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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2013년 묘사

by 이성근 2013. 11. 17.

 

11월17일 일요일 의령 유곡면 신촌리 합천이씨 시월 묘사(墓祀) 관계로 고향을 찾았다.  아침 10시, 집안 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차량은 도시고속도로에 올리면서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정체였다.  8시에 집을 나섰지만 도착한 것은 11시 반이었다.  평소같으면 길어야 두시간이었지만 다들 조상 섬기기를 중요사로 여긴듯 남해고속도로는  몰려든 차량으로 만원이었다.

고향가는 길이 지루했지만 막상 막실재를 앞두고 또 다른 설레임이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길에도 전에 없던 안내표지판 하나가 들어섰다. 이 골짝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사연인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고개 를 경계로 유곡면과 정곡면으로 나뉜다.  유년 시절 이 골짝에는 귀신 베짜는 골 부터 시작해서 여러 무서운 이야기들이 회자되었다. 그래서 잘 가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어쨌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 의령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로 소집되거나 연행되었다. 이중 일부는 의령경찰서를 거쳐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7월 22일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으며, 남은 80여 명은 7월 31일 트럭에 실려 나가 정곡면 중교리 막실재와 지정면 보갈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미군의 철수와 함께 인민군이 의령지역을 점령하자 8월 10일부터 13일, 그리고 8월 22일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 용덕면 정동리 등에 폭격이 가해져 피난민을 포함하여 주민 70여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미군은 낙동강에서 인민군의 도하를 막으려던 미 24사단 19연대를 근접지원하고 있었으나 마을 인근에 인민군은 없었다."

 

의령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7.22

마산 앞바다

 

CIC

 

1950.7.31

막실재 등

80

 

 

폭격

1950.8.10~22

상일리 등

70

미군

 

출처: 한국전쟁유족회                                                     조사: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유족회 자료에 따르면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  의령에서 죽임을 단한 숫자는 전체 희생자수에 비해 많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골짝에도 전쟁의 광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유족회가 처음 만들어 진 것은 이승만 정권 때였다. 그렇지만 1961년 이 단체는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가 만든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유족회 간부가 기소가 되었고, 1962년 기소자 28명 중 15명 유죄 판결 (이원식 사형, 그 외 6년 이상 중형)을 받았다.  그 뒤 유족회 활동 무산 되었는데,  2000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전국유족협의회 결성을 통해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족의 한 맺힌 사연과 원통함이  1961년 제정한  구호에서도 감지된다.  "무덤도 없는 영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다음은 유족회 홈페이지에 있던  민간인 학살개요를 임의 편집하여 옮긴 글이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전면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유족회 간부들이 붙들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학살은 또다시 은폐되었다. 당시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새롭게 출범한 장면 정부에서 미흡하나마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진행하려던 계획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운 5.16 쿠데타정권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만들어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은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여 북을 이롭게 하고 좌익용공 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유족회 간부들에게 사형, 무기 등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이들에게 ‘특수반국가행위’죄를 적용하여 사형 1명(전국유족회 회장 이원식, 나중에 감형), 징역 15년 3명 등 수십 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게다가 유족들을 검거하면서 유골발굴일지와 유골 수집철,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족회원 가입명단, 학살자 고발장, 유골 상자 등 학살진상규명에 결정적 단서가 될 관련 기록물들을 남김없이 압수, 폐기하여 (5.16 군사정부 포고령 제18호) 이후의 학살 진상조사를 원천 봉쇄했다.  또 피학살자들의 합동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내다버리고 비석을 뽑아 부수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다.

 

이로써 민간인학살은 다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 사항이 되었고, 1987년까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학살의 은폐와 왜곡은 불행히도 가해 집단만의 소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살 만한 위치를 선점한 온갖 인간들이 그에 가세했고, 이 땅의 민초들도 살기 급급하여, 혹은 살기 위하여, 혹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침묵으로 그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피학살자의 가족도, 친족도, 이웃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그에 함께했고, 이 땅의 양심들도,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이 땅의 사회운동가들도 ‘현안이 시급하므로, 어려운 문제라서, 먼 일이라서’운운하며 진실 밝히기에 나서지 않았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 고통스런 기억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가며 재구성되었다.  악의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등재되며 자라는 세대들의 정신마저도 옭아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고,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병든 사회의 제일 금기가 되었으며, 언론도, 학자도 심지어는 사회 운동가들까지도 이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왜 죽었는지 그 이유라도 알자’는 유족들의 소박한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실, 번번이 압살되긴 했지만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실을 알 권리는 국제 인권법에서도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천부적 권리로서, 알 권리의 침해 역시 심각한 인권침해로 간주된다.  피해자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던 진실의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상규명요구 압살도 천부적 권리를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묻혀 있던 민간인학살 문제가 침묵을 깨고 다시 제기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서서히 열리면서부터다..."

 

그런 것 같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에 연재중인  관련 글을 보면 ... 더욱이 이 시절이 또 한번의 겨울인듯 하다. 

날이 추워서 인지 불을 피워 놓았다.  기온이 많이 떨어 졌다.  하기사 예전에는 눈이 내린 적도 있었다.

