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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전사 시인' 김남주와 미국

by 이성근 2016. 8. 22.

'전사 시인'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821 프레시안

반외세 통일 문학의 대표, 시인 김남주

 

김남주 시인에 관한 글 한 편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게 1년 전인 20158월이었다. 201410월부터 20157월까지 <프레시안>에 한국의 반미 문학 예술에 관해 연재한 것을 계기로 20158<계간 창작21>'창작21 작가회' 주관으로 강원도 인제 만해 마을에서 열린 '2015 만해 축전 : 세계 작가 초청 평화 문학 심포지엄'에서 "해방 70년 분단 70년 민족 문학의 흐름"이란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바로 이틀 뒤 광주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해 강연했는데, 나를 초청한 단체의 대표가 김남주에 관한 일화 몇 토막을 들려주었다. 1988년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출판했던 분으로, 한국의 '반미 문학'이나 '민족 문학'을 다루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사(戰士) 시인'의 작품 몇 편을 소개한 내 글을 읽었던 모양이다.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주어지지 않는 감옥에서 "물밀듯 솟아오르는 시상이 떠올라도 한 편의 시도 적어두지 못한다"고 슬프게 호소하며, 못으로 우유갑이나 은박지에 쓴 수백 편의 시가 감옥 밖에서 시집으로 출판된 과정이 흥미로웠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일화를 부탁하며, 내가 한 때 심취하며 존경했던 시인에 관한 글 한 편 써보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마침 201511월 김남주의 고향 해남에서 '동북아 정세'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는데,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강연하고 고향집에 자리 잡은 김남주문학관을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자료를 찾고 모으면서 구상했던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김남주 시 전집과 산문 전집을 포함한 다양한 책과 논문이 그의 20주기인 2014년 전후로 쏟아지다시피 나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에 관한 석사 논문은 적어도 10편 넘게 검색되었고, 2012년엔 박사 학위 논문까지 나왔다.

 

2014년엔 "그의 시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김남주 문학의 세계>가 출판되었고, 2016년엔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온 삶을 되짚어보는" <김남주 평전>도 출판되었다. 자료가 풍부해져서 글을 쓰기 쉽게 된 게 아니라, 내가 새롭게 덧붙일 내용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참고로 1970년대에 김남주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전사로 이끌었던 분은 <김남주 평전>에 부족한 면이 좀 있다고 귀띔해줬지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문학 평론가나 전기 작가가 아니라 통일 운동을 하는 정치학자로서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외쳤던 전사 시인의 반외세 통일 문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글과 강연으로 통일 운동에 한쪽 발이나마 담가온 내가 김남주의 반외세 통일 문학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자체를 자주 통일 운동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미국에 의해 분단된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미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채 통일은 여태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김남주가 자주와 통일을 추구하다 감옥에 갇혔던 1970년대로부터 30여 년이 훌쩍 지나고, 1994년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흘렀어도 미국에 대한 의존이나 종속은 줄어들지 않고 남북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그가 시를 통해 애타게 부르짖고 간절하게 바랐던 반외세 민족 통일을 되짚어보면 우리가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란 한 시대를 그리며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역할까지 맡아왔는데, 특히 그의 시문학이 그랬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반외세 통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소개가 간단하게나마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1945년 몹시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머슴으로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는데 한쪽 눈이 멀었다. 그는 이러한 불우한 가정사를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는 시에 너무도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았다.

 

그래 그는 머슴이었다

십년 이십년 남의 집 부잣집 머슴살이였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니

그것은 보리 서 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그는 내가 커서 어서 어서 커서

면서기 군서기 되어주길 바랐다

손에 흙 안 묻히고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는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 부러워했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말해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골방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인다고 했다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부자들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김남주는 고향에서 초중학교 재학 시절 집안일을 하느라 낮에 공부해본 적이 없었단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나 오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소를 먹이거나 꼴을 베어야 했다. 밤엔 호롱불 기름이 닳아지니 어서 불 끄고 자라는 부모의 성화에 공부하기 어려웠다. 김남주는 해남중학교 다닐 때 자기 하고 싶은대로 공부할 수 있는 읍내 아이들을 가장 부러워했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항상 1등이었단다.

 

김남주 생가. 해남군청

 

김남주는 1964년 해남군에서는 1년에 한 명 들어갈까 말까 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주 학생 운동의 전통에 빛나는" 학교에서 획일적으로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도 "반민족적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을 일으키지 못했다"면서 1965년 자퇴했다.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어 했지만, 면서기나 산감지기라도 되어 가문의 울타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과 소원을 무시할 수 없어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도서관의 책을 가장 많이 이용하면서도 수업엔 가장 많이 빠진 학생이었다.

 

수업에 관심과 흥미를 갖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다, 197210월 박정희의 이른바 '대통령 특별 선언'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급히 광주로 갔다. 죽마고우이자 전남대학교 동기생인 이강과 '10월 유신' 반대 투쟁을 결의하고, 197212월 비상 계엄 상태에서 전국 최초의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광주 시내 대학교와 고등학교들에 배포했다. 1973년 서울로 피신해 신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고발>로 이름을 바꾸어 살포하려다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8개월 만에 집행 유예로 풀려났지만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김남주는 1974년 해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창작과비평>에 시 몇 편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이 되었다. 그 때 심사를 맡았던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그의 시가 "칠흑 같은 어둡고 깊은 밤중의 잠속에 빠져 있는 혼수상태의 문단에 칼을 들이대는 섬뜩함으로 다가온다"고 평했다.

 

그 후 광주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하고 민중 문화 운동에 몸담기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쫓겨 서울에서 피신하던 중 1978년 김남주는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 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 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과 "7.4 남북 공동 성명의 원칙과 토대 위에서 남북 관계를 조속히 개선하고 조국의 평화적 재통일을 촉진한다"는 것을 포함했다.

 

그는 '남민전''전사'로 활동하다 1979년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9년 만인 1988년 풀려났다. 이른바 1973년의 <함성> 사건과 1979년의 '남민전' 사건으로 두 번에 걸쳐 10년 간의 옥살이를 한 것이다. 석방된 후 옥바라지하던 '남민전' 동지와 1989년 결혼해 1990년 아들을 낳고 '김토일(金土日)'이라 이름 지었다. , , , 4일간 열심히 일하되 금, , 3일간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세상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한 채 김남주는 1994년 옥중에서 얻은 췌장암으로 쉰 살도 채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약 500편의 시 가운데 약 400편은 감옥에서 쓴 것이었다.

