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 저자 장석준|서해문집 |2019.11
저자 : 장석준 사회학을 공부했고, 진보정당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연구 및 출간 사업에 함께하고 있다.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공저)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공역) 《유럽민중사》 《도서관과작업장: 스웨덴,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 《극단적 중도파: 세계 정치에 내린 경계경보》 《국가 대 시장: 지구 경제의 출현》 등이 있다.
목차
서문
-역사를 통해 만나는 진보정당운동
I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1 지금도 반복되는 한 세기 전 진보정당의 고뇌1
-최초의 진보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2 지금도 반복되는 한 세기 전 진보정당의 고뇌2
-베른슈타인의 길과 룩셈부르크의 길
3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4 변방에서 미래를 준비하다
-1912~1914년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
II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5 역사의 ‘거름’이 되어야 할 때와 ‘추수’에 나서야 할 때
-2차 세계대전 전의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
6 독일 노동계급은 왜 나치에게 패배했는가?
-양차 대전 사이의 독일 사회민주당·공산당
7 인민전선운동, 그 절반의 성공
-양차 대전 사이의 프랑스 사회당·공산당과 인민전선
8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정당이 없는가?
-미국 사회당의 도전과 좌절
9 ‘붉은 빈’- 원조 ‘제3의 길’
-2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10 스웨덴 복지국가, 어떻게 가능했나?
-2차 세계대전 전의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III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까지
11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2차 세계대전 후의 이탈리아 공산당
12 칠레의 전투는 계속된다
-칠레 사회당·공산당과 아옌데 인민연합정부
13 신자유주의의 등장에 맞선 구조개혁 좌파
-영국 노동당의 벤좌파운동
14 일본 사회당의 조용한 죽음
-일본 사회당
IV 21세기의 실험들
15 행복을 꿈꾸길 두려워하다?
-브라질 노동자당
16 21세기에도 진보정당운동의 도전은 계속된다
-스페인 포데모스
결론
-진행 중인, 그리고 끝날 수 없는 역사의 중간 정리
출판사 서평
역사를 만든 Party! 세계를 바꾼 Party!
-불세출의 좌파 이론가 장석준과 함께하는 ‘지구 왼편의 역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근대 이후의 세계를 구성하는 양대 기둥이다. 그러나 두 정치·경제 체제가 지금 같은 모양새를 갖춘 건 오래지 않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는 ‘보통 남성’들만의 민주주의였고, 자본주의는 착취의 현장을 농장에서 공장으로 옮긴 ‘분칠한 노예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는 1인1표제, 다시 말해 완전한 보통선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는 어떻게 쟁취되었을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해 인간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었을까?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150년 전 독일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세계 곳곳에 등장했던 좌파정당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선사한 주역이었음을 증언하는 비망록이면서, 그 길에서 명멸해간 숱한 혁명가와 개혁가들의 백가쟁명을 담은 실록이다. 1990년대 좌파의 불모지 한국에서 노동자정당 운동의 전위에 서 있었고, 서른 이후의 삶을 진보정당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오롯이 채워냄으로써 ‘한국의 안토니오 그람시’ ‘이론가들의 이론가’로 호명되는 저자는, 공부와 궁리의 여정에서 만난 근대 진보정당사 150년의 풍경과 흔적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이 책은 좌파의 성공과 좌절을 낯간지러운 헌사나 최루성 신파극으로 각색하지 않는다. 저자는, 진보세력이 추구한 숱한 혁명과 개혁의 좌절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갈데없는 좌파지만, 진보정당의 오류와 한계들―예컨대 좌파가 곧잘 범하는 ‘급진적 언어-보수적 (혹은 소극적) 실천’이라는 모순―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한다는 점에서 설핏 우파적 면모마저 드러낸다. 이런 균형 감각에 크게 힘입어, 이 책은 장대한 시공간을 종횡하면서도 진보정당과 세계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순간들을 치우침과 왜곡 없이 재현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볼품없는 동네 선술집의 노동자 모임에서 출발한 진보정당들이, 소수파적 핸디캡을 잔뜩 지니고서도 굽힘 없는 신념과 명민한 전략으로 끝끝내 한 나라의 집권당에 도달하는 장면에서 경의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반대로 혁명과 집권에 성공한 뒤 우왕좌왕하는 장면에서 애써 환멸을 품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손위 좌파정당의 실패는 늘 그다음 세상의 진일보에 질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좌파에 대한 오랜 편견―예컨대 분열과 비관주의―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것은 물론, 한때 가장 보잘것없었던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획하고 만들어낸 주인공임을 보여주는 대반전 드라마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까닭
