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일 지난해 연말부터 본격 논의 되기 시작했던 '한국 길모임'의 창립했다. 현재 부산 갈맷길을 비롯하여 제주 올레 , 지리산 둘레길, 통영 이야길 , 강릉 바우길 등 19개 트레일 및 길과 문화 같은 길과 걷기를 주요사업으로 하는 단체가 동참하고 있다. 2010년 12월 군산모임을 시작으로 강릉, 제주, 하동 , 지리산을 순회하며 노의를 거듭하다 8월 발족에 이르렀다. 주말 서울가는 기차 에는 빈자리가 없다. 가면 원하는 표는 사전 예약일 때만 가능하다. 하여 원래 경부선 노선을 이용했다. 거기 낙동강이 있어 간만에 흐름도 살필겸 차창 넘어를 보는데
낙동강변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강을 살리는 사업이 아니라 강을 병들게 하는 4대강 사업이다. 강변의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발길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가 봐야 눈만 아픈 강, 그렇다고 어찌해 볼 여력도 없고, 물론 시방도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존재가 고맙기도 하지만 내 처지는 그와 동행할 수 없다. 아무튼
흐르는 강물 그늘이 깊다. 삼랑진을 벗어나면서 강과의 대화도 사라졌다.
발족식이 있는 국회, 지역에서 국회의원은 어딜 가나 대접 받지만 여기선 흔한 게 국회의원이다. 식당에도, 술집에도 거리에도 부딫히는 게 국회의원이라 개 닭보듯이 한다. 발족식에는 이미경, 원혜영 인주당국회의원 등이 축사를 해주었다.
초대 상임대표는 강릉 바우길 이순원(소설가) 대표가 맡았다.
기조 발제는 사단법인 숲길 도법 이사장이 '왜, 걷기인가" 와 ,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사례를 통해서 보는 걷는 길이 가야할 방향 모색' 이란 주제로 발표를 했다. 마지막으로 국회입법조사처 최준영 연구관이 '올바른 걷기문화 정착과 걷는 길 조성 정책을 위한 정부와 국회의 역할"을 발표했다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은 올레 길을 만들게 된 계기로부터 시작하여 조성에 대한 원칙과 여행문화로서의 길 걷기를 비롯하여 토목공사화 되고 있는 길 사업의 사례를 제시하며 해외 사례를 통해 우리 길의 미래를 역설하였다. 시사점으로 트레일의 목적은 자연과 인간을 함께 배려한 트레일을 걷게 함으로써 사람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지역과의 연계성, 예컨데 지역 커뮤니티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지역과 같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지향해야 하며, 운영과 관리에 있어서도 자원봉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관리어야 한다고 했다.
서 이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올레를 만들고 난 이후 육지에서 길이 생겨날 때 올레같은 길이 생겨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 길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그런 모임을 통해 구속되는 것도 싫었고, 감투싸움 하는 것도 싫어 모임을 만드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또 아니란 것을 알고 한국길모임이 만들어지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관에서 2.7km 조성하는 데 수억이 들었는데 반해 올레 4코스 길 내는데 3천6백이 들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씰데 없는데 돈을 들이며서 생색 아닌 생색을 내고 길은 길대로 베린다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성과주의다.
마지막 발제는 국회입법조사처 최준영연구관이 했다. 걷기열풍은 보행이라는 행위에 대해 사회적으로합의 된 가치를 부여했으며, 특정 공간에 국한되었던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인식의 차원을 제공해주고 있다며 길의 순 기능을 먼저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국걷기에 대한 특성을 집단적 이용, 인위적 길 형성, 경관위주로 즉자적인 인식에 머무름을 경계한다고 했다. 길 조성에 대한 정책방향으로서 공동체에 의한 거버넌스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라나라의 경우 갈등이 발생했을 때 중재 및 타협의 여지가 적어 상호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중재하는 기관이 부재하다고 했다. 나아가 법률과 같은 공식적인 제도 또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부처간의 중복투자 또한 적절한 상호경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참가자들이 각각의 발표를 꼼꼼히 기록히며 듣고 있다.
