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시기 | 주요사건 |
1964년 6월 | 박정희 정부, 비상계엄령 선포.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검거 시작. |
1964년 8월 14일 |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을 조직해 국가 변란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검거하고 16명을 수배. |
1964년 8월 17일 |
피의자들이 검찰에 송치,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57명의 구속·수배자 가운데 13명이 기소됨. 적용 혐의는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동조’에 관한 반공법 4조 1항 위반으로 바뀜. |
1965년 1월 20일 |
서울지방법원, 13명 중 도예종과 양춘우에 징역 3년과 2년, 나머지 11명에 무죄 선고. |
1965년 5월 29일 | 서울고등법원,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 선고. |
1965년 9월 21일 | 대법원, 2심 재판의 형량 확정.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종결) |
1972년 10월17일 | 박정희 정부, 비상계엄령 선포 및 4개항의 '특별선언'발표 |
1972년 11월27일 | 박정희 유신헌법 국민투표 후 4공화국 대통령 취임 |
1973년 8월 8일 | 일본 도쿄에서 한국 정치인 김대중이 납치됨. |
1973년 8월 13일 |
김대중이 수장 직전 극적으로 구출됨. 김대중 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으로 이어짐. |
1973년 9월 |
방학이 끝난 대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거세져 반독재·반체제 운동으로 이어지며 전국 고등학교로 파급·확대. |
1974년 1월 8월 |
박정희, 긴급조치 1, 2호 공포. 일체의 개헌논의 금지. 학생들의 운동이 교내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으로 계속됨. |
1974년 4월 3일 |
긴급조치 제 4호 발동.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정부 전복 및 4단계 혁명을 통한 공산정권 수립 기도 혐의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 포함 180명 구속·기소. |
1974년 5월 27일 |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민청학련사건 배후자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도예종 등 23명을 기소. |
1974년 7월 11일 | 비상보통군법회의 선고공판, 피의자 23명 가운데 8명에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에 징역 20년을 선고. |
1974년 9월 7일 |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 도예종 등 8명에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에 징역 15~20년 선고. |
1975년 2월 15일 |
민청학련 사건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해 수감자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 |
1975년 4월 8일 | 대법원, 상고를 기각하고 피의자들 형량 확정. |
1975년 4월 9일 |
대법원의 선고통지서가 서울구치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 집행. (2차 인민혁명당 사건) |
1975년 4월 10일 |
국제엠네스티,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 발표. 국제법학자회는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 |
2002년 9월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인혁당 사건 재조사. 해당 사건은 고문에 의해 과장 및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 |
2007년 1월 23일 | 서울중앙지법, 인혁당 재건위로 사형당한 8명에 무죄 선고. |
2008년 9월 18일 | 서울중앙지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나머지 피해자들에 무죄 선고. |
法,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5억3000만원 보상 16.2.25 뉴시스
법원이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약 5억3000만원의 형사보상과 2250만원의 비용보상을 결정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김용빈)는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고(故) 도예종씨 등 9명이 낸 형사보상청구 사건에서 5억2900만원의 형사보상과 가족당 250만원의 비용보상을 최근 결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하루 보상액을 법정상한액인 22만300원으로 결정했고, 1122일간 구금됐던 도씨 유족에게 가장 많은 2억5043만원의 형사보상과 250만원의 비용보상을 결정했다. 나머지 피해자와 유족들에겐 구금일수에 따라 4000여만원과 85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지난 1964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인민혁명당을 결성해 국가변란을 꾀했다'며 도씨 등 수십명을 검거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4년에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가 '인혁당 재건위'를 배후·조종세력으로 지목, 같은해 4월 대법원이 도씨 등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한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2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다.
1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난 2011년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2013년 9월 재심 청구자 13명 중 도씨 등 9명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그해 11월 9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대법원은 지난 1965년 형이 확정된 지 50년 만인 지난해 5월 무죄를 확정받았다
박근혜에게 권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12.9.14 PD저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잊혀진 죽음들-인혁당 사건’ (연출 한철수, 방송 1999년 10월 24일)
유신정권이 남긴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명과 슬픔은 ‘장준하’ 의문사뿐만이 아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바로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다.
지난 1999년 10월 24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잊혀진 죽음들-인혁당 사건’편을 통해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했다. 제작진은 당시 피해자 가족과 사건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건 관련 정부관계자들의 인터뷰 및 다각도의 사실확인 작업을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여정남, 이수병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졌고 그 유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안고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고통의 삶을 살았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은 검찰에 기소됐지만 증거물이 없다는 이유로 공소를 기각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4년 ‘인혁당 재건위’라는 2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다. 당시 유신반대운동을 하던 ‘민청학련’을 ‘인혁당 재건위’가 조종했다는 것이다. 이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모두 풀려났으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 중 8명은 사형 집행을 당했다. 그것도 대법원의 형선고 발표 20시간 만에 말이다. 공안 관련 사범이라고 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 4년은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하면 이례적인 형집행이었다.
▲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
■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연출 김환균, 방송 2005년 4월3일)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8명이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외국인이 있었다. 2005년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편에서는 당시 ‘인혁당’ 관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혁당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했다. 또한 제작진은 인혁당 사건이 냉전이라는 소리 없는 전쟁의 타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 영종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시노트 신부(James Sinnott)는 CIA 요원으로 있던 닐 도허티(Neil Doherty)로부터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등 정부에 반하는 세력들 모두에게 죄를 씌울 무언가가 짜 맞춰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74년 4월 3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유신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다.
시노트 신부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도허티가 예고한 사건임을 알고, 사건의 조작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또한 인혁당 관계자 가족들로부터 사건의 억울함에 대해 듣게 된 조지 오글(George Ogle) 목사도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계자 등 여덟 명은 성급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을 최초로 공론화한 조지 오글 목사와 가장 활발히 사건을 알렸던 시노트 신부도 한국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MBC
▲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故 이수병 ⓒKBS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8) 인혁당 사건 (上) 15.4.19 경향
한승헌 | 변호사·전 감사원장
ㆍ중정 “북괴 지령 받은 지하조직”… 검사들 불기소 ‘항명파동’
일러스트 | 박건웅
■ 학생운동에 붉은 색칠, 1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두 번 있었다. 1964년에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에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1974년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통상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면, 여덟 분의 억울한 형사(刑死)를 빚어낸 후자를 가리킨다.
먼저 1차 인혁당 사건부터 살펴본다. 당년 44세의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쓰러뜨린 뒤, 민정 복귀의 공약을 어기고 군복만 벗은 채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무단통치와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국민 각계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중에서도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격렬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아울러 당시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박 정권은 학생들을 대거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 기각당하자 한밤중에 무장 군인들이 법원과 영장 담당 판사의 집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 특히 대학가의 항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르자 정부는 6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산당 내지 불순세력이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며 학생운동에 ‘적화’의 색칠을 하고 나선다.
