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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外

by 이성근 2019. 3. 24.

   

빈 집 -  기형도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이영광

<종이>-  송유나

 

사랑 농사-  임찬일

어떤 그릇을 생각하며

 

<찔레> 문정희

<첫사랑 그 사람은> 박재삼

<사랑> 안도현

<목숨의 노래> 문정희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 신현림

<너 없음으로>   오세영

노숙3- 이경림

하늘 분양 공고 복효근  

배롱꽃 지는 뜻은

 

박성우

오이를 씹다가

누에

정읍역

 

어떤 힌트- 이화은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강연호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휴먼 보디 숍견딜 수 없는 믿음

철거

민둥산 김선우단단한 고요

어느날 석양이

고요  반칠환

 늙은 바퀴

바퀴를 보면 세우고 싶다

길앞잡이의 죽음을 애도함

풍경지우기

 

 <청맹과니>                    조석구

<남해 왕후박나무의 말씀>       이원규

<저수지>                      이재무

<가족사진>                    이창수

 <지푸라기>                    임보

<치졸당기稚拙堂記>           장석남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

<성공시대>                   문정희

그곳 이상국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저 산수유꽃   이은봉

마음이 머무르는 곳   김명리

天水畓

< 겨울 숲 >  복효근

<폐가의 배꼽> 문인수

<백년 묵은 여우> 김혜순

<흘러간 천렵 시절> 최금진

누이가 있는 강 임찬일

기다림의 꽃  - 동백 이재호

자목련 꽃 그늘 아래서

산중서신(山中書信)

11월의 감나무

<상처에 대하여> 고재종

<단호한 것들> 정병근

<說敎>

사람의 저녁상  이기철

상수리 나무  이재무

서울의 봄   이활용

빗소리 듣는 동안    안도현

하늘 악보  이성선

외로운 나무   이동순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김선우

꽃가루의 전설- 임찬일

-임찬일

내 마음의 남쪽에는

봄비를 맞으며

노가리를 구우며

별이 별로 안 보이는 밤 

슬픈 커피

양말

쿵따리 샤바라

나주 장석남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사랑을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이영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종이>                  송유나


숨기고 싶을 때 확실히 구겨 주는 여자, 헤어지고 싶으면 선혈도 없이 찢어져서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는 여자, 밤새도록 사랑을 받아써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여자, 더는 생각지 말자고 지우개로 얼굴을 지워 버리면 더욱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여자, 단 한번의 通情에도 까맣게 가슴에 재를 남기는 여자, 만날수록 순수해지는 여자, 풍선보다 가벼워 작은 유혹에도 속마음을 다 보이는 여자, 물방울 하나에도 온몸이 젖어서 흐느끼는 백치같은 여자, 돌아누우면 또 다시 백지가 되어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여자, 아침이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또 나를 꿈꾸게 하는 여자,내가 너 같은 여자를 어떻게 버릴 수 있니?                                               

-시선집별에서 길어올린 사랑시에서

 

사랑 농사       임찬일


가을엔 다른 거 말고

가슴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다

마음이나 한 마지기 장만하자

온종일 물꼬 앞에 앉아 물을 대 듯

맑은 햇빛 저 끝 고랑까지 채우고

평생에 한 번 심었다 거둔다는

사랑이나 푸짐하게 심어 가꾸자

참새들이 입방아를 찧고 가면 좀 어떠냐

그 바람에 우리들 사랑은 톡톡 여물어

껍질도 벗고 흰쌀 같은 알을 거둘 텐데

허수아비 세워 놓고 보내 버린 세월이

눈밑에 몰래몰래 잔주름으로 첩첩이 쌓여

이제 거울 속에 앉아 흉한 세월을 고치 듯

늦갈이 하는 농부처럼 가슴밭을 일구어

마음의 이랑마다 사랑이나 심어 가꾸자

포근한 땅속 같은 마음 한 자리 골라

따로 심는 계절도 없이 묻어만 놓으면

봄 가을 여름은 말할 나위 없고

눈 뿌리는 한겨울에도 잘만 자라느니

가을엔 다른 거 말고

가슴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다

마음이나 한 마지기 장만하자          

 - 시집못다 한 말 있네중에서


-       임찬일


우리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느닷없이

눈물바다를 이루며

슬퍼질 수도 있느냐


울음에 잠긴 몸 위로

눈빛 하나 올려 놓고

자나 깨나

푸른 물살 같은

마음이나 보내야 하느냐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다가


내 마음에 둥둥 떠 있는

너의 눈빛처럼

사람들의 마음마다

홀로 떠 있는

저 서러운 눈빛       


  어떤 그릇을 생각하며- 임찬일


불보다 좀더 뜨거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가령 네 눈빛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불길 같은 사랑 말이다

우리들 마음도 뜨겁게 지지면 무늬가 생기지

문신처럼 새겨진 국화무늬나 대나무 이파리 모양도

알고 보면 뜨거운 화상 아니더냐

그 흉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잠자는 불을

보아라, 오히려 뜨겁고 활활 타오르지 않느냐

독짓는 옹기장이의 눈빛이나 마음처럼

우리도 좀더 불 같은 사랑으로 화상을 입으면

그 마음의 지울 수 없는 무늬를 증거 삼아

한 개의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을 텐데

청자빛은 아니더라도 분청사기처럼 수수한

흙빛깔 사랑 한 개쯤은 구워 낼 수 있을 텐데

거듭 알고 보면 이 세상 사랑이란 사랑은 모두

뜨겁게 뜨겁게 가슴을 지져 놓은 화상 아니더냐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첫사랑 그 사람은>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따라

달빛도 포개진 채 울고 있었네

 

<사랑>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목숨의 노래>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노숙3                         이경림


스승은 병들어 두문불출이 되시고 적막이 되시고

적막을 떠도는 미묘한 바람이 되시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뒷산이 되셨는데

뒷산의 가시나무가 되시고

왕벌이 되시고

쑥국새가 되시고

개여뀌가 되시고

쑥대밭이 되시고.....

.저 한도 끝도 없는 능선이 되셨는데


어디서 이 쥐똥나무 열매 같은 밤은 밀려오는가

어떻게 청노루 같은 아침은 스며드는가


엉겅퀴가 되는대로 붙잡고 휘감고 찔러대며

허방을 더듬는 쑥대밭에는

, 초록무늬 뱀들만 뒤엉켜 꿈틀거리는가?