전통적인 필기에서 녹음, 그리고 무선 인터넷을 이용한 기록 등 다양했다. 허나 귀 기울여 듣는것 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
아무튼 아쉬운 바는 정부측 토론자들이 성의가 없었다고나 할까. 물론 담당이 바뀌는 시기라서 업무파악이 해소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디고 하더라도 전국모임의 출범식 아닌가? 한마디 해주긴 했지만 걱정스러웠다.
포럼이 끝난 뒤 기념촬영을 하고 행사는 폐회했다. 이날 운영위원으로는 (사)부산갈맷길(이성근 사무처장), (사)한국의 길과 문화(윤문기 사무처장), (사)지역디자인센터(김동식 대표), (사)군산구불길(임현 구불길지기), 대구녹색소비자연대 팔공산센터(오병현 센터장), (사)지리산 숲길(이상윤 상임이사), (사)강릉바우길(이기호 사무국장), (사)제주올레(안은주 사무국장)이 선임됐다.
한편 이날 조중동 종편에 반대하는 언론노조가 22일 총파업 출범식에 이어 한나라당 규탄대회를 마치고 의원회관에서 마무리 집회를 하고 있었다.
종편의 문제를 경향신문은 8월22일자 사설을 통해 "... 조·중·동 3개 신문을 한꺼번에 사업자로 선정한 종편은 공정성 개념을 내팽개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탄생할 수 없는, 이명박 정권에 의한 특혜와 반칙의 산물이었다. 반칙은 반칙을, 무리는 무리를 낳는다. 조·중·동 3개사에 방송을 주니 이들을 키우는 데도 무리를 피할 수 없다. 목하 현실로 닥친 것이 광고판매다.
종편 광고 직거래가 허용되면 ‘광고 약탈’이 자행될 공산이 크다. 한정된 광고시장에서 새로 영업을 시작하는 종편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매체의 광고를 빼앗는 방법 말고는 없다. 그 다음은 비정상적 광고 영업이다. 보도를 대가로 한 광고 수주나 기자를 이용한 광고 압력 등이 횡행할 개연성이 높다. 이는 필연적으로 방송의 질 하락을 초래한다. 또 광고시장에서 지상파와 종편이 과열경쟁을 벌일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지역신문·방송들이다. 기업들이 이들에 대한 광고부터 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재앙적 결과들을 피하려면 미디어렙법을 반드시 만들어야 ..." 한다 고 했다.
국제신문 강필희 노조위원장이 보이길레 아는 척하고 격려(?)를 전한다. 광고는 언론사들을 버티게 하는 밥이다. 그들로서는 일종의 밥줄인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미디어 오늘을 통해 " 이승만 정권 시절 신문사 입장에서는 광고수입보다는 구독료 수입이 더 컸고, 언론통제 방식도 무식해서 말 안 듣는 신문은 그냥 폐간시켜 버렸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광고의 비중도 커졌고, 언론통제 수법도 교활해졌다. 1965년의 <경향신문>사건이나 1974년 말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에서 보듯이 군사독재 정권은 광고주들을 협박하여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의 수입원을 끊어버리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했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는 군사독재의 앵무새가 되었던 언론이 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MBC와 KBS 등 방송은 일정하게 공공성을 회복했고, 방송에서 '땡전뉴스' 같은 창피한 왜곡보도가 사라진 것은 교육의 민주화와 더불어 민주정권이 출범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일부 신문에 민주화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수구신문은 약자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내팽개치고 기득권집단의 일원으로, 가장 전투적인 대변자가 되어버렸다. 인터넷의 발달과 방송의 영향력 증대 등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여 종이신문의 미래가 암울해지자 수구정치세력은 자신들의 대변자인 수구종이신문의 생명 연장을 위해 2009년 7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하던 방송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이 참여한 4개의 종편방송이다.
종편이 4개나 출현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광고시장의 규모는 그대로인데 불가사리 뺨치는 식탐을 가진 짐승 네 마리가 좁은 풀밭에 풀린 것이다. ...
이제 신문과 종편이라는 쌍권총을 든 조중동매가 기자를 앞세워 광고를 주면 홍보기사를 띄워주고 안 주면 나쁜 기사를 내보내는 식으로 파렴치한 직접 광고영업을 한다면 지역방송과 여론의 다양성은 다 말라죽고 말 것이다.
