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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2015 설 후기 사라진다는 것

by 이성근 2015. 2. 22.

 

2015년 을미년 설 연휴를 재구성 해 본다. 설 연휴는 2월 18일(수) 부터 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8일도 출근해서  23일 제출 예정인 공모사업 계획서를 작성할려고 했다.  계획의 변경이 있었다.  집안 청소를 해달라고 ... 마루를 딱아달라는 ..아내의 요청 때문이었다.  안방은 막내가  작은방은 큰아들이  마루와 씽크대를 포함한 베란다를 내가 맡기로 하고  아이들과 간만에 역할 분담을 해서 청소를 했다.  마지막 마무리로 화장실까지 정리하고 모처럼 향을 피웠다.  장미향과 아로마 향을  ...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큰아들이 막내를 데리고 오락실 서비스에 들었고,  나는 간만에 처가집과 본가 삼촌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했다.  아내는 오전서부터 밤 늦게까지 설 음식 준비에 분주했다. 나는  날이 저물때를 기다려 본가로 간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없고를 떠나  한결같은  흐름이다.  다같이 저녁을 먹고 아내는 막내와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게로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한다.  큰아들과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더불어 테레비젼을 보다 잠든다.

 

설날 새벽 가장 먼저 눈을 뜬 어머니가 머리를 감고 와서 정갈한 마음으로  조상님 전에 올릴 떡국을 준비하고 이어 아버지도 일어나 어머니를 거든다.  6시경 나도 눈을 뜬다.  그리고 아들을 깨워 씻긴 다음 세배를 드린다.  잠시 후 아내와 막내도 도착하고 새배를 드린다.  아버지는 지갑에서 혹은 미리 준비한 봉투를 나누어 주신다. 

 

설 차례상 준비가 이루어 지고, 창원 삼촌을 비롯하여 집안 친지들이 오고  맞절을 하거나 세배를 받고 세배돈 나누고 받느라 잠시 훈흔하다   메와 국이 다 될 무렵 모두들 일열로 서서는  엎드려 절하며  차례를 지낸다.   언제나 되풀이 되는 모습이다. 다만 아이들은 해들 달리할 수록 키를 키우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되려 줄어든다.  실제 아버지 키는 173cm에서  169cm로  줄었다.  아내와 막내의 키 차이도 역전됐다.  허뭇함과 순간 씁쓸함이 교차 된다.  그 시간의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보통 12시에서 한시를  전후하여 아버지 4촌과 친척들은 일어선다. 이후 시간은 직계 중심으로 좀 한가로운 시간이 이어진다.  올해는 삼촌의 둘째 손주 8개월 짜리 '성원'이와 막내 여동생의 갓난 아기 '나정' 이의 등장으로 집안이 더 한층 밝아졌다.  이 어린 것들이 있어 가족의 역사가 가능한 것이다.    

잠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성암사로 산책을 갔다옴.  경내 개잎깔나무 한 그루 있던 것 베어져 절 입구에 버려져 있었다.  마침 나이테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있어 헤아려 보았더니 서른살, 생육상태며 성장상태가 양호했던 나무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이테 중심에서 수피까지 24cm이니 직경은 얼추 50cm 작은 나무는 아니었다. 

여동생들이 친정으로 오듯 아내의 친정인 김해 한림으로 갔다.  도시고속 집입로 전광판에 정체가 표시되어 밀릴 줄 알았던 길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열림으로써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김해로 오듯 큰처남도 그의 처가집으로 가야하다 보니 술 한잔 나눌 시간이 없다.  좀 그렇다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문현동 본가로  처가집으로 오는 성서방과 안서방이 떠 올랐다. 그리고 멀리 있어 발걸음이 어려운 인천 박서방도 떠올랐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장 바꾸어 본다는 것, 상대적이란 것이 명절 시댁 친정 속에 명료해진다.   

 해가 많이 길어 졌다.  서둘러 자전거를 몰고 낙동강 강변으로 가 보았다. 이 또한 처가집에 오면 내 주요 일상이다.

낙동강의 변화,  둔치의 변화

강을 살린다는  핑게로 강을 난도질, 분탕질 해 놓고는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 길에 선 것은 설 자리 뿌리 내릴 자리 고려없이 식재된 수밓은 나무들이 주검 뿐이다.

