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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리처드 세넷

by 이성근 2020. 1. 13.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저자 리처드 세넷|김영사 |2020.01


리차드 세넷 (Richard Sennett) 미국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런던정경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노동과 도시화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회학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 음악, 예술, 문학, 역사, 정치경제학 이론까지 두루 막힘이 없는, 학문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다. 1943년 공산당원인 아버지와 노동운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빈곤과 범죄로 악명 높은 시카고의 공공주택 카브리니그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세에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할 정도로 첼로에 재능을 보였고, 프로 연주자를 꿈꾸며 1961년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졸업했지만 이듬해 발병한 손목굴증후군으로 음악가의 꿈을 접고 학계에 입문했다. 19세에 처음 만난 한나 아렌트를 스승으로 삼아 함께 공부하며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학, 역사, 철학을 공부해 1969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며 배웠다. 1977년 수전 손태그 등과 함께 뉴욕인문학연구소를 창립했으며, 1987년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과 결혼했다. 미국노동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유네스코와 유엔해비타트 등 유엔 산하의 여러 기구에서 일했다. 컬럼비아대학교 부속기관인 자본주의와 사회 센터의 선임연구원이자 교육 및 연구를 통해 도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설립된 단체 테아트룸 문디의 의장이기도 하다. 학자로서의 삶 외에 정원을 가꾸고 요리하며, 여전히 첼로를 연주한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사회과학아카데미, 영국학술원, 왕립문학회 등 여러 학술 단체의 회원이며, 2006년 헤겔상, 2010년 스피노자상, 2018년 대영제국훈장(OBE) 등을 받았다. 도시사회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살과 돌》 《공적 인간의 몰락》 《눈의 양심, 1998년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란 평을 얻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를 비롯해 노동사회학의 명저로 평가받는 계급의 숨겨진 상처》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뉴 캐피털리즘등을 썼고, 소설도 여러 편 발표했다.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호모 파베르)이 개인적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설명하는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을 구성하여 장인》 《투게더를 썼다. 짓기와 거주하기는 이 프로젝트의 완결편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비틀린, 열린, 소박한

비틀린열린소박한

 

1부 두 개의 도시

2. 불안정한 기초

도시계획의 탄생한 엔지니어 이야기시테읽기 힘든 것군중현대적이지만 자유롭지 않다막스 베버는 불행하다

3. 시테와 빌의 이혼

사람과 장소의 헤어짐균열이 커지다도시를 어떻게 여는가

 

2부 거주의 어려움

4. 클레의 천사가 유럽을 떠나다

비공식적인 거주 방식델리의 미스터 수디르그들은 점거하지만 거주하지는 않는다.”상하이의 Q 부인클레의 천사가 유럽을 떠나다모스크바에 간 발터 벤야민

5. 타자의 무게

거주이방인, 형제, 이웃기피하기두 가지 거부비교하기가까이에 있는 계급섞기정중함의 가면

6. 테크노폴리스의 토크빌

새로운 종류의 개인초연한 토크빌새로운 종류의 게토구글플렉스마찰 없음 기술사용자 친화적이라는 것은 사용자들에게 정신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가두 개의 스마트 시티처방 혹은 조정

 

3부 도시의 개방

7. 유능한 도시인

스트리트 스마트한 장소를 건드리고, 듣고, 냄새 맡기걷기의 지식낯선 장소에서 자리잡기대화적 실천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기파열 관리이민자, 모범적인 도시 거주자

8. 다섯 가지 열린 형태

중심은 동시적이다두 개의 중심적 공간과 실패한 설계구두점 찍힌 곳기념비적이고 세속적인 표시들다공성세포막미완성셸과 일반형다중성씨앗 계획

9. 만들기의 연대

공동 제작열린 형태로 작업하기협동은 하지만 가깝지는 않은사회성

 

4부 도시를 위한 윤리

10. 시간의 그늘

자연이 도시를 공격하다장기적, 단기적 위협파열과 결착정상적인 도시 시간수선품질 테스트

 

결론: 여럿 중의 하나

 

감사의 말

해제

옮긴이의 말

도판 목록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분리와 차별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기후변화 같은 위협과 불확실성에 맞서 더 잘 회복되는,

열린 도시를 향한 성찰과 제언

 

