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생신날 형제들과 같이 가야산으로 향했다. 인천 둘째는 거리거 멀어 전화로 안부를 대신했다. 어쨌든 간만의 해인사길이 궁금했다. 산은 그대로인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마을과 길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야산(伽倻山)의 다른 이름은 다른 이름은 우두산(牛頭山), 비봉산(飛鳳山), 상골산(象骨山)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옛부터 여러 시인,묵객이 이 산을 찾았고 그 감흥을 적은 문집이 전하고 있다.
은행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색깔이다. 생육환경이 좋지 않다 보니 그 영양상태가 잎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흡사 잎끝이 타들어 가는 형태가 많다. 수피는 매연에 찌들어 은행 특유의 밝은 회색이 아닌 검은 회색이다. 사람이든 나무든 자라는 환경의 중요성이 일생을 좌우 한다.
홍류동 계곡을 바라보며 내 성장환경을 생각해 본다. 70년대 부모님들은 먹고 사는데, 주력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셨다. 70년대 중후반에는 철물업을 하다가 제2차 석유파동이 오면서 부도를 내고 망했다. 아버지는 그때 이후 전의를 상실한 듯 했다. 집도 전세집을 전전하다 80년대 말 문현동 안동네 골짜기 국유지에 무허가 천막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다 2004년 경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긴 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그때 국유지 점용에 따른 벌금과 변상금이 원금을 넘어 열배 이상 불어나 버렸다.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진작에 이야기를 했더라면, 어떻게 손을 써 볼 텐데 너무 멀리 지난온 것 같다. 방안을 모색 중이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해인사행은 이런 심란한 마음속에 이루어 졌다.
가을 탄 산 빛에 허허로운 마음을 기대어 보았다. 고운 최치원은 홍류동에서 ‘봄꽃과 가을 낙엽을 물 가운데에서 취한다(春花與秋葉取向水中求)’고 했는데 나는 다만 불붙은 산빛에 족할 뿐이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위 사이 거세게 달리며 뫼 사이서 포효하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렀네
안타깝게도 홍류동 계곡을 걸어서 이동하지 못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없던 길도 보였다. 소리길이었다. 길 바람이 이곳이라고 비켜나지 않았다. 가야면 면소재지에서 해인사까지의 약 5km 천수답과 홍류동 계곡을 타고 오르는데 차창으로 눈요기만 했을 뿐이다. 그 길에 이런 시가 남겨져 있다.
踏出松陰二十里(답출송음이십리) 소나무 숲길 이십 리를 밟아 나오니,
村村襞在好耕田(촌촌벽재호경전) 마을마다 경작하기 좋은 밭이로다.
世若不逢堯舜聖(세약불봉요순성) 세상에 만약 요순 같은 성인을 만나지 못하면,
吾儕先入此山前(오제선입차산전) 우리들은 먼저 이 산으로 들어오리라.
<이호윤(李顥潤),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중에서>
요즘 같이 마음 심란하고 일이 안풀릴 때면 정말 산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많다. 아마도 나도 나이가 들어 감이다. 번잡함을 벗어나 산촌에서 밭갈고 씨 뿌리며 운무 더불어 지내고 싶은 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그렇게 살고싶다는 바램이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 생활을 택하겠다. 물론 가족들의 동의와 동참이 전제되어야 할 일이다만 한달에 일주일만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야 내가 온전해 질 것 같다.
이중무는 을축년(1625년) 9월 12일 친구들과 가야산을 방문하는데 홍류동에 이르러 고운최치원의 시를 생각하고 그에 답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썼다.
聞說孤雲入此巒(문설고운입차만) 듣자니 고운이 이 산에 들었다던데
自家還在是非間(자가환재시비간) 그는 도리어 시비 사이에 있었구나.
儒仙佛學曾誰辯(유선불학증수변) 유불을 일찍이 누가 분별 하였는가
獨有詩名重與山(독유시명중여산) 오직 시명만 산과 더불어 중하구나.
