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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포퓰리즘

by 이성근 2020. 8. 16.

<포퓰리즘>(고유서가 펴냄, 카스 무데·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 지음, 이재만

 

 

저자 : 카스 무데 -미국 조지아대학 국제관계학 교수. 네덜란드 레이덴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에든버러대학 조교수, 안트베르펜대학 부교수를 지냈다. 극우 운동에 관한 권위자로, 연구 분야는 유럽과 북미의 포퓰리즘, 극단주의, 정당정치, 이슬람 혐오 등이다. 저서로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정당POPULIST RADICAL RIGHT PARTIES IN EUROPE(스타인로칸상 수상) 중동부 유럽의 인종주의적 극단주의RACIST EXTREMISM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아메리카의 극우THE FAR RIGHT IN AMERICA, 편저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포퓰리즘POPULISM IN EUROPE AND THE AMERICAS등이 있다.

 

저자 :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칠레 디에고포르탈레스대학 정치학 교수.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 비교정치학, 정당정치 등이다. 편저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포퓰리즘』 『옥스퍼드 핸드북: 포퓰리즘THE OXFORD HANDBOOK OF POPULISM』 『라틴아메리카 우파의 회복력THE RESILIENCE OF THE LATIN AMERICAN RIGHT등이 있다.

 

역자 : 이재만-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중심으로 인문 분야의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전쟁과 평화: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확산』 『문명과 전쟁(공역) 몽유병자들』 『정치철학 공부의 기초』 『번역』 『성서』 『』 『유럽 대륙철학』 『종교개혁』 『세계제국사』 『철학』 『역사』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등이 있다.

 

목차

1.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2. 세계 각지의 포퓰리즘

3. 포퓰리즘과 동원

4. 포퓰리스트 지도자

5.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6. 원인과 대응

 

감사의 말

참고문헌

독서안내

역자 후기

도판 목록

 

출판사 서평

포퓰리즘은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포퓰리즘은 숙주 이데올로기에 기생한다

포퓰리즘 수요를 줄여야 자유민주주의가 강화된다

포퓰리즘 정치의 수요와 공급을 다면적으로 논의!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에 관해 폭넓게 저술해온 무데와 로비라 칼트바서는 이 얇은 책에서 모호한 개념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제시하고, 포퓰리즘 운동과 정당들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출현했는지 두루 개관한다. 이 주제에 관한 탁월한 안내서다.”

_B. 주디스(John B. Judis), 포퓰리즘의 폭발저자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동안 한국에서는 ‘populism’의 번역어로 대중영합주의’, ‘대중주의’, ‘민중주의’, ‘인민주의등을 써왔지만 이제는 학계에서나 미디어에서나 그냥 포퓰리즘으로 쓰는 추세다. 이 책은 유럽의 극우 정당,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대통령, 미국의 티파티 운동 같은 현대의 대표적 포퓰리즘 운동을 개관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또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의 모호한 개성을 파고들어 포퓰리즘 운동이 어떻게 민주주의에 도전하는지 조명한다. 나아가 포퓰리즘 정치의 수요와 공급, 포퓰리스트 지도자,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포퓰리즘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포괄적이고 다면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들은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포퓰리즘을 하나의 담론, 이데올로기, 또는 세계관으로 보는 이념적 접근법에 주로 근거해 포퓰리즘 정의를 내놓았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형태의 포퓰리즘이든 일종의 민중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포함한다는 학자들의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한다면서, 저자들은 포퓰리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순수한 민중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혼란스럽고 까다로운 개념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제시

이 책은 무엇보다 포퓰리즘이라는 혼란스럽고 까다로운 개념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제시한다. 저자들이 포퓰리즘에 대해 내리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라는 정의는 포퓰리즘의 핵심을 포착하는 동시에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이나 현상이 포퓰리즘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실용성까지 갖추었다. 가령 기득권층을 부패한 무리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민중의 뜻대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다. 포퓰리즘과 비포퓰리즘을 나누는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 외에, 이 정의는 포퓰리즘의 스펙트럼이 유달리 넓은 이유도 알려준다. 포퓰리즘은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인 까닭에 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정교한 행동 전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중심이 두꺼운 숙주이데올로기에 기생해야 하며,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생하느냐에 따라 극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저자들은 분석한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명료하게 설명

이 책은 또 포퓰리즘 현상의 중심에 있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모두 민중의 목소리’, 즉 보통사람들의 진정한 대표를 자처한다. 민중의 목소리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자신을 엘리트와 분리하는 한편 민중과 연결하려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부패한 엘리트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과 순수한 민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납득시키려 한다. 또한 엘리트와 거리를 두는 방법은 자신을 정치 아웃사이더’, 정치 신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기득권층과의 연줄이 아니라 순전히 재능을 바탕으로 자수성가한 청렴한 사람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 마지못해 정계에 진출했다고 강변하기 일쑤다. 이런 면에서 저자들은 포퓰리즘을 평범한 이력을 쌓아가는 비범한 지도자들의 보통사람들을 위한 정치라고 지적한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논의

이 책에서는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포괄적이고도 다면적으로 논한다. 저자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등한다는 통념은 오해라고 지적한다. 민중의 일반의지를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국민주권과 다수결을 지지한다. 요컨대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이데올로기다. 포퓰리즘과 충돌하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의 권리 등 기본권을 보호하고 다수의 폭정을 막는 기구들을 제도화한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사법부와 미디어처럼 선출되지 않은 기구들이 민중의 의지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다수결 원리와 소수자 권리를 조화시켜야 하는 난제를 겨냥한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처하기 어려운 공격인데, 다수결 원리와 소수자 권리 중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이 이 난제를 통해 불만을 결집시키고 세력을 키울 가능성은 자유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포퓰리즘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현대의 정치 지형에서 포퓰리즘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포퓰리즘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은 기득권층이 구제불능으로 부패했고 민중이 직접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포퓰리즘 이념의 중요한 측면을 지지한다. 이렇게 잠재해 있는 포퓰리즘 정서는 부패 스캔들이 터지거나 경제위기가 닥칠 경우 활성화되고 표출될 수 있다. 게다가 포퓰리스트는 기득권 정치 세력이 충분히 제기하지 않고 있는 사회적 불만을 감지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데 능하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제도적 부패와 사회적 불만을 감소시켜 궁극적으로 포퓰리즘 수요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포퓰리즘적 메시지를 일부 수용하는 선택이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포퓰리즘 populism

어원은 인민이나 대중 또는 민중을 뜻하는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유래하였으며, 대중주의(大衆主義) 또는 민중주의(民衆主義), 인민주의(人民主義)라고도 한다.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치 사상 및 활동을 가리키며,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대중을 지배하는 엘리트주의에 상대하는 개념으로 간주된다.

