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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 이번엔 ‘한명숙 부부’ 국보법 고발···“괴물의 알 산파 역할” 1229 경향
보수단체가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사진) 부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우익 성향 단체인 활빈단은 지난 28일 보도자료를 통해 “2012년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추진한 한명숙 당시 통합민주당 대표와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 26일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활빈단은 앞서 지난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 직후 이정희 대표와 통진당 의원 5명, 그리고 10만 당원 전체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고 검찰은 다음날 수사에 착수한 바 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정당으로 해산 결정이 난 반역정당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2012년 3월10일 만나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등 대한민국 정체성을 훼손하고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시장경제 근간을 무너뜨리며 사실상 연방제 공산통일로 가는 ‘공동 정책합의문’을 발표한 사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결과 무려 16곳 지역구를 통진당에 양보해 19대 국회에 이석기 등 RO세력 수뇌부를 국회에 끌어들이는 등 통진당이라는 괴물의 알을 낳아 품고 부화시킨 산파역할을 한 자”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한 전 대표의 남편인 박 교수에 대해서도 “공안당국은 통진당 창당과 야권연대 과정에서 피고발인과 남편의 역할, 북한과의 연계 여부에 대한 전모를 밝혀 간첩 혐의가 드러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해 주기 바란다”며 함께 고발했다.
김무성에 뿔난 알바들 "니가 알바해" 1229 프레시안
김무성 "진의와 다른 오해…상처받은 분 있다면 유감“
"저는 취업준비생입니다. 김무성 대표의 발언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은 잠깐의 좋은 경험이 아니라 이미 생존방식이자 삶입니다. 이게 과연 우리의 무능 탓인지 묻고 싶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최근 열악한 아르바이트 처우 문제에 대해 "인생에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 방법이 없다", "젊어서 그런 고생을 하는 것도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분노를 표출했다. (☞관련기사 : 김무성 "열악한 알바,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라")
▲29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김무성 대표 '알바' 발언에 대해 규탄 기자회견을 연 알바노조. ⓒ알바노조 페이스북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알바노조) 조합원 10여 명은 김 대표의 말을 무책임한 발언으로 규정하고,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새누리당사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아르바이트 노동자 보영 씨는 "하루 8시간 5210원을 받고 일해도 다음 달 계획도 세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런 알바노동이 좋은 경험이라면 당신들이나 실컷하시길 바란다"고 했다. 또 다른 아르바이트 노동자 조윤 씨는 김 대표가 "악덕 업주가 아닌지 구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 데 대해 "학비 벌랴 공부하랴 스펙쌓으랴 바빠 알바도 하기 쉽지 않은 세상인데 나쁜 사장을 가려내고 손님이 돈을 던지든 반말을 하든 설득하라고 한다"며 "나의 노동을 무시하고 나의 삶을 무시하는 김무성 대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이날 함께 집회에 나온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원망만 무성', '최저 받고 살아라', '노답(답이 없는) 김무성', '너땜에(너 때문에) 화가 나', '니가 알바해' 등 문구가 적힌 종이판을 들고 김 대표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2014년, 박근혜만 웃었다12.29 프레시안
[서리풀 논평] 2014년을 보내며 : 민주와 복지, 공공의 좌절-시민건강증진연구소
어느 날인들 평범하지 않지만, 2014년은 4월의 세월호 참사로 특별히 기억될 것이다. 많은 것이 드러났고, 끝 모르게 좌절했으며, 그만큼 또 숱한 반성거리를 남겼다. 한 해의 끝에 다시 다짐해야 할 말은, 그렇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은 그뿐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사고'는 올해를 정리하는 요약이자 키워드다. 2월 17일 경주 리조트가 무너져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헬기가 떨어졌고, 버스 터미널에 큰 불이 난 것도 올해다. 군대는 총기 사고와 폭력으로 얼룩졌고, 대형 산재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의료 사고까지 빠지지 않는다. 판교에서는 환풍구가 무너졌고, 외국 바다에서 조업하던 배가 침몰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많은 사고가 났고 아까운 목숨들이 스러졌다. 결코 우연이나 불운이 아니다. 낡아 빠진 앙시앵 레짐(구체제)과 개발 독재, 그 위에 겹겹이 쌓인 반(反)인간의 돈과 시장 만능 체제, 그 희생자들이 울리는 노골적인 경고다.
2014년의 첫 논평에서 우리는 민주와 복지, 공공의 회복을 말했다. (☞관련 기사 : 2014년을 맞으며 : 민주와 복지, 공공의 희망) 희망찬 기운으로 새해를 맞자는 뜻을 왜 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희망은 현실의 어두움에서 싹 틔우고 자란 것,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위협받고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걱정은 꼭 들어맞았다. 민주와 복지, 공공은 1년 만에 더 위축되었다. 더 노골적이고 염치가 없어졌으며 남은 눈치마저 보지 않는다. 곧 맞을 새해, 형식적인 희망조차 고사될까 걱정스럽다.
ⓒ프레시안(최형락)
1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살아낼 공간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경제 민주화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다. 2014년 내내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의심해야 했다. 그동안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던 형식과 절차의 민주도 장담하지 못하게 후퇴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12월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심판은 허약한 민주주의가 드러내는 대표적 징후일 뿐이다. 며칠 전 서울의 홍익대학교 앞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감지한다. 시대를 거스르는 그 '복고적' 형식이란. 구시대의 '유령'이 부활하는 조짐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
민주주의의 실질을 말하기는 낯간지럽다. 평범한 사람들의 뜻을 반영하는 대의 기구가 작동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기 어렵다. 대의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이고, 정책을 다루는 행정부의 독단과 전횡은 2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정도다. 이상한 '문건' 논란에서 보듯 근대적 합리성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마당에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 재벌과 대기업을 보살피는 데는 법도 가볍지만, 영세상인, 비정규직, 정리 해고, 빈곤층, 장애인에는 그렇게 가혹할 수 없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배제하는 곳을 그래도 민주 사회라고 불러야 할까.
2 복지는 더 후퇴했다. 경제와 정부 재정이 좋은 빌미다. 공약 파기는 이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뿌리를 내리려던 것조차 흔드는 것, 2014년 진행된 복지 정치의 특성이다.
안전과 건강, 복지를 '경제화'하는 것은 더 나갔다. 담뱃값을 올리면서 건강을 핑계로 삼았지만, 결국은 재정 대책임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복지를 수입과 지출의 게임으로 만든 것이 담뱃값 소동의 중요한 소득이랄까. 모든 복지를 경제의 틀로 통일한 효과를 거뒀다.
복지의 경제화는 정치로 완성된다. 급식과 보육을 둘러싼 '분할'의 복지 정치가 대표적인 예. 선별과 우선순위라는 이름으로 대상을 나누었고, 결국 이해관계의 각축으로 바꾸어냈다. 주어진 재정 안에서 배분하고 경쟁하게 하는 분할의 복지 통치를 시작한 셈이다.
3 공공성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지는 한 해였다. 1년 내내 의료 산업과 영리화를 밀어붙인 것을 잊을 수 없다.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지는 절로 드러났지만 동력은 줄지 않았다.
시작은 규제 완화였다. 전쟁이라는 은유와 끝장 토론이라는 이벤트를 동원했고, 모든 공중파 방송국이 나서서 월드컵 축구 중계를 흉내 낸 것을 기억한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2014년 3월 20일의 일이다. 그리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월호가 물에 잠겼고 300명이 넘게 희생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것은 국가의 무능과 부패였지만, 이는 곧 규제의 무능과 부패와 다르지 않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어떤 핑계를 대든, 무능하고 부패한 규제 완화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광풍'은 에너지가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신의료 기술 평가를 완화하겠다는 11월 말 보건복지부의 발표만 봐도 그렇다. 경제와 투자 활성화라는 명분, 그리고 행정과 관료주의의 합작품이다.
후반기에는 공공 부문과 노동 시장 '개혁'까지 보태졌다. 고임금과 성과급, 복지, 도덕적 해이 등의 공격은 공무원 연금 개혁까지 나아갔고,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공격이라는 또 다른 분할의 정치와 통치로 진화했다.
4. 요컨대 국가와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원리는 더 강해졌다. 그에 반응하는 개인의 내면도 따라서 다져졌다.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게다가 국가에 대한 혐오는 어느 때보다 커졌다. 국가와 현실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힘을 보탠 결과다.
돌아보니 2014년을 마무리하는 심정은 뿌듯함과 보람보다는 좌절과 소진에 가깝다. 그토록 거친 공격 속에서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지를 간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가. 그러니 냉소와 혐오(이 역시 내부와 외부 구분 없는)로 가기 쉽다.
그래도, 어떻게 희망의 불씨를 살릴까 묻는다. 우리 각자의 몫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떤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억압'과 '억제'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삶의 양식을 변화, 변용시켜 나가는 것과 관련된다.
또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쯤 되었을 때 발표한 논평도 여전히 유효하다. (☞관련 기사 : 혐오의 시대, 국가를 되찾자) 국가를 혐오하고 사회로부터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서 분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에 투항하는 것이다. 국가를 '찾고' 또 '되찾아야' 한다.
힐러리 웨인라이트의 주장을 다시 들어보자.
"신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의 목표는 정부의 등에서 민중들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의 등에 다시 올라타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한 당사자인 "정치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국가 공무원에 관한 좀 더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국가에 바로 짓쳐들어간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에 대항해(in and against the state)" "공공 서비스가 운영되는 방식을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국가를 되찾자>(김현우 옮김, 이매진 펴냄))
ⓒ알바노조 페이스북
알바노조는 "수많은 청년이 먹고 살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며 "이런 현실이 어쩔 수 없고 방법이 없다고 하는 건 정치권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을 확인하는 일"이라며 김 대표에게 즉각적인 사과와 아르바이트 노동자 처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같이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는 등 반발이 확산되자 김 대표는 이날 해명 보도자료를 내고 "지난 26일 타운홀 미팅에서 대학생과 나눴던 대화가 진의와 다른 오해를 받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청년들이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하고 공권력으로 다스려야 하며 저를 포함한 정치권이 더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라며 "그러나 그것이 오해든, 의도하지 않은 다른 의미였든 상처를 받은 분이 있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차라리 허수아비가 대통령이었다면…1229 한겨레
26일 저녁 8시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빌딩에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라는 명의로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는 삐라 1만장이 살포됐다. 삐라에는 ‘진짜 종북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2002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기와 방북 인터뷰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서울=뉴시스】
집권 첫해 교수들이 1위로 뽑은 사자성어는 도행역시(倒行逆施)였습니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것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기대와 달리 경제민주화, 차별과 격차 철폐, 공정성 회복, 복지사회 등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실종되고, 사찰과 정치공작 등 유신의 악몽이 가득한 억압적 통치가 부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교수들이 1위로 꼽은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였습니다.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윗사람을 농락한다는 것입니다만, 고사 속의 뜻은 더 험악합니다. 윗사람에 대한 농락은 그렇다 해도, 아랫사람들에게는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겁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넘어 일종의 공갈과 협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건 일말의 기대가 섞인 우려와 경고가 아니라, 정권에 대한 절망이고 포기입니다.