■ 수사검사들의 기소 거부와 사표 파동
마침내 중앙정보부(중정)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도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에 따라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지하조직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수배 중이라고 했는데, 그들에겐 정당 발기인 모임, 강령 규약 채택, 북괴 중앙당에의 창당 보고 및 지령에 의한 학생조직 강화 등의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이 사건은 그 해 8월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하여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등 네 검사가 총동원되어 전력을 다하여 수사했으나,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이에 놀란 검찰 상부와 중정 측이 당황한 나머지 수사검사들에게 어떻게든지 기소를 하도록 온갖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자 중정 차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의 명령에 따라 서울지검은 구속 만기가 되는 날의 당직검사 명의로 그 사건을 기소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세 검사는 사표를 냈다. 법무장관은 국회에 불려나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려고 기소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이러한 불기소 항명파동은 용기있는 검사들이 당시 중정의 막강한 위세에 검사직을 걸고 맞섬으로써 검찰의 위상을 지켜내고자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뇌와 중정의 밀착으로 사건이 변칙 기소됨으로써 검찰의 권력 예속성을 실증한 치욕적 일면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의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한 수사검사들의 소신과 용기를 잠시 ‘다시 보기’ 해본다. 그들은 수사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검사장과 검찰총장에 이어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권모 법무부 차관은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라고 다그쳤다. 그 뒤 검사장은 “당신들은 기소를 하든지, 옷을 벗고 나가든지 택일하라”는 말도 했다. 그래도 검사들이 굽히지 않자 검사장은 구속 만기일 전에 무조건 기소하라는 엄명과 함께 끝내 기소를 못하겠다면 공소장이라도 작성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검사들(부장검사 포함 4인 중 3인)은 이것마저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이용훈, <사필귀정의 신념으로>, 2000, 한겨레 2005년 10월5일자).
■ 김형욱의 강공에 당직검사 이름으로 기소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은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 단 한 명이라도 기소해야 한다’는 말로 검찰을 압박했다. 검찰 상층부에서는 서울지검 차장검사의 이름으로 기소하도록 지시했으나, 그(여운상 차장검사) 또한 이를 거부했다. 당황한 검찰 내부에서는 구속 만기 날 서울지검 당직 담당 A검사로 하여금 중정의 사건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서 공소장을 작성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소하게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A검사는 얼마 후 중정 5국 부국장으로 기용되었다.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는 사표 수리의 형식으로 면직되었다(나도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 재임 중이어서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와 감동을 체험했다).
그런데 김형욱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표를 내던져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의 정의감과 용기를 나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은 살아 있는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었다.”(김형욱, <김형욱 회고록> 제2부, 1985)
이것이 김형욱의 사건 당시 생각이었는지, 20년 후 회고록을 쓸 때의 생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수사검사의 한 사람이었던 장원찬은 이런 비화도 술회했다. “기록 보따리를 들고 검사장실에 들어갔다. 그때 공안검사 중 한 명은 화장실에 간다며 들어오지도 않았다. 검사장은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고, 역정도 냈다. 세 사람은 사표를 제출했다. 화장실에 가느라 사표를 내지 못했던 검사는 상대적 공로(?)를 인정받았다.”(2003년 5월9일, 한국일보)
■ 재조사 후 14명 공소 취소, 12명은 죄명 바뀌어
이 사건을 둘러싼 물의는 기소 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기소된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정에서 나체로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했다는 사실과 이에 따르는 사건 조작설이 퍼짐에 따라 수사당국의 입장이 크게 몰리는 국면으로 빠져들어갔다. 할 수 없이 검찰은 서울고검의 한옥신 검사로 하여금 고문 및 허위진술 강요 등에 관한 재조사를 하게 한 후, 피고인 26명 중 14명은 공소를 취소하고 석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당초의 반국가단체구성죄(국가보안법 위반)를 철회하고 추가 구속자 1명과 함께 (13명에 대해)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죄(반공법 위반)로 공소장을 변경하여 법정형을 낮추었다(<해방 20년사>, 희망출판사, 1965).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1965년 1월20일 열렸다. 도예종은 징역 3년, 양춘우는 징역 2년, 나머지는 무죄였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달랐다. 그해 6월29일 선고된 2심 판결은 도예종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전원 유죄로 뒤집힌 판결이었다. 같은 해 9월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중정과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대결(?)은 그 과정이나 결말에 있어서 피차 절반의 승리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수사검사들의 유례없는 소신 싸움은 이 나라 검찰사에 빛나는 자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 10년 후에 재현된 ‘인혁당 재건위’ 올무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는 1972년 헌정을 중단하고 국회도 아닌 비상국무회의와 국민투표라는 헌법 밖의 수법을 써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영구 집권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반유신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흉기로 대통령 긴급조치를 연발하였으니, 1974년 4월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그때 이철, 유인태, 이강철 등과 지면이 있는 경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여정남을 민청학련 사건 그룹에 ‘배치’하여 인혁당 재건위와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그런 구도 속에서 중정은 “인혁당 재건위가 북괴의 조종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한다. 즉 중정부장 신직수가 4월25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민청학련을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가 그 배후세력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난번의 ‘긴급조치 4호 사건’에서 살핀 바와 같다. 10년 전에 사건을 조작했다가 수사검사들의 기소 거부 파동을 겪으면서 호되게 쓴맛을 본 중정은 다시금 예전의 그 사람들을 검거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확대판을 ‘재건’한다. 중정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주동의 국가변란기도사건’의 추가 발표에서 “서도원, 도예종 등은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군 검찰은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송치된 21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 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긴급조치 4호를 적용했기 때문에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이 되어,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서 공소 제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 1차 인혁당 사건 때와 달랐다.
■ 적법한 물증 없고,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만
군법회의 심리에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적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일부 피고인들의 자백이 있을 뿐이었는데, 이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짙었다. 요컨대, ‘재건위’ 관련자들의 활동이 국가변란을 기도했거나 민청학련의 배후로서 작용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거기에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 자체가 실재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오직 학생들의 유인물에 들어간 발표 명의에 불과했음은 지난번 ‘민청학련’ 부분에서 살핀 바와 같다.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와 부합하는 교도관의 증언도 나왔다. 군 검찰의 조사에서 ‘중정에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이런 반국가사범이라는 혐의를 쓰고 군사법정에 서게 된 비운의 피고인들은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모두 21명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접목시킨 여정남 역시 ‘인혁당 재건위’와 운명을 같이할 징후가 보였다.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9) 인혁당 사건 (中) 15..26 경향
ㆍ수사관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 법원, 속전속결 ‘묻지마 유죄’
일러스트 | 박건
■ 공판조서 조작 항의한 변호사도 연행
인혁당 사건은 수사~재판의 전 과정이 위법·불법 시리즈의 연속이었다. 중정에서의 온갖 고문에 의한 진술 조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다 군 검찰 조사에도 중정 직원이 동석하거나 중정으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이 가해져 피의자는 검찰관이 중정의 의견서를 보며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면회(접견)도 일절 금지되었고,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되었다. 법정에서의 자유롭고 충분한 진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 ‘아니요’ 식의 답변만 허용되었다. 한 피고인이 자신의 진술서는 중정에서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하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직도 충분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검찰관도 있었다. 검찰관이 신청하는 증인은 모두 채택되어,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모르게 수명(受命) 법무사가 비밀리에 증인 신문을 했다. 반면, 변호인이 신청하는 증인은 채택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한 대목도 공판조서에는 시인한 것으로 허위기재가 되어 있었고, 이를 항의한 변호인들(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이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4> 202쪽 이하,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7).
