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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칠선계곡으로 향하다가

by 이성근 2018. 3. 18.

 

 

함양 둘째날 창원리를 반경으로 갈곳을 선택하고 숙소를 나섰다.  금계와 창원 사이에 있는 채석장 와불산을 찾았다. 아무리봐도 자연 형상의 누워 있는 와불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채석장 절벽에 부처 얼굴하나 다듬어져 있었다. 함부로 파낸 산에 대한 파괴적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함이든가. 

 

 

큰부리까마귀들이  무리지어 있다. 누가 리드일까 

 

진짜 와불은 비 안개 넘어 있다. 임천이 굽이치고 있다.  그 흐름이 주변 산세와 어울러져 매력적이다.  

 

칠선계곡 초입 마을의 풍광이다.  사실 지리산 자락 어디서든 마주치는 풍경이 절경이다. 

 

사실 눈길이 간 건 작은 마을 그 옆에 솟아 있는 언덕같은 곳에 자리잡은 한 무리의 큰 나무들 때문이다. 그 나무들 뒤로 칠선계곡이 병풍처럼 서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발길은 자연 칠선으로 향했다.  

 

의탄리로 건너가는  다리위에서 원앙을 보았다.  바위 사이 비교적 흐름이 완만한 곳에 너댓마리의 원앙들이 그렇게 놀고 있었고, 그 익숙하지 못한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있다. 지리산 자락이기 때문일까  

 

의탄교를 건너면 만나는 의중 마을의 노거수 

 

느티나무였다.  흉고둘레 6.4m 수고 22m  수령 620년   지정시기가 1972년이니 실제나이는 666살이다.  그리고 흉고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만  아쉽게도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줄자를 챙겼다가 빼버린 판단에 잠시 후회를 했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크게 3축으로 뻗었다.  잔가지가 많이 없음에도 여름모습은 풍성하다.  

 

창원리 쪽을 돌아 보았다. 뻗어내린  왼쪽 산자락의 정상은 1200고지의 삼정산이다. 의중마을은 고려시대 의탄소(義灘所)라는 지방특산물 탄(, )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행정구역인 소()였다는 유래에서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의중이라는 이름의 내역을 갖고 있다. 마을 뒤 산 쪽으로는 서암과 벽송사로 가는 숲길이 있다.

 

칠선계곡은 의탄천으로 연결되고 의탄은 임천의 지류이기도 하다.  그 흐름의 곳곳이 선경이다. 

 

3월이지만 봄빛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조만간 폭발하듯 이 잿빛이 연두빛으로 갈이 입을 것이다. 

 

한동안 계곡을 낀 차도를 타고 오르다 추성마을 초입 바위에 새겨진 비에 눈길이 머문다.   확인되는 글이 전구장 김공   불망비 정도인데 문헌을 찾아 볼일이다. 

 

계곡이 추성마을 초입에서 한번 크게 꺽어지는 지점 멋진 소나무숲이다.  

 

거기 바위돌에서 먹이 사냥에 나선 물까귀 한 마리 

 

 

 

 

 

칠선계곡은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다. 그런데 그 통제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붙어 있는 안내판이 새것과 헌 것이 같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추성마을 대부분이 민박집이다. 민박집의 형태도 다양하다. 지역 토박이의 집들과 외부자본에 의해 지어진 집들과의 차이가 확연했다. 

 

그 차이는 생활의 토대다.  외지인들은 순전히 숙박을 중심으로 하면서 이곳의 경관을 즐기는 축이라면 토박이들은 민박을 겸하지만 작은 밭뙤기를 가꾸며 약초 채취 등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원래 이 골짜기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의 집은 주변 환경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반면 외부자본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질성이 크다.  그 이질적 건축물들은 오랜시간 사람과 마을, 자연의 어울림에 항칠하는 형국이다.  이런 추세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수요자들이라 할 수 있는 지리산 방문자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시골집이라고 현대식 건물로의 변화를 못할 바 없다.  다만 그럴 수록 이곳의 공간적 정체성은 지워지는 것이다.   

 

19641129일 칠선계곡 입구 추성마을의 풍경을 묘사한 글이 있다.

