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폐지하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저/성원 역 | 서해문집 | 2023년 04월
저 : 소피 루이스 필라델피아에 사는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지리학자다. 『현재의 완전한 대리모 행위』(Full Surrogacy Now)를 썼다. 2019년 소피 루이스의 첫 책이자 논쟁적인 책 《이제는 완전한 대리모 제도를Full Surrogacy Now》이 나왔을 때 도나 해러웨이는 그 등장을 이렇게 환영했다. “내가 열망해온 완전한 임신정의를 위한 진정으로 급진적인 외침이다.” 비단 해러웨이만이 아니었다. 《제노 페미니즘》을 공동 저술한 헬렌 헤스터는 “비범한 책”이라는 말로 서두를 뗀 다음 “루이스는 임신 노동자들이 직면한 물질적 조건에 대한 세심함과, 대리모 제도에 대한 급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결합해 예리한 분석을 내놓는다. … 나로서는 이 책을, 이 책이 받아 마땅한 만큼 충분히 추천할 수가 없다”는 추천사를 썼다. 그리고 이러한 추천사는 늘어놓자면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더 적은 대리모가 아닌 더 많은 대리모, 완전한 대리모 제도를 주장하는 루이스의 목소리는 독특하고 대담하다. 완전한 대리모 제도를 통해 아이가 유전적 관련이 있는 이들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기존의 ‘가족’ 개념을 부숴야 함을 주장했던 그는, 다시 한 번, ‘가족에 반하는 페미니즘’(첫 책의 부제)을 가져와 두 번째 책의 주요 골자로 삼는다. 제목대로, 가족을 폐지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가족을 폐지하라니? ‘가족’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못해 완전히 뿌리박혀 있어서 그것이 폐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가족 안에서 아무리 많은 폭력이 벌어지더라도. 하지만 “확장된”, “확대된”, “혈연과 무관한” 온갖 대안적인 가족을 떠올리는 대신에 그것을 아예 무너뜨리는 상상을 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이 빠져나간 자리에 놓을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에, 아무것도 없음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을 폐지하라》는 바로 그런 사고 실험이자, 혁명적 제안이며, 선언문이다.
목차
그치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구!
어떤 가족을 폐지한다는 거야?
가족 폐지론의 간략한 역사
가족의 대안도, 확장도 아닌
주
출판사 리뷰
팬데믹이 이어지는 동안 국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자택에 머무십시오.”
이 명령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모두에게 자택이, 즉 격리 가능한 공간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모두에게 가족이, 즉 자가 격리를 하더라도 돌봐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자택은 누구의 공간인가? 바로 가족의 공간이다). 이런 명령에 가족 구성원들이 전업주부처럼 집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가족이 돌봄은커녕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가족이 없는 이들은? 그들은 정책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이다. 그리하여 봉쇄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끔찍한 가족과 같이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닥뜨렸으니,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식료품, 약, 생필품 등을 전부 배달 주문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환경에 있는 이들(배달비를 낼 여력이 없을 수도, 소도시에 거주할 수도, 홈리스일 수도 있다)은 홀로 앓았다. 팬데믹은 사회가 돌봄을 사적 책임으로 밀어넣은 결과를, 즉 돌봄이 부재하다시피 취약해진 모습을 비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폐지하자고?
이 말은 어떤 반응을 끌어내기도 전에 사고를 정지시킬지 모른다. 가족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주택 정책·의료·교육·유서·법원·연금 등 가족 제도를 유지시키는 기술이 어디에나 포진해 있다. 가족은 (온갖 재난 서사가 보여주듯이) 다른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꿈에 둘러싸여 있는 장소다. 한편으로 그곳에서는 은밀한 학대와 성폭력과 갈취가 가해지며, 로맨틱한(물론 이성애 규범적인) 환상이 아직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장소이자, 공공연한 계급 결합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이 다층적인 의미만큼이나 가족을 둘러싼 담론은 걷어차일 만큼 많고 (그만큼) 단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폐지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폐지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분명 ‘가족을 폐지하라’는 말이 어떤 부분에서는, 가령 혈연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할 수밖에 없었던) 유색인종의 역사에서, 혹은 가족 구성권을 요구하는 퀴어 공동체에게, 혹은 시리아나 예멘,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혈육과 생이별을 하고서 난민캠프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기상천외한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족 폐지보다는 확대가족이나 대안가족을 요구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가족을 아예 폐지하자는 주장은 너무 위험하고, 전략적이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가족을 폐지하라》는 ‘우리가 폐지하기를 주장하는 가족은 백인-부르주아-핵가족이라고!’ 같은 식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텍스트에서 훌쩍 떨어져 서 있는 이 책은, 수많은 반론들에 다시 수많은 반론들로 맞서지도 않는다. 백인 지배계급과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가족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파고들면서(2장), 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에서부터 21세기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 폐지론의 역사를 빠르게 조망하면서(3장) ‘가족’이 부르주아 경제의 축소판임을,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돌봄을 사적인 문제로 치부한다는 것을 내포한 단어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되돌린다. 가족을 폐지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가족 말고 다른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의료 노동자들과 돌봄 노동자들은 기진맥진한 채 나가떨어지지 않았느냐고. 이는 사실상 질문이 아니라 대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이다. 돌봄 시설이 문을 닫을 때,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이들은? 환자들은? 가족이 없으면 누가, (혹은) 무엇이 이들의 삶을 책임지겠는가?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이런 식의 질문은 나쁜 질문이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이 동물원 밖에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무리 대안적인 서식지가 희소해지고, 심지어 동물들이 동물원의 잔혹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해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에서 벗어나, 가족이 아닌 다른 대안을 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아니,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역할도 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좀 더 나은 삶이 “확장된”, “확대된”, “혈연과 무관한” 온갖 대안적인 가족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가족이 없는 자리, 그것이 아예 무너진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이 빠져나간 자리에 놓을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에, 아무것도 없음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을 폐지하라》는 바로 그런 사고 실험이자,혁명적 제안이며, 선언문이다.
책 속으로
르 귄은 사실 톨스토이의 말을 뒤집은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단순히 어떤 가족이 행복하다고 묘사하는 건 현실을 얕보는 참을 수 없는 잘못”임을 지적한다. … 톨스토이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다 똑같다고 일축한” 행복한 가족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통치 수단으로서 가족이 돌봄을 조직하는 비참한 방식이라면, 그리하여 불행한 가족이 구조적인 의미에서 다 똑같고, 행복한 가족은 기적적인 예외라면 어쩔 것인가?--- p.27
가족 폐지 운동은 아무 걸림돌 없는 완벽하고 보편적인 행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신이 각본을 뒤집어서 오히려 가족이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해보면 좋겠다. 가족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하고, 우린 모두 경쟁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을 하는 작은 생물학적 팀의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비행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가족의 짐이 된다. 관념적으로, 이런 경험은 우리가 가진 건 가족밖에 없음을 (그게 마치 좋은 것이라는 듯이)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를 재구성한다.--- p.37
장담하건대 당신은 (특정한 계급에 속한) 한 명,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개인에게 임의로 신생아를 떨어뜨리는 복권 시스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 (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다른 설명을,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하는 다른 방식을 발명할 수 있다.--- p.39
가족 폐지론자들은 “백인”, “부르주아”, “핵”가족을 말하는 거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걸까? 당신의 복잡하고,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퀴어적이거나 인종적으로 주변화된 혈연 네트워크는 절대 아니라고? 아니면 구조적인 의미에서 백인, 부르주아, 핵가족이 아닌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고수해야 하는 걸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백인 지배계급과 흑인 프롤레타리아(혹은 피식민자)의 가족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깊이 파고들 것이다.--- p.44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한 희생
©픽사베이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족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가 훌륭하긴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야 더 진실되다고 말했다. “불행한 가족이 구조적인 의미에서 다 똑같고, 행복한 가족은 기적적인 예외라면 어쩔 것인가?”
