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헬레나 로젠블랫 지음, 김승진 옮김 l 니케북스 l 2023-04
공동체의 도덕, 개인의 윤리가 되다
헬레나 로젠블랫 (Helena Rosenblatt) (지은이) 스웨덴 출신으로 바너드 대학을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 시립대학교CUNY 대학원 역사학과 교수다. 『자유주의적 가치: 뱅자맹 콩스탕과 종교의 정치Liberal Values: Benjamin Constant and the Politics of Religion』 등을 썼고, 공동 편저로 『루소와 함께 생각하기: 마키아벨리부터 슈미트까지Thinking with Rousseau: From Machiavelli to Schmitt』 등이 있다. 프랑스 정치‧종교 사상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성사를 연구하고 있다
목차
감사의 글
서문
1장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 키케로부터 라파예트까지
2장 프랑스 대혁명과 자유주의의 기원: 1789~1830년
3장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문제’의 등장: 1830~1848년
4장 성품의 문제
5장 카이사르주의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나폴레옹 3세, 링컨, 글래드스턴, 비스마르크
6장 교육의 탈종교화를 위한 전투
7장 두 개의 자유주의: 옛 자유주의와 새로운 자유주의
8장 자유주의, 미국의 신조가 되다
에필로그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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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자유주의는 왜 논쟁과 혼란의 정치 언어가 되었나
자유주의의 역사를 통해 현대 정치 지형을 읽는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 정신, 우리 사회의 제도와 질서가 다 성경 말씀에 담겨 있다.” 각각 정치에 입문할 때와 최근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역대 보수 정권은 모두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서 국가 폭력과 야만성이 정당화되는 것을 목격했다”(김훈)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도 있다. 미국에서는 리버럴이 진보 성향을 뜻하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좌도 우도 아닌, 비정치적이고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아서 때로 폄하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L로 시작하는 그 무시무시한 단어”라는 로널드 레이건의 말처럼 자유주의적liberal, 자유주의liberalism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폭발력이 있지만 합의된 견해가 없다. 자유주의는 왜 이토록 혼란스럽고 논쟁적인 정치 이념이 되었을까. 지성사 연구자 헬레나 로젠블랫Helena Rosenblatt은 고대 로마부터 21세기까지 자유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보고 오늘날 정치 지형을 읽는 데 자유주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적 이데올로기로 이해되는 자유주의의 개념은 20세기 중반에야 만들어진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 이래 오랫동안 자유주의는 공공선과 의무, 자기희생 등에 바탕을 둔 도덕적 기획이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역사는 어쩌다 잊히고 말았을까? 종교와 국가의 동맹과 분리, 수차례의 혁명과 반동,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과의 갈등, 전체주의와 냉전 등 자유주의를 둘러싼 여러 요인과 변곡점은 자유주의의 역사와 개념에 논쟁과 혼란을 가져왔다. 이 책은 오늘날 정치 담론의 장에서 여전히 중요하고 논쟁적인 자유주의의 역사와 변천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성품론에서 정치 담론으로 혁명과 탈종교화 과정에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
정치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생겨나기 전에 유럽에는 이미 2000년간 일부 계층의 남성은 자유, 너그러움, 공민적 정신 등을 함양해야 한다는, 즉 리버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전통이 존재했다. 이는 공공선을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음을 일깨우는 도덕적 기획이었고 기존의 정치, 사회 질서를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로마 시민의 이상적인 특질을 일컫는 이 개념은 차차 그리스도교화되고 보편화되고 정치 담론화되어서 독립 혁명으로 성립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헌법과 정치체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주의ism’로서 자유주의의 출발점을 프랑스 대혁명에서 찾는다. 혁명과 뒤이은 위기 국면을 경험한 라파예트와 제르멘 스탈, 뱅자맹 콩스탕 등은 좌우의 극단주의 세력과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자유주의적 원칙을 내세웠다. 공화정과 입헌 정부의 수호, 사상‧언론‧종교의 자유 등 최소한의 합의만을 이룬 자유주의적 기치는 현실 정치에서 그 어떤 세력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후 세 차례의 혁명(1830년, 1848년, 1870년)을 거치면서 자유주의는 정치, 경제, 종교 모든 측면에서 점차 정교해졌고, “스펙트럼상 모든 단계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대로 자유주의 세력은 분화했다.
