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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잔재 (殘滓)

by 이성근 2021. 9. 1.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무형의 유산인 왜곡된 전통문화 바로잡고 잔재는 청산해야

공적 국행의례까지 민간 지역의례인 마을제사로 전락시켜

우리 민족 전통의 근원적 모습 없애고 자주의식 분열시키기 위한 것

 일본 학자들의 굿 조사 장면. 경찰이 참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 조건에서 공연되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설명이다. (사진=(사진=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항일투쟁과 일제잔재 중)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내건 미끼 중 하나는 조선을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시켜주겠다는 사탕발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극복해야 할 문화로 매도하고, 민속 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해 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돼버렸다.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왜곡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바로잡히지 않았고, 잔재 또한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무형의 유산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일상,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의식세계와도 깊게 관계되어지는 만큼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강제로 빼앗긴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되찾는 일이야말로 일제잔재 청산의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국가 제사의 축소와 변질

 

순종황제실록에 따르면 1908 7 23일 국가 제례는 제실(帝室)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제사는 영원히 폐지하고 합사하는 것이 옳은 묘사전궁(廟社殿宮)은 옮길 장소를 찾아 봉안토록 하고 대제(大祭), 별제(別祭), 속제(俗祭), 삭망제(朔望祭)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신당(神堂), 아일(衙日), 고사(告祀)와 같은 것은 폐지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각종 제사의 규모와 횟수는 축소되고, 상당수의 제사는 폐지됐다. 조선의 왕족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왕실 봉작제에 편입시켜 종묘제례는 이어졌지만,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26년 순종이 승하, 1928년 종묘에 부묘된 이래 종묘는 조선왕조의 상징성을 상실한 채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장말도당굿. 장몽기 장군을 기리기 위해 도당할아버지가 한 쪽 다리를 들고 외다리춤(깨끼춤)을 추고 있다. (사진=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항일투쟁과 일제잔재 중)

 

대한제국의 국가 제례 공간은 자연스레 의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일본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 신궁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1898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왜성대(倭城臺)에 대신궁(大神宮)을 세웠으며, 1908년 남산에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1912년 조선신사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거쳐 1920 5월 기공식, 1925 10월 준공식을 치렀다.

 

이때 남산 중턱에 있던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고, 남산은 일본의 국조대신(國祖大神)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위한 제례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전통 유교 교육의 본산인 성균관의 경우 1911 6 15일 조선총독부가 경학원으로 개칭하면서 교육 기능을 없애고 문묘 석전 의례만을 유지시켰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의 역할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겨진 상태였고, 교육 기능이 없는 제사 기능은 후손이 끊긴 제사나 다름 없었다.

 

결국 문묘 대성전은 일제가 전국 향교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공식 통로가 됐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황국식민화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됐다.

 

그런가 하면, 관왕묘와 성황제 등 국가 차원의 공적 국행의례를 민간 지역의례로 바꿔 마을 제사로 전락시켰다. 마을굿의 형태로 진행되던 민간의 동제도 규제하면서 간단한 고사나 치성으로만 할 수 있게 했고, 도당굿은 도당제로 변했다.

 경기도 도당굿. (사진=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항일투쟁과 일제잔재 중)

 

1934 11 10일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인문 교화 방면의 민풍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관혼상제의 일생의례를 대폭 축소하는 의례준칙을 반포, 의례의 간소화가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필요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채미하 한국교통대학교 초빙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제사는 대체로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제사의 절차대로 지냈고, 제사의 종류도 기일과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나뉘어져 있었다면서, “의례준칙은 제례의 범위를 기제사와 묘제로 축소했고, 대상은 4대 봉사에서 2대로 한정했다. 제전(祭奠)의 공물(供物)도 간략하게 정비했고, 신주 대신 지방 또는 사진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제의 전통문화 왜곡... 마을신앙 탄압, 신토(神道) 강요

조선의 전근대적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민속 현상은 무속과 민간신앙이었다. 일제는 1912 3 25 경찰범처벌규칙을 정해 무속 행위를 범법으로 규정, 강력한 단속을 통해 마을굿과 개인굿을 금지시켰다. 이는 무속의 사회적 기능, 예를 들어 민중의 오락을 대표하고 정신을 치유하는 등의 기능을 인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경찰범처벌규칙 1907년에 발포된 일본의 경찰청처벌령을 모방한 것으로,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교(國敎)의 상징인 천황제의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도 무속과 일맥상통하는 신토란 전통 종교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에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어 집중 탄압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경기도 덕물산 도당굿. 산록에서 춤추는 사당패. (사진=일제하 경기도 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중)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일제는 문화정치기에 기존의 탄압 일변도 정책을 선회해 숭신인조합 등 무속인 조합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봉숭하도록 했다 무속을 이용해 이와 유사한 신토를 국교로 삼으려는 야욕을 가동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무속을 정화한다는 명목 아래 무당에게 신사신앙을 교육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무속을 동화시키기 위한 숭신단체가 경성·경기 지역에 창설되기도 했다. 한국인의 신앙적, 종교적 토대가 민속 신앙적이라는 점이 조사에 의해 밝혀지면서 정신적인 지배를 목적으로 일본 신도 속으로의 편입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제가 그토록 경계하고 끊어버리기 위해 애쓴, 우리 민족의 애향심과 대동단결의 힘은 강했다. 결국 일제가 패망하며 이러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중예술의 쇠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세습무 집안이 주축이 돼 만든 지역별 자치 조직으로, 수많은 재인(才人)과 광대(廣大)들이 활동했던 재인청이 1920년대에 이르러 하나 둘씩 해체되며 사라졌다. 전통 연희의 일부는 전승이 단절되기도 했다.

 

1784년부터 나름대로 엄격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130여 년간 그 명맥을 이어온 경기도 재인청(현 오산시 부산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역시나 경찰범처벌규칙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 보유자  오수복 선생. 2004 12 12일 부천시 중동에서 열린 장말 도당굿 현장 사진. (사진=문화콘텐츠닷컴 제공)

 

각종 문화예술의 원형, ‘경기도 도당굿’... 뿌리 찾고 원형 복원해야

1919 3·1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적이고 일방적인 동화 정책에서 벗어나 식민지의 문화, 역사, 제도를 인정한 후 지배국인 자신들의 여러 제도를 식민지에 맞춘다는, 이화(異化) 정책으로의 전환을 꾀하게 된다.

