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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타락한 저항

by 이성근 2019. 3. 30.

 

타락한 저항-지배하는 피해자,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이라영 지음/교유서가 2019.04

저자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모든 종류의 예술을 사랑한다. 미술과 예술경영을 공부한 후 문화기획과 문화교육 분야에서 일했다. 개별 작품보다 작품을 둘러싼 사회구조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예술과 정치 관련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여자 사람, 사람(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가 있다.

 

목차

들어가며: 진지충의 탄생

1장 블랙리스트와 저항

2[나꼼수]와 무학의 통찰

3장 메갈리아: 침묵당하기에서 교란시키기로

나오며: 생각하는 인간에 대하여

 

출판사 서평

1. 반지성주의의 풍토

올해 초, 한 코미디언이 제작한 동영상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PC’, 정치적 올바름놀리는동영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PC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간 이 영상에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남자친구인 백인남성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상황이 그려지는데, ‘PC으로 그려지는 그 부모는 딸의 남자친구가 백인이라는 것에 대해 소수민족이나 흑인남자친구에는 관심이 없느냐고 딸에게 묻고, 딸의 남자친구가 쓴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서는 왜 책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흑인이 한 명도 없느냐며 비판한다. 맥락에 맞지 않게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부모를 황당하게 그리며 ‘PC’, ‘진지충깐다’. 최근에는 쓸모는 없고 쓸데없이 진지한인문학 전공자들을 멸시하는 문과충이라는 말까지 유통되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것을 배우는 학문은 이제 이라는 이름이 붙어 놀림감이 된다.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다. ‘진지충을 조금 순화해 진지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표현으로 선비질’, 더 상스럽게 말하면 씹선비라고 한다.” 엘리트나 식자층의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는 소수자와 약자를 볼모로 삼은 창작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비판마저 엄숙주의자, 도덕주의자, 나아가 위선자 등으로 낙인찍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소수자성에 대한 민감함과 예민함으로 사회를 감지하며 우리 사회에 불편한 목소리를 발화해온 저자 이라영은 타락한 저항을 통해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풍토에서 자라난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다만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할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들을 보자.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 ‘‘종북귀족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 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참여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한다.” _196

 

2.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탄생과 진화

지성이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에 비추면 지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력이며 결국 누가 권력을 갖고 발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사건과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 이명박 정권하에서 탄생해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 집권까지 이어진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라는 저항의 방식을 둘러싼 현상)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핀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문화예술계를 뒤흔든 박근혜 정권하에서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문화예술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 정권의 제도적 검열과 이 검열에 맞서 혐오 발화를 동반한 저항이 짝패를 이루어온 과정을 살피고, ‘나꼼수 현상을 통해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이어진 10여 년간의 보수 집권 시기에 이기는 정치를 향한 욕망이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더 강화했는지, ‘적폐우리 편의 이분법적 구도와 팬덤 정치 속에서 지워진 다양한 목소리와 정당화된 혐오, 검증 없는 진실의 선동 등을 밀도 있게 파고든다. ‘메갈리아를 살펴보면서는 이 시대 새로운 종북 빨갱이가 된 메갈리아를 둘러싼 마녀사냥과 좌우 진영을 넘어서 진짜페미니스트를 감별하려는 흐름 속에 나타나는 여성혐오, ‘남혐여혐이라는 구도를 짜면서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로 여성의 분노를 혐오로 번역하는 방식,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키는 자칭 진보의 모습,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봐라라는 반지성적 태도 등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세 사건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여러 사건 중 일부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반지성주의와 혐오의 결합은 지금도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이에 저항하는 진보진영은 그 과정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패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대의를 위해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가령 노동자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지워지거나 나중에처리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패턴, 내지는 적폐로 상징되는 거대악의 피해자이자 저항의 주체는 남성의 얼굴을 한 채 보편의 위치를 점하고는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패턴.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모습이다. 혐오와 차별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여기에 취향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혐오의 자유까지 횡행한다.

 

타락한 저항뒤에는 생각하는 인간,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는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 소재가 무엇이든 웃기면 그만이고, 그 웃음이 적절치 않다고 정색하는 건 쿨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프로 불편러. 차별은 솔직한 것이고, 차별을 지적하는 건 위선이 된다. 강성노조 때문에 재벌이 해외로 나간다는 발언, 성차별적 언행,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졸다가 젠더 폭력이 뭐냐고 물으면서도 그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를 두고 웃기는 시골 영감같은 재미와 솔직함을 찾고 인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 이민자, 여성, 장애인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두고 솔직하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국정농단의 주범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조롱하며 2016년을 병신년이라고 언급하며 낄낄거리는 태도, 맥락 없는 누드와 출산이라는 소재로 박근혜에 저항하는 작품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까? ‘가짜 뉴스와 사실의 검증은 나중이고 폭로와 음모론이 난무하는 진보적대안 언론, 소영웅주의에 빠져 타인의 고통보다 발화자인 자신을 앞세워 진실을 선동하는 진보적무비저널리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는 사회를 향한 지성과 정치의 복원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고 진지한 성찰과 생각함을 비웃는 반지성적 문화, 그리고 저항이라는 명목과 권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무책임하고 선동적이며 차별적인 권력 행위, 표현의 자유로 포장된 차별과 혐오의 자유가 횡행하는 지금을 짚으며 저자는 제도적으로 통제와 억압이 자행되고 일상에서는 조롱과 혐오로 점철된 언어의 공격 속에서 수치심은 소수자의 몫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나아가 솔직함을 빌미로 만만한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 발언이 유머로 유통되고 있다면, 이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묻는다. 유머와 애도는 한 사회의 윤리와 지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며,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많은 고민과 학습,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치 약자를 조롱하는 것이 유머로 소비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태도 역시 경계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신의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정치 예능이나 무비 저널리즘 형식은 이러한 문제를 꾸준히 드러냈다.”