<이중무(李重茂), 가야록(伽倻錄) 중에서>
그는 홍류동 계곡을 이렇게 표현했다. "
돌들은 호랑이가 웅크린 듯 용이 발 갈퀴로 잡아당기는 듯 했고, 나는 듯한 냇물은 마치 눈을 뿜어내는 듯 우레를 치는 듯하였다. 마음과 눈이 모두 장엄해졌다. 산은 고요하고 골짜기는 그윽하여 형체와 정신이 더불어 고요해졌다. 이것이 바로 경치를 말미암아 생기는 현상이며 감촉된 것을 따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이라 했는데, 뛰어난 글솜씨에 눈이 밝았던 것 같다.
千峰萬壑裏(천봉만학리)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 안에,
大道轉不窮(대도전불궁) 큰 길은 도리어 끝이 없구나.
始知通於塞(시지통어색) 막힌 데서 통함을 비로소 알겠으니,
此心要與同(차심요여동) 이 마음도 그와 같아지고자 하노라.
<이호윤(李顥潤),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중에서>
막힌데서 통함을 안다는 것,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
간만에 포즈를 취한 식구들,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렇게 네명이 한 컷 하기도 쉽지 않다.
해인사는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사찰중의 한 곳이다. 현재의 모습은 세조, 성종 대를 걸쳐 갖추게 되었다. 본전은 대적광전이며 이곳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 뒤에는 장경판전이 위치하는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다. 요즘 대장경세계문화축전이 개최되고 있어 사람의 발길이 분주하고 소란하다. 1939년 12월 초 김도태란 분이 동아일보에 해인사 기행문을 실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구에서 현풍을 지나 고령읍까지 백십리길을 와서 다시 야로면까지 차량을 이용했는데 이후부터는 도보로 이동했던 모양인데 거기 해인사까지 가는 길의 모습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예컨데 "...수풀 속으로 뚤린 실낫같은 길을 .." 십오리 걸어서 당도 했다는데,
해인사가 오래된 절이란 것은 알지만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더불어 그 역사를 전하는 것이라면 생목이며, 이런 노거수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아쉽게도 더이상의 활동은 중지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같이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해인사 반을 보고 가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을 앞두고 있다.
해인사의 사천왕은 조각상이 아닌 그림이다.
해인사 -대장경 홈페이지에서
팔만대장경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했던 이덕무의 재미있는 글이 있다. "보지 도인(寶誌道人)은 소량(蕭梁) 의 불제자였는데, 부처에 아첨하던 그 때에 승려로서 이름이 났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답산가(踏山歌) 1편을 내놓고 제자 가운데 도가 높은 제자에게 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입적한 뒤에 신라에서 이름난 승려가 올 것이니, 이 답산가를 전하여 주거라."라고 하였다. 과연 수년 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대사가 지공(誌公)의 풍문을 듣고 신라에서 와서 지공을 뵈려 하였다. 그러나 지공은 이미 입적한 뒤였다.
그 제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 간직하고 있던 답산가를 공손히 주고 지공의 계언(戒言)도 전하였다. 두 대사는 공손히 답산가와 계언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합장하여 지공의 무덤 앞에 서서 세 번 낮과 밤이 바뀌도록 한결같이 범주(梵呪)와 염불을 부지런히 외었더니 무덤이 열리며 지공이 나타나 이르기를, "신라 우두산(牛頭山)은 복지(福地) 이니, 사찰을 세우면 기이한 응보(應報)가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대사는 두렵고 공경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우두산은 합주(陜州) 의 가야산(伽倻山)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나무하는 노인을 만나 사찰을 창건할 만한 곳을 물었더니 노인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저쪽으로 두어 절벽을 돌아가면 물이 모여들어 합수되는 곳이 있다. 그 위에는 단단한 기왓장 수만 개가 있는데 왜 그리로 가서 절터를 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두 대사가 사례하고 나아가 보니 과연 지대가 평평하고 넓으며 단단한 기와가 겹겹으로 쌓여 있었다.
