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부산갈맷길 축제가 오는 10월7일부터 15일 일주일 부산전역에서 개최된다. 이번 축제의 슬로건은 얼쑤 !! 갈맷길 칭칭나네 로서 금정,둥래,연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동래금정은 옛 부산의 행정과 국방의 중심축이었다. 반면 부산이란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했는데 15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래현에 소속되었던 부산부곡이 소멸되고 , 항거왜인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곳을 왜관이라 하고 경술국치 이후 부산의 중심은 동래에서 부산포 지금의 중.동.서구로 옮겨지게 된다.
아무튼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이 지역에서 갈맷길축제조직위는 개막식을 10월 8일(토) 오후 2시부터 열기로 했다.
축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개최 목적
- 시민들이 함께 누리는 걷기문화 활성화
- 역사와 예술을 누리는 고품격 걷기문화 활성화
- 거리예술과 결합한 걷기문화 활성화
- 해양문화도시 위상을 높이는 걷기문화 활성화
첫 행사인 개막행사는 2011년 10.8일 오후2시부터 6시까지 온천천변에서 열린다. 도시철도 1호선 부산대역 에서 온천천이 수영강과 만나는 환경관리공단까지 걷게되며, 기본 개념은 역사 생태.물길걷기이다. 이 길은 동래읍성에서 좌수영길을 복원하는 역사길인 동시에 민관 협력으로 되살린 생태하천을 따라걷는 길이다. 전체길이는 7km 로 두 시간이면 완주가능한 코스짐난 중간중간 동래 수영문화를 상징하는 문화공연이 배치되고 시민이 참여하는 가면 프레이드를 비롯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린다. 크게보면 부산대~세병교까지는 비보이 등 대학문화와 거리예술이 배치되고, 세병교~이섭교까지는 동래학춤 등 동래문화와 옛 수영의 관문을 상징하는 프로그램이,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환경공단까지는 전통문화, 친수문화, 열린공연이 선보일 예정이다.
그 길을 미리 답사 해보았다
온천천은 금정산 계명봉과 고당봉 사이 범어사 계곡에서 발원하여 금정구, 동래구, 연제구, 3개구를 두루 거쳐 정과정에서 수영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연장 14.13km(유로연장 15.62km), 유역면적 55.97km2의 하천이다. 수영강과 합류, 수영구 민락동 앞 바다로 흘러 수 천년 동안 해운대 백사장을 생성하는 주요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과거 동래의 젖줄이라 불릴 만큼 유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았다.
동래부읍지(1759) 산천조에는 ‘범어천은 부府 서쪽 3리에 있는데,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해운포로 흘러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류의 범어사 계곡 지역을 범어천, 그 아래를 ‘서천’ 혹은 ‘동래천’이라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온천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온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래군지(1937)에는 ‘서천은 일명 범어천이 라고도하며,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동래읍 동쪽으로 흐른다’고 적혀있다.
1872년 조선후기 경상도 지도 중
맑은 물을 자랑하던 온천천도 도시화와 산업화의 그늘은 비켜나지 못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며 온천천은 검고 탁한 물빛에 악취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또한 도시개발에 따른 온천천변 도로 건설, 지하철역 및 교각 설치, 역세권 주차장 건설 등으로 상당부분의 하천환경이 파괴되었으며 하폭이 좁아지고 둔치 및 저수로가 콘크리트 라이닝 되었다. 또한 도시화 과정에서 불투수층이 증가함으로써 강우시 지하수 충진율이 감소하게 되어 갈수기 기저유출량의 감소와 14개 지천이 모두 복개되어 하수관거로 사용됨에 따라 하수가 전량 차집되는 합류식 관거체계가 건천화를 가속화시켰고, 이같은 건천화는 수질을 악화시키는 고리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하천 고유의 생태적 기능과 친수기능이 상실되었으며 쾌적성도 사라졌다.
1980년대 동래지도
이같이 병들어 방치되던 온천천은 1995년 온천천 SOS운동을 시작으로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지도에서도 드러나는 바지만 온천천은 복개구간이 대폭 증가되었고, 둔치부는 하천의 영역이 아닌 자동차의 주차공간이나 도로로서 기능했다. 14개의 소하천은 13개가 복개되어 대부분 하수구로 전락했다.
