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소 노동자> 테라오 사호·박찬호 옮김/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9.08
저자 : 테라오 사호 1981년 도쿄도 출생. 피아노 치며 토크쇼를 하는 음악가. 2007년 앨범 「몸 ONMI」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오누키 타에코大貫妙子(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板本龍一(뮤지션), 호시노 겐星野源(음악가, 배우, 문필가) 등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영화 「전학생 너 안녕」(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 「0.5밀리미터」(안도 모모코安藤桃子 감독), 「나오토 한 사람뿐」(나카무라 마유中村眞夕 감독)등에 주제가를 제공했다. CM송이나 나레이션, 에세이, 서평 같은 분야에서도 활동. 앨범으로 「바람은 쌩쌩」, 「사랑의 비밀」, 「낙조」, 「푸른 밤의 안녕」, 「타원의 꿈」등이 있고, 저서로는 『서평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분게이신쇼文芸新書), 『사랑스러운 매일』(텐넨분코天然文庫)등이 있다.
저자 : 반핵의사회(공동기획)반핵의사회는 △모든 핵발전의 중단과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 모든 핵무기의 즉각 폐기 △ 진단용 치료용 방사선 사용 최소화를 위해 노력한다. 반핵의사회는 방사선 인체영향에 대한 학술연구와 핵시설과 방사능 물질의 안전성 검증 등의 역학조사 및 핵발전과 방사선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홍보 활동과, 국내외 반핵단체-환경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NONUKES.OR.KR/
저자 : 사회건강연구소(공동기획) 사회건강연구소는 몸, 마음, 사회의 건강을 위한 다학제적 연구와 활동의 공간이다. 건강에 관심 있는 연구자, 현장조직, 일반인이 갖고 있는 자원을 공유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홈페이지: HTTP://WWW.ISHEALTH.ORG/
서문 ‘핵발전소 노동자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
서장 대체 음악가가 왜 핵발전소에 관심을 갖는가?
사고 이후 4년
핵발전소를 둘러싼 맹점
2003년, 산야山谷의 여름 축제
사카모토坂本와의 만남
‘그들’에서‘당신’으로
핵발전소 노동에 대한 관심
마스크는 잊은 지 오래
일상화된 경보기 무시
하청 시스템
30년간의 공백
평상시 핵발전소 노동실태를 알자
제1장 사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유바 다카키요弓場淸孝의 경험
땜질 작업
방사선 관리 수첩이 없다
유바와의 만남
일본계 브라질 출신의 핵발전소 노동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고
부상을 당해도 보고할 수 없다
정기 점검 기간의 단축
영화 상영 운동과 필리핀의 티볼리족 지원
미나미소마에서의 봉사
당사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과학적 접근의 한계
그래도 저선량 피폭의 위험은 무시할 수 없다
피폭 대책이 없는 현장
유바를 일본에 머물게 한 것
제2장 필수 비용을 줄여버린 합리화 물결
- 다카하시 나오시高橋南方司의 경험
“사고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일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핵발전소로
작은 불은 내버려둔다
경보기 알람도 묵인할 수밖에 없다
건의함에는 의견을 내지 않는다
‘정검’ 단축으로 증가하는 사고와 부상
사람을 키우지 않는 핵발전소
핵발전소 내부의 화장실 문제
바꿀 수 없는 고선량 현장 작업
사라진 ‘유령사원’과 교육시간
3·11 당일
지구는 미래에서 빌려온 것
작은 행복의 시간
사라져가는 숙련기술
제3장 위선과 기만의 산재 승인 절차
- 가와카미 다케시川上武志의 경험
핵폐기물을 드럼통에 담기
인간답게 사는 방식을 생각했다
공동체 생활
공동체 생활에서 핵발전소로
암 발병과 소송
산재 청구 불승인의 이유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 권고의 근거
합리적인 냉혹함
서로 맞지 않는 증언
허위로 이루어진 산재 청구 심사
사상누각!?