 

이러한 김남주의 시에 나타나는 반외세 자주정신은 지나칠 만큼 강하고 투철하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이런 말까지 해도 될까 싶을 정도다. '양키''원흉', '압제''착취' 그리고 '제국주의' 등의 말을 나무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예를 들면, <희망에 대하여 2>에서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외친다.

 

양키야말로 학살의 숨은 원흉이고

양키야말로 이 땅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양키가 이 땅에 온 것은 해방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왔다고

가르쳐주는 선생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리하여 한일 관계는 협력 관계가 아니라 모순 관계에 있고

이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않는 한

이 땅에는 자유도 통일도 평화도 없다고

씌어진 책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해방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조직하고 활성화시키는

혁명 단체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도대체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하나

 

<>에서는 아래와 같이 '압제''착취'를 일삼는 '양키 제국주의'에게 사라지라고 호통친다.

 

허가 없이 도서를 열독해서도 아니 되고

허가 없이 집필 도구를 소지해서도 아니 되는

그렇다고 펜과 종이를 허가해 주지도 않는 이 방

()

아무것도 남지 말거라

마루 위에 벽에 또는 허공에

증오의 손톱으로 내가 새겨놓았던 말들-

압제여 착취여 양키 제국주의여

그 흔적마저 사라져 없어져버리거라

 

19805월 광주 항쟁을 계기로 한국에서 반미 운동이 폭풍처럼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는 훨씬 이전부터 강한 반미 감정을 품어왔던 모양이다. 사실 1980년 이전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 전쟁에서 구해주었으며 경제 성장을 이끌어준 고맙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마고우 이강에 따르면, 김남주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일 만큼 (196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부터 반미 감정이 유별났다"고 한다.

 

김남주는 문학 평론가 김희수의 표현대로 "외세로부터 탈피해야 하는 이 땅의 앞날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그 실천의 대열에 서서 아메리카의 허상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대학 다닐 때는 "양키 용병인 군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여" 1970~80년대 대학에서 필수 과목이었던 교련(敎鍊 : 군사 훈련)을 한 시간도 받지 않았단다. 짓궂기도 했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광주 시내 미국공보원 주위를 지나갈 때 앞에 서양인 청년과 한국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자 뛰어나가 서양 청년의 엉덩이를 냅다 차버렸다고 한다. 어느 한 겨울 폭설이 내리고 칼바람이 휘몰아칠 때 전남대학교 인문 대학의 미국인 영어 교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김남주가 눈뭉치를 몇 개 만들어 그에게 힘껏 던져 눈자위에 명중시켰단다. 그 교수가 수업 시간에 질문하면 김남주는 일부러 엉뚱하게 대답하거나 욕설을 섞어 대꾸하기도 했단다.

 

"주둔군의 백성으로서 우월감에 젖어 약소국의 대학생을 가르친다는 뻔뻔한 모습"을 김남주는 "살모사를 본 듯 싫어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어영문학과 학우들이 그 미국인 교수 앞에서 알랑거리는 모습을 보면 김남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분노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교련 과목처럼 교양 필수 과목인 그 교수의 과목을 수강하면서도 시험은 거부했다니 학점 미달로 졸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인 김남주.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한국 문학계에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해왔는데, 특히 9년째 감옥에 갇혀있던 1988년 절정에 이르렀다. 다양한 민중 운동 단체와 문인 단체 그리고 인권 단체들이 나섰다. 문학인 500명이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는 가운데, '반외세 민족 자주화의 선봉' <김남주론>과 그의 '대표 시집' <조국은 하나다>가 출판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소설가 이윤섭은 그를 기리며 3권짜리 장편 소설 <공존의 그늘>을 썼다. 감옥에 있는 저항 시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 '남주'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카투사(KATUSA)가 되어 부대 안에서 미국이 "정의의 사도라는 미명 아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종종 다양한 방법과 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며 미국은 결코 한국의 동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남주는 "양키 용병인 군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여" 대학에서 필수 과목이었던 교련을 한 시간도 받지 않았다는데, 주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주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 병력의 주인공으로 그를 삼은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비록 그를 내세워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미군 부대의 문제점을 파헤치지만 말이다.

 

아무튼 김남주는 1960~70년대 대학을 다닐 때부터 미국을 비판하며 거부했기에 특히 19805월의 광주 학살 이후엔 유난히 강한 반미 감정을 담아낸 시를 무수하게 쏟아냈다. 먼저 <학살 1>에서는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의 죄악과 위선을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누가 너를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느냐

누가 네 마을과 네 도시를 아비규환의 아수라로 만들어 놓았느냐

누가 허리 꺾인 네 상처에 꽃잎 대신 철가시바늘을 꽂아 놓았느냐

판문점에서 너를 대표한 자 누구이며

도마 위에 너를 올려놓고 초치고 장치고 포치고 차치고

내 조국의 운명을 요리하는 자 누구냐

입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뒷전에서는 원격조종의 끄나풀로 꼭두각시를 앞장세워

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들을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아메리카여

보아다오, 너희들과 너희들 똘만이들이 저질러 놓은 범죄를

음모와 착취로 뒤덮인 이 땅을

보아다오, 너희들이 팔아먹은 탄환으로

벌집투성이가 된 내 조국의 심장을

 

<학살 2>에서는 광주학살을 미국 관리들이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학살 3>에서는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과 음흉함을 비판한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조종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매국노>를 통해 미국과 그 하수인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꾸짖는다.

 

피 묻은 칼로

제 나라 허리를 잘라 그 아랫도리 반쪽을

이민족의 코앞에 발아래 바치고 그 대가로

제 동포의 머리 위에 군림한 자

()

이민족의 용병으로 미8군의 고용살이로 노예살이하면서

나라의 다른 반쪽 그 독립의 가슴에 괴뢰의 총칼을 들이대는 자

그 총구 그 칼로 반공 쿠데타로 일어나

()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그런 자를 나는

아메리카의 우방에서 흔해빠진 이름 독재자라 불러야 하나

백악관에서 입안되고 CIA에서 변조되고 미8군에서 급조되어

제국주의의 총구에서 튀어나온 상품의 이름 새 시대의 새 지도자라 불러야 하나

()

이 아무개 박 아무개 전 아무개를 독재자라고도 부르지 않겠다

신식민지에서 무슨 놈의 대통령이고 독재자냐 괴뢰면 괴뢰고 하수인이면 하수인이지

()

나는 부르겠다 놈들을 이렇게 이렇게 부르겠다

민중의 고혈이나 취해 뒤우뚱좌우뚱 흔들리다가 여차하면

한보따리 챙겨들고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산적들이라고

민족의 이익을 팔아 제 뱃속을 채우다가 들통나면

허겁지겁 미군 비행기를 타고 나라 밖으로 줄행랑치는 매국노라고.

