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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4.3 70년 이야기

by 이성근 2018. 4. 3.

폭도 새끼한테 젖을 먹여? 죽어야 돼4.2 시사인 제550

<제주4·3 구술자료 총서 1~8>(제주4·3연구소)에서 발췌 / 정리:변진경 기자










취우翠雨 / 정찬일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붙이 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선흘곶 답답한 굴속 - 김석교 

       

선흘곶 목시물굴 캄캄한 죽음의 냄새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안개 속처럼 흐릿한 세월 시간도 이곳은 비껴간다

 

굴밖으로 끌려나온 사람들 무릎 꿇린 채 총살당하고

굴속에 몸 숨겼던 사람들 수류탄 터져 목숨 끊기고

여자들과 아이들 북촌리 억수동까지 끌려가

따르르륵 기관총 맞아 몰살당하고

노인들 또 잡혀가 고문당하고

 

봄꽃들 앞 다투며 피는 이 4월에

죽음의 그림자 서성거리는 선흘곶에 오면

새들의 지저귐도 피 토하는 울부짖음이지

가지마다 움트는 생명의 붓순도 총알로 보이지

 

죽은 자들 말이 없고, 죽인 자들 미쳐 날뛰는

4, 선흘곶에만 오면 목시물굴에만 오면

그 의 생지옥이 나를 휘감아 나는 그만 미쳐 버리겠다

 

이덕구 산전 - 정군칠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4월의 햇살 - 오영호

 

화산섬 돌담 밑에

60년 여문 한()

쪼아 문 산비둘기 푸드득 날아올라

구천의 대문을 열고

신원(伸寃)의 깃발

흔들 때,

와르르

쏟아지는

4월의 노란 햇살

반짝이는 나뭇잎에

새겨진 눈물 자국을

허기진 바람을 타고

쉼 없이 닦고 있네.


박성내에서 - 김경훈

- 제주시 구남동 양 할머니

 

저기 보라

한라산 자락 아래 시커먼 연기 나는 거 보이지

느네 아방 토벌 다니는 모양이여

기여기여 울지 말라

자랑자랑 웡이자랑

그날

한라산 자락 아래 제주시 박성내에서는

토벌군인들이 주민들을 총살한 후 휘발유로 태웠다

와랑와랑 시커먼

연기가 솟았다 와랑와랑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 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제주 4·3 70년 특집 319 한겨레21 1204

아들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아 날 찾아오라

주민 3분의 1450명 이상 희생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살아남은 이들이 털어놓는 70년 피 끓는 이야기

 

70년 전 한신화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서 1년을 살았고, 고아원에 보내졌다는 4살 아들 양봉선을 영영 잃었다.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애끓는 노래를 부른다. 김진수 기자

 

우리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에 눈이 내렸구나, 날 찾아오라.”

3월 초, 제주 중산간 시골마을을 찾았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북서쪽으로 올려다보이는 한라산은 허연 눈으로 덮여 있다. 손을 뻗치면 바로 잡힐 듯 가깝다. 빼꼼히 열린 시골 농가의 창문을 두들겼다. “할머니, 4·3 이야기 나누려고요.” 한신화(98) 할머니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70년 동안 얼마나 사무치게 아들 양봉선을 그리워했을까. 이야기 마디마디가 애끓는 가락으로 살아났다.

 

4살 아들 잃어버린 한신화 할머니

밤에 (경찰이) 와서 다 불질렀어. 다 탔어. 내 남편, 어망아방, 어디 간지 몰라. 사방팔방 도망갔어.” 할머니는 4살 아들을 안고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 “가시리 여자 6, 함께 붙잡혀갔어. 팔을 뒤로 포승줄 묶었어. 책상 위에 올라갔어. 책상을 탁 쳐서 미니까 대롱대롱 매달렸어. ‘살려줍소, 살려줍소.’ 아홉 번을 달아맸어. 바지가 벗겨지고 겨드랑이가 찢어졌어.”

 

할머니의 한 손가락은 기역() 자로 꺾여 있었다. 다른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았다.

 

꾀부린다고 장작으로 후려쳤어, 뒤로 묶인 손을. 손가락 병신 됐어. 그렇게 매 맞고 1년형 받았어. 말소 끄는 배 타고 육지 형무소 갔어. 전주에서 6개월, 대구형무소에서 4개월 살았어.”

죄명이 뭔가요?”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것도 몰라.”

 

한 사람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6살 딸을 데리고 있었어. 그 사람은 무조건 , 했는데, 5년이나 받았어. 가시리 마을로 영영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직 죽었나 살았나, 아무도 몰라.”

할머니 아들은요?”

우리 양봉선이? 4살이었어. 내가 형무소 갈 때 고아원에 보냈대.”

 

할머니는 그 뒤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들이 생각나면, 애절한 가락을 읊는다.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무거운 응어리를 안고 할머니 댁을 나왔다. 백 걸음이나 걸었을까. 마을 농협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서니, 오국만(86) 할아버지의 돌담집이다. 할아버지는 70년 전, 피붙이 다섯과 형수님, 여섯 식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1948년 음력 10월 보름(양력 1115)이었어요. 가시리로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며칠 뒤 부모님과 열일곱이던 나와 두 동생은 표선의 해안부락으로 내려갔어요. 산으로 피한 세 형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가족이 영영 헤어졌어요. 큰형님 국림은 26, 국남 형님 24, 국효 형님 20살이었어요. 형수님은 호적에 아직 올리지도 않았고요.”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그날 1115일 하루에만 30명의 마을 주민이 죽임을 당했다. 10살 미만 아이가 9, 60살 이상 노인이 10, 21살 청년 1명을 빼고는 나머지 10명이 모두 부녀자였다. 발 빠른 장정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여섯 식구 희생당한 오국만 할아버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4·3추모공원의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새겨 있다. 왼쪽 3개에 빼곡히 적힌 가시리의 희생자는 420명으로, 표선·성읍·세화·토산 등 다른 4개 리의 전체 희생자(330)보다 훨씬 많다. 김현대 선임기자

 

한 달 남짓 지난 1222, 수용소 생활을 하던 표선국민학교에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표선 청년들로 조직된 민보단 단원들이 대창을 들고 우리 주위를 둘러쌌어요. 가족이 모두 내려온 식구들만 옆으로 나가 따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70년 전 일인데, 그때 기억이 뚜렷한가요?”

기억이라고요? 오늘 일처럼 생생해요!”

양쪽으로 무리를 갈라놓고 마주 보도록 세웠어요. 우리는 도피자 가족이었지요. ‘저쪽 무리 중에서 도피자 가족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저기 강덕근이도 아들이 안 내려왔어요.’ 장애인이던 그분, 강덕근도 우리 쪽 도피자 무리로 끌려왔지요.”

할아버지는 그 누군가를 알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순진한 분이어서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던 것뿐이거든요.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남까지 끌고 가려 했겠어요.”

 

할아버지는 호적 나이가 어리게 기재된 덕에 다 죽은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15살 아래와 젖먹이 엄마는 옆으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실제 내 나이가 17살이었는데, 호적엔 14살로 돼 있거든요. 나와 동생들만 살았어요. 부모님은 그날 돌아가셨고요.” 그렇게 도피자 가족으로 찍혀 표선의 버들못 근처에서 한날한시에 총살당한 이들만 76명에 이른다. 가시리에서 그날(1222, 음력 1122) 제사를 지내는 집이 유독 많은 까닭이다. 할아버지가 강덕근 가족의 슬픈 사연을 더 보탰다. “아버지가 끌려가니까 강덕근의 맏딸이 주저앉아 통곡했어요. 열다섯이 안 된 아이였어요. 그러자, (경찰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 따라 같이 가라고 도피자 대열에 집어넣었어요. 누군가의 고자질 때문에 아버지와 큰딸이 다 죽은 거예요. 지금은 작은딸 하나만 이웃 신흥리 마을에 살고 있어요.”

 

그날 헤어졌던 세 형님의 이야기를 물었다. “셋째 형님은 제주 비행장에서 죽었느니, 수장됐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어요. 숨진 게 1949812일이라는 말이 있어, 그날 제사를 모셔요. 큰형님은 붙잡혀 경인 지역에서, 둘째 형님은 호남에서 희생됐다는 소문만 있어요. 사형 언도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그래서 두 분은 생일날 제사를 모십니다. 아버지가 해안으로 내려갈 때 들고 간 궤짝이 있어요. 그 궤짝 문에 아버지가 아들들 생일을 적어놓으셨더군요. 그게 없었다면 형님들 생일도 모를 뻔했어요.”

 

할아버지는 그날 버들못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가 5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총살당한 분은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어요. 무슨 죄를 지어 총살을 당하셨나요. 죽을 죄명을 붙이라면, 우리 어머니였다는 것밖에 없잖아요. 어머니 성함이 고운기인데, 가슴이 찢어져요.”

 

남편·시아버지 총살당한 안정생 할머니

4·3이 일어나던 해, 가시리의 안정생(93) 할머니는 둘째 아이를 가진 23살 만삭의 몸이었다. 할머니의 한 서린 이야기도 그해 음력 10월 보름, 토벌대가 들이닥치던 날로 시작한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도망갈 데가 없었어. 우리 하르방(남편)28살이었는데, 그날 표선으로 끌려갔어. 음력 124일인가 5, 표선에서 성읍으로 가는 길가에서 총살당했다고 해. 시아버지는 76명이 총살당한 버들못에서 함께 당했지. 그 얼마 뒤 둘째 아들을 낳았어. 유복자야.” 할머니는 총살당해 죽었으니 혼이 달아났는지, 70년 되도록 하르방이 한 번도 꿈에 안 나타난다고 말했다. “긴 세월 죽지 않으니 살았어. 명이 기니까 산 거야. 이제 죽어서 만나도 하르방이 내 얼굴 못 알아보겠지. 죽은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데. 하르방 사진 한 장 있던 것도 잃어버렸어. 큰아들이 아방 많이 닮았어. 슬퍼.”

 

오문평(78) 할아버지 가족은 4·3 때 희생을 당하지 않았다. 가시리에서 보기 드문 경우다.

 

아버지가 8형제를 모두 데리고 표선 해안으로 내려갔어요. 사돈의 팔촌까지 한 명이라도 산에 올라간 사람 있으면 다 죽었는데, 아버지 덕분에 형제가 모두 산 거지요.”

사촌도 다 내려갔나요?”

, 우리는 사촌이 없었어요.”

 

할아버지의 아내인 김순애(76)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촌까지 다 내려갔어요. 그래서 살았던 거예요. 우리 형제는 그때 나 혼자였는데, 그 뒤로 8남매가 태어났어요.”

 

4·3 때 세상을 떠난 표선면의 전체 희생자 수는 공식 집계로 750, 그중 절반이 넘는 422명이 가시리 출신이다.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가시리 전체 주민 3분의 1가량인 450명 이상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국만 할아버지에게 왜 가시리에서 희생이 많았는지 물었다.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마을에 경찰지서가 있었다면 그렇게 안 당했을 거예요. 지서가 있던 근처 성읍리는 희생자가 별로 없었거든요. 늘 얼굴 대하는 이웃 사람을 어떻게 참살할 수 있겠어요. 여기는 경찰이 지키러 온다면서 괴롭히기만 했어요. 산에 숨은 이들한테 식량을 줬다느니 하면서 마구 두들겨패니, 경찰이 온다 하면 젊은이들이 무조건 산으로 도망갔어요. 누가 경찰을 좋아했겠어요. 우리 세 형님도 전혀 무학이에요. 좌익사상, 그런 것 몰라요. 국민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라 구박받고

이유 없는 개죽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집안에서 국민학교 입학한 것도 할아버지가 처음이었다. “학교에 늦게 들어갔어요. 4·3 17살이었는데 6학년에 다니고 있었어요. 국민학교도 졸업 못했지요. 4·3 때문에.” 할아버지는 지난 70년 세월이 너무나 시리고 아프다고 했다. “10여 년 전까지도 4·3 이야기를 마음 놓고 나누지 못했어요. 이웃 부락에서도 우리 가시리 마을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빨갱이라고 한없이 구박받으며 평생을 살았어요.”

제주=글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im@hani.co.kr

 

가시리 마을의 4·3 순례

발길 닿는 곳마다 참혹한 학살 흔적이

가시리 마을의 4·3길 순례는 특별하다. 참변을 겪은 오태경(87) 할아버지와 정덕재(82) 할아버지가 직접 해설사를 맡는다. 두 할아버지는 외사촌 간이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4·3 때 집이 한 채도 남김없이 다 타고, 마을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말했다. “가족 중엔 형님이 행방불명이고, 형수님이 1년형을 살았어요. 이웃 신흥리로 피신 가 있던 사촌형수님이 식량 가지러 마을에 왔다가 들판에서 사살당했고, 사촌 형님과 두 아들은 형수님 주검에 흙이라도 덮어주려고 마을로 들어왔다가 붙잡혔어요. 지금 해비치호텔이 있는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당했어요.”

 

두 할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마을 고지대인 고야동산과 마두릿동산을 먼저 찾았다. 경찰이 오는지,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을 검은개’, 군인을 노란개라고 했어요. 괴롭히니까 미워했던 거예요. 이곳 동산에 대나무를 세웠다가, 멀리 경찰이 들어오는 게 보이면 보초가 대나무를 눕혔어요. 그때는 나무가 많지 않아, 아래쪽 마을에서 동산이 훤히 보였거든요. 대나무가 누우면, 들판에서 일하거나 집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도망갔어요.”

 

흙 붉은 동산이란 뜻의 달랭이모루로 발을 옮겼다. 안흥규씨 가족 12명이 끔찍하게 몰살됐던 곳이다.

큰각시 고신춘과 작은각시 강매춘, 그리고 21살부터 갓난아이까지 자식 6, 모두 8명이 성읍지서로 끌려가던 중 총살당했어요.”

왜 여기서 죽였나요?”

모르지요. 사람 죽이는 것을 버러지 죽이는 것보다 쉽게 생각했으니까요. 안씨의 누님 부부와 두 자식 등 4명도 함께 당했어요.”

지금 가시리 사무소 앞마당에는 안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19495월인가 복구령이 내렸어요.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리사무소 근처에 작은 성을 쌓았고, 그 안에 이엉을 이어 비를 피했어요. 나중에 바깥으로 더 크게 성을 두르고 그렇게 수년 동안 집단생활을 했어요. 안씨가 그때 이장을 맡아 마을 복구에 헌신했어요.”

 

가시리에서 발원해 세화리로 흘러가는 가시천에도 슬픈 사연이 묻어 있다. “토벌대가 들어오던 날, 60대인 안만규 할아버지와 김인하 할머니가 3살 손자와 1살 손녀를 데리고 가시천 아래에 숨어 있었어요. 아이들이 소리를 냈던 거예요.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졌고, 그 자리에서 네 식구가 즉사했어요. 아들 부부는 먼저 피신해서 살아남았어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새가름과 종서물을 찾았다. 4·3 이전까지 각각 20여 가구, 10여 가구가 정답게 살던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 대다수가 참변을 당한 겁니다. 돌아올 사람이 없으니, 마을이 사라진 거지요. 새가름에는 고대효씨 부친과 문사봉씨 2가구가 다시 들어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떠나고 말았어요. 외로움과 상처를 못 이겼던 거지요.”

 

4·3의 이 깊은 기억, 아무도 모릅니다

허영선 시인이 만난 제주4·3 피해 생존 여성들

여성들의 파괴된 삶이 증명하는 참혹한 역사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지.” “자식들도 몰라야 할 일이지.” “그땐 눈물도 나지 안 헙디다.”

눈물마저 죄가 되던 시절. 그렇게, 제주4·3의 시기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4·3의 복판을 맨몸으로 관통한 여성들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살아낸 그들은 몸에 벼락처럼 가해진 참혹한 트라우마 속에 산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4·3 광란의 바람에 휩쓸렸고, 희생당했던 여성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4·3 70. 아직도 흐르지 않는 세월을 가슴 깊은 우물에 담그고 사는 사람들. 과연, 그들의 기억을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_편집자

 

한 여성이 토벌대에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손짓이 다급하다. 한겨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안 해서, 결혼한 여성은 했기에 제주4·3이 몰고 온 폭풍을 비껴갈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의 기억은 이들에게 가해진 성폭력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을 증언하는 당사자는 거의 없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성을 잃는 것은 목숨만큼 위태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4·3 때 열여덟이던 한 할머니는 토벌대에 당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했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다. “요즘 텔레비전에 누구누구한테 당했다는 얘기 나오면 가슴 덜컥해. 잠이 안 와.” 그는 지금도 자신을 가해한 군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상을 안방에서 볼 때도 늙은 가슴속이 스멀거린다. 오래된 흉터처럼.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는 성적 유린을 당한 여성들이 입은 상처는 후유장애로 편입되지도 못한다. 내면의 고통을 겹겹 포갠 채 살아갈 뿐이다. 4·3의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몸의 기억, 가족의 안위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던 강제결혼 등 여성들을 둘러싼 기억은 목격자의 입을 통해 어렴풋 세상에 공개되곤 한다.

 

달빛을 보라 했다

194812, 4·3 초토화 시기, 표선면 토산리 집단학살 현장에서 토벌대는 여성들에게 달빛을 보라고 했다. 달빛에 비춰 여성들 여럿을 뽑아갔다. 살아 돌아온 이는 열다섯 소녀뿐이었으나 소녀는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담을 쌓다가, 토벌을 피해 도망치다가, 느닷없이 총상을 입고 후유장애의 삶을 사는 여성들은 어떤가. 턱을 날려버린 총상을 입고,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싸맨 채 살던 진아영은 홀로 기억과 싸우며 신음하는 생을 살다 숨졌다.

 

그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양복천을 기억한다. “이제 그런 사태 온다 하면 죽지. 살 생각이 없어. 어떻게 살아.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입니까. 지금도 꿈에 나와. 이제도록 어찌 무슨 힘으로 살아졌는지.” 2009년 당시 93살이던 그는 몸서리치며 기억의 필름을 돌렸다. “3살 딸 등에 업고 10살 아들 옆에 섰어. 난 박박박 털멍 선생님 날 살려줍서만 하고. 올레 밖으로 도망가려는데 바로 총이 아들한테로 가버렸어. 아들이 엄마아 엄마야하니깐 저거 아직도 안 죽었네‘. 팡 쏘안. 첫 총에 죽었수다. 차마 사람이 사람을 죽이랴 헷수다. ! 허난 셋이 마당에 엎어진 거라.” 순식간에 마당은 선혈로 낭자했다.

 

그의 등허리에 명중한 총알은 옆구리로 튀어나왔다. 등에 업힌 딸의 다리가 그 총알에 맞았다. 그날은 딸의 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그날 입은 상처로 평생 후유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딸 김순여. “곱은다리서 함덕장으로 갈 때는 마을에서 놀던 아이들이 놀렸지요. 기어서 가니까.” 딸이 자라면서 고통은 커져만 갔다. 어머니는 딸을 업어서 등교시켜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힘들면 앉아서 모녀가 함께 울었다.

 

예쁜 신발 한 번만 신어봤으면 하는 건 꿈이었죠.” 딸은 열여섯부터 발등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십 대가 되니 옆으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어머니는 속으로만 울었다. 오십 대가 돼서야 남편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다. 그가 그랬다. “마음에서 없어질 상처는 아닙니다. 아무 친구한테도 말 안 했죠. 친구들은 소아마비로만 알았지요.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상처지요. 남들과 함께 걸어보지 못한 거,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고문 역시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들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날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을 살다 간 고난향. 그는 생전에 비행기 소리만 나도 쿵쾅,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구술했다. 전주교도소에서 10개월 옥살이를 했던 그다.

 

남편 없다는 이유로 집에 와서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어. 며느릴 걸상에 가로눕혀 배 위 양편에 나무 판자를 지들렀어.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서 네 서방 어디 갔느냐고 고문했지. 이 아인 모릅니다, 놔줍서 해도 놈들은 내 뺨을 때리고 그 짓을 했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

 

4·3을 직접 겪은 제주 할머니들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허영선 제공/ 허영선 제공

 

19485·10 총선거를 피해 산으로 올랐던 경험이 있는 여인들은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렸다. 그들이 당한 고문 역시 혹독했다. 이들은 이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을 회의 장소로 잠시 빌려줬던 양○○은 누군가의 밀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잠시 고향에 왔다가 일본의 남편한테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는 5살 딸아이의 엄마였다. 그의 전 인생은 그날로 뒤집어졌다. 회의 참석자 이름을 절대 불지 않고 모르쿠다(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던 그에게 내려친 고문의 모습은 이랬다.

 

이년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 닮은 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돼지 달아매듯이 이레 착 저레 착 막 두드려 반 죽으니까 떨어집디다. 손을 내놓으니 몽둥이로 두드리곡 손가락은 완전 꺾어지니까, 상의는 벗기지 못하니까 아랫도리만 벗겨서 그렇게 두드립디다. 3일 동안 두드려도 바른말 안 하니 이런 지독한 년은 없다고. 천장에 달아매고 두드리다가 코로 주전자에 끓인 물을 들이켜니 죽어질 것 아니우꽈(아닙니까). 밖에 동지섣달 얼려놓은 물에 던져. 살아나니까 끌어다가 다시 코로 물을 붓고. 손목 심고 돌리며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과락 밀리니 이마 벗겨지고, 이빨 다 무너지고. 아픈 줄도 모르곡. 옷이라도 입혀 그렇게 하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목숨 질긴 사람이우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 그에게 순경이 말했다.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그 순경이 자기 말만 들으면 살 수 있다고 헙디다.” 그날 이후 그의 생은 완전히 조각났다. 고문은 질겼고, 기억의 힘은 너무 강해서 지금도 고통은 밤까지 따라붙는다. 깊은 기억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힘을 갖는 건가.