어째서 매일

옷걸이 같은 햇살이


흩날리는가                 

  -시향21호에서

 

 하늘 분양 공고 복효근                  


 내 무심히 한에 들었다가 난생 처음 보는 푸른 하늘이 있어 주인을 물어보려니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말 생각났습니다 하기야 풍월에 무슨 주인이 있으려 싶어 그 하늘은 저 산 둘레만큼만 후딱 내 것으로 금 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면 명이 짧다는 말도 있어 이생에 좋은 일 하나 하자 싶어 뜻있는 분들께 한 평씩 무상으로 분양하고자 합니다 경작할 여유가 있으신 분들께는 몇 평씩 더 선심 쓸 의향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맑은 술 몇 잔이 그립기도 합니다만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하늘에 밤이면 돋는 별과 달까지도 피분양자의 것으로 하여도 추후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법원에 등기를 하여 권리를 주장함은 가하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평이 못 되는 하늘에도 빠져서 유명을 달리 한 사람들이 있다 하니 만약 유사한 일이 발생된다 하여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피분양자에게 있음을 함께 공지합니다                                    

   2004년 가을                                     

 분양자 연락처 010-352-6700                                             

-시집<목련꽃 브라자>중에서-



  배롱꽃 지는 뜻은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 받쳐주네                                                    

 -시집<목련꽃 브라자>중에서-


                            박성우


출항하기 직전에야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풍경을 오리기에 바빴다 찰칵찰칵,

앞다투어 가위질을 하는 통에

바다는 금세 너덜거리는 신문지조각으로 변했다

저기요 잠깐만 비켜줘요

뱃머리에 서 있던 내 신체의 일부도

오려져나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오려져나간 오른팔로 담배를 피웠다

뻥 뚫린 해가 연기를 빨아마신 뒤

힘없이 떨어져 젖었다

겹겹이 잘려지던 바다로 배가

천천히 빨려들어갔다 공기방울처럼 떠오르는 섬

그 섬에 닿으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멀미에 시달리던 나는 몸을 움츠렸다

속이 울렁거려 눈조차 뜰 수 없을 때

배는 이미 그 섬에 도착해 있었다

혼몽했던 나는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짙은 안개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앞서 내려 걸어가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을 뿐

섬을 떠나고 있을 배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깔려 있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을 즈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어느 곳으로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젠장, 바다를 밟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파도에 휩쓸려 안개섬을 빠져나왔을 때

탁구공처럼 떠오른 해가 막 뭍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안개섬과 앞서 내린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동안

허우적거렸을 팔이 심하게 결렸다                       

-시집 <거미> 중에서-

 

오이를 씹다가-  박성우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집에 첨으로 놀러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릿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방을 까는데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테기에다 거시기를 해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명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꼭다리가 요로코롬 쓰다냐

-시집 <거미> 중에서-

 

-      박성우


땅콩은 껍데기가 방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채 한바퀴를 돌지 못한다


좀 헐렁해도 나쁘진 않겠다

형에게 물려받은 바지처럼

옷장을 두어번 접으면 나,

이 방에 누워 빙그르 돌만 하겠다

어둠이 두꺼운 이 방은

커튼으로 가려야 할 창문이 없다

허나 나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커튼을 연다

가는 철사가 잡고 있는 그것을 젖히면

일그러진 얼굴이 환해지는 식기와 라면봉지

일찍이 끼니와 관련 없는 유적이 있었던가

이 방은 얼핏 보면 한 칸이지만

두 칸으로 나뉘어 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문이 있던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생활정보신문에도 이렇게 나왔었다

지하방 1칸 입식부엌 1칸 완전개조

물기가 깊이 뿌리를 내린 이 방의 벽면엔

단 며칠 만에 빵끗빵끗 검푸른 꽃이 핀다

나를 위해서 꽃잎 벌리는 그녀

오늘은 그녀가 온다


어두워서 좋은 방이다         

            

누에-박성우


누에가 안방을 가져갔다


뒹굴며 숙제하기에 좋았던 마루는

뽕잎을 썰거나 다듬는 장소로 적당했고

우리는 광을 고친 방에서

둥근 잠을 자며 둥근 꿈을 꾸었다

누에가 가져다줄

모나미 연필 한 다스와 새 가방이

누나 입가에서도 웃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기에도 턱없이 비좁은 방이었지만

갓 따온 뽕잎에 엎드린 누에처럼

여덟 식구 모두 싱싱한 잠을 잤다


막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통통한 누에는

겨우 연필로 뭉개진 뽕잎을 먹어야 했다

청소 시간에 주운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밀던 날,

막내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림일기를 썼다

큰누나는 훔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내 뒤통수를 측은해했다


누에는 실을 토하기도 전에 안방을 비워주었다

누엣구더기 때문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누에섶에 불을 질러

우리들의 꿈도 함께 태워주셨다


그날 밤, 만취한 아버지는 누운 채로

명주실을 밤새 토해냈다

둥글고 거대한 고치 하나가

다음날 오후까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막내는 더 이상

그림일기장에 누에를 그려넣지 않았다



 정읍역-박성우


,

안의 거미줄만이 내 거처를 간섭하였다

그 외에는 잘못 걸린 전화도 없었다

더 이상 절망할 이유조차 바닥을 보여

나를 위해 여장을 풀어주는 이, 뻔히

우무도 없을 정읍역에 앉아

국수 한사발, 찐 계란 두 개로

다른 세상 얼른

열어주던 정읍역에 앉아

누군가 버리고 간

비스킷 봉지에 붙은 햇살을

바스락바스락 먹어보는 바람으로

 정읍역에 앉아 겨우내 내리는 눈, 입 넘치게 받아 삼켜

마지막 말초신경까지 다 녹여내린 뒤에야

제맛이 난다는 동해안 덕장의 명태가 되고 싶던

정읍역에 앉아


어떤 힌트                                이화은


용덕사 스님들이 놓아 키우는 수고양이 한 마리가 아랫마을 수녀원에 숨어들어 수녀원 암고양이들의 밥그릇을 빼앗는가 하면 수녀원 규칙상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를 공공연히 저지른다 하여 원장 수녀님 용덕사 주지 스님께 엄히 항의하였던 바

우리 고양이도 절집밥 3년에 웬만한 염불 한 가닥 아뢸 줄 아는 법도 있는 짐승인데 그쪽 암컷이 무슨 힌트를 주지 않았으면 그럴 리 없는 일이라고······ 수고양이 행위가 크게 싫지만은 않으신 듯 슬쩍 편을 들었다는데

짐승들 일에 사람도 아닌 도인들이 설왕설래하는 동안 절집 배롱나무는 고양이 혓바닥만한 새 잎을 틔워내고 발가락까지 지 애비 꼭 빼다 닮은 아기 고양이 g나 마리 선물로 안고 어린 수녀님 용덕사 올라가시는 길목에 솜털 복실한 처녀 목련도 멍울멍울 수줍게 부풀었다지 아마-

시집 <절정을 복사하다>에서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엔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 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가 남아 있지 않나니,

한때 지구 자체가 푸른 여의주였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중이니

절대 교회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


  휴먼 보디 숍    - 장기 이식용품 코너에서 만난 어느 노인                                       

                                                      반칠환

삼 년 전에 심장을 잃었네, 그러나 오히려 잘 됐지 뭔가

지금 내 몸에 신선한 피를 공급해주고 있는 것은

그때 죽은 젊은 부랑아의 심장이라네

온몸 구석구석 깨끗한 피톨을 뿜어올리고 있다네

이 년 전에 콩팥을 잃었네 그렇지만 뭐 대수인가

달동네 소년 가장의 콩 같은, 팥 같은,

한 끼 잡곡밥 같은 콩팥을 한 쪽 사서 바꿔 끼웠다

일 년 전에 실명을 했다네 어이 섣불리 혀를 차지는 말게

역시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사듯 두 알 사서 바꿔 끼웠다네

이젠 돋보기조차 필요 없다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대머리였네

그렇지만 윤기 있는 어떤 행려병자의 머릿가죽을 꿰맨 후

나이에 걸맞잖게 무스를 바르고 다닌다네

자꾸 물어보지 말게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건만 그 중 온전히 남아 있는 게 무언지

나도 이제 잘 모른다네

모를 수밖에, 난 사 년 전만 해도 뇌사자였다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이냐고?