제4장 일상적으로 데이터를 수정하는 중앙통제실
- 기무라 도시오木村俊雄의 경험
전 도쿄전력 기술자와의 만남
80년 된 민가
도쿄전력 부설 고등학교에 진학
원자력에 불평하려면 전기를 사용하지 마라
원자로 업무
불신의 싹
일상적인 데이터 수정
마사이와의 만남
도쿄전력을 그만두고 자급자족 생활
전력회사나 행정기관에 대한 의존을 가능한 줄이자
미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선사 시대의 울림
고정관념에서 탈피한다
제5장 3·11 이후 은밀한 복구 과정과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 피폭 노동
- 미즈노 도요카즈水野豊和의 경험
리먼 사태의 여파
3·11 이전의 풍경
거대한 볼트를 제거
핵연료 저장수조에 잠입한 외국인의 존재
불법적인 대량 피폭
3·11 이후
반복되는 은폐
제6장 핵발전소 노동의 다단계 하청
- 다나카 데쓰아키田中哲明의 경험
사고 전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
갑작스런 계약 파기
어디에나 있는 현장
다단계 하청의 상하구조
좀처럼 주장을 하지 않는다
불안정한 고용
마무리 사람을 짓밟으며 살고 있다
핵발전소 거리로
핵발전소가 완성되고 거리가 어떻게 변했나
전쟁과 핵발전소
핵발전소 시공자가 지진을 두려워하는 이유
리셋되고 있는 피폭선량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증언
고용보험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다
나의 일
후기
옮긴이 후기 문제는 저선량 피폭이다
가난한 노동자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핵발전소···발전소 노동자들이 털어놓은 실상
핵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 6명과 인터뷰 뒤 책을 낸 일본 가수 테라오 사호/테라오 사호 홈페이지
“현대의 핵발전소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가난한 노동자의 불법적인 대량 피폭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활이 어려운 젊은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 전쟁터와 핵발전소일지도 모른다.”
참사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한국에선 후쿠시마 원전에 쌓여있는 100만t이 넘는 방사성 오염수 방출 문제로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내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핵발전소 노동자>는 일본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6명의 노동자를 인터뷰한 책이다. 저자 테라오 사호(38)는 피아노를 치면서 토크쇼를 하는 가수다. 가수가 핵발전소에 관심을 가진 엄청난 계기는 없었다. 2010년쯤 우연히 원전 노동자의 수기를 읽게 됐고,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이 그를 피폭 노동자 문제로 세차게 떠밀었다.
테라오도 원전에 대해 ‘사고가 나면 위험하다’거나, 그래도 ‘깨끗한 에너지’라는 막연한 이미지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양한 방법으로 수소문해 만난 이들에게 들은 실제 현장은 “사람의 건강을 갉아먹고, 때론 생명마저 앗아가는 피로 물든 시스템”이었다.
테라오가 전하는 원전의 실상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설프다. 2010년부터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한 미즈노 도요카즈라는 노동자는 터빈을 손질하는 유지 보수 업무를 했다. 3~4m짜리 날개가 달린 터빈 덮개에는 100개 정도의 볼트가 있다고 한다. 볼트를 풀려면 두 사람이 한 시간을 작업해야할 정도인데, 안 풀릴때의 해법은 히터로 새빨갛게 달군 뒤 해머로 내려치는 것이다. 변형된 볼트는 다시 조일 때는 잘 들어가지도 않게 된다. 핵연료 저장 수조는 엄격하게 관리될 것 같지만, 정작 담배꽁초 등 다양한 물건이 발견된다고 한다. ‘싼임금으로 쓰고 버림받는 노동자들’이 화풀이로 배관이나 원자로 안으로 밸브나 책상, 의자, 사다리 따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사고 당일에도 현장에 있었던 다카하시 나오시는 안전요원으로 후쿠시마 원전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현장에선 불이 나면 신고를 하는 대신 그저 불이 꺼지도록 놔두고, 방사선량을 알리는 경보기 알람도 떼어버린다. 이렇듯 현장에선 ‘문제’를 감추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노동자들은 고선량의 방사선에 피폭당한다.
