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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귀여움의 이면은 지배와 통제…‘펫’은 애정과 지배의 조합

by 이성근 2019. 1. 13.

전의령의 동물이야기](10) 귀여움의 이면은 지배와 통제은 애정과 지배의 조합

우리는 왜 귀여움에 열광하는가?

 

나는 귀엽다, 고로 존재한다

-냥카르트

 

나의 사전엔 귀여움밖에 없다

-냥폴레옹

 

만국의 고양이들이여 단결하라

-냥마르크스

 

이뿐 아니다,

장도리 만화의 냥도리도 있다

 

권력은 귀여움에서 나온다

 

올여름 나를 박장대소하게 한 이미지가 있다.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그 그림은 인민복을 입고 인민군 모자를 쓴 고양이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린 것으로, 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권력은 귀여움에서 나온다. 냐옹쩌둥.”

 

누가 봐도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과 그의 유명한 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를 고양이 버전으로 패러디한 그 그림은 한 역사적 인물이 풍기는 진지함을 참을 수 없는 빵터짐으로 날려버린다. 이후 나는 냥카르트’(“나는 귀엽다. 고로 존재한다”), ‘냥폴레옹’(“나의 사전엔 귀여움밖에 없다”), ‘냥마르크스’(“만국의 고양이들이여 단결하라”)를 보게 되었고, 다시 미친 사람처럼 박장대소했으며, 이 우스꽝스러운 연속 패러디의 주인공이 시사만화 장도리에 출연하는 고양이 캐릭터 냥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인터넷에서 셀러브리티가 된 그럼피 캣’. 원래 이름이 타르다르 소스(Tardar Sauce)인 이 암컷 고양이는 20129월 처음 소셜미디어 레딧에 소개된 뒤 특유의 부루퉁한 표정 덕에 인기를 끌다 미 3대 방송인 NBC, CBS, ABC 전파를 타면서 더욱더 유명해졌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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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귀여움에서 나온다.” 내게 이 말은 특히 기시감이 들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동안 날적이처럼 사용하던 블로그에 가보니 5년 전 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태로 집에 왔는데, 마마우가 온갖 귀여움으로 무장을 하고 문 앞에서 맞이한다. 한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는 느낌. 귀여움에는 권력관계와 연관된 무엇이 있다. 마마우는 같이 사는 고양이 이름이고, 이 고양이가 그 존재 자체로서 어떻게 내 기분을 바꾸고 나를 무장해제시켰는지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귀여움의 권력, 또는 귀엽다고 느껴지는 존재가 가진 힘. 언젠가부터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 돌아다니는 귀여움 과부하’(cuteness overload)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재현하는 이미지들은 보통 새끼 고양이, 강아지 또는 판다일 때가 많으며, 이 사진들은 인터넷과 SNS에서 꾸준히 발전해온 이른바 귀여움의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속에서 마루, 그럼피 캣, 크림 히어로즈 등의 수많은 동물 셀러브리티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국내에선 예를 들어 고양이를 직접 키우지는 않지만 고양이와 고양이 캐릭터를 담은 이미지 또는 동영상을 즐겨보고 고양이 유튜버를 구독하는 냥덕’, ‘랜선집사등의 신조어들이 등장했다.

 

국내 고양이 유튜브 채널 1위인 크림 히어로즈의 한 장면. 7마리 고양이의 일상을 다룬 방송으로, 구독자수가 183만여명이다. 크림 히어로즈 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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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의 생산

어떤 대상이 귀엽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보는 주체로 하여금 따뜻함과 무해함, 또 보살펴주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뜻한다. 콘라트 로렌츠라는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는 이른바 귀여움의 신체적 특성들을 본격적으로 논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인들로 하여금 돌보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는 인간 및 비인간 대상의 외형적 특징은 큰 눈, 튀어나온 이마, 몸에 비해 큰 머리, 짧고 통통한 발과 손, 둥근 체형, 둥근 뺨 그리고 몸의 투박한 움직임 등으로 요약된다.