화포천 하류부의 변화도 많다.  1990년 대 중반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릅면서 지형의 변화에 더하여 물길의 변화가 뒤따랐다.

처가집을 건너다 본다.  새삼스럽다.  이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저 집과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나같은 사람에게 딸을 줄려고 했겠는가.  저무는  겨울 해 속에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장인 한 마디가  그  집안의 법이던 시절,  아내는 적잖히 마음 고생을 했다.  적극적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면 아내는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는  시간도 있었다.    

식전, 장인과 작은처남 더불어 한잔 했다. 지난 12월 대만 출장에서 사왔던 58도 짜리 고량주를 깠다.  첫잔을 맛본 장인과 처남은 더이상 입 대지 않고 나만 마셨다.  대신 두 사람은 소주와 인삼주로 잔을 채웠다.  이어 저녁상이 들어 왔다. 장인은 몇 숟가락  뜨다  그민 드신다. 안타까운 마음에 조심스레   뭘 드시고 싶냐는 물음에 '회'를 말했다.  마음에 새기고  모처럼  윷을 놀았다. 장인은 구경만 했다.  어쩌다 보니 장모와 막내조카 내가 한편이 된 조가 일등을 하고 그 일등 값으로 애들을 데리고 한림읍 노래방을 다녀와야 했다.  

일찍 잠들었다.  초저녁 마신 술 기운 때문이었을까 심하게 코를 골았다고 한다.  

눈처럼 서리가 내린 아침

부지른한 농부는 식전부터 텃밭을 고루느라 땅에 박힌 돌을 뽑아 내고 있었다. 

아침 산책길에 보았던 가죽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 내던 정겨운 풍경은  이날 점심무렵 사라져 버렸다. 지난해 불이 났다고 ...베어진 것이다.

모정 마을에서 가죽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반면 참죽나무는 딱 한 그루 있다.  두 나무다 목재로서는 상품의 대접을 받는데 다듬을 공간만 있다면 수거해서 어찌해 볼 텐데 이래저래 입맛만 다셨다.  어쨌거나 지키던 자리 졸지에 베어진 것도 그렇거니와 동강 난 저 귀한 나무를  딱히 쓸 곳을 마련하지 못함이 그랬다.

가죽나무와 참죽나무로  만든 가구들 (웹사이트에서 퍼옴) 

아카시도 몇 그루 베어졌다.

살기 위해 아카시가 가시를 단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만  너무 싶게 베어지는 나무 또한 아카시다.

철길 옆에 자라던 아카시 나무는 이제 스무살이었다.  20년 전 큰 아들 환용이 태어났고,  21년 전 아내와 결혼을 했다.  22년전 아내와 만났다. 처가집 동네도 그 사이 변화가 많았다. 

간만에 둘러 본 모정마을 보기보다 큰 마을이다.  100호가 넘지만  이제 이곳도 빈집이 늘고있다.  

처가집 집 뒷편 무덤 있던 언덕이 반듯하게 정비되었다.  2002년 한림 수해 당시 처가집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은 몇 집 중의 하나였다.  일대는 주민들이 밝히고 있듯 상습침수지역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상습침수지역이 됐는가 를 헤아려 본다면 수해의 근본적 원인을 이해 할 수 있다.  김해 한림지역이 극심한 수해 피해를 입은 것은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림수해는  태풍 루사가 오기전 발생했다.   루사는 집중 호우 뒤인 8월31일 한반도를 관통했다. 어쨌든  이 비로 인해  한림면 일원 농경지 900ha와 가옥 침수로 1200가구 32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주택 142가구가 철거됐고, 피해액은 3840억 원에 달했다.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습지의 유실이었다.  한림 수해는 낙동강의 하구둑의 건설과 하상퇴적이 심화되어 발생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 된 것이다. 

그때 적을 두고 있던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 식구들과 임원들이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칼럼을 썼다.  물론 처가집은 갈 수 없었다.  한림면이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8월 중 하순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8월6일께 부터 였고 10일 밤 둑이 터지면서 물바다가 된 것이다. 11일 금곡리 일원이 물바가 되었다.  전국에서 구호물품이 답지했고,  그때 나도 그때 한일월드컵 문구가 새겨진 셔츠를 얻어 입었다. 

