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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by 이성근 2024. 4. 23.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 푸른 밤의 여로 '

1.황지우(해남 배다리마을) 시인 데뷔작 연혁(沿革)’ 2. 안도현(경북 예천 소망실) 시인 데뷔작 낙동강’ 3. 송찬호(충북 보은) 시인의 늙은 산벚나무’ 4.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5. 송수권(전남 고흥) 시인의 '대숲 바람소리' 6. 장석남(덕적도)'옛 노트에서' 7. 이기철(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청산행’ 8. 나희덕의( 순천시 해룡면 와온마을)‘와온에서’ 9. 박형준(전북 정읍)'빛의 소묘' 10. 최승호(경기 가평)'반딧불 보호구역

11. 문인수(경북 성주) ‘채와 북사이, 동백진다’ 12. 최영철 수영성 와목’ 13. 김선우의 대관령 옛 길’ 14.하재일-(제주)우도봉 올라서야 만난 해연풍 적막한 가슴을 적시고15. 조용미(강원 정선) ‘자미원 간다’16. 김영남(장흥군 대덕면 분토리) '푸른 밤의 여로' 17. 김명인(경북 울진)너와집 한 채’ 18. 이정록(홍성군 홍동면 대영리)의자’ 19. 문정희 (전남 보성) ‘물을 만드는 여자’ 20. 조정권 산정 묘지

 
 
 
1. 황지우 시인 데뷔작 ‘연혁(沿革)’
 “저희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멀리 섬들이 봉분처럼 떠 있다. 근경(近景)에는 허리를 구부린 노파 세 명이 초록의 마늘밭을 부유한다. 바다와 늙은 여인들 사이로, 무덤들이, 뻘밭의 갈대를 울타리 삼아 해변에 누워 있다. 머지않아 죽을 이들과 이미 죽은 자들의 집 너머로, 섬과 섬 사이에, 살아가야 할 자들의 생업을 부표로 띄워놓은 청태밭이 희미하게 보인다. 죽음과 노동과 생업이 아침 해무 속에 부옇게 빛난다.

  운이 좋았다, 이 사진을 건진 건. 운도 노력의 결과라는 말을 이쯤에서는 인정할 수 있겠다. 미황사에서 일행이 아직 자고 있을 때 해남의 아침 바다가 궁금하여 달마산을 내려와 어란을 향해 달렸다. 황지우(57) 시인의 데뷔작 ‘연혁(沿革)’을 붙들고 내려온 첫 여정인데, 전날, 천 리 넘는 길을 단내를 삼키며 쉬지 않고 달려와 놓고도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운 터였다. 어란 못 미쳐 구부러진 해안 길을 달리다가 해변에 누워 있는 무덤들을 발견하고 급하게 차를 세워 비상등을 켰다. 봉분들은 마늘밭 끄트머리 해변에 나란히 누워서 멀리 떠 있는 섬처럼, 살아 있는 자들의 영토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삭망(朔望)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의 사후(死後)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木船)들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內地)로 가고 여인들은 환생(還生)을 위해 저 우기(雨期)의 청태(靑苔)밭 넘어 재배삼배(再拜三拜) 흰떡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연혁’ 부분)

‘내지’의 황폐는 여전했던 시절

  고향을 태어난 장소로만 일컫는 건 사무적 편의일 뿐이다. 유년기의 뇌파에 새겨진 햇빛과 바람과 소리와 빛깔,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려놓은 무의식의 밑그림이야말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고향이다. 황지우 시인이 태어난 곳은 전남 해남의 배다리마을이라는, 섬이 아닌 내지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고향의 원형은 완도군 고마도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 ‘솔섬’이라는 곳이다. 네 살 때 해남을 떠나 광주로 갔지만, 선대가 대대로 뿌리내려 살아온 곳은 고마도였고, 명절 때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솔섬 앞바다에 내려오곤 했다. 그리하여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작 ‘연혁’에는 솔섬이 오롯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연혁’은 이후 황지우가 보여준 다양한 실험적인 시들에 비하면 그나마 순한 서정시에 속한다. 내지와 섬, 가난과 결핍, 이승과 저승,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가 다분히 주술적인 분위기로 펼쳐지는 이 시를 쓸 무렵만 해도 아직 광주항쟁의 참극은 일어나기 전이지만, 그래도 유신 말기의 어수선한 ‘내지’의 황폐는 여전했던 시절이었다. 솔섬은 가난과 결핍과 죽음의 이미지가 그득하긴 해도 그나마 연기가 피어오르는 내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온한 공간이었다. 전날 미황사에서 누군가 어란 앞바다에도 솔섬이 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솔섬은 섬들이 즐비하게 떠 있는 다도해 해남 해안에만 두어 개나 존재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솔이 자라는 무인도의 보통명사인 모양이다.