 

저자는 유머, 곧 해학·풍자·농담 등이 사회의 약자를 조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도가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전위적인 지성과 미학은 윤리적 고민을 품는다. 합리적 의심과 음모론, 배려와 위선, 전위와 무례, 평등과 획일화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렇기에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찾아 위태롭게 걸어가는 길이 지성의 역할이다라며 우리에게 지성의 복원을 주문한다. 우리가 결국 지성의 복원을 말해야 하는 건 사회의 야만이 약자 멸시에 담겨 있으며 지성이 바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시선을 돌리고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

최근 한국의 반지성주의 흐름 분석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

반지성주의자 스스로 피해자로 여겨

진지충·PC충 되길 마다 않고 싸워야

 

장자연 사건을 다룬 기사에 가장 흔히 달리는 댓글은 여성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2009년 사건 당시부터 여성단체들이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라고 줄기차게 외쳐왔다고, 누군가 댓글 형식으로 알려준다. 더욱 친절한 누군가는 지난 10년간 여성단체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활동한 이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신문기사들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잠잠해진 댓글창을 보면서 오해가 풀렸나 보다고 낙관하는 것도 잠시,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씨가 여성단체와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주르르 달린다. “간만에 여성단체가 일 좀 했군요.” “이제라도 나서니 다행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1분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진실을 왜곡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게으르고 성급한 일부 네티즌의 오해라고 지나치기엔, 매번 이런 식으로 불려나와 욕을 먹는 것이 여성단체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미세먼지가 심한 날마다 환경운동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고 핏대를 올리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상황에 무지한 나머지 엉뚱한 과녁에 대고 분풀이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여성단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무지하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일까. <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에 대해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쓰며, 모르지만 규정하려 한다.” 여성단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라서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전혀 알고 싶지 않으며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지하기는커녕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많다. 그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편견과 혐오를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며 과학적으로 포장한다. 저자는 “19세기까지 서구에서 과학과 성경을 바탕으로 흑인과 여성 일반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한국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에게 그 화살을 겨냥하면서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역차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믿음이 한국사회에 창궐하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의 목표는 기득권 유지에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마녀인 각종 을 계속 만들어내고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반지성주의자들은 모르고 싶어 하는 대상을 언제나 비인간화하고, ‘이들과는 다른 나를 확인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라 느끼고 안도한다. 언제나 물리쳐야 할 이 있으며 내 편이 아니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폐로 여긴다. 참으로 피곤한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맹렬한 혐오를 땔감으로 삼는 만큼 웬만하면 지치는 법이 없어 상대하는 사람들이 더욱 피곤하다는 게 함정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자들이 자신을 기득권자로 여기기는커녕 한없이 가엾고 상처받은 약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식민지 남성성에서 찾는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 지배국과의 관계에서 약자나 피해자가 된 남성이 자국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해 남성성을 복원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이다. “서구와 일본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가 된 이들은 서사를 장악하고, 기존 약자나 소수자의 새로운 움직임을 역차별이나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중립적 위치에 놓은 채 타인을 멋대로 지적하고 비난하는 지배하는 피해자가 이렇게 탄생했다.

 

201248일 오후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팬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채 막말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격려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저자는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 반지성주의의 흐름을 블랙리스트’,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등 세 가지 열쇳말로 풀어나간다. 반지성주의가 알기를 거부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블랙리스트는 한국의 보수 우파, 나꼼수 현상은 중도 우파, 메갈리아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 나타난 반지성주의의 양상을 각각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역대 보수 정권들의 문화정책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와 대중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온 과정을 살펴본다.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시민으로서 표현과 자유에 관해 제대로 배우고 훈련할 기회가 드물었던까닭에 금지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대신 금지당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력의 쾌감을 느끼는데 익숙해진 건 아닌지 반문한다.

또한 20114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방송된 팟캐스트 <나꼼수>가 정치를 소비하는 새로운 대중적 플랫폼을 제시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나꼼수의 반지성적인 면모가 마초적 남성성과 결합해 성차별을 자유롭게 민주화하도록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보수 집권 10년간 이기는 정치를 갈망하던 이들은 이명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과잉된 정의감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의제는 나중에!”로 미뤄지고 수많은 혐오가 정당화됐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메갈리아논쟁에 대해서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벌어진 마녀사냥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서 나를 설득해보라고 말하는 진보 진영의 반지성적 태도를 꼬집는다.

 

지배하는 피해자는 생각하는 인간과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면서 개인의 취향표현의 자유혐오할 자유로 대체한다. 그러나 백인을 좋아하는 취향, 뚱뚱한 여자에 비위 상하는 취향,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취향과 같이 상대가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결코 취향이 될 수 없으며 이런 혐오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나아가 반지성주의와의 싸움은 지배하는 그들이 조롱하는 진지충또는 피시(PC)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한겨레 3.29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저자 이졸데 카림|역자 이승희|민음사 |2019.03

원제 Ich und die Anderen

 

