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착한기업이 살아남는다 비즈니스워치 2.13~5.23
사회와 상생 외면하면 경영위기 봉착
기업들 "이윤에서 행복추구로"..법·제도 정비도 나서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북서쪽으로 230㎞ 떨어진 보그라(Bogra) 지역에 2006년 11월 작고 아담한 요구르트공장이 문을 열었다.
빈민층 소액대출로 유명한 그라민은행과 프랑스의 유제품기업 다농이 손잡고 세운 이 공장은 웬만한 요구르트공장의 10분의 1도 안되는 규모(공장면적 700㎡)지만 단숨에 전세계 시민단체와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이슈메이커로 부상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영양실조와 빈곤 문제를 개선할 '작지만 의미있는 시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회사명은 '그라민 다농 푸드(Grameen Danone Foods)'. 노벨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가 다농그룹 회장인 프랑크 리부에게 제안해 설립됐다. 이 공장은 '샥티도이(Shokti Doi)'라는 떠먹는 요구르트를 생산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구르트에 비타민A·철·아연·칼슘 등 필수영양소를 넣어 한컵만 먹어도 하루 권장량의 30%를 섭취할 수 있게 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당시 방글라데시는 발육정지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가 전체의 43%에 달했다. 처음 샥티도이 가격은 80그램짜리 하나가 5타카로 우리돈 100원이 안됐다. 방글라데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요구르트보다 40% 가량 저렴한 가격을 책정해 극빈층 어린이들에게 최소한의 영양소를 공급하도록 구상한 것이다.
◇ 요구르트가 일으킨 작은변화
그라민 다농 푸드가 더욱 주목을 끈 건 일자리 문제의 해법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그라민 레이디'라는 여성들을 통해 집이나 마을로 샥티도이를 가져가 판매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야쿠르트 아줌마와 비슷하다.
주원료인 우유도 현지 농가로부터 직접 구매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꾀했다. 이런식으로 그라민 다농이 창출하려는 일자리 목표는 공장 하나당 1600개에 달한다. 지금도 이 회사는 직접고용 300명을 비롯해 400명의 협력 농가, 수백명의 여성 판매원 소득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말 컨설팅그룹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UN의 지속가능 개발목표가 기업에 주는 시사점을 다룬 보고서(Navigating the SDGs)를 냈는데 여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시킨 사례가 그라민 다농 푸드였다. PwC는 "다농은 이 프로젝트로 영양소가 담긴 제품을 저렴한 비용으로 만드는 방법과 빈민층에게 상품을 파는 법, 새로운 시장 진출전략 등을 배웠다"고 평가했다.
◇ 국내기업 "앞만 보고 달렸다" 자성론
국내에서도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커지면서 이윤 추구 일변도의 경영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살듯 기업이 속한 사회가 발전해야 기업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기업 내부에서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골목상권 침해논란에 부딪쳐 위기를 맞은 대형마트가 단적인 사례다. IMF 외환위기 때도 매년 수십개씩 점포를 내며 고속성장을 하던 대형마트들은 2010년대 들어 전통시장 몰락의 주범으로 몰려 지금은 출점규제와 영업규제를 동시에 받는 고달픈 처지가 됐다.
그 결과 산업통상자원부가 집계한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의 매출은 2012년부터 5년 연속 역성장했다. 대형마트 한 관계자는 "너무 앞만 보며 달려온 거다. 과거엔 규모를 키우는 게 선(善)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마트가 전통시장과 판매품목이 겹치지 않도록 일부 점포에서 신선식품을 빼고 홈플러스가 우수 농산물 산지마을과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것도 지역사회와 상생없이는 장기적인 영업기반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윤'보다 중요해진 '이해관계자 행복
기업의 핵심가치에서 '이윤'이란 용어를 빼버린 기업도 등장했다. (주)SK와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SK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일제히 정관을 바꿨다. 기존에는 "미래성장을 위해 충분한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해야 한다"고 명시해왔던 것을 "이해관계자간 행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한다"로 바꿨다. 돈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업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관에 못박은 것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사회와 함께 하지않는 발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SK그룹은 지난 2012년 그룹 계열사 등에 사무용품이나 기자재를 공급하는 회사인 MRO코리아(現 행복나래 주식회사)를 사회적기업으로 바꾸는 통큰 실험에 나서 화제를 모았다. "사회적기업이 다양한 사회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다"는 최태원 회장의 소신이 반영된 결정이다.