세넷은 이 책에서 고대 아테네에서 21세기 상하이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도시에 대해 사유하고 제안한다. 파리, 바르셀로나, 뉴욕이 어떻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되었는가를 돌아보면서 제인 제이콥스, 루이스 멈퍼드를 비롯하여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등 주요 사상가들의 생각을 살펴보는가 하면, 남미 콜롬비아 메데인의 뒷골목에서 뉴욕의 구글 사옥, 한국의 송도에 이르는 상징적 장소를 돌아다니며 물리적인 도시가 사람들의 일상 경험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고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킬 수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건설되는 물리적 도시인 ville’과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정신적 도시 시테cite’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주되어 있는 이 책에서, 세넷은 넓고 깊은 지식과 섬세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닫힌 도시, 즉 건축적 분리와 사회적 불평등이 서로를 강화해주는 도시가 어떻게,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대안으로 열린 도시를 제안한다. 열린 도시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고 받아들이며 복잡성을 다루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기후위기 같은 단기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위협과 불확실성에 맞서서도 더 잘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도시계획의 어머니제인 제이콥스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지적 여정

학문적 통찰, 세심한 관찰, 대상에 대한 배려가 어우러진 생생한 글쓰기

문학으로서의 도시사회학, 이것이 에세이다!

 

세넷의 글은 특색이 있다. “현실의 스냅사진으로 커다란 사유에 생기를 더한다는 한 언론사의 평가는 결코 수사가 아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곧바로 사회학적 이론과 사회 현실의 논의로 연결하며, 수시로 화제를 바꾸면서 좌충우돌하는 것 같지만 어느새 핵심을 말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와 사회학적 이론이 지극히 유연하게 연결된다. 세넷은 그의 첫 번째 저서 무질서의 효용문학의 형태를 띤 사회학이라고 말하며 도시계획 입문서나 사회학 논문이라기보다는 도시 문화를 성찰하는 에세이로 읽어줄 것을 당부했다. 이 주문은 짓기와 거주하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도 델리의 시장인 네루 플레이스에서 저자가 직접 만난 노점상 미스터 수디르는 이 문학으로서의 사회학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만큼 4장에 처음 등장한 이후로 마지막 결론까지 곳곳에 등장하는데, 8장에서는 세넷의 상상 속에서 도시를 설계하기까지 한다. 이 외에도 중국 상하이의 Q 부인이나 남미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길 안내하는 소년들과의 경험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행위와 사건에서 사회학적 의미를 뽑아내는 세넷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인상적인 부분이다. 독자들은 마치 세넷과 함께 이들을 만난 듯이 느껴질 것이다. 깊은 학문적 통찰, 세심한 관찰, 대상에 대한 배려가 그처럼 활발하고 생생한 글쓰기의 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이 책은 도시계획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제인 제이콥스가 세넷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지적 여정이기도 하다. 비공식적이고 자유롭고 느슨한 방식을 지지한 제인 제이콥스와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바라보는 큰 규모의 도시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루이스 멈퍼드 간의 논쟁을 소개한 뒤, 세넷은 제이콥스와의 만남을 회상한다. “처음으로 내가 시테와 빌의 관계를 알아내려고 애쓰던 무렵에, 제인 제이콥스에게 시테에 관해서는 그녀가 멈퍼드보다 낫고, 빌에 관해서는 멈퍼드가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략) 내 말을 듣고 그녀는 퉁명스럽게 돌아서서 이렇게 물었다.”(136)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이 물음은 1부 마지막에 나오는데, 독자는 세넷이 그 답을 찾았을지, 어떤 답일지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다. 책 곳곳에 나오는 이런 장치는 탁월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의 솜씨이다.

 

이 도시에서, 어떻게들 살고 있습니까?”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장소에 거주하며,

삶을 짓고 세계를 건설하려 분투하는

인간을 위한 도시사회학

 

세넷은 지어진 것the built과 사는 것the lived, 즉 빌과 시테 사이의 균열이 세 가지 이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한다. 첫 번째는 도시의 팽창, 고속 성장이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의 도시지역 인구비율은 92%에 이른다. 세계적으로도 55%,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며,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여 2050년이 되면 세계인구 10명 중 7명이 도시에 살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가 가장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상대적으로 저개발 상태였던 인도, 중국, 나이지리아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인데, 이들 지역의 델리, 상하이 같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폭발적 성장과 그에 따른 몸살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속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에게도 익숙하다.(4)

 

두 번째는 타자의 배제다. 20151, 독일 드레스덴에서 페기다(PEGIDA)라는 반이슬람 단체가 시위행진을 했다. 이들은 우리 문화의 보존을 위해 독일에서 이슬람의 추방을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드레스덴 외의 대다수 지역에서는 반페기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더 많았고, 1년도 채 안 되어 독일은 시리아 내전에서 탈출한 난민들을 형제로서 맞았다. 이제 통합이 남았다. 세넷에 따르면 난민들에게 통합은 실제적으로는 구원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상실인데, 이들이 새로운 사회에 통합되어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난민 같은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타자를 오늘날의 도시는 공간적으로 분리시킨다. 우리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5)

