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2014 벌초 후기

by 이성근 2014. 8. 31.

 

고향은 늘 편안하다.  그런데 정작 나 태어난 마을보다 이모집이 있는 중장마을이 더 안기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유년시절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큰이모님은  나를 자식처럼 말 안들으면 꾸짓고 때렸다고 허는데 그런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나들이는 벌초길에서 비롯됐다. 

벌초길은 이맘때의 고속도로  정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막내여동생 내외가 같이 했다.  차가 의령군 정곡면 예둔리 들녁을 지나는 중이다.  일대에 500년 묵은 감나무가 있는데 늘 스친다.  

정곡을 지나 막실재로 향한다. 보도연맹 학살지가 이 골짝에 있다. 

고향 마을앞 신촌삼거리, 우측으로 빠지면 마두와 옥동, 판곡, 당동  유곡 면사무소가 있다.  그 길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20대 초의 내 모습도 떠오른다.

송산을 지나 신송산교를 건너면 이모가 있는 중장이다.  방학때면 한달음에 뛰어가던 내 유년도 보인다.  그 다리 밑에는 70년대 동네주민들이 새마을 공사 한다고 지게며 광주리에 돌을 져다 나르던 모습도 보인다.

1년 정도 안왔을 뿐인데 송산2구 중장에도 변화가 있었다.  대규모 감물 염색업체가 들어 왔다.

대규모라고 한 것은 작업공정을 보고서 였다.  각지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2008                                                                                                           2013

이모집 뒤에 있던 논 대부분을 장악했다.  어릴적 보리밭 넘어 꿩머리가 보이고 가끔식 사촌형들이 꿩알을 주워 오곤 했다.  

부추꽃이 만개했다.

아침겸 점심을 서둘러 먹고 장곡으로 향한다.

어머니 최여사의 고향이다.  거기에 외조모, 외조부 산소가 있다.   외조부 산소는 가끔 와서 벌초를 했다. 

몇 해전서부터 어머니는 일대에 있는 외증조부 산소까지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길이 만만찮다.  아버지는 그 길에 막걸리병이나 패트병을 나무가지에 꼽아 두어 흔적을 남겼는데 웃자란 가지들이 패트병을 감추어 버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이길이 맞네 아니네 다투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이 골짝까지도 다 논이었다고 한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는 땅은 묵정논이 되었다가 이제 아예 숲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사람의 육신도 몇 해가 지나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토가 되는 마당에 땅이란 것, 거기에 들어와 뿌리내리는 식물들의 천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아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

외증조부 어머니의 할아버지 묘다.  웃자란 풀들을 낫질로 베에내고 어머니 인사를 한다. 그 곁에 아버지 담배 한대 피우고

산뽕나무를 휘어감은 칡의 줄기들 마치 타잔이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두번째 외증조모 산소를 찾아 가는길 역시 한번에 찾아가질 못했다.

쓸어진 나무가 무덤위에 있어 이 또한 치워야 했다. 결국은 가족들 모드가 달라붙어 무덤 가장자리로 밀어 냈다.  어머니는 그제사 개운해 했다

모자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벌초길은 야생초 학습의시간이기도 하다. 막내아들에게 식물의이름과 특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개암열매를 따는 중이다. 이날 가족들은 굴참나무 아래서 꽤나 많은 도토리를 주웠다.  아마도 추석 때는 도토리 묵을 맛 볼 수 있을 듯하다

일본 개잎갈나무도 식재되어 있다.

숲의 정상부 에는 적송들의 군락이다.

각종 나물들이 지천에 깔렸다. 우산나물, 취나물, 참취, 수리취, 삽주 등

외조모산소에서 벌초를 하다 그만 낫에 손가락을 베었다.

해발 250을 넘는 정상부에 산소는 있었다.  후손발복 때문이다. 함안조씨 할매  한번도 뵌적이 없다. 

허기가 져서 반쯤 베다 말고 준비한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작업을 재개했다.

정리를하고 어머니, 어머니를 부른다. 그리고 神을 마주한 듯 자식들의 앞날을 살펴주실 것을 당부한다. 

외손자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산을 내려와 가장 가까운 곳에있는 외조부 산소로 향한다.

달포전에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미리 해둔 벌초, 하만 그사이 풀들은 고개를 비쭉 비쭉 내밀고있다.

와가 집터로 향한다.

제일 오른쪽 집이 외가터다. 안쪽 사랑채도 보인다.  보이는 노들이 예전에는외가집 논이었다고한다.  천석지기 였으니 먹고 사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 장가오던 때를 떠올리며, 어머니 갈래머리적 시절을 이야기 했다. 

어머니가 마을로 들어서 집집마다 인사를 하러 다닌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 보았다. 이 또한 풍경이 되었다.

오후4시가 넘어어야 이모댁으로돌아 왔다.  막내를 데리고 유곡천으로 나와 물놀이도 하면서 땀에 절은 몸을 씻었다.

유곡천에는 수수미꾸리도 살고, 버들치, 갈겨니,피라미도 흔히 보인다. 밤이면 동사리를 비롯하여 메기도 고인물에서 보인다. 

하지만 물빛이 예전만 못하다. 축사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오염물의 유입이 많아졌다.

날이 저물고

지난 번 비에 떠내려 온 나무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고 몸을 뎁히기도 했다.  그 사이 물뱀이 스쳐 지나갔다.  불놀이에 빠져 저녁 먹어로 오라는 호출을 두번이나 어겨 식구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 보다는 아들과 같이 짧은 시간이나마  불을 피우고 강가에서 보낸 시간이 더 소중했다.