아늑해야 할 집이 돌연 지옥이 되고,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돌연 가해자가 되는 경험은 비단 창작물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영화 <샤이닝>의 잭 토렌스는 아들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미로 속에서 얼어 죽었지만, 현실에선 아버지가 종종 ‘성공’한다.
극단적 폭력만이 아니다. 행복한 가족의 밑바닥엔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 포기와 상실로 이루어진 ‘하부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만약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당신은 드물게도 운이 좋거나 바로 그 희생의 대가로 자라난 사람이다.
물 위를 고요히 헤엄치는 오리의 다리가 바삐 움직이듯이, 행복한 가정에는 저마다 고유한 희생이 있다. 한 번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는 고된 노동의 담당자는 보통 아내이자 어머니의 몫이다. 가족 구성원의 돌봄을 무급으로 감당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는 이 오리의 다리에 주목한다. 자본은 돌봄 노동의 비용을 줄이고 가부장은 침묵의 대가로 가족이란 소왕국을 지배한다. 임금노동을 하는 임금님을 위해, 행복한 가족이 유지되어야 한다면 그 가족이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자연적 본성이나, 모성애, 고향과 같은 다양한 환상들로 지탱해야 할 만큼, 가족이 가치가 있는가? 소피 루이스는 가족이 사랑과 돌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끔찍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 거대한 무급 노동의 원천으로서 자본주의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을 하고, 아내는 무급의 돌봄 노동을 그리고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는 임금 노동을 전담하는 형태의 ‘핵가족’은 구조적 차별을 자연적인 질서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가 보기에 가족이 제공한다는 돌봄, 나눔, 사랑의 가치는 가족이 아니어도 제공할 수 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혈연과 사적 소유에 기초한 제도를 통해서는 사랑과 친밀함이 학대나 소유욕으로 전도될 뿐이다.
가족 폐지론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운동 속에서 꾸준히 언급된 주제다. 멀리는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가 있고, 1920년대 콜론타이와 같은 공산주의자들, 1960년대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오늘날의 퀴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꾸준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인륜을 저버린 급진주의자란 반대에 직면했다.
다시 소피 루이스가 이 오래된 역사를 언급하며 논의를 재개하는 것은, 팬데믹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정부는 방역을 위해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라 명령했지만, 정작 집이 안전한지 묻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다시 사적인 공간으로 복귀하면서, “파트너와 피부양자들을 들볶고 구타했지만 처벌받지 않는 일이 더 많아졌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더 나은 돌봄 체제를 고민할 시기인 것이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가 자식의 삶을 뒤흔들고, 원치 않은 양육을 감당하기 싫어 아이의 목을 조르면서도, ‘핏줄’을 내세우는 데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안식처가 반드시 핏줄로 짜인 그물침대일 이유는 없다. 그러니 모든 것에 앞서는 핏줄은 없다는 주장에는 어쩌면 손쉽게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폐지’다. 그 스스로 인정하듯 이것엔 어느 정도 으스스한 뉘앙스가 배어 있다.
그가 말하는 가족의 폐지란,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파괴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을 강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수용소에 가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가족만을 정상적인 구성으로 받아들이는 법적, 경제적 구조의 변화이며, 돌봄 관계를 확산하는 문제다. 혈육이 아니어도 돌아가 몸 뉘일 곳,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곳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혈연과는 무관한 의존과 필요와 지원의 구조”를 구축하길 요청한다. 소책자이기에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선 명확히 윤곽이 드러나진 않는다. “인간으로서 함께 지내기와 인간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이라는 함축적 문장은 읽는 이들의 구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동의하기에 쉽지 않은 문장들도 곳곳에 있다. 다만 도발적 문장들을 경유하며, 지금보다 가족이 조금 덜 필수적인 사회를 꿈꿔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니.
[PD저널=오학준 SBS PD]
다른 말과 틀린 말
‘식구’와 ‘가족’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 일명 ‘혼밥족’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1인 가구 500만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한 통계에 따르면 성인 가운데 72%가 ‘자발적 혼밥족’으로서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서 밥 먹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고 하니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따라 소형 가전이 인기를 끌고, 편의점에는 ‘혼밥족’을 위한 도시락이 날개 돋듯 팔린다고 하니 혼자서는 절대로 밥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들 한국인은 밥이란 모름지기 함께 어울려 먹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이 일본어에서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구’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였으니 함께 밥을 먹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사실은 동일한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중․일 세 나라가 전통적으로 각기 다른 한자어를 택하여 영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패밀리(family)’를 표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식구(食口)’를, 일본에서는 ‘가족(家族)’을, 중국에서는 ‘가인(家人)’을 각각 선택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말에서는 ‘식구’와 ‘가족’이 각기 다른 의미 영역을 차지하며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래는 동일한 지시 대상을 갖고 있던 단어들이었으나 차용이 이루어지면서 두 단어가 각기 다른 의미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의미 분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식구’와 ‘가족’의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식구’와 ‘가족’은 친족 관계의 여부에 따른 차이를 보이는 단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식구’는 친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한집에서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경우에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한다면, ‘가족’은 혼인이나 혈연, 입양 등에 의해 친족 관계가 성립하는 사람들끼리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식구’와 ‘가족’은 비교적 여러 가지 의미 차이를 보입니다. ‘식구’는 주로 일상적인 상황에서,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에 쓴다고 하면, ‘가족’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집합의 개념으로 쓰인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식구’와 ‘가족’은 각기 다른 의미 영역을 가지고 있어 분명하게 구별해서 써야 합니다. 그러나 (2ㄴ)과 같은 경우, ‘가족’을 ‘식구들’로 바꿔 쓰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을 보면, 원래의 우리말 어휘가 가지고 있는 의미 영역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식구’와 ‘가족’ (다른 말과 틀린 말, 2016. 12. 30., 강희숙)
가족주의
가족주의가 강하다. 가족주의적 유대의식이 동족, 부족, 민족으로 확대되고 나서도 사회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한국을 가족주의 국가라고도 한다. 그만큼 사회생활이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가족의 행복을 최상의 목표로 여기고 있다. "가화만사성", 이것을 누구나 좌우명으로 좋아한다.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가족이 융해하여 친족, 부족,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도 가족은 붕괴되지 않고 응결되어 가족은 건재하면서 민족 속에 가족이 포섭관계를 이루지 않고, 따로 분리되어 생활의 주류를 형성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민족을 넘어서서 현대적 국가체제를 갖추면서도 가족이라는 집단의식은 공고히 살아있다. 그것은 개인을 책임지는 것은 언제나 가족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국가생활을 하면서도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공동체적 유대가 핵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근간이 가족적 인간관계의 확대 연장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정서적이고 친숙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조상이 가족의 보호 밑에서 살아왔고 가족의 책임 아래 개인생활이 영위되었으며, 민족이나 국가의 적극적 보호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역사적 경험이 누적되어 타성화되어 버렸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나라의 형벌에 연좌제란 것이 있다. 부모형제의 죄는 자동으로 혈연관계에 있는 자에게도 공동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심한 경우에는 3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이 주어졌다. 도둑질을 해도 부모형제나 친척은 서로 감춰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친족 사이에 정이 없으면 사람으로 취급받지를 못한다.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족보에 의해 연결되고 있다. 족보는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신성불가침의 결정적인 가문의 문서이고 헌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집마다 족보를 신주 모시듯이 받든다.