 

특히 1930년대 들어 마을의 복합적인 공동체 의례인 동제(洞祭)’ 부락제(部落祭)’라 칭하며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는데, 그 이면을 살펴보면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 ‘심전개발(心田開發)’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을 잘 다스리면 경제적, 사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독려했지만, 실상은 사상을 통제해 식민지배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을 이용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국민으로 개조하는데 동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김준기 전임연구원은 경기도 도당굿 같이 무굿과 풍물을 동반한 동제를 억제하고, 신토와 유사한 절차를 지닌 유교식 동제로 획일화를 시도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마을의 전통 신당을 신사(神社)로 교체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신토를 한국의 국교로 삼으려는 그들의 술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이포의 옛 삼신당이라고 하는데, 입구가 도리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신당을 허물고 세운 신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진=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항일투쟁과 일제잔재 중)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려는 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1936년 이후의 일이다. 일제는 일읍면 일신사를 설치해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제하고 국민의례화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고유 동제의 특성을 과소평가하고 얕잡아 본 그들에겐 정책 실패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는 마을굿이 혈연 간의 파벌이나 반상간의 계층 의식을 약화시킬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감과 일체감을 엮어내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과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마을굿은 우리 민족 전통의 수호였고, 자주적인 민족수호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신토와 유사한 절차로 획일화를 강요한 탓에, 지역별 특수성이 희석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경기도 각 마을에 전승되던 도당굿이 나름의 마을 역사를 반영,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뿌리를 찾고 원형 복원에 나서야 할,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재인청도 도당굿에서 그 원류가 확인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일제의 민속신앙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은 우리 민족 전통의 근원적인 모습을 없애고 자주의식을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정신적으로 똘똘 뭉치는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경기신문 강경묵 기자 kamsa593@naver.com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공동체 놀이 통제와 탄압...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 철저히 경계

비합리적, 낭비적, 위협적 또는 너무 많은 사람들 모여 안된다 명분

우리의 것들 사라지고 왜곡되는 수모... 제대로 된 원형 복원 이뤄져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출판된 책들의 제목을 보면 그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귀신’, ‘조선의 향토신사’, ‘조선의 미신과 속전 등등. 한국이 전근대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문명, 조선은 미개라는 프레임을 짜 한국인 스스로 믿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아울러 일제는 공동체 놀이에 대한 통제와 탄압으로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철저히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전통 민속놀이를 장려한다는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을 전쟁에 내보내기 위한 꼼수가 숨어 있었다.

 김준근 기산풍속도 중 석전. 조선 왕실에서는 석전을 군사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장려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가 석전을 관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태종 이방원 역시 석전을 즐겼다. (소장처=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한국 전통사회에선 집단놀이가 많이 행해졌는데, 이러한 우리의 민속놀이도 전근대적 유산으로 낙인찍히며 점점 쇠퇴해갔다. 소위 문화정책의 시기였다는 1920년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3·1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군중들이 모이는 집회를 철저히 경계했고,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아마도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열광하며 참여했던 대표적인 놀이로 돌팔매싸움(石戰)’, ‘횃불싸움’, ‘줄다리기 등을 꼽을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석전(石戰)’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유서가 깊으며, 일반적으로 마을이나 지역 단위로 남자들이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모의 전투를 벌이는 상무적인 놀이였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정월 보름날이 되면 한양의 애오개 사람과 동서남의 3대문 밖 사람들이 만리현(萬里峴)에서 맞서는데, 두 패가 되어 몽둥이나 돌을 들고 싸움을 벌인다고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때 3문밖 편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풍년이 오고, 애오개 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는 부분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는 부녀자들의 모습. (사진 출처=문화콘텐츠닷컴)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행주치마가 여인들이 돌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은 믿을 수 없다 해도 석전이 전투에 활용된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일본은 조선군의 돌팔매 실력에 한 번 혼쭐이 난 경험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는 석전이 실전을 방불케 해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 등 위험성이 동반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근거를 댔다 하지만 위험성과 상관없는, 조선인의 단합과 용맹성을 기르는 다른 민속 현상도 탄압의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짐작케 한다고 부연했다.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 지역의 액을 막아 편안케 함을 위한 행사로 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진은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가 지난 2019 4 11일부터 14일까지 진행한 민속축제 모습. (사진=당진문화관광 홈페이지)

 

이같은 현상은 두레에 관한 주의사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두레는 마을마다 50~60명 정도가 보편적이었고, 군대처럼 강력한 규율을 갖고 있었다. 서열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 농기뺏기라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기도 했을 정도란다. 이에 일제는 비용과 충돌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품앗이로의 전환을 유도한다. 품앗이는 고작 3~5명 정도가 일손을 공유하는 만큼 집단 행동의 돌발성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일제가 군중집회와 같은 대동놀이를 경계했다는 증거는 줄다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30 2 11일자 A 신문에 실린 다음의 내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부산) 동래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줄다리기 대회는 유일무이한 대중적 운동으로서 일반 대중은 삭전의 승부를 보지 못하면 명절을 쉬지 못한 감각조차 들 만큼 갈망과 기대가 큰 대회인데, 지난 8일 하오 3시에 이르러 당국은 돌연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금지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경기도 또한 논농사가 이뤄지는 평야 지대에서 행해지던 대규모 줄다리기 행사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중단됐다. 어르신들의 제보에 따르면 줄다리기를 하려고 줄을 꼬는 족족 어느 틈엔가 일경이 나타나 칼로 자르고 가곤 했다는 게 김 연구원의 전언이다.

 김득신(1754~1822) '천렵도'. 18세기 수묵채색화. 소장처=간송미술관

 

그랬던 일제가 왜, 1930년대 들어와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하며 우리의 민속놀이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전쟁 병기로 쓸 조선인의 체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그 시범 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경기도였다. 경기도 지방과가 1933년부터 다음 해까지 조사·정리한 자료집 농촌오락행사간(農村娛樂行事栞)’의 서문에는 조선 재래의 농촌 오락은 여러 폐해가 있는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계승하거나 답습할 것이 아니라 그 공과를 가려 나쁜 점을 개선하고 좋은 점을 장려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 자료집에는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민속놀이의 거행 시기, 내용, 특징들과 함께 개선점, 시행상의 주의사항 등이 들어있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를 폄하하고 일제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널뛰기. 새끼줄을 단 것으로 보아 일제의 시행지침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

 

예컨대, 널뛰기의 경우 침목은 나무를 이용하지 말고 볏단 또는 가마니를 이용한다 판은 길이 7,  1 8촌 정도, 두께는 1촌 이상으로 한다 윗부분에 새끼줄을 달아 이 새끼줄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한다 등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 민속 중에서 어떤 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것은 낭비적이거나 위협적이라며, 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통제를 가했다. 그렇게 우리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왜곡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을 바로 세우고 문화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혹은 재밌는 놀이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 경기도민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일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거의 모든 문화예술 역시 자랑스런 우리네 선조들의 전통에서 비롯됐으니 당연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다행히 경기도를 이끌고 있는 이재명 지사는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에 대한 의지가 높고, 실천력도 매우 돋보이는 편이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의 문제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단순히 국가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재현하는데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원형을 얼마나 제대로 복원해 냈는가의 여부가 될 것이다. 전통 민속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일제강점기 들어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특히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식민지 정책을 위한 사정 자료로, 일제의 입맛대로 선별되고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다.