 

흥미롭게도 로렌츠는 실험대상자들이 때로는 귀엽게 보이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대상들에게 실제 살아있는 대상들보다 더 즉각적으로 반응했음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는 귀여움의 신체적 특징들에 반응하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본능이어서라기보다는 학습을 통한 선별적 강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렇게 귀여움의 본능또는 귀여움의 자연을 강조할 때마다 그 분야의 대표적 전문가로 종종 소환되는 로렌츠 자신이 정작 학습이라는 사회적·문화적 요소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귀여움이란 진정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사회·문화적으로 실행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끈다

   

귀여움의 사회·문화적 실천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캐릭터 산업이다. 그중 가장 고전적 캐릭터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의 진화과정을 보면 초기에는 단지 직립보행을 하는, 의인화된 쥐에 불과했던 이 캐릭터가 점점 더 로렌츠가 언급한 귀여움의 신체적 특징들을 과장되게 구현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그다지 귀엽지 않았던미키마우스는 점점 더 어린아이와 같은모습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소비자의 반응을 자극하고 시장에서 더 많이 팔리는 캐릭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귀여움의 문화를 추동하는 것이 철저히 신체적 요소도, 철저히 정서적 요소도, 더 나아가 철저히 상업적 요소도 아닌 세 가지 영역들의 복잡한 어울림이었음을 알게 된다.

 

캐릭터 산업이 미키마우스와 같이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하이브리드적 귀여움의 생산에 집중해왔다면, 애완동물 또는 반려동물 산업은 실제 동물들 속에서 귀여움 또는 사랑스러움의 특질들을 발현시키는 것에 열을 올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서구에서 100여년 전 시작된 브리딩 산업이다. 이 산업의 결과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다양한 품종개들은 지난 100년 동안 현저히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 고양이 등의 대표적인 애완동물들의 역사는 사실상 그들의 외형과 성질을 그들과 함께 사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귀엽게 바꾸는 과정과 개입들로 점철되어 있다. 초기의 반려동물 애호가들이 동시에 반려동물 브리더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살아있는 동물에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창출하는 작업은 선택적 교배, 유전자 조작에서 이차적 개입으로서의 외과적 수술을 아우른다.

 

귀여움의 소비?

위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대상이 귀엽다는 인식은 따뜻함과 무해함이라는 감정, 돌보고 싶다는 욕구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심리적 효과는 근본적으로 비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어떤 대상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그 대상과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차이 속에서 본질적으로 가능해진다. 따라서 귀여움의 이면에는 언제나 지배와 통제가 도사리고 있다. 언젠가 이 연재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펫의 역사에서 애정과 사랑이 지배와 통제와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이기는커녕 뒤엉켜 존재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여움이라는 감정은

살펴주고 싶은 욕망을 포함하며

학습되어지는 것이다

미키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애정은 지배의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부드러운 지배,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지배일 뿐이다. 지배는 잔혹하며 착취로 이루어진 어떤 것, 그 안에 애착이란 요소가 전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배와 애정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펫이다.”

 

여기서 지배와 통제는 본질적으로 애정, 즐거움, 유희라는 감정과 상태와 구분되지 않는다. 또는, 애정은 지배를 부드러운 것,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으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확장되고 있는 귀여움의 소비와 그 문화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인터넷과 SNS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인간, 비인간, 또는 하이브리드 형식의 귀여움들에 사람들은 왜 열광하고 또 이를 소비하게 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실제로 동물과 함께 사는 대신에 그 귀여움만을 취하는 냥덕, 랜선집사 등의 문화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하필 이 시대에 수많은 동물 셀러브리티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적어도 본능, 유전자, 진화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으로부터 이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연히 귀여운 것은 없을지도

몇 해 전 어느 학회에서의 일이다. 한국의 동물복지란 주제의 세션이 열렸는데, 총 세 개의 발표 중 두 개가 길고양이에 관한 것이었다. 발표와 토론이 끝난 후, 청중에서 왜 지금 고양이가 그토록 이슈인가라는 질문이 나왔고, 한 발표자의 즉각적인 대답은 “(그야) 귀여우니까요였다. 예상대로 이 답변은 모든 이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그 반응들은 반드시 고양이가 귀엽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의 답변이 뭔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듯했다.