 

포퓰리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로마시대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농지 개혁을 추진하던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에서 농민 계몽을 통하여 사회 변혁을 꾀한 '나로드니키(Narodniki) 운동'과 미국에서 인민당(People's Party)을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나로드니키운동의 주장 및 방침을 지칭하는 나로드니키주의(Narodnichestvo)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포퓰리즘이기도 하며, 인민당을 파퓰리스트당(Populist Party)이라고도 칭한다. 이 시기의 포퓰리즘운동은 농민(대중)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농촌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대중 중심의 사회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전개된 포퓰리즘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띠지만, ‘대중에 대한 호소엘리트에 대한 불신이라는 공통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나로드니키운동과 미국의 포퓰리스트운동을 포함하여 20세기 초의 멕시코혁명과 유럽의 파시즘,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 인도의 인디라 간디,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와 매카시즘, 프랑스의 장마리 르펜을 위시한 서유럽의 신극우주의 세력,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 이질적 현상 또는 인물들이 모두 포퓰리즘 또는 포퓰리스트의 범주에 거론된다.

 

대중에게 호소해서 다수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점, 다수의 지배를 강조하고 직접적인정치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 기득권 정치 세력과는 달리 대중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표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현실을 타개한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추진한 기아 퇴치 및 실용주의 노선은 대표적인 포퓰리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룰라 대통령은 월 소득액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에 정부가 현금을 지원하는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임기 동안 빈곤율을 10% 이상 떨어뜨리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반하여 포퓰리즘에 대하여 대중의 인기만을 좇는 대중추수주의 또는 대중영합주의로 보는 부정적 시각도 뚜렷이 존재하며, 2차 세계대전 후 노동자층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페론은 노조의 과도한 임금 인상을 수용하는 등 무분별한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독재정치를 펼쳐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와 같이 부정적 시각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편의나 기회주의적 생각으로 포퓰리즘을 활용하면서, 실제로는 비민주적 행태와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한다고 비판한다. , 권력과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정책을 내세울 뿐이며,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퓰리즘 [populism] (두산백과)

 

지금 우리는 포퓰리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퓰리즘의 시대에 접어들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실패했던 차베스가, 헝가리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오르반이 개헌도 불사하며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당의 마린 르 펜이 대통령 결선 투표에 올랐다. 의회주의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는 자국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패라지와 독립당이 EU 탈퇴를 주도했다. 미국에서도 오른쪽에서는 트럼프가, 왼쪽에서는 샌더스가 기성 정치에 분노한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돌풍을 일으켰다. 이렇게 많은 나라에서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지만, 한국은 다르겠거니 흘려듣고 말았다.

 

두 가지 사실이 한국 정치와 포퓰리즘의 연결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촛불 탄핵'에 대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부패와 위법을 공모했던 대통령을 국민의 힘으로 몰아냈고,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국민의 위력을 폄하하는 듯한 포퓰리즘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다른 하나는 그 용어가 가진 파당성과 모호함이다. 민주파 정부가 부자 과세, 서민 복지를 언급할 때면, 보수 언론과 야당은 어김없이 대중영합주의를 들고 나왔다. 그렇게 공격받던 이들이 안철수가 기득권 정치를 문제 삼고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제안하자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포퓰리즘은 "정적을 비난하기 위한 전투 용어(Kampfbegriff)이자 너무 모호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처럼 보였다

 

그렇게 시류에 편승해야 할지, 파당적 언쟁에서 비켜서 있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최장집 교수의 최근 논문,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를 읽게 되었다. 촛불 탄핵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규정하고 그 징후들을 논한 글을 보면서 한국 역시 포퓰리즘 정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 <포퓰리즘>을 읽은 후 적지 않은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역시 포퓰리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퓰리즘, '순수한 민중''부패한 엘리트'를 나누다

책의 서두에 나와 있듯이 포퓰리즘은 이견의 여지가 큰 개념이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는 방식도 꽤나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민중이 정치 참여를 통해 구축하는 민주적 생활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해석에서 포퓰리즘은 민중을 동원하고 공동체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힘이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라클라우식 접근법도 있다. 여기서 포퓰리즘은 기성 체제의 변화를 위해 정치에 갈등을 불러들이며 사회에서 배제된 부문을 동원하는 급진 민주주의 실현의 기제이다.

 

이와 반대로 포퓰리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경제학자과 언론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경제적 접근에 따르면, 포퓰리즘이란 과도한 부의 재분배와 정부 지출로 건전한 경제 발전을 막는 무책임한 정책 프로그램이다. 지도자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지지에 의존하는 통치 전략이라는 정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아마추어적이고 비전문적인 정치 행위를 통해 미디어의 관심과 대중의 지지를 극대화하는 통속적 정치 스타일이라는 해석도 있다.

 

무데와 칼트바서는 위와 같은 개념화를 아우를 만한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정의를 제시한다. 그들에게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상호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 '순수한 민중''부패한 엘리트'로 나눠져 있다고 여기며, 정치는 민중이 가진 일반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이다. 이 정의에서 핵심 개념은 민중, 엘리트, 일반 의지이다

먼저 인민, 시민, 국민으로도 불리는 민중은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 정치권력의 궁극적 원천이자 통치의 주체인 주권자로서의 민중, 둘째, 평범한 시민들의 판단력, 가치관, 취향에 대한 신뢰를 담은 보통 사람으로서의 민중,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인종적, 역사적, 신화적 구성에 기반한 국민으로서의 민중이 그것이다.

 

민중에 비해 엘리트 개념을 이해하기는 쉽다. 그들은 정치, 경제, 미디어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자신들 또는 외세의 이익과 요구, 가치 판단에 따라 공동체를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에서 엘리트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모호하고 자의적인 도덕성에 있다. 마지막으로 일반 의지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며 항상 올바른 민중의 의사를 뜻한다. 이 개념을 널리 알린 루소에 따르면, 귀족적 성격을 지닌 대의제에서 시민들은 선거 때마다 동원되어 대표를 선택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수동적 존재이다. 하지만 자치 정부라는 루소의 유토피아적 공화정에서 시민들은 직접 법을 만들고 집행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개념에 힘입어 국민투표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선호한다.