  미황사는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중턱에 있다. 지금은 남도 제일의 템플스테이 명소로 각광받고 있지만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대웅전에다 세심당(洗心堂)과 요사채, 그리고 초라한 공양간 한 집을 거느린 단출한 절이었다. 지난밤 그 시절에 만나 인연을 이어온 금강 스님과 회포를 풀고 뜨거운 구들장에서 단잠을 잤다. 이 절집의 대웅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다도해의 섬들은 짐승의 새끼들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새다. 해무 사이로 슬쩍 모습을 드러낼 때도 그런대로 신비롭긴 하지만, 맑은 날 석양녘이나 아침에 해가 뜰 때 남만(南蠻)의 이 새끼 짐승들은 황홀하다. 솔섬도 그 무리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근경(近景)에서 이름 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난 목선(木船)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다로 가는 대신 뒤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나신 솔섬 새 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南灣)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연혁’ 부분)

  대중에게 각인된 황지우의 출세작은 첫 시집의 표제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일 것이다. 그 새들이 데뷔작의 솔섬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솔섬에서 울어대던 그 새들은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란 가는 아침 길은 더디었다. 가다 서기를 자주 반복해야 할 만큼 어란 해변은 아름다웠다. 이른 봄의 연초록 마늘밭과 듬성듬성 서 있는 밭가의 나무들을 배경으로 바다가 처처에서 그림이었다. 정작 어란은 포구의 이름이 풍기는 서정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그저 그런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 진부한 풍경 속에 해우밭에서 거두어 온 김가루를 가득 채운 배들이 보였다. 흡사 석탄을 실은 것처럼, 조만간에 김 가공공장으로 옮겨질 검은 가루가 화물칸에 그득했다. 사내와 아낙이 새벽부터 고단했던 노동을 마무리하며 뱃전에서 김이 오르는 해장국을 맛나게 들이키는 중이다. 미황사 아침 공양 시간은 이미 놓쳤고, 한적한 포구 주변에 문을 연 식당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숙취에 허기까지 밀려들어 속이 쓰렸다. 포기했는데… 문자가 날아들었다, 공양간을 아직 열어놓았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황지우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재앙스러운 사랑’)고 했는데, 그날 아침에는 그 문자가 나에게 ‘사랑’이었다.

  “섣달 스무 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태(靑苔)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滿潮)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一家)의 심한 살냄새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土房門)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沿岸)에 남아 있었습니다.”(‘연혁’ 부분)

  가난과 남루는 시적인 소재이긴 할망정 막상 그 한가운데 있으면 고문보다 고통스러운 처참이다.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를 맡는 가난을 떨치기 위해 시인의 가족은 기댈 곳 하나 없는 광주로 솔가했고, 다시 시인은 서울로 올라와 대학까지 다녔지만 가문의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제 시대 투옥됐던 부친을 반드시 본받으려 했던 건 아닌데 유신시절 학내 시위에 참가한 덕분에 강제징집됐던 황지우는 1980년 광주항쟁 때 장형인 황승우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광주는 쑥밭이 되었고 지금도 금남로 상공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 광우와 나는 절대로 광주에 와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형제애를 큰형님 자신부터 배신했다. 그는 매일 시내에 나갔고 도청 앞에 모인 외신 기자들에게 마치 통역 장교 경력이 그때를 위해 있었기나 한 것처럼 물 흐르는 듯한 본토 영어로 광주 상황의 정당성과 긴급성에 대해 간증했다. 나는 유인물을 만들어 종로에 뿌렸고 청량리 지하철에서 체포되어 합수부에 끌려갔다.”(‘스님,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십니까?’에서)

  그렇게 합수부에 끌려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엮였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나중에 서강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동생 광우는 고등학생 때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를 계획해 제적당했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다 후일 노동 운동가로 변신했고, 장형 승우는 스님이 되었으니, 시인과 운동가와 승려가 공존하는 이 집안의 ‘전통’은 가위 화려하다.

승려·시인·노동운동가 삼형제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시(近視)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胎夢) 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石花)밭을 넘어가 인광(燐光)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연혁’ 부분)

  염치없는 아침공양을 늦게 마치고, 금강 스님과 차를 마셨다. 스님은 내려오기 전 발설한 나의 용무를 꼼꼼히 새겨두었던 모양이다. 절 아래 동네의 젊은 청년들을 통해 ‘솔섬’의 위치를 취재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시인의 큰형이 ‘성불암’이라는 절을, 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 지어놓고 산다고 했다. 정작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님으로 재직 중인 시인은 떠나오기 전에도, 해남에서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남군 북일면 갈두리 해변의 ‘성불암’은 마당의 탑이나 집에 새겨진 卍자만 아니라면, 펜션 같은 건물이었다. 성불암 앞에 시인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고마도가 있고, 그 옆에 솔섬이 떠 있다. 신도도 거의 없지만 찾아오는 중생 구제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이 절의 혜당(慧幢) 스님은 출타중이었고, 관리인 오영순(76) 보살이 대신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그 보살은 “미리 연락했더라면 밥을 지어놓았을 텐데 미안하다”고 했다.

  미황사 동백도 한두 송이밖에 벙글지 않았는데 이 성불암 곁 동백은 모든 봉오리를, 대단히 붉게, 활짝 열어제치고 있었다. 6·25 때 총알이 아깝다고 그물에 들씌워져 수장당한 이들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 앞바다에 혜당 스님이 절을 세웠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의 동생인 시인은 그냥 고향 인근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 것이라고 나중에 짐짓, 수정해주었다. 