저자 : 이졸데 카림-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1959년 빈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빈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으며 2007년부터 브루노 크라이스키 포럼에서 과학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타츠(TAZ), 비너 차이퉁(WIENER ZEITUNG)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000년 오스트리아에서 중도 우파인 국민당과 극우 정당인 자유당의 연립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적 공세(DEMOKRATISCHE OFFENSIVE)’를 조직해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새 정부에 반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 가운데 카림이 이끈 빈의 헬덴 광장 집회에는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저서로 알튀세르 효과: 이데올로기 이론의 구상(2002) 등이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정신 분석과 독일 관념론 철학(공역)을 번역하고 디아스포라라는 삶의 모델을 엮었다. 2006년 빈 시 저널리스트상을, 2018나와 타자들로 하노버 철학 연구재단에서 수여하는 철학도서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같은 해 미래의 책 10’(프로추쿤프트(PROZUKUNFT))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목차

들어가며7

 

1장 과거동질 사회라는 환상11

2장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33

3장 종교 무대다원화된 신앙인73

4장 문화 무대근본주의의 저항105

5장 정치 무대팬으로서의 참여145

6장 정치 무대포퓰리즘의 부상185

7장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233

 

나오며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징후적 질문295

 

감사의 말299

()301

 

출판사서평

트럼프와 마크롱이 일찍이 간파한 것,

우리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마크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프랑스, ‘브렉시트로 혼선을 빚고 있는 영국에서 오늘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정한정치의 실현을 위해서 새로운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준엄히 경고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 ‘지성의 반대편에 반지성을 설정하는 정치평론가들부터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좌파까지.

그 모든 분석에서 공통적인 지적은 정치가 예전같이 작동하지 않으며, 대중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귀환이라는 도식 속에서 포퓰리즘은 비이성과 연결되고, ‘난민 혐오는 극복해야 할 부정적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도식은 결국 계몽이나 각성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남긴다.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이것은 아직도 중요한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188)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에서 타자변화를 축으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 ‘상상된 공동체인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 유명한 개념에서 방점은 상상에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민족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허구의 개념인데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냥 여성이기보다 한국 여성이고, 독일 남성이거나 팔레스타인 남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민족 규정은 불과 지난 20~30년 사이에 침식되었다.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제공한 민족이 침식되면서, 동질 사회가 천천히 사라졌다. 즉 다원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의 본질이다.

 

정체성의 혼란과 타자 혐오 사이에 있는

오늘날 감소된주체에 대한 날카로운 철학적 탐구

 

이졸데 카림이 타자를 말할 때, 이는 관용이나 환대라는 윤리학적 개념을 또다시 역설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를 둘러싼 기나긴 형이상학을 재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카림은 타자성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시내 어디에나 있는 케밥집, TV를 틀면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마트 계산대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에서 본다. 현재 우리는 길에서, 매체에서 이방인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나와 타자들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주의의 층위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동등한 개인들이 처음 출현했다. 이것이 1세대 개인주의다. 둘째, 1960년대에 와서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각자의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운동으로 분화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2세대 개인주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다원화 사회에서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화했고, 2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주체는 감소된다. 다문화 속에서 당연한문화가 사라지며,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헤게모니를 잃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60) 타자 혐오는 바로 이 작아진 자아가 취하는 방어 태세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풀어야 하는상황에 처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세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거부한다.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세우며, 철조망을 쳐서 변화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방어인 동시에 내면적인 방어다. 불안한 주체를 완전한 주체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장벽 뒤에서 옛날의 완전한 정체성은 배타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바꾸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본문 중에서

 

항상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한

타자 혐오를 둘러싼 다섯 가지 쟁점

 

영국의 유럽 연합(EU) 탈퇴에서 보듯, 오늘날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의 침식이다.

오늘날 유럽 연합에 대한 저항으로 등장하여 자기 자리를 재탈환하려는 민족은 다른 무언가가, 통합의 서사로부터 분열의 서사가 되었다. 지금의 민족 서사는 국민의 50퍼센트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민족 서사는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반대한다. 여전히 환상이 잘 작동하고 있었을 때 민족은 밖으로는 경계를 만들지만 내부는 결속시켰다. 그러나 영국의 사례는, 그러한 허구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는 곳에서 민족을 호출한다는 것은 내부의 분열을 지향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민족은 외부의 국경에서 내부의 경계로 변화했다.”(본문 30)

 

이민자 혐오는 비록 올바르지는 않더라도, 현실적인 이유를 가진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전선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낯선 자를 받아들이기란 그토록 힘든 것이 맞다. 그러나 나와 타자들을 가르는 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전선은 원주민과 이민자 사이에 있지 않다. 정치 전선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후자는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과도한 외국화또는 이슬람화로 재해석하는 이들, 말하자면 변화를 막고 싶은 사람들이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하고 순수한사회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부인이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위험한 힘이다. 현실을 자신들의 환상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144)

 

진보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좌파 포퓰리즘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떤가?

그럴 수 없다. 이제 누구도 가치를 주입할 수 없다.

기본 가치는 논의될 수 없고 질문할 수도 없는, 고정되고 확정된 데다가 (바로 주도 문화처럼) 본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호소는 민주주의적 과정이 전혀 아니며, 대신 가치에 대한 복종이 주제가 된다. 이 복종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가치는 제공되어야 할까? 혹은 가치로 물을 들여야 할까? 이 논의의 주제는 재교육일까, 세뇌일까? 재기호화일까, 신념일까 아니면 유혹일까? 가치는 페티시처럼, 주술 기도처럼, 낯선 것들의 등장을 방어하기 위해 불려 나온다.”(43)

 

페이스북으로 좋아요를 누르고, 트위터로 리트윗하는 것만으로 자기가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진짜참여와 가짜참여에 대한 잘못된 구분을 전제한다.