 

한국 최초의 포퓰리스트는 '노무현'

책에서는 한국의 포퓰리즘 사례로 노무현 대통령을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스트로 지목받고 비판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들의 폭넓은 정의를 따르자면, 국가 규제를 공적(公敵)으로 상정하고 온 나라를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넘쳐나게 했던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고, 아버지에 대한 향수에 기대어 집권에 성공하고 '콘크리트' 지지를 구가하며 그 아버지의 권위주의 행태마저 따르려 했던 박근혜 대통령도 포퓰리스트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면모는 촛불 탄핵을 통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 주장의 근거를 짧은 테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포퓰리즘은 국민 주권에 호소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조가 지금처럼 자주 언급되며 상찬 받은 시기도 없을 것이다. 헌법이 밝힌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많은 국민들이 아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왕정도, 귀족정도 아닌 민주정이라는 의미만 담고 있으며, 실제 민주주의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원리와 제도의 체계로 작동한다. 게다가 다양할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상호 대립적인 이익과 요구를 가진 시민들을 '국민'이라는 하나의 수사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공허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포퓰리스트들은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깨어있는 시민', '촛불 시민'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국민 주권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하며 이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동원한다.

 

포퓰리즘은 국민의 직접 참여를 강조한다.

일반 의지는 파당적 이해에 얽매인 정당이나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 결사체들은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일반 의사의 확인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를 우회해 집행부 수장과 그 참모들이 국민의 제안을 받고 그에 답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런 기능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제도이다. 이 모델은 중앙 정부를 넘어 지방정부에까지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집단 지성을 모아 당면한 원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론화위원회도 같은 맥락에 있고, 국민 의사는 외면한 채 부정부패를 일삼는 국회의원을 소환하고, 국민 참여로 법률과 예산을 결정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포퓰리즘은 지도자 개인과 강력한 일체감을 갖는 지지 집단을 통해 작동한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농담이려니 하다가도 농담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나타난 이 정치인 팬덤 현상이 이제는 포퓰리즘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지지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최장집 교수는 "특정 정치인을 열정적으로 따르며 ''로 불리는 '컬트적'(cultist) 운동은 강고한 결속력과 공격성을 핵심"으로 하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한국 정치와 선거 과정을 지배하는 힘으로 등장했다고 진단한다. 대통령에 대해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의 행태가 시민사회 공론장의 황폐화를 낳고 정당 정치와 선거에 부정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포퓰리즘은 법의 지배와 언론의 자유를 경시하며, 대통령 권력을 강화한다.

무데와 칼트바서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들은 민중 권력을 제한하는 비선출 기관을 불신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들의 표적에 가장 자주 오르는 것이 사법부와 미디어다. "예컨대 수십 년간 법정을 들락거린 베를루스코니는 판사들이 공산주의자 이익을 옹호한다고 공격했고, 권력을 잡은 포퓰리스트들은 국영 미디어를 정부 대변인으로 바꾸곤 한다."는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자리에 조국을 놓고, 국영 미디어 자리에 KBS, MBC, 연합뉴스 등을 놓는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검찰에 문제가 없고, 조중동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검찰 개혁이 왜 이 정부의 최대 개혁 과제가 되어야 하는지, 왜 근거도 빈약한 사건에 '검언유착'을 내세우며 법무부 장관이 수사 지휘권까지 발동해야 하는지는 포퓰리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검찰 개혁의 대안으로 제시된 공수처법은 최장집 교수가 우려하듯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대통령에게 또 하나의 권력을 안겨줄 뿐이다.

 

포퓰리즘은 선악 구도의 이분법적 적대에 의존한다.

정치는 갈등을 통해 작동한다. 갈등에는 경제 문제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도 있고, 문화적 정체성을 둘러싼 것과 같이 나눌 수 없는 것도 있다.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나눌 수 있는 갈등을 우위에 두며 조정과 타협으로 사회적 형평과 통합을 모색한다. 그에 반해 포퓰리스트들은 선악 이분법으로 단순화된 나눌 수 없는 갈등을 조장하며, 나눌 수 있는 갈등마저 도덕적으로 정의해 분란을 키운다. 문재인 정부 전반기를 지배했던 '적폐청산' 구호가 대표적이다. 지난 정부에 잘못이 있다면 과오를 밝히고 책임을 묻고 새로운 관행을 실천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과격하고도 모호한 구호로 정리해 1호 국정 과제로 제시하자, 온 나라가 언론 적폐, 노동 적폐, 재벌 적폐, 교육 적폐 등의 '적폐청산 열풍'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최저임금 1만원' 정책도 다르지 않다. 해고 위협과 적은 임금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 삶을 개선하자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노동시장 분절화 원인에 대한 체계적 분석도 없이, 노동 문제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에 대해 충분한 의견 수렴도 없이, 재벌-중소기업 정책, 소상공인 정책, 복지 정책과의 긴밀한 연계도 없이 당위만 앞세운 까닭에 여론은 이들 정책에 대한 찬반으로 양분화되고 정책 실패의 책임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조나 보수 언론과 야당의 선동 탓으로 돌려지고 있다.

 

포퓰리즘은 정당 약화에서 비롯되며, 정당의 공동화(空洞化)와 운동화를 가속화한다.

포퓰리즘의 확산은 정당 쇠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서유럽에서 좌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부상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기성 정당들이 서로 간의 이념적 거리를 좁히고 국가의 물적 자원에 의존하며 사회로부터 점점 더 유리된 데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성 정당이 자신들의 정당성 결핍을 당원 투표, 국민 투표 등의 직접 민주주의 기제로 보완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에서 티파티 운동이 공화당에 불비례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당 정책의 급진화를 낳고, 정당 활동과 무관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에 오른 것도 당의 조직적 경계가 불분명하고 당이 자기 후보를 선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최초의 포퓰리스트라 할 수 있는 노무현 대통령은 노사모를 비롯한 일반 시민들의 지지 덕분에 민주당 후보가 되고 집권에도 성공했다. 그렇잖아도 취약한 정당에 국민 경선제가 도입되고 지구당이 폐지되자 후보의 선거운동은 캠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당의 정책은 외부 전문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당의 주요 활동 또한 사회의 여러 이익과 요구를 결집하고 조율하는 본래의 역할보다 선거 컨설턴트, 여론조사 전문가, 행사 기획가 등이 중심이 되어 여론과 언론의 구미에 맞는 토막말(soundbites), 이미지, 이벤트를 생산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렇게 당이 왜소화·형해화·주변화되고 대통령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소수의 극렬 지지자와 부유하는 여론에 호소하는 정치를 이어가더라도 당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어쨌든 공직을 맡고자 하는 이들은 당의 이름을 달아야 하고, 대다수 유권자들은 당의 이름을 보고 투표하며, 의회 입법은 당을 중심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당의 허물어진 경계를 넘어 당내의 빈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이 시민사회에서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과 그들의 태도이다. 정치를 도덕화하며 적과 아를 가르는 운동의 언어, 이슈의 과도한 단순화에 의존하며 가치의 선명성을 부각하는 운동의 정향, 아래로부터의 동원보다 중산층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여론과 언론, 법원에 호소하는 운동의 전략은 포퓰리즘과 친화성을 갖고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정당을 운동화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켜보는, 수도 이전을 주장하는 민주당, 차별 금지법을 외치는 정의당, 사상 전향을 묻는 통합당의 실체이다.