 

습지의 가치·기능 파악 복원을(2002.8.22. 부산일보)

예측하지 못한 집중호우가 경남을 강타했다. 삽시에 불어난 물은 허술한 둑을 무너뜨리고 들과 집을 물속에 침몰시켰다. 언제나 비는 내리지만 20028월의 비는 양상이 달랐다. 수상한 강우전선이 다가서고 있으니 조심을 당부하는 기상당국의 전갈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참담한 결과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비는 분명한 인재였다.

 

그것은 불어난 물을 빼고 더하는 차원이 아닌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며,지구적 기상 시스템의 교란 때문이다.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았던 김해 한림면의 경우도 화포천 주변에 습지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습지가 공장으로,쓰레기매립장으로,농지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예순살을 기준으로 이땅에서 물난리라면 1959년의 사라호 태풍과 1963년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대홍수였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덜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비가와도 불어난 물을 가두어 줄 수 있는 천연의 댐인 습지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습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홍수를 예방하고 건기에는 머금었던 물을 풀어 가뭄을 해소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밖에도 습지는 기후조절,환경오염의 정화 그리고 생태균형유지 및 생물다양성과 희귀동식물의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30년간 대한민국에서는 습지의 이같은 기능은 철저히 무시됐고 외면당했다.

 

1998년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중국의 양자강 대홍수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듬해 중국 정부는 제7차 람사회의를 통해 습지의 무분별한 파괴가 홍수의 원인이었음을 밝히고 대규모 습지 복원 프로젝트를 천명했다. 우리도 이번 수해를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더하여 경계할 일은 마치 이번 수해가 댐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인양 국민을 기만하고 댐건설을 호도하는 일은 말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습지에 대한 가치를 국민과 공유하며 그 기능을 회복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명심할 것은 또 다른 수해지역인 경남 함안의 법수 역시 내륙습지가 많았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2002년 12월 말 부산환경운동연합은 2002년 10대 환경사건을 언론에 배포했다.  한림수해가 2번째로  제기 되었다. 

"개발의 탐욕이 빚어낸 환경재앙, 수마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한반도 2002년 여름,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루사로 인해 한반도 전역과 특히 그간에 수해피해가 거의 없 었던 영동지방이 사상초유의 큰피해를 입었으며, 55천억원의 재산피해와 200여명이 넘는 사상 자를 냈다. ‘자연재해냐, 인재냐라는 전국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이번의 환경재난은 도로 건설 등으로 인한 지나친 산 절개면과 산불로 인한 산사태 급증, 하천 직강화 및 과도한 정비, 물흐름에 방해가 되는 교량건설로 인한 하천범람 등 인간이 저지른 대형 국토파괴로 인한 자연훼 손이 그 원인임이 드러났다. 그 원인중에는 세계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기후변화와 무분별 한 자연환경의 파괴도 주요한 것이다.

김해 한림면의 경우, 지난 30여년동안 개발위주의 국토정책하에서, 낙동강 유역의 습지를 매립하 고,공단등을 무분별하게 조성함으로 인해, 낙동강 수계가 외부로부터 유입된 물리적 압력에 대응 하는 시스템의 교란과 파괴를 가져왔다. 여기에는 과도한 골재채취 및 수량의 감소로 좁아진 강폭을 보완하기 위해 높게 쌓은 둑이 강물 의 유속을 빠르게 함으로써,직강화된 낙동강이 사상최대의 대규모 범람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 다. 이번 환경재난은 그간의 환경정책과 개발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과 생태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 다음 블로그 천성산 얼레지     ▼  다음 블로그 멋진 김해 농군(김기일)

 

좀 비켜난 이야기지만  수해 발생 후 대선 후보들이 현장을 다녀갔다.  그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도 다녀갔다.  다녀갔다가 보다는 복구 자원봉사를하러 왔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때의 장면을 오마이 뉴스 윤성효기자 남겼다.  솔직히 감동받았다.  8월12일 MBC가 전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김혁규도지사와 수해 현장을 방문했다고 하던 기사와는 느낌이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노무현이란 정치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사 전문을 옮겨 본다,