 

세 번째는 테크놀로지 이슈이다. 테크놀로지는 삶을 부드럽고 매끈하게 만들어 타자의 무게를 가볍게 해준다. 꿈의 직장을 넘어 신의 직장이라고까지 불리는 구글. 세넷은 구글 사옥을 둘러보며 세탁소도 있고, 의사를 만날 수도 있으며, 체육관에서 체력 단련도 할 수 있는 이런 자족적 공간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묻는다. 이런 건축 양식은 주변 지역의 주택 가격과 임대료를 올려 젠트리피케이션을 조장하고, 회사가 외부의 자유 시장을 파괴할지라도 내부에서는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교환을 자극하도록 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아무 저항 없는 내향적 환경이 정말로 창조성을 고무할까? 세넷은 마찰 없는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가치가 사용자들에게 어떤 정신적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한국의 송도와 브라질의 쿠리치바 등 두 종류의 스마트 시티를 비교하며 보여준다.(6)

 

이것이 세넷이 읽은 오늘날의 도시와 속하지 않는 곳을 헤매면서 스스로를 정착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184)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인생의 끝자락에서 낙관론자가 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말한 세넷은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에게 열린 도시를 만들 수 있을지 자신의 실험과 도전을 공유하며 함께 고민해보자고 제안한다    

  

책속으로

초기 기독교에서 '도시city'는 두 개의 도시, 그러니까 신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를 의미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1784년에 쓴 코스모폴리스에서의 삶을 다룬 논문에서 인간이라는 비틀린 재목으로는 곧은 물건을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도시는 수십 개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성분의 이주자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비틀려 있다. 또 그 속의 불평등성이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에 비틀려 있다. 날씬하고 세련된 여성들이 점심식사를 하는 장소에서 바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지친 청소부가 있고, 젊은 졸업생 수는 너무 많은데 일자리 수는 너무 적다. 물리적 빌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도로를 보행자 전용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주택 위기를 감소시킬 수 있을까? 건물에 강화 단열 유리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이민자들에게 더 관대해질까? 도시는 시테와 빌이 비대칭성이라는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 비틀려 있는 것 같다 P. 10~11

 

도로-속도의 경험이 빠른 것은 자유, 느린 것은 부자유라는 특정한 버전의 현대성을 정의한다. 원하는 곳이 어디든 언제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는 공식은 거주지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축소시킨다. 당신은 그저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P. 58~59

 

P. 109~110 부아쟁 계획은 유동하는 현대성의 한 면모인 과거 지우기를 잘 보여준다. 르코르뷔지에는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혹은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로 지은 새로운 구역을 상상했다. 그런 색을 쓰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물리적 재료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에 도전한다는 의미다. 오래된 건물이나 닳은 포장석은 그 물리적 환경이 사용된 것임을 알려준다.거주는 흔적을 남긴다. 아무 칠도 하지 않거나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는, 건물은 아무도 그곳에 산 적이 없었던 것처럼 언제든지 복원될 수 있다는 상징으로 보였기에 르코르뷔지에에게 매력적이었다. 재료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유혹적인 논리가 있다. 너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와 단절할 필요가 있다. 현재를 살려면 과거의 기억, 습관, 신념을 불러오는 시간이 남긴 표시를 없애라. 빌을 희게 칠하라. 흰색은 새로움과 지금을 의미한다 .P. 109~110

 

헐벗은 권력이 살아남으려면 옷이 필요하다. 즉 스스로를 합법화해야 한다. 성장의 약속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성장은 경제, 정치, 기술적 진보를 한꺼번에 감싸 안는다. P. 146

 

Q 부인은 중국 도시에 대한 서구적 사유의 분별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에게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그 책을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작은 동네, 느린 성장, 상향식 정치를 옹호하는 그 위대한 미국인은 너무 미국적이었기 때문이다. 느린 성장성장은 부자 나라나 누릴 수 있는 여유다. 더욱이 Q 부인은 자발성에 대한 제인 제이콥스의 생각을 순진하게 여겼다. 그녀에게 자발성이란 문화혁명 기간 동안 설치고 다녔던 홍위병 부대를 의미했으니까.... P. 163~164

 

성인 난민들은 스웨덴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해?성인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 일반적으로 그렇듯이?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밖에 없었다. 반면 사춘기 자녀들은 언어 습득 속도가 빨랐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외국어를 쉽게 구사하고 외국 문화를 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점점 동화될수록 애당초 부모들을 그곳에 오게 만든 고고난과 트라우마를 잊어갈지 모른다. 정착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많은 부모가 아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걱정했다. 통합은 실제적인 구원인 동시에 경험적으로는 상실이었다.

