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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더불어 살기

2017 세계 호랑이 해

by 이성근 2017. 7. 29.



세계 호랑이의 날전 세계 야생 호랑이 3900마리

호랑이를 살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세계자연기금 보고

 

[출처=Nature Punk]

'세계 호랑이의 날(International Tiger Day)'은 매년 729일로, 2010년 러시아에서 개최된 호랑이 정상회담에서 야생 호랑이를 보전하자는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지정됐다.

 

세계자연기금(WWF)27(현지시간)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의 정부들이 반 밀렵 노력을 강화하고 아시아의 야생동물, 특히 전 세계에 약 3900마리 남아있는 야생 호랑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덫을 엄중히 단속하도록 촉구했다.

 

WWF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보전기관으로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고, 재생 가능한 자연자원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등 전 세계 100개국에 500만 명의 회원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 10년간 자연보전 활동을 해왔으며, 2014년 공식적으로 재단법인 한국세계자연기금(WWF-Korea)이 설립되었다.

 

왜 호랑이 보호가 중요한가?

WWF-Korea에 따르면 호랑이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야생 동물의 개체수를 유지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호랑이가 멸종한다면, 이 초식동물은 토지를 과도하게 방목하고 손상시켜, 결과적으로 전체 생태계 균형이 깨지게 된다.

 

인류 또한 식량, 물 등의 자연 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건강한 생태계에 의지하고 있다. 호랑이를 보호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포함된 서식지, 즉 생태계의 수천가지 생물종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환경을 공유하는 인간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WWF 트랩카메라에 포착된 야생 호랑이 [출처=WWF]

 

야생동물 불법거래 연간 200조 규모

한편, 밀렵꾼들은 점점 더 많은 덫을 이용해 호랑이, 코끼리, 표범 등 암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야생동물을 잡고 있다. 특히, 자전거 케이블처럼 널리 쓰이는 재료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죽음의 덫은 아시아 숲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야생동물 불법거래는 연간 200억 달러(224조 원) 규모로 추정되며, 마약, 인신매매, 위조품을 이어 전 세계에서 4번째로 규모가 큰 불법거래로 성장하였다.

 

WWF 호랑이 보전 프로그램 타이거스 얼라이브(TA)’의 책임자 마이크 발처(Mike Baltzer)덫은 야생동물을 멸종 위기로 이끄는 주요 원인이며, 동남아시아에서 위험하고 은밀하게 확산되고 있다. 야생 호랑이를 보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대규모 덫으로 인해 위태로워지고 있다. 보전 활동의 최전선에서 덫을 치우고 덫을 설치한 자들을 검거하는 레인저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지원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WWF 야생 호랑이 보전 레인저 [출처=WWF]

덫을 설치하는 불법 밀렵꾼들에 대한 조치 취해야  

UNESCO 세계 유산이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야생 호랑이, 오랑우탄, 코끼리, 코뿔소가 공존하는 인도네시아의 주요 섬인 '수마트라(Sumatra)'의 열대우림에서 2006년에서 2014년까지 8년 사이 덫의 개수가 2배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서식지는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수마트라의 보호 구역 중 하나인 근처 림방 발링(Rimbang Baling)에는 불과 26명의 레인저가 서울시의 2.5배 가까운 1400를 순찰하고 있다.

 

WWF 야생동물 관련 법 집행을 담당하고 있는 로힛 싱(Rohit Singh)덫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덫을 설치하는 불법 밀렵꾼들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현장의 레인저들에게 더 많은 자원과 강력한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덫이 아시아를 옭아매는 가운데, 아시아의 보전 단체들은 긴급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와일드라이프 얼라이언스(Wildlife Alliance)가 이끌고 있는 보전 단체들은 대중이 야생 고기를 소비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인식 개선 운동에 착수하고 있다.

 

호랑이를 살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

2010,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의 정부들은 TX2, 2022년까지 전 세계 호랑이 개체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목표를 세웠다. 그동안 감소 추세에 있던 전 세계 야생 호랑이 숫자는 2016년부터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해 호랑이 보전에 희망의 불빛이 내비쳤다. 하지만 반 밀렵과 레인저에 대한 투자를 강화 없이는 개체 수가 다시 감소하는 추세로 돌아설 것이다.

 

호랑이를 살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호랑이가 멸종되면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미래는 이 훌륭한 동물을 살리는데 달려있습니- 싱예 왕모, WWF 동물 보호가

 

 

호랑이[Tiger ]Panthera tigris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 IUCN Red List 지역절멸(RE)

학명인 'tigris'의 어원은 '화살'이란 뜻의 페르시아어이다. 일설로는 메소포타미아지역을 흐르는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형태 및 생태

등쪽의 색은 암적황색이고, 사지에 이르러 약간 담색이 된다. 등쪽에는 불규칙한 검은 무늬가 많이 있으나 앞다리와 앞면에는 적다. 주둥이 끝은 암연피색(暗軟皮色)이고, 눈과 뺨 밑은 흰색이며 검은 점이 있다. 머리 위와 등의 뒷부분, 복부, 뒷다리에는 뚜렷한 갈색 반점이 있다.

 

꼬리의 기부(基部)는 등쪽과 같은 색이며, 끝과 뒷면은 대회백색(帶灰白色) 또는 연피색(軟皮色)으로 8~9개의 둥근 검은 무늬가 있는데 꼬리 끝 가까이에 있는 2개는 더욱 뚜렷하게 검은 편이다. 귀 뒤는 광택이 있는 흑색이고, 귀 끝 가까이에는 흰 점이 있다. 겨울털은 여름털에 비하여 담색이고 길며, 수염은 백색이다. 몸길이는 180, 꼬리길이는 87에 달한다.

 

고양이속의 여러 가지 성질과 습관을 지니고 있으며, 동작이 매우 빠르고 매사에 조심성 있게 행동한다. 소리를 내지 않고 먹이가 되는 다른 야생동물에 접근하며, 자기 몸이 보이지 않게 걸어가는 동작과 모양은 마치 뱀이 땅 위를 기어가는 동작과 비슷하다. 먹이를 찾아서 하루 동안 보통 80100를 달린다. 보폭은 80에 달하며,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뛰는 것이 매우 빨라서 한번의 도약이 4m에 달하며, 다른 야생동물을 쫓아갈 때에는 78m의 먼 거리를 무난히 뛰며, 큰 바위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도약할 때에는 10m까지도 뛰어내린다. 헤엄을 잘 치며 무더운 여름에는 냇가로 내려가서 산간 계류의 선선한 곳에서 쉬고, 낮에는 모기와 등에를 피하여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안개가 낀 물가의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잔다.

 

산의 급한 경사지나 바위 위를 잘 오르내리며 개에게 추격을 당하게 되면 나무의 경사가 45° 정도만 되면 나무 위를 자유롭게 기어 올라간다. 나무 위에서 내려올 때에는 회전하여 머리를 밑으로 향하여 내려온다. 여름철의 무더위를 제일 견디기 어려워한다. 따라서, 67월에는 1,500m 이상 되는 심산유곡에서 살고, 8월이 되면 다소 밑으로 내려와서 산다.

 

겨울에는 30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년 중 이 시기에는 특히 피하지방조직의 발달이 잘 되어 배와 겨드랑이 밑의 지방층은 5두께로 두꺼워진다. , 달 밝은 밤에 눈 위에서 뒹구는 모양은 마치 개가 눈이 오면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과 흡사하다. 눈이 많이 온 겨울에는 한겨울 동안 눈 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때문에 배 밑과 발에 있는 털이 다 빠지게 되며, 따라서 오래된 발자국을 밟으려고 힘쓴다.

 

해가 진 뒤와 해가 돋기 직전을 제일 좋아하지만 낮에도 수시로 먹이가 되는 야생동물을 찾아다닌다. 배가 부르면 하루 종일 드러누워 낮잠을 자다가 해가 지자마자 활기를 띠고 약탈적 행동을 시작한다. 배가 고픈 호랑이는 밀림의 넓은 지역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높은 지대를 선택하려고 힘쓰고, 배가 부른 호랑이는 특히 추울 때에는 나무가 무성한 장소를 선택하며, 그때 그때마다 항상 장소를 바꾸는 성질이 있다.

 

만약, 먹이가 되는 동물을 잡기 위하여 밤에 활동하는 것이 불편할 때에는 낮에 대기한다. 또 먹이가 되는 동물을 잡기 위하여 이동할 때에는 좌우 양사면(兩斜面)이 잘 보이는 산마루를 좋아하며 때때로 계곡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뾰족한 바위 위에서 엽장(獵場)을 내려다보며, 먹이가 되는 야생동물을 확인하게 되면 뱀과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서 등 뒤에서 덮친다.

 

교미(交尾)시기와 교접(交接)121월 초순경에 시작되며, 젊은 호랑이는 2주일간 늦어진다. 이 시기에 수컷은 이산 저산 숲이란 숲은 모조리 뒤져서 암컷을 찾아 헤맨다. 수컷 여러 마리는 암컷 한 마리를 두고 큰 투쟁을 벌인다. 제일 힘이 센 호랑이는 특권을 가지고 욕정(欲情)을 충족시킬 때까지는 다른 수컷이 암컷 있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수컷의 투쟁은 맹렬하며 투쟁장소는 항상 피투성이가 되는데, 발톱으로 말미암아 부상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투쟁으로 죽음을 초래하는 일은 없으며, 약자는 패배당하면 그 투쟁하던 장소를 강자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행운을 찾아서 물러서게 된다. 임신기간은 98110일이며 1회의 새끼 수는 3마리이다.

 

암컷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로 된 동굴이나, 바위와 바위 사이에 움푹 팬 곳, 절벽의 동굴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보금자리는 먹이를 찾는 데에서 너무 멀지 않은, 즉 멧돼지와 여러 가지 야생동물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선택한다. , 일반적으로 보금자리는 바위 위의 자연히 움푹 팬 곳에 만들며, 나무의 마른잎, 마른풀을 보금자리 밑에 깐다.

 

암컷은 항상 경계하기 위하여 결코 일직선으로 보금자리를 찾아가지 않고 바위를 밟고 다녀서 자신의 발자국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맹목적으로 용감하여져서 모성애를 발휘하며 미친 듯이 엽사(獵師)에게 덤벼드는 성질이 있다.

 

갓난 새끼는 어린 고양이 크기이지만 성장속도는 매우 빠르다. 2개월이 경과되면 어미는 새끼들을 보금자리에서 나오게 한 뒤에 새끼들에게 반쯤 죽은 야생동물을 운반하여다가 육식동물로서의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훈련을 시작한다. 6개월간 젖을 먹이며, 매일의 일과로서 짐승을 잡는 기술을 연마, 습득하게 하여, 9개월째부터는 어미호랑이와 동반하여 수렵을 하기 시작한다.

 

새끼들은 1, 2년간 어미 곁에 머무른 뒤 서서히 독립생활에 들어가지만, 어미 호랑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는 않는다. 3년 뒤에야 좋은 서식장소를 찾기 위하여 방랑하기 시작한다. 호랑이는 생후 5년이 되어야 비로소 성숙하며, 수명은 1520년이다.

 

1년에 두 번 털갈이를 하는데 그 시기는 9월과 3월이다. 검은 줄무늬와 코와 발의 털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빨리 털갈이를 하며 털갈이 기간은 약 2주간이다. , 길고 날카로운 발톱도 매년 바뀌며, 바뀌는 시기는 12월경이다.

 

호랑이의 식성은 자기 자신이 잡은 신선한 야생동물의 고기만 먹는데, 시장기가 날 때에는 죽은 고기, 오래된 고기도 먹는다. 주식물(主食物)은 멧돼지이며 노루·산양··사슴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덤벼들어 잡아먹는다. 호랑이는 도망가는 야생동물을 쫓아가서 잡는 일은 거의 없다.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동물에게 소리 없이 접근하여 도약하면서 넘어뜨린 뒤에 목덜미를 물어뜯는데, 멧돼지는 목덜미가 굵어서 그 앞목을 물어뜯어 죽인다. 호랑이의 호화찬란한 생김새, 번개같이 빛나는 눈, 짐승들이 싫어하는 독특한 냄새로써 다른 야생동물에게 마비와 공포를 주게 되어 다른 동물들은 마치 최면술에 걸려든 것 같이 되어 도망하지 못하게 된다.

 

큰 멧돼지를 물어뜯어 죽인 뒤에는 조용한 개울 근처로 끌고 가서 넓적다리와 복부(腹部)의 연한 부분부터 먹기 시작하여 배가 부르면, 물을 많이 마시고 그 옆에서 쉬면서 서서히 여러 번 물을 마시고 또 계속하여 잠을 자는데 하루 이상 푹 쉰다. 멧돼지 다음으로 좋아하는 동물은 개···염소 같은 것인데 큰 짐승들의 뼈가 많이 붙어 있는 곳과 내장은 결코 먹지 않으나 노루·멧돼지의 새끼, 개와 같이 작은 동물은 전부 다 먹는다.

