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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4월은 갈아 엎는 달

by 이성근 2019. 4. 24.

흑백사진가물치 정일근,

풀뽑기문인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박제천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황지우

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 김수상

어쩌자고/ 최영미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최서림

지공거사/ 권순진

/ 이성부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브레히트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맞수/ 정희성

곡시哭詩/ 문정희

너 갈 데로 가거라 / 김규동

2 / 문인수

겨울 수화/ 최승권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엄마, 엄마, 엄마 못에 관햔 명상 36/ 김종철

산다는 것은 / 배현순

개나리 전설/ 배현순

우포늪 왁새/ 배한봄

어린 봄/ 배한봄

단 디가 최고/ 배종대

비가 온다 / 배상득

4월의 배나무 / 배두순

 

반성 서시/ 배경숙

고요 / 반칠환

사소한 산책/ 박후식

추억(봉개초등학교) / 박효찬

서호에서 / 박홍점

향수(鄕愁) 제조업 / 박현태

나는 가끔 들판으로 가는 꿈을 꾼다 / 박현태





흑백사진가물치

                                  정일근,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풀뽑기

                   ―문인수,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박제천

 

안개꽃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 뒤에 뒷짐을 지고 선 미류나무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들판에 사는 풀이며 메뚜기며 장수하늘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옮겼다 반짝이는

창유리에게, 창유리에 뺨을 부비는 햇빛에게

햇빛 속의 따뜻한 손에게도 말을 옮겼다

집도 절도 차도, 젓가락도 숫가락도, 구름도 비도

저마다 이웃을 찾아 말을 옮겼다

 

새들은 하늘로 솟아올라 그 하늘에게,

물고기들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그 바닥에 엎드려

잠자는 모래에게,

아침노을은 저녁노을에게,

바다는 강에게 산은 골짜기에게

귀신들은 돌멩이에게

그 말을 새겼다

 

빨강은 파랑에게 보라는 노랑에게, 슬픔은 기쁨에게

도화지는 연필에게, 우리집 예쁜 요크샤테리어종

콩지는 접싯물에게, 태어남은 죽음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 시집나무사리(문학아카데미,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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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황지우

 

!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內藏寺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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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 19664월 동아일보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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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 김수상

-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창립 22주년에 부쳐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을 죽일 때

농민군의 사지를 소나무에 묶어놓고

묶인 사람의 정수리에

송진을 바른 소나무 가지를 뾰족하게 깎아

망치로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는데,

정수리에 박힌 나무못에 불이 붙으면

, , !

농민군들 머리 터지는 소리가

1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어디 동학군뿐이겠나

대구의 10

제주의 4.3

광주의 5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 나라에

아직 우리가 살고 있다

 

일제에 빌붙고 군부와 독재에 아첨하며

온갖 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아직까지 권력의 단맛에 취해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빛바랜 창호지 같은 얼굴을 한 우리들은

창천(蒼天)의 하늘 아래 별로 부끄러움이 없다

 

외국인 200만 명이 우리 땅에 살고 있다

같은 말을 쓰면서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사람들을 민족이라 부른다

그게 민족이라면 그런 시절은 이제 곧 지나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우리를 무참하게 학살하고 때려죽인 이유가

아직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겨눈 반역의 죄인들이

광장의 맑은 햇빛 아래 끌려나오지 않았다

 

인간은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되는데

혼백은 혼()과 백()으로 나누어진다

()은 몸을 빠져나와

위패 안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은 사람의 몸에 남아 흙이 되고 바람이 된다

 

억울한 영혼은 백()이 되어 눈을 뜬 채 땅에 머문다

내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내 무덤을 내가 파서 왜 생매장을 당해야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생(相生)이 먼저가 아니고

해원(解寃)이 먼저다

원한을 풀어야 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민족은 해묵은 낱말이 아니다

민족은 폐기되어야 할 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가

가을밤의 별처럼 자꾸 돋아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꾸 되돌아봐야 한다

어머니가 동구 밖에서 우리를 보낸 뒤에도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보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무릎 꿇고 고백해야 한다

 

영원한 이념은 없고

영원한 민족도 없어라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모든 사람은 같은 민족이어라

세상의 그늘 안으로

맑은 햇볕 한 줌 쥐고 달려오는 사람은 모두가 같은 민족이어라

선하고 맑은 마음만이 인간의 역사 앞에 오래 살아남아

별처럼 빛날 것이다

 

민족은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불의에 항쟁하는 사람들

민족은 진실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

민족은 핏줄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으로 사랑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사랑공화국에서 법도 없이 푸른 맥박으로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미움은 가고 사랑은 오라!