당신이 속하지 않는 장소에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 역으로, 그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 .P. 183.

 

나는 운 좋게 레비나스가 토라 해석을 진행한 주간 강의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혼란스러웠다. 왜 그는 히브리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어려운 작업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할까? 시간이 지나, 나는 번역이 바로 그의 윤리적 비전이 다루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언어들은 서로를 향하지만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만난다. 각 언어는 환원 불가능하고 번역 불가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삶에서는 그런 상황이 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이웃은 서로를 향하는 윤리적 존재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심하게 돌아설 수는 없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인간과 신의 관계, 우리의 이해 능력을 넘어선 신적 존재와의 관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P. 186

 

억압받는 자들이 연대하여 뭉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억압은 통합을 낳지 않는다. 차라리 연대는 지배층에게 우리는 통합했기 때문에 강하다라는 것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허구다. 피억압자들은 이 허구를 사실로 믿고 행동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억압자들이 그들의 분열을 이용하여 분할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P. 200

 

마찰 없음을 지향하는 사조는 복잡한 장소의 특정한 사항들에 집중하는 초점 관심을 사소한 수준에서도 유보한다. 예컨대, 찾아가기 힘든 곳에 있는 어떤 지역 카페에 굳이 가지 않고 그냥 스타벅스에 들어가는 식이다. 더 심각한 예를 들자면, 마찰 없음은 흑인이나 무슬림 같은 타자의 전형성만 알아본다. 그 전형성에 맞지 않는 흑인 남자나..무슬림 여성의 특수성을 식별하려면 감정적 노동뿐 아니라 정신적 노동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P. 236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잔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뜬금없이내 아버지는 대머리라고 말한다. 이런 뜬금없는 반응이 사실 당신이 마음속에 오래 묵혀두었던 아버지의 악행에 대한 고백을, 고통스럽고 고착된 독백이라는 물길에서 해방시킨다. 내 아버지의 대머리에 대한 이야기로 당신과 나 사이의 교환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교환을 계속 이어지게 한다는 사실이다. 당신 아버지가 잔혹하다는 사실을 내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술을 한 잔씩 더 주문하면서 그 힌트와 흔적을 당신에게서 찾아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더 할 것이다. P. 289

 

르코르뷔지에는 연속되는 똑같은 고층 빌딩들이 마레 지구 전체로, 나아가 파리 전체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설계는 균질적이고 추가 가능한 부분들로 구성된 닫힌 시스템을 보여준다. 그 무차별성은 Q 부인의 상하이와 한국의 신도시에서 현실화되었다. 그런 곳의 똑같은 건물들은 외벽에 거대하게 적힌 숫자로 구별된다. 그 숫자를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을 분별하기 힘들다. P. 312

 

반에이크의 공원에서 급진적인 요소는 아이들이 어떻게 놀아야 할지에 관한 개념이었다. 그의 공원 안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는 안전을 이유로 도로와 격리되지 않았다. 턱은 있었지만 철제 울타리는 없었다. 반에이크의 입장은 아이들이 차량이 통행하는 곳과 풀밭의 차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고, 아이들은 그것을 배웠다. 이 다공성 때문에 일어난 사고는 거의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어른들을 위해 마련된 벤치는 아이들이 노는 곳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거기서 대화를 나누거나 졸고 있는 노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P. 332

 

제인 제이콥스 이후 어떤 계획가도 로버트 모지스처럼 항복하라. 무엇이 최선인지 내가 안다라고 대중에게 대담하게 선언하지 않는다. 그런 선언 말고도 채찍을 더 섬세하게 휘두를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건축 관련 협의consultation’에는 일반적으로 기획 부서도 포함된다. 그 부서가 가령 새 도로의 위치와 건설 방법에 관한 제안서를 냈을 때, 그 위치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건 사이클 챔피언들이건 항의하면서 큰소리를 내면 기획 부서는 유익한 견해 교환후 이런 반대에 대해 숙고한 다음, 애초에 하려고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일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계획가들은 마치 외교 협상과 비슷하게 기꺼이 폐기할 수 있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제안서에 심어두어, 실제로 협상이 진행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P. 363

 

P. 376 이때 전문가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유엔 계획가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베이루트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일주일 뒤에 돌아와서 당신들을 남겨두고 가서 미안했습니다라고 말하자 남베이루트인이 대답했다. “우리끼리 그럭저럭 해냈어요.” 서로 간의 원한보다 동네에 어느 정도 길이의 전선이 필요한지에 집중한 끝에 그런 일을 .해낸 것이다. 전문가의 퇴장이 따뜻한 화해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차이로 인한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사라져도 계획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P. 376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 첫 번째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그가 두려워한 것이다. 다수가 소수를, 51퍼센트가 49퍼센트를 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개인주의다. 여기서의 개인주의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서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를 두려워했다. 그 그것이 행동의 활기를 소리도 없이 해제해버리기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의 같은 취향과 신념을 공유하는 사회, 삶이 단순화되고 사용자 친화적이 된 사회는 에너지를 잃어가는 사회다.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의 협동이 시들어가는 사회다. P. 387