 

나아가 이토록 암담한 현실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시인의 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시인으로서 나라와 사회의 죄악을 폭로하고 만인에게 선전하며 민중들을 고무해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아가자고 선동하는 일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이다.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

홀랑 까진 마빡 위에 지르르 기름기가 흐르고

그 위에 학살과 저주의 낙인이 찍힌 채

양키의 부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이

반역자인 너의 일이라면

()

시인인 나의 일은?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남주는 대학에 들어가며 왜 영어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했을까. 1960년대 고등학생 때부터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외세를 거부하고 미국인을 혐오하면서도 굳이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중학생 때부터 영어 단편 소설을 읽을 정도로 영어를 잘해서였을까. 물론 영어는 미국인들의 언어에 앞서 영국인들의 언어였고 세계 공용어가 되었지만 말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싸워서 이길 수 있기에(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으로 간주한 미국을 제대로 알고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의 고향 후배로 해남고등학교 교사이며 김남주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경윤은 <선생님과 함께 읽은 김남주>에서 그가 영문과에 들어간 이유가 "외국의 진보적인 책들을 직접 읽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남주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이강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남주가 영어영문과를 선택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대더구만. 하나는 당시에 영문학과가 타 학과들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서 머리 좋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이 몰린다는 점이었지. 내가 알기로 남주가 영문학과를 때려치우지 않고 그럭저럭 4년을 다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 같아."

 

이를 인용해 언론인 겸 평론가인 김삼웅은 <김남주 평전>에서 "그 역시 한편으로는 평범한 청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했는데, 김남주가 친구 이강에게 건넨 말엔 농담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일찍이 사회와 나라 문제에 관심 갖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기까지 할 정도로 강한 의식을 지니고 조숙했던 청년이 "머리 좋고 예쁜 여자애들"을 만나기 위해 영어영문학과를 택했겠느냐는 뜻이다.

 

참고로, 지난날 북한에서는 미 제국주의를 '철천지 원쑤'로 삼고 거의 모든 미제(美製)를 거부하면서도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교육을 중시했다. 김일성은 "만일 청년들이 일어와 영어를 한 마디도 모르면 앞으로 전쟁마당에서 적을 붙잡아놓고도 처리하기 곤란할 것이다. 청년들은 누구나 다 영어나 일본말로 '손들어!',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쏘지 않는다' 등의 간단한 군사 용어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교시했던 것이다. "철천지 원쑤 미국과 숙적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부터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 남한의 일부 대학생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남한에서 반미 감정이 폭발적으로 고조될 때 영어 사용을 될수록 자제하거나 거부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반미 투쟁의 효과적 무기"로 일상 생활을 통해 반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생활 문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미제 청바지를 입지 말고 미국 팝송을 부르지 말자고 했다. 미국 담배를 사지 말고,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자고도 했다. 내가 1980년대 말 서울에서 영어 학원 강사로 잠시 일할 때 한 대학생이 "요즘 우리 운동권 친구들은 영어공부 하지 않는데 수강생들이 있느냐"고 묻는 일도 있었다.

 

여하튼 태생적으로 반미 감정을 지닌 듯했던 '독서광' 김남주는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가 영어로 써진 책을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일어책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198012월 감옥에서 형님에게 보낸 편지 끝엔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일어로 된 시집을 부쳐달라고 부탁하고, 19849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집에 있는 시집을 있는 대로 보내라. 국어판이건 일어판이건 영어판이건 가릴 것 없이"라는 구절로 끝낸다.

 

사실 자주 통일을 위한 그의 전투적 시문학은 19852월 연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 외국인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10년의 감옥살이를 끝낸 뒤 결혼했던 연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다.

 

"6년째 접어들고 있는 징역살이입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책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것은 발자크, 셰익스피어, 하이네, 푸시킨, 레르몬토프, 네크라소프, 고리키, 고골리, 톨스토이, 숄로호프, 브레히트, 네루다, 체르누이세프스키, 루이 아라몽, 마야코프스키, 루카치, 게오르그, 뷔히너 등의 제 작품입니다. 브레히트의 시와 희곡은 목적 문학으로써는 큰 효과를 거둔 것 같지만 문학의 예술성의 측면에서는 좀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참된 문학을 내가 분별할 수 있도록 지도해준 사람은 게오르그 루카치 선생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저작을 통해 하이네를 새로 알고, 톨스토이를 다시 읽게 되고, 에밀 졸라, 카프카, 브레히트 등의 실험 소설, 전위 문학을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가르침으로 게오르그, 뷔히너를 알게 되었고, 현실을 인식하는 기초과학으로써의 경제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의 리얼리즘론에서 작중 인물의 목적의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지 않은 점에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들고나올 경우의 약점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남주가 위 편지를 썼던 1985년은 한국에서 운동으로서의 '민중 문학'이 전개되기 시작할 무렵인데, 그는 이미 감옥 안에서 민중 문학의 선구자나 이론가들을 두루 섭렵했던 것 같다. 1980년대 민중 문화 운동을 이끌었던 분야 가운데 하나가 연극이었고, 그러한 연극 운동을 이끌었던 게 독일 출신 연극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Brecht)의 연극론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시와 희곡이 운동성은 크지만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시인의 비판에 숙연해진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헝가리 출신 루카치(Lukacs)'비판적 현실주의 (critical realism)'는 운동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깊이 새길 만하다.

 

김남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며 이러한 문학 공부를 통해 '불퇴전의 실천 시인'이 되었다. 특히 반외세 통일 문학 분야에서는 작품의 양으로든 내용의 강도로든 그를 앞지를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해방과 통일을 부르는 걸판진 무당"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했던 그에게 시는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주와 통일을 위한 무기였던 셈이다.

 

시집 <조국은 하나다>(김남주 지음, 남풍 펴냄, 1988). 남풍

 

1988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대표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편집했던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과 조국 통일에의 열망을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는 김남주 시인""문학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의 가장 귀중한 예술적 재보이며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전 인류적 투쟁의 가장 빛나는 무기로 되고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선명하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간결하다. 단호하고 투쟁적이다. 나 같은 정치학자도 문학 평론가나 해설자의 도움 없이 그의 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다. 가수 안치환이 2000년부터 그의 시에 곡을 붙인 '헌정 음반'을 만들어 대중을 상대로 발표해올 수 있었던 배경도 될 것이다.