전통적으로 동일 문중의 사람들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혼인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금혼의 풍속이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법적으로 혼인관계가 폭넓게 허용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관습적인 유풍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엔 연공서열이 있다. 이것은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가족윤리가 사회생활에도 확대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직장사회에서도 그것이 업적평가의 중요한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입사 동기, 혹은 같은 학번이 진급하는데 무시하기 어려운 압력이 되고 있다. 업적 사회에 귀속성이 혼재하는 한국적 특성은 이런 연유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상과 사회과학의 만남, 2005. 11. 25., 고영복)
가족해체는 사회주의의 ‘미덕’이었다!
가족의 위기, 누구의 책임인가
코흘리개 장난꾸러기 꼬마로 60,7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대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등을 기억한다.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면 일단 울며 달아나서 할아버지 등 뒤로 숨는 것이다. 어머니는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지만 어찌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손주의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과 어머니의 화난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무조건 손주편이다. 나중에 손주는 할아버지로부터 엿이나 삶은 감자 같은 것을 얻어 먹으며 따뜻한 훈계로 잘못을 뉘우친다.
하지만 오늘날 부모와 자녀만이 있는 핵가족에서 아이는 숨을 곳이 없다. 더구나 한 부모 가정에서라면 아이는 자기 편 조차 없는 어머니나 아버지와 맞서야 한다. 잘못을 알지만 타협이 안 되므로 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든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청소년의 탈선과 비행의 배경에는 이러한 가정문제가 절대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족의 해체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제기되는 시점이다.
붕괴하는 가족가치, 늘어나는 사회폭력
최근 대구에서 아파트 투신으로 꽃다운 생을 마감한 여중생도 그런 이혼한 어머니 밑에 있었고 의대를 강요하던 이혼한 어머니와 살던 한 고등학생은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한 부모가 아니더라도 부부간의 가정불화는 청소년과 노인을 자살로 이끈다. 대구시교육청에 의하면 2010~2011년 2년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구지역 초ㆍ중ㆍ고교생 17명 중 절반 가량이 가정불화 등 가정문제와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가 원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늘어나는 노인 자살 역시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원인이 60%를 넘는다고 2010년 경기복지재단이 조사 보고를 통해 밝힌 바도 있다.
가정불화는 가정폭력으로 발전해 이제 더 이상 가정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정불화 현장에 경찰이라는 국가가 개입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이번 달 2일부터 시행되는‘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바로 그것이다.
2010년 여성부가 기혼남녀 26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0 가정폭력실태조사’에 따르면 1년간 가정폭력이 있었다는 응답이 53.8%였다. 가정폭력이 계속된 기간은 평균 11년 2개월이었다. 대개 30~40대 여성이 주 피해자였으며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비율은 62.7%나 됐다. 사회폭력의 범죄자들은 대개 어릴 때 가정에서 폭력에 시달렸거나 가족으로부터 거부됐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이러한 가족 문제는 전통적 가족가치의 붕괴로부터 발생한다. 가족 내에서 갖는 부모의 위상과 자녀의 역할이 서로 갈등하고 이혼과 별거가 증가하며 결혼의 기피, 혼전 임신의 증가, 심지어 동성간의 동거 가족마저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사회에 가족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서구사회가 겪었던 그러한 문제들이다.
흔히 ‘가족 위기론’이라고 불리는 이 주장의 핵심에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쾌락주의가 원인으로 자리한다. 가족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 전에 개인들의 가치관 문제이며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가족공동체를 위해 부부와 자녀의 전통적 역할을 회복하는 길이다. 가족 위기론자들에게 그러한 방법론은 ‘가부장적 제도’의 확립에 있다.
이처럼 전통가족과 전통적인 가족가치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가족사회학자는 파피노우(David Popenoe)였다. 파피노우는 부모 및 그들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1950년대의 가족을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20세기 후반 이혼의 증가로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현상을 미국 사회의 위기로 지목했다.
미국 내 'the family' vs 'families' 논란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50년대의 미국 가족은 전통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 역사에서 특수한 가족이라고 보아야 하며, 미국의 가족은 하나의 대표적인 가족(the family)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면적인 가족들(families)로 접근해야 실상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흔히 ‘가족 진보론’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관점에는 남성이 중심이 된 가부장적 가족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으로 자리한다.
가족 위기론을 주장하는 파피노우의 주장에 가장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개진한 스테이시(Judith Stacey)는 캘리포니아 지역의 가족들의 심층면접을 통해 탈산업사회의 가족이 어떻게 분해, 변형되고 있는지를 추적하며 미혼모 가족, 외부모 가족, 심지어 동성가족들은 결코 비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가족이고 따라서 이들이 지닌 가족가치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는 가치관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진보’하고 있다는 것. 싸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정적인 충돌은 다름 아닌 미국의 백악관에서 벌어졌다.
1990년대 초 미 백악관에는 가족문제에 대한 보고서 제목의 문구를 놓고 한바탕 학자들간에 격론이 불거졌다. 보고서 제목의 가족을 The family(가족)라고 표기할 것인가 아니면 Families(가족들)이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보수주의 가족학자들은 전통적 가족의 의미에서 미혼모 가족이나 1인가족, 동성애 가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진보학자들은 반대로 이러한 변형된 가족도 가족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1992년 재선에 도전한 부시 대통령은 지지율이 신통치 않자 가족의 문제가 미국사회의 중요한 아젠다임을 깨달았고 이를 선거전략에 활용하게 된다.
