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지음, 진석용 옮김/교양인원
저자 :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A. P. MARTINICH) 미국 텍사스대학 오스틴 캠퍼스 철학과 교수. 1946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윈저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언어철학, 종교철학, 정치철학이며, 언어철학과 홉스 철학에서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작인 《홉스(HOBBES: A BIOGRAPHY)》는 출간 후 텍사스대학에서 주관하는 ROBERT W. HAMILTON BOOK AWARD에서 상을 받으며 학문적 우수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저서로 《THE TWO GODS OF LEVIATHAN》, 《A HOBBES DICTIONARY》, 《THOMAS HOBBES: PERSPECTIVES ON BRITISH HISTORY》, 《ANALYTIC PHILOSOPHY: AN ANTHOLOGY》 등이 있다.
목차
· 머리말
· 날짜 표기에 관하여
1장 공포의 쌍둥이 1588~1608년
“어머니는 나와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다.”
2장 캐번디시가의 가정교사 1608~1620년
“윌리엄은 나의 고용주였지만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3장 정치적 인문주의자 1621~1629년
“인간은 행운보다는 역경을 보면서
더 많은 교훈을 얻는다.”
4장 신을 믿는 유물론자 1629~1640년
“이 우주에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다.”
5장 절대 왕정의 옹호자 1640년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그래서 지옥이다.”
6장 논쟁하는 망명자 1641~1644년
“데카르트를 읽어보라.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7장 신과 악의 문제 1645~1651년
“신은 악의 원인이다.
그러나 신의 행위는 정당하다.”
8장 『리바이어던』의 탄생 1651~1653년
“리바이어던은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다.”
9장 논쟁의 한복판에서 1652~1659년
“정치철학의 혜택은
내란과 학살을 방지하는 것이다.”
10장 토머스, 홉스를 변호하다 1660~1669년
“그는 부끄러워할 것이 전혀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11장 노년의 철학자 1670~1679년
“내 곁에 서 있는 죽음이 말한다. 두려워 말라.”
· 참고 문헌
· 주석
· 토머스 홉스 연보
· 옮긴이 후기
·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찬사와 비난, 오해와 경탄의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린 문제적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논쟁적인 삶을 살았다. ‘홉스’라는 이름에는 지극한 찬사와 함께 격렬한 비판이 따라붙었다.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찾은 콜럼버스, 위대한 철학자, 초인적 지성”과 “맘스베리의 괴물, 형편없는 교리의 전도사, 방탕한 무신론자”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았다. 홉스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자연 상태를 만인의 자발적인 사회 계약으로 극복한다는 이념을 통해 근대 인민 주권과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 동시에 인민 전체의 동의에 기반해 절대주의 국가, 곧 리바이어던을 세운다는 기획을 제시함으로써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 같은 근대 전체주의 체제의 원형을 제공했다
미국 텍사스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홉스 철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저자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는 이 책에서 홉스의 일생을 유례없이 완벽하게 되살려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출간 자료와 미출간 자료들을 동원하여 홉스 시대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그려내고, 홉스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에 명쾌하게 답한다. 대표작인 《리바이어던》을 포함해 《법의 원리》, 《시민론》, 《물체론》, 《인간론》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들에 담긴 사상도 깊이 있게 다룬다. 나아가 정치철학뿐 아니라 과학적 탐구, 수학·기하학 논증, 언어철학까지 드넓은 지적 관심과 학문 세계를 상세히 살핀다.