 

소화작용을 돕기 위하여 여름부터 가을에는 여러 가지 잡초를 먹는 외에 도토리, 산림 속의 여러 가지 과실, 즙액(汁液)이 많은 머루·다래 같은 것도 잘 먹는다. 때로는 물가에 내려가서 물고기도 잘 잡아먹는다. 음식을 충분히 먹은 뒤에는 산골 냇가로 내려가서 코와 입을 물 속에 담그고 입 속에 남은 고기 부스러기와 피를 깨끗이 씻는 습성이 있다. 겨울에는 물을 얻기가 어려우므로 물 대신 눈으로 목마름을 면한다.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장백산 일대, 중국 동북지방의 소흥안령 일대와 소련의 극동지방, 연해주의 흑룡강 계곡 등에 극히 일부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전에는 백두산 고준지대(高峻地帶) 원시산림과 바위동굴에서 볼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시베리아의 연해주 일대의 원시산림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극동지역의 분포권 내에서는 약 200마리가 생존하리라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방에 6070마리, 북한에 4050마리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거는 희박하다. 현재 동물원에서 기르고 있는 개체는 약 150마리로 집계되었는데, 이 가운데 수컷이 약 70마리, 암컷이 약 80마리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수컷 39마리와 암컷 46마리 및 어린 새끼 등 87마리는 야생이 아닌 동물원에서 출생한 것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경동물원에서는 소흥안령과 장백산에서 포획하여 다른 동물원에 분양을 해주었다. 또한, 러시아(당시 소련)19631964년 사이에 약 15마리를 생포하여 다른 동물원에 수출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까지 모두 25마리가 포획되었다.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시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멸종되고 말았다

 

민간신앙에서의 호랑이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치는 민폐가 매우 심하여 호랑이에 의하여 사람이나 가축이 해를 입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고까지 칭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885(헌강왕 11) 2월에 호랑이가 궁궐 마당으로까지 뛰어들어 왔다고 하였으니, 호랑이의 피해가 나라 전체에 걸쳐 매우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산중 혹은 인근 마을에서 마주치는 맹수 중 가장 두려워한 존재가 바로 호랑이였다.

 

호랑이를 야성의 맹수로 인식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호랑이는 그 야성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동굴 속에서 뛰쳐나와 맹수로 머무르고 만다. 이렇게 인간에게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본능은 급기야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되어 살아 있는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고 제사까지 지내는 풍속이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풍속은 원시부족국가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鎭山)에서 도당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호랑이숭배사상은 산악숭배사상과 융합되어 산신신앙으로 자리잡게 된다. , 산을 숭배하는 사상은 산속에 사는 숭배의 대상인 호랑이와 연계되어 산신이 호랑이로 표현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별칭하여 산군·산군자(山君子산령(山靈산신령(山神靈산중영웅(山中英雄)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이러한 사상이 엿보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심마니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깍듯이 대접하고 있다.

 

그러나 산신을 모셔놓는 산신당에는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산신도에 묘사되고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사납기보다는 점잖고 친근하게 표현되고 있다. 호랑이의 자세도 공격적이거나 서 있기보다는 산신의 옆 또는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도에서의 호랑이 의미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의 군자 호랑이는 엎드려 있어도 모든 헤아림이 그 속에 있다라는 말에서와 같이,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의 신지(神知)를 받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어떻게 관장할 것인가를 헤아리고 있는 사려 깊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소곳이 엎드려 길게 다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인 토치(兎齒)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며, 호랑이의 기상과 기개를 나타내는 꼬리는 소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 구름 속까지 닿게 하며 화면 전체에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눈은 왕방울만하게 그려 전체적으로 아래로 내려뜨린 모습이며, 파란색 금박으로 눈동자를 박아 어둠 속에서 신비스러운 빛을 발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호랑이의 모습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애교가 있고 신성한 영물로서의 분위기와 함께 친근한 시골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를 동시에 나타냄으로써 확실하게 선과 정의의 편에 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풍수에서의 호랑이

호랑이는 일찍이 풍수설에서도 중요시되어 왔다.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는 우주를 진호(鎭護)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을 방위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 동쪽에는 청룡(靑龍), 서쪽에는 백호(白虎), 남쪽에는 주작(朱雀), 북쪽에는 현무(玄武)라는 이름을 가진 방위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 4신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풍수지리에서는 좌청룡·우백호·전주작·후현무라 하여 매우 중시되었다. , 좌청룡·우백호가 서로 어울려 여러 겹으로 주변을 감싸는 것을 최고의 명당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무덤을 쓸 때에는 좌청룡·우백호를 보아 자리를 정하고 무덤을 보호하는 능호석(陵護石)에는 12지신의 하나로 호랑이상을 새겼으며, 무덤 앞의 석물에도 호랑이상을 조각하였다.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서의 4신은 풍수에서뿐 아니라 부대의 깃발과 포진에도 응용되었다. 12지신은 땅을 지키는 12신장으로 열두 방위에 맞추어서, ··호랑이·토끼·····원숭이···돼지를 수호신으로 삼고 있다. 12지신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그 성격이 변모해 갔다.

 

설화에서의 호랑이

우리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첫번째는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과 관련된 설화에서와 같이 신령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물로서 표현되는 경우이다.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하여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였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웃옷을 던진 뒤 두 개의 물어올리는 옷의 주인이 희생을 당하기로 하였는데, 두 개의 왕건의 옷을 물어올려서 약속대로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의 차이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김현의 설화에서와 같이 두 개의 자유자재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과 교유한다는 내용이다.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던 김현은 한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두 개의 변신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소녀를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게 되어 소녀의 형제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된 것을 소녀의 기지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형제호랑이의 살생에 대한 천벌이 멀지 않음을 감지한 소녀가 김현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형제를 살리고 김현에게 공을 돌렸다는 내용이다.

 

세번째는 인간의 행위에 감동된 두 개의 인간을 도와주는 경우, 또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는 경우이다. 이상의 유형이 호랑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랑이와 토끼의 설화는 호랑이의 어리석음을 희화적(戱畵的)으로 표현한 유형에 속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꾀 많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 토끼는 꾀를 내어 먹을 것이 많은 곳을 가르쳐 줄 테니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호랑이는 토끼를 따라 강변에 가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린다. 점점 물이 얼기 시작하여 꼬리가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더 많은 물고기가 달리기를 기다리다 결국 물이 얼어붙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상의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이지만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결코 간교하지 않은,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하겠다.


민화 속의 호랑이

우리 민화에서 호랑이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호랑이에게 삿된 귀신을 물리치는 신통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을 비롯하여 일반 민가에서도 호랑이의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여 삿된 것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벽사의 염원은 호랑이삼재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재는 풍((()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정초의 세화(歲畵)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행위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도라고 추측된다. ,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까치와 호랑이의 그림도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무관의 표시로 관복의 흉배에 호랑이를 수놓았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호랑이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길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치·호랑이의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대나무숲에 있는 호랑이그림도 벽사적 의미가 담긴 민화이다.

 

담문록(談聞錄)에 의하면 서방 산중에 인간에게 병을 주는 키가 큰 산귀가 살았는데, 대나무를 잘라 불 속에 던져 큰 소리로 그 귀신을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큰 소리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과 대나무숲을 그린 그림으로 병귀를 쫓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삿된 존재를 멀리하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벽사적·길상적 의미가 강하였다.

 

생활 속의 호랑이

호랑이는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이용되기도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호랑이의 각 부위가 약재로 이용되고 있다. , 뼈는 사악한 기운과 병독의 발작 등을 멈추게 하여 풍병의 치료제로 쓰이고, 눈은 마음이 산란한 환자에게 쓰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광을 발하는 호랑이의 눈에는 사귀(邪鬼)도 놀라 달아나게 되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호랑이의 코는 미친병의 치료와 어린이 경풍에, 이빨은 매독이나 종기의 부스럼에, 발톱은 어린이의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물리치는 데, 털가죽은 사악한 귀신을 놀라게 하여 학질을 떼는 데, 수염은 치통에, 오줌은 쇠붙이를 삼켰을 때 사용되었다.

 

호랑이의 털가죽을 신행 때 신부의 가마 위에 덮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호랑이가 지닌 벽사적 의미에서 실시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시 인간의 즐거움을 시기한 잡귀가 새색시를 넘보기라도 할까 미리 잡귀의 범접을 막고자 한 의도이다. 이것은 호랑이의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부녀자들이 패용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단옷날에는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속도 있었다.

 

참고문헌

수교집록(受敎輯錄)

용재총화(慵齋叢話)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한국의 호랑이(국립민속박물관, 1988)

한호의 미술(조자용, 삼화출판사, 1974)

한국동식물도감 7 동물편(원병휘, 문교부, 1967)-[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백두산 호랑이의 귀환, 사진으로 확인 12.6.27 한겨레

   

백두산에서 무인카메라에 찍힌 호랑이의 모습. 사진=북경대, 세계자연보호기금 중국지부, 순 게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에 소수가 남아있던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가 옛 서식지인 백두산에 출몰하고 있음이 무인 사진 촬영으로 확인됐다. 중국 베이징대 연구진과 지린성 임업당국은 지난 3월 왕칭 자연보호구역에 적외선 카메라 100여대를 설치해 아무르호랑이와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의 분포 실태를 조사했다.

 

지난 612일 왕칭 임업국 직원이 두황즈 임업장에 설치한 카메라를 회수해 확인한 결과 야생 아무르호랑이가 촬영된 것을 발견했다고 <중국망 신문 중심>이 최근 보도했다. 촬영 시점은 44일 오전 732분이며 장소는 백두산 북쪽 해발 837m 지점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카메라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이 2장의 사진에 찍혔다.

 


0820col_old.jpg » 아무르호랑이 서식지 분포도. 붉은색은 현 서식지, 분홍색은 과거 서식지. 사진=아무르 헤이룽 강 유역 네트워크.

 

현재 아무르호랑이의 최대 서식지는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430~500마리가 이곳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는 헤이룽장성의 완다산 일대와 지린성의 왕칭과 훈춘 지역을 중심으로 18~24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적인 번식집단은 러시아에만 있다. 왕칭 보호구역에서는 2008년 이후 발자국은 여러 차례 발견됐지만 호랑이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지앙 세계자연보호기금 중국 동북프로그램 책임자는 이번 사진은 적절한 보전과 관리대책을 세우면 호랑이가 원래의 서식지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무인 카메라가 희귀한 야생동물을 모니터링 하는데 매우 효과적임을 보여 주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전문가들은 지난 3월 훈춘에서 촬영된 아무르호랑이의 사진과 대조해 이 호랑이가 동일한 개체인지를 확인하는 한편 백두산에 정착한 번식 집단이 있는지도 알아볼 예정이다.

 


amur-tiger.jpg » 중국 훈춘에서 지난 3월 무인 카메라에 촬영된 아무르호랑이. 사진=훈춘자연보호구



amur-leopard2.jpg » 훈춘에서 촬영된 아무르표범. 사진=훈춘자연보호구.

 

훈춘 야생 백두산 호랑이 자연보호구에서는 지난 3월 호랑이와 표범의 발자국이 발견된 16곳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호랑이 와 아무르표범의 사진을 촬영하는 성과를 올렸다.

 

아무르표범은 1970년대까지 전 세계에 30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멸종위기에 몰려있으나 최근 40마리가량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0821col.jpg » 아무르표범 서식지 분포도. 붉은색은 현 서식지, 분홍색은 과거 서식지이다. 사진=아무르 헤이룽 강 유역 네트워크.

 

러시아가 최근 연해주에 설치한 표범 나라 국립공원에는 지난겨울 29마리의 아무르표범이 무인 카메라에 찍혔다. 중국 동북부에는 8~11마리의 아무르표범이 서식하고 있을 것으로 야생동물 보전 협회(WCS)는 추정했다.

 

한국호랑이는 멸종하지 않았다 12.2.11 한겨레

 

아무르호랑이 수컷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단군 신화부터 프로 야구팀의 마스코트까지, 호랑이 만큼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은 동물은 없다. 민속학자 천진기씨는 우리 조상은 이런 호랑이를 좋으면서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 우러러보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호랑이의 나라를 자처하면서도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지는 한 세기를 바라본다.

 

1980년 한 석간신문이 서울대공원에서 벵골호랑이를 찍은 거짓 제보 사진을 한국산 호랑이가 57년만에 나타났다고 섣불리 보도한 오보 사건도, 한국 호랑이가 없는 허전함과 호랑이를 되찾고 싶다는 염원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호랑이 발자국이나 포식 잔해에 대한 제보가 아직도 끊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최근 이항 서울대 교수팀이 발표한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는 같은 아종이라는 발표는 다시 한 번 우리 의식 속의 호랑이 향수를 깨웠다. 이 발표는 애초 한국호랑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호랑이는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 내막을 알아보자.

 


한국범의 서식지.JPG 호랑이 분포 변화_이항 서울대 교수 제공.JPG

 

아무르호랑이 분포 지역(왼쪽). 극동 러시아에만 400여 마리가 남아있다. 오른쪽은 1900(붉은색)1990(녹색) 호랑이 분포 지역 비교.

먼저 한국호랑이에 대한 개념정리. 현재 호랑이에는 6가지 아종이 있는데,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북지방에 서식하는 아종을 흔히 시베리아호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식지가 시베리아와 무관한 이 아종을 러시아와 국제 학계는 아무르호랑이라고 부르며 중국은 동북호를 고집한다.

 

문제는 이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하나였던 한반도 개체의 정체가 무어냐는 것이다. 독일학자 브라스는 1904년 아무르호랑이 가운데 한반도에 서식하는 호랑이가 줄무늬가 뚜렷하고 붉은 색을 띠며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가죽을 지닌다, 별개의 아종인 한국호랑이로 분류했다.

 

이 분류는 1965년까지 유지되다가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이 별다른 검토 없이 한국호랑이를 아무르호랑이에 편입시키면서, 이미 남한의 야생에서 사라진 한국호랑이는 이름마저 잃고 말았다.