 

문재인정부, 포퓰리즘을 넘어서자

포퓰리즘은 스스로를 민중·시민·국민의 유일무이한 대변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정치 양식이다. 현재 한국 정치는 그런 포퓰리즘의 면모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지금 우리 정치를 포퓰리즘이라 비판한다고 해서 당장 크게 나아질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포퓰리즘과 친화성을 갖는 몇 가지 활동 방식 내지 태도의 자제를 제안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너무 쉽게 분노하지 말자

사회는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OECD 최고 산재사망률과 최저 출산율. 겉으로는 선량인 척 공익을 앞세우면서도 돌아서면 자기 이익, 자기 명성부터 챙기는 정치인들, 나라 경제 전체를 좌우하는 기업임에도 경영권은 오로지 자신과 후손만이 갖기를 고집하며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재벌 총수들, 자기 동네에 장애인 시설, 임대 아파트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며 걱정하고 반대하는 주민들, 탄핵은 위법이라며 주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모자에 꽂고 광화문으로 오는 사람들. 여기에 더해 '기레기', '검새', '대깨문', '마초'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자면, 정말이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울지 모른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분노가 불러온 마음의 흥분 상태는 이성의 작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왜 현실이 이러한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리더는 무엇을 하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태가 복잡하다면, 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책을 살펴봐도 좋고 주변의 신뢰할 만한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해도 좋다. 분노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거나 대충 마감한 채 문제의 혐의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 주는 데 몰두하게 만든다. 그런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상대방이나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분노가 폭로를 낳고, 폭로가 또 다른 폭로로 이어지며 고발과 기소, 재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분노에 기반한 폭로-기소-재판은 이제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문제 해결 패턴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휘발적인 감정의 분출에 의존하며 제도 정치를 우회하는 접근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대개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이다. 그래서인지 폭로가 문제의 해결과 개선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드물다.

 

분노의 시간은 짧고 이성의 시간은 길다. 포퓰리즘이 분노를 먹고 자란다면, 민주주의는 이성의 힘에 의지한다. 포퓰리즘의 자양분이 분노가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열정이라면, 민주주의의 그것은 이성이 인도하는 차가운 열정이다.

 

클릭이나 기부에 만족하지 말자.

정치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를 취미로 즐길 수도 있다. 어딘가로 나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만나 일을 도모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인터넷을 띄우고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창을 열면 또 다른 정치의 세계가 펼쳐진다. 친근하고 괜찮아 보이는 정치인들, 평소 그의 주장과 태도에 호감이 갔던 정치인들에게 친구 신청을 해놓으면 언제든 그들의 활동과 의견을 볼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간단하게 '좋아요''공유'를 누르면 된다. 물론 정말 마음에 드는 정치인이라면 몇 번의 클릭으로 그의 계좌에 기부금을 보낼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도 친구 맺기를 하고 댓글에 댓글을 더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도 뿌듯한 일이다. 친구들이 알려준 대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카페에 가입해 국내외 현안을 망라한 뉴스 분석과 입장들을 얻고 내 주장을 남기는 일도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한 발 더 나아가 인터넷 동지들과 함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정치인 사이트나 페북 계정으로 가서 비판 의견을 남기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그의 전화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남기거나 그의 통장계좌로 모욕적인 금액을 기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통적인 정치는 활동가들(activists)이 주도하지만, 취미 정치는 슬랙티비스트들(slacktivists)이 지배한다. 그들은 짧은 댓글과 몇 차례의 클릭으로 동의를 밝히고 남이 올린 자료를 퍼 나르는 데는 익숙한 반면, 지루하거나 부담스럽거나 느린 일에는 뜻을 거두는 활동가 아닌 활동가들이다. 그날그날의 사건·사고에 빠르게 반응하고, 기껏해야 보름을 넘지 못하는 이슈와 뉴스 분석을 쫓아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활동이 서로에게 주는 정서적 만족은 분명 클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그들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관심과 참여를 불러올 수 있을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오히려 취미로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성 밖 사람들은 배척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신념만큼이나 정서적 만족이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는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버리기 마련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 상식에 벗어난 낯선 주장은 무시하고, 자신들 믿음에 반하는 발언과 행태에는 분노하며, 자신들의 확신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들에만 환호한다. 그렇게 그들은 동료 의식을 키우고,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며, 마치 시민으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뿌듯해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오늘날 많은 논평가들이 우려하는 여론의 양극화, 진영 논리의 심화는 바로 이와 같은 매커니즘에서 비롯된 바 크며, 포퓰리즘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힘 또한 이로부터 나온다.

 

옳음에 대한 확신을 자제하자.

정치인이자 작가로 영국 수상을 지내기도 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자전적 소설, <콘타리니 플레밍>에는 원로 정치인 아버지와 열정 어린 젊은 아들 간의 대화가 나온다.

 

아 들: "그저 그렇고 그런 말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요."

아버지: "얘야, 세상에 올바른 아이디어란 매우 드물단다. 게다가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지.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한단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원대한 이념,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상들 속에서 문제의 핵심을 찌르며 적절한 정책 수단과 함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정책 패키지. 세상을 바꿔보려는 열정이 강한 진보파들 사이에서 이런 이념, 저런 정책에 대한 갈증을 자주 보게 된다. 정당이나 의회에 비해 집행부가 무척 강한 한국에서 그 수장의 선호에 맞는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그것을 입법화하고 정책화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대학 교수와 연구자들이 선거 캠프로, 각종 정부 위원회로 몰려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옹호하는 이념과 정책의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그것은 정치에서나 운동에서나 오만과 권위주의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 정치는 올바른 아이디어의 실천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한 나라의 앞날을 다루는 엄청난 일이기에 좀 더 나은 목표, 좀 더 나은 방법에 대한 탐구가 없을 수 없고 없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가능한 합의점을 중심으로 타협하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디즈레일리의 정치인 아버지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말로 통치한다고 말했다.

 

민주 정치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태도의 오류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 작고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죠반니 사르토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간단명료한 정의에 대해 이렇게 논박한 바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멘켄(H. L. Menken)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에는 단순하고 깔끔하며 틀린 해결책이 있다." 1960년대에 성인이 된 세대는 거의 모든 문제에 단순하고 깔끔한 해결책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 캠퍼스 혁명 세대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깔끔하다. 하지만 틀렸다. 민주주의는 단순하게 인민의 권력으로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민에 대한 인민의 권력'이라는 온전한 표현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관계다.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실제 권력은 행사되는 권력이다. 그렇다면 수천만 심지어 수억 명의 전체 인민이 어떻게 그들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여기에 깔끔한 답변이란 있을 수 없다.