■ 74년 사건, 10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의 악연
여기서 잠시 제1차 인혁당 사건(64년 사건)과 제2차 인혁당 사건(74년 사건)의 유사성, 연관성, 그리고 차이점을 살피는 일도 사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그 상황적 배경이 거의 같다. 두 사건 모두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격렬해졌을 때 그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이 내세워졌다. 그리고 학생 시위가 북괴 내지 공산세력의 사주로 국가전복이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삼았다고 했으며, 두 사건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사건 수사의 지휘부를 이루고 있었다. 즉 64년 사건 때 중정 차장이었던 신직수와 인혁당 사건 담당 중정 요원이었던 이용택이 74년 사건 때는 각 중앙정보부장과 중정 6국장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이런 줄기찬 악연에서 두 사건을 조망해보는 안목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 때 공안부 검사들의 불기소 항명으로 고역을 치르며 체면을 구긴 두 사람이 ‘10년 만의 보복’을 한 것이라는 잠재심리 분석이었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6).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 수사를 맡기고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한 것도 64년 사건의 ‘학습효과’에서 나온 지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보다 주목할 만한 차이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에 비해 74년 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또는 지명도가 덜한) 인물들을 추가시켜 그만큼 사회적 관심을 덜 끌겠다는 의도가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74년 사건이 발표된 뒤 몇 달 동안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 점에 대해서 기독교(개신교) 일각에서 반성하는 움직임이 늦게나마 머리를 들었다.
■ 1심, 사형 7명 등 역시 ‘정찰제 판결’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그해(1975년) 7월2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을 선고했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은 사형(여정남은 이 사건이 아닌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종대 등 8명은 무기징역, 이창복 등 6명은 징역 20년이었다. 검찰관의 구형량과 똑같은 ‘정찰제’ 판결이었다. 이보다 이틀 뒤(7월23일)에 선고된 민청학련 32명 그룹에 대한 판결 형량은 이 연재 지난번 치에서 알려 드린 바와 같다. 군법회의 판결은 소위 설치장관의 확인조치를 거치게 되어 있어서, 앞서의 민청학련 그룹의 사형수들은 국방부 장관의 확인조치에서 7명 중 5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여정남과 이현배는 ‘원판결대로 확인’이 되었다.(그런데 이현배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여정남만 계속 사형수로 남아 불안을 키웠다.)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는 위의 두 사건을 병합심리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여정남의 변호인이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1심의 법정 변론이 문제가 되어 구속당했기 때문에 내가 대타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 여정남의 수난, 인혁당 사건의 축소판
여정남의 항소이유서에 의하면, 그가 당한 수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고인들이 겪은 불법과 야만의 축소판이었다. “긴급조치하인데 법이 무슨 필요냐? 정보부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어느 정도는 시인해야지, 안 그러면 재판 도중이라도 끌어내다 박살낸다”는 협박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혼미해진 가운데 부르는 대로 받아써야 했던 정황을 폭로하기도 했다. 시기의 선후가 맞지 않는 말을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기에, 조작을 해도 좀 똑똑히 하라고 했더니, 수사관이 ‘네 말이 맞다, 피의사실과 다르게 불렀군, 내가 잘못 불렀다’라며 틀린 것을 자인(?)하더라는 희극의 한 장면도 있었다. (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실제 진술과 다르게,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로 조서가 작성된 것을 알면서도 강제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이름을 쓰고 무인을 찍어야 했던 그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대구의 여정남이 서울에 올라와 이철, 유인태를 사주했다고 하는 시나리오도 유인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변명의 여지를 잃고 말았다.
■ 처음엔 민청학련을 인혁당 배후로 설정하려다
즉, 중정 수사관들은 소위 인혁당의 배후조종과 관련하여, “처음엔 ‘내가 여정남에게 모든 것을 지령했다’고 쓰라고 하기에 ‘이분은 선배인데 어떻게 내가 지시를 합니까?’ 했더니 ‘인마, 선배 좋아하지 마. 너희 서울대 애들은 지방대 애들을 우습게 알잖아?’라며 막무가내로 (그렇게 쓰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면서 거꾸로 내가 여정남으로부터 모든 지시와 지령을 받았다고 바꿔 쓰라고 윽박질렀다. ‘그 사람이 나이는 많지만, 서울의 학생운동 사정에 어두운데 내가 무슨 지시를 받는단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이 새끼야 잔말 말아. 그래도 선배잖아!’ 이렇게 해서 소위 인혁당과의 관계가 생긴 것이다.”(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 사건>-‘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2’, 2006).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에게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든가,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는 것도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나 다른 피고인이 시인했으니 너도 시인해야 한다느니, 그렇게 부인하면 정보부로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검찰관이 불러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실토를 했다.(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라는 ‘가설’은 이렇게 해서 발표되었던 것이다.
■ 사실심리도 봉쇄한 2심 재판의 허울과 위법
두 사건을 병합한 항소심은 피고인의 진술과 변호인의 반대신문, 증거신청이나 이의신청도 봉쇄, 묵살한 채 일사천리의 속도전으로 시종했다. 그리고 판결도 김종대, 전재권 두 피고인이 무기에서 20년 징역으로 감형된 것 외에는 모두 1심 그대로였다. 2심에서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고 폭주(暴走)를 할 때 모두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문에 보면 ‘살피건대 일건 기록과 원심에서 적법하게 조사한 증거들을 모두어 보니 원심이 판시한 각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들은 이를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달리 원심이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거나 그 사실 인정 과정에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잘못을 찾아볼 수 없음으로 논지 모두 이유 없다’는 기계적인 부동문자 몇 줄의 나열로 ‘묻지마’ 유죄를 포장해 놓고 있다. 오죽하면 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가 불문곡직하고 상고기각으로 끝장 날 때에도, 유일하게 원심 파기 환송 의견(이른바 소수의견)을 낸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이런 지적을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사실심리를 하지 아니하고 재판을 한 절차상의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
■ 대법원 사형 확정 직후의 울부짖음과 나
이 사건이 상고심에 걸려 있는 동안, 유신헌법에 대한 난데없는 국민투표가 강행된 후 정부가 말하는 ‘일부 공산주의자 내지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구속집행정지(미결수) 또는 형집행정지(기결수)로 석방되었다. 그것이 2월17일이었는데, 한 달쯤 뒤인 3월21일, 나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내가 변호하던 여정남을 포함한 인혁당 피고인들과 같은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 공판날이 하필이면 4월8일, 바로 인혁당 사건의 상고심 판결이 예정된 날이었다. 서울 서소문동에 있는 법원 건물 앞마당에서 인혁당 사건의 가족과 친지, 각계 인사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성하다시피 절규하고 통곡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나는 구치소 호송차 안에서 수갑을 찬 채 바라보아야만 했다. 사형수들에 대한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음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오전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인혁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피고인 38명 중 2명을 제외한 36명에 대한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등 8인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던 것이다. 선고에 단 10분도 채 안 걸렸다. 법정 내에는 ‘전부 조작이다’라는 절규가 튀어나왔고, 북받쳐 오르는 비통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울부짖음으로 넘쳐났다.