 

노 후보, 고향 김해 수해복구 비지땀(2002. 8.25 오마이뉴스)

'노사모' 회원 150명과 함께, "주민들 꿋꿋이 지내 다행

 

노 후보가 정동채 의원과 함께 오염된 흙을 담아 싣고 나오는 모습.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25, 마을 전체가 보름 동안 물에 잠겨 피해를 입은 고향인 김해를 찾아 복구작업을 벌였다. 노 후보는 정동채 의원과 윤원호 민주당 부산지부장, 이봉수 김해지구당 위원장 등과 함께 하루 동안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했다.

이날 오전 11시경 김해 한림면 장방리 부평마을에 들린 노 후보는 복구 작업에 여념이 없는 주민과 군인, 경찰, 자원봉사자를 격려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 김규칠(69)씨는 "바쁠텐데 이렇게 도와 주러 오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옆집인 최덕순(60)씨 집에 들러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주민들을 만난 노 후보는 "복구가 빨리 되고, 정부 지원이 최대한으로 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최씨 집에서 복구작업을 하고 있는 부산시경 소속 의경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피해 현장을 둘러본 소감을 묻는 질문에 노 후보는 "이런 상황을 보니 소감이라기 보다 억장이 무너진다. 생각보다 주민들이 꿋꿋하게 지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노 후보의 김해 수해현장 복구작업에는 '노사모' 회원들도 함께 했다. 부산과 경남 울산에서 활동하는 '노사모' 회원 150여명이 삽과 포대 등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복구작업을 벌였다. '노사모' 회원들은 앞으로 주말마다 김해에서 복구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영화배우 명계남씨를 비롯해, ‘노사모차상호 회장도 비지땀을 흘리며 복구작업을 벌였다.

'노사모' 회원은 삽을 들고 마당에 있는 흙을 퍼내는 작업을 하는 노 후보를 향해 왜 예정시간 보다 늦게 오셨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어떤 회원은 막노동을 하는 모습이 어울린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한 회원이 노가다라고 하자 노 후보는 “‘노가다는 일본말 아닌가라며 바로 잡아 주기도 했다.

점심 때는 노사모회원들이 마련한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노사모는 회원뿐만 아니라 주민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1만원의 식사비를 받았으며, ‘노사모는 수입금을 수해기금으로 낼 것이라 밝혔다. 노 후보도 1만원의 식사비를 내고 식사를 했으며, 주민들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노 후보가 수해현장의 복구작업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해지역 주민들이 달려오기도 했다. 노 후보는 한림정청년회 백청사 회장을 비롯한 20여명의 회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재해대책을 듣기도 했다. 청년회 회원들은 김정길 법무부장관의 해임안과 맞물려 28일 예정되어 있는 국회의 재해특별법이 통과될지 의문이다, “국회가 민생은 외면하고 있는데 노 후보가 신경을 써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한림면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진한 김해시의원과 장수관 농협조합장도 나와 대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노 후보는 점심 식사 이후 다시 복구작업을 벌였다.

노 후보는 오후 늦게까지 김해에서 복구작업을 벌이고 저녁 8시 비행기로 상경할 예정이다. 잠시 정치에서 벗어나 수해로 고통을 입은 고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복구작업을 벌인 노 후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한림면 부평마을 주민 김규칠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노 후보.                          주민들과 악수를 나누며 수해대책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 후보.

 

      ▲ 삽질하는 노 후보. 오염된 마당의 흙을 퍼내는 작업부터 했다.   노 후보는 맨 땅에 퍼질러 앉아 주민들과 점심을 먹으면서도 수해대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2007년 들어 환경부가 김해 진례면 신안리~한림면 금곡리 일대 화포천 2159410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여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과 2008년 1월  한림면 사무소에서 개최된 간담회에서 주민들의 반발이 격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멋진 김해 농군(김기일 2006. )   ▲ 김해 인터넷 뉴스

 