 

 

숨겨진 의미 알면 쓰지 못할 일제잔재어

의미도 모르는 채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문제 각별한 관심 필요

잔재 단어들의 의미, 정확히 알려줘야... 최대한 짧은 시간 관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정수 되찾는 일... 일제 잔재어뿐 아니라 외래어도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우수한 언어로 평가돼 있고, 새로운 한류 문화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사진=국립국어원 홈페이지 화면 캡처)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말을 쓰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는 꿈을 꾼다네.”

 

일제 말 국민(초등)학교를 다닌 한 어르신의 말이다. 일제의 강압적 교육의 폐해는 이렇듯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뼛속 깊이 박혀 상처로 남아 있다. 일제가 그토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써가며 말살하고자 했던 한글은 지금 어떤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우수한 언어로 평가돼 있고, 새로운 한류 문화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결국, 그것이 줄임말이나 신조어라 할지라도, 우리말 한글을 쓰는 방식에서 비롯됐다면 그 역시 미래세대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다만, 세대 간 소통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하루 빨리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위 젊은 사람들의 것으로 치부하고 방치하고 있다가는, 언젠가 같은 우리말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불상사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미 늦은 시작이다.

 적어도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면 쓰지 않을 단어들은 최대한 많이 알려주고 깨우쳐 주는 것이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나서야 할 마땅한 사업이다. (사진=MBC ‘선을 넘는 녀석들 화면 캡처)

 

최대한 빠른 시간에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분명 우리말로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제시대 교육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요즘 세대들 간에 통용되는, 게다가 의미도 모르는 채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문제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적어도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면 쓰지 않을 단어들은 최대한 많이 알려주고 깨우쳐 주는 것이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나서야 할 마땅한 사업이 아닐까 한다.

 

최근 경기문화재단 후원으로 열린 ‘2021 문화독립 만세운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비보이이자 여행 인플루언서인 브루스리 씨는 나 역시 무심코 쓰던 상당수 단어들이 일본어 잔재였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무엇보다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가 충격적이었다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본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단어들을 일상에 사용할 만큼 바보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지와 변화라는 말을 앞세운 캠페인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잔재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 해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간질병 환자라고 부를까? 세상에 어떤 친구가 친구에게 지뢰를 밟아 다리가 없어질 놈이라고 하겠나? 바로 땡강 부리지마 찐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다.

 

땡깡 부리지마는 일본식 한자 텡캉으로 간질병 환자, 간질병의 의미로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인들을 비아냥댔던 단어였다. 또 일본어 진빠에서 유래된 말, ‘찐따 6·25전쟁 당시 우리 군인들에게 너는 지뢰 밟을 놈이야!”라며 무시와 모욕의 표현으로 썼던 말이다.

 

묵찌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은 러시아의 군함, ‘는 침몰, ‘는 파열의 뜻을 담아, ·일 전쟁 후 일본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게임이라고. 우리말로는 가위, 바위, .

 

브루스리 씨는 나라면 숨겨진 의미에 관한 설명을 듣는 순간부터 우리말을 사용할 것 같다면서, “현대는 15초짜리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어학회가 표준어 사정을 위해 마련한 제1독회 당시 현충사에서 찍은 기념사진. 1번 이윤재, 2번 한징, 3번 안재홍, 4번 이숙종, 5번 이희승, 6번 최현배, 7번 장지영, 8번 이극로. (사진=한글학회 제공, 출처= ‘나라말이 사라진 날’ 96)

 

일본어 잔재 청산은 기본적으로 선행돼야 할 문제이자 과제다. 특히나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정서를 해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작업하고 심어놓은 것들, 우리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결단코 찾아내 없애야 한다.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인 정재환 박사는 저서 나라말이 사라진 날을 통해 영화 말모이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며 소개한다. 바로 판수의 중학생 아들 덕진이 월사금을 내지 못해 일본인 선생에게 빠따를 맞는 부분이다. 이때 덕진이 자신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데, 그 순간 선생은 학교에서 조선어가 금지된 게 언제 적 일인지 모르냐?’며 덕진을 일으켜 세운 뒤 사정없이 따귀를 올려붙인다.

 

정 박사는 영화는 상상력으로 만드는 것이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고 과장되거나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당시 학생들이 처한 현실은 영화 이상이었다 어느 학교에나 교실 벽에 국어상용이라 적힌 표어가 붙어 있었고, 벌금통을 만들어 조선어를 쓸 때마다 1전씩 넣도록 한 학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 사용 학생에 대한 감시와 처벌은 일상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보통학교 국어독본 표지(왼쪽)와 본문(오른쪽). (사진=서울교육박물관 제공, 출처=‘나라말이 사라진 날’ 45)

 

일제는 조선 땅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로 말하게 하고, 일본 정신을 갖게 하려고 했다. 그래야 천황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조선어 말살을 통해 완벽한 동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결국 천황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돼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다.

 

1911 9 22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배의 방향을 담은 조선교육령을 발표한다. 교육의 목표는 역시나 충량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국어, 즉 일본어를 보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1 1일부터 보통학교를 비롯한 조선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됐다. 보통학교 교육과정에선 일본어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조선어는 소홀이 취급됐으며, 조선 역사는 사라져갔다.

 무기를 만들기 위한 금속을 공출하는 장면 뒤로 국어상용 표어가 걸려 있다. 정일성, ‘인물로 본 일제 조선 지배 40(1906~1945)’. (출처=‘나라말이 사라진 날’ 149)

 

우리말은 다시 살았다. 우리의 글자로 다시 살았다. 다시는 말하는 벙어리 노릇이나 눈 뜬 소경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 정태진, ‘재건도상의 우리 국어 

 

일본어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운명을 다했고, 우리말과 한글은 독립했다. 말 그대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35년 동안이나 주입한 일본어는 일상을 잠식하고 있었고, 해방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와 같은 현실에 직면해 있다.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제 시기 왜곡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즉 민족정기를 올바르게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인가. 우리말 사랑은 일제 잔재어뿐 아니라 영어 등 외래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아무리 좋은 외국어라도 우리말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삼베 수의·유족 완장 장례문화, 전통 아니었다?

예로부터  중시해 온 우리나라, 일생의례 지내

최연우 교수 전통 수의는 평상시 입던 가장 좋은 옷

1934년 조선총독부 의례준칙 발표삼베 수의 사용 시작

상주의 완장·가슴에 다는 리본, 영좌 꽃 장식도 일제잔재

 2001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꽃상여에 하직인사 드리는 모습 (사진=경기도박물관의 경기민속지 5-일생의례 발췌)

 

이제껏 전통이려니 생각하고 따랐던 삼베 수의와 유족이 차는 완장 등 장례문화가 일제잔재라니 참 애석하네요.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베로 수의를 만들어 고인에게 입히는 풍습이 사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년 전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는 경기도민 A 씨는 전통 장례문화인줄 알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 전통 사상의 영향으로 효를 중시해왔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옛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머리카락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은 조상을 극진히 섬겼다.