거짓은 가고 진실이여 오라!

 

- <뉴스민> 201710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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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최영미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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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최서림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쓸히 내려다본다

 

역사는 산 자의 전쟁터면서 죽은 자의 감옥이다

연극은 끝나도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관객들이 박수치고 고함지르며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퇴장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

 

- 계간 리토피아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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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거사/ 권순진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대망의 연세가 착착 다가온다. 저기 있는 고지처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다 내 바로 앞에서 덜컥 차단기가 내려와 가로막히는 건 아닐까 조바심마저 생긴다. 이렇게 늙음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재함을 반겨도 좋은 노릇일까 갸우뚱하다가도 알량한 당근이 재촉하는 생의 덫에 서둘러 빠져들려는 이 치사한 심보는 무언가. 남은 생이라야 기껏 대통령이 한 둘 더 바뀔 터이고 몇 번 더 올림픽의 성화를 볼 수 있으리라. 그조차도 명운이 좋았을 경우다. 노약자석에 앉아서도 시침 뚝 떼고 마구 싸돌아다닐 할랑한 신간이면 좋으련만. 분별없는 열정 따윈 다 소진하였겠으나 삶의 틈새로 끼어든 구차한 이물질이 아니라 남루한 존엄일망정 지켜낼 것은 지켜가며 덤으로 얻은 생, 쌩쌩 세포들이 살아 꿈틀거려주기를 소망하노니

 

-계간 주변인과문학201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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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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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메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시집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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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Chris Harman민중의 세계사첫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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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시집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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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앉혔다. 열 판이면 열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늘 하는 대로 따먹은 이나 따위를 딸그락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 시집돌아보면 문득(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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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시哭詩/ 문정희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 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 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 111, 수필 20, 희곡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 김명순(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이 실린 잡지들.

 

계간 문예중앙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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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갈 데로 가거라 / 김규동

 

아들아이는 빈 책가방에 도시락만 달랑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학교에 가도 수업시간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없고

한 시간이 천년 같다고 했어요

수학과 영어는 1학년 때부터 공부했어야 하는데 어느새 3학년

기초가 없으니 어느 과목도 다 모를 것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복도에 나가 벌을 서는 편이

마음 편하다 했지요

몰래 시간에 빠진 다음 뒷산에 올라가 낮잠을 자거나

거리를 여기저기 걸어다녔어요

막노동하는 아버지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일만 열심히 했어요

뒤늦게 이 일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분통이 터져 당장 아이를 붙잡아 때려죽이려 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 어깨를 짚더니

조용히 이야기 했어요 참으로 조용히 말했어요

용식아, 알았다. 그렇구나, 너 갈 데로 가거라

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거라 이 애비도

그래서 일찍이 집을 뛰쳐나와 이렇게 평생을 살았단다

용식아 알았느냐 그러면서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는 그만 통곡하고 말았어요

 

- 계간 사람의 문학200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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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 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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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수화/ 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 시집 정어리의 신탁(문학들, 2016)

1986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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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시집어머니, 우리 어머니(문학수첩,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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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엄마 못에 관햔 명상 36/ 김종철

 

나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사십이 넘도록 엄마라고 불러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싫지 않으신 듯 빙그레 웃으셨다.

오늘은 어머니 영정을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불러 보았다

그래 그래, 엄마 하면 밥 주고

엄마 하면 업어 주고 씻겨 주고

아아 엄마 하면

그 부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기도인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내 몸뚱이 모든 것이 당신 것 밖에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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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 배현순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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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전설/ 배현순

 

 

개나리 담장 두르면 과부가 난다고 했대

뜬소문이라 여기고 심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며느리가 과부가 되었다네

 

그 집 시어머니 서른한 살 청상과부 돼서

4대 독자 아들 하나 키우며 수절한 덕에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수북수북 두고 살고 싶었는데

그 아들 어디로 가고

 

밑머리 올려 빗고 은비녀 꽂은 젊은 아낙,

곰방대 입에 문 여인네

개나리 빛 얼굴 마주 바라보고 있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손자새끼 아들 둘에 딸 둘이라네

 

개나리담장 치지 말라고 말릴 적에 심지 말 것을

이제와 베어낸들 무슨 소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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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왁새/ 배한봄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홀홀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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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봄/ 배한봄

 