이런 위험한 일자리를 메우는 사람들은 저학력, 저숙련, 이주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위험이 높은 현장에 투입되고, 일정한 피폭량에 도달하면 가차없이 버려지고, 피폭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아 질병이 발생해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
가난한 노동자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핵발전소···발전소 노동자들이 털어놓은 실상.
테라오가 전하는 풍경은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일하던 석탄화력발전소와도 오버랩된다. 하청업체로 책임을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와 전력시장 자유화 이후 전력회사들의 수익 추구가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테라오는 “음지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막대한 수의 노동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일해 왔다”며 “핵발전소는 대외적으로는 근대적인 겉치레 치장을 하고 있으나 내부의 실제모습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책이 전하는 현장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핵발전소 얘기다. 하지만 최근 전남 영광 한빛원전의 원자로를 보호하는 격납벽에서 구멍이 100개 넘게 발견됐다거나 벽이 뚫리기까지 고작 10㎝를 남겨뒀다는 기사들을 접하노라면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는다. 이 책의 옮긴이도 “한국 사회는 구체적인 노동자의 피폭 문제에 무지하거나 많은 사실을 감추고 있다”며 “원자력 정책의 비밀주의가 피해를 더 확산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매일 피폭 당하며 일하는 핵발전소 하청 노동자들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 ①]
▲ 핵발전소의 구조와 노동 핵발전소는 홍보를 위해 비교적 안전한 노동을 하는 중앙제어실의 사진을 주로 배포한다. 하지만 원자로 격납용기나 발전용 터빈 근처 등의 장소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여러 겹의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피폭 노동을 한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비정규직이거나 하청 및 중층 하청 노동자이다. (출처 :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 자료집 (2016.12.15))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전력회사들은 중앙제어실처럼 깨끗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곳 위주로 홍보 사진을 배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홍보 사진 때문에 핵발전소 중 중앙제어실 이외의 공간은 전부 기계화돼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핵발전소는 큰 사고가 없는 한 안전한 일터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핵발전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 작동시에도 피폭(인체가 방사능에 노출됨) 노동이 필수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폭노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처럼 큰 사고라도 난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폭노동은 더욱 불가피합니다.
피폭노동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
실제로 전력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중앙제어실과 같은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 그림처럼 터빈실과 같은 곳에서 제염작업(오염된 방사능 물질을 닦아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이들은 주로 전력회사의 하청 또는 중층 하청 노동자들입니다. 즉 압도적으로 더 많은 수의 비정규직은 핵발전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피폭노동의 현장에 있습니다.
▲ 1980년 일본 핵발전소 하청 노동자 노조 기관지에 실린 삽화 1980년 일본 최초의 핵발전소 하청 노동자 노조 기관지에 실린 그림. 맨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원자로 아래에서 오염된 물질을 걸레로 닦는 제염작업을 하고 있다. ⓒ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 자료집
이들은 연평균 피폭량 20mSv(20밀리 시버트)를 감수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노동자가 암으로 사망할 수 있는 확률이 0.1%씩 증가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심각한 수치입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는 수습 작업에 하루 약 7천 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들이 1년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이 중 7명은 암으로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부 노동자의 경우 연평균 피폭량은 20mSv보다 높습니다.
아래 핵발전소 노동자들 중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피폭량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그래프가 있습니다. 그래프에서 가로축은 연도를, 세로축은 총 피폭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래 축의 어두운 부분은 정규직 노동자의 피폭량이며, 그래프 전체에 그려지고 있는 회색 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폭량입니다.
