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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이전 흔적

2011.9.11 생태교란 식물에 노출된 낙동제방

by 이성근 2019. 6. 21.


그랬던 것 같다.  그때라고 내  눈길이  오죽했겠냐 싶다.   우연히 그때 입힌글이 검색되어 옮겨 싣는다. 

 37차 갈맷길 그린워킹 삼십리방 낙동제(三十里坊 洛東堤)를 걷다


강서 팔경 제4경 삼십리방 낙동제(三十里坊 洛東堤)라 했다. 강서는 땅이 기름지고 수량이 풍부하여 관계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그리하여 북부는 과수지대, 중부는 도작지대, 남부는 소채지대가 흥했다. 낙동강 제방 둑길은 대저땅 대부분이 들어간다. 37차 갈맷길 그린워킹은 거북이가 뭍을 기어오르는 곳이라는데서 유래한 대저 1동 1통 마을인 등구(登龜)에서 시작하여 을숙도 하구둑 입구까지 12km의 강둑 벚나무길 걷기다. 이 길은 공항로인 차도와 병행한다.

 


 

대저동은 1300리 낙동강이 흐르다 마지막으로 분류하여 흐르는 곳에서 시작한다. 옛날 이름으로 말하면 삼차수의 시작점인데,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이 된 땅이다. 따라서 일대의 땅에는 물著, 모래沙 은덕德, 새로 없던 땅이 생겨났다 하여 新자 이름이 많다. 삼차수란 지금의 서낙동강과 평강천, 낙동강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나루가 많았던 것도 특징이다. 대저-구포간 고성진나루, 덕두본리-사상덕포간 덕달이나루와 감전동을 오가던 맥도나루, 맥도-장협 간의 월포나루 등이나 구포대교, 낙동대교, 하구둑이 들어서면서 전설이 되었다.


 


취락의 형성은 주인없는 샛강 갈밭을 찾아 개간하여 홍수와 싸우며 만들어 졌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일제가 낙동제방과 녹산 대저수문을 만들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일제는 낙동강이 삼랑진 근처에서부터 강폭이 좁아져 하류부에 범람이 빈번해지고 침수가 일어나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대저도를 감싸는 두 지류를 하나로 만드는 공사를 1931년부터 시작하여 대저동 동쪽 낙동강 제방 쌓기를 통해 강이 직류선인 동낙동강의 하폭을 넓히고 서낙동강의 분기점이 되는 김해 대동에 수문을 설치했다.

 

김해평야의 등장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마을도 본래 있던 것에 더하여 새로 생겨 났다. 현재 강서지역 141개 마을 중 평야입지마을이 51곳(주로 대저동) 하안입지가 42곳, 산록이 25곳, 해안이 23곳인데,   대저배 혹은 구포배의 신화는 이렇듯 일제가 강을 지배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임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나 실상은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시대에 걸쳐 보다 긴 안목으로 이땅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행정구역으로 본다면 대저땅은  예부터 양산군에서 김해군으로 넘어 갔다 1978년 부산직할시로 편입됐다. 그때도 강서구가 아닌 북구의 소속이었다. 김해공항은 두 해 앞서 옛 신촌마을을 소개하고 만들어졌으나 기실 이 또한 이미 1944년부터 일제가 일대를 비행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터를 딱음으로서 비롯됐다.  이 바람에 강서의 명물인 칠점산(七點山)이 원형을 잃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칠점산은 낙동강 삼각주를 만들게 한 강서의 뿌리이다. 낙동강의 수위가 현재보다 1m이상 높았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수 천년 전에는 7개의 산봉우리만이 오늘의 오륙도(五六島)처럼 솟아 있었으나 홍수 때마다 칠점산을 기점으로 충전된 흙으로 대저섬을 이루었다.  이 산으로부터 서북쪽 4.5km지점인 김해서 불암동에 초선대(招仙臺)라는 바위산이 있는데 가락국(駕洛國)의 제2대 거등왕(居 登王)이 이곳에 와서 칠점산에 있는 참시선인(浚始仙人)과 함께 배를 타고 가야금을 켜면서 함께 즐겼다는 옛 기록이 있다.


 

마을은 명지 방향으로 내려가며 신소, 소덕, 덕두, 동방, 금호, 본맥도, 작지, 송백, 염막으로 이어 진다. 강건너는 사상구 삼락동이다.  염막과 명지는 별개의 단위지만 낙동강일천식공사 후 진해-부산국도가 생기면서 연결되었다. 

