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우익'의 현대사>(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오월의봄 2019.08
저자 : 야스다 고이치 1964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주간 호세키週刊寶石》 기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논픽션 작가가 되었다. 사건·사회 문제를 주요 테마로 삼고 집필 활동을 계속하면서 혐오발언 문제에 대해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린 《거리로 나온 넷우익》으로 2012년 제34회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2015년 〈르포 외국인 ‘노예’ 노동자〉로 제46회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잡지 부문을 수상했다. 저서로 《르포 차별과 빈곤의 외국인 노동자》, 《혐오발언》, 《오키나와의 신문은 정말로 ‘편향’되어 있는가》, 《애국이라는 이름의 망국》 등이 있다.
목차
시작하며
우익과 넷우익의 차이│우익이란 무엇인가
서장-전사前史, 일본 우익의 원류
우익 테러리즘의 시대│빈부격차에 분노하다│국가 개조를 지향하다│혈맹단 결성│국가 개조에서 쇼와유신으로│혈맹단, 폭력, 테러, 쿠데타│일본 우익의 특징│자유민권운동에서 태어나다│좌우의 명확한 분열│국가는 우익도 탄압한다│천황의 ‘인간 선언’│황국 사관은 왜 무너졌을까
1장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다
항복 반대·철저 항전│봉기의 열기는 식어버리고│무기를 입수하지 못하다│속출하는 해프닝│경찰서 안에서 “자결”│전후 초기 우익 활동가│건학 정신에 교육칙어를│천황을 사랑하는 아이들│애국노동조합│회사에 맹렬히 항의하다│“죽음으로 천양무궁을 기원한다”│요요기공원의 숨은 역사│“황혼에 맹세코 영원히 황성을 지키겠다”│전통 우익으로 살다│장렬한 자결│진짜 보수의 삶이란│끝나지 않은 유신의 꿈
2장 반미에서 ‘친미·반공’으로
친미 민족주의란│유골 탈환│마쓰이 이와네의 암자│칠사의 분골│‘좌익 혈맹단’의 표적이 되다│우익단체 간부들의 회합│젊은 우익의 얼굴│야쿠자 계열 우익의 대두│사회주의자에서 우익으로│‘황도’ 대신 ‘방공’│우파 세력의 부활│아카오 빈의 생애│모두를 난도질하는 독특한 설법│선생님을 동경해서│새로운 시대 우익의 모습│오족협화의 꿈│‘작은 만주’를 지향하다│묘지기로 살다│진짜 보수란 산벚꽃처럼
3장 정치와 폭력 조직의 연결
왜 친미가 되었는가│반공발도대의 위험한 계획│‘정치·폭력·우익’의 트라이앵글│자민당 원외단│“섬을 지켜주었다.”│정재계를 연결하다│건국기념일 제정 뒷이야기│한국의 군사정권과 일본의 우익│“적색 세력과 대결”│부활한 발도대의 망령│폭력 장치로서 우익│삼무 사건│실행 부대의 리더를 만나다│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이유│괴승 이케구치 에칸│국회 잠입│조선인 노동자를 공양하다│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우익│국가권력이 키운 문제아
4장 신우익의 탄생
우익과 아이돌│‘방패회’의 가입 조건│민족파 학생운동의 등장│새로운 우익의 계보│분트를 동경하다│검은 헬멧을 쓴 데모대│신우익의 정의│스즈키 구니오와 ‘생장의 집’│일학동의 탄생│미시마 유키오의 격려│내부 대립│“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인재를”│“정치를 움직이자”│보수와 보신│미시마의 탄식│일본회의를 지탱하는 실력자│반대편의 시선│일관되게 국가권력에 붙다│좌파도 우파도-학생운동의 몰락│미시마 유키오 사건이 준 충격│전업 활동가의 각오│반체제 민족주의자│넷우익 세력에게 내준 안방│내분과 분열
5장 종교 우파와 일본회의
양복을 입은 우익│대일본제국 헌법 복원 결의│독실한 ‘생장의 집’ 신자│‘기이한 사건’으로 비웃을 수 없는 이유│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개헌집회│하늘의 계시│반동│원호법제화 운동의 승리│교육 정상화 운동│수백 대의 선전차보다 우수한 대중운동│그리고 일본회의로│‘생장의 집’이 이탈하다│일본회의의 강점│개헌 선언│속속 성과를 거두다│새로운 교과서 만들기│가해의 역사를 담지 못하다│회사 전체를 동원해서라도│되살아난 일본의 전통 가족상│신사의 지원
6장 넷우익이 날뛰다
JC는 “한마디로 바보”│지금 가장 ‘극우’인 곳│인터넷에서 태어난 욕설│재특회가 말하는 ‘진실’│그들의 무기는 혐오발언│과격한 우파 집단│그들은 적인가, 아군인가│재특회의 쇠퇴│혐오는 살아 있다│‘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혐오범죄가 발생할 때│녹고 있는 경계│우익의 망망대해
끝으로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일본 우익의 분류
일본 우익은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선 ① 전통 우익. 대동숙, 불이가도회로 대표되는 이 계열은 전후 미국이 만든 질서를 부정하고 전전의 천황 중심 세계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고대 신도의 정신을 버리지 않고, 심신수련 장소로서 농장과 기숙사를 운영하기도 한다.
② 그다음으로 거리 선전을 중심으로 하는 행동 우익이 있다. 이들은 반공, 반좌익을 기치로 내걸고 직접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군복을 입고, 선전차를 타고, 음량을 크게 올린 군가를 트는 행동을 한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익단체이다. 좌익 집회가 열리면 우르르 몰려가 집회를 방해하는 활동도 벌인다. 중심 단체로 시국대책협의회,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 등이 있다.
