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고정희
수염/ 장인수
돌아가자 / 요시마스 고오조
강의 부록- 이해원
캄캄절벽이 환하다-채재순
침묵의 힘 -복효근
부고 訃告 -강성은
애인 -유수연
발인(發靷) - 오세영
도장 마경덕
전세 -도종환
공중무덤- 마경덕
흙탕물- 이재무
처방전- 조정권
역류-마경덕
계란을 생각하며-유안진
사근사근 첫눈이 이화은
완장 , 황상순
눈 오시는 날 · 1 임동윤
은거지隱居地·2 정일남
누이의 방 - 전기철
권태
브레히트를 읽는다
뉘엿뉘엿- 김영주
겨울 엽서ㅡ첫눈 정일근
참깨꽃-문신
별국 -공광규
겨울 대관령
개구리와 개와 새들
대천 바다
닭
갈천 저수지
겨울 대천
폭설
몸관악기
무량사 한 채
가을 덕수궁
미루나무
놀란 강
장마에 갇히다- 이동호
3월
용천리 풍경
민간인 - 김종삼
시인학교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박주택
자작나무 숲은 여기서 멀고
시간의 동공
낯선 얼굴-신용목
뉴욕행- 김사인
옛 일
빈 화분-김점용
그는 숨는다
출렁거리는 와불
생명이 밉다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김성규
택배 되어 온 남자- 권애숙
백살-이정록
마늘밭을 지나다
대추나무
버드나무 강변에서의 악수 -손택수
사라진 입들-이영옥
이팝나무 고봉밥
연밥
바람 아래 붉은 강
어디쯤 왔을까
맨드라미
행방
소리의 길 - 조성자
첫사랑
나무의 고백
친구처럼 가을이 왔다
외도
가을 호수는
한가위
첫눈- 박성우
신혼 첫날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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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장인수
새벽 5시, 거울을 보니 밤새 수염이 웃자랐다.
이놈 수염,
남성 호르몬을 남발하는 이놈의 자슥
내 얼굴에 쳐들어 와서 피부를 야곰야곰 묵정밭으로 만드는 녀석!
때론 안면몰수의 그런 너의 성품이 좋아서
내 턱과 입술 주위에 야생화를 피우겠지 싶어 몇 주 넘게 묵힌 적도 있겄만 수염은 볼품없는
잡초에 불과했더라.
촌놈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묻어있는 도시적 겉치레와 품격을 제거하기 위
해 일부러 수염을 깎지 않은 적도 있었다.
관우 장비의 수염 흉내를 내고
이황이나 이이 선생의 수염을 내심 바랬다.
이래도 저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수염아,
차라리 너는 개털처럼 자라기도 하거라.
나의 게으름을 맘껏 갉아먹고 천박하게 얼굴을 도배하고 꼬리를 치라.
수염은
감각령으로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얼굴 밖의 세상으로 쭉쭉 뻗어가서
독자적으로 운동하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내 몸뚱이를 숙주삼아
마구 파먹어라.
때로는 포도 넝쿨로 뻗어가서
나의 얼굴에 신사임당의 포도도(葡萄圖)를 그리고
입술을 악보로 삼아 포도주를 마시고 미친 가객의 헛소리를 부르렴.
수염아,
시커먼 세월의 뿌리야!
너는 내 얼굴에 출몰하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네 멋대로 미치광이의 삶을 살아라.
갈대숲이 되어 새 둥지를 틀다가
수염아,
야크의 털이 되어 천상에 가닿을 차마고도의 험난한 길을
폭설처럼 휘날리거라.
내 얼굴 따위는 짓뭉개버려라.
- 계간 《시평》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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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자 / 요시마스 고오조
기쁨은 날마다 저만치 멀어져간다
네가 일생동안 맛보았던 기쁨을 다 세어보는 것이 좋을 거다
기쁨은 분명 오해와 착각 속에 싹트는 꽃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다다미 위에서
하나의 주발 가장자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낯선 신의 옆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며 몇 년이 지나버렸다
무수한 언어의 축적에 불과한 나의 형체와 그림자는 완성된 듯하다
사람들은 들국화처럼 나를 보아주는 일이 없다
이제 언어에 의지하는 일 따위는 그만두자
실로 황야라고 부를 만한 단순한 넓은 평야를 바라보는 것 따위
어림도 없다. 인간이라는 문명에게 아무리 불을 빌려달라 하더라도
그것은 도저히 헛된 일이다. 만일 돌아갈 수 있다면
이미 극도로 지쳐버린 영혼 속에서 굵고 둥근 막대기를 찾아내어
거친 바다를 횡단하여 밤하늘에 매달린 별들을 헤쳐 나아갈
노를 하나 깎아내어
돌아가자
사자와 송사리가 생몸을 부대끼며 서로 속삭이는
저 먼 창공으로
돌아가자
- 시선집『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다』(들녘,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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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부록
이해원
밤새 안개를 짓는 강변북로
새벽을 복사하면 긴 강이 출력된다
안개는 강의 부록
자욱하게 안개를 출하하는 강을 따라 걸으면
물이 익어가는 소리,
허공에는 수없이 안개의 지문이 찍힌다
새벽에 배달되는 싱싱한 입자들, 촘촘한 밀도에 길은 뒤집히고
도시는 실종된다
국제업무지구에 불안한 소음이 둥둥 떠다닌다
반대와 찬성으로 안개에 덮힌 동네
현수막은 대변인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도시개발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조망권의 실소유자는 누구일까
질 좋은 배경으로 해마다 프리미엄이 늘어나는 강
안개의 성분에는 전망이라는 고가의 지분이 숨어 있다
달리는 차들은 모두 안개를 한 줌씩 얻어서 통과한다
―시집 『일곱 개의 엄마』, 시산맥사, 2016.
캄캄절벽이 환하다
채재순
아흔 노모의 귀는 캄캄절벽이다
친구 분과 맛나게 이야기 나누시길래
무슨 얘길 하셨냐니까
서로 제 얘길 했지 하신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는
캄캄절벽끼리의 말씀
벽 만드는 일이 없다
마주보며 웃는다
절벽끼리 말이 말랑말랑하다
서로 다른 말을 가지고서도
저토록 웃을 수 있는 천진난만
밀고 당기는 일 없는 캄캄절벽이 환하다
침묵의 힘 복효근
철로 한켠에 침목들 쌓여있다
하나 같이 일자로 입을 다물고 있다
세상은 열차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의 몫인 것 같지만
달리는 자들의 세상 같지만
침묵하고 있는 자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한 생을 한 자리에서 누워 침목은 침묵으로 말한다
침목은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열차의 굉음을
제 몸으로 받아내어 잘게 잘게 땅으로 분산시키고
이윽고 침묵을 남긴다
지반이 꺼지지 않도록
철길을 붙잡고 종착역까지 옮겨주는 것은
저 말 없는 것의 힘이려니
저 켜켜이 쌓여있는 침목들은 어디론가 실려가
누군가의 길이 될 것이다
떠들 게 없어서가 아니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
침목 혹은 침묵
―<한국동서문학>, 2017 봄.