   “내륙(內陸)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가 그물을 내린 자궁(子宮)에서 인광(燐光)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연혁’ 부분)

  조용호 : 세계일보 문화부 선임기자 jhoy@segye.com

 

2. 안도현 시인 데뷔작 ‘낙동강’

낙 동 강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낙동강’에 등장하는 안도현(48) 시인의 아버지 안오성(1934∼1981)은, 후일 유명한 시인이 된 큰아들이 스물한 살이었을 때, 마흔여덟 살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시인의 어머니 임홍교(1939∼ ) 여사가 우리 나이로 마흔세 살 때였고, 장남인 시인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초중고에 다니던, 참, 갑갑한 시절이었다.

  “어머님께. 날씨가 무척 추워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등지신 지도 벌써 다섯 달이 다 되어가나 봅니다. …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위한 채찍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따금 술이라도 한 잔씩 마시면 아버지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 우리라도 이 서러움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언제쯤 내려오실 생각인지요 …. 1981년 12월 22일 도현 올림.”

  임홍교 여사 칠순 기념으로 지난해 안도현 시인 부부가 펴낸 타블로이드판 ‘安氏年代記’에 따르면, 큰아들이 보낸 이 편지를 어머니는 수없이 읽고 또 읽었고, 읽을 때마다 흘린 눈물은 강을 이루었고, 어머니는 서랍에 이 편지를 오랫동안 보물처럼 간직해 왔다. 안도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고향 땅 경상도 예천에서 떠나와 전라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안도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들이 참여하는 문예 백일장을 모두 휩쓸던,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스타’였다. 그는 자신의 문학 실력만으로도 서울의 대학에 특기생으로 당연히 진학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암초에 걸려 지방의 문학 명문, 전라북도 익산(이리)에 소재한 원광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된 거였다. 그런 운명이 아니었다면, 경상도 낙동강과 전라도 만경강이 어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는 우선, ‘낙동강’으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1981년 당선됐다. 그는 “또래보다 일찍 고향을 떠났고 더욱이 멀리 전라도에서 살고 있을 때여서, 오히려 낙동강을 선택했던 것 같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안도현이 태어난 곳은 낙동강으로 흘러들 내성천이 지나가는 강변, 경북 예천 소망실이라는 마을이었다. 태어난 이듬해 부모가 예천과 경계를 이룬 안동 풍산으로 이사를 가 ‘풍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일찌감치 사촌들을 따라 대구로 유학을 갔다. 그의 시 ‘풍산국민학교’가 재미있어서 예천에 내려간 김에 안동 풍산초등학교를 둘러보았는데 시에서처럼 아직도 굵은 플라타너스가 운동장 가운데 남아 있었다.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 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 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풍산국민학교’ 부분)

  성장한 곳이 풍산이라고는 해도, 외가와 큰집이 있는 내성천변은 시인의 유년기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낙동강’의 진술처럼, 시인의 아버지가 내성천 어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냥 시적인 메타포일 따름이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는 그물 한 장만 주셨다고 했는데, 사실 시인의 부친은 경기도 여주에서 수박농사를 짓다가 돌아가셨다. 4형제의 장남인 도현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래서 그해 여름, 아버지가 밭에 남겨 놓은 수박들을 따서 트럭에 싣고 조수석에 앉아 영등포 청과물 경매시장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썼다.

  “타이탄 트럭 하나 가득 달을 싣고/ 아버지의 친구 張氏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장씨 아저씨는 여관에 들자 코를 골며 주무시고/ 여관방 쇠창살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영등포 청과물 시장 새벽 경매가 끝나면/ 리어카에 실려 서울 시내 골목 위로 둥그렇게 떠오를/ 그것은 아버지가 키우다 만/ 붉은 달이었다// 나는 그 달을 보며/ 너만 달이냐,/ 너만 달이냐,/ 창에 걸린 붉은 달에게/ 눈물을 훔치며 삿대질을 달에게 해대었다”(‘붉은 달’ 부분)

  이렇게 슬픔을 옮기기만 해도 시가 되던 시절이 안도현에게도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았던 아버지’가 수박 몇 통보다 더 값진 자산을 남겨준 셈이다. 내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많은 자산을 남겨주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시를 쓰진 못했다. 아버지가 남겨준 ‘그물’이 시인에게 그리 큰 도움을 주진 못한 모양이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다. 하루 전, 서울에서 예천까지 단숨에 내려와 내성천이 휘돌아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회룡포’를 다녀왔는데, 말 그대로 강이 마을을 용처럼 휘감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어제는 날이 한참 어두웠다. 예천 읍내에 들어와 ‘태평추’ 집을 찾다가 포기한 채 여관에 먼저 짐을 풀었는데, 정작 그 여인숙 옆에 ‘태평추 전문’이라는 글씨를 유리창에 붙인 ‘동성식당’이 보였다. 식당 주인 신말자(60)씨는 직접 메밀묵을 쑤어 이 자리에서 20년째 태평추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 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예천 태평추’ 부분)

오늘 내성천변은 환하고 맑다. 시인의 둘째 동생 태현(42)씨가 안내하는 중이다. 그는 시인의 동생답게,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살고 있었다. 어젯밤, 전주에 살고 있는 시인의 소개로 그의 동생을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며 시인의 내밀한 가족사에 대해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중 으뜸은 시인의 장남 역할이었다. 명절 때 형제들이 예천에 모이면, 그 형제들은 오랜만에 내려온 친구를 찾는 친구들조차 만나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힌다고 했다. 형제들끼리 술 마시는 재미가 훨씬 더 좋은 것인데, 그 중심에 안도현이라는 듬직한 장남과 형이 있었다. 어머니는 술 마신다고 만날 타박하면서도, 이날을 위해 가까운 군부대 ‘충성마트’에 가서 싼값으로 소주와 맥주를 박스째 떼어온다고 했다.