서로 말하기를, "장소가 있고 기와도 있지만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이 역사를 도울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하고는 공경히 주문을 외었더니, 상서로운 기운이 발산하여 곧장 허공 밖에까지 뻗쳐나갔다. 이때에 신라 애장왕(哀莊王, 800-809)의 왕후가 등에 종기가 났는데 모든 의약을 다해 보았지만 낫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초야(草野)나 바위 굴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인물이나 기술을 통달한 성인을 구하게 하니, 사명을 띤 관원들이 온 나라에 두루 다니며 찾았는데, 이때 사명을 띤 관원 한 사람이 상서로운 기운이 가야산 정상에 뻗쳐 있는 것을 보고는 두 대사에게 머리를 조아려 명을 전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전대 속에서 핏빛같이 고운 분홍실을 한오라기 전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이 실의 한 끝을 후원의 배꽃나무에 잡아매고 다른 한 끝은 종기에 접착시켜 놓으면 종기가 바로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명을 띤 관원이 돌아와서 그대로 시험하였더니 배나무는 말라죽고 종기는 즉시 완치되었다. 애장왕은 이를 은혜로 여겨 사자를 보내어 사례하고 대사의 소원이 무엇인가 물으니, 이는 장차 은혜를 보답하려는 것이었다. 대사는 사찰을 건립하는 일로써 대답하였다. 왕은 대장(大匠)에게 명하여 돈을 내어 사찰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 뒤에 합주의 이정(里丁)인 이거인(李居仁)이 길에서 눈은 셋이고 다리를 절름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는데, 이거인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그 강아지는 매일 점심 때에 한 끼의 밥만을 먹었으며 주인이 출입할 때면 반드시 몇 리라도 좆아와서 보내거나 맞이하였다. 그러다 3년 후에 죽자 이거인이 슬퍼하여 관(棺)에다가 염습하여 장사하고 제사하기를 사람과 같이하여 주었다. 그런지 2년 뒤에 이거인은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 영혼이 경황없이 불가에서 말하는 명부(冥府)라는 곳으로 들어가니, 대문 안에 엄정하게 공복(公服)으로 차린 관원이 있었다.
그는 당을 내려와 다정하게 맞이하여 말하기를, "우리 주인께서는 어찌하여 오셨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거인이 보니 전혀 면식이 없었으나, 다만 그 눈이 셋이었다. 또 말하기를, "옛적에 내가 견책을 받아 양계(陽界)에서 모피(毛皮)를 쓰고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 주인의 은혜를 입어 3년이 지난 후 다시 이 벼슬에 봉직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거인은 사례하고 애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용렬하니 염왕전(閻王殿) 앞에서 무슨 말로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눈이 셋 달린 사람이 당부하여 말하기를, "다만 세상에 살아 있었을 때에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여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거인이 그대로 아뢰었더니, 염라대왕이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귀신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눈이 셋 달린 사람은 작별의 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돌아가시면 팔만대장경을 등사하시고 화주(化主)의 권선권(勸善券)에 합주(陜州)의 도장을 찍어 잘 간수하여 두시오. 그렇게 하면 후일에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거인은 살아 돌아와서 그 말대로 하여 간수해 두었다. 이때에 애장왕의 귀공주(貴公主) 형제가 함께 천연두를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홀하여 말하기를, "만일 간수하여 둔 팔만대장경의 권선문을 얻는다면 우리의 병은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하여 구하게 하였더니, 합주의 원이 이거인을 역마로 달려 보내왔다. 이거인이 공주를 보니 공주는 땅 속에 있던 눈이 셋 달린 사람의 말을 하여 이르기를, "작별한 뒤로 평안하십니까?"라고 하고는 왕에게 말하기를, "팔만대장경은 저승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염라대왕께서 이 사람을 석방하여 주신 까닭은 세상에 나와서 이 일을 도모하게 하신 것입니다. 원하건대 왕께서는 이 사람을 도와 일을 이루소서."라고 하고, 이거인을 작별하여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영원히 못 만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곧 병이 나았다.