부고 訃告 -강성은
그해 시월
공중에는 검댕이 마구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우산으로도 막아봤지만
피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씻고
낮이면 다시 더러워졌다
십일월의 나뭇잎들은 나무에 매달려지지 않았다
검고 불길한 생물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면 울면서 노래도 불렀다
십이월이 오자
검은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것이 눈이라니(저것이 눈인가, 저 검은 것이 눈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하는 사람들 사이로
신난 개들이 뛰어다녔다
더러워진다고 죽는 건 아니다
잠들기 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먼 곳에서 발생한 큰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걸
곧 이곳을 휩쓸 거라는 걸
그들은 몰랐다
그들만 몰랐다
―<문학사상>, 2016.12.
애인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티브
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2017 신춘문예 당선시
애인 유수연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 시집 <벼랑의 꿈>, 시와시학사, 1999.
발인(發靷) 오세영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야간 비행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등불들은 별들의 세상,
밝은 별 하나를 찾아 나
이 지상에 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이 공항은
환승을 위한 한 순간의 경유지.
착륙 즉시
다른 항공편으로 갈아타야 한다.
세 바퀴는 이미 내렸다.
활주로를 구르는
지금 창가엔 간단 없이 비가
흩뿌리지만
돌아보면 다행이도 지난 기상(氣象)은 좋았다,
바람과 구름을 가르며
별 사고 없이 날아온 한 생애의 항적(航跡).
그러나 이제 나는 또 다른 별을 찾아
탑승을 서둘러야 한다.
다시 또 하나의 비상을 꿈꿔야 한다.
지상 일만오천 피트의 어두운 상공을
페가사스처럼
카시오페아처럼
―<버클리문학>, 2016 여름.
도장 마경덕
마마가 돌던 해
또래 중 혼자 살아남은 계집아이
곰보라는 놀림에 눈이 붓도록 울었다
엄마는 말했다
울지마라 곰보자국은 하나님이 널 살려주신 증거란다
내 몸에도 증거가 있다
벼랑에서 굴러 이마에 찍힌 2㎝ 흉터
앞머리로 가린
죽음이 스쳐간 아찔한 흔적
제왕절개로 아랫배에 달라붙은
지네발도 숨겼다
아이가 살아난 그 자리를 축소하고 싶었지만,
신은 그때그때
몸에 도장을 찍어 확실한 증거를 남기셨다
-시집 <사물의 입>에서
전세 도종환
살아보고 결정할 걸 그랬다
처음 보던 날 마음이 휘청하고 기울었다
산뜻하고 수려한 외모 훤칠한 키 때문에
투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문을 열고 살짝 들여다 본 안쪽 풍경은
막힌 데 없이 탁 트여 보기 좋았다
배경이 좋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도도한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고
멀리서는 새들이 날아오며 격조를 높여주었다
물 가운데 떠 있는 작은 모래섬은
여기 머물러도 좋겠다는 마침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살아보니 아니었다
여름에는 화로처럼 뜨거웠고
겨울에는 부채바람 같은 찬 게 강에서 몰려왔다
겉보기와 다르게 속은 좁고 불편한 데가 많았다
보기 좋은 배경도 발을 담글 수 있는 게 아니어
위험하고 실속이 없었다
보기 좋다고 살기 좋은 게 아니었다
낮이고 밤이고 몰려오는 소음과 질주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정거를 반복하는 소리들로
창을 열어도 닫아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살아보고 난 뒤에 결정할 걸 하고 후회했다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드는 걸 알면서
몇 가지 익숙함을 버리지 못해
습관처럼 오늘도 여기 머물러 산다
여차하면 떠난다는 생각을 하며
나간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며
오늘도 여기 머물러 산다
―<시와표현>, 2016.7.
공중무덤
마경덕
새벽이 숲을 켠다
나뭇가지에 낀 어둠이 뿔뿔이 흩어지고
밤새 보름달에 접속한 하늘은 해상도를 높인다
잠시도 귀를 굶기지 않는 나무들
일찍 새떼를 풀어놓고 새소리로 아침을 먹는다
숲이 낳은 새들
지난밤 둥지에서 충전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방전된다
새를 타고 산 너머로 날아간 나무도 있다
물똥을 싸도 잎사귀서랍에서 벌레과자를 꺼내주는 나무는
새와 같은 핏줄이다
공중의 길을 지우는 어스름
정시에 숲이 닫힌다
빈 둥지가 불안하다
새들의 무덤은 공중에 있다
― 시와표현, 2016.8.
흙탕물
이재무
흙탕물은 흙의 감정일까, 비의 감정일까,
저토록 격렬한 포옹을 본 적이 없다.
난 탕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흙탕물은 아직 맛을 보지 못했다.
나무들 풀잎들은 흙탕물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포지션], 2016 여름.
처방전 조정권
뭉게구름 90일분
시냇물 소리 90일분
불암산 바위 쳐다보기 90일분
빈껍데기 달 90일분
귀하의 삶은 의료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현대시학, 2015.1.
역류
마경덕
능수버들은 바닥이 하늘이다
오를수록 땅과 가깝다
주변을 거스르는 유턴, 직진이 아닌 하강이다
저 푸른 역류,
이편이 아닌 저편은 역모이다
나무나라에선 허공의 고리에 목을 걸어야 한다
바람과 친분을 맺고 화분(花粉)을 유포한 죄목으로 참수를 당한 버들족(族),
산발한 석고대죄가 드문드문 변두리로 유배되었다
죄 물림은 삼족(三族)까지 이어져 피를 나눈 수양과 개수양도 머리를 풀었다
버드나라 왕으로 군림한 왕버들은 지금 반신욕에 빠져있다
한때 강변을 장악한 버들족의 멸망으로 번창하는 공중
하늘의 괄약근을 찔러대고 소나기를 뒤집어써도
집요하게 허공을 침범하는 거목들, 아찔한 고소공포증에 마디마디 통증이다
쉬 휘어지는 능수버들 옹이가 없다
무골의 힘이다
―유심, 2014.11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 시집 둥근 세모꼴에서
사근사근 첫눈이 이화은
눈이 온다 서울 여자처럼
사근사근사근사근
큰오빠를 홀린 서울 여자를
집안 어른들은 여시라고 했다
티마 속에 꼬리를 감추었다고 했다
발자국이 없을 거라고 했다
사근사근사근사근
서울말은 우리들 눈썹에 머리칼에
선들에 닿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우리는 침을 흘리며
그녀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녀가 울며 떠나간 날도 눈이 내렸다
면사무소 국기 게양대처럼 꿋꿋하던 큰오빠가
시든 열무 잎처럼 변한 것도
그 여시 때문이라고
눈이 온다
흰 속치마 속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무덤덤 담벼락에 전봇대에
오래 눈을 감고 있는 늦은 골목에
발자국도 없이
사근사근사근사근
―시집 미간에서
완장 , 황상순
완장은 초등학교 때
주번완장 차 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흘러내리는 완장 고쳐 올리며
못내 어색하기만 한데
임종도 못 지킨 불효 죄스러워
팔에 두른 완장이 돌확처럼 무거운데
국장님도 과장님도 완장에 기죽어
엎드려 큰절들을 하고 가네
정족리 돼지엄마 육천 삼백 원
삼천동 김숙희 만 오천 원
비뚤비뚤 침 묻혀 쓴 외상장부로
자식들 공부농사 다 지은 후
빈 곳간에 알곡 들일 일만 남았는데
까만 줄 선명한 완장
마지막 선물로 주시고, 어머니
미소만 짓고 계시네
삼베완장 무거워 자꾸 흘러내리네.
