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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by 이성근 2023. 4. 24.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저/이경식 역/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03

원서 : Democracy’s Discontent: A New Edition for Our Perilous Times

 

: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2010년 이후, 한국에 정의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수업은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존 롤스 이후 정의 분야의 세계적 학자로 인정받는 그는 명실공히 이 시대의 최고 석학이자 철학계의 록스타이다. 대표 저서로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완벽에 대한 반론』 『정의의 한계등이 있다

 

목차

추천의 글

개정판 서문

들어가며

 

1.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

: 경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2. 공화국 초기의 경제와 시민적 덕목

: 공화주의적 이상과 산업을 찾아서

 

3. 자유노동 대 임금노동

: 노동자와 노예는 어떻게 다른가

 

4. 공동체와 자치, 그리고 점진적 개혁

: 진보주의에 가려진 '거대함의 저주'

 

5. 자유주의와 케인스혁명

: 경제학의 승리가 의미하는 진실들

 

6. 절차적 공화주의의 승리와 고난

: 민주주의의 불만이 불신으로 이어지다

 

7.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 199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해제

 

출판사 리뷰

통제를 벗어난 경제 권력이 벌인 일들

마이클 샌델, 민주주의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다!

 

민주주의는 사실 새롭지 않은 키워드다.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남발로 인해 듣기만 해도 피로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마이클 샌델은 지금 이 순간, 다시 민주주의를 꺼내든 것일까? 이 책은 1996년 미국에서 출간된 초판 민주주의의 불만(Democracy’s Discontent)4반세기 만에 전면적으로 고쳐 쓴 개정판이다. 본문을 업데이트하는 수준을 넘어 초판의 두 기둥 중 하나인 미국의 헌법적 전통, 즉 헌정주의 부분을 들어내고 , 또 다른 골자인 정치경제 담론에 집중해 전체 분량의 4분의 1을 새로이 저술했다.

 

샌델은 초판 이후 민주주의의 불만이 훨씬 더 예리하고, 한층 더 원한이 깊으며, 심지어 치명적으로 퇴보했다고 우려를 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업과 엘리트 지배층은 정치후원금과 로비스트 집단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고, 시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방관한다. 소수의 거대 기업은 주요 산업을 장악해 물가를 올리고 노동자들의 불평등을 조장하며, 소셜미디어는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를 여과 없이 내보내며 대중의 주의력을 흔들고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탈취해간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좌파를 지지하는 사람과 우파를 지지하는 사람들, 도시에 사는 사람과 지방에 사는 사람들, 학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부유층과 서민, 심지어 여성과 남성은 물론 세대가 전부 분리된 채 살아가며 제각기 출처가 다른 뉴스를 접하고 다른 사실을 믿으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폭력과 너덜너덜해진 사회적 유대감에서 파생된 경제적·정치적 양극화는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샌델은 우리가 처한 이 곤경이 밀접한 연결고리로 민주주의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시의적이고도 심층적인 민주주의 토론이 긴요한 때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만의 정체를 완벽히 밝혀낸 책!”월스트리트저널

 

대부분의 사람은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경제 권력이 우리 삶에 초래하는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자신을 시민으로 생각하기보다 소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대기업이 주요 산업을 독점해나가는 것을 목격할 때 시민사회의 건전성이나 공정성이 훼손될까 우려하기보다 재화의 가격이 오를 것을 걱정한다. 은행의 예금 수수료와 금융사의 신용카드 수수료가 오르고, 항공료가 오르는 것에 더 긴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제와 연관된 보편적 토의는 파이를 어떻게 크게 만들까파이를 어떻게 분배할까를 두고 이뤄졌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발언권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이자 노동자로 전락해버렸다.