③ 폭력단이 모체인 임협 우익도 있다. 행동 우익과 경계가 애매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언론사에 테러를 가하는 등 그동안 여러 폭력 사건들을 일으켰다. 기업에 경비원으로 고용되어 노조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즉 ‘반공’, ‘애국’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멋대로 행세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④ 1970년대에 등장한 신우익이 있다. 이들은 ‘친미’ 일변도인 기존 우익단체와 달리 ‘반미’ ‘반체제’를 외쳤다. 그래서 언론 등에서 이들을 새로운 우익이라는 의미인 ‘신우익’으로 불렀다. 민족파 학생운동을 모체로 탄생한 일수회가 대표 단체이다. 그러나 일반 우익단체와 주장하는 게 달라 ‘이단’ 취급을 받는다. 민족파 학생운동은 신좌익 학생운동에 대한 대항으로 탄생했는데, 좌익 학생운동이 쇠퇴하자 함께 소멸해갔다.
⑤ 종교 보수. 지금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일본회의 등도 종교 보수단체가 모체이다. 일본회의와 쌍두마차인 신도정치연맹도 이 계열이다. 신도정치연맹은 전국 대부분의 신사들이 가맹되어 있는 신사본청이 배후에 있다. 저자는 이들을 ‘양복을 입은 우익’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들은 친정부 노선을 걸으며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부를 지원하고, ‘개헌’을 주장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등 활발한 대중운동을 펼치며 일본 사회에 ‘극우의 공기’를 주입하고 있다. 정계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조직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소속 국회의원은 280여 명(2017년 10월 현재)이다. 아베 수상은 간담회의 특별고문이고, 현 내각 각료 대부분도 이 모임 소속이다. 신도정치연맹 의원 네트워크인 ‘신정련 국회의원 간담회’는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288명(2018년 5월 현재)의 멤버를 자랑한다. 아베 수상도 그중 한 명으로, 젊은 시절부터 사무국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⑥ 마지막으로 배외주의,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넷우익. 지금은 규모가 작아진 재특회가 대표적인 단체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일본 사회 전체가 재특회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극우화되었다고 진단한다. 재특회의 혐오발언이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또한 기존 우익과 넷우익의 경계가 허물어져 둘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혐오발언을 무기로 하는 '재특회'의 시위(사진=오월의봄)
일본 우익의 역사
이 책에는 전전의 혈맹단에서부터 최근의 재특회, 일본회의까지 일본 우익의 역사를 아우른다. 저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우익의 역사를 살핀다. 하나는 종전부터 1970년 안보까지.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으며, 동시에 우익의 자멸이기도 했다. 전후,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 총사령부)의 손으로 우익 세력은 ‘전전의 유물’이라는 이유로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 대부분의 우익 인사들이 이때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한때의 휴식일 뿐이었다. 국가권력의 폭력 장치로서 숨을 다시 쉬게 된 우익은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되살아났다. 일부는 폭력단과도 연계되어 검게 칠한 선전차로 대표되는 ‘위협과 공갈’이라는 우익의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한편 1970년대에는 전후라는 시대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체제’를 주장하는 신우익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흐름. 1970년에 이르러 신좌익은 운동의 첨예화, 내부 분열 등으로 급속히 힘을 잃었다. 신좌익에 대한 대항으로 탄생한 민족파 학생운동도 신좌익이 힘을 잃자 함께 방향을 잃었다. 이제 우익은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났다. ‘반공’을 대신하는 ‘개헌’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들었다. 개헌을 구심력으로 삼은 일부 우익은 풀뿌리 대중운동에서 활로를 찾았다. 그 흐름에서 일본회의와 같은 거대한 대중 조직이 탄생했다. 우익은 ‘개헌’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들고 사회에 다시 침투한 것이다. 이 새로운 조직들은 ‘우경화’라고 불리는 시대를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이런 움직임을 자양분 삼아 21세기에 ‘넷우익’이라는 계층이 탄생했다. 기존 우익들은 처음 넷우익의 배타적, 차별적 주장을 백안시했지만, 이제는 양 진영의 경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넷우익을 포함한 우익 세력의 목적은 ‘개헌’뿐 아니라 인종, 반전, 반차별과 같은 전후 민주주의가 키워온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후라는 시간에 대한 ‘반동’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보다는 일본의 전통을 강조하고, 이는 전전의 일본으로 회귀하는 것을 뜻한다.
필요하다면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목적을 달성한다
“내가 우익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목구멍 안에서 역겨운 느낌이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폭력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1932년 민정당 소속 전 대장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총탄을 맞고 살해되었다. 얼마 뒤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인 단 다쿠마가 미쓰이은행 본점 현관 앞에서 사살되었다. 범인은 모두 혈맹단 출신 청년들.