전신마비의 두 환자로부터 좌뇌와 우뇌를 각각 저렴하게 구입했다

좌뇌는 뛰어난 수학자로부터,

우뇌는 제법 이름 있는 어느 시인으로부터그럼,

그럼 나는 도대체 누구냐고?

글쎄 때마다 부속물이 바뀌는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필요에 따라 장기를 갈아끼울 수 있는 나의 재력만

내 몸의 주인인지도 몰라             


견딜 수 없는 믿음                                          반칠환


1

소심한 그러나 사려 깊은 동직원 김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나님 앞으로 민방위 소집 통지서를 발송하면서 중얼거렸다. 땅의 재난이 크면 하늘도 온전치 못하리라. 하나님, 저는 이 땅의 전쟁과 재난으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민방위 업무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 한 위성 도시의 구급 공무원입니다. 실상 당신은 민방위 대원으로 복무할 연령(17세부터 50세까지)을 넘긴 지 오래이며 지역 민방위대나 직장 민방위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사오나 미구에 닥칠지도 모를 재난을 유념하시어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하여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2

하나님, 물론 순식간에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닷새나 걸려 이 우주를 신축하시고 엿새째 벌거숭이 두발짐승을 창조하시어 세상을 경영케 하신 은혜로운 하나님, 에덴 이래 한없이 어리석은 저희들이 아찔아찔 아슬아슬, 조마조마 설마설마, 요런조런 이런그런 불장난에 코끝이 매울 때조차도 우리들의 이성과 자율을 믿어 의심치 않으신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동족을 찌를 때에도 나서서 총칼을 빼앗지 않으시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가진 부자가 한 마리 양을 가진 빈민의 양을 가로챌 때에도 그 재주를 사랑하여 물끄러미 바라보아주시고, 의로운 젊은이들이 나가 의문의 주검으로 돌아올 때에도 눈물의 비 한 줄금 부조해주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이 주신 이 땅을 거대한 핵폭죽으로 만들도록 한 번도 사찰을 요구하지 않으신 믿음의 하나님,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날려버린 뇌관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소심한 자들은 이제 당신의 가없는 믿음이 두렵기조차 합니다. 바라옵건대 저희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주옵소서.


철거                                        반칠환


포크레인이 한옥을 헐고 있다. 야트막한 담벼락은 지레 허물어진 지 오래다. 투두둑 문짝이 날아가고, 챙그랑 家和萬事成이 깨어진다. 문틀 위 붉은 부적이 찢겨나가고, 복조리가 나동그라진다. 저런, 복과 액이 한꺼번에 흩어진다.

한때 이 집의 가장과 그 아내가 번갈아 무거운 등을 기대곤 했으리라. 든든했던 벽이 시루떡처럼 무너지고 서까래와 기둥이 갈비뼈처럼 불거진다. 와그르르 이끼 낀 기왓장이 해묵은 고문서처럼 쏟아지고, 누가 상량식을 올렸을까. 마침내 기우처럼 여기던 들보가 내려앉는다. 믿을 수 없다. 저렇게 허약한 것에 의지해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다니.

곧 이 집터엔 들보 없는 건물이 들어선다 한다. 들보 없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들보 없는 나라를 세울 것이라 한다.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 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풀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 중에서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어느날 석양이                                             김선우


하루가 저물어간다, 참 잘 곰삭은 저 저녁 풍경이 실은 천연스레 뒤를 보이고 앉아

볼일 보는 크낙한 엉덩이라면 저물녘 저 태양이 문이라면

금빛 항문 어슴푸레 열리는 새벽으로부터 한낱 지나 저물녘에 이른 우리의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없이 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의 한 오분 시원한 용변과 같다면

수성이랄지 목성은 그녀의 젖가슴쯤 명왕성이랄지 천왕성은 쌔근거리는 정수리 문쯤이 될까금빛 거웃 바람결에 흔들려 드문드문 하늘자리 젖은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할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

저물어간다, 허방지방 거미줄 치고 있는 목마른 나의 하루는 긴가 너무 짧은가 아득한 물병자리 옆얼굴이 슬몃 보였는데 뭉게구름 느릿느릿 금빛 항문을 닦아주며 흐르는데

 

고요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국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은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저 오실라나

토옥!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늙은 바퀴반칠환       -속도에 대한 명상 2


달동네 새벽 비탈길을 청소부의 손수레가 굴러간다

손잡이를 움켜쥔 채 허공으로 번쩍 들린 청소부의 야윈 몸이

깃털처럼 위태롭다

이때, 손수레를 멈추어주는 저이는 누구인가

믿을 수 없다 나는 저이의 과거를 잘 알고 있다

저이는 한 번도 달리고 싶은 모든 것을 배반한 적이 없다

저이는 천년을 멈춰 선 바위의 명상이나

거북이의 느린 산책을 비웃었다

저이의 길은 언제나 탄탄 대로였으며

줄창 달리고 달려 세상 가득 가쁜 숨소리만 남겨놓았다

저이는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정열의 사내였으며,

오늘날 속도의 왕국을 세운 일등 공신이다

손수레가 다시 치솟다 가라앉는다

대체 무엇이 저이를 변절케 한 걸까

기를 쓰고 시멘트 바닥에 뱃살을 긁히며 비탈길을 부여잡으려는

손수레 밑의 늙은 타이어 한 개     


       바퀴를 보면 세우고 싶다반칠환        -속도에 대한 명상 3


묵은 비급, 당랑권을 선보이며 불쑥

국도 위로 내려앉은 사마귀를 보았다

찌를 듯한 기세가 미더웁다

저건 고서에도 있는 유서 깊은 싸움이다

그러나 흥분이 고조되기도 전,

가볍게 승용차가 밟고 갔다

푸른 체액이 납작한 주검보다 멀리 흐른다

이게 그들이 펼친 무공의 전부다

하지만 사마귀들은 오늘도 푸른 푸섶에서 찬이슬로 목 축이며

새로운 권법을 연마하리라

반드시 질주하는 바퀴를 세우고 말겠노라고

바퀴처럼 둥근 달 둥글게 떠오르면 더 한층 다짐하리라     


  길앞잡이의 죽음을 애도함- 반칠환     -속도에 대한 명상 4


아스팔트, 검은 아스팔트 위로 길앞잡이*가 달려간다

아 저것, 땡볕 쏟아지던 여름 흙먼지 길을

폴짝폴짝 자로 재듯 한 발짝씩 앞서 가던

술주전자 흔들리며 막걸리 심부를 가는 철부지에게

죽은 큰성 뵈주랴, 죽은 누일 뵈주랴

얄밉게도 한 발짝씩만 앞서서 날던

풍든 애비 떨며 걷던 그 길을 불길한 무덤으로 나꾸어갈 듯

댓바람에 발길로 으깨고 싶던


그러나 오늘 매연에 그을은 길앞잡이가

차도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유서조차 구겨넣고, 금록색 등딱지에 핏빛 놀 새겨넣고,