 

애완동물 브리딩 산업

동물들은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처럼 귀여움의 이면에는 지배와 통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미키가 달라진 것처럼 애증의 한계점은 움직이는 것

 

한국 사회에서 지금 그토록 귀여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고양이라는 동물은 불과 이십년 전만 해도 혐오의 아이콘이었다. 길고양이가 예전에는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사실은 고양이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작스럽게 변했음을 방증한다. 한국 고양이의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에서 우리는 애정과 혐오, 귀여움과 징그러움 사이의 한계점이 고정된 것이 아닌 항상 움직이는 것, 필연적인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공적 귀여움의 최대치를 보여준다는 큐피인형과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어린아이들을 울릴 것으로 염려된 E.T.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만큼 크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18.11.15

 

전의령의 동물이야기](3) 자연 정복·근대성 상징가공된 우리에 가둬버린 동물의 세계

동물원이라는 공간

 

창경원은 1909년 일제가 창경궁 내에 만든 동물원이다. 조선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궁내에 동물원을 조성,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1973년 창경원을 찾은 시민들이 물범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동물원은 1983년부터 철거됐고, 1986년 창경궁으로 복원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재 한국에선 동물보호·복지 운동, 반려동물 문화의 성장 속에서 동물원의 동물들이 처한 현실이 점점 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텔레비전 속 동물 프로그램들에선 종종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처한 슬픈 현실을 보여주곤 한다. 경영이 힘들다거나 사육사의 수가 모자란 동물원에서 동물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가며, 이들의 모습은 흡사 기근과 기아에 고통받는 지구 남반구의 어린이들을 연상시킨다. 폐업한 동물원의 동물들의 경우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이들은 보통 방사되거나, 다른 동물원으로 입양되거나, 이도 저도 힘들 경우 안락사 된다. 이와 같은 동물원 관리의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서 작년부터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몇 개의 기사들은 이 법이 실질적인 관리 기준의 미비로 인해 현실적인 강제성이 떨어지며, 따라서 법 개정 전후 동물원의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동물원의 동물들

많은 이들에게 동물원은 어렸을 적 한두 번은 가봤음 직한 장소이다. 동물원의 기억은 생생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빛바랜 사진들의 배경으로 남아 있을 법하다. 시대가 변하고 유흥의 형태 또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존 버거는 동물원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일상 속에서 동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등장하였음을 이야기한다. 동물에 대한 향수는 18세기적 발명품이며, 기술의 발달이 동물의 여러 가지 역할을 대체하게 된 20세기에 이르러 동물들은 동물보호구역이나 국립공원 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거의 이와 같은 말은 동물원 이전의 동물-인간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가능성, 즉 동물원의 등장은 곧 달라진 삶을 의미함을 상기시킨다. 물론 동물원 또한 시대적으로 계속 변해왔다. 과거의 동물원은 지금의 동물원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전시와 인종진화론