과거의 군사독재 정권은 비판적인 매체 하나를 대상으로 광고를 끊어 언론을 통제했다. "방송 때문에 10년간 정권을 빼앗겼다"는 황당한 인식을 가진 수구세력은 이제 자기네 채널에 광고를 몰아주고 나머지 매체는 아예 굶겨 죽게 만드는 방식으로 미디어 생태계 자체를 교란하려 하고 있다. '미디어렙'이니 '종편의 광고 직접영업'이니 하는 말은 민주진영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어쩌면 강 건너 불같은 이야기인지 모른다. '대의'로 보면 마땅히 방송의 공공성이 지켜져야 하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그게 깨졌다고 당장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거나 들어와야 할 돈이 안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해방 직후 99.9999 퍼센트의 사람들이 친일파의 청산을 당연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줌 그 자들에게 뚫려버렸던 것이 아닌가. "라고 역설했다. 참 갑갑한 세상이다.
포럼을 마치고 강릉으로 밤길을 달렸다. 그렇게 8월25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늦은밤 달려 도착한 바우길 게스트하우스, 감자 백숙이 대기 중이었다.
만나서 웃고 즐기는 동안 밤이 이슥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바우길 2구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적당(1인당 3병)한 음주만이 허용됐다.
2구간 출발지점인 대관령 휴게소에서 시작한다. 코스는 양떼목장-국사성황당-반정-옛주막터-대관령유스호스텔-바우길게스트하우스로 하여 16km 6~7t시간 정도 걸린다. 대관령의 대관(大關)은 험한요새의 큰 관문이라는 뜻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영동과 영서가 소통하던 통로 였다., 특히 이 구간은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강릉단오의 첫 제례가 대관령 산신각과 국사성황당에서 열리는 곳으로 옛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관문이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이 길을 지나 관동별곡을 쓰고,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서울로 오가던 길이다. 그리고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앉고 한양 과거를 보러가던 길이기도 하다. 한편 이 길은 강릉지역에서 생산되던 해산물과 영서지방의 토산품이 교환되던 길로서 인근 구산장, 연곡장,옥계장으로 넘나들던 교역의 길이기도 했다. 그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은 '선질꾼'이라 불리운 전문 장꾼들이 했다고 한다.
몸풀기, 이기호 바우길 사무국장의 코믹 체조를 따라 하면서 걷기도 전에 웃다거 배가 꺼졌다. 제주 올레 정지혜 팀장과 통영 송언수국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날이 흐린 관계로 양떼목장으로 가는 숲길은 안개 속이다.
앉은부채며 이 계절 피어난 식물들을 구경하느라 행열을 잠시 잃어버리기도 했다.
자작나무의 흰 수피가 빛나는 숲에서 강원도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대관령은 늘 습기를 머금은 구름이 황명산(1407) 발오아산(1458) 선자령(1157) 같은 높은 봉우리에 부딫혀 비 또는 눈을 쏟아지게 한다. 그래서 골짝 골짝 젖어 있는 곳이 많고 그런 지형과 땅의 성질에 맞춘 식생들이 자란다.
양떼목장에 철조망이 쳐 져 있다. 진짜 양떼가 있어 이탈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아님 땅의 소유가 달라서 인지 모르겠다만 풀밭 너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산비장이들이 군데군데 피었다. 철조망을 지나면서 부터 아흔아홉구비 길이 시작된다.
이맘때 이정도 높이의 산에서 만나게 되는 식물들과의 만남은 너무 좋다.
조금더 나가면 바우길 1구간과 2구간 갈림길이 나온다. 길 양편으론 쉬땅나무며 노루오줌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정표가 선명하다. 문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 로고다. 해파랑길 구간은 다른 이미지로 선보일 예정이다.
어린 주목이 열지어 심어진 대관령 탄생숲. 각지에서 생일을 맞아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 나무와 같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대한민국의 큰 일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글쎄, 왜 일꾼이 되어야 하지 ?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황당쪽이려니
아니나 다를까 소리는 성황당에서 솟아 올라 골짜기를 적시고 있었다.