이 판결을 놓고 사법부의 변질을 논하는 견해도 나왔다. 즉, 한 사학자는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던) 10년 전의 사법부와 유신체제의 사법부는 크게 달랐다. 1960년대 후반에 조금씩 권력에 종속되던 사법부는 1971년 사법부 파동을 거치며 독립성이 아주 약해졌다’며, 당시 법관의 임명 보직권을 대통령이 갖고, 그해 3월 대법원 판사 15명 중 9명이 재임명에서 탈락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서중석,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과 박정희 유신체제>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백서 1권’, 4·9평화통일재단, 2015).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0) 인혁당 사건 (下)
ㆍ검찰이 미리 선고 통지, 집행명령 없이 사형… “사법 암흑의 날”
일러스트 | 박건웅
■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의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의 가족들은 걷잡을 수 없는 통분 속에서도 재심 청구를 논의하는 등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곧장 서울구치소로 달려갔다. 남편들에 대한 접견이 금지되었다는 교도관의 말에 무슨 이유냐며 항의를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던 것이다(하재완의 부인 이영교의 말-2009년 4월9일자 한겨레). 다음날 재심 청구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길에 제부로부터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는 가족도 있었다(우홍선의 부인 강순희의 말-2012년 9월14일자 경향신문).
놀랍게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4월9일 새벽, 여덟 명의 사형수들에 대한 교수형이 서울구치소에서 전격 집행되었다. 언론 보도에는 그 시각이 판결 선고 후 18시간 만인 새벽 5시였다고 했다. 군법회의 판결이 확정된 것이어서 형 집행장에는 군 법무장교와 군종장교(목사)가 입회했다. 당시 군목으로 참여했던 박정일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형 집행은 그날 오전 4시반경부터 8시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사형수들은 “난 억울하다. 언젠가는 모든 일이 밝혀질 것이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반드시 정의가 밝혀줄 것이다” 등의 유언을 남겼다. 누구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용공적인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도를 원하느냐는 군목의 말에 모두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2012년 9월12일자 한겨레). 내가 변호인이었던 여정남을 비롯해 여덟 분의 목숨이 그처럼 오랏줄에 매달리던 그 시각, 나는 같은 구치소 감방에서 새벽잠을 자고 있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 판결 전 선고통지서, 집행명령 도착 전 사형(?)
사형 확정 후 하룻밤 사이에 형 집행을 하는 것은 전례도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군법회의법에 의하면 사형은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국방부 장관이 집행명령을 내리고, 그때부터 5일 이내에 집행해야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룻밤 지나고 집행을 해도 좋다는 규정이 아니라 상당한 유예기간을 두고 사정 변경 등도 감안해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특히 사형수에게 재심 청구 등 마지막 구명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사형 확정 다음날의 형 집행은 법적으로도 피고인의 재심 청구권 박탈이라는 위법을 면하기 어려웠다.
의혹에 찬 반칙은 이 밖에도 속속 드러났다. 대검찰청에서 발송한 도예종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형 선고통지서가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된 시점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1975년 4월8일 오전 10시보다 8시간이나 빠른 오전 2시로 문서 접수인에 찍혀 있었다. 판결 선고 훨씬 전에 군 검찰부에 통지서가 갔다는 이야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이 발부한 사형 집행명령서가 서울구치소에 접수된 시각은 4월8일 오후 2시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8’을 ‘9’로 고쳐 놓은 것이 역시 접수인에 훤히 보인다(국가기록원에 보존된 관계 문서에서 확인). 당초의 오후 2시 접수는 행정절차상 불가능한 일임을 뒤늦게 알고 하루 뒤로 날짜를 고쳤음이 틀림없다. 만일 그렇게 고친 대로라면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명령서가 오기도 전에 집행을 한 것으로 되어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이렇게 조급하게 허둥대면서까지 사형 집행을 서둔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대법원의 사형 판결은 기정사실 내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는 점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 고문 상처 숨기려 시신 탈취 화장까지
시신의 처리에서는 더욱 통분할 만행이 벌어졌다. 유족들은 형장에서 나온 시신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의 도움으로 서울의 한 성당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국은 서울 이외 지역 거주자의 시신은 서울에서 가족에게 인도하기를 거부하고, 각 거주지 시립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송상진의 시신만은 어떻게든 응암성당으로 옮겨 안치하려 했으나 도중에 유족과 신부, 목사, 시민 20~30명과 경찰 300~400명이 대치 충돌한 끝에 시신을 빼앗긴 채, 어디론가 사라지는 차를 놓치고 통곡만 했다(<인혁당 사건에 대한 가톨릭의 현실 고증>, 이상우, ‘비록 박정희시대’(3)-반체제민권운동사, 중원문화, 1985). 송상진, 여정남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경찰이 벽제 화장터로 싣고 가서 화장 처리하고 말았다. 전격적으로 처형을 한 것도 처참한 고문의 흔적 때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상처가 심했던 두 사람은 아예 시신 인도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고, 모두들 통분했다. 당시 제네바에 본부를 둔 1975년 4월9일 사형당한
■ 추방당한 성직자,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분의 외국인 성직자가 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바로 그들이다. 당시엔 누구도 함부로 인혁당 사건에 관해 입을 열지 못할 때였는데, 1974년 10월10일,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에서 오글 목사가 인혁당 사건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그는 그날의 설교를 이유로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1970년대 민주화운동> 1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시노트 신부는 1975년 2월24일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 회장으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밝히는 ‘인혁당의 진상은 이렇다’ 등의 성명을 발표하고, 그 사건이 조작임을 공개 성토하는 등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사형 집행 후 주검조차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는 당국의 처사에 현장에서 거세게 항의하다가 경찰에 끌려갔고, 마침내 그도 강제 출국을 당했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각계의 운동은 시일이 가도 끊이지를 않았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개신교의 기독교교회협의회 그리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중심으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 의문사위·진실위, “고문에 의한 조작” 발표
역사는 흘러, 1979년 10월, 박정희 왕조가 김재규의 총격으로 끝나는가 했으나, 전두환이 군사반란 및 내란을 일으켜 권좌(5공)에 오르고, 1987년 6월항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의 6공 등장을 막지 못했으며, 그와 합세한 김영삼 정부가 출현했다. 그에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문정현)가 결성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12일, (인혁당 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한 장석구에 대한 직권 결정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정에서 정권 안보를 위해 고문 등에 의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작 의혹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정부에 권고하는 결정을 했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2권, 2003). 이어서 그해 12월,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5년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도 중정이 이 사건을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짜맞추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의 한 위원은 ‘사건의 성격상 사형 집행은 박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 법원, 30년 만의 재심 개시 결정
서울중앙지방법원(형사합의23부)은 같은 달 27일, 이 사건의 유가족들이 낸 재심 청구에 이유가 있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통한의 죽음이 있은 지 실로 30년 만의 일이었다. 재판장인 이기택 부장판사는 결정을 고지하기에 앞서 “피고인들이 이미 없어진 국가기관에 의하여 사형당해 지금 이 법정에 서지 못하게 된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그가 “이 사건의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 주문을 낭독하자 유족들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2005년 12월28일자 경향신문).