김남주가 <나의 이름은>에서 "일제가 뒷문으로 쫓겨갈 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 미제가 앞문으로 쳐들어올 떼 세상에 나왔습니다"고 밝혔듯, '소위 해방둥이'로서 통일을 위해 절규했던 시 2편을 결론삼아 소개한다. 통일 문학의 역할을 보여주는 시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통일 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가리켜주는 시다. 30여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오늘의 현실에도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만, 외세는 변함없이 그대로 머물러있고 남북 관계 역시 변함없이 꽉 막혀있지 않은가. 문학 평론가의 해설도 필요 없고 통일 운동가의 설명도 필요 없기에 조금 줄여서 그대로 옮긴다.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남인지 북인지 분간 못하는 바보의 벽 위에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좌충우돌하다가 내빼는 망명의 벽 위에

자기기만이고 자기환상일뿐

있지도 않은 제3의 벽 위에

체념의 벽 의문의 벽 거부의 벽 위에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

나는 또한 쓰리라

노동과 투쟁의 손이 미치는 모든 연장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인 삼팔선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

그리고 나는 내걸리라 마침내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에 내걸리라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들의 손가락 끝도

언제고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었다는 신의 입김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하늘 높이에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

 

민족 해방 투쟁 만세

 

10년 전 오늘 그대는 외쳤지

두 팔 번쩍 치켜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 번 외쳤지

민족해방투쟁 만세! 민족해방투쟁 만세! 민족해방투쟁 만세!

그러자 당연하게도 경찰이 와서 두억시니 같이는 와서

그대를 채갔지 솔챙이가 병아리를 채가듯 그렇게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문과 텔레비전은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했지

그들은 이렇게 떠들었지 미친놈 날궂이한다고

해방된 지가 언제적인데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한다고

'자생적 공산주의' 운운하면서 '배후에 고정간첩'이 없나 눈알을 두리번거리는 놈도 있었지

()

벗이여 10년 전의 해방자여

이제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네 그 동안 40년 동안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왔던 제국주의의 가면은 벗겨지고

놈들이 이땅에서 저질러 놓은 모든 범죄가 드러났다네 청천백일하에

이제 알고 있다네 세 살 먹은 삼척동자도

누가 조국의 허리를 두 동강 냈는가를 무엇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을 사주하여 이남에 꼭두각시정권을 세웠는가를

이제 알고 있다네 부엉이의 마을 한낮의 소경도

귀머거리에 입달린 벙어리도 그가 조선의 아들이고 딸이라면

제 땅에서 뿌리 뽑혀 오갈 데 없는 가난뱅이라면

알고 있다네 제국주의의 살인청부업자 군장성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한 민주주의란 개좆나발이라는 것을

제국주의 군대가 이땅의 언덕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자유고 통일이고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지는 것을

 

자유주의 환상은 깨지고 벗이여

투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네 그것은

10년 전의 그대가 외쳤던 만세 민족해방투쟁이네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의 자유, 민족의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민족의 자각이네.

 

김남주는 이렇게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고 통일의 걸림돌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양키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민족의 해방과 통일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절규한 때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까지 미군은 여전히 주둔하고, 미국에 대한 남한의 종속은 변함없으며, 자주와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하다. 심지어 1950년대 한국 전쟁조차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다. 60여년이 흐르도록 어정쩡한 정전 또는 휴전 협정을 고수하며 종전 또는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악마로 만들고 주적으로 유지하며 이를 핑계로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 때문이다. 30여년 전 자주와 통일을 향한 '전사' 시인의 '함성'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 미국 8.4 프레시안

미국 역사 240년 동안 219년을 전쟁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호전적(好戰的)인 국가다. 미국처럼 전쟁을 많이 해본 나라도 없고, 좋아하는 나라도 없으며, 잘하는 나라도 없다.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고, 전쟁을 통해 세계 패권을 유지해 왔다.

 

몇 가지 통계를 제시한다. 첫째, 미국은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2016년 현재까지 240년 가운데 무려 219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는 8.8%21년밖에 되지 않는다. 5년 이상 연속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기간은 세계 대공황 직후인 1935년부터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0년까지가 유일하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난 이후엔 1997년과 2000년에만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둘째, 2차 세계 대전 이후 2016년 현재까지 전 세계 150개 이상의 지역에서 약 250개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가운데 200개 이상의 전쟁이 미국에 의해서 일어났다. 참고로 20세기에만 약 19000만 명이 전쟁으로 죽었다.

 

셋째, 미국은 2016년 현재 세계 각지에 약 1000곳의 군사 기지를 운영하며, 150개 이상의 국가에 1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에 52000, 한국에 25000명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8만 명 이상, 그리고 독일에 37000, 이탈리아에 12000명 등 유럽에 6만 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넷째, 미국은 20117100억 달러 이상의 군비를 지출함으로써 전 세계 군비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2011'예산 통제법(Budget Control Act)'을 만들어 2012년부터 해마다 5% 안팎의 군비를 줄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15년엔 약 6000억 달러의 군비를 지출했지만 여전히 세계 전체 군비의 3분의 1 이상을 쓰고 있다. 참고로 2015년 군비 지출 2위부터 10위까지의 국가는 중국 2100억 달러, 사우디아라비아 870억 달러, 러시아 660억 달러, 영국 550억 달러, 인도 510억 달러, 프랑스 510억 달러, 일본 410억 달러, 독일 390억 달러, 한국 360억 달러 순이다.

 

건국부터 2016년 현재까지 주목할 만한 미국의 전쟁과 외교 정책 10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2006년 태평양에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한 미 해군. wikipedia.org

 

1) 영국과의 독립 전쟁과 건국 : 전쟁을 통해 세워진 나라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에 "영국의 현재 왕의 역사는 반복적인 위해와 강탈의 역사였다. 이 식민지에 절대 폭정을 세우려는 데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며 온갖 폐해를 세계에 알렸다. 나아가 "이 국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서 전쟁을 시작하고 평화를 체결하며 동맹을 협정하고 통상을 수립하며, 독립 국가가 해야 하는 모든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전쟁은 독립 선언 1년 전인 1775년 시작됐고 1783년 끝났다. 8년간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이루었으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2) 유럽에 대한 도전과 먼로 독트린 : 고립주의보다 독자주의나 불간섭주의

제임스 먼로 제5대 대통령은 1823년 먼로 선언이라 불리는 미국 외교의 기본 정책을 발표했다. 유럽 강국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고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의 약화로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라틴아메리카를 더 이상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도전이었다. 아울러 미국도 유럽에 간섭하지 않고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에 지속적으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먼로 선언을 고립주의 외교 정책으로 부르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의 관계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국가 안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 대외 문제에 광범위한 개입을 반대하는 방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고립주의'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미국은 건국 이후 세계문제로부터 진정 고립을 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먼로 선언은 유럽 강국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하는 것을 봉쇄하여 이 지역에서 미국의 안전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공세적 정책이었다. 따라서 '독자주의''불간섭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3) 멕시코와의 전쟁과 서부 개척 : 원주민 학살의 역사

1820년대부터 미국인들이 당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로 많이 이주했다. 멕시코 정부가 초기엔 이민자들을 환영했지만 이들의 숫자가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지자 이민을 제한했다. 이에 미국인들이 반발해 1836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이겼고, 텍사스는 1845년 미국에 합병되었다. 1846년부터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미국이 크게 이겼다. 그 결과 지금의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캘리포니아 등 광활한 서부 지역이 미국 영토로 바뀌었다.