네 차례의 혁명에는 반동이 뒤따랐고 반혁명 세력은 언제나 가톨릭교회와 결탁했다. 종교의 측면에서 정교분리와 리버럴 신학이 생겨났으나 절대왕정과 교회의 동맹은 자유주의 세력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세력은 살아남았고 마지막 혁명의 국면에서는 교육 제도 등에서 반가톨릭주의를 어느 정도 현실화하기도 했다. 이제 자유주의는 더 이상 관대함과 공공선을 중시하는 인간형에 머무르지 않고 반혁명적인 정부와 교회에 적대적인 정치 원칙을 뜻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의 모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정치적‧경제적 불평등
자유주의가 현대적 의미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개념을 포함하는 이념으로 진화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유주의적 헌법을 구현했다고 칭송받은 미국에서는 꽤 오랫동안 노예제가 유지되었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참정권은 매우 제한적으로 주어졌다. 마찬가지로 ‘열등한’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과 지배가 정당화되었고 당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우생학과 인종주의, 제국주의를 옹호했다.
19세기 중반 고도화된 산업화와 노동자 계급의 빈곤 문제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고, 유럽 전역에서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1848년 혁명). 혁명과 이후의 반동기를 거치며 자유주의 세력과 정부는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비스마르크나 나폴레옹 3세 등의 국가주의적 보수주의 모두로부터 강한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자유주의 세력은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자유주의 내부에서 적극적인 정부 개입과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편으로는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집권, 급진 봉기 등 극단주의나 압제와 민주주의가 결합하는 현실에 절망한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품성과 역량을 불신했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미국화된 이데올로기 자유주의에서 사라진 가능성
자유주의는 명실상부 20세기 중반 이래 미국의 신조가 되었다. 미국적 자유주의는 프랑스와 독일의 영향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자유주의에 내재한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독일 정치경제학은 두 차례 대전을 거치며 탈색되었고, 미국은 영국적 자유주의 전통만을 계승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우리가 독일의 운명을 되풀이할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독일을 비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원천으로 지목했다. 뉴딜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는 전체주의로 귀결되리라는 우려를 낳았고 냉전 시기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와 이익, 자유방임주의, 작은 정부론 등이 미국적 자유주의로 재구성되었고 공공선과 의무, 자기희생 등 자유주의의 핵심 요소는 제거되었다.
자유주의는 그 기원부터 통합되거나 고정된 이념이 아니었고 언제나 논쟁을 수반하며 전개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현재의 주류적 정의는 자유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와 미덕을 자의적으로 배제해버렸다. 현대 정치 지형을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에 주목하고 자유주의의 지적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이를 통해 현재 대부분의 국가가 처한 공동체성의 위기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나는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간과되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을 이 책에서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도덕적인 지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생각했던 자유주의는 오늘날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으레 연상시키는 원자화된 개인주의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의무를 강조하지 않은 채로 권리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이 권리를 갖는 것은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활발히 잘 돌아가는 공동체가 이기심의 추구에만 기초해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견해를 언제나 거부했고 이기주의의 위험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고했다. 또한 그들은 관대함, 도덕적 고결성, 시민적 가치를 그치지 않고 옹호했다. 물론 그들이 늘 자신이 설파하는 가치대로 실천했거나 그에 부합하게 살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는 앵글로-아메리칸 사조라는 통념은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야 생긴 개념이다. 이 통념은 20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산물이고, 특히 냉전 시기에 팽배했던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다. 그 이전의 거의 2000년 동안에는 ‘리버럴한’ 사람, 혹은 ‘자유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이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졌다.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베풂을 실천할 줄 알고 공민적 정신을 가진 시민이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존재임을 이해하고 공공선에 보탬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했다. -〈서문〉
근대 초기 유럽의 리버럴리티는 기성의 사회·정치·종교 질서의 보존을 위한 덕목이었다. 키케로와 세네카, 그리고 이들을 이어받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야기했듯이 베풂은 사회적 응집을 가능케 하는 접착제였다. 세네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는 사람들이 “이로움”을 서로 베풀고 받음으로써, 즉 호의, 명예, 특전, 도움을 주고받음으로써 응집되고 잘 돌아갈 수 있었다. 또 그리스도교적 자선과 기부도 공동체 정신과 선한 의지에 대한 감수성을 전파했다. 끝으로, 리버럴리티의 표출은 그 사람의 고귀함과 사회적 지위를 드높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장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 키케로부터 라파예트까지〉
‘리버럴한’ 정치체가 꼭 ‘민주적인’ 정치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모로 보나 18세기의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고,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질서한] 아나키 상태나 [비이성적인 군중에게 휩쓸리는] 폭민 정치와 같은 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세습되는 특권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 모두가 “진정으로 고귀한 리버럴리티의 감수성과 태도를” 보여야 하고 모든 시민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공민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1장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 키케로부터 라파예트까지〉