당시 미국 NBC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머피 브라운’ 이라는 연속극에서 주인공인 뉴스앵커 여성이 혼외 임신으로 출산하는 장면을 두고 미국 사회에 가족가치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지적이고 높은 연봉을 받는 전문 여성 앵커가 아이의 아버지 없이 혼외 임신한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를 부통령 댄 퀘일이 지적하자 이와 연관된 가족에 관한 여러 현상을 두고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에 따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가족가치에 관한 연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가족가치는 선거기간 동안 가장 논쟁적인 쟁점의 하나가 됐고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의 공화당은 1950년대의 미국 가족을 전통 가족이라고 규정하면서 1950년대 미국 가족 및 가족가치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공화당은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가족가치를 선거 캠페인으로 이용함으로써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대화 없는 한국 가족, 미래는?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이 가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한국정신문화원 은기수 교수팀이 가족가치에 대해 국가간 비교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동거, 이혼 및 가족 내 성역할 등의 가족가치에 관해서는 일본, 대만보다 보수적이었다. 오히려 한국보다 경제수준의 차이가 많이 나는 필리핀과 동일한 수준에 있었던 것. 가족가치의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가로 연구 조사에서는 밝혀졌다.
동시에 가족에 대한 만족도도 현재로서는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2010년 서울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5세 이상 서울시민 56.6%는 전반적으로 가족관계에 대해 만족하며 38.8%가 보통이라고 응답했다. 불만족은 4.5%로 낮은 수치를 보였다. 부모 자녀간의 만족도는 100%를 기준으로 72.6%로 가장 높았고 배우자 69.1%, 부모 65.6%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배우자 형제자매와의 만족률은 44.0%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같은 해 ‘씽굿-스카우트’라는 취업포털의 '2010 가정의 달 가족애' 테마 설문 조사 결과와도 일치한다. 가정의 건강함 척도를 엿볼 수 있는 ‘가족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2030세대는 100점 만점에 ‘80~89점’을 꼽는 이들이 32.20%로 가장 많았고 이어 ‘70~79점’을 꼽은 응답자가 31.10%, ‘90~100점’이 14.40%로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30세대에서 ‘아버지와의 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2030세대들은 같은 조사에서 하루 평균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23.30%가 ‘거의 없다’고 응답했다. 10분 이내와 5분 이내가 각각 20%와 18%였다. 30분 이상이라고 응답한 이들은 11.10%로 집계됐다. 어머니와는 절반 가량의 응답자가 30분 이내 또는 이상 대화하고 있었다고 밝혔던 점에 비하면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가 젊은 자녀층과 소원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가부장제적 가족가치가 미래에도 지지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회의 가족가치는 아직 양호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바로 이혼이나 별거, 미혼 출산을 통한 한부모 가정과 무자녀 가정의 증가세가 바로 그것이다. 자녀 없이 부부로만 구성된 가족은 지난 2000년 기준으로 2010년에는 47.2% 늘었으며 편부 또는 편모와 미혼 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는 30.2%, 1인가구는 무려 70.2% 증가하는 등 `소핵가족'의 증가율은 높아가고 있다. 앞으로 2020년까지 이 한부모 가정의 수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러한 소핵가족의 경우 가족 만족도가 4~6인 가족의 만족도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핵가족 하에서는 자녀들이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된다. 더구나 인터넷과 게임에 몰두해 있는 청소년 자녀들은 부모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보면 맞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이렇게 말한다.
“ 과거에는 TV가 가족간의 대화를 줄인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인터넷이 가족간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아내와 남편 역시 각각 자신의 사이버세상에서 따로 살아가죠. 가족간에 유대가 될 만한 대화나 가치공유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지요.”
국가가 가족을 책임져주는(?) 사회주의 사회
우리 사회의 가족해체가 가족의 위기라면 그 치유방법은 가족 구성원들 각각의 노력에 달려 있다. 가족의 위기가 근본적으로는 사회 문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가 가족의 위기에 관여하게 되면 이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옮아간다. 부부싸움에 경찰이 안방으로 들어오고 아이를 국가가 무상으로 보육하며, 이혼한 부모와 자녀의 생활을 국가가 지원하고, 어머니의 도시락 대신 ‘사회적 식탁’이라는 무상급식을 가정에 제공하는 체제는 가족의 해체를 더 가속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보호해 주니 부부싸움도 할 만하고, 아이를 국가가 돌봐주니 책임이 없으며, 이혼해도 국가가 생활을 지원해 주니 그것도 할 만하고, 국가가 아이의 식탁을 책임지니 굳이 아이의 식성에 신경 쓸 일도 없지 않을까.
이렇듯 국가가 가족을 책임져 주는 사회의 이상적 모습이 다름 아닌 시회주의 체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가족의 해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필연적인 일이며 여성의 가사노동을 가부장제가 착취하기 때문에 여성을 가정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였다. 가족의 식탁을 가정에서 끌어내 사회적 광장으로 옮기려는 사회주의적 생각은 바로 가족이란 사유재산의 상속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재산에 바탕한 가족체제가 붕괴하고 공동체적인 이상주의 국가를 지향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족은 해체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상복지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정책이다. 더 크고, 더 깊고, 그럼으로써 더 확실하게 가족을 붕괴시키는 수단이 바로 무상복지이며 그것이 바로 보수주의자였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국민들을 사탕발림으로 유혹했다가 끝내 사회주의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패퇴하게 만든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엉뚱한 이야기라고? 그러면 한 권의 책을 권한다. 1884년 칼 마르크스의 노트를 바탕으로 엥겔스가 야심차게 썼던 유명한 저서,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에는 왜 가족이 해체돼야 하는지가 장황하게 펼쳐 있다.(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2012.05.07.
https://brunch.co.kr/@book-survivor/41 같이 있어도 불편한 가족
가족 간 불편한 관계, 건강에 더 해로운 영향 미쳐
가족간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는 건강에 더 해로울 수 있다(사진=셔터스톡)
부모를 비롯한 형제 자매간 불편하고 긴장된 관계는 다른 사람들의 관계 및 문제보다 건강에 더 해로운 것으로 밝혀졌다.
가족 내 정서적 분위기와 건강
미국심리학회 및 가족심리학 저널에 실린 이 연구에 따르면, 가족 내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는 개인의 전반적인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20년에 걸친 중년 시기에는 뇌졸중이나 두통 등 만성적인 신체 조건까지 발전시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
연구의 수석 저자이자 텍사스대학 사우스웨스턴 메디컬 센터의 가정 및 지역사회 의학 부교수인 사라 우즈 박사는, 친밀한 관계가 신체적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전의 연구와는 달리 이번 연구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가족과 파트너 관계
우즈 박사는 이전 연구들이 낭만적인 관계, 특히 결혼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 가장 많았다며, 연구들은 이같은 관계에서의 문제가 건강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트너와의 친밀한 관계와 가족, 그리고 건강 사이 연관성의 강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파트너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결혼 전 더 오래 기다리기도 한다는 것.