 

만삭의 여인에게 가해진 고문도 있다. 출산이 임박했던 여인 전○○에게 달려온 사람은 산파가 아니었다. 남편이 산파를 데리러 간 사이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수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멍석말이가 다 뭐야. 이리 차면 저리 나동그라지고 할 때는 정신 좀 차려진 때야. 하루 만인지 이틀 만인지 살아났지. 온몸은 멍들어 형편없고. 다 죽은 걸로 알았어. 정신 나서 보니 애기도 있었어. 그러곤 정신을 놓아버렸어. 방은 피로 번번했고 순경들이 나갔어. ‘사람 죽었다소리에 사람들이 달려온 거야.” 인근 병원 간호사 출신의 그는 고통 속에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간호사로 다녔던 병원 의사들도, 동료들도 볼 수 없었다. 60년 넘어서야 병원 엑스레이를 찍었다. 병원에선 머리가 함몰된 지 40년 넘었는데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 했다. 집안 사람들도 그의 한쪽 눈이 멀었다는 것,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지 못했다. 절대 말하지 않았다. 마을 팽나무에 임신부를 매달아놓고 학살한 일도 있었다.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

남편 잃고 홀로된 여성들이 살아갈 힘은 오로지 자식들이었다. 4·3 시기 어디론가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과 시부모를 모시고 피신을 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다 붙잡히면 도피자 가족으로 모진 고문을 겪었다. 행방불명자 가족이 있는 여성들은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산다. 젊은 남편은 죽고 당신은 아흔 넘게 살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인도 있다.

 

행방불명된 이십 대 남편이 행여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며 기다리던 가시리의 박내은. 그는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벌어지자 제주시 연동에 있는 한 방송사를 찾았다. 혹시 남편이 육지 어딘가에 살아 있어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해서였단다. “이산가족들이 울고불고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나올 때 혹시 (남편이) 육지로 넘어가 살았으면 그래도 편지라도 할 것인가 해서 오래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한 여인은 대구형무소에 수용당했다는 남편을 찾아갔지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을 길 없는 주검 대신 자신이 갖고 간 옷을 사른 재를 한 줌 손수건에 담고 왔다. 두 남동생이 학살된 데 이어, 예비검속으로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마저 행방불명됐다는 김순아. 그 역시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친정가족 모두 4·3으로 몰살됐다. 그래서 4·3 기사는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했다. “예전엔 바다에서 헌 고무신짝만 봐도 어머니 생각, 헌 걸레만 봐도 어머니 생각. 이런 꽝()만 봐져도 어머니 생각 나는데 찾지도 못하고. 내가 죄인이야.”

 

육지 출신 경찰의 수양딸로 들어가 평생 자신의 성씨가 바뀌어버린 여인에게도 4·3은 입 밖에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이다. 팔순을 앞둔 그는 아예 고향 땅 제주도를 밟지 않는다. 원망은 자신을 그리 놔둔 오빠에게 향한다. 부모님 호적에서 빠진 채 평생을 살아온 여든 살의 강○○.

 

사라졌던 아버지는 얼마 뒤 광주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부모님이 4·3 때 왜 죽었는지, 70년이 된 지금까지 여자라서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붙잡혀간 뒤 중산간 마을 봉개동에 살았다는 그의 집에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아들을 내놓으라며 어머니를 회초리와 몽둥이로 매타작했다. 어머닌 말 못하는 흉내를 내며 맞기만 했다. 이후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3살 여동생은 굶어 죽었어. 우리 어머닌 눈물도 하나 안 내고, 묻을 걱정이라. 이 아길 어찌 묻을까. (친족)한테 아이를 묻어달라고 사정을 한 모양이라.” 갈 곳 없는 그들은 외양간에서 잠을 잤고, 제사도 쇠막에서 했다. 한 번이라도 밥을 먹고 싶었다. 11살 그에게 수양딸 삼자고 우도에서 한 엄마가 찾아왔다.

 

평생 뒤틀린 삶 살아낸 여인들

이 아이를 우릴 줍서. 어머닌 절대 안 된다고 했어. 죽어도 같이 죽자 했어. 막 울었어. ‘어머니, 나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니우꽈. 쌀도 하나 없는데.’” 한 입이라도 덜어야 했다. 그렇게 수양딸로 가 6년을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너희 엄마가 크게 울더라. 그렇게 우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해. 그래서 나는 절대 우도에 (수양딸로) 간 말 안 해. 챙피해서. 물질해서 친정집 세 개 사준 적도 있어.” 살아남은 남매의 호적은 부모가 아닌 친척 호적에 남았다. “우린 왜 호적도 못 찾는지, 누군한테 물어야 하는 건가? 우리 아버지는 첫아기를 서른에 났어. 아들도 없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왜 아들을 내놓으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아직도 자발적으로 남의 집에 갔다는 말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그가 그런다. “그렇게 곱닥한(고운) 사촌언니도 임신했는데 죽었어. 막 화나지. 죄 없는 사람들을 왜 죽여. 징글징글하지.”

 

엉키고 뒤엉키는 4·3의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세상이 곧 올 줄 알았다며 주체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도 있다. 오사카에 사는 조은숙은 어려서 본 동네 학살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땐 총 맞아 죽는 사람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여성은 학살 모습을 봐선지 꼬챙이에 꿴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4·3 희생자의 21.3%가 여성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런 무장도 없는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주섬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대통곡을 가슴에 묻고, 애도조차 할 수 없었다.

 

죄 없이 육지 형무소에 갇힌 한 여인은 갓난아이가 죽자 찬 바람 쌩쌩 부는 전남 목포의 한 파출소 빗자루 위에 주검을 올려놓고 왔다고 눈물을 흘린다. 젖이 퉁퉁 불은 수용소의 또 다른 젊은 엄마는 빨갱이 새끼에겐 젖도 주지 말라는 저주의 목소릴 들었다. 밤엔 산이 무섭고, 낮에는 아래가 무섭다고 울부짖던 젊은 여성들은 4·3의 비극이 시국 탓이라 말한다. 국가의 폭력에 희생됐으나 이들은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이들의 감춰진 목소리는 여전히 4·3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꽃 같은 청춘의 생 위에 쏟아진 광풍에 휩쓸려 평생 뒤틀린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들, 4·3의 가장 가혹한 시간이었던 194811월 중순께부터 19492월까지 키보다 높은 눈을 짐승처럼 헤치며 헤매야 했던 여인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죽어가던 모습을 눈물 없이 지나쳐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의 삶이 증거다

기억과의 싸움은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그 시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사연은 국가 공권력이 무고한 여성들의 인권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했는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이자 진실이다. 살아남은 그들이 찬란하나, 가혹한 제주의 4월을 통과하고 있다./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누가 그들을 폭도로 몰았나

사진 기록으로 짚어보는 제주4·3의 역사

미군 사진병 사진 속에 누락된 진실

 

사진 속 4·3

제주4·3 한가운데 무츠란 이름의 미군 사진병이 있었다. 그는 잡혀온 폭도, 폭도의 손에 희생된 여성의 주검, 사태 수습을 위해 제주로 모여든 역사적 인물들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았다. 그러나 4·3의 진실은 그가 찍지 않은 사각(死角), 안 보이는 곳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수집한 사진들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친절한 설명을 달았다.

 

194882일 경비대가 탈영했던 경비대원 3명을 제주시 근교에서 총살하기 직전의 모습. 당시 경비대원의 총살은 미군 입회 아래 집행됐다. 한겨레

 

나는 제주도민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났고,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기 전까지 내 삶의 반경은 섬이었다. 섬 밖에 나가본 것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두 번의 수학여행이 전부였다.

 

나는 민오름을 좋아했다. 집 뒷산치고는 큰 오름이었다. 올라가면 제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풍광이 좋았다. 민오름을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코앞에 오라리 연미마을이 있다. 국민학교 소풍 때마다 지나쳤던 오라리 마을이 제주4·3 때 등장하는 그 마을임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2000년 즈음이었다. 당시 4·3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춰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며 내 생활과 기억의 일부이던 장소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던 오름에 으레 있는 버려진 무덤의 의미도 예전과 같을 순 없었다.

 

체포된 무장대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미군은 사진에 최근 진행 중인 테러 기간에 제주도에서 포획된 두 명의 살인자. 이 둘은 자백했다는 설명을 달았다. 194851일 촬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힌 귀순 제주도민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194851일 일어난 오라리 방화 사건40년 넘게 폭도들이 오라리 마을을 공격해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경찰이 격퇴한 사건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9<제주신문> 4·3취재반의 조사로 경찰의 사주를 받은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 사태에 대한 군경의 무력 진압이 본격화됐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듯 4·3이라는 대량 학살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무성영상 한 편이 남아 현재에 전한다. <한국의 메이데이: 제주도>라는 이름의 영상은 제주경찰감찰청 입구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자수한 폭도 살인범과 노획한 살인 무기를 클로즈업한다.

 

제주경찰감찰청 정문에서 캘리버 자동소총(30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관이 경계를 서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기관총에 비하면 영상이 전하는 살인 무기라는 것은 죽창, 손도끼, 칼 등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느릿느릿 구부정한 채 건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역시 폭도 살인범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약해 보인다. 19485월은 아니지만 6월에 종군기자로 취재했던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이 쓴 기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포로들이 후송되어 온다. 부린 채 말없이 이끌려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

 

처참하게 살해된 여성의 주검. 옆에 가족인 듯 보이는 노인이 멍한 눈으로 정면을 보고 있다. 미군은 공산군 빨치산에 의해 살해된 주검과 그들의 친지 및 친구들이란 설명을 달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가고 있다. 1948515일 촬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귀순한 주민들이 취조를 받고 있다. 한겨레

 

영상은 곧바로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맞아 죽은 여성의 주검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미군 장교가 파괴된 도로를 지켜보는 모습과 함께 이내 미군과 경찰이 주민들을 심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라리 마을의 일부 가옥들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은 L-5 정찰기를 타고 공중 촬영한 장면과 오라리 마을로 출동해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 모습을 지상 촬영한 장면이 교차편집돼 있다. 영상은 엉성하나마 의도를 갖고 편집된 것이다. 그렇다. 이는 단순 기록영상이 아니다. 사전 각본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기록물이다. ‘제주4·3’ 무장대가 잔악무도한 폭도,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인한 것처럼편집을 했다.

 

이 영상을 찍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딱 그 시간에 공중과 지상에서 오라리 사건을 촬영할 수 있었을까.

 

당시 제주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에 배속된 123통신사진파견대 스틸사진가와 영상카메라맨이 있었다. 이들은 1948430, 51, 55, 515일 제주도의 모습을 찍었다. 이 가운데 스틸사진을 찍은 무츠와 영상카메라맨 샤이다크가 이목을 끈다. 샤이다크가 촬영한 영상 속 일부는 무츠의 사진에 정지화면으로 포착돼 있다.

 

군 사진병들은 사전 기획 목적에 따라 특정한 시각을 이미지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을 임무로 한다. 샤이다크가 찍은 영상만큼 무츠의 사진 속 시선이 매우 흥미롭다.

 

무츠는 123통신사진파견대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다. 나는 그가 19481~6월 한국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132장을 확인했다. 그는 서울, 인천, 수원 등 중앙은 물론 춘천과 제주 등 이른바 전선 지역을 두루 넘나들었다. 정치와 군사 관련 주요 피사체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을 사람들 일상 속에서 잘 포착했다.

 

4·3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역사적인 인물들이 194855일 제주를 찾았다. 윌리엄 딘 주한미군정장관이 제임스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맨스필드 중령 뒤에 가려진 인물은 안재홍 민정장관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4·3사건과 관련해선 18(1장은 추정)의 사진이 남아 있다. 무츠의 사진 속 시선에서 사각화’(死角化·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함)한 것은 무엇일까?

 

무츠의 사진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공산 폭도들의 잔악한 만행이다. 연구자들은 이 사진들이 프로파간다(선전) 목적으로 촬영됐다고 평가한다. 1948428일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과 무장대 대장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상이 맺어진다. 그 직후인 5월 초는 국방군 강경파에게 이 협상을 파기하고 강경 진압을 정당화해줄 프로파간다가 절실하던 시기였다.

 

4·28 평화협상은 말이 평화협상이지 귀순공작에 가까웠고, 김익렬 연대장이 단독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의 지시와 제주 59군정중대장 제임스 맨스필드 중령이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협상 결과가 기대 이상이어서, 보고를 받은 맨스필드 중령이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딘 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 중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사태의 조기 진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현재 병력으로 무력 진압을 했을 때 얼마나 빨리 사태를 끝낼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에게 제주도민의 안위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하지 중장 주변의 미군 방첩대와 정보참모, 군정경찰을 대표하는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무력을 동원한 강경 진압 방침을 권고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51일 김익렬 연대장이 만난 미 제24군단 정보참모 중령과 방첩대 소령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 방첩대 소령은 김익렬이 자체 조사한 오라리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이 한 것이다라며 일축했다. 게다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토벌 강화를 지시했다. 하지 중장의 정보 라인과 경찰 수뇌부가 긴밀히 연계하면서 제주 지역 경비대 책임자의 의견을 묵살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진실을 알린 <제주신문> 4·3취재반의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양조훈의 평가가 주목된다. “평화협상의 구도를 미군과 경찰이 깨뜨렸다. 그뿐 아니라 제주도의 유혈을 불러일으킨 초토화의 근간도 미군의 발상에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김익렬 연대장이 보고한 오라리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51일 발생했던 일들만 정리하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서 좌익 혐의가 있는 집을 찾아 불을 질렀다. 12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 오후 1시께 우익 청년단은 무장대 20여 명의 추격을 받았다. 그즈음 마을 어귀에서 마을 출신 경찰 가족 1명이 피살됐다. 무장대 출현 소식을 듣고 경찰기동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무장대는 떠났고, 주민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경찰은 마을 입구부터 총을 쏘며 들어왔고, 주민들은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여성 1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 경찰은 경비대 9연대가 마을로 출동하자 황급히 철수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직접 현장 조사를 진행했고 다음날 방화 주동자로 대동청년단 단원을 체포, 구금했다.

 

40년 뒤 4·3취재반은 방화범 대동청년단원과 경찰의 총에 맞아 피살된 여성의 딸을 찾아냈다. 딸의 증언이 흥미롭다. 당시 하늘에서 비행기가 오랫동안 머리 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공중에서 촬영하고 있던 비행기를 본 것이다.

 

제주도 국방경비대 고문 리치 대위와 국방경비대 장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마을의 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제주항 밖에 정박한 미 구축함의 존 R. 크레이그의 모습(아래).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후 미군은 영상과 사진으로 54일 이후 제주의 모습을 담았다. 공중에서 제주도 제59군정중대 건물, 공중과 지상에서 제주항의 모습을 담았다. 장소는 매우 상징적이다.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의 존재와 역할이 미묘하게 시각화하는 장소다. ‘폭도와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무력 진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미군이 드러나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를 통치하는 제59군정중대에서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 주한 미군정 최고 지도부가 비밀회의 참석을 위해 제주에 도착하는 장면, 미군 구축함이 제주도를 봉쇄하기 위해 제주항에 정박한 장면 등이 포착됐다.

 

특히 55일 비밀회의를 위해 주요 인사들이 제주에 도착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은 참 흥미롭다. 딘 군정장관,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군정경찰의 책임자인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날 회의에서 맨스필드 중령은 회의 내용이 극비이고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음에도, 그다음날 딘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제주 사태를 바라보는 회의 참석자들의 시각이 달랐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외부의 공산분자에 의한 것이고, 사태가 곧 회복될 것이라 했다.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 소풍을 온 것처럼 어린아이와 여성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미군은 제주도 공산주의자 테러로 집에서 피난 나온 마을 주민들이란 설명을 달았다. 1948515일 촬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 극비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고, 무엇을 결정했을까? 김익렬의 회고록을 보면 제주 사태의 원인을 둘러싸고 상반된 의견 두 개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경찰은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므로 군경이 합동으로 무력 진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사태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됐고, 경찰의 실책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며 무력 진압이 능사가 아니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해 폭도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맞섰다. 4·3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처지에 서면 폭도양민을 구별한 김익렬 연대장의 시각에도 한계가 있지만, 당시 제주 지역 군 책임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그런 정도의 입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격분한 김익렬 연대장은 몸싸움을 벌였고, 다음날 연대장 직위에서 해임됐다. 조병옥의 빨갱이 몰이야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안재홍 민정장관의 통곡은 인상적이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것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이후 상황은 송호성 사령관이 제주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예상한 것처럼 전개됐다. 5·10 총선거가 제주도 2개의 지역구에서 무산되자 미군은 경찰과 경비대를 지휘하면서 강경 무력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 무렵 미 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돼, 현지의 모든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사건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면 평정될 것이다.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는 그였다. 여름 이후 미군 사진병의 시각에서 제주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유혈 진압을 시각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사진병들은 한국의 이곳저곳에서 활동했지만, 초토화가 전개되던 제주도는 여전히 그들의 사각에 있었다. 제주에서 꽃모가지째 떨어지던 붉은 동백꽃은 2년 후 전국에 걸쳐 벌어질 동족 학살의 전조였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비극의 뿌리를 기억하라

70주년 맞아 새롭게 떠오른 정명(제 이름 찾기) 운동

원인 외면하고 학살에만 초점 맞추면 절반의 기억머물러

 

19884월 열린 ‘4·3 추모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에서 제주 지역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해방공간은 극적인 시대였다. 해방과 분단, 좌익과 우익, 혁명과 반혁명의 시간이 공존했다. 해방의 기쁨과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은 벼락처럼 왔다가 한순간 꿈처럼 사라졌다. 고작 3년도 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해방공간은 새 세상의 열망이 곳곳에서 분출하는 나날이었다. 그 열망은 한반도 끝자락 제주에서 폭발했다.

 

금기 깬 순이삼촌

70년 전, 19484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인근 오름들에서 봉화가 올랐다. 미군정과 경찰 폭압에 맞선 자위적인 투쟁을 위해,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내걸며 봉화가 올랐다. 평범한 제주민들도 선거를 피해 산에 올랐다. 결국 제주 3개의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의 투표가 무효가 됐다. 제주는 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으로 한국현대사에 남게 됐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고, 금기의 시간이 이어졌다. 제주4·3의 기억이 표출되려면 10여 년 뒤 도래할 4·19라는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했다.

 

4·19혁명 직후 1960523일 국회에서 거창, 함양, 남원, 영암, 함평, 문경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 조사단 구성이 의결되자 제주에서도 4·3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졌다. 그 계기는 19605월 제주대학교 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해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제주신보>에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 관련 현지 조사에 앞서 제주신보사가 62일 사고(회사에서 내는 공고)를 내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렸다. 접수된 신고는 사흘 만에 1259, 인명 피해는 1457명이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진상규명 논의는 중단됐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쿠데타 직후 제주뿐 아니라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인사들이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 금기를 깬 것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었다. 1978<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북촌리 학살 사건을 그린 소설로서 4·3의 참혹상과 상처를 폭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필화 사건을 겪었다.

 

이후 4·3의 조직적 진상규명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86년 무크지 <녹두서평>에 이산하의 시 한라산이 발표되며 4·3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40주년을 맞아 추모모임과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1989년 처음 공개 추모제가 거행됐다. 1989510일에는 제주4·3연구소가 조직돼 현장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4·3 연구가 시작됐다. 제주 지역에서 헌신적인 증언 채록이 이뤄졌고, 미국 자료가 공개되며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1988년에는 자료집 <제주민중항쟁><잠들지 않는 남도>가 출간됐다. 이어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정치학 논문 두 편이 나와 4·3 연구의 기초를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을 복원함으로써 4·3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민주화운동 거치며 진전

특히 1980년 말 시작된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40여 년 동안 침묵 속에서 한을 삼켜왔던 유족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4·19 이후 19876월 항쟁까지 유족들의 공적 증언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은 그동안 4·3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1980년대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4·3은 제주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게 됐다. 4·3이 제주도만의 4·3이 아니라 통일운동이자 민중항쟁으로 한국현대사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4·3 진상규명 노력을 진전시킨 것은, 다시 제주 출신 인사들과 제주도민이었다. 제주4·3연구소의 증언 채록과 19906월부터 연재된 <제민일보><4·3은 말한다>가 출판되며 4·3의 원인, 전개 과정, 피해 상황 등 전모가 소상히 드러났다. 1992년 제44주년 4월제 행사와 세미나는 제주도를 넘어 전국 단위로 확대돼 열렸다. 그런 의미에서 1992년은 4·3의 전국화가 추진된 해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등 제주와 서울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는 41일부터 7일까지를 ‘4·3영령 추모 기간으로 정해 추모제를 열었다. 한편, 그해 다랑쉬굴에서 처참한 4·3 피해자들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 시기 진상규명 운동의 성과는 재야의 틀을 벗어나 공적 기구에서 해결책이 모색됐다는 점이다. 1993320일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이듬해 제주도의회는 ‘4·3피해신고실을 개설했다. 피해 신고에 따라 1995년 제주도의회는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펴냈다.

 

1994년은 4·3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함께 주최한 첫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제주 지역 12개 시민단체가 모여 구성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왔다. 이에 반해 반공유족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당시 ‘4·3유족회1991년부터 3년째 따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었다.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19984·3 50주년을 전후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위해 제주4·3특별법 제정운동이 제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새천년을 맞이하기 전에 특별법을 쟁취하기 위한 제주도민과 유족들, 시민단체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인 19991216일 특별법이 통과됐고, 2000112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됐다.

 

새천년에 제정된 제주4·3특별법에 기반해 20031015일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1031일 국가권력의 잘못에 공식 사과했다. 보고서는 4·3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 4·3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식 이해가 바뀐 것이다.

 

극우세력의 4·3 흔들기

  

제주4·3’ 희생자 유가족과 도민들이 2008460주기 4·3 희생자 위령제가 끝난 뒤 제단에 헌화·분향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진상조사 보고서 채택 이후 본격적으로 4·3 명예회복 과정이 진행됐다.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4·3기념관, 4·3평화재단이 조직됐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3 최대 암매장지로 파악된 제주공항 등에서 부분적이나마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현장의 참혹함은 유족과 도민에게 4·3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일깨워줬다.