느낌만으로 참여하는 일, 참여한다고 느끼는 일은 결핍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여한다는 주체의 느낌은 허공에 붕 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여한다는 느낌이 싹트기 위해서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느낌이 생겨날 수 있는 활동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경청받는 공명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참여의 중요 기준이 냉정한 현실에서 공동으로 결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현실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 월가 점거 운동은 참여의 주관적 순간이란 곧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럴 때에만 오늘날 개인들에게 참여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149~150)

 

요즘 정치적 올바름이 너무 과잉된 것 아닌가?

물론 과잉되었다. 그러나 과잉에 대한 묘사 또한 과잉되었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존재한다. 대학가와 예술계에 국한된 현상이다. 그리고 과잉을 현상으로 판단하는 데 기여하는 과잉의 과장된 묘사도 존재한다. 우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에서 이 과잉은 우파들의 환상 속에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유령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 모든 것이 상관없다. 왜냐하면 포퓰리스트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잘 먹히는 전투 언어이자 도발 언어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음모론적 환상은 정치적 올바름의 지배를 조장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이 지배라는 유령은 사회를 금지와 소수자의 권리로 노예화한다. 이런 음모론을 통해 적의 구성이 가능해진다.”(261, 이상의 문답은 나와 타자들을 토대로 재정리함)

 

우리는 장벽을 칠 것이다에서

이것은 나의 투쟁이 아니다,

추상적인 온라인상의 적대에서

구체적인 오프라인의 만남으로

 

2000년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반유대주의적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시위에서 민주적 공세(Demokratische Offensive)’라는 운동을 조직했으며, 알튀세르를 연구하고 지젝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한 이졸데 카림은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질문이 성급하게 해답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로 인해 버락 오바마에서 버니 샌더스, 마르틴 슐츠, 에마뉘엘 마크롱 등의 정치인을 반복해서 해결사로 불러낸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자가 내놓는 것은 다른 답이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는 만남 구역이라는 교통규약이 있다. 만남 구역에서 자동차는 20킬로미터 속도로 다닐 수 있으며 보행자의 안전이 우선시된다. 이졸데 카림은 이 만남 구역을 다원 사회의 개인들이 공존하기 위한 개념으로 가져온다. 아무런 권위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구성원들이 스스로 주의해서 움직이는 공간. 이는 타자에 대한 적대를 온라인상으로 또는 머릿속으로 양산시키는 지금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오프라인의공적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예컨대 대북 정책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북한의 인민이 제공할 잠재적인 노동력 또는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이야기만이 오가는 가운데, 남북한의 개인이 각자 자기 길을 가는 동시에 스치며 만날 수 있는 실제 공간이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국경이 희미해지는 오늘날, 장벽을 쌓아 올려 변화를 애써 거부하는 것과 정반대에서 온 저자의 제안은 우리의 미래에 관하여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책속으로

우리는 더 이상 동질성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동질 사회는 지난 20~30년 동안 천천히 사라졌다. 더딘 발전이었고, 또한 모든 영역에서였다.

동질 세계는 모든 물질적 영역에서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물론 열차 시간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다른 시간표를 보자. 차이트 임 빌트(Zeit im Bild, 오스트리아공영 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으로 1955년부터 방영되었다.)타게스샤우(Tagesschau, 독일에서 가장 오래 방영된 공영 방송의 뉴스 프로그램)를 보기 위해 전 민족이 오후 730분이나 8시에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 앉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랬던 적이 없는 젊은 사람들에게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했고 그렇게 자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보기 서비스, 케이블 방송, 유튜브 사이에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하나의 시간표로 규정되지 않는다. --- 1장 과거: 동질 사회라는 환상중에서

 

이민자들은 축구 경기 때 어느 편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를 통해 통합의 정도를 측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지금의 변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터키계 이민자가 독일을 응원한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독일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터키를 응원한다고 해서 완전한 터키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민족 정체성은 다원화되었다. 시민들은 이제 완전하지 않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감정은 지표가 아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냉담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혼성화나 독일계-터키인처럼 이음표로 연결하는 정체성도 아니다. 다원화를 통한 변화는 훨씬 더 나아간다. 왜냐하면 이 변화는 혼합되는 사람에게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2장 지금: 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례인 월가 점거 운동 참가자뿐 아니라 마크롱 지지자들에게서도 보았듯이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며, 또한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기를 원한다. 제바스티안 쿠르츠의 사례에서처럼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그때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운동의 외주화라 할 수 있다. 운동은 스타에게, 전문가에게, 성공에 위임된다. 반면 대중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경청받는 존재가 되는 일이나 그곳에 존재하는 일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단지 성공의 배당을 받는 일이 예정되어 있다. 그들의 전체 운동, 그들의 전체 변화는 전혀 다른 오늘날의 중심인물 안에 있다. 그들은 팬이 되어야 한다. --- 5장 정치 무대: 팬으로서의 참여중에서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산다.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우리가 살지 못하는 삶을 산다.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즐긴다. 어쨌든 팝스타는 우리가 모든 것을 승인해 준 자다.

이를 위해 정치에서 심오한 능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치 경험도, 정치 기획도 필요 없다. 단지 음란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할 뿐이다. 공적 공간에서 실현되는 나르시시즘. 트럼프는 자신의 청중을 대리하여 즐긴다. 그들이 실행할 수 없는 것, 그들이 실행하면 안 되는 것을 대리하며 즐긴다. 트럼프는 그들을 위해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애에 빠진 권능이라는 환상을 향유한다.