 

인구와 면적으로 미국 본토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주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빼앗은 것이다. 참고로 전쟁 직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황금 덩어리가 무더기로 채굴되고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펑펑 쏟아졌으니 이를 바라보는 멕시코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들이 지녀온 반미 감정의 원천이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전후로 이른바 서부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적어도 수백만 명 이상 죽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개척'일지라도 원주민들의 처지에서는 참담하고 끔찍한 학살이었다.

 

역사는 대개 승자가 쓰기 마련이며 패자의 기록보다는 승자의 기록이 멀리 퍼지고 오래 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미국의 '서부 개척'이라는 승자의 용어를 쓰려면,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승자의 용어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하며 '한반도 침략'이라는 패자의 입장을 주장하려면, 미국의 잔인함을 비판하며 '원주민 학살'이라는 패자의 처지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4) 스페인과의 전쟁과 제국으로의 발돋움 : 선민의식과 조선에 대한 배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1895년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쿠바에 투자한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98년 쿠바에 해군 함정을 보냈다. 곧 이 함정이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되자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겼다. 전리품으로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 거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지도자들이 내세운 게 선민의식이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인종이 기독교 문화와 그를 기반으로 발전된 서양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함으로써 미개한 유색인종들을 개화시키는 것이 도리요, 의무라고까지 주장했다. 참고로, 1898년 쿠바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함정의 폭발은 무려 73년이 흐른 1971년에야 스페인군의 기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일러실의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해외로 확장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1905년 태프트-가쓰라 비밀 협정을 맺었다. 태프트 미국 육군 장관이 새로운 식민지 필리핀을 시찰하러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 총리를 만나,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이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맺자, 서양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1882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던 미국은 가장 먼저 조선을 떠났다.

 

5) 일본과의 전쟁과 인류 최초의 핵무기 사용 : 고립주의와 중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1935년 히틀러의 독일은 군비 증강에 착수하고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한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동원령을 내리고 에티오피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유럽 분쟁에 또 다시 휘말려 들지 않겠다며 중립법을 제정했다.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킬 뿐만 아니라 교전국에 대한 융자와 전쟁 물자의 판매까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 곤경에 처한 영국이 협력을 요청하자 미국은 중립법을 피하고 무기 대여법을 통해 영국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자 미국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며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19457월 인류 최초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 8월 일본에 터뜨림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핵무기에 따른 조선인들의 피해도 매우 크고 끔찍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 약 7만 명이 방사능에 노출되고 4만 명이 폭사했던 것이다.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뜨린 핵폭탄이 폭파하는 모습. wikipedia.org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은 세계 패권을 추구하는 국제주의로 바뀌었다. 유럽 열강들이 두 차례 대규모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하며 쇠퇴하는 터에, 세계 제1의 국가로 솟아오른 미국이 소극적 고립주의나 중립주의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6) 소련과의 냉전과 트루먼 독트린 :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와 저지

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1이 되었는데 곧 미국에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다. 자본주의 멸망을 추구하며 세계 제2위로 오른 사회주의 소련이었다. 스탈린은 1946년 자본주의 진영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예상되므로 조국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에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소련의 팽창 정책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1947년 초엔 영국이 붕괴 위기에 처한 그리스와 터키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지속할 수 없다며 두 나라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이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은 중동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하면 중동의 석유 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해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반공주의를 강조한 트루먼 독트린과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을 내세운 마샬 계획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문제는 더욱 꼬이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그리스나 터키보다 전략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47년 초부터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면서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19479월 미소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를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10월 한반도 문제를 미국 외교의 뒷마당이랄 수 있는 유엔에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또한 중동에서는 아랍 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실현시켰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국가 이익'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소련과 손잡고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연합국이던 소련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까지 우방으로 만들었다.

 

1947년부터 안으로는 국가안보위원회 (NSC), 중앙정보국 (CIA), 그리고 합동참모본부 등을 만들고 밖으로는 미주기구 (OAS),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등의 창설을 주도하며 소련과의 냉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7) 한반도에서의 전쟁 : 60여 년 지나도 끝나지 않는 전쟁

1950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트루먼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했다. 그리고 남한이나 대만이 공산화하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군이 합법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 상황이라며 의회의 동의 없이 병력을 보냈다.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군을 증강하고 필리핀에 대한 군사 원조를 확대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미군 주도의 유엔군이 19509월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되찾고 북쪽으로 진격했지만 10월 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19511월 후퇴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만주 폭격을 포함한 전쟁 확대를 주장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의 제한 전쟁만을 명령했다. 매카더의 거듭된 확전 주장에 트루먼은 그를 해임해버렸다.

 

1년간의 격전 끝에 19517월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휴전을 극렬하게 반대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하자, 미국은 지루한 휴전 협상을 빨리 끝내기 위해 1952년부터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두어 차례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2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19537월 휴전정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로부터 63년이 흐른 20168월까지 전쟁을 쉬거나(휴전) 멈추고 있는(정전) 상태에서 완전히 끝내거나(종전)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다. '호전적'인 북한은 줄기차게 종전-평화 협정을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미국과 남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537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미국국립문서보관소

 

8) 베트남 침략 전쟁 : 2의 한국 전쟁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인 제1차 베트남 전쟁은 1946년 시작되어 1954년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 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협정이 맺어졌다. 미국은 이에 반대하고 남베트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추구해온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1961년 남베트남에서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 조직이 결성되고, 사회 혼란 속에 디엠 정권의 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자 미국은 1963년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민 정권이 베트콩 세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추구하자 미국은 1964년 또 다른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사회 혼란과 베트콩 세력의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군사 개입을 확대하면서 북베트남 통킹만에 함정을 보내 정찰 활동을 펼쳤다. 곧 미국 함정이 공격당하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1965년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벌였다.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통킹만 사건은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1971년 조작으로 밝혀졌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한 빌미로 삼았던 미국 함정의 폭발이 73년이 흐른 1971년에야 보일러실의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진 것과 비슷하다. 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파렴치한 침략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범죄행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이 유일하게 패배한 굴욕적인 전쟁이기도 했다.