실제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총 피폭량의 96%에서 97%가 하청 및 중층 하청 노동자들이 당한 피폭량 입니다. 이 그래프만 보더라도 핵발전소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과 핵발전소 내에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안전할 권리에 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업체 노동자의 총피폭량 비교 그래프 아래 축의 어두운 부분은 정규직 노동자의 피폭량이며, 그래프 전체에 그려지고 있는 회색 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폭량이다. 강연자 나스비씨는 실제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총 피폭량의 96%에서 97%가 하청 및 중층 하청 노동자들이 당한 피폭량 이라고 한다. (원 출처 : 『원자력 시민 연감 2010』) ⓒ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 자료집
피폭은 더 많이 당하지만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
이렇듯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더 열악한 곳에서 피할 수 없는 피폭을 감수하며 일합니다. 하지만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훨씬 적게 받습니다. 일례로 현재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일하는 하청 피폭노동자는 암에 걸릴 수 있는 노동이란 것을 전제하고도 일급으로 1만4000엔에서 1만9000엔 정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의 물가와 일본 건설 노동의 임금을 고려하면 절대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상당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청 업체들에게 임금을 착복당합니다. 노동강도도 세지고 있습니다. 최근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14시간이나 피폭노동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재와 손해배상 인정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
게다가 핵발전소의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와 손해배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76년 이후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까지 그동안 핵발전소에서 일한 사람은 50만 명 이상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업재해 인정은 겨우 13명에 불과했습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는 2015년 10월 첫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산업재해를 인정받더라도 노동자들은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일례로 나가오 미츠아키(長尾光明)씨는 1977년 10월부터 1982년 1월까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와 하마오카 핵발전소에서 일하고 70mSv의 피폭량에 노출되어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아 2004년 1월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에 나가오씨는 원자력손해배상법에 의거하여 2009년 도쿄 전력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2010년 2월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겨우 900명의 안전만 검사할 뿐
2011년 3월 11일 이후 2011년 12월 16일까지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의 '긴급작업'이라는 수습 작업 기간이었습니다. '긴급작업' 기간에는 연간 피폭량의 한계가 성인 남성 기준으로 최대 50mSv에서 최대 100mSv까지 늘어났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반경 20km 권 내의 긴급한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경우 연간 피폭량으로 250mSv까지 감수하도록 했습니다. 250mSv 이면 임파구의 일시적 감소를 일으킬 수 있는 수치라고 합니다.
'긴급작업' 기간에 일한 사람의 수는 2만 명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국가가 피폭노동과 관련된 건강 진단을 한 사람은 지금까지 900명 정도뿐이며 이들 대부분은 2011년의 '긴급작업'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즉, 일본 정부가 50mSv 이상 피폭된 사람에게는 백내장 검사, 100mSv 이상 피폭된 사람에게는 암검사를 그나마 실시하고 있었지만 50mSv 미만의 피폭노동자들은 이후 직장 건강검진으로 충분하다고 해버린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피폭노동, 안전하지 않은 핵발전소
나스비씨의 위 강연 내용처럼, 핵발전소는 매일 많은 노동자의 피폭노동을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이들에겐 지진과 사고가 없더라도 핵발전소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사고시 핵발전소는 더욱 위협적입니다. 나스비씨는 전 세계 핵발전소 보유국 중 어느 나라도 후쿠시마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핵발전소 사고에 제대로 된 대처 방안을 갖춘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핵발전소 사고시 지역 주민의 안전 피해는 물론, 수습 과정에서는 더 많은 노동자가 피폭노동과 위험한 노동환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스비씨의 강연 내용을 연재하며
원전 밀집도 1위의 대한민국에서 2016년에는 경주에서 진도 5가 넘는 강진이 있었고 저는 당시 많이 놀랐었습니다. 경주는 월성 원전에서 불과 27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후쿠시마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2011년 3월 11일 도쿄에 있었습니다.