시조 강양군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조 증조 ... 나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삼촌들 까지 두루 절을 올렸다.

바람이 불었고 상수리나무를 흔들었다.  낙엽이 회오리바람에 날려 하늘 높이 솟았다.

음복을 하고 출석과 함께 회비를 걷는다.

그리고 종사의 주요 사안을 자유롭게 이야기 하지만,  가능한 말을 아낀다. 

진입로며 현장 창고 대용 컨테이너 박스  설치,  효과적인 벌초에 대한 방안과 적정한 비용규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어떤 결정이 났는지 잘 모르겠다. 다들 필요성은 느끼는데 현재 적립한 기금이 많지 않다보니 의견이 존재했던 것 같은데 ...

묘사는 오후 2시경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기막힌 의무감 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송산으로 향했다. 정미소에 쌀을 찧어 가야 하기 때문에, 한 20년 전에는 신촌교 옆에 정미소가 있었다.   

보통 논 한마지기(약 200평)에 80kg 2.5~3가마 정도 나오는데, 우리집 논은 두 마지기 반 정도이다.  이날 아버지가 집에 가져온 쌀은 전체 수확량의 3분의1정도이다.  여기에 삼촌집, 딸 집에 한 포대씩 주고 보니,  실제 양은 더 줄어든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을 주는데,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소작하는 사람이 7이나 6하고 지주는 3이나 4를 가진다.

쌀값이 개갑 보다 못하다.  그래서 농민들이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통계청의 ‘2012년산 쌀 생산비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논 10a(1000㎡·300평)당 벼 생산비는 71만2523원으로 전년보다 8만4268원(13.4%) 늘었다. 농약비는 줄었지만 종묘·비료·위탁영농비 등이 늘어 직접 생산비가 21.3% 증가했다. 지난해 쌀 80㎏당 생산비는 11만6754원으로 전년보다 1만8723원(19.0%) 증가했다.

 

지난해 논 10a당 총 수입은 98만8515원으로 집계됐다. 여기에서 생산비 71만2523원을 빼면 순수익은 27만6291원이다, 2011년 33만9886원에 비하면 1년새 6만3595원(-18.7%) 줄었다. 10a가 1.5마지기인 점을 감안하면 논 한 마지기당 순수익은 18만여원에 불과한 것이다.

 

의령군 2013년산 공공비축미곡 매입계획 홍보에 의하면

매입기간 : 2013. 9. 23 ∼ 2013. 12. 31(100일간)

- 산물벼 : 2013. 9. 23 ∼ 11. 15

- 포대벼 : 2013. 10. 21 ∼ 12. 31

매입곡종 : 동진1호, 일미벼

 

 매입가격(우선지급금)                                                                                                  (단위 : 원/벼 40kg)

구 분

특등품

1등품

2등품

3등품

포대벼

56,820

55,000

52,560

46,780

산물벼

56,000

54,180

51,740

45,960

※ 전년도(1등급 기준) 49,000원

 

매입규격(포장단량)

- 산물벼 : 산물벼를 건조중량 환산식으로 적용

- 포대벼(알속무게) : 40kg, 800kg(규격포장재에 담아 출하)

품위규격 : 수분 13.0 ∼ 15.0로 건조된 벼

논 10a당 순수익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50만원을 넘었지만 매년 줄어 10년새 반토막이 났다. 물가 인상률 등을 감안하면 수익 감소 폭은 더욱 크다. 농민이 대접받지 못한 세상은 문제가 많다.  먹을거리 태반을 수입해서 먹고 그것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은 또 다른 주권의 상실이다.  

궁류 방면에서 흘러 오는 유곡천, 70년대 인근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에 동원되어 돌들을 져다 나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중장 (신송산 2구) 큰이모집 뒷산, 겨울 밤 수리부엉이가 부엉부엉 울었다. 이모님은 이날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는 바람에 뵙지 못했다.  이종사촌들이 이모님의 연세를 고려하여 제주 나들이를 간 것이다. 또 제주로 이사한  형이 있기 때문이다. 

송산 큰길, 옛 문헌상에는 미요리(未要里) 구역인데 지금의 계현, 마현, 상촌, 송산, 장곡, 중장 등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을터가 온통 소나무 숲이었다고 한다. 한때 솔미니 솔뫼로 불렀던 적이 있었지만 송산(松山)이 부르기 편했다고 한다. 세월이 가면서 마을이 커지다 보니 묵은 터를 구송산으로 하고 새동네를 신송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터(신기)는 초등학교 아랫쪽의 뜸이고 한길 가는 점방껄(점방꺼리)이라고 하며 뒷편을 뒷골로 조금 들어앉아 있는 곳은 안땀(안뜸)으로 부르고 있다.

학교 앞 한길 가에는 효자(孝子) 경주 김씨지선(知(善)공의 포창비와 꽃집이 서 있다. 김공은 어릴적부터 효심이 지극했고 남이 할 수 없는 간병을 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된 도리로서 예장을 치룬지라 향내유림들이 주선하여 효행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졸업생 4,161명 중에는 아버지와 삼촌, 사촌, 오촌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다. 