 

나의 지도교수는 학생들에게 "지나친 확신은 무지의 결과일 때가 많다"고 주의를 주곤 했다. 이 글에서 나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포퓰리즘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확신일지 몰라 이견의 여지를 두고 싶다. 무데와 칼트바서도 말했듯이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모든 운동, 정책, 지도자가 늘 부정적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은 단순하고, 민주주의는 복잡하다. 포퓰리즘은 쉬운 답을 주고, 민주주의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쌍생아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포퓰리즘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손자가 말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포퓰리즘을 알고 난 후 민주주의도 알아보면 좋겠다.

박지혜 정치평론가/프레시안

포퓰리즘 기원과 사례,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의 관계

저자 폴 태가트|역자 백영민|한울아카데미 |2017.09.

원제 Populism

 

저자 폴 태가트는 서식스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며, 서식스유럽연구소(SUSSEX EUROPEAN INSTITUTE)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포퓰리즘 연구에서 서식스 학파(SUSSEX SCHOOL)를 대표하는 인물로, 서유럽에서 등장하는 신포퓰리즘 현상과 관련된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목차

01. 들어가며

02. 포퓰리즘의 다양한 정의

 

1포퓰리즘 사례

03. 미국의 포퓰리즘: 포퓰리즘과 대중운동 정치

04. 러시아의 포퓰리즘 사례: 국민 속으로

05.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사례: 리더십의 포퓰리즘 정치

06. 캐나다의 포퓰리즘 사례: 사회신용당과 종교적 포퓰리즘

07. 신포퓰리즘

 

2포퓰리즘의 특성

08. 포퓰리즘, 국민, 그리고 마음속 이상향

09. 포퓰리즘의 제도적 딜레마

10. 포퓰리즘과 대의정치

11. 결론

 

출판사 서평

카멜레온 같은 포퓰리즘에 대해 현상이 아닌 본질을 연구하다

최근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확산되면서 포퓰리즘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해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포퓰리즘을 다룬 책에서는 하나같이 포퓰리즘을 정의내리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딱 맞는 정의와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인해 포퓰리즘 연구는 학문적으로 오랫동안 진지하게 진행되기보다 포퓰리즘이 득세할 때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방향이 상이하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묶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을 이해해야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의 본질을 연구한 이 책은 매우 의미 있다.

 

각 나라의 포퓰리즘 사례와 포퓰리즘이 안고 있는 딜레마 분석

저자 폴 태가트는 오늘날 포퓰리즘 연구가 현실에만 매몰되어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주요 포퓰리즘 사례를 분석한다. 우선 미국 사례에서는 19세기 미국사회에 등장했던 국민당 사례를 분석한다. 국가 이념에 대한 존중, 순수의 상실에 대한 집착 등 포퓰리즘의 특징보다 미국적 특징이 더 두드러졌던 미국의 포퓰리즘을 통해 포퓰리즘이 환경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를 증명한다. 러시아 포퓰리즘 사례에서는 나드로니키 운동을 중심으로 도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농촌의 삶을 변화시키려 했던 과정을 설명한다. 한편 라틴아메리카는 카멜레온적 속성을 지닌 포퓰리즘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된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정치는 굴곡의 역사였으며, 정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정치인의 리더십에 크게 의존했다. 캐나다의 사례로는 포퓰리즘 운동이 사회운동으로서 성공한 독특한 케이스인 사회신용당을 분석한다. 사회신용당은 포퓰리즘을 대중적 운동이자 명확한 사상의 집합으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의 예외적인 사례다.

한편 저자는 20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포퓰리즘을 신포퓰리즘이라 칭하면서 신포퓰리즘의 공통된 특징을 분석한다. 신포퓰리즘은 안정된 정당 시스템과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선진 복지국가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신포퓰리즘은 이념적으로는 정당정치를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정당정치하에서 활동해야 하고, 대의정치 과정에 반대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의정치 과정에 의존해야 하는 딜레마를 동시에 안고 있다고 설명한다.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포퓰리즘과 대의정치 간의 관계에 충실한 학술서

많은 학자들은 포퓰리즘을 대중의 인기에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영합하는 정치 스타일이라고 분석하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포퓰리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포퓰리즘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포퓰리즘과 대의정치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자유주의적 민주정치제도에 대한 반작용이다. 이로 인해 정당을 불신하고 특정 지도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현상이 나타나며, 세계화에 반대해 민족의 정체성에서 위안을 느끼려는 사회집단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포퓰리즘 지지자들은 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포퓰리즘 지지자들이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열광하는 이유도 혁명보다는 변화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지지자는 대부분 정치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포퓰리즘 운동에 동원된다는 것은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해봐야 하는 근거라는 저자의 경고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책속으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여러 속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다. 포퓰리즘은 어떤 시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잠잠하다. 포퓰리즘의 본질은 모호함이며, 개념적 불확실성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람에 따라 포퓰리즘에서 엄청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포퓰리즘에 아무런 본질적 의미가 없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 p.16

 

포퓰리즘 운동은 느슨한 신념의 체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 운동은 본질적으로 통제되거나 조직되기 어렵고, 일관성을 띠지도 않으며,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특성을 갖는다. 포퓰리즘은 난해하고 모호한 개념이라서 포퓰리즘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일련의 특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포퓰리즘의 근본적 특징은 유동성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 상황 또는 정치운동으로서의 포퓰리즘에 대해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포퓰리즘 현상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 --- p.17

 

포퓰리즘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이유는 포퓰리즘이 공허한 개념이라는 점, 즉 포퓰리즘에서 핵심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의 경우 명시적이든 함축적이든 평등, 자유, 사회정의와 같은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가치를 내세우는 반면, 포퓰리즘에서는 그러한 핵심 가치를 찾을 수 없다. …… 물론 자유주의, 보수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등과 같은 근대의 거대이데올로기도 자기들끼리의 접합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급진주의적 페미니즘과 같은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경우보다 다른 이데올로기에 덧붙어 존재하는 경우가 훨씬 더 빈번하다. --- p.21

 

주정부의 권리에 대한 월러스의 주장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앨라배마 주민의 마음속 이상향(어쩌면 앨라배마 백인 농촌 거주자들이 꿈꾸던 모습)에 대한 애정에서 잘 드러난다. 변화는 이러한 마음속 이상향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연방정부와 사회적 민권운동, 더 넓게는 새로운 진보세력의 등장에 따른 것이었다. 월러스의 반동적 포퓰리즘은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월러스는 미국사회에 등장한 새로운 진보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기존의 마음속 이상향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 p.77

 