이 대리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엘리트를 비난한다. 엘리트들과는 반대로 이 남자는(이 대리자들은 대부분 남자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자신을 선택한 사람들의 생활 세계가 아니라(대리자는 생활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의 강박적인 희망들과 관계를 맺는다. 대리자는 그들의 희망을 실행한다. 이런 세계에서 트럼프에 대한 환호는 단순히 권위에 대한 환호라기보다는 기생하며 즐기는 향유다. 트럼프가 공공의 영역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때, 사람들은 그의 향유를 향유한다. --- 6장 정치 무대: 포퓰리즘의 부상중에서

 


 

미국의 반지성주의 저자 리처드 호프스태터|역자 유강은|교유서가 |2017.04

원제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저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컬럼비아 대학 미국사 담당 드위트 클린턴 특훈교수DEWITT CLINTON PROFESSOR였다(197010월에 타계). 버펄로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메릴랜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1958~9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미국 역사와 제도 담당 피트 교수를 지냈다. 미국사에 관한 첫번째 저서로 미국 사상 속의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 IN AMERICAN THOUGHT(1944), 뒤이어 미국의 정치 전통AMERICAN POLITICAL TRADITION(1948)을 내놓았다. 개혁의 시대THE AGE OF REFORM(1955)로 퓰리처상(역사 부문)을 수상했고, 본서 미국의 반지성주의(1963)로 퓰리처상(넌픽션 부문), 파이베타카파의 에머슨 상, 시드니 힐먼 상 등을 수상했다. 이 밖의 저서로 미국 정치의 피해망상 양상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1965), 진보적 역사학자들THE PROGRESSIVE HISTORIANS(1968), 정당 체제의 구상THE IDEA OF A PARTY SYSTEM(1969), 1750년의 아메리카AMERICA AT 1750(1971) 등이 있고, 마이클 월리스MICHAEL WALLACE와 함께 미국의 폭력: 자료로 보는 역사AMERICAN VIOLENCE: A DOCUMENTARY HISTORY(1970)를 엮기도 했다.

 

목차

서문을 대신하여

 

1: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2장 호평 받지 못하는 지성

 

2: 마음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정신

4장 복음주의와 부흥운동가

5장 근대성에 맞선 반란

 

3: 민주주의 정치

6장 젠틀맨의 쇠퇴

7장 개혁가의 운명

8장 전문가의 부상

 

4: 실용적인 문화

9장 기업과 지성

10장 자조와 영적 기술

11장 주제의 변주

 

5: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13장 생활 적응의 길

14장 어린이와 세계

 

6: 결론

15장 지식인: 소외와 체제순응

 

감사의 말/ /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정치의 타락은 지성이 타락한 결과다!

 

출판사 서평

매카시즘과 1952년 대선의 흐름

저자는 매카시즘과 1952년 대통령 선거의 밑바탕에 흐르는 대중의 정서를 무엇보다도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반공산주의를 표방한 매카시즘은 사실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운동이었다. 대공황 이후 1930년대에 진행된 뉴딜은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권력의 중추에 포진하는 계기였다. 한편 2차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전문가로서의 지식인과 대조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지식인은 체제, 아니 사회 자체를 전복하려는 위협 세력으로 느껴졌다. 호프스태터가 보기에, 매카시즘은 이 두 부류의 지식인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폭발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18세기의 세속화 물결

18세기에 들어서 미국에서는 세속화의 물결이 번져나갔다. 아메리카로 밀려들어오는 유럽의 근대에 대한 반발이 복음주의의 신앙 부흥 운동이었다. 서부의 거친 황야에서 고되고 외로운 개척 생활에 지친 농민들은 열광적인 대각성운동에서 위안을 얻었다. 부흥 운동은 학식 있는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지식인 일반에 대한 반발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음의 지혜나 하느님과의 직접 교섭을 중시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나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성직자 집단을 거부한 것처럼, 평등주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보통사람의 타고난 현실적 감각과 진리와의 직접 대면을 중시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을 배제시키자고 제안했다. 보통사람의 지혜를 중시하는 이런 경향은 민주주의적 신조를 과격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서민들에 의한 일종의 호전적인 반지성주의로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반지성주의와 극우 보수주의 정치의 결합

오늘날의 반지성주의는 극우 보수주의 정치와 단단하게 결합되었다. 애들라이 스티븐슨과 아이젠하워의 대결은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 부시와 존 케리,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결에서 고스란히 재연되었고, 유권자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열광하면서 부시와 트럼프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트럼프는 저자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특징으로 꼽는 원시주의, 지성에 대한 경멸,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현실적 성공을 밝히는 사업가 정신을 체현한 인물이다. 남부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과 중서부의 농민들만이 아니라 자신은 엘리트와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잘난 헛똑똑이 힐러리 클린턴을 혐오하고 대신 트럼프에게 지지를 보냈다. 1960년대 민주주의와 경제가 번성할 때 지식인과 잠시 좋은 관계를 이루었던 대중은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결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다시 분노의 화살을 지식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책속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근본주의자를 극우로 이끄는 것은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다. 근본주의자들도 다른 이들 못지않게 자신들이 폭넓은 세계관을 지녔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며, 종교적 반감과 정치적 반감을 결합할 수 있을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서로 무관한 적의를 하나로 결합해서 상승작용을 하게 만드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 p.191-192

 

숙련과 지성은 결정을 내리거나 관리하는 권한에서 완전하게 소외되었던 것이다. 공공생활에서 지성의 지위는 유감스럽게도 교육이나 훈련에 대한 젠틀맨의 시각에 의존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명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왔다. 19세기 미국에서 지성은 결국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 --- p.240