물론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위아래를 농락하고 겁박한 조고는 누구이고, 농락당한 호해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고사 속의 어리석은 황제 호해일까요 아니면 음흉한 조고일까요. 대통령이 호해라고 할 경우 조고는 이른바 그림자 권력들일 겁니다. 황제를 농락하고 신하들을 겁박하는 ‘상시’들이겠지요. 대통령이 조고라면, 호해는 이 나라 국민이 될 겁니다. 사실 최종적으로 속임과 조롱과 멸시를 당한 건 주권자인 국민입니다.
홍대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진짜 종북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삐라가 1만여장 뿌려졌고, 경찰에 초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규탄의 강도를 따진다면 삐라의 내용은 지록위마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대통령을 바보로 조롱하거나, 아니면 대국민 공갈사기범으로 단죄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월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정윤회씨 국정개입’ 문건 파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오늘 이 정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이란 걸 노사정위에 보고했습니다. 노사정위에서 논의할 ‘정부안’이라고 둘러대긴 하지만, 사실상 정부가 발표할 확정안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평가한 대로 비정규직 양산 대책에 불과합니다. 비정규직에게 담뱃값 정도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긴 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해소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기간제의 계약기간을 대폭 늘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전체 노동자의 45%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팽창시키는 조처입니다. 게다가 파견업종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담았습니다. 기업이 직접고용을 피할 수 있도록 자본가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장그래’들이 원하는 것은 고용 안정이고, 격차와 차별 해소입니다. 정부 대책은 이 모든 걸 외면하고 있고,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두고 비정규직 보호 혹은 장그래 보호 대책이라고 하고 있으니, 지록위마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해의 마지막날까지 국민을 속여먹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습니까?
지난 한 해 나라 안팎에서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사진 100장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 사진이 2장 포함됐습니다. <에이피>(AP) 통신 역시 올해의 사진 150장을 선정하면서 세월호 참사 관련 사진을 4장 포함시켰습니다.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의 2014년은 세월호 참사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304명의 승객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전국민이 지켜봐야 했던 사건 말입니다.
문제의 7시간 동안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직도 국민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이라는 말로 모든 의문을 묵살해버렸습니다. 국민을 이렇게 겁박하고, 대통령을 그렇게 조롱해도 됩니까? 나에게 그 말은 ‘눈만 뜨고 있으면 되는 대통령’이란 말로 들렸습니다. 참사의 결정적인 시간에 아무런 한 일이 없는 대통령을 두고 그것도 대통령의 집무라고 한다면, 차라리 일 년 내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허수아비를 청와대에 앉혀두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정체가 좀더 분명해지기 시작한 건 민정수석실 감찰 문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입니다. 문건 내용만 보면 당신은 그림자였습니다. 국정을 주무르는 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호해 뒤에 조고가 있듯이, 당신 뒤에는 문고리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건 폭로 사건을 문건 유출 및 비밀 누설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가이드라인을 받들어 ‘문서 유출, 국기 문란’ 구호를 외치고 다닌 건 당신입니다. 검찰은 그에 따라 국정 농단 행위에는 눈감은 채 유출자 색출에만 전념했습니다.
당신은 문건 폭로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허당인지, 얼마나 쉽게 조정할 수 있는지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물론 비서실장도 국정을 농단한 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누군가 써준 것만을 읽었습니다.
지난해의 사자성어 후보 중에서는 이가난진(以假亂眞)이 3위에 올랐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히고 거짓이 진실을 뒤흔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지록위마에 이가난진을 더할 때 제대로 반영될 듯합니다. 그림자가 실체를 흔들고, 거짓이 진실을 흔들고, 허깨비가 실물을 흔들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고, 그런 대통령을 상시들이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슴이 말이 되고, 흑이 백이 되고, 퇴행이 개혁이 되고, 반민주가 민주가 되었습니다.
이런 ‘대국민 조롱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당신은 말했습니다. “정부는 항상 국민을 믿고 국민의 편에서 개혁을 추진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자세에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지록위마(조롱)가 어디 있고, 이가난진(거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8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이석기 전 의원 구명 나서 1228 한겨레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측이 내란음모·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구명을 위해 대법원에 성명서를 전달했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이 설립한 인권단체인 카터센터는 지난 18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유죄 판결에 대한 카터센터 성명서’를 내고, 우편을 통해 우리 대법원에 발송했다.
카터센터는 성명서에서 “대한민국 현직 국회의원인 이석기 의원에 대한 서울고법의 유죄 판결을 우려한다”며 “서울고법은 추종자들에 대한 이 의원의 녹취록을 근거로 징역 9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이 성명서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하고 의원직 상실을 선고하기 직전 작성됐다.
카터센터는 “현재 상고심이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제시된 사실들의 진위에 관해 언급하지 않겠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대한민국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하지만 카터센터는 “이 의원에 대한 유죄 판결이 1987년 이전의 군사 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매우 억압적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선고됐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판결이 국제인권조약을 준수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의무, 매우 성공적으로 번영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세계적 명성 등과 모순된다는 점도 주목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11일 항소심 선공공판에 참석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사진공동취재단
카터센터는 카터 전 대통령이 “한국이 아시아와 세계 정세에서 인권 지도자로서 필수적 역할을 확대하려면, 국보법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인권에 관해 모든 한국 시민들이 온전히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카터센터는 “미국인들이 고문의 공적 사용에 관한 의회의 조사 결과에 관해 긴박하게 토론하는 이 시기에 모든 나라가 국제 인권법에 충실하면서도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1981년 퇴임한 카터 전 대통령은 이듬해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대에 카터센터를 설립하고 인권과 세계 보건, 갈등 해결, 선거 감시 등의 활동을 벌였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내란 사건 피고인들의 가족은 이달 초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 대사의 주선으로 카터센터를 직접 방문해 탄원을 요청했다. 레이니 전 대사는 대표적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영향력 있는 인사의 구명 활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영주 총무 목사, 원불교 남궁성 교정원장 등 4대 종단 최고위 성직자들은 지난 7월 서울고법에 탄원서를 냈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어리석은 갈등으로 국력을 소진하기보다 서로 간의 이해와 포용이 허용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내란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르면 내년 1월 중하순께 판결을 선고할 전망이다.
'인터뷰' 개봉취소 소동, 오바마 개입끌어들인 소니의 마케팅1228 미디어오늘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닮은 소니, '언더독 코스프레
2014년, 가벼운 팝콘 오락 영화가 표현의 권리를 대변하는 영화로 변신하는 과정은 놀라웠다. 그 비밀은 애국마케팅에 있었다. 여기에는 자기중심적 진실 편향이 작용하고 있었다. 애국 마케팅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개념이다. 이는 우리가 영화 <디워> 논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애국마케팅에는 마치 영화를 직접 극장에서 관람해 보면 나라를 지키는 즉 국가적 이익이나 안보, 국위선양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심리가 작용한다. 가깝게는 올 여름 영화 <명량>의 흥행에서도 일정하게 이런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2014년 <어벤져스 2> 촬영 당시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하게 했던 것도 이런 애국 마케팅 심리에서 기인했다. 국가와 민족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개인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뷰>의 개봉과정과 이에 대한 미국 관객들의 반응은 한국의 애국 마케팅을 한국인의 민족적인 특성이나 문화적 고질병이라 공격했던 이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독특하게 한국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애국마케팅이 미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영화 <인터뷰>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영화 <인터뷰>는 국가의 안보와 관계되는 일이 중요한 애국적 행위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며, 이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디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조건과 환경은 그들에게 바로 테러에 대한 불안과 공포였다. 자신들만이 선하고 정의를 지키고 있다는 편향의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보통 때는 일반 시민들이 관심도 기울이기 힘든 영화를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인 성탄절, 미국인들은 영화 <인터뷰>를 애국하는 마음으로 상영관에서 관람했다. 사랑과 관용, 평화의 정신을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과연 부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영화 <인터뷰>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을 암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탄절에 한 국가의 지도자를 암살하는 영화를 집단적인 관람하는 것은 화합과 포용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자국이기주의에 가깝다고 하겠다. 더구나 애초에 알려졌던 북한 해킹설도 반드시 맞는 지 알 수가 없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해커 협박에 따른 개봉 취소와 온라인 배포도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노이즈 마케팅 논란을 낳았다. 해킹 행위도 의구심을 일으켰다. 과연 북한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 <인터뷰> 포스터.
다만, 애초에 북한이 이 영화 제작에 대해 미국에 금지요청을 한 것은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북한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2014년 한 해 동안 여러 차례 미국에 영화제작과 개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실제로 백악관에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요지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모욕하는 영화는 제작될 수 없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시스템에서 국가나 정부가 영화제작현장에 개입을 할 수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똑같이 아니 그 이상의 행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 <인터뷰>의 개봉에 대해 적극적인 찬동의 의사표시를 한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 평가된다. 애초에 개봉이 취소됐을 때, 자신과 협의를 했더라면 영화관 배급사 등지에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대통령이 직접 영화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의 판단에는 정보기관의 첩보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작사에 대한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고, 이 때문에 개봉을 취소하는 행태가 선례를 남길 것이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판단은 일견 맞아 보이지만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고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발언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오바마 대통령은 결국 미국 시민들에게 존재하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영합한 셈이 됐다. 평화와 인권을 강조해 온 오바마 대통령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결과인 셈이다. 영화 <인터뷰>는 애초에 개봉을 포기했다가 오바마 대통령의 말을 듣고 온라인에 배포하기로 했고 나아가 극장 개봉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개봉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영웅으로 등장하는 대통령들처럼 나라와 국가 나아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슈퍼맨같이 나선 셈이다.
영화 <인터뷰> 스틸컷.
해당 영화의 독립영화관 개봉에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는 미국의 최고 수장 오바마 대통령의 빽이 작용을 한 셈이다. 아니 그는 스스로 너무도 당당히 자임했다. 더구나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영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요구나 성원은 거세되었고, 결국 권력의 수장의 영향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체가 독립영화관에서 상영을 할 자격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이로써 좋지 않은 선례로 남게 되었다. 앞으로 북한을 자극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마케팅 전략이 계속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 북한만 자극하겠는가. 다른 나라나 집단을 자극하는 영화들이 대거 제작될 듯싶다. 이번 소니의 영화 마케팅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과 닮았다. 아니 더 영리했다. 테러와 해킹의 위협 등을 통해 마치 탄압받는 ‘언더독’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어갔고 영화를 과감하게 포기하며 대통령의 개입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흥행을 원한다면, 이제 할리우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바마 대통령을 자극해야 한다. 아니, 누구보다도 미국을 사랑하고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많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애국마케팅의 타깃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게 묻는 성탄의 의미 <쿼바디스>12.23 미디어오늘
< 트루맛쇼 > 로 대중이 미디어를 통해 비쳐지는 이미지에 얼마나 쉽게 현혹되는지, 그리고 그런 대중을 미디어는 얼마나 쉽게 조작하는지를 까발리고, <MB의 추억>에서는 17대 대선 당시의 선거 캠페인을 통해 대통령 출마 후보들과 유권자 모두 당시 당선자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MB'에 대해 각자 어떻게 추억하고 정산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할 것인지를 물은 김재환 감독이 이번 작품 <쿼바디스>에서 다루는 것은 교회다.