 

샌델은 새로운 챕터에서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불편한 공존을 이루게 된 서사를 집요하게 추적해나간다. 빌 클린턴부터 조 바이든 시대까지 미국의 주요 경제·금융 정책과 거대한 분기점을 이룬 정치사상의 변천사를 바탕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불만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단순히 미국 정치경제사를 열거하는 방식을 넘어 논쟁자의 태도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경제와 어떤 관계를 형성해왔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경제 성장과 공정한 파이 분배 역시 중요한 과제지만, 그 이상으로 시급한 사실은 경제를 만드는 과정의 이해당사자로서 시장의 지배에 휘둘리는 신자유주의적 군중이 아닌 시민의식을 지닌 시민으로 각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불만을 걷어낼 동력은 바로 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적인 경제 담론보다 덜 기술적이지만 더 정치적인 일이다. 샌델은 이렇듯 폭넓은 시민성 차원의 경제 논쟁 전통을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citizenship)’이라 부르며,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옳음을 넘어 모두를 위한 좋은 삶으로!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위대한 제언

 

정치적 양극화, 부의 불평등, 기업 독과점, 세대 갈등, 능력주의무수한 문제들을 양산한 지금의 민주주의가 다시 활력을 찾고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는 무엇을 위해존재해야 하는가? 국가는 주택, 교육, 기술 가운데 어디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할까? 시장의 논리로 모두를 위한 공동선(common good)을 되살릴 수 있을까? 승자와 패자만 존재하게 만드는 능력주의는 해소될 수 있을까?

 

샌델은 이 답에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을 건넨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기술 관료주의 정치에 가려졌던 논제다. 하나는 경제가 민주적 통제에 순응하게 하려면 어떻게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를 누그러뜨리고 효과적인 민주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공적 삶을 재구축해야 할까?’이다. “경제적 강자가 사회에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과 시민의식을 활성화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작업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전자는 권력과 제도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정체성과 이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두 개의 작업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샌델은 정치, 역사, 경제, 문화를 우아하게 넘나드는 특유의 입담과 해박한 지식으로 불만을 넘어 붕괴 직전에 이른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진단하는 동시에, 이 중대한 담론의 장으로 우리를 시민자격으로 초대한다. 모두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하며 시민으로서 우리 스스로 적합한 결론을 찾아나가도록 독려하고 인도한다. 여기에 이 책의 용도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가 상업과 교환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가르쳤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식을 고민한다는 것이고 또한 자기를 온전하게 인간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미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뜻이다.”

 

너덜너덜해진 사회적 유대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우리의 민주주의 실험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의 실체라고 바라보며 그 원인과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뉴리퍼블릭]

 

마이클 샌델이 아름답게 서술하는 미국의 정치경제는 시민적 공화주의의 비극적인 상실 이야기이다. 자유는 정부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치의 능력, 즉 유일하게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치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뉴욕타임스]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 진단"

특권층은 정의를 입맛대로 이용하고 사람들은 각자 믿고 싶은 뉴스만 골라본다. 불평등은 심각해지기만 하고 모두의 분노는 깊어진다. 민주주의, 괜찮을까? 마이클 샌델이 덜컹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을 제안해왔다.

 

샌델이 집중하는 부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불편한 공존이다. 우리는 왜 시민으로서의 권리보다 소비자로서의 불만을 먼저 인식하게 되었나? 그는 미국 정치경제사를 파헤치며 경제 발전 과정에서 시민의식과 경제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살핀다. 소비자 의식이 시민의식에 앞선다면 민주주의의 작동에는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다. 그는 시민들의 시민적 자아 각성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경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능력주의는 해소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다시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에 샌델은 결정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우리가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도록 독려한다.

- 사회과학 MD 김경영 (202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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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노동자는 가난하고 우울하게 살아가지만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대부분은 부유하다. 그러므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기여한 몫에 반비례해 보상을 받는다.˝˝ - 우민(愚民)ngs01

 

기존의 부의 분배방식에 대해 어떤 반대를 하든 간에, 기존에 존재하는 부를사람들에게 단순하게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높인다는목적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 이 사실만큼은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 우민(愚民)ngs01

 

˝어떤 정의로운 정부 아래에서도 사회에서의차별은 늘 존재한다. 재능, 교육, 부를 평등하게 만드는 일은 인간이 만든어떤 제도나 기관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근면과 절약과 덕목의 열매를 충분히 누리면서 법으로 보호받을 평등한권리를 가진다.˝ - 우민(愚民)ngs01

 

노동자와 노예는 어떻게 다른가 우민(愚民)ngs01

 

˝청년은 자기 소유의 농장을 살 돈을 모을 때까지만 돈을 받고 일한다.