이때 거제도 바다에 큰 배가 떠 있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안에는 팔만대장경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모두 글자가 금은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왕은 온 나라 안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이거인과 함께 섬에 가서 간행하고 합주 해인사로 옮기어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해인사는 바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선생(李先生)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부자(夫子) 는 일찍이 괴력난신(怪力亂神) 《논어(論語)》‘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로, 괴이(怪異)·용력(勇力)·패란(悖亂)·귀신(鬼神)을 말함. ##을 말씀하지 않았으니 군자가 어찌 괴이한 것을 말할 수 있으랴? 말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거든 하물며 서책에 올리는 것임에랴? 장화(張華)의《박물지(博物志)》, 간보(干寶)의《수신기(搜神記)》, 왕자년(王子年)의《습유기(拾遺記)》, 단성식(段成式)의《유양잡조(酉陽雜組)》, 소식(蘇軾)의《구지필기(仇池筆記)》 등이 나오면서 괴이한 것을 말한 것이 많이 나왔으니, 이것은 기록으로 허탄한 데에 빠진 것이요, 이를 따라 믿은 것이다. 지금 내가 팔만대장경의 기문을 지은 것은 허황되게 속이는 것을 꾸짖어 유괴(幽怪) 를 말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려는 것이다."
* 소량(蕭梁) -- 중국 양(梁)나라를 말함.
* 복지(福地) --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
* 합주(陜州) -- 지금의 합천(陜川)
* 양계(陽界) -- 인간의 세계
* 이 선생(李先生) -- 필자 이덕무(李德懋) 자신을 가리킴.
* 부자(夫子) --공자(孔子)
* 왕자년(王子年) -- 왕가(王嘉)의 자(字)
* 유괴(幽怪) --어두워 나타나지 않는 괴이한 것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유산기),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어머니는 이날 부처와 보살이 있는 건물은 죄다 섭렵하며 가족의 안위를 빌었다. 그래야만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머니의 행위가 아내에게서도 일어날까?
가족의 나들이와 회식이 이루어지는 배경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집 큰 아들이 집안 행사나 모임을 싫어 한다. 도무지 재미가 없다는 것이고 시간 낭비라고 불만이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든가 자문해 본다. 관련하여 얼마전 책이 나왔다. 다윈이 쓴 '우리는 왜 먹고,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는가' 이다. 인간의 생존 번식 유대에 관한 가이드라고 출판사 서평은 밝히고 있는데, 예컨데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이루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와 인류학이 확인해주듯, 모든 사람이 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한 장씩 행사하는 것과 번식적 측면에서 여성을 한 명씩 독점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다.”_ 108쪽
생물학과 역사를 함께 본다면, 청소년기의 반항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생물학과 인문학을 완전히 구분해서, 따로따로 가르치고 있는 상황에서 공통적인 설명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특별히 구분해서 설명해야 하는 걸까요? 그럴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_ 7쪽
저자는 청소년기의 반항이 호르몬 과다 분비 때문이라는 통념에도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분명 2차 성징이 발현되면서 남녀 모두 신체적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400년전에도 청소년기는 과연 반항의 시기였을까? 17,18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일상을 자세히 기록한 회상록들을 살펴보면 지금 얘기하는 청소년기의 반항과 연결지을 수 있는 대목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귀족의 아들이건 소작농의 딸이건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럼 현재의 청소년기가 과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남자와 여자를 논할 때는 애써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하면서, 청소년기에 대해서는 의외로 사회적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생물학적 특징에만 주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청소년들이 더 이상 어른들과 사회생활을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저자는 진화적 관점에서 집중해 살펴본다. 서양에서는 아동 노동이 19세기 중반부터 법으로 금지되고, 19세기 말부터는 의무 교육을 받는 기간이 처음 7~13세에서, 나중에서는 16세까지 늘어난다. 이렇게 어른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 청소년들이 자기네들끼리 또래 집단을 만들어 어울리며 나름의 사회성을 키우게 되면서, 어른들의 간섭은 귀찮고 방해만 놓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레 반항이 폭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청소년기의 급속한 신체 성장과 성징 발현, 인지적·지적 능력의 향상과 같은 생물학적·생리학적 변화가 이런 반항을가속화시킨 것은 물론이다.(출처: 교보문고)
3장. 남자에게 아내는 몇 명이 적당할까 - 혼인제도와 정치체제
전쟁의 기원
여자, 몇몇 남자들만의 미래다?