재심 첫 공판은 2006년 3월20일 열렸다. 같은 재판부(이때 재판장은 문용선 부장판사)에 의해 심리가 진행된 이 재판에서는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결과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기존의 유죄판결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결심 공판 때 구형도 하지 못했다.
■ 32년 만의 무죄 판결, 그러나 불귀의 원혼들
2007년 1월23일, 이 재심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도예종 등 재심 피고인 8명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다만 폐지된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면소됐고, 긴급조치 및 유신헌법 자체가 무효라는 변호인 측 주장은 그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법원에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로 32년 만의 무죄 판결이었다. 법정은 박수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 형사(刑死)한 억울한 영령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권력자에 의해 조작된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에 희생된 원혼들의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는 데서 그 의미와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은 법원이 ‘과거사’에 얽힌 사법적 오류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는 국면에서, 흔히 내세우는 ‘법적 안정성’보다 ‘사법 정의’를 중시한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지난날 시국사건 등에서 억울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의 재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다만 법원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좀 더 진정성 있는 사죄를 했어야 되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후 인혁당 사건 생존자 및 복역 중 사망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장영달 등 8명, 이해찬 등 5명을 비롯한 45명이 연달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59년의 진보당 조봉암(사형) 사건, 1961년의 민족일보 조용수(사형) 사건, 1974년 오종상의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말년에 술에 취하면 인혁당 사건 처리를 후회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내가 그 기사를 읽고, 술의 참회 유발적(내지 양심 회귀적) 효용에 대해 경탄했던 기억이 난다.
1975년 4월 9일과 시노트 신부 광주일보 15.1.20
나이가 들면서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오(悔悟)가 새삼스러울 때가 많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때 더 열심히 사랑할 것을, 미처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이 그것이다. 겪어 나온 옛날 일들을 더듬다가 어느 장면에서는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다. 지난 연말만 해도 1970년대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관한 구술을 하다가 나도 울고, 듣고 있던 대담자도 울어버린 일이 있었다.
1975년 2월 24일 9시 30분, 명동성당 사제관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유신정권을 향하여 인혁당 사건에 대한 공동 진상조사단 구성을 제의하면서 그때까지 확인된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제1차로 공개했다. 200자 원고지 70∼80매 분량의 이 진상보고서는 필자가 사제단의 주선과 보호 아래 숨어서 쓴 것이었다. 가족들의 진술과 양심선언을 토대로 하고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상고 이유서, 그리고 변호인들과 관련 참고인들의 증언을 들어 작성하였다.
그걸 쓸 때도 그랬지만, 그것을 다시 읽어보면서도 치떨리는 분노와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수사과정의 처절한 고문장면도 그렇지만 재판부가 이수병에게 “피고인들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고 물은데 대해 이수병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변하는 것을 변호인들과 가족들이 분명히 들었는데도 공판조서는 “과거 인혁당과 같은 조직을 구성, 대정부 투쟁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변조된 것이다.
1974년 11월 4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이들의 항고를 기각하자 초조해진 가족들은 그 억울함을 신·구교 기도회 등에 호소하고 다녔다. 그때 그들의 소원이라는 것은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으니 제발 공개재판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족들이 구명을 애타게 호소하고 다니자 중앙정보부는 이들 부인네를 연행, 남편이 간첩활동을 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진술서를 쓰게 하고, 심지어는 저희들끼리 희희락락 희롱까지 하는 작태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 부인이 집에 돌아와 그 수모를 참지 못해 자식들과 함께 자살을 꾀하다 친정어머니한테 들켜 죽지 못하고, 네 식구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슬픈 이야기는 차마 거기에 쓰지 못했다.
그들은 구속된 이래 죽는 날까지 누구 한 사람, 단 한 번 가족접견을 하지 못했다. 다만 이수병의 처는 기약도 없이 매일 서대문구치소로 출근하던 어느 날, 마음 착한 어느 교도관의 배려로 기적처럼 그 앞을 지나치던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딱 1분, 그러나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이라고 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확정 판결이 있었고, 이로부터 18시간 뒤인 4월 9일 새벽, 이들 중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재심 과정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인 4월 8일 새벽 3시에 이미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되었고,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집행 후인 4월 9일 15시에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 사형선고 통지가 오기도 전에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저간의 사정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이 지난 2005년의 국정원 진실위 조사에서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상부 지시가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한 발언이 모든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이 유신시대의 한가운데 모습이었다.
얼마 전 시노트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노트 신부가 1975년 4월 9일, 사형장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주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끌려가는 사진이 외신에 크게 실렸었다.
그는 또 주검 이후의 시신 확인 과정을 선교회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 국제법학자협회가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인혁당 사건이 BBC 다큐멘터리(Anno Domini BBC Ⅰ)로 제작되어 나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 그는 1975년 4월 30일, 끝내 한국정부로부터 추방 당했다. 1989년, 14년만에 정식비자를 받고 입국, 김포공항에서 인혁당 사형수 8명의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했다. 2004년 10월에는 ‘1975년 4월 9일’이란 책으로 이 사건을 증언했다. 2015년 4월 9일은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의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기억하라, 1975년 4월 9일-김 정 남 언론인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14.7.5 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1>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4월혁명 후 활발하게 전개되던 통일 운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노동 운동 등에 철퇴를 가했다.
서중석 : 쿠데타 정권의 정책 실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경제 정책이라고 본다면, 쿠데타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반혁명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좌익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검거했다. 쿠데타가 난 지 일주일도 안 돼 2014명을 검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3500명이 되고 하는 식으로 그 숫자가 더 늘어난다. '앞으로 반혁명적인 큰 사건이 일어나면 비판적인 세력은 조심해야 한다', 이게 이런 일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차하면 잡혀 들어가서 되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1년 6월 22일, 최고회의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걸 소급 입법했다. 이 특별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조항이 바로 제6조다.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 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가지고 혁신계,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 유족회 등을 잡아들이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몰아붙여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형한 것이다. (이 특별법은 3년 6개월까지 소급 적용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같은 해 7월 3일 반공법도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탄압할 때 국가보안법과 함께 반공법을 애용했다. <편집자>)
이런 것을 가지고 '혁명 재판부'는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장인 조용수와 송지영, 안신규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상두에게는 징역 15년형, 양수정과 이건호에게는 구형량보다 많은 징역 10년형을 부과했다. (이날 법정의 풍경을 1961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법정 안은 온통 울부짖음에 싸여 재판장의 주문이 들리지 않았다." 그 후 송지영과 안신규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다. <편집자>) 통일사회당으로는 윤길중에게 15년형을 내리는 것을 비롯해 김성숙, 이동화, 정화암 등에게도 중형을 내렸다. 혁신당에 대해서는 79세 장건상한테 5년형을 내리고, 사회대중당의 김달호에게도 15년형을 내렸다. 교원 노조 간부들에게도 중형을 선고했다. 이수병과 류근일이 15년형을 받는 등 학생들에게도 중형이 선고됐다.