1824년 9월 16일에 루이 18세가 숨지고 동생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독실한 가톨릭이자 골수 반혁명주의자인 샤를 10세는 곧바로 권위주의적이고 가톨릭적인 군주정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극우 왕당파 의원들의 도움으로 일련의 법을 통과시켜 자유주의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중략) 자유주의자들은 맹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가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크게 절감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조직적인 홍보 활동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프랑스에는 정치 소책자, 만평, 노래, 반종교적 문헌의 염가판 등이 넘쳐 나게 되었다. (중략)
1827년이면 정치의 시계추가 다시 자유주의 쪽으로 돌아왔고 극우 왕당파들 사이에서는 이러다 자유주의자들이 전투에서 승리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선동꾼”이며 “12년이 넘는 동안 그들이 진실되고 선한 모든 것을 막무가내로 공격했다”고 비판했다. 또 자유주의자들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기를 열렬히 고대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난 혁명보다 더 완전한 혁명을 원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이 점점 더 세를 얻자 절박해진 샤를 10세는 대중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해 식민지 확장에 나섰다. 작은 외교 분쟁 하나를 빌미로 알제리에 군대를 보내 수도 알제리를 점령했다. -〈2장 프랑스 대혁명과 자유주의의 기원: 1789~1830년 〉
영국, 프랑스, 독일 모두에서 19세기 자유주의자 다수는 정부의 개입을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재산권이 절대적으로 수호되어야 하는 권리라는 개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개인이 각자의 이기심을 좇으면 부의 건전한 분배와 사회적 조화가 자동적으로 달성되리라고 믿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비판했다. 엄격한 자유방임 원칙을 주장한 자유주의자는 소수였고 이들은 다른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단호하게 비판받았다. -〈3장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문제’의 등장: 1830~1848년 〉
1848년의 실패한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했다. 왜 그들은 그렇게나 성공적이지 못했는가? 왜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그렇게 강하게 끌렸는가? 왜 프랑스 대중은 그토록 혁명으로 치우쳤는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부당한 사회 체제가 원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1848년의 실패가 대중의 도덕성이 처참하게 붕괴해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도덕성이 무너진 탓에 소수의 선동가가 사회주의 개념을 주입해 대중을 오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1848년 혁명이 “인간 정신의 일반적인 병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상한” 사회주의 이론에 위험하게 경도되어 생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이란 지적 역량과 도덕적 특질이 부족해서 책임 있는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보았다. 대중은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상, 가령 사회주의 같은 철학으로 빠지기 쉬웠다. 1848년 혁명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말한 바를 입증하는 듯했다. 프랑스 민중에게는 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사상과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이다. -〈4장 성품의 문제〉
1918년에 베버는 비스마르크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다소 길지만 전체를 인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국가를 남겨놓았다. …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정치를 하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나라를 남겨놓았다. … 독일은 [통치자가] ‘군주적 정부’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대신해 결정해버리는 것에 대해 그게 어떤 결정이든 숙명적으로 참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버렸다.” 비스마르크는 후세에 “어떤 정치적 유려함도 없는 나라,” “자신의 정치적 의지가 없는 나라”를 남겨놓았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추구하는 비자유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조작된 가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비스마르크는 “이기심이야말로 규모가 큰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건전한 토대”라고 말했다. -〈5장 카이사르주의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나폴레옹 3세, 링컨, 글래드스턴, 비스마르크〉
회중교회 목사 노아 포터Noah Porter는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가 무신론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가 너무나 유혹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는 경전이 담고 있는 진실을 부인하는 음모론이었고 전통적인 가족 개념에도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협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가 더 퍼지게 둔다면 사회가 뒤흔들리고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정통파들은 자유주의 성향의 종교와 페미니즘의 관련성에 특히 경악했다. 영국의 비국교도 개신교 집안 출신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부터 ‘독일-가톨릭’ 운동과 가까운 루이제 오토Louise Otto와 반종교적인 강성 프랑스 페미니스트들까지, 여권 옹호자들은 ‘사제주의와 미신’을 비난했고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를 비난했다. 남성 자유주의자들처럼 많은 여권 운동가들도 유의미한 개혁이 이뤄지려면 가톨릭교회가 더 자유주의적이 되거나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한다고 믿었다. -〈6장 교육의 탈종교화를 위한 전투〉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개혁 지향적인 잡지 중 하나인 『격주간 리뷰Fortnightly Re-view』는 이미 1876년경부터 “낡은 정통 신조”가 무너진 것을 반겼다. 