근대인의 바이블,《리바이어던》
홉스는 존 로크, 장 자크 루소와 함께 사회 계약론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정치철학자이다. 대표작 《리바이어던》(1651년)은 사회 계약론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근대 국민 국가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자연, 인간, 정치, 종교에 관해 독창적인 이론을 펼친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정치철학을 완결하는 작품이다.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살았던 17세기의 산물이지만, ‘근대인의 경전’이라 불리며 오늘날에도 수없이 인용되고 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비참하다는 데 있다. 자연 상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며,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절대 권력을 지닌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절대적 주권자로서 왕의 권리를 주장한 사람은 홉스가 최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존에는 왕의 절대적 권한이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향식’ 관점이 지배적이었다면, 홉스는 인민 주권의 양도와 승인을 통해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적인 ‘상향식’ 관점을 취했다. 이것이 홉스가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배척당한 이유였다.
개인의 동의가 정치적 복종의 ‘유일한 근거’이며, 정부가 합법성을 지니려면 주권자가 인민 개인을 보호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은 개인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합리적 사고와 판단을 존중하는 근대적 사고의 표본을 드러낸다. 《리바이어던》은 홉스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혹은 당대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근대인의 정신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근대 국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개인의 승인에 기반한 국가의 탄생을 예견했던 토머스 홉스. 그가 남긴 역작 《리바이어던》을 ‘근대인의 바이블’이라 부르는 이유다.
“홉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준점이 될 전기” _ 〈Kirkus Reviews〉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은 저자 마티니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Hobbes: A Biography》를 완역한 책이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홉스 관련 저서는 《리바이어던》의 번역서와 해설서가 대부분이었다.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본격적인 홉스 전기이다. 《리바이어던》(나남출판, 2008년)을 번역한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진석용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는 홉스가 남긴 두 편의 자서전과 홉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존 오브리(John Aubrey)가 쓴 최초의 홉스 전기(1681년 출간)를 바탕 삼아 홉스에 관해 잘못 알려져 있던 사실을 바로잡고, 그동안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 있던 청년 홉스의 삶을 꼼꼼하게 추적해 나간다. 홉스가 젊은 시절에 쓴 수필부터 《리바이어던》을 거쳐 노년에 완성한 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작에 해박한 저자는 홉스의 사상이 절대 왕정에서 의회 정치로 급변하던 영국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발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보여준다.
홉스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그런 통념을 뒤집는다. 지지자만큼 적대자도 많았고 숱한 비판을 받으며 수년간 망명 생활을 했지만, 홉스가 늘 고독한 사상가였던 것은 아니다. 홉스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인으로 꼽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찰스 2세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논리학·물리학·기하학·신학·문학·번역 등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분야에서 활약하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절대 왕정과 의회 정치의 대결, 영국 내전, 청교도 혁명과 공화국 수립, 찰스 1세 처형,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학 논쟁까지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근대적 정신이 태동하던 17세기 유럽에서 홉스는 자신의 사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 책은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모순적인 정치철학자 홉스를 소심하고 병약한, 때로는 오만하고 건방진, 그러나 가슴은 따뜻하고 이성은 냉철했던 매력적인 인간으로 되살려낸다.
주요 내용
“어머니는 나와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다.”
홉스는 1588년 4월 5일 영국 윌트셔의 맘스베리 외곽에 위치한 웨스트포트의 중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홉스의 어머니는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으로 출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 산통을 시작했고, 홉스를 임신한 지 7개월 만에 조산했다. 홉스는 어머니가 자신과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홉스의 삶에는 공포가 운명처럼 뒤따랐다. 출생부터 드리워 있던 공포는 훗날 홉스의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러한 출생에서 홉스가 입은 정신적 상처는 일생 동안 아물지 않았다. “조국의 원수에 대한 증오”는 바로 그 출생 환경 때문이라고 홉스는 말했다. 84년 후에 쓴 운문 자서전에 홉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함대가 들이닥쳐 곧 조국이 종말의 날을 맞을 거라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있었다.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쌍둥이를, 즉 나와 공포를 함께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 1장 공포의 쌍둥이·20쪽
홉스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 부목사였으나 교회당 앞에서 다른 목사와 난투를 벌이고 도망친 후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 홉스는 다행히도 장갑 장사로 돈을 많이 번 삼촌 덕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1602년(혹은 1603년) 옥스퍼드대학 모들린 홀에 입학한다.