 



 

새끼와 함께 있는 아무르호랑이.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이항 교수팀의 이번 연구는 학계의 숙제를 뒤늦게 한 셈이다. 한반도의 호랑이는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북부, 그리고 한반도를 넘나들던 유전적으로 동일한 집단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호랑이란 실체가 없어지지만 동시에 한국호랑이가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아무르호랑이가 한반도에 돌아오면 한국호랑이가 복원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스피호랑이는 1815년 멸종했지만 유전적으로 아무르호랑이와 매우 가까와 아무르호랑이를 이용한 복원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이항 교수는 아무르호랑이가 우리에겐 호랑이 카레이스키라고 했다. 우리가 러시아의 고려인을 돌봐야 하는 것처럼 아무르호랑이를 한국호랑이처럼 지켜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최근 환경부가 멸종위기종을 재정비하면서 멸종한 다른 동물은 보호종에서 제외하면서도 호랑이를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에 유지시킨 데엔 이런 고려가 있었을 터이다. 

아무르호랑이는 1940년대 20~30마리까지 줄어 절멸 직전에 몰렸으나 국제적인 보호운동에 힘입어 현재 400여 마리가 남아있다. 이 호랑이를 구한 것은 호랑이와 아무 인연도 없는 네덜란드, 미국 등 선진국 사람들이었다.

 

국제적인 아무르호랑이 보호단체인 티그리스재단 홈페이지의 후원자 명단을 보면, 미국 동물원 27곳과 유럽 동물원 18곳이 후원자로 나와 있다. 후원액도 네덜란드 정부 12만 달러, 영국 동물학회 26000달러 등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한국범보존기금이 2004년부터 해마다 약 2000달러를 모금해 보내고 있다. 지난해엔 후원금이 늘어 4000달러가 됐지만 소수의 관심 있는 후원자가 참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한국호랑이. 사진=인도 키미오.

 

한국호랑이가 아무르호랑이와 한 핏줄로 드러났지만 기후와 지형이 다른 한반도 호랑이가 러시아의 호랑이와 꼭 같은 수는 없다. 특히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훨씬 많은 호랑이가 고밀도로 분포했다. 일제의 해수구제사업이 진행된 1919~1924년의 6년 동안 잡아 죽인 호랑이만 65마리에 이르는 것은 한반도의 마지막 호랑이 집단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또 한반도 호랑이가 깊은 산보다는 먹이가 많은 초지와 늪지대에 많이 살았고 특히 섬과 해안에 높은 서식밀도를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국호랑이 표본이 남아있는 목포 유달초등학교의 한국호랑이도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잡힌 것이고, 1924년도 전남도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포획됐다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결국 유전적으로 동일할지라도 한국호랑이는 아무르호랑이와 미세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의 연구가 밝혀야 할 과제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고 환경을 복원하면 아무르호랑이는 한반도 남쪽까지 올 수 있다. 그날을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아무르호랑이, 아니 한국호랑이를 보존하는데 손을 보태는 일이다.

 

호랑이, 사자, 표범, 재규어의 고향은 히말라야 13.11.19 한겨레

티베트서 가장 오랜 화석 발견, 대형 고양이과 동물 '아시아 기원설' 확인

넓은 이마는 추운 기후 적응, 히말라야 산맥 솟으면서 세계로 확산

 

새로 발견된 고양이과 맹수 조상의 화석을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 현생 눈표범과 비슷하다.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호랑이, 사자, 표범 등 대형 고양이과 동물은 서식지 최상위 포식자로서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또 이들의 상당수는 아주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언제 출현해 어떻게 분화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미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약 200만년 더 오랜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두개골 화석을 발견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발견으로 이들 대형 맹수는 아시아에서 처음 출현했으며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오르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해 분화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USAID Afghanistan_640px-Big_cat_in_Afghanistan.jpg »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된 눈표범의 모습. 추위에 적응해 눈 사이가 넓고 꼬리가 뭉툭하다. 사진=아프가니스탄 USAID, 위키미디어 코먼스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덩치가 큰 표범아과에는 호랑이, 사자, 재규어, 표범, 눈표범, 구름표범 등이 속해 있다. 여태껏 이들의 기원과 분화를 설명하는 길은 현생 맹수들의 유전자를 분석해 추론하는 것뿐이었다.

 

2006년 미국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 연구를 통해 대형 고양이과 동물이 1000~1100만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해 퍼져나갔다고 밝혔지만, 기존의 화석연구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논란이 거듭됐다.

 

이제껏 알려진 가장 오래된 대형 맹수의 화석은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으로 380만년 전 두개골 조각 등이 전부였다. 그런데 2010년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 돈사이프 캠퍼스의 박사과정생이던 잭 쳉은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인 티베트의 오지를 조사하다 강변에서 동물 화석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cranium.jpg » 이번에 발견된 대형 고양과 동물의 두개골 화석(오른쪽)3차원 복원 모습. 사진=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절벽에 묻혀있다 침식돼 떨어져 나온 120개의 화석은 지금은 멸종한 영양, , 코뿔소의 것이었는데, 그 속에 대형 고양이과 동물 3마리의 거의 온전한 두개골 하나를 포함해 이빨과 턱뼈 등이 들어있었다. 이 맹수는 체중이 20정도로 호랑이와 사자는 물론이고 눈표범보다도 약간 작았던 것으로 추정됐는데, 추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찬 공기를 데우는 구실을 하는 부비동이 커 이마가 넓었다.

 

Panthera-blytheae-Mauricio-Anton.jpg » 이번에 발견된 대형 고양이과 동물 화석 두개골과 이를 복원한 모습.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이번 연구로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기원은 400~590만년 전으로 끌어 올려졌고,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기존 연구가 확인됐다. 새롭게 그린 고양이과 맹수의 진화 과정은 이렇다. 1640만년 전 티베트에 이들의 첫 조상이 출현했고, 600만년 전에는 이번 화석의 주인공을 비롯해 눈표범의 조상, 호랑이의 조상 등 3종이 아시아 고원지대를 누볐다. 사자와 재규어는 훨씬 나중에 가지 쳐 진화한다.

 

big cat map_s.jpg » 대형 고양이과 동물의 확산 과정. 그림=모리시오 안톤, <왕립학회보 비>

 

티베트 고원의 남서부에는 다양한 말, 영양, 여우 등의 화석이 출토된다. 당시의 기후는 건조했고 너른 평원과 히말라야의 가파른 절벽이 있는 경관이 펼쳐졌다. 히말라야 산맥이 차츰 솟아오르면서 동물들의 서식지는 나뉘었고 맹수들도 그들을 따라 흩어져 다양한 환경에 적응했다.

 

그런 점에서 티베트 고원지대는 대형 고양이과 포식동물이 기원해 분화한 곳일 뿐 아니라 그들의 먹이였던 다양한 초식동물이 다가올 빙하기에 적응할 훈련장이자 빙하기 때 피난처 구실도 했을 것이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비> 최근호에 실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Z. Jack Tseng et. al., Himalayan fossils of the oldest known pantherine establish ancient origin of big cats, Proc. R. Soc. B 2014 281, 20132686, published 13 November 2013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국호랑이는 언제, 왜 사라졌을까09.12.29 한겨레

일본인 엔도 20여년 추적 르포

마지막 포획·유일 표본 뒤쫓아 멸종사확인

총독부 호랑이 표범 곰 등 싹쓸이 사냥 기록

‘197912·12사태로 정국이 뒤숭숭하던 1980124일 석간 <동아일보> 사회면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산 호랑이가 나타났다-57년 만에 경북 산속서 등산객 촬영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서울에서 의상실을 하는 한 남자가 친구와 경주 부근 대덕산에서 등산을 하다가 절벽 위에서 한국산 호랑이 컬러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반세기만의 진객 백수의 왕이란 제목이 달린 사진엔 호랑이의 늠름한모습이 또렷했다.


산림청은 혹시 이 호랑이가 밀렵꾼에게 당할까 봐 긴급 보호조처에 나서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낭보는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코미디로 드러났다. 서울대공원의 벵골호랑이를 찍은 것임을 대공원 직원과 동물학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동아일보 오보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행

그런데 이런 해프닝의 전말을 모르는 한 여행 가이드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한국호랑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 이야기는 마침내 일본의 동물작가인 엔도 키미오한테 전달됐다. <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을까>(엔도 키미오 지음·이은옥 옮김/한국학술정보/15천원)는 한국 유력지의 오보를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 뒤 여러 해에 걸쳐 한국호랑이 관계자를 만나고 자료를 뒤진 엔도 키미오의 취재기록을 담은 르포이다.

 

호랑이는 단군 신화에서부터 등장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동물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 조상은 이런 호랑이를 좋으면서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 우러러보았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의 상징이었던 호돌이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기아타이거스의 마스코트가 친숙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호랑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호랑이가 남한에서 사라진 사실쯤은 모두 알 테지만, 마지막 한국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잡혔으며,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언제, 무엇(누구) 때문인지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남한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호랑이의 표본은 어디에 있으며, 그 호랑이는 어떻게 잡혔고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잡힌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호랑이를 좋아하고 이용하려고만 했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알려고 하지 않은 언론인을 포함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길이 2·5m, 몸무게 153확인일제의 무서운 폭력 사죄

이 모든 일을 20여 년 전부터 묵묵히 한 이가 바로 일본인 엔도 키미오 일본야조회 명예회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호랑이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6년 출간된 이 책은 지은이가 1908년 전남 영광 불갑산에서 1908년 잡혀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박제로 남아있는 한국호랑이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호랑이를 집중 추적한다. 또 서울대 도서관과 남산 국립도서관의 옛 자료를 뒤져 일본 강점기 때 호랑이 포획 실태에 관한 귀중한 통계자료를 찾아낸다.


호랑이도표

 

서툰 한국말과 친구인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에 기댄 그는 꼼꼼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 집요한 취재력으로 한국의 어떤 언론인도 해내지 못한 한국호랑이의 멸종사를 그려내고 있다. 상세한 포획기록이 남은 마지막 한국호랑이는 192110월 경북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됐다. 지은이는 이 호랑이에게 물려 큰 부상을 입은 김유근(타계)씨 등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김씨와 다른 마을 청년 몇은 추석을 앞두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를 진 채로 정면에서 달려든 호랑이의 공격을 당했다. 지게가 부서질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김씨는 지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마침 일본 왕실의 귀족이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미야케 순사는 도로공사를 하던 조선인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산등성이로 쫓기던 호랑이는 목을 지키던 포수의 총탄 두 발에 거꾸러졌다. 길이 2.5m, 체중 153의 큰 덩치였다. 호랑이 가죽은 일본 왕실에 헌상됐다. 당시 초등학생을 위한 일본말로 된 국어교과서에는 이 충성심 깊은 순사의 이야기가 실려있음이 확인됐다.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북돋기 위해 쓰인 것이다.

헌병 등 총동원, 호랑이 24 표범 136 429 늑대 228 마리 사살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있는 한국호랑이 표본은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주민들에게 잡힌 것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창으로 찔러 죽인 주민들은 이 호랑이를 들쳐메고 며칠을 걸어 부유한 일본인 상인들이 많은 목포에 도착해 우여곡절 끝에 팔게 된다. 다다미 상인 쇼지로는 이 호랑이를 구입해 일본에서 박제한 뒤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다.


그가 서울대 등에서 발굴한 조선총독부의 각종 통계자료는 충격적이다. 일제는 주민이나 가축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 늑대 등 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사업을 1910~1920년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펼쳤다. 피해 신고를 받으면 주민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사살하는 방식이었다. <조선휘보>1915년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한반도 전체에서 8, 1916년에는 일본인 1명 포함해 3명으로 기록했다. 일본인은 사냥하다 역습을 받아 사망했을 것이다. 1915년 늑대에 물려 죽은 사람이 113명으로, 호랑이나 표범보다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해수를 구제하기 위해 1915년 경찰과 헌병 3321, 사냥꾼 2320, 몰이꾼 91252명이 총 4220일 동안 동원됐고 호랑이 11마리를 죽였다. 그 밖에도 표범 41마리, 261마리, 늑대 122마리 등이 잡혔다. 이듬해에도 4만여 명이 동원돼 호랑이 13마리, 표범 95마리, 168마리, 늑대 106마리를 퇴치했다. 요즘이라면 한 마리가 나타나도 반가울 대형 포식동물이 해마다 수백 마리씩 사라진 것이다.


총독부 자료를 보면, 대덕산 호랑이가 죽은 뒤에도 남한의 호랑이는 계속 잡힌 것으로 나온다. 1924년 전라남도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포획됐다. 해마다 2~3명이 호랑이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도 나온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잡힌 호랑이는 8마리, 표범은 103마리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호랑이가 붙잡힌 곳은 모두 함경북도 등 북한이었다.

흥미로운 건, 남한에서의 호랑이 피해는 계속됐다는 것이다. 1936년 경북과 충북에서, 1942년엔 경남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보고돼, 이때까지도 남부지방에 호랑이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도 정2품 장수 두고 왕이 직접 챙기며 포획 독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말살한 책임은 일제에 있는 걸까.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이 책 기획편집 후기에서 호랑이 절멸의 책임을 일제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이 결정타를 가했지만, 이미 호랑이 개체수는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을 편 조선시대 동안 급감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적었다.