  지난해 그의 모친 안홍교 여사 칠순신문 발행인도 그가 맡았는데, 이 신문에는 가족들이 단합해 일제히 임여사를 공격하는, 언론 본연의 소임을 다하는 비판적인 기사들이 실려 있다. 이를테면, 큰아들은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면 키우던 닭을 잡아 맏이인 나를 몰래 부엌으로 불러 큼지막한 닭다리를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는” 편애를 일삼는다고 털어놓았고, 막내아들은 연애시절 만났던 처자에 대해 지금의 아내에게 알려주는 임여사의 그 ‘자상함’에 대해 비판하는 식이다. 마흔세 살에 혼자 된 그 임여사가, 아들의 시인 줄도 모르고,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들 집 벽에 걸린 글귀를 적어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특종이, 임여사 칠순기념신문 우측 상단에 젊은 시절 약혼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 시는 큰아들이 1991년에 펴낸 ‘그대에게 가는 길’(푸른숲)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인데, 시인 아들은 엄마에게 짐짓 볼멘소리를 한다. 어떻게 아들 시인 줄도 모를 수 있느냐고. 어쨌든, 임홍교 여사는 저 세상의 남편에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나그네’ 전문)

  시인의 동생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내성천을 바라보며 “이 뚝방길을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달린 적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처녀 뱃사공’을 불렀다”고 말한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며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로 이어지는 그 노래. 시인의 데뷔작 ‘낙동강’이 거저 나온 게 아니라 분명 DNA의 과학인 것을, 실감하겠다. 그 시인은 전라도 익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높고 외롭고 쓸쓸한’ 한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전주에서 살고 있는데, 그가 ‘낙동강’으로 데뷔한 뒤, 다시 3년이 흘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전라도 ‘만경강’을 배경으로 쓴 시가 당선됐다.

  시인은 “나의 20대 초반이 80년대였고, 전라도로 상징되는 역사적 상황이 안일한 서정시만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며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오순도순 같이 모여 살지 못하던 내 가족의 상황과도 흡사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시인으로 인하여, 낙동강과 만경강은 특정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네 가슴속에 하나로 흐르는 강이 되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세계일보 선임기자 jhoy@segye.com

 

 
 
 3. 송찬호 시인의 ‘늙은 산벚나무’
 
늙은 산벚나무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누구나 고향에서는 평등합니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  멀리 산벚나무, 신화 속에 피어난 꽃처럼 이마에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다. 송찬호(50) 시인의 ‘늙은 산벚’은 아닌 것 같다. 멀어서 분명하게 보이진 않아도, 호리호리하고 제법 키도 큰 것이, 화사하고 젊다. 숲은 아직 초록 물이 차오르기 전이어서, 오히려 그 회색 배경 탓에 노란 산수유와 젊은 산벚이 더 돌올하다. 시인을 찾아 충북 보은에 내려와 그가 자주 찾는다는 속리산국립공원 안쪽 구병리 계곡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는데, 국도변 숲에는 젊은 산벚만 홀로 도도할 뿐, 시인이 보았음직한 부끄러운 늙은 산벚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산을 오르다가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내는 형상을 보고,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시인은 그 산벚처럼 숫기가 없다.

     그는 보은읍에 나와 손을 기다리다가 읍이 아니라 당신 집으로 내비게이션을 켜놓고 가는 중이라고 전했더니,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 외지의 불청객과 겨루기(겨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평화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싸움이다) 위해 숨을 가다듬는 중이었을 게다.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 시인의 집은 통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주변에서도 돋보이는 아담한 집이다. 집 옆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버드나무 옆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가득 꽃을 매달았다. 시인은 일꾼을 거의 쓰지 않고 이 집을 직접 지었는데, 자그마치 5년이나 걸렸다. 동네 노인들은 그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언제 집이 완성되느냐고 물었고, 그들 중에는 집이 끝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

     시인은 대학(경북대 독문과)을 졸업하고 잠시 객지에서 방황하다가 이내 고향에 들어와 한 살 아래 고향 여자와 결혼해 아이들 낳고 지금까지 붙박이로 살아왔다. 아내는 인근 고등학교 역사교사이고,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시만 쓰는 전업이다. 해외는 나가본 적 없고 몇 년 전 제주 작가회의 행사에 참여하느라 딱 한 번 비행기를 타보았다. 중국 여행 스케줄이 잡힌 적도 있었지만 출국 이틀 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운전면허가 없는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인근 상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터미널에서 바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일. 한가한 시골 버스에 앉아 흔들리며 오고가노라면 마음이 평정된다고 했다. ‘늙은 산벚’이 따로 없다.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 되었습니다’ 부분)

     어떤 사연이 있어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살아왔을까. 시인은 끝내 구체적인 사연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 돌아왔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시로 지난 정서의 흐름을 어림짐작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사진도 찍기 싫어했다. 내려온 손님을 맞기는 하되, 신문에 얼굴 내미는 것, 마뜩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거만한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겸손한 태도와 말투여서, 민망하고 미안했다. 