ㅡ 시와 소금 2012 여름에서
눈 오시는 날 · 1 임동윤
손바닥마당에 내리는 것들을
종일 바라보기만 하기
여리고 가는 붉은 발의 새들이 처음 밟도록
바라보기만 하기
잣나무 둘레가 바닥까지 휘어져서 찢겨져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기
찢겨져서 허옇게 뼈를 드러내며 내지르는 소리도
그윽하게 듣기만 하기
물푸레나무가 뿌리로부터 길어 올린 푸른 물들을
제 몸에 쟁이는 것을 듣기만 하기
자작나무와 박달나무가 제 몸 비워내는 소리를
절간의 풍경소리로 듣기만 하기
모든 생각이 다른 한 생각을 지우고
푸른 무늬로 일어섬을 생각하기만 하기
흰 것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안 보이는 것이 더 잘 보이는 것이라고
뒤집어 생각하기만 하기
마당귀 무너지도록 종일 쌓여도
무심히 눈여겨 바라만 보기
ㅡ 시집 편자의 시간에서
은거지隱居地·2 정일남
우편집배원이
솔부엉이 우표가 붙은 서한을 주고 간다
어느 시사詩社가 나를 찾아준다
솔부엉이가 용케도 번지를 알고 왔다
야생과 손잡은 일상이 유배인 듯 살아왔으니
원시의 멧새가 날아와
내 귀에다 비색 음을 채운다
내 은둔이 만개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움집으로 왔던 길이 서둘러 비구니 따라 산 속으로 가버렸다
그 길로 인기척은 오지 말거라
흰 수건 두른 낮달만 오거라
칡꽃이 필 때는 거기에 만족하고
시드는 것을 생각지 말자
내가 바라는 피안에도 달이 뜨면 좋겠다
맷새가 무덤을 노래하다 저승 쪽으로 가버렸다
숨어 사는 번지가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
ㅡ 시와 소금 2012 가을에서
누이의 방 전기철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 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지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차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러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않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ㅡ 시집 /누이의 방에서
권태 전기철
생각의 뼈다귀를 쌓는 밤. 책이 한 관념론자를 편다. 어머니의 치매가 와 있다. 기억의 밑바닥이 수런거린다. 목구멍에서 침을 핥는 어머니. 방부 처리된 기억의 저편에서 온 어머니, 파랗다. 파란 어머니는 책을 기절시킨다. 관념으로 그을린 밤. 페이지 속으로 들어온 관념론자가 절뚝인다. 책 속에다 글을 쓴다. 치매에 걸린 책. 초점 위에 권태를 쌓는 관념론자의 밤. 파란 밤. 어머니가 목구멍에서 마지막 침을 핥는 밤. 적막이 그을린다.
ㅡ 시집 /누이의 방에서
브레히트를 읽는다 전기철
자유야, 너는 얼마짜리냐.
평등아, 네 스펙은 무엇이냐.
진보와 보수의 장사치들 사이에서
죽어가는
자유야, 미안하다.
평등아, 나는 거짓말쟁이다.
시장통에 빠진
이 시대에
나는 한 번도
부자들을 증오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에 사는
평등아,
부자의 하수인들이 설치는 거리에 사는
자유야,
나는 가진 자들과 공범이다.
바람둘이 플로베르보다 못하고
아편쟁이 콜리지보다 못한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염치도 없이
브레히트만 열 한 번째 읽고 있다.
ㅡ 시집 /누이의 방?에서
뉘엿뉘엿
김영주
머리 하얀 할머니와 머리 하얀 아들이
앙상하게 마른 손을 놓칠까 꼬옥 잡고
소풍 온 아이들처럼 전동차에 오릅니다
머리 하얀 할머니 경로석에 앉더니
머리 하얀 아들 손을 살포시 당기면서
옆자리 비어 있다고
여 앉아 앉아
합니다
함께 늙어 가는 건 부부만은 아닌 듯
잇몸뿐인 어머니도
눈 어두운 아들도
오래된 길동무처럼
뉘엿뉘엿
갑니다
겨울 엽서ㅡ첫눈 정일근
남쪽 항구 도시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지난 1979년 군사계엄령 이후 처음으로
이 도시에 백색 계엄령이 발표되고
무장한 백색 계엄군들이 진군해 왔습니다
시민들은 그날처럼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북위 36도 아래의 따뜻한 길들이
속수무책으로 지워지고
백두대간과 변방의 먼 섬들도
이마마다 백기가 펄럭인다는 전언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폭설입니다
남쪽 항구 도시 기상청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설주의보 대설경보가 차례차례 발효되고
태어나서 처음 눈을 만나는 우리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드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인지
눈사람 대신 하얗게 서 있습니다
ㅡ 시집 가족에서
참깨꽃-문신
참깨꽃 보면 오래 묵은 범종 같다
당목撞木으로 두드리면 부처님 말씀이 서 말 하고도 한 닷 되쯤은 쏟아질 것 같다
저기 저 한 뙈기도 안 되는 비탈밭 가득 참깨꽃 피었다
범종이 무릇 일만 송이는 된다
쳐라, 바람아
부처님 설법을 깨알 같은 필체로 옮겨 적어 마침내 팔만대장경을 일구리라
ㅡ 시집 /물가죽 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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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국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시집 소주병에서
겨울 대관령
공광규
등을 구부린 창백한 달이
산등성이 위에 누워
초저녁 새우잠을 자고 있다
별들은 추위에 떨다 하나 둘
불을 쬐러 바닷가 도시로 내려가
처마 끝이나 가로등에 매달려 있다
아찔한 빙판 고개를
두 눈에 불을 켜고
힘겨운 삶처럼 기어가는 자동차
야윈 등을 구부리고
삶의 벼랑을 간신히 넘어가고 있는
버스 안의 사람들.