또는 당신이 원하는 표현을 쓰자면 노동한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서 그는 고용주가 된다˝ - 우민(愚民)ngs01

 

˝모든 것을 국가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우민(愚民)ngs01

 

새로운 노동조합은 생산자계급이라 부르지 않고 노골적으로 임금소득자wage-earner˝ 또는 ˝노동계급working class˝ 이라 불렀다. 또 중소기업과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개혁 목적의 동맹을 앞세우는 시도를 중단했다. 노동 우민(愚民)ngs01

 

진보주의에 가려진 거대함의 저주‘ - 우민(愚民)ngs01

 

˝대부분의 개인은 대부분의 경우에 마치 기계 장치에서 톱니바퀴들이 협력하듯이 협력하면서 작업해야 한다.˝ - 우민(愚民)ngs01

 

시민의식에서 소비자 복지로 - 우민(愚民)ngs01

낙수효과..대기업이 거둔 이익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이론 이것의 반대 개념은 분수효과다. - 우민(愚民)ngs01

 

˝국가번영의 열매를 공정하게 분배할 것˝ - 우민(愚民)ngs01

 

정부 지출이라는 해결책 우민(愚民)ngs01

 

민주주의의 불만이 불신으로 이어지다 우민(愚民)ngs01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권리를 정부가 존중해야 한다. - 우민(愚民)ngs01

정의에 따라 확보된 권리는 정치적 흥정이나 사회적 이익이라는 계산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 - 우민(愚民)ngs01

 

˝도시들이 마구잡이로 확장되면서 이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주택의 수는 늘어나지만 사람들이 걸어다닐 장소가 없다. 여자들이나 아 우민(愚民)ngs01

 

의자를 싸잡아 비판했다. ˝학습이 도덕적 행동을 좌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많은 입법 행위는 곧 도덕적 입법을 의미한다. 모든 교육이 곧 도덕교육인 것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하고 중요한 영역에서 시민의 행동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우민(愚民)ngs01

 

무엇이잘못되었을까? - 우민(愚民)ngs01

 

부패 척결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우민(愚民)ngs01

 

경제적 비용도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오바마의 위기 대처 방식 때문에발생한 장기적 차원의 정치적 비용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 우민(愚民)ngs01

 

˝금융위기와 지긋지긋한 불평등 그리고 반복되는 부채 공황˝으로 점철되자 ˝경제 분야의 전문성이라는 것도 빛을 잃고 말았다.˝ 아울러 우민(愚民)ngs01

 

한때 자연의 불변적 진리로 보였던 것이 지금은 자치의 대상이 됐다. - 우민(愚民)ngs01

 

민주주의의 붕괴가 자명한 상황에서도 공공철학공동선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샌델 교수는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사는 정치를구현하자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때 미국을 선망했던 대한민국의 시민들, 아직 대의정치에 기대를 버리지 않고 뉴스를 챙겨보는 시민들, 그리고 영끌 노동의 끝을 보고 있는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책을 읽으며민... 더보기 우민(愚民)ngs01

 

이 책은 세계화의 한계를 정확히 예측하고그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탈세계화가 본격화된 이후 미국 정치 시스템의변화와, 이것이 세계 경제에 던질 파장을 내다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을 강력히권한다.

박종훈, KBS 기자 우민(愚民)ngs01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그동안 샌델교수가 다뤄왔던 다양한 주제들이 총집결된 결정적 저술이다. 그가 설파해온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그리고 현실 인식을 토대로정치경제 전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가장 위험한 시대에 더 나은 그리고 더 좋은 삶을 향한 새민주주의를 전망한다.