사회비평가 애시 아민은 칸트식 코즈모폴리턴을 차이에 무관심해진indifferent to difference” 사람, 그리하여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관용은 칼 포퍼가 열린 사회를 규정할 때 핵심적 덕목이었다. 이사야 벌린도 어떤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다분히 상충하면서도 비슷하게 타당한 진리들이 있기 때문에 관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관용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 적어도 진리를 생사가 달린 문제로 보지 않는 무관심에 의존한다 P. 434~435

 

스마트 시티송도가 유령도시가 된 까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 윤리적 도시설계화두로 종횡무진 지적 탐구

중앙집권·타자화된 닫힌 도시아닌 모호하고 복잡한 열린 도시지향

 

민권운동이 한창 타오르던 1960년대 중반, 미국 보스턴 구역의 노동계급 거주지에 새 학교를 짓기로 했다.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는 인종 통합학교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흑백 분리 학교를 만들 것인가? 통합학교를 만들려면 멀리 사는 흑인 아이들을 위해 스쿨버스가 정차하는 큰 주차장을 만들어야 했다. 백인 부모들은 마을에 녹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통합학교를 반대했다. ‘진보적 양심을 지닌 도시전문가들의 고민이 시작됐다. 도시계획가는 지역 주민들이 고수하는 사회의 기존 가치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가? 정의를 물리적 공간으로 재현하는 방법이 가능한가? 근본적 질문. 윤리적 도시계획이란 무엇인가?

 

2016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칠레의 사회 참여 건축가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킨타 몬로이 공동주택단지. 각 세대에 돌아가는 정부의 건축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자, 그는 절반만 완성된 주택을 짓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벌이가 나아지면 스스로 증축·개축할 수 있도록 했다. 아라베나는 진정한 설계란 사람들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영사 제공

 

노동과 도시연구로 저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는 이런 물음에서 출발한다.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기술의 가치를 역설한 <장인>(The Craftsman·2009), 사회적 협력 방식을 도모하는 <투게더>(Together·2013)에 이어 2018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그가 오래 천착해온 주제인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의 완결편이다.

 

짓기-거주하기를 구분할 때 그가 빌려온 개념은 물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ville)과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행동이 담긴 시테’(cite). 도시가 건설되는 방식()과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방식(시테)은 불일치할 때가 많다. 다양한 인종과 계급, 성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는 이해충돌적이며 전문가에 의한 물리적 개선이 곧바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세넷은 빌과 시테의 불일치성이 도시(공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인정하는 한편, 빌과 시테의 균형을 찾아나가려는 전문가와 거주민들의 노력 속에서 도시의 윤리성을 발견한다. 그는 빌만 챙기면 시테가 좋아질 것이라는 르코르뷔지에의 원대한 빛나는 도시이론과 국제주의 건축양식에 반대하며, 식당·게임실·의무실·휴게공간·사무실 등을 모두 한 건물에 몰아넣어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뉴욕의 구글플렉스가 얼마나 비도시적인지고발한다. 스마트시티를 내세우며 데이터의 중앙집권화를 꾀한 인천 송도 신도시는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한 유령 도시라고 일갈한다.

 

그가 지향하는 열린 도시는 역동성·애매모호함·복잡성·의외성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며 정보의 소통과 인간적 교류가 이뤄지는 곳이고, 거주민들이 불확실함 속에서 기민한 태도를 익힘으로써 책에선 배울 수 없는 지혜를 갖춘 스트리트 스마트로 성장하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본인이 만드는 것에도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보스턴 학교를 인종 통합 배움터로 만들면서도 시간대에 따라 놀이터로 이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세넷은 상상해본다.