 

이명박 정부에서 극우세력의 4·3 흔들기가 계속됐으나, 그때마다 실패로 끝났다. 적극 대응한 것은 유족회였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4·3의 피해자인 유족들의 인식과 역할이 크게 달라졌다. 20013월 전체 유족을 통합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가 조직되면서, 유족들은 진상규명의 주체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20144·3을 국가추념일로 제정했다.

 

60주년인 20084·3의 정명(正名·제 이름 찾기)을 둘러싼 문제제기가 본격화했다. 이는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배제된 항쟁의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자는 논의와 맞물려 있다. 4·3 추모행사 직후 제주4·3진상규명 명예회복추진 범국민위원회가 주관한 ‘4·3의 정명을 위한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제주4·3연구소 주최의 ‘4·3 6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무고한 이들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 명예회복 작업이 대중적 공감을 얻는 상황에서 (제주도민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항쟁의 역사 찾기는 현실적으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4·370주년을 맞는다. 70주년은 피해자와 유족들이 생존할 때 이뤄지는 마지막 기억투쟁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기념사업위원회, 전국 조직으로는 범국민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개별 배상과 사자명예훼손 조항이 들어간 4·3특별법 개정안을 만들었고, 다시 한번 역사적 정명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70주년을 맞아 전국에 4·3분향소가 설치되고, 47일 광화문문화제가 열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4·3아카이브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가 아니라 서울 중심부에서 시민들이 4·3과 만날 것이다.

70년 전 제주는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뿐 아니라 처참한 공동체 파괴를 겪었다. 그 고통 속에 이뤄진 진상규명 운동은 제주도민 내부의 갈등을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화해하는 등 과거사 청산의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 평화교육이 이루어져 4·3은 미래 세대와 만나고 있다. 제주도민에게 4·3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현재진행형이다.

 

원인 묻어둔 채 결과만 논해

그러나 4·3이 왜 일어났는가를 기억하는 것도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4·3의 원인은 묻어둔 채 결과만을 얘기한다. 물론 참혹한 죽음 앞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운동이라는 4·3저항과 항쟁의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4·3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며,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면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사실을 배제하는 절반의 기억에 머무르고 만다. 학살론을 통해 국가폭력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제주도민은 일방적인 피해자 지위에 머무르고 만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가해자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뜻한다. 저항적 기억투쟁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양정심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아직도 구천 헤매는 영혼들

2007년 제주공항서 첫 유해 발굴 이후 속속 드러난 그날의 진실

행방불명된 3천여 명 유가족 품에 안겨줘야

 

 

제주4·3’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현장을 찾은 이들은 켜켜이 쌓인 죽음 앞에 저마다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잃었다. 조미영 제공

 

비행기 굉음이 고막을 타고 들어와 머리를 때린다. 거기 중장비 기계음이 더해져 소리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굴착기를 멈춰세웠다. 자갈이 가득 찬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사람이 작은 뼛조각을 찾아냈다. 유골이었다. 60여 년 만의 해후였다.

 

너무도 소중한 뼛조각 하나

20079, ‘제주4·3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의 하나로 제주국제공항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된 첫날 풍경이다. 발굴단은 기적처럼 첫날 유해를 발견했다. 발굴 장소를 퍼즐 맞추듯 찾아가던 우리는 기다란 암매장 구덩이에서 그날의 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2007년 여름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여간 진행된 공항 1차 발굴 결과, 길이 32m, 너비 1.2~1.5m의 좁고 기다란 구덩이에서 유해 128, 탄두, 탄피, 고무신 등 유류품 659점이 발굴됐다. 이후 20089월부터 20099월까지 이뤄진 2차 발굴에서는 길이 15.5m, 너비 4.3~5.4m의 직사각형 구덩이에서 유해 259구와 유류품 1300여 점을 발굴·수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제주공항 바닥에 파묻힌 채 침묵해야 했던 이들은 누굴까?

70여 년 전, 제주는 이념 갈등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 고통의 땅이었다. 194843일 무장대가 일제히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며 투쟁을 결의했다.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에 반대하고 친일 경찰의 부당함에 저항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단독정부·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다.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194911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들판이 학살터로 변했다.

 

당시 정뜨르 비행장, 현 제주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학살터였다. 공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고 주변에 인가가 드물며 경사진 땅이 많았다. 그래서 학살 후 주검을 암매장하기 쉬웠다. 이후 이곳은 공항 활주로로 포함됐다. 그날의 진실이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러나 목격자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트럭에 실려 정뜨르 비행장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 트럭이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분명 그곳 어딘가에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공항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발굴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끈질긴 요구 끝에 유해 발굴의 기회를 얻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발굴을 준비했다. 마침 제주공항 남북 활주로 확장 공사로 활주로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막상 공항 활주로에 서보니 옛 지형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목격자들조차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증언을 토대로 옛 지번을 측량하며 암매장지를 추정해나갔다. 옛 지번 2451번지가 유력했다.

 

그곳은 공항 내 전시 비축자재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모래와 자갈 등을 넣어두는 구덩이다. 우선 이것을 옮겨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첫 유해 조각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그 일대에서 확인된 유해들은 부스러진 채 흩어져 있었다. 과거 비축자재를 넣기 위해 구덩이를 파던 중에 손상된 듯하다. 하지만 이 으스러진 뼛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도 소중했다. 누군가 애타게 찾고 있을 희생자를 찾아줄 단서였기 때문이다.

 

첫 발굴로 얻은 용기와 자신감

제주4·3 희생자 유해 발굴의 목적은 역사의 진실 찾기외에도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유가족의 품에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희생자 유골에 남아 있는 DNA와 유가족의 혈액에서 채취한 DNA를 대조하며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92구의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 품에 안겨졌다.

 

이처럼 많은 성과를 냈지만, 유해 발굴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20054·3 희생자 유해 발굴을 위한 예비조사를 한 뒤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6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발굴이 가능하겠냐는 회의적인 시각과 유해가 온전히 남아 있겠냐는 의문의 목소리가 거셌다. 특별법을 통해 유해 발굴의 법적 정당성은 확보했지만 무슨 근거로 함부로 유해를 파헤치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였다.

 

20065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하천 정비 작업을 하는 사업 터에 유해 발굴 대상지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6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쳐야 해 시일이 촉박하다고 했다. 아직 정규 발굴팀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 구제발굴이 진행됐다. 다행히 첫날 유해 일부분이 확인됐다. 안도하고 감격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온전했다. 증언자의 말대로 반듯이 누인 상태로 유해 3구가 확인되었다. 발목을 감싼 각반과 허리벨트까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너무나 긴장한 탓인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거르고 쪼그려 앉아 흙을 걷어냈다. 배고픔이나 다리 저림도 잊은 채 발굴에 몰입했다. 첫 발굴의 경험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 저마다 애타는 사연을 안고 주시하는 유가족들을 보며 갈등하던 맘이 굳건해졌다. 이후 4년 동안 이어질 유해 발굴 작업의 시작이었다.

 

200610월에야 유해 발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화북천 임시 구제발굴을 마치고도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행정은 미적거렸고,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제주4·3연구소에서 기획·조사를 담당하고 발굴 전문기관이 발굴 현장을 맡았다. 제주대학교 법의학 교실은 DNA 감식을 했다. 국방부 유해 발굴 현장 경험자를 초빙해 체질인류학적 접근도 시도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신이 남아 있었다. 더욱 정확한 조사가 필요했다. 실패가 거듭된다면 이후 예정된 공항 유해 발굴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계획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교차 증언을 통해 팩트체크에 나섰다.

 

4·3은 확인할 수 있는 정부 기록 문서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목격자들의 증언이 중요 단서가 된다.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증언자들의 몫은 매우 컸다. 목격자 대부분이 고령인 탓에 엊그제 일은 까맣게 잊었지만, ‘오래전 그날의 일은 또렷이 기억했다. 첫 발굴지였던 화북천변 현장은 물론,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앞의 유해 발굴 현장은 증언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5~6겹으로 뒤엉킨 유해들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별도봉 오름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많다. 이 동굴 앞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어 그분의 도움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근처에 동굴이 여러 개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증언자 역시 연세가 많고 편찮은 관계로 현장 동행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땅의 지주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아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며느리가 증언했다. “시아버지께서 그곳에 가면 동굴 앞쪽에선 밭을 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요. 4·3 때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저는 해가 조금만 어스름히 기울면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치듯 왔습니다.”

 

증언자의 시아버지는 자신의 밭 앞 동굴에서 학살된 주검들을 꺼내 가지런히 눕혀 가매장했다고 한다. 동굴 안쪽부터 입구까지 샅샅이 파들어갔다. 증언대로 유해들은 줄 맞춰 뉘어 있었다. 8구의 유해가 이곳 별도봉 진지동굴 앞에서 확인됐다. 이 중 2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군대 간 남동생의 생사를 몰라 애타게 기다리던 누나는 6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백골이 된 동생을 만났다.

 

남동생은 4·3 진압 작전을 펴던 9연대 군인이었다. 하지만 1948618일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진 뒤 제주 출신 군인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색출된 이들은 새벽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처형됐다.

 

2007년 공항 1차 발굴 결과 수습된 128구의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26구이다. 이들은 1950년 예비검속 희생자들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과거 4·3에 연관됐거나 기존에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던 이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했다. 이른바 예비검속이다. 이렇게 잡혀온 이들은 고구마 창고 등에 갇혀 있다가 일제히 처형됐다. 이때 공항에서 확인된 이들은 서귀포, 대정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잡혔다가 희생당한 이들이었다. 제주시에서 검거돼 행방불명된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주검은 여전히 공항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공항 2차 발굴 역시 평탄치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3개년 계획으로 시행되던 발굴이 늦어지며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5m 높이로 복토된 흙을 걷어내는 작업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1차로 흙을 굴착기로 걷어내고 2차로 인부들을 동원해 손으로 걷어냈다. 그 과정에 구덩이의 윤곽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구덩이를 파내며 우리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과 마주하게 됐다.

 

유해들은 5~6겹으로 쌓여 짓이겨진 채 뒤엉켜 있었다. 좁은 구덩이에 259(두개골 기준)의 유해를 묻은 뒤, 공항 확장과 함께 그 위에 흙을 덮고 장비로 눌러댔기 때문이다. 전체 발굴에 1년 넘게 걸린 터라 중간중간 현장을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도 열었다. 이때 발굴 현장을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숙연해졌다. 4·3을 부정하던 이들도, 발굴을 회의적으로 보던 이들도 처참한 죽음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194910월 불법 군법회의로 사형당한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잡혀 있다가 살해됐다. 유류품에서 이들의 사연이 묻어났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숟가락과 위장약 병 그리고 안경까지. 누군가의 소중한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였던 이들이다.

 

좌우 이념이 아닌 인권의 문제

아직도 제주에는 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3천 명이 넘는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 때 못 돌아온 이들, 바다에 수장되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는 이들, 제주 땅 어딘가에 지금도 쓸쓸히 묻혀 있지만 찾을 수 없는 이들이다. 벌써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가족들도 한분 두분 세상을 뜨고 있다. 이분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빨리 어딘가에 묻힌 희생자를 찾아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는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조미영 제주4·3연구소 이사

 

·삶을 말한다

큰넓궤부터 섯알오름, 북촌 너븐숭이까지 제주4·3 상흔 찾아 떠난 23

통곡의 섬에 삶과 죽음은 함께 있었다

 

낮은 포복으로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굴 입구를 지나면 어른 키만한 높이에 반경 4m 정도되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1948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뒤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이곳에서 집단 은신했다.

 

형을 날려버렸다.

일정 때 일본으로 간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조천중학원에 다니던 큰형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다. 둘째 형은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만 있었다.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곤 큰형밖에 없었다. 그런 형이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난리 1년 전(1947)에 있었던 3·1절 시위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었다. 194836, 큰형이 죽었다. 조천지서에서 고문받다 골로 가버렸다. 형의 이름은 김용철이었다.

 

228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에서 만난 김용선(78)씨는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다만 이장할 때 본 형의 백골은 아직도 선명하다. 두개골이 함몰돼 있었다.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4·3의 한 도화선이 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

 

4·3의 도화선이 되기도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형을 잃은 김용선씨.

 

“1948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 제주 사회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金用哲, 21)이 유치 이틀 만인 3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314일 모슬포지서에서 유치 중이던 양은하(梁銀河, 27) 역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3월 말에는 서청 경찰대에 붙잡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朴行九, 22)가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 상태에서 끌려가다가 총살당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지역신문에도 실렸을 정도로 민심을 들끓게 했다. 경찰은 지병에 의한 사망이라고 해명했지만 주검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가 거세졌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 당국에 요구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경찰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치러진 1차 부검이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고,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 사인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이 구속됐다.

 

장례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수백 개의 만장이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 한 달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제주 청년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도피입산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면서 도민들은 경찰을 더욱 불신하게 됐다고 향토지는 적었다.

 

김씨는 큰성()이 죽지 않았으면 집안이 멸족됐을 거라며 형이 죽어서인지 4·3 그 난리통에도 다른 화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집안은 항일운동가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천읍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도일한 김경희 선생은 그의 작은할아버지였다.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도 받았지만 후손인 김씨는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금 한 푼 받지 못했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방불명, 그리고 형의 죽음까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31일 오전, 날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은 모질게도 불었다. 제주를 찾은 인권활동가들의 당일치기 4·3 ‘다크투어일정에 동행하기 위해 제주시 애월읍으로 향했다. 행사를 주관한 강은주 제주 다크투어공동대표는 일정을 소개하면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은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라며 블랙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했다. 4·3 다크투어는 연중 계속된다.

 

첫 일정은 영화 <지슬>의 촬영지로 유명한 서귀포시 동광리 큰넓궤’(‘큰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였다. 1948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 은신했던 동굴이다. 지급받은 헬멧과 장갑을 착용하고 인권활동가 30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 너른 들판에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큰길가에서 큰넓궤까지 가는 길은 1.3km나 됐다.

 

큰넓궤 입구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자물쇠로 채워 있었다. 해설사를 따라 철제문 사이를 비집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암흑이 끼쳐왔다. 휴대전화 조명을 켜 진로를 확보했지만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폭이 좁아져 낮은 포복을 해야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무릎이 돌에 부딪혀 약간의 통증이 번져왔다. “!” “!” 어둠 저편에서 짧은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수시로 천장에 부딪히는 헬멧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는 몇 명은 진입을 포기했다. 2m 정도 기어가자 아래의 큰 동굴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가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어른 키만 한 높이에 반경 4m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윗굴이었다. 해설사는 이곳이 첫 번째 거주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축축했다. 불빛을 비춰보니 깨진 사기그릇과 질그릇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당시 피란민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70년의 풍화도 없이 깨끗했다. 천장 한쪽엔 박쥐가 매달려 있었다. 여기서 20m만 더 가면 또 아랫굴이 나온다고 했다. 폭은 다시 급격하게 좁아졌다.

 

당시 피란민들은 이곳에서 밥을 해먹지는 않았어요. 근처의 작은 굴에서 며칠에 한 번씩 밥을 해서 차롱(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납작하게 만든 그릇)에 담아다 먹었다고 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 발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대요. 똥도 밖에서 누지 못해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 거기서 누었다네요.”

 

해설사의 말에 활동가들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공간에서 노인들은 어떻게 60여 일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밖으로 나오면서 영화 <지슬>의 동굴 장면을 떠올렸다. 50분 동안의 동굴 탐험을 마친 활동가들은 생존자다를 외치며 온몸으로 4·3을 기억하게 됐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슬픔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20049월 별세한 진아영 할머니의 유품들. 이면지에 쥐약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오승훈 기자

 

버스는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으로 방향을 틀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을 불법적으로 체포·구금한 뒤 집단학살했다. 섯알오름에선 1950820일 새벽 2시에 한림어업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 새벽 5시께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보도연맹은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이승만 정부가 강제로 조직한 어용단체였다. 지역별로 할당이 정해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보리 서 말을 받고 가입하는 등 엉망이었다. 1949년 중반 이후 가입한 이는 대개 무지렁이 농민들이었다. 현기영 선생 말처럼 이승만이 국부라면 지 새끼들을 잡아먹은국부였다.

 

해설사는 희생자 추모비를 둘러보고 야외에서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자고 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맨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데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에 모래가 밥과 반찬 위에 앉았다. ‘정말 다크투어가 맞다는 얘기가 절로 나오는 날씨였다. 서둘러 점심을 쓸어넣은 우리는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송악산 일본군 진지동굴에 도착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뚫려 있다. 너비 34m, 길이 20m에 이르는 이 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이다. 4·3 이전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였던 제주의 상처는 오늘날 강정 해군기지로 이어지고 있다.

 

다크투어 마지막 일정은 진아영 할머니 삶터’(서귀포시 한림읍 월령리)였다. 진아영 할머니는 4·3 때 얼굴에 총탄을 맞아 한평생 턱 없이 살다가 20049월 별세했다.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할머니의 집은 방 한 칸에 부엌으로 단출했다. 방 한쪽에 머리빗부터 자물쇠, 목걸이, 머리띠, 공과금 영수증, 동전 등 할머니가 쓰던 유품이 진열돼 있었다. 몽당연필 옆 이면지에는 쥐약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 나왔다. 턱이 없어 말하기 어려웠던 할머니의 슬픔이 거기 새겨 있었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었나. 인권활동가 몇몇이 눈시울을 붉혔다. 돌아오는 차편, 하루 종일 바람을 맞아서일까. 으스스 신열이 났다.

 

32일 오전, 상경하는 날 야속하게도 날씨가 맑게 개었다.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참배객은 거의 없었다. 도열한 각명비 뒤로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적막하고도 평화로웠다. 아치형으로 된 4·3위령제단으로 들어갔다. 13903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자랑이고 기쁨이었을 1390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는 이름을 얻기도 전에 죽은 아기도 많았다. 만약 그들이 살았다면 올해 일흔이 됐을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지금 내 나이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그렇다면 여긴 한 사람이 13903번 죽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4·3 70주년 추념식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평화공원이 중산간이 아닌 시민들 일상 곁으로 내려올 수는 없었을까. 삶과 죽음은 함께할 수 없는 것인가.

 

제주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조천읍 북촌리 집단학살 현장으로 차를 돌렸다. 1949117, 북촌리 주민 450여 명이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됐다. 무장대가 토벌대를 습격한 데 따른 무차별 보복이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는 ·삶을 말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단일 규모로는 제주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천읍 북촌리 학살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고완순 북촌 노인회장.

 

기념관 앞에는 그때 죽은 아기들을 묻은 애기무덤이 있다. 어른들 무덤은 다른 곳에 안장됐지만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무덤가에 핀 수선화가 햇볕에 반짝였다. 돌과 돌 사이에 미니자동차, 막대사탕, 과자가 놓여 있었다. 고무로 된 노란 오리인형도 보였다. 말 없는 통곡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은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떼죽음을 당했다.

 

북촌리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고완순(80) 북촌 노인회장의 댁을 찾았다. 마을 공터에서 기다리는데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큰일을 당하셨는데도 연세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그때 내가 11살이었거든. 70년이 지났는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지. 바깥채에 있던 애가 울더라고. 군인이 단검을 꽂은 총으로 문을 열어젖혔어. 빨리 초등학교로 모이라 하더라고. 나가서 보니까 군인들이 불을 질러서 옆집이 불타고 있더라. 3살 먹은 남동생이랑 언니랑 나도 손 하나씩 잡고 운동장으로 갔어. 사람들이 운동장에 반 이상 가득 찼어. 내가 호기심이 굉장히 많거든. 교통사고 나도 다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데. 학교 울타리 위에 기관총이 운동장으로 향해 있더라고. 사람들 끄트머리로 끼어 앉았어. 교단에 군인이 올라가서 뭐라고 말하더니 바로 총을 쏘는 거야. 아침에 군인차 지나가는 거를 (무장대가) 죽여가지고 군인 2명이 죽었거든. 마을 사람들이 그 주검을 가지고 부대에 갔더니 한 명 빼고 다 죽였거든. 그러더니 기관총 사격으로 막 쏘는 거야. 막 기었어. 손에 걸려서 보니까 내 손이 피범벅인 거야. 아고 어멍 손에 피 묻었엉. (눈물을 글썽이며)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찾더라고. 세상에.”

 

군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30명가량씩 묶어서 학교 옆 옴팡밭(오목하게 들어간 밭)으로 끌고 갔다. 그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옴팡밭에 끌려갔는데 길도 좁고 밭이 깊어. 끌려가보니까 이미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다리에 머리가 가 있고. 죽어 있었어. 쓰레기, 바람에 불려온 것처럼. 우리를 횡대로 앉혔어. 죽음 앞에는 뭔 생각이 안 나. 그때 시간이 겨울인데 오후 4시가 넘었어. 밭이 피로 물들어서 햇빛을 받아 흑색으로 보였어. 자기네끼리 이북 말씨로 뭐라뭐라 하더라고. 쇠소리가 철거덕 철거덕 나. 벌벌 떨고 있는데 사격 중지하는 소리가 들렸어. 지프차가 달려오는 거야.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으로 다시 끌려갔어.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함덕으로 와라고 하더라고. 집이 불탄 사람들은 남의 집 곳간이나 외양간에서 밤을 지새웠지. 생각해보면 그때 아예 제주도를 없애버리려고 그런 거 같아.” 소설 <순이삼촌>에 나오는 그 옴팡밭이었다.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농사는 참 잘 되었다는 그 밭. 옴팡밭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 삶과 죽음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

 

죽은 사람 썩어 감저농사 잘된 옴팡밭

조금만 더 일찍 옴팡밭에 끌려갔으면 자신도 분명 죽었을 거라는 그는, 강원도로 시집간 언니를 만나러 속초에 갔다가 월남해 군에 투신한 남편을 만나 혼인했다. 부산대학교를 나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큰딸은 몇 년째 연락이 없다. “이거 한 가지는 소원이야. 뭐냐면 4·3 겪은 사람들이 동네에서 35명쯤 돼. 내가 막내야.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 오늘도 둘째 딸이 시내에서 감자탕 사다 갖다 줬어. 다 독거노인이야. 언제 죽을지 몰라. 남편 잃어버리고 자식 잃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망이가 많아. 그런 노인들을 위해 공동생활할 수 있는 양로원이나 지어줬으면 좋겠어. 그동안 고통을 준 대가로 국가가 이런 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제주·서귀포=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읽다

제주 4·3을 인류 보편적 비극으로 승화시킨 김석범의 <화산도>

70년 전 비극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두 번째는 더 깊고 아린 체험이었다. 지난 1년 여에 걸친 월례 세미나를 통해, 김석범(1925~ )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 12권을 다시 완독했다. 201510<화산도>가 한국어로 완역된 직후 약 석 달에 걸쳐 처음 독파한 지 2년여 만이다. 좋은 작품 읽기가 늘 그러하듯이, 첫 독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문제적 장면들, 애틋한 마음들, 가슴 시린 비극들, 뇌리를 관통하는 생생한 묘사들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화산도> 두 번 읽기를 통해, 나는 이 기념비적 작품의 뛰어난 문학성과 비범한 상상력, 치열한 역사의식, 인간과 사회·혁명에 대한 깊은 안목을 다시금 환기하고 싶다.

