4월~2016년 11월까지 ‘한겨레’ 장기 연재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 속 주요 장면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이 여사는 지난 1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보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별세했다. <한겨레>는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이희호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80차례 장기 연재했다. 100년 가까이 여성 권리 신장,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구현을 향한 투쟁으로 일관했던 이희호 이사장의 일대기 속 주요 장면을 꼽아봤다.
1.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희호 자신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름이 나는 데 굳이 김대중이라는 존재에 빚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운동을 이끌었다. 총무로 취임해 활동한 4년 동안 이희호는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 자주 물었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전의 김대중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희호 평전] ① 연재를 시작하며 어린시절에서 현재까지 90여년 삶
2009년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한 이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6년째 매주 두 차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남편과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31일 오전 가족·측근들과 함께 묘소를 찾은 이 이사장이 분향을 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2009년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한 이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6년째 매주 두 차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남편과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31일 오전 가족·측근들과 함께 묘소를 찾은 이 이사장이 분향을 하고 있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투사를 단련시킨 투사 “시련의 세월에도 늘 한결 같은”
2009년 8월23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현대 정치사의 거인’ 김대중이 이 땅의 사람들과 영원히 작별했다. 이날 오후 국회를 떠난 영구차는 현충원에 고인을 내려놓기 전 서울시청 앞 광장을 들렀다. 민주주의 수호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모여든 수많은 시민을 앞에 두고 검은 상복을 입은 노구의 부인이 단상에 올랐다. 슬픔에 젖은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으로 울려 퍼졌다. 고인과 47년의 삶을 함께한 부인 이희호였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바라옵건대,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세상을 뜨기 전 김대중은 피로써 이룬 민주주의가 깨져 나가는 걸 보며 독재의 부활을 걱정했다. 2009년 5월23일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자기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검찰을 앞세운 정권의 잔인한 보복이 끝내 전임 대통령의 자살을 불렀다.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일기에 썼다. 김대중은 장례식에서 읽으려고 쓴 조사에서 비명에 간 후배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산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김대중은 정권의 방해로 이 조사를 읽지 못했다. 6월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식이 열렸다. 김대중은 아픈 몸을 이끌고 참석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마지막 생기를 다 모아 쏟아낸 연설을 뒤에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은 쓰러졌다. 그것이 영원한 잠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새로 단장한 묘역에 묻혔다. 장례식 이후 지금까지 이희호는 매주 두 번씩 남편의 묘소를 참배한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빠지지 않았다. 화요일에는 지난날의 동지들, 측근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남편을 찾고, 금요일에 다시 홀로 묘소를 찾는다. 일이 있어 타지에 갔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라도 들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하늘에서도 이 나라 민주주의와 남북의 화해와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써 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몸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내지 않은 것 같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남편을 생각하며 같은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이희호 곁에는 여전히 김대중이 있다.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희호 자신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름이 나는 데 굳이 김대중이라는 존재에 빚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운동을 이끌었다. 총무로 취임해 활동한 4년 동안 이희호는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이희호는 김대중과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삶의 행보가 바뀌었다. 운명은 두 사람을 현대사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이 걸은 길은 수난의 골고다 언덕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마냥 뒤따르는 길은 아니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즐겨 쓴 표현을 쓰자면, 두 사람의 일생은 ‘동행자’, ‘동역자’의 삶이었다.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는 삶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동지,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 동지였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동지로서 서로를 일으켜주었고 부추겨주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 자주 물었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전의 김대중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을 때 유세장에서 음료를 건네고 있는 이희호 이사장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독재자들의 핍박을 받던 시절 이희호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돼 기도로 밤을 새우면서도, 독재자와 싸우기를 중단하라거나 민주주의 투쟁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투쟁을 지원하고 독려했다. 1972년 10월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자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이희호는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 답답해하고 있다”고 조국의 현실을 전한 뒤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적었다.