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푸른배달말집

by 이성근 2024. 12. 2.

 

 

갈수록 느는 왜말·꼬부랑말 말살이 이대로 괜찮은가

아래아 한글 입력기에서 을 작성하면 이 프로그램은 그 말을 뜻 모를 로마자 skrt로 바꾸어 출력했다. 한글 자판으로 놓고 몇 번을 거듭 쳐 보아도 기계는 한사코 낯선 알파벳 조합을 고집했다. 기계의 고집이 어쩌면 우리말보다 바깥말(외래어)을 앞세우고 높이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얼굴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란 세금의 우리말이다.

 

제가 예전에는 썼는데 한자말에 밀려 사라진 우리말들을 찾느라 훈몽자회라든가 노걸대언해’, ‘신증유합’, ‘광주천자문같은 옛날 책들을 많이 뒤졌습니다. ‘도 그렇게 찾은 말인데, 그게 바로 세금을 뜻하는 우리말이거든요. 그렇게 우리말을 하나만 찾아내도 여러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를테면 보유세지님낛’, ‘국세나라낛’, ‘지방세고장낛이렇게요.”

 

지난 19일 오후 경북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 기슭의 마음닦는마을’(명상센터) 푸른누리에서 만난 최한실(75)씨의 말이다. 그가 지난달 푸른누리 사람들과 함께 펴낸 우리말 사전 푸른배달말집’(안그라픽스)에는 이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나라나 고을에서 쓸 몫으로 백성한테서 거둬들이는 돈”. 이런 설명 뒤에는 거꿀화살표(<=)에 이어 세금’ ‘조세가 나와 이 한자말들을 우리말 으로 바꿔 쓰라고 알려준다. ‘이라는 올림말(표제어) 다음에는 낛일’(세무), ‘낛일집’(세무서), ‘낛쪽종이’(인지), ‘낛푼수’(세율)가 따르고, 이를테면 낛푼수에는 모두벌이낛 낛푼수는 네 갈래로 나눠 더 매겨간다는 보기말(예문)이 덧붙는다. ‘모두벌이낛은 종합소득세를 뜻한다. 눈 밝은 이는 알아차렸겠지만, ‘푸른배달말집은 올림말과 풀이(설명)는 물론 보기말까지 한결같이 우리말로만 되어 있다. 한자말이나 하늬말(서양말, 유럽어)을 올림말로 삼을 적에는 난전 => 길가게”, “텍스트 => 바탕글처럼 바꿔 쓸 우리말을 알려주어 바로잡도록 했다. ‘’, ‘가방’, ‘버스’, ‘피아노처럼 다른 나라 말이지만 우리말처럼 쓰는 들온말 몇몇은 우리말과 똑같이 올림말로 올려 풀이했어도, 보기말만은 한자말이나 하늬말 없이 우리말로 오로지했다.

 

우리말 사전 푸른배달말집을 낸 최한실씨가 19일 오후 경북 상주시 화북면 마음닦는마을푸른누리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책을 만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주눅들어 있었단 말입니다. 종살이(식민지 생활)도 하고 가웃()종살이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말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쓰지도 못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나오면서 한글만 쓰기로 하고 가로쓰기도 하면서 우리 겨레가 우리글을 널리 쓰게 하는 데에 큰 구실을 했거든요. 그래서 옹골차게 한자 섞어 쓰기와 세로쓰기를 지키던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까지 따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제 우리가 우리글로 쓰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 왜말(일본제 한자어)이고 하늬말이란 말입니다. 갈수록 와이프니 주방이니 멘토니 고객이니 하는 꼬부랑말과 왜말이 말살이에서 늘어나고 있어요. 한겨레신문이 이참에도 깃발을 들고 나아가, 말살이에서 죽어 가는 우리말을 살려내는 일을, 그러니까 다스림(정치), 살림(경제), 삶꽃(문화), 배움(교육), 모둠(사회) 곳곳에서 말살이를 뒤집는 바람을 일으켰으면 합니다.”

 

최한실씨가 우리말 사전에 뜻을 두기 비롯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붙잡혀 옥살이를 한 그는 감옥 안에서 생태·환경 문제에 눈을 떴고 마음닦기(명상)에도 마음이 기울었다. 건강이 나빠져 5년 만인 1984년에 형집행정지로 나온 뒤로는 생태 및 마음닦기와 관련된 강연 등을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매달려 온 지난 삶을 돌아본 끝에 1995년에 생태공동체 푸른누리를 만들어 상주로 내려왔고, 이어서 사단법인 푸른누리마음닦는마을을 꾸렸다. 2002년부터는 10여년에 걸쳐 길게는 5~6개월, 짧게는 한 달씩 인도에 가서 마음닦기를 배웠고, 스승 고엔카가 마음닦기에 관해 잉글말(영어)로 쓴 글을 우리말로 뒤치(번역)다가 우리말이 뒤죽박죽인 현실에 맞닥뜨렸다.