 

일본 문인들의 편견을 깬 수작

누구보다 <화산도>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우카이 사토시 히토쓰바시대학 교수는 “<화산도> 전권의 한국어 번역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동아시아에 있어, 아마도 최대의 문화사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라고 언급했다. 그렇다. <화산도>는 단지 제주4·3을 배경으로 삼은 한 편의 소설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남북한, 일본과 미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원과 의미를 발본적으로 되묻는 귀한 사료이기도 하다. <화산도>는 단지 한 번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 수많은 문제의식과 첨예한 어젠다를 품고 있는 문화 자산이자 늘 되새겨야 할 우람한 고전이다. 일본인 우카이 교수의 <화산도> 평은 이 작품이 지닌 문화적 보편성을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2017918김석범 문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화산도와 나-보편성에 이르는 길에서 “‘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 고향 제주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대학살 ‘4·3’을 테마로 글쓰기를 시작한 나에게 일본어로 조선에 대한 글을 못 쓰게 된다면, 글쓰기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애초에 한국어로 <화산도>를 쓰다 그는 결국 일본어로 <화산도>를 완성했다. 이 점은 일본어로 조선(문학)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렬한 자각의 발로이다. <화산도>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 문학은 상위 문학이고 재일조선인 문학은 그 밑에 있다는 편견, 조선을 테마로 한 작품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완강한 선입견에 대한 확고한 저항의 찬란한 결실이다. 작가는 일본어로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대마도 밀항 때 만난 여성의 상처에 충격 받아

 

재일동포로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산 김석범은 부모의 고향 제주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류우종 기자

 

<화산도>를 통해, 4·3의 전개 과정은 물론, 친일 문제와 친일문학, 해방 직후의 역사적 과제, 한국 현대사와 미국의 역할, 제주의 풍속과 인문지리, 혁명과 이념에 대한 사유와 성찰, 재일조선인의 상처와 저항, 밀항과 귀환의 험난한 여정,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투쟁과 내면, 서북청년단의 행태와 욕망 등은 그 최대의 미적 형상화에 도달한다. 이 모든 주제들은 작품 속에서 단단하게 결합되어 적절한 자리에 배치된다.

 

4·3 때 일본에 있었기에 현장 확인을 위한 답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김석범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가 그로 하여금 장장 20여 년 동안 대하소설 <화산도>를 쓰게 만든 마음의 동력이었다. 작가는 4·3의 참화를 피해 대마도로 밀항한 친척과 함께 만난 여성이 고문으로 유방이 사라진 것을 비통한 마음으로 확인하며, 제주에서 자행된 미증유의 대학살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때로 슬픔은 그 어떤 정서보다 강렬한 힘이 된다.

 

해방 직전 일본에 있는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겠다는 각오로, 홀로 조국을 거쳐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충칭(중경)으로 망명을 시도했던 작가 김석범의 행로를 생각해본다. 해방 직후 국학전문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위당 정인보를 만나 대화하기도 했던 학생 김석범이 있었다. 194628일부터 9일 사이에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조선문학가동맹 주관의 전국문학자대회에 참석해, 시인이자 비평가인 임화가 연단에서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를 발표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년 김석범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그 마음과 체험, 역사적 상상력이 <화산도> 곳곳에 켜켜이 배어들어 있다. 김석범은 20대 초반에 간접 체험한 고향 제주(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고향 제주를 마음속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의 참혹한 비극을 평생 동안 창작의 원동력으로,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 삼아왔다.

 

작가를 만나면 작품보다 환멸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김석범 선생은 참으로 진솔한 편이다.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했던 재일동포 조동현의 발언을 기억한다. 오랜 세월 작가 김석범을 깊이 이해하고 도운 그는 “<화산도>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토록 가벼운 시대, 때로 그 어떤 무거운 역사적 과업과 깊은 인식도 스마트폰 앞에 속수무책인 시대에 200자 원고지 2만 장에 이르는 대하소설 <화산도>를 독파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진 슬픈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곡진한 애정과 이해 없이는 참으로 힘겨운 도정이 아니겠는가.

 

문학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

올해로 우리 나이로 아흔넷에 이른 김석범은 현재 <화산도> 이후의 스토리 <바다 밑에서>(から)를 일본의 대표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연재하고 있다. <바다 밑에서>에는 이방근의 자살과 남승지의 일본 밀항 이후에 전개되는 얘기, 즉 제주에서 그토록 애잔한 관계였던 남승지와 이유원이 일본에서 맞이하는 슬픈 해후와 어긋남의 장면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또한 4·3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한 남승지와 한대용이 이방근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는 대목도 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다. 이번 20184월호 <세카이>에는 <바다 밑에서> 14회 연재분이 수록되었다. 90대 중반에 가까운 연세에 아직도 소설을 월간지에 연재하다니, 노대가의 참으로 엄청난 문학적 열정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이 지속되는 한, 4·3에 대해 계속 발언하고 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감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마음이 과연 가능했을까.

 

이제 <화산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이해는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바다 밑에서>를 비롯한 김석범의 다른 저작들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또 한 편의 <화산도> 후일담이라 할 수 있는, <땅밑의 태양>(地底太陽, 슈에이샤, 2006)<전향과 친일파>(1993), <고국행>(1990)을 비롯한 김석범의 산문집과 평론집도 한국어로 옮겨야 하리라. 최인훈의 산문과 소설의 관계가 잘 보여주듯, 김석범의 산문 역시 소설과 밀도 깊은 관계를 이루며 또 하나의 독창적인 세계 인식을 우뚝하게 보여준다.

김석범은 문학작품을 통해 해방 공간의 역사를 재검토하는 것이 <화산도> 창작의 기본 의도이다. 앞으로 통일이 될 때, 4·3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내 개인적 소망은 <화산도>의 주인공 이방근을 통해 독자들이 해방 공간의 역사적 진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화산도>를 쓴 궁극적 목적은 작품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있다고 말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김석범 작가는 <까마귀의 죽음>(1957)에서 <화산도>로 이어지는 4·3을 소재로 한 작품과 실천 활동을 통해, 일본 지식사회에 4·3의 참담한 비극을 최초로 알리는 평화를 위한 파수꾼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해왔던 것이리라.

 

, 4·3 70주년을 맞이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 더 나아가 이 땅 한반도 현대사의 상처와 모순, 그늘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화산도>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와 평화가 번성하는 시기일수록 첨예한 사회적 대립의 역사적 내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이 땅의 문학과 역사는 어떤 작품보다도 <화산도>의 세계를 정면으로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이즈음 남과 북, 미국 사이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 흐름에 김석범은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일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민주화가 된 에서도 <화산도>가 독자의 손에 닿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화산도>가 한반도에서 명실상부한 존재 증명을 하는 순간은 북한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화산도>를 탐독할 때가 아닐까 싶다.

 

<화산도>의 문제의식 촛불과 통해

20179월 중순 제1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수상차 서울을 방문한 김석범은 일본 귀국길에 공항으로 가기 직전 이 땅의 청춘들을 만났다. 34일에 걸친 한국 방문의 마지막 일정은 동국대 학생들과 대화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경청하는 증손자뻘 학생들에게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함께해서 너무 좋다고, 이들이 이 땅의 희망이라고, 당신들이 촛불데모(혁명)로 새로운 정부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한 주역이라고말하며, 중간에 잠깐 눈물을 보였다. 그는 거듭 이 땅의 청춘들과 함께한 감격, 민주정부가 들어선 새 시대에 한국에 오게 된 소회를 토로했다.

 

역사가 그렇듯 작품도 운명이 있지 않을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정권의 파행 이후, 촛불혁명으로 새롭게 진전한 한국 사회에선 <화산도>에서 제기된 문제의식과 의제에 대한 열린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곧 열릴 4·3 70주년 행사에서 벅찬 감격과 깊은 회한의 표정을 지닌 김석범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권성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저자 김석범|역자 김환기, 김학동|보고사 |2015.10


저자 김석범(金石範, 1925 ~)1925년 오사카(大板)에서 태어나 평생에 걸쳐 제주 4·3 사건에 관련된 작품 집필에 매달렸다. 그는 18세인 1943년에 제주도에서 일 년여 머물며 의기투합한 청년들과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19453월에는 중국으로 탈출해서 임수정부를 찾아간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오사카로 돌아가야 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도 그는 서울로 돌아와 국학자 정인보 선생이 설립한 국학전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로 밀항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김석범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주도에서 밀항해 온 친척으로부터 제주 민중들의 참혹한 학살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이후로 그는 야만적인 권력에 의해 자행된 제주 4·3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나이 32세 때인 1957년에 발표한 간수 박 서방(看守朴書房)까마귀의 죽음()에서 시작해, 관덕정(觀德亭)(1961), 만덕유령기담(万德幽靈奇譚)(1970) ?(2001)에 이르기까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김석범은 1988년 다시 고국을 찾을 때까지 정권의 회유와 압박으로 많은 괴로움과 좌절을 겪어야 했으며, 제주 4·3 평화상 1회 수상자가 되었을 때도 이념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조국의 진정한 통일과 미래를 위한 망명 문학이 부정되는 현실에 맞서 자신의 문학은 망명문학이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화산도는 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문학계에서도 김석범은 일본어로부터 자유와 해방이라는 고뇌를 안고 작가 활동을 해왔다. 일본어를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보편성에 근거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 조선인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을 지향했다. 화산도1983년 아사히신문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상과 1998년 마이니치(每日) 예술상을 수상했다.

 

1회 제주 4·3 평화상 수상 작가

일본 마이니치(每日) 예술상 수상작

아사히신문 오사라기지로(大佛次郞)상 수상작

        

"살육자들이 승리자가 되어 서울로 개선한 뒤, 폐허가 된 광야를 건너는 바람 속에 허무는 있는가? 섬을 뒤덮은 시체가 허무를 부정한다. 죽음의 폐허에 허무는 없는 것이다."

 

화산도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482월 말부터 이듬해인 19496월 제주 빨치산들의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의 해방직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는 제주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서울과 목포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교토, 도쿄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빨치산들의 무장투쟁 자금의 유입 경로, 재일동포들의 실상과 일본공산당과의 관계 등이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이방근은 독립 운동가였으나 전향을 약속하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인물로, 해방 후에도 친일파가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득세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이방근은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서도 새로운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친일파 세력과 서북 청년단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선 그들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대와 달리 제주 빨치산의 무계획적이고 무모한 활동은 수많은 제주 민중을 희생시키고 이방근은 더 깊은 허무와 절망감에 빠진다. 빨치산과 서북청년단, 친일파 경찰이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이방근 역시 사람을 죽이게 된다. 친일파이자 제주 민중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 선 유달현과 정세용을 처단한 것이다. 이방근은 그들과 친척과 친구 사이였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타인을 죽이기 전에 자살한다."는 소신을 깨뜨린 이방근은 끝내 자살을 선택한다.


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석범의 화산도는 제주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좇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이 소설은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민중의 슬픈 역사를 애도하는 장중한 진혼곡이자, 야만적인 폭력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존엄 평화를 외치는 작품이다.

 

역자의 글

1997년 김석범은 필생의 역작화산도를 완성했다. 작품이 비록 일본어로 쓰여지긴 했으나 한국/한국인/한국사회의 정서를 충실하게 담았을 뿐만 아니라 재일 디아스포라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일구어낸 소중한 문학적 소산으로서, 특히 4·3과 맞물린 격동기 해방정국을 형상화한 역작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4·3이란 무엇인가. 이 사건은 해방정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냉전구도에 대한 제주 민중의 저항이었고,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선연한 폭력의 기억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남겨진 이 역사의 부채는 사건의 진실을 통해서만이 비극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 앞에 던진다. 작가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역사의 수많은 하위주체들에게 강요된 침묵과 억압당한 생채기들을 활성화하는 존재이다.

저 고요하고 평화로운 지금의 제주 바다와, 그 너머로 탄식과 폭력 속에 놓인 절망과 극한 슬픔들로 얼룩진 과거의 잊혀진 기억은 결코 둘이 아니다. 폭력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것이다. 위로받지 못한 정령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슬픔과 좌절에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직면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의 내막을 헤아림으로써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이렇게 사회적 역사적 성찰을 구조화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개량의 신화에 걸맞은 작가의 역할이자 문학 본연의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 인간 기록의 가장 세밀한 보고서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화산도는 한국소설계에서 거둔 값진 소산들과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성좌와도 같이 조밀하게 구성된 각계각층의 인물들이나 시공간의 넓이는 비록 4·3을 전후로 이삼 년에 불과한 시간대이지만, 이 시공간은 결코 제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본과 한반도 본토, 제주에 이르는 공간적 배경에다, 인물들이 맥동하는 신구 세대의 긴장/대립은, 단순한 갈등구도를 넘어 구 식민세대와 해방이후 세대의 대립과 갈등으로 확산되고, 다시 분단의 냉전구도와 통일을 열망하는 구도로 재배치된다.


화산도에서 접하게 되는, 하층민으로부터 사회 상층부에 이르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성찬은 부엌이로부터 이방근을 거쳐 당대의 정치가, 변호사, 재력가, 군인, 경찰에 이르는 각계각층에 걸쳐 있다. 이러한 특정/불특정 인물군의 생생한 현장성을 확인해볼 수 있는 서사구조야말로 화산도가 가진 특장이 아닐 수 없다.

화산도는 서장과 27장에 걸친 이야기, 마무리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흥미로운 구성은 화산섬인 제주의 공간적 특징(한라산)을 염두에 둔 듯, 서장-전개·위기·절정(1-27)-종장의 형식과 건축학적 구도 안에는 4·3으로 치달아가는 아득한 높이와 깊이를 갖춘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인상적이다. 작가 특유의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이 뒤섞인, 그래서 인물의 결곡한 의식과 섬세한 관찰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역사적 개인들의 단단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작품의 내용을 일별해 보면, 시대적으로는 1948년 전후 해방정국의 격동기를 배경 삼고, 공간적으로는 제주도-목포-광주-대전-서울-부산의 육로와 해로, 일본의 홋카이도-도쿄-교토-오사카-고베를 잇는 한반도 바깥의 육로와 해로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이념적으로는 한반도(특히 제주도)에서 반목했던 남북한/좌우익의 갈등/대립과 함께, 제주4·3사건을 둘러싼 군경-미군-무장대-제주도민 사이의 사상/무력충돌을 전면화하면서도, 유엔의 단독선거 결정과 남북분단, 이승만 정권의 등장과 함께 일제강점기 친일파 세력이 재기하는 사회현실만이 아니라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의 극한적 대립양상도 잘 형상화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는 당대 한반도에 존속해온 봉건적인 가부장제, 경제자본, 해외유학, 신세대의 결혼관/자유연애 등등, 해방 직후 제주도의 생태학적 문화지리를 깊이 있게 부조해 내고 있어서, 해방정국의 정치경제의 현실만 담아냈다는 선입견을 정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화산도는 사회역사, 민속종교, 통신교통, 의식주와 교육에 이르는, 당대의 정치역사성, 사회문화적 지점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작가 자신에게는 필생의 역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화산도는 민족의 자화상이자 디아스포라 소설, 저항/고발문학, 세계문학, 국가/자기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안티테제의 역할과 기능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자 원고지 22천여 매라는 분량도 그러하지만, 1965년부터 시작된 창작의 여정은 30여 년에 걸쳐 언어와 발표매체를 달리하며 이어져 왔고, 마침내 2015,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 모국어의 외피를 입고 한국의 독자들 앞에 등장했다. 전쟁과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이 방대한 노작(역사/휴먼 드라마)을 관통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생각한다.

        

책속으로  

조선총독부의 일장기 대신 내걸린 서울 미군정청의 성조기는 내려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저기에 성조기 깃대가 계속 서 있는 것일까? 저건 태극기가 아니고 성조기가 틀림없나? 아니, 성조기로 보이는 건 내 착각일 것이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우리말이 서툰 이 노인이 국수주의와 멸공의 깃발을 치켜들고 민족과 국토를 양분하는 선거를 치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점령군 군법회의에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사형 또는 기타의 형벌에 처한다. 이방근의 뇌리에 맥아더 포고문 제2호의 결말 분분이 떠올랐다.

 

난 전쟁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실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옥쇄를 각오한 자가 아니면,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어리석은지를 모르는 법이지요. 무엇 때문에 모두들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지금 강 선생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즉 무기를 손에 들고 적과 싸운다니까, 그것도 일종의 전쟁입니다.

 

무장봉기, , 무장봉기란 말이지. 무장봉기는 장구벌레가 들끓는 물을 마시고, 조밥과 고구마를, 아니 조와 고구마 줄기로 죽을 쑤어 먹는 섬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여차할 때 들고 일어난다. 매일같이 낮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일어난다.

 

해방된 지 3, 이렇게 많은 자기 민족의 유혈과 시체를 초석으로 삼으면서 무슨 정부 수립이고 건국 축전입니까. 아니지요, 원래 괴뢰정권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집니다. 해방이고 나발이고,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후 민주주의 같은 것은 이 나라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자력으로 독립과 해방을 달성한 것이 아닙니다.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본적을 제주도에서 본토로 바꾸어 자신의 고향 땅과 작별을 고하고, 유려한 서울말을 익혀서-이방근은 이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지만- 변신한다. 제주도가 본적이어서는 입신출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친일파아버지를 둔 걸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일제 때 생활을 백 퍼센트 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친일이라면 친일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게다. 이 작은 섬에서 무슨 친일이냐. 큰 악은 서울 같은 육지에 있는 게다


“4·3은 내 숙명이었다

제주4·3의 진실 가장 먼저 알린 <순이삼촌> 작가 현기영

두 차례 끌려가 고초 겪었지만 다시 돌아가도 쓸 수밖에 없어

제주4·3이 잊힌 게 아니라면,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4·3이 외롭지 않았다면, 야만의 세월을 기록한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이삼촌>의 현기영부터 김석범, 강요배가 있어 4·3의 슬픔이 뭍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영화 <지슬> <레드헌트>가 있어 4·3의 비극이 젊은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본디 예술이 세상에 대한 위로라고 할 때, 그 모범이 여기에 있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 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 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 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순이삼촌> 중에서)

 

1978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현기영(사진) 선생의 중단편 <순이삼촌>이 실렸을 때, 그것은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제주4·3’을 발음하지 못했던 유신 말기에,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평생을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의 비극적 생을 다룬 이 소설은, 제주도 방언의 질박함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남다른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작품의 성과만으로 <순이삼촌>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순이삼촌>은 소설이기 전에 4·3의 진실을 폭로한 최초의 기록으로 평가돼야 한다. 문학과 활자 매체를 통틀어 4·3을 처음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뭍사람들에게 4·3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비극을 알게 된 우리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훗날 4·3 진상 규명 운동에 뛰어든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독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꿈속에서 순이삼촌이 나타나

<순이삼촌>은 소설이기 전에 4·3의 진실을 폭로한 최초의 기록이다.

36일 오후, 경기도 성남 자택에서 만난 현기영(77) 선생은 내게 4·3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던 운명 같은 것이었다며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순이삼촌> 때문에 두 번의 고초를 겪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4·3을 쓰지 않고 다른 걸 쓸 수 없는 건 제주 출신인 내 염치 때문이라는 노작가의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젊어 보였다.

초기작 <아버지><초혼굿>에서도 4·3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4·3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은 1978<순이삼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경외감마저 든다.

 

젊을 때라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처음부터 4·3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데뷔하고 보니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더라. 4·3을 말하지 않고 다른 걸 쓰면 엉뚱한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세상 물정 몰랐던 거다.

 

해야 할 말을 했다는 이유로 필화 사건도 겪었다.

<순이삼촌> 소설집이 나온 1979년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3일 동안 고문을 받고 한 달간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인 1980년에도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받은 끝에 책이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등단 이후 가장 왕성하게 집필해야 할 시기에 고초를 겪은 셈인데.

그렇게 얻어맞고 나오니까 억울해서 못 견디겠더라. 더 이상 쓰지 말라는 건데, ! 너무 억울해서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맞을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 한동안 술로 허송했다. 글을 못 쓰겠더라고. 그즈음 연세대 학생들이 찾아왔다. 내게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오늘이 4·3입니다하는 거야. 그렇게 지냈지. 그해엔 5·18도 터지고 더더욱 술만 마셨어요.

 

다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꿈속에 나타난 순이삼촌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술로 분노를 삭이며 지낸 지가 1년이 채 못 되었을 때다. 어느 날 낮술 먹고 집에 고꾸라져 있는데 빛 속에서 소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나타나더라고. 순이삼촌이야. 내가 만든 소설 속 주인공이 정말 실제 인물처럼 나타났던 거지. 백일몽이었죠. 나보고 일어나라고 소리쳤어. 정신이 번쩍 들었지. 마치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람들을 손잡고 이끌어내는 장면과 비슷했어. 그 꿈 덕분에 위안을 얻고 절망을 버릴 수 있었지.

 

“‘공비라는 말 때문에 국보법 면해

<순이삼촌>을 이번에 다시 읽으니 동네 어르신들의 대화와 학살 사건이 플래시백되면서 교차편집처럼 이뤄진 구성이나 서북청년단 출신의 고모부 캐릭터를 집어넣은 점 등이 눈에 들어오더라.