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인 1973년 5월 편지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밝히면서도 “꾸준히, 용감하게 싸워나가 달라”고 또박또박 썼다.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니 이제 투쟁을 그만두고 타협하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이희호의 입에서는 끝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단호한 태도가 김대중의 양심을 단련시켰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남편을 대신해 찬조연사로 전국을 돌 때 이희호는 연단에 서서 시민들에게 말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이희호의 부드러움 속에는 부러지지 않는 철심이 들어 있었다. 그 철심이 남편의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김대중의 신조 ‘행동하는 양심’의 그 양심 한가운데 이희호가 있었다. 유신독재 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17절) 우리 크리스천은 사회를 새롭게 변혁하는 행함으로 지상의 천국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희호가 김대중의 양심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을 김대중은 아내에 관해 쓴 글에서 솔직하게 밝혔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가 아니다. 나의 진심이다. 1980년 당시 내가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실력자가 나를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 나도 인간인데 그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내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이희호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기도하다 밤을 새우는 날이 몇날 며칠인지 몰랐다.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남편이 쿠데타군에 잡혀가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던 때 이희호는 이사야서를 되풀이해 읽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떨지 말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망망한 바다에서 난파당한 배의 파편 한 조각을 붙들고 흘러가는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 표류가 어디서 끝날지, 과연 육지가 나올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부서질 것 같았으나 기도로 버텼다.
이희호의 신앙 안에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하나로 만났다.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의 기복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었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희호가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은 남편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희호연대기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일꾼으로 동참하는 것이 남편이 할 일이었다. 그 신앙이 용기의 원천이었다. 김대중은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희호가 낸 용기야말로 ‘진리에 대한 헌신’, 곧 이희호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희호의 용기는 용서로도 나타났다. 자신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이희호는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77년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악은 악으로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 이런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것은 남편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다 5년형을 받고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수난의 한가운데서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희호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직후에도 똑같이 기도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지난 2월 이희호 이사장이 고명섭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집필진은 매주 한차례 서울 동교동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5층, 청와대 시절 그대로 옮겨 놓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김경애 기자
이희호가 보여준 이 용서의 정신은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했던 유언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때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공유한 용서는 신앙적 차원의 결단이고 신념이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희호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그를 생각하면 고린도전서의 이 구절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그 한결같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많은 이들이 이희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바로 그 한결같음을 꼽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고난의 시절이나 영광의 시절이나 한결같다.”
그런 한결같음은 매주 두 번씩, 빠지지 않고 남편의 묘소를 찾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희호는 그런 한결같음으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질고 강퍅한 시련의 현대사를 통과했다. 이희호가 걸은 길은 고난의 길이었고 믿음의 길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희호가 거쳐 온 그 세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어린 날의 이희호를 만나게 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2. 이희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일제 강점 말기의 혼란 속에서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충남 예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일제로 인해 이화여전 2년 만에 강제로 마쳐야 했던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3학년 때 교육과로 전과했다. 사진은 1949년 교정에서 교육과 교수·동기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맨 뒷줄 왼쪽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대학생 이희호는 혼자 공부에만 몰두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피천득의 회고에서도 얼핏 드러나듯이 이희호는 사범대 여학생들의 리더 구실을 했다. 그 시절 이희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이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였다. 행동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행동이 남성적이었어요. 그래서들 ‘다스’라고 불렀지요.”