"...감 껍질과 호박, 무가리가 냇가의 반석에 널려 있는 길섶에 빨간 고추, , , 도토리가 빼꼼한 틈도 없이 멍석을 덮고 있다. 무 잎사귀를 짚으로 엮어 돌담 울타리에 걸어놓았고, 담 밖의 나무시렁에는 곶감을 매달아 주렁주렁하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수확한 작물을 부지런히 손질하고 있는 것이다. 벼를 거둬들인 빈 논바닥에 우뚝우뚝 쌓인 짚가리를 보면 벼농사도 잘 된 것 같다. 그 언저리에 어미소와 흑염소가 네댓 마리씩 떼 지어 마른 풀을 뜯는다.’

 

그렇지만 이 마을도 6.25전쟁 때 군사작전지구가 되어 30호 농가가 불태워졌던 곳이다. 의탄마을이 기대고 있는 산 위의 벽송사(碧松寺)도 빨치산과 군경토벌군의 격전 와중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7년의 전쟁터, 서로 죽이고 죽임당한 동족의 피로 아롱지고 포연탄우(砲煙彈雨)로 더럽혀졌던 산자락,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추성마을 사람들은 그 지긋지긋했던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고 아름다운 지리산에로의 환원(還元)을 힘써오고 있다..."(1964년 11월28일~12월6일까지 칠선계곡 루트 등을 포함한 지리산 동북(東北)루트 개척 학술조사대조사대장 김경렬 글)

    

칠선계곡 주차장에서  오르면 두개의 물길이 있다.  제석봉과 천왕봉 사이에서 바뤈한 흐름과 두류봉 과 하봉 사이 에서 흐르는 국골계곡이다. 현재의 칠선계곡 지명은 1964년 학술조사단이 명명한 것이 많다. 예컨데 23개의 소 가운데서, 아래쪽에서 중간지점에 위치한 소들이 옥녀탕(玉女蕩), 군선담(群仙潭), 선녀탕(仙女蕩)

등으로 명명된 것이나 동참했던 대륙산악회의 이름을 딴 대륙폭포 같은 것이다.  그들은 칠선계곡에서 "...50마리에서 100마리를 한 떼로 하는 산오리가 계곡의 못에서 놀고 있었고, 사향노루와 담비(食肉目) 등도 발견되었다. 예비답사 때에는 칠선계곡에서 백무동을 넘는 능선에서 두 마리의 큰 곰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경악할 일도 목도했다고 한다.

 

 


칠선계곡의 원시림, 도벌꾼들이 나이테 200~300개의 거목들을 마구 베어내 함지박 등 목기를 만들어둔 현장. 이들은 도벌한 나무를 '목마로(木馬路)''도벌 댐'이라는 기막힌 방법으로 산 아래로 일거에 운반했다.(1964년 김경렬 사진)

 

칠선계곡은 그 지형이 너무나 험악하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먼저 굵은 기둥을 경사지게 세웠다. 그 위에다 경사지게 좀 작은 기둥으로 연결했다. 또 그 위에다 허벅지만한 통나무를 3미터 정도 길이로 잘라 착착 붙여서 목마로(木馬路)를 만들었다. 이 길을 만드는데 사용된 나무가 도대체 몇 만 그루이겠는가.’

 

이 목마로보다 훨씬 더 용이한 방법으로 도벌한 목재들을 산 아래로 운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 곧 도벌 댐이었다. ‘계곡 중에 제일 협소한 곳을 막아 간이 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다 마구 벤 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하나씩 계곡물에 흘러 내려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곡에 나무들을 쌓아올린다. 여름철 어느 날, 집중호우가 퍼부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댐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최화수 <우리들의 산 1991년 11월호 > 중 조사대 제1리드 성산 씨의 증언)

 

상봉골 중봉골 하봉골 국골 도깨비골에서 넘쳐나는 거센 수압력을 이용해 처음부터 장치된 댐을 손쉽게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도처에 흘러드는 계곡물은 거센 파도처럼 되어 계곡에 넘치면서 쌓여 있던 나무들을 가랑잎처럼 순식간에 계곡 하류로 운반한다. 물론 중간에서 바위나 나무 뿌리에 걸려 운반되지 못하는 것도 부지기수이겠지만, 태산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의 위력에 견딜 수 없어 부러지면서도 흘러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성리를 지나 의탄을 거쳐 엄천강으로 흐르는 나무들은 용류담을 거쳐 내려오는 신세가 된다’(최화수 <우리들의 산 1991년 11월호 > 중 조사대 제1리드 성산 씨의 증언)