‘쿼바디스’는 네로 황제의 폭정이 극도에 다다르던 시절,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후, 그 가르침을 전하러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베드로가 겪은 일화에서 비롯된 물음이다.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려던 베드로가 자신이 지나온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예수를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자,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는 예수의 대답에서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되돌아갔고, 바로 순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억압과 박해가 있는 곳,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가르침은 가혹하다. 이주민들, 노예들, 여성들처럼 시민권이 없는 이들도 모두 귀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지배자들에게는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으로 여겨졌고, 대화재로 혼란에 빠진 로마의 정치적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한 희생양으로 많은 이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제자 네로는 쫓겨나고,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이후 유럽 지역의 중심종교가 되었고, 정치와 문화를 아우르는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전세계에 퍼져나가 보편적 신앙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이 없는 동네는 있어도 교회가 없는 동네는 거의 없다. 대형 교회, 작은 교회, 오래된 교회, 개척 교회... 참으로 많은 교회가 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많다.
▲ 영화 <쿼바디스> 포스터
<쿼바디스>는 이런 상황에서 묻는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 건물에 경배하러 가는 것인지를.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지 않고 목사의 권위와 교회 자산인 부동산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인지를.
거리나 지하철에서 불교 승려에게까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공격적 전도, 북한 김정은이 물려받았다는 백두혈통도 아닌데 목사 집안끼리 세습되는 교회 권력과 재산, 삶을 거룩하게 가다듬어야할 성직자들의 섹스 스캔들, 세속의 탐욕과 부정부패를 꾸짖는 대신 정치권력과 한통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유명 목사들, 그런 교회에서 희생과 섬김이 아니라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신도들...
이런 한국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신도들은, 목사들은 그분을 알아볼게 될까? 그분은 그런 교회를 자신의 성전으로 인정하고 거기 깃드실 수 있을까? 신도들은 궁전 같은 규모와 장식을 한 교회 건축에 역사하는 재물이 아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쿼바디스> 첫 장면은 서초동에 새로 들어선 초대형 교회인 사랑의 교회 신축 문제로 시작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탈세·배임 문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 문제 등을 실제 자료 화면과 인터뷰를 통해 조목조목 파헤진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대형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담임직 세습과 전별금 문제 등까지 짚어낸다.
그러다보니 기독교계는 '한국교회언론회'를 통해 영화를 상영하려는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에 조직적으로 공문을 보내 <쿼바디스>의 상영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면서 더 큰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계의 '조직적인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쿼바디스>는 이미 개봉 전 후원자를 위한 순회 상영회나 언론시사회 때부터 시사회 장소로 예정되었던 멀티플렉스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 때문에 갑자기 장소와 시간을 바꿔야 했었다. 그리고 개봉 직전인 지난 6일에는 사랑의 교회가 '설교영상 무단 사용과 이미지 훼손'을 이유로 영화의 일부분 삭제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 영화 <쿼바디스> 스틸컷
그러다보니 <쿼바디스>는 멀티플렉스가 아닌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10여개 개봉관을 확보해 지난 10일 개봉했다. 김재환 감독은 관객 1만 명이 넘으면, 수익금 3000만원을 부실채권을 매입해 소각하고 불법추심으로 고통 받는 채무자들에게 희년을 선물, 경제교육을 통해 새로운 삶을 지원하겠다는 ‘희년함께’의 부채탕감운동에 전액 기부하기로 약속했고, 지난 22일 마침내 관객 만 명을 넘어섰다.
법적인 아버지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자의 학살 위협에 살던 곳 베틀레헴을 떠나 타국인 이집트로 피신하던 길에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난 난민이었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니 노동계급이었으며, 보수기득권자인 율법학자들과 맞서 싸우는 개혁운동가였고, 로마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가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아우르는 공동체를 이끈 사회운동가였다.
기독교가 ‘개독’이라는 비아냥거리가 되는 세태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와 교회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 높다란 장벽 안에 고립된 베틀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 벽에는 테러리스트가 쏘아댄 총알 자국이 선명하고, 으리으리한 한국 교회 건물에서는 하느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자본과 권력의 탐욕이 넘실댄다. 그러니 그런 교회를 향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고 또 물을 수밖에.
‘기레기’로 불렸던 기자들, 얼마나 변했나 1224 미디어오늘
타임라인으로 보는 2014년 언론과 세월호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전과 후 언론은 달라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민낯을 드러낸 언론은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도중 전해진 ‘전원구조 됐다’는 보도는 오보로 드러났다. 그 사이 탈출하지 못하고 기다리던 일반 승객과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은 그대로 물속으로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300여명 사망이라는 초유의 사고에 언론은 ‘흥분’했다. 문제는 사고 원인과 구조 과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어뷰징하면서 조회수 늘리기에 바빴다. 자극적 보도와 편집이 이어지자 네이버조차 언론사에 자제를 요청했을 정도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자들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불렀다. KBS와 MBC의 일부 간부는 세월호 참사와 교통사고를 비교하거나 세월호 유가족을 폄훼하는 듯한 발언을 해 지탄을 받기도 했다. 현장을 뛰는 언론사 기자들의 반성문도 잇따라 나왔다. 이들은 정부의 보도를 받아쓰기만 했던 지난날의 행태에 대해 사과했다.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는 언론의 받아쓰기 관행, 박근혜 대통령 감싸기 보도에 항의하며 길환영 KBS 사장 퇴진을 외쳤고 KBS 기자들도 이에 호응했다. KBS는 양대 노조의 동시 파업으로 김시곤 보도국장 보직 사퇴와 길환영 사장 사퇴 등을 이끌어 내며 공정방송의 단초를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사들은 세월호 관련 보도 비중을 줄였다. 많은 언론지면에서 경제 살리기가 주요뉴스로 등장했고 세월호 관련 아이템을 지면에서 점점 사라졌다.
지상파 방송3사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에 구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규제개혁 토론회 등 청와대 행사를 생중계하고 메인 뉴스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세월호 관련 보도는 점점 주요 언론에서 멀어졌다. 세월호에 ‘관심’을 쏟은 건, 종합편성채널과 대안언론이었다. 종편과 대안언론은 세월호 참사와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을 집중 보도했지만 보도의 초점은 달랐다. 종편에게 세월호 참사의 교훈은 없는 듯 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정부에 ‘호의적인’ 방송사에 대해서는 경미한 징계를,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서는 중징계를 내리며 공정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은 언론인들에게 수난의 해였다. 실명으로 유머 사이트에 회사를 비판했다는 등의 이유로 징계를 당했다. 집회 현장에서는 ‘정부 비판적인 기사를 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기자를 체포했다. 최근 KBS 한 기자는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지상파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점점 신뢰를 잃고 있다.
"한국인 갓난아기 97%가 '몽고반점' 있다" 1229 파인낸셜뉴스
한국인 갓난아이의 97.1%에서 몽고반점으로 불리는 '몽고점(Mongolian spot)'이 관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과 중국에서 몽고점을 갖고 태어난 갓난아기의 비율보다 10% 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몽고점은 갓난아기의 엉덩이나 등, 손 등에 멍든 것처럼 퍼렇게 보이는 얼룩점으로, 보통 7살 이전에 없어진다.
관동대의대 제일병원 소아청소년과 신손문 교수팀은 2012~2013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한 신생아 1천9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분석됐다고 29일 밝혔다. 의료진에 따르면 몽고점은 조사 대상 신생아의 97.1%에서 관찰됐다. 발생위치는 엉덩이 및 몸통 부분이 97.3%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팔(1%), 다리(0.8%), 가슴과 등(0.7%), 머리와 목(0.2%) 등의 순이었다.
눈길을 끄는 건 우리나라 갓난아기의 몽고점 발생률이 같은 몽골계인 일본이나 중국보다 크게 높았다는 점이다. 인종별 몽고점 발생률은 일본 81.5%, 중국 86.3%, 미국 인디언 62.2%, 서양인 6.2%였다. 갓난아기들에게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경계가 불투명하면서 연한 핑크빛의 반점으로 나타나는 '연어반'이었다. 혈관종의 하나인 연어반은 조사 대상 신생아의 30.8%에서 관찰됐는데, 위치는 뒤통수(62.8%), 눈꺼풀(34.9%), 이마(15.2%) 등의 순서로 많았다.
이밖에 얼굴과 몸에 빨갛게 발진이 일어나면서 태열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신생아 중독성 홍반'은 출생 후 48시간 이내에 10.2%에서 관찰됐다. 이 홍반은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었지만, 미숙아(4.2%)보다 만삭아(10.7%)에서 발생률이 높았다.
신손문 교수는 "한국의 신생아에게 몽고반점이 많은 것은 유전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면서 "하지만 몽고반점 발생률이 높다고 해서 우리가 더 순수한 몽고 혈통이라고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결과를 담은 논문은 대한신생아학회지 최근호에 발표됐다.
소고기 내주고, 자동차 챙기다 1225 시사인
한국·오스트레일리아 FTA가 내년부터 발효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제조업, 한국은 축산업의 피해가 불가피하지만 ‘주고받기’가 이뤄졌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금융·교육 등 서비스 산업 수출을 적극 모색 중이다.-최승광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국제관계학 박사과정
지난 12월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국·오스트레일리아(호주) FTA 비준 동의안이 통과됐다. 이로써 한·오스트레일리아 FTA는 내년부터 발효하게 된다. 한국의 6대 교역국(2013년 기준)이자 최근 5년간 연평균 10% 이상 가파른 수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시장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처지에서도 4대 교역국이며 3대 수출시장인 한국과의 FTA가 발효되면, 2011년(260억 달러) 이후 계속 감소세인 대(對)한국 수출에 반전을 모색할 수 있다.
양국은 당초 한·오스트레일리아 FTA 협상이 순조로울 것으로 기대했으나 최종 비준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오스트레일리아 FTA의 공식 협상이 개시된 것은 2009년이다. 그러나 당시 큰 논란이었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둘러싸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해 3년 넘게 공식 협상을 중단했다. ISD는 상대국이 투자협정상 의무를 위반해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을 경우 그 투자자가 상대국을 대상으로 국제중재를 청구하는 제도다. 오스트레일리아는 2004년, 미국과 FTA를 맺을 때도 이 조항을 협정에서 배제했다. 자원 부국으로 외국인 투자가 많은 자국의 특성상 ISD를 허용했다간 자칫 정부의 규제권은 물론이고 자원산업(오스트레일리아의 국가전략 산업)에 대한 통제권까지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국 측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對)오스트레일리아 직접투자와 오스트레일리아 진출 한국 기업의 권리 보호를 위해 ISD 조항의 삽입을 양보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오스트레일리아 소고기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FTA 발효 전에도 거의 60%에 이르렀다.
3년간 교착 상태였던 한·오스트레일리아 FTA 협상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 계기는 지난해 9월 오스트레일리아의 정권교체다. 노동당에서 자유당으로 6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는데, 신정부가 ISD 조항에 동의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 관계인 일본과도 ‘경제동반자협정’을 맺었다. 내년 4월 발효를 앞두고 있다. 한·오스트레일리아 FTA 비준안이 올해 통과되지 않았다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본과 경합 중인 자동차, 가전 등 주요 한국 제품의 시장 입지가 좁아질 수 있었다.