어버지와 매제,성서방이 티브를 보는 동안 이모님과 어머니는 향후 산소 관리를 할 것인지 늦은밤까지 옛이야기 더불어 나누셨다.  기억에 남는 대목이 어머니 어린날 이린 큰 외삼촌이 어머니께 했다는 말이다 . 예컨데 그때  어린 외삼촌 두 분과 어머니 모두 과거로 몸시 아플때 였다.  외조모님이 아이들이 아픈 와중에도 당시 큰집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며 어린 외삼촌을 데리고 갈려고 했다고 한다.  외삼촌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기어코 데리고 나선 모양이었다.  한데 삶은 달걀이야기가 나왔다. 외조모님이 어리 외삼촌들에게 계란 삶은 것을  먹어라고 주자 외삼촌이 누나도 줘라 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다. 외조모님이 어머니에게도 계란을 주시긴 한 모양이지만 어머닌 드시지 않았다고 했다. 어쨌든 이후 두분 어린 외삼촌은 한밤중 흰 광목에 쌓여 집을 나섰고 대신 이렇다할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한 어머니는 살아 남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남동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아마도 이렇게 해마다 산소 방문하는 것이 외삼촌의 몫을 대신하는 것 같다며 알듯말듯한 말을 하신 것이다.   그 시절 중장 큰이모는 집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른 채 허구한 날 소먹이러 다니셨다고 한다. 

그밤에 시골 밤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기 위해 나선 밤 마실길  막내가 물었다. 아빠는 시골이 좋냐 우리집(부산)이 좋냐?  그리고 우리가족괴 일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뭘 선택하겠냐고  당돌한 질문에 잠시 멈추어 다시 하늘을 바라 보았다

벌초 둘째날, 서둘러 신촌으로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산책길에 나선다.  사방이 안개다.

그 사이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와 이모 그 너머 아침햇살이 구릉을 넘어선다.

양파를 넣은 닭도리탕 요리를 두 분이 준비중이시다.  어떤 비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은 늘 맛이 있다. 이는  누구라도 공히 인정 하는 바,  심지어 지난 밤 막내는 무려 세 그릇이나 비웠는데,  된장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된장 찌개에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다.  양파와 고추가 전부였다.    

집뒤 염소우리, 지금까지 본 우리 중에 최고 화려하고 멋진 우리였다.  문짝만 하더라도 어디다 견줄 것인가

어디나 마찮가지겠지만  중장도 빈집이 늘고 있다.   세째 여동생과 곧잘 어울렸던 이쁘장한 애가 있던 집이다. 

일대는 신촌 우리집과 마찮가지로 박씨들이 담장을 경계로 집안을 이루고 있다. 

사람 살지 않는 빈집 마당에 들깨와 아주까리가 키를 높이고 있다. 그 마당에 뛰어놀던 내 유년이 보인다.

안개가 서멀서멀 기어다니는 집앞 들  이슬머금은 나락 더불어  무리지어 핀 부추꽃들,  이런 풍경이 늘 그리웠다.   

 

공기가 다르다 

서서히 아침이 열린다.

선령에는 벌써부터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진동했다.  늘 먼저 와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늘 늦는 사람도 있다.

사람 좋은 창호 오촌 아제, 나이차가 있으나 거의 같이 성장했다.  

그리고 낯선 얼굴도 보인다.  서울팀인데,  서울 오촌 아제의 사위와 아들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숙모와 삼촌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해구 아제와 양산 쓴 모라 아지메

얼추 작업이 끝나고 음복주를 마신 다음 각 집안의 사위들이 친지들에게 인사를 나눈다.

매제 성서방은 우리집 둘째 아들로 격상 되었다.  어머니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신다.  그만큼 잘 한다. 어른들 헤아릴 줄 알고  가려운데를 잘 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나는  낙제다. 허나 기실 그것 역시 말 못할 사정 때문이고,  그 사정이란 것도 물질적으로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과는 달리 거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성격상 안되는 부분도 있다.  처가집에 성서방 반만큼이라도 했다면  그냥 웃는다.

올해 벌초는  특별하다.  보다 효울적인 관리운영을 위해 '선령사랑회'를 결의하고 논의했기 때문이었다. 

각자 차려온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회의에 들었다.

준비된 안건은 다수결에 의해 통과되었고 회장 이창도,  총무 이성근을 비롯하여 감사가 선임되었다.   70대 이상은 회비 면제를 결정하는 한편 회장 직권으로  재정의 안정적 운용을 위해 어느 정도  적립 전까지는 추가적 사업을 동결했다.   

갈길이 멀고 피곤했기 때문이겠지만, 임원의 선정이나  회의 진행은 너무 거칠었다.  신상발언의 기회도 없이 집안일이니까 로 던져 졌다.  2년의 임기가 있지만 개인적으론 원치 않았던 소임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총무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야 했다.  여기에 기존 체제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부족했다.  반면 기존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소통이 전제된  수용과 베품은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사전에 논의 안건이  배부되어 숙지는 되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선령 관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정은 났다. 다들 원칙적으론 이번 모임에 대해 긍정하나  각론에서는 마음들이 편치못한 모습이었다. 상곡천 골짜기 물들이 합류되는 지점에 누군가 피리 낚시를 걸어 놓았다.  보아하니 몇 마리 잡힌 듯하다.  문득 그런 생각했다.  일이란 이렇게 하느 것 아닌가  예컨데 길목을 잡고 장치를 통해 잡아들이는 것처럼 ...

수변의 환경이 엄청 변했다. 달뿌리 풀들이 대거 점령한 형태다. 물을 여과하는데는 도움이 될련지 몰라도  이상해졌다. 

나 태어난 집터 집은 없고 마당과 집이 들어선 자리에 들깨만 가득하다 . 씁쓸하다.

 

Pharrell Williams - Happy (12AM) / 1: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