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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by 이성근 2019. 5. 16.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저자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편집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창비 |2017.05

 

황석영-황석영이 북한에 갔다 와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자,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학적 천재가 썩는 것을 아까워 했다. 상당수 문인들은 `살아 있는 국보를 내놓으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했으며, `그를 가둬두는 일은 생동하는 모국어를 가두는 일`이라고도 했다.

 

70~80년대 황석영이 이뤘던 문학적 성과는 빛나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소설과 희곡이 동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단했던 황석영은 1974년 첫 창작집 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등은 지금도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품들로 인정 받는다.

 

같은 해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 받았던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의적 두목을 주인공 삼아 70~80년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작지만 시원스런 문학적 숨통을 틔워주었다.

<객지><장길산>에서 보여준, 서민 대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의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유신 시절 공장 견습공으로, 노가다꾼으로, 문화운동가로, 6·25 이후 최초의 농민운동가로 뛰어다니며 민중의 삶을 배우던 그는, 19805월을 광주에서 겪고, 80년대 내내 진보적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급기야 1989년에는 통일운동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수 차례 면담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발표하여 그 편집자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역시 독일과 미국을 유랑하다 1993년 귀국과 함께 체포·수감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침없이 실천하며 살아온 황석영의 `싹수`는 명문고교를 중퇴하고 머리를 깎겠다고 산사를 찾아들어갔을 때부터 분명했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에 뛰어든 것도 그렇고, 그 베트남 전장에서 방금 터진 포탄 구덩이 속으로 몸을 처박으면서 `이번에 살아남기만 한다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것도 황석영 다운 일이었다.

 

황석영은 입심과 노래솜씨, 친화력으로도 `국보급`이라 한다. 교도소에서 그의 별칭이 교도소 `소장`보다도 높은 `총장`이었던 것도, 특유의 친화력과 입심으로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이 청산유수라 창작의 고통도 별로 겪지 않는 타고난 필력이 아닐까 상상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비록 `외다리 타법`으로나마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파지를 양산할 일도 없어졌지만, 한 장의 원고지를 채우기 위해 100장의 파지를 양산하는 각고의 시간과 결벽에 가까운 완벽성의 추구는 황석영의 또 다른 면모다.

 

이제 황석영은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객지>와 같은 `메마르고 딱딱한 리얼리즘`으론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동아시아적 형식에 현실주의적 내용을 담고, 마르케스와 아스투리아스 등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참조항 삼아 새로운 문학적 변신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관심을 끌어,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 소설선집>(1988)이 각각 번역·간행되었다.

 

목차

간행의 말정상용

머리말황석영

추천사브루스 커밍스

 

1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2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3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부록

일지

후주

개정판을 내며이재의

간행위원 명단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이 기록이야말로 동시대 민중의 증언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책이다!”

 

10년간 민주정권에 이어 2008년부터 시작된 보수정권 아래서 우리는 심각한 역사왜곡이 진행되는 것을 고통스럽게 겪었다. 특히나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왜곡과 폄훼는 극심하여,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실마저 송두리째 부인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특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한 왜곡과 공격은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광주항쟁에 대한 터무니없는 왜곡과 공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입술을 깨물며 준비를 했고 그사이에 촛불혁명이 진행되었다. 5·18 광주와 세월호의 어린 넋들이 함께하는 이 빛나는 계절에 위대한 시민들은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우리들의 책은 이제 피와 눈물이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향한 이정표가 되어야만 한다.”(황석영, 머리말)

 

항쟁의 진실을 기록한 최초의 책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기록한 책들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1985년은 5·18항쟁 가해자인 신군부가 집권을 하고 있는 서슬 퍼렇던 시기였으므로 필자들은 자료 수집에 많은 제약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필자들은 가해자인 신군부, 피해자인 광주시민, 그리고 관찰자인 기자와 선교사 등 항쟁 관련자 가운데 한 축이었던 피해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당시까지 생산된 각종 유인물과 입수 가능한 재판기록 등 한정된 자료만을 토대로 집필을 해야 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와 상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항쟁 5주년에 맞춰 출간된 이 책 초판은 대학가 서점에서 소리소문 없이 팔려 나가는 지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초판 출간 이후 32년 만에 왜 개정판을 펴내는가?

1987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어, 1988년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광주청문회가 개최되면서 광주시민의 억울한 오명도 조금이나마 벗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및 12·12, 5·18 재판, 5·18특별법 제정, 등을 거치면서, 5·18무장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법과 역사의 평가가 내려졌다. 그 후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5·18 당시 계엄군의 진압작전 내용이 일부 밝혀지면서 5·18에 대한 신군부의 의도적인 왜곡이 상당부분 드러났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집권한 보수정권 아래서 광주항쟁의 진상에 대한 심각한 왜곡과 폄훼가 다시 시작됐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송두리째 부인하고, 확정된 대법원의 사법적 판결마저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특히 이 책과 필자들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도를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이 같은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2014년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성금을 바탕으로 개정판 집필을 추진하여, 3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2017년도에 전면개정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객관적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한 넘어넘어전면개정판

개정판은 주로 항쟁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한 초판과는 달리, 계엄군의 군사작전 관련 문서, 피해보상 등 행정기관 문서, 1868건에 이르는 항쟁 참여자의 증언자료, 5·18재판 자료, 검찰수사기록, 청문회 자료 등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초판 출간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내용과 5·18재판으로 밝혀진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계엄군의 경우 광주청문회(1988)에서 이루어진 진압작전 참여 군인들의 증언과 국회 제출 군 자료, 12·12, 5·18 재판(1995~1997)과 수사기록 등에서 드러난 신군부의 내란 모의와 실행 과정의 불법성, 가해자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법률적 판단을 다루었다.

 

또한 5·18항쟁을 제3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현장을 취재했던 내외신 기자들의 증언과 보도기사 등을 통해 어느 일방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이제는 역사가 된 5·18항쟁, 37년이 지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5·18항쟁을 좀더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이 책의 초판이 지니고 있던 인식과 정보의 한계에서 비롯된 피해당사자만의 관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개정판을 내며를 통해 1985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발간된 초판의 집필과 출판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도 소개하였다.

 

아울러 초판보다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결과 초판에서 발생한 오류들도 정정하며 서술했는데, 후주(146, 311, 442, 461, 477, 606, 607, 609)를 통해서는 이에 해당하는 10여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면, 초판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고교생 김영찬은 실제로는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했고(후주 146), 23일 아침 불탄 광주세무서 지하실에서 발견됐다는 여고생 시신에 대한 서술(초판 155~56)은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항이며(후주 477), 27일 새벽 가두방송을 듣고 도청을 향하던 수백명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는 기록(초판 241)에 대해서도 그 시각 도청으로 향한 청년들은 거의 없었다고 바로잡았다.

 

19805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이은 518일 군경의 폭력적인 시위진압으로 촉발된 광주민중항쟁은 21일 계엄군의 퇴각에 따른 짧은 해방기간이 지나고 27일 새벽 개시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1987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된 5·18 광주민중항쟁은 관련 기록물이 영국의 대헌장,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등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2011년 등재됨으로써, 인류사의 진전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국내적으로도 1997417일 대법원은 광주시민의 저항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인정했다.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위협이 가해져 그 권능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헌법을 수호할 최후의 수단은 국민들의 결집된 저항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적·사법적 평가는 일부 극우 선동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부정되고 있으며,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한 내란의 수괴전두환 또한 최근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 심각한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은 극우세력의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에 맞서는 건전한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지닌 시민사회의 단단하고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을 자임하고 있다.

 

추천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지금까지 나온 광주항쟁에 관한 여러 기록 가운데 가장 세밀하고 고전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한국현대사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아직까지도 광주항쟁을 둘러싼 한국사회 내부의 정치적 관계나 국제적인 역학은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하는 개정판은 그런 의미에서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의 긴장과 지난겨울 한국의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촛불혁명이 가져다준 문제들에 얽혀 있는 상관관계를 깊숙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미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한국현대사에서 광주문제가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만이 아니라,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워싱턴 두 나라 정치권력의 합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

 

1980년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은 놀라웠다. 군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진압은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광주항쟁은 혹독한 독재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민주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한국인들이 용감하게 투쟁의 발걸음을 내디딘 사건이다. 이 투쟁은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 (언어학자, 철학자, 정치운동가)

 

이 책은 군사통치에 항거한 1980년 광주시민의 영웅적인 항쟁을 진솔하고 흥미롭게 기록한 이야기다. 저자들은 냉전시대의 가장 중요한 대중저항 가운데 하나인 이 항쟁의 하루하루를 날카롭고 열정적으로 써내려갔다. 이 책은 어떻게 민중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연대와 사랑을 통해 자신의 도시와 국가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관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이 책을 즉시 읽어보라고 강력히 추천한다.

