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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지리산에 들다 (백무동에서 중산리)

by 이성근 2018. 3. 18.

https://www.youtube.com/watch?v=uFYGQj3S5Rc 

 

3일째 아침, 지리산이 문을 열었다.  서둘러 백무동으로 향했다.  창원에서 백무동 입구까지는  꽃별새길의 아들이 태워 주었다.  시간 절약에 도움된 배려였다.  2박3일 먹고 자고 했던 값을 살째기 줄려다 들키고 말았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짐짓 정색하기에 후퇴 했다가 차에서 내릴 때 아들편에 건냈다.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그냥 가기에는 마음에 허락하지 않아서다.

 

함양 도착 후 하루 2번 이상은 보았던 임천

 

제일 뒷편 산자락, 송전마을 뒤편에 지리산 상내봉(1200m) 능선이 누워 있는 부처 모양이다. 최근에 함양군에서 와불산이라 명명했다 한다.  산 이름이 이렇게 바뀌는 모양이다.  옛날에도 부처 모양이라고 했을까.  

 

백무동 초입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장면을 익히 아는 지 상호 중에 백무동의 아침이 송알삼거리에서 도촌교 앞에 간판 세워 자랑하고 있었다. 

 

백무동은 출발할 때부터 계획을 세웠다.

 

 

 

3월 중순의 지리산은 잠을 깨는 중이었다.

 

잎을 내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물종은 거의 없었다.

 

 

 

산빛 역시 좀 이르다. 전면의 산은 오공산이고 뒷쪽은 벽소령쪽이다.

 

푸른 물 머금은 겨우살이만 짙은 초록잎을 달고 있었다.

 

 

 

노각나무 굵기가 지금껏 본 나무 중에 제일 굵었다. 금정산에서 본 노각나무와는 비교되었다.

 

그랬다. 쉬엄쉬엄 산행을 하며 금정산 국립공원을 생각했다.

 

산중에 만난 생강나무 꽃,   유일했다. 

 

산수국이 필 때 다시 와 보고 싶었다

 

계절을 다 하고도 남아 있는 꽃대는 지난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함양군수가 하동군수와 장기를 둬서 지는 바람에 '하동 바위'란 이름을 달고 있는 바위지대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하산길에 든 사람도 제법 있었다.  또 나르 앞서간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내 호홉과 걸음으로 쉬엄쉬엄 오를 뿐 먼저가고 오는 것은 의미없다.  

 

참샘에서 만난  동고비는  의외로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거제수나무들이 곳곳에 섰다.

 

아래소지봉 못가서 이번 산행에 큰 도움을 준 충청도 분을 만났다.  인사로 길을 상태를 묻는데, 아이젠 없이는 힘들다고 답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자 이분 두말없이 베낭을 뒤적이더니 자신의 아이젠을 건낸다.  나는 산을 오르는 사람이고 자기는 목적을 달성하고  내려가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는 가던길 마저 가던 사람.  뜻하지 않는 도움에 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 봤다.

 

실제 그랬다. 산행 중간중간  잔설 남아 있는 빙판길과 응달의 눈쌓인 길은 아이젠 없이는 뒤 돌아서는 것이 훨씬 나을 법 했다.

 

웃소지봉으로 향하는 길 산죽들이 점령하고 있다. 해발 1300 지대이다.

 

한동안 산죽 깔린 평탄한 길이 어어진다.

 

충청도 양반에게 고마음을 다시 전한다.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왕봉의 주소는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다. 오른적이 언제이든가. 까마득하다. 이나이 되도록 4번 밖에 오르지 못했다.  20~30대에는 여러산들을 돌아 당기느라 그랬고, 40중반 이후에는 등정문화에 대해 생각이 바뀌어서다.  굳이 오르지 않고서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장터목산장을 돌아 본격 천왕봉으로 향했다.

 

여기서 장(場)이 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산청 시천 사람들과 함양 마천 사람들 대단하다. 이곳을 이요하기 위해서라면 예약은 15일전에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해야 한다.  30대 때 치밭목산장을 이용한 적이 있긴 하다만  그때는 대원사 코스로 올랐다.

 

첩첩능선을 보며 늘 새로운 능선을 만나는 삶을 생각했다. 

 

제석봉[帝釋峰]은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에 있다. 천왕봉(天王峰, 1,915m)과 중봉(中峰, 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다. 높이 1,806m 숨을 헐뜩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제석봉을 지나 천왕봉이 보일듯 가찹지만 몹시 고통스럽다.

 

드디어 천왕봉이 앞에 있다.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잔설에 찍혀 있다.  그렇다 산은 그대로 있고 눈이 녹으면 그 흔적은 지워지는 것이다.

 

 

 

 

 

단체 탐방객으로 소란스러웠다. 겨우 한 장면 남겼다. 천왕봉에 세워져 있는 현재의 표석은 1982년 초여름에 세웠다. 높이 1.5m의 자연석을 옮겨 와 세운 이 표지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자가, 뒷면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을 새겨놓았다. 처음엔 '慶南人(경남인)氣像(기상) 여기서 發源(발원)되다' 라고 새겼다가 전국적 반발과 송동 끝에 '한국인의 기상'으로 수정이 됐다.

 

그리고 창원리를 내려다 보았다. 오늘 아침 저 아래마을에서 올려다 보았다. 석봉 선배가 일하다 말고 이 인간이 올라갔나 내려갔나 궁금해 했을 법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형 고맙수

 

내려갈 중산리쪽 산줄기를 보았다.