한·오스트레일리아 FTA에 따른 양국의 경제적 득실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 소고기의 한국 시장 점유율 확대(협정에 따르면 2030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산 소고기에 대한 관세를 점진적으로 철폐하게 되어 있다)를 기대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소고기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FTA가 발효되지 않은 현재에도 거의 60%에 이른다. 이미 FTA가 발효 중인 미국 소고기의 두 배 정도다. 이로 인해 한국 축산 농가가 받을 피해는 명확해 보인다. 농촌경제연구원 FTA센터장인 정민국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국내 한우 농가는 물론 (소고기의) 대체재인 돼지고기 생산자들도 피해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관세 철폐로 인한 오스트레일리아산 소고기의 가격경쟁력 강화(가격 인하)가 단지 오스트레일리아산뿐 아니라 전체 수입 소고기 시장을 키우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축산 농가의 피해 가능성을 무릅쓰고 한국이 오스트레일리아와 FTA를 체결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산품의 수출 증가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5%에 이르던 관세가 FTA 발효 즉시 철폐된다. 덕분에 현재 20억 달러 규모인 대(對)오스트레일리아 자동차 수출액이 발효 첫해부터 1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현대자동차는 일본 마쓰다 자동차를 제치고 오스트레일리아 시장에서 점유율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광산·교통·에너지·통신 등 오스트레일리아 내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에 대한 한국 기업의 투자가 더욱 용이해지는 것도 한·오스트레일리아 FTA 발효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오스트레일리아 FTA로 10억 달러 이하에 대해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별도 심사 없이도 투자가 가능해진다. 양국 정부는 이번 FTA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모든 FTA 중 최고라고 자평할 정도다. 한국은 축산업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제조업에서 피해가 불가피하지만, 이는 양국 간 ‘주고받기’가 제대로 이뤄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국, FTA 효과 극대화하려는 노력 모자라
그러나 한국 정부는 외형적인 성과를 넘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략적 노림수도 파악해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전통적으로 금융·교육·법률 등 서비스 산업의 강자다. 이런 서비스 산업들을 상대적 약자인 한국 시장에 수출할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연합뉴스 울산 현대자동차 선적 부두의 수출 자동차들. 현대자동차는 오스트레일리아 시장 점유율 3위다.
교육 서비스 산업(한국인 등 외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영어 학교에 등록하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육 서비스 수출이라 할 수 있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한국에 대한 5대 수출 부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빠르게 위축되어왔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의 통화가치가 오르면서 교육·관광 산업(주요 고객인 외국인 처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달러 가치가 오르면 그만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광·교육 서비스에 쓰는 비용이 증가한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더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한 한국 학생들이 연이어 피살되면서 한국에 부정적 여론이 조성된 탓도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유학생 수는 2011년 3만1000여 명에서 올해 1만4000여 명으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레일리아 신정부는 이른바 ‘뉴 콜롬보 플랜’으로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교류 증진을 추진 중이다. 한·오스트레일리아 양국 관계에서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내 한인 사회와의 스킨십을 높이려는 노력도 본격화했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이번 FTA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이 공산품의 수출 실적 확대나 자원 확보에만 만족한다면, 이번 FTA로 인한 국내 축산 농가의 피해와 희생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부 알려진 분야의 기대 효과를 넘어서 국익과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좀 더 포괄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민관 협력이 필수적이다. 민관을 아우르는 전방위 교류 협력 전략을 통해, 다양한 부문의 상품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한편, 가장 취약한 서비스 부문에서도 국익을 선제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이미 무역수지 적자인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교역 구조가 더욱 나빠질 수 있다. 2013년 현재, 한국의 오스트레일리아 교역 규모는 303억 달러로, 무역수지 적자가 112억 달러에 이른다.
물론 이 같은 숙제를 단시간에 해낼 수는 없다. 우선 양국의 미래인 청소년들이나 대학을 비롯한 교육 연구기관의 교류 등을 더욱 확대해서 양국 시민 간 접촉 공간을 넓힐 필요가 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육·관광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소비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 서비스 산업을 수출하는 노력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 때이다.
유승찬의 눈]우리 사회 민주화의 수준 1230 주간경향
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위기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라는 허울 속에 살아왔다. 그것의 핵심적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최근에 개헌 논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개그처럼 가볍게 흘러갔다. 국가의 미래를 송두리째 고민하는 개헌 논의는 없었고, 그저 하나마나한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가 잠시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건드렸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터진 사건이 정윤회씨의 문건 스캔들이다. 이런 껍데기 개헌 논의가 사그라진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는 박근혜 정권 출범 2년 동안 끝없는 인사 스캔들에 휘말려 왔다. 권력의 인사 문제는 사실상 권력 그 자체의 문제이고, 최근 들어 더욱 중요해진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이다.
정윤회 스캔들은 단지 사적인 ‘썸씽’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매우 역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1년 예산 370조를 운영하는 국가권력의 핵심 요직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누가 어떤 이유로 합리적으로 집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핵심 이슈가 바로 인사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윤회 스캔들이 마치 아침 드라마처럼 희화화되는 순간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여당은 침묵하고 야당은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있다. 여당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또 하나의 권력 의혹을 향해 근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권력의 사유화 가능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문화다. 야당은 이명박 정부의 사자방으로 잠시 잡았던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검찰발 정윤회 사건을 그저 ‘게이트’라고 명명하는 것에 스스로를 안주시키고 있다.
사자방을 덮기 위해 정윤회 문건 파동이 나왔고 정윤회 문건 파동을 덮기 위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나왔다는 항간의 음모론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하는 매우 희극화된 자화상이다. 최근 한 달간 트위터와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뉴스 소비의 한 패턴은 마치 누군가에 의해 절묘하게 연출된 이슈 컨트롤이라는 음모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트렌드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이 한창이던 최근 조현아 전 부사장 파동이 권력형 인사 이슈를 어떻게 잠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항간의 의혹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한 검찰 대응은 느슨하고 미미하며 변죽에 그친 반면 조현아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검찰 대응은 빠르고 민감하며 전면화하고 있다는 비교를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야를 떠나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의 유효함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은 크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재벌 중심의 기업이나 서열화된 사회구조는 아직 봉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청와대발 비선 특권 의혹이나 대한항공 조현아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어떤 정파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수준을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사자방을 덮기 위해 정윤회 문건 파동이 나왔고 정윤회 문건 파동을 덮기 위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나왔다는 항간의 음모론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하는 매우 희극화된 자화상이다.
한겨레사설] ‘연대와 대중성 회복’이 진보개혁세력의 살길1230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결정은 우리 사회 진보개혁진영에 무거운 짐을 안겼다. 헌재 결정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의 심각한 훼손이며,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데엔 박근혜 정권의 퇴행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 상황과는 별개로, 진보개혁진영의 잘못은 없었는지 냉철히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진보개혁세력이 대중적 기반을 좀더 단단히 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진보개혁진영에선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진보 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 원탁회의’가 열렸고,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국민모임이 발족했다. 통합진보당 재건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기에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오는 2월 당 지도부를 새로 선출하는 중요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야당의 지도체제 개편과 새로운 정당 추진, 진보 정당의 재건, 박근혜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 등이 얽혀 있는 복잡한 형국이다.
집권세력을 견제·비판하는 방향으로
제1야당의 지리멸렬함으로 인해 현 정권의 폭주를 적절하게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흐름이 출현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통합과 연대’란 기치만으로 이런 움직임을 막을 명분은 현실적으로 없다. 모든 야권 정당이 하나의 우산 아래 헤쳐모이든, 다양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진로를 모색하든 그건 각 정치세력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모든 정치세력이 마음에 담아야 할 몇 가지 기본 원칙은 있다고 본다. 우선, 박근혜 정권이 시대를 거슬러 나가는 상황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움직임은 이를 막아내는 데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는 점이다. 현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분산시키는 쪽으로 진보개혁진영 재편이 진행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헌재 결정 이후 야당 일부에서 제기하는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실패론’은 적절치 않다. 서로 정치적 지향은 달라도 큰 틀에서 현 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데엔 한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얻은 48%의 국민 지지엔 새정치연합 지지자뿐 아니라 다양한 진보 정당 지지자들의 표가 함께 섞여 있다. 그 의미를 특히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념 지형이 새누리당에 절대 유리한 우리 정치현실에선 폭넓은 연대만이 진보개혁세력의 집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둘째,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 당이 제시했던 전향적인 정책들을 계승하는 데 인색해선 안 된다. ‘종북 프레임’ 때문에 통합진보당에 무조건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통합진보당 내부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적 행태는 거센 비판을 피하기 어렵지만, 경제·노동·복지 등 분야에서 기성 정당을 뛰어넘는 의제를 제기해 정치적 지평을 넓힌 공로는 결코 작지 않다. 요 몇년간 우리 정치권의 핵심 이슈인 ‘경제민주화’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도 통합진보당이었다. 이런 점이 통합진보당과 그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한때 국회의원 총선에서 13%에 달하는 정당득표율을 얻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통합진보당 정책의 긍정적인 부분들은 진보개혁세력이 포용해야 할 대상이지, 거리를 둘 대상은 아니다.
대중 불신 자초한 책임 철저히 반성해야
셋째, 통합진보당의 문제점에 대해선 당의 핵심 그룹뿐 아니라 진보개혁진영 내부에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진영 내부의 잘못에 눈을 감는 건 잠시는 괜찮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론 진보개혁세력 전체의 대중적 토대를 약화시킨다. 내부 비판을 강화하는 게 오히려 진보진영을 건강하게 하고 새로운 전진의 토대가 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어느 순간부터 정책보다 당내 패권싸움이 국민의 시선을 끄는 당이 됐다. ‘대중적 진보정당’에서 대중이 소거된 것이다.
유권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해야 하는데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그러질 못했다. 북한 인권 문제나 3대 세습에 침묵하는 듯한 모습은, 아무리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조직으로선 잘못된 태도였다. 누구나 신념에 따라 정치활동을 할 자유가 있으며, 통합진보당 인사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믿지만,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정치활동을 재개하더라도 이런 부분에 대한 반성과 혁신 없이는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 바란다. 사법적 판단에 의해 정당이 강제해산되는 사태까지 온 데엔 무기력한 제1야당의 책임이 작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얻은 지지율만큼이라도 현 정권을 제대로 견제했다면 지금처럼 전방위적으로 민주적 가치의 후퇴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곧 새 당대표를 뽑기 위한 경선에 들어간다. 다양한 가치와 세대를 대변하는 경쟁구도를 기대했지만, 지금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소리를 들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럴수록 당대표 선거가 과거 회귀적으로 흐르거나 지역 대결 또는 친노·비노 싸움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새정치연합이 계속 진보개혁세력의 중심추가 될 수 있느냐가 이번 전당대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보다 더 이상한 '박근혜 나라'1230 프레시안
[주간 프레시안 뷰] 저급한 통치술이 부른 퇴행의 시대
붉은 여왕에게 손목이 잡혀 뛰고 또 뛰는 엘리스보다 고달픈 한 해였습니다. 동화 속 '이상한 나라'에선 죽어라 뛰면, 제자리는 유지할 수 있다더군요. 우린 거꾸로 가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다 보니, 정방향의 역설도 모자라 유신의 1970년대로 후진하는 세상까지 경험하나 봅니다. '퇴행의 정치'가 2014년의 눈부신 하드웨어를 무색케 하는 세(歲)밑입니다.
