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차 조사는 기존 보호수를 중심으로 동선을 잡았다. 그동안 기존 보호수는 조사 대상에 넣지 않았다. 그 방침을 올해 3차조사 이후부터 수정했다. 조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부산지역 전체 노거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예컨데 보호수는 보호수대로 마을터줏대감나무는 터줏대감나무대로 일괄 정리한 다음 지도로 만들 예정이다. 짧아진 해기울기를 고려하여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역시 겨울 해는 짧았다.
첫 방문지는 대연동 용소마을 당산나무였다. 휴일아침 반것것은 담장위의 참새들이었다.
주소는 대연동 561-12 소나무 / 유엔 평화로 47번길 153-10 (TBN 뒤) 쌈지공원 해송은 1980년 12월 보호수(2-7-1-0-1)로 지정되었고 수고 15m 나무둘레 4.2m 수령 173년 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올해로 198살이 된다. 실측에 들어보니 수고는 12.6m 나무둘레는 4.2 m 에 기부 0.3m(2.1m, 1.86m, 2.76m) 로 나왔다. 수관폭은 현장을 떠난고 난 뒤 아차 차 했다.
마을이름의 유래는 마을에 있던 습지의 모습이 용(龍)이 소(沼)에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데서 용소(龍沼)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북쪽에는 황령산이 있었고, 동쪽의 바닷가 쪽은 갯등[바닷가 쪽에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언덕]이 있었다. 습지는 바다에서 밀려오는 모래와 황령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土砂)로 만들어졌다. 당시 동쪽 해안은 사분포였고, 동남쪽 해안은 분포였다. 해안쪽에는 길이200m 폭20m 정도의 백사장이 있었고, 주위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1940년대 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이 들어서면서 사분포와 분포가 매립됨으로 인해 용소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마을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500년 전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380년 전 창녕 영산에서 금산 김씨(錦山金氏)가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1904]에 동래부 남하면의 용소동에 13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 이전까지는 경주 이씨·금산 김씨·남평 문씨(南平文氏)·김녕 김씨(金寧金氏) 등 12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용소마을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은 마을 당산나무가 유일하다. 용케 살아 남아 약100여년 전부터 매년 정월 초삼일(1월 3일)에 마을의 안녕과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노소간 신년하례, 마을의 화합단결을 위해 주민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내왔다.
따용소마을 당산목을 기준으로 미루어 보건데 용소의 면적은 정확히 알수 없지만 지금의 부경대 대연캠프스 정문에서 UN조각공원까지 정도를 그 면적으로 본다. 약7000평 정도이며 지금의 용소마을은 부경대를 지으며 학교 정문 앞으로 이주했다.
사진출처: 부경대 홈페이지 -부경대 백경동산 내력 중
1952년 6월 촬영 용주면(대연/남천/용호) 일원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농바우
2014년 2월 조성된 쌈지공원은 건물보상비까지 포함 총5억 5천만원을 들여 육각정자(용소정)와 전통담장, 전통조명등, 화강석 판석과 안내판 2개, 배롱나무외 4종 1천643주의 수목으로 조성됐다.
도시의 발달과정에서 노거수의 존재는 잊혀졌다.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여 왠만한 수령이 아니고는 푸대접을 넘어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서슴치 않고 베어져 사라지기가 허다하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용소 쌈지공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번 조사는 공존을 생각하게 했다.
근원부 6.1m , 둘레 4.1m , 수고 14.5m , 남북 16.8m , 동서 23.m
근원부 6.5 , 가슴둘레 4.77 , 곁가지 1.45 , 수고 10 , 수관 동서 19 , 남북 19.5
예림리 팽나무는 현장을 방문하고서야 대상나무를 제대로 확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현재 위성지도며 일반지도에선 읽을수가 없었다. 예컨데 신정관로가 팽나무 위를 지나기 때문이다. 2011년 개통된 신정관로는 국가지원지방도 제60호선의 일부로서 정관면 예림리에서 두명리까지 약 2km 남짓한 정관 신도시 우회도로이며 예림리 구간은 교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위성지도에 B라고 표기된 나무가 내가 만나야 할 예림리 팽나무로 알고 갔는데, 찾지를 못해 주민에게 물어야 했다. 눈대중으로 찍고 찾았던 나무는 예림리 570(예림길 27) 번지 였다.