현재 행복나래는 사회적기업 194개사의 제품을 사들여 판매하는 등 사회적기업들의 플랫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4468억원어치를 팔아 53억원(영업이익)을 남겼는데 이렇게 번 돈 대부분(49억원)을 사회적기업 육성을 위한 기부금으로 썼다.
◇ 사회적책임, 선택 아닌 필수
경영권 분쟁과 검찰수사, 사드 이슈 등 잇단 악재로 몸살을 앓은 롯데그룹도 환골탈태를 꾀하는 중이다. '매출 200조를 달성해 아시아 톱10 기업이 되겠다'는 기존 비전이 성장을 지나치게 강조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롯데그룹은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시작된 폐쇄적 지배구조 등으로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는 정체성 논란에 휘말렸다. 수많은 협력사와 관계에서 갑질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 여론이 켜켜이 쌓이면서 위기가 한꺼번에 닥쳤다는 게 롯데그룹의 진단이다.
황각규 롯데그룹 경영혁신실장은 지난달 초 그룹 비전 설명회에서 "최근 깊은 성찰을 통해 기업의 목표는 매출성장과 이익확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롯데라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에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매출과 이익, 비용 등 정량적 숫자에 가려 그 중요성이 덜 조명받긴 했지만 앞으로 기업의 사회적책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고 있다.
해외에선 기업이 환경(기후변화), 사회(노동·인권), ·지배구조(경영투명성) 문제를 소홀히 하면 기관투자자들이 투자를 철회하는 등 #[사회적 책임]이 실질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도는 일정규모 이상의 회사에 직전 3년간 평균 순이익의 2% 이상을 사회적책임 활동에 쓰도록 아예 법률(2013년 회사법 개정)로 규정해놨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하려면 법과 제도 등 인프라 정비가 필수적"이라며 "특히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기금들이 전면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현대자동차·SK·LG전자 등의 국내 주요기업의 1대 주주나 2대 주주로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공약하는 등 착한기업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면서 기업들로선 좋든 싫든 변화가 불가피해지고 있다.
2 "사회적책임은 곧 기업가치 키우기"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인터뷰
"사회적책임 환경 열악..정부 인프라 구축 시급"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 꾸준히 강조되고 있지만 사회적책임에 대한 기업이나 일반의 이해도는 여전히 낮다. CSR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차원에서 변변한 정책하나 나온 적 없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10년 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을 발족해 기업의 사회적책임 필요성을 알리는데 공을 들인 양춘승 상임이사는 "사회책임은 기업이 살아 남고 인간이 살기 위해, 또 지구가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5년 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지만 왜 '기-승-전-사회적책임'인지를 양춘승 상임이사에게 들어봤다.
-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 사회적책임이 이윤으로 이어질 수 있나
▲ 당장은 이윤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책임을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장기적으로 반드시 기업의 가치를 올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실제 많은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선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실천하면 종업원의 자부심과 충성심이 올라가고 이직을 줄일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의 생산성이 올라간다. 이는 소비자의 신뢰로 이어지고 브랜드가치까지 올려준다. 기업에 대한 신뢰와 브랜드가치가 상승하면 투자자를 유도해서 자본조달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특히 이런 투자는 장기투자이기 대문에 기업 입장에서 유리한 자본조달방법이 된다.