 

플래시백은 별거는 아니고 영문 소설에 있는 기법을 가져온 거지. (웃음) 지금 생각해도 고모부 캐릭터를 넣은 건 잘한 거 같다. 소설에도 썼지만 당시 도피자 가족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해보려는 방편으로 이런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연대가 교체돼 육지로 떠남에 따라 거의 파경에 이르고 아비 없는 자식들만 서럽게 자라는 경우도 많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 공동체의 비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4·3 연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문학이 당대의 삶을 재구성한 느낌이 들었다.

 

제주 공동체의 본질이지. 그때는 계산하고 썼어. 고모부의 입을 빌려 동네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일부러 공비라고 썼어.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걸려고 하는데 공비라는 말 때문에 안 됐다고 하더라.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이후엔 산사람이나 입산자라고 썼지.

 

이번 설에 문재인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는데, 무슨 얘길 나눴나.

 

감사하지. 묻지 않았는데, 4·3 70주년 추념식에 내려와서 참배한다고 하시더라. 4·3 전국화하느라 다들 애쓴다고 격려하시고. 특별법 통과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드렸는데 아마 아시겠지.

 

4·3 70주년을 맞아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도 일고 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항쟁이었지. 이데올로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해방 후에도 강제 공출에 시달린 제주 민중의 생활고가 터져나온 거다. 항쟁과 대학살의 측면이 함께 있다. 변방과 속국의 제주 역사가 현대에서 재현된 것이지. 중앙이 가해 세력이고 섬은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70주년을 맞는 4·3이 대한민국 역사로 기록돼야 하는 이유다.

 

제주 민란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와 일제 때 잠녀항일투쟁을 다룬 <바람 타는 섬> 4·3문학의 전사(前史)가 되는 작품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왔지만, 여전히 선생을 4·3 작가로 일컫는다.

 

숙명이다, 버릴 수 없는. 문학이 해방이고 자유인데 구속받지 않고 쓰고 싶은데 잘 안 돼. 벗어나려고 유년의 눈으로 제주의 자연을 그린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썼지만 그 자연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거야. 이제 편하게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인생이 한순간이더라고. 이거저거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더라.

 

다 미친 세월이었던 거지

 

개인적으로 노인의 혜안이 눈부신 <마지막 테우리>에서 4·3 화해의 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오래전에 제주의 한 마을로 취재를 갔더니 두 할머니가 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한 사람 남편은 경찰인데 싸우다 죽고, 한 사람은 죽은 산사람의 부인이더라. 두 할머니가 사이좋게 지내더라고. 다 미친 세월이었던 것이지. 그런 것들이 화해와 상생의 단서가 되지 않을까.

 

4·3 희생자를 선별하지 말라

민단·총련이 공동으로 기념하는 일본의 제주4·3 70주년

희생자에서 배제된 항쟁 지도부한국 정부가 풀어야


자이니치와 4·3

36년 동안 이어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극한 혼란 속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에게 일본은 더 나은 삶이 보장된 신천지였고, 차별은 당할지언정 학살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일본으로 흘러든 이들이 제주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이른다. 제주 출신 자이니치(재일 동포)들이 가족과 친지에게 보내온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를 뒷받침하는 한 축이었다. 이들의 끈질기고 위엄 있는 삶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일부다.

 

2008323일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 성공회 교회에서 열린 제주4·3 60주년 기념행사에서 4·3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증언이 터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증언하는 이복수(가운데)씨는 4·3 때 무장대 총사령관이던 이덕구의 조카딸이다. 한겨레 자료

 

 

제주4·3 70주년을 맞이해 일본에서도 각종 위령제나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4·3 위령제와 기념행사는 일본에서도 4월 연례행사로 정착된 지 오래지만, 70주년을 맞은 올해엔 예년보다 각별한 열의와 기운이 넘친다.

 

일본의 4·3운동

 

일제강점기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라는 이름의 정기연락선이 있었다. 나이 든 제주도인들은 지금도 큰 물건을 보면 군대환(기미가요마루) 같다고 말한다. wikipedia

 

먼저 310~11일 이틀 동안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사회와 제주4·3일본에서 보는 시각이라는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주에서 열리는 70주년 추모식엔 일본에서도 200명 넘는 방문단이 참가한다. 또 일본 도쿄에선 421, 오사카에선 422일 대규모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다. 오사카에선 올가을을 목표로 독자적인 4·3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 4·3의 진실을 전하는 영화 상영, 패널 전시회, 학습회 등 다양한 행사가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준비돼 있다. 올해 일본의 4·3 70주년 기념사업은 예전에 없던 규모와 다양성을 자랑하는 사업이 될 것 같다.

 

돌이켜보면, 줄기차게 이어져온 일본의 ‘4·3운동에서도 40주년(1988), 50주년(1998), 60주년(2008) 10주기 사업들이 늘 운동의 큰 고비가 돼왔다. 4·3을 다룬 대하소설 <화산도> 저자 김석범이나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 고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 등이 준비한 40주년 기념 강연회에는 500명 넘는 시민들이 참석해 일본 4·3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4·3 유족이 대거 참석한 50주년 행사는 일본 4·3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됐다. 60주년 때엔 100명 규모의 제주 방문단이 고향을 찾는 모습이 일본 NHK장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일본 전국에 방송됐다.

 

일본 4·3운동의 발자취와 성과에 비추어볼 때 올해 70주년은 어떤 의의가 있을까. 70주년을 앞둔 일본 4·3운동의 지향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일본 4·3운동의 과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000년 만들어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은 제10조에 대한민국 재외공관에 피해자와 유족 피해 신고를 접수하는 신고처를 설치하는 조항을 담았다. 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등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를 진상 규명하는 다른 과거사 관련 법률에는 볼 수 없는 규정이다. ‘재외공관이라 되어 있지만, 여기서 재외는 주로 일본을 뜻한다. 4·3과 재일동포 사회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규정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와 제주를 잇는 기미가요마루’(代丸)라는 이름의 여객선 직항로가 만들어지면서, 1930년대 중반 제주도 인구의 약 4분의 1(5만여 명)이 일본에서 살게 됐다. 오사카엔 자연스럽게 제주도 출신자들의 확고한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를 넘는 제주도 주민의 생활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사카, 일본 속 작은 제주

19458·15 해방과 더불어 많은 제주인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가 4·3 전후의 혼란을 피해 다시 오사카 등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GHQ)은 일단 한반도로 귀환한 한국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도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이 시기 한국인의 도일은 밀항이라는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 기록 등 이 시기의 밀항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 4·3을 전후한 시기(1947~49)에 대략 5~1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4·3의 진상 규명은 밀입국자를 포함해 만들어진 재일동포 사회를 외면해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

 

‘4·3 콤플렉스라 일컫는 4·3 체험자의 좌절감이나 심리적 굴절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재일 제주인 사회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권력에 저항한 대가로 4·3 체험자들은 너무나 크고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에 입을 굳게 다물고, 정치 자체를 기피하거나 금품에 집착하는 특성을 갖게 됐다. 반대로 권력이나 조직에 과잉 충성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본에서도 4·3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 오사카에선 이런 공기가 짙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일본 4·3운동은 이런 침묵의 벽이나 압력을 무너뜨리고, 4·3을 누구나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조사하고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4·3운동은 한국에서 이뤄진 여러 진전에 보조를 많이 맞춰왔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재일동포 사회 속 침묵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의 사죄는 일본 4·3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재일동포 사회가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4·3의 체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넓혔다.

 

일본의 4·3운동은 지금 최후의, 그러나 결코 낮지 않은 장벽에 맞닥뜨려 있다. 재일동포 사회는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일본 사회라는 하나의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200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4·3특별법에 대한 우익 세력의 위헌 소송에 기각 판단을 내리면서도 다음과 같은 부대의견을 달았다. , ‘사령관급 공산무장 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혹은 무장봉기에 주도적·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은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의 범위에서 배제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집행기관인 ‘4·3위원회도 이 헌법재판소의 의견에 따라 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핵심 간부나 무장대 수괴급은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희생자 선별 기준을 정했다.

 

이른바 북쪽’, 즉 총련계 재일동포 중에는 핵심 간부수괴급에 해당할 만한 관계자나 그 친족·자손이 적지 않다. 4·3특별법에 근거해 이뤄진 재일동포 사회의 희생자 신고 접수가 애초 예상보다 부진했던 것도 공식화된 선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일동포 사회의 이런 특수성을 고려할 때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앞으로 절실한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4·3 무장봉기를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공적인 논리와 기준으로 지속되는 한, 재일동포 사회에서 4·3을 둘러싼 침묵의 압력도 지속될 것이다.

 

물론 남로당이라는 공산주의 정당이 대한민국 정권 수립 과정에 무력까지 써가며 저항했던 만큼 항쟁 지도부를 포함한 모든 희생자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선·단정 반대 투쟁이 왜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무장투쟁으로 치달았는지 숙고해야 한다. , 4·3 무장봉기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탄압이면 항쟁이다는 무장대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미군정 아래서 친일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제주에서 휘두른 횡포에 자위적 반항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도민 대다수도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외부의 폭력이 혹독할수록 그 저항의 방법도 격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명예회복

200664·3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과 경찰도 희생자로 인정해야 할지에 관한 법제처의 판단이 있었다. 당시 법제처의 판단은 군경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제주일보> 2006620일치). 이데올로기적 극한 대치를 상대적으로 파악하는 이런 시각은 당시 무장대에도 적용돼야 한다. 무장대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해방 정국의 과도기적 혼란 속에서 분출된 이데올로기와 정의의 관념을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화해와 상생의 정신과 어긋난다. 어쨌든 모든 4·3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공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재일동포들에게 4·3 해결은 여전히 미완일 수밖에 없다. ‘모든 4·3 희생자의 명예회복이야말로 70주년을 지향하는 일본에서 4·3운동의 핵심적 과제다.

 

촛불혁명을 이어받은 새 정부 아래서 4·3 70주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재일동포에게 더없는 행운이다. 일본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그해 일본 4·3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50주년 행사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가 있던 이듬해(2004)에는 1천여 한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56주년 기념행사(오사카)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민단·총련의 지단장급·지부위원장급 임원들이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려,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화합의 행사로 진행됐다.

 

10년 가까운 보수·우파 정권 아래서 4·3운동 성과물에 대한 극우세력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래서 운동 역시 수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거친 한국 사회엔 정의로운 사회 개혁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다시금 과거사 재정립 흐름이 고조될 것이 전망된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새 정부 아래 개헌 논의와 관련해 헌법이 개정되면 그동안의 헌재 결정도 바뀌어야 한다. 헌법 재판은 사회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연합뉴스> 201828일치). 물론 이 발언은 4·3에 대한 헌법 판단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개헌 논의의 쟁점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법통이라는 맥락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20014·3 항쟁 지도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도 영원불변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70주년이 놓아야 할 시금석

올해 70주년 일본 행사에 10년 만에 민단과 총련 임원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 제주방문단에 오랫동안 한국 입국이 어려웠던 조선적동포들도 참가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 진행 중인 4·3 70주년 기념행사는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남북 화해의 뜻을 담은 행사라 할 수 있다. 물론 참다운 화해는 항쟁 지도부를 포함하는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 없이는 성사될 수 없다. 70주년 행사가 그 시금석이 될 것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문경수 리츠메이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제주와 오사카 사이 역사가 흐른다

일제 시기 시작된 제주 사람들의 오사카 도항

일본 터잡은 자이니치들 산업화 시기 제주 경제 떠받쳐

 


재일동포들의 삶의 애환을 다룬 영화 <피와 뼈>(위쪽)<박치기>. 해방 이후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의 신산한 삶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다. 네이버 무비/ 네이버 무비

 

대판(오사카)이오, 대판!”

제주 민요 <오돌또기> 가락이 흐르는 가운데 푸른 대양을 가르며 배 한 척이 앞으로 나아간다. 까만 굴뚝에서 새까만 연기를 내뿜는 배의 선수에는 代丸’(기미가요마루)라는 이름이 새겨 있다. 재일동포 작가 양석일의 동명 소설을 같은 재일동포인 최양일이 영화로 만든 <피와 뼈>(2005)의 첫 장면은, 한 마리 괴물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재일동포 1세 김준평이 1923년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잇던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에 실려 일본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서 일본에 도착한 이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저만치 뿌연 연기를 내뿜는 오사카 공장지대를 보며,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격하게 반긴다. 찐빵모자를 쓰고 정면을 응시하던 소년 김준평도 자신 앞에 펼쳐질 미래의 가능성을 떠올리듯 희미하게 웃는다. 식민지 때 처절한 가난에 시름하던 제주도인들에게 일본은 말 그대로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의 땅, 오사카

제주도인의 본격적 일본 도항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이들은 오사카의 이카이노나 도쿄의 아라카와 근처에 모여 집단 커뮤니티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22년 오사카~제주도 사이에 개설된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였다. 오사카에서 동포 노인들이 부모님이 군대환 타고 일본에 왔어라고 말하는 것을 이따금 들을 수 있는데, 군대환이 다름 아닌 기미가요마루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커다란 물건을 비유할 때 군대환 같다는 말을 쓰곤 했다.

조경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논문 불완전한 영토 밖의 일상’(<주권의 야만>, 2017)을 보면, “제주도인들의 도일의 가장 큰 배경은 궁핍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빈곤층의 확대라는 계급적 요인이 가장 컸다. 실제 육지의 다른 지역보다 일본에 도항한 제주도인들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컸다. 2009년 일본 법무성 자료를 보면, 일본에 사는 조선·한국 국적자 578495명 가운데 제주 출신은 9882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도 전체 인구 528411명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19458월 해방으로 한반도는 독립됐다. 이로써 대일본제국의 일부를 구성하던 내지(일본)와 조선 사이에 전에 없던 국경이 만들어진다. 제주4·3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밀항이라는 위험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은 2006년 일본 연구자 오구마 에이지와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함께 펴낸 인터뷰집 <자이니치 1세의 기억>에서 자신의 일본 도항 배경을 설명한다. 192912월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시종은 어린 시절 제주에서 자랐다. 일본의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받은 김시종은 일본은 신국이며, 천왕은 신이라 믿었던 군국 소년이었다. 해방은 그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충격에 못 이겨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하던 군국 소년은 새 조국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에 눈을 뜬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제주도의 상황은 일제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섬의 주인이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바뀐 것일 뿐, 법령도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이같은 현실은 혁파해야 할 타도 대상이었다.

 

젊은 김시종이 남조선노동당의 말단 당원이 된 것은 19472월이다. 그해 말 그는 제주도 학무과의 촉탁 직원으로 취직한다. 김시종의 업무는 학교용 교재를 만들어 우체국을 통해 섬 전체에 배포하는 일이었다. 4·3이 시작되자, 폭력의 광풍 속에서 19485월 동지가 총에 맞아 참살당한다.

 

제주4·3, 망명이 된 밀항

그는 당으로부터 복수를 위해 (평소 출입하던 우체국) 우편물에 불을 질러라는 임무를 받는다. 일을 저지른 김시종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숙부 집에 숨어든다. 남로당원 조카를 숨겨주던 숙부는 애꿎게도 배신자로 오해받고 남로당 무장대에 죽창으로 살해됐다.

 

이런 살기등등한 상황에서 김시종의 부모는 1949년 외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키기로 결심한다. 떠나는 김시종에게 부모는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우리 눈앞에서 죽지 마라.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일본에서 살아라.” 그가 부모의 묘를 찾아 성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별 후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98년이었다.

 

4·3이 끝난 뒤에도 제주도인의 밀항은 계속됐다. , 목적이 돈벌이로 변했다. 그와 함께 밀항자의 절대 수가 크게 줄었다. 4·3 직후인 1949년엔 밀입국을 했다 검거된 한국인이 8302명이었지만, 국교정상화 직후인 1966년 검거자는 767명에 그쳤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은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은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온 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로 접어드는 초입이었다. 농촌에 살던 젊은이들은 1960~70년대 서울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연재한 것은 19662월이었고, 40년 전 이미 만원으로 꽉 찬 서울의 인구는 38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인들이 목표로 삼은 도시는 육지 사람들과 달리 서울이 아닌 오사카였다. 그곳에 자신들의 오랜 가족·친족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조경희 교수의 논문을 보면, 1960~70년대 밀항을 시도한 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만날 수 있다. 논문에 등장하는 78살 남자와 69살 남자는 농사짓는 것 외에 제주도에서 돈 벌 길이 없었던 청장년층에게 밀항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 했다. “배는 작은 똑딱선에서 30명이 타는 무역선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부산 경찰도 브로커와 밀항 희망자들의 거래를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돈만 주면 경비정이나 경찰이 선착장까지 안내해주기도 했다.”

 

제주를 떠받친 자이니치들

재일동포의 애환을 그린 또 다른 일본 영화 <박치기>(2004)를 보면,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와 주인공 안성의 집에서 일하게 된 한국인 청년이 등장한다. 어리바리한 그에게 사람들은 너도 부자가 되고 싶은 거지, 열심히 일해라고 말한다. 밀항해서 일본에 뿌리내린 이들은 고생해 번 돈을 보따리장사를 통해 제주의 가족에게 전했고, 이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 발전의 탄탄한 밑거름이 됐다. 이것은 어찌 보면,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울 수 없는 한-일 교류사의 한 부분이다.

 

 

극우반공국가의 탄생

4·3 진압 명령 거부한 14연대 군인들 봉기한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과 숙군, 국보법, 보도연맹 낳으며 분단체제 공고화

 

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뒤편에서 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한겨레

 

역사의 도미노였다. 제주4·3은 여순사건을 낳았고 여순사건은 분단체제를 완성했다.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1019, 4·3 진압을 거부하며 국군 제14연대가 봉기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초토화 진압 작전을 벌였다. 반란군과 민간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차별 진압과 이른바 부역자 색출로 전남 동부권은 피로 물들었다. 이후 군내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만이 아니라 광복군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이승만계를 솎아내는 대규모 숙군 작업이 진행됐다.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됐고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전국적 어용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됐다. 극우반공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남은 좌익 세력과 피란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벌였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1948, 내전은 이미 시작됐다.

 

동족상잔의 제주 출동 반대한다

14연대가 육군본부로부터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것은 1015일이었다.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홍순석 중위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 간부들은 출동 시각인 19일까지 나흘 사이에 진압과 봉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뒤쪽을 택했다. 이날 밤 9, 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며 총구를 제주에서 여수로 돌렸다. 여순사건의 시작이었다.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는 19485월 초 확군(擴軍) 작업의 하나로 광주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창설했다. 이 연대에는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될 좌익계 군인들이 사병에게 영향을 끼칠 주요 보직에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경찰 수배를 받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도 경찰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할 수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다. 여순사건을 좌익 군인과 친일 경찰의 충돌이라고 해석한 배경이다.

 

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 등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 시내에 진입했다. 1020일 반군 주력 부대가 시내에 진입해 교전이 일어났다. 소수의 경찰 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에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했다. 이날 오전 9시 반군은 여수시를 장악했다. 반군은 주요 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 기관장, 우익 청년 단원, 지역 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여수를 장악한 반군 2개 대대는 1020일 오전 930분께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전남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광주에서 급파돼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됐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가담했다. 20일 오후 3시께 순천 시내를 완전 점령한 반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재편성했다. 주력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하동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원·구례·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 세력이 지역을 점령해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일도 있었다.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지역 남로당원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

 

이승만 아동이라도 불순분자 제거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해 진압에 나섰다. 육군총사령부는 10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해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또한 제2여단장에 원용덕 대령, 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임명해 진압작전을 맡겼다. 같은 날 육군 5개 연대, 비행대, 수색대를 뼈대로 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외로 강력해지자, 1022일에는 부산에 주둔한 제5연대가 추가로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1022일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군법에 의해 사형 등에 처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승만은 1023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고 본 것이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와 같은 이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승인대로 군경은 진압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민간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미군 관계자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봉기는 진압군이 23일 순천을 점령한 데 이어 27일 여수를 탈환하면서 종결됐다. 곧바로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이적행위자 색출은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1단계와 심문·재판의 2단계로 진행됐다. 경찰·청년단원·학련생·우익인사 등이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을 가려냈지만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억울하게 지목당해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총이었다.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반군 점령 기간에 인민재판에 앞장섰다고 지목된 자는 그 자리에서 곤봉·개머리판·체인 등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2단계 심사를 거친 이들은 즉석에서 총살되거나 군경에 넘겨졌다. 이 과정이 수개월간 계속됐다. 194911월 전남도는 여순사건의 인명 피해를 11131명으로 집계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반군과 지방 좌익들은 산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에 토벌대는 빨치산의 보급로가 된다는 이유로 지리산과 조계산, 덕유산 인근의 마을을 초토화했다. 살기 위해 빨치산에게 식량과 편의를 제공한 주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즉결처형됐다. 피아 식별이 어려운 게릴라전의 특성에 일본 전체주의의 유산,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사인종주의가 더해져 극도로 무자비한 방식의 학살이 자행됐다.

 

한반도 방방곡곡 피로 물들여

반군의 여수·순천 지역 점령 기간에 이뤄진 경찰과 그 가족, 공무원들에 대한 처형과 진압 이후 이른바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보복 학살은 지역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비극은 비단 여수·순천만의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종전까지 공권력이 벌인 잔인한 보복은 한반도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였다. 대한민국은 무덤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미국, 제주 4·3의 또 다른 가해자

붉은 섬낙인찍고 미군 지휘관 파견해 강경 진압

4·3 고비마다 각인된 미국과 미군정의 냉전 전략

 

제주도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 박승화 기자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65천여 명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제주도에 배치해 미군과 전투에 대비했다. 공출에 시달려온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군사기지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미군기는 제주도 상공에 나타나 소이탄을 투하하고, 미잠수함은 제주도 주변 해역에 출현해 선박들을 격침해 수백 명이 숨지고, 제주도의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해방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였다. 해방 직후 제주 지역에서는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자치기구 건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중앙의 움직임에 발맞춰 제주 지역에서도 19459월 들어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이어 이 조직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주도한 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은 물론 자치 교육에 힘썼다. 미군정(59군정중대)이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한반도가 해방되고 3개월 가까이 지난 119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해방이 되자 일본 등지로 떠났던 제주도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219천여 명에서 1946276천여 명으로 2년 새 56천 명 이상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전국적인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경제적으로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해방 이전인 19431944년에 견줘 각각 41%, 31%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기근이 심했던 1946년 여름 제주섬을 휩쓴 콜레라는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민들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해방 후에도 기용했다. 이들은 후술할 ‘3·1사건이전 각종 불법적 이권에 개입해 미군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낳았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보루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제주4·3특별법)제주4·3사건“194731일을 기점으로 19484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대로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었다.