: 좌파의 위기? ‘빈약한 이론’이 아니라 ‘역사의 부재’
역사의 흐름은 얄궂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아랍의 봄’을 맞아 다시금 만개하는 듯했던 세계 진보정당들의 위세는 이제 간데없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 유럽 좌파정당들의 지리멸렬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21세기 세계 좌파 부흥의 진앙이었던 중남미에서조차 주요 지도자들의 죽음·정치적 몰락과 더불어 정권이 우파에게 넘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에, 일각에서는 ‘이념 없는 분노’라며 현대 좌파의 이론적 역량 부재를 꼬집기도 한다.
반면, 당대 제1의 좌파 이론가로 손꼽히는 저자는 거꾸로 진보정당의 ‘이론’이 아닌 ‘역사’를 강조한다. 나아가 “이론은 추종이 아니라 대화 상대”임을 분명히 한다. 예컨대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블라디미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보여준 혜안과 통찰에 탄복하면서도, 그 아이디어들이 줄잡아 1-2세기 전의 것임을 넉넉히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세기 전 거인들은 경험하지도, 예측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는 다른 시공간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난해한 이론에서 발췌한 한두 줄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먼저 진보정당운동을 한 이들이 마주했던 문제를 생생히 추체험하고, 논쟁 당사자들이 우리 안에서 다시 대화하게 해야 한다. (…) 만약 ‘이론’이란 게 있다면 이런 역사의 재상연을 통해 우리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독자들이 지금 이곳의 맥락에서 진보정당운동의 보편적 고민과 선택에 마주하길 당부한다. 책의 표제가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인 까닭이다.
세계의 운명을 가른 진보정당들의 결정적 선택
1860-1870년대 비스마르크 정권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피해 독일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선술집에 모여들며 시작된 이야기는 4부에 걸친 16개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각 부에 등장하는 좌파정당들은 동시대를 엇비슷한 세계관으로 통과한 만큼 비슷한 길을 걸을 법도 하건만, 이들의 행로는 제각기 다르다. 소수정파라는 처지와 고민을 공유하지만 결단의 방향은 딴판인 경우가 많다. 코민테른 본부, 즉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상부의 명령으로 충실히 받든 독일 공산당과 이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개척한 중국 공산당의 엇갈린 운명은 그중에서도 드라마틱한 대비를 이룬다. 파시스트 세력을 맞아서도 광범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꾀하는 정당들이 있는 반면, 진영 내 주도권 다툼에 빠져 소탐대실한 경우도 있었다. 독일혁명 와중에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학살은 그 자체로서도, 그 사건이 훗날 나치의 집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진보정당사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고민과 선택을 묶어내는 공리(公理) 혹은 대의는 또렷하다. 공산당이든 사회당이든 사회민주당이든 사회민주노동당이든 “권력과 부의 불균형을,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끔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 1세대 진보정당들의 태동과 노선 투쟁이 펼쳐진다. 최초의 진보정당 독일사회민주당 편에서는 정당 설립까지의 우여곡절과, 진보·좌파정당의 혁명/개혁노선을 놓고 일대 파란을 몰고온 베른슈타인-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이 지상중계된다. 프랑스 사회당 편에서는 전설적 좌파 장 조레스의 활약상이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 노선과 함께 그려진다. 1·2차 세계대전기를 다룬 2부에서는 유럽 좌파정당들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시작으로, 좌파의 맥이 끊긴 미국의 진보정당사와, 일찍이 현대적 복지국가의 전범을 이룩해낸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집권 드라마가 이어진다. 미국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민주당을 지지함으로써 사회당이 몰락하는 장면과, 프랑스 좌파가 반파시즘 연합전선에서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를 고민한 상황은 이른바 ‘비판적 지지’ 문제가 한국을 비롯한 소수파 진보정당들의 오래된 숙명임을 일깨우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까지의 진보정당들이 완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에 사활을 거는 모습과 보통선거제 이후 벌어진 진보정당들의 눈부신 약진은, 좌파의 본령과 지지기반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이를 배반했을 때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역사적 힌트를 제공한다.