지난 15일 열린 국제 학술대회 호랑이의 삶, 인간의 삶에서 김동진 한국교원대 교수는 조선은 성리학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호랑이를 적극적으로 포획하고 살상해 사람과 호랑이 사이의 생태적 균형이 무너졌다고 밝혀다. 조선 초기 논으로 개발된 저습지는 호랑이가 주로 살던 곳이어서 대규모 호환이 일어났고, 백성 보호와 굶주림을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 체계적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적병을 베는 것에 버금가는 상을 내려 호랑이 사냥은 출세의 지름길이 됐고, 일정 수 이상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전국의 포호 성과를 국왕이 직접 챙겼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이 범에게는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착호갑사라는 호랑이 포획 전문 병종을 만들고, 호랑이 포획활동을 전문적으로 지휘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해당하는 장수인 착호장을 두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또 포획기술의 개발과 보급에도 힘썼다. 조선 후기에 도입된 조총도 범의 포획을 가속했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호랑이에서 늑대로 교체됐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제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살아남은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이항 교수는 호랑이와 전혀 무관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가 호랑이 보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은 없다며 호랑이 보전을 위한 관심과 참여를 촉구했다

 

임진왜란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몸보신 위해 조선호랑이 먹었다 17.7.24 중앙

16세기 일본을 통일한 뒤 조선을 침략, 한반도를 피비린내 나는 살육장으로 만들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수명연장을 위해 그가 먹었던 음식은 다름아닌, 조선 호랑이였다고 일본 주간지 '사피오(SAPIO)'가 최근호에서 보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처-doopedia>co.kr

.그는 조선 출병 때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조선 호랑이를 사냥해 고기를 소금에 절여 자신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전투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들에게 호랑이 사냥은 커다란 부담이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결국 이듬해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냥한 조선 호랑이 두 마리의 고기를 소금에 절여 토요토미에게 보냈다

 

당시 일본 무장들 사이에선 호랑이 고기가 기력을 보충해준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현저하게 쇠퇴한 도요토미로서는 호랑이 고기가 더욱 탐이 났을 터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쓴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라는 책에도 "1592년 일본군 무장이 부산 근처 기장성(機張城)을 점령해 도요토미에게 호랑이 한 마리를 보냈다. 드물게 보는 거대한 호랑이였기 때문에 도요토미는 교토의 천황에게 자랑했다. 그리고 호랑이를 수레에 싣고 장안을 돌아다녔다"고 기술돼 있다.

 

당시 공문서에도 "조선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을 목록 그대로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님은 기뻐하시며 드셨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특히 공명심이 강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몸보신을 위해 조선 호랑이 사냥에 열중했다고 한다. 도요토미는 이 뿐만 아니라, 규슈(九州)의 다이묘에게도 학과 백조를 진상하라고 명령했다. 학과 백조 고기 또한 호랑이 고기와 마찬가지로 기력 회복에 도움을 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 이처럼 도요토미는 자신의 체력과 정력강화를 위해 여러 식이요법을 썼고, 심지어 희귀한 새와 짐승 고기까지 섭취했다고 잡지는 전했다.

 

그토록 몸에 좋다는 호랑이 고기는 물론 간과 쓸개까지 먹었던 도요토미는 그리 오래 살진 못했다. 도요토미는 전쟁(정유재란)이 가장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8월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사망했다. 일본의 야생동물 생태연구가인 엔도 키미오(遠藤公男)조선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작은 몸집에 원숭이라고 불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풍모를 떠올렸다. 무엇인가 홀린 듯한 눈을 하고, 호랑이의 간()과 장()까지 탐내며 먹었던 것이 아닐까?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그는 61세에 죽었고 임진란은 끝이 났다.“

 

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벤트, 시식회까지 한 달 기록 14.4.11한겨레

조선 호랑이 포수 총동원 150명이 전국 뒤져, 호랑이와 표범 2마리, 승냥이 사냥

경성과 도쿄에서 요인 불러 호랑이 고기 시식회 열어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기여

 

» 원정대가 사냥한 호랑이 두 마리. 왼쪽이 한 마리를 사냥한 최순원, 오른쪽이 원정대 대표인 먀아모토. 그의 손에 사냥총이 들려있지만 실제로 사냥을 하지는 않았다.

 

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

루스벨트 그 무엇이랴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표범 덤벼라 늑대도 곰도 덤벼라

안 나오면 쏘겠다 오연발로

호랑이여 오라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동행 취재하게 된 기자는 아마도 흥분했던 것 같다. 한 기자가 지은 정호군가라는 노래는 19171110일 일본 도쿄역을 출발해 같은 해 1210일 다시 도쿄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한 원정대의 분위기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그 속내까지도 드러냈다.

 


<정호기>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만원

 

<정호기(征虎記)>는 말 그대로 조선 반도의 호랑이를 친 일본 원정대의 수렵기이다. 1918년 출간된 이 책은 사냥 행사 때 찍은 사진과 일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이 행사 후원자와 참가자에게 일종의 기념품으로 주기 위해 만든 비매품 한정판이다. 한국범보전기금은 일본의 한 인터넷 고서적 판매상에서 이 책의 원본을 구해 이번에 번역해 냈다.

 


j3.jpg » <정호기> 원본. 참가자와 후원자를 위한 한정본으로 만들었다.

 

사냥 행사를 주관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탄광회사와 선박회사를 소유한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원개발과 해운으로 떼돈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이 행사에 , 팔만 원의 큰돈을 들였다. 당시 쌀 한 석에 15원 정도였으니 거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3억원쯤 된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쌀 수탈로 쌀값이 폭등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던 3·1 운동 직전의 피폐한 상황이었다.

 

야마모토는 이 행사의 취지를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매일신보> 1917113일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은 이 책의 해제에서 이렇게 밝혔다. 겉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짐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동기는 개인의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의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18)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종종 식민지에서 맹수사냥을 벌이곤 했다. 20세기 초부터 조선 땅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커밋 루스벨트를 비롯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 등이 호랑이 사냥을 하러 왔다. 이들이 직접 사냥총을 쥐었다면 야마모토는 사냥꾼과 몰이꾼을 고용하고 자신은 지휘만 하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j8.jpg » 경성 남대문역의 원정대에 동행 취재중인 기자들.

 

사냥대는 24명의 사냥꾼과 약 150명의 몰이꾼으로 구성됐고 매일신보사, 중앙신문, 경성일보, 규슈일보사, 야마토신문 등에서 기자 19명이 동행 취재했다. 사냥꾼은 8개 반으로 나눠 백두산 등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 파견한 뒤 사냥물을 한 곳에 모았다. 요즘 많이 하는 팸 투어처럼 언론을 통한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 엿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3명을 뺀 사냥꾼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냥꾼이 모두 동원됐는데, 호랑이 100마리를 쏘아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로 꼽히던 강용근,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실이 공인한 엽사로 하루에 꿩 106마리를 잡은 기록을 갖는 이윤회 등이 포함됐다. 다른 포수가 화승총을 쓰던 시절이었지만 이 둘은 엽총을 사용했다.

 


j7.jpg » 원산에 집결한 조선인 11. 두 번째 열 왼쪽에서 네 번째 사람이 조선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인 강용근, 그 옆 머리에 하얀 두건을 두른 이가 백운학이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구식 단발 엽총으로 호랑이 같은 큰 맹수를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급소를 단번에 맞춰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를 따로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도 작용했다. 이들이 정호군의 핵심을 이뤘지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급급했지 일제에 이용당한다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멈칫거림도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원정대는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는 등 일제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지역 행정당국과 유지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j9.jpg » 호랑이 사냥 원정대의 모습.

 

j11.jpg » 함흥에서의 환영회 모습.

 

j16.jpg » 북청 성문밖의 환영 행사.

 

일본인 대부호의 엽기적인 사냥 이벤트는 큰 구경거리여서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해마다 사람 200명 이상, 가축 7000마리 이상이 호랑이 등 맹수의 피해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언론의 호의적이 보도가 이어졌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아 이들의 여망에 부응하려고 경쟁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j14.jpg » 포수 강용근과 흰옷을 입은 이윤회가 숙소를 방문해 사냥한 산양을 내려놓고 야마모토와 기념촬영을 했다.

 

포수 백운학은 함경북도 성진에 상륙한 뒤 남운령에서 열흘 만에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고 다른 세 명의 사냥꾼과 함께 산 정상의 목을 지키자 몰이꾼 10여 명이 산 밑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허리 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왔고, 백운학이 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세 발을 연달아 쏘아 잡았다.

 


j15.jpg » 호랑이를 잡은 백운학과 그의 반에 속한 포수들. 상으로 받은 술잔을 든 이가 백운학이다.

 

다른 포수 최순원도 호랑이를 잡았다. 그는 함경남도 죽암동에서 이틀 만에 상수리나무 숲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멀리서 쏘았으나 총에 맞은 호랑이가 바위굴에 숨어들었다. 그는 돌을 굴려 굴 입구를 막고 석공과 인부를 고용해 굴 옆에 구멍을 뚫은 뒤 사격을 해 호랑이를 죽였다.

 

총을 맞고 굴에 뛰어든 지 일주일 만에 호랑이가 잡힌 것이다. 야마모토는 최순원의 무용담에 감동해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선물로 주었다.

 


j12.jpg » 호랑이를 잡은 최순원(오른쪽)이 야마모토와 기념촬영을 했다.

 

함경도 일대에서 잡은 호랑이, 표범, , 노루, 산양 등을 기차에 산더미처럼 쌓은 기차가 123일 경성에 도착했다. 신문이 매일처럼 사냥 소식을 보도했기 때문에 이들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폭죽이 터지고 조선 음악대의 떠들썩한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카이젤 수염을 한 야마모토는 가슴을 펴고 환영 나온 장관들과 사진을 찍었다.”(70)

 

전라남도 능주 천태산에서는 일본인 포수 곤도가 이틀 만에 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호랑이 굴을 발견했고 이곳에 숨어있던 몸길이 2.85m의 거대한 표범을 쏘았다.

 


j17.jpg » 전남 능주에서 잡은 대형 표범과 사냥꾼들. 붕대를 감은 사람은 포획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다.

 

126일 사냥 원정대는 남대문 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기차 화물칸을 가득 채운 포획물은 호랑이 2마리, 표범 2마리, 반달가슴곰 1마리, 멧돼지 3마리, 산양 5마리, 승냥이 1마리, 노루 9마리, 기러기·청둥오리·꿩 다수였다.

 


j18.jpg » 여관 마당에 포획물을 쌓아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사냥감을 그저 가져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27일 경성에서는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주빈으로 경성의 명사 120명을 초대해 호랑이 등 포획물의 시식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호랑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양주를 넣어 익힌 요리 등을 맛나게 먹었다. 이 사냥이 정치적 퍼포먼스임을 보여준 대목이다.

 

호랑이 시식연 참석자들은 방명록에 서명을 했는데, 이 책에 언론인들의 서명이 실려 있다. 사냥 행사를 취재한 기자들의 서명 가운데 한국 이름이 하나 눈에 띈다. 정호군을 따라다니며 <매일신보>에 그 여정을 상세히 기사로 쓴 심천풍(18980~1946)이 그이다.

 

j4.jpg » 호랑이 고기 시식연의 언론인 방명록. 오른쪽에 한국 이름 심천풍이 보인다.

 

그의 본명은 심우섭으로 <상록수>를 쓴 작가 심훈의 맏형으로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j5.jpg » 일본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시식회 모습.

 

호랑이 시식회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12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추밀원 고문관, 육군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여명이 모여 일본에는 없는 이 신기한 고기맛을 보면서 대일본제국의 힘을 만끽했다. 당시 연회의 메뉴판에는 요리 순서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197)

  

 1.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푹 익힘, 토마토케첩으로 마리네 함)

 2. 영흥 기러기 수프

 3. 부산 도미 양주 찜(국물과 함께)

 4. 북청 산양 볶음(야채 곁들임)

 5. 고원 멧돼지 구이(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곁들임)

 6. 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7. 과일, 커피

 

그러나 호랑이 원정대 이야기는 시식회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범보전기금은 한국 호랑이의 실체를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한국 호랑이의 표본을 추적하던 중 야마모토 원정대가 잡아 내용물을 먹은 호랑이의 표본과 조우하게 된다.

 

야마모토는 호랑이를 비롯한 포획물의 표본을 만들어 자신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는 것이다. 표본관을 들른 이항 교수는 조선산이란 표지가 선명한 호랑이, 표범, 반달가슴곰, 승냥이, 산양, 멧돼지의 표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j1.jpg » 일본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의 호랑이. 원장대가 포획한 개체이다.

 

j2.jpg » 도시샤 표본관의 조선 표범 표본.

 

고향에서 이제 맥이 끊긴 호랑이, 표범, 승냥이를 머나먼 땅에서 만난 것은 감상적인 일이었지만, 실질적인 의미도 있다. 이항 교수 등 한국범보전기금 전문가들은 해제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멸절된 동물 중 포획한 사람, 장소와 시기, 과정 등 표본과 관련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현재까지 이 도시샤 고등학교의 표본들이 유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마 멸절된 동물에 관한 기록과 표본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정호군 대장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덕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 와서 호랑이를 사냥해 기록과 표본으로 남겨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리를 씁쓸하게 했다.” (53) 

 

 

일본군 호랑이 시식행사는, 조선 침략 자축행위 16.2.28 미디어오늘

호랑이는 식민지배와 분단의 희생양이다. 일본 기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정호군(征虎軍)’이 보여준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혼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사냥해 사실상 씨를 말렸고, 한국전쟁으로 생긴 휴전선은 만주에 사는 호랑이들이 백두대간을 타고 지리산까지 이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반도는 호랑이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라 호랑이가 많았지만 현재 한반도에는 야생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는 왕, 표범은 여왕을 상징한 것을 보면 숭상의 대상이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붙인 양탄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 잡지 '라이프' 지가 1951년 보도한 명성황후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표범가죽카펫.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가족사진 속에 호피가 깔려있다. 현재 이 호피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일제는 조선인들이 아끼는 호랑이를 사냥했다. 1차적으로는 일본인(내지인)이 한반도에 정착하는데 가장 무서웠던 존재가 호랑이였기 때문에 해수(해로운 맹수)구제사업을 진행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포호정책(호랑이 포획정책)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야마모토가 호랑이를 사냥해 왕실에 바친 것을 보면 정호군의 활동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야마모토는 왜 조선의 호랑이를 모교에 기증했을까?