불과 100여년 전 구미의 동물원에서는 동물만 전시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른바 인종 전시(ethnological expositions)’가 유럽 전역을 돌며 관람객을 엄청나게 끌어모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동물원의 발달 속에서 등장하게 된 인종 전시는 유럽인들의 눈에 이국적인 모습의 인종적·식민주의적 타자들을 전시하였다. <텔레비전과 동물원>(2007)의 저자 올리비에 라작에 따르면 1877년부터 1912년까지 스물네 번의 인종 전시회가 파리의 순화원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에스키모인, 남미 팜파스의 목동, 푸에고인, 갈리비족, 아로카 인디오, 신할리족, 아샨티인, 호텐토트족, 라플란드인, 코사크인, 소말리아인, 다호메이인, 이집트인, 카리브 인디언, 코트디부아르 원주민, 인도인, 갈라인, 난쟁이”, 그리고 흑인들이었다. 1904년의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는 인류의 모든 인종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는 포부를 갖고 다양한 종족들, 특히 발전정도에 따른 그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였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전시된 피그미족 오타 벵가. 부족의 의례에 따라 이를 뾰족하게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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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단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피그미족의 전시였으며, 그중에서도 오타 벵가(1883~1916)의 비극적 삶은 잘 알려져 있다. 벵가를 콩고에서 미국으로 오게 한 이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를 위해 한 무리의 피그미족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주문을 받고 콩고를 여행하던 탐험가이자 사업가였던 새뮤얼 베르너였다. 베르너는 벵가에 대한 대가로 한 파운드의 소금과 옷가지들을 노예상에게 지불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전시되기 시작한 벵가는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벵가는 온화한 성격을 가졌으며, 사람들은 피그미족 의례 때문에 뾰족하게 갈아놓은 벵가의 이빨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신문들은 미국에 있는 유일한 진짜 식인종이라는 말과 함께 벵가의 사진들을 싣는 데 열을 올렸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가 끝난 후 베르너와 함께 잠시 콩고로 돌아갔던 벵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과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집에서 야만인의 표본으로 전시되기도 하였다. 벵가는 원숭이 집이 여러 논란과 함께 막을 내리자 당시 이미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하였으며, 이후 담배 공장의 노동자로 살다가 32세가 되는 해 권총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오타 벵가와 그의 비극은 18세기에 등장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인종진화론의 산물이었다. 인종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식민주의적 인종개념이 결합한 것으로서, 다양한 인간 집단들을 하나의 진화론적 발달 상태 또는 위계 안에서 나누고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인종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 등장하였으며, 이미 시작점부터 차이를 우열 관념 안에서 바라보는 개념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의 지식인이었던 조제프 고비노는 그의 <인종불평등론>에서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백인종에서 멀어질수록 극도의 추함과 열등한 형질을 대량 생산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인종진화론은 인종적 위계라는 사회적 담론을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지식 안에서 확고히 하려 하였으며, 당시의 유럽과 미국에선 권위 있는 인류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의 인류학적 삽화들을 보면 백인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유인원인 침팬지 사이에 흑인의 두상을 그려 넣거나 나뭇가지 위에 흑인,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를 함께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백인, 흑인, 유인원의 진화론적 차이와 위계를, 후자의 경우 유인원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 흑인의 진화론적 상태 또는 여전히 자연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간주된 흑인의 인종적 열등함을 상징한다. , 여기서 흑인은 문명 대 자연, 또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후자에 가까운 존재로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종진화론은 식민주의의 산물이었으며, 또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지식이었다. 아직 야만적이고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타자를 계몽하고 교화시켜 문명의 삶으로 이끄는 것은 키플링이 이야기한 백인의 의무였던 것이다. 동물원, 특히 인간 전시회는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였으며, 또 그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 , 동물원의 인간 전시는 인류의 다양성과 동시에 타자의 야만성과 야생성을 성공적으로 재현할 필요가 있었다. 라작에 따르면, 1883년 당시 파리 순화원에 전시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해 사람들은 충분히 야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인디언들은 가능한 한 인디언처럼보이기 위해 애썼다. 또한,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집에 벵가와 함께 넣어진 오랑우탄 도홍은 야생성의 더 실감나는 재현을 위한 소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보려고 했던 제국의 욕망과, 동시에 그 욕망의 단순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활용했던 타자들의 전략과 마주한다. , 인디언들은 더 리얼한 연기와 춤을 선사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였으며, 벵가는 그의 뾰족한 이빨을 보여주는 대가로 관람객들에게 5센트씩을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이 야만적 타자라는 식민주의적 인종관의 재생산이란 맥락에서 벌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경원과 근대성