대관령 국사(國師) 성황당(城隍堂)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굴산사를 열어 강릉지방을 외침으로부터 지키며 안녕을 도모했던 범일국사를 모신 당이다.
본채는 3칸 기와집으로 내부 정면에 성황도라 할 수 있는, 호랑이, 시녀, 성황신이 화상이 있다. 해마다 음력 4월 보름이면 강릉 단오제에 성황신을 모셔가는 행사가 있다고 한다. 자료를 찾다 재미난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예컨데 "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대관령 국사여성황사는 대관령 국사여성황신(國師女城隍神)을 모시는 제당(祭堂)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인 강릉 단오제는 음력 4월 15일 대관령 국사여성황사에서 대관령 국사성황신과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의 위패와 신목을 합사하고 봉안제를 올리는 의례로부터 시작된다.
전설에 따르면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동래부사를 역임한 정현덕(1810~1883)의 딸이라고 하는데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정씨의 꿈에 나타나 청혼했으나 사람이 아닌 신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거절당하자 호랑이를 시켜 정씨의 딸을 대관령으로 데려가 영혼결혼식을 했다 한다. 사람들이 처녀를 찾아 대관령으로 갔더니 영혼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몸은 비석처럼 서 있었다 한다. 4월15일은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가 혼배날이다. 한편 조선 숙종 때 초계정씨 정완주의 무남독녀인 경방댁 정씨 처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대관령 국사성황신의 부인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동래부사 정현덕이 등장해서 솔깃했다.
정현덕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부산 금정산과 범어사를 비롯하여 그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억하는 인물이다.
사진출처:http://tahkyhun.blog.me에서
물푸레나무인듯한 나무 아래 마련한 칠성단도 특이하다.
굿판이 한창이다. 슬슬 무당이 뛰기 시작하는데 일행이 움직인다. 아 이런 건 돈주고도 못보는데...
성황당을 나와 능선을 넘어서면 본격적인 대관령 옛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줄창 내리막이다. 대관령을 이 지역 사람들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국대국 구르는 고개"라는 뜻인데 그 대굴령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대관렬이라 했다.
사)길과 문화의 윤문기 사무처장 길에서 선 사내다. 언제든지 걸을 준비가 된 남자로 그의 베낭과 허리춤에는 단순한 걷기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늘 길바닥에 함부로 또는 무심코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담는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의 길문화란 것이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며 특히 이용자들의 수준이 한참이나 높아져야 한다고 했다. 공감한다. 배려와 감사가 동반되지 않는 길걷기는 길을 아프게만 할 것이다.
흰진범
촛대승마
내리막길 틈틈히 대관령을 노래한 시인들의 시비가 있다. 먼저 매월당 김시습의 시를 읽는다. 대관령 구름이 걷히니 /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아 있네/ 羊腸처럼 산길은 험난도 한데/ 鳥道같은 驛程은 멀기도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구나/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
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반정은 강릉 구산과 평창 횡계를 잇는 대관령 옛길의 중간쯤이라고 한다. 대관령을 넘는 길 세개가 시절을 거치며 명암을 달리한다. 산 아래 얼마 가지 않아 영동고속도로가 소음을 내며 길게 뻗어 있다. 국사성황당에서 반정(半程)까지는 1.8km이며 반정에서 주막까지는 3km 이며 하제민원까지는 4.5km
바우길 이국장이 손끝으로 기리키는 곳이 경포호다. 매립으로 사리진 옛 경포호를 설명한다.
날이 흐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산 아래 강릉의 옛 모습을 짐작한다
단원 김홍도기 그린 대관령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대관령을 넘으며 지었다는 '사친시(思親時)다. 있는 그대로만 읽으면 부모님을 그리는 애절한 심정이지만 그 이면에 깔린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와 살던 세월이 신사임당으로서는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얻지못한 그 무엇을 율곡이 대신 했다. 사내가 독하게 정진하지 못하고 틈만나면 강릉으로 넘어 왔다나. 하여 신사임당이 꾸짖었다는데
계곡을 중심으로 금강송들이 군릭을 이루고 있다
참호 같은 길이 굽이치며 휘감는다. 비 내리면 이 길에 빗물이 흐르는 물길이 된다. 하여 혹이나 흙들이 씻겨 내리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맑은날 더운날 이길은 쉬원한 길로서 기억할 법하다.