개구리와 개와 새들
공광규
개구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니
온 논의 개구리들이 따라서 울어댄다
개가 한 마리 짖으니
온 동네 개들이 까닭도 모르고 짖어댄다
새 떼가 바람이 여닫는 부엌문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 소심하게 흩어진다
헛기침과 발걸음 소리에도 놀라
울음을 일제히 멈추는 개구리들아
작은 막대기만 들어도
꼬리를 내리고 슬슬 도망치는 개들아
무리에서 낙오되는 것이 두려워
떼를 지어 방향을 바꾸는 새 떼들아.
대천 바다
공광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듣는
파도가 나와 술을 마시자고
어리고 슬픈 작부처럼 보챈다
술은 파도가 먹고 싶은데
바람이 먼저 횟집 창을 두드리고 들어와
술을 달라고 졸라댄다
아나키스트, 그 여자의 술집에서
해변에 버려져 썩어가는 배
폐선처럼 늙어가는 나이를 바라보며
생계에 갇힌 인생을 안주로
파도와 수십 잔 수백 잔
사상의 정부(政府)도 마음의 정부(情婦)도 없이
꿈과 힘과 아름다움이 소진해가는
내가 그리고 네가 안쓰러워
떠나간 사람 떠나간 사랑을 애기하다
파도가 왜 기타줄에 와서 우느냐고
횡설수설 술잔으로 탁자를 친다.
닭
공광규
닭에게 모이를 던져주면
정신없이 달려들어 주워 먹는다
발에 걷어차이면서도 모이를 향해 돌진한다
닭을 잡을 때는 이렇게
모이를 던져서 가까이 오는 놈을
얼른 잡아서 목을 비틀면 된다
밥을 좇아
정신없이 관습의 식탁으로 달려가는
닭 무리들이 있다
목 비틀리고 털 뽑히러 가는.
갈천 저수지
공광규
외딴 초가집 추녀에 쌓인 음반이 비에 젖어
적막한 청춘을 빗소리가 밟고 가는 곳이다
물수제비 뜨는 아이도 멱 감는 젊은 아낙도 없는
한낮 새소리와 초저녁 지렁이 울음만 가득한
산이 깊어 사람도 깊어지는 산골이다
청호반새가 햇빛 별빛이 부서져 고인 저수지에 빠진
하늘과 구름과 달맞이꽃을 배경으로
잠시 졸다 개망초꽃을 흔드는 미풍에 놀라는 곳이다
물이 흰 뱀처럼 남강으로 기어가다가
갈천서원 앞에서 두런두런 경전 읽는 소리를 흉내내다
조약돌이랑 모래무지랑 새끼붕어랑 얘기하는 곳이다
원앙과 천둥오리와 왜가리 떼가 들풀들에게
수런수런 말을 걸다 저수지를 떠나면서
고요의 존재를 알리려고 가벼운 깃털 하나와
구름 조각을 물 위에 조용히 떨어뜨리고 가는 곳이다
저렇게 가벼운 깃털 하나 구름 한 조각의 무게에도
파문이 깊어 물에 빠진 하늘과 나무와 꽃과
산과 사람이 함께 부드럽게 구겨지는 저수지다.
겨울 대천
공광규
첫눈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바다
모래 위에 뒹굴며 엉엉 우는 빈 소주병
“우리들 청춘도 신음하며 지나고 있어요.”
한 사람이 말했고 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탄불 위에 구워지는 조개가
몸을 뒤틀며 아우성을 쳐댔다
따뜻한 것이 그리운 눈발 몇 개가
비틀비틀 주막 안으로 불을 쬐러 왔다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녹아버렸다
“인생은 연탄불 위에 내리는 눈발 같아요.”
한 사람이 말했고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틀거리는 눈송이 하나가
다른 술집 몇 개를 거쳤다 오는지
술잔을 받기도 전에 잔 속에 몸을 푹 던졌다
수평선에 몸을 맞댄 하늘과 바다는
눈발로 주렴을 치고 열심히 사랑했다.
폭설
공광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ㅡ 시집 말똥 한 덩이에서
몸관악기
공광규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굴욕의 나이를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끌어당기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걸레처럼 끌고 다니는 밤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에서
술에 젖은 몸이
악보도 연주자도 없이 운다.
무량사 한 채
공광규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 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 소리를 냅니다.
가을 덕수궁
공광규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나란히 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고 물들이다가
땅에 내려와 몸을 포개고 있다
은행나무와 모과나무 잎도 그렇고
병꽃나무와 생강나무 잎도 그렇게
단풍으로 달아오른 몸을 포개고 있다
허리가 없고 배가 나온 초로의 남녀가
가을 나무 아래 팔짱을 끼고 간다
물든 마음을 서로 포개고 있을 것이다.
미루나무
공광규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아무한테나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울거나
한여름에 반짝이는 잎을 하염없이 뒤집던 나무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를 기대어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것에도 못 쓴다며
무시당하고 무시당했던 나무
그래서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 갔던
아주아주 오래 살다가
폭풍우 몰아치던 한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놀란 강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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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에 갇히다
이동호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비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 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충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스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이동호 시집 「조용한 가족」중에서
3월
이동호
일당도 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목 곳곳
가닥가닥 거미줄을 치는 바람
중량을 초과한 기막힘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얼굴의 주름살 범람 중이다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걸친 듯한 월세 집들
아무렇게나 엎어진 언덕 위 비포장 공터
오래된 널빤지에서 방금 뽑아낸 녹슨 못 같은
굽은 다리로 한 사내, 중년의 절반쯤
겨우 균형을 잡고 박힌다
아직 겨울은 짐도 꾸리지 않았는데 3월이다
가로등이 하나 둘 좌판을 펼치는 야경의 반경
도란도란 목젖을 여는 벚나무들
그 사이를 톱니처럼 빠져나가는 몇 사람 지나
온갖 부족한 것들의 집이었던
그의 사글세방에 조명이 켜진다
안면근육이 쪼글쪼글한 전기장판은
아무리 열이 올라도 꽃을 피우지 않는다
창 틈 낮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저 숱한 몰래카메라
어느 누가 그의 가난을 훔쳐보는 것일까
봄도 업신여기는 그의 3월
고드름처럼 거꾸로 자란 한파가 가득 들어가 눕는다
환하게 떠오른 달 틈으로는 슬픔들
안타까움들 숨죽여 그의 비극을
관람 중이다
용천리 풍경
이동호
감나무 가지마다 시월이 걸려있다
오늘은 용천龍川도 월남치마를 벗어두고 뽀얀 알몸이다
경운기는 한 해 동안의 고된 노동을 헛간에 내려놓는다
황톳길을 두르고 소 몰고 마실 나갔다 돌아오는 어머니는
이제 뒷모습조차 외할머니를 닮아 주름지고
아버지를 닮은 나도 어느덧 아버지다
도시서는 환영도 못 받는 선생질이