  •  “낡은 봉고를 끌고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어물전을 펴는/ 친구가 근 일 년 만에 밤늦게 찾아왔다// 해마다 봄이면 저 뒤란 감나무에 두견이 놈이 찾아와서/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피를 토하고 울다 가곤 하지/ 그러면 가지마다 이렇게 애틋한 감잎이 돋아나는데// 이 감잎차가 바로 그 두견이 혓바닥을 뜯어 우려낸 차라네/ 나같이 쓰라린 인간/ 속을 다스리는 데 아주 그만이지//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그 쓰린 삶을 다스려낸다는 거!// 눈썹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일찍/ 그 친구는 상주장으로 훌쩍 떠나갔다/ 문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봄밤’ 전문)

    옆에 있는 이에게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풀어놓은 시편이다. 하지만 송찬호의 시들이 모두 이렇게 서사적이고 친절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변에 능하다. 이를테면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같은 그의 첫 번째 시집 표제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가 전형적이다. 누군가는 이 시를 두고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했고, 이즈음 미래파 시의 뿌리라고도 했다. 어쨌든 나는 이런 시도 괜찮지만, ‘봄밤’ 같은 시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문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 간 그 친구, 눈물 난다.

    저물녘, 보은읍으로 나와 ‘신라식당’에 들었다. 황태를 넣고 청국장 냄새가 나는 된장을 풀어 끓여낸 황토 색깔 국이 사람을 따뜻하게 위무하는 맛집이다. 시인은 술이 조금 들어가고 더러 세상 이야기를 섞어가자 조금씩 편안해지는 낯빛이었다. 그는 주변에 “나쁜 사람도, 나쁜 환경도 없다”고 했다. 그가 스스로 발설하는 그 비결, 혹은 이유란, 쓸쓸하다. 욕망을 지니지 않으면, 특별히 요구하지 않으면, 부딪치지 않으면, 반작용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거다.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찔레꽃’ 부분)

     왜 그는 일찍 귀향해 숨어 살기로 작정했을까. 찔레꽃 사랑 때문에? 시인은 묵묵히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그는 막연하게 말했다. “누구나 고향에서는 평등합니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나는 이걸 고향에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시인은 다음날에도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촛불’ 부분) 

     그날 저녁 이어진 자리는 보은의 맥주 집이었는데, 소읍의 금요일 밤 술집은 너무 뻔해, 그곳에서는 아무리 활동량이 적은 숫기 없는 시인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지인들을 쉬 만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동기이자 그 역시 문학세례를 받은 친구, 그 벗은 얼핏 지나가는 말로 송찬호가 광부로도 일했다고 했는데, 시인은 그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인근에 문경 탄광이 있었으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날 술값(생맥주 6000㏄ + 마른안주)은 동석했던 다른 친구가 냈다. 그 벗은 미당문학상 때도, 김수영문학상 때도, 서울에 올라가 시상식에 참석했단다.

     “우리 동네는 충북과 보은의 동남쪽 끝머리에 있다. 이곳에서 동쪽을 붙잡고 자동차로 사오 분 가량 줄달음치면 경북을 잇는 도계와 만나게 되고 거길 한 발 넘어서면 상주 화서 땅의 시작이다. …내 마음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상주를 지나 문경 예천 영주 너머 영동산악 어딘가를 헤매곤 하는데, 그것은 그런 오랜 방황과 모색 끝에 오래도록 책들이 썩지 않고 노래가 죽지 않는, 시의 천축국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에서인 것이다.”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붉은 눈, 동백’의 자서에 적은 말이다. 9년 만에, 그의 네 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이달에 나온다. 이번 시집에서는 과연 ‘시의 천축국’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을까. 세 번째 시집으로는 김수영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 ‘가을’과 ‘늙은 산벚나무’로 미당문학상까지 받았으니, 그는 ‘시의 천축국’으로 틀림없이 가는 중인가. 그는 “시는 내가 경영할 수 있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니까…” 쓴다고 했다. 이런 그의 시는 마지막으로 또, 어떤가.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 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부분)

    세계일보 선임기자 jhoy@segye.com

     

     
     
    4.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  
  •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골목길’에 해당되는 말인데, 그 길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귀포를 중심으로 제주 남서부 해안을 12코스로 이어놓았다. 어쩌다 행복하게도 3박4일 동안 그 올레를 걸을 기회가 생겼던 터에, 이생진(80) 시인의 ‘술에 취한’ 성산포가 보고 싶어 하루를 따로 떼어 홀로 제1코스(시흥초등학교~말미오름~종달리소금밭~성산갑문~광치기해변, 15㎞, 4~5시간)를 걸었다. 이 코스에서는 걷는 내내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12 - 술에 취한 바다’)