야마모토의 정호군19171110일부터 한 달간 조선의 명포수를 고용해 한반도 전역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서 2마리의 대호를 잡았다. 야마모토는 한 마리를 당시 일본 왕태자에게 기증했고, 다른 한 마리는 자신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에 기증했다.

 

이에 대해 김영준(혜문 스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는 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조선인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믿기도 했고, 조선의 지도자는 자신을 호랑이로 비유했다호랑이 사냥은 대동아공영권을 미래세대에게 알리는 정치적 행위라고 말했다.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왕태자와 자라나는 세대에게 조선의 상징인 호랑이를 잡아 보낸 것이다.

 

22일 일본 교토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호랑이 박제가 혜문스님을 통해 국내 언론에 공개됐다. 호랑이 길이는 3m, 높이 80cm 가량으로 꼬리만 1m가량이다. 사진=혜문스님





22일 일본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새끼 호랑이 뼈 골격이 공개됐다. 조선호랑이 여부는 확실치 않다. 사진=혜문스님

호랑이 사냥의 문제가 동물의 멸종 차원을 넘어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이었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영국인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할 때 사자를 사냥한 것이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의 생활기반인 버펄로를 사냥한 것과 같은 얘기라며 임진왜란 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침략해 호랑이 고기를 먹고, 가죽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야마모토 역시 호랑이 시식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시식회는 191712월 서울(경성) 조선호텔과 도쿄의 제국호텔 등 두 차례 진행됐다. 왕이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 옆 조선호텔과 제국호텔에서 호랑이를 먹었다는 건 조선침략을 자축하는 행사라는 게 김 대표의 해석이다.

 

19171220일 일본 제국호텔에서 진행된 호랑이 시식회. 이날 일본 내 주요인사 200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습격할 때 암호명이 토라토라인데 이는 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이라며 동아시아에서는 대부분 호랑이를 좋아하고 숭상하는데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고,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일본 스모선수들이 호랑이 그림을 달고 나오는 것,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 다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호랑이 반환의 의미 동물로 푸는 동북아 외교

호랑이를 잡은 사람은 뒤가 안 좋다는 미신이 있다. 김 대표는 우스갯소리지만 야마모토가 엄청난 부자였는데 호랑이를 잡고 나서 1940년대 이후 쫄딱 망했는데 조선호랑이의 복수가 아니냐고 말했다. 아직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호랑이 박제가 일본에 있다는 건 민족갈등의 불씨가 될 가능성도 있다.

 

수호(호랑이와 표범의 잡종)를 포획한 정호군 제7반과 부대원들이 능주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수호에게 머리를 다친 몰이꾼(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수호 가까이 앉아있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김 대표는 22일 일본 도시샤 학교 법인에 야마모토의 정호군이 사냥해 기증한 호랑이와 표범 박제 반환을 요청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김 대표는 발전적인 한일관계와 세계 평화를 위해 호랑이는 이제라도 한국에 반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의 소망은 호랑이 문제로 동북아의 외교를 풀어가는 것이다. 그는 일본이 호랑이 박제를 반환하면 그 호랑이가 잡힌 함경도에 주면서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도 있다사실 호랑이는 시베리아부터 백두대간을 오가는 동물인데 휴전선으로 그 통로가 막혀있다고 말했다.

 

호랑이 생태복원을 이유로 갈등으로 치닫는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에 남북정상회담하러 북한 가면서 호랑이 그림을 구매했다그만큼 호랑이 그림 구입은 자연스러운 한국인의 정서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호랑이가 자연스럽게 백두대간을 타고 지리산까지 내려오게 하려면 북한 뿐 아니라 러시아·중국과도 협력이 필요하다.

 

일제가 남긴 흔적은 호랑이와 표범의 멸절된 것만이 아니다. 김 대표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선 사슴이 정력에 좋다고 다 잡아먹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시카(sika)’라는 일본 사슴을 풀어놓은 것이라며 북한에서는 조선 사슴농장이 있어 협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인제군과 함께 조선사슴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문화재반환운동 10, 모든 것이 제자리로

혜문스님으로 더 유명한 김 대표는 2006년부터 문화재 환수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유학 중 일본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문화재 환수를 요청해봤는데 이에 성공한 뒤부터다. 2011년 일왕이 소장하던 조선왕실의궤환수도 그의 노력 덕분이었고,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호랑이와 표범을 보러가는 것 역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의 삶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 18일 국회 의원회관에는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주최한 20만 마리 종이학 전시회가 열렸다. 현재 일본 오쿠라 호텔에 있는데 석탑이 반환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수도권 47개 학교 학생들이 종이학을 접은 것이다. 석탑의 원래 위치는 평양이다. 역시 한일 간의 문제이자 남북문제인 것이다.

 

문화재를 통한 발전적인 한일관계의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그는 “10여년 전에는 일본 오타니 고등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재일본거류민단에 호랑이 박제를 기증했고,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있는 호랑이 박제 역시 일본에서 기증한 것이라며 내년이 야마모토의 정호군이 호랑이를 잡아간지 100년째인데 내년까지는 꼭 호랑이 박제가 돌아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베리아 호랑이 사냥한 러시아 밀렵꾼 법정서 17800만원 벌금형 받아 17.2.4 중앙

 

[사진 시베리안타임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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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국제 멸종 위기 종인 시베리아 호랑이를 사냥한 밀렵꾼이 1억원이 넘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일 러시아 매체 시베리안타임스에 따르면 에브게니 로마노브(52) 등 밀렵꾼이 시베리아 호랑이 6마리를 사냥한 혐의로 법정서 155000달러(17800만원) 벌금형 받았다. 현지 환경 단체는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내린 벌금액 중 가장 큰 규모라고 말했다. 로마노브는 호랑이 뿐 아니라 곰과 독수리, 사슴도 사냥한 혐의도 받고 있다.

 

[사진 시베리안타임스 캡처]

.국내 산림청은 2009년부터 강원도 영월에서 흘러드는 운곡천과 봉화 주실령에서 내려오는 두내리천이 만나는 곳에 5179크기 백두대간수목원을 조성해 시베리아 호랑이를 들여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진 시베리안타임스 캡처]

   

전 세계 야생호랑이 얼마나 남았을까? 17.2.20 중앙



야생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모습 [세계자연기금]

.100년 전 10만 마리에 이르렀던 전 세계 야생 호랑이 숫자가 이제는 4000마리도 남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자연기금(WWF)은 지난해 말 현재 전 세계 야생호랑이 숫자가 3890마리로 집계됐다고 21일 밝혔다. 이는 2010년 조사된 3200마리보다는 다소 증가한 것이지만 불과 100년과 비교하면 97%가량 급감한 상태다.

 

호랑이 뼈로 만든 약재가 밀렵을 부추기고 있다. [세계자연기금]

.특히 지난해 인도에서만 76마리가 밀렵으로 희생될 정도로 야생 호랑이들의 생존은 여전히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남한에서는 이미 멸종된 백두산 호랑이(시베리아 호랑이)는 러시아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 북한 등지에 440여 마리 미만만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WWF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대규모 인프라 개발 계획이 야생 호랑이의 서식지를 위협하고 있고, 호랑이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도로·철도·운하·송전선과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등 대규모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WWF이러한 개발 프로젝트가 호랑이 서식지를 조각내면서 사람과 호랑이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고, 밀렵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인간과 야생 호랑이들이 공존을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개발 방식 취하지 않을 경우 중국·미얀마·태국· 말레이시아 등지에 사는 500마리의 호랑이가 10년 내 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0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러시아·중국 등 13개 국가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호랑이 정상회의가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글로벌 호랑이 보호 캠페인 'TX2'가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10년부터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야생 호랑이 개체 수를 두 배로 늘리자는 캠페인이다.

WWF의 마이크 발처 호랑이 프로젝트 리더는 호랑이는 아시아 문화 기반의 일부이고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세계의 유산이라며 앞으로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평가할 때 호랑이와 자연환경의 보존상태를 주요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사의 안뜰] 300년간 이어진 호랑이와 군병들의 처절한 전투 17.6. 11 세계일보

<45> 범 잡는 착호갑사’ / 집채만한 범 출몰닥치는대로 횡포 / 사람·가축 400두 죽인 백호도 있어 / 국가적 대응 필요군병 전담팀 조직 / 즉시 현장에 투입·조총으로 사투 / 해수구제책에 조선 호랑이 멸종

 

도심에 나타나는 야생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불청객이다. 최근에는 주택가로 내려와 소동을 일으키는 야생 멧돼지가 뉴스에 단골로 오르내린다. 멧돼지는 위협적인 동물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는 드물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하지만 멧돼지가 맹수인 호랑이로 바뀐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만약 호랑이가 지금의 멧돼지처럼 도심 곳곳에 출몰한다고 가정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속출할 것이다. 아마도 전국에 비상사태가 내려질 것이고, 국민들은 동시다발로 테러를 당한 듯 엄청난 패닉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과거의 우리 선조들에게 당면한 현실이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석사 감로도(1649)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것을 호환(虎患)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호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중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일 년의 절반을 호랑이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절반은 호랑이에 죽은 사람 문상하러 다닌다.” 중국 사람이 보기에도 조선에는 호랑이가 많았고 피해도 컸다는 이야기다. 호환이 심할 때는 한 지역에서 연간 수백명이 호랑이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렇듯 호환은 민생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였고,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의 대응을 필요로 했다


 

호랑이는 1719세기 산신도와 민화, 판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랑이에 맞선 군병들

옛 기록에는 호랑이를 죽이거나 포획하는 것을 착호(捉虎)’라고 했다. 조선 전기에는 호랑이 잡는 특수 군인인 착호갑사(捉虎甲士)와 착호장(捉虎將)을 두어 대응하였다. 그러나 활과 창만으로 무장한 이들은 오히려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냥감 신세가 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에는 호랑이를 잡는 주체와 방법이 바뀌었다. 훈련도감의 군병들이 호랑이를 제압하는 선봉에 서서 맹위를 떨쳤다. 이후 약 300년간 호랑이와 군병들이 벌인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훈련도감 군병들의 착호에 관한 기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훈국등록(訓局謄錄)’, 즉 과거 도성의 수비를 맡았던 훈련도감에서 작성한 업무일지에 자주 나온다.

 

착호는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새로운 임무였고, 이들은 호랑이가 나타나면 즉시 현장에 투입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생산된 조총이 자신을 지키고 호랑이를 퇴치하는 믿을 만한 무기였다. 조총은 재래식 무기보다 살상력이 강하고 명중률이 높았기에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호랑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구한말 서울 외곽에서 카메라에 잡힌 호랑이 사냥꾼들. 한 손에는 곰방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영국인 허버트 폰팅 촬영

 

호환은 재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호랑이는 태조 1(1392) 12월 자에 기록된 도성 안에 출몰한 호랑이다. 한양의 백성들과 첫 대면을 한 이 호랑이는 한양천도 이전부터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에 살고 있었다. 이곳의 터줏대감이던 호랑이들은 도성 안을 빈번히 출입하였고, 심지어 궁궐 안까지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양 어디든 호환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남장사 소장 감로도(1701)

 

호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단연 백성들이다. 인명피해에 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호환이 심한 해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선조 4(1571) 10, 하얀 눈썹을 한 늙은 백호(白虎)가 지금의 고양시 등지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 400여 두()를 죽였다고 했다. 지금 들어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에 분노한 선조는 호랑이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서 대규모의 사냥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그 이후의 상황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호랑이 잡는 매뉴얼

조선 전기에는 착호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호랑이 잡는 매뉴얼인 절목(節目)을 자주 만들었다. 일종의 시행세칙인 절목에는 호랑이 퇴치에 관한 최신 정보들이 소개되어 있다. 예컨대 사람이 직접 호랑이와 대면하지 않아도 될 함정과 궁노(弓弩), 기계 등으로 호랑이 잡는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또한 지방에서는 착호인(捉虎人)을 지정해 두었다. 이들은 평시에 생업에 종사하다가 수령이 소집령을 내리면 바로 호랑이 포획에 나서게 하였다. 이를테면 호랑이를 퇴치할 예비군제도를 운영한 셈이다.

 

시행세칙에는 호랑이를 잡는 군병들이 경계해야 할 항목도 나와 있다. 예컨대 호랑이를 쫓는 추격전이 벌어질 때면 군병들이 논밭을 망가뜨리기도 했고, 민가에 머물며 백성들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끼쳤다. 이렇게 되면 군병의 폐해가 맹호보다 더 심하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따라서 정조 임금은 도성 안에 호랑이가 들어오면 도성 밖 먼 곳으로 몰고 나간 뒤 거기에서 잡도록 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포상과 실적

훈련도감 군병들이 호랑이를 잡으면 후한 상을 주었다. 착호는 군병들의 당연한 임무일 텐데, 왜 별도의 상을 주었던 것일까. 시상은 착호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착호는 위험을 무릅쓰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포상이 없거나 미약하면 그 실적도 매우 낮았다.