- 팀 셔록 (탐사전문 저널리스트, 5·18 관련 미 정부 비밀문서 공개)

 

이 책은 광주 사람들의 불굴의 정신을 연대기적으로 최초로 기록하였다. 가혹한 통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개정판은 극우세력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자가 1980년 광주항쟁의 가장 기초적인 사실이 알려지는 것조차도 탄압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 수구 보수주의자들은 아름다웠던 사랑의 공동체를 북한의 음모로 치부하며 진실을 왜곡하려 하고 있다. 온 도시가 아직 화약 냄새에 휩싸여 있던 시절에 이 책은 용기 있게 항쟁의 진실을 드러냈다. 야수 같은 군대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광주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노력이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한국의 민중봉기』 『아시아의 민중봉기저자)

 

5·18 광주민주항쟁을 나는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알았다. 그리고 옥살이에서 풀려난 뒤엔, 이 책의 초판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나병식 도서출판 풀빛 사장의 변호인으로 큰 분노를 경험했다. 그런데 총검으로 애국 시민을 학살하고 권좌를 차지한 내란 수괴가 건재한 가운데 준엄한 사필(史筆)을 두려워하는 불의한 세력은 광주항쟁을 폄하하는 역사 왜곡을 되풀이해왔다. 심지어 내란의 수괴로 확정판결까지 받은 전두환조차 최근의 호화 자서전에서 자신이 광주사태 씻김굿의 제물이라 운운하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에서 이 책이 증보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은 참으로 통렬한 정의의 천둥이 아닐 수 없다.

- 한승헌 (변호사)

 

5·18의 진실을 밝히려는 기억투쟁의 과정에서 이 책은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그 진실은 독자들의 양심을 찔렀고,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책무를 거듭 일깨웠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풍부한 자료와 증언으로 입체화된 이 증보판을 통해, 5·18이 여전히 살아 있는 주제임을 실감한다.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오월ing ] <넘어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전용호 "5.18 왜곡할수록 빛날 책"

 

이 책은 짓밟힐수록 살아났다. 전두환 정권은 출간되자마자 책 2만권을 압수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숨죽여 읽으면서 '지하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 담긴 잔혹한 학살의 진실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87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한때는 비밀스러운 책이었다. 황석영 작가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으나, 집필자는 따로 있었다.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유명 작가의 힘을 빌린 것. 극심한 감시와 억압을 피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황석영 작가는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의 방패막이가 됐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펴내는 걸 승낙했다. 198510월 세상에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 넘어) 이야기다. 이 책은 19805,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뜨거운 항쟁을 기록했다.

 

첫 책이 나온 지 32년 만인 2017, <넘어 넘어>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해 10<넘어 넘어> 전면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 초고를 집필했던 이재의(63)씨가 기록자로 추가됐다. 이씨는 5.18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남대 들불야학 학생들과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했던 전용호(61)씨도 책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8,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인근 카페에서 공동 저자 이재의씨와 전용호씨를 만났다. 또 다른 공동저자인 황석영 작가는 '집필중'이라며 책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두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독재정권의 총칼에 살아남아 <넘어 넘어>를 출간할 때까지의 긴박했던 과정을 전한다.

 

대학생 시민군

1980, 이재의는 전남대 총학생회 '비밀기획팀원'이었다. 여기서 그는 '대학의 소리'라는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했다. 학생회에서 발행하는 성명서 수준의 유인물과 달리 정세를 분석하고 시국을 논하는 소식지였다. 광주항쟁 당시 그는 대학생 시민군이 됐다.

 

522일 아침, 이씨는 녹두서점으로 갔다. 당시 광주지역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날 이씨를 비롯한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는 회의 끝에 전남도청 상황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계엄군이 휩쓸고 간 전남도청은 아수라장이었다.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외부로 유일하게 통화할 수 있는 행정전화였다. 버려진 무전기 예닐곱 개에서도 계엄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실 한 귀퉁이에선 시민군에게 붙잡힌 계엄군이 조사를 받았다.

 

"상황실은 질서가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에 드나드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계엄군의 정보원이나 공작원이 끼여 있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스포츠형의 머리나 단단한 몸매 등 수상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상황실 출입을 통제해야 했다. 총과 수류탄을 들고 상황실 책상 위로 올라가 전남대생이라 밝히며,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고 상황실 출입을 통제하자고 제안했다. 이때부터 증명서를 소지한 사람만 출입하게 됐다."

 

23일 저녁, 이씨는 전남도청을 빠져나가 집으로 갔다. 밤을 꼬박 새운 데다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던 중 집에서 형과 누나에게 잡혀 강제로 고향 곡성으로 보내졌다.

 

전용호는 전남대 들불야학과 독서토론 동아리 '잔디' 활동을 하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떴다. 이재의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로 만나 '대학의 소리'를 함께 만들었다. 그도 '당연히' 대학생 시민군이 됐다.

 

전씨는 주로 YWCA 건물에 있었다. 당시 청년·학생 홍보본부가 여기에 있었다. 전씨는 가두방송을 이끌면서 항쟁 지도부의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파했다. 홍보차량에 '투사회보'를 싣고 다니며 뿌리기도 했다.

 

'투사회보'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 열사가 이름을 지은 소식지로, 계엄군 학살의 실상과 시민의 저항과 임무 등을 담아낸 유인물이었다.

 

한번은 '전남대 스쿨버스'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어렵게 찾아내기도 했다.

 

"시민들에게 신뢰감을 주려면 '전남대 스쿨버스' 만한 게 없었다. (스쿨버스) 차량 열쇠가 없어 고민하는데, 방직공장에서 일하다가 시민군이 된 김상집이 군대에서 익힌 기술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전남대 스쿨버스를 이끌고 거리를 돌며, 궐기대회 개최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주로 유인물을 뿌리는 역할을 했다. 가두방송을 한 건 여학생이었다."

 

전남대 스쿨버스 타고 거리 홍보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부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전남대학교 버스도 보인다. 1980.5.24 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투사회보". 연합뉴스

 

전씨는 27일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광주재진입작전)' 때 녹두서점으로 피신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뒤 체포돼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전씨는 1980년 말, 감옥에서 나왔다. 이씨는 19818.15특사로 석방됐다.

 

진실을 알리자... 기록을 모으다

"27, YWCA를 빠져나오면서 궐기대회를 주도했던 김태종(당시 전남대 국문학과 4)이 쓴 성명서와 원고 등을 모두 가지고 나왔다. 언젠가 분명히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모아놨던 거였다. <넘어 넘어> 출판에 많은 도움이 됐다." (전용호)

 

"끝까지 도청에 남아 있지 못했던 게 아직도 가슴에 맺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내가 한 일과 5.18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넘어 넘어>를 만들자고 할 때 거절할 수 없었다." (이재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공동저자 전용호, 이재의. 권우성

198410, 누군가 이재의를 찾아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항쟁지도부 외무위원장이었던 정상용이었다. 정씨는 전남대 출신 청년 활동가로 광주항쟁 당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이씨에게 "광주항쟁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이씨는 전남대 경제학과 3학년 복학생이었다.

 

정씨가 이재의를 적임자로 꼽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5.18 이후 수감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다른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 , 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한 데다 수감생활을 하며 5.18 관련자들과 함께 지내 취재가 용이하다는 강점도 있었다.

 

"5.18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광주 사람을 폭도라고 하면서 죽은 사람도 없고 집단 발포도 없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재의)

 

광주항쟁에 참여한 혐의로 투옥됐던 정용화가 자료를 갖다 줬다. 오래전부터 모아둔 거라고 했다. 80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면서부터 자료를 수집했다는데, 항쟁 당시 개인들이 써놓은 목격담과 병원 기록, 재판 기록, 사진 등 사과상자 여섯 박스 정도였다.