연구 결과 참가자가 경험한 가족의 부담이 클수록, 만성 질환의 수는 더 많았다(사진=셔터스톡)
이에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연구팀은 미드라이프 디벨롭먼트가 2,802명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설문했던 자료들을 분석했다. 이들 수집된 자료들은 1995~1996년, 2004~2006년, 그리고 2013~2014년 등 총 3번에 걸쳐 나온 것으로, 그중 1차 조사의 연구 참가자들은 평균 45세였다.
당시 질문은 배우자가 있거나 없는 조건하에서 가족에 대한 것으로 '가족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을 비난하는가?' 하는 것 등이었다.
이외 파트너와의 낭만적인 관계에 대한 가족 지원과 별도의 설문 조사에 대한 질문도 포함됐다. 파트너나 배우자가 얼마나 자주 자신들에게 감사하는지 혹은 반대로 얼마나 자주 논쟁하는지 같은 질문들이었다.
참가자의 건강 상태 측정
연구팀은 또한 참가자의 건강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3가지의 데이터 수집 기간 전 12개월 동안 경험한 만성 질환의 수도 고려했다.
여기에는 위장병을 비롯한 두통 및 뇌졸중 등이 포함됐다. 그 결과, 참가자가 경험한 가족의 부담이 클수록, 만성 질환의 수는 더 많았으며 10년 후의 '건강 평가' 역시 더 나빴던 것으로 나타났다.
2004~2006년 사이 이루어진 2차 조사에서 연구된 가족의 지지 정도는, 10년 후에 더 나은 건강 평가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를 분석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파트너와의 긴장되고 껄끄러운 관계에 있어 건강에 대한 중요한 연관성이나 영향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 이와 관련 우즈 박사는 건강과 감정적 분위기, 그리고 로맨틱한 파트너 사이에는 연관성이 '제로'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 같은 결과는 연구팀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말했다.
정서적 강도와 건강
연구팀은 향후의 건강 및 친밀한 파트너 사이의 중요한 연결성이 결여된 것은 아마도 이별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가족 관계가 더 긴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파트너 관계는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정이다.
연구 책임자이자 녹스빌 간호 조교수인 패트리샤 로버튼 박사 역시, 가족 관계의 감정적 강도가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이는 사람들의 안녕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우즈 박사는 이미 만성적인 건강 상태를 가지고 있는 성인들의 경우, 불편한 가족 관계로 인해 부정적인 정서적 분위기를 유지하게 될 경우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가족 구성원의 정서적 지지 및 건강 상태에 대한 열린 대화가 이뤄질 경우 건강은 개선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회 관계와 건강, 웰빙
의료 전문가인 비벡 머시 박사는 사회적 관계의 부재와 외로움이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치 하루에 15개피 상당의 담배를 피우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아워월드 인 데이터'의 자료에 따르면, 외로움을 느끼는 노령층의 비율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현상은 많은 국가에서 나타났다.
2015년 65세 이상 인구를 기준으로 그리스가 62%, 이스라엘이 48%, 이탈리아가 47%,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46%의 수치를 보인 것. 이어 프랑스가 25%, 벨기에가 42%, 그리고 스페인이 40%, 핀란드가 39%, 독일이 37%, 네덜란드가 33%, 스웨덴이 30%로 그 뒤를 이었다. 이 가운데 핀란드는 75세 이상, 미국은 72세 이상을 기준으로 했다.
올해 발표된 세계행복보고서에서는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국가가 7.44점(최고점 10점)을 얻은 노르웨이로 나타났다. 이어 7.18의 호주, 7.12의 독일, 5.98의 콜롬비아, 그리고 5.92를 받은 볼리비아 순이었다.
최재은 © 메디컬리포트뉴스2019.11.13.
새로운 후생지표의 개발
경제성장이 우리의 복지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완전하지 못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후생지표의 개발이 시도되었다. 1972년에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토빈(James Tobin)교수가 제안한 경제후생지표(Measure of Economic Welfare)는 전통적인 국민소득 계정에 추가적인 복지 요소들을 포함시켜 국민총생산에 내재된 약점을 보완하고자 시도했다. 경제후생지표는 국민(내)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 시장 밖의 경제활동 가운데 주부의 가사활동과 가족의 여가활동을 추가적으로 포함한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후생지표들은 경제발전과 함께 증가하는 공해 같은 사회적 손실비용을 포함하고 있다. <출처: gettyimages>
새롭게 제안된 후생지표 가운데 일부는 후생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개발되었다. 조로타스(Xenophon Zolotas)가 1981년에 제안한 경제적 복지(Economic Aspects of Welfare)지수는 재생 불가능한 천연자원의 사용을 포함시키고 공기, 물, 토양, 소음공해 등의 다양한 공해요인과 범죄, 이혼 등의 사회적 손실비용을 포함한다. 지속가능성을 천연자원이 아닌 인간의 측면에서 접근한 새로운 지표도 제안되었다. 소득분배의 형평성이 악화되면 구성원의 행복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제의 지속가능성도 약화된다는 관점에서 데일리(Herman E. Daly)와 콥(John B. Cobb)은 1989년에 소득분배상태를 포함한 지속 가능한 경제후생지표(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를 제시했다.
세계은행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후생지표이다. 인간개발지수는 1인당 평균소득과 같은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예상수명, 영아사망률, 문맹률, 교육수준 등 삶의 질과 같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진정진보지수(Genuine Progress Indicator), 녹색국민총생산(Green Net National Product), 빈곤지수(Human Poverty Index) 등도 제안되었다. 이제 성장을 대신하는 새로운 지표의 개발은 새로운 성장 산업이 되었다.
행복지수
성장을 대신하는 새로운 후생지표 가운데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이다. 행복지수라는 참신한 아이디어의 포스터 모델은 부탄정부이다. 부탄은 히말라야 산맥 동쪽에 티베트와 인도와 접한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진 인구가 100만 명도 안 되는 왕국이다. 1972년 당시의 통치자였던 지그메 싱계 왕추크(Jigme Singye Wangchuck) 전 국왕은 국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는 국가에서 살 수 있는 경제를 국정목표로 설정했다. 그는 이러한 후생지표를 국민총행복이라고 명명하고 부탄왕국은 국민총생산에서 벗어나 국민총행복을 추구할 것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부탄정부가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위해 설정한 목표는 성장보다는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 환경 보호, 문화 진흥, 그리고 좋은 통치이다.
부탄에서 가장 신성한 사원인 탁상 사원. 부탄 왕국은 국민총생산에서 벗어나 국민총행복을 추구한다. <출처: Douglas J. McLaughlin at en.wikipedia.org>
국민총행복 지수는 부탄인의 총체적인 행복과 후생 수준을 구성하는 요소로 간주되는 9개의 규범적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9개의 항목은 심리적 후생, 시간 활용, 공동체의 활력, 문화, 건강, 교육, 생태의 다양성, 생활수준, 통치이다. 국민총행복지수의 작성에서 각각의 영역은 동일한 가중치를 갖는다. 각각의 영역은 몇 가지 지표에 의해 평가된다. 지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하지 않고, 조사에서 응답률이 높고, 서로 상관관계가 높지 않은 항목으로 선정했다.