“나는 윌리엄을 20년간 충실히 모셨다. 그는 나의 고용주였지만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쾌활한 시절이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가난한 시골 청년 홉스에게 모들린 홀의 총장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를 명문가인 캐번디시가에 가정교사로 소개한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홉스와 캐번디시가의 인연은 몇 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홉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홉스는 캐번디시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변변치 못한 출신으로서는 감히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특히 뉴캐슬 공작과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영국 정치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의 모임을 후원하기도 했다. 뉴캐슬 공작 덕분에 홉스는 17세기 정치계와 과학계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1614년경에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2대 데번셔 백작 윌리엄과 첫 번째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홉스는 고대 역사가에 큰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한 일이었다. 홉스가 투키디데스에게 호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군주정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16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영국은 절대 왕권을 확립하려는 찰스 1세와 입헌 군주제를 관철하려 했던 의회의 불화 때문에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홉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영국 국민이 대중 수사학의 위험을 직시하길 원했다. 즉,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요란한 말로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과거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찰스 1세의 편을 들어 왕의 주장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홉스가 투키디데스에게 호감을 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군주정을 선호했다는 점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통치 기간에 아테네는 외형은 민주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주정이었다. …… 홉스는 투키디데스의 역사가 당대에 주는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왕에 대적하는 자들이 수사를 써서 나라의 안정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 3장 정치적 인문주의자·141~143쪽
“물질 세계는 우주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왜곡되기는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영역본이 출판되기 1년 전인 1628년, 홉스의 고용주이자 20년 지기였던 2대 데번셔 백작 윌리엄이 세상을 떠난다. 윌리엄이 죽자 홉스는 캐번디시가를 잠시 떠나 당시 왕당파의 일원이었던 갑부 거버스 클리프턴에게 고용되어 그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된다. 1630년경에 그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아들 클리프턴과 함께 두 번째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오르는데, 이 여행 중에 우연히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읽고 기하학의 ‘연역 체계’에 감탄했다고 한다. 홉스는 기하학이 공리, 정리, 증명을 통해 하나의 진리로 다른 진리를 낳는 과정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홉스는 기하학의 연역적 원리를 자신의 정치철학의 근본 원리로 삼아 사유를 전개한다.
홉스의 철학에서 기하학은 매우 중요하다. 이 중요성을 잘 모르는 학자들도 있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기하학의 증명 형태를 따라야 한다. 정의(定義)의 형태로 공리(公理)를 제시한 다음, 이로부터 필연적인 추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과학이 확실하고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된다. …… 홉스가 감탄한 것은 기하학의 공리와 정리와 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을 의심의 여지없이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기하학 그 자체가 아니라 기하학의 방법이 그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 4장 신을 믿는 유물론자·154~155쪽
1630년 홉스는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캐번디시가로 돌아갔다. 그는 훗날 3대 데번셔 백작이 될 윌리엄의 아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1634년 제자와 함께 다시 세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난다. 홉스는 이 여행길에 당시 종교 재판소에 의해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 그의 사유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갈릴레이의 물리 법칙은 이후 홉스의 20년 과학 탐구의 결산인 《물체론》(1655년) 등에서 수용된다. 또한 홉스는 여행 중에 마랭 메르센을 만나 당대 유럽의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누리는데, 당시 메르센의 모임에서는 유물론자로 유명했던 피에르 가상디를 비롯해 홉스와 여러 차례 대립한 르네 데카르트 등이 활동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프랑스 학자들과 홉스의 교류는 계속되었으며 홉스의 지적 자양분이 되었다.