 

당시 자료와 기록을 모은 사람은 정용화만이 아니었다. 전남대 출신 조봉훈도 기록을 모았다. 조씨는 1978'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 등 시국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198011월 석방된 후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그해 12, 구치소 복역 중 알게 된 소준섭을 만나 함께 광주항쟁을 기록하자고 제안한다. 소준섭은 5.18 당시 현장에는 없었으나 조씨와 함께 광주 시내 목사와 신부, 신도, 구속자 가족 등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기록했다.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정리해 1982'광주백서'란 이름으로 42면짜리 팸플릿 약 120부를 인쇄해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5월 항쟁 기록 "넘어넘어" 초고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씨가 8일 오후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수장고에 보관된 "넘어넘어" 초고를 살펴보고 있다. 권우성

 

여러 갈래로 진행되던 광주항쟁 기록 작업은 198411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이하 전청협)가 출범하면서 하나로 모아졌다. 전청협 초대의장을 정상용, 부회장을 정용화가 맡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5.18 진상규명'이 선택된 이유도 크다. 정상용은 이재의에게 집필을 제안한 사람이고, 정용화는 5.18민주화운동 자료를 수집한 사람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넘어 넘어> 출판 작업이 시작됐다.

 

신혼집에서 담요 뒤집어쓰고 타이핑

광주항쟁 기록을 제안 받은 이재의는 고교 동창이었던 조양훈을 찾아가 <넘어 넘어> 집필 작업을 제안했다. 조양훈은 전남대 독서토론 동아리 '루사(RUSA)'에서 함께 활동한, 이씨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다. 조양훈은 집필과 함께 책에 삽입된 항쟁 지도를 만들었다.

 

이재의와 조양훈의 신혼집에 집필 작업장이 마련됐다. 두 사람은 정용화가 모아온 자료부터 분류했다. 항쟁 당시 주요 사건별로 핵심 인물 40여명을 취재 대상으로 선정하고 증언을 기록했다.

 

"198412, 결혼을 앞두고 정상용에게 제안을 받았다. 고민이 됐다. 아내는 세무 공무원으로 운동권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라고 했다. 조양훈도 막 결혼했을 때여서 번갈아 옮겨가면서 밤새 글을 썼다. 혹시 타이핑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창문을 담요로 가렸다. 그것도 모자라 담요를 뒤집어쓰고 타자기로 원고를 썼다." (이재의)

 

전용호는 5.18민주화운동 직후 구속됐다가 1980년 말 감옥에서 나왔다. 광주지역의 문화예술계 상임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넘어 넘어>의 자료수집 등에 힘을 보탰다. 집필 작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궂은일을 도맡았다.

 

원고가 서서히 완성되어 가자 '명목상 집필자'로 나서줄 사람을 고민하게 됐다. 순간 전용호의 머리에 떠오른 건 황석영 작가였다. 전씨는 1982년 황석영 작가가 노래극 <넋풀이>를 만들 때 인연을 맺었다. <넋풀이>에 나오는 노래 중 하나가 광주항쟁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황 작가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19854월 중순, 서울에서 회의가 열렸다. 황석영 작가가 이 자리에 참석해 집필 책임을 맡겠다고 수락했다. 얼마 뒤, 초고를 갖고 황석영 작가 집으로 갔다. 항쟁 진행과정은 많은 참여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면밀하게 검증된 내용이라 가급적 고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다. , 사찰 당국이 출판과 동시에 들이닥칠 것을 고려해 황 작가가 원고를 다시 옮겨 쓰기로 약속했다. 그는 흔쾌하게 동의했다." (전용호)

 

황석영 작가는 초고를 받아 여관에서 한 달 반 이상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완성했다. 머리말과 서문에 해당하는 '역량의 성숙' 부분은 직접 썼다. 문병란 시인의 시 '부활의 노래'에서 제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따왔다. 1985520, 이렇게 <넘어 넘어>가 세상에 나왔다. 전두환 정권은 2만권을 통째로 압수했지만, 겉표지에 아무런 디자인도 없는 <넘어 넘어>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5월 항쟁" 사진전 둘러본 "넘어넘어" 저자들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공동저자 전용호, 이재의씨가 지난 8일 옛 전남도청앞에 전시된 5월 항쟁 당시 사진들을 둘러보고 있다. 권우성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두환 회고록>

2014, 황석영 작가와 이재의, 전용호가 19년 만에 다시 뭉쳤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일베'나 극우 선동가 집단이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심지어 극우인사 지만원씨는 광주에 북한군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넘어 넘어> 초판 작업에 참여했던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은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고 무너지는 현실 앞에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개정판 간행위원회를 꾸리고 국민성금을 모았다.

 

개정판 집필 작업은 이재의와 전용호가 나눠 맡았다. 전씨는 증언자 1472명의 증언을 읽고 사건을 구성했고, 이씨는 계엄군 자료와 1988년 국회청문회 자료,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회의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등을 분석해 원고를 집필했다.

 

201710, 황석영과 이재의, 전용호 세 사람의 이름을 내걸고 <넘어 넘어> 개정판이 출판됐다. 32년 전, 군사정권 때와 달리 집필진을 감출 이유도 없어 공개하기로 했다. 개정판은 지금까지 약 2만부가 팔리며, 꾸준히 읽히고 있다.

 

"5.18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5.18과 관련해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우리(5.18민주화운동에 직간접 참여한 자들)가 보고 경험한 대로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 집필했다. <넘어 넘어>는 광주의 진실이다." (이재의)

 

"<넘어 넘어>5.18의 진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책이다. 5.18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와 광주전남 외부 지역 국민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5.18 당시 사라진 75명 행불자들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진상규명을 반드시 해야 한다." (전용호)



5월 항쟁 기록 "넘어넘어" 초고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씨가 8일 오후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수장고에 보관된 "넘어넘어" 초고를 살펴보고 있다. 권우성

 

5월 항쟁 기록 "넘어넘어" 초고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씨가 8일 오후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수장고에 보관된 "넘어넘어" 초고를 살펴보고 있다. 권우성

 

광주 금남로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는 이재의가 집필한 <넘어 넘어>의 초고가 보관돼 있다. 이씨는 초고를 보여주며 취재진에게 말했다.

 

"<넘어 넘어>는 지금보다 더 엄혹한 시대에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 5.18을 왜곡하고 혐오하는 발언들이 늘어날수록 <넘어 넘어>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지난 2017년 말, 황석영과 이재의-전용호는 <넘어 넘어> 개정판을 낸 공로로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같은 해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 1(혼돈의 시대)5.18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출판 및 판매금지 된 상태다./ 오마이뉴스 글: 정대희(kaos80

 

너와 나의 5.18 다시 읽는 5.18 교과서 저자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5.18기념재단|오월의봄 |2019.03

  

목차 

서문

5·18, 우리 역사의 위대한 질문 _은우근

 

1. 5·18, 배경과 진행

15·18, 왜 일어났을까? _김정인

1. 긴 독재, 불굴의 민주화투쟁 | 2. 반공의 이름으로 국가폭력에 희생되다 | 3. 서울에서 광주로, 민주화의 꿈이 살아나다

 

25·18민주화운동, 열흘간의 드라마 _정문영

1. 518일부터 521일까지 | 2. 522일부터 525일까지 | 3. 526일부터 527일까지

 

3장 진실을 향한 투쟁 _정문영

1. 19805월 광주항쟁에서 19876월 국민항쟁에 이르는 길 | 2. 19876월항쟁과 광주청문회 | 3. 특별법 제정과 책임자 처벌 | 4. 에필로그: 국제적인 운동으로서 5월운동

 

2. 5·18 이후의 5·18

4장 상처 입은 자, 그들의 부서진 삶 _김정인

1. 살았으되, 죽은 삶들 | 2. 여성, 무너지고 부서진 삶 | 3. 치유 가능한 삶을 위하여

 

55·18, 진실과 거짓말: 그들은 왜 5·18을 왜곡·조작하는가? _은우근

1. 5·18 왜곡의 영향 | 2. 5·18 왜곡의 양상 | 3. 5·18 진압 이후 왜곡의 추이와 배경 | 4. 왜곡에 어떻게 대처할까?