 1996년 경기도 성남에서 장례 행렬(행상)이 진행 중인 모습이다. (사진=경기도박물관의 경기민속지 5-일생의례 발췌)

 

2002년 경기도박물관이 발간한 경기민속지 5을 살펴보면 선조들은 태어나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에 행하는 일생의례를 지냈다. 인생의 고비는 출생과 성년, 혼인, 사망과 같은 신체적 성장과 쇠망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믿었으며, 출생의례를 중시한 서양과 달리 사후의례의 하나인 제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인 죽음을 다루는 의례가 상례(喪禮), 그 일부분으로 장사를 치른다고 해 매장·화장 등으로 시신을 다뤄 처리하는 의례가 장례(葬禮)이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수의(壽衣)는 장례 과정 중 시신을 목욕시킨 후 평상시처럼 팔다리를 끼워서 옷을 입히는 의식에서 쓰는 옷으로 습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수의가 변질됐다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수의는 평상시 입던 가장 좋은 옷으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장례(염습) 문화를 보여주는 순학옹을 염하다-창녕성씨 성급 묘 출토 유물 특별전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수의로 입은 웃옷 모음()과 사폭바지 형태의 솜누비 바지-겹바지-홑바지 모음(아래)을 볼 수 있다. (사진=석주선기념박물관 온라인 전시 캡처)

 

최연우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는 2017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 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삼베 수의의 등장과 정착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일제의 식민주의 정책이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삼베 수의가 우리의 본래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상례문화로 자리 잡았고, ‘바람직한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정착·확산시키기 위해 등장한 유언비어에 가까운 속설이 믿음이 돼 정작 우리 전통이었던 다른 소재의 수의가 점점 설 곳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문헌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의 수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유학자들이 가례주석서를 편찬하는데 대표적으로 이재(李縡)가 쓴 사례편람을 보면 수의 소재로 주, , , , 무명이 제시된다. 베는 남자용 홑바지에 쓰였고, ‘주나 무명, 베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곤룡포 부 용문보의 모습. 임금이 평상시 업무를 볼 때 입었던 집무복으로 용포 또는 망포라고 불렸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왕실의 수의 소재는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 ‘국조상례보편’,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의 국장을 기록한 의궤 등에서 확인된다.

 

왕의 장례에는 광직, 모단, 모시 등을 썼고 왕비의 장례에는 금선, 필단, 모단, 모시 등을 썼다고 한다. 어디에도 삼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수의에 삼베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 100여기의 분묘에서 발굴된 수천 점의 옷에서 염습의 구분 없이 모든 출토복식을 대상으로 했을 때 극소수에 해당하는 몇 점의 삼베옷이 나왔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시 입던 복식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제정 의례준칙’, 유족 완장·국화 등 한국전통에 변화

 고종의 국장식 장면으로 추정되는 장례행렬 모습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광복 76주년을 맞이했으나 오늘날 국내 장례문화는 아직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

삼베로 만든 수의와 유족 완장과 리본, 영좌의 꽃장식 등 장례 모습은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의례준칙에서 비롯됐다.

 

조선총독부는 1934 11 10일 전통적인 사례에 근거를 둔 간략화 된 의례준칙을 제정·공포하며, 조선시대 상장례 규범서의 하나인 사례편람의 상례절차와 내용을 대폭 축소·간소화했다.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한 조선총독부는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무시하고 상주와 상복, 습렴 등에 대해 새로운 절차를 제시했다. 이때 값비싼 비단, 명주 사용을 금지하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만들 것을 강제했다.

 삼베 수의와 유족이 팔에 차는 완장, 가슴에 다는 리본, 영좌의 꽃 장식은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문화가 아니다. (사진=한국장례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상례의 제한 내용은 성복의 절차를 생략하고, 염습이 끝나면 바로 상복을 입도록 했다. 상복에는 상장을 달도록 제한하고,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또 유족이 한복 등 전통복장을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나비 모양의 검은 리본을 달게 했다.

 

고인의 영혼을 모시는 영좌 주변을 국화로 장식하는 것도 일제의 영향이다. 한국은 사람의 시신을 실어서 묘지까지 나르는 상여를 장식하는 종이꽃 수파련 말고는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

 2001년 경기도 포천시에서 장례 의식 중 평토를 끝내고 제사인 평토제를 드리는 모습이다. (사진=경기도박물관의 경기민속지 5-일생의례 발췌)

 

그렇다면 전통 장례문화에서 삼베옷은 누가 입었을까?

나는 군부(임금)에게 죄를 얻었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죽는다. 너희들은 옷은 삼베옷으로 하고 염은 삼베 이불로 하며, 띠풀로 관을 덮고 달구지로 실어다 장사하여 대략 흙으로만 덮도록 하라.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교리 최기남이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 이와 같이 성혼의 유서가 인용됐다. 성혼은 임진왜란 시 선조가 피난 중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났음에도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다고 해 죄를 입었고 위 내용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에 삼베옷은 죄인이 입는 옷이라는 관념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를 여읜 자식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는 뜻에서 삼베 상복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 현대 민속에서 삼베 수의를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련하는 수의로 인지해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전통 수의 복원일제잔재 청산 위한 움직임 활발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 15명이 2016년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했다. (사진=단국대학교 제공)

 

전통 출토복식을 국내 최대 규모로 소장하고 있는 단국대학교는 2016년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했다.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과 장례문화 복원에 나선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를 비롯해 전통의상학과와 전통복식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진 15명이 삼베 수의가 일제잔재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고증해 1년여 끝에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삼베 수의가 등장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이 전통수의로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중국산까지 비싸게 유통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바쁜 현대인들이 전통 예법대로 모두 장례를 치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의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장식이나 조화도 없애고 전통대로 병풍을 세우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게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한국장례협회와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김명연 국회의원이 장례문화의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우리시대 장례문화를 진단하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공동주최했다.