 

이를테면 마음닦기를 풀이한 잉글말 ‘be aware of incoming breath and outgoing breath’들어오는 호흡을 알아차리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리세요라고 뒤치던데, ‘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이나 그냥 들숨’ ‘날숨이라고 하면 될 걸 굳이 호흡이라는 니혼(일본) 한자를 쓴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깨달은 사람 가르침이라도 쉬운 우리말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김수업 교수님을 찾아뵈었죠.”

 

최한실씨가 푸른배달말집을 만들 때 쓴 빈책(공책)에 쪽글(메모)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김수업(1939~2018, 전 경상대 교수, 대구가톨릭대 총장)배달말꽃’(지식산업사, 2002), ‘말꽃타령’(지식산업사, 2006) 같은 책을 냈으며 배달말학회’, ‘우리말교육연구소등을 통해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힘쓴 이다. 최씨와 김 교수는 뜻 맞는 이들과 함께 2014727일 푸른누리에서 겨레말살리는이들’(겨살이) 모임을 뭇고 우리말집(국어사전)을 만들기로 했다.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 돌아가시고 딱 온 해(100)가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모임의 가장 큰 이끎이(지도자)였던 김 교수가 2018년에 돌아가자 모임은 느슨해졌고 이어서는 코로나도 오고 해서 앞날이 흐릿해지기에 이르렀다. 최한실씨가 사전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은 게 바로 그즈음부터였다. 푸른누리를 끈으로 삼아 알게 된 이들, 보탬이 될 만한 둘레(주변) 사람들과 일을 나눠 맡아 몸과 마음을 쏟은 끝에 마침내 푸른배달말집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1559쪽 분량에 47800개의 올림말을 담은 것으로, 그 가운데 절반쯤이 우리말이다.

 

제가 저 안(=감옥)에 있다가 나와서도 과천에 계신 이오덕 선생님을 찾아가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한 걸 보면 그 앞()에도 우리말에 마음이 있긴 있었습니다. 갇혀 있다가 나와서 늦게 장가를 갔는데, 1987년과 1990년에 본 두 아들 이름을 솔과 바다로 짓고 그즈음에 제 이름도 석진이라는 처음이름(본명)을 버리고 한실이라는 우리말로 바꿨거든요.”

 

겨살이에 참여한 이들이 여럿임에도 굳이 그가 이 일을 도맡은 까닭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말이란 사회성과 역사성을 지닌 것이고,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말을 고집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더 따져 물었다.

 

요새는 애들조차 블랙이니 화이트니 한다고 들었습니다. 검다거나 희다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바깥말을 쓰는 건 종살이의 말버릇이 얼마나 우리 얼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겨레의 얼이 똑바로 못 선다고 생각해요. 우리말은 마디마디가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경제를 우리말로는 살림이라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잉글말 이코노미’(economy)를 가져와서 경제라는 한자로 맞춰 놨습니다. 굴을 뚫고 물을 막고 그래서 그 안에 있는 거 다 죽어도 그게 보탬이 됐다, 경제가 나아졌다 이러잖아요? 그렇지만 살림은 우리말 살리다에서 왔는데, 죽이면서 살림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제라는 말을 버리고 살림이라고 쓰자는 건, 살림은 경제를 그저 갈음(대신)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는, 날씨고비(기후위기) 때에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책을 무엇보다 배움이(학생)들이 곁에 두고 들춰 보면서 우리말을 익히는 데 썼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우리말은 옛날부터 엄마 등에 업혀서,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배운 말이잖아요. 들로 메()로 뛰어다니면서 나무 이름, 풀 이름, 온갖 말을 다 배웠는데 학교라는 데 가서는 예나 이제나 우리말 안 배우고 한자말 배우잖아요. 아이들한테 우리말 가르치는 게 가장 바쁜(급한) 일입니다. 이 책 어느 곳을 펼치더라도 구슬 같고 깨알 같은 우리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날이 한 마디씩이라도 우리말로 바꿔 쓰면 언젠가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우리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푸른배달말집은 출간 한 달여 만에 초판 1천부가 다 팔려서 재쇄를 찍고 있다. 최한실씨는 진작부터 이 책을 깁고 보태는 일에 들어갔는데, 올림말을 6만개쯤으로 늘린 증보판은 오는해(내년)나 다다음해(내후년)쯤 나올 것으로 본다.

 

하느라고 했어도 못 담은 우리말이 제법 되고, 더 바로잡고 고칠 말들도 있어서 제가 하루에 거의 열 때(시간)씩 이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도 알려주실 게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가 쫑궈(중국) 한자말과 니혼 한자말, 하늬 꼬부랑말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고 우리말을 넉넉히 찾아 쓸 수 있다는 걸 믿고 함께 나아갔으면 합니다. 이 말집은 그렇게 더 큰 길로 나아가는 디딤돌일 뿐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