 

이토록 파렴치한 침략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든 나라가 남한이었다.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파병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의 신임과 지지를 받으면서, 미국의 지원에 의한 경제 성장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엔 미국의 줄기찬 요구와 은근한 압력에 따라 베트남에 지속적으로 파병했다. 미국이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미국의 파병 요청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남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남조선)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는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미국과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에 맞서 북베트남에 공군 병력을 보냈다. 둘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1966년부터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무장 침투 및 공격 행위를 급격하게 늘렸다. 19681월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한 청와대 습격 사건과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1~12월 울진삼척 침투 사건 등 다양하고 빈번한 공격 행위와 도발은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렇듯 제2차 베트남 전쟁은 제2의 한국 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고, 그에 맞서 북베트남을 가장 크게 도운 나라는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9) 이라크 침략 전쟁과 부시 독트린 : 예외주의와 일방주의 그리고 선제공격

2001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정부는 2002년 새로운 국가 안보 전략을 짰다. 핵심 내용은 미국의 안보 개념을 다른 나라들에 대한 견제에서 적극적 공격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미국에 대한 테러 징후가 보이면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예외주의도 깃들어져 있었다.

 

이러한 예외주의와 일방주의 그리고 선제 공격이 핵심인 부시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은 2003년 유엔의 반대와 많은 나라들의 비판을 받으며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이라크를 침공했다.

 

네 가지 이유를 내세웠다. 첫째,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미국처럼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많이 배치해 놓고 있는 나라는 없다.

 

둘째, 이라크가 9.11테러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9.11 이전까지 미국만큼 테러를 많이 지원했던 나라는 없다.

 

셋째, 이라크가 독재를 실시하고 인권 탄압을 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러나 독재와 인권 탄압에서 이라크 못지않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파키스탄 등에는 무기도 팔고 경제 지원도 했다. 그리고 미국처럼 독재 정권을 많이 지원한 나라는 없다. 세계 곳곳에서 독재 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수십 개의 민주화 운동이 미국의 도움에 의해 반공의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넷째, 이라크가 유엔 결의안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러나 유엔 역사상 미국만큼 유엔 결의안을 지키지 않은 나라는 없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엔을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대외 정책에 공개적으로 밝힌 나라 역시 미국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를 점령해 군사 정권을 세우려는 진짜 속셈은 반미 정권을 제거하고 석유 자원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렇게 파렴치한 침략 전쟁에 남한은 한미 동맹을 앞세우며 베트남전에 이어 또다시 병력을 보냈다.

 

10) 새로운 냉전의 시작 : 쇠퇴하는 미국의 떠오르는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중국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국가로 간주하고 중국을 견제하며 봉쇄해왔다. '냉전'의 정의와 개념에 따라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겠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 말 개혁 개방을 시작한 이래 해마다 10% 안팎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급속도로 떠오르는 중국에 대해 미국은 중국 위협론을 제기하며 일본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해왔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996년 일본과 안보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1997년엔 일본과의 방위 협력 지침을 개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있는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보통 국가'가 되도록 촉구해왔다. 아베 정권의 헌법 재해석과 개정 움직임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부추김과 압력에 따른 것이다.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 널리 알려진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이 바로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2015년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만들고,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일본과 남한을 끌어들여 이른바 한--일 삼각공조를 강화하는 것도 중국 견제용이다. 2016년 남한에 고고도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겠다는 것 역시 중국 때문이다.

 

미국이 60여 년이 넘도록 한국 전쟁을 끝내지 않고 북한과의 평화 협정을 거부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종전 협정이나 평화 협정을 맺으면 주한 미군을 계속 유지할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81~4일 한신대학교에서 열리는 제1'대학생 통일 경제 캠프'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미국은 어떻게 전세계에 무기를 팔아먹나? 8.2 프레시안

'죽음의 상인' 군수업체와 미국 정치의 실상 -윌리엄 하퉁 미 군산복합체 전문가

 

한반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가 결정되는 순간 누가 가장 기뻐했을까? '죽음의 상인', 미 군수업체의 대명사 격인 기업 록히드 마틴 아닐까?

 

다음은 비영리 독립언론 매체인 <톰 디스패치>에 최근 실린 윌리엄 하퉁의 칼럼이다. 미 군산복합체의 실상을 파헤쳐온 하퉁은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힌다. 

하퉁에 따르면, 미국의 전 세계 무기 거래 규모는 최근 나날이 성장세다. 전쟁 혹은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중동, 남중국해, 동아시아, 유럽에서 끝없이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군수업체들에겐 한마디로 전 세계에 장이 선 셈이다.

 

그렇다고 무기가 그냥 팔리는 건 아니다. 군산복합체는 미국 정치를 움직인다. "미국 대통령부터 해외의 대사까지 군산복합체의 외판원" 노릇을 한다. "본질이 세계 최대의 무기 거래상"인 미 국방부에는 실제로 무기 판매를 전담하는 부서까지 있다.

 

군수업체와 정치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이 구조에서 '동맹국'은 곧 무기 팔아먹기 딱 좋은 ''일 뿐이다. 사드도 예외는 아니다. 하퉁이 파헤친 미 군산복합체의 구조에 따르면, 우린 멍청했고 록히드 마틴의 금고엔 달러가 넘쳐날 일만 남았다. (원문보기)

 

무기 장사만한 사업은 또 없다 : 무기, 하면 바로 미국!

미국 기업들이 한 해 7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 세계 시장을 석권한 사업 부문이 있다고 치자. 당연히 이 업종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업이 세계 무기 거래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류 미디어가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은 매년 무기 거래 통계가 발표될 때만 한두 번 쯤 기사로 다룰 뿐이다.

 

그렇다고 무기 거래의 실상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집속탄(cluster bomb : 대표적인 비인도적 무기. 폭탄 속에 또 다른 폭탄이 들어가 있는 구조로 다수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한 무기여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역자) 등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전되는 미국 무기들, (미국의 하수인인) 시리아 반군 세력들에게 제공되는 가공할 만한 무기들, 혹은 논란이 많은 F-35 전투기의 값비싼 해외 판매의 영향력에 관한 기사들이 이따금 나온다. 혹은 외국 어느 나라의 정상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면 그 나라에 대한 미국 무기 판매 소식이 한두 건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무기 거래의 방대한 규모나 이에 관련된 미국의 정치, 이로부터 수익을 얻는 업체들, 그리고 그 결과로 전 세계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은 거의 거론되지도, 깊이 있게 분석되지도 않는다.