 

단박에 내갈 것으로 예상했던 하산 일정은 오판이었다.

 

중산리 코스는 단코스로 가장 빨리 정상으로 가는 길이긴 하지만 체력소모가 많은 곳이다.  몇 번의 경험이 올때 코스로는 달갑지 읺아 더이상 다니지 않았다.  그 세월이 길다.

 

급경사의 오르막이기도 하고 내리막이기도 한 조금 더 내려가면 천왕샘이다.

 

족제비 한마리 먹이를 찾는지 한동안 두리번 거리다  인기척에 달아 났다.  자세히 보면 귀엽다.

 

법계사 1,450m 를 앞두고 서편으로 기우는 해 그림자에 어린 중산리 계곡을 마주했다.   하산하는 사람은 혼자였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법계사는 지나쳤다. 법계사(法界寺)는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찰이다.신라 진흥왕 9(548)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에 이어 세운 사찰이다. 이 절에는 최초의 지리산 기행기를 남긴 이륙(李陸)이 세조 7(1461) 청운의 뜻을 품고 말바리에 수백 권의 책을 싣고 와 3년 동안 머물면서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도 머물었다고 하여 바로 인근 바위 이름이 문창대(文昌臺)’로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절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고려 우왕 6(1380) 왜구의 방화로 소실된 데 이어 1908년 다시 의병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1938년 신덕순(申德順) 보살이 사찰을 복구했으나, 19481019일 여순병란의 격전 속에 다시 붙태워졌다. 현재의 법당은 1981년 조재화(曺在樺), 재연(在鍊), 재영(在永)씨의 불사로 세워졌다고 사찰 앞의 현판에 기록돼 있다.

 

 

 

겨울나무 움터는 3월이다. 4월 초나 중순에 왔다면 또 다른 장관에 압도되었을 장면들이다.

 

백무동으로 오를 때 보았던 거제수나무 군락지다. 로터리산장을 돌아 순두류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으니 1100~1200 고지 정도일듯하다.

 

법계사 쪽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아직 두터운 얼음장이다. 

 

 

 

중봉과 써리봉 사이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전천 계곡이 물 소리 높여 흘러 내린다.

 

일대가 순두류다. 두류산이 순하게 흘러 평지가 되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국수봉 자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경남 환경교육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한때의 저물녁 하산길이 떠올랐다.   촛대봉으로 해서 하산하던 길이었는데 그때는 여름이었고 많이 어두웠다.  조급한 마음에 빠른 하산을 하느라 길을 벗아나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  하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다행 불빛이 보이고 무작정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으로 들어가  1박을 요청했고 맘 좋은 주인의 배려로 밥까지 얻어먹고 단 잠에 빠진적이 있었다.  그때도 혼자였다. 

 

그랬다.  그런데 막상 내려서니 길이 대로다.  언제 이렇게 넓어졌나 싶다.

 

비포장이 끝나는 길에서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중산리 시외버스 터미날 까지 약 3km  다리는 풀렸고 시간은 촉박했다.

 

될대로 되라 는 심정으로 아스팔트를 따라 걷자니 차량 한대가 다가 온다.  고로쇠물을 받으러 왔다 귀가하는 중산리 마을 분이었다.  손을 들자 선뜻 차를 세우고 태워 주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마지막으로 중산리 계곡을 보았다.  이 계류가 흐르고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여 남해로 들 것이다.  마주한 물이 낙동강 하구에 도착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지난 며칠을 시전천에 실어 보냈다.

 

간만에 찾았던 지리산을 정리해 본다. 뜻밖의 도움이 있었고 뜬금없이 찾아도 재워주고 먹여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한 내게 격려와 떠남을 권했던 많은 사람들 고마움을 전한다. 

 

문득 당일치기 지리산이란 것이  웬지 가볍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이동수단의 발달과 노골적인 개발의  덕택이다. 나는 거기에 기꺼이 편승했고   실제 옛날 지리산 방문은  어지간히 마음먹지 않고서는 어려운 행보였다. 물론 장비나 접근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그런점에서 본다면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한떼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들기까지의 과정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창립된 삼천리탐승회는 부산에서 1516일의 일정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왔다. 당시 부산에서 진주까지는 기차를 탔고, 진주에서 천왕봉에 가려면 하루 1편뿐인 버스를 타고 덕산(德山)에 닿은 뒤 40~50의 짐을 메고 걸어갔는데, 중산리까지 2~3일 걸렸다.또한 전란 직후여서 등산로가 제대로 나있지 않아 짐을 두고 1~2전진, 등산로를 확인한 다음 짐을 올리는 식으로 등정을 했다.’이종길의 <지리영봉>

 

 

아무튼 큰 준비없이 무탈하게 잘 올랐고 또 내려왔음에 감사할일이다.  차를 타기 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급히 산채 비빔밥으로 허기를 지웠다.

 

부산행 진주경유 시외버스 승객은 나 혼자 였다.

 

어둠에 묻혀버린 차창 밖을 보며 지난 사흘간의 나들이를 되새겨 보았다.

지리산은 이땅의 사람들 누구나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늘 푸른산이다.
오윤 지리산.2  1984정비파 아, 지리산 2, 1998

Vem Vet  - Lisa Ekda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