공급망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하청업체나 납품업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질 좋은 원부자재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된다. 또 지역주민들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브랜드가치의 상승은 브랜드 보험으로 이어지는데 실수를 하더라도 한번에 신뢰를 잃지 않게 된다. 작은 실수 정도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장기적으로 무조건 득이 된다.
- 기업의 일상인 고용, 납세 등은 사회적책임이라 보기 어려운가
▲ 기업의 사회적책임은 고용창출하고 돈을 벌어 세금을 내는 것으로 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제적책임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사회적책임은 경제적 책임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적책임은 경제적책임 이외에 법적책임, 윤리적책임 그리고 재량적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윤 극대화만 추구했을 때 기업이 법률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사회적 비난을 받는 행위를 한다면 CSR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이키가 동남아에서 미성년자들을 고용한 사실이 확인되자 주가가 폭락했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옥시 사건으로 이윤추구와 사회적책임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확인됐다.
사회적책임은 법적, 경제적책임 그 이상의 것이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룰을 따르라는 것이다. 몸에 좋지 않은 화학물질에 대해서도 일정양까지는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데 사회적책임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까지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 우리나라 기업의 사회적책임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 아직도 많은 기업이 사회적책임은 돈을 벌고 나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돈 벌기 이전부터 해야할 일이 사회적책임이다. 우리나라 1900여개의 상장기업 중에서 지속가능 보고서를 발행하는 기업은 100개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에 CSR발전 단계론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책임을 최고 수준으로 잘하는 기업도 중간점수 밖에 못받을 것이다. 아주 잘한다는 기업이 그 정도다. 중소기업은 이름도 못 꺼낸다.
- 한국에서 CSR 잘한다고 평가할만한 기업은 어디인가
▲ 내세울 만한 곳이 유한양행인데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가 창립초기부터 사회적책임을 열심히 이행한 기업이다. 요즘은 LG그룹이 전사적으로 CSR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청업체들까지 독려해서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중소기업은 사회적책임에 소홀한데 대기업이 서포트하면서 신경 써주는 것은 높은 점수를 받을만 하다. 또 KSS해운이라는 곳은 종업원 이익공유제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는데 주주가 아닌 종업원들에게도 이익의 3분의 1정도를 배분해서 종업원들 스스로 부패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금융 쪽에서는 신한금융지주가 이사회 내에 사회책임경영위원회를 만들고 사외이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해서 사회책임을 운영하고 점검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성과도 많이 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사회적책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 정부 역할이다. 자본주의에서 정부의 역할은 게임의 룰을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돈 버는 것 이상으로 사회적책임을 잘 이행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이를 감독해야 한다. CSR인프라를 구축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업들이 재무제표만 공개하고 있는데 사회적인 성과 즉 인권침해 여부, 성폭력, 노동쟁의, 온실가스 배출 정도 등을 모두 시장에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국민연금 등 연기금들이 이런 것을 잘하는 기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법인세를 감면해 주는 등 세제지원도 하고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국정농단에 재벌 대기업이 개입되는 등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런 부분에서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고 구체적인 이행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겼으면 한다
3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힘
2003년 국내 도입 후 늘고 있지만 속도 느려
'비재무적 지표 공시' 제도화해야 효력
자본은 비정하다. 이익을 남겨 몸집을 불려야 산다. 기업은 인간적 선의로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그 본질은 이익 추구다. '사회적책임'에 대한 태도도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기업이 여유가 있을 때야 잘 챙기지만 생존 위기에 몰리면 후순위로 밀린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가 말로 내뱉어지거나 글로 남겨지면 다르다. 특히 사회적책임 이행 성과가 기업의 언어인 숫자로 장부나 외부 공표 보고서에 쌓이면 등한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게 지속가능경영보고서(Sustainability Report)다.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는 성장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종전에는 이윤창출 능력에 초점이 맞췄졌다면 이제는 동반성장·사회공헌 기여도, 투명한 지배구조 등이 중요한 척도다. 지속가능경영을 추구하는 윤리적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게 이제는 지배적인 인식이 됐다. 이는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기업관'으로도 여겨진다