 

과거에는 사업이 종교적 훈련의 수단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수단의 하나였던 반면, 이제는 종교적 훈련이 사업의 수단이고 하느님을 세속적인 목적에 활용하는 방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업에 성공하면 그것을 구원의 징표로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구원을 현세에서 의지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 즉 세속의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성공과 동시에 얻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종교는 활용해야 하는 것이 된 셈이다. --- p.366

 

미국 교육 개혁가들의 역사는 대체로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미국 문학에서 교육을 둘러싼 슬픈 이야기는 청교도의 설교에 등장하는 그것만큼이나 특징적이다. 문학이 비판의 한 수단이었다는 것 자체는 놀라울 게 없다. 비판은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져야 할 짐이기 때문이다. --- p.414

 

지식인과 민중의 동맹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적인 지식인 계급은 때로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 p.556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저자 우치다 다쓰루|역자 김경원|이마 |2016.06.

원제 日本反知性主義

 

엮은이 우치다 다쓰루는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전문 분야는 주로 프랑스 현대 사상, 영화론, 교육론, 무도론(武道論) 등이다. 고베여학원대학 문학부 종합문화학과 교수직을 퇴직한 뒤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1년 고베 시에 무도와 철학을 위한 배움터 개풍관(凱風館)’을 열어, 문무를 함께 단련하고 있다.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5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비판적 지성을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 평론가이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하류지향,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일본변경론,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공저),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5

 

1장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 - 우치다 다쓰루 13

지성적/반지성적을 나누는 것 / 지성이란 집단적인 현상이다 / 이상주의가 최악의 반지성주의를 낳을 때 / 음모 사관은 왜 되풀이하여 나타나는가 / 인류사상 최악의 반지성주의 사례 / 선구적 직감에는 시간이 관여한다 / 사회적 또는 공공적인 것의 조건 / 반지성주의를 결정짓는 무시간성’ / 미래가 없는 것을 대가로 삼아 / ‘숨겨진 진실의 발견 / 반지성주의자의 진정한 적 / 선동가는 반복을 꺼리지 않는다 / 정치에 시장은 없다 /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 반지성주의의 본질

 

2장 반지성주의, 그 세계적 문맥과 일본적 특징 - 시라이 사토시 55

머리말 / 1. 반지성주의의 정의와 일반적 특징 / 2. 현대 반지성주의의 문맥 I / 3. 현대 반지성주의의 문맥 II / 4. 반지성주의의 일본적 특징 / 5. 부인(否認) 선진국 일본

 

3반지성주의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어쩐지 반지성주의같아서 꺼림칙했기 때문에 , 그럼

무엇에 대해 글을 쓸까를 생각하고 써 본 글 - 다카하시 겐이치로 103

빠름 / 더욱 빠름, 그리고 뒤틀림을 바로잡는 일에 대해 / 더더욱 빠름, 여자처럼

 

4장 어떤 무기보다 파괴적인 것 - 아카사카 마리 121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다 / 헌법의 구성을 들여다보는 일은 나라를 들여다보는 일 / 밀착인가 아니면 고립인가 / 메이지 시대의 비밀 패러독스 / 우선 꼭대기가 면책을 받는 시스템 / ‘친밀한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고 / 쿠데타로 이룩한 정부이기 때문에 / 말로 표현한 적 없는 살기 힘듦

 

5장 전후 70년의 자학과 자만 - 히라카와 가쓰미 139

전쟁을 모르는 어른들 /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 대중 선동의 강력한 도구로서 / 지성적이었던 전후 독일의 재상 / 피해자라는 위치를 선택한 일본인 / 어른 정치가의 부재 / 우리가 똑바로 보아야 할 것

 

6장 지금 일본의 계급적 분열에 대하여 - 오다지마 다카시 161

교양과는 인연이 없는 곳에서 / ‘지성도구로 파악한 사람들 / 속류 양키론을 배척한다 / ‘마일드 양키라는 말의 모순 / ‘데키스기 군양키의 가치관 차이 / ‘전후 민주주의라는 우등생 사상 / 진행하는 분열스토리 / 생애를 결정짓는 분열은 15세 때 / 진짜 계급이 형성되기 전에

 

7장 신체를 통한 직감지 - 나코시 야스후미×우치다 다쓰루 대담 183

태초에 결여감이 있을지니 / 지성을 추동하는 근원은 지기 싫어하는 근성이라고? / 갈망 상태에 있으면 생명력은 향상한다 / 오래된 가요가 갖는 문화 공간 / ‘처세 의리의 신체화 / 지성을 지성답게 만드는 것 / 지성은 공동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 신체를 통한 직감지 / 문학의 본질은 죽은 자와 공감하는 체험 / 시간과 공간을 접는다

8장 체험적 반지성주의론 - 소다 가즈히로 220

지성의 발동에 지름길은 없다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대본 지상주의 / 효율과 예정조화 / ‘안전책이 다큐멘터리를 죽인다 / 관찰영화의 십계’ / 일본 사회에 둥지를 튼 대본 지상주의=반지성주의 / 원자력발전 사고와 반지성주의 / 반지성주의의 질병 이득 / 우리의 반지성주의

 

9장 과학의 진보에 따른 반지성주의 - 나카노 도오루 236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실험 / 낚시에서 저인망 어업으로 / ‘붉은 여왕은 계속 뛸 수밖에 없다 / 과학의 종언? / 연구와 대학의 자본주의화’ / 생명과학만의 문제일까 / 저항은 가능할까 / 과학자의 책임

 