3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구가된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뒤이은 신자유주의의 공습에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각국 진보정당들의 이야기, 그리고 칠레 아옌데 인민연합정부의 장렬한 비극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본 사회당과 영국 노동당의 사례는, 위에 언급했듯 좌파정당이 좌파답지 못할 때, 다시 말해 더 이상 혁명을 꿈꾸지 않고 시장경제에 순순히 영합하는 정당이 될 때 치러야 할 대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4부는 21세기 들어 가장 주목받아온 두 좌파정당 브라질 노동자당과 스페인 포데모스의 일대기다.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의 땀내 가득한 3전4기 성공 신화와 최근 몇 해간 벌어진 거짓말 같은 몰락은, 남유럽의 신생 좌파 포데모스는 물론 한국의 진보정당들에게 전범이자 반면교사로 새겨둘 만하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실패를 막으려면?‘큰 개혁과 작은 혁명의 좌파 블록’을 만들자!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 탐구를 바탕으로 근미래를 모색한다. 모색은 전망의 일종이지만, 의지가 깃든 예견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전망과는 다르다. 저자의 세계 모색 또한 단순한 분석과 예측에 머무르지 않는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전적 좌파 이론의 현대적 재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역사의 재상연’을 통해 스스로 이론을 생산하자는 당부의 자기 실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자는 베른슈타인-룩셈부르크 논쟁에서부터 이어져온 ‘개혁vs.혁명’의 이분법 구도를 ‘개혁-혁명’의 변증법 구도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개혁과 혁명은 지배 집단과 다수 대중의 세력균형을 바꾸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연속적이며, 한쪽이 다른 한쪽의 전제조건이 되는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장 조레스의 ‘개혁적 혁명주의’에서부터 오스트리아의 ‘완만한 혁명’, 스웨덴의 ‘잠정적 유토피아’에서 이론적·역사적 접점을 찾아내어 이어붙이기를 시도한다. 그럼으로써 그간 실패를 거듭해온 ‘큰 혁명과 작은 개혁’ 대신 ‘큰 개혁과 작은 혁명’으로의 발상 전환을 제안한다.
덧붙여 저자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내세운 사회변혁의 요체인 ‘역사적 블록’에도 주목한다.
책속으로
지난 150여 년간 이런 정당들은 세계사의 주요 배역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거기에는 늘 좌파정당이 있었다. 가령 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보통선거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 나라에서 가난한 노동계급 남성은 투표권이 없었고, 여성은 정치 영역에서 일체 배제됐다. 이때 노동자와 여성에게 참정권을 보장하라며 앞장서서 싸운 정치세력이 각 나라 좌파정당들이었다. 일단 보통선거제가 실현되고 난 뒤에 모든 민주국가의 급박한 다음 과제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를 얼마간 실현한 복지국가가 처음 등장했는데, 어느 나라든 이 과업의 중심에는 항상 좌파정당과 노동운동 세력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들이 새 나라를 세울 때도 거기에는 좌파 정치세력이 있었다. 또한 정치적 독립을 넘어 경제적 자립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도 좌파정당은 가장 적극적인 문제 제기자이자 대안 제시자였다.