둑길은 아스콘으로 깔끔하니 단장되었다.  일본식 사고로 본다면 ‘기레이(奇麗)문화’ , 다시 말해 깔끔하고 아름다운 의미인데 전후 개발도상국 시기 일본에서는 이 의미가 ‘불도저로 확 밀어버린 산등성이나 콘크리트로 말쑥하게 포장된 강득’을 묘사할 때  썼던 표현이다. 그 시기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대부분의 시골길이 아직 비포장 상태에서 막 개발된 직후 사람들을 사로잡은 생각이었다. 이같은 관념은 거품경제가 무너지면서 변화를 가져 오기 시작했는데, 맙소사 시방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고 있는 것이다. 식민의 잔재는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알렉스커가  쓴 치명적인 일본을 참조)

아무튼 길 양켠으로 벚나무가 2열로 도열해 있어 한 여름 걷기에는 그만인데 봄날이었으면 더 좋았을 법하다. 하동십리벚꽃이 무색할 정도다. 아쉬운 노릇이라면 공항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여 좀 걷다 강변 둔치 가장자리 순환길로 내려선다. 그나마 운치가 있어 호젓하다.

 맥도생태공원에서 초대시인 성수자시인의 시를 청해서 듣다.


 

을숙도 벽화 

                                                성수자 시인

 

연으로 날아올라
철새의 눈높이로 날아올라
아득한 희망의 부표로 떨어져 내리는
강과 바다의 의식

흘러 온 날들의 묶음만큼 갈대밭이 자라고
자라온 갈대밭 머리위로
잘 말린 햇살이 탄주하는
마침내 물이 뿌리를 나누어 주는 곳

실한 강의 씨를 바다에 털어넣고
손사래 치며 흘러온 시간의 끈을 풀어
완주한 강의 흐름위로 노을이 걸리면
강바닦을 두드리는 물의 득음

세상은 이렇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풀 숲에 숨죽이던 바람이 걸어나와
물비늘을 쓰다듬는 강의 수화
거대한 강의 한생애를 거는

을숙도 벽화

 모자가 참여했다.  그 모습이 좋아 한 컷 했다.

 걷고싶은부산 류경희 길위원


1992년 강서구청에서는 낙동강제방을 시민공원화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정서함양과 향토애를 고취하기 위해 제방위에 철쭉동산 등을 조성하고 시비를 건립하였다. 금수현 그네 노래비 , 이은상 시비, 배재황시비, 이주홍시비, 조지훈 박목월 시비 등  다리쉼하며 그들의 노래 들어 볼 일이다. 



 곳곳에서 이곳 고유의 풍경이 뭉개지고 있었다.



  불도저며 포크레인이 걷어내  자리에 백로류들이 날아들어 먹이를 찾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포크레인이 파헤쳐 놓은 습지에 당장은 땅속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새들의 한 때 주린 배를 채을 수야 있겠지만, 그 시간이 지니고 나면 황폐화 된 이곳에서 백로며 왜가리들이 지금과 같은 포식이 가능할까 . 어찌 저 모습이 백로들에게 국한되는 말일까. 영락없는 인간 세상 그대로다. 내일이 없다.  지금 당장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이기적 삶이   사실은 모두를 절망에 빠트린다. 



걷다보니 놀랄 일이 또 생긴다. 단풍잎돼지풀의 등장이다. 군락은 강 둑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거기다 가시박이 창궐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조사를 해 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귀회식물(歸化植物)만 도표로 만들어 보았다.

과 

종 

마디풀과

털여귀, 소리쟁이

바늘꽃과

달맞이꽃

자리공과

미국자리공

배추과

다닥냉이

콩과

자운영, 개자리, 토끼풀,각시갈퀴나물

박과 

가시박

괭이밥과

덩이괭이밥

질경이과

창질경이

국화과 

돼지풀, 단풍잎돼지풀, 미국가막사리, 망초, 개망초, 큰망초, 큰금계국, 기생초, 코스모스, 가시상추, 개쑥갓, 큰방가자똥, 만수국아재비, 서양민들레

벼과

메귀리, 털빕새귀리, 큰이삭풀, 털물참새피

⋇ 굵은 글씨로 표시한 종은 귀화도가 3~5에 이르는 식물





  가시박

물론 귀화식물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귀화식물은 학자에 따라 그 정의가 차이가 있으나 통상 ‘외국의 자생지로부터 인간의 매개에 의해 의도적이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국내에 옮겨져 여러 세대를 반복함으로서 야생화 내지  토착화 된 식물’을 말한다.  그 조건은 첫째, 원산지가 외국이어야 하고, 외국에서 생육지를 우리나라로 옮겨온 식물이어야 한다. 둘째, 인간에 의해 옮겨진 식물이어야 한다. 셋째, 국내에서 야생화 하여 대를 거듭하는 생활고리를 가져야 한다.