과수원 귀퉁이 밭 일구러 갔다가

그곳이 적멸보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햇빛의 말

바람의 말

진눈깨비의 말을 기억하는

쑥 냉이 씀바귀

구만 구천 어린 나한들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적멸보궁

땅 깊숙이 삽날을 박으면

흙에서도

이슬 머금은 젖비린내

달빛 머금은 젖비린내

내 발목을 감고

얼굴까지 올라와서는

! 목젖 적시는 봄비의 옹알이

과수원 가장자리 적멸보궁에 들어

나는 소란스런 침묵으로 뛰노는

어린 봄을 만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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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디가 최고/ 배종대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때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 단 디"를 데리고와 나에게 소개한후

아흔이 다 되어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단 디가 최고다"라며 가까이 하기를 원하셨고

심지어 일흔이 넘은 큰 형님에게도

" 단 디"를 데리고 다니라고 말씀 하셨다

 

" 단 디"는 언제나 말이 없다

있는듯 없는듯 한 친구이나

어떨때는

" 단 디"" 단 디"하라는 어머님이

성가실때도 있었다

멀리 여행을 간다거나 무슨일을 하면서

" 단 디"를 떼어 놓을때는

무슨 작고 큰 좋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

어머님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는

" 내가 뭐라 했느냐? 단디가 최고다했지 않느냐?"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셨다

 

이제

어머님이 말씀 하시던 "단 디"

나이 서른이 다된 아들한테 부탁한다

 

"단 디"는 나의 둘도없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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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 배상득

 

비가 온다.

오갈데 없는 타향 객지에서 비가 온다.

노가다 하루 일당을 앗아가는 비가 온다.

공치기 두려운 오늘,

딸아이 학원비 주룩주룩 내리고,

바닥난 쌀통 비웃듯 내리고,

아내 옷섶이듯 파고 들어도

눅눅한 가슴뿐인 비가 내린다.

외상 소주 한 병으로 기운을 추스려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한가닥, 한가닥 바램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온다.

일어서야 하는 오늘

대들보 붙들고 추적추적 가을비 온다.

아득한 어둠 거느리고 허둥대는

낮도깨비 얼굴로 비가 온다.

일어설래도 소주값 없는

막막한 파발로 당도하는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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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배나무 / 배두순

 

물오름의 끝, 맥박이 빨라진다

탄력 좋은 가지부터 꽃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황사만 일없이 풀썩거리고

지금 나는 배나무들의 초례청을 찾은 것이다

벌들이 게을러지고

나비들이 인공의 장신구로 돌아간 지금

꽃들의 합궁은 이제 사람의 몫이다

붓질이 바빠지고 하얀 베일 속 남녀가

그림자만 보이는 듯한 한 낮

지금은 잠시 공중의 태양도 달이 되어

내 무심한 행동에 입방아가 찧어지고

초야, 저녁이 오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사월의 배나무에 혼례 일을 한다

붓질은 더 이상 안빈낙도를 새겨주지 않고

벌과 나비가 찾아들지 않는

사월의 배나무 사이를 쓱쓱

휴우- 망측하기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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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서시/ 배경숙

 

가끔은 헐벗기 위해

섬을 찾는다

내가 잊은 것

모자란 것

버린 것

더 사랑할 것을 위해

돌아가는 길을 위해

섬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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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너 오실라나

토옥.... !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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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산책/ 박후식-

 

산을 내려왔다 산은 많은 것을 나에게 주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산에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숲길은 나무만큼의 깊이로 늘 고요했고

푸른 나뭇잎 줄기 사이로는

청빈한 아침햇살이 나에게 들어왔다

 

우체국 옆 근린공원길에 들어섰을 때

도시를 닮은 한 소녀가 강아지를 앞세우고 가고 있다

목이 풀린 강아지는 여기저기 코를 찍어댔다가

뒤쪽다리를 치켜 올렸다가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닌 모양이다

목이 풀린 사소한 산책이 강아지에게는

하늘이 열린 만큼이나 즐거웠을까

 

묶인 우리의 산야는 할 말을 잃은 채

강 건너 슬픈 마을처럼 오늘도 그대론데 말이다

산을 내려왔다

산은 많은 것을 나에게 주는데

나는 산의 아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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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봉개초등학교) / 박효찬

 

제주시에서 중 산간 마을 입구

작은 오름 돌아서면

왕벚꽃 나무들이 꽃 비로 반겨주던

나의 고향 봉개국민학교

고깔모자를 쓴 칠 오름도 반쪽이 되어

바람 소리를 내어준다

 