 

박일도 한국장례협회장은 일제강점기 하에 유입된 왜곡된 장례문화를 확인하고 바른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발점이 됐다면서 앞으로 일제잔재를 확인하고 전통을 발굴,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김명연 의원 역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장례 의식과 풍습을 청산하는 것이 자주독립의 정신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경기신문 신연경 기자 shinyk@kgnews.co.kr

 

 

전북 곳곳에 존재하는 친일잔재

전북 친일잔재 건물 131군산 30 · 전주 27곳 등

진안 강정리 근대한옥 등 잘못된 해석으로 피해 건물

학계 항일운동 중심지 철거 마땅교육적 활용 고심

친일건축 낙인 전, 정확한 고증통한 연구 선행되어야

일제에 억압받고 핍박받았던 세월을 이겨 낸지 어언 76. 하지만 전북 곳곳에는 여전히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의 흔적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 곳곳에 침투했다. 최근 왜색논란으로 문제가 된 우림교 조형물이 그 결과다. 전주시는 전문가 의견과 주민들의 입장을 반영해 문제가 된 조영물을 소폭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도내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일제의 흔적을 놓고 철거와 교육적인 목적으로서의 현상유지를 놓고 학계는 여전히 서로 대립하고 있다.

 

현황

30일 전주시 덕진공원 내 취향정(醉香亭)을 비롯한 친일잔재가 시내 곳곳에 침투해 있다. /사진 = 조현욱 기자

 

30일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덕진공원 내 취향정(醉香亭). 덕진공원에 있는 연못이 보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취향정은 일제의 잔재다. 취향정은 연꽃향에 취한다는 의미로 일제강점기 당시 전주 지역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박기순이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국유지에 취향정을 설치하면서 이곳에 사람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열면서 개인적인 공간으로 활용했다. 일제강점기 박기순의 사유화에서 해방 이후 전주시민들에게 개방됐다. 박기순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추원참의, 전주 농공은행장 등을 역임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됐다. 즉 덕진공원의 취향정은 친일파가 만들어 논 일제의 잔재인 셈이다. 취향정 앞에 있는 취향정기(醉香亭記)’도 일제의 잔재다. 취향정기는 취향정을 건립하게 된 과정을 기록한 비석이다.

 

취향정 내 현판도 친일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취향정에 걸려있는 현판은 총 18개 김현섭(金顯燮)의 시이다. 이외에도 김양근(金瀁根), 주영조(朱榮祚), 박영기(朴永基), 강진옥(姜眞玉), 박영래(朴榮來), 강주산(姜舟山), 박영숙(朴英淑), 김성삼(金成三), 송한초(宋漢草), 김창섭(金昌燮), 박기순(朴基順), 김기0(金琪0), 정내화(鄭來和), 임병찬(林柄讚)을 포함한 6명의 시, 김제덕(金濟悳), 근차취향정운(謹次醉香亭韻) 이라는 제목 아래 17명의 시 각 1, 시회 참여자 16명의 시()  1수 등이 걸려있다. 이들이 적어 논 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찬양하고 있다.

 

전북도가 지난해 발표한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전북의 친일잔재 건물은 총 131곳에 달한다. 지역별로는 군산이 30, 전주 27, 고창 16, 익산 15, 완주 11, 김제 8, 부안 6, 정읍·진안 4, 남원 3, 무주·임실·순창 각각 2, 장수 1곳 등이다.

 

친일잔재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곳도 있다. 대표적인 장소로는 진안 강정리 근대한옥(전영표 가옥)이다. 전영표 가옥은 원강정마을 명당자리에 위치해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보기 드문 2층의 근대 한옥으로 지여졌다. 한국은 2층 한옥을 짓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전영표 가옥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그 산의 기운이 매우 강해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2층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남해경 전북대 건축학과 교수는 진안 강정리 근대 한옥은 2층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2층을 사용하지 않았고, 풍수지리학과 건축학이 결합된 건물로 봐야한다면서 일제의 잔재로 표시하긴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안

전북 곳곳에 남아있는 131곳의 친일잔재. 우리는 어떻게 이 잔재를 해결해야 할까. 학계는 일재잔재의 청산은 당연하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활용방안을 고심한다.

 

이동희 예원예술대학 교수는 친일 잔재에 대한 기준점으로 항일운동을 꼽을 수 있다면서 항일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서는 친일건축물을 남겨놔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어 다만 여럿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축물에 대해서는 아픈역사를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법도 생각해야한다면서 무조건적인 철거는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해외사례를 보면 그 활용법을 배울 수 있다. 핀란드 헬싱키 원로원광장에 위치한 알렉산드르 2세 동상, 독일 베를린 유태인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아픔을 화합과 치유 그리고 아픈 역사를 다시 일깨워주는 교육의 장으로 내세웠다.

 

전북에서도 이를 잘 활용한 곳이 있다. 군산이다. 친일건축 30곳이나 존재하는 군산은 블랙투어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다크투어리즘을 적용해, 관광적 효과를 극대화 하고, 또 하나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영기 전주대 관광학과 교수는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존재하던 건축물을 잘 보존해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한 도시라면서 왜색이라고 해서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아픈 역사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안내문등을 통해 교육적 효과 및 관광효과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일건축을 규정하기 전, 정확한 고증과 연구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건축학계에서는 연구가치가 큰 건축물도 많은 만큼 일방적인 친일건축으로 지목보단 철저한 고증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

 

남해경 교수는 진안 강정리 근대한옥은 풍수지리학과 건축학이 접목되면서 그 연구가치가 크다면서 “2층 건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적인 친일건축이라는 낙인을 찍기 전 역사학자와 건축학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정확한 고증을 거쳐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북일보 최정규 inwjdrb@nate.com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인천시교육청이 지난 해 초··고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일제 잔재를 조사해 모두 81건을 파악했으나,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였다.

 

섬집 아기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는 7개 학교에서 사용중이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이른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조사됐다. 나머지는 서운,송월,백마,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각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에 맡겼다면서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일제 잔재 수두룩 '조례'... 언어 독립 언제

지방자치단체 사무 규정이지만

일본어식 용어는 무분별 사용

'에 대하여' 번역 투도 버젓이

생활 속 흔히 쓰이는 말 중에 일본어식 용어와 표현이 많습니다. 섞이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는 언어의 특성상 일제강점기에 들어오거나 만들어진 용어·표현을 하루아침에 모두 없애기는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광복절을 맞이해, 될 수 있으면 덜 썼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자치법규 속 일본식 용어와 표현을 찾아봤습니다.

 

해방 76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일제 잔재 용어는 많이 남아 있다. 공공 기관은 일본어식 용어를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 사무를 규정한 조례에는 아직도 일본어식 용어가 많다.

 

국회 법제실과 법제처,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10월부터 알기 쉬운 법률을 만들고자 법률 용어 정비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어식, 전문적, 외국어 등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표현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특히 고쳐야 할 일본어식 용어 50가지를 추렸는데, 여기에는 아직 일상 속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많다. 조례도 마찬가지다.

 

조례 속 수두룩 = 법령 속에 보이는 일본어식 용어는 자치법규 속에서도 매우 흔하게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안전부 자치법규정보시스템(www.elis.go.kr)에서 '감안'을 검색해 보면 전국에서 조례 5116, 규칙 1845, 훈령 1728건 등에 쓰여 있다고 나온다. 다만, 검색 체계가 폐지된 조례 등도 포함하도록 돼 있어 시행 중인 것은 더 적을 수도 있다.