한국 최초의 동물원이었던 창경원 또한 위에서 이야기한 식민주의의 세계사 안에 위치해 있다. 창경원은 1909년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내에 만든 동물원과 식물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제는 동물원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으며, 이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여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창경원 설립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시설을 모두가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창경원의 주요 관람자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관리들과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이었으며, “공중을 위한 동물원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 시설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었다(서태정 <한국근현대사연구>). 창경원이 일반인을 위한 도시 유흥시설이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84, 창경궁 복원 공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창경원은 수도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서 존재하였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창경원은 보통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의 상징으로서만 기억된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일제가 몰락해가는 조선의 심장 같은 곳에 하필 왜 동물원이라는 시설을 만들고자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물원은 19세기 이후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던 일본에 있어서 서구의 발전과 근대 도시의 기본을 의미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따라서 창경궁 안의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립은 동물과 식물 등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대한제국이란 국가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넘어서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이룩한 근대성을 식민지 조선의 심장부에서 과시하는 사건이었다(서태정). 창경궁 안의 동물원은 조선의 미개함’, 또는 전근대성과 일본의 발전됨’, 또는 근대성이라는 식민주의적 이분법을 물질화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물원이란 시설이 근대성을 상징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물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 통제, 지배를 상징하며, 이는 근본적으로 자연 대 문화라는 근대적 이분법 안에서 가능해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연을 저 멀리,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거나 가공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간주하지만 자연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엄밀히 말하면 근대적 산물이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일 뿐이다. 인류학, 인문지리학, 과학기술학 등의 사회과학에서 이는 자연의 사회적 구성이란 개념으로 설명되며,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또는 자본주의하에서 자연 대 문화 이분법이 어떤 권력과 지식을 생산·재생산해 왔는지는 이 분야의 오랜 화두로서 존재해 왔다.

 

동물원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가

19세기 이후 동물원은 근대 문명의 상징인 도시란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재생산해 왔으며, 삶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방식 또한 변해 왔다. 과거의 동물원들이 인간을 포함한 종의 다양성을 관람객 앞에 재현해 보이는 데 집중하였다면, 지금의 동물원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멸종위기 동물의 보호 및 번식을 통해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큰 가치를 둔다. 이 둘은 얼핏 다른 목적을 가진 듯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 사회에 의한 자연의 재생산이란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현재 한국에 있는 동물원의 수만 해도 100여개에 달한다고 하며, 이들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동물원들은 여전히 종의 다양성 또는 동물의 세계를 어떻게 더 스펙터클하게 재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며, 자본과 기술력에 따라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동물권 또는 동물해방이란 측면에서 동물원 폐지의 요구는 점점 더 커져 왔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향수, 그것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동물원과 같은 공간이 완전히 사라질지는 의문이다.

18.4.5 경향

 

전의령의 동물이야기](1) 인간에게 구속된 반려동물, 정말 아이를 대신할 수 있을까

아이 대신 반려동물프레임

 

주인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순응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 펫의 행위자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 <마이펫의 이중생활>의 한 장면. 펫의 행위자성은 때로는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 주체를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 인간을 그것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펫의 경험은 종종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태를 바꾸어놓는다. <마이펫의 이중생활> 캡처

 