성차별 받는 남자들
일부다처제, 일부일처제 그리고 장자 상속
로마 권력 구조의 본질
성의 독점과 전제군주제
지금은 어떨까?
남성의 사회적 지위와 번식 능력의 상관 관계
여성 해방이 시작되다 / 성의 평등과 정치의 민주화
4장. 인간은 왜 암수 한몸이 아닐까 - 남자와 여자
생물계에서 암수 차이
성선택/ 젖가슴은 암컷의 전유물인가?
실험실의 동물들 / 우리의 사촌, 원숭이
남녀는 신체 구조상 체급이 다르다
남자는 말을 안 듣고, 여자는 주차를 못 한다.
유전자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인간의 성별은 사회적 변수보다는 생물학적 상수가 결정한다
5장. 동성애자는 태어날까, 만들어질까 - 동성애
동물들의 동성애
사회적으로 강요된 동성애적 행동들
역사 속의 동성애 성향
생물학적 결정요인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성애
6장. 아들은 아빠를 닮았을까 - 가족생태학
할머니와 폐경
동물들의 폐경 / 가족 내 할머니의 역할
부모투자를 둘러싼 갈등
부계불확실성 / 형제자매간의 경쟁 / 이혼과 계부, 계모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족 갈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청소년기의 반항
사회 변화를 이끄는 가족 구조
가족의 진화
한국의 절집 배치는 시대별로 차이를 보이면서 발전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탑과 금당 등 중요한 거물들이 평지에 정형화되어 배치되다가 신라말기 선종이 유행하면서 산지의 입지조건에 따라 가람배치가 변화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민간신앙을 흡수하고 새로운 불교 사상들이 유입되면서 다양한 건물들이 새롭게 추가 된다. 대표적인 구성요소로는 문, 루, 종각, 법당, 회랑, 탑, 석등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있다. 오늘날 사찰들의 가람배치는 조선후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인사 절집 구조를 알기 위해선 큰산줄기 부터 봐야 한다.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1430미터)의 맥은 대덕산에서 온다. 대덕산에서부터 한 갈래는 덕유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되고, 또 한 갈래는 우두치(牛頭峙)에서 修道山)으로 이어져 가야산에 이르러 해인사의 명당 터를 맺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수많은 선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산이다.
옛 기록들은 이런 가야산세를 일러 “산형(山形)은 천하 으뜸이고 지덕(地德)은 S해동(海東)의 제일”이라 적고 있다. 특히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왜란 때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 등이 모두 왜적의 화를 면치 못했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가야산은 왜적이 들지 못한 옛부터의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고 적었다. 즉 전쟁과 가뭄과 홍수의 재난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으로 불린다.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상도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은 끝이 뾰죽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은 듯하고 대단히 높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석화성이란 돌꽃 산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불꽃모양처럼 타오르는 듯한 첨예한 산세를 화형(火形)의 산으로 분류한다. 가야산은 풍수의 오성론(五星論)으로 볼 때 화(火)의 기운을 담은 산이다. 화의 기운을 담은 산 형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산봉우리가 불타오르듯이 뾰족하여 첨예(尖銳)한 모양을 띠고 있다. 화의 기운은 밝고 명랑하여 수도나 학문을 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본다. 물론 정통의 풍수에서는 양택(陽宅)이건 음택(陰宅)이건 화성(火星)의 산을 주산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인사는 화형의 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화의 기운을 탈바꿈한(풍수에서는 이를 剝換이라 한다)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인사 자리의 특징은 가야산 상왕봉을 중심으로 가람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높은 산들에서 형성된 긴 골짜기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간 자리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계곡이 깊게 형성된 곳에서는 계곡으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가람이 들어설 만한 터가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수해(水害)를 막을 수 있고 주위의 높은 산이 내리누르듯이 가리지 않는 곳이면서 가람 앞으로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경각 자리와 대적광전 자리에서 보면 앞산의 높이도 적당하고 청룡, 백호가 아늑하게 잘 감싸주고 있다. 장경각 아래로 내려가면 청룡, 백호가 상대적으로 허약해 보이고 앞산인 안산(案山)도 좀 높아진다.