  단풍잎돼지풀

우리나라에서는 개항 이전에 들어 온 식물을 묶어 사전귀화식물로 규정한다. 예컨대 벼의 도입과 더불어 들어온 돌피, 강피, 물달개비, 방동사니 등은 남방계 식물로서 논잡1초를 형성했고, 대륙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보리의 전래는 수영, 냉이, 쇠별꽃, 질경이 등 유럽식물이 중국을 경유하여 이입된 밭잡초가 그것이다.  반면 개항 이후 들어온 식물은 신귀화식물이라 하는데, 주로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오다 한국전쟁 이후 경제발전과 국제교류의 증대로 원산지에서 직접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 수는 대략 300종 가까이 되며 지금도 유입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시상추

사람이나 화물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들어온 상태를 1차 귀화식물이라 하고 자라서 생육하는 공간을 귀화센터라고 한다. 낙동강 제방을 기준으로 대저 둔치 길가는 그런 귀화센터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대게 항구나 공항, 도시강변, 둔치, 매립지, 목장지대, 미군부대 등이 이에 속한다. 2차 귀화는 1차 귀화가 이루어진 식물이 세대를 거듭하는 생활고리를 반복하면서 분포지역을 광역화하는 것을 말한다. 2차 귀화지는 주로 택지조성, 공단개발, 도로공사 등 대형토목공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시방 4대강 공사가 이루어지는 낙동강변은 그들의 살터를 열어주는 서비스라고 보면 된다.



  족제비싸리

예의주시 할 일은 귀화도가 3~5에 이르는 식물들이다. 표의 굵은 글씨로 표시한 종은 그러한 종들로서 사람에게 질병을 유발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지정된 식물로 부지불식간에 확산된다. 이렇듯 둑 하나 넘어 세상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자동차의 질주가 강변 마을을 점령하고 있음이 전자라면 다른 세상은 시야가 트인 낙동강 하류의 초록들판이다. 내려쬐는 땡볕 아래 개개비들만 바쁘다. 어쩌다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무리가 재잘거리며 지나고 나면 녹색물결만 출렁인다.  아니 그 속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소리없이 진행중이다. 다만 무섭고 두려운 일은 사람이 벌이는 무모한 개발이다. 2011년 늦여름, 정녕 강의 평화는 요원한가.  장마 뒤 황토 붉은 강물이 씨   바씨    바 하며 흐를 뿐이다.



 누룩뱀 한마리 졸지에 허리를 밟혔다.



 아직 숨이 붙어있지만  졸지에 당했다. 



 원래 이길 또한 차량이 다지는 길이 아니었다.  길을 열때도 말이 많있다. 관리용 도로라 했지만 4대강 공사 덤푸트럭의 작업도로로 전락했다.




 평화로운 풍경과 그렇지 못한 풍경이 한 곳에 있다.



 염막을 거쳐 명지 IC에서 을숙도로 이동하는 참가자들



 어떤 분이 귓속말로 물었다. 이런 행사 할려면 스폰스 많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왜 참가비를 안받는지 궁굼해 했다.   참가비? 하긴 요줌 걷기 대회가  언론사들의 새로운 돈벌이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때 생각해 볼일이 많다.  참가비는 실상 허울에 불과하다.  참가비 몇 푼 받아서는 수지타산이 안맞다.  명분일 뿐이고 스폰스 또는 광고 수익을 기대할수 있가 때문에 대회를 유치하는 언론사가 많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대두되는 경품이다.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기 위해 뭔가를 제공해야 하고 ,  그러기 위해선 하다못해 수건이라도 나누어 줘야 한다.  그게 만연되어 있다.  바람직한 길걷기 문화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볼 과제다. 

언제나처럼 참가자들은 기찰막걸리로 마무리한다.

 

 


 이날 최고령(73) 참가자 김해에서 왔다고 했다.  하지만 정정하다.  수고했다며 거수경례를 하고는 마니아가 되겠다고 한다.  몸둘바를 모르겠다.  갈맷길 그린워킹 이런분들 때문에 존재한다.


 

말해버릴까 -지다연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