2008년 3월6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낙향 10일째 되던 날  봉화마을 주변 화포천 일대에 대한 자연정화 활동을 벌였다. 첫 공식행사였다.  김해시는 화포천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만들고자  했고 지난  2012년 9월14일 개장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오늘날 화포천 일원의 변화를 견인해 내었다고 자부한다.  90년대 중 후반 이후 나의 처가집 방문에서의 일과는  자전거를 타고 화포천 일원 습지조사였다.  그리고 이곳의 중요성을 알려내었다.  2002년 낙동강유역청에서 발주한 용역 내륙습지조사를 수행하면서 낙동강 일대의 생물상 조사를  수행했다.  조사가 진행되던 때는 한일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을 때 였다. 그때 화포천유역을 목록에 넣었다.  그리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에 신청하기도 했다.  수상작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주목받는 현장으로 인식되었다.

 http://blog.daum.net/bgtkfem/69

 

결혼 직후 막내처남과 집뒤 무덤가 풀밭에서 보름달 안주 삼아 술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무덤이 이장되고 난 2013년 이후 2014년 여름 일대의 땅 800여 평이 외지인에게 매각됐다.  여기 있던  오솔길은 아내가 부산이나 김해에서 나 만나고 타고가던 김해시내버스 종점이었던 모정교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더는 볼 수 없기에 그동안 기록해둔 관련 장면들 담아 보았다.  뒤져보니 오늘 이런 날 올줄 알았든가  몇 컷 찍어 두었던 것 같다.  지난 20년 처가집 오면 혼자 아침 저녁으로 산책하던 주요 코스였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철맏 피는 꽃들과 풀벌레 울음이 이 장소에서 피었다.  일테면 이른 봄 꽃다지 피고 매화배꽃 피면서 억새, 쑥 사이  앙중맞게 꽃을 열던 봄구슬봉이며  여름 이질풀과 찔레꽃 달맞이꽃,  가을 무릇꽃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2004 7                                                                                                          2006. 1.31

2007.2.20                                                                                                     2011. 8.13

2012.9.29                                                                                                   2013.3.29

이제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인가.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 오면 좋을 법도 하지만  그다지 썩 좋은 느낌이 들지 않음은 왜 일까.

2006. 4.3                                                                                                      2007.4.15

2010. 2.14                                                                                               2010.4.11

거기 회화나무에 청딱다구리 한 마리 깃들었다.  그동안 이 나무 가지에 머물거나 잠시 쉬다 간 새들은 몇 종이나 될까.  까치, 까마귀, 산비둘기는 기본이고 참새떼 아침저녁으로 늘 오가며 놀다 간다.  붉은머리오목눈이들도 늘 떼지어 다닌다. 내 기억에는 쇠딱따구리, 직박구리,  딱새, 파랑새, 꾀꼬리, 때까치, 어치, 곤줄박이, 박새, 멧새, 방울새, 콩새 등이 앉아 있었다.   

처가집 마당 끝 감나무에 매달린 동박새

 

노씨 재실 앞 회화나무와 차가집 감나무와 석류나무는 산과 수풀에 사는 새들의 징금다리다.

장모의 관찰에 의하면 겨울 청동오리들 수백마리가 처가집 논으로 올라 와 낱알갱이를 뒤진다고 했다.  

경계심이 휠씬 강한 기러기들은 인가나 낚시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쉼터를 마련하거나 먹이터를 구한다.  올해는 정초부터 새구경이 많다.  날아 오를 일이 많으려나 ... 

잠시 용원으로 가서 횟거리를 장만했다.  아내의 부탁도 있고 해서  많이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농어와 광어를 손질해서  장인.장모에게 드시길 권했다.  잘 드시고 흡족해 하는 모습 기억에 담아 두었다. 감나무에 새잎 열리고 감꽃 피고 풋감들 툭툭  떨어져 마당에 굴러 다니고 시나브로 감이 익어 홍시처럼 매달리때  을미년도 끝난다 .  거르름은 내어다 논과 밭에 뿌릴 것이다.   거기 무엇을 심듯  또 장모는 아들 딸 챙겨주기 위해  분주히 밭둑에 설 것이다.  모쪼록 건강하시기 바란다.   아들과 사위는  달리 해드릴게 없다,  그저 마음 뿐이다.  거기에 좀더 걸음을 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