김선욱... 더보기 우민(愚民)ngs01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숨은 폭군임을 폭로한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트럼프 현상으로 드러난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착종된 관계 속에서 추적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위대한 민주혁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성숙한 진짜 이유가 궁금한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더보기 - 우민(愚民)ngs01

 

공공철학은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있기 대문이다. 때로 공공철학은 정치적 담론을 펼치거나 정치적 추구 활동을 할 때 종종 무반성적으로 작용하는 배경이다. 아무 일 없는 일상적인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 어떤 공공철학에 따라서 살아가는지 쉽게 깨닫지 못한다. - Lovelyedel P. 28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인은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믿었으며, 경제 성장의 열매도 다양한 경제 계층에 걸쳐 폭넓게 분배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특히 레이건 재임 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 그러다 보니 정치를 바라보는 미국인의 좌절감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 Lovelyedel P. 316

 

정치는 필요한 것과 가능한 것 사이에 일어나는 지속적인 협상 과정이다. - 로렌P. 387

 

비록 자유노동자 각자에게 특정한 주인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그들 자신은 가진 것 없이 가난한데 다른 사람이 자본을 가지고 있는 상황 때문에 노예가 된다. - 로렌P. 107

 

자유노동과 노예제를 구분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동의 여부가 아니라 독립성에 대한 전망, 즉 언젠가는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고용주나 노예주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할 기회 여부였다. - 로렌P. 117

 

마이클 샌델 교수는 우리의 사회적 삶을 감싸고 있는 자본의 힘에 대해 시민의 민주주의적 역량으로써 어떻게 대항하여 모두가 바람직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선 또는 공동선을 창출할 것인가에 주목한다. 이것이 샌델 교수가 이 책에서 집중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목표이며, 우리가 모르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 로렌P. 428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온갖 힘들의 형태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시민적 열망은 이제 우리에게 여름이 지나면 과연 가을이 올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또 판단하라고 말한다. - 로렌P. 390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에 신경을 쓰느냐에 달려있다. - jarujuin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망치는가?

마이클 샌델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원래 영어 제목은 <민주주의의 불만(Democracy's Discontent)>이다. 책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샌델은 미국 민주주의가 정상괘도에서 이탈했다고 판단한다. 미국은 상당 기간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국회의사당 폭동 등을 복기해본다면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에 대한 검찰의 기소는 봉합될 수 없는 갈등이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샌델은 민주주의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과정을 찾아 나선다.

 

샌델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불만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각자의 삶을 지배하는 힘의 통제권을 잃어가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의 도덕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인식이다. 미국 대중들이 이런 불만을 가지게 된 원인을 샌델은 미국 사회가 '공공철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공공철학은 "우리가 실천하는 행동에 내재된 정치 이론, 즉 시민의식과 자유에 대한 여러 가정들"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어 개인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정치철학관이 공공철학이다.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백년간 단일한 개념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샌델은 미국민주주의가 공화주의라는 초기 이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본다. 공화주의는 시민의 소유적 자유, 개인적 선택의 자유보다 덕성(德性)을 보유한 시민의 참여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상이다. 샌델이 심중에 두는 정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다.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미국에서 자유는 건국 초기부터 중요한 이념이었다. 또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의 물적 토대가 필요했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은 농업적 삶의 방식이 자치에 적합한 도덕적 시민을 만든다는 것을 이유로 거대제조업의 진흥을 반대했다. 오늘날의 상식과 다르다.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에 따르면 대규모 제조업은 공화주의 시민의식의 전제조건인 독립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제조업이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독립성이 퇴화한 시민들로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치를 수행해나갈 수 없다고 제퍼슨은 판단했다. 제퍼슨은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거꾸로 자치는 시민적 덕목에 의존한다는 발상이 공화주의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제퍼슨만의 것은 아니었다. 발명가이자 사상가로 잘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도 "오로지 적절한 소양을 갖춘 도덕적 사람만 자유를 누릴 역량을 가진다"고 했다.이런 생각은 당시에는 양식 있는 이들의 상식이었다.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이라 샌델이 칭하는 국민의 삶을 우선시하는 공화주의 모델은 또 다른 건국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거부된다. 해밀턴은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재정정책을 수립했고 대규모 제조업을 부흥시키려 했다. 해밀턴은 기업 보조금정책을 긍정했다. 이런 정책은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부정부패를 만연케할 위험한 것이었다. 당시의 공화주의자들은 소작농이 아닌 자작농에 의한 자치가 수행되는 공동체를 공화주의적 이상으로 생각했다. 토크빌이 감동했던 미국 민주주의는 소규모 마을인 타운에서 수행되는 참여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해일이 미국을 덮쳤다. 제퍼슨식 모델은 밀려나고 해밀턴의 비전으로 사회는 점점 변해 갔다. 이에 따라 물질적 성장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경제적 독립성이 시민의식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었다. 이때의 '경제적 독립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19세기 내내 임금노동은 임금노예제라 불릴만큼 인간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시스템으로 부정당하곤 했다. 존 콜드웰 칼훈같은 논객들은 북부의 자본주의적 임금시스템을 노예제보다 더 나쁜 제도라며 경멸했다. 그들은 노예에게 제공되는 평생 고용과 기본적 복지가 북부 임금노동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남부노예제 이론가였던 조지 피츠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북부기업가-필자주) 노예소유주이다. 그런데 노예주이면서 노예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노예주에 불과하다."