2013년 이맘때, 박근혜 정부는 철도노조 강경 진압과 통합진보당 사건 등 살풍경으로 임기 첫해를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가에서 시작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안녕하지 못한 모든 이들의 마음과 공명했었죠.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미생>이 울림을 얻는 가운데 '종북몰이' 광풍이 몰아치는 박근혜 정부 2년 차 연말이 지난해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올해의 정치 분야 5대 뉴스를 꼽아보니, 우린 틀림없이 거꾸로 가는 나라에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세월호 참사
▲ <타임>은 2012년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를 '철권 통치자의 딸'(The Strongman's Daughter)이라며, 표지기사로 다뤘다. ⓒ타임 홈페이지
절대로 출항해선 안 될 배가 진도 앞바다 거친 물살에 침몰했습니다.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됐습니다. 구조된 사람은 '0'. 희생자 대부분은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고 했습니다. 국가는 70명을 구조했던 1993년 서해 훼리호 사건 때보다 무능했습니다. 허둥대다 72시간의 '골든타임'을 허비했습니다. 무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책임도 회피했습니다. 비정규직 선장과 반(半) 백골로 발견된 유병언 씨 일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정부의 실패를 외면했습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흘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이었는지, 악어는 알까 모르겠습니다. 6.4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박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의 면담 요구조차 싸늘하게 외면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유족들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던 세월호 특별법이 기약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당 의원들이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는가 하면, 일부 보수단체 인사들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죠.
정권과 언론이 조장한 세월호 피로감에 난데없이 이념 논란으로 치환된 세월호 특별법은 숱한 부침을 겪다, 참사가 발생한 지 206일 만인 11월 7일에서야 국회에서 처리됐습니다. 그 사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아직도 진상조사위 구성 등에서 마찰음이 들립니다. 새누리당은 공안검사 출신 인사들을 밀어 넣으려 합니다. 내년에 활동에 들어갈 진상조사위가 중도 파행으로 끝난 국회 국정조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는 까닭입니다. 해를 넘기며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시간을 1900년 전 중국의 후한(後漢)말로 되돌린 듯 한 사건이 권력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11월 28일 <세계일보>의 보도로 이른바 '십상시'로 명명된 환관 정치의 내막이 세상에 추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비선 실세'로 통하는 정윤회 씨가 청와대 십상시들과 인사 개입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내용의 청와대 공식 문건이 알려지자 정권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은 정윤회 씨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회장 사이의 권력 암투설로 발전되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승마 선수인 정 씨의 딸에 대한 특혜설을 뒷받침하는 정황과 함께 박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에 대한 인사를 직접 지시했다는 점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궁중 야사'와 같은 정치 막장극으로 정 씨와 박 회장,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섰습니다. 불과 집권 2년 만에 발생한 권력의 심각한 균열 징후에, 콘크리트 같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지층에서조차 뚝뚝 떨어져 집권 후 최저 수준인 30퍼센트(%)대까지 추락하기에 이릅니다. 그 어느 정권보다 심한 박 대통령의 불통이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 레임덕이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청와대 공식 문건을 "찌라시"라고 자기 부정하며,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세 차례나 가이드라인을 쳤습니다. 검찰은 권력 암투의 실체, 문건 내용의 진위보다 문서 유출 경위에 대한 수사에만 치중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최 모 경위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의 회유가 있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죠. 결국 검찰 수사는 일개 경찰관 한 명의 거짓말에 청와대가 놀아났다는 어설픈 결론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6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파문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쏟아지는 쇄신 요구를 또 얼렁뚱땅 넘어가려 합니다. 이러다보니 2015년 '쌍끌이 특검'(세월호 특검, 정윤회 특검)을 예상하는 말이 일각에서 나오는 거겠죠.
■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종북 마녀사냥'은 전가의 보도인가 봅니다. 2013년 정부가 느닷없이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청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로 봤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무리한 송사가 1년 동안 진행되더니, 끝내 정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빚었습니다. 공교롭게 헌재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한 12월 19일은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일부 인사들의 토크 콘서트를 '종북'이라고 규정하며 예고편을 띄운 뒤였습니다.
헌재의 결정은 심각한 파문을 낳고 있습니다. 1987년 '헌법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탄생한 헌재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헌법을 파괴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만으로도 '역사의 퇴보'로 기록될 만합니다. 혹자는 이번 헌재의 결정을 보며 국회 해산과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을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이는 다시 "자유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며 헌재 결정을 환영한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과 겹칩니다.
'법의 언어'라고 볼 수 없는 논리적 비약과 적의에 찬 문장들로 결정문을 채운 헌재의 보수성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9명 중 단 한 명을 제외한 무려 8명의 재판관이 그저 '관심법'으로 통진당을 북한의 지령을 받는 정당으로 규정하고,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마저 박탈했으니 논란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헌재의 결정 이후 보수단체는 10만여 명에 달하는 통진당 당원 전체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가히 '공안 광풍'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가장 저급한 통치술의 단면입니다.
▲ 2013년 8월 '손문상의 그림세상' ⓒ프레시안(손문상)
■ 인사 파동
박근혜 정부의 온갖 불통 논란은 예외 없이 '인사(人事) 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안대희, 문창극 두 국무총리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국무총리의 후임자 하나 찾지 못해 짐을 쌌던 정홍원 총리가 '부활(?)'하는 일까지 벌어졌죠. 안대희 전 후보자는 5개월 동안 무려 16억 원의 수입을 거둔 고액 전관예우 논란으로 제풀에 고꾸라졌습니다. 게다가 총리가 되면 변호사로서 벌어들인 11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돈으로 총리자리를 거래하느냐는 비판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문창극 전 후보자의 낙마는 현 정부 최악의 인사 참극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총리 발탁 하루 만에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민족 비하성 과거 발언이 공개돼 거센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문 후보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며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서겠다는 고집을 부려 불난 데 기름을 붓기도 했죠. 초유의 총리 후보자 연쇄 낙마에 김명수 교육부장관 후보자의 제자 논문 표절 의혹까지 드러나 박근혜 정부의 인사정책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정 총리의 유임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은 꼴이 됐습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세월호 참사 직후 국무회의 자리에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해 미운털이 박혔다고 합니다. 이임식도 없이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유 전 장관의 후임으로 청와대는 정성근 후보자를 발탁했으나, 음주운전 및 사생활 논란으로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정윤회 비선개입 의혹 정국에서 유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의 지시로 문체부 국·과장을 인사 조치했다고 폭로해 박 대통령을 다시 한 번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차갑게 내친 유 전 장관과 달리, 박 대통령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소위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 비서관들은 여전히 감싸고돕니다. 2015년 초 개각설이 나오고 있지만, 김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이 교체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 야당의 실패
불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무한 독주를 허락한 야당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3월 안철수 세력과 민주당이 합당한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호랑이를 잡겠다며 호랑이굴에 들어간 안철수 의원은 기초선거구 무공천을 주장하다 명분도 실리도 잃고 '호랑이밥' 신세가 됐습니다. 질 수 없는 선거라던 지방선거에서 패한 데 이어, 7.30 재보선에서도 공천 파동으로 패배를 자초해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는 4개월 단명으로 끝났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기계적으로 결합한 야권의 불완전 재편은 이처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합당의 흔적만 당명에 덩그러니 남기고 익숙한 야당의 모습으로 빠르게 회귀했습니다.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야성을 보이지 못한 새정치연합은 안철수-김한길 대표 체제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도 맥을 못 췄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 와중에 원내대표를 겸하던 박 위원장이 돌연 탈당 운운하며 사흘간 잠적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누더기가 되어간 과정에는 이 같은 야당의 전략 부재와 내부 갈등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뒤를 이었지만, 비상하지 않은 비대위 체제의 일상화는 새정치연합의 무기력한 현재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5년 2월로 예정된 새정치연합의 당권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도전장을 낸 이들은 저마다 혁신을 외치는가 하면, 집권의 토대를 닦는 데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결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수언론을 통해 야당에 대한 악의적인 프레임이 가동된다는 점을 감안해도 아직까지는 친노와 비노 세력 간의 이전투구의 양상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야당의 실패는 야당만의 실패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비극입니다. 야당이 달라지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의 임기 3년 차도 올해보다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야당의 재정비로부터 정치가 제 기능을 하는 2015년을 기대해보겠습니다.
최민수 “법 상식 무너진 사회 최소한의 도리”…MBC 연기대상 수상 거부 파장 1231 한겨레
배우 최민수가 <문화방송>(MBC)이 주최한 연기대상 황금연기상 수상을 거부했다. 최씨는 “아직도 차가운 바다 깊숙이 갇혀 있는 양심과 희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면서 세월호 참사를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민수는 “유가족들은 힘내시라. 나 역시 그 슬픔을 함께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민수는 30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사옥에서 진행된 ‘2014 엠비시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오만과 편견>으로 황금연기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최민수 대신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백진희가 갑자기 대리 수상자로 나섰다.
백진희씨가 대리수상자로 나섰지만, 막상 그가 전달한 최민수의 수상 소감에는 ‘수상 거부’의 뜻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최민수의 소감문은 그가 현재 연기하고 있는 드라마의 배역인 인천지검 부장검사 ‘문희만’의 이름으로 쓰여졌다. 문희만 부장검사는 검사의 본분을 지키려 갈등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최민수는 이 글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하게 해주신 MBC, 김진민 감독, 이현주 작가에게 감사드리며, 드라마를 사랑해주시는 시청자들께 감사 말씀 전한다”고 하면서도, “허나 다른 때도 아니고 요즘은 제가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뭐 잘한 게 있어야 상을 받죠 그죠? 해서 죄송스럽지만 이 수상을 정중히 거부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최민수의 소감을 전하던 백진희는 곧이어 “죄송하다. 뒷부분은 못 적었다”고 소감 발표를 끝냈다. 최민수가 휴대전화 문자로 소감문을 보내와 이를 출력해 대신 발표하려 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출력물이 없어져 급하게 펜으로 앞부분만 다시 적어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백진희는 “존경하는 선배님은 (수상을) 거부하셨지만 제가 정중히 전달하겠다”고 대리 수상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이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 전개에 이런저런 뒷말이 따라붙었는데, 이날 밤 연예매체 <스타뉴스>가 최민수의 ‘수상 거부 소감문’ 전문을 보도하면서 최씨의 뜻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진희가 읽지 못한 뒷부분에 세월호 참사와 연관된 듯한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최민수는 소감문 뒷부분에 “아직도 차가운 바다 깊숙이 갇혀 있는 양~심과 희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나 할까요? 법과 상식이 무너지고 진실과 양심이 박제된 이 시대에 말입니다”라고 썼다.
31일 최민수가 한 언론 인터뷰에 응하면서 시청자들의 짐작은 사실로 확인됐다. 최민수는 이날 <오마이스타>와 한 인터뷰에서 “세월호를 언급한 게 맞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들 모두의 가슴 속엔 슬픔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고, 나 역시 그 중 한 명으로서 수상의 기쁨을 내 몫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며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들은 힘내시라. 나 역시 그 슬픔을 함께 하겠다”고 했다. 또 “백진희가 수상 소감문을 잃어버린 게 맞다. (시상식 이후)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눈물을 펑펑 흘리기에 괜찮다고 말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엠비시 관계자는 이날 <한겨레>와의 전화 통화에서 “(회사가) 수상자의 수상소감을 미리 체크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현장에서 실제 (소감문을) 분실하는 바람에 (수상 거부 소감문을 완전히 발표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수상 거부 문제와 관련해선 “회사가 공식입장을 밝힐 건 없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최민수의 수상소감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민생안정팀 부장 문희만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런 의미 있는 작품을 하게 해주신 MBC, 김진민 감독, 이현주 작가에게 감사드리며 무엇보다도 '오만과 편견'을 사랑해주시는 시청자들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더불어 우리 인천지검 민생안정팀에게도요.