 

경남 지역 조례를 검색하면 568건에서 감안이 사용됐다. 모두 '~() 감안하여' 식으로 쓰였다.

 

감안하다는 우리말로 '고려하다', '참작하다', '생각하다', '살피다' 등으로 고쳐 써야 한다.

심지어 올바른 국어 사용을 위한 조례 속에서도 감안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남해군 국어 진흥 조례 4 2항에는 "군수는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남해 지역어의 발굴 및 보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지방자치단체 사무를 규정한 조례에 아직도 일본어식 용어와 표현이 넘쳐난다. 사진은 경상남도 도시재정비촉진 조례·지방세 세무조사 운영 규칙·경남사랑상품권 발행 및 운영 조례의 일부. /자치법규정보시스템 화면 갈무리

 

감안(勘案)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다. 국립국어원은 2012년 펴낸 <일본어 투 어휘 자료집>에서 "감안은 1938 2 25일 자 <매일신보>에서 3 2단 기사 제목에서 처음 나왔다"고 했다. 제목은 '사업(事業)의 완급(緩急)을 감안(勘案) 시국대책(時局對策)에 치중(置重)'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만, 감안이라는 단어는 1920 <동아일보>, 1923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나타났다.

 

국립국어원은 감안을 "일제 때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라고 규정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거나 우리나라만 사용하는 한국식 한자 용어를 담은 <한국한자어사전>에는 감안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게 국립국어원 설명이다.

 

법령 속 일본어식 용어로 정비 대상에 꼽힌 입회, 지불, 명기, 노임, 납득, 저리, 마대, 음용수 등도 조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입회는 참여나 참관, 지불은 지급, 명기는 분명하게 적다, 노임은 임금, 납득은 수긍이나 받아들이다, 저리는 저금리, 마대는 포대나 자루, 음용수는 먹는 물이나 마시는 물로 바꿔 써야 한다. 규칙이나 훈령에는 빈칸을 뜻하는 '공란', 이름표로 고쳐야 할 '명찰' 등도 종종 나타났다.

 

일본어 투·외래어도 많아 = 일본식 용어만 문제가 아니다. 일본어 투 표현이 없는 조례·규칙·훈령 등은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달부터 효력을 발휘한 '경남도 일제 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에는 공공 기관이 사용하는 일제 잔재 행정 용어는 순화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례에도 16조와 17조에 일본어 투가 쓰였다.

 

'도지사는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관련 기관 및 단체 등에 지체 없이 통보하여야 한다', '도지사는 제7조에 따른 일제 잔재 청산 사업을 추진하는 법인·단체 등에 대하여 필요한 사업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예산의 범위에서 지원할 수 있다' 등 두 문장에 나타난다.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결정된 사항은'으로, '법인·단체 등에 대하여' '법인·단체 등이'로 고쳐야 한다.

 

조례·규칙·훈령 속 대표적인 일본어 투는 '~에 대하여', '~에 관하여', '~에 있어' 등을 꼽을 수 있다. '~에 대하여·관하여'는 일본어 투 표현을 답습한 것이고, '~에 있어'는 일본어를 직역한 것이다.

 

~에 관하여, ~에 대하여 등은 '~, ~, ~'로 바꾸면 된다. '~에 있어' 표현도 '~에서, ~할 때, ~하는 데'로 고쳐 쓰면 된다.

 

자치 법규 속 고쳐야 할 외국어·외래어도 많다. 법제처는 외국어·외래어로 가이드라인(지침), 프로그램(과정), 로컬푸드(지역농산물), 멘토·멘티(결원·후원·지도·연결), 워크숍(연수), 컨설팅(자문), 네트워크(사회적 관계망) 등을 꼽았다.

감수 김정대 경남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경남도민 김희곤 기자 (hgon@idomin.com)

 

'코코 넨네'가 경상도 사투리냐고요?

일상에 녹아있는 일본식 표현들... 우리 집에선 안 쓰렵니다

"선배 기사 잘 보고 있어요. 내가 보낸 택배가 그렇게 파장이 컸나 봐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덕분에 동네 할머니들이랑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덕분에..."

"근데 선배... 궁금한 게 있어요. 선배 부산에 오래 사셨잖아요. 시댁에 오니까 아기 보고 맘마나 찌찌 먹고 넨네 해야지... 하는데 이거 경상도 사투리예요?"

 

지난 16일의 일이다. 첫 광복절의 대체 공휴일을 보내던 나에게 마침 부산에 있는 시댁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 기사(분홍색과 레이스 때문에 대역 죄인이 되었습니다)에서 아기의 옷을 선물했던 후배였다.

 

아기가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하고, 할머님들께 혼쭐이 났던 소식을 듣고 사과도 할 겸 전화를 건 것이다. 안 그래도 기사를 작성하면서 어쩌면 언젠가 후배가 읽게 될 기사의 반응이 궁금했었다. 솔직히 그 후기를 기다렸던 건 안(?) 비밀이다.

 

? 근데 후배는 기다렸던 후기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육아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 '넨네' '코코 넨네', 그리고 '찌찌'를 부산 출신인 시댁 어르신들이 자주 하신다며, 이게 경상도 사투리냐고 물은 것이다.

 

솔직히 기억에 이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선친들께서도 부산과 경상도 출신이시기 때문이다. 아기의 증조부모이신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경상도가 고향이셨다. 그런 이유로 나도 자주 이 단어들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아기를 기다리는 7년 동안 읽은 서적을 통해 이 단어들은 사투리가 아니며, 일본어 단어이거나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후배의 질문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넨네와 찌찌라... 게다가 오늘은 광복절로 대체휴무를 하는 날인데...' 이런 질문을 부산에 살면서 처음 들은 것이 아니라서 더 고민이 되었다. 후배를 비롯한 타인들이 이 단어들을 사투리로 알고 있는 건 결이 다른 문제였다.

 

맘마, 넨네... 우리가 이런 말을 안 쓰는 이유

 맘마 캡처 네이버 화면 맘마 캡처 최원석

 넨네 네이버 화면 넨네 검색 시에 나오는 화면 캡처 최원석

 

발음하기 쉽고 어감이 귀여워 아기에게 가르치기 좋다는 이유로 아기에게 이런 단어들을 알려주는 건 지양하고 싶었다. 이 단어들의 정체를 알리고자 글을 쓰는 이유다. 이 단어들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아기의 교육에서 저 단어들을 일부러 애써 배제하고 있었었다. 게다가 아기의 밥을 뜻하는 '맘마'조차도 일본말이어서 쓰지 않으려 애썼다. 이외에도 육아에는 많은 일본어가 녹아있다. 흔히들 아기의 심한 칭얼 거림을 뜻하는 '땡깡'과 계획 없이 밀어 붙이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인 '무대뽀'는 일본어다.