10마찰의 의미-지성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 와시다 기요카즈 258

분열의 과잉 / ‘지성적이라는 의미 / 다문화성이라는 심연

 

출판사 서평

무지와 왜곡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것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

최근 더욱 심해져 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소수자 (집단) 혐오,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밑바탕에는 반지성주의와 반교양주의가 있음을 성찰한다

 

일본의 지식인들, 반지성주의에 저항하는 법을 고민하다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무지나 무교양과 다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지성에 대한 반발, 아니 공격적인 태도다. 반지성주의적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일. _아사히신문서평(2015. 4. 17)

 

아베 정권은 폼을 잡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도 국민의 다수는 이 정권을 지지한다. 일본인은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일까.() 논고가 가르쳐 주는 중요한 것. 그것은 반지성주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무심코 무자각 상태에 휘말린다는 것이다._겐다이 디지털신문(2015. 4. 14)

 

반지성주의 사회, 폭주하는 사회의 이면을 읽다

이 책은 분명히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경고와 성찰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 자위권을 인정하는 헌법개정 움직임과 재일 한국인을 겨냥한 혐오 시위·발언 등 부쩍 심화되고 있는 우경화 움직임을 우리는 걱정스럽게 지켜봐 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사회의 이러한 흐름을 그저 관망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정부의 진실 은폐, 정치인과 미디어의 폭언과 거짓 발언·보도, 여성·성소수자·해외이주민 등 소수 집단을 향한 혐오 발언과 범죄, 사실관계 확인 없이 SNS를 뒤덮고 있는 음모론, 과거사 왜곡 등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는 우리도 이미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도착해 있는 사회, 이 책은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반지성주의가 밑바탕에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성의 부재나 비지성적인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맹렬한 지적 정열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지성의 작용에 대해 모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매우 높은 파급력과 선동성을 지닌 반지성주의는 당연히 사회를 단일한 방향으로 몰아가며,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된다.

 

반지성주의에는 사회도 미래도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반지성주의 최악의 역사적 사례들로 19세기 후반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20세기 중반 미국의 매카시즘, 일본의 사례로는 군국주의와 이의 왜곡을 두루 지목한다. 반유대주의는 인류사 전체를 유대주의와의 대결로 간단히 규정하고 당시 유럽 사회가 처한 모순의 제공자를 유대인으로 몰아가 이후 20세기에 홀로코스트를 낳았으며, 매카시즘은 미국 정부 곳곳에 공산주의자가 다수 암약하고 있다는 발언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무려 5년간 정계와 사회,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공통적으로 성찰과 의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무시간성’(‘지금, 여기, 밖에 없다)과 진부하고 음모론적인 지식의 단순한 반복과 웅변, 사회의 영속성은 안중에도 없는(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외곬의 지적 정열이 압도한 사례다.

현재 일본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혐오 발언과 시위·범죄에도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깊이 내재해 있다. ‘재특회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일베에 뿌리 내리고 있는 지역 차별과 여성 혐오는 일종의 사회병리적인 하위문화의 수준을 넘어서 사회 전반의 심상으로 번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사회, 경제적 모순과 그로 인한 박탈감을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원한과 분노로 너무나 손쉽게 치환하는 반지성주의적인 사고와 선동이 있다.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적 정치권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권력의 자원으로 동원하거나 활용한다.

 

지성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은 반지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지성의 역할과 작용을 다시 생각한다. 근대적 지성은 이미 도구적 지성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고, 이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여러 오해와도 관련되어 있다. 지성은 단지 학력이나 지식의 양, 연구나 업무의 성과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이러한 도구적 지성은 분열과 정치적 동원의 계기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저자 가운데 특히 흥미를 끄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소다 가즈히로(8)대본 지상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연관 짓는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이미 주제를 결정짓고 이에 따라 내용 전개나 인터뷰이의 발언에 관찰자가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대본 지상주의는 사회 문제 전반에 깊숙이 개입된 태도이다. 동일본대지진 직후의 일본 정부나 미디어의 대응을 살펴보면, ‘일본의 원전은 사고를 일으킬 리 없다(일으켜서는 안 된다)’안전 신화의 강력한 대본, 그에 앞서 원전 추진이라는 정재계, 언론, 학계 등이 연루된 권력 집단의 대본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대본에 없던 사고가 나자 그 대응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첨단의 지성이 결집된 과학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조작 사건은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례이다.

이 책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지성의 본래적 작용, 즉 회의하고 질문하고 우리 안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러 있는 힘을 강조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의 멈추지 않는 열정에 사회 전체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 또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 다시 지성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책속으로

지성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지성은 집단적으로만 발동한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 지성적인지 아닌지는 그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한 지식의 양이나 지능 지수나 연산 능력에 따라 판별할 수 없다.개인적인 지적 능력은 어지간히 높은 듯하지만, 그 사람이 있음으로써 주위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이며, 노동 의욕이 저하하고, 아무도 창의적인 제안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이 현실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아니, 지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사람이 활발하게 본인의 지력(知力)’을 발휘하는 탓에 그가 소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 능력이 내려갈 때, 나는 그런 사람을 반지성적이라고 간주한다.--- p.17~18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여기, 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지성주의자들이 예외 없이 과잉 논쟁적인 까닭은 그들이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상대를 지식과 정보와 추론의 선명함으로 압도하는 일에 열중하기 때문이다.그들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간단하게 들켜 버릴 거짓말, 근거가 빈약한 데이터, 일리가 있는 해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타자와 협동해야 할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최종 소비자(end-user)’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향유하는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자신의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과는 자기가 다 써 버리겠다고, 누구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지 않고 증여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최종 소비자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p.34~35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지성주의의 심정이 사회의 잠재적인 주조 저음으로 깔린다. 사정이 이러한 이상, 정치권력은 우민화 정책을 실행하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심정을 권력의 자원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그것이 압도적으로 패권을 쥐고 흔들지 않도록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대중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그 과정이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중대한 난제를 껴안고 있다.