계류가 소리내어 흐르며 숲의 뿌리를 적신다.
계곡을 만나자 모두들 신발을 벗고 발을 담군다. 아마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이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을 것이다.
여기서 부터는 또 줄창 계류를 옆에 끼고 걷는다. 가끔 뱀님도 지나신다.
주막이다. 물레방아 위에 걸터앉은 개구리란 놈 자세가 불량하다.
이 주막은 기관 이병화가 오가는 나그네며 선직꾼들을 위해 1824년 만든 것이다. 미쳐 보지 못했는데 김홍도의 대관령 그림판 아래 어디쯤 그를 기리는 유혜불망비가 서 있다.
어흘리 밥집이다.
오후에 운영위에서 이야기할 의제를 사전에 준비하는 간담회가 막간을 통해 있었다. 나는 이때 부터 편두통이 와서 주님을 멀리 했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게스트하우스 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라 이쯤에서 귀가하는 통영.남해팀에 합류하여 차로 이동했다.
바우길 게스트 하우스 앞 마을 보광리의 풍경
그날 밤 일차 음주 가무가 끝난 다음 밤 늦도록 수건돌리기 술판이 있었다. 맨정신에 하우스 서고에 있던 책을 읽다 군산 임현국장의 질긴 포섭에 굴복하여 막판 술자리팀에 합류했는데 임국장 표정이 어지간 하다.
슬그머니 빠져나가기 직전 현장을 담아 두었다.
맨정신은 새벽잠을 지웠다. 웬 청승인지 새벽에 잡은 책 한권 다 읽고 거기 중국의 명나라 주첨기가 그린 武候高臥圖의 제갈량을 생각했다. 그림은 제갈량이 무후에 봉해지기 전 융중(隆中)에서 은거생활을 할때를 묘사한 그림인데 대밭에 한가로이 누워 책을 보다 뭔가를 생각하듯 팔벼개를 한 자세다. 옷을 풀어헤치고 가슴과 배를 한껏 드러낸 저 여유가 부러워 옮겨 보았다.
아침은 된장을 푼 근대국이었다. 속풀이로서는 그만이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각자의 지역으로 가기 전 주문진 아래 영진항 뒷편에 있는 유명한 커피집을 찾았다. 보헤미안 이란 커피 파는 집이다. 제일교포였던 박이추씨가 연 가계인데 명성이 자자했다. 그를 일러 한국 커피의 전설이라 했다. 일간지며 잡지들이 특필했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가 계단 담벼락에 붙어 있다.
사실 커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마니아들이 손꼽는 이 집의 유명세를 알 길 없다. 더욱이 그 맛이야 더욱 그렇다. 다들 주문하기에 다양한 커피 중 1999년 람사회의 때 갔던 코스타리카를 생각하며 그 나라에서 생산된 커피를 주문했지만 그 맛을 헤아리기엔 아직은 무리다. 그만한 내공이 쌓이려면 수업도받고 집에서 원두를 갈아 마시는 노력을 득한 다음 쯤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커피의 쓴맛과 냄새에 매료되어 푹 빠져 버렸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인구 전체가 년간 소비하는 커피는 잔 수로 29잔이라 했다.
내가 시킨 코스타리카산 커피다. 폼잡고 맛을 느껴보려 했지만 .... 포기했다
대신 보헤미안 창넘어 영진항의 풍경에 잠시 생각에 젖었다. 지난해 동해안 답사길 해안을 따라 갈어 갔기 때문이다.
건물의 외관이다. 국도변에서 조금 들어오면 이 집이 있다. 마당에서 한창 커피 이바구에 빠진 트레일 관계자들
점심 무렵 들린 사천항
전복에 국수사리 담은 오징어 물회로 배를 채우고
다음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예정했던 낙동강으로의 이동이 수월찮아 경포대를 거쳐 허난설헌 생가로 갔다.
경포대의 그림이 또 한번 위기를 맞는것 같다. 경포해변 뒷편 송림숲 끝 아마 경포소방서 쯤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릉사람들은 이런 개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남의 일 같지 않다.