--- p.6-7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활동하던 무렵으로부터 인간 세상은 나이를 100년도 더 먹었다. 세계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는 그들 이전보다 오히려 이후가 분량이 더 길어졌다. 한 세기 전 거인들은 경험하지도 못했고 예측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그간 수없이 명멸했다. 예를 들면, 지구 위 거의 모든 나라가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세상은 그들이 살던 세상과는 거리가 꽤 멀다. 몇몇 고전의 요약 정리만으로는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침반까지는 몰라도 지도는 될 수 없다. (…) 구체적인 맥락에서 몇 가지 명제만 따로 떼어낸다고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는 우리에게 유효한 길잡이가 될 리 없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 맥락 쪽일 수도 있다. 우리보다 먼저 진보정당운동을 한 이들이 마주했던 문제 상황을 생생히 추체험하고 논쟁의 여러 당사자들이 우리 안에서 다시 대화하게 해야 한다. 만약 ‘이론’이란 게 있다면, 이런 재상연을 통해 우리 스스로 생산해야 할 것이다.
--- p.9-10
좌파정당은 지배세력과 노동대중 사이의 힘의 균형을 바꾸려 한다. 어떤 정책을 추진하든 늘 기존의 세력균형을 조금이라도 더 노동대중에게 유리하게 흔들고 변형하고 뒤집으려 노력한다. 더 나아가서는 앞의 인용구대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바꾸려 한다. 그러자면 세력 관계의 가장 단단한 부분, 즉 자본주의 ‘구조’에 손을 대야 한다. 좌파정당은 늘 이런 근본과제를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철저한 ‘개혁’세력이기 위해서도 말이다.--- p.18
진보정당운동이 시작된 독일에서도 주 의회 선거는 평등선거가 아니었고 여성은 선거권이 없었다. 심지어 여성은 정당에 가입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진보정당으로서는 집권 이전에 우선 보통선거권 실현에 매진해야 했다. 아니 보통선거제도 시행이야말로 진보정당이 집권에 이르는 직항로라 여겨졌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진보정당의 투쟁을 통해 참정권이 확대되면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유권자가 된 이들이 주저 없이 진보정당에 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후 선거 때마다 계속 진보정당에게 투표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보통선거가 시행된 핀란드(당시 러시아 제국 내 자치령이었다)였다. 1907년의 첫 선거에서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단번에 3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p.32
지구당은 간판을 내리는 대신 문화클럽, 여가클럽 등을 만들어 위장 활동을 벌였고, 주점을 열어서 회합 장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주요 활동가들이 죄다 술집 주인이 되는 뜻하지 않은 상황도 벌어졌다. 공장 주변의 싸구려 선술집은 일과 후에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도수 높은 술은 취급하지 않는 대신 맥주를 팔았다. 하지만 맥주만 마시고 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당의 비합법 출판물이 튀어나오면 그 내용을 안주 삼아 즉석 정치토론이 벌어졌다. 공장에서는 노예였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런 밤 한때를 보내다 보면 이제는 더 이상 공장에서도 노예로만 살 수는 없기 마련이었다. 탄압법이 폐지된 뒤에도 이런 선술집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여흥과 회합의 장소로, 즉 정치의 중심으로 남았다.--- p.44
베른슈타인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전망을 수정하자고 촉구했다. 사회주의란 최소강령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현함으로써 다가갈 수 있는 것이며, 실은 이게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개혁주의’라고도 불렸다.