 

그러나 포상이 잘 이루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정조연간의 일이다. 죽은 호랑이를 앞에 두고 훈련도감과 금위영의 군사들이 공적을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다. 서로가 자신들이 먼저 총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는 주장이다. 조총이 거의 동시에 발사될 경우 누가 먼저 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에 정조는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동일하게 상을 주어 애매한 상황을 매듭지었다. 이후에는 호랑이에게 재방, 삼방까지 총을 쏜 자들에게만 상을 주는 규정을 만들었다. 삼방 이후에 맞힌 것은 호랑이의 숨이 이미 끊어진 상태이므로 시상에서 제외하였다.

 

호환의 공범

일제강점기의 통계자료를 보면서 베일에 싸였던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조선 팔도를 호환의 공포로 몰아넣은 주범은 호랑이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호랑이 외에 다른 공범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표범으로 확인된다. 한반도에 호랑이와 표범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사가 매우 오래다. 놀랍게도 선사시대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에도 호랑이와 표범으로 보이는 동물이 함께 등장한다. 줄무늬는 호랑이, 점무늬는 표범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통계를 보면, 표범의 개체 수가 호랑이보다 훨씬 많았다. 예컨대 1919년에서 1924년까지 6년간 전국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포획한 수치를 보면, 호랑이가 65마리인데 표범은 385마리에 달했다. 표범이 호랑이의 6배에 이른다.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면 표범의 개체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호환의 혐의를 호랑이 혼자서 모두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영화 대호.

 

호랑이, 역사의 막을 내리다

훈련도감이 해체된 1882년 이후 약 30년간은 민간의 전문 사냥꾼들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호랑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 시행한 해수구제(害獸救濟)’책에 따른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호랑이의 개체 수는 멸종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약 300년간 도성을 지킨 훈련도감 군병들의 삶은 최근 훈국등록의 연구로 인해 되살아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착호는 군병들이 목숨을 담보로 호랑이와 사투를 벌였던 생생한 이야기들이다.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민생치안을 위해 호환은 국가에서 대응하였고, 그 중심에 훈련도감 군병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착호에 관한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들을 들추어 보자면 도심에 출몰하는 멧돼지가 순간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호거산(虎踞山) 이름 붙은 운문산군이라면 호랑이 복원할만 16.11.2 경상일보

2부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7)운문산 호랑이 사냥꾼

 

운문사 경내 호랑이 벽화. 황소만한 호랑이를 탄 산신령이 유유자적 산속을 향하고 있다.

 

1917년 동짓달, 기세 좋게 퍼붓는 눈발을 뚫고 운문령(雲門嶺)을 오르는 사냥꾼이 있었다. 구만산, 억산, 운문산, 가지산, 쌍두봉의 된비알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을 끈기 있게 추적해온 사냥꾼의 눈깔은 뒤집혀 있었다.

 

고기 맛이나 볼 요량으로 산짐승을 쫓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하루에 수 백리를 이동하는 호랑이를 따라잡기란 여긴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호랑이의 보폭이 80에 달한다면 무명 홀대바지에 각반 찬 사냥꾼의 걸음새는 반도 되질 않았다.

 

운문령 아래 생금비리에서 호랑이가 발톱으로 할퀸 나무를 발견한 그는 나무둥치에 코를 대 냄새를 맡아 보았다. 오줌냄새가 짙은 것으로 봐선 호랑이는 얼마 전에 지나간 것으로 여겨졌다. 부지런히 추적하면 놈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랑이 오줌에는 다른 짐승이 공포감을 느낄 고유의 물질이 들어 있었다. 여러 짐승들이 다녀가는 이런 나무를 표시목(標示木)이라 하는데, 야생 우체통 역할을 하였다. 호랑이가 표시목에 영역 표시를 하고 가면 다른 짐승들이 이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피해가는 것이다.

 

그는 발자국과 배설물만 보고도 짐승을 파악할 수 있는 백전노장 사냥꾼이었다. 멧돼지 똥은 건조하고 억센 편이고, 항문이 큰 반달곰 똥에는 열매 씨가 섞여 있었다. 육식성인 담비나 삵, 오소리, 족제비 똥은 가느다란 반면에 호랑이 똥은 씨알부터 월등히 굵었다. 홍두깨 굵기의 호랑이 똥에는 잘게 부순 뼈 조각과 털 그리고 잡초 따위가 섞여 있는데, 잡초는 소화촉진을 위해서였다

 

그는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 출신이었다. 착호갑사는 인명과 가축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관군으로서, 이들은 조선시대 국난(國難)이 발생했을 때 전투의 최선봉에서 싸운 최정예 대원들이었다. 청산리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홍범도 장군도 착호군 출신이었다. 조선 땅이 완전한 왜인 속국이 되면서 분개한 그들은 의병이 되거나,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목매를 치는 홀치기로 입살이를 해야 했다.

 

여우네 봉놋방을 지나 운문 삼계마을에 도착한 그는 호랑이를 모신 산신각에 들러 예를 올렸다.

그를 알아본 동네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산간오지 논 한 마지기 값이나 마찬가지인 송아지를 호랑이에게 잃어버린 노인은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미치광이 풋나물 캐듯 늘어놓았다. “언양장에서 산 송아질 몰고 생금비리 부자바위를 내려오는데 겁 많은 송아지가 발굽을 떼지 않는 기라요. 혹시 호랭이가 노리는가 해서 바짝 긴장을 했지요. 호랭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호랭이가 번개처럼 덮친 기라요. 들고 있던 횃불로 쫓았지만 송아지 목덜밀 문 놈이 나한테도 달려들려 해 내뺄 수밖엔 없었단 말임더.”

 

운문령 비알에는 소뿐만 아니라 소장수까지 실종되는 호사가 잦았다. 향 좋은 소나무를 집중 벌목하는 산판꾼과 화전민이 늘어나면서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가축과 인명을 노리는 종종 일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인 총포 소지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이라면 호랑이를 척살하던 조선 관군 착호갑사가 출동을 한 것이다.

 

그는 송아지를 물고 달아난 운문산 호랑이 추적에 나섰다. 호랑이 발자국은 운문산 북능 배너미재로 나 있었다. 호랑이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일자(一字)로 되밟는 습성이 있었다. 다 큰 호랑이의 발자국 크기는 20~30로 성인 손바닥 크기이다. 앞발가락은 4개이고 뒷굽 패드는 간장종지처럼 둥글다.

 

운문산 북능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라는 말은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억산, 범봉, 운문산, 가지산 그리고 지룡산(일명 복호산)에 에워 쌓인 무인지경 계곡은 지리에 밝은 토박이라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깊고 깊은 심심(深深), 신비한 학심(鶴深), 길 잃은 오심(奧深)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냥꾼들조차 출입을 꺼려하였다.

 

배너미재에 도달할 무렵엔 해가 그렁그렁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배너미재 아래에 있는 외딴 움막으로 찾아갔다. 게딱지 움막에서 나온 산판꾼이 그를 알아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간이 배밖에 나온 나으리시구만.” 그가 착호갑사 시절 몰이꾼으로 동원되었던 인물이었다. 친일 순사 등살에 들볶이다 못해 산으로 내몰려 산판을 굴러다녔다.

 

움막 모닥불 옆에 앉은 두 산중호걸은 산중생활 이야기를 나눴다. “엊그제 학소대 방구(바위)에서 마루타(통나무) 내릴 때였소. 바위틈에서 화덕 같은 범불이 새파랗게 노려보기에 놀라 자빠진 적이 있었소. 불을 켠 눈깔이 하나 됐다가 둘 됐다가 그랬거든요. 부리부리한 눈빛이 가까이서는 빨간 두 개, 멀리서는 파란 하나로 보였소. 도사견보다 큰 중개만 하더군요.” 담력 좋은 산판꾼 호랑이 목격담을 늘어놓았다.

 

도사견만한 놈이라면 내가 쫓는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요. 호랑일 보고 백수의 제왕이라 하지 않소. 호랑이는 정면승부를 합니다. 산중에서 자기보다 강한 짐승이 없으니깐 요. 보통사람은 이빨을 드러내고 우르릉거리는 놈을 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질금질금 싸죠. 호랑이 사냥은 녀석이 정면에서 덮칠 때를 이용해서 한 방에 조져야 합니다. 두 번 기회가 없죠. 한 순간에 결판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내 목이 날아갑니다.”

 

여긴 호랑이 소굴이요. 학소대 도랑물에 손 씻고 있는데 요강만한 돌이 떨어지기에 올려다보니 누런 호랑이었소. 산신할배가 밥을 안 줬는지 비쩍 마른 놈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어요. 운문산 산판꾼들 언제 호랑이 밥이 될지 몰라요.”

 

그때 움막 밖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호랑이 포효가 들렸다. 지축을 흔드는 호랑이 우짖는 소리를 들은 사냥꾼 눈빛에 서릿발이 섰다. “저 놈은 가까운 데 있어요. 호랑이 소릴 듣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소.” 사냥꾼은 총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아는 길도 밤길은 걷지 말아야 했소. 날이 밝으면 가시죠.” “호랑이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소. 아침이면 벌써 백리 밖에 있을 놈이요.” 산판꾼의 만류에도 사냥꾼은 여울진 골짜기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갔다. “어흐흥~어흐흥~” 가뜩이나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호랑이 울음소리에 부러졌다. 어둠이 짙은 숲속에서 들리는 호랑이 울음소리는 공포에 떨게 했다.

 

제 아무리 심장에 털 난 사냥꾼이라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호랑이 사냥은 두려웠다. 오룡산 이 포수는 호랑이 발길질에 허벅지가 으스러졌고, 명포수 소리를 듣던 강 포수는 범귀신이 씌어 내가 범이다고 헛소리를 치며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반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어둠이 짙은 숲속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는 얼른 몸을 숨겼다. 밤으로 활동하는 호랑이는 으슥한 곳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는 나무둥치를 은폐삼아 얼른 허리춤에 꿰찬 탄띠를 꺼내 엽총에 장전시키고 주변을 살폈다. 날카로운 눈빛은 거랑 너머에 엎드린 호랑이와 마주쳤다. 이 녀석은 운문령 근동을 돌아다니며 활개를 치던 놈이 분명했다. 칠십 관이 넘는 멧돼지와 혈투를 벌이는가 하면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물어 죽였다.

 

소리 없이 움직이던 호랑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놈이 뒤에 있으면 위험해.’ 속으로 뇌는 찰나 놈은 어느새 그의 뒤에 있었다. , 앙 소리를 내는 놈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때를 놓칠세라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호랑이는 그의 팔을 단숨에 물어 뚫고 거꾸러졌다. 걸레짝처럼 너덜거리는 팔뚝으로 엽총을 끌어안고 호랑이를 향해 정신없이 총질을 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신성시했다. 호사가 많은 운문산 주변의 지명들은 범상치 않다. 무인지경 운문산 산군을 싸잡아 호거산(虎踞山)이라 불렀고, 이웃한 형제봉을 범봉(虎峰), 운문사 앞산인 지룡산을 복호산(伏虎山)이라 칭했다.

 

운문산이 거느린 산군은 호랑이가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주변 관망이 용이하고 새끼를 키우기 좋은 호젓한 굴도 여러 군데이다. 따라서 무인지경 운문산군(雲門山群)이라면 범을 복원할 만하다. 운문사 경내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처럼 호랑이를 타고 산책을 나설 그날을 응시하고 있다./배성동 소설가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 산척을 아시나요 16.01.28 대구일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부대 주축되기도 민생 파수꾼그들의 실체 각종사료 통해 살펴

산척(山尺), 산행포수, 산척포수, 산포수, 탁월한 숲속의 사람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호환이라는 말이 그저 아이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말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조선시대에는 구한말까지도 호랑이는 일상적으로 출몰하여 백성뿐만 아니라, 도성 안의 왕과 위정자들까지 괴롭히는 공공의 적 1였다.

그리고 그 호랑이를 잡던 호랑이 사냥꾼, ‘산척이라 불리던 직업사냥꾼은 공식적으로 역사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민생의 파수꾼으로,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전쟁의 영웅으로 크나큰 활약을 했다.

 

목궁으로 무장한 산척’, 이후 조총으로 무기를 바꾼 산행포수’, 이 전문사냥꾼은 어떠한 이들이었을까? , 그토록 큰 활약을 했던 이들은 어떻게 하여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일까?




산척(山尺)조선의 호랑이 사냥꾼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민생의 파수꾼이었고 전시에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창 우현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경상도 의병 부대는 산척들이 주축이었고, 진주성 전투에서도 산척들은 매복 작전으로 왜군을 패퇴시켰다. 평소 무예로 단련된 그들은 전장에서 정규 군인보다 뛰어났다.

 

책은 호랑이와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구했던 산척의 실체를 각종 사료를 통해 살펴본다.

산척이 누구인지, 그토록 큰 활약을 했던 이들이 어떤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는지 등에 대해 알려준다.

 

1910년대 호랑이를 잡기위해 설치한 덫.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에 따라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의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한반도는 호랑이들의 주 서식지였다. 특히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호환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왕조 개창 직후인 1402년 경상도에서만 1년에 수백명이 물려 죽는 호환이 발생했다. 때문에 이 시기 전문적으로 사냥을 업으로 하는 산척이 생겨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산척은 백정의 한 부류이다. 백정은 떠돌아다니며 가죽을 다루거나 공연을 하기도 하고 도축업을 했던 집단으로 그들은 대부분 본업 말고도 사냥에 능했다. 이들은 전문사냥꾼답게 호랑이와 곰, 표범과 같은 맹수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호랑이를 잡는 일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호환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호랑이에게 사람들이 입는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실제 백성들은 호랑이 때문에 밤에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기(18971012~1910829) 대한민국을 여러차례 여행했던 비숍은 자신의 여행기에 해가 저문 뒤에 여행하는 것은 한국의 습관에 위배된다.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프랑스인 샤이롱 베도 밤의 외출은 길가에 있는 더러운 개울에 빠질 염려도 있지만 그보다 기아에 못 이겨 특히 겨울철에 마을의 중심지까지 들어오는 표범 또는 호랑이까지도 만날 위험이 있는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척들은 화살이나 조총, 그물 등으로 호랑이를 포획해 백성들을 지켰다. 병자호란 때는 왕의 호위무사들로 활약했고 구한말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에 출몰한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의병부대로 활약했다.