일본 우익의 특징 중 하나는 직접 행동, 즉 테러 활동이다. 테러는 최근까지도 행해지고 있을 정도로 일본 우익을 상징하는 행동 중 하나다. 이 우익 테러리즘의 원류는 전전의 우익단체 혈맹단. 이노우에 닛쇼가 설립한 혈맹단은 ‘국가 개조’, ‘부패 체제 타도’를 지향했다. 사리사욕에 치우친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만민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쇼와유신 운동이라고 하는데, 얼핏 보면 혁명적으로 보이지만 천황에게 국가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체제 전복’을 주장했지만, 천황만은 절대적으로 사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혈맹단은 천황 옆의 간신들을 ‘일인일살一人一殺, 일살다생一殺多生’의 정신으로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여러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
결국 혈맹단원 14명이 체포되면서 혈맹단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혈맹단의 테러리즘은 일본 우익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행위마저도 긍정하는 게 일본 우익의 특징이 되었다. 이후 우익에 의한 테러는 최근까지도 거듭 벌어졌다. 혈맹단 사건이 일어난 1932년 무장한 해군 장교들이 총리 관저에 난입해 총리를 암살했다(5·15사건). 1936년에는 육군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2·26사건). 전후에도 테러는 계속되었다. 1947년 신예대중당 당원이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 의장 기쿠나미 가쓰미를 식칼로 베는 사건을 저질렀다. 1960년 10월 12일 일본 사회당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이 우익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1961년 《주오코론中央公論》에 발표된 한 소설에 천황 일가를 야유하는 듯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17세 우익 소년이 주오코론사 사장 집에 침입해 사장 부인에게 중상을 입혔고, 가정부를 살해했다. 2018년에는 두 명의 우익 활동가가 조선총련 중앙본부 현관을 향해 총탄 5발을 쏘았다. 이런 테러로 인해, 일본 사회는 폭력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천황 없이는 일본 우익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황을 유일,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천황의 존재 없이 일본 우익은 존재할 수 없다. 네오나치에게는 사상상의 ‘절대군주’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우익에게는 ‘천황이 있어야 우익’인 것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지난 12일 방송된 'MBC스페셜-아베와 일본회의'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 1945년 천황은 스스로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천황의 인간 선언’이 우익에게 안겨준 충격은 컸다. 1945년 8월 22일, 종전에 반대하는 ‘존양동지회’ 멤버 10명이 아타고산에 올라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후 서로에게 수류탄을 던져 자살했다. 5일 뒤, 이번에는 자결자의 부인 3명이 그 장소에서 권총을 쏘고 자결했다. 같은 해 8월 23일에는 명랑회 회원 12명이 황거 앞에서 단도로 할복하거나 목을 찔러 자살했다. 8월 25일에는 대동숙 숙생 14명이 요요기 연병장 근처에서 집단 자결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은 천황에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있으므로 죽음으로써 사죄한다는 취지였다.
천황 중심의 만민평등사회를 지향한 ‘쇼와유신’의 꿈은 전쟁과 함께 사라졌다. ‘신주불멸’, 즉 일본은 신의 나라이므로 패할 리가 없다는 믿음도 패전을 맞이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일부 우익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천황에게 사죄했다. “천황주의가 초래한 광기였으며,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전 우익 사상을 실천한 셈이었다. 황도 사상에 너무 충실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종전 조서 발표와 함께 그들의 이상과 육체는 산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일본 우익에게 천황은 절대적이다. 일본 우익이 다른 나라의 우익과 다른 점은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걸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천황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천황이 있고, 국민이 있다는 생각, 이것을 계속 지키는 것이야말로 일본 우익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일본 사회에서는 천황을 비판하는 건 금기 사항이다. 바로 우익의 테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인, 언론사, 출판사 등에 우익이 가한 테러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1990년 나가사키 시장 모토지마 히토시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자, 우익단체는 바로 테러를 가했다. 특히 1961년 주오코론사 사장 집 난입 사건은 언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이 언론계에 끼친 영향은 컸다. 즉 우익 테러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황실에 관해 언론은 강제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비롯해 황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업지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기자들은 황실 보도에 관해서는 폭력 장치로서 우익의 존재에 기가 눌려 압박을 받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최근 2016년에도 우익 청년이 월간지 《윌》 편집부실에 난입해 사무실 바닥에 페인트를 뿌리고 소화기를 분사한 사건이 있었다. 황태자나 마사코 비를 비판하면서 현대 황실을 걱정하는 내용을 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참고로 월간지 《윌》은 우익 성향의 잡지였다.
권력의 나팔수, 권력을 위한 폭력 장치
종전이 되자 기존 우익은 궤멸했다.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 총사령부)의 손으로 우익 세력은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곧 미국이 원하는 ‘반공’의 깃발을 내걸고 다시 등장했다. 미국 또한 동아시아의 반공 보루로서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 우익 세력의 등장을 부추기는 면도 있었다. 원래 천황의 질서를 무너뜨린 미국을 반대해야 마땅하지만, 우익은 손쉽게 ‘반미’에서 ‘친미’로 돌아섰다. 망설임이나 고통의 표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전후 우익의 궤적을 보는 데 아주 중요하다.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깃발을 흔들면서 미일 안보를 긍정하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고정화를 돕는 것이 이젠 대부분의 우익이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후, 노동쟁의가 자주 일어나자 회사 편에 서서 노조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고, 196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을 때는 학교 편에 서서 좌익 학생들과 싸웠다. 결국 우익은 항상 권력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우익단체들은 국가권력의 폭력 장치로서 기꺼이 자신들을 갖다 바쳤다. 1951년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기무라 도쿠타로는 공산당의 무장투쟁에 대항하고자 우익단체와 폭력단을 엮은 반공발도대를 구상했다. 결국 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폭력단과 연계된 우익단체가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반공’, ‘애국’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정치-폭력단-우익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된 것이다.
“체제는 우익단체를 첨병으로 부렸다. 기업이나 지주에게 고용된 우익들은 쟁의 현장으로 쳐들어갔다. 지배층의 폭력 장치로서 쟁의를 탄압하는 데 선두에 선 것이다.”