울음마저 삼킨 채 바퀴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납작한 등딱지만이 제 스스로 수의가 되어 관이 되어

납작한 제 주검을 봉분도 없이 노장路葬하는 것을 보았다

제가 뭉개고 가는 것이 저를 인도할 길잡인 줄도 모르고

죽음보다도 빨리 달아나는 사람들을 보았다


짚신 신고 타박타박, 고무신 신고 터벅터벅


힘든 인생살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한 걸음씩만 살아나오라던

환한 길 환하게 걷고, 어둔 길 어둡게 걷다보면

저승 가는 낯선 길이야 제가 다 안내해주겠다던

너하널 너하널, 어디가리 넘자 너하널

이제 사람들은 삼도내마저 찾지 못하리라

죽어서 가는 첫길을 뉘에게 물어보리


* 길앞잡이는 환경부에서 정한 보호 대상 곤충의 한 종류이다. 흔히 사람의 앞길을 뛰어날므로 이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한다. 필자의 시골에선 저승길을 인도한다고 해서 저승길라잡이라 부르곤 했다. -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풍경지우기반칠환-          -속도에 대한 명상 5 


물지게 지고 점순네 논달뱅이 옹달샘 찾아간다

동부넝쿨 우거진 밭두렁이다

얼굴 못 본 큰성 빠져 죽은 묵샘이다

발목 홀치는 푸섶마다 불티 날듯 흩어지는 풀벌레다

콩밭에 설설 기는 저건 까투리다

용용, 눈감고도 빗겨 넘는 돌부리다

돌미나리 웃자란 논배미 위에 함지박만한 옹달샘이다

저녁 이슬에 바짓가랭이가 발목에 휘감긴다

삼호선 수서발 지축행 전철

풍경 대신 열네 개의 역을 알려주는 안내 방송은 친절하다

양재에서 안국역까지

바짓가랭이는 아무 일 없이 보송보송하다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청맹과니>                    조석구


월사금을 낼 수 없어서

솔 뜸 순례는 보통 학교엘 못갔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쑥쑥 커가는 고무신 문수를 헤아리며

물푸레나무가 되어 그냥 그렇게 컸다


옥양목 적삼과

포폴린 치마를 입고

오산 비행장의 헬리콥터가

두두두 떠나가는 것을 보며



보이지 않는 일상의 그물속에 갇혀

나른한 그리움으로 그냥 그렇게 살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착해빠진 길을 부끄럽게 보여주며

아득한 첫사랑의 전설을 풀어내고


빛은 빛끼리 모여사는

어둠은 어둠끼리 모여사는

아름다운 굴욕을 굴비처럼 엮으며

청맹과니 순례는

이 세상의 순례자가 되어

흰소가 끄는 외나무다리를

세월이 고개 넘는 소릴 들으며 잘도 건너간다.                 

 -월간문학(2002. 9)


<남해 왕후박나무의 말씀>        이원규


나무는 죽어서야

서까래, 기둥이 되고

불이 되지만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집이니라


내 나이를 묻지 마라

몸 그늘에 쉬어간 천 년의 사람들에겐

선창가의 작부였다가

스스로 목숨 버리는 이에겐

혀를 빼문 교수목,

수억 마리의 갈매기들에겐

어미이자 둥지였다


저 바람 속에

네 어미 아비의 얼굴을 찾아보아라

떨리는 너의 목소리를 들어보아라

천 년을 두고 보아도사람의 하루와 갈매기의 하루가 다르지 않으니

여여히 파도가 치는 것 아니겠느냐


신목을 찾아 헤매지 마라

볼 것 못 볼 것 안 가린 세월이 모여

마침내 신의 이름을 부르나니

그 이름이 너의 몸이자 집이니라 

-실천문학(2002. 여름)


<저수지>                        이재무


그녀 스스로 속 내보인 적 없다

아무도 그녀의 나이를 모른다

나는 그녀가 크게 웃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잔주름 많고 검푸른 눈엔

그렁그렁 수심이 고여있다

수심 깊어서 한낮엔 앞산 뒷산을 담고

밤에는 천상의 것들 넉넉히 품는다

어느 해인가 빚에 쫓겨 도망다니던,

성실했으나 불운했던 사내 끌어들여

서방으로 삼았다는, 구설 끊이지 않는

무서운 여자. 비밀 많은 그녀가 딱 한 번

궁금한 속 내비친 적 있다

지독한 가뭄이 있던 그해 여름

화냥년 되어 가랑이 쩍 벌리고 누워

소문 듣고 온 남정네들 설레게 했다

그녀 진흙 같은 자궁 속에는 팔뚝만한

잉어며 붕어들이 나뒹굴며

쩍쩍 입 벌리고 있었다

수심 깊은 여자

위기의 사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 여자           

 -시와 시학(2002. 겨울


)<가족사진>                    이창수


할머니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은 카메라를 보고 있다

아니, 카메라가 초점에 잡히지 않는

우리 가족의 균열을

조심스레 엿보고 있다

더디게 가는 시간에 지친 형들이

이러다 차 놓친다며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담장처럼

잠시 후엔 누가 붙잡지 않아도

제풀에 지쳐 제각각 흩어져 갈 것이다

언제나 쫓기며 살아온 가족

무엇이 그리 바쁘냐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시는

아버지의 그을린 얼굴 위로

플래쉬가 터진다

순간, 담장을 타고 올라온

노오란 호박꽃이

푸른 호박을 끌어안고

환하게 시들어간다        

 -시와사람(2002. 겨울) 


<지푸라기>                     임보


낟알을 다 뜯기도 만신창이로

들판에 버려진 지푸라기. 그러나

새의 부리에 물리면 보금자리가 되고

농부의 손에 잡히면 새끼줄이 된다     

 -문학과 창작(2002. 12)     