 

각종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학문적 깊이도 놀랍지만, 뇌졸중으로 방향감각에 손상을 입었으면서도 이를 감각의 확장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열린 태도가 매우 인상적이다. “회복하는 동안 건물과 공간의 관계를 전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공간에 더 광범위하게 적응하게 되었다. 로버트 벤추리가 말하는 (의미의 명료함보다 풍부함을 지지하는) 진짜 도시인이 된 것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참여와 협력이 열린 도시의 윤리

 

짓기와 거주하기>에선 도시는 인간에게 무엇이고,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분리와 차별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기후변화 같은 위협과 불확실성에 맞서 더 잘 회복되는 열린 도시를 강조한다. 사진은 오늘날의 열린 공간인 인도 델리의 네루 플레이스이다. 노숙인들, 전자기기 장물아비들, 사리 상인들이 이곳을 사용하며, 양옆에는 신생기업들이 늘어서 있다. 김영사 제공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3부작 마지막으로 삶의 현장, 도시탐구

물리적 도시 과 정신적 도시 시테두 개념의 팽팽한 긴장

인도 델리 네루 플레이스와 한국 송도 스마트 시티사례 비교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거대 도시의 풍경은 뉴욕이나 런던 그리고 서울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의 재료도 철근콘크리트와 유리로 비슷하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1925년 파리 마레지구를 재개발하는 부아쟁 계획을 발표했다. 마레지구는 가난한 유대인 상인, 갓 상경한 농민,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위그노 직공들이 뒤섞여 사는 습하고 불결한 곳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곳을 평지로 만들고 격자형 공간에 격리된, 하늘에서 봤을 때 X자 형태의 거대한 고층 빌딩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100년 전 계획이지만, 오늘날 을지로 공구상가를 비롯한 서울 재개발 계획이 겹쳐진다. 더러운 거리와 낡은 건물을 쾌적하게 바꾸면 삶의 질은 높아지지만, 과거의 흔적은 지워지고 삶은 단순화된다. 하지만 도시가 역사의 보존을 위한 형태의 박물관으로만 남을 수도 없다. 현대 도시의 딜레마다. 무엇이 옳은 방향일까. 어떤 도시가 좋은 도시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성찰을 담은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가 나왔다. 세넷은 한국 지식사회에도 화두를 던진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 프로젝트’ 3부작을 통해, 구체적 실천으로 스스로의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이 개인적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설명한다.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노동의 의미를 돌아본 <장인>에 이어 <투게더>에서는 실제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인 협력에 주목해 사회적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마지막 <짓기와 거주하기>에선 사람들이 부대끼는 삶의 현장인 도시를 탐구한다.

 

책에선 간명한 정답을 주는 대신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한다. 도시에 대한 논의들을 두루 검토하며 읽는 사람의 생각을 열어준다. 고대 아테네에서 21세기 상하이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도시에 대해 사유하고, 하이데거와 발터 베냐민, 한나 아렌트 등 사상가들의 생각을 살펴보기도 한다. 파리, 바르셀로나, 뉴욕이 어떻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되었는가를 돌아보고, 콜롬비아 메데인의 뒷골목에서 뉴욕의 구글 사옥, 한국의 송도까지 찾아다니면서 도시 환경이 사람들 일상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고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키는지, 혹은 그 반대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에선 두 가지 개념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주된다. 건설되는 물리적 도시인 (ville)’과 시민들이 느끼는 정신적 도시인 시테(cite)’의 관계다. 둘 사이의 긴장은 열린 도시닫힌 도시로 표현된다. 닫힌 도시는 폐쇄적인 상류층 거주지처럼 건축적 분리가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공간이다. 그 대안인 열린 도시는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고 받아들이며, 사회적 복잡성을 배우고, 외부 위협에도 더 잘 회복되는 공간이다.

 

세넷이 제안하는 방향은 열린 도시다. 문제는 어떻게 도시를 열어젖히느냐다. 책에선 비공식적이고 자유롭고 느슨한 방식을 지지하는 제인 제이콥스와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체를 바라보는 큰 규모의 도시계획을 선호하는 루이스 멈퍼드 간의 논쟁을 소개한다. 제이콥스는 다양한 인종, 젠더의 사람들이 복작대는 더 열려 있어서무질서하지만 생기 있는, 멈퍼드는 그보다는 닫혀 있어서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도시를 선호한다. 둘 다 장단이 있다. 세넷은 시테에 관해서는 제이콥스가 멈퍼드보다 낫고, 빌에 관해서는 멈퍼드가 낫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제이콥스의 느린 성장은 부자 나라나 누릴 수 있는 여유이고, 멈퍼드의 이상형인 전원도시는 수백만명이 사는 신흥개발 도시에 이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긴장 사이에서 세넷은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좋은 도시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다. 그가 주목하는 공간은 인도 델리의 네루 플레이스이다. ‘실리콘밸리의 싸구려 버전인 일종의 전자상가다. 1970년대 정부 계획으로 개발된 이곳은 당초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확장과 발전을 거듭하며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비공식적 시테가 기획된 빌에 접목된 공간이다.