현재도 우익은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수상이 선거 유세 차량에서 내려갔는데도 열광은 멈추지 않았다. 환희의 기세는 그대로 분노가 되어 곧 ‘적’을 향한 공격으로 바뀌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소수의 ‘반아베’파 사람들과 언론이 표적이 되었다. ‘꺼져라!’ ‘너희들, 비국민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70년 기시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오른쪽)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오노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지간’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반공 파트너’, 한국 군사정권과 일본의 우익
“예전에는 무엇보다 반공이라는 가치관을 우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동지로 보는 견해가 우익에서는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 일본 우익은 ‘혐한’을 외치지만 예전만 해도 한국과 동지 관계였다. 정확히 말해 그들과 동지 관계였던 ‘한국’은 한국의 군사정권을 말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군사정권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일본 우익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협력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서로 이익이 되니 일본 우익은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원했고, 한국의 군사정권도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일본 우익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국이 군사정권이었을 시절에 일본 우익은 한국 군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익에게 북조선은 한일 공통의 적이었으니까 당연히 보조를 맞췄지요. 한일 양국이 가진 다른 역사 인식 문제는 북조선이 붕괴할 때까지 보류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전후 일본 행동 우익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인 아카오 빈은 ‘반공 파트너’인 한국과의 우호를 중시했는데, 영유권을 둘러싼 독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과의 우호가 중요하니 “그딴 섬은 폭파시키면 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우익과 한국 군사정권과의 관계도 종언을 맞이했다. 1987년에 한국이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군사정권이 몰락하자 일본 우익은 그 파트너를 잃었다. “우익은 군부와는 연결되었지만 민간과 교류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우익은 한국 군사정권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죠. 한국의 민주화는 결과적으로 우익과 한국의 연결이 소멸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대중 속으로 들어간 ‘양복을 입은 우익’
“그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역으로 말하면 대중이 우익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중은 ‘제복 입은 우익’을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양복을 입은 우익’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만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새로운 테제로 ‘개헌’을 들고나온 종교 보수가 등장했다. 1974년 생장의 집을 중심으로 한 종교계 우파들이 대거 모여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전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헌법을 개정해 다시 전전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었다.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평등, 반전평화라는 개념은 전후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파는 거기에서 ‘파괴되어가는 국체’를 보았다. 있어야 할 일본이 사라진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전전의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운동 수단으로 삼은 것은 검은 선전차가 아니라 대중운동이었다. 그들은 좌파의 풀뿌리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집요하게 대중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조금씩 이기는 법을 알아갔다. 가장 먼저 ‘원호법제화 운동’(황위가 계승될 때마다 바뀌는 원호는 우익 진영에게 천황제의 상징이기기도 하다)애서 승리했다. 전국 각지에 ‘원호법제화’를 주장하는 원정대를 파견하고 각각의 지방 의회와 교섭했다. 나아가 저명인을 초청한 집회를 열고, 데모 행진 등을 펼쳤다. 그 결과 전국 지방의회의 약 반수에 해당하는 1,632개 의회에서 ‘원호법제화’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마치 바닥을 기는 듯한 풀뿌리 운동의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1979년에 우파 세력이 간절히 원하던 ‘원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우파 대중운동의 빛나는 성공 체험이었다.
이 운동 성과를 바탕으로 1981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국민회의’는 최대 목표로 개헌을 내걸었지만, 더 나아가 자주방위와 일본의 전통에 근거한 교육의 실현도 과제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교육 정상화 운동’에 힘을 쏟았다. ‘국민회의’의 인식에 따르면, 전후 학교 교육은 일교조의 강력한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도 일본의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매우 불공정한 내용이었다. ‘국민회의’는 ‘적화 교육’이 진행 중인 학교 현장을 비판할 뿐 아니라 독자적 교과서 편찬에도 나서게 되어 1985년 《신편 일본사新編日本史》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자민당과의 관계 맺기에도 더 적극적이었다. 자민당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당내에 동조 세력을 늘려왔다.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때로는 감시하고, 의견을 내놓고, 그러면서 자민당 내부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그리고 일본회의… 일본 사회에 ‘극우의 공기’를 주입하다
“전후에 연합국이 준 민주주의는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말이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했습니다. 일본의 훌륭한 정신문화도, 전통도 점점 잃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뭐니 뭐니 해도 헌법을 바꿔야 합니다. 싹이 썩으면 이 나라는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많은 일본인들 사이에 아직 훌륭한 전통정신이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우리 ‘일본회의’는 온 일본에 철저히 전파하여 5,000만 명 이상의 ‘일본회의’ 멤버가 생겼을 때, 우리의 힘으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해 ‘일본회의’가 탄생했다. 지금 일본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회의 역시 ‘개헌’과 ‘일본의 전통문화 복원’을 실행해야 할 과제로 내세웠다. 일본회의는 ‘지키는 모임’과 ‘국민회의’에서 성과를 거둔 대중운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하나씩 이뤄나갔다. 게다가 이전보다 정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아베 신조 총리 또한 일본회의와 깊은 관계에 있다.
2017년 일본회의가 주최한 개헌집회. 민간이 주최한 집회에 아베 총리가 화상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수상 지위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개헌 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그날 아베 총리는 2020년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새로운 헌법이 시행되면 좋겠다고 일본회의가 주최한 자리에서 말했다.
일본회의는 개헌운동 외에 국기국가법 제정운동,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운동, 교육기본법 개정운동 등에 몰두해왔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 모두 일본회의가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었다. 1998년 국기국가법(일장기와 기미가요에 국기와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률) 제정에 관여해 결국 통과시켰다. 같은 해, 외국인 지방 참정권은 거의 국회에서 통과되기 직전이었지만, 일본회의의 반대운동으로 결국 무산되었다. 2006년에는 교육기본법 개정운동을 펼쳐 이를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가해자의 역사’가 담긴 역사교과서는 퇴출되고, 일본회의가 관여해 만든 역사교과서가 대거 채택되었다. 전전의 질서가 반영된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모두 일본회의가 바라던 바였다. 이외에도 일본회의는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국민운동도 일으켰다.