당산나무를 찾는다고 하니까 길따라 가라고 했다. 가는 골목길이 정겨워 몇 컷 담았다.
담장 넘어 가지를 내민 엄나무가 제법 나이가되어 보여 주인에게 묻자 40년생이라 했다. 그의 나이는 50대 초
담장이 그리 높지 않아 자연스럽게 담 너머를 엿보게 되었다. 아마도 이집의 뒷마당인듯 남새(菜蔬)밭 으로 꾸며진 담장 가장자리에 엄나무 한 그루 이 집과 연을 맺어 여지지껏 살아 왔다. 수형을 살리고 더 많은 잎을 얻기 위한 흔적이 가지와 가지 사이 잇댄 여러개의 각목이 말해주고 있었다.
예림리 팽나무도 지난 1982년 11월 보호수(2-16-4--1-1)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360년 수고 25m 나무둘레 4m 로 소재지 주소는 예림리 415번지였다.
한편 또 어떤 자료에는 근원부 둘레 7.5m 에 수관 폭은 30x30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찔레나무·음나무·머루·사위질빵 등의 식물이 착생하고 있으며, 착생 식물의 피도(被度)[지표면을 덮는 비율]는 30% 정도로 소개하고 있었다.
팽나무 주위에 열매들이 수북했다.
측정을 해 본 결과 가슴둘레 4.4m 수고 11m , 수관 남북 27.7m , 동서 25m 가 나왔다. 보호수 안내판 설명에 의한 수고 25m와 실측 11m와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관도 다소 차이가 있다.
가슴둘레의 경우 대부분 보호수 지정 당시 측정된 수치 보다 더 많이 나오는데, 여기선 되려 줄었다. 10cm에 불과하지만, 교량건설 이후 나무의 생장이 위축된 것일까 내가 잘 못 잰 것일까
편의시설로는 보호수 안내판과 예림 마을 할배 제당, 나무 지주, 편의 시설인 평상과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할배제당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 자정에 제사를 지낸다
조사를 마치고 자동차가 이동할 수있는 곳까지 산쪽으로 가 보았다. 함박산 자락 골짜기에 큰골 안쪽에 건축행위가 예고된다. 골짜기를 파고드는 개발행정은 이제 그만 됐으면 한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서 본 또 다른 팽나, 함박산에서 큰골을 따라 따라 내려온 구릉형 언덕 가장자리 대숲에 서 있었다. 최소 100년은 넘어 보였지만
골목 어디로든 접근이 어려웠다. 게다가 대숲 까지 가로막고 있어 별로 만나고싶어 하지 않는듯 했다.
어디를 가든 감은 지천에 달려있었다. 예전같으면 간짓대로 따 내고 몇 개만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을 터인데
간만에 보는 지게와 예전 외양간 자리에 걸어 둔 무우청이며 겨울 땔나무를 쌓아논 장작 더미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마을과 주변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나무는 거기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389-3번지 느티나무
정관면 방곡리 느티나무는 방곡 마을 제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관 신도시 개발로 주변은 공원화되어 마을 제사와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는 평균 지대보다 아래쪽에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어 멀리에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바닥은 나지로 되어 있고, 작은 습지를 조성하였다. 주변은 이대와 조릿대,등 대나무류와 조경수로 팔손이나무, 남천 등 과 함께 찔레나무와 담쟁이덩굴 등의 착생 식물이 있다. 1982년 11월 10일 구 보호수 제2-16-3호로 지정되었다.
측정결과 가슴둘레 5.3m 곁가지 1.7m 수고 25m , 수관 남북 16.3m , 동서 21.5m 로 나왔다. 다른 지역 보호수 와는 달리 큰 차이는 없었다.
줄기와 뿌리 부분은 외과 수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수세가 많이 약해져 있으며 고사한 가지가 많이 보였다.
방곡리 느티나무는 등록 당시 400살이었다.
400년이란 흔치 않은 나이가 얼마나 더 연장될지는 모르겠다.
안타까운 사실은 당집을 철거하고 대신 체육시설을 설치하겠다는 방침이다.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자정 방곡 동리 남녀노소 가정마다 안가태평하고, 오고가는 행상길의 안전과 농산에도 대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낸다고 했는데....
당집과 당산나무는 한몸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방곡리 느티나무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세 양호하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모두에 언급했듯 이날 노거수 조사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을 보면서 공존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 날이었다.
용수리 회화나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다.