포퓰리즘 운동의 경우 자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국민을 기반으로 포퓰리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는 지식계층을 통해, 그리고 지식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 나로드니키는 문자 그대로 자신들이 설정한 마음속 이상향과는 전혀 동떨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마음속 이상향을 극단적으로 이상화시켜 생각할 수 있었다. 다른 포퓰리즘 운동이나 사상의 경우 마음속 이상향은 암시적으로 존재할 뿐이었으나, 러시아 나로드니키는 마음속 이상향을 매우 명확한 형태로 제시할 수 있었다. --- p.102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은 참여자의 마음속 이상향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이상향에 거주하는 국민을 운동의 근원으로 삼으면서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내부에서 제시된 이념 및 이에 대한 포퓰리즘 참여자의 숭배는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사례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는 다른 포퓰리즘 사례에서도 관찰된다. --- p.126

 

현대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혼합경제를 추구하는데, 신포퓰리즘은 이 같은 현대 복지국가의 정치적 안건, 제도, 정당성을 거부하는 현대적 형태의 포퓰리즘이다. 또한 신포퓰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당들이 합의한 체제를 거부한다. 특히 현재의 정치 형태, 그중에서도 주요 정당 간의 정당정치를 거부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정당을 조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신정치와 맥을 같이한다. _132

 

국제주의와 세계시민주의는 포퓰리즘의 적이다. 포퓰리즘은 자신이 내세우는 국민의 경계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고립주의와 폐쇄주의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의 특징은 왜 포퓰리즘이 (신포퓰리즘에서 나타나듯) 인종 중심의 민족주의 경향을 띠며, (20세기 미국의 포퓰리즘에서처럼) 대외 정책에서도 고립주의를 내세우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_165

 

정치적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포퓰리즘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지지자는 제도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포퓰리즘 운동은 딜레마에 빠지고 자체적 성장이 제약된다. ,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 성장을 저해하는 한계 요인을 안고 있다. 바로 포퓰리즘과 제도 간의 불편한 관계다. _170

 

포퓰리즘이 리더십을 중시하는 이유는 제도적 절차에 따른 복잡성을 감소시키고 포퓰리즘 리더십에 대한 지지자들의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이 두 가지 목적은 서로 구분되지만 동일한 결과로 이어지며 동일한 딜레마를 야기한다. 일반 국민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몇몇 뛰어난 개인에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포퓰리즘 리더십이 처한 딜레마다. 카리스마적이지 않은 포퓰리즘 리더십의 경우 권위주의적이거나 중앙집중적인 리더십 형태를 띤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제도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으므로 단순한 형태의 조직 구성을 선호하는데, 조직이 단순해지면 리더십을 견제하기가 어려워져 결국 조직을 이끄는 수장에게 더 큰 권력을 몰아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이 추구하는 리더십 형태는 장기적으로 유지되기가 매우 어려우며, 포퓰리즘 운동의 추진력이던 국민숭배와는 명백한 모순을 보인다. _176

 

제도에 대한 포퓰리즘의 양가감정은 왜 포퓰리즘이 완성된 형태의 정치운동이나 정치세력화로 나아가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포퓰리즘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제도에 대한 포퓰리즘의 양가감정은 왜 포퓰리즘이 스타일 또는 수사법으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포퓰리즘은 정치제도에 대해 회피 또는 본능적인 좌절감을 표출하는 편리한 방법이다. 물론 어떤 정치운동도 언젠가는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제도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시작점이다. _182

 

신포퓰리즘 정당은 무언가를 반대하며 등장한 정당이다. 현대 정치에 대해 신포퓰리즘 추종자는 대의정치가 사회적 소수자 집단을 과도하게 대표한다고 비판한다. 신포퓰리즘 정당은 국가가 소수자 집단의 조직적 이해 또는 자유주의적 엘리트의 합의를 위한 먹잇감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신포퓰리즘은 대의정치의 작동 방식에 대한 비판 및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_188

 

포퓰리즘은 대의정치가 얼마나 관용적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시험지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포퓰리즘 사례는 포퓰리즘이 국민(국민의 정의가 무엇이든)을 대변하며 선거에 참여해 정당을 만드는 방식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하는 방식(러시아의 나로드니키는 제외)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포퓰리즘이 자신의 정당성을 대의정치를 통해 구현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역설적이게도 포퓰리즘은 대의정치가 얼마나 관용도가 높은 정치체제인지를 증명한다. _193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포퓰리즘이 현대 정치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퓰리즘이 중대한 정치적 운동이나 정당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대의정치체제에서 잠재적인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포퓰리즘이 언제든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현재 대의정치에 대한 생생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_194

 

그러나 본래 권리란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소수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와 다수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에서는 권리를 탐탁찮게 여긴다. 포퓰리즘 추종자는 다수파가 궁지에 몰려 있으며 국가가 소수파의 권리를 심각할 만큼 부정의한 방식으로 지켜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의미의 권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_196

불평등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저자 강명세|바오 |2019.12.30

저자 : 강명세-고려대와 뉴욕의 사회과학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UCLA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UCLA에서 정치학 박사 취득 후 노동과 복지,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2019년 현재까지 민주주의 복지국가 그리고 재분배(삼인, 2014) 등 세 권의 저서와 민족과 민족주의(홈스봄, 창비, 1991) 외 여러 권의 번역서를 출판했으며, 촛불혁명의 희망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2017)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세종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다.

 

목차

감사의 글/4

서장 불평등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계급정치/8

1장 복지국가의 미시적 기반/27

2장 소득격차의 계급적 편향/57

3장 무엇이 재분배를 지배하며 어떤 제도가 완화하는가?/99

4장 민주주의는 저소득층 요구를 반영하는가?/133

5장 재분배와 투표의 계급편향성/165

6장 동아시아 선진민주주의 3-일본, 한국 및 대만의 재분배 선호 비교/195

7장 선진민주주의 정치지형의 변화/223

8장 변화하는 계급정치와 포퓰리즘의 도전/255

9장 왜 노동계급이 우익 포퓰리즘 정치를 지지하는가?-역설의 계급정치/287

10장 거대변화와 미시적 결정의 상호작용/329

참고문헌/340

 

출판사 서평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 위기

왜 민주주의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고 지속 또는 확대되는가. 민주주의는 다수파가 의사 결정을 주도하며, 시장은 경쟁이 지배한다. 시장의 승자는 소수이며 늘 다수의 패자가 생겨난다.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시대에는 중산층이 패자군으로 편입된다. 어느 나라에서나 복지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공급을 훨씬 넘어선다. 따라서 결국 중요한 것은 재분배정책이다.