 

경제적 독립이란 자작농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임금노동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상당했다.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사라져야 했다. 친자본적인 임금노동 옹호론자들은 남북전쟁 이후 '자유노동'이라는 시민적 개념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자유노동'은 누군가의 속박을 받지 않으면서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했다. 시민의 권리로서의 '자유노동'은 어느새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자유노동'을 대신해 '자발주의'란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제 노동도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맺어진 자발적 계약의 산물로 포장되었다. 친자본측은 이런 노동계약이 기존의 '자유'개념과 부합한다고 선전했다. 1895년 발생한 로크너 사건이 계기였다. 뉴욕주 제과점주였던 로크너는 당시 110시간 주 6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뉴욕주의 법을 위반해 벌금형을 받았다. 로크너는 강제가 전혀 아니었고 종업원과의 상호합의였다고 항변했다. 연방대법원은 로크너의 편을 들어 뉴욕주 법이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계약의 자유가 시민의 온전하고 독립적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선포되는 전환점이었다.

 

노동에서의 '자발주의적 계약'이라는 관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발주의적 자유관'으로 확장된다. 이런 자유관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에서 기원한다. 샌델에 따르면 자발주의적 자아상은 "자신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는 독립적 자아"라는 생각이다. 이런 자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주류의 위치에 오른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 덕분에 복지국가와 개인의 권리확대라는 소중한 성과가 가능했다고 판단한다. 이런 자아상과 자유관은 자유주의(liberalism)와 상호 공명한다.

 

이런 자아상, 자유관, 자유주의 덕분에 미국인은 행복하게 되었을까? 샌델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샌델의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개인의 권리와 혜택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들을 스스로 통제하는 미국인의 통제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승리는 개인의 통제력이 또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서 나타났다."

 

심지어 샌델은 이런 주장까지 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겪는 어려움은 특정한 좌절감에서 비롯됐다기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자발주의적 자아상이 부족해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자발주의적 자아상은 공동체와 유리된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 자유주의는 이런 인간의 개체적 속성에만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또 다른 속성인 공동체적 속성을 외면한다고 샌델은 보고 있다.

 

샌델은 권력을 절차주의에 제한한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정치권력이 자본권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 사회는 망가진다. 샌델의 말이다.