프레시안 :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주장을 다시 한 번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다.
서중석 :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나 김종필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혁신계의 이른바 '특수 반국가 행위'에 대한 처벌 같은 것을 보면,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분단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민족주의 활동은 통일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통일 운동 세력을 아주 철저히 처단한 것이 바로 이 '혁명 재판소'다. 그 가운데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독립 운동을 했던 분들도 여러 명 포함돼 있다. 장건상과 김성숙, 이분들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다. 이런 혁신계, 진보적인 학생들, 노동 운동을 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교원 노조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들여 중형을 내린 것은 5.16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더 기가 막힌 건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처벌한 죄목이 크게 6개인데 밀수, 부정 선거, 조직 폭력 등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통일 운동,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등을 특수 반국가 행위로 처벌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런 운동들을 부정 선거, 밀수 등과 같이 취급한다는 것도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독립 운동을 하고 통일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특수 반국가 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인 건, 정말 국가라는 게 뭐냐 하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독립과 분단 해소에 헌신한 이들을 범죄자 취급한 나라
프레시안 : 부정 선거를 일삼고 국민을 학살한 이들보다 통일 운동,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노동 운동 등을 한 사람들을 훨씬 가혹하게 처벌한 것도 문제다.
서중석 : 몇 가지를 통해 5.16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더 확연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 소위 '혁명 재판'으로 처단된 사람들에는 부정 선거 원흉이라든가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학살 관련자 등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혁명 검찰부'에서 수리한 사건을 보면 특수 반국가 행위 사건은 225건, 608명이다. 주로 혁신계와 유족회를 겨냥한 건데, '혁명 검찰부'에서 수리한 사건의 전체 인원 1474명의 41.3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다. 반면 3.15 부정 선거 원흉들은 163건, 363명으로 그 수가 훨씬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혁명 재판소'에서 처리한 것을 보더라도 부정 선거 원흉은 69명이 유기 징역을 받았고 4명이 무기 징역, 6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특수 반국가 행위자로 지목된 이들은 통일 운동을 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125명이 유기 징역을 받았다. 69명의 거의 두 배다. 그리고 3명이 무기 징역, 5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문제는 이렇게 형을 받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후 이 사람들을 처리한 것을 보면, 부정 선거 원흉이나 경무대 앞 발포 사건 관련자 등은 석방이 빨랐는데 혁신 세력은 석방이 거의 안 됐다.
예컨대 1962년 12월 24일에 자유당에서 이기붕 다음 가는 간부였던 이재학(전 국회 부의장)이라든가 신현확 전 장관 등이 가석방된다. 1963년 5.16 특사로 자유당 중요 간부이던 임철호나 송인상 장관도 석방되고 그 뒤에 홍진기 내무부 장관도 석방된다. 이런 식으로 자유당 관련자들은 부정 선거 원흉이건 발포 사건 핵심 인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건 거의 다 석방된다. 이와 달리 혁신계 대다수는, 학생들을 빼놓고는, 거의 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특수 반국가 행위 사건에 엮인 이들 중 상당수는 1968년에 가서야 풀려났다. <편집자>) 학생들은 15년형을 받은 이수병과 류근일, 이 두 사람을 빼놓고는 자유당 간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장관들이 석방될 때 대개 풀려났다.
프레시안 : 이수병과 류근일은 그 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수병은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엮여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을 이야기해 큰 논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와 달리 1961년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 총회 의장을 맡았던 류근일은 7년여의 수감 생활 후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살아갔다.
서중석 : 맞다. 이수병 이 양반은 1975년에 처형을 당했다. 류근일도 그런 경력 때문에 민청학련 사건에 다시 걸리기도 했는데,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했다. (류근일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구속됐다. <편집자>) 사실 군사 정권은 꼭 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죽이거나 남겨놓고는 했다. 혁신계 중 많은 사람이 1968년 또는 그 이후까지 감옥소에 있고 그랬다. 학생 같은 경우 이수병하고 류근일이 중형을 받고 감옥소에 남았는데,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사 정권은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또 본보기로 일부를 감옥소에 남겨두기도 했다.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이 처형한 이들의 면면에서도 형평성 문제가 드러난다.
서중석 : 군사 정권이 '혁명 재판' 같은 걸로 죽인 사람 중 이야기가 많이 되는 게 조용수, 최백근,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이렇게 6명이라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여기서 끈 떨어지고 힘없는 처지가 된 세 사람, 즉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를 빼면 조용수, 최백근, 최인규 셋이 남는다. 혁신계로 두 명이나 처형을 당한 것이다.
최인규는 혁신계를 두 명이나 희생양으로 처형하는 마당에 자유당 간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장관들 중 부정 선거 또는 발포 명령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소한 한 명은 처형한다는 것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본다. 최인규의 경우도 과연 이게 법치주의에 맞게 처형된 것인가, 그렇지 않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처리된 건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조용수라든가 수많은 혁신계 인사를 보면 나중에 재심을 청구해 다시 재판을 받은 경우 다 무죄 판결을 받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사형당한 조용수, 이 사람은 2008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은 소급효 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또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차별 금지 원칙에 위배되며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고 볼 수 없어 무죄다'라고 판결했다. 이것 말고도 법원에서 수많은 재심 판결을 했는데,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6조와 관련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부 정치적인 재판이었다는 게 2000년대 들어 법원에 의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이 사람들의 경우 재심 청구를 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못 들었다.