어머니한테는 여전히 최고급이다
고향집 마당을 밟을 때마다 아이고 우리 이 선상님
국 끓듯 반가운 목소리
빨랫줄에 걸린 옥수수가 시계추처럼 흔들려
어머니의 표정도 가을걷이를 끝낸 전답인데
내 심정이 덩달아 우루과이 라운드인 것은
마구간에 묶인 내 아파트 전세금 일부와
한 상자를 팔아야 겨우 만 오천 원 떨어지는
사과 상자 안 둥근 은행 대출금 때문이다
나는 하룻밤도 못 채우고 선잠을 대문 앞에 내 건다
어머니는 말없이 내 허리춤에 입단속 잘한 봉투를 밀어 넣고
차 트렁크에는 감자, 옥수수, 햅쌀 한 포대를 기어이 채워 넣는다
대문 앞에서 어머니는 감나무 가지에 달려 흔들린다
어머니는 후경後鏡 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어머니의 머리 위로는 어머니를 덮으며
사글세 같은 시월이 뚝뚝 떨어진다
닭울음소리가 동구 밖까지 나를 따라나서며
‘꼬락서니꼬오락서니’ 지저귄다
민간인 김종삼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시인학교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박주택
이 거리, 노래가 되다 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놓는다
-박주택 시집 「시간의 동공」중에서
자작나무 숲은 여기서 멀고
박주택
영혼을 저녁에 가둔 사람, 걸어가네
낮과 밤이 섞이며 진눈깨비 내리고
우산 없는 가로수 밤의 우울한 노래를 게워내네
죽음과 싸우기 위해 펄럭이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누군가 숨 가쁘게 계단을 오르고
기억의 비린내 속으로 한 사내 내려가네, 숨결은 흩어지고
막 생명이 태어난 듯 애인들, 팔짱을 끼고
서로의 배 속으로 들어가네, 비가 눈과 섞이며 진눈깨비로
퍼붓는 저녁, 자작나무 숲은 여기서 멀고
구두는 길과 싸우면서 두려움을 만든다
저녁의 저 윤곽들, 나서 한시도 자신을 결정하지 못하여
주통 없는 몸에 가 닿으려고 할 때
생애 가장 길었던 오늘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이별의 끝으로 이파리 져 날짜들의 지붕을 덮고
가로수 어둠에 밴 물을 토해낼 때
저녁을 가둔 영혼, 사내의 몸에서
빠져나와 윤곽 밖에 있는 빛으로 가네
진눈깨비 내리네, 등을 구부린 사내
흐르는 뺨으로 떨다
멀리 진눈깨비 속에 갇히네
시간의 동공
박주택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박주택 시집 「시간의 동공」중에서
낯선 얼굴
신용목
따신 묏등에 앉아 누런 해에 눈 맞추고 노는데
후드득, 새들이 저녁을 싣고 숲을 빠져나갈 때
낚싯대도 없이 찾아간 물왕저수지
한켠의 미루나무가 그림자를 동쪽 끝까지 눕혀
노을을 물 위에 쓰러뜨릴 때
멀리, 바람이 연기를 모아 먼 산을 찾아갈 때
낮잠 자다 깨니 아무도 없는 집, 일어나기는 싫고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뒹굴다 눈에 비친 창으로
흰 구름 몇 떠서 안을 들여다볼 때
바람에 날린 비닐봉지가 허공에 구멍처럼 박혀 있을 때
찾을 사람 없는 대낮, 누가 벨을 눌러
배달부가 내미는 연체금 독촉 고지서를 받아들고는
서둘러 문 잠그고 돌아설 때
부스스한 머리로 멍하게 앉아 수십 쌍둥이 화장실 타일들을 보고 있을 때
누운 방 하얀 벽으로 햇살이 소리 없이 소나기질 때
그때,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버린 승객처럼
개찰되지 않는 한 인생이 거기 서성이고 있다
도무지 내 것 같지 않은 얼굴이 유리마다 비치는 것이다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중에서
뉴욕행
김사인
딸년은 제 사촌들과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슬슬 이 땅 떠나 이륙하고
손바닥만 한 창으로 엄마! 아빠!
소리치며 빠이빠이 하고
밑에 남은 부모 일동도
새끼들 얼굴 창에 비칠 때마다
‘오냐 잘 댕겨온나’ ‘편지해라’
같이 소리지르며 손 흔들어대는데
한 바퀴 돌 때마다
열심히 고개 내밀고 에미 애비 찾아쌓는
그것들 보니
하이고야, 제법 그럴듯하게
코 찡하고 가슴 써늘하더라
그러다 슬며시 겁나더라야
부산행 서울행보다
뉴욕행 빠리행 타겠다고 떼쓰는 저것들
나중에 참말 뉴욕행 빠리행 해가지고
오도 가도 안하면
그때 심정 어떨까나
어디다 말도 못하고 걱정되더라
부산 금강공원
500원짜리 뺑뺑이 비행기에
딸년은 실어놓고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에서
옛 일
김사인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빈 화분
김점용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이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면 나를 옮겨 담은 화분도 아득하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 오 대~한민국!
결국엔 우리 모두 지구 위에 심어졌다는 생각
목숨 붙은 걸 함부로 맡는 법 아니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겁도 없이 생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지
빈 화분
그 오랜 공명이 아직
씨 뿌리지 못한
빈 몸을 울리고 지나간다
어찌하여 화분은
화분이 되었는지
-김점용 시집 「메롱메롱 은주」중에서
그는 숨는다
김점용
그는 숨는다
장롱 안에도 숨고 마루 밑에도 숨는다
담벼락 속에도 숨고 바코드에도 숨는다
한번은 오래된 은수저에서 그가 숨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숨는 데 귀신이다 심지어
구멍 난 양말의 오랜 추억 속에도 그는 제 몸을 숨길 줄 안다
동짓달 초이레의 반달 뒤에도 숨고
늙은 여자의 하품 속에도 숨는다
제삿날 병풍 뒤에도 숨고 사진 속에도 숨는다
일부러 보자고 한 적 없지만 그는 날마다 숨는다
햇볕 속에도 숨고 그림자 속에도 숨는다
그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그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술래가 되어 그를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출렁거리는 와불
김점용
잠들었는데 누가 자꾸 부른다
깨어나 보니 붉은 달이 떴다
연유를 묻지 말고 그냥 따라오란다
달옷으로 갈아입고 달빛을 마시며 달을 따라 올라가니
희고 넓은 들이 나왔다
지금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너른 평야였다
달빛을 타고 내려가 혼자 체조를 했다
팔운동을 하는데 팔뚝이 우두둑 떨어져 나갔다
목운동을 하다가는 머리통이 굴러떨어지고
제자리 뛰기에서는 불알이 훌렁 빠져버렸다
체조를 끝내자 수천 갈래로 찢긴 내 몸이 흰 들판에 누워 있다
커다란 솥에 푹 삶아 부위별로 잘라 늘어놓은 듯
수천 개의 출렁이는 저울 위에
허벅지 골반 간덩이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가득히 누워 있다
고통도 없이 의식을 치르란 말인가
공중에선 짤랑짤랑 방울 소리 울리고
눈물이 날 듯 눈물이 날 듯
이 거대한 방광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가
밤중에 큰 새 한 마리 빙빙 돌면서
아교 같은 안개를 계속 뿌려댄다
수천 개의 저울 위에 놓인 거대한 몸 하나가
와불(臥佛)처럼 누워서 출렁거린다
생명이 밉다
김점용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따뜻한 절벽, 한 둥지 안에 독수리 형제가 나란히 있다. 부모가 먹잇감인 바위너구리를 들고 나타나자 형은 날카로운 부리로 동생의 살을 쪼아 헤집어 먹이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이 지나는 사이 동생은 서서히 죽어간다. 부화한 지 3일 만에 동생이 죽기까지 형은 부리로 1,569번을 쪼았다.