 

6모두의 5·18’로 가는 길 _김정인

1. 공감 없는 비극, 5·18 | 2. 세계인이 공감하는 역사, 홀로코스트 | 3. 5·18, 공감을 위한 문화적 여정 | 4. 5·18, 아직도 머나먼 공감의 길

 

3. 해석과 실천

75·18 학살의 애도와 민주주의 _김정한

1. 오월의 바람 | 2. 추모투쟁과 사회적 애도 | 3. 5공화국의 공포정치와 5·18의 민중운동 | 4. 5·18의 학살자와 살아남은 사람들

 

8장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봉기하는가? _김정한

1. 4·195·18 | 2. 5·18의 세계적 보편성 | 3. 국경을 횡단하는 봉기의 계승 | 4. 5·18의 세계 유산

 

9장 저항하는 사람들의 윤리 _김정한

1. 광주 시민이 국군에게 보낸 편지 | 2. 왜 총을 들었는가? | 3. 5·18의 반폭력 정치 | 4. 저항의 윤리

 

105·18 공동체: 부끄러운 자들을 위한 연대 _은우근

1. 부끄러움의 의미 | 2. 5·18 공동체와 집단 정서의 형성 | 3. 부끄러움의 힘 | 4.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4부 기억, 증언, 예술

11장 공감과 연대: “내 속의 이 큰 슬픔을 누구에게 말할까?” _한순미

1. 분노와 저항의 물결 | 2.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기억 | 3. 말을 잃어버린 도시: 소문과 유언비어 | 4. 산 자여 따르라 | 5. 평범한 위대함의 순간들

 

12. 물음과 선택: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_한순미

1. 어쩌다 총을 들게 되었을까? | 2. 명령의 꼭두각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 3.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똑같이 아픈 사람들 | 4. 부끄러움과 죄의식 | 5. 발언과 실천: 너는 결코 죽지 않았다

 

13.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_한순미

1.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 2. 유령들의 증언 | 3. 인간이란 무엇인가? | 4.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 | 5. 또 다른 질문의 시작: May, 18th

 

출판사 서평

왜 우리는 지금, 다시 5.18을 말해야 하는가

: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 극우 세력은 4월혁명, 6월항쟁 등 여타의 민주화운동보다 유독 5.18에 대해서만 진실을 왜곡?폄훼하는 것일까? 5.18이 일어난 지 39년째가 되어가는데도 왜 그들은 망언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너와 나의 5.18>의 필자들은 단호히 말한다. 그들이 그토록 5.18을 왜곡하는 이유는 아직도 5.18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시 5.18을 말해야 하고, ‘너와 나의 5.18’, ‘우리 모두의 5.18’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또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국가폭력이 계속되는 한 5.18은 결코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고 말한다.

 

<너와 나의 5.18>5.18기념재단이 2016년부터 준비해 만든 일반인과 대학생을 위한 교양서이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바쳐 부당한 권력과 싸우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너와 나의 5.18> 필자들은 그 질문들이 무엇이며,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5.18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진실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5.18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그 정신이 인권과 평화의 인류 보편적 가치로 승화, 발전되고 있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왜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지도 파헤친다.

 

이 책은 4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5.18, 배경과 진행>에서는 5.18 이전의 역사와 배경, 5.18의 전개 과정, 5.18 이후 6월항쟁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2<5.18 이후의 5.18>에서는 5.18이 남긴 상처와 그 치유의 문제, 5.18 진실의 왜곡과 조작, 5.18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서술했다. 3<해석과 실천>에서는 5.18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그리고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에서의 변혁운동을 5.18과 비교했다. 더불어 5.18의 주체인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 윤리, 5.18 공동체의 특징과 의미도 살펴보았다. 4<기억, 증언, 예술>에서는 5.18이 문화예술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서술했다.

 

“5?18은 민중이 생명을 바쳐 쓴 서사시이다. 그 주제는 국가와 인간이다. 5월 민중은 목숨을 바쳐 부당한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그 질문들이 무엇이며 지금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려 했다. 5.18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민중이 겪은 역사적 고통과 좌절, 그리고 극복에 대한 기록이다. 국가의 모습이 5월 민중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생명공동체의 빛나는 성취와 일치하지 않는 한, 5.18은 계속되는 현재이다.”

 

5.18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

 

5.18은 왜,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을까? 19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곧 전두환을 비롯한 군사반란 세력들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섰다. 서울역에 10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민주화의 일정을 방해하려는 신군부에게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신중론이 득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는 중단되었다.

 

광주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가 일어났다. 514일부터 16일까지 계엄령 해제등을 요구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렸다. 그리고 518, 완전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남대 학생들을 통제하면서 5.18은 시작된다. 공수부대원들은 학교 출입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던 학생들을 진압봉을 휘두르며 마구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은 이전에 익숙히 봐오던 시위 진압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했다. 계엄군들은 금남로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가톨릭 사제의 입에서조차 “M16 소총이 내 손에 있었으면 나는 전원을 사살했을 것이라는 절규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계엄군들의 상식 밖의 만행이 벌어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대학생들보다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 주변 가게의 종업원들, 노동자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 고등학생들이 더 많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5.18은 순수한 민주화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5.18에 가담한 사람들은 북한군불순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시민군을 만들고, 527일 마지막 도청이 함락되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19805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리며 함께 터져나온 총탄으로 평범한 이웃들이 죽어갔다. 애국가를 합창하며 태극기를 흔들던 국민을 국가가 죽인 것이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 민우 역시 택시 운전을 하며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를 뒷바라지하는 낙에 살았으나 이때 동생을 잃고 만다.”

 

5.18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1968년 혁명에서도 보였던 현상이다. “흔히 대중들이 혁명적 이념을 갖고 봉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획득한 후에 봉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 평등, 인권 등의 보편적 이상(ideal)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하고자 할 때 봉기가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대중들의 힘이 조직될 때 혁명으로 나아간다.”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는가

: 총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귀중한 생존 도구

 

이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거리 위로 격정에 못 이겨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뛰어나간 청년들에게도, 부상당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조준 사격이 가해졌다. 공수부대가 물러감으로써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시민들의 소박한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이제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흔히 역사 왜곡 세력들은 5.18폭동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총을 들고 군대에 대항해 싸웠으니 폭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

 

이 책의 9<저항하는 사람들의 윤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민을 적으로 여겼지만, 시민들은 군인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발표된 유인물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에도 우리들은 국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되어 있다. 시민들이 식사를 하지 못한 군인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준 이유도 군인을 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 시민군이 발표한 성명서에 총을 든 이유가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발포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총을 드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시민들에게 총은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자신과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무기로서 귀중한 생존 도구였다.

 

이 글은 시민들의 행위를 반폭력anti-violence’으로 명명하면서 시민들이 무장투쟁을 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무장투쟁이 곧 반폭력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견지하려고 했던 윤리적 관점과 태도를 가리킨다. 대항폭력이 두 적대 세력 중 어느 한쪽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절멸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면, 반폭력은 저항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절멸적 폭력 사용에는 반대한다. 또한 비폭력이 모든 폭력 사용에 반대하는 것과는 달리, 공수부대와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과 같은 극단적 폭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방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더 나아가 반폭력 정치는 경찰과 군대의 절멸이나 물리적 패퇴가 아니라 그 명령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즉 시민들은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것이었다. 당시 배포된 투사회보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라는 행동 강령이 적시되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5.18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주화의 과제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5.18 37주년 기념사)

 

문재인 대통령은 5.18의 진실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이 자신을 성장시켜준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10<5.18 공동체>부끄러움이라는 감정으로 5.18 공동체를 재해석하고 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생명을 걸고 싸웠고, 일시적으로 승리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이 5.18과 관련된 수많은 증언과 고백에서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정서는 비단 광주 시민에게뿐만 아니라 광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의 감정이었고, 그 부끄러움은 부채의식으로,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공유되어 한국 사회를 움직였다. 5.181980년대에 걸쳐 지금까지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의 죄의식의 원천이자 도덕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다.

 

3<진실을 향한 투쟁>7<5.18 학살의 애도와 민주주의>5.18 이후의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5.18을 하나의 금기로 만들었다. 5.18을 발설하지 못하게 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려는, 민주화를 이루려는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집권한 군부 세력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시민 학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려는 과거사 청산 운동으로, 5.18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문화투쟁으로, 또 통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5.18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곧 광주 알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거나 순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광주 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은 19805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주화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6월항쟁은 5.18의 바람에 대한 7년 만의 응답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비로소 시민들이 봉기한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사회운동의 힘으로 성취되었다. 이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기원을 이루는 것이 5.18광주항쟁이다.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내란 범죄를 자행한 군부의 학살에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고독한 저항은 6월항쟁에서 전국적인 응답을 얻었다.”