신동아 파밀리에 아파트 104동 협성 르네상스아파트단지가 인접하고 있다.
단지 안은 쾌적했다. 요즘 대단지 아파트의 공간이용과 조경이 웬만한 근린공원 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이곳도 그런 범주에 들었다.
곳곳에 식재된 장송과 조경수들은 아파트 단지안에서도 계적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한듯하다
주차시설은 대부분 지하로 넣었고 지상부는 주민 쉼터나 공원화 한 것이다.
동과 동사이 회랑 (回廊)에도 키큰 나무와 아교목, 관목을 심었다.
그렇지만 아파트 어디에서도 용수리 회화나무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주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중년의 남성은 나무의 수종이 뭐냐고 한동안 궁금했다고 묻기까지 했다.
이곳은 아파트로 개발되기 전에는 덕전마을이었다. 용수리(龍岫里)는 1914년 덕전동과 산막동, 평전동, 가동을 통·폐합하여 붙인 명칭으로 정확한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4개 마을이 모두 조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조룡산의 용(龍) 자와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뫼부리 수(岫) 자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 가동 마을, 덕전 마을, 산막 마을, 평전 마을이 있다
제당은 1994년 건립하였고 년에 한번 성황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마을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제당 뒤에 느티나무가 있다고 소개하는데 보다시피 회화나무다. 수령은 알 수가 없다.
대충 주변을 둘러 본 다음 회화나무의 생육상태며 성상을 재어 보았다. 근원부 6.25m 기부 0.1m 좌측줄기 3.3 m 우측줄기 2.43 m , 수관 남북 21.2 m 동서 19 m
두 그루가 한 그루로 변했는지 원래부터 한 그루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자로 보고 측정했다.
전체 줄기며 가지는 동남쪽으로 기울기가 심하다. 아마도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일대의 환경적 조건에 따른 현상인듯하다
남쪽으로 가지를 뻗어 수관의 절반이 108동 쪽으로 뻗었다.
무성한 가지는 한여름 그늘로서 기능을 발휘할 것도 같지만 바닥은 수분이 많아 모기떼가 바글거릴 것 같았다.
미루어 짐작컨데 용수리 덕전 회화나무의 수령은 최소 300년은 되어 봄직했다.
가지끝에 달린 수많은 열매는 아직도 왕성한 생산력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당집의 존재로 보아 용수리 회화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섰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아마도 처음부터 설계를 하며 반영이 된 듯하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사실 누가 누구더러 위안이라 표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어린이놀이터 옆에 회화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큰 꿈 과 수백년 노고수의 지혜가 이곳 아이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해 본다.
다음 장소로 매학리 714-7 팽나무를 찾아 나섰다. 신동아 파밀리에 아파트 맞은편 홈플러스 정관점 옆 정관어란이도서관 윗골공원 안에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지만 찾지 못했다. 매학리 윗골은 주변보다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명칭이다. 웃골을 한자화하며 상곡(上谷)이라 하였다. 주변에는 공장 시설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59년 건립된 매학리 상곡 제당(매학리 86번지)은 헐린 상태이며, 당산 나무만 남아 있다고 ... 나무수종도 느티나무라고 ...
매학리는 조선후기 1879년 ‘호구총수’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매학(梅鶴)이란 이곳에 있는 매곡(梅谷) 마을의 매(梅)와 상곡 마을[매학리] 뒤에 솟아 있는 소학대(巢鶴臺)[백운산 자락의 매 바위를 일컫는 것으로 기장 팔경 중 하나]의 학(鶴)을 합성하여 붙인 지명이다. 어쨌든 이렇게 변했다. 다만 이런 조선후기의 고가가 마을의 역사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줄 뿐이다.
사진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윗골공원 내 메타쉐퀘어 거로수길과 어린이도서관 앞 생명나무 Tree of Life 잘 설치한 어린이놀이 시설이다.
그리고 장미공원, 동행했던 이에게 카톡으로 보낸 장미들이다.
장미공원은 윗골공원내 약 400평 남짓한 면적에 조성된 장미밭인데 다양한 장미들이 방문자를 반기고 있었다.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형진 강변아파트 앞 양버들 세 그루가 서 있었다.
1908년 유럽에서 도입되어 전국 각지에 심어졌지만 요즘은 교외로 나가야 보인다.
또 다른 동행자 막내아들에게 수고 측정기로 양버들의 키를 재어보게 했다.