4천여 졸업생들 중에 객지로 나가지 않고 농사짓는 이는 극히 소수다.  다들 먹고 살기 위해 대처로 나갔다.  그리고 해마다 명절이나 이맘때, 아니면 누가 죽으면 와보는 곳으로 전락했다.   2012년 말 현재 유곡면(20개 마을) 인구수는 1,460명 이다.  이중 송산초등학교를 의령군은 전입자(2명 이상, 6개월 이상 거주시)에 대한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으나 인구 증가는 거의 없다. 

폐교의 모습은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참 안타깝다.  지역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운동장에 가득했던 환호 대신 개망초만 가득했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동상을 비롯한여 이승복 군의 동상이 학교를 지키고 있다. 

  뒷 편 이겸수(李謙秀)현감의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남재희(南載熙)공와 이도재(李道載)공 두 분의 시혜송덕비(施惠頌德碑)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열부 박홍묵공의 부인인 진양 강씨의 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근래 세운 공덕비

방앗간 주인은 무려 한 시간 뒤에야 왔다.  그렇지만 다들 그려려니 여긴다.

정미소(精米所-방앗간)는 절구와 디딜방아, 물레방앗간의 뒤를 이어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기계 방앗간으로 농민들이 수확한 곡식을 찧는 곳이다.

먼저 쌀 포대를 채곡채곡 쌓아 놓았다  지퍼를 열면 바닥 투입구로  알곡을 밀어 넣으면 알곡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돌과 뉘가 골라지고, 껍데기가 벗어지고, 겨가 빠지고 깎아지면서 광택을 낸다. 

투입구에 넣어진 벼는 정선기(精選器)와 석발기(石拔機-벼에 섞인 돌을 골라내는 기계), 현미기를 거쳐 아래 풍구(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등을 바람으로 날려서 제거하는 기구)와 공중 풍구(윗풍구)를 통과한다. 그 다음에 정미기를 거치면서 껍질이 깎이고, 분리기를 거치면서 깎인 나락과 덜 깎인 현미가 별도로 분리되어 정미기로 되돌아온다. 정미기로 되돌아온 벼를 연마기를 거치게 하면서 싸라기와 쌀알을 걸러주면 도정 작업이 끝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벼는 정미기를 4번 거쳐야 반짝반짝 윤기 있게 빛이 나는 쌀로 거듭난다고 한다. 

1년 나락 농사가 총 정리되는 순간이다.

이른 봄볍씨 소독하고 > 못자리 만들고 > 모내기를 위한 논 고르기 하고 > 모찌기  >모내기 >물대기(물퍼기) > 농약살포 > 벼베기 > 탈곡>정미소의 과정이 끝난 것이다.  요즘은 트렉트를 이용한 써래질 >  한꺼번에 8줄의 모를 심을 수 있는 승용이양기 > 원동기 양수기를 이용한 물퍼기 > 벼베기와 탈곡은 콤바인으로 하다보니 과정은 줄긴 했다만  이렇게 생산된 쌀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월이 됐다.

 

 

정미소가 있는 풍경

 

                                               - 안 도 현 -

 

시외버스를 타면 길가에

가끔, 오래 된 정미소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나는 그곳을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싶어지네

 

생산의 고향이여,

모든 부의 관리자여,

그리하여 눈부신 빚더미여,

붉은 양철 지붕을 뒤집어쓰고

한마리 덩치 큰 짐승처럼 서 있는 정미소를

나는 찬미하고 싶어지네

 

그러나 내가 탄 시외버스마저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가려 하는

나이 많은 정미소

 

들녘의 모든 길들,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

멍석만한 크기로 날아오던 참새떼와

앞마당에 넘치던 나락 냄새, 말들의 울음소리

청춘의 팔뚝의 꿈틀거리는 힘줄의 물줄기를

내가 노래하려는 것은 아니라네

 

정미소는, 숨가쁘게 달려왔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늙은 혁명가

 

지금 그에게는 속도가 없네

개들이 똥을 누고 가는 뒤안에서부터

개들의 잠자리가 있는 마을까지가

마지막 그의 관할구역이라네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을 차에다 옮겨 싣고 창원으로 향했다.  삼촌이 올해 배추며 무 농사를 지었는데, 김장거리를 주신다고

이 들에도 평화가 오기를

고향 신촌마을을 스친다.

함안 법수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한 차량들, 창원까지는 30분이면 갈 거리임에도 이날은 사정이 달랐다.   도착하니 날은 저물었고 다행 먼저 출발했던 아내와 큰아들이 삼촌을 도와 배추며 무를 포장까지 해 두었다.    

삼촌이 또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오리고기 집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모두 11명이 푸짐하고도 거나하게 먹었는데도  13만원 밖에 안 나왔다.  모두가 흡족한 저녁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가까웠다.  그 시각까지 고속도로는 만원이었다.

 

 

노래출처: 다음 블로그 아름다운 음악여행

Anak / Freddie Agui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