 

그들은 왜 5.18을 왜곡하는가

: 진실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그다음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괴벨스, 나치의 선전장관)

5<5.18, 진실과 거짓말>은 그동안 군사반란 세력과 극우 세력이 어떻게 5.18을 왜곡해왔는지, 그 양상과 배경을 밝히고 어떻게 왜곡에 대처할지를 밝히고 있다. 5.18이 일어난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들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거짓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되새겨봐야 한다.

 

군사반란 세력은 5.18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한 남침설을 날조하여 국내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독재정권들이 늘 써오던 방식이었다. 이 여론 조작의 목표는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남침설은 곧 허위로 밝혀졌고, 군사반란 세력은 5.18 당시와 그 이후에 더 이상 써먹지 않는다.

 

5.18 당시 군사반란 세력은 지역주의, 김대중 추종 세력, 간첩 등의 유언비어로 진실을 왜곡했다. 군사반란 세력의 5.18 왜곡 프레임은 무엇보다 먼저 공수부대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시위 진압 현장에 출동한 공수부대원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시위대를 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에 세뇌당한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또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국민에게 전파했다. 언론은 광주?전남 이외 지역 국민들이 5.18을 간첩, 공산분자, 김대중 추종 불순 세력들의 지역주의적 선동이 초래한 폭동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저항하는 5월 민중을 격리, 차단, 고립시켰다. 군사반란 세력과 언론은 5.18의 진실을 왜곡하여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프레임에 5.18을 가둬버렸다. 오랫동안 5월 민중과 광주는 한국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이 프레임은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기 정부의 지원을 받은 뉴라이트 계열 극우 세력이 가담하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몇몇 보수언론들도 이를 조장하고 있다. TV조선과 채널A는 이들이 주장한 “5.18 광주사태 자체가 김정일, 김일성에 드리는 선물이라는 내용을 여러 차례 방송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이 프레임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진실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발포 책임자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전두환 등 가해자는 반성도 하지 않았다. 가해 주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과 17년 형을 선고받은 노태우가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1222일 김영삼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합의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국가가 책임지고 명백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

 

모두의 5.18’로 가는 길은 있을까

: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할 수 있을 때

 

5.18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모두의 기억이 되지 못했을까? 5.18의 희생 위에 6월항쟁이 일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후 국가가 나서 5.18의 진상을 규명하고 주동자를 처벌했으며 보상과 기념이 이루어졌는데도, 5.18은 광주만의 기억과 기념으로 축소되어가는 것일까? “국가가 나서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기념할수록 5.18을 향한 국민의 관심은 점점 더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6<‘모두의 5.18’로 가는 길>은 어떻게 세계인이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공감해갔는지를 살펴보면서 광주의 5.18’이 어떻게 하면 모두의 5.18’이 될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홀로코스트가 세계인이 공감하는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동일시, 즉 공감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소설, , 만화,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이 큰 역할을 했다.

 

홀로코스트가 세계인이 받아들이는 역사가 되었듯이, 5.18도 모두의 5.18일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5.181980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그렇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의 감성으로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5.18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동시에 모두의 5.18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5.18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나 자신이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공감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우리 모두 차마 그들을 보고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었던 영화 <택시 운전사>의 김사복과 함께 눈물 흘리며 그들과 함께하고자 할 때 5.18은 우리 모두의 5.18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모두의 5.18’이 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 이 건재하다.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위해 5.18을 악용하는 세력들도 있다.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민중들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한 아직 5.18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속으로  

5월 민중은 목숨을 바쳐 부당한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그 질문들이 무엇이며 지금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려 했다. 5.18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민중이 겪은 역사적 고통과 좌절, 그리고 극복에 대한 기록이다. 국가의 모습이 5월 민중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생명 공동체의 빛나는 성취와 일치하지 않는 한, 5.18은 계속되는 현재이다. 5.18의 진실에 대한 왜곡과 폄훼는 5.18이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 p.14

 

3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넘어 들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옥상부터 훑어 내려왔다.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항복하라고 해도 나오지 않으면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 p.114

 

모든 역사 왜곡 세력의 주장은 그 자체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왜곡.폄훼의 배경과 패턴을 따져보고 추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언뜻 보면 왜곡 세력이 같은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왜곡의 강조점과 패턴, 방식은 달랐다. 이를 고찰함으로써 그들의 의도와 계획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감추려 한 것에 5.18의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이다. --- p.197

 

4월혁명과 6월항쟁 등 여타 민주화운동과 달리 극우 기득권 세력이 유난히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왜곡?폄훼하는 이유는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포 책임자와 여러 비밀공작의 진상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자위권 발동을 운운하거나 북한 특수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국가가 책임지고 명백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 --- p.230

 

5?18이 일어난 지 30년이 훌쩍 흘렀건만,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5.18은 끝나지 않았다고 절규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외면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5.18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를 불편한 진실로 여긴다. --- p.238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탄생한 제5공화국은 전국의 시민들이 봉기한 19876월항쟁으로 비로소 무너졌다. 6월항쟁은 5.18광주항쟁의 바람에 대한 7년 만의 응답이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꿈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 같았다. 19876월 서울 시청 광장의 집회는 19805월 광주 도청 광장의 시민궐기대회를 재현했다. --- p.267

 

5?18에서 시민군이 꾸었던 꿈, 그리고 5?18 이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열망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고,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5?18광주항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다. --- p.293

 

과연 5.18은 국군과 시민군의 전쟁이었을까? 오히려 광주 시민을 적으로 상정하고 전쟁을 벌이는 군대에 맞서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왜 같은 국민인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냐고, 왜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하느냐고 비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반()전쟁이 아닐까? 총을 들고 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군인들은 적이 아니었다. 물론 총을 들고 무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된 자구 행위였다.5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 p.331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5월 민중에게 빚을 졌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년 5월 수만 명이 광주를 찾았으며, 매년 수십만 명이 5.18을 기억하기 위해 전국에서 투쟁했다. 민주화운동은 한층 치열해졌고, 과감해졌다. 5.181987년 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밑불이자 거름으로 작용했다.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간직하고 5.18이 계속되고 있다고 외치는 민중 안에서 5월 민중의 항쟁은 언제나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였다. 따라서 5.18은 미완의 혁명이다. --- p.372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 증언할 수 있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며, 대체 증언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일어난 일을 죽은 자를 대신해 말해야 한다. 증언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끔찍한 기억들은 쉽게 말이 되지 못한다. 증언은 당사자들과 목격자들을 포함해 살아남은 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이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설령 무엇인가를 말한다 해도 말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 말들은 증언이 될 수 없다. --- p.463

 

 

녹두서점의 오월 저자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한겨레출판사 |2019.04

저자 : 김상윤 전남대 학생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다 제적당한다. 이후 독서모임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금서로 지정된 인문사회과학서를 학생과 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1977년 계림동에 녹두서점을 열었다. 현재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을 맡고 있다.

 

저자 : 정현애 1977년 친구를 따라 녹두서점을 처음 찾았다가 그 인연으로 녹두서점 주인과 결혼했다. 19805월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실질적으로 녹두서점의 살림을 책임졌다. 현재 오월 어머니집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자 : 김상집 김상윤의 남동생. 33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198051일 제대해 방직공장에 취직한다. 그러나 곧 항쟁이 벌어지며 시민군에 뛰어든다. 현재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지부장을 맡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1부 녹두서점의 탄생

1장 금서를 파는 책방 (김상윤)

19791027, 대한민국의 두 얼굴 | 수상한 서점의 탄생 | 무모한 청혼을 받아준 여자 | 전남도청 근처로 서점을 이전하다

 

2부 항쟁 속으로

1장 감옥에서 (김상윤)

유신체제의 붕괴, 술렁이는 대학가 | 전남대 총학생회가 부활하다 | 학내 민주화의 요구가 교내를 휩쓸다 | 교수와 학생들이 5·16화형식을 열다 |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연행되고 있어!” |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다 | 505보안대 지하실의 비명소리

 

2장 서점에서 (정현애)