심리적 후생 영역은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이다. 삶의 모든 요소에 대한 만족도, 삶의 즐거움, 후생의 주관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구성원 전체의 총체적 행복이 부탄왕국이 추구하는 주된 목표이기 때문에 심리적 후생은 국민에게 행복을 제공하는 정부의 정책과 서비스가 성공했는지 여부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심리적 후생 영역은 일반적 심리 지표(general psychological indicators), 정서적 균형 지표(emotional balance indicators), 정신적인 지표(spirituality indicators)로 구성된다. 구체적으로 측정되는 내용은 일상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의 정도, 질투, 좌절, 이기심과 같은 부정적 감정, 관대함, 동정심, 평정심 등과 같은 긍정적 감성, 명상과 기도와 같은 영적 활동 등이 척도로 측정되어 조사 결과가 수량화 된다.
매년 부탄의 종교적 축제기간에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의식이 진행된다. 문화적 전통의 유지는 부탄의 중요한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Babasteve at en.wikipedia.org>
시간의 사용 영역은 삶의 질을 나타내는 가장 효과적인 창문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측정하는 이유는 노동 이외의 시간이 행복에서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다. 수면과 자기계발, 공동체 활동, 교육과 학습, 종교와 사회 및 문화적인 활동, 운동과 여가활동, 그리고 여행 등에 활용한 시간은 삶을 풍요하게 하고 행복을 증진시킨다. 살림을 하고, 애들을 키우고,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을 돌보는 가사활동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경제활동이기 때문에 국민소득 계정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우리의 후생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에 국민총행복지수에서는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공동체의 활력 영역은 개인과 공동체와의 관계, 공동체 내에서의 개인 사이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영역은 신뢰의 본질, 공동체의 귀속감, 가정과 공동체의 안전, 나눔과 자원봉사 등을 조사한다. 공동체의 활력 영역의 지표는 가족, 안전, 상호의존, 신뢰, 사회적인 봉사, 공동체 참여도, 그리고 친척과의 친밀도로 구성되어져 있다.
문화적 전통의 유지는 부탄의 중요한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과 문화의 다양성은 부탄인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창의력의 배양에 크게 공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화 영역은 문화적 전통의 다양성과 강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영역은 문화시설, 언어사용의 형태, 그리고 공동체 축제와 전통적 오락의 참여 정도를 조사한다. 이러한 지표들은 부탄인의 핵심적 가치를 측정하고 가치관과 전통의 변화를 추정한다. 문화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측정하는 지표는 방언, 전통, 운동, 공동체 축제, 예술적 기능, 가치관의 전파, 기본적 통찰력 지표이다.
행복지수 조사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이 2,000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탄은 1위를 차지했다. <출처: gettyimages>
좋은 통치 영역은 행정의 질이나 효율성, 정직성에 대한 국민의 평가를 반영한다. 통치 영역의 지표는 인권, 정부 각 부처나 기관의 지도력, 불평등과 부패를 추방하기 위한 정부의 감독 및 정책 능력을 포함시킨다. 이와 함께 언론매체와 사법부 그리고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지수도 포함된다. 즉 정부의 업적, 자유, 그리고 제도와 기관에 대한 신뢰가 통치영역에 포함된다.1)
영국에 본부를 둔 유럽 신경제재단(NEF)은 지난 해 국가별로 행복지수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 부탄은 1위를 차지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2,000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탄은 응답한 국민 가운데 97%가 행복하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부탄에 비해 1인당 국내총생산이 10배나 높은 대한민국은 143개국 가운데 68위에 그쳤다.
참고문헌: Andrew Leigh, Growth Matters, [Aurora Magazine, Issue 3, July 2006]; Gross National Happiness, The Center for Bhutan Studies.
행복지수 - 경제와 행복의 관계 (경제학 주요개념, 김철환) 2011. 09
세계 행복지수 1위 2022년 랭킹 핀란드 5년 연속 1위
이 순위는 미국 조사 회사 갤럽이 전 국가에 대해 실시하는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한 해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지난 3년간의 평균치에 따른 것이다. 2022년 결과는 2019~2021년 결과의 종합이다.
각국 정부는 행복을 공공정책의 중요한 목적으로 간주하고 OECD의 압력에 의해 현재는 거의 모든 회원국이 매년 국민의 행복지수를 측정하고 있다. 1차 이때는 2008년~2012년 5년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2019년~2021년까지 15년간 7개 지표 중 1인당 실질 GDP는 아시아에서 성장세가 가장 빨랐고 다음으로 아프리카, 동유럽, CIS가 증가했다.
건강 수명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늘었고 남아시아가 뒤를 이었다. 반면 남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지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측정되는 사회적 지원은 가장 적었다.
아시아에서는 남아시아의 성장이 현저하며 원래 높은 수준에 있던 서유럽에서는 성장이 보이지 않아 동유럽이 따라잡는 형국이 됐다.
독직 인식이라는 점에서 라틴 아메리카(동유럽 이외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와 북미·호주, 뉴질랜드(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 울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2010년 이후 떨어졌다.
아시아 3개 지역(동, 동남, 남)은 모두 높은 수준이었으나 소폭 감소하였으며, 서유럽에서는 2012년과 최근을 비교하면 가장 많이 줄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청년들의 생활만족도는 떨어지고 60세 이상의 생활만족도는 오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팬데믹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현저한 변화는 전세계적으로 자선활동이 급증한 것이다. 모든 국가에서 자선사업에 돈을 기부하는 사람, 낯선 사람을 돕는 사람,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게 늘고 있으며 이들 세 지표를 합친 평균은 2021년에는 팬데믹 전과 비교해 25%나 상승한 바 있다.
동양에서 중시되어 온 균형과 조화를 지표로 활용해 서양 문화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 행복연구에서는 동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균형과 조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비교적 경시되어 왔는데 2020년 갤럽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체험에 대해 질물을 하고 있다.
- 자신의 인생은 밸런스가 잡혀있나요?
- 자신의 인생에 편안함을 느끼나요?
- 하루의 대부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습니까?
- 자극적인 인생보다 온화한 인생을 선호하시나요?
- 타인이나 자신에 대한 배려를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은 균형, 편안함, 온화함을 체험한 사람은 만족도가 가장 높은 서구 국가에 많고 가난한 나라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국가 및 지역에서 대다수 사람이 자극적인 삶보다 평온한 삶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동양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그 비율이 특별히 높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 평온도가 낮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국가에서는 평온한 삶을 바라는 목소리가 더 컸다. 균형과 편안함 모두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만족스러운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https://happiness-report.s3.amazonaws.com/2023/WHR+23.pdf
한국인 행복지수 세계 최하위권...애인·배우자 기대감 가장 낮아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나타났다.
지난 15일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발표한 '세계 행복(GLOBAL HAPPINESS) 2023'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 수준은 57%로 전체 32개국 중 31위였다.