그날의 공포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나스비씨의 강연도 2011년의 기억을 바탕으로 들었습니다. 그동안 핵발전소에 대한 저의 문제의식은 후쿠시마처럼 대형사고가 일어났을 때 인력으로 막아내기 힘들다는 것에서 멈춰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스비씨의 강연을 듣고 핵발전소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홍보하는 영상 속의 안전한 노동자는 극히 일부이고, 많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이 피폭노동에 처해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핵발전소는 이미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17.01.02
박선미(opendata1006)
핵발전소 용역 노동자의 설움…피폭량, 한수원 직원 9.6배
그래픽_김지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민의당 이찬열 의원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2012년부터 올해 6월까지 해당 기간 한수원 직원의 1인당 연간 평균 피폭량은 0.10mSv(밀리시버트)인 반면, 용역업체 직원들의 평균 피폭량은 0.96mSv로 약 9.6배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지적되는 문제로, 핵발전소 업무가 광범위하게 외주화된 탓이다. 실제로 이찬열 의원의 분석을 보면, 한국수력원자력 정규직의 경우 지난 2012년 1인당 평균 피폭량이 0.14mSv에서 지난해 0.11mSv로 감소한 반면, 용역업체 직원들의 피폭량은 같은 기간 1.03mSv에서 지난해 1.23mSv로 올라간 것으로 나타난다.
이 의원은 “용역업체의 경우는 방사선관리구역 및 오염자 제염, 방사선(능)측정용 시료 채취·분석, 방사성폐기물 수거, 분류 등을 하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피폭량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고 지적했다. 2017년 6월 기준 한수원 정규직은 7801명이고, 한전케이피에스(KPS) 등 타공공기관 인력을 포함한 한수원 소속이 아닌 직원은 5474명으로 전체 직원의 41.2%를 차지한다.
인체에 해가 없다고 생각되는 방사선의 양적 한계를 의미하는 ‘선량한도’가 일반인의 기준인 연간 1mSv를 넘는 직원도 2453명이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원자력안전법은 일반인과 방사선 작업 종사자의 경우 선량한도 기준치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법은 방사선 작업종사자의 경우 연간 50mSv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5년간 100mSv, 수시출입자, 운반종사자 및 교육훈련 등의 목적으로 위원회가 인정한 18세 미만인 경우 연간 6mSv, 그 이외의 사람은 연간 1mSv로 선량한도를 규정한다.
이 의원은 “한수원은 용역업체 방사선 작업종사자에 대한 종합건강평가프로그램을 (현재 희망자만 시행)의무시행으로 바꾸고 상대적으로 위험한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찬열 국민의당 의원 제공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후쿠시마 원전 피난민 모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의 피난민인 가토 유코(57) 모녀가 21일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가토 유코(57)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난민이다. 그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교토에 산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가 몇년 간의 해외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3년반만에 일어났다. 후쿠시마 원전의 수소폭발은 2011년 3월12일에 일어났는데, 그 전날 대지진과 쓰나미로 가토의 집의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겼다. 다행히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원전이 폭발했다는 것은 3월13일 이후에야 알았다. ‘여기는 60km 정도 떨어진 곳이니까 괜찮겠지.’ 정부도 60km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겐 대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가토는 그때 후쿠시마 시청의 사무직 계약직원이었다.
가토의 일상은 그런대로 돌아갔다. 수도가 끊겨 2시간씩 대기해 급수차에서 물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물건이 동이 난 가게들을 전전하며 먹을 것을 구해야 했지만. TV에서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바로 벗거나 버리고, 샤워를 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가토는 ‘수도가 끊겼는데 어떻게 샤워를 하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방사능 구름’ 같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방사성 물질이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점차 ‘괜찮을까’ 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가토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딸이 등교할 때 모자, 안경, 마스크, 장갑, 긴팔 옷, 타이즈까지 입혀 중무장을 시켰다. 그렇게 학교에 가는 건 딸 뿐이었다. 러시아 체르노빌 보고서까지 읽고 난 후, 가토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가토는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르면 ‘충분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피해 증명서’를 받을 수 없었다. “체르노빌 보고서를 읽고, 막연하게 300km 이상은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토는 주택 제공을 받을 수 있는 오사카로 가기로 했다. 살림살이를 모두 버렸다. 여름옷을 넣은 캐리어를 끌고, 9살 딸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 남기로 한 아버지·남동생 부부와는 헤어져야 했다. 몇달 동안 연습해 온 플루트 콩쿠르 출전을 앞둔 딸은 왜 우리만 가야 하느냐고, 친구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울며 버텼다. 사고가 난 지 한달 만이었다.