 

아기 옷에 동그란 무늬를 의미하는 '땡땡이'라는 단어도, 아기의 옷을 '곤색'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일본어 영향을 많이 받은 노래이며, '쎄쎄쎄'는 제목부터가 일본어다.

 

일제의 영향을 받은 '국민학교'라는 이름도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과거 일제가 부산에 처음 설치하면서 이름을 붙였던 '유치원' '육아 학교'로 명칭을 변경하는 법안이 추진되기도 했다.

 

일제가 유치원을 부산에 제일 먼저 설치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부산의 지리적인 특성상 일본과 교류가 잦아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부산뿐만 아니라 이 단어를 기억하고 계시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일제의 잔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8 15일 광복절에 국기를 걸며 아기에게 '좋은 말'을 가르치고 싶다는 다짐을 했었다. 일본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전달하지 않겠다고. 이번 일을 계기로 이 단어들은 다음 세대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넨네는 '코 자자', 찌찌는 '엄마 젖'으로 순화가 가능하다. 쉽다고 계속 아기들에게 전달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를 우리 가정에서부터 실천하고, 이 시대 양육을 하고 계시는 부모님들께도 알리며 부탁을 드리는 바다.

 

처음으로 받아 볼 자녀 장려금을 기다리면서 느낀 점이다. 오는 8 26일에 지급이 결정된 근로 장려금의 '근로'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는 크다. 근로라는 단어가 일제의 잔재라는 지적이 있어, 근로를 노동이라는 단어로 바꾸자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노동의 다양한 모습들이 생겨나고 많은 직군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이 시기에 다음 세대에게 어떤 단어를 제공하고 사용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아기도 엄마라는 단어를 외치며 말을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 아기와 아이들의 육아와 양육이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 올바른 단어 선택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더욱 크다.

 

일제의 잔재는 많다. 그 일제의 잔재를 잘 소개한 책이 있다. 그 책은 황대원 작가의 <빠꾸와 오라이>라는 책이다. 그 책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당연히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던 말들이 일본말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 작업을 하게 된 동기도 단순히 일본말을 추방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언어란 것은 어차피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인접한 다른 언어로부터 끊임없이 간섭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간섭을 받더라도 주체가 올바로 서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먼저 내 안에 녹아 있는 일본어의 잔재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외래어들이 나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가늠해 보고 그들의 문화와 우리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같은 잘못이라도 알고 저지르는 잘못과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은 하

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다."

오마이뉴스 최원석(no1danny)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구요? 사라지지 않은 일본말 잔재

2021 쉬우니까 한국어다 5

15일은 우리 민족이 다시 빛을 찾은  76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36년 가까이 강제로 써왔던 일본어 용어는 주변에서 많이 사라진 상태다. 5060세대가 어릴 적 사용하던 용어들은 거의 우리말로 바뀌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 벤또(辨當·べんとう)와 마호병(魔法甁·まほうびん)과 와리바시(·わりばし)를 꺼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도시락과 보온병과 나무젓가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된 것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995 일본어 투 생활 용어 순화집을 출간했고, 국립국어원은 이듬해 일본어 투 생활 용어 사용 실태 조사를 펴내 국민들의 인식 개선을 유도해 왔다. 법제처도 2006년부터 법률 속 일본식 표현을 알기 쉽게 바꾸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재임 중 가장 보람 있는 업적으로 노견(路肩·ろかた)’ 갓길로 바꾼 일을 꼽았을 정도로, 우리말 생활화에 힘써 온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현재를 만들었다.

 

국립국어원이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발간한 일본어 투 용어 순화 자료집을 지금 다시 들춰보면,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일본식 한자어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유명 영화배우의 행사 멘트가 영화 속 대사로 재생산되며 화제가 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かお체면)’가 없냐는 문장이나 스타일이 좋은 배우들의 성() 간지(·かんじ느낌)’라는 용어를 결합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사용하기도 한다. 게임을 하다가 패를 잘 못 낸 친구에게 쿠사리(·くさり핀잔)’를 주다가 나가리(·ながれ무효)”를 외치고 가까스로 똔똔(とんとん본전치기)’을 맞춘다. 유흥업소 앞에서 삐끼(·ひき여리꾼)’와 시비가 붙어 기도(木戶·きど 문지기)’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다.

 

자동차로 고바이(勾配·こうばい오르막)’를 오르다 나뭇가지에 긁혀 기스(·きず흠집)’가 나거나, 옆집 잉꼬부부(鸚哥夫婦·いんこ-원앙부부)’ 뗑뗑이(點點てんてん-물방울무늬)’ 옷만 입는 아이가 무뎃뽀(無鐵砲·むてっぽう막무가내)’ 뗑깡(癲癎·てんかん생떼)’을 부려 짜증이 나기도 한다.

 

기름에 튀긴 것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템뻬로(tempero)’ 덴푸라(天婦羅·テンプラ튀김)’, 우리가 깨꽃이라 부르는 샐비어(salvia)’ 사루비아(サルビア샐비어)’, 요행을 뜻하는 플루크(fluke)’ 후롯쿠(フロック엉터리)’로 표기된 것은 문화의 이전과 변형이라는 면에서 흥미로운 주제로 삼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일본어도 하나의 외국어로서 무작정 수용보다는 의미와 용례를 알고 적절한 상황에서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공동기획: 국어문화원연합회

중앙선데이 전형모기자

 

민족 자유도 일제 잔재?

한 광역자치단체 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행적이 있는 작곡가가 지은 교가, 동서남북 등 방위명이나 ○○제일고등학교 같은 순서가 들어간 교명을 바꾸고, 그 외에도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찾아내는 데 수억원의 세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일제 용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반장’ ‘훈화’ ‘휴학계’ ‘파이팅’ ‘간담회 등이 꼽혔다. 이것들이 일본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식민지시대 전공자인 이승엽 교수가 페이스북에 자세히 써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위의 말들이 다 일제강점기 때 쓰던 말이라고 치자. 이거 다 바꾸면 해결되는가. 학부모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해입니다. 바른 역사의식과 정체성확립 및 민주적 학교 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교생활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장 속에 밑줄 친 단어들은 다 일제 잔재. 필자가 아는 것만 밑줄 쳤으니 안 친 단어들 중에도 더 있을 게다. 일제용어를 청산하자는 공문에 이 교육청은 왜 이렇게 많은 일본어를 썼는가. ‘민족의식을 함양하겠다는 충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민족 의식도 메이지시대 일본지식인들이 서구용어를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다. 이뿐인가. 신문, 출판, 도서관, 헌법, 민주주의, 야구, 대학, 물리, 철학, 법률, 과학, 자연, 계급, 공화, 진화, 유물론. 일일이 셀 수가 없다.