"이민자를 배척하는 우파적 파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진보정치가 실패했음을 예고하는 징후다. 자유주의자들이 경제권력을 민주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결국 미국 사회를 실패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이 절차적 정당성에만 매몰될 때 공화국은 무너진다.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전은 타운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공화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그의 천착은 공화주의적 감성이 흥성거렸던 건국 초기 타운 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공동체라는 유대감은 기본적으로 타운이라는 공간을 빼놓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토크빌에 따르면 미국 자치의 핵심인 타운은 규모가 이삼천명에 불과했다. 토크빌은 타운의 규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크지 않기 때문에 그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작지 않기 때문에 업무를 관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그 시민들 가운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한길사 펴냄))

 

다른 공동체주의 철학자 매킨타이어의 글을 살펴보자. 그의 책에는 근대 이전 시기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넘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있어서 공동체는 단지 모든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좋은 삶'의 생각을 추구하는 무대이다. (중략) 이와 반대로 고대 및 중세의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덕들의 실행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덕을 갖춘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권위 있는 성인들의 과제에 속한다."(<덕의 상실>, 문예출판사 펴냄)

 

풀이하자면 현대인은 자기 좋은 것에만 몰두하지만 고대·중세인들은 자신이 유덕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덕있는 삶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덕에 기초한 공동체주의를 제안한다. 좋은 말이지만 가능한 구상일까?

 

윤리철학자 황경식은 공동체주의자들의 덕에 근거한 공동체건설이라는 제안을 반대한다. 그의 논문 <도덕체계와 사회구조의 상관성>을 살펴보자. 황경식은 도덕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덕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리 정합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실천적 지침으로서 제대로 작동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경우, 다시 말하면 그 체계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이나 실현가능성에 있어 하자가 있을 경우 사회윤리로서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 윤리와 덕 사상을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의 제반사항에 대한 사회철학적 숙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황경식은 혁명을 상정하지 않고는 소규모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덕성공동체를 조성해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혈연과 연고를 토대로 한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덕윤리의 퇴조는 온전히 자유주의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대하고 익명성이 강한 사회 가 도래하고 그 속에서 기존의 덕윤리, 공화주의적 에토스를 상실해버렸기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개인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칸트, , 롤스가 이런 사회를 포착한 자유주의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즉 하부구조의 거대한 변화에 조응한 윤리체계가 자유주의인 것이다. 황경식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 사회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전제되지 않거나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이 가능하지 않는 한 규칙-의무의 윤리(자유주의윤리-필자주)는 현대사회의 주도적 도덕체계로서, 특히 성품-덕 윤리의 하부구조이자 기초질서로서 엄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윤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샌델은 자본주의가 조성하는 사회적 불안을 공화주의로 극복하자고 독려한다. 샌델의 공화주의에 대한 애착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준다. 기득권지배층이 설정한 적정한 선 이상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케인스의 통찰은 해방적이면서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정치가 우선임을 주장하는 그의 통찰이 무엇보다 해방적이다."

 

그의 비전은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케인즈주의를 재도입할 배짱있는 공화주의정치를 호명하는 선에 머무른다. 미국은 케인즈주의도 해봤고 신자유주의도 해봤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현재 실질적 내전상태에 빠졌다.

 

사상가 백낙청은 남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백낙청은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미국 헌법의 창안자들은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졌었다"고 말한다. 삼권분립, 상하원 양원제, 대통령 간접선거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인민의 바램이 여러 장치를 통해 구조적으로 왜곡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개혁적 시도는 과두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과두제로 귀착되는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한 거대 경제권력을 극복해낼 정치세력의 형성은 요원하다. 철학자 김용옥의 민주주의 비판은 더욱 급진적이다. 김용옥은 "민주라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에 매몰되면 그 개념이 만들어내는 중력장에서 허우적대게 되기 때문이다.

 

샌델의 공화주의가 조락해가는 미국과 세계의 민주주의에 희미한 빛이라도 비출 수 있을까? 필자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럼에도 샌델이 말하는 덕에 기초한 공동체의 건설은 매우 소중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토착신학자 이은선이 말한 '조숙한 근대국가' 조선이 500년을 지속했던 것도 양반이라는 지식인지배층을 성리학이라는 윤리적 이념체계에 경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동행하기 참 어렵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