 

19473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는 25~3만여 도민이 대회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다.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도한 기념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던 중 관덕정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채여 넘어지는 사고가 터졌다. 경찰은 이를 그냥 지나쳤다. 항의하는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가는 순간,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이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광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들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20대 젊은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그날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미군정 경무부는 경찰을 추가 파견해 참가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310일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총파업을 벌였다. 발포 책임자와 발포 경찰의 즉각 처벌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건 총파업에 제주도청을 비롯한 학교, 은행, 우체국 등 166개 기관 단체, 제주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 명이 참여했다. 현직 경찰관들도 파업 대열에 참여했다.

 

경찰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314일 제주도 방문에 맞춰 파업 참가자 대량 검거에 나서 닷새 만에 200여 명을 검거했다. 조 경무부장은 320일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이날 총성이 4·3이라는 커다란 비극으로 가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3·1사건과 3·10 민관 총파업의 영향은 컸다. 마침 1947312일 미국은 냉전 체제 시작을 공식화하는 선언이라 할 수 있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 내전으로 촉발된 이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역할을 자임했다. 이 독트린은 미군이 제주도 사태에 개입할 논리적 근거가 됐다. 한반도 남쪽 끝 제주섬에서 3·1사건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지던 때, 미군정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했다.

 

먼저 제주도지사가 교체됐다. 그때까지 제주도지사는 제주 출신 박경훈이었지만, 19474월 극우파로 평가받는 외지 출신 유해진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단체나 인사들을 좌파라 몰아붙이며 우익 강화 정책을 폈다. 그의 행정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서청)이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고, 자금 모금 명분으로 테러를 일삼았다. 심지어 서청 제주도단부 간부는 194711, 미군정에 제주도를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며 이를 입증해 보이겠다고 할 정도였다. 미군 방첩대가 194712월 입수한 정보를 보면, 경찰이 이른 시일 안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단체가 제주 경찰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할 만큼 제주 사회는 혼돈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

 

윌리엄 하지 미 군정장관이 19485·10 총선거구성된 제헌의회 개원식(531)에서 연설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량 검거 바람으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19482월 현재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사람은 365명으로, 3.4평 크기의 방에 35명이 수감될 정도였다. 19473·1사건 이후 19484·3이 터지기 직전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됐다.

 

주한미군정청 특별감찰실은 유해진을 특별감찰해 19483월 유해진의 경질을 건의했지만, 5·10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19482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제주 지역에서도 검거 바람이 불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 와중에 36일 조천면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생 김용철(21)이 경찰 고문으로 숨졌다. 중학원생들과 주민들은 지서 앞에 몰려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분노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3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27)가 숨졌다. 경찰의 잇단 고문치사 사건은 3·1사건 이후 도지사의 독단적 행정, 대량 검거 등으로 부글부글 끓던 민심에 불을 지폈다.

 

194843일 새벽 2,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50여 명으로 추정되는 무장대는 단독선거 반대를 내걸고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들이 보유한 무기는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 등 30정 안팎과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의 제주도민에 대한 폭압적 행동은 봉기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당시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다라고 진단했다. 언론은 경찰의 민심 이반을 지적하며, 서청을 해산하고, 사법·행정·경찰 수뇌부의 인적 재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딘 군정장관이 도지사 유해진을 경질한 것은 4·3무장봉기가 일어나고, 5·10선거가 끝난 뒤인 19486월이었다.

 

딘 군정장관은 416일 경비대의 합동작전을 명령하는 등 제주도 사태 진압을 지휘했다. 제주도 주둔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제주도 인민유격대(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4월 말 평화협상을 벌여 사태 해결에 합의했으나, 미군정의 무력 진압 방침으로 합의가 깨졌다. 이즈음 미군정은 427~28일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의 제주도 현지 시찰과 지도, 29일 딘 군정장관과 광주 주둔 미국 제6사단장 워드 소장의 제주도 동시 시찰 등의 활동에 나서며 긴박하게 움직였다. 딘 군정장관은 선거를 닷새 앞둔 55일에도 안재홍 민정장관 등 미군정의 한국인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도 현지에서 대책회의를 열 정도로 제주도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반면 무장대는 선거일이 다가오자 선거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 방해에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 등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선거의 성공이 미사절단의 핵심 임무라며 독려하고, 딘 군정장관이 제주도를 2차례나 방문하는 등 선거 성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선거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5·10선거 반대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까지도 가세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은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 남북협상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미군정의 강경 진압 강도는 더 세졌다. 512,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 소요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구축함을 급파했다. 또 미군정은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외국의 전투 현장에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 지휘관을 진압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5·10선거 이전 하지 장군이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했던 것과 달리 선거가 끝난 뒤에는 야전군 지휘관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파견한 것이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

 

제주4·3연구소 조사반이 19922월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중산간 다랑쉬오름주변 동굴에서 발견한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들. 한겨레

 

상공에는 미군 정찰기가 날고, 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 군함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언론 보도(<조선중앙일보> 194866일치)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제주도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다.

 

브라운 대령은 “(무장 대립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며 2주면 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작전 아래 진행된 경비대 11연대의 비민분리정책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6월 중순까지 붙잡힌 제주도민은 6천여 명에 이르렀다. 618일 강경진압 작전을 벌이던 11연대장 박진경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운 대령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제주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623일 재선거도 무기한 연기됐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 실패는 향후 벌어질 강력한 토벌 작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1011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증원했다. 제주도 주둔 9연대장 송요찬은 1017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실상 고립무원의 섬이 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하고, 방화와 학살을 일삼았다. 해안마을로 소개된 주민들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4·3 시기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난 194810월 말부터 19493월까지, 5개월여 동안 방화와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194812월 말 진압 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이 이끄는 2연대도 토벌 작전을 계속했다. 1949117일 하루에만 300여 명을 학살한, 4·3 시기 대표 학살 사건인 북촌 사건2연대가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촌 사건 나흘 뒤인 121일 국무회의에서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하라고 지시했다. 제주섬은 죽음의 섬으로 변해갔다.

 

미국은 4·3 전개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개입했다. 정부 수립 이전에는 직접 최고 지휘관으로 진압작전을 주도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초토화 시기인 194811월 제주도 토벌을 격려했다. 송요찬 9연대장은 미군 조종사의 정보 제공에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초토화 시기 소련 잠수함의 제주도 연근해 출현설이 떠돌았다. 그때마다 외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모두 가짜뉴스였다.

 

이승만 정부 집단처형 승인

4·3 진압 과정에서 서청은 군인으로, 경찰로 변신해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4·3을 체험한 이들은 서청을 가리켜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청은 1948119일 김두현 제주도청 총무국장을 고문치사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무장대의 공격으로 인명 피해도 많았다. 194811월 이후 무장대는 토벌대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 일부 마을을 습격해 학살과 방화를 하는 등 큰 피해를 줬다.

 

194967일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이 사살됐다. 중학원 교사 출신인 이덕구는 19488월 김달삼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참석을 위해 제주를 빠져나간 뒤 무장대 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4·3의 종식을 뜻했다. 그러나 붉은 섬으로 규정된 제주도민에게 정부의 탄압은 가혹했다. 1949102일에는 이승만의 승인에 따라 249명이 정뜨르비행장(제주국제공항)에서 집단처형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됐다. 1950716일과 820일 두 차례에 걸쳐 대정면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계엄군이 예비검속한 250여 명이 집단학살됐다. 또 한국전쟁 시기 제주에서 다른 지방 형무소(교도소)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가운데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이 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됐다. 제주4·3은 제주도경찰국이 19549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4·3이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것은 인명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4·3 희생자로 결정한 인원을 보면, 2017725일 현재 희생자 수는 14232명이다. 희생자에는 사망자(1245), 행방불명자(3575), 후유장애인(164), 수형인(248)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5~3만 명으로 추정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수치다. 정신적·물적 피해는 마을 공동체의 파괴, 공공시설과 산업부문의 파괴 등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영원히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100여 곳에 이른다. 연좌제는 제주도민들에게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경 토벌대에 희생됐거나 수형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감시당하고,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 공기업 입사, 국내외 여행과 출입국 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4·3 추념식 참여한 유일한 대통령

이제 4·3 70주년을 맞았다. 4·3 추가 진상조사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역사적 정명(正名·올바른 이름을 찾음)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했던 4·3 희생자들 보상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돼야 할 과제다. 화해와 상생은 지역사회 발전의 정신적 토대다. 비극적 역사를 통해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되새기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키우는 여정이 제주도민들에게 남아 있다.

 

제주=허호준 <한겨레> 기자 hojoon@hani.co.kr

 

 

4·3의 가해자들

송요찬, 함병선, 이승만그리고 미국

 

왼쪽부터 송요찬, 함병선, 이승만.

 

77개월 동안 이어진 제주4·3으로 제주도민 10명 가운데 1명이 희생됐다. 수많은 죽음과 엄청난 재산 피해 등을 가져온 4·3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312월 발표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집단 인명 피해 지휘 체계를 볼 때,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가 언급한 9연대장과 2연대장은 송요찬과 함병선이다. 실제 초토화 시기 이들이 제주 토벌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이 와중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미군 정보보고서(194941)조차 9연대는 모든 주민이 게릴라에 도움과 편의를 주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9연대에 이어 들어온 2연대의 작전 시기인 1949117일에는 하루 300여 명이 학살된 이른바 북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2연대 3대대다.

 

그러나 인명 피해의 최종 책임자는 보고서에서도 밝히듯 이승만 대통령이다. 보고서는 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다.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강경 작전을 지시했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책임도 거론된다.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4·3은 미군정 시기에 시작돼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막을 내렸다. 보고서는 “4·3사건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미군 대령이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되고, 진압 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는 한편 로버츠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은 초토화 시기 9연대장의 지휘를 높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주한미대사 무초와 참사관 드럼라이트 등도 지속해서 4·3의 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이 대통령 등을 만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16년 제주4·3평화포럼과 지난해 제2회 제주4·3평화상 시상식 참석차 제주를 찾았을 때 이 사건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4·3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미국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도 제주도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던 당시 경찰과 서북청년단도 가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냉전 렌즈낀 미국4·3 시작과 끝 낱낱이 알고 있었다 326

4·3, 또 하나의 냉전

 

123통신사진파견대가 1948515일 촬영한 이 사진은 제주도 주둔 9연대 고문관 리치 대위가 경비대 중대 장교와 공산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는 마을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이 돼 있다. 리치는 훗날 제주도가 합법적인 군사작전지역이었다고 주장했다.

 

24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관람을 끝낸 방문객들이 미국과 유엔의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용지에 서명하고 있었다. 제주4·3유족회,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제주위원회 등이 추진하는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에는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5만여명 가까이 참여했다. 이들은 왜 미국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을까.

 

냉전의 그림자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지난 200310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4·3에 대해 사과하며 냉전을 언급했다.

 

1947312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촉발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미군정 경무부 차장 최경진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민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도 제주도를 좌익 거점이라고 언급하며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해 나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유엔에서 미-소가 미국의 제주도 군사기지화설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4·3이 본격화되자 외신은 제주도 상황 전개를 (트루먼 독트린을 촉발시켰던) 그리스 내전 양상과 비슷하다. 주한미군사령부도 놀라고 있다고 전했다. 2003년 나온 정부의 <제주4·3사건상조사보고서>-소 냉전이 제주4·3의 참혹함을 불러왔다는 것은 당시 언론의 공통된 인식이었다고 소개했다.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으로 19754·3논문 <제주도 반란>을 쓴 존 메릴 전 미국무부 동북아실장은 기자와 인터뷰와 이메일 교환을 통해 미국이 냉전의 렌즈로 제주도 사건을 보았고, 현지 환경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제주4·3은 아시아에서의 폭넓은 의미에서 냉전의 맥락에 닿아있는 사건이다고 말했다.

 

미군 고문관들의 4·3 경험

제주4·3 시기 제주에 주둔했던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연대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있었다. 이들은 훈련과 작전, 군수지원 등 모든 면을 자문했다. 기자는 4·3이 본격화한 19485~12월 제주도와 서울에 근무했던 6명의 미군 고문관 출신 예비역 장교들을 만나거나 이메일, 편지 등을 통해 인터뷰한 바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이들은 과거 기자와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근무 기간 대량학살을 모른다고 했다.

 

19485~8월의 연대 고문관은 제주도는 합법적 정부를 위협하는 합법적 군사작전지역이었다박진경 연대장과 함께 11연대를 중산간 지역으로 보내 작전하도록 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경비대는 폭도들을 보면 그들 가운데 일부를 즉결 처분했다고 말했다. 이해 7~8월 대대 및 연대 고문관은 나의 임무는 반란을 진압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제주섬을 관통해 소탕작전을 벌였다고 말했다.

 

유족회·제주위원회·범국민위, 미국 책임 촉구 서명운동 전개

제주도 주둔 고문관들 작전현장에 나간적 있지만, 학살 몰라

미군 정보보고서와 주한미대사관 문서 등엔 직간접 개입 넘쳐

존 메릴 미국은 냉전의 렌즈로 제주도 사건을 보았다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 책임론제기

 

심지어 초토화 시기인 489~12월 제주도에 주둔했던 고문관도 섬의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고,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됐다경비대의 회의에 참석하면 항상 노획한 무기수 보다 사살자 숫자가 많았다. 나는 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언어소통이 어려워 말 그대로 고문관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 고문관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싸움이었다며 미국 책임론을 강하게 반박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브라운 대령(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브라운 대령은 19485월 하순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돼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미국의 직간접 개입

제주도 주둔 경비대 고문관들의 기억과는 달리 미군정 수뇌부, 군사고문단과 미대사관 등은 깊숙하게 제주도 사건에 개입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방첩대, 군사고문단의 보고서, 미대사관의 문서, 극동사령부의 보고서 등은 미국이 4·3의 시작과 전개, 결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8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은 제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주한미군사령부 작전 참모의 제주도 시찰 및 지도(4.27~28), 군정장관 딘 소장과 미 제6사단장의 동시 시찰(4.29), 딘 소장의 제주도 재방문과 한국인 군정수뇌부의 현지 비상대책회의(5.5) 등을 잇따라 열고, 진압을 독려했다.

 

그러나 5·10 총선거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지역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직접 개입에 나섰다. 선거 이틀 뒤인 512,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에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급파했다. 이어 같은 달 19일을 전후해 미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6?23 재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고문관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가 제주도의 경비대와 경찰을 모두 책임졌다고 말했다.

작전을 진두지휘한 브라운 대령은 6월 초 기자들과 회견에서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선거가 무기한 연기됐다. 브라운 대령은 그 뒤 6사단장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가 공산기지로 조직됐다고 주장했다. 4·3연구자들은 이런 인식이 제주도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경비대원 3명이 194883일 오후 제주시의 한 근교에서 내란죄와 탈영죄 등을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옆에는 미군 장교 2명이 보인다. 이 현장에 있었던 연대 고문관은 당시 총살 집행이 미군의 입회 아래 이뤄지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경비대원 3명이 194883일 오후 제주시의 한 근교에서 내란죄와 탈영죄 등을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옆에는 미군 장교 2명이 보인다. 이 현장에 있었던 연대 고문관은 당시 총살 집행이 미군의 입회 아래 이뤄지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19488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과 주한미대사관으로 대표되는 미사절단은 4·3에 깊게 개입했다.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초토화가 절정이던 1218일 이범석 총리에게 송용찬 연대장의 작전 능력을 높게 평가하며 작전 결과를 널리 홍보해야 한다고 추천했다. 미군 정찰기 조종사는 무장대의 집결지와 전투상황을 9연대에 제공해 작전에 도움을 줬다.

 

이런 와중에 19491월에는 소련 잠수함과 선박의 제주 연안 출현설이 외신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19일자 소련 잠수함, 제주도 공격신호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소련 잠수함 3척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나 공격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는 미국은 물론 동남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9491월 각종 외신에 보도된 소련 잠수함의 제주 연안 출현설은 모두 가짜로 판명됐다.

 

19491월 각종 외신에 보도된 소련 잠수함의 제주 연안 출현설은 모두 가짜로 판명됐다.

무초 대사는 같은 해 49일 국무부에 제주도가 남한에 테러를 가하기 위한 소련의 주무대로 선택됐다. 소련의 에이전트들이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보도와 인식이 냉전 초기 제주도를 미-소 직접 대결의 장으로 인식하도록 세계 여론을 형성하려 한 것이다고 분석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19491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하기 위해서는 제주도와 전남지역의 도당들을 발근색원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128일 국무회의에서는 제주도사태는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의 이런 발언을 뒷받침하는 최근 문서가 발견됐다. 기자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굴한 미군 문서에는 이승만의 발언 직후 미 해군이 제주도를 방문한 사실이 밝혀졌다.

미 극동해군사령부 지원단이 작성한 문서(4922)에는 미해군 함정 3척이 인천을 방문해 124일 함정에서 연 연회에 이승만 대통령, 무초 대사, 로버츠 장군 등이 참석했다고 돼 있다. 문서는 또 무초 대사가 한국정부가 (미해군 함정의) 제주도 방문을 간절히 바란다며 제주 방문 방안을 상의했고, 이에 따라 계획을 수정했다고 돼 있다. 이들은 1253시간 남짓 제주에 기항해 미군 고문관 등을 만났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의 교감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 뒤에도 미군과 미대사관 관리들의 제주도 사태 진압에 대한 관심과 의견 표명은 계속 이뤄졌다.

 

미군과 제주도 여성들의 모습.

 

미국 책임론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집단 인명피해와 관련해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6월 제주4·3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해 기자들과 만나 미군정은 1945년부터 3년간 남한을 법적으로 통제했고, 그 뒤에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군사와 경찰을 통제했다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존 메릴은 “4·3은 미군정 시기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파국을 맞고 냉전이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일어났다. 미군 고문관들은 제주4·3 전 기간에 걸쳐 제주도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고문관들이 직접적인 지휘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펼쳤던 정책 역시 한 원인이다며 정부 수립 이전 미국의 책임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제주4·3범국민위 등 단체들은 제주4·3은 미군정이 통치하던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사건이다. 미국은 4·3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 사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 유엔도 조사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운동은 제주와 서울, 온라인을 통해 국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죽어도 돌아오지 말라4·3으로 제주 떠난 사람들 322

살기 위해 떠나야 제주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4·3 광풍 피해 일본으로, 육지로 떠난 디아스포라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평생 고향 그리며 살아

 

김이선씨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58년 만에 북에 있는 오빠를 만난 것을 기념해 제주시 조천읍 신안동의 부모 묘소 앞에 세운 남매상봉기념비를 김씨의 아들 박영선씨가 바라보고 있다.

 

제주4·3 당시 많은 제주사람은 일본으로, 육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주섬이 지긋지긋해서 떠났고, 독자나 종손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나 할머니 손에 이끌려 죽음의 섬을 벗어났다. ·경 토벌작전이 강화되면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살리기 위해밀항선에 태워 보냈다.

 

‘4·3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시작됐다. 거센 바다를 건너는 제주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배에 올랐다. 낯선 땅에서 삶은 힘들었지만,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제주와 일본, 미국 등으로 흩어져 살거나 북으로 간 형제자매들도 있다. 이들은 고향에 있는 부모의 부음 소식에도 안타까워 했을 뿐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으로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몰려 있는 오사카 이쿠노에서는 제주도에서 초토화가 한창이던 194913일 재오사카 제주도 대정면 친목회가 인민학살반대추도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마을별 추도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일본으로의 밀항 경로는 제주에서 직접 가거나 부산과 쓰시마를 거쳐 야마구치현과 기타큐슈 사이 뱃길을 많이 이용했다. 194810월 하순께부터 해상경비가 강화되면서 밀항선들은 미나미큐슈 쪽으로 경로를 바꿨다. 특히 초토화 시기와 맞물리면서 밀항자들이 급증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한 영연방점령군의 19481025일치 에히메현을 통한 불법입국 통제보고서에는 “10월 들어 날마다 한국의 밀항자들이 붙잡혔고, 300여명에 이르렀다고 돼 있다. 이 시기 제주에서 일본 에히메현으로 밀항하다 붙잡힌 제주도민은 5차례에 걸쳐 289명이나 됐다. 그러나 4·3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없다. 4·3이 끝나갈 무렵 당시 김용하 제주지사는 “4만여명이 일본으로 갔다고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다. 5~1만여명이 일본을 건너갔다는 연구자들도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뒤 고향인 서귀포시 대정읍에 정착했던 이창순(86?도쿄)씨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48년 친구 3명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지난 114일 도쿄에서 만난 이씨는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나오라고 했다. 안 나오면 너도 빨갱이다. 총살하겠다고 해서 모두 나갔다.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제주를 떠나 서울에 잠시 머물다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씨는 할머니가 1949년에 돌아가셨는데, 나한테 죽어도 제주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다. 종손인데도 할머니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 한이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일본 도쿄에서 만난 제주 출신 재일동포 2세인 원일동씨가 아버지와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쿄 우에노에서 만난 재일동포 2세 원일동(59)씨가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진일동으로 돼 있었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출신인 원씨의 아버지(원경연·작고)4·3 때 살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제주농업학교 재학시절 학생활동을 하다 산으로 피신했던 아버지는 토벌대에 10여명과 함께 한라산 들판에서 총살되는 순간 총이 격발되지 않는 틈을 타 모래 구덩이로 떨어져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 뒤 고모 집에 숨었다가 경찰에 붙잡혀 몇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밀항선을 탔다.