강릉시는 경포호와 맞닿은 초당동 일대를 습지로 조성중이었다. 습지에는 부레옥잠이며 가시연이 깔려 있고 연꽃이 한창이었다
경포호에서 허난설헌 생가로 접어든다. 홍길동이 도처에 보인다. 허초희의 동생 허균을 같이 알려내고픈 생각에서 였을 것이다.
생가를 에워싸고 있는 솔숲이 인상적이다.
박정애 시인괴 짝이 되어 일대를 돌아보았다
난설헌의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길 허난설과 허균이 태어난 집이라 했다. ㅁ 자 배치를 한 한옥인데,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 중의 하나가 과연 이들의 생가가 맞는가 ? 였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의 주장에 의하면 '이건 아닌데'이다. 예컨데 "...허균과 허난설헌은 그의 외가에서 태어 났다. 허엽 장인의 집인데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는 '애일당'이라는 집이다. ..." 는 것이다. 하여 관광도 좋고 스토리텔링 마케팅도 좋지만 왜곡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찜찜함을 나 역시 표현한 바가 있는데
"...초당동 허초희(許楚姬)(1563~1589)의 생가로 간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27세에 요절한 난설헌은 대사헌 부제학을 지낸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文才)였던 그녀는 15세에 혼인하였으나 순탄치 못했던 결혼생활로 인해 부부간. 고부간 불화 속에 지내다 자식조차도 어린 나이에 잃어버렸다. 그 공백을 시(詩)로서 살았지만 조선사회는 외설스럽다며 외면하다 못해 폄하했다. 요즘 말로하면 “어디 여자가 건방지게” 쯤이었다. 그녀는 세상과 이별하면서 “내 시를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유고 중 일부를 동생 허균이 난설헌집으로 묶어 냈다. 여류시인으로 당대 최초로 중국과 일본에서도 출판된 난설헌의 시집은 정작 조선에서는 외면과 폄하로 점철되었다.
강릉에는 비슷한 시기 신사임당과 율곡이 살았다. 지배이념에 충실했던 모자는 현모양처와 대유학자로 존경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5만원 권과 천원 권 지폐 속에 건재하다. 주류와 비주류의 삶은 이렇듯 극명하게 엇갈렸다. 지배이념에 충실하면 세상은 편할까. 난설헌의 가계는 모두 불행했다. 가족 모두 객사하거나 역모로 몰려 능지처참 당했다. 이상세계를 그리며 홍길돈 전을 지은 교산(蟜山)허균은 광해군 연간에 역모죄로 사지를 찢긴 채 소금에 절여 전국에 나뉘어 전시되었다. 살던 집은 역적의 거처라 하여 허물고 우물은 메워버렸다. 하여 난설헌의 생가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근자에 생가터 주변에 기념관이 들어서고 시비가 줄줄이 섰지만 비참했던 그 생애의 흔적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불여세합(不與世合:세상과 어울리지 못함)의 길이다. 날이 저물었다. 강문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뒤돌아 본 솔숲에서 불빛 한 점 푸르게 피어올랐다..." 월간 함께사는 길 '동해 해파랑길 4. 강릉 - 솔향바람에 취해 난설헌(蘭雪軒)을 만나다 중에서
언제나 그렇다. 좋은게 좋은 것 이니냐며 얼버무리고자 하는 자세가 문제다. 아무렴 어때의 정서는 왜곡을 심화 시킨다. 이들 남매에 대한 본격적인 선양사업이 시작된 것은 2007년 기념관이 건립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난설헌은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뭔가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솔숲에서 쉬고 있자니 예쁘장한 아가씨가 자전거를 끌고 오더니 우리 앞 벤치에 머문다. 뒤태가 너무 보기 좋은 울진 아가씨 연락처를 주고 받으며 10월에 있을 갈맷길 축제에 자원봉시자로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난설헌 생가를 나와 강문해변으로 가는 길
푸른 하늘을 이고 선 소나무의 청정함이 눈을 시원케 한다.
강문해번을 둘러 보고 부산으로 향했다.
The Wonder Of You - Ray Pet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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