애옷 대신 개옷

올해 초 어느 신문의 경제 섹션에 난 기사에 따르면 지금 한국은 아이는 안 낳아도 개는 키우는 시대로 들어섰으며,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애옷 대신 개옷을 파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선 지 오래며,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농림축산식품부 추산으로 지난해 2조원대에서 올해 3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물사료·반려동물 의류업과 같은 전통적인 종목들뿐만 아니라 통신·가전업까지 반려동물 시장에 뛰어들고 있으며, 기존의 영세·중소업체 중심에서 대기업 중심으로 판도가 바뀌고 있다. 기사는 반려동물 시장의 급성장을 매해 떨어지고 있는 유아 시장 성장세와 대조하면서 저출산으로 타격을 입은 유아복업체들이 아예 강아지 옷을 포함한 반려동물 사업에 진출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기사에서 반려동물아이를 대체하고 있는 무엇으로 그려진다. 물론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이들에게 아이로서의 반려동물이라는 정의는 그리 놀랍지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 주변의 많은 반려인들은 스스로를 엄마혹은 아빠’, 또는 다른 친족적 호칭으로 부름으로써 반려동물과 가족이라는 특정 개념 안에서 돌봄 관계를 형성한다. 시간이 지나면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성장하게 되어 더 이상의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아이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늘 돌봄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반려동물에게 있어서 아이라는 정체성은 두말할 것 없이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 기사의 논지는 반려인과 반려동물 사이에 유사 부모-자식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에 이른바 저출산·고령화로 정의되는 지금의 한국에서 반려동물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사회문화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신생아 인구를 대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아이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프레임은 반려문화의 성장을 저출산, 소비문화의 발달, 인구 이동의 증가라는 맥락에서 접근하는 많은 연구들에서 발견된다. 이 시각에서 반려동물은 어린아이에 대한 감정적 대체물로서 사람 아이보다 금전이 덜 요구되며 키우기 쉬운, 그러면서도 감정적 보상을 제공해주는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서 필자는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이와 같이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기능주의적인 상상에 딴지를 걸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반려동물은 정말로 전통적 가족이란 맥락 안에서 아이를 대체하는 존재일까? 반려동물의 경험은 아이의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대적·사회적·문화적·도덕적 의미가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는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잠시 제쳐두고 그것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배와 애정의 조합물로서의

이푸 투안이라는 지리학자는 1984년에 나온 그의 저서 <지배와 애정: 펫 만들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정은 지배의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부드러운 지배-즉 인간의 얼굴을 한 지배일 뿐이다. 지배는 잔혹하며 착취로 이루어진 어떤 것, 그 안에 애착이란 요소가 전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지배와 애정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펫이다.” 투안의 이와 같은 말은 애정과 사랑을 지배와 권력과 완전히 다른 영역의 것들로 간주하는 우리 시대의 정서, 무엇보다도 펫을 지극한 애정과 사랑, 돌봄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의 상상력을 완전히 거스른다.

 


18세기 영국 상층계급 여성들은 흑인 소년을 이국적인 장식물또는 으로 데리고 있었다. 그림은 미국 예일대 브리티시아트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 시동과 함께 있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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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안에게 있어서 펫은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로 상상되는 반려동물이란 개념을 넘어서 식물, 더 나아가 노예, ‘난쟁이등의 인간 범주까지 포함하게 된다. 예를 들어, 18세기 영국에서 상층계급 여성들은 흑인 소년을 이국적인 장식물또는 으로 데리고 있었으며, 이들을 특별한 선물로 거래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위계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위계가 펫이라는 문화적 대상과 그 경험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펫은 근대 서구에서 자연또는 야생을 상징했던(, 그렇기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간 및 비인간 존재에 대한 지배와 통제라는 욕망의 산물이었다. 투안은 그와 같은 근대적 욕망을 동물 펫들의 브리딩과 훈련, 정원 가꾸기, 더 나아가 동물원의 등장 등에서 찾는다.

 

중요한 것은 이 지배와 통제가 본질적으로 애정, 즐거움, 유희라는 감정과 상태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는, 여기서 애정은 지배를 부드러운 것,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으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펫의 모순은 단지 근대 서구라는 특정한 시대적·지리적·문화적 공간 안에 포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펫의 경험은 이와 같은 모순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후쿠다 가오루라는 인류학자는 1990년대의 도시화된 영국에서 야생동물의 사냥이 점점 더 잔인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중성화, 미용, 브리딩 등 펫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형식의 인위적 개입들은 잔인함과는 거리가 먼 애정과 돌봄의 행위로 여겨지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것이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인지, 또는 어느 것이 애정의 소산이며 어느 것이 지배욕의 소산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펫의 반전