집회, 데모, 지방의회에 대한 진정, 청원, 결의. 이 모든 것을 일본회의는 온 힘을 다해 집요하게 진행했다. 시간을 들여 정성을 다해 하나씩 과정을 밟아나갔다. 지방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확장시켰으며, 국회의원들을 포위했다. 일본회의는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일본상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회의는 항상 ‘흑자’를 관철해왔다는 것이다. 일본회의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일본회의가 보여준 것은 ‘대중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회의가 일본 사회를 지배한다”는 견해는 틀렸다. 그들은 ‘지배’가 목적이 아니라, 공기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아왔다. 조그마한 부채로라도 몇 천, 몇 만 번 흔들어 바람을 일으킨다면, 큰 나무도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계속 선동한다. 큰 나무는 흔들리고 있다.”
일본회의가 바라는 대로 일본 사회는 지금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일본 사회에 ‘극우의 공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다.
책속으로
다 큰 어른이 일장기를 흔들면서 조선학교朝鮮學校에 다니는 아이들을 공갈한다. “외국인을 몰아내라”고 외치면서 번화가를 누빈다. 듣기에도 참을 수 없는 혐오발언을 인터넷에 쓰고, 반론을 받으면 “표현의 자유”라며 뻣뻣하게 나온다. 개헌을 주장하면서 일본국 헌법을 들먹이며 제 몸을 지키려고 한다. 나는 생활보호제도 이용자를 욕하거나,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연대 시위에 참가한 고령자에게 달려드는 우익도 보았다. 빈곤을 자기책임이라며 냉소적으로 보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전력을 다해 지지한다. --- p.8
우익은 체제 타도를 지향하면서도, 천황만은 절대적으로 사수하려고 했다. 많은 일본인에게 뿌리내려져 있는 천황관(천황을 신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천황절대주의)은 그대로 두고, 만민평등의 국가 체제를 지향했다. 그랬기 때문인지 테러리스트는 대중에게 의적으로 보였다. 만약 테러의 주역이 “천황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 좌익 조직이었다면, 설령 그들이 빈곤 구제를 대의로 내걸었다 하더라도 당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28
일본 우익이 다른 나라의 우익과 다른 점은 다카마가하라의 주재신과 계보로서 이어지는 천황이 존재하고, 그 천황을 만물의 중심으로 여기고 천황이 국체를 지킨다는 생각에 있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을 절대시하는 사상이다. 천황주의라고 해도 좋다. 우익은 예로부터 ‘국체國體’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를 의미한다. 천황이 있고 국가와 국민이 있다는 생각. 이것을 계속 지키는 것이야말로 일본 우익의 특징이다. --- pp.44~45
석비의 휘호揮毫는 아베 신조 安倍晋三 수상의 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썼다. 도쿄재판이 ‘승자’에 의한 일방적인 심판의 장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껏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재난에 국민을 휘말리게 한 전쟁 지도자들을 당시 현역 수상인 기시가 ‘순국칠사’라고 찬사한 셈이었다. 개설 당시에는 현지뿐 아니라 미국 국무성에서도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 p.97
국가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것 이상으로 경제적으로는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지향했는데, 주권을 국가에 두고,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일본 우익이 내건 황국 사관과 친밀성이 있었다. 좌파가 외치는 사회주의가 인민의 혁명으로 성립하는 데 비해 우파가 외치는 국가사회주의는 국가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즉 위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이다(나치스 또한 국가사회주의를 테제로 내세웠다). --- p.119
우파 세력은 자민당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당내에 동조를 늘려왔다.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때로는 감시하고, 의견을 내놓고, 그러면서 내부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 p.265
중요한 것은, 일본회의는 항상 ‘흑자’를 관철해왔다는 것이다. 일본회의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일본회의가 보여준 것은 ‘대중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회의가 일본 사회를 지배한다”는 견해는 틀렸다. 그들은 ‘지배’가 목적이 아니라, 공기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아왔다. 조그마한 부채로라도 몇 천, 몇 만 번 흔들어 바람을 일으킨다면, 큰 나무도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계속 선동한다. 큰 나무는 흔들리고 있다. --- pp.287~288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금 가장 일반적인 우익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조소와 냉소, 그리고 혐오발언. 차별과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적’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내 개별적으로 공격한다. 인터넷에서 태어난 일본판 ‘극우’는 오늘도 곳곳에서 날뛰고 있다. --- p.298
재특회의 힘이 약해진 이유 중 하나는 혐오발언적인 행동에 대해 사회적 압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특회가 없어도 될 만큼 사회에 이미 ‘극우 공기’가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재특회의 추락으로 바뀐 것은 재특회가 주최한 데모가 거의 사라졌다-이런 사실 정도이다. --- p.313
요 몇 년을 돌아보기만 해도, 차별이나 편견을 부추기는 일본의 ‘극우화’는 속도를 올리고 있다. 아니 끝이 없다. 차별 데모에 참가하는 지방의원이 있다. 응원하러 달려오는 국회의원이 있다. 차별 발언을 되풀이하는 의원이 있다. 넷우익이 주최하는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의원이 있다. 블로그에 외국인을 “구더기, 바퀴벌레”라고 표현한 신사의 궁사가 쓴 책에 아베 신조 수상이 추천사를 쓴다. --- pp.323~324
일본인은 극우의 망망대해에 살고 있다"
1950년 10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11개월 앞두고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일본 전범들에 가한 공직 추방 조치를 해제한다. 전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지는 공산주의 대항을 위해 이들의 관료적 실력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1951년 2월 8일, 점령군의 감시를 피해 흩어졌던 우익들이 '조국방위간담회'를 열고, 이 회의는 이후 '대일본애국단체연합·시국대책협의회'로 이름을 바꾼다. 일본 우익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조국방위간담회개 개최된 같은 해, 일본 전후 가장 유명했던 우익 활동가 아카오 빈이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한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기울었던(상당수 일본 우익이 청년기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훗날 국가사회주의자로 전향했다.