허나 다른 때도 아니고 요즘은 제가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뭐 잘한 게 있어야 상을 받죠 그죠? 해서 죄송스럽지만 이 수상을 정중히 거부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차가운 바다 깊숙이 갇혀 있는 양심과 희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나 할까요? 법과 상식이 무너지고 진실과 양심이 박제된 이 시대에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 '오만과 편견'을 끝까지 사랑해 주실 거죠? 그죠.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시멘트 12 15 한겨레
“조선이 점차 개발됨에 따라 근래 ‘세멘토’의 수용이 더욱 증가하여 1년간 이입량이 약 2천만통에 달하고… 조선인들은 이를 대개 분묘에 이용하는데 일반 조선인이 장래에 이 세멘토를 사용하게 되면 그 수용은 막대히 증대하리라더라.”(<매일신보> 1915년 8월25일)
시멘트는 ‘부순 돌’이라는 뜻의 라틴어 ‘카이멘툼’(caementum)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건축용 접착제 일반을 뜻했다. 인류가 건축물에 접착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석고와 모래를 섞은 접착제가 사용되었다. 가장 오랫동안 널리 사용된 것은 석회인데, 주된 건축 재료가 흙과 나무였던 우리나라에서도 석회는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시멘트라 부르는 것은 1824년 영국에서 ‘발명’된 포틀랜드 시멘트로서, 석회석에 점토 등을 섞어 구운 이 물질을 물과 섞어 굳히면 포틀랜드산 석재와 비슷한 색깔이 났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 포틀랜드 시멘트가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고 철도 부설 공사가 진행되던 19세기 말에는 흔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에 개시된 덕수궁 석조전 공사에는 1867년 프랑스에서 처음 개발된 철근 콘크리트도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시멘트 생산이 시작된 것은 1919년 함경남도 문천군에 건설된 오노다 시멘트 공장이 가동하면서부터다. 이 공장은 당시 조선 내 공장 중 최대 규모였다. 시멘트 산업은 1960~70년대 압축 성장에도 견인차 구실을 했다. 새마을운동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사업이 추가된 것은, 생산 과잉으로 고심하던 모 시멘트 회사 사장이자 ‘권력 실세’였던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는 학설도 있다.
현대인들, 특히 대도시 주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멘트가 주성분인 콘크리트 벽체 안에서 보낸다. 건물 밖 대로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역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다. 그래서일까? 옛날에는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진다고들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식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분신자살에 무덤덤한 사회 7.21. 한겨레21 제1020호]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신주쿠 한복판에서 시도된 자위권 반대 분신자살… 권력에 맞서 맨몸뿐인 사회적 약자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지만 ‘죽음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반응마비의 결과’
2011년 11월3일 중국 쓰촨성 간쯔현 타우의 거리에서 중국의 지배에 항의하며 몸을 불사른 티베트 비구니. 자유티베트학생연합에서 찍은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2009년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80명 이상의 승려가 분신자살을 꾀했다. AP
지난 6월29일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7월9일치 <도쿄신문> 보도에 따르면,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63살의 남성이다. 그는 그날 오후 1시께 육교에 올라가 확성기를 들고 “70년 동안 평화로웠던 일본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집단적 자위권으로 일본이 망가지고 있다”고 말한 뒤 러일전쟁기의 반전시인 요사노 아키코(謝野晶子)가 전쟁터로 떠난 동생을 기리는 시 ‘당신이여! 죽지 말라’를 낭독한 다음, 페트병에 담겨 있던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쓰러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중태다.
“지지도 공감도 할 수 없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미디어의 보도가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주요 신문들은 대부분 단신으로 다루었고 공영방송 는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거의 묵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전염 효과’를 우려했을 것이다. 분신자살이 사회적으로 퍼져나가 이른바 ‘모방자살’로 이어지는, 즉 ‘베르테르 효과’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역시 아베 신조 정부의 해석개헌에 대한 반대 여론이 퍼져나갈 것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도 이 소식이 급속하게 퍼져나간 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이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동영상과 목격담 등이 뒤덮었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자살 방법이 준 충격 때문이었다. 21세기 일본에서 정치적 항의의 뜻을 지닌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다니! 옴 진리교 분석으로 유명한 평론가 에가와 쇼코(江川紹子)는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티베트가 아니다”라며 “지지도 공감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을 포함한 아베 정부의 폭주에 비판적 견해를 줄곧 밝혀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분신자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티베트처럼 언로가 막혀 있는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일본처럼 의견 개진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2009년 이후, 티베트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80명 이상의 승려가 중국 공산당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저서 <자살>에서 ‘희생적 자살’을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 행위라며 이에 분신자살을 포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희생적 자살이라는 행위는 권력의 부당함을 사회에 알려 권력의 의지를 꺾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자는 무고하고 순결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희생적 자살이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자살자가 죽음을 통해 알리려는 사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이거나,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깨달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전자가 언론 자유의 문제라면, 후자는 가치의 문제다. 해석개헌을 감행하려는 아베 정부의 행보는 이미 언론을 통해 전해진 사실이니 해석개헌에 반대한다는 이 남성의 폭로는 폭로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치판단의 문제만 남는다.
집단 내부의 특징과 밀접한 자살
하지만 결과는 ‘희생적 자살’이 가치판단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기보다는 기왕에 존재하는 가치판단의 틀이 ‘희생적 자살’에 대한 시각을 결정해버리는 쪽으로 이어졌다. 즉 해석개헌에 찬성하던 사람은 해석개헌 찬성이라는 입장을 지키기 위해 방법의 극단성·과격함을 근거로 가치까지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 했고, 해석개헌에 반대하던 사람은 민주적 절차에 대한 믿음을 방패로 ‘주장에는 찬성하나 방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양자 사이에는 분신자살이라는 방법의 극단성에 대한 거부감이 공통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부감이 ‘생명 경시’나 ‘생명 불감증’, 혹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증폭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당황시킨 것은 분신이라는 사회적 항의 수단이 일본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주변 반응이었다. 그래서 분신자살이 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라는 비아냥도 SNS에 등장했다. 자살 방법에 대한 문화적 기제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 즉 자살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한 형식이다. 특정 집단의 자살률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게 혹은 낮게 나타나는 것은 그 집단 내부의 사회 구성의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살률은 빈곤·차별·경쟁이 심해 유동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높게 나타나고 사회의 안정성이 높을수록 낮게 나타나는 법이다. 하지만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사회에서도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문화적 기반이 강고하게 실생활에서 작동한다면, 자살률 상승이 상대적으로 억제될 수도 있다. 일본은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문화적 기반이 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책임을 지는 방식의 하나로 자살을 용인하는 문화적 풍토가 어느 사회보다 강하고, 사적 형벌의 하나로 죽음을 강요하는 ‘강제적 자살’ 풍토도 있다. 가미카제나 자살공격 같은 ‘광기’는 적을 죽이려는 의지를 동반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살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전쟁 말기에 나타났던 집단자살은 이를 강제하는 문화적 풍토에서 이뤄진 것이다. 또 ‘셋푸쿠’나 ‘하라키리’라 불리는 할복자살의 형식도 있다. 할복이 일본만의 전통은 아니다. 중국과 한국에도 있고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이 일본의 문화적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때로는 사회적 항의의 수단으로, 때로는 궁극적 책임짓기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무사도>(1900)에서 “영혼이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복부를 칼로 찌르는 행위가 “예로부터 해부학적 전통”이라 말한 데서 비롯됐다. 과거를 특정 시공간으로 호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통’인 것이다. 이 때문인지 국가주의자나 천황주의자 같은 극우파는 항의·충성·책임·매듭 등의 표시로 할복을 택했다. 1945년 8월15일 패전 직후에 많은 우파들이 할복자살을 택했지만, 역시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뒤에도 심심치 않게 극우파들의 할복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렇게 보면 할복은 일본 극우파의 고유한 자살 방식이다. 좌파나 자유주의자 중에 자살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할복이라는 방식을 택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분신자살은 어떠할까?
우파의 할복, 좌파의 분신
1967년 11월11일 오후 6시께, 다음날로 예정된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미국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데모대가 속속 모여들고 있었던 도쿄 도심 나카타초. 총리 관저 앞 사거리에서 한 노인이 가슴에 가솔린을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화염이 살을 파고들었고 노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노인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노인의 이름은 유이 주노신(由比忠之進).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 태어났으니 사건 당시의 나이는 73살이다. 유이는 유서 등을 통해 분신자살의 이유를 밝혔다. 두 가지였다. 베트남 인민을 학살하는 미국에 반대하고 미국에 협력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였고, 미군의 베트남 폭격 기지였던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는 1920년대부터 에스페란토의 열렬한 신봉자이면서 활동가였다. 그는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열린 정치 공간’의 틈새가 만들어낸 국제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전시에 만주의 일본 기업에서 이른바 ‘식민자’로 일했던 부끄러운 경험에 대한 성찰이 평화주의·민주주의·국제주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고 이런 믿음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알베르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오늘날 모든 행동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모두 살인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듯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이 베트남 인민 학살에 가담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고, 그 현실에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과 그 일본에 가담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 듯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해 유이의 행동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논의를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선거를 통해 비판하는 것에 있다. 어떤 형태이든 직접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분신이었을까? 유이 이전에 일본에서 분신자살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연이나 불륜, 개인적 원한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적 분신자살로는 유이가 일본에서 첫 번째다. 역시 1963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승려들의 연이은 분신자살, 즉 소신공양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때부터 분신은 숭고한 사회적 항의 수단으로 세계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1965년 앨리스 허즈라는 퀘이커 평화주의자 여성이 베트남전 반대를 내걸고 분신자살을 감행했고 이후 미국에서 8명이 허즈의 뒤를 이어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196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얀 팔라흐라는 청년이 소련의 군사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가솔린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일본에서도 정치적 분신자살 사건이 뒤를 잇는다. 1970년 10월6일 신주쿠 부근에 자리한 신사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194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재일조선인 2세였다. 1975년에는 빈민활동가 후나모토 슈지(船本洲治)가 오키나와의 가데나 미군기지 앞에서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적군파 활동가인 에모리 다카오(檜森孝雄)는 2002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분신자살을 했다. 정치적 우파로 분류되는 자위대 출신인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郞)가 1969년에 분신자살한 사례는 매우 예외적이다. 이처럼 사회적 항의 수단으로서의 자살에도 우파와 좌파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에서 차용한 할복자살이 우파라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서 비롯된 분신자살은 인터내셔널리즘을 드러내는 자살 방법이다.