▲ 학살 문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은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제2의 학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두개골. 대부분의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다. ⓒ연합뉴스
쿠데타 세력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제2의 학살
프레시안 : 5.16쿠데타 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서중석 : 이런 사건 못지않게 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 피학살자 유족회 문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주민 집단 학살로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는데, 4월혁명 이후 거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유족회를 만들지 않았나. 그때 경상도를 중심으로 해서 유족회가 참 많이 생겼다. 수십 군데 있었다. 그런데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주민 집단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 명예 회복 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전부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유족회 관계자들은 대거 구속됐다. 그러면서 거창, 김해, 진영, 제주 등 여러 지역의 피학살자 합동 분묘를 파헤치는 걸 볼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유골 상자를 부수고, 정으로 비석을 쪼아서 버려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래서 제2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경상남북도 피학살자 유족회' 이원식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노현섭은 무기 징역을 받고 그랬다. 많은 유족회 관계자들이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그리고 학살을 주도하거나 그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 경찰들에게 '혁명 재판'에서 면죄부를 명백히 부여한다. 그런 것을 통해 쿠데타 세력이 학살에 가담한 군인, 경찰들과 동류의식을 보여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제2의 학살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 혁신계에 대한 대량 재판과 처단은 혁신계를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그래서 진보 세력이 새로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이고, 2000년대에 와서야 의회에 여러 사람이 진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진보 정치 세력이 수십 년간 공백으로 남게 되고 그 대신에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그래서 학생운동이 30년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나라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혁신계와 피학살자 유족회에 대한 단죄는 피해 대중의 공포와 피해 의식, 무력감을 상기시키고 증폭해서 현대사 그리고 학살 사건 등에 대한 무지와 왜곡의 상태를 심화했다. 주민 집단 학살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30년 가까이 유족들은 또다시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입을 열지를 않았다. 이런 공포 상황에서 그 자식들은 자기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연좌제에 묶여 온갖 피해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유족회 사건 피해자 중 재심 청구를 한 사람들은 다 무죄 선고를 받았다. 예컨대 '경주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김하종은 '혁명 재판'이라는 데에서 7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은 '군사 재판 판결문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니 원심 판결과 같이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으므로 무죄 판결을 원심 그대로 유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1세기 들어 각종 과거사 위원회가 생기고 거기서 진상 규명을 하게 돼서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30년 이상 극단적인 반공 체제를 유지하는 데 혁신계 단죄, 유족회 단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 그런 것들을 통해 5.16 주체 세력이라는 사람들의 성격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이소선, 인혁당 사건 가족들과 대면하다 14.11.7 오마이뉴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55] 6. 어둠을 가르는 몸짓
기도회와 재판정에서 만난 사람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가족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하여 당국의 사건조작을 폭로하고, 구속자석방운동과 민주회복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민청학련에 관련된 학생들은 법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은 수사기관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전남대 김정길은 수사기관에서 '김일성 만세'라고 자꾸 쓰게 하여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나중에 그것이 자기 조서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김지하, 나병식 등 관련인사와 학생들은 수사과정에서 받았던 살인적인 고문행위를 폭로하여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974년 9월 7일 오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급 48명과 두 일본인을 포함한 50명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죄로 선고공판을 열었다. 군법회의는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 징역 12년 이상 20명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1974년 4·3 사건 발생일로부터 10개월 12일 만인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180명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과 학원 관계자 4명을 제외한 148명이 출옥하였다.
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조작해낸 사건으로서 내·외의 여론에 밀려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까지 밀리게 된 것이다.
이소선은 이 무렵부터 목요기도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목요기도회는 유신정권 시절에 재야민주인사들이 모여 '기도회'라는 형식을 빌어 인권문제를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강력한 반정부 집회의 하나였다.
유신 때는 반정부적인 집회를 합법적으로 개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되었든 구교가 되었든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기도회라는 형식으로 반정부 집회를 가졌다. 목요기도회는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정기적인 기도회였고, 그 밖에는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당면한 사안에 따라 기도회를 열었다.
전태일 사건 이후 목요기도회에 나가게 된 이소선
이소선이 목요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에 거의 빠짐없이 나가게 된 이유는 전태일 사건 이후에 학생들이나 종교인들, 지식인들이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싸워준 것이 고마워서였기도 하고,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갖가지 기도회나 특히 민주인사 재판정에 방청을 다니면서 배운 바는 엄청나게 많았다.
이소선은 기도회에 가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을 생생하게 들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도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투쟁이 결코 외로운 투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구속된 민주인사들의 재판정에 방청을 가서 그들이 당당하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묶이고 갇힌 자가 죄인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이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한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지하가 재판을 받는 것을 들어보니까 말뚝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김지하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 조목조목 맞는지 그날 이소선은 양반집 하인인 말뚝이를 통해서 분배의 정의를 알게 되었다.
함석헌 선생이 불구속으로 재판 받을 때다. 함 선생은 스스로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삼베옷을 곱게 입으신 채로 재판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씀하셨다.
"재판장, 내 말 들으시오. 지금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당신이 재판하지만, 역사는 당신들이 죄인 되는 날이 올 것인데 두렵지 않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올바로 말하는 사람들을 죄수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 할 것 같으면 당신네가 죄인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앉아서 재판을 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오."
그 서슬 퍼런 유신 정권을 향하여 함 선생은 준엄하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기도회나 재판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가지고 밤에는 노동조합에 와서 조합원들한테 열심히 얘기를 해주었다. 그 귀중한 가르침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청계노조 조합원들한테 전달해 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조합원들을 항상 그런 곳에 데리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들은 공장에 가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들은 다음 그들에게 다시 전해주어야 했다.
목요기도회는 다니면서 많은 사례를 보고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사례 중의 하나가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애당초 1964년 8월에 '북한괴뢰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소위 인민혁명당의 정체를 전 국민 앞에 밝히는 바'라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발표에 의해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검사 등의 공소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기도 하고 공소가 취하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고 몇몇 사람만 비교적 무겁지 않은 실형을 받았다.
그런데 10년 후인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때, 과거의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또다시 연루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고,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기도했다는 이유로 2·15 석방 때 제외되었다.
이소선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가 일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분리해서 조치하고, 또 언론이나 사회여론도 이러한 정부의 의도에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석방운동도 따로따로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재야민주인사들마저도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별종으로 치부하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이런 가운데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호소문을 써들고 기도회에 나와서 읽겠다고 사정하면 사회를 보는 사람이 순서에 넣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 사연 들은 이소선, 그들을 돕겠다고 마음먹어
인혁당 사건 가족은 끈질기게 기도회나 집회에 나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물론 그것은 정식순서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폐회가 된 뒤 그들이 마이크를 잡고 호소하는 식이었다. 어떤 때는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나타나 호소하고자 하면 신부나 목사님들이 그들을 피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얘기 좀 합시다. 우리는 얼마나 억울하게 됐는데, 그런데도 말도 못하게 합니까?"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외면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인혁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남편들 재판정에서 어느 날 이름이 우리한테 붙었는데, 우리 남편들은 그냥 순수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난 모의라고 해서 조작해낸 것입니다.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여기서 끌려든 사람들은 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며, 사회에서 뚜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전부 다 누가 석방운동을 해주지도 않을 그런 사람들만 끌어모아다가 이렇게 덮어씌워 가둬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절한 호소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소선 역시도 이러한 문제를 우리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은 그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들이 싸우는 곳에 가서 함께 싸워주는 것밖에는 달리 없었다.
훌륭하신 목사님과 신부님 몇 분 그리고 민주인사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잘못된 시각을 바로 잡아주고, 고통당하는 가족들한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해주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의 억울한 사정을 구구절절이 적은 호소문은 눈물 없이는 읽어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호소문을 읽어나가면서 이소선은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했다.