그래도 이것들은 한자 개념을 이용해서 새로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에 있던 한자 의미를 새롭게 바꿔서 만든 것들이다. 아예 순일본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취조(調), 입장(立場), 절상() 이건 좀 더 찐한 일제 잔재인가. 이런 사실은 무슨 대단한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위키피디아만 찾아봐도 다 나오는 것들이다.

어느 현충일이었다. 한 방송의 아나운서가 국경일에는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며,  게양은 일본말이니 국기달기라는 말을 쓰자고 했다. 그게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을 일제 잔재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분은 현대 한국어 형성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 ‘게양이 일본어라면 국기 민족도 일본어다. 뜻밖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국어 국사 역시 이 기준으로는 일본어다. 무엇보다 본인이 하는 일인 방송도 그렇다. 예를 들어 민족(民族)’이란 어휘는 ‘nation’이라는 서양어 개념이 들어오자, 메이지시대의 일본지식인들이 고민 끝에 만든 말이다. 일본에서는 1900년 전후로 쓰이기 시작했고 우리 사회에서는 1905년경부터 많이 쓰인다. 방금 쓴 우리 사회의 사회도 똑같은 사례다. ‘society’라는 낯선 개념을 수용하려고 일본인들이 만든 말이다(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 맺음말).

 

 

내년엔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통령 선거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에 비해 대권(大權)’은 메이드인 코리아다. 그럼 우리는 대권은 쓰고 대통령이나 선거는 없애야 할까. 작가 김규항은 대권이 왕조시대에나 어울리는 말이지 민주공화국에서는 쓸 게 아니라고 했다. ‘잠룡도 마찬가지다. 대권이나 잠룡은 일본이 만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대통령을 암암리에 왕조시대의 임금과 등치시키려는 우리들의 오랜 사고습관을 반영하는 동시에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 용어들은 대통령은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족, 국사, 국기, 국가(國歌)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말을 쓰면 우리의 민족정신이 훼손되는가? 자유, 헌법, 권리, 민주주의, 사회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후퇴하는가? ‘대권을 없애야 하는가, ‘자유를 없애야 하는가. 아니, 그 전에 저 말들을 다 청산하고 가정통신문을 쓸 수 있는가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경향

 

 

 조계종이라 이름 붙였나요?

Q 우리나라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왜 조계종이라 이름하는가?

 

 

중국 육조혜능 법맥 잇지만

중국엔 없는 독창적인 종명

일제잔재 육식대처 청산 후

한국불교 최대종단 자리매김

 

 

A 한국불교는 기록에 의하면 서기 372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이 최초입니다. 중국의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順道)스님을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했다고 합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침류왕 1년인 서기 384년에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에서 왔습니다. 신라는 이보다 수 십 년 늦게 고구려의 아도(阿道)스님이 전했습니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불교전래는 중국의 어느 한 종파가 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인도 그리고 고구려에서 산발적으로 유입되어 왔던 것입니다. 초기에는 경전 중심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종 쪽이 다수였고, 통일신라 말기쯤에 이르러서 선종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고려시대에는 교종 5개와 선종 9개가 활발하게 활동하여 5 9산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 불교 배척의 정책에 따라 불교는 타격을 입고 거의 명맥만 유지하면서 선·교 양종의 8도도총섭제도가 임진왜란 때까지 계승되어오다가, 그 후 한말까지는 남북총섭시대로 양종이 양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으로 불교의 억압이 해제되고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반포하여 전국의 교종과 선종 사찰을 강제로 30개의 본사로 통합 정리합니다.  30개의 본사를 모두 총괄하는 사찰로 서울에 태고사(현 조계사)를 설립하고 조선불교조계종으로 호칭했습니다.

 

본래 한국불교의 종파는 거의 중국에서 성립되어 중국의 명칭을 그대로 썼는데, 중국에는 없었던 우리나라 독창적인 종명 중의 하나가 조계종입니다. 조계(曺溪)는 중국 선종의 6조 혜능대사가 40여 년 동안 머무시던 보림사 앞에 흐르던 개울의 이름으로 사실 혜능대사를 뜻합니다.

 

그 이전, 그곳에는 조 씨들이 모여 살았는데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냇물을 조씨네 개울이라 해서 조계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계종은 중국 선종의 혜능대사 법맥을 잇는 종단이라는 뜻이고,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계종을 창시한 것을 그 효시로 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시대에 일본불교는 스님의 결혼과 육식을 허용하는 불교유신을 단행했는데, 한국불교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스님들을 결혼시키는 등 한국불교의 전통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서도 일제잔재 청산운동이 일어나 사찰령을 무효화하고 새로 출발하는 차원에서 불교의 헌법에 해당하는 종헌의 제정 작업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격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혼란의 시기도 겪었지만 결국 조계종은 일본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정우 군법사ㆍ육군 대령/ 불교신문

 

오뎅·벤또만 문제?...민주주의도 일본어 잔재죠

[더 좋은 우리말] 일본식 조어 꼬집은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통해 받아들여진 개념·학술용어

150년 넘게 구분되지 않고 사용돼

단어 의미 되새겨 '우리 언어화' 필요

외국어 마구 가져다 쓰는 것보다는

 

심쿵 등 창의적 조어가 더 나을 수도

우리말 속 일본어 잔재를 생각할 때 오뎅’(어묵)이나 벤또’(도시락) 같은 표현들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문화재·제세동기·진검승부 같은 단어가 더 큰 문제일까요? 아무 고민 없이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서 쓰고 있는 무임승차 같은 말들에 대해 이제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76주년 광복절을 앞둔 11일 서울 마포구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이건범(사진)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청산해야 할 우리말 속 일본어 잔재에 대해 이 같은 문제 의식을 제기했다. 우리말 사용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 명백한 일본어 사용에 관해서는 국민들 스스로 사용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립되고 있다. 이따금 재미있는 우스개 표현으로 쓰이는 정도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나 학술·개념 용어의 경우 오래 전 일본식 표현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우리말인지 일본식 조어인지 구분되지 않고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대표는 이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도 엄밀히 따지면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다. 이 대표는 자본주의(Capialism)이나 사회주의(Socialism) 이즘(-ism)’을 뜻하는 주의(主義)를 붙여 쓸 수 있는 말이지만, 통치·정치의 개념인 민주주의(Democracy) 주의를 붙인 것은 일본의 영어 번역을 그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짚는다. 그는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서양의 학술 용어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했는데, 이후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이 그 용어를 무분별하게 수입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잔재’”라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가 민주주의’ ‘문화재 같은 개념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것이 150여 년 전의 일인데 당시만 해도 이들 개념 용어와 학술 용어를 고민할 여건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제는 일본말 잔재에 대한 문제 의식만 가지던 것에서 탈피해 우리가 부여한 단어의 의미를 잘 새기고 우리 언어화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서울경제 조상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