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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오래된 미래

황령산 과수원 내 노거수 群 조사

by 이성근 2015. 11. 29.

 

11월 마지막 일요일 틈을 보던 황령산 과수원 내 노거수 군 조사를 단행했다.  과수원 주인의 사전 출입 동의를 구했지만 정작 출입은 이른바 개구멍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첫 대상지는 남구 문현1동 진남로 198번길 83에 소나무를 먼저 측정했다.   조계종 성암사 옆이다.   2014년 조사에는 성암사 사찰 경내 소나무 1주를 조사 한바 있다.

수령은 약 150년 정도일 것이라고 주민들이 말했다.  사실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읺는다.  아무튼 측정결과  근원부 2.7m   가슴둘레 2.47m   수고 6m   수관 남북 16.4m  동서 15.3m로 나왔다.  일대는 조씨문중의 땅이라 했는데 동아대 쪽과 관련이 있다. 

근원부 바로 위에 일제시대 수탈의 흔적이 보인다.  다른 곳은 몰라도 그동안 수집했던 조각 정보를 모아 본다면 이골짜기에 제대로 된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은 일본인들이 먼저였다.  

문현1동의 경우 적산가옥은 훼손되거나 변형되었지만  문현3동의 2층 목조건물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아마 더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현4동 등  ...  아무튼 문현동의 일본식 건물은 조선방직 사택과 연관되어 있다.  

소나무의 수형은 원줄기에서 3m쯤에서 기부가 벌어져 가지를 펼쳤다.  북쪽 가지 일부는 한때 눈이 많이 와서 부러졌다고 했고, 주민들이 막거리 등을 부어 주기도 한다고 했다.  특별한 제례의식은 없고 주민의 휴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나선 걸음에 어머니 텃밭으로 가보았다.   역시나 부모님들은 틈만나면 밭에서 일 하신다. 가꾸는 재미와 잡다한 시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늦게 심었던 고구마는 보기에도 자잘하다.   

그리고 토란뿌리들

방울토마토도 보인다.

두분은 밭을 고르고 있었다.  막내아들에게 직접 케보라 했더니  뭔가를 집어 들었는데 탁구공 크기의 감자 였다. 신기해 했다.  

배추농사가 그런대로 된 것 같다. 12월이 되면 김장을 담을 것이다.  그 김치를 어머니는 형제들에게 배분한다.   일이 바쁘다는 핑게 아닌 핑게로 올해는 제대로 거들지 못했는데, 죄송할 따름이다.  

부모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조사현장으로 이동했다.   일대의 과수원이 폐쇄적인 장소라서 그런지 문현1동의 당제며 당산나무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문현1동 황령산 당산은 약 10평 정도에 서남향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슬레이트 맞배지붕(옆면이 'ㅅ' 모양으로 된 지붕)에  두 칸 브록 벽을 쌓아 외벽은 흰 페인트로 마감했다. 문은 알루미늄 외짝문으로 칸마다 있다.  특이한 것은 동쪽 외벽에 문 없는 툇마루같은 것이 있다.  주위는 돌담장(1.5~2m)이 둘러 있고 출입문왼쪽에 1m 가량의 담장이 돌출되어 있다.    (1칸은 8(1자는 3.03m, 8자는 24m) 인데 여기서는 한자로 봐야할 듯하다.)

그렇지만 당산제는 언제 누구의 주관으로 어떤 목적과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 지는지 알 길이 없다. 나아가 이 제당이 언제 만들어졌고 그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문현동은 북쪽으로 황령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으로 작은 산지가 있으며, 서쪽으로 동천을 끼고 있다. 남쪽으로는 우룡산이 있다. 문현 교차로에서 대연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게골 또는 대연 고개라고 부르는데, 옛날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높은 고개였으나 6·25 전쟁 당시 도로를 개수하면서 토석 채취로 고개가 점차 낮아졌고 1965년 착평 공사로 현재와 같은 낮은 고개로 바뀌었다.

 

문현동(門峴洞)은 조선 후기 기록에서는 지명을 확인할 수 없고,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1904]에서 동래군 서하면(西下面) 문현리로 처음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동래군 서면 문현리였으며, 1936년 부산부 부산진출장소 문현리가 되었다. 1949년 부산시가 되었으며, 1957년 구제(區制) 시행으로 부산진구 문현동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였고, 1975년 남구가 신설되며 문현동은 부산진구에서 남구로 이관되었다. 1982년 법정동 명칭 변경 및 경계 조정으로 범일동 일부가 문현동에 흡수되었고, 적기동 1가는 문현동에 흡수되며 폐지되었다. 1989년 부산진구 범천동 일부가 남구 문현동으로 편입되는 행정 구역 조정이 있었다. 1995년 부산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바뀌면서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이런 배경속에 문현동에도 사람살이가 있었고 그 애환과 근심을 털고  삶의 희망을 기대고 의지하였던 곳이 당산이라 본다.  황령산 자락 문현1~4동까지 당산은 다 있었다. 문서화 되어 그 기록이 전하는 곳은 두곳이다.  문현2동의 경우 1845년을 전후하여 부락의 윤곽이 윤곽이 형성되어 웃농막이라 불렸고 이 시기의 향리민들이 당산을 세웠다. 이후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에다 1925년 좌천동 해변 일대의 매축을 구실로 동산 토석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당산이 헐림으로 인해 문현1620번지에 천당 당하였다가 1969년 문현노인정을 건립하며 제단을 안치하였다. 이후 1994년 최초의 자리에 동제당(문현2613-8)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문현4동 산제당(문현41028-1)의 경우 19825월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령산 당산의 당산목은 상수리나무다.   수령은 100년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당산 주변은 물길이 흐르고 주변은 과수원부지다. 측정 결과 가슴둘레 2.95m  기부 1.5m (1.55 / 1.87 ) 수고 9m   수관 남북 24.6m   동서 22.2 m

나무는 1.5m의 높이에서 두개의 큰 가지를 남북으로 내었다.