<치졸당기稚拙堂記>                         장석남 


이젠 잠자리에 들어서도 반성이랄 것도 없이 그냥 배가 부르면 배가 부른 채로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올해도 몇 그루의 나무들을 사다가 차례도 질서도 없이 계단 앞에 묻어본다. 사과나무, 배나무, 불두화, 석류, 매화, 넝쿨장미…… 모두가 살아난다면 이 좁은 마당은 얼마나 치졸해질까? 그러나 그 치졸을 나는 즐기련다. 속물은 할 수 없다. 잠 속에도 이것저것을 묻어둔 모양이다. 어떤 때는 여성의 성기가 보이고 또 어떤 때는 돈 다발이 보이기도 한다, 안팎 속물들과도 별수 없이 어울리고, 웃고, 거래한다, 뭐 좀 서로 속여보자는 속셈이다, 돈냥이라도 좀 얻어먹어 보자는 속셈이다, , 차례도 질서도 없이 피어나는 잠 속의 종이꽃들. 이젠 잠이 깨어서도 막막함이 없다. 막막하기 전에 신문지를 찾고 막막하기 전에 마당에 심은 치졸들을 들여다보고 막막하기 전에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다, 막막하기 전에 강의를 듣고 막막하기 전에 또 가르칠 만한 게 있다고 학생들 앞에까지 나선다, 막막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막막하기 전에 취하고, 막막하기 전에 잠을 부른다, 배가 불러도 반성이랄 것도 없다,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 멀리서 호오이 호오이 밤새가 운다. 저것이 비명이란 것도 모르고 나는 잠을 자고 있었구나.                                                        -세계의 문학(2002. 여름)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문학나무(2002. 가을)

 

<성공시대>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현대시(2002. 4)

 

 

그곳                이상국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 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들을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보고는 한다                     

[문학사상] 2002.12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 콩알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사상] 2002.8


저 산수유꽃             이은봉


환한 등불 켜들고 걷는 하늘길이다

길 끊긴 곳, 빈 공중 향해 내뿜는

샛노란 물줄기다 절벽 끝까지

몰려와 삐약대는 저 병아리 떼들!

여기 산기슭 어디에도 더는

나아갈 길 없다 종종거리며

치마끈 풀어헤치는 봄, 자궁 속으로

뜨거운 제 모가지 처박는 수밖에……

마른버짐 가득 피어오르는 얼굴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꽃이여

그만 등불을 꺼라 우리 지난 겨울의 꿈

산골짝 시린 물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조용조용 이울고 있다.               

[문학과 경계] 2002 가을


마음이 머무르는 곳                    김명리


마음이 부르는 곳을 찾아 헤맨다

마음은 이제 막 쑥부쟁이꽃 위에 앉았다 날아간 불빛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통 속으로 내려앉는 저 끄을음

아무려나 나는 이제 이곳을

마음이라 부르려네

또다시 의 불길에 자지러지는

애반딧불이의 암수가 맞붙었다 떨어지는 저 一瞬!         

 시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天水畓                김명리


아픈 마음이 또 한 석 달 열흘

죽을 둥 살 둥 몸을 알았지요

4월 봄볕에 우두커니 서서

백의종군하듯 꽃망울 터뜨린 저 나무들,

흩뿌린 혈흔이듯 청천에 스미는 저 꽃잎들,

천길 벼룻길 물소리로 마주 오던 봄이

백발 성성한 늙은 마음의

말라붙은 젖꼭지를 덥석 깨물었지요

보세요, 피가 철철 흐르는 봄이지요

보세요, 꽃 모가지마다 이글거리는 저 몽매를!

끝도 없이 들이켠 모래 바람

삼재팔난 중에서도

火魔가 천지간에 덮쳐온 봄날이지요

뻐개질 듯 만개한 벚꽃잎 어느 사이 훨훨훨 져 내리고

누런 해 떨어지기 무섭게

가슴엔 천 필 아마포 찢어지는 소리 들리지요         

 시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 겨울 숲 >  복효근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 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 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폐가의 배꼽>     문인수


이 외곽지 야산의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출퇴근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끌고 온 탯줄 같은 거,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삐뚤삐뚤 나고 있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마당의 소줏병들처럼 나뒹굴며 폭우 아래 지나갔다.

그 위를 뒤덮으며 풀들이 화염처럼 지나갔다.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채 한 채의 폐가여서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의 조롱박들이 아침에시퍼런 똥자루처럼 자꾸 힘껏 빠져 나온다.                                        

 -<현대시학> 2001.12-


<백년 묵은 여우>     김혜순


나는 이번 생에 복숭아 하나 얻으러 왔어

당신이 떠나가며 한 모금 울컥 뱉어놓은

그 붉은 얼룩, 그것을 구하러 왔어

당신은 저 유령들의 세상에서 병들어 있다는데

나는 눈 내리는 이 겨울 밤 이 얼어붙은 골짜기

그만 눈밭에 흘려 버렸나봐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눈밭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붉은 아기는

하얀 할머니 되고 하얀 할머닌 붉은 아기 된다는데

복사꽃 난분분 난분분 흰눈은

밀려오고 다시 또 오는데

가도 가도 희디흰 백지

발자국 남기자마자 지워지는 내 평생의 족적

저 땅 속 깊은 곳 숨어서 눈뜨는 핏발선 눈동자 하나

벌어진 내 자궁 속에서 튀어나온 그 뜨거운 것

연필은 똑 부러지고, 숙제는 많은데

그런데 정말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선가 복숭아 향기 그윽히 오는 것만 같은데                                                

 -<시안> 2002.-

 

<흘러간 천렵 시절    >최금진


사내들은 가마니 속에 개를 그슬렸네

불탄 개는 웃으면서 꼬리를 움직였네

술잔에 쓸개 같은 바람을 섞어

사내들은 먼지 낀 허파를 씻었네

모래톱 위에서 노을은 살점처럼 썰려졌네

고무장화를 신고 몇몇은 강물로 뛰어들고

누군가의 등가엔 시커먼 다슬기들이

빨판을 대고 붙어 있었네

노린내를 맡고 몰려오는

어둠이 컹컹, 둑 위에서 짖어대고 있었네

빈 솥에 물을 붓는 사내들의 굽은 등이

살구나무 아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네

텅 빈 계집의 말뚝처럼

저녁 별들이 목줄을 매고 돌고 있었네

물풀처럼 일렁이는 제 얼굴을 높이 들어

사내들은 자꾸 건배를 하였네

털 빠진 수캐들처럼

 컹컹, 강물에 붉은 달을 게워내기도 하면서

흘러간 노래를 공중에 날려보내고 있었네                                  

  -<시안> 2002.-

 

누이가 있는 강                                임찬일


강가에서 나는 또 어지러웠다.

포플러 나무로 둘러싸인 큰집 누이의 빈혈처럼

물살 위로 날던 한낮의 도깨비불

들깨풀 자주빛으로

산국화 주황색으로

강물에 몸을 풀던 누이 같은 해


저물어 가는 포전에서

누이의 허벅지처럼 희고 긴 무를 뽑아

손아귀로 비틀어 내어 남몰래

감추듯이 강물에다 내던지면

시퍼렇게 입술을 물고 쳐다보던

강의 눈빛

허기를 타고 올라오는 무트림에

 내 가난한 시절은 진저리쳤다.


