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저문 봄날, 어둑살 내린 마을 어귀에 서성이며 듣는 새 울음 있었다. 스스로가 길들인 까닭이다. 대개 봄꽃이 피면 봄이 온 것으로 여기지만 봄밤을 울어 주는 새가 오지 않았다면 봄은 왔지만 또 진짜 봄이 아니라고 규정할 만큼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불현듯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다시 왔다는 것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때로 눈물이 핑 돌 때도 있다.
유년의 봄에 들려오던 새소리
고향 떠나 커면서 그리움으로
그 자리에 이젠 세월호 울음이
돌아왔노라고 들려주는 울음마다 싣는 사연이 다르긴 하다만 대체로 한이 서린 울음이다. 전생에 풀지 못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풀어낸다. 그 새는 소쩍소쩍 우는 소쩍새이기도 하고, 쑥꾹 쑥쑤꾹 우는 쏙독새(쑥꾹새)이기도 하다. 때로는 휘파람 소리 가늘게 가늘게 우는 호랑지빠귀의 울음이기도 하다.
산빛이 연분홍 움트는 가지들의 빛깔로 물들었다가 순식간에 연초록으로 갈아입을 때, 하마 개울가 복사꽃이 환하게 피었다 달빛에 지는 밤, 그 새들의 울음은 시나브로 유년의 귓가에 들어앉아 기억의 집을 지었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나는 유년의 동굴로 들어가 기억의 불을 켜고 지난 세월을 들여다본다. 참 아득한 날이다.
봄날 고향 집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두루마기 입은 할배, 늘 머리에 수건을 쓴 할매, 삼촌과 일가친척들 얼굴이 보이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그 시절의 소녀까지 등장한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생생하다. 마루에 걸터앉아 앞산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쑥꾹새가 쑥수꾹 울었다. 그때 당신들이 나누던 세상사 가늠할 길 없지만, 어린 마음에 근심 어린 그 얼굴은 기억한다.
'산다는 것은/내 어린 날의 허기진 어둠이다/그 유년의 어둠 건구지산 중턱쯤/배곯아 죽어 새가 된 사람/쑥쑤꾹 쑥쑤꾹 울고 있었지//모진 세월 끼니가 없어 쑥국만 먹다/그것도 없어 굶어 죽은 사람의 혼이라며/산다는 것은 죄가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그때 그 시절의 노인들//이제 모두 새가 되어 울음 타는 밤/그저 좋은 세상 오시구려/반짝이는 불빛 아들자식 바라보듯/ 보릿고개 쉬어 넘던 앞산 뒷산/쑥쑤꾹 쑥쑤꾹 울고들 있었다'(졸시 '쑥꾹새2').
고향을 떠나와 고향에서 울던 새들을 가슴에 담기 시작한 때가 팔팔한 이십 대였다. 문학 병에 걸린 나는 툭하면 황령산 자락 공동묘지를 찾아 불빛 휘황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그 시대를 저주했다. 그러다 무덤 사이 돋아난 새파란 풀밭에 몸을 뉘이곤 했고, 소쩍새 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오래도록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서럽고 원통한 울음, 그것은 차마 지울 수 없는 오월의 혼백이었다. 옛날에는 못 먹고 못살아 다들 죽어 소쩍소쩍 우는 새가 되었다면 1980년 중후반 새들의 울음은 다르게 해석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나갔다. 소쩍새는 정겨운 새가 되었고, 쑥꾹새는 그리운 새가 되어 만났다. 그런데 지난해 봄부터는 내가 울기 시작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자식을 애타게 찾는 부모들의 울음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새벽 집 뒤 숲에서 호랑지빠귀가 울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낮은 휘파람소리로 호랑지빠귀는 봄이 다하도록 울었지만 끝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봄이 왔고 밤늦은 귀갓길 긴가민가 들려오는 흐느낌이 있어 뭔가에 홀린 듯 아파트 옥상에 올라 귀를 세웠다. 호랑지빠귀였다. 휘이익 휘이익 사오월 봄밤이 귀 밖으로 걸어 나온다. 2014. 5.2 부산일보 -토요 에세이
Drifting - Suzanne Ci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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