뱀상어는 몸속에 알을 낳는다. 그 안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자유롭게 헤엄치며 서로를 잡아먹는다. 새끼들은 이빨이 자라고 헤엄치며 서로를 잡아먹는다. 새끼들은 이빨이 자라고 몸집이 커진다. 이들은 더 작은 새끼들을 잡아먹는다. 최후로 한 마리가 남을 때 까지 이 과정은 반복된다. 그 사이 어미는 1만 7천여 개의 알을 낳아 계속해서 먹이를 제공한다.
내가 살아남은 데도 다 이유가 있다.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중에서
택배 되어 온 남자
권애숙
수령증에 도장 꾹! 눌러 찍고 건네받은 상자가 잠깐 흔들, 거렸는데요 잘 키워 봐라 품종이 괜찮은 거다 상자 밖으로 뛰어나온 남자씨 숙인 고개 살풋, 들었는데요 흐흐흐 구미에 당기는 품종이군요 화끈한 식탁을 기대해도 되겠어요
나른한 세월 내 뜨거운 혀 끝에 줄기줄기 불끈불끈 근육 세우며 주렁주렁 미끈미끈 약이 올랐는데요
청양할매 이천 평 밭에 남자를 키워 빻아 먹고 찧어 먹고 갈아 먹고 여든 세월에도 청청한데요 아아악, 남자 하나 베어먹다 내 한 세상 그만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는데요
반쯤 뜯어 먹힌 남자가 식탁 끝에 넘어져 더 먹고 싶어? 은근히 쳐다보는데요
-권애숙 시집 「맞장 뜨는 오후」중에서
백살-이정록
얘야, 환갑 지난 지 한참인디, 이제 내 나이가 멫이다냐? / 예, 아흔여섯이에요. / 그래, 백 살 여시가 되려믄 월마 남았더냐? / 예, 사 년 남았어요. / 사 년이 월만디? / 애비 젓가락하고, 제 젓가락을 합친 것만큼이에요. / ......, ...... / 오늘부터 나, 아무것도 안 먹을란다
그로부터 식음을 전폐한 오수경 할머니는 아흐레 뒤 선산에 오르셨다. 모르는 게 약이지, 혀를 차는 소리 동네 안팎을 떠돌았다. 아무도 그 며느리를 탓하지 않았다. 사십구재를 지낸 다음날이 곗날이어서 그 며느리 노래방에 따라갔다. 조용필의 「한오백년」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다. 운이 좋아 그날 곗돈 백만 원을 탔다. 얼마나 끔찍한 백인가. 숟가락 젓가락 들고는 건너지 못할 달이 떠 있었다
-이정록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중에서
마늘밭을 지나다
이정록
마늘종에는
마늘종 송아리라는 작은 마늘통이 매달린다
위아래에, 마늘은 왜
따로따로 씨통을 만들까
땅 속 굵은 밑알과
땅 위 송아리 사이에
질긴 끈, 마늘종이 있다
살아 눈총맞다, 죽어
된장독에 처박히는 괴로운 종
햇살 쪽, 꼬리 긴
마늘종 송아리를 뽑아내야
땅 밑 육쪽마늘이 실해진다
한치 어둠도 괴로워
지상으로 퍼올렸던 젊은 날이 시들며
아랫도리 알싸해진다
하지만, 그 마늘종 송아리를 씨앗으로 묻으면
쪽 없는 한 통 되마늘을 만날 수 있다
지하로만 내려갈 수 없었던
마늘종 송아리의 나날들이, 마늘밭에 가득하다
대추나무
이정록
가시만으로 가볍게 겨울을 건널
다섯 살바기 대추나무 두 그루에
무밭 한 뙈기가 걸쳐 있다
저, 솜털가시 싯푸른 무 줄거리들
눈비 맞으며 말라가리라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버드나무 강변에서의 악수
손택수
버드나무 아래 아이들이 도마뱀을 쫓는다
모래톱에 꼬리만 댕강 잘라놓고
버드나무 썩은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은 좀체 고개를 내밀지 않고
초등학교 가족 동반 동창횟날
한쪽에선 빌려온 노래방 기계에 술판이 한창인데
악수를 나눌 때면 늘 가슴이 먼저 아려오던 친구가
돌 갓 지난 아기를 보듬고 온다
의자공장 잔업을 하다 그만 변을 당했어
덕분에 4급 장애인 혜택을 다 받게 되었지 뭐냐
만나고 헤어질 때면, 잡아줄 수 없고
흔들어줄 수 없는 손가락 셋을 흔들며 쓸쓸히 멀어져가던 친구
나는 친구가 제 손 대신 내민
아기의 손가락 다섯을 두 손에 감싸쥔다
그러는 나를 친구는 봄햇살보다 더 환하게 바라보고
버드나무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 꼬리처럼
내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 속에 들어와 꼼지락거리는 마디마디
지친 아이들이 잘려나간 도마뱀 꼬리를
모래흙 속에 묻어주고 있는 게 보인다
모래톱날에 드문드문 잘려나간 물줄기는
땅속으로 숨었다가 멀리서 다시 고개를 내밀고
지난 겨울 뭉툭하게 쳐냈던 버드나무
연초록 가지들도 새로 막 흐드러지고 있는 강변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중에서
사라진 입들
이영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매러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이영옥 시집 「사라진 입들」중에서
이팝나무 고봉밥
이영옥
육중한 그 집 대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누가 사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겨울바람이 가랑이를 늘이며 높은 담을 올라갔다
술 취한 사내가 담벼락에 욕설을 퍼부어도
그 집은 끝내 묵묵부담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옷깃을 한 번씩 더 여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보안등은 수상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그 집의 산수유나무가
물집이 툭툭 불거진 가려운 팔뚝을 긁적였다
개나리는 조롱조롱 노란 궁금증을 매달았다
그 집의 대문이 열린 것은 혼자 살던 노인의
부음이 꽃잎처럼 떨어진 날이었다
외국에 사는 아들내외는 너무도 담담하더란다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된 해골의 구멍 안에는
캄캄한 외로움이 그렁거렸다고 한다
목련나무가 꽃등을 내리고 조문을 끝내자
대신 이팝나무가 하얀 고봉밥을 가득 담아