홉스는 세 번째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오십 세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홉스는 두 모임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교류를 이어 갔다. 하나는 뉴캐슬 공작이 주도한 과학자 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레이트 튜’라는 지식인 모임이었다. 전자의 주요 관심사는 과학, 특히 광학이었고 후자의 주요 관심사는 종교였다. 홉스는 이미 1630년대에 광학 분야에서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철학자나 종교철학자로서 명성은 그보다 뒤에 얻게 된다. 1640년에 홉스가 저술한 《법의 원리, 자연법과 정치법》은 정치 이론가로서 홉스를 널리 알린 책이며, 군주정에 대한 홉스의 강한 선호와 신념을 담고 있어 의회주의자들의 비난을 사게 된 책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는 10여 년 뒤 출간된 《리바이어던》의 주요 내용이 거의 다 들어 있었다.
“제가 갑자기 떠나게 된 이유는 왕의 특권을 늘리려던 저의 발언이 의회의 조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640년 가을 장기의회가 소집되자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되었다. 군주정을 옹호하는 인사들이 의회로부터 공격받고 고발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고 홉스는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으며, 영국 내전이 끝난 1652년이 돼서야 돌아온다. 홉스는 고국의 정세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과학적 탐구에 쏟았다. 1630년대 후반에 계획한 《철학의 원리》 3부작 《물체론》, 《인간론》, 《시민론》을 집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탐구에 몰입했고, 1642년 《시민론》을 먼저 완성했다. 또한 홉스는 동시에 당대 여러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열심히 교류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르네 데카르트, 존 브럼홀과의 논쟁이 인상적이다.
홉스와 데카르트는 둘 다 수학의 명증성이 모든 학문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하고 기계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명성을 추구하고 자기 도취적인 성격도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이 각각 다른 실체라고 여기는 유심론적 이원론자였던 반면, 홉스는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 인정한 유물론적 일원론자였다. 동시에 홉스는 신도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유물론적 유신론자였다. 데카르트는 홉스가 정신과 물질이 같은 종류라고 주장하는 것에 경악했지만, 홉스는 데카르트가 정신이 비물질적인 실체라고 말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확실한 전제를 세우고 싶었지만 홉스는 ‘약정적 정의’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둘은 서로에게 독설을 퍼부었고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홉스는 데카르트 같은 지식인이 철학에 무지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홉스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는 데카르트가 “홉스는 논리적 증명이 뭔지 모른다.”고 언급한 데 대해 이렇게 응답했다. “이것은 반론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홉스의 태도는 온건했다. 홉스는 메르센에게 데카르트가 자신의 수학책을 좀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므로, 내가 쓴 책을 좀 더 자세히 읽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6장 논쟁하는 망명자·276쪽
1645년 홉스와 존 브럼홀은 파리에서 만났고, ‘자유 의지’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국교회 주교였던 브럼홀은 필연성이 부재하는 자유를 긍정했으나, 홉스는 자유와 필연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홉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실제로 그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결과는 잇따른 선행 사건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브럼홀은 홉스가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며, 행동을 결정하는 선행 사건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자유 의지에 관한 논쟁은 ‘죄’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된다. 죄의 결과가 자유로운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죄를 범한 행위자를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브럼홀과 홉스는 이 문제를 두고도 대립한다. 브럼홀은 죄의 원인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홉스는 죄의 근본 원인이 신이지만 죄의 당사자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신은 공의와 불의의 개념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단언했다.
“리바이어던, 즉 주권자는 영원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다.”