그 시절 이희호와 남학생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 ‘누님’이다. 남학생들은 너나없이 이희호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거침없고 활기 넘치는 태도로 일마다 앞장서는 것이 누님다웠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89590.html
3. YWCA 총무 이희호가 제안한 첫 캠페인 ‘혼인신고를 합시다’
대학 졸업 뒤 한국전쟁을 맞아 이희호는 피란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이희호는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이희호는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59년 1월3일부터 이희호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총무로 출근했다. 이희호는 총무로 취임하자마자 와이더블유시에이의 분위기를 확 바꾸었다. 사회운동가 출신답게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희호가 제안한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엔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뒤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조강지처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자식 낳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집밖에 나앉는 거지요.” 이희호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의 지역 와이더블유시에이에 보내 붙이게 하고 띠를 어깨에 두르고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 제1부 학업시대-6회 여성운동 첫발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97423.html?_ns=r3
▶ 제2부 만남과 동행-1회 YWCA 총무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3637.html
4. “무일푼이지만 꿈이 큰, 이 사람을 도와야겠단 생각 들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요약하자면, 김대중은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그때의 김대중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그것이 이희호를 움직인 생각이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결혼 다음 해인 1963년의 일이다. 서울 동교동에 집을 사서 수리를 마친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이희호는 대문에 문패가 두 개 걸린 것을 보았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문패였다. 김대중이 자기 이름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아내가 생각나 아내 이름의 문패도 함께 주문했던 것이다. 남편이 집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부부 문패가 걸린 대문은 낯선 풍경이었다. 김대중의 회고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부부 이름이 새겨진 동교동 문패는 이희호와 김대중의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 제2부 만남과 동행-3회 결혼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5851.html
▶ 제2부 만남과 동행-4회 동교동 문패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6922.html
5. “김대중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타도하겠다”
1971년 ‘4·27 7대 대선’ 당시의 일이다. 이희호도 남편에 뒤지지 않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었어요. 남편이 가지 못한 곳을 주로 다녔지요.” 이희호는 영동·장호원·논산·서산을 비롯해 전국의 소도시 수십 곳을 돌았다. 장터와 거리를 다니며 거칠고 투박한 손들을 잡았다. 이희호는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그 시절엔 후보 부인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로 답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같은 해 8대 총선 때도 이희호는 따로 찬조 연설자로 뛰었다. “나에게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지역구를 돌았는데, 꽤나 인기 있는 연사였어요.” 이희호는 청중들과 문답하듯이 연설했다. “여러분, 독재를 원하십니까?” “아니오.” “그럼 민주주의를 원하십니까 “네.” 단순명쾌한 문장이 연사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 실려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 제2부 만남과 동행-11회 71년 대선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03649.html
▶ 제2부 만남과 동행-12회 71년 8대 총선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04686.html
6. 남산에 끌려간 이희호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
1976년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세웅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직후 이희호는 남편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이희호는 수사관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태연하고도 결연하게 말했다.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희호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신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76년 이른바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되자 그 부인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첫 공판이 비공개로 열리는 바람에 참관도 하지 못한 가족들이 불구속 기소자로 법정에 섰던 이우정 교수한테서 설명을 들으려 기독교회관 식당에 모였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귀손(윤반웅 〃), 박순리(서남동 부인), 이우정, 이희호(김대중 부인), 박영숙(안병무 〃), 공덕귀(윤보선 〃), 박용길(문익환 〃), 김석중(이문영 〃). 뒷줄 맨 왼쪽 이종옥(이해동 〃)씨가 소장해온 사진이다.
그 시절 이희호는 구속자 가족을 대변해 외국 언론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각오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편들이 한 일은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 제3부 유신의 암흑-9회 3·1민주구국선언 (상)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14411.html
▶ 제3부 유신의 암흑-10회 3·1 민주구국선언 (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15456.html
7. 국회 방청석에서 가족법이 통과되는 순간을 지켜보다
1989년 12월 이희호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법 개정이었다. 이희호는 국회의원 부인들과 함께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을 방청했다.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 소원이었어요.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는데 가족법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만들어진 뒤로 거의 바뀌지 않았거든요. 내가 창설에 앞장섰던 여성문제연구소가 가족제도에 관한 민법 개정을 추진하고, 그 뒤에는 이태영 박사가 가정법률상담소를 이끌면서 여성단체들과 함께 개정 운동을 벌였어요. 그래서 1960년, 1977년 두 차례 손질했는데 여전히 남녀차별 조항이 많았어요.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들, 손자에게까지 법률상 종속돼 있었지요.”