경향신문은 다른 후쿠시마 주민들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후쿠시마·한국 청소년 교류’ 차 한국을 찾은 가토 모녀를 지난 21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당시 9살이었던 딸 히로코(가명)는 이제 대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까지만 해도 환경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가토는 지금 일본정부와 전력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의 원고가 되어 탈원전 문제에 앞장서고 있다. 모녀가 도망치듯 떠난 지역에서, 내년엔 올림픽 경기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가토 모녀를 만나 거대한 재난과 사고 앞에 ‘국가’를 믿을 수 없었던 개인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가토 모녀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 후쿠시마가 고향인가요.
“후쿠시마 태생입니다. 원전에서 60여㎞ 떨어진, 후쿠시마현에서 살았습니다. 저와 딸은 2000년부터 7년간 독일에서 살았어요. 2007년에 9월에 제 고향인 후쿠시마시로 딸과 이주해 원전 사고 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 피난은 어디로 간 건가요.
“사고 1달 후에 후쿠시마 시에서 오사카로 갔고, 또 한 달 후에 교토로 이사했습니다.”
- 사고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세요.
“대형 지진이 난 뒤 전기, 수도, 가스가 다 끊겼습니다.급수차 앞에 줄을 서서 1시간반이나 2시간 동안 기다려 물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밖에 나와 가게를 전전했습니다. 지진 때문에 물품 보급이 안돼 가게에 물건들이 거의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고 후 방사선량이 올라가는 상황에서도 나는 물과 먹을거리를 사러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밤만 되면 설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어떻게 직접 방사능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나요.
“(처음에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60여㎞까지는 방사능의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방향으로 방사능 구름이 날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방사능이나 원전에 관한 정보와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독협회’에 ‘후쿠시마는 안전한가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후쿠시마 대학교 교수가 제게 원전 자료와 관련 인터넷 링크를 보내줬습니다. 그것을 다 읽었습니다. 피폭을 당해 병을 얻는데 ‘역치(생물체가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치가 없다면, 멀리까지 피난하는게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됐습니다.”
- 히로코는 사고 후에도 학교를 다녔나요.
“학교는 다녔습니다. 마스크, 모자, 안경, 장갑 등 최대한 피부가 안 보이도록 가린 뒤 교복 안에 타이즈도 신고 다녔습니다. 방사선 때문에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안내를 받은 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밖에 나가지 말고, 나가면 들어와서 옷을 버리거나, 벗고 바로 샤워를 하라’는 안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물이 안 나오고 외출을 안 할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60여㎞ 떨어진 곳인데도 그런 안내가 나왔나요.
“후쿠시마에 방송되는 주요 방송국에서 다 그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 정부의 지원이 있었나요.
“재해 발생 시 살 수 있는 공영주택에 들어가려면, ‘이재증명서’를 받아야 하는데 저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사카가 이재증명서가 없어도 받아준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신청서를 오사카에 내고, 후쿠시마에서 1주일 간 집을 정리하고, 가재도구를 다 버렸습니다. 여름 옷, 딸의 학교 가방과 최소 필요한 학용품 정도만 챙겨 수트케이스에 넣어서 오사카로 이주했습니다.”
- 오사카 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이사간 곳에 다른 피난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부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둘만 있고 정보 교환을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립되었습니다. 집 제공 외에는 어떤 지원도 없었습니다. 날마다 ‘정말 내가 피난을 잘 온 것인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습니다. 컨디션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버지, 남동생 가족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살았습니다. 제가 일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초등학생 딸을 돌봐줬습니다. 오사카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큰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슬픔이 컸습니다.”