 

'무기 덕후'인 내가 몇 년 동안 궁금했던 점은, 헐리우드 영화나 중서부 농산물 같은 미국의 다른 주요 수출품들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정보가 제공되는데 반해 무기 수출에 관한 자료는 왜 상대적으로 은폐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세계 제일의 무기상이라는 게 부끄러워서인가? 아니면 우리의 무기 수출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든가, 국민이라면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하듯이) 인가?

 

미 의회조사국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전 세계 무기 거래의 절반 이상은 미국 차지였다. 2위인 러시아는 14%로 한참 뒤쳐져 있다. 이 분야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독보적이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점유율은 약 3분의 1에서 2분의 1 사이에 머무르더니 정점을 찍은 2011년엔 전 세계 무기 판매의 70%를 차지해 거의 독점적인 지위에 올랐다. 골드러시는 계속된다. 국방부의 무기 판매 부서(좋은 말로 국방안보협력국) 책임자인 조 릭시 해군 중장은 2015년에 국방부가 성사시킨 무기 거래 규모가 460억 달러로 최고를 기록했으며, 20167월 현재 이미 400억 달러에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에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집단들이 있다. 방위계약업체의 경영진들은 이 성장하는 시장에 돈을 투자하고 있다. 국방부 및 관련 기관들과 함께 1년에 약 6000억 달러에 달하는 독점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제네럴 다이나믹스 같은 업체들은 새로운 수익의 주요 원천으로 글로벌 무기 시장을 주목해왔다.

 

20151, 록히드 마틴의 CEO인 메를린 휴슨은 투자자들로부터 오바마 정부와 5개국이 추진한 이란 핵협상이 중동의 긴장을 완화시킬지, 그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록히드 마틴의 무기 수출 증진 전략이 타격을 받을지 여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중동과 아시아는 지속적인 '불안정성(volatility)' 탓에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는 '성장하는 지역'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달리 말하자면 걱정 말라는 얘기다. 세계가 전쟁에 휘말려 있거나 전쟁 직전으로 치닫는 한 록히드 마틴의 수익은 결코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록히드 마틴의 생산품들은 그런 '불안정성'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을 입증할 것이다.

 

휴슨이 회사를 이끌면서 록히드 마틴은 최소 25%의 수익을 무기 수출에서 얻으려는 목표를 세웠다. 사업 영역의 30%를 해외 무기 판매에 두고 있는 보잉은 이를 보다 잘 수행해 온 업체다.

 

중동으로부터 들려오는 좋은 소식(당신이 군수업자라면)

무기 거래는 미국 정가의 생존 방식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주요 기관들은 미국 무기들을 세계 시장에 유통시키려는 의지가 확고하다. 록히드 마틴이나 보잉 같은 업체들에게 보다 좋은 여건을 제공하려는 의지 또한 분명하다. 전 세계의 동맹국 정상들을 만나고 다니는 대통령부터 국무 장관, 국방 장관, 대사들까지 미국 관료들은 무기 회사의 외판원 노릇을 한다. 국방부가 조력자다. 무기 거래의 중개, 촉진, 거래대금 입금부터 동맹국들에게 무기를 이전하는 일까지 미 국방부의 본질은 세계 최대의 무기 거래상이다.

 

통상적인 무기 거래에 있어 미국 정부는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국방부는 동맹국에게 그들이 필요한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그 나라의 군사력을 평가한다. 물론 동맹국들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수십억 달러짜리 미국산 첨단 무기들이다. 그런 뒤 국방부는 거래 조건에 관한 협상을 돕고, 의회에 그 세부 내용을 고지하고, 해외 구매자로부터 자금을 징수해 방위 계약의 형태로 미국의 업체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대부분의 무기 거래에서 유지 및 예비 수요를 미국산 시스템으로 하는 계약에도 국방부가 관여한다. 이 모든 과정을 돕는 기구인 국방안보협력국은 3.5%의 수수료를 떼어 간다. 이것이 끝없이 더 많은 무기를 판매하게끔 하는 인센티브인 셈이다.

 

미제 무기의 대외 수출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 정치다. 군수업체들은 자신들의 무기 공장을 가능한 한 미국의 모든 주와 지역에 배치시키려 한다. 그래야 의원들이 더 많은 무기 생산과 수출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미제 무기의 해외 수출이 미국의 각 지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수업체는 무기 수출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부의 끊임없는 지원을 이끌어 내며 이것이 미 국내 정치의 일부가 됐다.

 

예를 들어 제네럴 다이나믹스는 오하이오와 미시건 주에 있는 탱크 제조 설비를 유지하고 생산품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하기 위해 국방비에 추가 예산이 반영될 수 있도록 관리해왔다. 이 비용은 국방부가 요구하지 않아도 의회가 알아서 예산으로 잡는다. 보잉은 쿠웨이트에 40대의 F-18s 전투기 판매 계약을 위해 개설한 세인트루이스의 생산 라인을 유지하고 있는데, 협상이 보다 빨리 진행되도록 오바마 정부와 협력한다. 이런 지역의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이 무기 수출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전 세계 무기 유통 시스템의 정점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이나 주류 언론, 군부 등은 이러한 실상에 대해 함구한다. 오바마 정부는 무기 수출업체들의 좋은 친구라는 점이 입증됐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뒤 6년 동안, 미국 정부는 1900억 달러가 넘는 무기 수출 계약에 관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역대 미 행정부의 실적 가운데 최대 액수이다. 게다가 오바마 정부는 블랙호크, 휴이 헬리콥터, C-17 수송기 등 각종 무기류들에 대한 검사 기준을 낮춰 수출 규제를 완화했다.