▶제5부 광장의 시련-4회 가족법 개정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46947.html
8. “김정일 위원장 첫인상은 풍문과 달리 명랑해 보였다”
2000년 6월13~15일 평양에서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났다. 당시 이희호는 김정일을 찬찬히 관찰했다.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로 말을 쏟아냈어요. 유머 감각도 있고요. ‘저 표현력을 어떻게 지금까지 감출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북한에는 선거가 없지’ 하고 자문자답하면서 혼자 웃음을 삼켰지요.”
2000년 6월13~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일정 동안 이희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탐색했다. 이틀째인 6월14일 저녁 목란관에서 열린 환영만찬 행사에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의 가슴에 문득 서러움이 번졌다. “만감이 교차했지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올 수 있는데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기까지 반세기나 걸렸잖아요. 또 우리는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요.”
6월15일 평양을 떠나기 전 김정일이 주최한 송별 연회는 화기가 넘쳤다.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합창했지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뭉클했어요. 남편과 김정일 위원장도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노래했지요. 나도 김정일 위원장 손을 잡았어요.”
▶ 제6부 청와대 시간-5회 남북정상회담 (상)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58398.html
▶ 제6부 청와대 시간-6회 남북정상회담 (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59362.html
9. 유엔 총회에서 여성으로 첫 기조연설을 하다
2002년 5월 8일 이희호 여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2002년 5월6일 이희호는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8일에는 임시의장으로서 영어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했다.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빈곤과 학대, 영양실조와 에이즈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희호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자”고 촉구했다. 이희호에게 유엔특별총회는 뜻깊은 행사였다. “유엔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것은 여성으로서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 제6부 청와대 시간- 8회 여성부 탄생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2234.html
10.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뒤 승리가 확정되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이사장. 한겨레출판 제공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다. 20세기를 관통해 21세기에 이른 100년 가까운 삶이었다.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희호는 자신이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이희호는 한국이 인권국가로 반듯하게 서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다.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나라로 세계인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같이 잘사는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희호는 매일 기도했다. “남과 북이 서로 사랑하고 도와가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제7부 동교동의 날들 5회 방북-마지막회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8547.html
고 이희호 여사 모욕하는 일베와 그 배후들
누가 일베를 두둔했나...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혼인신고를 합시다"…여성 인권과 함께 했던 '1세대 여성운동가' (KBS <뉴스9>)
韓 여성운동 선구자…DJ와 민주화 · 평화운동 동행 (SBS <8뉴스>)
여성운동가…사형수의 아내…DJ의 '평생 동지' (MBC <뉴스데스크>)
"더 단단하고 당당하게"…'페미니스트 이희호'의 삶 (JTBC <뉴스룸>)
11일 지상파 3사와 JTBC가 지난 10일 밤 서거한 고 이희호 여사를 보도하며 뽑은 제목들이다. 향년 97세로 별세한 이희호 여사에 대한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역사를 선도한 1세대 '여성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이 여사의 삶이 국민들에게 다시금 회자되는 중이다(관련기사: 남편 DJ를 바꾼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 여사).
평소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라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이 여사는 2008년 출간된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당선되면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겠다는 공약 발표를 시작으로 대선과 총선, 모든 선거에서 가장 앞선 여성 정책을 제시한 페미니스트 후보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교동 자택의 문패에 DJ와 자신의 이름을 동등하게 걸었던 여성운동가이자 인권․평화․통일운동가였던 이희호 여사는 지난해 3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투 운동에 대해 "용기 있게 나서는 거 보면 좋다. 대견하고 고맙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응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여야,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동참하고 있는 추모 분위기에 유일하게 찬물을 끼얹는 것도 모자라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이들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바로 일간베스트(이하 일베) 사용자들과 '여성혐오(여혐)' 세력이다.
페미니스트 이희호를 누가 욕되게 하는가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살인범을 욕하면 일베충으로 낙인찍히는 나라가 되었는가. 여가부(여성가족부) 때문에, 여가부 예산을 받는 여성단체 때문에 무고하게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데. 여가부 만드는 데에 1등 공신인 사람을 고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욕하면 안 되는 건가? 자기도 똑같이 죽음을 느껴 봐야지."