      시흥초등학교에서부터 오름을 향해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햇빛은 환한데 바다에는 해무가 자욱하다. 길 양편에 장다리꽃이 보랏빛으로 무성하게 너울댄다. 저만치 커플티를 입은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이미 걸어가고 있다. 이젠 올레가 제법 알려져서 신혼여행객들도 이 길을 걷는 모양이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 말미오름 정상에 이르렀을 때 기대했던 성산 일출봉은 안개 속에 희미한 유령선처럼 떠 있었다. 이제 초입인데, 성산포에 닿으려면 한나절 내내 걸어야 하는데, 연무가 걷히기를 하세월로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뭍에 조각보처럼 펼쳐진 유채밭들은 제법 선명하게 들어온다. 아쉬운 대로 유채 바다를 곁눈질하다가 유령선을 흘깃거리며 오름을 돌아 내려가는데 말들이 꼬리를 한가롭게 내두르고 있다. 가만히 보니, 그 말들보다 그들 뒤편으로 돌담을 두른 무덤들이 더 시선을 잡아끈다. 무덤 하나하나 돌담으로 에워싸였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80- 고독한 무덤’)

      시인이 시는 그리 썼지만, 햇볕이 따갑고 햇빛은 맑아서 무덤에서 고독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의 억새들이 아직 남아 무덤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름 아랫길을 다 내려와 종달리 소금밭을 향해 나아가려는데, 이 한적한 섬의 길가에 차들이 우우 줄지어 서 있다. 멀리 연기가 올라가고 포클레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파놓은 구덩이에서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하는 사람은 두엇이지만, 뒷짐을 지었거나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거나 혹은 고개를 길게 빼어 일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많다. 먼발치서 줌렌즈를 당겨 사진 몇 장 찍고 천천히 다가갔는데 노인 하나가 더 가까이 가서 찍어도 좋다고 불쑥 말했다. 그들은 무덤을 열고 뼈를 추려 새 묘지로 옮기는 중이었다. 노인은 친근한 낯빛으로 “올레꾼이냐?”고 물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9- 생사’)

      아스팔트 길을 걸어 종달리 소금밭 쪽으로 갔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천일염을 생산하던 소금밭에 지금은 갈대만 무성하다. 정오가 가까워도 여전히 연무는 가시지 않아 갈대 너머로 성산 일출봉 유령선은 더 크고 장엄하게 부유하는 중이다. 종달에서 처음 오름으로 출발했던 시흥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걸어야 성산포에 이를 수 있다. 이 도로에서는 성산포와 일출봉이 내내 가까이 보인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셔터를 한 번씩 누르는 꼴이니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를 추월한다. 가만히 보니 그는 이미 나를 추월한 지 오래인데,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젊은 그는 높낮이가 다른 두 다리로, 여전히 껑충거리며 해안 길을 하염없이 걷는 중이다. 지팡이는 없다. 바다가 바로 곁에서 말을 걸어온다. 일출봉은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 속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청청한 소주 빛깔 성산포 바다, 멀지 않았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30- 바다의 오후’)

    이생진 시인을 만난 건 제주에서 올라와 김후란 시인이 운영하는 ‘문학의 집·서울’ 수요모임 ‘만나고 싶었습니다’라는 공개 문학강좌 자리에서였다. 운이 좋았다. 일부러 노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는다는 게 썩 편치 않은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청중 속에 섞여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됐던 거다. 시인은 이날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을 준 건 그가 어떻게 시에 대한 열정을 사르었는지, 물증을 들고 나온 대목에서였다. 그는 40여년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살면서, 시를 심장에 넣고 섬과 섬을 떠돌았다. 아직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 1955년부터 내리 4년 동안 매년 자신이 쓴 시를 등사를 하고, 표지를 만들어 니스를 칠해 그늘에 말리고, 철사를 ㄷ자로 구부려 일일이 제본을 해서 200권씩 만들어서 선후배와 친지들에게 회신용 엽서를 동봉해 보냈다고 했다. 그는 그 시집 몇 권과 엽서 몇 장을 보여주었다. 객석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토요일이면 인천 춘천 망우리 같은 서울 근교를 떠돌면서 느낀 걸 즉석에서 엽서에 깨알처럼 적어 자신의 주소로 부쳤다. 그러면 화요일쯤 집에서 그 엽서를 받아보게 되는데, 그 스스로 엽서의 독자가 되어 당시의 심정과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섬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섬이 3188개가 있다는데 그중 1000여개는 내가 다녔다”며 “어선을 타고 우리 바다 어디를 지나가도 대충 내가 어딜 가고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낀다”고 했다. 왜 그리 섬으로만 떠돌았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외로워서 갔다”고 했다. 그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인데, 이독치독(以獨治獨)은 말이 안 되는지” 물었다. 따지고 보니 그는 불행한 청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서 말했던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였다. 성장기는 일제강점기였고, 20대 청춘기에는 6·25전쟁과 폐허가 이어졌다. 다시 가난을 극복하자는 군대식 행진이 청년의 푸른 감성을 짓눌렀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 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 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 거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66- 보고 싶은 것’)

      지치고 허기가 져 내내 적당히 점심을 해결할 곳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는데 주변에 식당은 보이지 않고 종달해안도로만 썰렁하게 성산봉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길이었다. 제주의 등 푸른 고등어를 조려서 차진 그놈의 살에다 자글자글 붉은 국물을 얹어 소주 반주로, 오전의 피로와 고독을 보상받고 싶었다. ‘해녀의 집 식당’ 간판만 덩그랗게 눈에 띄는데, 그것 말고는 앞으로도 한참을 더 걸어야 할 막막한 풍경이다. 해녀의 집에 들러 해삼 한 접시와 소주를 시켰다. 해삼은 맑고 붉었다. 홀로 다 먹기에는 큰 접시다. 시인과는 반대로 소주 한 잔에 해삼 두 점을 먹었다.