늙은 갈대꽃이 우우 소리내어 우는

강의 등줄기를 타고 헐떡거리며

통통통 올라오는 멸치젓배


누이는 석양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나와

몰래몰래 개짐을 빨았다

강물에 풀린 노을은 갈수록 붉어지고

나는 또 그 풍경에 휩싸이며

이마에서 반짝이는 현기증을 앓아야 했다.             

 시집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에서


기다림의 꽃  - 동백                                이재호


거 봐 내가 그랬잖아

그리움도 그렇게 오래 서 있게 두면

눈물 날 거라구.

오오래 서서 혼자 울던 시간 속에서

생각의 무슨 가지들이 자꾸자꾸 뻗어나가서

거 봐 내가 그랬잖아

늘 푸른 동백숲이 잘 자랄 거라구

보고 지고 보고 지고 그 이름을 부르노라면

눈물에도 빨갛게 꽃필 날이 있을 거라구.             

시집 <내 그리움에도 언젠가는 봄이 오고>에서


자목련 꽃 그늘 아래서                               이재호


우리 사랑이란 게 가령

눈물만 그렁그렁 달고 나오는 옛이야기라 하자.

가슴을 열어 보여도 그 가슴뼈의

속살까지 열어 보여도 멍들어 있을 뿐

가령 우리가

아주 오래된 아픔이라 하자.

아주 오래고 먼 데서 황사 바람 불어와

세상 자꾸 흐려놓는 어느 봄날쯤 가서

그 때 우리 영 잊혀진 얼굴이라 해도 사랑아,

태어나면서부터 피멍이 들어 있는

이땅의 젊음처럼, 돌아온 4월처럼,

온몸으로 피워낸 꽃들의 노래는 아무래도

온통 눈물일 거라 눈부실 거라 하자.         


 산중서신(山中書信)                                      이재호


이 보시게 아우(雅友),

올핸 밤 농사가 풍년일 모양일세.

가는 곳 산골마다 즐비한 밤나무

뭉게뭉게 피어나는 밤꽃 구름을 보겠네

.어디 풀벌레 울음소리 들리거든

그 풀벌레 소리 조금은 쓸쓸해지거든

가을 바람처럼 꼭 한 번 다녀가시게.


이 보시게 아우님,

올 때는 텅 빈 마음으로 오시게

와서 그 빈 가슴 가득

알밤 떨어지는 소리나 며칠 채워가시게.

우리 생활보다 더 넉넉해야 하는 것을

이 보시게나 아우님,

아무래도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영혼 아니겠는가.      


 11월의 감나무                            이재호


지상의 모든 열매는 꽃 같던 나의 추억인 거라.

때 초여름 신생의 초록 잎사귀 속에다

현기증 일도록 샛노란 감꽃을 저질러놓고

감나무는 혼자서 설레는 사랑에 울었던 거라.

눈물보다 큰소리로 뚜욱 뚝 꽃이 지던 밤

그렇게 끝나가는 떫은 나이가 서러워

감나무는 두고두고 울었던 거라.

스치던 별빛도 긴긴 날의 햇살들도 그걸 알아차리고

어깨뼈 들썩이며 우는

감나무 가지들을 보듬어 주었던 거라.

그래서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꽃피던 자리마다 꽃잎 지던 자국마다 새살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이 영글어갔던 거라.


감나무들이 왜 여태 바알간 가슴을 매달고 있는지

묵묵한 바위산들도 저희끼린 다아 알고 있는 거라.

 

 

  <상처에 대하여>                                      고재종


솔가지 꺽던 낫날에 왼손 집게손가락을 날렸다지요. 두엄자리 뒤던 쇠스랑날로 오른쪽 발등을 찍었다지요. 거친 밥 독한 소주에 가슴앓이 이십 수년, 복부의 수술 자리는 시방도 애린다지요. 좋은 일은 다 잊었는데 몸의 상처론 환히 열리는 서러움들, 참으로 야릇하다고. 이게 다 몸으로 살아온 탓 아니겠느냐고 활짝 웃는 얼굴의 주름살. 그건 그대로 논밭고랑이네요. 마치 앞강 잉어들의 비닐무늬가 그들이 늘 해살치는 물결을 닮았듯이, 봄날 당신이 잘 갈아논 밭을 닮았네요. 여기에 무얼 심을 거냐고 했더니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복숭아라네요. 복숭아 같던 아내의 젓가슴으로 쉿, 처음으로 움켜쥐던 비밀도 이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무심코 입술에 가져다대는 아, 없는 집게손가락! 그 뭉툭한 상처 자리가 반질반질 윤을 내고야 말더라니.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단호한 것들>                                       정병근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

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

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

내 귀를 바다에까지 열어 놓는다


발에 밟히면서 잘 움직거리지 않는 돌들

간혹, 천길 낭떠러지로 내 걸음을 막는다

부디 거스르지 마라, 하찮은 맹세에도

입술 베이는 풀의 결기는 있다


보지 않아도 아무 산 그 어디엔

원추리꽃 활짝 피어서

지금쯤 한 비바람 맞으며

단호하게 지고 있을 걸


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거리지 않는 것들,

환하게 피고지는 것들

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

제갈길 가는 것들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현대시학20017월호 중


 <說敎>                              정병근


죽음이 지나가던 나의 손을 덥썩 잡고

안부를 묻는다 돌아온 탕자를 만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잠깐이면 된다면서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 끈질기게 앉으라고 한다

앉으면 누우라고 한다

이제부터 귀 닫고 눈감고 입 다물고

아무 것도 듣지 말고 보지 말고 말하지 말라고

숨도 쉬지 말고 마침내 텅 비어서

바위처럼 구름처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답답한지 나중엔 내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고집불통인 나를 가르친다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라 한다


죽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주문을 외우며 나를 용서한다

모든 不和를 향해 기도한다

나야 알아듣든 말든 외면하든 말든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갈 길을 재촉하든 말든

등 돌리고 떠난 모든 이별을 간절히 기다린다                           

현대시학20017월호 중


사람의 저녁상             이기철


꽃이 큰 소리로 피는 것 보았느냐

햇빛이 알려 주지 않으면 피었는지도 모를 것을

풀이 외치며 크는 것 보았느냐

바람이 흔들지 않으면 그 키를 모를 것을

산은 우레 아니면 제 있음을 말하지 않고

시내는 홍수 아니면 큰 소리로 흐르지 않는다

 

길들은 천 년을 기다리면서도 탄식 한 번 한 일 없고

처마들은 등불 가물거리면서도 누굴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의 가슴이라도 한 번은 어두워지고