낡은 신조로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국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1879년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회주의에 대한 단원들Chapters on Socialism」이 이 잡지에 게재되었는데, 여기에서 밀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사상이 개혁에 지침이 되는 원칙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10, 20년 사이에 점점 더 많은 영국 자유주의자들이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이 개입해야 한다고 보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가 빈곤과 질병과 무지를 일소하기 위해, 그리고 부가 과도하게 불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단순히 자유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유를 가능케 하는 여건들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을 이들은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주요 대학에 자리 잡은 학자들이 새로운 정치경제 사상을 전파했다. 이들은 독일에서 윤리적 경제학을 최전선에서 공부했고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처럼 이들도 자유방임 사상이 도덕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아예 틀린 사상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경제에 더 많은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7장 두 개의 자유주의: 옛 자유주의와 새로운 자유주의〉
놀라운 사실은, ‘리버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격렬했지만 자유주의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들 사이에 논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두 조류 모두 자유주의가 영국 역사에서 기원했다고 보았다. 하이에크에게는 자유주의의 기원이 영국의 개인주의였고 듀이에게는 영국의 인도주의였다. 어느 쪽도 프랑스나 독일을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을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밀어내는 추세의 시작일 뿐이었다. 점차로 프랑스가 기여한 바는 배경으로 밀려났고 독일은 오히려 비자유주의의 원천으로 치부되었다. 1947년이면 하이에크 버전과 듀이 버전 모두에서 자유주의는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의 신조”가 되었다. 라이어널 트릴링이 1950년에 언급했듯이, 자유주의는 미국의 지배적인 지적 전통일 뿐 아니라 미국의 유일한 지적 전통으로 자리매김되었다. -〈8장 자유주의, 미국의 신조가 되다〉
‘자유방임’은 자유주의 본질 배반한 것
미국 역사학자 로젠블랫
자유주의 ‘잃어버린 고리’ 복원
“개인의 이익 아닌 공공선 증진이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 가치”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쓴 역사학자 헬레나 로젠블랫. 위키미디어 코먼스
오늘날 정치 용어 가운데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말처럼 논란을 부르는 말도 달리 찾기 어렵다. 미국에서 자유주의는 ‘큰 정부’를 지향하는 이념으로 쓰이는 데 반해 유럽에서는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쓰인다. 자유주의는 때로는 진보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수주의와 어울리기도 한다. 자유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길이 없을까? 스웨덴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 헬레나 로젠블랫 뉴욕시립대 교수가 쓴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는 자유주의라는 말의 역사를 면밀하게 살펴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고리’를 되찾아냄으로써 자유주의 이념의 윤곽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자유주의 이념의 산실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프랑스와 독일이 자유주의 이념의 탄생과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이 이 책을 통해 분명해진다.
지은이는 먼저 자유주의가 근대 정치 이념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역사, 곧 ‘자유주의의 전사’를 탐사함으로써 ‘자유’의 본디 의미를 복원하려 한다. 그 본디 의미를 알아야만 자유주의라는 말이 왜 그토록 많은 혼란을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라는 말의 뿌리를 찾아 고대 로마로 돌아간다. 리버럴(liberal)이라는 말의 라틴어 단어는 ‘리베랄리스’(liberalis)이고 그 명사형은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인데, 그 말은 ‘자유로운 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걸맞은 덕성’을 뜻했다.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서 동료 시민을 고귀하고 너그러운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리베랄리타스였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관용의 정신으로 무장하고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인간, 도덕적 용기를 지니고 자기절제를 실천할 줄 아는 인간을 뜻했다. 로마 정치가 키케로가 쓴 <의무론>은 이런 의미의 리베랄리타스를 설파한 대표적인 저작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리베랄리타스는 근본적으로 상류계급의 미덕이었다. 이 고전적인 의미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근대의 문이 열린 뒤, 특히 17세기 이후 계몽주의가 시대의 주된 흐름이 된 뒤의 일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리버럴함’이 종교적 관용을 뜻하게 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은 18세기 독일에서 나온 ‘리버럴 신학’이다. 이 신학은 도그마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질문에 마음을 여는 신학, 교리보다 도덕을 강조하는 신학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책은 ‘리버럴’의 의미가 정치적으로 분명한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그 뒤를 이은 미국 헌법을 든다. 미국 헌법을 통해 리버럴함은 군주가 신민에게 베푸는 관대함이나 귀족이 서민에게 베푸는 관후함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세운 헌법을 통해 자신들에게 자유로움과 너그러움을 보장함을 뜻하게 됐다. ‘리버럴’이라는 말에 정치적 의미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탄생하는 데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프랑스대혁명이었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초기에 유럽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공포정치로 과격화한 끝에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그 직후에 프랑스 정치가 뱅자맹 콩스탕이 ‘리버럴의 원칙’을 주창하고 나섰는데, 콩스탕은 공포정치를 거부함과 동시에 반혁명도 거부함으로써 혁명이 이룬 ‘리버럴한 성과’를 온전히 지켜내고자 했다. 콩스탕이 제시한 리버럴의 원칙은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공화정을 수호하고, 법치와 평등, 헌법과 대의제를 지켜내며,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뜻했다. 콩스탕의 기대와 달리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 독재로 귀결했고, 황제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 정복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맞서 스웨덴과 스페인에서 일어난 저항 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자유주의’라는 말이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받아들여 실현하려는 세력의 정치적 운동을 가리켜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대혁명은 근대 자유주의 이념을 탄생시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경로로 결합했는지 상세히 살핀다. 