담 위로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더란다
잘 먹어야 그리움도 훤히 켤 수 있다는 듯이
연밥- 이영옥
가난한 지붕처럼 둥근 연잎들이 모여 살았다
해소 기침병이 심해진 그녀는
어린 내손을 잡고 저물녘의 연못둘레를 걷고 있었다
길은 조용히 등을 내주고 어둠 쪽으로 흘러갔다
그때 연못 가득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구멍 뚫린 흰 뼈를 묻으러 가나 했다
인기척을 거두고 깡마른 빈집이 되나 했다
연못은 기침소리를 파묻고 서서히 말라갔다
연꽃 향기가 추억의 몸 냄새처럼 떠돌고 있을 때
한 무리 억새꽃들이 피어나 바람에 콜록거렸다
이번 生 내내 나를 덜거덕거리게 했던 뼈들은
진흙바닥에 우르르 흩어져 하얗게 빛나는데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마른 연 줄기 힘없이 손사래를 쳤다
습윤(濕潤)한 세월 너머의 저쪽,
코가 뭉개진 낮달이 고무신을 끌고 나와
푸른 연밥을 조용히 뜸 들이고 있었다
나는 언제 뼈를 추스르고 환한 꽃송이로 일어설 텐가
그리움은 어른어른 김으로 서려오고
나는 연밥에 뚫린 컴컴한 열쇠구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람 아래 붉은 강- 이영옥
길쯤이 얼어붙은 강 위로
아버지의 구식 자전거는 오래된 충복처럼
삐거덕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해 왔다
오십천 왜가리는 얼음에 발을 심고 한나절을 버텼다
미루나무가 달랑거리는 귀 한 짝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하나같이 바람의 갈기를 붙잡고 떠돌다가
이제 막 황량한 겨울 풍경 앞에 뱉어진 꼴이었다
하교 길에 영덕대교 아래에 사는 거지들의 따듯한 저녁을
나는 가끔 훔쳐보았고 청솔가지 태운 연기가
흰 뱀처럼 몸을 비틀며 붉은 강을 건너왔다
한 방향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방향들이 살고 있었는지
바람이 삶 전체를 뒤로 밀었다가 제자리에 세우면
강바닥에는 어지러운 손금들이 자꾸 태어났다
모두가 하룻밤만 자고 나면 떠날 객식구처럼
바람이 뱉어낸 싸락눈처럼 서늘하게 집안을 떠돌았고
나는 백열등 소켓까지 키가 닿지 않았던 아홉 살,
깜깜한 날들이 블라인드처럼 가지런히 접혀 갔다
내 앞에 놓인 강을 어떻게든 건너려 했던 시절이었다
어디쯤 왔을까
이영옥
북천 내* 건너온 바람이 대문을 흔든다
아버지의 귀가는 늦어지고
어머니가 막내 동생 머리를 긁어보라고 한다
어디쯤 오고 있는지
뒤통수쯤인지, 앞이마쯤인지
마음이 마음을 짚어낼 수 있는지
대문을 찌걱이다 돌아가는
바람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는 휑한 그믐
아랫목에 묻어둔 밥주발이 몇 번 넘어졌다
하품이 잦던 막내도 애저녁에 잠들고
불안을 문풍지처럼 올려 둔 방안에서
한 땀 한 땀 이불 호청을 꿰매는 어머니는
밤을 연탄재처럼 하얗게 태우는데
안강들에서 출발한 주먹 눈이 창문을 퍽퍽쳤다
눈썹 위에서 눈을 얹은 아버지는 어디쯤 왔을까
초저녁부터 밝혀둔 기다림의 심지를 한 칸 올리고
이제나 저제나 예감으로 이어지는 캄캄한 겨울 밤
오늘도 샤륵 샤륵 흰 눈이 오고 있다
*경주 북쪽으로 흐르는 천
맨드라미- 이영옥
외팔이 된 삼촌이 월남에서 돌아왔다 까맣게 탄 목덜미는 반쯤 꺾여 있었고 그는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사람들을 경계했다 우물가에 앉아 한 손으로 붉은 맨드라미를 쓰다듬던 그의 커다란 눈 속에는 석양이 비치는 메콩강 물살이 가파르게 일었다 책상위에 벗어놓은 고무팔이 따가운 햇살을 움켜잡았다 팔이 빠져 나간 소매에서 펄럭펄럭 바람이 일었다 비둘기 부대의 용사였던 그는 힘겹게 한쪽 날개를 저어 십자성을 건너왔다 고향으로 회귀한 그는 밤마다 술에 취해 구욱 거렸다 그가 마을에서 없어진 아침나절에 맨드라미 꽃잎 닭 벼슬처럼 놀라 소스라치고 돌담 위의 석류가 안전핀을 뽑았다 그는 안개가 포성같이 깔린 저수지로 돌진한 것이다 밤이 이슥토록 잠수한 그는 물밖에 나오지 않았고 달빛 환한 자정 무렵에야 그의 고무팔이 먼저 떠올라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보내온 세상과의 화해였다 가을 꽃밭의 붉은 혀들이 긴 울음을 밀어냈다 맨드라미 꽃잎을 털면 따이한, 따이한, 알아들을 수 없는 새까만 말들이 훌쩍훌쩍 쏟아졌다
행방- 이영옥
어디에서 날아 왔는지
꽃잎 한 장이 방충망에 붙어 어깨를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 여기서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다
저 슬픔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읽던 책 속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는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찍어대고 있다
꽃이 열매에게 제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
어디로 뛰어 내려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꽃이 고운 제 빛깔을 거두며 어두워지려할 때
옆에서 아무도 다독여 준 이가 없었구나
이쪽 철망에 걸러진 삶이
저쪽 철망으로 몸을 끼워 보지만
세상은 빈틈없이 촘촘한 봄날이었다
소리의 길
조성자
들을 만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는 듯
귀 자꾸 어두워 가는 어머니
소통의 통로가 자주 교신 불능이다
더 들을 것 이제 없다는 듯
댓잎 같이 귀를 치켜세우고도
아득한 동문서답이다
들을 소리 못들을 소리가 한 통속으로 드나들던 와우각이, 전쟁의 참화나 아들의 죽음이 무서리로 내려 피를 사위던 소리의 입구가, 가난은 그쯤에서 그만하면 차라리 고마웠고 바람기 잦은 사랑채를 쓸고 닦다가 몇 번씩 혼절하고도 모든 풍문을 은닉하던 귀청이, 손을 놓고 묵묵부답이다
데시빌 강도 높이는 보청기로도
한번 돌아 앉은 마음
돌이킬 방도는 없는지