1651년 5월 무렵 홉스는 망명지에서 그의 대작 《리바이어던》을 출간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전체에 걸쳐 로마가톨릭이 진정한 종교와 안정된 정부를 위협하는 해악이라 주장했기 때문에, 이 책이 출간된 후에는 가톨릭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홉스는 프랑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에게 분노를 사고 있었다. 프랑스도 이제 그에게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1652년 홉스는 10여 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홉스는 19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이 권력을 잡은 영국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홉스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리바이어던’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공포가 만연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인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국가의 권력자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맺고, 권력자는 계약에 의해 승인된 절대 권력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바이어던》의 출간은 왕당파와 의회파, 국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에게 파장을 일으켰다. 의회파는 절대 왕정을 옹호하는 홉스의 주장을 곱게 볼 리 없었고, 왕당파는 주권자가 인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방식과 인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을 경우 교체될 수 있다는 내용이 신성한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국교회는 홉스에게 이단과 무신론 혐의를 씌웠고, 로마가톨릭은 1654년 홉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리바이어던》은 ‘근대인의 경전’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자신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혹은 당대의 그 어떤 저작보다도 근대인의 정신을 강력하게, 웅변적으로, 포괄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도덕학, 정치학, 비판 신학이 들어 있다. - 8장 《리바이어던》의 탄생·373~374쪽
“나는 내 저작들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다. 정의를 가르쳤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1650년대 홉스는 정치, 종교, 형이상학, 교육, 기하학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주요한 책들을 여러 권 출간했다. 특히 《철학의 원리》 3부작에 해당하는 《물체론》과 《인간론》을 각각 1655년과 1658년에 발표한다. 《인간론》의 주제는 시학, 웅변술, 윤리학, 논리학 등으로 기존의 홉스의 주장을 재론한 것에 불과했지만, 《물체론》은 홉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종합하는 저술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비타협적인 유물론적·기계론적·결정론적인 관점을 옹호했다. 당시 홉스의 책들은 《리바이어던》과 더불어 옥스퍼드대학을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홉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최초의 반론은 로마가톨릭에서 나왔지만, 대부분의 비판은 동지였던 프로테스탄트에게서 나왔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민주적 전제들은 급진적이었고, 그의 절대주의적 결론은 반동적이었다. 홉스가 정의한 여러 개념이 모호한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의 가정적 정의를 실제 사실로 오해하거나 유물론적인 종교적 견해를 무신론적으로 해석하는 적들도 많았다.
특히 무신론자라는 오해는 언제든 종교적 처형을 받을 수 있는 위협적인 혐의였다. 그러나 홉스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노년의 나이였던 1660년대까지 활발히 자신의 사유를 책으로 저술하고 비판자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1670년대에 들어서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를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친분이 있는 학자들과 정치와 종교에 관한 서신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는 지난 30년간 주장해 왔던 물리학 이론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책 《자연철학 10화》(1678년)을 출간했다.
홉스는 자신의 마지막 10년을 더비셔에서 한가롭게 보냈다. 1679년 10월 중순 홉스는 극심한 소변 장애를 앓았고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마르크스의 귀환: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저자 : 제이슨 바커 197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03년 웨일스의 카디프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을 영미권에 활발하게 소개했다. 2002년 발표한 《알랭 바디우 : 비판적 입문》으로 바디우에게 ‘내 작업의 정치적 궤적을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미권의 바디우 연구에 물꼬를 텄다. 이후 런던대학교, 미들섹스대학교,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재장전〉을 집필, 감독, 공동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니나 파워, 알베르토 토스카노, 자크 랑시에르, 존 그레이,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이 출연하여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부활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룬다. 2011년 9월에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2018년 《마르크스의 귀환》을 출간했고, 지젝은 이 책에 대해 ‘마르크스의 혁명 사상 핵심에 가닿은 걸출한 소설’로 평했다. 최근에는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 북리뷰》 《다이어크리틱스》 등의 신문과 잡지, 학술지에 글과 서평, 비평 등을 기고하며,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 철학, 드라마를 가르치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을 내며
책머리에
저자의 말
늪지의 생물들
무한에서 0까지
미래로의 귀환
참고문헌
카드로 보는 책 출처: 경희대출판문화원
출판사 서평
위대한 통찰과 비루한 삶, 《자본》과 인간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귀환》에 나오는 마르크스는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위대한 사상가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강박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주변 사람이 엉뚱하고 미심쩍게 여기는 것에 몰두하며 세상을 부유한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을 희생해버리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쓰면서 자신의 삶과 모든 관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소설에 나온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은 영화 〈기생충〉의 김씨 가족과도 비슷하다. 나날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투쟁, 고통스러운 사생활, 끊이지 않는 돈 걱정, 그리고 ‘품위’를 향한 욕망이 그렇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방세가 밀리고, 가진 것을 저당 잡히고, 자식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에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직장을 구하고 정착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가 몰두한 단 한 가지는 바로 노동자와 자신의 가족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줄 《자본》의 집필이었다.