 

2015~2017년 동안 1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소득격차가 너무 크다는 데 동의한다. 소득재분배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선진 복지국가인 독일에서는 76.9%가 소득격차에 대해 우려하지만, 미국에서는 46.9%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복지정책이 활발한 나라에서 소득양극화를 우려하는 반면, 미국처럼 불평등한 나라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유럽에서는 복지정책을 국가사회적인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지만 미국에서는 불평등을 개인적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지금까지처럼 한국사회에 우승열패의 신화가 작동하는 한 불평등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

 

불평등이 해소되지 못하는 이유-투표와 정치참여의 중요성

민주주의에서 시장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엘리트가 다수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엘리트는 정치자금과 미디어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자원을 기반으로 다수 대중에 비해 정치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나타내는 가장 본질적인 정치행위다. 투표참여에도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재분배정책을 희망하는 저소득층은 고소득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표참여율이 낮다. 한국의 경우, 저소득·저학력층은 재분배정책을 지지하는 진보정당보다는 그에 반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국 이들의 투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는 상반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고소득·고학력자가 저소득·저학력자에 비해 투표참여율이 높다면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은 누구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까? 세대차이도 마찬가지다. 투표에 적극적인 세대의 요구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수요층의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과 함께 투표를 통해 정치인에게 그 요구를 보여주어야 한다.

 

포퓰리즘의 성장과 특징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포퓰리즘이다. 트럼프의 당선과 집권의 포퓰리즘의 맨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포퓰리즘 현상은 불평등 시대에 드러난 민주주의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일국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자국의 이해에 기반을 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한국경제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한국인의 소득불안을 불러온다. 위기는 두 가지 차원에서 발생한다. 첫째, 포퓰리즘은 경제적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갈등을 통해 기성정치를 공격하며 진입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통합과 세계화로 인해 노동계급은 이민노동자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복지정책의 무임승차자로서 복지재정을 압박한다고 호소한다.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나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은 세계화로 인한 열패자가 갖는 경제적 상실감을 이용하여 자국우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전통적으로 진보정당을 지지해온 노동계급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재분배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사회정치적으로는 반이민과 반톨레랑스 정신을 지지한다. 둘째, 사회적 대전환에 따른 정당전략의 변화이다. 노동계급의 전통적 정당인 사회당이나 사민당 같은 진보정당은 후기산업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증가하는 사회문화 전문직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문화적 요구를 적극 수용해왔다. 그 반면에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노동계급의 경제적 선호는 상대적으로 외면당했다. 이처럼 기존의 진보정당이 계급 재배열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사이에 포퓰리즘 정당은 기회를 맞아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전 세계로 확산되는 포퓰리즘

포퓰리즘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지지세는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파시즘의 트라우마가 극우정당을 봉쇄해왔던 독일에서도 포퓰리즘 정당(대안정당)2017년 연방선거에서 12.6% 득표로 94석을 획득했다. 서구 민주주의 가운데 톨레랑스에 가장 공감해온 스웨덴에서도 2018년 총선에서 포퓰리즘 정당(스웨덴 민주당)19.8% 득표로 70석을 확보하여 제2당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극우포퓰리즘이 장기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노동계급이 겪는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노동계급을 위한 정책에 더 많은 자원을 배당해야 한다. 인구감소와 노동력 부족을 겪으며 또한 세계화 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노동력 수입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유사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책속으로

이 책은 두 가지 상호 긴밀히 연관된 주제, 즉 불평등의 정치와 극우 포퓰리즘의 계급정치를 논의했다. 첫째 주제는 왜 그토록 다수가 원함에도 불구하고 복지의 공급은 부족한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둘째 주제는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가 포퓰리즘을 낳아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든다는 점을 논의한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등장, 포퓰리즘 정당의 등장 등 최근 중대한 변화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과거 30년 동안 있었던 거시적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거시적 변화는 기술변화, 탈산업화, 세계화,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공공부문의 팽창, 그리고 교육기회의 확대 등이다. 서구에서는 이에 더해 이민문제가 저소득 일자리의 임금·고용과 결합하여 중대한 사회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기술변화가 유도한 부문 간 이동은 노동시장의 이중화를 낳고, 이는 다시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거시적 변화는 역설의 계급정치를 만들어낸다. 노동계급은 더 이상 자신들이 지지해왔던 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정반대의 포퓰리즘 정당을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새로운 헤게모니 구성을 위한 샹탈 무페의 제안

 

포퓰리즘의 세계화 왜 전 세계적으로 엘리트에 대한 공격이 확산되고 있는가

저자 존 주디스|역자 오공훈|메디치미디어 |2017.07.

원제 The Populist Explosion

 

저자 존 주디스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정치사회 분야 전문 저술가로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철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잡지 [소셜리스트 레볼루션]의 창간 에디터로 시작해 50여 년간 작가, 기고가,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아왔다. 최근에는 [뉴 리퍼블릭] 에디터, [내셔널 저널]의 전문 라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욕타임스 매거진][워싱턴 포스트] 등 수많은 유명 잡지에 칼럼을 기고해오고 있다.

 

최신작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포퓰리즘이 파시즘과 혼동되고 경시되는 풍조 속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한편, 수많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뉴욕타임스]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가장 잘 설명한 책으로, [이코노미스트]유럽과 미국의 포퓰리즘 현상에 관한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가이드로 평가했다. 한편, [블룸버그]‘2016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저서로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설(THE PARADOX OF AMERICAN DEMOCRACY), 창세기: 트루먼, 유대계 미국인, 아랍-이슬라엘 분쟁의 기원(GENESIS: TRUMAN, AMERICAN JEWS, AND THE ORIGIN OF THE ARAB-ISRAELI CONFLICT) 등이 있다.

 

목차

해제

서문 포퓰리즘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1장 미국 포퓰리즘의 논리: 인민당에서 조지 월리스까지

2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 페로, 뷰캐넌, 티 파티, 월스트리트 점령

3장 침묵하는 다수와 정치 혁명: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4장 유럽 포퓰리즘의 발흥

5장 좌익 포퓰리즘의 한계: 시리자와 포데모스

6장 북유럽 우익 포퓰리즘의 약진

결론 포퓰리즘의 과거와 미래

감사의 말

참고 도서

주석

 

출판사 서평

브렉시트, 유럽 극우정당, 미국의 트럼프와 샌더스까지 포퓰리스트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열기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동시다발 폭발로 이어지는 것처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경기 대침체와 함께 포퓰리즘 폭발을 마주하고 있다. 엘리트의 명분론과 계몽주의(또는 기득권의 합의)를 부숴버리겠다는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에 대중은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았을까? 한국 정치권 역시 연일 포퓰리즘 공방이 오가는 중에, ‘엘리트 혐오가 확산 중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사소해보이지만 주목할 만한 진실이 포함된 우려를 퍼뜨리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포퓰리스트들은 이러한 우려를 정당 정책으로 탈바꿈시켜, 결국 투표에서 승리를 거둔다. 일부 논평가는 아직도 포퓰리즘이 저항 운동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서구의 엘리트는 근시안적인 전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끼칠 포퓰리즘의 영향력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를 비롯해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영국독립당, 네덜란드,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미국과 유럽에서는 포퓰리스트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인기를 끌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좌우파로 전혀 다르지만, 둘 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뉴딜 정책이 남긴 어느 정도의 사회안전망)라는 기존 합의를 크게 흔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엘리트와 기득권층에 맞서서 국민을 옹호하는 좌파 포퓰리즘

보수주의나 파시즘과는 구별해야 할 우파 포퓰리즘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목격되는 포퓰리즘은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엘리트(최상류층)나 기득권층에 대항하도록 보통 사람들을 결집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할 수 있다.