죽음의 평균화, 수많은 자발적 죽음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자살 중에서도 분신은 총칼과 제도로 무장한 권력에 대해 맨몸뿐인 사회적 약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기는 하다. 언로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희생적 자살’이 논리적·이성적 행위라는 전제 아래 그 자살을 통한 저항이 효과를 거두려면 자살이, 혹은 분신이 사회적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의 숭고한 희생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 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己)가 “죽음의 일상화”는 “죽음의 평균화를 낳아” 결국은 “그 압도적인 양에 의해 반응마비를 결과한다”고 말한 바 있듯이, 분신자살의 문제는 그 방식의 극단성이나 과격함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자발적인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 ‘희소성’을 잃으면서 당사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저항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반핵 09.01 한겨레21 제1026호]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2] 비정치적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반핵통일전선,
‘순수성’으로 인해 운동 폭을 넓혔지만 운동 분열도 가져와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에선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여러 행사가 열리는데 그중에서 일본의 피폭 경험을 ‘반핵평화’라는 이른바 보편적 의지로 의제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행사가 바로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다. 이름 그대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지구상에서 없애기 위해 일본은 물론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반핵평화에 대한 의지를 담아내는 집회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으로부터 69년째인 올해에도 8월4일부터 6일까지 히로시마에서 세계대회가 열렸다. 제1회 세계대회가 1955년에 열렸으니 59년째다.
승무원 23명이 뒤집어쓴 ‘죽음의 재’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이 세계대회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기관에 의해 주최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원수폭금지 일본협의회(겐스이쿄, 원수협), 또 하나는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겐스이킨, 원수금)이다. 원수협은 공산당계고 원수금은 옛 사회당계다. 원수협이 결성돼 제1회 세계대회를 개최한 것이 1955년. 사회주의 핵무장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분열된 것은 1963년이다. 그리고 1965년 사회당계가 떨어져나와 원수금이 결성됐다. 두 기관이 공동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한 1977~85년을 제외하면, 이때부터 항상 두 개의 세계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보수계 평화단체인 KAKIN(옛 핵금회의)을 더하면 일본에는 반핵단체가 세 개나 존재하는 셈이다. 반핵에도 여러 길이 있다는 뜻일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에서 비롯된 일본의 반핵 세계대회는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반핵집회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반핵운동의 분열을 체현하는 대회이기도 하다. 어떤 배경에서 반핵운동 단체가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1945년 8월6일 우라늄형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히로시마? 아니면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일에 플루토늄형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나가사키?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1946년부터 매년 8월이면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고 평화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피폭 이야기가 퍼져나가 반핵·반미 여론이 형성될 것을 우려해 그물망 같은 검열 정책을 펼친 미군 점령기(1945~52)에는 ‘자유롭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 거주자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구체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음에 따라 공개적인 반핵운동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다. 히로시마·나가사키는 피폭 경험에서 보면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비극을 끄집어내 이를 ‘현재’의 문제로 삼아 운동으로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도쿄 스기나미(杉)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스기나미를 원수폭 금지 운동의 ‘발상지’라고까지 부른다. 때는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3월1일, 비키니섬 동북부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배 제5후쿠류마루가 미국이 인근에서 실험 중이던 수소폭탄에 의해 다량의 ‘죽음의 재’를 뒤집어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흔히 ‘비키니 사건’ ‘제5후쿠류마루 사건’으로 불린다. 승무원 23명이 피폭당했고 이 중 1명은 반년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패류를 사러 시장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고, 특히 참치는 ‘방사능 참치’라 불리면서 전량 폐기됐다. 어민, 상인 그리고 주부들의 충격이 컸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이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 지도자인 미야모토 겐지는 이를 ‘원폭희생민족’이라 형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4년 5월 스기나미 공민관에 주민 38명이 모여 ‘수폭금지 서명운동 스기나미협의회’를 결성한다. 이 모임은 8월에 ‘원수폭금지 서명운동 전국협의회’라는 전국조직으로 발전했고, 이 협의회를 주축으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펼쳐져 연말까지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은다. 이 대대적인 서명운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1955년 8월에 개최된 것이 바로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다. 이 대회에 참가한 인원은 5천 명.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정파와 단체들이 참여했다. 좌파는 물론 자민당이나 신토 연합 같은 우파도 이름을 올렸다. 굳이 말하자면, 반핵 통일전선체와 같은 대회였다.
차이를 뛰어넘기 위해, 불가사의한 선언문
스기나미에서 시작된 서명운동이 1955년 제1회 세계대회로 이어져 히로시마·나가사키가 반핵평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사회의 반핵 여론이었다. 반핵 여론의 확산은 일본을 세 번의 피폭을 당한 비극의 ‘순교자’로 구체적으로 자리매김하면서도 동시에 반핵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의제를 탈정치화·추상화함으로써, 즉 운동의 ‘순수성’을 강조해 운동의 폭을 넓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1950년대 말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 위기가 외부적으로 미국과의 안보조약 개정 문제가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추상적인 반핵운동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1955년 스나가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 위키피디아 사진
한마디로 “정당, 정파, 종파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핵철폐 운동을 펼친다는 대회의 기본 원칙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이 기본 원칙은 앞서 결성된 ‘스기나미 협의회’의 선언문에 나와 있는 “서명운동은 특정 당파의 운동이 아니고, 모든 입장의 사람들을 잇는 전 국민 운동”이라는 기본 원칙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반핵운동을 대표하는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는 특정 정파나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활인의 관점에서 비정치적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반핵통일전선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계대회의 모태가 된 스기나미 협의회의 결성선언문을 읽어보면 몇 가지 불가사의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평화’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일 안보조약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사회의 큰 쟁점이던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같은 원전 관련 단어도 없다. 어떻게 보면 무색무취한 추상적인 반핵 의지를 일반론으로 담아냈을 뿐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왜일까? 물론 우연은 아니다.
서명운동을 이끌고 선언문 작성에 관여했던 야스이 가오루(安井郁) 도쿄대 교수는 선언문 원안의 취지를 설명하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핵서명운동은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원자력과 인류”의 대립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선언문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원전이 “원수폭 (무기의) 제조에 이용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며, 또 “평화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서명운동의 순수함을 혼동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핵무기를 가진 미국이나 소련을 비난하지 말자, 쟁점이 되고 있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말자,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자, 일본은 세 번의 피폭을 당했다, 이대로 가면 인류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모아 전세계에 호소하자, 핵무기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일본 반핵운동의 1차 분열
주최 쪽이 반핵운동의 폭을 넓히고 분열을 막기 위해 얼마나 부심했는지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흔적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1956년 제2회 세계대회(8월)를 앞둔 3월에 도쿄에서 ‘원수폭 금지 일본협의회 전국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배포된 ‘다른 평화운동과의 관련’이라는 토론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이 기록돼 있다. “원수협은 어디까지나 운동을 넓혀나간다는 관점에 서서”, 원수폭 금지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만, “이 방침을 구체화할 때, 운동의 폭을 좁히거나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가 오래갈 수는 없었다. 다른 사회운동과의 관련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부터 공선제에서 임명제로 바뀐 교육위원 제도하에서 일본 정부는 교원에 대한 근무평가 제도를 도입하려 했고, 이에 대해 일본 교직원 조합을 중심으로 맹렬한 반대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1958년부터는 경찰직무집행법을 개정해 경찰의 수사재량권을 대폭 넓히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에 대해 대규모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 우치나다 투쟁(1949~57)이나 스나가와 투쟁(1955~68)과 같이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1960년 미국과의 안보조약 개정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외부적으로는 미-일 군사동맹 강화가 점쳐지던 시기였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다른 운동과의 관련을 ‘부정’하고 추상적인 반핵 구호로 일관하는 비정치적 반핵운동이 존립하기는 어려웠다. 좌파 쪽에선 근무평가 도입 반대운동, 반기지 운동,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에 원수폭 금지운동도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파 쪽에선 원수폭 금지운동의 ‘순수성’을 들어 이에 반대하는 구도가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1958년부터 본격화한 대립 구도 속에서 결국 자민당 등의 보수파가 이탈했고 이들 중 일부가 1961년 ‘핵병기금지 평화건설 국민회의’라는 반공주의적 반핵단체를 결성한다. 일본 반핵운동의 1차 분열이다.
좋은 핵과 나쁜 핵
이렇게 보면 일본 반핵운동의 고양을 이끈 것도 반핵운동의 분열을 가져다준 것도 반핵운동의 ‘비정치성’, 즉 ‘순수성’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비키니에 핵무기를 사용해 일본에 구체적인 핵 피해를 가져다준 것은 미국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미-일 군사합작의 구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하고 있었다. 주일미군기지도 안보조약도 모두 미국의 핵전략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통일전선적 반핵운동의 고양을 이끈 ‘순수성’ 혹은 ‘비정치성’이란 이런 현실에 눈감겠다는 의지 표명과 다름없었다. 아니면 핵에도 ‘좋은 핵’과 ‘나쁜 핵’이 있어, 히로시마·나가사키·비키니에 투하한 핵은 ‘나쁜 핵’이고 일본을 지켜주는 미국 핵은 ‘좋은 핵’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보수파가 이탈한 제1차 분열은 ‘거대한 분열’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1963년 사회주의 핵무장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평화운동 진영을 엄청난 혼란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의 종’은 어떻게 울렸나 [12.22 한겨레21 ㅍ제1041호]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2] 원폭 투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인 나가이 다카시,
과학자이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천황주의자이기도
나가사키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중국 남부지방 푸젠에서 유래했다는 나가사키 짬뽕이나 나가사키 접시우동? 혹은 포르투갈에서 유래했다는 나가사키 카스텔라? 혹은 나가사키현 사세보에 자리한 유럽을 본뜬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 나가사키 하면 떠오르는 ‘이국’ 냄새 물씬 풍기는 이런 단어들은 길고 길었던 ‘쇄국’ 체제하에서도 ‘데지마’라 불리는 ‘섬 아닌 섬’을 통해 네덜란드나 중국 등과 꾸준히 교역을 하면서 키워왔던 나가사키의 개방적인 문화를 드러내준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의 그림자도 있다.
분노의 히로시마, 기도의 나가사키
나가사키 항구에서 불과 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하시마라는 섬은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를 노예처럼 혹사시킨 탄광 등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군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칸지마’(군함섬)라고도 불렸고 또 섬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 노동자가 끊이지 않아 ‘감옥섬’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헤엄쳐 바다를 건너려 했던 조선인 노동자 중 육지에 무사히 상륙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앨커트래즈(Alcatraz)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최근 일본 일각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삭제하고 일본 근대 산업혁명의 성공 이야기만을 부각시켜 ‘군칸지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관련 흔적 중 히로시마와 다른 것은 가톨릭 관련 유적이다. 평화공원 근처에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교회 우라카미 천주당이 자리하고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피해자 묵념을 하고 있는 일본 학생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또 다른 역사의 그림자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나가사키는 1945년 8월9일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곳이다. 이러다보니, 나가사키에도 근대적 유적과 함께 원자폭탄에 얽힌 평화공원이 있고 도서관과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히로시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원자폭탄에 얽힌 역사의 흔적이 나가사키에서는 쉽게 눈에 띈다. 바로 가톨릭 관련 유적들이다. 평화공원 근처에 자리한 우라카미 천주당은 신도 수 7천 명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교회다. 원자폭탄으로 이 성당은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때마침 고해성사 미사 중이던 사제와 부사제를 포함한 신도들이 모두 사망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의 ‘가톨릭 도시’ 공격
히로시마에는 우라늄형 원폭 ‘소년’이,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형 ‘뚱뚱보’가 각각 투하되었고, 히로시마에서는 이후 5년 동안 약 20만 명이 사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이 중 조선인 희생자는 약 10%로 추정된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동일하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도시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과 방향은 다소 다르고, 또 두 도시 간에는 피폭 체험을 둘러싼 묘한 ‘경쟁 구도’가 있다. 히로시마가 스스로를 ‘인류 최초의 피폭도시’라 하면, 나가사키는 반핵에 대한 미래의 의지를 담아 ‘인류의 마지막 피폭도시’라 한다. 히로시마가 스스로를 ‘평화도시’라 하면, 나가사키는 ‘국제문화도시’라 한다. 일본에서 원자폭탄의 비극을 표현할 때, 히로시마 나가사키라고는 하지만 나가사키 히로시마라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시간적 선후를 기준으로 나열한 것이지만, 이 순서가 때로는 피폭 체험의 위계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학자 다카하시 신지는 나가사키를 히로시마와 대비해 ‘열등 피폭도시’라고까지 말한다.