해인사 입지의 풍수적 특징 중의 또 하나는 대적광전의 좌향 문제이다. 해인사의 조산인 남산제일봉(321m)은 화기가 충천한 화산인데 해인사의 대웅전인 대적광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므로 불이 많이 난다고 본다. 실제로 1695년에서 1871년까지 일곱 차례나 화재를 겪기도 했다. 1817년에 여섯 번째의 화재를 겪은 이후로는 대적광전의 좌향을 잡을 때 남산제일봉을 정면으로 삼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우향하여 정초하였다고 한다. 즉 풍수로 해석할 때, 남향이면 수도인은 많으나 화재가 빈발하게 되고, 지금같이 좌향을 잡으면 도인의 배출은 적으나 화재가 준다고 하여 할 수 없이 화재를 줄이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고 하니, 불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배의 무게중심에 해당되는 곳에 삼층석탑(대적광전 앞마당)을 세워 중심을 잡았다. 또 산의 등허리에 나무를 심어 배를 붙잡아 매었으니 그것이 천년고목의 학사대 전나무요, 또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큰 느티나무를 심어 땅에 뿌리를 박아 놓았으니 그것이 개산(開山) 당시에 심은 느티나무였다. 그런데 그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은 돛대바위가 맡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래 화기가 승(勝)한 땅의 기운은 발산되어 자칫 산란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한 곳에는 기운을 지긋이 눌러 안정시켜줌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대자연은 절묘하게도 해인사 명당이 시작되는 맥의 목줄기에 바위를 세워 땅 기운을 안정시켜 놓았던 것이다. 일제 시대 때 대적광전 앞의 축대공사를 하면서 돛대바위를 그 공사용 석재로 깨트려 사용하면서 파괴되었던 곳은 현재 수미정상사리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 수미정상 사리탑> 연기문을 보면 돛대바위가 당시에 무참히 파괴되어 밑 뿌리만 남아 버려져 있었다고 적혀 있다. 바위가 깨어지고 난 뒤 어찌된 영문인지 해인사는 여러 가지로 불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60년이 지난 1986년에야 뜻 있는 스님들이 힘을 모아서 그 자리에 돛대바위를 대신할 탑(장경각 뒤편의 <가야산 해인사 수미정상 사리탑>)을 세우니, 그 뒤로 다시 본래의 안정이 되찾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미정상탑 자리가 하마터면 선방이 될 뻔한 적이 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닉슨이 한국을 방문하면 그에게 자랑할만한 세계적인 보물을 있었는데 담당비서관이 추천한 보물이 바로 해인사 대장경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화재를 방지하고 폭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영구적인 장경각을 다시 지으려했다. 그때 도면에는 지금 장경각과 똑같은 크기로 지하1층, 지상1층의 콘크리트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장경판고 두 동의 건물을 2층으로 포개어 놓은 형태로 설계되었다. 위치는 지금 수미정상탑 자리인 장경각 바로 뒷 쪽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안은 해인사 스님들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대의 주요 논거는 여러 가지였지만 풍수적 측면에서는 해인사가 터를 잡은 모습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기 때문에 땅을 파고 지하를 만드는 일은 배 밑을 뚫는 일이므로 배가 가라앉고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무가 주된 건축 부재로 이용된 사찰에서 싸늘한 콘크리트 재료가 주는 이질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른 곳에 신장경각을 짓게 되었다.
야로면 삼거리에서 식당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들어 간다고 들어간게 중국집이었다. 생일날 짜장면이 뭐람 -- 일부 어른들의 불만이 있었으나 아이들은 다 좋아 했다. 무엇보다 밥때를 놓치니 허기가 심해진 아버지가 짜증스러워 했다. 거기다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은 아버지 였기에 달리 할말이 없다. 야로면은 아버지가 중학교다닐 때 학교축구 선수로 와서 패했던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아버지가 분석한 패인은 시합전 먹었던 국밥이었다고 했다. 차라리 짜장면이었으면 식후라도 움직이기가 훨씬 좋았을 텐데 말대그대로 국밥이니, 먹을 때는 괜찮았지만 막상 먹고 뛰는데는 오히려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는 .... 해서 결론은 졌다는 것이다.