하지만 펫의 경험을 일방적인 지배와 애정의 과정으로서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펫이라는 문화적 경험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지배와 애정의 대상으로서의 펫이 단순히 그 의도와 감정의 효과로서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펫의 대반전은 대중문화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몇 해 전 필자가 재미있게 본 <마이펫의 이중생활>이란 영화가 있다. 여기서 주인공 맥스는 주인만 바라보고 사는 반려견이다. 영화는 주인의 충실한 심복으로서만 살아가던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에 의해 뉴욕의 다른 펫들과 만나게 되고, 급기야 지하세계에서 동물해방전선을 조직 중인 토끼 스노우볼과 조우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그린다. 영화 속에서 관객의 웃음을 특히 자아내는 것은 주인이 집에 있을 땐 사랑스러운 반려견 또는 반려묘를 연기하던 펫들이 주인이 집을 나가는 동시에 물건을 부수고 광란의 파티를 벌이면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는 극도로 의인화된 방식으로 펫들을 그리지만, 여기서 핵심은 주인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순응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 펫의 행위자성(agency)이다. 인류학과 여타 사회과학에서 행위자성이라는 개념은 행위자(actor)가 행사하는 능력 또는 힘으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으며, 이 행위자란 개념에 비인간을 포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과학기술, 의료, 환경, 동물, 심지어 기업과 시장이란 주제에 관한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들은 비인간의 행위자성을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이성과 의도라는 지극히 인간적 또는 인간주의적 요소들을 전제로 하는 근대적 행위자/행위자성 개념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마이펫의 이중생활>에서 펫들의 행위자성은 물론 매우 의도적인것으로 그려지며, 그렇기 때문에 매우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의도성이라는 요소만 제외하면 현실의 펫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를 빚어낸다. 즉 영화에서 펫들이 어질러놓은 집을 치우는 일은 오롯이 사람 주인의 몫이 되며, 이 상황은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펫의 반전, 즉 비인간의 행위자성은 때로는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 주체를 움직이게하며 심지어 후자를 그것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펫의 경험은 종종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양태를 바꾸어놓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자조적으로 사용되는 집사라는 말은 그와 같이 펫이 행사하는 구속력에 자발적으로 또 비자발적으로 예속되어버린 주인의 상태와 심리를 잘 포착한다. 필자가 한동안 즐겨보던 <사이먼의 고양이(Simon’s Cat)>라는 만화가 있다. 이 만화의 에피소드들은 주로 사이먼과 그의 고양이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불협화음들을 다루고 있으며, 사이먼의 하루는 보통 새벽부터 시작되는 고양이의 끊임없는 요구(주로 밥에 집중되는)와 이에 쉬이 응대하지 않으려는 그의 힘겨운 노력들로 이루어진다. 이와 똑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 비만 고양이와 살아가면서 벌써 십년째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있으며, 주말에도 이를 피해 집을 비우곤 하는 필자에게 있어서 주인공 사이먼은 웃지 못할 공감과 동지애의 대상이다.

 

애완에서 반려로가 의미하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펫의 행위자성이 주인의 행위자성과 동일하고 동등한 방식으로 행사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펫의 경험에 있어서 본질적인 지배, 권력, 불평등의 요소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는 예를 들어 현재 한국에서 유행 중인 애완에서 반려로라는 동물복지적 구호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권력과 지배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하게 하는 담론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언설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와 문화, 즉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재조직하고 새로운 니치마켓을 만들어낸다. 마트에서 이젠 뭔가 구시대적인 애완이란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려라는 새로운 코너가 훨씬 더 확장된 형태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일상의 움직임들을 하나의 방식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이를 대체하는 반려동물이란 프레임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반려동물은 정말로 아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일까? 그와 같은 말은 현실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 - Cheryl Benty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