자유주의자들은 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중이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민주주의 원리가 자유주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독재를 불러들이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이 그 전형적인 경우를 보여준다.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모범으로 삼은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한 뒤 1852년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나폴레옹 3세)로 등극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나폴레옹 3세의 ‘민주적 독재’를 카이사르주의 또는 보나파르트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조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이 시기에 나타났는데, 1861년 에이브러햄 링턴이 미국 대통령이 된 것, 그 뒤 자유당 지도자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영국 총리가 된 것이 두 이념의 통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무렵 프랑스 언론인 오귀스트 네프처가 <시대>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그 첫 호에서 자유주의 정당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계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멈출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므로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끌어올려 독재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자유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역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19세기 후반 상황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두 종류의 자유주의’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그 전장은 독일이었고 쟁점은 ‘자유방임이냐 정부 개입이냐’였다. 당시 유럽에서 영향력이 큰 경제사상은 ‘자유방임주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가 그 사상의 대표자였다. 여기에 맞서 1870년대에 등장한 것이 독일의 ‘윤리적 경제학’이었는데, 이 학파는 자유방임이 국민 대다수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면서 정부의 개입을 통해 빈곤과 질병과 무지를 퇴치하고 불평등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자유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자유를 가능케 하는 여건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 이 윤리적 경제학자들의 생각이었다. 독일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새 자유주의’(New Liberalism)이라고 불렀다. 독일의 윤리적 경제학은 이웃나라에 즉각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새 자유주의’는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와 가까워지게 된다.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도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1893년 영국의 자유주의 주간지는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에 공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면 그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자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일체의 정부 개입에 반대하고 철저한 자유방임을 주장했다. 스펜서의 사상은 미국의 제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에게 그대로 이어졌는데, 섬너는 독일 사상을 ‘돌팔이 수법’이라고 비난했다. 이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윤리적 경제학 편에 섰다. 이 시기에 미국 경제학 교수진이 독일 유학파로 채워졌고 이 경제학자들이 ‘자유방임 자유주의’에 맞서 ‘정부 개입 자유주의’를 옹호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20세기 미국 철학자 존 듀이는 자유주의에 두 종류가 있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자유주의는 더 높은 평등을 추구하고 정부의 힘을 빌려 금권정치에 맞서는 자유주의라고 주장했다. 듀이의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뉴딜 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정부 개입을 강조하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미국 자유주의의 본령이 됐다.
하지만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냉전 시기에 자유주의는 한번 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는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함으로써 시작됐다. 1944년 <예속의 길>을 펴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보수파의 대표자였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는 것은 형용모순이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개인주의 사상에서 나온 자유주의가 진정한 자유주의이며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독일에서 온 가짜 자유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스벨트식 뉴딜 정책은 독일의 운명을 되풀이하다 전체주의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믿음이었다. 하이에크 부류의 비판은 냉전이 시작된 뒤 점점 더 거세졌고, 뉴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심지어 ‘공산주의’로 불렸다. 이런 공격에 밀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의 요구를 낮추어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유주의, 곧 개인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삼는 자유주의다.
지은이는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가 ‘개인의 권리와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의 증진,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이기심을 넘어선 도덕적 성숙’에 있다고 강조하며 자유주의의 본디 가치를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역사적 경로를 통해 그려낸 자유주의는 오늘날 통용되는 자유주의보다는 진보적 공화주의를 더 닮았다.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와 상충하기는커녕 그 본디 이념에서 보면 공화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이념이라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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