 

인천 송도의 꼼꼼하게 설계된 사회적 공간은 실패작으로 비판받는다. 거주민들은 도시계획이 논리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비공식적으로 형성된 장소들을 더 좋아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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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스마트 시티인천 송도는 대표적 실패 사례로 언급된다. 송도는 중앙통제를 통해 공원의 이산화탄소 양까지 파악이 가능한 첨단도시다. 하지만 이렇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마찰 없음을 구현한 도시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세넷은 비판한다. 최적 경로로만 오가다보면 장소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다양한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 간의 부글거리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발견)”를 지우는 셈이다. 결국 송도는 세계 최초의 녹색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건물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든 뉴욕의 구글 플렉스역시 비판 대상이다. 내부 공간에서 창조성을 추구하지만, 외부와는 고립되면서 창조적 작업의 핵심인 저항과의 마주침을 부정한다는 지적이다.

 

세넷은 도시 설계의 궁극 목표는 특정한 성격을 지닌 장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 도시 건물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으면서도 형태를 유지하는 스펀지같아야 하고, 도시의 가장자리는 세포막처럼 울퉁불퉁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삶이 서로 스며들고 주고받고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시 공간이다. ‘도시를 위한 윤리라는 표제가 붙은 마지막 장에선 오늘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강조한다. 생뚱맞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실존적 위협이다. 기존 도시를 다루는 잣대에서 벗어나 다른 기준으로 도시를 바라보자는 제언이기도 하다.

 

세넷은 무작정 개발을 비판하진 않는다. 그는 현대의 건물들은 이전 시기 건물들보다 수명이 짧다면서 현대 상업용 고층 빌딩은 35~40년이면 수명이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부실시공이어서가 아니라, 용도와 주거 형태 등 현대 도시가 급격히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먼 동네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느린 성장을 마냥 강요할 수도 없다. 책의 핵심은 결국 도시를 어떻게 열린 공간으로, 더 살기 좋은 공간으로 만들지에 대한 아이디어들이다. 세넷이 가장 강조하는 가치는 참여’, 그리고 협력이다. 도시계획가와 도시민 사이의 연결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도시를 이야기한다. “여럿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면 의미의 명료함보다는 의미의 풍부함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열린 도시의 윤리이다.”

본문 마지막 장을 덮고도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 수 있다. 책 해제를 읽으면 좀 더 비판적 독서가 가능할 것 같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를 대상화하는 시선, 도시의 역동성을 당연시하는 생각에 대한 의문 등 더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기후위기로 비틀린 도시, ‘열린 시스템이 더욱 절실한 이유

기조강연: 리처드 세넷 런던정경대 명예교수

 

기후변화가 부른 도시의 무질서

적응과 개방적 자세 필요

어떻게 협치를 끌어낼 것인가

도시가 직면한 사회·정치적 과제

 

기후변화에 따라 날로 그 규모와 강도가 커지고 있는 풍수해는 도시를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해 갈 지 고민하게 한다. 사진은 지난 9월 허리케인 도리안이 엄습했을 때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하마의 프리포트에서 한 소녀가 강아지와 함께 구조되는 모습. AP/ 연합

 

리처드 세넷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는 석학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르네상스형 학자이다. “하도 사통팔달해서 어떤 모임에서든 다른 참석자를 모두 합쳐도 그의 박식함을 따라가기 힘들다.” <3의 길> 저자인 앤서니 기든스가 세넷을 평가한 말이다. 사회학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 음악, 예술, 역사, 문학, 정치, 경제 등에 두루 조예가 깊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서 <장인>, <투게더>,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등이 다루는 주제만 봐도 그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알 수 있다. <겁 없이 울어댄 개구리>를 포함해 소설책도 세 권 냈다.

 

세넷은 아시아미래포럼 첫날인 23일 오전 기조 연사로 무대에 올라 기후변화와 도시의 정치·사회적 영향을 주제로 강연한다. 76살 노학자가 한국 청중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다. 그는 <한겨레>에 보낸 이메일에서 기후변화는 오늘날의 도시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문제라며 이런 환경적 도전이 도시 내부의 사회·정치적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얘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회학자로서 세넷은 도시를 건설하는 방법과 그 속에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연결하는 연구를 좋아했다. 바둑판 모양의 도로, 수직으로 올라간 빌딩 등 직선의 도시에서 굽은 나무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넷은 ’(Ville)시테’(Cit?)라는 개념 틀로 이를 분석하고 설명한다. ‘은 물리적 장소로서의 도시이며, ‘시테는 그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거주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엉성하게 설계된 뉴욕의 어느 터널에서 빚어지는 차량 정체는 의 문제이지만, 수많은 뉴욕시민이 아침부터 일어나 터널을 지나 달려야 하는 무한경쟁은 시테의 문제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돼 출간될 예정인 그의 책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김영사)에서도 이런 틀로 도시를 들여다본다.