반지성주의가 권력층의 통제를 벗어나 폭발적으로 분출할 때, 매카시즘이나 문화대혁명, 폴포트의 지식인 탄압 같은 파국적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아까 이소자키 요스케의 예에 나타나듯, 현대 일본의 반지성주의는 권력자가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이용하는 우민화 정책의 차원을 뛰어넘어 반지성주의적 에토스가 권력층 자체까지 침투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 p.61~62

 

데키나 오사무가 착안한 ‘B이라는 개념은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우정해산과 총선거 때 나왔다. 즉 자민당으로부터 선거 전략을 의뢰받은 광고 회사(스리드사S.L.I.E.D Co. Ltd.)가 작성한 리포트에 등장했다가 그것이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세상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용어다. 국민의 계층을 A~D층으로 분류한 그 리포트에서는 B층을 구조 개혁에 긍정적이고 IQ가 낮은 층’,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캐릭터를 지지하는 층으로 규정하고 있다. 데키나 오사무는 이를 정리하여 B층이란 매스컴 보도에 휘둘리기 쉽고 비교적’ IQ가 낮은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다. 매스컴에서 글로벌화나 규제 완화-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를 좋은 것이라고 선전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찬성!’을 외치는 어리석고 지성을 결여한 사람들이다. 고이즈미 자민당은 이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면밀한 전략을 세움으로써 총선거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덧붙여 스리드사의 리포트는 B층 이외의 계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A: 구조 개혁에 긍정적이고 IQ가 높다. C: 구조 개혁에 부정적이고 IQ가 높다. D: 구조 개혁에 부정적이고 IQ가 낮다.요컨대 이 분류는 중산층 사회가 붕괴한 이후 등장한 새로운 계급 사회의 양상을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p.64~66

 

반지성주의를 둘러싼 논의는 지성 같은 것을 축으로 대립한다기보다는 분열의 서사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현재 이 나라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간을 두 계층으로 분열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주제는 분열자체에 있다.

집단을 둘로 단절시키는 원흉으로 학력이 강조된다. 반지성주의 집단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학력에 의한 분열의 절단면이 성적 서열이라는 지층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지성을 축으로 대립하다가 그 결과 사람들이 두 진영으로 분열한 것이 아니다. 순서를 따지면 분열이 먼저 생기고, 분열을 발생시킨 요인으로 지성이 악역을 맡고 있을 따름이다.우리는 계속 분열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지성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둘로 나뉜 각 집단에 의해 표면화되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는 지성 같은 사소한 것으로 대립하기를 멈추고, 될수록 빨리 제대로 된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제대로 된 사회를 되찾아 현재 진행되는 분열을 저지해야만 한다.--- p.177~178

 

일본 정부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는 심각한 사고를 일으킬 리 없다(일으켜서는 안 된다)’안전 신화라는 강력한 대본을 갖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원자력발전소 추진이라는 더욱 포괄적인 대본, 즉 정계와 관료와 학계와 언론이라는 일본의 권력 중추가 공동으로 발전시킨 대본이 있었다. 그래서 막상 대본에 없는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대본의 존재로 인해 일본 엘리트는 지성의 기동을 현저하게 저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대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철두철미하게 폐기하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도록 사고를 정지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가동시키면 원자력발전 추진시나리오는 붕괴하고 말기 때문이다.--- p.231~232

 

고도로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학에 의한 반지성주의는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다. 그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한층 더 나쁘다. 그 커다란 흐름에 저항하려면 새로운 기술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말고, 정보 검색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목적에 얽매이는 일을 의식적으로 회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머리로 똑바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일반인이 과학에 대한 반지성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똑바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과학의 운용에는 지성이 저절로 따라붙는다는 애매모호하고 낙관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히는 것은 과학에 내재한 반지성주의에 가담하는 꼴이라고 말할 수 있다.--- p.256~257

 

한 사회의 중대한 생명은 마찰에 의해 길러진다는 말입니다. 사회의 각 계층이나 부분은 반드시 나머지를 부가하여 보충해야 할 결함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발생하는 상시적인 마찰에 의해 끊임없이 자극이 편재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평화를 보장한다고 T. S. 엘리엇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얼크러지는 분할선이 많으면 많을수록 적대감을 분산시키고 혼란시킴으로써 국민 내부의 평화에 유리해지는 결과를 낳기때문입니다.

마찰을 감소시키고 소거하여 하나의 신앙으로 균질화하려는 사회는 견인력과 반발력의 긴장감을 잃고 마침내 생명까지 잃고 맙니다.그렇지만 작금에 들어 격차의 심각한 비대화, 걷잡을 수 없는 배외주의의 앙양 등을 보면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그 반대, 즉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않는 분열의 심화’(사이토 준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현 정부가 명백하게 원자력발전의 재가동,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으로 키를 돌려도, 이를 염려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흐릿하기만 할 뿐 잘 퍼져 나가지 않습니다. 연대를 하려 해도 금세 길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개중에도 특히 매개자가 되어 중의를 충분히 모아야 할 야당이 거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분열의 심화라는 거울에는 필시 가장 가까운 정치적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우리 자신이 비치겠지요. --- p.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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