 

좀 더 나아가 좌파 포퓰리즘의 경우, 국민과 엘리트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우파 포퓰리즘의 경우는 세 요소, 즉 국민과 엘리트라는 두 요소에 외집단(out group)이 더해진다. 또한 포퓰리즘은 국민과 엘리트라는 두 요소 간, 또는 우익 포퓰리즘의 경우 외집단이 포함된 세 요소 간의 갈등 관계를 정의한다.

 

한편, 좌파 포퓰리즘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나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다르다. 계급투쟁의 정치도 아니고, 반드시 자본주의 폐지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익 포퓰리즘도 보수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전복을 목표로 삼는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와도 다르다. 또한 우파 포퓰리즘의 경우, 일부는 파시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있지만 파시즘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파시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우파 포퓰리즘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의회를 해산하라고 협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표준적 세계관이 오작동 한다는

강력한 시그널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에는 나름 일리 있는 것도 있는 반면, ‘말도 안 되는불평도 있다. 아무튼 이들의 주장은 문제점이나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조기 경보 역할을 한다. 예컨대,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나 무상 대학 교육과 같은 샌더스의 주장은 당장의 현실성은 없어 보이지만, 대다수 국민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인종차별, 이민 배척, 외국인 혐오는 문제가 많고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몰려드는 최하층 이민자는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이처럼 포퓰리즘 또는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지배적인 정치 이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하다는 신호이자, 표준적인 세계관이 고장 났다는 신호의 역할을 한다.

 

역사적 사건과 각국의 다양한 현상을 함께 분석-

유럽은 경기 침체 여부에 따라 좌우파 포퓰리즘으로 갈려

 

미국의 좌파 포퓰리즘의 경우, 인민당에서 시작해 휴이 롱,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거쳐 최근에는 버니 샌더스로 이어진다. 우파 포퓰리즘의 경우, 1960년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지낸 조지 월리스로부터 시작해 로스 패로, 팻 뷰캐넌, 티 파티를 거쳐 도널드 트럼프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조지 월리스의 대선 운동으로 만들어진 이 우파 포퓰리즘은 공화당으로 터전을 옮겨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정통파에 도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유럽은 지역별 양상이 다르다. 경기 침체로 말미암아 발전이 뒤처진 남유럽 국가들, 예컨대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은 국가에서는 좌파 성향의 포퓰리스트 정당이 번성해오고 있다. 이에 비해, 사실상 경기 대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번영을 이룬 서·북유럽의 국가들(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는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번성해오고 있다.

 

책속으로

이 책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어떤 정치 상황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세를 얻는지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지배적인 정치 규범이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나 걱정거리와 불일치하는 시간과 장소, 바로 그것이 포퓰리스트들의 활동 공간이다. 포퓰리스트들은 방치된 관심사를 절묘하게 증폭시켜 대중의 기대를 자신들한테 집중시킨다. 또한 비타협적 엘리트와의 전면적인 투쟁을 유도한다. --- p.9(해제)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관심사에 집중해왔던 포퓰리스트 정당과 운동이 대침체 시기 이후 갑자기 급증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다룰 주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런 종류의 포퓰리스트 정치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이 포퓰리스트 정치가 트럼프와 샌더스는 물론,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스페인의 포데모스를 모두 아우르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 p.22(서문)

 

카진은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포퓰리즘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 사람들이란 보통의 사람들을 계급으로 협소하게 구분하지 않고 고귀한 집합체로 여긴다. 또한 자신들과 대립하는 엘리트(최상류층)를 자기 잇속만 차리며, 비민주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그 엘리트에 대항하도록 결집시키고자 한다.” --- p.22(서문)

 

포퓰리즘은 미국인이 창조해내 나중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으로 전파된 산물이다. 미국 포퓰리즘의 가닥은 미국독립혁명과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미합중국 제2 은행 폐지를 두고 벌인 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실제로는 1890년대 인민당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인민당은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는 포퓰리즘 운동의 선례를 만들었다. 유럽과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이런 운동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 p.32

 

미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뉴딜 자유주의에 대한 수정을 의미하지만, 뉴딜 자유주의를 도매금으로 폐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뉴딜 정책이 마련한 안전망을 옹호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시장의 원칙에 우선권을 두고 이를 지지했다. 반면, 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는 부분적으로 고전적인 자유 시장 자유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우세한 시대에 속해 있다. 하지만 이 신자유주의 세계관은 1990년대 초반의 로스 페로와 팻 뷰캐넌에서 2010년대 티 파티와 월스트리트 점령에 이르는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운동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 p.62~63

 

트럼프와 샌더스는 각각 우파와 좌파의 위치에서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겨냥했다. 당시 상당수 유권자는 그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해 내용과 정체를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적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대침체의 영향으로 특히 더 심해졌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로스 페로와 팻 뷰캐넌이 출발했던 지점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은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합의가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 p.97

 

대침체의 영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많은 망명 신청자들이 무리 지어 몰려든 북유럽 지역은, 우익 포퓰리즘이 우세했다. 하지만 실업률이 대공황 수준에 도달한 남유럽의 경우, 새로운 좌익 포퓰리즘이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부상했다. 유로존 가입으로 크게 절뚝거리게 된 주요한 중도 좌?우파 정당이 자국 경제를 소생시키는 데 실패하자, 유권자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한 포퓰리스트 정당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 p.165~166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학자 얀 질론카(Jan Zielonka)를 포함한 일부 유럽 정책 전문가는, 유럽연합이 해체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근거를 따지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유럽의 좌?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이 탄생한 계기가 됐던 사회?경제적 압박은 앞으로 더욱더 증가할 것이고, 결국 영국 외에도 다른 몇몇 국가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는 시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버락 오바마가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라고 일컬었던 유럽연합은, 과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연맹 결성을 시도하다가 맞이했던 가혹한 운명을 되풀이해 겪을 것이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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