자람새나 생육환경은 양호했다.

 

 

 

당집에서 대각선으로 해안사가 보인다.

이 나무를 관찰하기 위해 앞에 있는 통일동산에서 건너다 보기도 했다.

두번째 방분인 이곳에서 여러 야생동물들과 만났다.  조사 직전 풀섶에서 고라니 한마리 화들짝 튀어 산쪽으로 달아 났고 1차 방문때는 꿩이 날아 올랐다. 하늘에 맴을 도는 새는 수리과의  맹금류인데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과수원 내 팽나무 群 조사에 들었다  모두 네 그루인데 세그루만 조사 대상에 넣었다.

 

첫번째는 남쪽 팽나무로 1번 팽나무다.  첫 방문때 과수원주인의 5m 줄자로 대충 가늠했다.

근원부 4.6 m 가슴둘레 3.5m   수고 20m   수관 남북 17.5m   동서 17.7m 

근원부 밑에 작은 옹달샘이 있었는데 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과수원주인의 말에 의하면 1995년 황령산 터널( 부산진구 전포동과 남구 대연동을 연결하는 터널

1,860m )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 일대의 넘쳐나던 물이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가지가 갈라지는 기부에서 두개의 쿤 줄긱 뻗고 그중 1지의 가지가 손상되었을 뿐 아직은 건재하다. 어깨가 넒어 다른 식물 종자가 뿌리를 내렸다.  

2번 팽나무는 다소 기형적이다. 

축사 옆에 바위를 물고 뿌리를 내렸는데 크게 세개의 큰 줄기를 뻗었다.

근원부 5.3m  기부 1.0m  (2.55 / 1.95  /  1.84)  수고 17m   수관 남북 15.7m  동서  15m

사진만 봤을 때는 세 그루의 나무로 보일수도 있지만 뿌리에서 약 1m지점에서 가지를 뻗어 올린 형태다.

좀더 근접해서 보자면 직립한 원줄기에 남으로 나간 또 다른 줅에서 두개의 줄기가 나와 솟구쳐 오른 형상이다.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3번 팽나무는 앞서 두 나무에 비해 굵기는 작지만 비교적 곧게자랐고 그 중 수형이 제일 좋다.

아마도 뿌리내린 터의 다름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근원부 3.6m  허리둘레 2.85m    수고 11m   수관 남북 16.9m   동서 20.1m

과수원집 막내아들이랄까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또 달리 보인다

과수원 사택 주변에는 상록교목으로 가시나무류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자연산이 아닌 식재된 것이다   추정컨데 과수원 주인의 말이나 주택의 특성상 일제시대 식재된 것 같다.

종가시나무인지 참가시나무인지 확신이 안 선다.  그럼에도 종가시쪽으로 기우는데 그런데 이맘때 쯤이면 응당 보여야 할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대관절 ...

근원부 3.7m 기부 0.8 m(A 1.83 /  B 1.3  /   C 1.25 /   D 1.9 )  수관 남북 14.9m   동서 14.6 m로 측정되었는데 수고는 나무의 입지상 측정이 어려웠다.

종가시나무의 경우 남해안 섬지역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에서 자생하는데 가시나무류 중에서는 비교적 추워에 강하다

유사종의 비교

가시나무

참가시나무

종가시나무

어긋나기. 피침형

어긋나기. 피침형

어긋나기 도란형, 광타원형

측맥 11~15쌍 잔톱니

뒷면 회백색에 털없음

측맥 10~12

상반부 날카로운 톱니

뒷면 백색 밀모

측맥 10~12

상반기 안으로 굽은 톱니

뒷면 회백색

가시나무는 종가시나무에 비해 잎의 폭이 좁고 긴편이며 거치도 작다

종가시나무는 잎의 폭이 넓으며 거치가 크고 날카롭다

열매 깍정이 6~7개 동심원층

열매 깍정이 7~9개 동심원층

열매 깍정이 5~6 동심원층


 

그럼에도 주위에서는 2세목들이 도처에 보인다. 과수원 주인이 도토리를 다 걷어들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도한 두개 쯤은 달려 있을 것 아닌가. 미스테리다

 

과수원 집주변에는 이빡에도 큰 벚나무와 단풍 나무가 자라고 있다.

단풍나무

 

밖에서 보면 일본식 가옥이란 것을 모른다. 집은 낡고 낡아 금방이라도 쓸어질 듯 하다.

벽체와 창문에 그 흔적만 남았다.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참으로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굴뚝새 였다

과수원은 예전에 소와 돼지 등을 키웠다

주로 매실나무를 많이 심었고 경계면에는 탱자와 맹송죽이 자라고 있다. 

이곳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산까치야 - 김세화.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