 

그동안 너무 쉽게 얻은 승리로 정신력이 해이해진 프랑스군은 대포도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을 공격했다가 호랑이 사냥꾼, 즉 산행포수의 매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단 한번의 전투에서 프랑스 원정군의 분견대는 3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하던 산척들은 1907년 일제가 총포화약류단속법을 시행해 총기류를 제한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일제가 의병 활동을 막기 위해 총기류를 빼앗으면서 총으로 사냥을 하는 산척들도 더 이상 사냥꾼으로서 생활을 유지하며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속법으로 생계를 잃은 산척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깡그리 사라져버리게 된다.

 

산척들이 사라지면서 호랑이 역시 구한말에 자취를 감춘다. 이는 지속적으로 호랑이 포획 작전을 벌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호랑이 가죽 수요 증가에 따른 시장의 힘에 의해 멸종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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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판 '선만동물통감(鮮滿動物通鑑)'에 조선호랑이에 대한 얘기가 실려있다.

 

조선시대 호랑이잡이는 주로 함정을 판 뒤 함정 밑에 개나 돼지를 미끼로 놓아두면 이 미끼를 먹으러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호랑이를 창으로 찔러잡았다. 이때 큰 호랑이는 관아에서 상으로 40(40가마)을 주고 중간 크기는 20, 새끼는 10량을 주었다. 호랑이는 불과 대와 꽹과리 소리를 싫어하므로 호랑이 몰이를 할때는 꽹과리를 치면서 쫓거나 죽창과 횃불을 들었다.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드물고 술취한 사람과 숨을 거두지 않은 사람은 잡아먹지 않는다. 그래서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 청나라 때는 호랑이 가죽이 조선 공물 중의 하나였다. 호랑이뼈는 호골주나 호정주(虎精酒)로 쓰이고 특히 앞다리는 힘이 좋아 호골고나 고요로 쓰여 버틸 것이 없다. 호랑이뼈는 벽사용으로 대문에 걸어두기도하고 이빨과 발톱을 노리개로 차고다니면 악귀가 범하지 않는다는 민간신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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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635번 등장

 

조선시대 호랑이 피해

조선시대에는 교통사고만큼 많았던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호환이었다고 합니다. 호랑이와 범이 얼마나 많았던지 멧돼지만큼 흔했던 산짐승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호랑이 수가 많아진 건 고려시대때 불교사상에 따라 호환을 당하여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복수를 하거나 살생을 하지 않은게 한 원인이었다고. 그래도 고려시대때는 조선시대때만큼 호환이 극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의 영역을 어느정도 지켰다고.

 

하지만 조선에 들어서며 우리나라는 농업중심국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래서 습지와 평야지대를 적극적으로 개간했고,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며 야생동물들과 크게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 중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일이 극심해서 나라의 큰 골치거리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호환기록만 해도 700건이 넘는데 특히 영조대에 이르면 호환의 피해가 가장 극심해 호랑이에게 먹혔다는 기록만 100여건에 이른답니다. 영조 10년에는 매일매일 호환에 관한 장계가 전국에 걸쳐서 올라왔고,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총계가 140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영조 11년에는 영동지방에서만 물려죽은 사람이 40인에 이르렀고 급기야 영조 27년에는 경북궁안까지 호랑이가 들어왔다고 하네요.

 

호랑이가 너무 많아서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오는 일은 종종 있었는데. 인왕산에 사는 호랑이가 내려와 궁궐에 새끼를 까는 일도 있었다고...물론 서울장안에서 어슬렁거리며 사람을 물어가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고 합니다. 서울이 이모양이니 지방의 피해는 얼마였겠습니까. 또한 가축의 피해도 무시못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조선시대때 사람들은 호환이 두려와 산을 오르내리는 것도 사람들끼리 몰려서 다니고, 밤에는 절대 산을 타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웃마을에 드나드는 것도 조심스러웠다고. 특히 한국의 호랑이는 피맛을 알아버려 인간을 사냥감으로 생각했고 성격도 포악해 민가에 들어와 방문을 부수고 사람을 물어가는 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강원도에서는 호환으로 마을이 사라져버린 곳도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강원도에 화전민으로 숨어들어온 사람들의 피해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호랑이에게 죽으면 창귀가 된다 하여 창귀에 대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특이한 형태의 돌무덤을 만들었습니다.뼈를 화장한데다 돌을 쌓고 그 위에 시루솥을 뒤집어 얹고 칼이나 물레를 꽂아뒀는데 이걸 호식총이라 부르며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무덤이 전국 산을 통틀어 몇천개가 된다고 합니다. 남아있는게 이정도니 실제 피해는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봅니다.

 

[호식총]

 

조선에서는 고려때와 달리 호환에 적극적으로 싸웠는데. 호랑이 사냥부대인 '착호군'을 만들어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사냥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특수정예군으로 위세가 하늘을 찌를정도였다고 하네요. 조선초기에는 40명이던 착호군이 나중에는 400명이 넘어가니 이들의 특권의식도 대단해 술먹고 자신이 착호군이라며 행패를 부리는 일도 빈번했지만 포도청과 군관도 착호군은 함부로하지 못했다합니다.

 

하지만 착호군이 아무리 호랑이를 잡아도 호환은 끊임없이 발생했고 나라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노비가 호랑이를 잡으면 노비를 면천해주고 평민이 호랑이를 잡으면 세금을 평생 면제해준다고 나라에서 발표를 하니 너도나도 호랑이를 잡아보겠다고 오히려 피해를 키웠다고.

 

호랑이 사냥에 포상금이 두둑하니 호랑이포수들 숫자도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의 호랑이포수들은 실력도 뛰어나고 용맹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외국에서 온 사냥꾼이 한국의 포수들이 구식총으로 호랑이 잡는 걸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합니다.

 

나라의 여러 노력으로 호랑이 피해는 점차 줄어들고, 늘어나는 개간에 본래 늪지대와 평지에 살던 호랑이들은 쫒겨쫒겨 전라도 섬지방이나 아주 깊은 산속, 백두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라도 진도에는 특히 호랑이가 많이 살아 집집마다 진돗개를 키우고 부엌에 개구멍을 만들어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오는 것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진돗개가 용맹했지만 호랑이 앞에서는 앓는 소리만 냈다고 해요. 너무 무서워서. 진도에 호랑이가 많이 살때는 10마리도 넘게 살았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백두산으로도 많은 수가 밀려올라갔는데 백두산에 숨어든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백두산 인근에는 포수들이 아주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이르자 조선인에 대한 총기 도검 금지령을 내려 이들의 총과 검을 모두 수거해가 버리는데, 이것때문에 줄어든던 호랑이 숫자가 늘어 호환피해가 다시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특히 호랑이 수가 줄자 늑대때가 창궐했는데 포수가 제 역할을 못하자 피해가 어마어마했다고. 그때서야 부랴부랴 일제는 포수를 고용해 대대적인 호랑이 토벌에 나섰다고 합니다. 안그래도 줄어들었던 호랑이 숫자는 일제에 이르러 씨가 마르게 됩니다.

 

한편 일제에 총을 빼앗겨 일자리를 잃게 된 포수들은 이 횡포에 분개해 의병전쟁에 투신하게 됩니다. 호랑이포수 출신의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의사죠. 홍범도 장군은 호랑이 포수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었고 안중근 의사도 어릴때부터 포수들을 따라 호랑이사냥을 다닌걸로 유명호환사례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야기로 전해져내려오다 6.25 전쟁을 끝으로 남한의 호랑이는 멸종상태로 보입니다. 가장 최근의 호환기록은 70년대에 동물원에 술먹고 들어가 호랑이에게 팔을 먹힌 남자가 있겠네요...=_=

 

여기서부터 진짜 공포.

호랑이 무서운걸 모르는지 민족의 정기를 부활시켜야 하니, 뭐니 하며 대한민국에 호랑이를 복원하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리산 반달곰 방사계획처럼 호랑이를 방사해 번식시켜 호랑이를 복원하자는 말도 안되는 계획이죠. 이 계획은 민족의 영물을 복원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호응을 받았으나 다행이도 엎어집니다. 하지만 연천군에서 방사계획을 자체적으로 추진하다 다행이 이것도 말아먹은 걸로 알고 안심했습니다. (겨울철 군인들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뉴스 볼지도...) 그런데 이번에는 경북 봉화에서 호랑이를 풀어 노루 사슴처럼 자유롭게 뛰어놀게한다는 프로젝트를 2014년까지 완료한다고 그럽니다. 제발 이런 짓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호랑이는 민족의 영물도 아니고 산신도 아닌 사람 물어가는 산짐승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등산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이런짓을 하다니. 진정 공포게시판에 어울리는 글 아닙니까? 호랑이는 민족불문하고 배고프면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공평하게...

출처: 오늘의 유머 13.2.2. http://todayhumor.com/?panic_4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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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관련 전설·민담 많은 우리나라호랑이 만나러 떠나 볼까 10.2.20 한겨레

호랑이가 얼굴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며, 코를 감싸 쥐고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말하길 ‘(배웠다는 놈이) 더럽구나.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마라. 너희가 밤낮으로 싸다니며 팔 걷어붙이고 눈 부릅뜨고, 노략질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심한 놈은 금전을 형으로 모신다. 그 잔인하고 박한 행실이 너희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 있더냐.”- 박지원 <호질>

 

인용한 글은 백수의 제왕 호랑이가, 점잖은 척 더러운 짓을 일삼는 도덕군자를 향해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호질·虎叱)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 ‘호시탐탐남의 재물을 노리고,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자들이 넘치면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런 속담을 되뇌게 된다. 가혹한 정치가 춤추는 나라엔 백수들도 넘쳐난다.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 올해는 호랑이해 중에서도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랑이해다. 눈에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백수의 왕이 우리나라를 지켜볼 게 틀림없다.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다. 방방곡곡 호랑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다. 호랑이 얘기 안 듣고 자란 사람 없고, 호랑이 꿈 한번 안 꾼 사람 드물다. 선사시대인들의 생활 흔적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호랑이가 등장한 이래, 숱한 신화·전설·속담·격언과 지명, 상징물, 사람 이름에 이르기까지, 나고 살고 죽는 인생사 이곳저곳에 호랑이 얘기 한자락 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284개 마을 이름에 호랑이가

우리에게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산의 주인인 산신령이요, 악을 응징하는 구원의 신이며, 친근한 이웃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바보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치명적인 야수이자, 부모를 해친 원수이면서, 포획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사냥감이기도 했다.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는 속담은 신앙 대상으로서의 호랑이와 사냥감으로서의 호랑이, 두 속성을 함께 드러낸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전설·민담은 600종을 웃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호담국·虎談國)에 비유했다. 호랑이에 주목한 최남선은 일제의 야욕이 극으로 치닫던 1908년 창간한 잡지 <소년>에 호랑이를 등장시켰다.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가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데 반해,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일어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한반도를 그렸다.

 

땅 모습뿐 아니라 우리나라 구석구석엔 호랑이 상징물이 깔려 있다. 마을 이름, 지형지물 등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349(전체 지명의 0.4%)에 이른다.(국토지리정보원 자료) 지명 중엔 마을 이름이 가장 많아 284개를 차지한다. 호랑이 꼬리의 뜻을 담은 포항 호미곶,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을 한 안성 금광면 복거리(복호리), 호랑이가 나타나 효자를 도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거제도 호곡마을, 영천의 효지미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영월 주천면 신일리의 의호총처럼, 효자를 도와주고 죽은 호랑이를 장사 지낸 호랑이 무덤도 여러 곳에 있다. 나쁜 호랑이든 착한 호랑이든 호랑이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민족과 진하게 어우러져 대대로 살아온 셈이다.

 

호환으로 한 마을이 풍비박산 난 곳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호랑이를 추격해 때려잡은 뒤 뱃속에서 살과 뼈를 수습해 장사 지낸 효자도 있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그리고 악귀를 쫓는 힘을 가진 신성한 동물로 여겨, 그림 그리고 수놓고, 심지어 글로 써서 붙이기도 했다.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도 강력한 힘을 가진 호랑이를 잡아 그 머리를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무관의 관복 흉배에 그려넣어 용맹성을 강조했고,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내걸어 잡귀를 쫓는 부적으로도 썼다.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또는 대리인)으로 여겨 호랑이를 모시기도 한다. 무섭기만 한 호랑이지만, 민담이나 민화 등에선 대부분 착하거나 어리석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려운 존재인 맹수를 일상생활 속에 녹여넣어 마을과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호신으로 여기고 친숙한 동물로 묘사한다.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밤길 가는 나그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던 호랑이도, 효자를 등에 태우고 강물을 헤엄치던 호랑이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한 땅에 야생 호랑이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나 그 발자국을 봤다는 허다한 목격담은 진행형이다. 끊이지 않는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 남한에선 호랑이가 발견됐다는 구체적 기록(포획 기록, 사진 촬영 등)이 없다고 한다.