 

수십 년 동안 규제 완화를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군수업체들에게 이는 그야말로 복음이다. 하지만 규제 완화는 무기 밀매상이나 인권을 유린하려는 자들이 보다 쉽게 미국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예컨대 아르헨티나와 불가리아에서 루마니아나 터키에 이르는 36개국의 미 동맹국들은 미국 무기와 부품을 수입할 때 더 이상 국무부의 허가가 필요 없다. 이는 그 나라들에서 무기 밀매 조직이 더 쉽게 구축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란이나 중국 같은 제3국에 미국산 무기와 부품들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미 일반적인 일이지만, 새로운 규제 환경 하에서 이런 일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오바마 정부가 무기 수출업자들을 돕는 쪽으로 후퇴하는 경향은 2013년 정부의 수출 개정 조치에 대한 청문회에서 분명히 확인되었다. 당시 국무부 정치군사업무국 부차관보이던 톰 켈리는 정부가 무기 수출 증진에 있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 기업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으며, 무기 판매가 확실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매일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무기들을 더 잘 팔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궁리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와 국방부의 협조로 최근 무기 수출 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지역은 중동이다. 정부는 F-15 전투기와 아파치 공격 헬기, 전함,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사우디아라비아에만 500억 달러 이상의 무기 계약을 중개했다.

 

가장 수익성이 좋으면서도 가장 파괴적인 계약은 사우디가 예멘에서 벌이고 있는 잔혹한 전쟁에 폭탄과 미사일을 판매한 것이다. 이 전쟁 때문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게 됐다. 미시건 주의 존 코니어 하원의원과 코네티컷 주의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이 살상 무기들을 그 지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입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워싱턴 정가에 대한 사우디와 군수업체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극복해내지는 못했다.

 

무기 판매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중동으로부터 들려오는 좋은 소식은 끝이 없다. 정부가 발의한 이스라엘 10개년 원조 계약을 보자. 법률이 제정된다면,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국방 지원은 현행보다 25%(연간 약 40억 달러)가 늘어난다. 동시에 이는 이스라엘의 방위 산업에 대한 미국의 원조 개발 비용 가운데 4분의 1을 이스라엘이 부담하도록 한 규정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도록 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미국) 납세자들이 4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전액을 부담하게 되며, 이는 록히드 마틴 같은 군수업체의 금고로 곧바로 흘러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수십조 달러에 달하는 이스라엘의 F-35s 전투기 계약의 핵심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불안정성'

록히드 마틴의 메를린 휴슨에 따르면, 중동이 록히드 마틴이나 다른 군수업체들에게 유일한 성장 시장은 아니다. 중국과 주변국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남중국해는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들에게 미국 전함과 다른 군수품들을 판매할 만한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남중국해 갈등은 태평양 제해권을 미국이 장악하느냐 중국이 장악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싸움의 전초전이다.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기각한 최근 헤이그 국제분쟁재판소의 결정은(중국은 이 결정을 즉각 거부했다) 이 지역의 무기 구매 속도를 증가시킬 것이다.

 

아울러 끝도 없이 좋은 소식을 제공하는 북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공포의 증대는 미국이 지원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대한 수요를 부추겼다. 남한은 록히드 마틴의 사드(THAAD) 미사일방어 시스템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오바마 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미국 무기 수출 제한 조치를 해제하기로 한 결정은 미국 군수업체들에게 또 다른 중요한 시장을 열어준 셈이 됐다. 지난 2년 동안에만 미국은 대만,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동맹국에 150억 달러 이상의 무기류를 수출했다.

 

또한 오바마 정부는 인도와 장기적인 방위 관계 구축을 추진해 왔는데, 이 역시 미국 무기수출 업체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이다. 지난해에 미국과 인도 정부는 항공기 엔진과 항공모함 사업 계약을 포함하는 10개년 방위 조약에 서명했다. 최근 미국은 과거 소련과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인도의 무기 시장에 상당한 진출 성과를 거두어 왔다. 58억 달러 규모의 보잉 C-17 수송기 판매, 14억 달러 규모의 공격형 아파치 헬기 판매와 관련된 지원 서비스 계약 등이 최근 성사됐다.

 

일촉즉발 상황의 유럽도 간과할 수 없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결과는 영국에 대한 미국의 무기 수출을 불확실하게 하는 요인이다. 영국은 지난 2년 동안에만 60억 달러가 넘는 거래를 했을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큰 미국 무기 구매자 역할을 해왔다. 이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미국이 판매한 무기 거래량보다도 많은 규모다.

 

영국의 군수업체인 BAE는 록히드 마틴이 F-35 전투기를 판매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해외 파트너다. 이들은 14000억 달러라는, 역사상 가장 값비싼 무기 프로그램을 입안했다. 만약 브렉시트에 따른 긴축 재정으로 인해 이 계획이 지연되거나 취소된다면 F-35 거래(혹은 다른 중요한 무기 수출)는 미국 군수업체들에게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점은, 다른 예산이 감축되더라도 BAE의 로비스트들이 이 계약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될 것이라는 점이다.

 

군수업체들에게 희소식은 영국의 긴축 재정이 실행되더라도 냉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동유럽과 중부유럽이 사업 기회를 제공해 (영국에서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14~2015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결과로 이 지역에서 방위비가 13% 증가했다. 특히 폴란드는 22%나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런 환경에서 전 세계 무기 거래 동향은 중요한 뉴스거리이며, 불안정한 지역의 나라들은 더 강력한 무기를 사들이고자 할 것이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이건 괴물 같은 사업이다. 그리고 이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보잉 여객기를 판매하는 것보다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죽음의 상인'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이나(1934년 공화당 소속 제럴드 나이 상원의원 주도로 1차 대전 중 무기 생산 및 수출로 떼돈을 번 군수업체들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미 국민들은 이들을 '죽음의 상인'으로 불렀다: 역자) 1991년 걸프 전쟁의 결과로 누가 사담 후세인을 무장시켰는지에 대한 논쟁이(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레이건 정부는 이란의 이슬람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이라크 후세인에게 엄청난 자금 지원과 함께 화학무기 기술 등을 제공해 이라크의 군사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역자) 있긴 했지만, 고삐 풀린 무기 수출에 대한 공적인 저항은 역사적으로 드물었다. 현재 존 코니어나 크리스 머피, 켄터키 주의 랜드 폴 상원의원 등 소수의 의원들이 사우디에 대한 집속탄과 폭탄, 미사일 판매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군수산업의 경제적 가치나 그 안에서 워싱턴 정가가 차지하는 위상에 관한 공적인 논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언론에서도 중요한 기사 주제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일의 무기거래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백악관은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국방부는 바퀴에 기름칠을 한다. 그리고 이윤에 굶주린 미국 군수업체들에게 달러가 굴러들어간다. (번역 : 임경구 기자)

 


비경 - 박인기 Com pose d by Sa nna ...

비경(秘景) / "피리와 18현 가야금을 위한 2중주곡

서장 : 전설

1 장 : 해안절경(海岸絶景)

2 장 : 기암절경(奇巖絶景)

3 장 : 용두비경(龍頭秘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