한 번은 밝아진다

땡볕같이 쨍쨍한 마음을

그리움이라고 바꿔 말라


오래 참다 보면 외쳐 부르지 않아도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린다

맑은 가슴이라면 크게 말하지 않아도

파도소리보다 높게 들린다


꽃 피듯 피어나 세상 적실 수 있다면

사람의 옷고름에 향기 한 봉지 담아 놓겠다

[] 흐르듯 흘러 세상 깊이 스밀 수 있다면

사람의 저녁상에 수저 한 벌 닦아 놓겠다

<辭說>

고통을 수식하지 말라       

삶을 비하하거나 미화해서도 안 된다     

  오늘도 다가가 앉을       

저녁상 위의 수저소리 한 벌                             

 -문학사상20015월호 중에서


상수리 나무              이재무


생활이 나를 속일 때마다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의 구릿빛 근육을 떠올리고 그대의 한결같은

성정을 떠올리고 또 나는 그대의 벌거벗은 아랫도리

곳곳에 숭숭 뚫린 구멍들을 떠올린다 그 구멍 속을

쉴새없이 들고나는, 일개미들과 풍뎅이들과

장수하늘소, 왕텡이들의 여름날 신성한 노동을 떠올린다

그들은 모두 내 유년의 정다운 벗들이다 그 구멍은

그냥 구멍이면서 내 벗들의 서식처이고 일터이고

그대의 숨구멍인 셈인데 아, 이제 와서는

내 마음의 거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살아서는 상처의 잔액으로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죽어서도 불이 되어 시린 등을 덥혀 주던,

마을에 들어서면 어깨 위에 척 하니 가지를 걸치고

환하게 웃어 주던 죽마고우, 생활이 나를 속일 때마다

그대가 내게로 온다                 

-문학사상20015월호 중에서


서울의 봄         이활용


물오른 산수유 가지 끝에

달려온 봄이 몸을 풀고 있는 사이

여의도의 벚꽃은 짙은 치장을 하고

죽은 도시의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월은 이 봄도 호시절이라

떨어지는 꽃잎에 취해

취생몽사 흘러가지만

끝없는 만행의 길 떠나는

미친 봄바람아

치열해서 눈멀었던 첫사랑아

짧아서 아름답고 처연한

낙화하는 벚꽃처럼

적멸의 꿈 버리지 못하는

한평생을 속절없이 살아온

한 남자가 드디어 한강수 푸른 물에

잠수하는 서울의 봄.             

  -문학사상20016월호 중에서


빗소리 듣는 동안                             안도현


1970년대 편물집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를 모아 둔

비 온 뒤의 연못물은 젖이 불어

들녁을 다 먹이고도 남았네

내 장딴지에는 살이 올라 있었네                           

-문학사상20016월호 중에서


하늘 악보        이성선


길을 가다가 바라본다

나뭇잎이 어제는 저기 떨어지고

오늘은 여기 흩어져 앉는다


어느 것은 일찍 지고 어느 것은 늦게 진다


가을 가득한

이 삶의 소리


며칠 전까지 지상을 푸르게 채우던 생명들

오늘은 누른 빛 붉은빛으로 변해

대지에 눕고 바람에 뒹굴고 허공에 날린다


그러나, 아아

무엇이 차이랴


여기 떨어지고 저기 앉는 것

먼저 지고 오래 남는 것


그분 피리의 연주가


이 구멍은 먼저 닫히고 저 구멍은 늦게 닫히는

어떤 음은 길게 다른 음은 짧게 작곡된

생명 모두는 우주 큰 연주 속의 한가락                              

 -문학사상20016월호 중에서

 

외로운 나무         이동순


나무는 쓸쓸하였다

하루 온종일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다

누가 말이라도 걸어 주었으면 싶었다

바람이 어깨를 슬쩍 부딪치며 언덕 너머로 불어갔다

그 조용한 오후

나무는 한쪽 팔을 옆 나무 쪽으로 슬그머니 내뻗어 보았다

가만히 보니 그도 외로운 얼굴이었다

내가 다가가는 만큼 그도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을까

서편 하늘이 활활 타오르는 어느 저녁

두 나무의 몸은 비로소 가까이서 만나게 되었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의 어깨 위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또 한 나무는 다른 나무의 볼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들 사이로 바람이 무슨 말을 속삭이며 불어갔다

알아들었다는 듯 두 나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문학사상20016월호 중에서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                    김선우



구름 상여 지나간다

하늘은 겹겹 절

口音(구음)처럼 자란

늙은 진달래 나무

절벽 끝으로 저를 밀어낸다


누군가 저 여자를 건져야 한다

절개한 뱃속처럼 내장이 환히 드러난

發火(발화),

진달래 꽃잎들

일제히 활짝 열리고

낭떠러지가

붉고 비린 꽃 속으로 들어간다


생리혈 가장 붉은 월경 둘쨋날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으로

진달래 나무가 건너온다

아가야, 달래 다오

절벽 끝으로 저를 밀고 가

절벽을 받아 안는 저

늙은 여자의 말을                   

-문학사상20017월호 중에서

 

꽃가루의 전설- 임찬일


날 받아 놓고

이불솜이랑 다 타놓고

그만 설레다가 죽은

어느 마을 처녀가 있었는가 봐


바람에 날리는

솜털 같은 꽃가루


해마다 죽은 날을 기억하고

이불솜 찢어 날리며

천지간을 헤매는

그 처녀의 넋


가만히 내 손바닥을 펴주니

운명선에 내려앉네

무게를 알 수 없는 사랑인 양

솜털이 되어 온 처녀의 넋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나는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네


죽은 몸으로 품고 있는

씨 한알             

- 시집못다 한 말 있네중에서


-임찬일


마음이란

이렇게 매다는 거라

사랑에다

목을 걸고

얽매인 채

몸서리칠 줄이야

끝없이 넓고 아득한

세상을 한 바퀴 돌아와

몸 풀 듯 울음을 낳는

이 마음의 소리

아직도 미치지 못한 곳이 있어

몸달아 하다가

부질없어라, 이 사랑은

누구를 위한 공력(功力)이던가

그래서 그래서

소리에는 무게가 없는 거라                         

 - 시집못다 한 말 있네중에서


내 마음의 남쪽에는             임찬일


사람 사는 일이 춥다고 느껴지는 날

내 가슴 한 마지기나마 푸릇푸릇

겨울 보리 같은 사랑을 키우고 있으면

그걸 보고 뜯으러 달려드는

한 마리 쇠기러기 닮은 사람이 찾아들겠네

길손의 이름 같은 사랑아

하룻밤 내 마음의 아랫목에서 발목을 녹이고

아침이면 쇠기러기 꽁지 털고 날아 가 듯

더 푸른 보리밭을 찾아 떠나갈 사랑아

늘 잔인한 것이 사람의 일이긴 하지만

멀리서 울음소리가 겨우 보내오는 그리운 것들이

눈송이 되어 눈 앞에 와서 다시 눈물로 녹을 때

내 가슴은 눈 덮인 보리밭에 찍어 놓고 떠난

쇠기러기 발자국 같은 사랑의 뜻 하나가 남아

아직도 풀지 못한 상형문자처럼

서럽게 서럽게 푸른 보리밭을 이루고 있네

그저 사랑을 기다리거나

그저 사랑을 떠나보내는

내 마음의 남쪽 한 마지기 가량

쇠기러기에게 내줄 보리밭이 있네                       


 봄비를 맞으며             임찬일


부족함이 없으라 하시네 저 말씀

귀로 듣고 살포시 눈뜨는 나무들

쥐똥나무도 까만 가지마다 푸른 소름이 돋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어린것의 얼굴을 두 손으로 씻기 듯