아카오는 지금의 일본 우익과는 결이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전후 일본이 미국의 우산 아래에 들어가자, 그가 주로 겨냥한 적은 일교조(일본교직원조합)였다.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친다는 이유였다. 한국 극우 세력이 전교조를 주요 적으로 타깃팅한 것과 같다. 주요 목적이 반공이었기에, 같은 반공 국가인 한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도 아카오는 주장했다. 독도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가 남긴 말은 유명하다. "그딴 섬은 폭파시켜버리면 돼." 미국 주도의 동맹 체제에서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한국 극우와 결이 비슷하다.
아카오 사상이 한국 극우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그는 1951년 대일본애국당 창당 때부터 개헌을 요구했다. 전쟁 직후부터 일본 극우의 핵심 목표는 개헌이었다.
<일본 '우익'의 현대사>(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오월의봄 펴냄)는 한일 갈등이 첨예한 이 시기, 현대 일본을 주도하는 일본 우익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12년 출간돼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논픽션 <거리로 나온 넷우익>(김현욱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한국 발매는 2013년)에서 당시 일본의 문제적 사회현상이었던 넷우익을 파헤친 데서 한발 나가, 이번에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일본 극우 사상사의 핵심 인물을 재조명하고, 연관 인물들과 인터뷰해 방대한 극우 계보를 정리했다.
굳이 '방대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까닭은, 일본 극우가 하나의 사상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 극우를 크게 여섯 갈래로 나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이들 계보가 뭉치고 흩어지면서 현대 일본 극우의 극단적 모습이 서서히 갖춰지는 모습을 좇는 독서 경험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대일본애국당과 같은 해 출범한 협화당(協和黨, 교와토)은 일본 재군비 반대, 전쟁 포기, 엄정한 중립 국가를 지향한다. 반공 구호조차 외치지 않는다. 이 당의 뿌리가 이시와라 간지가 조직한 전전 우익단체 동아연맹이기 때문이다. 만주침공(만주사변)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진 이시와라 간지는 아시아 각국이 우호적으로 연대해 미국과의 '인류 최종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던 인물이다. 전후 일부 리버럴 중에도 (무력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국가에서 평화 사상을 논한다는 모순을 무시하고) 그의 오족협화(五族協和) 사상에 심취한 이가 있었다. 한국에는 최영의로 알려진 가라테 고수 오야마 마스다쓰의 스승으로 재일민단 단장을 지내기도 한 조영주도 그의 제자다.
다른 극단에는 대일본애국단체연합시국대책협의회 일부 구성원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천황 주체 사상자도 있다. 이들은 간단히 말해 현 일본 지배 체제 자체를 부인한다. 천황이 절대권력을 쥐고 다스리는 아래 만민이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일제 강점기 그 모습으로 일본이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다. 책에 묘사된 이들의 회의에서 나오는 발언은 독자를 실소케 한다. "폐하께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신민의 분수를 넘는 행위입니다." "(절대권력자인 천황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엄하므로) 우익씩이나 되는 자가 자기 폐하를 야스쿠니로 데려가는 행위를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 극우의 핵심으로 꼽히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일부 인사의 경우 히틀러의 제3제국 자체를 부정하고 비스마르크 집권기인 통일 독일(제2제국)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이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북유럽 극우 일부와도 상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유럽 일부 극우주의자는 기독교 세계관이 통일한 현대 유럽 자체를 적대한다. 노르딕 신화 시대의 재현을 이상향으로 삼는다(한국에도 이 같은 극우가 있다고 봐야할 듯하다. 환단고기 등을 추종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있다.).
▲ 일본의 패전일이자 한국의 광복절인 지난 15일 일본 도쿄(東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극우들이 전범기인 욱일기(旭日旗)를 들고 선 모습. ⓒ연합뉴스
단연 한국 독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4장 '신우익의 탄생'과 5장 '종교 우파와 일본회의'다.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현대 우익이 이들 장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960년 우파 대학생 조직 일본학생회의(JASCO, 자스코)가 출범한다. 1967년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던 야마우라 요시히사가 의장이 된 후부터 자스코는 친미, 반공으로 대표되던 기존 일본 우익 사상과 결별을 선언한다. 자스코는 얄타회담(Y)으로 인해 미소 패권 체제가 확립되고, 포츠담회담(P)으로 인해 일본이 미국의 하부 동맹국으로 떨어졌다고 규정하고 이 'YP 체제' 극복을 목표로 내건다. 같은 60년대, 일본학생동맹(일학동), 전국학생자치체연락협의회(전국학협) 등 우파 학생 조직이 연달아 등장한다. '신우익'이 탄생한 순간이다. 특히 전국학협 출신 상당수가 현 일본 극우의 대표 조직인 일본회의로 들어갔다. 이들은 대체로 반 YP 체제, 점령 헌법 타도(개헌), 반일교조 등의 구호를 목표로 내걸었다. 마치 한국의 학생운동세력이 이후 민주 세력의 중심으로 성장하듯, 일본에서도 격동의 60년대를 보낸 우파 대학생들이 극우의 핵심이 된다. 이들은 넷우익이 인터넷 시대 새로운 주류가 될 때까지 일본 우익의 핵심이 되었다.