--- p.53
이제 독일 사회민주당 집행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반전투쟁이냐 아니면 전쟁의 수락이냐’. 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애국주의 바람이 몰아치는 형국에 반전투쟁이란 곧 당의 완전한 비합법화와 내전에 가까운 격돌을 의미했다.--- p.76
15만 군중 앞에 선 단상의 조레스뿐만 아니라 프랑스 노동 진영은 그들 삶의 한 전성기에 도달해 있었다.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이 내적으로 통합되고 또한 자연과 화합하는 화해와 융합,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던 조레스의 사회주의 이념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p.101
대중운동의 수세(守勢)기를 헤쳐 나갈 길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교훈들이 당시에는 숱한 희생과 패배를 통해 새로 배워야 할 낯선 진실이었다. 한때 혁명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파시즘의 반격에 내몰려야 했던 이탈리아의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 값비싼 수업의 첫 번째 학생이었다.--- p.148
제국의회 의사당에는 원인 모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히틀러 정부는 이를 빌미로 비상통치를 시작했다. 메이데이 다음날 ADGB가 해산됐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차례로 불법화됐다. 두 세대 가까이 이어지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았던 독일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이 불과 몇 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p.193
뉴욕만이 아니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아칸소, 미주리 등 남서부 지방에서도 기초지자체 수준에서부터 사회당의 기반이 성장했다. 이들 주는 지금은 공화당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온상처럼 되어 있는 곳들이다. 하지만 한 세기 전에는 사회당이 인민주의운동의 전통을 이어 미국 토양에 뿌리내린 진보정치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p.228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완만한 혁명’이 이런 점에서 러시아에서 실제 일어난 혁명보다 더 현실적이면서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추구한 ‘완만한 혁명’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건들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계급 세력관계의 재편과 팽팽한 균형이었다.--- p.258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이라고 하면 대개 ‘타협의 정치’를 떠올리지만, 이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대결의 정치’가 필요한 때에 이를 선택하길 두려워하지 않은 데 있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p.296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산당은 구조개혁을 약속만 했을 뿐이었다. 이제 그것이 가능함을 실제 눈앞에 펼쳐 보인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운동이었다.
--- p.329
9월 11일 새벽, 피노체트 장군이 지휘하는 육·해·공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피노체트는 전화를 걸어 망명을 권고했지만, 아옌데 대통령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아옌데는 최후의 항전을 결의하는 라디오 연설을 마친 뒤, 혁명좌파운동에서 파견한 경호원들과 함께 직접 총(카스트로가 선물한)을 들었다. ‘대통령 동지’는 그렇게 산화해갔다, 쿠데타며칠 동안 학살, ‘실종’되거나 정처 없는 망명길에 나선 10만 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아옌데, 비록 그에게 오류와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민중이 영원히 기억하고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
--- p.361-362
노동대중 사이에 진보정치의 이념, 운동, 문화를 뿌리내리는 것이야말로 진보정당운동의 가장 중요한 토대다. 이런 토대 없이는 한때 성공한 듯 보였던 진보정치도 순식간에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사회당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p.425
포데모스 다수파의 입장은 과거 사회주의 교리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치적 가능성들이 열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p.497
진보정당운동은 더는 ‘개혁 대 혁명’ 식의 이분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개혁과 혁명을 대립시키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세기에 굳어진 개혁노선과 혁명노선의 분립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 p.516-517
세계의 진보정당 역사를 보면, 한국 정치가 보인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의 꿈은 의회에 진입하면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개혁과 혁명 혹은 당면 과제와 장기적 목표 사이에서 진보정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가운데 나오는 위와 같은 질문은 진보정치의 오랜 난제다. 선거제 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요즘 이 난제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정해진 답은 없다. 정립된 이론도 없다. 정치는 사람의 이해가 부딪치는 일이고, 상대가 있는 일이다. 매뉴얼을 기대하기 어렵다.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앞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석준의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서해문집 펴냄)는 요긴한 책이다. 저자는 역사를 네 시기로 나눠 각 시기의 주요 진보정당을 설명한다. 1부는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다. 2부는 전간기를 다룬다. 3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20세기다. 4부에서는 21세기의 실험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가 타국의 진보정당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책만은 아니다. 저자는 16개로 이뤄진 각 장의 앞머리를 왜 이 진보정당을 소개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미국 사회당을 다룰 때는 '왜 미국에 사회주의정당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옌데 시기 칠레의 진보정당을 다룰 때는 '그들의 창의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꽤 자주 반복되는 문제의식이자 책 전체를 꿰뚫는 문제의식이 하나 있다. 바로 개혁과 혁명의 관계다.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또, 이는 꼭 진보정당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흔히 고민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 책의 보다 보편적인 효용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진보정당의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논쟁들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세계 최초의 진보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이야기로 시작한다. 개혁과 혁명에 대해 아마도 가장 유명한 논쟁을 벌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해당 장의 주인공이다.