사회적책임, 길을 묻다…100년 기업을 위하여
2003년 국내 도입 후 늘고 있지만 속도 느려
'비재무적 지표 공시' 제도화해야 효력
자본은 비정하다. 이익을 남겨 몸집을 불려야 산다. 기업은 인간적 선의로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그 본질은 이익 추구다. '사회적책임'에 대한 태도도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기업이 여유가 있을 때야 잘 챙기지만 생존 위기에 몰리면 후순위로 밀린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가 말로 내뱉어지거나 글로 남겨지면 다르다. 특히 사회적책임 이행 성과가 기업의 언어인 숫자로 장부나 외부 공표 보고서에 쌓이면 등한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게 지속가능경영보고서(Sustainability Report)다.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는 성장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종전에는 이윤창출 능력에 초점이 맞췄졌다면 이제는 동반성장·사회공헌 기여도, 투명한 지배구조 등이 중요한 척도다. 지속가능경영을 추구하는 윤리적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게 이제는 지배적인 인식이 됐다. 이는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기업관'으로도 여겨진다
◇ 보고서 펴내는 기업 12년새 32배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기업의 경영 과정에서 사업적 손익 및 재무상태뿐만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성과를 이해 관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기업에 따라서는 사회적책임 보고서(CSR Report), 통합 보고서(Integrated Report)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한국표준협회, 한국생산성본부 등이 구축하고 있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데이터베이스(DB)를 살펴보면 종합적으로 환경·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 국내 기업은 2015년 현재 126곳이다. 지난 2003년에 삼성SDI, 현대자동차, 교보생명보험 등 단 3곳에 불과지만 12년 사이 32배로 늘어났다.
환경에 대한 보고서까지 따지면 이보다 역사가 길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환경보고서'는 이미 1990년대 후반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어 2002년 당시 참여정부 환경부가 '환경보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대기업들 사이에 환경보고서가 점차 확산됐다. 2003년부터 환경과 사회를 함께 다루기 시작해 2000년대 후반 들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로 통합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한 기업은 대한항공이었다. 이 항공사는 1995년 국내 최초로 환경보고서를 발간한 후 2005년부터 사회 이슈까지 다룬 환경·사회보고서를 펴냈고 2006년 이후로는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매년 내고 있다. 삼성전자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2000년부터 '녹색경영보고서'를 발간한 뒤(2002년, 2003년 미발간) 2006년, 2007년에는 환경·사회보고서를, 2008년 이후로는 지속가능성경영 보고서를 내고 있다.
◇ 수식어 덜고 숫자 채워야 '지속가능'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이 점점 늘어난 이유는 사회적으로 잘한 일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시민사회와 소통한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서다. 하지만 대기업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속가능보고서 발간을 거르거나 아예 펴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CSR 평가연구기관인 IGI(Inno Global Institute)이 지난 2월 조사한 결과 시가총액 기준 100대 기업중에는 42곳이 작년에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았다. ▲네이버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SDS ▲고려아연 ▲우리은행 ▲IBK기업은행 ▲엔씨소프트 ▲이마트 ▲한국항공우주 ▲한화생명 ▲CJ ▲한샘 ▲삼성카드 등 13곳이 50위내 대기업중 지속가능보고서를 펴내지 않은 기업이다.
작년 8월 산업정책연구원 조사에서는 2015년 매출액 상위 200대 기업중 46.5%인 93개 기업만 해당년도 지속가능보고서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홍보성 자료로만 인식하는 일도 다반사다. 사회 및 환경 활동에 대한 수사(修辭)만 채워 해외 법인 영업이나 투자유치를 위한 해외 넌딜로드쇼(NDR), 컨퍼런스 등 대외홍보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 201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나타난 LG전자 비재무적 성과 추이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기업들이 내보이는 지속가능경영과 관련한 지표들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비재무적 성과 공시에 대한 표준을 정형화해 시행토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사회공헌 활동의 경우 대다수 기업이 투입 금액은 밝히지 않고, 주요활동을 나열하기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지속적으로 공시하게 하면 성과 측정과 기업간 비교가 명확해 질 수 있다.