지난 4월, 이 여사를 비하하는 내용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려 비난을 받은 대학생이 11일 재차 게시한 글이다. 이날 <세계일보>에 따르면, 수능 만점을 받고 서울대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진 이 대학생은 이 여사가 서거한 직후 과거 게시 글이 여론의 맹폭을 받자 위와 같은 글을 올렸다. 이와 관련, <수능 만점 서울대생, 故 이희호 여사에 '막말' 논란> 제목의 10일 <연합뉴스> 기사는 한 포털에서 1만 5개가 넘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
한 대학생이 이희호 여사 비하 글을 작성해 논란이 됐다
▲ 한 서울대 학생이 지난 4월 "이희호 여사 모욕" 발언을 페이스북에 남긴 것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됐다. ⓒ 페이스북
▲ 한 서울대 학생이 "이희호 여사 모욕" 발언 논란 후 남긴 글 ⓒ 페이스
<연합뉴스>는 "11일 대학가에 따르면 서울대에 재학 중인 A씨는 지난 4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희호 여사가 위중하다는 기사를 공유하며 이 여사를 비하하는 내용의 글을 함께 게시했다"며 "당시 A씨의 게시물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됐으나, 이달 10일 이 여사가 별세하면서 이 발언이 다시 부각되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대학생은 이후 여러 매체에 소개되면서 소셜 미디어 상에서 주목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디 이 학생뿐일까. 12일까지 일베에서는 A학생이 쓴 글보다 훨씬 더 정도가 심한 고 이희호 여사 모욕 글과 사진이 넘쳐나는 중이다.
이른바 '여혐' 세력과 일베에서 유독 이희호 여사를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담하다. 국민의정부 당시 이 여사가 여성가족부와 국가인권위원회 출범에 지대한 공을 들였으며,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 등 '모성 보호 3법'이 개정이나 내각 내 여성 장관의 등용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정평이 나 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 불리는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이 여사의 서거 후 "'김대중은 이희호로부터 태어났다'라고 할 정도로 (이 여사는) 김 대통령님에 대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끼치신 분"이라고 평가한 이유에는 국민의정부 당시 여권신장을 향한 기여도 포함된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더더욱, 지난 4월 이희호 여사를 "'페미대장'이라고 폄훼하고, "여가부 만드는 데에 1등 공신인 사람"이라며 살인범 운운했던 서울대생의 사고는 참담할 지경이다.
페미니즘이나 미투 운동이 대두되기 전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표적 삼았던 '일베'의 모욕과 비하는 좀 더 뿌리 깊다.
일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DC 인사이드'에서부터, 전라도 차별과 혐오가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와 엮이며 '홍어'나 '좌좀' 같은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DC 인사이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20년 가까이 된 모욕인 셈이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의 비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소에 나선 일도 있다. 지난 2013년 11월 김대중평화센터는 보도자료를 통해 "김 전 대통령과 관련한 허위사실을 작성해 인터넷에 유포한 자들을 철저히 수사해 사자명예 훼손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법 위반 혐의로 엄벌해 달라는 내용의 고소장을 서울서부지검에 제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듬해 6월에도 이 여사는 재차 고소에 나섰다. 이게 벌써 5~6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예의 그 참담함은 왜 지속돼야 하는가.
누가 일베를 두둔했나
▲ 바른미래당 하태경 최고위원이 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도를 넘은 고 이희호 여사에 대해 도를 넘는 조롱을 퍼붓고 있는 극우 사이트 일베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중략). 또 워마드에는 이런 게시물을 비판하면서 고인을 모욕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게시물이 그대로 게재돼 있다. 최소한의 모자이크 처리도 안 된 게시물은 일베 게시물과 다를 바가 없다. 역시 삭제하길 바란다."