베른슈타인은 이 논쟁에서 개혁 편에 섰다. 그렇다고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 극복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표 역시 사회주의였다. 다만, 자본주의의 붕괴와 그에 따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전망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개혁적 조치를 쌓아가는 것뿐이다. 베른슈타인은 진보정당의 입법활동,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협동조합의 집단적 소비 확산 같은 운동이 곧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로자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개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로자는 개혁만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과는 방점이 달랐다. 로자에게는 개혁 자체보다 어떤 개혁 투쟁이냐가 중요했다. 노동조합 투쟁이나 개혁 투쟁은 대중에게 경험을 제공해 혁명적 주체를 탄생시킬 때 의미가 있다. 로자가 굳이 혁명을 이야기한 것은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시기에 혁명적 주체가 없다면 우리는 야만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를 보다 익숙한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산업재해로 죽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는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그 과정을 통해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늘려나갈 때 의미가 있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싸움 역시 이를 통해 비정규직 철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늘려갈 때 의미가 있다. 꼭 자본주의 붕괴나 혁명이 아니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귀기울여볼 만한 제언이다.
베른슈타인과 로자의 논쟁은 이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변주된다. 저자가 첫손에 꼽는 진보정치인인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는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식화하며 로자와 가까운 편에 섰다. 지구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국가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인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당면 개혁정책'과 '대안사회 건설' 사이에 만리장성을 긋는 전통적 개혁론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도전"했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개혁과 혁명에 대한 진보정당의 고민은 또다시 목격된다. 당장의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역사적 논변을 소개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결론에서 "한국에서 진보정당운동에 어떤한 모색이나 도전이 필요할지 생각해보거나 토론하려는 분들을 염두에" 뒀다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대에 좌파정당은, 9할은 베른슈타인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개혁노선의 틀 안에서만 마냥 머무르면 막상 개혁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좁은 의회정치 문법에 갇히면 일상의 세력균형을 바꾸는 실질적 힘인 대중행동과 유리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혁명만 부르짖는다고 하여 대안이 될 수는 없다. … 21세기 진보정당운동은 이 두 함정, 즉 '작은' 개혁들만 좇는 개혁정당과 '큰' 혁명만을 꿈꾸는 혁명정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으로, '큰' 개혁들과 '작은' 혁명들에 익숙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 자신이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는 등 진보정당 운동에 깊게 관여해 온 저자의 삶과 어울리는 저술 태도다.
"진보정당은 대기업과 관료기구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
이외에도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에는 어떤 정당이 진보정당인가에 대한 저자의 정의, 진보정당의 흥망성쇠와 그에 대한 분석,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바람직한 관계, 진보정당의 대중 기반을 확충하는 문제 등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의견이 수놓아져 있다.
역사를 크고 작은 명확한 문제의식에 따라 정리하되 기본적인 정보를 빠뜨리지 않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을 다루면서는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진보정치인 베벨의 행보를 빼먹지 않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이론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볼 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놓치기 쉬움을 경계한다. 프랑스 사회당을 다루면서는 장 조레스의 정치적 성장 과정은 물론 당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진보정치인이 보수 정부에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하는 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적었다.
끝으로, 일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고, 이제 세계 진보정당의 역사를 다루는 책까지 쓴 저자의 진보정당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논쟁적인 문장을 소개한다.
"민중이 스스로 결정(자기 통치)하는 삶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기업과 관료기구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좌파정당만 한 무기는 아직 없다."
진보정당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꼽는 저자의 의견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이 때문에도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는 꼭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일독할 만하다. /프레시안
슈베르트 : 세레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