학생운동 시대가 퇴조하고 1970년대가 열린다. 일본청년협의회가 이 해 조직된다. 1930년 탄생한 신흥종교 생장의 집이 이 조직의 모태다. 이 조직은 1974년 일본을 지키는 모임으로 이름을 바꾼다.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핵심 멤버는 전부 종교(신토) 관계자들이었다. 1981년 출범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합친다. 1997년, 그 유명한 일본회의가 탄생한다. 이들은 전후 체제 자체를 부정한다. 전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이 같은 사고는 2000년대 들어 일본 길거리를 혐오로 뒤덮은 이른바 넷우익에게까지 이어진다.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우파 학생운동도 힘을 잃자, 생장의 집은 일본 우익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생장의 집 출신의 정치가와 운동가들이 현대 극우 움직임을 주도한다. 일본회의의 중심에 종교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에서 보듯, 지금도 천황제, 신토는 일본 극우주의의 정수다.
이들의 대중운동은 결실을 하나하나 맺어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호법제화다. 원호법제화운동의 성공 후 탄생한 일본회의는 개헌, '교육 정상화', 자주방위 등 핵심 3대 안건을 일본 사회에 요구하고 나섰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새역모 등으로 대표되는 퇴행과 군국주의 사상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게 됐다. 저자는 넷우익이 판치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 일본 길거리에서 과거처럼 조선인 등 외국인을 혐오하는 집회를 자주 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우파가 너무나 당연한 주류가 되어버려서, 그런 모임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고 말이다.
오늘날 일본회의는 회원 4만여 명 규모다. 일본 전국 47개 도도부현 본부 외에도 243개 지부를 두고 있다.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조직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회장 후루야 게이지 중의원)'가 존재하고, 이 모임 소속 국회의원은 280명에 이른다. 아베 수상이 간담회 특별고문이고, 현 아베 내각의 각료 대부분이 이 모임 멤버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머물렀던 일본 극우는 아베 내각 들어 정권과 한 몸이 됐다.
아베 내각이 주도하는 개헌 목표는 '전쟁 가능한 국가'로 일본을 바꾸는 것 정도라고 알기 쉽다. 일본회의의 요구는 한발 나간다. '천황 폐하께서 일본국을 대표하는 원수임을 명기'하는 것도 이들의 개헌 목표다. 국기국가법 제정운동,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 반대운동, 교육기본법 제정운동 등 이들의 모든 극우적 백래시의 핵심 목표는 천황 국가로의 회귀와 민주주의 반대다.
지난해 2월 23일, 도쿄도 지요다구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에서 5발의 총성이 울린다. 현행범으로 56세 우익 활동가와 46세 전직 폭력단원이 체포된다. 이 활동가의 딸은 한국 누리꾼에게도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있다. 2013년 오사카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을 겨냥해 "난징대학살이 아니라, 쓰루하시대학살을 실행하자"고 목소리를 높인 여중생이 주인공이다. 일본회의로 대표되는 극우조직과 넷우익이 결합하면서, 일본은 점차 더 극우로의 질주를 가속화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극우화다. 우리는 우익의 망망대해에서 살고 있다."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할 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로 위험한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일 갈등이 고조화하는 시기, 이웃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대희 기자 /프레시안
일본우익과 싸우는 기자 우에무라 “한·일관계 역사 바탕 위 미래로 가야”
우에무라 다카시<슈칸킨요비> 발행인/사진 서성일 기자
기자는 운명적으로 거짓을 폭로하고 부정과 싸울 수밖에 없다. 폭로하고 싸우는 대상이 거대할수록 기자 평가도 높아진다. 특종의 등급은 얼마나 큰 거짓과 부정과 맞섰느냐로 결정된다. 개인 간 문제보다 집단이나 세력, 나아가 정부가 자행한 부정을 폭로하는 보도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기자에게 가장 큰 특종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고발하고 싸우는 것이다.
한 기자가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발행인이다. 일본인인 그는 일본 우익세력과 아베 정권과 싸운다. 민간세력과 권력이 결합한 거대한 상대다.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그는 1991년 8월 11일 한국인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사례를 처음 보도했다. 이 보도는 그때까지 일종의 ‘에피소드’로 여기던 일제하 종군위안부 문제를 인륜을 거스르는 전쟁범죄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우에무라 기자는 국익을 해친 ‘날조기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우익세력은 그의 고등학생 딸의 신상을 털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다른 취업길도 막혔다. 하지만 그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참담한 현대사가 일본 기자에 의해, 일본 언론에 의해 의제화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이부영)이 주최하는 강연회(6월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관 오후 6시)를 갖는다. 지난 6월 7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종군위안부 사례 처음 보도
-일본 우익과 법정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명예훼손 소송은 두 군데서 하고 있다. 도쿄에서 니시오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하고 있고, 삿포로에서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우파 저널리스트를 상대로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삿포로에서 내린 1심 판결에서는 내가 졌다. 판결은 사쿠라이가 나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쿠라이가 인신매매로 위안부가 됐다는 것을 믿은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사쿠라이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도쿄에서 1심 재판은 6월 26일 선고된다.”
-법정싸움에서 중요한 쟁점은 무엇인가.
“1991년 8월 11일 내가 쓴 기사는 한국정신대협의회가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증언을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쟁점은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이다. 강제로 끌고 갔다는 할머니 증언만 있고 증거문서는 없다. 나는 보도에서 ‘강제’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일본 재판소가 우경화됐기 때문이다.”