인도나 유럽연합(EU) 등은 이미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사회공헌 및 책임경영 관련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이를 보고서에 의무적으로 담도록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모 그룹 사회공헌활동을 총괄했던 전직 임원은 "지속가능보고서는 핵심 이슈에 대해 이해관계자가 의사결정을 하는 데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며 "손익계산서처럼 긍정적 내용 뿐만 아니라 부정적 내용도 균형 있게 기술하고, 비교 가능한 척도를 정확하고 적시에 공시하도록 기준을 제도화해야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효력이 현실화할 수 있다
▲ 2015년 현대건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중 장기지속가능경영 목표 및 성과 측정지표
기업 사회적책임 활동 현주소는
2015년 주요기업 2조9020억 지출 취약계층 지원 많아..문화체육 지원 증가 추세
재원 부족·선심성 지원요구 등 저해요인
한국에서 기업들의 사회공헌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과거 산업화 시대 급속성장 시기를 지난후, 기업들의 사회적책임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공헌 활동도 주목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들도 단순한 지원 일변도의 사회공헌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활동에 나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개념을 넘어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인식의 변화가 작용한 결과다.
다만, 아직 기업들의 사회공헌을 바라보는 안팎의 인식이나 관련 규제 등 정비가 필요한 부분이 산적한 것도 현실이다.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제시한 용어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V, Creating Shared Value)과 구별된다. CSR은 기업의 이익과 관계없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성격이 강한 반면 CSV는 기업과 사회적 약자 혹은 지역사회가 함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개념이다.)
◇ 사회공헌, 이미 수조(兆)원 영역
사회공헌은 통상 개별적으로 수행되는데다 분야 또한 다양해 전체 상황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사회공헌 활동의 역사가 짧고, 아직 대기업 위주의 활동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주요기업들의 활동을 통해 전체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요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간하는 사회공헌백서에 따르면 지난 2015년 주요기업 255개사의 사회공헌 지출은 총 2조9020억5073만원으로 집계됐다. 1개사 평균 지출규모는 113억8059만원으로 나타났다. 전년에 비해 6.8% 증가했다.
주요기업들의 사회공헌 지출은 지난 2000년 이후 급속하게 증가해왔다. 2000년 7000억원을 소폭 상회했던 지출은 2002년 1조원을 넘었고, 2007년까지 매년 두자릿수 성장을 이어갔다. 2008년에는 2조1601억원으로 첫 2조원 시대를 열었고 2011년에는 3조원도 돌파했다. 연도별로는 2012년 3조2534억원이 가장 많은 수치다.
가파르게 증가하던 사회공헌 지출은 2013년 경기침체 영향 등을 받으며 다시 2조원대로 내려갔고, 2014년 역시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2015년 다시 증가세를 보이며 3조원에 육박한 상태다. 전경련은 사회공헌 지출이 증가세로 돌아선 요인을 ▲지역기반 인프라 프로젝트 추진 ▲청년지원 프로그램 확대 ▲내수활성화 사업추진 등으로 분석했다.
전경련 백서에 따르면 매출의 0.1%~0.5% 정도를 사회공헌에 지출한 기업들이 가장 많았다. 전체 기업들중 42.4%가량을 차지했다. 1% 이상을 지출한다는 기업은 18개로 7.1%, 0.02% 미만인 곳은 35개로 13.7%로 나타났다. 연도별 매출액 대비 사회공헌 지출비율은 2011년이후 2년간 감소했지만 2013년부터는 소폭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 2015년 비율은 0.19%로 집계됐다.