남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1980517) |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다(1980518일 자정) | 상황실이 된 녹두서점(1980518일 새벽) |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다(1980518일 낮) | ??광주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1980519일 오전) | 도망가야 하는가, 함께해야 하는가(1980519일 오후) | 왜 진실을 방송하지 않는가(1980520) | “군인들이 총을 쏜다!”(1980521) | 우리에게도 지도부가 필요하다(1980522) | 시민궐기대회의 시작, 하나 된 광주(1980523) |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1980524) | 어린 시민군의 양말을 사 주다(1980525) |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1980526) | “시민 여러분, 우리와 함께해 주십시오!”(1980527일 새벽)

 

3장 거리에서 (김상집)

군인에서 사회인이 되다 (198051) | 돌아가는 시국이 심상치 않다 (198055~17) | 진압군 속에서 친구를 발견하다 (1980518일 오전) | 총검에 찔린 남자가 눈앞에서 쓰러지다 (1980518일 오후)| 호신용 무기를 들자 (1980519) |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다 (1980520일 오전) | 아버지의 눈물을 뿌리치다 (1980520일 오후) | 불타오른 MBC 방송국 (1980520일 오후) | 이제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1980521) | 시민들이 총을 들다 (1980521) | 전남대 스쿨버스로 길거리 방송을 시작하다 (1980522일 오전) |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다 (1980522일 오후) | 총기 회수를 중지시켜야 한다 (1980523) | “8일만 버티면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이다” (1980524) | 대학생들을 시민군으로 조직하다 (1980525) |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1980526) | 형수가 내 손목을 잡아끌다 (1980527일 새벽)

 

3부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장 살아남은 자 1: 내란 주동자 (김상윤)

온 세상이 깜깜했다 | 상무대 영창에서 초기 조사과정 | 정동년이 자해하다 | 김영철이 자해하다 | 윤상원이 남긴 마지막 사진 | 왜 광주에 빨간색을 칠하려는가 | 아내는 중죄인, 나는 포고령 위반 | 학생회 간부들의 자수 | “자식아, 그건 와꾸에 없어!” |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 |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죽음 | 죽음의 공포 앞에 기도를 올리다 | “정동년 사형! 김상윤 20!” | 석방 그 이후

 

2장 살아남은 자 2: 폭도 (정현애)

체포되다 | 이곳은 지옥일까 | 빨갱이 공포증 | 석방과 복직 | 항쟁은 내란이 아니다 | “선물을 일본에 보내지 마세요” | 미국의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 | 전두환이 탄 차 앞에 엎드리다 |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다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탄생

 

3장 살아남은 자 3: 극렬분자 (김상집)

초주검 | 육법 위에 무법이다 | 윤상원의 죽음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다 | 큰형을 만나다 | 집단 단식으로 요구를 관철하다 | 구두닦이 박래풍과 부잣집 아들 안통일 | “누가 내 아들놈 손에 총을 쥐어주었냐” | 김영철의 기도를 듣다 | 5월 항쟁을 기록하라 | 들불야학은 죽지 않았다

 

에필로그

해제_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온몸으로 겪었던 세 사람

5·18항쟁 상황일지

 

출판사 서평

“80년 오월의 거리, 그곳에 서점이 있었다

5·18민중항쟁의 산실, 녹두서점

 

광주에 가면, 30여 곳의 5·18사적지가 있다. 10일 동안 이어진 항쟁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이다. 그중에서도 항쟁 최후의 거점이었던 전남도청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바로 녹두서점이다. 이 서점은 헌책방으로 시작하여 1981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기까지 불과 4년 남짓 운영됐다. 하지만 15평의 조그마한 책방은 5·18항쟁 시기 광주의 고립된 시민들에게 수많은 대자보와 전단을 만들며 정보를 전달해준 상황실이자,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간이식당이었고, 윤상원을 비롯한 지도부가 항쟁 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의를 이어간 회의실이었다.

 

이 책은 당시 녹두서점을 운영한 서점 가족 눈으로 본 1980년 오월의 이야기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녹두서점은 광주 유일의 인문사회과학서점으로 당시 비판적 사상에 목말라했던 시민과 학생들,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꾸길 원했던 야학 노동자들, 반독재를 외치던 대학과 시민사회의 활동가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정치적 생각을 이야기하고 지적 무기를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다. 서점은 당시 금서로 지정된 인문사회과학서적을 제공하며 대학가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지적 수원지 역할을 했다. 유신정권 반대를 외치다 전남대에서 제적당한 뒤 녹두서점을 차린 김상윤, 남편을 도와 서점 살림을 도맡은 중학교 교사 정현애, 그리고 805, 33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상윤의 남동생 김상집이 1980년 오월 광주를 이곳에 불러낸다.

 

 

세 가족의 시선으로 보는 5·18항쟁의 전 과정

감옥, 서점, 거리에서 마주한 10일간의 처절한 사투

 

이 책은 녹두서점의 세 가족이 각각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경험한 5·18항쟁의 이야기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민주화의 봄을 쿠데타로 짓밟으려는 전두환 신군부에게 녹두서점은 광주 진압을 위해 미리 손을 써두어야 하는 곳 중 하나였다. 517일 자정이 다된 시간, 총을 들고 서점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대공과 형사들에 의해 서점주인 김상윤은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간다. 컴컴한 지하실 복도,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낭자한 곳에서 그의 5·18은 시작된다.

 

남편이 지프차에 실려 어두운 밤거리로 사라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홀로 서점에 남게 된 정현애는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처럼 갑작스레 남편이 구속된 부인들, 녹두서점을 방문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 광주 내 민주인사들에게 남편의 검거 소식과 당시 상황을 공유하고 시간대별로 상황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518일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녹두서점은 정현애를 중심으로 어느새 광주 전역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학살 소식은 물론 전국 정보가 모이는 상황실로 변모하게 된다.

 

군 제대 후 매일 밤 야학 노동자, 청년들과 함께 시국토론을 벌이던 김상집은 17일 새벽, 들불야학 강학인 윤상원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윤상원과 함께 녹두서점에 달려간 그는 서점에 모인 청년 학생들과 거리로 나선다. 그곳에서 불과 보름 전 자신이 속해 있던 부대가 운용하는 500MD 헬리콥터가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시민들을 위협하고, 눈앞에서는 계엄군이 착검한 총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살육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녹두서점의 세 가족은 감옥(김상윤), 서점(정현애), 거리(김상집)라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자신들이 겪은 5·18항쟁 열흘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항쟁의 전 과정과 에피소드, 그 속에 담긴 항쟁지도부와 기층민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평범한 시민은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넘어 항쟁의 주역이 되었나

일상의 고귀함을 지키려던 사람들의 목소리

 

이 책은 평범했던 시민들이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항쟁에 나서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기습적인 검거작전에 의해 항쟁을 지도할 인사들이 대부분 검거되거나 도피한 상황이었다. 녹두서점에 모인 사람들이 가까스로 지도부 역할을 대신하고는 있었지만, 521일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대거 투입되고 시민에게 집단발포 했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이들도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피신을 결정한다. 그런데 정현애와 김상집이 피신하는 도중 목격한 것은 투쟁을 외치며 도청 쪽으로 향하는 총을 든 시민군들이었다. 운동권들의 예상을 뒤엎고 시민들이 흩어지지 않고 저항을 결의한 것이다. 책 곳곳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생필품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매점매석이 혼란을 가중시킬 것을 경계하며 판매량을 조절하는 상인들, 부패하는 시신의 악취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죽은 자들을 돌보는 사람들, 최루탄으로 고통받는 시위대를 위해 대야에 물을 길어오는 유흥업소 여성들, 학생들을 향한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참지 못하고 항의하는 노인들, 계엄군의 구타에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었는데도 시민들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자랑스럽게 떠들던 열네 살 구두 수선공 등 항쟁 속 시민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한다.

 

이 책에는 세 사람이 항쟁의 여러 변곡점마다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뻣뻣이 서 있는 전경 사이로 자신의 옛 친구를 발견한 순간의 씁쓸함, 바로 옆 사람이 계엄군의 총검에 찔려 쓰러질 때 느꼈던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공포, 죽은 자의 관 옆에서도 조잘거리던 생기 넘치는 어린 학생들을 향한 연민과 걱정,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과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느꼈던 따스함. 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항쟁에 뛰어든 사람들이 철두철미한 전사가 아니라 빨갱이, 폭도, 극렬분자라는 낙인과 무차별 폭력에 맞서 그저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키려 한 존재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5·18항쟁을 잔혹한 계엄군의 진압장면과 박제화된 사건 기록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월의 거리에 서 있던 시민들이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서술하며 일상의 고귀함을 지키려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부활시킨다.