야로면에서 가족들은 합천호를 경유하여 영상테마 박물관으로 향했다. 2004년도에 건립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 오픈세트장으로 드라마 <각시탈>, <빛과 그림자>, <서울1945>, <에덴의 동쪽>, <경성스캔들>, 영화<써니>, <태극기휘날리며>, 뮤직비디오 등 67편의 영화, 드라마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오가는 길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해공원의 존재다. 일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참고로 합천은 1985년 제12대부터 2012년 제19대 까지 27년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신한국당, 민정당이 국회의원을 석권해 왔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합천사람도 거부감을 일으키는 일해공원은 오늘도 건재하다. 다만 이를 거부하는 지역민의 이유있는 목소리 또한 유효하다. 공원은 경남도비 20억원을 포함, 총 68억원이 건립에 투입되었으며, 황강 주변 5만 3724m2 부지에 2004년 준공했다.
성 명 서
<합천인의 행복권을 돌려 달라.>
오늘 우리는 93년 전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으로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선조님의 거룩한 얼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 합천인의 자존심과 행복권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일해공원” 이름의 삭제를 요구하기위해 나섰습니다.
합천군은 이곳 “생명의 숲”으로 불러지던 공원의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꾸기 위해 불합리한 설문조사 방법과 성원미달의 조사 결과임에도 이를 반대하는 수많은 군민들의 외침을 무시 한 채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2007년 1월 29일 합천군정조정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일해공원”으로 정한바 있었고. 중앙과 지방 언론들이 관제데모라고 보도한바있는 대규모 일해공원지지군중집회까지 열어 강압행정을 자행했던 그 때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까지 일해공원으로 인해 합천이 발전한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일해공원” 이름 때문에 우리 합천과 합천인이 당하고 있는 피해는 헤아릴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 내용을 열거하자면 전국의 네티즌 들이 쏟아내는 비방과 욕설. 합천물품 불매운동 등의 글은 수천 개에 달해 합천군청과 군의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한 때 마비시켰고, 게시판의 글을 계속 지우고 지워나가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를 당한바 있습니다. 그 중 제일 많이 올라온 글 내용은 욕설입니다. ‘합천에는 개새끼들만 산다. 그것도 똥개새끼들만“ 이라는 글보다 더 심한 욕설로 도배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한 내용의 글들이 전국의 인터넷에 그대로 게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 합천이 이지경이 되었습니까.
왜? 우리 합천사람들이 똥개새끼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 합천의 농산물이 불매운동을 당해야 합니까.
여기 모인 저와 당신과, 모든 합천사람들을 보고 외지 사람들이 똥개새끼들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억울한 수모에서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똥개새끼라는 말을 듣고도 행복하다고 할 사람, 여기 누구 있습니까?
합천사람들도 행복을 누릴 권리가 헌법에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합천군조례로 만들어진 일해공원 이름 때문에 합천사람들이 불행해 있습니다.
합천군조례보다 대한민국 헌법이 상위법입니다 여러분!
이에 오늘 우리는 우리 합천과 합천인 모두에게 주어진 고유의 행복권을 찾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합천군은 합천군조례로 만들어진 “일해공원”이름 때문에 합천과 합천군민들이 당한 치욕에 대해 사죄하고 하루 빨리 일해공원 명칭을 변경하여 군민들의 존엄한 행복권을 보장하라.
2,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고향 합천에 대한 한 오라기 관심이라도 있다면 일해공원 이름 때문에 합천과 합천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치욕에 대해 사과하고 스스로 “일해공원” 명칭 사용을 취소 요구하여 고향사랑의 마음을 보이시라.