운동장을 빙 둘러 앉은

나무들 사이

가을 운동회가 열리고

세월에 목마름으로

아이스 께기 장사꾼 목소리가 들린다

 

귤나무 밭 웅덩이엔

작은 삽 놀림으로 장난치던 동창들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후배들에겐 육성회비 낼 돈 없어

학교에 못 오는 아이가 없게 한다는 희망으로,

남자아이는 힘껏 삽질을 해댄다

 

여름날 뙤악볕에 퇴비를 만든다고

낫을 들어 휘두르고

쪽나무 교실 바닥 몽땅 양초를 발라 미끄럼 타며

나무그늘에 작은 돌멩이를 펼쳐놓고

여자아이들 공기놀이

사라져버린 기억들이 삐쭉삐쭉 새싹 돋듯

시곗바늘을 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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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에서 / 박홍점

 

계속되는 가뭄으로

호수는 가장자리부터 만신창이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물새들은 썩은 물에도 발을 담그고 논다

부리를 처박았다 뺐다,

그칠 줄 모르는 새들의 식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들의 부리나 발이

왜 그렇게 매끄럽고 단단한지 알 것도 같다

 

자궁암 말기

생산이라곤 몰랐던 그녀의 자궁 속에서

바람이 불때마다 악취가 출렁인다

늘 고여 있기만 하던 물이 멀리도 간다

죽어서 걸어 나오는 물

죽어서 안기는 물

이제는 여밀 수 없는 시간들이여,

삼키고 흘려보냈던

눈물과 땀과 정액이 그녀 주위를 맴돈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고

마디를 늘리고 있는 나뭇가지들

밤이면 어김없이 켜지는 불빛들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삼삼오오 희미한 불빛아래 담소하던 이들은

날벌레들에게 기꺼이 피 몇 방울 나누어 주고

늦은 밤 손 흔들며 다리를 건넌다

칸칸이 매달린 몸을 끌며 어둠 속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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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제조업 / 박현태

요 며칠

가는 바람이 숲을 흔들더니

시골로부터 포대 하나가 배달되었다.

그 속에는 고향이 들어 있었다.

새끼줄로 묶인 포대의 입을 풀자

하얀 햅쌀들이 반들반들 이빨을 빛내며 웃는다.

크게 한웅큼 주루루 만져보자

구수한 쌀향이 풀풀이 날아든다.

한 됫박의 콩과 팥, 한 주먹의 참깨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흙과 바람, 시퍼런 강물소리도 들어 있었다.

나는 생각해 낸다.

추억의 창고, 거미줄 쳐진 구석에

수북하게 버려두었던 기억들을

그 여름날

뭉게뭉게 피어올라

앞산 높은 허리를 너울너울 넘어 오던 뭉게구름,

갑자기 쏴아 하고 천지간을 후려치며

쏟아지던 소나기,

쿵쾅 우렛소리와 함께 하늘을 갈라놓던 벼락,

금방 비 개이며 검푸른 들녘이 파도처럼 출렁이던 넓은 들판,

그 싱싱한 그림들

나는 생각해낸다.

어머니의 가느다란 허리에 묶어 두었던 어린 날들을 왜 잊지 못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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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들판으로 가는 꿈을 꾼다 / 박현태

 

옛 친구를 생각하다가

문득

파아랗게 깎아진 풀밭 위로 외로운 길 따라서

표표히 언덕을 넘어 사라지던 동자승,

그의 둥근 머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이상한 슬픔 같은 거

그리고 회색의 장삼자락에 휩싸여 겹겹이 나부끼며

살아지던 크고 검은 그늘, 그런 운명으로부터

안겨지는 삶 하나를 본다.

 

오늘은 고운 추억만을 생각하기로 하고

살아있다는 것, 오직 행복하기로 한다

잠시 회상한 옛 친구와 가을나무 누른 그늘에 앉아

거친 세상을 열심히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가

이리 쉬이 간 세월에다 대고 바람 허하게 웃을 뿐

새삼 인생이니 운명이니 알 바 아니라 다짐한다.

 

이럴 때 나는 들판으로 가는 꿈을 꾼다.

잠깐으로 과거의 모두를 돌아볼 수 있는 것 아니지만

시간을 쩔뚝이며 다만 얼마라도 더디게 세월을 가게하고

잠든 듯 멈춰 서서 떠올려보는 옛사랑 옛친구

그 물빛 같은 추억에 젖어 들어

내 인생살이 중 가장 아름다운 세월

한 자락 들추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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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제06회 MBC 대학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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