 

우리의 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간 또 다른 항쟁

 

5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지키던 마지막 시민군이 계엄군의 총탄에 최후 진압당하고 10일간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 항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미 감옥에 있던 김상윤을 포함해 정현애와 김상집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상무대로 끌려온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항쟁을 내란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 이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며 거짓 진술을 요구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빨갱이와 폭도로 낙인찍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 고문으로 정신이상에 시달리는 동료들과 항쟁 과정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 끝나지 않는 구타와 비인간적 대우로 인한 수치심과 싸우고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구속자 가족의 노력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항쟁이 내란 사건으로 조작되는 와중에 내란주동자 혐의에서 벗어난 정현애는 풀려난 뒤 곧바로 녹두서점으로 돌아와 나머지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석방운동을 진행한다. “조작된 내란죄 누명을 벗겨내는 일이 광주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일”(274)임을 자각한 구속자 가족들은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며 항쟁은 내란이 아님을 증언해줄 것을 요청한다.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광주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따지기도 하고, 삼엄한 경비를 뚫고 명동성당에 들어가 단식농성을 진행하며 당시 침묵과 왜곡으로 일관하던 언론을 우회해 세상에 내란 조작을 폭로하고자 했다. 의기양양하게 광주를 방문한 전두환이 탄 차 위에 엎드린 채 경호원들이 눈앞에서 권총을 들이미는 와중에도 구속자들을 살려내라고 외치기도 했다. 5·18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간 또 다른 항쟁의 이야기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생생히 담겨 있다.

 

매년 5월이 오면 광주 시민들은 지독한 ‘5월 앓이를 한다. 광주트라우마센터가 2017년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약 72퍼센트가 ‘5월이 되면 무언가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토로했다. 39년 전 겪은 분노, 고립, 낙인, 폭력은 여전히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힌다. 이 책을 쓴 저자들 또한 5월이 되면 당시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온몸에 발진이 돋고,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제는 국가공식기념일이 된 5.18기념식에도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항쟁 최후의 날, 그 애절한 방송을 듣고서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가지 못했던 많은 광주시민은 여전히 마음에 큰 병을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39년간의 침묵을 깨고 이 책을 집필한 이유다.

 

우리 가족은 일종의 의무감으로 2012년부터 마음에 담아 둔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5·18항쟁에 대한 폄훼가 도를 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상황이 두 가지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들을 현재까지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박정희 군부독재부터 이어져 온 지역 모순과 차별을 끈질기게 부추기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기록을 쓰게 만들었다.”(6)

 


 

책속으로

 

여기는 광주입니다. 저는 민청학련 관련자로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질문할 테니 대답만 해주세요.”

저는 잘 모르는데.” 아주 어눌한 목소리였다.

이화여대에서 대학교 학생회장들이 모두 잡혀갔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저는 잘 모르는데, 뭐 그런 말들을 하는 거 같아요.”

혹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지 않았나요?”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 비슷하게 하긴 하던데.”

모든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긴박한 상황을 알려줘야 할 텐데, 전화가 도청되고 있어서 어눌하게 알려주는 것이 분명했다. --- p.43

 

형님, 군인들이 총을 마구 쏩니다!”

곁에 앉은 윤태원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낮에 수만 명에 달하는 맨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운전대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서너 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 뒤, 덤프트럭의 적재함이 도청 쪽을 향하게 차를 돌렸다. 트럭 안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도로에 있던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총소리가 멈췄다.

이때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그러나 일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죽었거나, 죽지는 않았어도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어선 사람들은 길거리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외쳐댔다.

여기 사람이, 총 맞았다!”

이곳저곳에서 총 맞았다! 총 맞았다!” 하는 소리가 금남로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p.172

 

식사를 준비하던 동생 정현순이 쌀이 떨어졌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쌀가게로 갔다.

쌀 다섯 되만 주세요.”

그렇게 많이요? 못줍니다.” 깜짝 놀라서 주인을 쳐다보았다.

나누어 먹어야지요.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사람은 못 가져가요.”

!”

시민들은 현재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생필품이 떨어지면 혼란이 오고, 그것이 저들이 바라는 것임을 말이다. --- p.105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책방, 방 안, 뒷마당, 뒷방 등에서 각자 알아서 자기 일을 했다. 구석에서 궐기문을 작성하고 있는 사람들, 검은 리본을 만드는 사람들, 허수아비 만드는 사람들, 투사회보를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 무언가 작성한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서점을 꽉 채웠다. 게다가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홍보하던 사람들이 들이닥치기도 했고, 한쪽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뿐인가. 일을 돕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니,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원래 서점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밥만 해서 젓갈을 넣거나 소금만 넣은 주먹밥을 만들어서 나누어 주었는데, 그마저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 p.120

 

잠시 후 기자회견을 끝내고 윤상원 형이 나타났다. 그는 시민군 앞에서 우리의 의지를 밝혔다.

방금 외신 기자회견을 끝내고 왔다.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 전두환 살인마가 우리 부모형제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있고, 오늘도 공수들이 암매장한 시신들을 찾아왔다. 소식을 모르는 행방불명자들이 이미 수천 명이 넘는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다 비통하게 숨진 열사들의 숭고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 광주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군이 되고자 여기 모인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우리는 전두환 살인마가 즉각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일정에 따라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외신기자들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앞으로 3일만 더 버티면 전두환은 물러날 것이라고 하더라. 민주정부가 수립될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자.”

상원이 형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가 연설 말미에 물었다.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시민군 모두 우렁찬 목소리로 !” 하고 대답했다. --- pp.207~208

 

살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녹두서점에 널려 있는 총과 윤상원이 맡긴 문건들이 생각났다. ‘이것들이 계엄당국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 YWCA가 공격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청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있어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을 것이다.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떤 대응을 할지 알 수는 없으나, 혹시 진압이 된다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증거물을 없애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인 생각이었을까? ‘그래 나가자.’ --- p.139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저자 안종철|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01

목차

  

간행사 - 간행위원회

하서 - 윤장현

하서 - 이낙연

하서 - 차명석

서문 - 안종철

 

1.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2. 5·18 때 대학생은 없었고 북한군만 있었다고?

3. 북한 특수군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4. 5·18사진첩, 북한과 공모해 발간했다고?

5. 복면한 사람들은 북한 특수군이었다고?

6. 지하실 폭탄 북한 특수군이 설치했다고?

7. 광주 시위대 600명은 북한군이었다고?

8. 북한 특수부대가 무기고 44곳을 습격했다고?

9. 사망자 70%는 시민군의 카빈총에 맞았다고?

10. 5·18묘지에 북한군 시신 12구가 묻혀 있다고?

11. 광주 시민군이 먼저 발표했다고?

12. 북한 특수군이 계엄군을 매복해 습격했다고?

13. 북한 특수군이 장갑차를 운전했다고?

14. 중형 받은 사람들은 떠돌이 노동자들뿐이었다고?

15. 탈북자 증언집이 남한 자료와 일치한다고?

16. 북한의 역사책은 안기부 자료와 일치한다고?

17. 북한의 역사책 광주의 분노는 어떤 내용인가?

18.넘어넘어가 북한의 작품이라고?

19.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어떤 내용인가?

20. 남한 책과 북한 책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21. 윤기권의 월북을 북한이 배후 조종했다고?

22. 윤상원은 5·18 영웅이 아니라고?

23. 총을 들고 싸운 사람은 북한 특수군이었다고?

24. 지만원의 주장에 대한 조갑제의 반박

결어. 계속되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 왜곡

 

오월 5·18광주민중항쟁 연작 판화 저자 홍성담|단비 |2018.05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하고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 제1, 3회의 한국작가로 선정, 출품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광주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 [새벽], 환경생태 연작그림 [나무물고기], 동아시아의 국가주의에 관한 연작그림 [야스쿠니의 미망], 제주도의 신화 연작그림 [신들의 섬], 예수 수난그림 14[오월의 예수] 연작, 신문사진 분석법에 관한 연작그림 [사진과 사의], 국가폭력에 관한 연작그림 [유신의 초상], 세월호 연작그림 [들숨 날숨] 등이 있다. 국제 엠네스티가 1990세계의 3대 양심수로 선정, 뉴욕의 국제정치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2014년 세계를 뒤흔든 100인의 사상가 THINKER’에 선정했다.