이리도 다정하게 세상을 토닥거리는

비는 봄비 어디 보자고 오는 봄비

나도 금방 돋은 새싹처럼 얼굴을 들고

물방울에 두 볼을 비비네

갑자기 가슴속이 파래지는 느낌

어쩌면 나도 이 세상의 목마른 나무

한 그루 뿌리까지 적시며 마치 응답하듯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야 할 숨쉬는 초목

자꾸자꾸 부르는 봄비의 말씀

부족함이 없으라 하시네

내 귓속까지 촉촉하게 흘러 들어오는

저 복음의 소리, 봄비           


 노가리를 구우며- 임찬일


쯧쯧, 공연한 일에 마음 두고 살았구나

번뇌를 해탈하고

몸도 벗어 버리고

불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참으로 묘한 이치다

몇 마리 노가리를 불에 구우며 바짝바짝

함께 구워지는 내 정신 한 꿰미를 본다

돌아보면 문득 내 살아 온 날들도

불에 굽기 위해 물기를 말려 온 일이었을까

의문스럽다. 밑바닥까지 뒤집어 말리지 못한

그 축축한 삶의 물기

혹시 자르르한 물리고 애써

내 몸 비늘을 빛나게 하려고 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좀처럼 멀리 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늘 질질 끌려 다닌 몸을 꾸짖으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 특별한 공경을 드리 듯

나는 노가리를 굽는다 바짝바짝

노가리를 굽듯이 나를 굽는다                   

 - 시집알고 말고, 네 얼굴중에서

 

별이 별로 안 보이는 밤 -임찬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별이 별 생각 없이 깜박이고그 깜박이는 별과별 생각 없이 눈이 맞은 여자가 별 생각 없이 살아온 날을 생각하며앞으로도 별 생각 없이 잘 살았으면 하고생각하는 밤생각에 잠긴 로뎅을 생각하는 여인처럼여자는 별 생각 없는 것들을 생각하다가별 생각 없이 하늘의 별과 눈이 맞으면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별 생각 없는 섹스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창조적인 섹스에 의해서 별을 임신한우주는 신비한 자궁을 열어 밤마다 저 많은 별을 출산하고 있다는 사실을여자는 자기도 별 하나를 낳아서 별보다 더 예쁘게 키우고 싶다는오로지 그 생각으로 별과 눈이 맞아별에게 가슴을 열어 보이며이윽고 별과 환상적인 섹스를 시작한다별리 별로 안 보이는 절정에 이를 때까지                               


  슬픈 커피-임찬일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 그 시절을혼자 빠져 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오래 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나는 무슨 느낌으로 커피에게 내 입을 빼앗겼을까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사람은 갖고 떠났다그와 나눈 한잔의 커피가 이 세상의 가장 진한 이야기가 되어지금 내 가슴을 휘휘 저어대고 있다함부로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다 보낼 사람이라면갈색 이마와 그윽한 눈빛을 한잔씩 마시면서 사랑이 얼마나 슬픈 약속인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사람과 사람 사이를 뜨겁게 물들이던슬픈 커피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이 비운 자리를혼자 지키고 있다아마도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양말-임찬일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아무렇게나홀랑 까뒤집어서 벗어 던지는아이들의 양말걔들 엄마는 호통치기 일쑤이지만나는 그냥 그 귀여운 발목이라도 보는 듯웃음이 절로 나온다아이들의 발은 못 말리는 것!이 세상을 쿵쿵 뛰기 위해 온 그 녀석들을누가 무슨 재주로 말린단 말인가양말을 까뒤집으면서때묻은 어른들의 꿈을 까뒤집으면서 아이들은 크는 법양말에 묻혀 온 저 꿈의 얼룩들이아름다운 무늬가 되어서우리 집을 채우는 저녁아내가 돌리는 세탁기 안에서까지깔깔거리고 쿵쿵대며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발목세상의 모든 숨은 꿈의 머리카락을 찾아내는너희들의 양말꿈은 너희들이 신고 뛰놀아야 할아름다운 양말나는 그 꿈속을 놀다 온 양말을 보면 덩달아 괜히 즐겁고저절로 저절로 세상이 재미있어진단다오래 전 뒤꿈치를 꿰매 신던 이 아빠의 어린 양말도히히, 그런 때가 있었거든  


  쿵따리 샤바라           임찬일히로시마에 성냥갑 만한 핵폭탄이가비얍게 떨어진 날서울에는 달콤한 초콜릿폭탄이무더기로 투하되었다 버섯구름도 없이그로부터 오십년, 쿵따리 샤바라히로시마는 초토에서 깨어났지만서울은 까맣게 이빨이 썩어서초콜릿폭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멀쩡한 우리 문화 떼어내고달콤한 서구문화를 이식수술한 후로몰라보게 얼굴색이 서구화 되었으나그것은 문화의 폐허에 핀 잡초일제시대 창씨개명한 놈들은 죽일 놈이 되고이제는 혀 꼬부라진 발음기호로 이름을 바꾸어야위대한 세계시민의 시민증을 얻을 수 있는 시절쿵따리 샤바라 연속 1위를 달리는 신나는 시절세계화란 일찌감치 하루라도 더 빨리우리 것을 포기하는 것이야 말로 지름길이라는 듯이오오!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초콜릿우리말인지 꼬부랑 말인지 헷갈리는서울의 간판들은 우리들의 항복을 알리는 깃발그 깃발을 바라보는 독립군의 후예는 어린 자식에게 영어로 가르친다의사의 지시에 따르라는 약봉지의 경고처럼Keep out of the reach of children그래, 꼬부랑 문화는 손대지 말라고초콜릿의 후유증을 번역하고 있다                            - 시집알고 말고, 네 얼굴중에서


나주           장석남거기 그렇게 그렇게들 있습디다요마침 감들이 빨간 빛들을 해가지고서는담장들이 담 안에 마당을 들여놓듯이가을 햇빛 같은 걸부지런히 제 안에 들여놓고들 있습디다요그 안에 같이 섞여 들어가고 싶습디다만햇빛이 너무 밝아서요햇빛이 너무나 밝아서는 어려웠어요


강변에서 - 김민기 출처: 둔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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