두 도시의 피폭 경험과 그 계승을 대비시킬 때, ‘분노의 히로시마’와 ‘기도의 나가사키’라는 말도 잘 쓰인다. 물론 이같은 대비가 반드시 실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히로시마가 동적이고 격정적인 반핵운동의 이미지라면 나가사키는 정적이고 은인(隱忍)의 이미지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사실 나가사키가 ‘기도’로 형용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앞서 말한 우라카미 천주당이 자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나가사키는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가 2006년 현재 일본 전역에 약 45만 명이 있는데 이 중 나가사키에 6만5천 명(나가사키 인구의 4.4%)이나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메이지유신(1868년) 앞뒤로 약 6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순교했으니 나가사키는 가톨릭 박해의 성지이고 신앙의 장소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 성당인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겨우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가톨릭 신자의 희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국가’ 미국이 일본의 기독교 중심지를 원자폭탄으로 공격한 셈이다.
사실 미국이 원래부터 나가사키, 그중에서도 가톨릭 신자가 밀집 거주하던 우라카미 지역을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나가사키에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고쿠라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가 날씨 때문에 나가사키로 목표를 수정했고, 나가사키의 옛 도심을 표적 삼아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지만 이 원자폭탄이 예정 궤도를 벗어나 당시 변두리였던 우라카미 지역에서 폭발했다. 우라카미에는 옛 도심에 거주하던 나가사키 토박이들의 차별 때문에 가톨릭교도나 피차별 부락민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니 이들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결과이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은 가톨릭과 분리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기도’라는 말로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형용하는 것은 역사적 경위를 생각할 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고 해서 피폭 경험이 바로 ‘기도’라는 말로 자동 수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나가사키’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 나가이 다카시(永井隆·1908~51)가 있다.
» ‘기도의 나가사키’를 만들어낸 것은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도 1949년 번역돼 쇄를 거듭할 만큼 인기 있었던 〈나가사키의 종〉은 최근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로 재발간되었다. 한겨레 자료, 권혁태 제공
우라카미 천주당 근처에 ‘여기당’(如己堂)이라는 소박한 목조건물이 있다.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탐험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일본어로 ‘뇨코도’라 읽는 이 집은 ‘여기애인’(如己愛人)의 줄임말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의사이자 작가인 나가이 다카시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약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집필한 곳이다. 나가이는 1908년 의사의 아들로 시마네현에서 태어났으니 나가사키 토박이는 아니다. 의사의 길을 걷기 위해 나가사키의과대학에 입학해 나가사키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가 스무 살이 되던 1928년 무렵이다. 이후 그는 공부에 매진해 1940년에는 모교 교수로 부임했고, 1944년에는 모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때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길을 걸은 셈이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 연구에 매진하다가 1945년 6월에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1945년 8월에는 원자폭탄으로 머리를 크게 다치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의 길과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작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권력자에게 유리한, 이중의 면책 언설
피폭자는 피폭자라는 하나의 모습으로 그려지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다양한 삶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나가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의사이고 과학자(원자물리학)이면서 작가였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피폭자로서 원자폭탄에 부정적이었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전)을 과학자로서 적극 지지했다. 또 그는 독실한 신자답게 원폭 투하를 ‘신의 섭리’로 해석하고 희생자를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는 ‘어린 양’으로, 그리고 이 의식을 ‘번제’(燔祭·홀로코스트)라 했으며, 살아남은 피폭자들에게는 원폭 투하를 ‘하느님이 내린 시련’이니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도=은인=자중’을 주장하는 이같은 나가이의 언설은 후일 학자들에 의해 ‘우라카미 번제설’로 명명되었다. 나가이의 주장을 한 가톨릭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나가사키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절절히 담은 <나가사키의 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신앙고백’이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대표하는 언설로 자리잡았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은 후일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나가사키 피폭자인 시인 야마다 칸(1930~2003)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으로 향해야 할 “민중의 원한”을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달래는 미국 쪽의 데마고기에 가담하는 언설이라 비판했고,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도 ‘신의 섭리’는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 무력화하고 싶어 하는 권력자에게 유리한 언설이라 비난했다. 또 사회학자 다카하시 신지는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은 천황의 전쟁 책임과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무화하는, ‘이중의 면책’ 언설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 <나가사키의 종>(1946년 집필)이 출간된 것은 1949년 1월이다. 원자폭탄 관련 서적의 출간을 엄격히 금지하던 미군정의 검열 체계가 강력히 작동되던 시기다. 미군정은 일본군에 의한 필리핀 주민 학살을 다룬 ‘마닐라의 비극’이라는 보고서와의 합본을 조건으로 출간을 허가했다. 아마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과 원자폭탄의 비극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신의 섭리’를 내세우는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이 원자폭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무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미군정은 생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같은 사정이 반영된 탓인지 1949년에 당시 천황 히로히토는 병석에 누워 있던 나가이를 병문안했고 나가이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 가톨릭 신앙과 신토라는 ‘종교 아닌 종교’ 이데올로기, 근대 과학과 전근대적 군주, 평화에 대한 믿음과 천황의 전쟁 책임 사이에서 그가 갈등했던 흔적은 없다. 과학자이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천황주의자이기도 했다. ‘기도의 나가사키’는 적어도 나가이에게는 천황주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천황주의자를 감추고 싶은 이들
<나가사키의 종>(이승택 옮김·삼일출판사)은 1949년 8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고 1950년 2월까지 7쇄를 거듭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겨우 반년 만에 한글 번역판이 나온 셈이다. 오사카대학원 서윤아씨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신문에 “원자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 해방 후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보자!”라는 광고가 실렸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이 책은 2011년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그런데 1949년 일본어 원판에 “우라카미가 잿더미가 되는 순간 비로소 하느님은 이를 받아주시고 인류의 잘못을 들어주셔 바로 천황 폐하에게 하늘의 계시를 내려 종전의 성스러운 결단을 내리도록 해주신 것입니다”로 되어 있는 나가이의 발언이 2011년 한글 번역판에는 “우라카미가 폭격에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것을 받으시고 온 인류를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드디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종전을 허락하셨습니다”로 되어 있다. 즉, 나가이가 했던 ‘천황 폐하’라는 말이 삭제돼 있는 것이다. 나가이에게서 천황주의자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일본과는 다른 맥락에서 한국에도 있는 듯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북 노동신문 같은 조선일보 1231 미디어오늘
[조선일보 팔불취] ‘통합진보당’ 변론맡은 변호사는 서울교육청 감사관 안된다고? 변호인의 조력권 문제 삼는 게 ‘헌법부정’
대한민국 인권상식 하나. 어떤 국민이라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 ‘변호인이 조력할 권리’ 역시 헌법상 보장되는 권리. 그러나 조선일보 기자에겐 이런 권리가 상식이 아닌 듯.
<통진당 해산 반대 변호인, 서울교육청 감사관 임명돼 논란>이라며, 통합진보당을 변론한 변호사는 서울교육청 감사관의 자격이 없다는 주장의 기사를 게재.
살인범이든, 강간범이든 그 어떤 흉악한 범죄자라도 조력하는 것이 변호사에게 주어진 민주국가의 헌법적 권리이거늘, 이 권리를 행사한 변호인에게 국민의 기본권인 공무담임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은 ‘장성택’을 체포 며칠 만에 전격 처형한 북한 김정은 체제 하 노동신문에서나 가능할 정치보복논리.
조선일보는 “정치중립 지켜야 할 자리에 정치적으로 예민한 종북문제에 관여한 인물이라 부적절하다”는 정치중립논리 내세웠는데, 하지만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변호사로서 변론활동이 무슨 상관인지 밑도 끝도 없는 이념성 비약 논리 아닌가. 그게 논리라면,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의견 낸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도 헌법재판관 옷 벗겨야 할 듯.
극과 극은 서로 닮아간다더니 2014년 마지막 날까지, 이념에 절은 논리비약 기사 내보내는 조선일보 사회부, 새해에는 이런 기사 자제 요망.
조선일보 12월 31일 14면 기사
[다시보기 팔불취 : 12월 30] 조선에 ‘SOS’ 노동부장관, 이래서 ‘장그래 양산법’?
○…‘장그래 양산법’이라 비판받는 ‘비정규직 대책법안’ 내놓은 이기권 노동부 장관. 종합일간지 중 유일하게 조선일보와 인터뷰했는데, 노동자들의 반발 크게 일자 긴급히 SOS 치는 모양새. 이 장관 인터뷰에서 “계약기간 연장(2년→4년)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고용유연화 정책이 아니다”라며 성난 비정규직 노동자 달래기 나섰으나, 이를 어쩌나 이 장관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
평소 재계 입장 주로 대변하는 조선일보 통해, 노동부 장관 얘기 들을 수많은 장그래들, 비정규직 위한 법안이라는 장관의 해명이 곧이 곧대로 들릴까? 오히려 ‘꽃놀이패’ 쥐고서 ‘반대 입장’ 발표해 더 따낼 것 없는지 관망하고 있는 재계에 힘 좀 실어 달라고 하는 이 장관의 SOS는 아닐지 의심만 생길 듯.
조선일보 2014년 12월 30일 A3면
○…‘통일이 미래’라는 미래지향적 아젠다를 내놓고서도, 사안에 관계없이 언제나 대북불신감을 노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갖고 있는 조선일보. 1월 남북당국 대화하자는 정부의 대북제안을 북측이 수용하라고 촉구하는 사설 제목, 중앙일보 사설 제목과 비교하면 불신감의 강박관념 잘 드러나.
조선일보 12월 30일 사설
북측의 대화 수용을 촉구하는 조선일보의 사설과 동일한 내용이면서도 중앙일보는 남북의 대화와 상생을 명분으로 상대방을 대화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표현의 제목을 사용하는 데 반해,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대화 상대방에 주는 동냥 받으라는 듯 일방적이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표현. 남북 간 대화는 누구에게 좀 더 이익이냐 따질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 표현대로 ‘통일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이니 만큼, 불신감을 먼저 표출하기보다 성사시킬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는 것이 현명한 언론의 역할일 듯.
중앙일보 12월 30일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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