 

세넷이 보기에 시테는 비대칭이어서 고통스럽다. 예를 들어, 서울역 새 청사를 아무리 현대적으로 만들어도 노숙인은 저녁이면 여전히 골판지로 텐트를 친다. 그래서 세넷은 열린 도시’(Open City)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는 복잡성, 모호성 그리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칸트가 말한 인간이란 비틀린 재목으로는 곧은 물건을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시는 수십개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성분의 이민자로 가득하기에그 속의 불평등이 너무나 확연하기에비틀려 있다. 도시를 바라보는 세넷의 이런 접근법은 그가 1970년대에 쓴 <무질서의 효용>(다시.)에서부터 일관된 흐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질서정연하지만 단조로운 삶을 살 것인가, 무질서하지만 생기있는 삶을 살 것인가라고 물으며 다양성과 창조적인 무질서를 구성원 스스로가 통합해 가는 도시, 살면서 만나는 갖가지 시련과 도전에 적절하게 대처하는도시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리처드 세넷. <한겨레> 자료사진

 

세넷에게는 기후변화도 도시의 비틀림 가운데 하나이다. 그 격동과 불확실성은 어느 도시에서든 파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2014109일치)에 한 기고에서 세넷은 201210월 말 자메이카와 쿠바,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해 해변은 물론 내륙에도 큰 타격을 준 대형 허리케인 샌디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샌디는 폭풍의 강도나 영향이 미친 범위에서 그 앞의 어떤 허리케인보다 무시무시했다. 언론은 기후변화가 몰고 온 재앙이라고 보도했다. 폭풍이 지난 뒤 바닷가 주민들은 살던 곳을 떠나기보다는 재건을 원했다. 지역사회도 이를 위해 벽을 세우고 둑을 쌓는 비용을 낼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디자인을 통한 재건’(Rebuild by Design)이란 프로그램이 내린 과학적 결론은 이런 대응책은 지속가능하지 않고, 일부 지역은 급속도로 해체되고, 주민은 흩어지며, 어떤 곳은 버려진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세넷은 이를 완화’(mitigation)적응’(adaptation)의 차이라 규정한다. 둑을 쌓아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재건이 도시를 계속 유지하려는 완화전략이라면, ‘적응전략은 도시의 많은 것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의 적응은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힘 때문에 도시 형태의 통일성이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후위기는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대한 방식인 통제’(control)를 까다롭게 만든다. “예측 불가능함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의 변덕은 우리에게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열린 시스템의 논리다. ‘적응하기 위해 도시는 더는 정연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볼 때 완화적응의 차이는 한 도시가 토론과 투표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과, 자연의 힘에 순응해 정책을 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다. 그는 자연은 비민주적이다. 투표와 포용은 기후변화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집단의지는 적응 전략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세넷은 기후변화가 불러온 도시의 무질서를 인정하고 적응해 가되 좀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삶이 가능하도록 협치’(governance)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가 도시가 직면한 사회적·정치적 과제이다. 세넷은 일부 지역은 물을 제한 급수하는 법을 제정하고, 홍수에 노출된 일부 지역을 포기하는 전략을 세우며, 더는 석탄을 태워서 발전할 수 없으므로 전기를 제한 송전할 수도 있는생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래된 습관을 고치는 걸 미룰수록 문제는 더 악화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넷은 194311일 미국 시카고에서 공산주의자 아버지와 노동운동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세넷은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태어나고 몇 달 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그곳에서 만난 여전사와 사랑에 빠져 모자를 두고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보장 대상자로 흑인 빈민, 전쟁 부상자들과 함께 공동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매카시즘이 극성을 부리던 당시, 좌파 아버지를 둔 그의 가족은 감시 대상이었다. 20대에는 미국 신좌파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 운동이 반지성주의로 치닫는 데 실망해 한때 우파로 전향했다 돌아오기도 했다.

 

세넷은 13살에 첼로 연주회를 열 정도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살 무렵 첼리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손목뼈에 난치병이 생겨 더는 활을 당길 수 없게 돼서였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세넷에게 하버드대 한 사회학 교수가 입학을 제안하면서 사회학도로서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 1960년대에는 한나 아렌트에게 배우기도 했다. 첼리스트를 꿈꾸었던 사회학자 세넷은 활 대신 펜을 쥐고 <장인>(21세기 북스)이란 책을 써 내려간다. 인류 문명을 직조해왔으나 이제는 잊히고 있는 생각하는 손을 다룬 이 책은 헤겔상, 스피노자상을 수상한 세넷의 대표작이 됐다. 이후 세넷은 여러번 팔목 수술을 받은 덕에 다시 첼로를 켤 수 있게 됐고, 가끔 동호인들과 연주를 즐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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