원씨는 토벌대들이 왔을 때 아버지를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 할머니가 막아서서 도망시켰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는 잡혀서 엄청나게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됐다. 아버지가 3대 독자여서 아들을 살리려고 할머니가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제주에서 살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쓰시마를 거쳐 하카다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오무라수용소로 보내졌다. 김녕리 출신 재일동포들은 아버지가 송환되면 처형될 것이라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일본돈 80만원을 모아 진태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그때부터 그가 일본에서 불린 이름은 진태영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원씨는 진태영의 아들 진일동이 됐다. 원씨는 아버지는 규슈에서 도쿄로 올라올 때 할머니 기일을 맞아 술과 주먹밥을 사고, 향을 피워 기차 안에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원씨의 아버지는 아들한테 4·3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제주도를 찾지 않았다. 원씨는 아버지가 몇 번이나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느냐. 통일된 다음에 가겠다며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40살이 넘어 제주에 처음 간 원씨는 어릴 때부터 마을 친목회 활동도 하고 집에서는 제주말을 쓰면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4·3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한경익(84·도쿄)씨는 당시 1년 선배가 총살당하고, 그 선배의 아버지가 외아들을 살려내라며 지서 앞에 드러누워 울부짖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좀처럼 4·3 경험을 이야기 하지 않던 한씨는 어떻게 동족을 개돼지처럼 죽일 수 있나. 4·3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씨는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아버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짚고 나를 보내려고 정거장까지 나왔다. 그게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1월 일본 가와사키현에서 만난 방정옥(81)씨도 4·3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4·3이 발발하던 1948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방씨는 그해 5월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서 생활하다가 1951년 봄 제주로 들어왔다. 그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2년 후배의 어머니가 밭에서 죽을 때였어요. 서북청년들이 주민들한테 눈을 가린 그 어머니를 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민들이 주저주저하자 서청들은 주민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어머니한테 용서해달라며 죽창을 찔렀어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쉬쉬했어요. 너무나 끔찍해 몸서리쳤습니다.” 1965년 일본으로 건너간 방씨는 어떻게 4·3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면서도 말을 아꼈다.

 

북으로 행여 살아계실까 가슴 조이며 기다리던 인내의 세월, 수없이 흐르던 눈물,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이 권배 오빠를 만나 번창한 가족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니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집니다.”

제주시 조천읍 신안동의 한 가족묘지의 부부 묘 앞에는 독특한 표지석이 있다. 10년 전인 200837일 김이선(86·제주시 조천읍)씨 등 자녀들이 세운 남매상봉기념비. 김씨는 2007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가 오빠가 북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헤어진지 58년 만인 2007512일 남북 이산가족상봉 행사 당시 만난 북의 작은 오빠 김권배씨와 김이선 김씨의 큰 언니 김일선씨(왼쪽부터). 김이선씨 가족 제공

 

울면 서로가 말도 못하기 때문에 갈 때부터 절대 울지 말자고 약속했어. 죽지 않고 살아서 보기만 해도 좋은데 울긴 왜 울어. 저쪽에서 걸어오는데 오빠로구나 했어. 오빠도 이선아하면서 나를 불렀어.” 지난 2007512일 금강산에서 열린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때 김씨는 북한에 사는 작은 오빠 김권배(90)씨를 만났다. 18살과 22살에 헤어진 남매는 58년 만에 만났지만 울지 않았다. 남매 상봉 6개월 전에 죽어가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 옆 마을 출신(조천읍 신촌리) 올케가 북에 있는 제주도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씨의 아들 박영선(64)씨는 우리까지만 족보를 5권을 만들어서 그 밑에다 우리 아이들과 큰이모님 아이들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제주도에 오면 먹고 살 게 있으니까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4·3 당시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사람들은 한국전쟁 시기 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처형되거나 행방불명된 경우가 많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북으로 간 경우도 있다. 김씨의 작은 오빠는 서울에서 삼촌 회사에 다니다 한국전쟁 시기 북으로 가게 됐다.

고향 조천에서 해방 뒤 야학 활동을 했던 작은 오빠는 19473?1절 기념대회에 이후 경찰의 주목을 받아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숨어 지냈다. 4·3이 본격화하고 작은 오빠를 찾아내라는 경찰의 닦달에 조천의 수용소에 수용됐던 아버지는 194915일 조천지서 앞 밭에서 총살됐다. 15살이었던 김씨는 밤새 아버지에게 입힐 옷을 만들고 9살짜리 동생과 마차를 빌려 아버지의 주검을 실어다 인근 밭에 가매장했다.

 

김이선씨가 이산가족상봉 당시 패용한 이름표에 삐뚤삐뚤하게 쓴 또 만나야지라는 글에서 오누이의 애틋함이 보인다.

 

아버지와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던 어머니(김창환?당시 49)는 같은 달 22일 뒤따라 희생됐다. 제주시의 친척집에 숨어 지냈던 작은 오빠는 어느날 부모가 죽은 고향이 싫다며 서울로 떠났다. 김씨의 큰 오빠 김임배(당시 29)씨는 한국전쟁 직후 지서에서 회의가 있다며 데리러 와서 나간게 마지막이었다. 김씨의 언니 일선(94)씨는 처음 제주경찰서로 넘어간 큰오빠가 6월에 죽었는데 경찰이 얘기를 하지 않아 그해 8월까지 사식을 사들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중에야 경찰이 큰 오빠를 배에 싣고 두어시간 나간 뒤 돌에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가 시집간 뒤여서 김이선씨는 16살 때부터 70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 제사를 치렀다.

부모님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남매상봉기념비를 세웠다. 오빠는 부모 죽은 게 너무 억울하니까 통일이 돼도 오지 않을거야.” 김씨의 말이다. 김씨 가족묘지에는 4·3 당시 희생된 부모와 큰 오빠의 비문이 4·3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육지로 지난달 23일 경기 고양시에서 만난 오추자(80?경기 고양시)씨는 국내 ‘4·3 디아스포라사례다. 오씨의 가족은 1946년 가을 제주시 노형 외가집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서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남동생 두명 모두 왔다. 오씨는 아버지가 얼마 있다가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며,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오씨의 아버지(오영수·당시 34)19473·1사건 전날인 228일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러 제주에 왔다. 이튿날인 31일 느지막이 일어난 아버지 오씨는 아침 겸 점심을 먹다가 동네 반장이 관덕정 광장에서 3·1절 행사를 한다.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듣고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19473·1절 기념대회 후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진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 됐다.

 

오추자씨.

 

오씨는 아버지가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우리한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아버지가 죽으려고 왔는지 몰라도 딱 맞춰서 왔다. 정답게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버렸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달 유복자로 태어난 남동생은 4살이 되던 19506월 숨졌다. 6살 아래 남동생도 그즈음 숨졌다. 오씨는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온 종일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살았다. 이를 보다 못한 외삼촌들이 우리를 부산으로 데려왔다. 어머니가 부산에서 힘들게 장사하다가 다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지 올해로 66년이 됐다고 말했다.

“3·1사건, 4·3사건으로 육지로 나오게 됐어요. 동네 삼촌들은 일본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아무런 일이 없을 텐데 고향에 돌아왔다가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떠나라고 했어요.”

4·3으로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또다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고, 그곳에서 뿌리를 박고 새로운 터전을 일궜다. 그리고 일본으로, 육지로, 북으로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늘 고향 제주가 자리 잡고 있다. 4·3의 디아스포라는 현재진행형이다

 


판결문 없는 4·3 군사재판수형인 명부인정여부가 쟁점

 

제주 4·3사건 수형인 재심청구

당시 군사재판, 법적절차 없이 진행

1999년 국가기록원서 명부 드러나

2530명 이름·주소·판결 등 기록

제주지법, 최근 재심관련 증인신문

명부, 당시 재판 입증자료진술 나와

 

1999년 공개된 제주 4·3 사건 관련 수형인 명부 표지. 가운데 큰 글자인 수형인 명부오른쪽에 단기 428112, 단기 42827월 군법회의분’, 왼쪽에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공

 

제주 4·3 당시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들이 제기한 재심 청구의 최대 걸림돌은 판결문이 없다는 점이다. ‘유죄의 확정판결을 다시 판단해달라는 재심 청구에는 원심 판결문이 있어야 하는데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군사재판은 판결문도 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일한 공식기록인 수형인 명부로 당시 재판과 판결을 입증할 수 있느냐가 재심 개시 여부의 핵심 쟁점이다.

 

제주지법 형사2(재판장 제갈창)19일 제주 4·3 관련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에 대한 2회 심문기일을 열고 수형인 명부 등과 관련해 김종민 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했다. 제주 4·3 관련 수형인은 194812월과 19497월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진행된 군사재판을 거쳐 인천·대전·대구 등 전국 형무소 14곳에 나눠 수감된 사람들이다. 4·3 수형인에 대해서는 증언만이 전해져 왔으나,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수형인 명부를 공개하면서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수형인 명부에는 194812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처벌한 871, 19497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죄 등으로 처벌한 1659명 등 총 2530명의 이름, 주소, 판결, 언도 일자, 형무소 등이 적혀 있다.

 

증인으로 나온 김 전 위원은 먼저 “1948, 1949년 이루어진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수형인 명부에 대해 군인들이 철수하면서 제주지방검찰청으로 넘겼고, 검찰청이 보관할 이유도 없고 파기할 수도 없어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시켜 보관된 것으로 생각된다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2530명 중 일부 이름, 본적지가 다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실제 증언과 일치하기 때문에 당시 재판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앞서 지난 2월에 열린 1회 심문기일에서 일부 학자들은 수형인 명부가 사후에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이 수형인 명부를 근거로 재심 청구가 가능한 것인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제주 4·3 수형인들의 원심 판결문은 어느 국가기관도 보관하고 있지 않고, 판결문이 없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당시 군사재판이 기본적인 재판 절차도 지키지 않아 처음부터 작성되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가 수형인 명부의 신빙성을 인정할 경우, 당시 군사재판이 열렸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편,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 2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4·3 군사재판과 관련해 수형인 명부는 존재하는데 적법 절차를 거쳐서 군사재판이 행해진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볼 수가 없다고 답변한 바 있다. 군사재판은 열렸지만, 적법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청구인 쪽에선 재판의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군사재판으로 고통받은 4·3 수형인들에게 다시 재판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김민경 기자

 

70년전 18살 제주 소녀 김평국 곁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제주지법, 재심청구 심문기일 열어

피해자 4명 당시 군사재판 진술

15~19살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몰매 맞고 군사재판 뒤 형무소 수감

죽기 전에 명예회복을재심청구

 

제주 4·3 사건 수형인들이 제주지법 형사2(재판장 제갈창)의 심리로 19일 오후 2시 열린 재심 청구 사건 심문기일에 출석하기 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왼쪽부터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김세은 변호사와 재심을 청구한 부원휴(89)·오희춘(85). 앞쪽 김평국(88·왼쪽현창용(86)씨는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왔다. 제주/김민경 기자

 

재판 받으러 가신 장소 기억나세요?”(임재성 변호사)

고개나 들겠습니까. 죄인이라고 하니 고개 숙이고 따라갔지요. 들어가 보니 군인 세 명이 좀 높은 석에 왔다 갔다 하면서 서 있더라고.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77조 내란죄. 그거 하나는 기억에 있어요.”(김평국씨)

몇 명이나 같이 재판 받으셨어요?”

대략 눈짐작으로 둘러보니 한 100명이 안 됐나.”

앞에 군인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좀 높은 데서 왔다 갔다가 하고. 재판이라는 걸 받는데, 죄인 누구누구 불러다가 호명하거나 무슨 죄냐고 물어본 것도 없고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하는 것도 없고. 써 붙인 것만 보고 내란죄라는 죄로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데 다 끝났다고 다 가라고.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재판이라는 건지 뭔지.”

형량은 언제 들었어요?”

포승줄을 가져와서 다섯 명씩 묶더니 배에 실어 전주형무소에 놓고 갔는데, 징역을 살아도 몇 년인지 모르고 갑갑하다고 하니 간수가 1년이라고 말했습니다.”

194812월 경찰에 끌려가 재판인지 뭔지를 받는 18살 소녀 김평국씨 곁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본인임을 확인하는 판사의 인정신문도, 검사의 공소사실 낭독이나 구형도, 판결 선고도 없었다. 죽음의 공포에 겁먹었던 김씨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88살 할머니가 된 김씨는 지난 19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법정에 섰다. 증인석에 휠체어를 고정시킨 김씨의 맞은편에는 자신의 변호사가, 오른편에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판사 3명이 앉아 있었다. 검사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제주 4·3 사건 수형인, 지원단체 등 김씨를 응원해줄 방청객도 있었다. 재판 전 많이 긴장된다던 김씨는 증인석에 서니 마음이 편해지고 해야 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70년 만에 법정에서 그날들에 대해 조목조목 진술했다.

 

제주지법 형사2(재판장 제갈창)는 이날 제주 4·3 사건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에 대한 2회 심문 기일을 열고 김씨 등 청구인 4명의 당사자 진술을 들었다. 제주 4·3 수형인은 194812월과 19497월 두 차례 제주도에 설치된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옛 형법 제77조 내란죄, 국방경비법 제32조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33조 간첩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이름, 본적지, 판결, 언도(선고) 일자, 복형 장소가 적혀 있다. 수형인 명부에 적힌 김평국씨의 이름 아래에도 언도 일자: 1948125, 항변: 무죄, 판정: 유죄, 형량: 징역 1, 복형: 전주등이 적혀 있었다. 김씨와 같은 제주 4·3 수형인 18명은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며 지난해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씨는 1948년 가을께 피난을 가야 산다고 해서 제주 남원통 시내로 내려갔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촌에서 온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해 어머니, 두 동생과 영문도 모르고 잡혀갔습니다. 경찰에서 개 때려잡는 것처럼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매로 사흘간 맞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김씨와 함께 증언한 현창용(86)·오희춘(85)·부원휴(89)씨는 15~19살 나이에 경찰에 끌려갔다가 194812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인천·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12월 군사재판은 제주 4·3 사건 때 중산간 마을에 사는 민간인을 몰아내는 19481017일 제주도경비사령부의 포고령과 1117일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뒤 무장대를 토벌한다며 군경이 주민들까지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적법 절차도 지키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진행됐다. 억울했지만 징역살이가 부끄러워서 타지에서 결혼했던 김씨는 이제야 맘 편하게 무죄를 밝혀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 재판을 40, 50, 60살 때 했으면 내 마음에 자유가 들어왔을 텐데, 그때는 징역이라는 그 두 글자가 몸에 딱 배겨갖고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재판 받아 좋은 일 나 봤자 죽는 일이나 기다리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만 진짜 너무 억울합니다.” 30분 넘게 진행된 증언을 마치며 김씨가 재판부에 한 말이다

 

제주 흙이 피에 절어 시커멨어, 처형장 가던 내 나이 9

올레길에서 만난 4·3

 

여행객들이 제주올레 1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 주변에 있는 4·3 당시 학살터였던 터진목을 지나고 있다.


제주올레와 유명 관광지를 찾으면 아름다운 자연에 뒤덮여 있는 제주4·3이 보인다. 제주올레 17코스(관덕정)에서는 4·3의 시작을, 1코스(터진목)6코스(정방폭포), 19코스(함덕해수욕장과 북촌리)에서는 학살을, 13코스(잃어버린마을 조수리 하동)에서는 사라진 마을을, 14코스(진아영할머니 삶터)에서는 개인의 비극을, 10코스(갱도진지와 섯알오름)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의 현장을 만난다. 제주의 비극적인 근현대사가 오롯이 길 위에 남아있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 주변 노랗게 핀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주변은 4·3 당시 일상적인 학살터였다.

 

2살 때 잃은 엄마 꿈에 그리던 70대 작년 묘 이장 때 유일한 유품발견

터진목·정방폭포·북촌리올레 곳곳에 학살 흔적이 남아 있다

 

69년 만에 찾은 어머니의 은반지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볼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30여년 전 어느날 꿈 속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분이 버스를 탔는데 내 앞에 있다가 나를 바라보는거에요. 직감적으로 어머니라고 생각했어요. 신양리 쪽으로 가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 그 분은 그 버스를 타고 그대로 갔어요.”

 

2살 때 어머니를 잃은 성산읍 신양리 상군해녀(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 강숙자(72)씨가 그 어머니를 만난 건 지난해 7월이었다. 69년만에 이장하기 위해 어머니 묘를 열어보니 꿈 속에 봤던 모습 그대로 어머니(오계춘·당시 36)의 유해는 70년이 다 됐는데도 하얗게 고왔고, 치아도 가지런했다.

 

제주4·3 당시 터진목에서 어머니가 희생된 강숙자(72·성산읍 신양리)씨가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 4일 만난 강씨의 왼손 약지에는 유난히 빛나는 은반지가 있었다. 강씨는 “69년 만에 어머니 묘 이장 작업을 하다가 은반지를 발견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반지 색깔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 이 반지 내가 끼쿠다, 고맙수다’(끼겠어요. 고마워요)라고 했어요. 어머니도 두 살 배기밖에 안된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이 아이를 놔두고 내가 죽어야 하나라고 생각해서 내게 주려고 한게 아닌가, 아니면 나를 키워주지 못한 어머니가 유품이라도 내게 전해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69년 만에 강씨에게 다가온 은반지는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 됐다.

 

지난해 769년 만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면서 발견된 강숙자씨 어머니의 은반지.

 

지난해 769년 만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면서 발견된 강숙자씨 어머니의 은반지.

어머니 오씨는 35살에 귀한 딸 강씨를 얻었다. 어머니는 강씨가 2살 때이던 19481127일 터진목에서 학살됐다. 잘못이 없어 곧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는 젖먹이 강씨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 ‘세루(서지) 치마, 세루 저고리에 목수건을 한 채 터진목에 끌려온 어머니는 마침 지나가던 동네 이웃에게 옷과 목수건으로 강씨를 감아 안기고, 언니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강씨와 어머니의 마지막 이별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터진목에서 희생되기 몇개월 전에는 아버지(강태형·당시 33)가 행방불명됐다.

 

부모를 모두 잃은 강씨는 어머니 언니(이모)의 손에 컸다. 자라면서 이모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로 모셨다. 강씨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다. 4년 전 남편과 자녀들의 만류로 물질을 그만뒀지만, 최근에도 하루 물질을 해 99의 소라를 채취할 정도의 실력 있는 상군 해녀다. 밭일을 하다가도, 보험외판을 하다가도 바다로 달려갔다. 밤에는 자녀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하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살았다. 15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을 한 강씨는 경북 포항 구룡포와 경남 거제도는 물론 일본 미에현의 섬 등에서 출가물질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강씨는 국회라도 찾아가서 정치인들에게 ‘4·3을 겪은 사람들을 폭도라고 해서 기를 펴고 살게 해줬나. 보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싶다고도 했다.

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밭도 샀어요. 바다가 없었으면 굶었을텐데 바다가 있어서 밥도 먹고,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어요. 자식을 의사까지 만들었으니 자랑할만 하지 않나요.” 눈물이 쏟아지던 강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지난 10일 오후 세계자연유산인 서귀포시 성산 일출봉으로 가는 길목인 터진목. 제주올레 1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다. 잔잔하게 펼쳐진 바다와 파란 하늘이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한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렌터카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제주의 봄을 알리는 노랗게 피어난 유채꽃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관광객들이 셀카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온 몸으로 봄날을 느끼고 있었다.

 

한쪽에는 제주4·3 성산읍 지역 양민 집단학살터 표지석이 있다. 강씨의 어머니처럼 성산읍 지역의 많은 주민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터진목은 당시 일상적인 학살터였다.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제주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주민들이 말하듯 한과 눈물의 땅이다. 4·3의 초토화 시기이던 1948년 가을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이 절경지는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1948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곳에서 학살된 주민은 400여명 이상이다.

 

한달 일정으로 제주에 와 사흘째 제주올레를 걷고 있던 조재두(42·경기 안산시)씨가 집단학살터 표지석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제주시에서 출발하는 18코스부터 걷고 있다는 조씨는 이렇게 마음 아픈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다. 올레를 걸으면서 4·3을 알게 됐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도 봤는데, 이곳에서도 보게 됐다. 이런 절경지가 70년전에 학살터였다는 것을 알게 돼 먹먹하다고 말했다.

 

올레 19코스 북촌리에서 600여명 학살

처형 기다리다 목숨 건진 고완순씨

어머니 등에 업혀 보채던 3살 동생

군인이 몽둥이로 머리 두번 내리쳐

북촌초 학살 때 부모 잃은 세 친구들

그날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 어떻게 잊어

 

처형장에서 살아난 소녀 북촌리 옴탕밭(옴팡팥)의 검붉은 빛이 돌던 흙이 피에 절어 시커맸어. 오후 4시가 넘어 해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얼음에 빛이 반사되듯이 핏빛이 유리알처럼 반짝 거렸지.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추웠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1949117일 당시 9살이었던 북촌리 노인회장 고완순(78)씨는 너븐숭이 옴탕밭 처형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등 뒤에선 소총의 철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살짜리 남동생을 업은 고씨의 어머니는 한손에 언니(당시 16)의 손을, 또다른 손엔 고씨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옴탕밭으로 끌려간 고씨 가족은 처형 순간을 기다리다 극적으로 살아났다. 옴탕밭에는 바로 앞서 처형된 주민들의 주검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노인회장 고완순씨가 4·3 당시 처형장이었던 너븐숭이 옴탕밭으로 끌려가 학살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나온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갑자기 군인이 탄 지프가 나타났고, 주민들은 곧이어 중지, 중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고씨의 가족은 이렇게 살아났다. 앞서 고씨 가족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헤멨다. 고씨가 밀려나가다 이미 숨져 있는 한 아주머니를 만졌고, 손에는 피가 묻었다. 고씨가 아이고, 무서워하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3살 남동생도 집에 가자며 보챘다. 몽둥이를 들었던 군인이 동생의 머리를 두번 내리치자 조용해졌다. 동생은 시름시름 앓다가 1952년에 숨졌다.