◇ 취약계층·교육 분야·문화체육 집중
기업들의 사회공헌 지출은 취약계층, 교육분야, 문화체육 등 3대 분야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3년 전체 사회공헌 지출 중 이들 3대 분야는 70.3%를 차지했다. 2014년과 2015년은 각각 63%, 67.4%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공헌 지출은 최근 비중이 축소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장 많은 재원이 투입되고 있다. 지난 2009년의 경우 취약계층에 대한 지출이 전체의 절반을 넘기도 했다. 이후 다른 분야 지원이 확대되며 30% 안팎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취약계층 지원은 전체의 33.5%를 차지, 전년의 29.5%에 비해 증가했다.
취약계층 지원은 전통적으로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온 영역이고, 사회가 복잡·다변화되면서 지원분야와 대상이 세분화되며 지출비율이 늘어났다는 것이 전경련의 설명이다.
최근 3년의 경우 교육분야에 대한 지출은 감소한 반면 문화체육의 비중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교육분야 지출은 2013년 23.7%에서 2014년 18.2%, 2015년 17.5%로 낮아졌다. 문화체육은 같은 기간 12.7%에서 15.3%, 16.4%까지 높아졌다. 전경련이 분야별 지출을 집계하기 시작한 2006년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삶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문화예술을 수단으로 활용한 교육·치유 프로그램이 증가한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사업파트너는 비영리단체(NPO, Non-Profit Organization)를 선택하는 경우가 31.7%로 가장 많았고 정부나 지자체와의 협업도 21.6%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성을 가진 비영리단체와 협업하거나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필요성 등이 작용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기업들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비율은 28.4%로 나타났다.
지원형태도 시설건립이나 물품 등 하드웨어 지원은 18.6%, 심리치료나 경제교육 등 소프트웨어 지원은 29.1%인데 반해 혼합형은 52.3%에 달했다. 기업들이 단순한 지원보다 프로그램 연계를 통한 다각적 지원을 추진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 '갈 길은 멀다'
역사가 짧지만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이 성숙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전경련 백서에 따르면 주요 기업들의 사업 추진기간은 '4~6년'이 36.2%로 가장 많았다. 대표적인 사회공헌프로그램 평균 나이는 8.1세로 조사됐다. 10년 이상 프로그램은 29.7%로 조사됐다.
다만 넘어야 할 과제들도 여전했다.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기업들은 안팎에서 다양한 장벽들과 마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경련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내부적으로 가장 큰 애로요인으로는 '자체사업을 위한 예산부족'이라는 응답이 22.1%로 가장 많았다. 준조세 성격의 기부금이나 외부협찬 요구 등으로 인해 자체사업 추진을 위한 실질적인 재원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또 내부 임직원 관심부족(21.4%)과 단기 성과위주 평가(17.5%)도 주요 저해요인으로 제시됐다. 특히 경기불황이 이어지면서 기업 내부적으로도 사회공헌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평가다. 그외에 이슈에 대한 전문성 부재, 담당인력이나 조직 축소·부재, 전사차원 기획기능 부재 등도 내부적인 저해요인으로 꼽혔다.
외부적으로는 '외부의 선심성 지원 요구'라는 답이 40.3%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치권의 무상복지 공약이나 선심성 정책으로 무상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기업들의 사회공헌을 '가진 자', '눈먼 돈' 이라는 인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회적 무관심(14.7%), 반기업 정서로 인한 왜곡된 시선(13.9%), 사회문제에 대한 체계적 정보 부족(12.4%) 등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으로 제시됐다. 그밖에 외부기관과의 파트너십 어려움, 법·제도로 인한 제약 등도 저해요인으로 꼽혔다.
전경련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함께 기업들도 단순 기부나 일회성 외부 협찬보다는 기업의 핵심가치와 특성을 살린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Sing, Sing, Sing - Anita O'Day (191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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