입소스는 '모든 상황을 종합했을 때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행복하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57%로, 나머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또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한국보다 행복도가 낮은 국가는 헝가리(50%)뿐이며 조사 대상 32개국 평균인 73%와도 큰 격차를 보였다.
입소스는 사람들에게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행복한가?’라고 물었다. ‘매우 행복하다’, ‘제법 행복하다’라고 답변한 비율을 행복지수로 표현했다. 이번 조사는 전 세계 32개국의 75세 미만 성인 남녀 2만250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조사 대상에 오른 32개국의 평균 행복지수는 73%였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는 중국이었다. 응답자의 91%가 ‘매우 행복’ 또는 ‘제법 행복하다’라고 답했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86%), 네덜란드(85%), 인도(84%), 브라질(83%) 순이었다. 미국(76%)과 일본(60%)은 각각 14위, 29위를 차지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 1명 이상'인 한국인은 61%로 32개국 중 30위에 머물렀다.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국가는 브라질(58%)과 일본(54%)뿐이었다.
애인이나 배우자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국은 최하위로 조사됐다. 독신인 한국인 중 10년 안에 애인이나 배우자를 만들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더 쉬워질 것이라고 답한 이들보다 58%p 더 높았다.
조사 대상국 응답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는 요소'로 자녀와 배우자와의 관계를 공통으로 꼽았다. 만족감이 가장 적은 것은 국가 경제 상황 및 사회·정치 상황으로, 각각 평균 40%에 그쳤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2월22일부터 올해 1월 6일까지 조사 대상 32개국의 74세 이하 성인 2만2000여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에서 진행됐다. 2023.03.16.
행복 1위’ 핀란드 사람들은 뭐 하고 노나요?
여행
숲 여행, 사우나, 얼음물 수영, ‘저세상’ 대회
‘고무장화’ 패션, ‘얼음물 수영’ 등 젊은층 유행
“우린 행복보단 평온, 만족이란 표현 써”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 인터뷰
핀란드인은 자연 호수에서 얼음물 수영을 즐긴다. 사진 핀란드 관광청 제공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UN SDSN·유엔 산하 자문기구)는 지난 3월 <세계 행복 보고서>를 펴냈다. 집계 결과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북유럽 핀란드라고 밝혔다. 3년째 부동의 1위다. 최근 핀란드는 국내 정치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기본소득 도입 논쟁의 ‘단골손님’이다. 2017~2018년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갑론을박 중이다. 핀란드 ‘청년 정치’도 화두에 올랐다. 산나 마린(35) 핀란드 총리는 지난해 말 ‘전 세계 최연소 지도자’로 주목받으며 취임했다. 그를 포함해 연정 참여 5개 정당 대표 모두 여성, 그중 넷이 30대다. 전 세계가 놀랐다.
격세지감이다. 10년 전만 해도 핀란드는 그저 껌 ‘자일리톨’과 노키아, 교육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핀란드 문화는 한국인 일상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다. 핀란드 도자기 브랜드 아라비아, 유리 브랜드 이딸라, 패션·리빙 브랜드 마리메꼬, 하마 닮은 캐릭터 ‘무민’,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와 ‘클래시 오브 클랜’ 등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ESC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주한 핀란드 대사관저에서 에로 수오미넨(65) 대사를 만나 물었다. “핀란드 사람들은 뭐 하고 놉니까?”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었다. 핀란드가 정말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유엔 <세계 행복 보고서>는 1인당 국내 총생산(GDP), 사회적 지원, 기대 건강수명, 자유 등을 주요 분석 지표로 활용했다. 반면 갤럽 보고서 <2019 전 세계 감정>은 ‘어제 잘 쉬었나?’, ‘어제 많이 웃었나?’와 같은 일상적 경험을 설문 조사했다. 140여개 나라 15만1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갤럽 조사에서 자신의 일상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장 많이 느낀 나라는 남미 파라과이였다. 핀란드는 상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핀란드의 숲. 사진 핀란드 관광청 제공
—<세계 행복 보고서> 결과와 달리 핀란드인이 실제 느끼는 행복감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언론 보도나 조사 결과가 있다. 그 괴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핀란드에선 행복하다는 말보다는 사는 데 만족한다는 표현을 쓴다. 그 만족감의 바탕은 신뢰다. 핀란드인들은 정부 기관, 정치, 언론, 이웃에 대한 신뢰가 강하다. 그런 신뢰가 자기 삶에 대한 만족으로 이어진다.”
—핀란드 관련 자료를 보면 행복을 설명할 때 유독 평온(calm)이란 단어를 자주 쓴다.
“핀란드인에게 행복보다 훨씬 중요한 개념이 평온이다. 급한 마음 없는 편안하고 예상 가능한 삶이 핀란드인에게 중요하다. 한 예로 최근 인터뷰에서 산나 마린 총리의 배우자가 총리에 관해 ‘매우 차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건 핀란드에서 최고의 칭찬이다. 국민 입장에서도 차분한 지도자는 신뢰할 만한 좋은 지도자라는 의미다. 핀란드인에겐 행복보다 평온,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
—기쁨, 즐거움은 핀란드인이 느끼는 행복감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인가.
“핀란드인도 신나고 기쁠 때가 있지만 그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런 감정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핀란드엔 사우나가 320만개 이상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 핀란드 관광청 제공
주한 핀란드 대사관저 지하엔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다. 수오미넨 대사는 핀란드인이 즐기는 여가 활동으로 사우나를 첫손에 꼽았다. 북유럽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핀란드 면적은 한국의 3.37배(33만8145㎢), 인구는 약 11%(약 552만6000명)다. 핀란드 관광청에 따르면 핀란드에 사우나는 320만개가 넘는다. 아파트, 별장 오두막, 수영장, 헬스클럽, 호텔, 공항 라운지, 패스트푸드점, 대관람차 등에도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대관람차 한 칸이 사우나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신기한 노릇이다.
—핀란드인의 ‘사우나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새로 지은 아파트는 거의 모든 집마다 개인 사우나가 있다. 오래전 지은 아파트는 공용 사우나가 있다. 호숫가 별장마다 거의 모두 사우나가 있다. 한 주에 보통 수요일과 토요일에 사우나를 한다. 매일 사우나를 하는 사람도 있다. 사우나는 가족, 친구가 함께 즐기는 매우 사교적이고 사적인 공간이다. 사우나를 같이 가자는 제안은 우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사우나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피부가 반질반질해지는 느낌을 즐긴다. 핀란드인들은 어떤 점을 즐기나.
“장작을 태울 때 나는 소리와 사우나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별장에선 사우나에서 바라보는 호수 전망을 즐긴다. 불에 달궈진 돌에 물을 뿌렸을 때 나는 ‘치치익’ 소리도 정말 좋다. 여름엔 신선한 나뭇가지를 모아 피부를 때려 마사지한다.”
핀란드 전통 사우나는 나무를 태워 그 위에 있는 돌을 달군다. 그 돌에 물을 뿌려 생기는 증기로 습도를 조절한다. 여름 별장에선 갓 자란 자작나무 가지 묶음으로 몸을 두드리는 행위(vasta spanking)를 즐긴다. 혈액 순환을 돕고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를 하면서 소시지와 함께 맥주 또는 사이다를 마신다.