 

"...이렇게 거센 계류를 따라 흘러내린 나무들은 엄천강 중간 부분, 물살이 세지 않은 곳에서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인부들에 의해 수거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또 적당한 길이로 잘려진 나무들은 트럭에 실려 남원으로 이송되었어요. 남원에선 다시 기차에 실려져 당일로 서울까지 운반되거나 부산 등지로 흘러들었다니 놀랄 일이지요 ." (최화수-부산 사람들의 지리산 사랑 중)

 

 

 

“...지리산이 평정된 얼마 후 지리산 난민들을 돕는 사업을 펼친다며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지리산개발주식회사'였다. 이 회사는 지리산 난민 정착사업을 돕기 위해 발족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지리산의 목재들을 팔아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이다'삼흥흥업주식회사'라는 벌채업소가 서울영림서로부터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 내의 고사목 풍도목(風倒木)에 한해 벌채허가를 받은 것이 19639월이었다고 한다.그 후 이 회사는 남선목재와 서남흥업공사로 전매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벌채목 반출 기간과 허가 지역이 늘어나고, 급기야는 생목 아름드리 나무까지 마구 베어내 기업형 도벌로 변질하게 됐다..." (김명수 <지리산>에서

 

이런 역사를 지닌 칠선계곡이다.

 

 

칠선교에서 5분 거리에 두 물길이 만나 의탄천이 된다.

 

 

 

국골방향 물길

 

칠선계곡 물길

 

지킴터에서 급경사 길을 오르면 본격적 칠선계곡으로 드는 길이다.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과 제주 탐라계곡과 더불어 한국 3대 계곡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언제고 갈 수 있는 코스가 아니다.  1997년 태풍 내습으로 계곡이 심하게 훼손되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회복차원에서 1998년 부터 출입을 통제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복원에 들었고 2008년부터 국립공원 최초로 '예약탐방제'도입했다. 그것도  해마다 5, 6월과 9, 10월 넉 달만 기회가 주어지며  일주일에 두 차례, 월요일과 토요일, 미리 예약해야만 가능하다.


현재 칠선계곡 일대 124000의 면적은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향후 2027년까지 지속된다. 공단은 전체 탐방로 9.7가운데 추성리에서 비선담까지 4.3는 전면 개방했다. 반면 비선담에서 천왕봉까지 5.4는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루 60명씩 한정, 공단 직원 4명이 안내하는 탐방가이드제를 운영하고 있다

 

날씨가 안좋을 경우, 탐방은 자동 취소된다. 탐방이 취소되는 경우는 기상특보(호우, 태풍, 예비특보 포함) 발효 시 천재지변 등으로 해당지역 입산 통제 시 운영 당일 비가 오거나 지속될 것으로 기상예보 시 전일 강우량 30mm 이상 시 등이다.

 

 

 

 

보도블록이 깔린 길은 장구재까지 어어지다 맨흙이 된다.

 

장구재에서 건너다 본 두지동, 지형이 쌀 뒤주를 닮았다고 하여 `두지터'라 하고 옛 가야 구형왕이 군량미를 두었던 곳이라고 도 한다.

두지동 계곡 초입부터  천왕봉까지는 9.7km 계곡을 따라 33개의 소()7개의 폭포가 이어진다. 자연휴식냔제와 예약탐방제로 인한 효과는 크다.  답압에 의해 뚜렸하게 나 있던 등산로가 일부 구간에서는 희미할 정도가 되었고, 사람의 간섭이 없다보니 동식물의 종과 개체수가 증가했다고 한다.

 

 

아름들이 서어나무 군락과 오소리굴, 그리고 살무사 등 등산로 주변에서 보일 만큼 통제 성과가 보인다. 국립공원 지정을 희망하는 금정산 또한 염두해둘 대목이다.  금정산은 도심에 위해해 너무나 많은 등산로가 나있고 그만큼 답압과 훼손이 심하다. 

 

사전 정보의 분석없이 무작정 나섰던 길이었고, 그리고 돌아서 나오긴 하였지만 나름 의미있던 행보였다.

 

 

 

 

Puerto Montt - Patricia Sal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