 

저서로는 오월에서 통일로(청년사/1990),해방의 칼꽃(풀빛출판사/1991),사람이 사람을 부른다(夜光社/일본 도쿄/2012), 그림소설 바리(도서출판 삶창/2013),동아시아의 야스쿠니즘(唯學書房/일본 도쿄/2016), 소설 난장(에세이스트/2017), 에세이 화집 불편한 진실에 맞서 길 위에 서다(나비의 활주로/2017), 오월광주 그림동화 운동화 비행기(평화를품은책/2017), 세월오월 그림사건 자료백서세월오월(광주시립미술관 편/2017) 등이 있다.

 

목차

발문_ 따뜻한 총알_ 황석영 006

작가의 말_ 오월판화는 기억투쟁이다! 012

 

오월판화와 시

마각 022 / 횃불행진 024 / 꼭두각시놀음 026 / 친구 028 / 구경꾼들 030

혈루-1 032 / 혈루-2 034 / 혈루-3 036 / 혈루-4 038 / 혈루-5 040

혈루-6 042 / 혈루-7 044 / 암매장 046 / 투사회보-1 048 / 도망 050

형제 052 / 양동전투 054 / 황금동전투 056 / 가자, 도청으로 058 / 투사회보-2 060

깃발 062 / 무기분배 064 / , 나의 생명 066 / 068 / 대자보 070

대동세상-1 072 / 도청궐기대회 074 / 076 / 효천전투 078 / 동생을 위하여 080

갚아야 할 원수 082 / 임산부 084 / 무기회수거부 086 / 헌혈구호 088 / 헌혈행진 090

대동세상-2 092 / 흐르는 물이야 094 / 새벽전투 096 / 잃어버린 시체 098 / 새벽 100

나의 이름은 102 / 무등산하만고해원신시민군 104 / 칼춤 106 / 낫춤 108 / 윤상원 열사 110 시민군 신장도 112 / 사시사철-114 / 사시사철-여름 116 / 사시사철-가을 118 / 깃발춤 120

 

오월판화 일기 122

추천사_ 오키나와 이후 정신세계의 계엄을 넘어서_ 서승 190

 

출판사 서평

오월 판화는 기억 투쟁이다!

화가 홍성담은 역사는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면 언제든지 다시 인간이 가진 악마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다. 가까운 역사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특히 군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순간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은 약 2천만 명의 아시아 민중을 학살했다. 올해로 70주년이 되는 제주 4.3사건은 또 어떤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또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상흔이다. 5?18 또한 군인들에 의해 잔인한 일이 거짓말처럼 벌어졌던 사건이다. 잔인한 역사의 현장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기억하지 못할 때 거짓말 같은 일은 되풀이될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홍성담은 역사를 기록한다. 판화가 기억 투쟁을 위한 하나의 프로파간다가 되기를 자처한다.

 

“‘오월판화는 기억투쟁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림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오월판화를 두고 예술이기 전에 선전선동화라고 폄하하기 일쑤였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예술이 예술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_본문에서

 

그리하여 홍성담의 오월 판화는 시민들의 피맺힌 외침이 울려 퍼지는 투쟁 현장의 생생함을 기록한 우리의 역사이면서, 국가 폭력의 민낯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저항으로서의 예술인 것이다.

 

오월 판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손으로 그려진 그림!

5·18 당시 광주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였다고 홍성담은 말한다. 527일 새벽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 본부가 계엄군들의 막강한 화력 앞에 무너지기 전 열흘 동안 무시무시한 총칼 앞에서 광주를 지키며 함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홍성담은 그들의 이야기를 목판과 고무판 위에 고스란히 옮겨 판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홍성담의 판화는 바로 이 사람들의 마음과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판화의 주인공 중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며 마지막까지 광주를 지켰던 시민군들도 있고, 광주에서 밥상공동체를 만든 주먹밥 아줌마들도 있다. 그녀들은 시내 여기저기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서로 밥을 나누면서 피를 나눈 형제임을 확신하게 된 시간이었다. 가진 것을 내놓아 함께 나누었던 시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뻤던 열흘 동안의 항쟁이 가진 가치가 연작 판화 []에 담겨 있다.

 

사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든 판화도 있다. 바로 [갚아야 할 원수]가 그것이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의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물음을 고스란히 판화에 옮겼다.

또한 시내 큰 병원마다 피가 모자라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마다 시민들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룰 때 그 길에 동참했던 광주의 매춘부들도 있었다. 홍성담은 [황금동전투]라는 연작 판화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새겼다.

 

광주에서 우리의 품에 안기지 않았던 남자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 젊은이들이 악마 같은 계엄군들에 의해서 붉은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우리 매춘부의 피는 당신들과 다르다더냐? 우리 몸에도 당신들과 똑같은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_본문에서

 

그해 5월 민주주의를 쓴 사람들



판화 깃발’.

 

라이트를 밝힌 버스 지붕에서 한 남자가 태극기를 휘두른다. 시민들은 어깨동무하고 전진한다. 시민군을 시민과 아이가 환영한다. 동네 아줌마는 광주리 하나 가득 김밥을 쌌다. 한 줄기 빛 같은 외길 위로 횃불든 시민들이 행진한다.

 

1980518~27일 광주를 기록한 오월 판화-봄이 새긴 얼굴들10일 대전 미룸갤러리에서 막을 올린다. 다음 달 8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회는 홍성담 화백이 새긴 목판화 50점이 선보인다. 대부분은 3~4호 크기다. 전시작은 횃불행진, 꼭두각시놀음, 혈루, 암매장, 도망, 양동 전투, 깃발, 무기분배, 대자보, 대동세상, 도청궐기대회, 효천전투, 임산부, 잃어버린 시체, 새벽, 무등산하 만고해원신 시민군, 윤상원 열사, 사시사철, 깃발춤 등 80년대 대학가에서 걸개그림이나 깃발로 나부꼈던 장면들이다.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대전 미룸갤러리는 10일부터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전을 연다. 작품은 홍 화백의 판화 대동세상1’. 미룸갤러리 제공

홍 화백은 혈루 7’ 작가노트에서 그녀는나에게 가슴을 열어 보였다. 가슴속에 구름과 별과 꽃과 무지개와 실개천과 강과 바다가 새겨져 있다고 나의 우둔한 귀에 푸른 입술로 속삭였다고 기록했다. 미룸갤러리는 작은 전시공간을 살펴 10~24일까지 이번 전시회의 표제인 깃발25점을 먼저 전시하고, 25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횃불행진등 나머지 25점을 전시한다.

 

미룸갤러리 쪽은 오월판화전은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민주주의의 의미와 이를 지키려 했던 우리들의 얼굴을 알리고 싶어 기획했다. 홍성담의 판화는 평범한 사람, 평범한 이웃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광장에서 온몸으로 군부의 총, , 탱크에 맞선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밝혔다.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대전 미룸갤러리는 10일부터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전을 연다. 작품은 홍 화백의 판화 횃불행진’. 미룸갤러리 제공

광주민주항쟁때 시민군이었던 홍성담 화백에게 오월 판화전은 그의 작품 활동이 시작한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갤러리쪽은 또 광주에서 세상과 고립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던졌다. 수십년간 그들에게 폭도, 빨갱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5월 광주의 진실을 숨긴 군부 쿠데타 세력들은 아직도 건재하게 살고 있다고 지금 오월 전시가 필요한 이유를 말했다.

 

미룸갤러리 대표인 김희정 시인은 홍성담은 그해 광주의 오월 민주주의자들의 얼굴을 역사에 새겼다. 그 얼굴은 텔레비전 속 드라마 주인공처럼 조각같이 잘 생긴 게 아니라 평범한 내 이웃이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외면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함께 했던 얼굴들이라며 오월 판화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얼굴을 잊지 않게 해준다. 이 얼굴을 잊고 산다면 이웃과 민주주의가 함정에 빠질 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바보 같고 나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얼굴들, 그 얼굴은 우리이자 민주주의 얼굴이라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대전 미룸갤러리는 10일부터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전을 연다. 작품은 홍 화백의 판화 대동세상’. 미룸갤러리 제공

미룸은 11일 오후 3, 홍성담 화백과 시민이 만나 작품 속 숨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최근 재출간된 홍 화백의 5.18 민중항쟁 연작 판화집 <오월> 독자 사인회도 열린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2018 5.18


 

                                                                           정태춘-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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