      “나는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45- 고독’ 전문)

    성산 일출봉 입구는 뭍에서 온 여자중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뒤덮여버렸다. 봄부터 수학여행을 떠나는 모양이다. 봄볕이 더워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언덕 위로 올랐다. 멀리 섬 하나가 누워 있다. 파랗디파란 바다에 섬이 보이는데, 그 섬은 아닌 게 아니라 소가 배를 깔고 턱을 괸 채 먼 바다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꼴이다. 우도는 우도(牛島)다. 무엇보다도 바다가 소주 빛깔보다 훨씬 더 파래서, 아무리 퍼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은 처음 일출봉에 올라 그 섬이 ‘우도’라는 걸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무명도’라는 제목으로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고 썼다.

      그는 나중에 그 섬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그냥 ‘무명도’를 고집했다. 이름이 있다면, 이름을 안다면, 고독이 사라질지 모른다. 그는 1978년에 내놓은 이래 지금까지 30년 넘게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집 ‘그리운 성산포’ 서문에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것이라고 썼다. 나는 그의 연작시 중에서도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36- 감탄사’ 부분)는, 높고 쓸쓸하고 서글픈 ‘백석’ 같은 대목이 좋다. 그리고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고 쓴 ‘바다의 오후’ 그 대목도 시리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잔잔하고 지루하게 살다가(이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이겠지만), ‘덜컹덜컹’ 사랑하고 갈 수 있다면 더 무슨 말을 붙일까.   세계일보 선임기자 jhoy@segye.com
 
 
5. 송수권 시인의 '대숲 바람소리'
 
대숲사이 하얗게 피어 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
끝없이 펼쳐진 황토길… 뻘… 南道의 맑은 숨소리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하게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댓이파리의 맑은 숨소리

 

누군가 그의 용모를 일컬어 점잖게 ‘시골풍’이라고 시집 발문에 쓴 걸 보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광주 역전에서 처음 만난 시인은 남도 바닥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영락없는 촌사람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그을린 얼굴, 연신 피워대는 담배에다 빠른 남도 사투리 때문인지는 모르되 밭에서 일하다가 모처럼 차려 입고 오랜만에 도시에 나온 농부 같았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나지막이 ‘누이’를 호명하며 한국 서정시의 한 획을 새로 그어낸 그 시인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렵겠다.

남도의 큰 서정시인 송수권(순천대 명예교수·69) 시인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그의 고향 고흥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순천에 살고 있는 그가 마침 광주에 올라올 일이 있어서 그곳에서 합세해 영랑문학제가 열리는 강진에 들렀다가 최종 목적지인 고흥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여정은 광주 역전에서 섣불리 재단했던 시인의 ‘촌놈’ 이미지가 차례로 깨져나가면서 논리적이고 강건한 남도의 서정시인 하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산문에 기대어’ 부분)

오늘날 시인을 있게 한 이 명편은 휴지통에서 건져냈다. 원고지가 아닌 갱지에 흘려 써 ‘문학사상’에 응모한 이 시는 휴지통으로 들어가버렸지만, 이어령씨가 발견하고 여관 주소만 적혀 있던 응모작의 주인을 수소문해 1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975년 데뷔 과정의 일등공신이 이어령씨였다면, 정작 이 시를 존재하게 한 건 젊은 나이에 자살한 동생이었다. 시인의 친모는 일찍 죽었고, 계모 아래 두 형제가 살았다. 그중 한 혈육이 군에서 제대한 다음 날 친모의 무덤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고, 무덤 주변에는 동생이 먹다 만 알약들이 이슬을 받고 있었다. 눈썹이나 머리카락 같은 사람 몸의 터럭들은 죽어서 매장을 해도 오래 썩지 않고 남아 그 사람의 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죽은 동생의 눈썹이 가을산 그림자에 빠지고, 기러기가 그 눈썹을 물고 날아다니는 풍경 속에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라는 구절은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줄 때까지 기다리는 ‘제의(祭儀)’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 제목의 ‘산문(山門)’이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셈이다.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결국 누굴 그리워하고 산다는 것은 이 슬픈 제의(祭儀)를 되풀이하는 끝없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들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5월의 사랑’ 부분)