한편 1989년 온천천 하천정비기본계획을 부산시에서 처음으로 수립하였지만 홍수제어를 위한 치수기능에 치우쳐 친수기능 및 유지유량 확보방안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1993년~98년 동래역부터 구서동역까지 수영하수처리장(2단계) 하수 차집관로 콘크리트 라이닝공사 실시설계와 공사과정에서, 1989년 하천정비기본계획에 근거하지않고 행정편의를 위해 저수로와 둔치 모두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1993년 이후, 두구동 영락공원 조성 문제와 맞물려, 주민들의 요구로 온천천 상류 남산동에서 남산5호교까지 600m구간이 2002년 복개되어 도로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90년대 중후반 서울 양재천을 시작으로 시민에 의한 하천살리기 운동이 확산될 즈음 부산에서는 온천천이 그 출구가 되었다. 그 시작은 1997년 동래구에서 개최한 '온천천 자연형 하천 복원 심포지움이었다. 이후 2000년 부산지역내 부산환경운동엽합, 낙동강공동체, 연제공동체,사)도시발전연구소 등이 주축이 되어 온천천살리기네트워크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온천천살리기운동에 들었다. 아래 사진은 1999년 동래구쪽 콘크리트라이닝을 해체하기 위해 함마로 콘크리트를 깨는 장면으로 당시 콘크리트를 제거해야만 온천천을 살릴 수 있다는 나의 강경론(?)이 수용되어 온천천 생명문화축전 전야제 때 실행에 옮겨졌다. 온천천 콘크리트 해제 이벤트는 온천천 살리기의 상징이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동래구와 연제구가 서서히 온천천 살리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영하구처리장 유지용수 확보문제를 통해 '시민이 만드는 온천천 마스트 플랜'이 제시되고 2001년온천천살리기민관협의회가 발족되면서 온천천은 변화를 거듭했다. 동아대 김승환교수가 주축이 되어 이웃한 일본과의 하천살리기 교류가 연례화 되고, 악취를 풍기던 공장들이 이주하면서 주변의 집값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2004년 부산시는 온천천하천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금정구를 비롯한 온천천 일부 구간들이 콘크리틀를 벗기 시작했고, 유지용수 확보를 위해 온천천으로 흘러드는 계곡수 모우기 사업등에 이어 2005년에는 낙동강 물이 하루 3~5만톤 온천천 유지용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2008년들어서는 온천천 유역 전구간 생태복원을 위한 종합정비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온천천은 계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것은 옛물길의 회복과 더불어 수생태의 건강성 복권과 유역통합관리, 주민참여 활성화 등이다. 물론 10년전에 비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친수중심과 근린공원으로서의 온천천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유역주민의 편의적 요구에 떠밀려 과다한 체육시설이라든지 생태사막이랄 수 있는 잔디밭의 조성 등은 한물간,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하천정비요 관리다. 물은 스스로 정화하면서 제길을 찾아 간다. 그 물길을 언제까지나 막을 수 없으며, 그렇게 막아서도 안된다. 온천천을 따라 걷다보면 그런 흔적은 도처에 보인다.
현재 온천천을 이용하는 인근주민은 급증하고 있다. 웰빙 건강 등의 걷기바람이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낮과 밤이 따로 없다.
수크령을 비롯 식재된 수생식물이 많지만 자연스럽게 천이가 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지하철 역세권을 지날 때면 자동차의 밑창을 올려다 보기도 한다. 자동차 어딜가나 부담스런 것이다.
둔치 호안을 따라 여뀌나 돌피군락이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행정은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사 아래는 인근 주민의 놀이터다. 10원짜리 화투에서부터 장기며 바둑으로 소일 삼는 주민들
현대적 감각의 조형물이 천변 곳곳에 들어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오리들은 어디서 왔는지, 온천천에는 해오라기와 왜가리, 백로류, 흰뺨검둥오리가 깃들어 살고 가끔 붉은부리갈매기들이 중상류까지 날아든다. 하지만 먹이 자원이 빈약한 편이다. 지금은 숭어떼가 올라오는 계절이다.