2012년 3월 20일
가칭, 일해공원 폐기를 바라는 사람들 일동
나도 반대한다.
지방자치단체가 막대한 돈을 들여 경쟁적으로 유치한 영화·드라마 세트장이 관람객 급감과 사후관리 부실로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태원 의원이 19일 한국컨텐츠진흥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영화·드라마 세트장에 투자한 지자체는 총 26곳이며 이들 지역에 32개의 세트장이 지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영화·드라마 세트장 설립에 들어간 총 예산은 5170억4400만원이었으며, 이중 국비·도비·시군비는 전체의 27.3%인 1394억3200만원이 투입됐다.
지자체가 20억원 이상 지원한 주요 영화·드라마 세트장을 살펴보면 △전남 나주-삼한지 테마파크(290억원) △충남 태안-태왕사신기 세트장(20억원) △전북 전주-전주영화종합촬영소 야외세트장(43억5000만원) △경남 김해-김수로 세트장(198억원) △전남 순천-사랑과 야망(63억원) △전남 완도-해신(50억원) △충남 부여-서동요(50억원) △경남 합천-태극기 휘날리며(45억원) △전북 부안-불멸의 이순신(40억원) △충북 제천-대망(20억원) 등이다.
하지만 영화·드라마 세트장을 유치한 26곳 지자체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28.6%에 불과했다. 더욱이 32곳의 영화·드라마 세트장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운영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고, 보수 관리도 안 되고 있는 실정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일부 세트장은 공사 부실 등으로 촬영 후 건물이 무너지거나 홍수, 화재 등으로 유실된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나 드라마가 종영된 후 관람객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충북 제천 '태조 왕건' 세트장의 경우 제천시가 12억원을 들여 건립한 야외 촬영장으로, 세트장 건립 초기에는 연간 30만명 이상이 다녀가면서 4천여만원의 주차료 수익을 올렸으나 현재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세트장 보수비로만 4천여만원이 드는 실정이다. 시는 올해 말까지 철거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남해군 가천 다랭이마을 '맨발의 기봉이' 세트장은 제작진이 지자체와 마을에 기증했으나 관리부실로 흉물이 돼 있다. 는 보도로부터 합천 셋트장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이런 문제의 바탕에는 철학이 없는 성장과 개발 중심의 도시계획이 자리한다. 대관절 합천과 경성역이 무슨 상관이있으며, 합천과 조선총독부가 연결될 일이 없음에도 영화를 위해 급조된 촬영장으로 영구적인 영화를 꿈꾼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다. 이같은 현실은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예외없다. 옛 것 혹은 전근대는 구차하고 낡고 볼품없는 것이라하여 죄다 밀어버리고, 무엇이든 신축으로 해결할려고 하다보니 맞이하는 당연한 현상이다.
일본식 목조 건물이며 그 시절의 명소가 추억이나 회상을 넘어 허접하고 씁쓸해 보임은 영혼이 없는 시대가 너무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큰손자와 이야기 하는 아버지.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妹弟 성서방, 안서방은 이날 늦게 합류했다.
단체 기념사진
귀가는 고향 의령으로 가기 위해 합천 쌍백에서 궁류를 경유하여 유곡>정곡으로 하였다.
쌍백에서 궁류로 넘어가는 길의 모습이다. 고개를 넘는데 골골이 아담했다. 별도로 시간을 내어 고향 주변 국도여행을 해 보리라
이렇게 방향을 잡았던 것은 나락추수를 했는지 알고 싶다는 아버지의 요청 때문이었다. 섬안들 앞의 구릉은 마두 소속 산자락이다. 둑 넘어 유곡천이 흐른다.
들은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다. 집터와 논이 .... ㅡㅡ
논옆 강둑으로 올라 유곡천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가족들, 또 BGT와 여러 관계망에서 벌어지고 있는일들이 유곡천처럼 흐른다.
마음 속 걱정과 근심도 더불어 흐른다. 물론 이또한 흘러 갈 것이지만, 다만 평화로왔으면 할 뿐이다,
음악출처: 다음 불로그 아름다운 음악여행
곡명: 숨어우는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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