강진 가는 길 차창으로 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시인은 차 안에서도 연방 담배를 놓지 못한다. 하루에 세 갑 정도는 피운다고 했다. 하릴없이 조금 내려놓은 창틈으로 빗방울이 들어와 얼굴에 튀긴다. 저물녘 강진은 비가 오는데도 축제분위기가 완연했다. 영랑문학상을 시상하는 강진문화회관에는 지역사회 유지들이 보낸 화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지역의 문인들은 물론 허름한 차림새의 노인네들까지 ‘굿’을 보겠다며 몰려들었다. 일기가 불순한 데다 강진의 일정이 늦어져 그냥 그곳에서 일박을 한 뒤 다음 날 고흥으로 가기로 했다. 그날 밤 강진의 식당에서 늦은 시각까지 송수권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순천사범학교를 나와 서라벌예대까지 졸업했지만 등단이 여의치 않아 문학 화병이 들었던 데다 피를 나눈 형제마저 자살해버리자 20대 초반의 젊은 시인은 섬으로 발령을 자청해 초도중학교 교사로 6년을 살았다. 여수에서 뱃길로 오래 달려 거문도 못 미쳐 당도하는 그 섬에서 시인은 문학을 제쳐두고 낚시에 빠져 살았다. 첫 발령지의 중학교에서 만났던 제자를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섬에 들어와 3남매를 낳았다. 6년이 지나고 다시 섬으로 발령이 나자 시인은 섬을 나와 홀로 절과 도시를 떠돌았다. 어쩌다 서울에 입성해 서점에서 다시 처음 보게 된 문예지가 ‘문학사상’이었고 여관에 틀어박혀 갱지에 응모작을 써서 투고한 뒤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데뷔하게 된 거였다. 이후 그가 펼쳐온 시의 풍경은 남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진경이었다.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대숲 바람소리’ 부분)

그는 남도 정서의 핵심으로 대나무와 황토, 그리고 뻘을 꼽았다. 댓잎이 살랑거리면서 내는 사각거리는 속삭임은 서늘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어디선가 듣기론 뒤안에 대나무를 심어놓으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연고로, 선비의 집에선 될 수 있는 한 피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밤 송수권의 대나무론은 그런 편견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대나무는 남도의 일상에 스며든 풍경이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들의 재료였다. 충청 이북지역에서 자생할 수 없는 나무여서 그 자체로 남도의 특성을 반영하거니와 죽순에서부터 대바구니, 연, 활, 죽창으로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쓰임새는 남도의 상징이나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그는 대밭을 끼고 낮게 몽기작거리며 서서히 돌아나가는 저녁밥 짓는 연기에 대해 말하며, 남도의 노래는 높이 흔들어대는 소리가 아니라 땅을 밟는 소리라고 했다. 일단 남도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그 DNA의 60%는 무조건 무당기질을 타고난다고 했다. 그 ‘끼’란 시나위나 산조 같은 무한자유의 신명일 것이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자락들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 부분)

강진의 그날 밤, 그가 펼친 이 세 가지 핵심에 대한 강의는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지면에 소개된 그의 남도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육성을 통해 살을 붙여 듣노라니, 촌사람의 외피 같은 건 사라지고 논리적이고 체화된 인문적 품성이 완연 깊어졌다. 황토야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쉽게 남도 이미지로 다가갈 터이고, 뻘에는 시인의 설명이 조금 필요할 듯싶다. 뻘은 우리 역사에서 ‘물둑’의 정신이라고 했다. 뻘을 막아서 논으로 만든 게 호남평야요 나주평야라는 것인데,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의 개척정신을 일컬어 ‘개(뻘)+ㅅ+땅+쇠(접미사)’라고 했다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남도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왜곡되었지만, 개땅쇠란 대단히 긍정적인 어원을 지녔다고 했다. 시인은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모든 것은 싱거워서 시도 삶도 아니라고 했다.

“자욱하다/ 진창이 된 저 삶들, 물이 썬 다음 저 뻘밭들/ 달빛이 빛나면서 물고랑 하나 가득 채워 흐르면서/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저 봉합선(縫合線)들,/ 이 세상 뻘물이 배지 않은 삶은/ 또 얼마나 싱거운 것이랴”(‘곰소항’ 부분)

시인은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이 있는 변산반도에서도 몇 년 살았다. 이곳에서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이라는 시집도 펴냈다. 평생 방황하고 방랑하는 삶이었지만 중고교 교사 30여년을 청산하고 이곳에 머물다가 ‘학사는 물론 박사학위도 없는 국립대교수 1호’로 초빙되어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맡았다.

강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고흥으로 내달렸다. 고흥군 두원면 학림마을. 이곳이 시인이 태어난 동네이자, 그가 누이와 함께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던 현장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인의 생가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빈 방의 장지문은 종이가 떨어져나가 을씨년스러웠다. 그는 전날 밤 강진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시에 대거 수용한 그의 시작에 대한 신념, 가락을 무시하고 역사성이 빠진 요즘 현대시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도 토로했었다. 그가 최근 탈고한 지리산 빨치산들에 관한 대하서사시 이야기도 이어졌다. 송수권의 시는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한 편이다. 그날 밤 동석했던 한 시인이 그에게 “선생님 시에는 연애시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시인은 손사래를 치며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귀경한 뒤에서야 그의 절절한 연애시 한 편을 발견했는데, 그 시 역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피어 있었다.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석남꽃 꺾어’ 전문)

세계일보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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