이승의 소리는 모두 부질없다는 듯
호접란 벙그는 것도 잊고 코 골며 주무신다
-조성자 시집 「새우깡」중에서
첫사랑
조성자
막 샤워를 끝낸 흰색 승용차 가슴팍에
새가 똥을 갈기고 날아간다
갈기다라고 했지만 이 말은 그르다
저 시간의 배설은 최초의 난관
불가항력의 오류다
첫사랑은 출처가 모호한 소문처럼
언제나 아리송하다
뜨거운 입맞춤 격렬한 포옹보다
눈 빛 안에서 더 아리고 떨리던
사랑보다 첫 때문에 더 깊이 음각되던
첫사랑은 첫의 마법에 사로잡힌
공소시효 없는 형량이다
-조성자 시집 「새우깡」중에서
나무의 고백
조성자
결 고운 마룻바닥을 닦다보면
다락방에 숨겨진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다
강, 약, 중간약의 호흡 속에서
뜨겁게 자아졌을 문양
울타리로 전진배치 되어, 늘
헛기침을 해야 했던 궁핍의 생을
따라가다 보면 부름켜 사이마다
울음들 납작 눌려 자국이 되었다는 것을
나무가 오래 마른 후에야 알게 된다
닦을수록 또렷해지는 결들은
내성적인 나무의 고백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을까
외벽을 향해 거침없고 싶었을까
파라핀 같이 녹아내린 야만성의 세월은
들키고 싶지 않은 여린 속내였을 것
침묵 아래 막힌 누선의 소용돌이가 무늬를 새기고
꾹꾹 삼키곤 하던 외침이 결이 되어 남아 있는
아버지
친구처럼 가을이 왔다
조성자
지나다 들른 듯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벌컥 문 연다 나는 가을을 받아 건다 가을이 제 집인 양 까칠한 등을 내게 기댄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가 낯을 바꿔 상견례를 해올 때 나는 그와 늘 티격태격했다 때론 심한 다툼을 벌이다 앓아눕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와 나의 불화는 흑색선전에 물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선동하는 무리들은 늘 색을 앞세운다 혼곤하게 바래버린 아득함의 저편 날개라고 생각하던 푸르른 시절도 생을 현혹하던 과대광고였는지 모른다 가을이 정탐꾼처럼 나타나도 동요 않겠다 그 손아귀에 사로잡혀 병 깊어져도 내치지 않고 그를 들이리라 사이좋게 동거하리라
외도
조성자
그대 등지고 외도에 든 지 십 수 년
바람기에 들뜬 몇 해는 황홀도 했다
새 연인의 품은 뜨겁고 풍성해
빈궁의 여한이 나른하게 풀리기도 했는데
그대 치마폭에 싸여
일부종사 지키던 장구한 세월
황토 흙 자근자근 밟고 돌면
익모초 갈 볕에 타다
회모리장단으로 굽이쳐 별이 되던,
흑단머리 가르마 곧은 신작로 옆
망부석이 되었을 나의 탯자리
수만 물줄기 모였다 갈리는 신대륙
배냇 욕망들 삼삼오오 몰려다니다
제풀에 수그러드는 저녁이
황석어 젖 같이 물큰하게
시력 떨어진 눈가를 간질이는데
새 사내 품에서 이미
아이 서넛 분가시켜 볼모가 된 터
화농만 번지고 있는 나의 망향望鄕
가을 호수는
조성자
제 가슴팍에 산을 받아 적고 있다
성근 이마, 자우룩한 골짜기도
바짝 귀 대고 꼼꼼하게 받아 적는다
수시로 변하는 표정을 기록하는 일은
그의 오랜 일과
이제쯤 한 소식 얻었을 만도 한데
아직도 습작 중이라니
고요는 유일한 붓이었을 것 그래서,
제 살갗을 다스리는 일은 기도였을 것인데
산의 발밑에서 일그러지는 날이 많았지만
산이 뱉어내는 푸념을
좋은 물감이라고 다시 또 시작한다네
귓불을 찌르고 달아나던 청둥오리
까칠한 부리는 물멀미 내며 꽥꽥대고
산과 호수, 필생의 업을 지켜보던
잣나무는 저녁 아래로 수굿한데
작은 소리에도 솜털 돋는 물 가장자리
속 헛헛한 사람들 모여 앉아
호수의 생애는
강도 높은 수련과정이라고
제 급소에 자화상 그리는 일이었다고
물색없이 떠들어 보는 시월
한가위
조성자
덜컹거리는 문을 밀고
제 그림자 속으로 낯설게 들어서면
접힌 책 같은 방들 불 켜지고
벽장 속에 숨어 울던 냄새들이
부엌으로 모여들겠지
마당가에 아무렇게나 펴 터지기를 기다리던
과꽃은 다리 아픈 노모를 대신해
부산을 떨고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방들은 금세 그리움의 성토를 하겠지
노독 풀어지고 얼큰해진 뒤란
널어 말린 고추처럼 동생은 코를 풀고
오그라진 노모의 자궁
가물어 가는 탯자리
오남매가 지리고 간 웃음 돋아나
하루쯤은 아람 벌어 벙긋 거리겠네
첫눈
박성우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는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첫날 며칠만 보내고 떨어져 사는 신혼 밤
첫날밤 내내 살을 녹이던 당신은
이내 내 곁으로 와서 무릎을 베고 잠에 든다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박성우 시집「가뜬한 잠」중에서
신혼 첫날
박성우
오지 않은 한 명의 하객을 찾아갔다
서운한 마음도 서운한 마음이거니와
몰래 왔다가 그냥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행기표를 놓았다
돌연 신혼여행도 안 가고 그를 찾아나서는
나와 새색시를 의아하게 보던 형이
이내 못이기는 척 우리의 뒤를 따랐다
그냥 제발 신혼여행이나 가라는 형,
형만 아니었으면 형만 아니었으면 하면서
늘 내 원망의 대상이었던 형이어서
따라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구월의 볕은 아직 뜨거웠고
새색시는 어질어질 걸음을 떼었다
쑥대머리로 앉아 있는 그를 만났다
하객을 맞아야 할 사람이
하객으로도 오지 않은 미운 아버지
형은 그의 검푸른 머릴 자르고
나와 새색시는 나란히 절을 올렸다
밉기만 하던 형이 산처럼 든든해져 왔던가
형과 나와 며느리가 안 보일 때까지
아버지는 산 아랫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월의 볕만 뜨거운 것은 아니어서
신혼 첫날밤도 네 번이나 속옷을 벗어던졌다
김민기:작사 /김민기:작곡 아하 누가 그렇게 출처: 둔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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