비참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법
19세기, 억압과 악취로 찌든 런던에서 부르주아사회와 자본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영향력을 증식하고 있었다. 자본은 모든 데 스며들고, 모든 곳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이를 침울하게 바라보던 마르크스의 고뇌는 21세기에 되살아난다. 《자본》을 쓰도록 추동한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참혹한 삶은 오늘날 재현되고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피자 배달을 ‘업’으로 삼고, 노인들은 폐지를 줍도록 거리로 내몰린다. 그 어느 시대보다 양극화 현상이 세계적 차원에서 극심해지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거대 공장이 뿜어내는 유황 구름과 숨조차 쉴 수 없는 탁한 공기, 부유물로 뒤덮인 항구로 대변되는 환경 문제 역시 현재에 오롯이 되살아난다. 지구 가열로 인한 기후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이를 입증한다.
마르크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은 늘 있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광적인 몽상가 무리가 언제나 그와 함께했다. 현실, 또는 일상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끝없이 ‘혁명’을 추구한 마르크스. 저자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딜레마를 소설이라는 장르로 그려내며, 독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꿈꿀 수 있는가?’ 《마르크스의 귀환》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 다시 소환되는 혁명정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책 내용
저자의 말_《마르크스의 귀환》은 역사소설입니다. 카를 마르크스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고 현실에서 주고받은 서신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꽤 등장합니다. 특히 3부 ‘미래로의 귀환’에서는 시간 흐름을 굉장히 압축적으로 그렸습니다. …개연성이 약한 사건에 관해서는, 독자분들께서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서 자유롭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르크스의 전기를 의도하지 않았고, 그 점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_[014쪽]
늪지의 생물들_춥고, 비 내리고, 스산한 날이었죠. 남편이 숙소를 알아보러 다녔지만, 아이가 넷이라고 하는 순간 다들 난색을 드러냈답니다. 마침내 한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방값을 치르고도 가진 침대를 전부 급히 처분해야 했어요. 압류 소문에 놀란 약국, 빵집, 정육점, 우유 가게에서 외상값 청구서를 들고 쳐들어왔거든요. …부인께 저의 진심 어린 애정의 인사를 전해주세요. 당신의 어린 천사들에게도, 가슴에 젖먹이를 안고 많은 눈물을 떨군 어미 한 명을 대신해 입맞춤을 전해주세요._[094~096쪽]
늪지의 생물들_“이보시오!” 문을 벌컥 열어젖힌 마르크스가 홀로 있던 빵모자에게 말했다. “얼마 안 가 철로가 끊길 거요! 서둘러요!” 놀랍게도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겨우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인데요.” 마르크스는 그 태만한 인간을, 다음으로는 창밖으로 닥쳐오는 파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_[156쪽]
늪지의 생물들_“…저는 오직 투쟁만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일 겁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변화는 일어날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투쟁은 그저 여러분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당신 노동자들이 그리고 오직 당신들만이 마침내 자기 노동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겁니다.”_[213쪽]
무한에서 0까지_단순히 원고를 끝내기만 하는 건 더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가 처한 곤경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사탄의 배꼽, 다른 말로 하자면 중력 없는 중심이었다. 그의 책은 지하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제시해야 했다. 동맹의 파열을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방편으로. 그의 책은 그때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것, 즉 부르주아 정치경제 체제를 대상으로 급진적인 비판을 개진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경제, 즉 프롤레타리아 경제와 그것을 운영할 능력을 갖춘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준비해야 했다._[332~333쪽]