60년 만에 돌아온 백호랑이해

그러나 호랑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호랑이와 함께 살고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아기 호랑이 호돌이를 내걸었고, 60년 만에 백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마케팅 바람이 뜨거운 것도, 우리 곁에 호랑이가 살아숨쉬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고고함, 용맹스러움의 상징동물 호랑이의 해. 우리 모두 새해를 맞아 두루 깨끗하고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운, 멋지게 도약하는 한국 호랑이들이 되길 기원해 보자.

호랑이 나라이니, 곳곳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들이 널려 있다. 호랑이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을 준비해볼 만하다. 살아 있는 호랑이도 만나보고 호랑이 흔적, 호랑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호랑이 마을 여행 다녀오신 뒤엔, 한번쯤 호랑이 꿈도 꾸고 대박 맞으시길. ^^

 

재미나는 호랑이 공부

호랑이가 개·고양이? | 호랑이는 포유강 개목 고양이과에 속한다.

호랑이··표범 | 범은 호랑이와 표범을 아울러 일컫는 이름.

백호 | 벵골호랑이의 돌연변이 종. 야생종은 멸종. 전세계 사육 마릿수 200여마리. 국내엔 14마리.

줄무늬 수 | 몸에 24개 안팎, 꼬리에 8~13개가 있다.

| 앞발 한 방의 순간적 힘은 800위력. 도약거리 5~7m, 높이 2m를 뛴다.

시력 | 낮엔 사람과 비슷, 밤엔 식별능력이 사람의 6.

짝짓기 | 발정기간 일주일 정도. 교미는 130, 하루에 20~30회나 한다(주변 경계 습성 때문).

수명 | 야생상태 10년 안팎, 사육상태에선 20~25.

 

 

세계 호랑이의 날 "한국인들, 호랑이에게 빚 갚아야죠" 729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항 한국범보전기금 대표 "한국 호랑이에 대한 정보, 미국에서 처음 알게 돼"

 

러시아 연해주 라조자연보호구에서 연구용 무인카메라에 잡힌 아무르호랑이의 모습Dr. Alexander Myslenkov 제공

 

729일은 세계 호랑이의 날이다. 2010년 러시아에서 개최된 호랑이 정상회담에서 야생 호랑이를 보전하자는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635회 언급될 정도로 우리나라엔 호랑이가 많았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세계 호랑이의 날을 맞이하는 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88서울올림픽에 마스코트로 사용될 정도로 호랑이는 대한민국 문화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멀게는 단군신화가 있고 가깝게는 영화 <대호>를 찾을 수 있다. 얼마 뒤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수호랑)이다.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호랑이가 잡힌 것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였다. 정부에서는 19964'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제출한 보고서에 "국내에는 호랑이가 한 마라도 서식하지 않는다"며 남한내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공식화하였다.

 

기자는 '세계 호랑이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 호랑이 복원과 연구를 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이항 교수를 만나보았다

 

- 언제 처음 호랑이 보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1999년 겨울, 야생동물 연구 현장을 들러 보기 위해 미국의 여러 동물원과 박물관, 보전기관을 방문하였을 때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많은 기관들에서 아무르 호랑이의 생태는 물론, 왜 이들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고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매우 깊은 수준으로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 미국에서 오히려 호랑이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네요?

"아무르 호랑이가 한국에 살았던 호랑이와 같은 아종이며 지금도 러시아에 수백 마리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한국에 살았던 표범과 같은 아종인 아무르 표범, 즉 한국표범이 북한-러시아-중국 접경지역에 극소수(30마리)만 살아남아 있어 아무르 호랑이보다 훨씬 더 심한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상징이 호랑이이고 한국은 호랑이의 나라라고 생각해 왔는데, 우리는 왜 이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호랑이나 표범이란 동물이 산 적도 없는 미국과 유럽의 많은 동물보호단체들과 보전활동가들이 한국호랑이와 표범의 보전과 복원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었죠. 이 일을 계기로 한국에 돌아가서는 반드시 우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두만강생태통로 개념도 한국 호랑이와 표범이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 지역에 이를 수 있는 생태통로 형성이 가능한지를 알기 위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리영 리해룡

 

- 현재 호랑이 보전을 위해 하고 계신 연구와 목표는 무엇인가요?

"현재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연구는 북한과 접하고 있는 중국 국경지역에 연구원을 파견해서 중국-러시아 접경지역에 살고 있는 호랑이와 표범 그리고 그 먹이동물 현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한국 호랑이와 표범이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 지역에 이를 수 있는 생태통로 형성이 가능한지를 알기 위한 연구입니다.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북한의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대에 호랑이와 표범이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생태통로 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호랑이, 표범 등 야생동물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는지가 호랑이·표범복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공 요소이기 때문에, 주민의 야생동물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조사하는 연구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만강 호랑이 생태통로 프로젝트'라 이름 지었습니다."

 

- 시베리아 호랑이, 아무르 호랑이로 부르는데요, 동일한 종개체로 보아야 할까요? 한국 마지막 호랑이가 1921년에 사라져서 유전 정보를 분석할 기회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 호랑이와 아무르 호랑이가 같은 아종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범보전기금연구자들은 한국 호랑이의 유골을 추적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탐문 끝에 일본과 미국의 자연사박물관에서 한국에서 잡힌 호랑이의 두개골과 뼈를 발견했고 여기에서 DNA를 추출,현재 러시아에 살아있는 아무르 호랑이의 유전자와 비교한 연구결과가 2012년 초에 논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한국 호랑이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와 아무르 호랑이의 유전자가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근거로 두 호랑이 집단은 같은 아종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한국범보전기금이 1935년경 지리산에서 포획된 표범의 가죽을 입수하여 그 유전자를 지금의 아무르 표범과 비교한 연구도 역시 동일한 결과를 확인하였습니다. , 한국 표범과 아무르 표범은 같은 혈통이고 같은 아종에 속한다는 결론입니다. 호랑이 수컷의 행동범위는 800~1200km²에 이릅니다. 이런 호랑이를 인간이 생각하는 국경에 따라 나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한국 표범은 이 땅에서 사라진 게 확실한 것인가요? 호랑이와 표범이 북한에서 서식할 가능성은 있는지요?

"한국 표범은 한반도에서는 사라졌다고 보입니다. 중국, 러시아와 접한 북한의 국경지역에는 때때로 표범이 나타나는 일이 있으나 곧 다시 중국, 러시아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북한지역에 먹이가 될 만한 초식동물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한국 표범과 한국 호랑이의 후손들이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 러시아, 중국 등의 시베리아 호랑이 서식지에서 개체수가 늘어나면 한반도까지 호랑이 서식지가 다시 늘어날 가능성이 있을까요? 반달가슴곰처첨 자연방사는 가능할까요?

"러시아, 중국의 호랑이, 표범이 늘어난다고 이들이 북한으로 바로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이들을 위한 적합한 서식지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북한의 백두산과 개마고원 지역이 적합한 서식지라는 것이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러시아-중국 접경지역까지는 적합한 서식지가 군데 군데 끊어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끊어진 서식지 사이에 나무를 심어 커다란 '호랑이 숲길', 즉 생태통로를 만들어야만 비로소 호랑이, 표범이 북한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가까운 장래에 남한까지 호랑이가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남한의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 호랑이가 살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전체에 호랑이가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북한 일부 지역에는 호랑이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표범은 남한에서도 반달가슴곰처럼 인위적인 재도입에 의한 복원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보다 훨씬 몸집도 작고, 작은 면적에서도 살아가며 사람과의 충돌 위험성도 낮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들 최남선은 이렇게 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는 없다고 하여 한국을 호담국(虎談國)이라 하였다. 호랑이는 나라의 상징으로, 1988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호돌이)였고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수호랑)이다 한국범보전기금

 

- 호랑이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호랑이는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서부터 한민족의 문화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하여 민화와 그림, 장식품,석상 등에 빈번히 나타납니다. 한국인은 수천년 동안 호랑이와 함께 살아오면서 호랑이의엄청난 파괴력을 두려워하고 또 부러워했으며, 그 힘과 용맹을 사랑했습니다.

 

최남선은 이렇게 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는 없다고 하여 한국을 호담국(虎談國)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호랑이는 나라의 상징으로, 1988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호돌이)였고 그후 30년 만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수호랑)입니다. 우리 민족은 호랑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상징으로 생각하면서 호랑이를 나라 밖으로 쫓아낸 상황입니다. 이제 그 빚을 갚을 차례입니다. , 한반도 전체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에서만이라도 호랑이와 표범이 다시 돌아와 살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두산호랑이 주 먹이는 멧돼지, 겨울엔 절반 차지18 5.16 한겨레

한국표범은 주로 사슴 사냥두만강 건너 중국 동북부 조사 결과

멧돼지와 사슴 주 먹이지만 호랑이는 반달곰, 표범은 수달도 사냥

 

t1.jpg » 아무르호랑이가 대륙사슴을 사냥하는 모습을 재현한 이탈리아 밀라노 자연사박물관의 디오라마. 중국 동북부에서 실제로 호랑이는 멧돼지 사냥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한 세기 전만 해도 한반도 전역과 중국 동북부,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3000마리 이상이 살았던 아무르호랑이(백두산호랑이, 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는 현재 500여 마리만 야생에 살아남았다. 가장 큰 야생집단은 러시아 연해주로 415490마리가 서식한다. 이와 분리된 다른 한 집단은 두만강 건너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로 약 20여 마리의 백두산호랑이와 세계에 100마리 미만이 남은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이 함께 산다.

중국이 대규모 호랑이 국립공원을 조성 중인 이 지역은 연해주의 호랑이 서식지가 이미 포화상태여서 또 다른 서식지가 필요한 데다 백두산 생태계의 일부로서 장차 한반도의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생태축으로 주목받는 지역이다(관련 기사: 중국에 지리산 2호랑이 국립공원생긴다). 특히 이 지역은 대형 포식자인 호랑이와 표범이 함께 분포해 먹이를 둘러싼 이들의 경쟁 관계가 관심을 끄는 곳이다.

 

t2.jpg » 두만강 건너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대의 중국쪽 호랑이·표범 서식지(붉은 격자). 세모는 무인 카메라 위치, 점은 마을을 나타낸다. 양하이타오 외 사이언티픽 리포트’(2018) 제공.

 

중국 연구자들이 이 지역 호랑이와 표범의 배설물을 통해 먹이를 분석한 연구결과가 나와, 두 포식자가 언제 어떤 먹이를 잡아먹으며 상호관계를 맺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연구자들은 20142016년 동안 중국 지린 성 동부와 헤이룽장 성 남동부인 러시아 국경 지역 보호구역에 483개의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고 호랑이와 표범의 배설물 각 217개와 115개를 수거해 먹이를 분석했다.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 2일 치에 실린 이들의 논문을 보면, 두 대형 포식자의 주요 먹이는 멧돼지와 두 종의 사슴으로 이들이 전체 먹이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그러나 포식자가 선호하는 먹이는 종마다 계절마다 약간씩 달랐다. 멧돼지는 호랑이의 가장 중요한 먹이로 전체 마릿수의 37%를 차지했지만 표범에게는 붉은사슴(누렁이, 백두산사슴, 말사슴)이 전체의 38%였다. 먹이의 양으로는 멧돼지가 호랑이 먹이의 46%였고 대륙사슴(꽃사슴)은 표범 먹이 양의 34%였다.

 

t3.jpg » 겨울철 눈이 쌓인 곳에서 활동이 민첩하지 않은 멧돼지는 호랑이의 주요 먹이가 된다. 김봉규 기자

 

연구자들은 호랑이는 특히 겨울에 멧돼지를 선호했지만 표범은 여름에 멧돼지 비중이 높았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실제로 겨울에 호랑이 먹이의 비중(마릿수)46%에 이르렀지만, 표범은 4%에 그쳤다. 반대로 여름에 멧돼지를 먹이로 삼은 비율은 호랑이 3%, 표범 11%였다. 이런 현상은 표범이 큰 멧돼지를 피해 봄에 태어난 어린 개체가 많은 여름에 멧돼지 사냥을 주로 했지만 호랑이는 사냥 노력에 견줘 에너지 확보량이 많은 다 큰 멧돼지 사냥을 선호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멧돼지는 사슴보다 키가 작고 눈이 많이 쌓인 곳에서 빨리 달아나지 못해 호랑이의 표적이 되는 측면도 있다. 일반적으로 호랑이의 기본 식량은 사슴으로 알려져 있다.

 

.jpg » 중국 동북부 호랑이와 표범의 먹이동물 목록. 양하이타오 외 사이언티픽 리포트’(2018) 제공.

 

이들 대형 포식자의 먹이에는 모두 11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대형 발굽 동물 말고도 중형 포식자와 소형 포유류, 가축 등이 포함돼 있었다. 호랑이의 먹잇감으로는 너구리가 8%로 멧돼지와 사슴 다음으로 많았으며, 이어 오소리, 여우, 반달가슴곰, 산토끼, , , 사향노루 순으로 자주 먹이 목록에 올랐다. 표범은 사슴과 멧돼지에 이어 오소리가 7%로 많았고, 이어 여우, , 너구리와 산토끼, 수달과 사향노루, 개 순으로 자주 잡아먹었다.

 

연구자들은 호랑이와 표범이 모두 잠복사냥을 해 먹이가 중복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먹이의 크기에 따라 선호하는 종이 달라 한 서식지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Haitao Yang et al, Seasonal food habits and prey selection of Amur tigers and Amur leopards in Northeast China, Scientific Reports (2018) 8:6930 DOI:10.1038/s41598-018-25275-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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