- 가족들은 왜 함께 피난가지 않았나요.
“아버지는 후쿠시마에서 태어나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내가 오사카까지 가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안 오셨습니다. 남동생 가족은, 일본의 시골은 장남이 산소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 온 집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버리고 피난할 수 없었습니다.”
- 피난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응은 어땠나요.
“남동생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는데, 남동생은 ‘일본 정부도, 후쿠시마현도 괜찮다고 말 하는데 왜 피난을 가야 하느냐’며 반대했습니다. 제 의지가 너무 강하자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후쿠시마는 역시 불안하니까, 간사이 지방이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에는 병으로 누워있는 가족이 있거나 여러 상황들 때문에 피난을 가고 싶어도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는 피난 갈 수 있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소원해졌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부러움과 시기, 질투로 ‘도망간 사람은 (잘)됐네’ 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 피난민들에 대한 이지메가 있었나요.
“당시 ‘방사능이 전염된다’고 이지메를 당한다는 뉴스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더 피난을 망설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차에 후쿠시마가 찍힌 번호판은 오지말라고 하거나, 호텔에서도 숙박이 안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런 뉴스들이 나오니까, ‘후쿠시마’라고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히로코는 지금 피난 결정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것이 있나요.
“처음 저는 주변의 눈치, 반응을 볼 수 밖에 없는 나이였습니다. 우리 식구가 주변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 엄마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빨리 결단을 했기 때문에 피폭을 거기에서 멈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왜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나요.
“오사카에서는 모녀 둘만 고립되어 있어서 불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교토에 후쿠시마 피난민들이 한 장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토에 가니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갔을 땐 주로 다들 딸보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온 피난민들이었고, 여름쯤 되니까, 딸과 동년배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피난을 오기 시작했습니다.”
- 설사 같은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돌이켜보니 저녁 때가 되면 반드시 설사가 났습니다. 이상한게 배가 아프지 않은데 설사가 나왔습니다. 설사는 배가 아프잖아요. 그런데 배가 전혀 아프지 않고, 그냥 화장실에 가면 설사가 나오는 상태였습니다. 딸은 오사카로 간 직후 코피가 멈추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때는 방사능 때문이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교토에서 만난 피난민들과 이야기를 하며 다들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집 앞에 피난을 온 남자아이는 날마다 코피가 났는데, 어떤 날은 정말 코피가 멈추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코피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히 피폭증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병원엔 가지 않았나요.
“설사나 코피 같은 것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은 증상이 없는 것인가요.
“지금은 없지만, 저선량 피폭은 증상이 바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지금 없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안 나타날 거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정기적 검진이 중요합니다. 다른 피난민들은 검진에서 갑상선 결절이나 작은 혹이 발견돼 ‘요관찰’ 진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피난민이 된 후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교토 거리를 걷다 딸이 우연히 ‘탈원전’ 현수막을 봤습니다. 그것을 보자 내가 체험한 이야기를 뭔가 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쿠시마 피난민인데, 탈원전과 관련해 뭔가 할 수 있으면 하고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전단지 돌리는 일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직접 마이크를 주고 이야기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도로에서 생전 처음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100세대가 사는 교토 피난민 주택의 무료 보장 기간은 2년이고, 이후에는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핵 사고로 피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교토와 후쿠시마, 중앙정부에 청원서를 넣었습니다. 서명운동을 하고, 피해자 보고대회 같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2017년 3월에 피난민 주택에 대한 지원은 끊겼습니다. 피난민 100세대는 전부 흩어졌습니다.”
-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었나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의 당사자가 되고 나서 원전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언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일어날 지 모릅니다. 현재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거리 연설도 하고, 왜 핵발전소가 안 되는지 재판에서 진술하기도 합니다.”
먼 옛날(김명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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