무한에서 0까지_예니도 지옥 같은 그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했다. 그렇지만 예니는 나서지 않았다. 그 괴물에 맞서거나 헬레네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예니는 알고 있었다. 대안은 없다는 걸. 그 모든 고통과 비탄에도, 그 아픔을 연장해서라도,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_[332~333쪽]
무한에서 0까지_“아빠” 에드거가 애틋하게 불렀다. 아이는 신열이 있었고 여전히 침대 시트처럼 창백했다. 마르크스는 아들을 안았지만, 몸이 흠뻑 젖어있어서 곧 도로 내려놓았다. 예니와 딸들은 잠들어있었다. 그는 그들 곁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덜덜 떨면서 헐떡이고 김을 내뿜었다. 너무나 추워 아무것도-공포도, 고통도, 감정도-느낄 수가 없었다._[344쪽]
미래로의 귀환_세계는 변화에 준비가 됐을까? 상관없었다. 그건 이미 거기 있었다. 그냥 전보다 더 많이. 골분쇄 공장은 여전히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고, 더 많은 보트가 웨스트민스터 다리 부근의 좁은 구역을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더 많은 공장이 주황색 그을음을 대포처럼 쏘아 올렸고ㅡ그는 갑작스러운 포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ㅡ더 많은 원재료가 완제품으로 제조되었다. 기본적으로, 전보다 더 많이._[420쪽]
미래로의 귀환_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그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이 하고 있던 말과도 배치되었지만, 실은 자신이 그 이야기를 이미 천 번도 넘게 마음속으로 연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르시겠어요?” 마르크스가 소리쳤다.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노동자들을 위해 썼어요. 혁명을 위해서요!”_[454쪽]
약자의 철학’ 펼친 두 사상가들의 지긋지긋한 고난과 성취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의 1999년작 ‘홉스’…90여년 발자취와 논쟁 수록
‘인간 마르크스’ 고뇌와 역사적 맥락 담은 제이슨 바커 역사소설도 발간
근대 서구 정치사상사의 고전 <리바이어던>을 쓴 토머스 홉스(1588~1679)와 <자본>을 쓴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고난 가득한 생애와 성취를 다룬 책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두권 모두 얇지 않은 두께에 내로라하는 철학 거장들의 삶을 상세히 다루고 있지만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희로애락이 교차하며 흥미롭게 읽히는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 화가 아브라함 보스가 그린 <리바이어던> 초판(1651) 표지 삽화. 리바이어던의 몸은 수많은 개인으로 이뤄졌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은 미국의 홉스 철학 권위자인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가 1999년 쓴 저작이다. 물리학, 기하학, 종교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하던 근대 초기 시대상을 11장으로 나누어 한 사상가의 파란만장한 90여년을 조명한다. 홉스가 태어난 1588년은 “액운이 든 해”가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점쳐졌으니, “조국이 종말의 날을 맞을 거라는 소문” 한가운데서 그의 어머니는 “공포와 함께” 아들을 잉태했다. 삼 남매 중 둘째로 일곱달 만에 태어난 홉스는 배움도, 덕도 모자란 목사 아버지에게 침례를 받았다. 툭하면 화를 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자취를 감춰 버리고, 조숙한 학생으로 자란 홉스는 14살 때 옥스퍼드에 진학했다. 그는 나름의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을 좋아해 어려서부터 지적 독립심과 자부심이 컸다. 훗날 르네 데카르트 등과 치열하게 논쟁한 씨앗이 이때 뿌려진 셈이다. 1608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그는 이후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캐번디시가와 인연을 맺었다. 정치인 윌리엄 캐번디시는 홉스의 제자 겸 상전이자 친구였고 둘의 인연은 20년 동안 이어졌다.