얼마전 온천천에 수달이 나타나 대서특필되기도 하였고 은어도 잠시 모습을 보였다. 잠시일 뿐이다. 그 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온천천의 생태적 건강성이 담보되어야 하고, 그들에 대한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다움이다. 하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세병교를 앞두고 있는 구간, 현상적으로는 가장 수변식생대가 뛰어난 곳이다.
온천천을 경계로 좌측이 동래구고 우측이 연제구다. 처음엔 동래구가 생태적 정비로 앞서나가다 연제구의 친수중심정비와 관리를 따라가는 듯한 추세다. 주민들이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태하천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필요하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선택할 수있게끔 해야 한다.
세병교 근처다 세병洗兵이란 병기를 물로 씻었다는 곳으로 , 아마도 동래읍성 남문 앞 온천천에서 임진왜란 등 큰 전쟁을 치를 때 피 묻은 창칼을 물로 씻은 곳이어서 이곳에 돌다리를 세우자 세병교라 불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세병교 아래 동해남부선
전하는 말
" 현재 동래역 쪽에서 조개무지(패총)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더 옛날에는 세병교 쪽이 바다였던 것 같다. 온천천이 지금처럼 수영하수종말처리장 앞으로 물길이 직선으로 수영강과 합쳐진 것이 아니라 정과정으로(현재 87번 버스 종점) 물길이 빠졌는데, 합쳐지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났었고, 수영비행장 자리(지금의 센텀시티)가 수영강, 온천천 하구로 갈대가 우거졌고 커다란 모래섬으로 되어있어 사람들이 어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현재 세병교 옆에 있던 작은 산이 없어졌고, 아래 제방(둑) 양쪽 지금의 주택가 지역은 하천바닥보다 낮은 논과 습지여서 사람들은 전혀 살지 않았다. 제방을 일제 강점기에 만들었는데, 당시 세병교 하류는 하천바닥과 고수부지가 온통 흰 백사장이었고, 현재 평화유지, 대상공장 자리가 기타가와라는 일본사람의 과수원으로 큰물 졌을 때 모래가 과수원으로 넘치면 안 되기에 당시 동래경찰서에서 비가 오면 주민들을 모아 가마니로 제방을 높였던 것이 현재의 제방모습이다.
내 기억으로는 물이 넘친 적은 없다. 60년 사라호 태풍 때 제방이 찰랑찰랑해서 주민들이 제방에 모래주머니를 쌓았다. 온천천 물은 금정산 계곡(주로 범어사 계곡) 물과 일제 강점기에 만든 회동수원지 물의 큰 줄기가 수영강, 작은 계곡물들이 온천천으로 다 들어왔는데 지금은 범어사 계곡물과 회동수원지 물이 하나도 온천천으로 안 들어온다. 홍수가 나면 물길로 하천바닥이 조금씩 달라져 깊이가 차이 났지만 허벅지에서 목 깊이까지 물이 항상 많았다. 겨울에도 물이 많았고 봄여름 가뭄이 두 달 이상 계속되면 물이 조금 마르곤 했었다.
아이들은 소를 몰고 와서 둑에 매어놓아 풀을 먹이고 소싸움도 시켰다. 기타가와가 온천천 행정적 관리자, 책임자로서 소싸움을 못하게 했다. 낮에 더울 땐 물장구 치고, 모래싸움하고 재첩과 고기도 잡았었다. 저녁에는 세병교 쪽에서는 남자들이 목욕을 했었고, 더 아래 하류 쪽에서 아줌마와 처녀들이 목욕을 했다. 정과정 쪽에는 물이 휘돌아치고 깊어서, 애들이 빠져죽거나 떠내려가면 수영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70년대 초반부턴가 물이 더러워지면서 아이들의 발길이 끊겼지.
온천천변에서 관이나 주민들이 모여 문화행사를 한 것은 없고, 고복수(가수)씨가 백정아들로서 세병교 동래역 쪽에 살았는데, 가출해 서울 가서 가수로 성공한 뒤 1년에 한 두 번씩 온천천에 내려와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곤 했다. 이런 기억밖엔 없다. 주변엔 온통 논과 습지, 연꽃이 많았다. 아낙들은 빨래도 하고 물도 떠가곤 했다. 수영비행장 어촌주민들이 물고기 대야를 머리에 이고 와 동래시장 어물전에서 팔거나 다른 물건과 물물교환을 했다. 동래시장에는 소시장도 열렸다.