12일 바른미래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하태경 최고위원이 한 발언이다. 하 최고위원은 지난달 혐오사이트를 폐쇄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한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 법률안, 이른바 '혐오 사이트 규제법'을 대표 발의한 주인공이다. 이날 "고 이희호 여사에 대한 평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면서도 하 의원은 "일베에 올라 온 게시물은 우리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당장 삭제하고 고인과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발인조차 하지 않은 이희호 여사가 끊임없는 모욕으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을 방치한 것이 누구인가. 뿌리 깊은 여성 혐오, 전라도 혐오를 자양분 삼아 세월호 유족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일베를 정치적으로 인용했던 이들이 누구인가.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었던 이른바 '폭식투쟁'을 통해 공분을 샀던 일베 사용자들을 두둔했던 것이 누구인가.
"폭식투쟁이 잘못됐다고 성찰할 수 있는 20대 우파 청년들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일베 내) 20대들은 아직 자정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
2014년 9월 KBS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하태경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하 의원이 소속된 새누리당은 일베를 두둔하는 것을 넘어, 같은 달 폭식 투쟁에 참여했던 인사를 당 지도부가 전략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18년 3월, 나경원 의원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일베 폐쇄 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하자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일베 폐쇄 추진은 표현의 자유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행위다. (문재인 정권이) 방송장악에 이어 인터넷 공간도 장악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논란이 확산되자, 나 의원은 "나 역시 일베 글로 피해를 받은 적이 있다"며 "핵심은 타인의 권익을 침해하거나 불법·허위정보를 올린 작성자에 대한 처벌 강화, 피해자에 대한 권리구제 강화"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일베 폐쇄 반대' 목소리까지도 '문재인 정권' 비판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아울러 '혐오 사이트 규제법'을 발의하면서 하 최고위원은 "특정집단에 대한 조롱, 비하, 협박, 이런 노골적인 내용들을 다수 가지고 있는 혐오 사이트를 규제해야 하고 그 대표적인 혐오 사이트가 바로 워마드라는, 그래서 이 혐오 사이트 규제에 가장 일차적인 대상은 워마드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
당시에도 일각에선 '훨씬 사용자가 많은 일베는 놔두고 워마드가 먼저인가'란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일베 사용자들을 "자정능력이 사라지지 않은" 20대 청년들로 규정하고 두둔했던 하 최고위원 아닌가. 일베와 같은 여성혐오 세력을 등에 업고 '워마드 폐쇄'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폭식투쟁 이후 현재까지, 보수 정치인들의 일베 활용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한 혐오자들, 그리고 공범들
▲ 2014년 9월 6일,단식농성장에 나타나 핫도그 먹는 남성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 나타난 한 남성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이희훈
"일베의 고인 모독행위, 인간이길 거부한 자들, 강력한 처벌을 원합니다!"
보다 못했는지, 12일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가 페이스북에 적은 글이다. 소셜 미디어상에선 '페미니스트' 이희호 여사에 대한 추모와 회고가 이어지는 한편으로 고인을 비하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 또한 거세지는 중이다. 김대중평화센터와 유족들이 다시 한 번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전 규제를 두고 법조계 내에서도 논란이 될 소지가 다분한 '혐오 사이트 규제법'을 발의한 하 최고위원을 필두로 그간 일베와 같은 혐오 사이트를 방치하고, 사용자들을 두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현 보수 야당의 통렬한 반성이 먼저다. 또 이후 향후 혐오 사이트 규제법으로 대변되는 관련 법안의 입법 과정을 지켜보고, '혐오'가 벌어지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책임 의식과 실천의지를 갖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희호 여사의 삶이 곧 페미니스트의 삶이었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삶이었다. 표현의 자유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한 삶을, 그 가치를 이해할 의지조차 없는 이들이 자기 안의 혐오를 발산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할 때, 이들을 두둔하는 행위 역시도 공범 딱지를 붙여 마땅하다. 물론 지금, 현재까지도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이들에겐 두말할 나위 없이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하성태(woodyh)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