이제 곧잘 나무의 키를 잰다. 측정 방법을 가르쳐 주고 몇 번 시도하면서 오차를 줄이는 법까지 터득했다.
모전리 소나무를 찾아 나섰다. 비교적 쉽게 찾았다.
이곳 역시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원형이 사라졌고, 솔나루근린공원 입구에 당산나무와 마을표지석이 신도시 이전의 모전리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모전리의 옛 이름은 띠밭으로 띠[억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띠밭을 한자화하며 ‘띠 모(茅)’ 자에 ‘밭 전(田)’ 자로 표기해 모전(茅田)이 되었다. 정관면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개발전까지 당산제(모전리 241번지)가 매년 음력 1월14일 할매당산에서 이루어 졌지만 2004년 신도시 개발로 다 사라졌다.
소나무는 원래 모전리 당산 뒤에 있던 두 그루의 소나무 중 한 그루인 듯 했다. 측정결과 근원부 3.39m 가슴둘레 2.9m , 수고 13.4m , 수관 남북 13.9m 동서 13m
수령은 알수 없다. 추정컨데 150~200년
측정 후 마을표지석에 새긴 모전예찬가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아주 오래된 마을이었다. 1995년 3월 기준으로 전주이씨 19 동래정씨 13 , 경주감씨 12, 진주강씨 9, 남평무ㄴ씨 7, 밀양박씨 6, 청주한씨 5, 해주오씨 4, 경주손씨 3, 김해김씨3, 나주정씨3, 경주이씨3, 순흥안씨 2, 파주윤씨2, 기타 14가구 총인구 약 409명이 살았는데 신도시 건설로 인해 2002년 부산과 양산등으로 이주했다고 새겨져 있다.
내고향은 아니지만 여기서 나고 자란 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아파트단지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연까지 더하면 참 거시기하다.
그런 사연이 어디 모전리 뿐이었을까. 암튼 정관면에서는 달산리 1063(정관산업단지 산단2로 )의 느티나무까지 조사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다음으로 미루고 철마로 넘어 갔다. 그리고 병산리의 소나무 역시 보지 못하고 이동했다. 조사 동선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실린 사진으로 달산리 느티나무와 병산리 소나무는 대신한다.
병산리 소나무는 약 200살이다. 높이 18m, 둘레 각각 3.2m, 1.6m이다. 뿌리 바로 위의 둘레는 3.9m이고, 수관 폭(樹冠幅)[나무줄기와 잎이 많이 달려 있는 줄기의 윗부분의 너비]은 20×16m이며 착생 식물은 없다. 원래 병산 당산목이었으나ㅣ 2004년 골프장 조성공사로 해운대 CC로 이식되어 졌다.
바닥은 자갈로 포장되어 있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보호수 안내판과 유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결손 부분을 처리한 흔적이 있다. 2006년 2월 25일 마을 보호수 제2-16-4-7-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경원개발 소유로 되어 있으며, 골프장 측에서 관리하고 있다.
달산마을의 신목으로 대접받던 느티나무는 달산리 439번지의 달산 제당(1931년 건립 달산리 964-1)) 뒤편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팽나무 세 그루도 같이 살았는데 달산마을이 사라지면서 느티나무만 살아남아 주)기린건물 뒤쪽 공장 뒷편에 자리하게 되었다. 수령이 약 400년인 느티나무는 직경 110㎝, 높이 30~40m로 전한다.
달산리에는 달산마을 외 강변 마을, 당곡 마을, 대전 마을, 독점 마을, 떡곡 마을, 묵은터 마을, 상리 마을, 중리 마을이 있었는데 모전리처럼 원주민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의 정관신도시 사진출처: 네이브 블로그 정관애플 부동산
정관에서 철마로 넘어오는 시간 어둑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백길리 팽나무는 2014년 조사때 지나쳤다. 그때는 보호수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때도 시간에 쫒겼던 기억이 새롭다.
백길리 팽나무는 당산 할배나무다 . 이 나무 역시 1982년 11우러 동 보호수(2-16-5-2)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은 추정 400년이다. 수고 15m, 나무둘레 4m 널리 알려진 노거수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왕 나선 걸음이고 실측해보았다. 가슴둘레 4.37m 수고 15m 수관 남북 21.2m 동서 17m가 나왔다. 가슴둘레가 지난 1982년 지정 당시 보다 37cm 늘었다.