핀란드인은 숲에서 버섯이나 베리 채집을 즐긴다. 사진 핀란드 관광청 제공
수오미넨 대사는 여행지로서 핀란드의 매력을 한 단어로 요약했다. “자연.” 그 중심에 핀란드 숲이 있다. 전 국토의 75%가량이 숲이다. 그들에게 숲은 각별해 보였다.
—핀란드인은 숲에서 어떤 활동을 하나.
“지천으로 널린 버섯과 베리를 따러 다닌다. 개인이 소유한 숲에서도 자유롭게 채집 활동을 할 수 있다. ‘만인의 권리’라는 개념으로 보장하는 활동이다. 물론 나무를 자르는 건 금지한다. 숲에선 오리엔티어링(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중간 지점을 통과해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는 경기)이나 사냥도 즐긴다. 텐트 안에 숨어서, 미리 놓아둔 먹이를 동물들이 먹는 걸 구경하는 액티비티도 있다.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아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불 때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맑은 공기를 즐긴다. 장 시벨리우스(핀란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도 그런 숲에서 나는 소리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한국도 국토 63.2%가 산림이다.(2015년 말 기준) 한국인과 핀란드인이 숲에서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
“핀란드인은 숲을 단지 좋아하지 않는다. 숲을 정말 사랑한다. 핀란드인은 나무와 동물 사이에 숨어 숲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즐긴다. 숲은 안전하고 평온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있다. 한국인들은 산을 정복하는 느낌으로 등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가 핀란드에서 가져 온 등산용 고무장화.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핀란드인들은 어떤 옷차림으로 숲에 가나.
“핀란드는 한국보다 비가 많이 와서 숲 바닥이 눅눅한 편이다. 편하고 안전한 고무장화를 즐겨 신는다.”
—숲에선 등산화가 편하지 않나?
“핀란드는 한국처럼 따로 낸 등산로가 없다. 돌이나 수풀을 통과할 때 고무장화가 의외로 편하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고무장화와 등산용 바지, 바람막이를 들고 나타났다.)
“보통 이렇게 입는다. 고무장화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는다. 바람막이는 밝은색을 입는다. 가족끼리 가도 각자 돌아다니다가 서로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려는 거다. 1970년대 핀란드에서 고무장화 패션이 유행했는데, 레트로(복고주의) 문화를 타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고무장화가 인기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주한 핀란드 대사관저에서 만난 에로 수오미넨 대사.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2016년 주한 핀란드 대사로 부임한 수오미넨 대사는 종종 북한산에 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고무장화를 신고 산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최근 서울 지역 20~30대 사이에서 남녀 불문하고 레깅스가 등산 패션으로 뜨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핀란드 호수가 약 18만8000개다. 핀란드인은 호수 여행도 즐기나?
“보트나 카누를 타거나 수영, 낚시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호수에 나타난 새에 관한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꽁꽁 언 호수에서 얼음물 수영도 즐긴다.”
—얼음물 수영은 어떻게 하나.
“도시에서도 자연 호수에 얼음물 수영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 얼음을 깨서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아침마다 얼음물 수영을 하고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건강을 유지하고 활력을 찾는 데 좋기 때문이다. 단 얼음물 수영은 심장이 튼튼해야 할 수 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얼음물 수영한 걸 자랑처럼 얘기하곤 한다. 최근엔 레트로 문화가 유행하면서 얼음물 수영을 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얼음물 수영을 하고 바로 이어 사우나를 즐기는 문화도 있다.”
—얼음물 수영을 할 때 어떤 감각을 느끼는 건가.
“처음 할 땐 너무 추운데 곧 익숙해진다. 얼음물 수영을 하고 물 밖에 나오면 몸이 따뜻해지고 이완되는 느낌이 있다. 장기적으로 면역력이 강해져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측면도 있다.”
핀란드 관광청에 따르면, 근래 핀란드에는 스파, 목욕 시설과 함께 얼음물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늘고 있다. 그 매력은 ‘마른 땅으로 나왔을 때 몸을 관통하듯 솟구치는 강렬한 느낌’이라고 한다.
핀란드에선 ‘하비 홀싱’ 대회가 인기를 얻고 있다. 말 인형에 고정한 막대기 위에 올라 말에 탄 것처럼 마장 마술을 뽐내는 경기다. 사진 핀란드 관광청 제공
핀란드인들이 자연을 벗 삼은 야외활동만 즐기는 건 아니다. 핀란드식 ‘집콕 혼술’ 문화도 있다. 외출할 생각 없이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술 마시는 행위를 뜻하는 ‘칼사리캔니’(Kalsarikännit·Pants drunk)다. 핀란드 외무부는 ‘디스 이즈 핀란드’ 누리집에서 핀란드를 알리는 그림말(이모티콘) 56종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칼사리캔니 이모티콘이다.
—칼사리캔니 문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무런 요구와 강요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뜻한다.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여유롭게 독립적으로 있어도 괜찮다는 게 핵심이다.”
—핀란드에서 대중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흔하진 않다. 혼자 사는 젊은이 중에 그런 시간을 즐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핀란드인이 고요하고 평온한 여가만 즐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어 기타(기타를 들지 않고 실제로 연주하는 것처럼 흉내 내는 기타) 세계 선수권 대회 본거지가 핀란드 북부 도시 오울루(Oulu)다. 1996년부터 열리고 있다.
에어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 사진 우소 하랄라(Juuso Haarala) 제공
—핀란드인들은 에어 기타 치는 걸 즐기나.
“실력 있는 선수들도 있지만 직접 하는 것보다는 대회를 관람하는 걸 즐긴다. 정말 특이해 보이는데 막상 보면 재밌는 대회다. ‘저세상’(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다는 뜻)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엔 인형 말을 타는 ‘하비 홀싱’(hobby horsing) 대회가 뜨고 있다. 여자아이들이 즐기는 경기다.”
하비 홀싱 대회는 머리만 있는 말 인형에 막대를 끼우고, 막대 위에 올라탄 자세로 마장 마술을 뽐내는 경기다. 경기 영상을 보면 10~2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처럼 달리며 기술을 선보인다. ‘휴대전화 던지기 세계 선수권 대회’도 2000년 핀란드 남동부 도시 사본린나(Savonlinna)에서 시작했다. 대회는 대부분 휴대전화를 멀리 던지는 종목으로 구성돼 있다. 핀란드 중부 작은 마을 손카야르비(Sonkajärvi)는 1992년 ‘아내 나르기 대회’(Wife carrying competition)가 처음 열린 곳이다. 남성이 여성 팀원을 업고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대회다. 참가자들은 진지한데 관람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우나, 얼음물 수영, 숲 여행부터 ‘저세상’ 대회들까지 핀란드인이 노는 법을 듣다 보니 이 나라가 더 궁금해졌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20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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