-왜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1990년 일본 국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질의했다. 이에 정부가 ‘민간이 했고 정부는 관계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한국에서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사회부 민권·재일한국인 담당기자였다. 재일한국인은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참정권도 없고, 취업은 물론 아파트 입주에도 차별을 받는다. 나는 ‘이웃사람’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이런 차별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문제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와세다대 다닐 때 재일한국인 선배를 만났다. 광주 민주화운동 다음해인 1981년 한국 여러 곳을 여행했고, <아사히신문>에 ‘김대중 무죄다’라는 기고를 하는 등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가했다.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1987년부터 1년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참, 아내가 한국인이다. 장모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이고, 아내는 그 유족회 직원이었다.”
2016년 쓴 책의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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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과 법정싸움 아직도 진행 중
-한국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일본 언론이 먼저 기사화했다. 이 보도는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였던 위안부 문제를 전쟁범죄로 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다. 내가 보도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가 증언한다는 얘기뿐이다. 나중에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 얘기했고, 이것이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록 내가 기자회견 3일 전에 기사를 썼지만 김 할머니가 용기 있게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면 내 기사는 그냥 묻혔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우에무라는 거듭 자신의 보도에 대한 과대평가를 우려했다.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도 이유겠지만, 진행되는 재판에 대한 영향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김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며 기자회견을 했고, 1991년 12월 6일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문제는 한·일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1992년 1월 17일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특히 1993년 8월 4일 일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부 모집과 이동, 관리 등 전체적으로 강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하는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하기까지 이른다. 1995년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만들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도 사과하는 등 위안부 문제는 수습단계에 들어선다. 1996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도 여성 폭력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1997년 일본 자민당 아베 신조 의원에 의해 상황은 거꾸로 간다. 위안부 문제가 기술된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 결성되고 아베 의원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우에무라는 “그때부터 우익들이 고노 담화를 폐기하려는 공격을 시작했고, <아사히신문>도 그 공격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도 보수화가 됐고, 결국 우에무라 기자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나.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제주도에서 한 여성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증언을 보도한 기사를 취소했다. 이것을 빌미로 우익들이 ‘위안부 문제에 <아사히신문>이 거짓 보도했다’고 주장하면서 내 문제까지 거론했다. <아사히신문>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회사를 중도에 그만두지 않았나. 해직기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나는 해직기자가 아니다. 대학교수가 좌절됐을 때 <아사히신문>에서 복직, ‘돌아오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거부했다. 내가 복직하면 우익들과 계속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2013년 한국인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위안부는 자발적이고 오히려 일본군과 동지적이라는 관점의 책이다. 그런 책을 낼 정도라면 보수화됐다는 증거 아닌가.
“<아사히신문> 출판부의 판단일 것이다. 계열사이긴 하지만 돈 벌기 위해 아무 책이나 출판하니까. 일본에는 박유하 같은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지식인도 있지만 보통은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비교적 리버럴한 <마이니치신문>이 ‘아시아태평양상’을 주고, 학술상까지 줬다. 일본 교수와 학자, 비평가, 언론인 등 지성의 수준이 매우 깊고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도 아베 총리의 극우정책에 속수무책으로 있는 이유는 뭔가.
“일본 지성 수준이 높지 않다.(웃음) 사상의 뿌리가 없어서 그렇다. 우익들이 ‘죽인다’고 하면 두려워한다. 좋을 때는 말하지만 탄압국면이면 말을 못한다. 심지어 어제까지 친구였지만 갑자기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한때 NHK가 이상적인 공영방송의 롤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NHK도 완전 친정부 방송이 됐다. 이젠 공영방송의 롤모델이 아니다.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월급받는 ‘회사원 기자’들이 많아졌다. 요즘 그런 후배 기자들이 많다. 나도 소시민적 기자인지도 모른다.(웃음) 그러나 이런 시련이 있어서 오히려 많은 공부를 하고 세계가 넓어졌다.”
우에무라는 1958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오사카 본사 사회부를 거쳐 테헤란특파원, 서울특파원, 베이징 총국에서 근무하다 2013년 4월 조기 퇴직했다. 2010년 와세다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2012년 4월부터 호쿠세이학원대학 강사를 하다 2016년 3월부터 한국가톨릭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동아시아 평화’를 강의한다.
가톨릭대학 초빙교수로 강의
우에무라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의 진보적 시사주간지 <슈칸킨요비> 발행인 겸 사장을 맡고 있다. 일주일에 3일은 서울에서, 4일은 일본에서 보낸다. 그는 “<슈칸킨요비>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이 창간한 25년 된 리버럴·진보적 잡지”라며 “광고가 거의 없고 정기구독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한때 정기구독자가 5만명까지 됐으나 요즘에는 1만3000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슈칸킨요비>에 재일교포로 1961년 한국에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관련한 기획기사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사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지만 이런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는 것은 양국 모두의 불행이다. 재일교포에게도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베 총리가 바뀐다고 일본의 우경화가 멈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일본과 한국 국민의 감정이 나빠진 것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젊은이, 젊은 기자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 더 복잡해진다”면서 “한·일관계는 역사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17년 7월 한·일학생포럼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기자 지망생이 함께 숙식을 하며 취재와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첫 포럼은 한국 ‘나눔의 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두 번째, 세 번째 포럼은 일본 히로시마와 오키나와에서 열렸다. 네 번째 포럼은 한국 5·18 광주에서 열렸고, 서울 남영동 인권기념관도 둘러봤다. 그는 30년 넘는 언론생활에서 자신이 추구한 것은 ‘인권과 평화’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1991년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던 한국 기자는 모두 언론계를 떠났고, 한국 기자들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압록강 칠백리(이미자)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