북촌리 여자들은 물질하다가 조팟(조밭)에 가서 검질()메고 하면서 다리가 다 휘어졌어. 그래도 이 마을을 지켜온 사람들이 여자들이야.”

 

지난 201211월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만난 적이 있는 고씨는 지난해 말 우리 마을 북촌은 4·3의 한을 풀지 못하고 70년의 세월을 살았다. 4·3의 아픔을 해결해주실지 때론 기대 속에 살 맛이 난다. 제주에 오시면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다시 한번 꼭 만나고 싶다는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의 꿈은 이뤄질까.

 

지난 3일 제주올레 19코스에 있는 북촌리 너븐숭이. 광주에서 온 광주제일고 교사 김병섭(41)씨와 박종헌(50)씨가 북촌리 주민 이상언(56)씨와 4·3 너븐숭이 유적지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는 28~30일 수학여행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하고 있었다. 박씨는 “4·3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5·18과 비교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는 현장이어서 찾기로 했다. 이런 역사가 올레길에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4·3을 알릴 계획이다고 말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로 알려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1949117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2연대 3대대의 학살극으로 하루동안 북촌초등학교와 인근 밭 등에서 200여명이 넘는 주민이 학살된 곳이다. 학살극이 벌어진 이튿날 인근 함덕리 소개된 주민들은 또다시 도피자 가족이거나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처형됐다. 이틀 동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0여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북촌리에서는 4·3 시기를 통틀어 6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학살의 주체는 ‘2연대 3대대라고만 알려졌을 뿐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58년 만에 만난 세 친구 울고불고 했어요. 북촌사건 때 있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어요.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잊겠어요. 나이가 어려도 그때의 기억을 평생 갖고 있는데

 


58년만에 만난 친구들 이야기에 금세 눈물이 그렁했다. 지난해 4월 김현옥(75·제주시 동광로)씨는 서울 은평구의 한 식당에서 고향 후배 이춘애(74·서울)씨와 김용희(72·서울)씨를 만났다. 김씨와 이씨는 자주 만났지만, 10대 중반에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갔다가 강원도에 정착한 용희씨는 만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이뤄지게 됐고, 1960년 헤어진 지 58년 만에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친구들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58년 만인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난 제주 북촌리 출신 이춘애 김현옥 김용희씨(왼쪽부터). 이씨가 김용희씨한테 북촌초등학교 역사가 담긴 책을 보여주며 4·3 당시 희생된 아버지 사진이 있으니까 찾아보라고 했으나, 김씨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김현옥씨 가족 제공

 

북촌리 학살이 벌어진 1949117, 이들은 모두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다. 김씨는 6, 이씨는 5, 용희씨는 3살이었다. 김씨는 아버지(김유신·당시 50), 이씨는 어머니, 용희씨는 아버지를 잃었다. 태어난 날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날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은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다. 김씨의 어머니(이차복)13녀의 자녀와 남겨졌다. 북촌사건 다음날, 8살 위 언니 김금택(83)씨는 어린 김씨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함덕 이모댁으로 갔다. 며칠 뒤 어머니는 고향으로 와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주검에 가마니를 덮어놨다가 밭에 묻었다. 여느 북촌사람들처럼 김씨 가족의 신산한 삶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함덕으로 갔던 김씨 가족은 봄이 되자 다시 북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두 타버린 마을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이 북촌사건이 나기 전에 시국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조그만 단지에 약간의 돈을 넣어서 텃밭에 묻어뒀어요.” 불타버린 집 터에서 어머니는 텃밭에 묻었던 단지를 꺼냈다. 그것은 4·3 이후 김씨 가족의 생존 밑천이었다. 그 돈으로 얼레기’(머리빗)를 사서 중산간 마을로 팔러 다녔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출신 김현옥(75)씨가 4·3 당시 부모님이 텃밭에 돈을 넣고 묻어뒀던 단지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씨는 집터에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그 위를 막아 움막을 만들었다. 세가족이 같이 살았는데 우리 집은 다섯식구, 한 집은 세 식구, 또다른 집은 다섯식구 해서 모두 13명이 움막에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릇이 없어 전복 껍데기를 사용했고, 먹을 것이 없어 톳이나 파래와 보리쌀을 섞은 톳밥, 파래밥, 물읏을 섞은 물읏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함덕에서 북촌으로 옮겨온 지 두어달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3살 아래 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졌다. 오빠 김철(79)씨는 당시 홍역으로 청력을 잃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낀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그해 6월에는 남동생 희준(69)씨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생을 출산한지 23일만에 핏덩이를 업고, 땔감을 사서 남의 마차를 빌려타고 시내에 나와 팔았다.

 

김씨는 그 시절 얘기를 어떻게 다 하느냐. 나만 그런게 아니라 몇해 전 돌아가신 남편은 어머니가 총살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심정이 오죽했겠느냐. 글만 쓸 수 있으면 소설을 써도 몇권은 쓰겠다고 말했다.

살아온 과정들이 다 마찬가집니다. 서로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지요.” 김씨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제주/·사진 허호준 기자

 



4·3 ‘백비는 이름을 원한다

[동백에 묻다] 백비의 침묵

제주4·3평화기념관 글 없는 비석 이름 짓지 못한 4·3의 현주소다

 

항쟁 폭동 학살 등 77개월간 얽히고설킨 사건들정부 보고서엔 사건 정의만

2014년 국가추념일 지정됐지만 역사적 평가는 후세 몫으로 남겨

70돌 맞아 정명운동이 시작됐다

 

제주 4·3’ 70주년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 제1관에 누워 있는 백비를 추모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 백비 앞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평화기념관. 어두침침한 제1역사의 동굴에 들어서면 새소리가 잠깐 들리고 양옆에는 깨진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과 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천장에서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듯이 들리는 물소리는 어두운 동굴 안에 있는 느낌을 준다. 4·3 당시 제주도에 널려 있는 자연동굴들은 제주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그 동굴의 끝 지점에 하얀 대리석 비석이 누워 있다. 비석은 천장의 원통형 기둥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빛난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비석의 표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이른바 백비. 설명문에는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없어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백비는 사건 발생 70년이 되도록 이름 짓지 못한 4·3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200310월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정부 보고서)가 확정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고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지만, 여전히 4·3이름 짓지 못한 역사로 남아 있다. 당시 정부 보고서는 사건의 정의는 내렸지만, 성격 규정은 미뤘다. 200310월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제주4·3위원회)가 확정한 정부 보고서 서문에서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보고서는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대사의 큰일 가운데 4·19 혁명은 이미 법·제도적 공인이 이뤄졌고, 부마(부산마산)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은 문재인 대통령이 마련한 개헌안 전문에 명시될 정도로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받았다. 이와 달리 제주4·3’은 그냥 ‘4·3’이다. 발단부터 마무리까지 한달 안팎이었던 다른 사안과 견줘 4·377개월이 걸려 성격 규정이 어려워졌다. 분단과 냉전 초기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제주4·3은 미군의 직간접적인 개입과 진압에 나선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의 반인륜적인 잔학 행위 등이 얽히고설켜 확대됐다.

 

제주에 여행을 왔다가 지난 310일 제주4·3기념관을 들른 송한용 전남대 5·18연구소장은 처음에는 4·3 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기 때문에 누가 희생자인지 몰라 백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주 사람들의 딜레마를 백비를 통해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백비로 상징된 것 같다. ‘국가폭력에 대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마음, ‘항쟁이나 학살이라는 표현은 국가권력이나 우익이 싫어해서 쓰지 못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제주4·3 희생자 유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위패봉안실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찾고 있다.

 

학살·희생 프레임 갇힌 4·3역사의 눈으로 이름짓자

국가는 50년간 폭동이라 했고 진보사학계는 항쟁이라 했다

최근 15년간 학살 규명에 초점통일국가 향한 투쟁담론 상실

항쟁성 등 역사적 대의 재조명다양한 성격 포괄한 정명찾아야

 

제주4·3이란 여야 합의로 20001월 제정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사건의 정의를 “194731일을 기점으로 19484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 보고서를 보면, 제주4·3은 미군정 시기인 194731일 경찰의 발포로 ‘3·128주년 기념대회참가자들의 거리행진을 구경하던 초등학생과 젊은 부녀자를 포함해 6명이 숨졌는데도 경찰이 발포 책임자 처벌은커녕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면서 시작됐다. 그 뒤 19483월까지 2500여명이 검거돼 고문을 받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또 극우 도지사 유해진의 독단적 행정행위, 극우세력인 서북청년단의 제주도민에 대한 가혹 행위와 19483월 경찰에 의한 2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194843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5·10 단독선거 반대 등을 명분으로 무장봉기에 나섰다. 4·3은 미군정 아래서 일어나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9월 한라산 입산통제구역이 해제될 때까지 77개월에 걸쳐 전개됐다.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 희생자 위패에 유가족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제주4·3 희생자 유족이 제주4·3평화공원 안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각명비 앞에 앉아 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남로당의 무장봉기와 ‘5·10 선거 반대등을 들어 4·3을 여전히 공산폭동이자 반란이라고 본다. 그러나 제주 4·3 시기 무장대의 민간인 학살과 방화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단학살과 무차별적 방화는 군·경 등이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제주4·3위원회가 희생자와 유족을 마지막으로 심사한 지난해 725일 현재 희생자 14232(사망 1244, 행방불명 3576, 후유장애 164, 수형인 248), 유족은 59426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는 5.4%(772), 11~20살은 17.3%(2464), 전체의 22.7%20살 이하다. 61살 이상은 6.3%(900)를 차지했다. 이런 희생자 비율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희생됐음을 보여준다. 정부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5~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왜 정명운동이 전개되나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4·3범국민위)는 올해 70주년을 맞아 ‘4·3에 정의를, 역사에 정명을이란 구호를 내걸었다.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가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했다는 말에서 정명이 나왔다. 박찬식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은 정명 문제가 공식적인 역사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회적 토론과 합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계속 덮어놓고 갈 수는 없다. 70주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식 정명이 이뤄지긴 어렵더라도 4·3의 주체적인 측면들을 조명하고 평가하는 부분은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4·3이 특별법 제정 등으로 제도화되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 대량학살 등의 프레임에 갇힌 측면이 있다. 당시 도민들은 단순히 희생과 억압의 객체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였다. 해방공간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해가는 주체로서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려는 노력과 투쟁이 있었는데 (정부 보고서 이후) 지난 15년 동안의 담론 속에서 실종된 측면이 있었다며 정명운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제주4·3 때인 194811월 초토화 작전 때 해안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주변에 피신해 있던 주민 50여명이 희생된 제주도 서귀포시 영남마을 전경. 한라산 남쪽 첫마을이라는 영남마을은 그 뒤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4·3은 그동안 폭동과 항쟁, 학살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폭동은 사건 이후 50여년 가까이 국가의 공인된 인식이었고, 지금도 일부 보수세력들은 4·3의 성격을 폭동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토벌은 정당했고, 진압 과정에서 일부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시각이다. 진보 역사학계 등은 외세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분단에 반대한 항쟁으로 규정한다. 또다른 시각은 4·3의 진실을 규명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4·3의 발생 원인을 분석하고, 외부의 부정과 불의 등 부당한 탄압에 맞서 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정의로운 투쟁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연구자들은 제주4·3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돼 정명에 대한 합의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정명 문제에 관한 한 현장과 연구자들 간에 괴리가 있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4·3항쟁이다. 해방공간에서 1948년 상황까지를 보면 항쟁이다. 그러나 그 뒤 1954년까지의 기간은 항쟁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죽임과 죽음의 싸움이었다그래서 정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백비는 여운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전체 희생자의 10% 미만으로 보이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유족들의 마음도 같이 헤아려야 한다. 비율이 아주 적다고 하더라도 무장대의 과오도 분명히 있다. 동학처럼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4·3을 개인사나 가족사가 아닌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정명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항쟁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자인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개인 의견과 공적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정명운동은 4·3 70주년을 맞아 내건 슬로건으로, 분명히 적극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정명운동으로 국민적 추인을 받는 건 매우 어려운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동학운동도 처음에 동학란에서 시작해 동학혁명을 거쳐 동학농민전쟁으로 정설화됐는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정명화됐다고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4·3항쟁적측면을 강조한다.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4·3사건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는 4·3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4·3의 항쟁적인 면을 부각하기 어려웠고, 그냥 4·3특별법에 있는 대로 하자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온 측면이 있다. 정명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4·3의 발발 원인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 보고서에도 있지만, 특히 3·1절 기념대회 이후 제주도에 몰아닥친 육지 사람들의 횡포나 미군정의 실정, 해방된 지 2~3년이 지났지만 통일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암담함, 이런 것들이 결국은 4·3으로 폭발한 것이다. 서북청년단 등에게 당했다는 강한 피해의식 등도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항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4·3은 다른 사건과 달리 매우 오래 지속됐다. 항쟁적인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한 단계 더 (연구가)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4·3항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양정심 박사는 “4·3이 현재진행형이듯이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가 만나기 위해서라도 4·3의 다양한 성격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3은 추모공원, 추념일, 유적지, 유해 발굴 등 아픔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대중의 자주적 국가 수립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 녹아든 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 앞에서 한 유족이 절을 올리고 있다.

 

박찬식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은 그 부분대로 충분히 조명돼야 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정명 문제와 연결해야 맞는지는 고민이다. 무장대로 나서던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제주도민, 다수 국민의 열망이 기저에 있다. 항쟁으로서 정당성이 있었다고 해도 무장대가 살해한 피해자 유족들 처지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대의를 가지고 싸웠던 부분을 덮어버리고 희생의 프레임만 4·3의 모든 것이 돼 버리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4·3이 원래 시작됐던 배경과 동기, 주체로서의 역사,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조명을 늦출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제주4·3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바라보는 견해가 달라서 모두가 합의하는 명칭을 부여하기는 아직 쉽지 않은 것 같다. 4·3 발발의 사전과 사후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논의가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혀간 뒤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당분간 불완전하지만 ‘4·3’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범죄자 낙인 찍힌 4.3행방불명인...4.3특별법 통과해야" 4.2

[언론 네트워크] "50년간 연좌제로 고통받은 유족들...명예회복 호소"

70년전 4.3의 광기가 제주를 휩쓸었을 당시 행방불명되면서 아직도 '범죄자' 낙인이 찍혀있는 희생자들. 4.3행방불명인 유족들은 이들의 마지막 한을 풀기 위해 '4.3특별법'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4.3행방불명인 유족협의회(회장 이중흥)1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4.3특별법 개정을 위해 정부가 더욱 앞장서고, 국회가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힘을 실어달라"고 촉구했다.

 

1일 오후 2시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4.3행방불명인 유족협의회. 제주의소리

 

유족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주4.3사건특별법을 제정하면서 50년 숨죽여 살아온 4.3 유족들이 비로소 얼굴을 들 수 있었고,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정부에서 4.3진상보고서가 나오면서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두 분 대통령이 계셨기에 유족들은 '화해와 상생'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지난 9년 보수정권 집권 시기에는 4.3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의 역사를 되돌리려는 악의적인 시도가 집요하게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에 4.3 해결을 약속했고, 대선 후보 시절 제70주년 제주4.3추념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부디 4.3 60주년 추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해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옥살이 끝에 행방불명된 4.3 수형인 희생자와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유족들은 "4.3사건 희생자 14231명 중 행방불명 희생자는 3478명이며, 미신고자를 포함하면 행방불명 희생자는 5000명이 넘을 것이다. '수형인 행방불명' 희생자에는 '범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후손인 유족들은 연좌제로 50년 이상 고통을 받아왔다"고 그간의 고초를 토로했다.

 

이들은 "모든 원인은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한 것이다. 행방불명 희생자 대부분은 수형자로 한국전쟁 당시 총살 당했거나 행방불명 됐다"고 주장하며 "지난 20074.3특별법 개정 때 수형자도 비로소 '희생자'에 포함됐지만, 아직도 행방불명 수형인은 '범죄자' 딱지가 붙어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들은 "원희룡 제주지사는 4.3담화문을 발표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4.3수형인'에 대해 명시적인 공식 사과를 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고, 4.3특별법 전면 개정안이 오영훈 국회의원의 대표발의가 된 상태다. 4.3특별법 개정안에는 4.3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등이 있지만 군법회의가 불법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하며 "정부와 국회는 4.3특별법을 개정해 4.3 수형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홍성수 전 4.3유족회장은 "지난달 30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만나 4.3특별법 통과를 요청했고, 홍 대표로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특별법 개정의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차원에서 동참해 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3유족·도민 마음 어루만진 '제주도민' 이효리 4.3 프레시안

제주 이주 6년째를 맞은 소길댁이효리가 공식 석상에서 제주4.3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3일 오전 104.3평화공원에서 열린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이효리는 내레이션을 맡았다.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추모시를 낭독했다.

 

이효리가 낭독한 시는 이종형 시인의 '바람의 집' 이산하 시인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김수열 시인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3.

바람의 집에는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이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효리제주4.3 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서 내레이션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4.3의 상징과 같은 동백꽃도 언급했다. 이효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이효리는 2013년 가수 이상순과 결혼하면서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도가 70주년을 맞은 4.3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그에게 추념식 내레이션을 제안하자 흔쾌히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에선 추념식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이날 추념식 현장에서 울려 퍼진 이효리의 차분한 목소리는 4.3 유족과 도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 충분했다.

 

바람의 집<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생은 아물지 않는다<이산하>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김수열>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천둥 번개에 놀라

이리 휘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에

쓸려 저리 휘어진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 여기 심고 싶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불벼락을 뒤집어쓰고도

모질게 살아 여린 생명

키워내는 선흘리 불칸낭

한때 소와 말과

사람이 살았던,

지금은 대숲 사이로

스산한 바람만 지나는

동광리 무등이왓 초입에 서서

등에 지고 가슴에 안고

어깨에 올려

푸르른 것들을 어르고 달래는 팽나무 같은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

허리에 박혀 살점이 되어버린 총탄마저 보듬어 안고

대창에 찔려 옹이가 되어버린 상처마저 혀로 핥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바람을 부추기고

바람이 거칠면 바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 틔워

뭇새들 부르고

여름이면 늙수그레한 어른들에게 서늘한 그늘이 되는

그런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푸르고 푸른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내일의 바람을 열려 맞는 항쟁의 마을 어귀에

아득한 별의 마음을 노래하는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온 섬이 '일시정지'...제주도민, 4.3영령 위로하다 4.3 제주의소리

[언론 네트워크] 추념일 최초로 묵념 사이렌 변화된 4.3 위상 확인

201843일 오전 10. 1분 동안 제주도 전체가 일시정지했다. 울려퍼지는 사이렌에 맞춰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70주년을 맞은 제주4.3희생자 추념일에 사상 최초로 제주도 전체에 묵념사이렌이 울렸다. 오전 10시 정각부터 1분간 제주도경보통제소 주관 하에 제주 전역에 설치된 민방위경보시설 46곳을 통해 사이렌 소리가 온 섬을 가득 채웠다.

 

묵념과 추도를 목적으로 사이렌을 울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전국 단위 묵념사이렌은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현충일 때만 가능하다. 지역 단위로는 6.25 참전용사를 기리는 턴 투워드 추념행사(1111) 시 부산 전역,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행사 시 안산 일원,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차원에서 대구 일대 등 총 3곳이다.

 

최계명 행정안전부 비상대비정책국장은 4.3 70주년 하루 전 묵념사이렌 소식을 알리면서 적기의 공습에 따른 민방공 경보 사이렌이 아니므로 제주도민 여러분들은 놀라지 마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1분 간 묵념 후,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민방위경보시설에 설치된 사이렌은 묵념 용도가 아니라 비상경보 목적이다. 적의 공습 등 유사시 경보를 발령하거나 이를 대비한 민방위 훈련 때 사용이 가능하다.

 

다만 범국민적 추념 분위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중대사인 경우에는 이를 묵념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행정안전부의 민방위 경보 발령·전달규정 제22조는 사전에 경보단말 활용계획을 제출할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의 승인을 거쳐 사이렌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 서귀포 안덕중 학생들이 3일 오전 10시 사이렌에 맞춰 묵념하고 있다. 이날 제주지역 각 학교들은 10시에 맞춰 잠시 수업을 멈추고 추모를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제주도는 4.3의 완전 해결과 추모 분위기 확산 차원에서 작년 행안부에 계획을 제출했고 작년 말 최종 승인됐다. 중앙민방위경보통제센터 관계자는 “4.3추념식을 정부가 주관하고 있는데다 제주도민 전체의 추념 분위기 조성 차원인만큼 당연히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묵념사이렌이 도민 전체의 추념 동참 분위기 확산에 톡톡한 역할을 한 것을 두고 제주도 관계자는 묵념사이렌은 4.3의 변화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의미를 전했다

 

대통령 "아직도 4.3을 이념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 있다"

"4.3의 진실은 역사의 사실완전한 해결 약속"

문재인 대통령은 4.3 희생자 추념사를 통해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제주도에서 열린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현직 대통령이 4.3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지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12년 만의 일로, 자유한국당 등 보수 세력이 4.3 항쟁에 색깔론을 덧씌운 데 대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대선 후보였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20174.3 추념일 당시 "제주 4.3은 소위 좌익들에게 제주도민이 이용돼서 제주도민 3분의 1이 피해를 본 사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홍준표 "4.3 좌익이 이용5.16 혁명가 기억나")

문 대통령은 이같은 주장에 대해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다""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12.28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지난 2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는데, 이를 4.3 항쟁에 대한 해석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4.3의 완전한 해결 향해 나아가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더 이상 4.3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4.3에 대한 접근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2000,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또 "유족들과 생존 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유가족에게 배상하고 국가트라우마센터를 건립하려면 '4.3특별법(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4.3특별법' 개정에 대해서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공감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문 대통령은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 가치를 되찾는 일"이라며 "4.3의 명예 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문 대통령은 제주 평화공원에서 행방불명인 표석을 참배해 유가족을 위로한 뒤 위령비에 헌화했다. 가수 이효리 씨와 4.3의 아픔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 씨 등이 행사에 참석해 추모시와 추모글을 낭독했다.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이 땅에 봄은 있느냐?"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4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화산도'.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43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