그래도 건장하다.
주변에는 건물들과 도로가 있으며, 바닥은 자갈과 데크로 되어 있다. 나무 주변에 보호수 안내판과 나무 지주, 데크가 설치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은 외과수술 전의 백길리 팽나무와 다음 도로지동에서 캡쳐한 모습이다.
마을 뒷편 거문산 자락이 병풍처럼 서 있다. 수세가 많이 상했다. 그런데 163번지 보호수 팽나무 보다 그 뒷편 팽나무가 더 마음을 끌었다.
다소 비스듬하게 줄기를 세웠지만 수세나 수형이 백길의 간판 팽나무보다 나아 보였다.
뜻밖의 만남에 단박에 다가가 재어 보았다. 가슴둘레 3.7m 수고 20m 수관 남북 19.4 m 동서 20.3 m 가 나왔다. 이만하면 준수하지 않는가
주민에게 나무의 나이를 물은 즉, 여든 일곱의 할머니가 시집 올때부터 저만했다고 한다.
참 곤란시럽지만 달리 기댈 정보가 없다. 최소 200으로 잡아 본다.
서둘러 구칠리 모과나무를 만나러 자리를 떴다.
철마면 구칠리 마을은 마을 이름 이칭이 많다. 원래는 구칠리(仇柒理)라는 한자어를 사용하였으나 뒤에 구칠리(九七理)라고 하였다.
그 외 구칠(九柒)·구칠(邱漆) 등이 있는데 이같은 표기는 주민들은 이곳에 큰 옻나무 아홉 그루가 있었기에 마을 이름을 구칠(九漆)이라 하였고, 그 옻나무가 언덕 위에 자생하고 있으므로 구칠(邱漆)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옻독으로 원수 같은 나무라 하여 ‘원수 구(仇)’ 자로 구칠(仇漆)이라 하였으며, 후에 구칠(九七)로 표기가 변하였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인근의 갈치재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고 있다. 철마면과 기장읍을 연결하는 큰 고개인 갈치재는 구칠재로도 불렀는데, 이 두 명칭 모두 거칠재의 변음으로 본다. 이때 거칠의 의미는 원래 ‘거칠 황(荒)’이 아니라 ‘클 대(大)’의 뜻을 담고 있어 큰 고개를 뜻한다고 국어학계에서는 해석한다.
모과나무를 찾아 마을을 헤멧다. 다소 어린 팽나무를 만나기도하였다.
골목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구칠길 64-8 (279번지) 집 뒤 대숲에 밑둥을 가린채 서있는 모과나무를 만났다.
노란빛 모과열매가 아니었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측정을 해보니 수고 9.2m 수관 남북 10.8 m 동서 9.2 m 였다. 둘레를 재 볼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최소 2.5~3m 정도는 나올법 했다.
하지만 선 자리가 비탈인데다 729번지 집안으로 들어가 밑에서 재야 하는데 주인이 없었다.
모과나무가 선 자리 뒷편은 밭이었고 아래는 279번지 뒷곁이었다.
출타중인 중인 주인을 무한정 기다릴 수없기에 지붕 너머 모과나무 상체만 담았다.
아쉽지만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돌아 나오며 구칠리 어느 산자락을 베어낸 현장을 보았다. 숲 자리와 맨 흙 , 숲이 있음으로 해서 생명이 깃든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이곡리로 향했다. 이곡리 556(이곡길 128-3) 300살 느티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령300살 (1982.11 보호수 지정) 수고 20 가슴둘레 4
이끼류와 버섯류가 착생하고 있으며, 약 50%의 피도(被度)[지표면을 덮는 비율]를 보이고 있다. 주변에는 건물과 도로 및 이곡천이 있으며, 바닥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나무의 바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아스팔트로 포장해 뿌리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생육환경이 그만큼 불량하다는 것이다. 실제 그렇다. ㅣ
매년 음력 정월 14일 자정 당산 할배라 여기며 제사를 지내고 동짓날은 마을 할머니들이 팥죽을 뿌린다고 한다.
그렇건만 300년 느티나무가 고깃집 악세사리로 전락한 것 처럼 보여 마음이 편치 못하다. 9차 조사 나무 중 최악이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기길에 올랐다. 금새 어두워 졋다.
조사 동선을 부산 전역을 설정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동래구와 북구는 언제 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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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a Fitzgerald - My one and only Love(with Nelson Riddle)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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