초상화가 존 마이클 라이트(1617~1694)가 그린 토머스 홉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교와 구교 간의 30년 전쟁 속 혼란기에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그는 자신의 정치이론을 다져갔다. 40대 초반의 나이로 기하학을 만나 근대 과학적 사고에 눈뜬 홉스는 1634년 2년간 여행을 떠나 프랑스에서 르네 데카르트를,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을 만났으며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훗날 쓰게 될 저작들의 힌트를 얻었다. 1640년 정치적 변화 속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해 11년간 돌아오지 못한다.
대표작 <리바이어던>(1651)을 출간한 때 그의 나이는 63살이었다. ‘리바이어던’은 <성경>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 괴물을 상징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상태의 비참함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보여주려 했다. 근대 국가의 원리를 처음으로 정립한 이 책은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도덕학, 정치학, 비판 신학을 웅변적으로 담은 홉스 정치철학의 정수다. 절대 주권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공적 구조물’인 시민 국가가 (예수 재림 전까지) 지상의 유일한 구세주이며, 상향식 인민 주권의 양도를 통해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했기에 홉스는 왕당파와 의회파, 국교회와 가톨릭 모두의 미움을 샀다. “히드라, 극악한 리바이어던, 거대한 용, 무시무시한 괴물, 영국의 야수, 형편없는 교리 전파자, 실성한 지혜 유포자… 사기꾼.”(국교회 신자 찰스 로보섬, 1673) 이처럼 홉스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비난받았지만 지은이는 홉스가 “약자의 철학”을 펼쳤다고 강조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에 빠져드는 무법천지를 피하는 방법으로 그는 근대 국가의 정치철학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전쟁의 공포와 쌍생아로 잉태되어 성인으로 자란 뒤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망명길에 올랐던 홉스, 왕당파에게서 살해 협박을 받고 한편으로는 무신론자라는 비난 속에 처형의 두려움에 떨며 살아간 그가 공포에서 벗어나는 정치체제를 꿈꾼 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는 점을 지은이는 밝힌다.
카를 마르크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마르크스의 귀환>은 영국 런던 출신의 철학자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작가이자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 철학, 드라마를 가르치고 있는 제이슨 바커 교수가 경쾌하게 써내려간 카를 마르크스의 일대기 소설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은이는 카를 마르크스의 일생을 “독일판 ‘기생충’”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 부부가 생존을 위해 벌인 매일의 투쟁, 나름의 전략과 전술, 끝없는 돈 걱정과 여러모로 고통스런 일상생활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속 가족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다.
외국의 평자들로부터 다소 불경스럽다는 묘한 찬사를 받았다는 이 책은, 역시나 거침없으면서 발랄하며 유쾌한 전개가 때론 무람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책 앞머리부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나 정치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마르크스가 얼마나 온건해 보이는지 흥미롭다”며 한국 사회 비평까지 더한 점을 보면, 서구 백인 남성 지식인의 시각이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할 뻔하다가도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필치와 섬세한 역사적 재현에 어느새 고개를 수굿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 탄생의 역사, 혁명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간 마르크스’의 땀과 눈물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지은이는 뛰어난 지적 상상력과 학식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스피노자, 루이 알튀세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군데군데 존재감을 과시하며 당대 유럽의 혁명적 문화와 지적 교류를 친근하고 생생하게 보여주어 뜨거운 역사적 현장 속으로 독자를 강하게 밀어 넣는 흡인력도 강하다. 덕분에 20세기 마르크스의 고뇌와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문제가 곧장 연결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미적분학을 동원해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모습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혁명의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는 장면들은 특히나 인상적.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은 뒤 아비의 유령을 만나 사투하듯 논쟁을 벌이고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노동자들을 위해 썼어요, 혁명을 위해서요!” 외치며 유산을 끝끝내 거부하는 모습에서 혁명적 사유를 멈추지 않은 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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