송어와 재첩이 많았다. 정과정 쪽에는 재첩이 엄지손가락보다 컸는데 소쿠리로 끌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큰 가마니로 가득했다. 송어도 하천만 아니라 주변 논바닥에도 많았다. 이것 말고도 피라미, 논고동, 미꾸라지, 자라도 많았다. 하천 모래섬에 뱀장어도 많아서 손을 집어넣어 잡곤 했다. 수영비행장 쪽에는 큰 숭어가 팔딱팔딱 뛰었고, 온천천으로 올라오곤 했다.
갈매기(현재도 날아오는 붉은부리갈매기), 참새, 까치, 까마귀 등이 있었고, 참새들이 특히 떼로 몰려 다녔었다. 하지만 학, 황새 들을 본적은 없다. 왕잠자리 등 온갖 곤충들이 많았다. 잠자리를 실로 묶어 놀고, 개구리가 많아서 그런지 뱀이 많았다. 물뱀이 많았고, 울긋불긋한 뱀과 밤에는 독뱀도 다니곤 했다.
고수부지에 수풀과 들꽃이 많았지만 우거진 정도는 아니었고, 주로 모래사장이었다. 주변에 습지가 많아서 연꽃이 많았다. 제방이 지금보다 좁아서 그런지 큰 나무는 없었고, 세병교 쪽에는 수양버들이 조금 있었다. 예전에는 모래사장이 정말 곱고도 넓었다. 지금은 하천바닥이 다 오염되었는데, 준설을 해야지. 1m 이상 파면 예전 모래가 나올 것이다. 그래야 옛날처럼 물고기가 돌아오지. 그리고 옛날에 온천천으로 들어왔던 회동수원지 물을 끌어 와야 하고, 거제천, 사직천의 오염된 물이 온천천으로 안 들어오는 방법으로 이곳에 작은 하수처리장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환경이 더 중요한 시대가 아닌가. 시민공원도 잘 만들었지만 둔치에 자연스레 곤충과 들꽃이 많아야지 잔디를 깔면 눈에 보기만 좋지. 그리고 거제천에서 더러운 물이 들어오는 걸 해결 못하면 물도 안 맑아지고, 물고기도 안 온다. 헛돈 들이는 거야.
그리고 요즘 애들은 자주 아파. 예전에는 10리, 20리를 걸어 다녔어. 의학발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기 좋고 물 좋으면 병이 안 생긴다. 자연과 같이 살아야 병이 안 생기는 거다. "
(2002년 6월, 1938년부터 낙민동(동래역 앞)에서 살아 온 서영화 옹의 회고. 당시 76세)
이섭교는 세병교에서 하류방향에 있는 연안교 바로 밑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이섭교 터에 차가 다니지 못하는 좁은 시멘트다리가 놓여 있다. 옛날에는 이섭교가 동래읍성 남문에서 좌수영으로 이어지는 행정・군사상 중요한 교통로로서 지금의 안락동과 연산동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이섭교는 교각과 교각 사이 빈 공간 반원형이 연달아 4개나 되는 아름다운 긴 다리였다.
이 무지개 모양 반원이 붙은 게 마치 안경 같다고 하여 '안경다리'라고도 불렸다. 반원이 되는 무지개형 석재는 잘 다듬어 도괴되지 않도록 역학적으로 축조하였고 기타 교각을 이룬 석재는 자연석이거나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사용한 듯하다. 이렇게 아름답고 견고했던 다리가 어떤 연유로 유실되었는지 안타깝다.
이섭교利涉橋의 뜻이 '하천을 건너기에 편리하도록 가설한 다리'이니 다리 가설 목적을 표현한 이름이다. 이섭교비(인조13년, 1635)에는 다리를 만든 목적과 목교를 석교로 바꾼 계기가 밝혀져 있다. 이 이섭교비는 지금 금강공원 안에다 옮겨 보존하고 있는데, 부산광역시지정(1980년 6월 3일) 역사적 기념물 제2호이다.
2011.10.7 축제 개막
Mantovani Orchestra
출처 다음 블로그 홍이 아뜨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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