점차로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호소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고, 석방운동이 활발해지자 중앙정보부에서 그 가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씨의 부인 임인영씨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임인영씨에게 들은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정보부를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남편이 재판정에서 그렇게 억울하다고 얘기하는데, 그래도 이 사람이 뭔가에 묶여 있으니까 정보부에서 묶었지 않았겠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기징역을 살 정도면, 저들이 남편에 대해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항상 나를 따라붙었다. 나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서 애 아빠를 취조한 수사관을 붙들고 남편에 대한 것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차차 굳혀갔다.
그러한 의도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호소문도 더욱더 과감하게 써서 배포하고, 고문에 대한 것도 폭로하였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잡으러 올 것이다'하고 집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청량리경찰서 담당직원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는 남편과 관계있던 사람들이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형사들이 난처한 듯 머뭇거리다가 "저 아줌마, 중앙정보부에서 좀 모시고 오래요"라고 하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 데리고 오래요?"라고 했다. 형사들이 그렇다고 대답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고 가야지. 얘들아, 나 빨리 갔다 올 거다"하면서 형사들을 따라나섰다. 나의 그런 태도에 오히려 형사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중앙정보부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당황해 하거나 '왜 데려가려 드느냐'며 버티며 몸싸움이라도 한바탕 해야 하는데, 되레 반가워하면서 따라나서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갔다. 처음에는 혼자만 잡혀 들어온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같은 시간에 인혁당 사건 관련 가족 10여 명을 동시에 연행한 것이다. 대구에서도 잡아오고 서울에서도 잡아들이고 해서 여자 10여 명을 연행했다. 연행되어 와서는 각자 다른 방에 있었으니까 서로 그런 줄을 몰랐다.
어떤 방엔가 앉혀져 잠시 기다리니까 과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까맣게 생긴 사람이었다.
"흥, 생긴 건 빤빤하게 생겨 가지고 ……."
그 사람은 대뜸 반말지거리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조금 후에 점잖은 태도로 학교를 어디 나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몇 마디 대꾸를 해주자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취조관이 들어왔다. 취조관이 나를 취조하려고 들기에 나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내 남편 취조한 취조관을 데려오시오."
"아이고 아줌마, 아저씨 취조한 사람은 데려다 뭐하게요? 우리하고 얘기합시다."
나는 공책 3페이지 정도 되는 공소장을 달달 외우고 있던 터에 취조관에게 항의하듯 따지고 들었다.
"아니오, 나는 우리 아저씨가 재판정에서 한 얘기도 있고, 공소사실을 보면 3페이지밖에 안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무기징역이 뭐야!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자, 봐라. 무슨 책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중에서 파는 책이다. 그리고 다방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 다방 가봤다. 가보니까 의자가 요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거기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해? 정신이 빠진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서 국가를 변란하기 위한 모의를 할 수 있겠어? 거기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이 오면 차 마시고 식사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래 당신들은 그런 데서 국가변란 모의를 하냐?"
내가 얘기하는 동안 취조관은 내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전창일이 의심나는 것 있으면 말해봐라. 그러면 나는 석방운동 안 해. 너희들이 당장에 증거만 대고 전창일이 의심스러웠던 것만 대주면 석방운동 안 해. 그러니까 빨리 데려오라고."
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니까 밖으로 나갔던 과장이라는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과장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떠들어? 저것 맛 좀 봐야겠네?"
과장이라는 사람이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내가 이들의 협박에 굴할 아무런 까닭도 없다.
"왜 고문해서 조작했냐? 너희들에게 고문해서 빨갱이 만들라는 권한이 어디 있냐?"
과장은 더욱 싸늘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저것 진짜 한 번 혼 좀 내야겠네. 저년 당장 고문실로 데려가!"
"그래, 내 남편이 받았다는 고문, 나도 받아보는 게 소원이다. 가자 가."
과장이라는 사람하고 취조관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나의 태도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고문실로 데려가지는 않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비교적 공손한 태도로 취조를 했다.
"아주머니, 자꾸 남편이 억울하다고 하는데 남편 공판기록을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가져와 보세요. 한번 봅시다."
취조관이 캐비넷에서 공판기록을 꺼내 전창일 부분을 펴서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니까, 판사가 '국가변란을 모의했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네, 했습니다.'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질문들도 재판정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전부 '네, 했습니다.'로 뒤집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수병씨를 맡은 조순갑 변호사가,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전해들을 때는 설마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눈이 확 뒤집혔다.
"아니,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변호사님이 말하더니 이것 좀 봐! 법정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했습니까?'하니까 '우리는 국가변란 모의가 뭔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것 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이게 뭐야! 다 했다고 되어 있잖아. 당신들, 이런 짓까지 해도 되는 거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내가 팔팔 뛰며 몰아붙이자 취조관은 얼른 공판기록을 덮어버리고, 그 얘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같은 정보부내에서도 공판기록을 조작한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 취조관은 조작사실을 모르고, 그 기록을 보여주면서 나를 설득해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3일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그런 식으로 싸워나갔다. 내가 워낙에 강력하게 싸운 탓인지 조사기간 내내 비교적 예우를 받아가며 조사를 받았다.
임인영씨와는 달리 다른 가족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고 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씨의 부인은 치 떨리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정보부에 끌려가자마자 온갖 더러운 욕설을 들어야 했다. 특히 미국인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한국의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두고 그들은 '그 미국 놈들 왜 쫓아 다니냐?" 며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욕을 했다.
○○○씨 부인은 그때 오바를 입은 채 연행되었는데, 멱살을 잡고 얼마나 세게 흔들었는지 나중에 석방되어서 나온 뒤에도 목 언저리에 멱살 잡힌 오바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런 폭행을 처음 당해보았기에 그녀는 너무도 놀라서 기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이 간접'이라고 진술한 그녀... 그 고통은 참혹하고 끔찍
취조과정에서 너무도 숨이 차고 목이 타서 그녀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하얀 색의 물을 가져다주더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물인 줄만 알고 반쯤 마셨는데, 물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성욕이 솟구치는데 못 견딜 정도였다고 했다. 물에다가 흥분제를 탄 것이다. 견딜 수가 없어서 바닥에서 막 데굴데굴 구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보부 요원들은 자기네끼리 짐승처럼 웃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자, 네 남편은 간첩이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네 남편은 간첩이라고 써라'고 강요했고, 그녀는 강요에 못 이겨 남편이 간첩이라고 자신의 손으로 진술서를 쓰고 말았다 한다.
○○○씨 부인은 그런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거짓진술서를 쓴 것이 가책이 되어, 석방된 뒤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하면서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자기가 남편을 간첩이라고 진술서를 써주었기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남편의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고통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했겠는가. 그녀의 진술을 마저 살펴보면 한 가정이 얼마나 잔인하게 부서졌는지를 알 수 있다.
"남편의 사진을 불태우고 나서 나는 애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쥐약을 사왔다. 쥐약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몰래 먹인 뒤 나도 먹고 죽으려고 했다. 방안에 애들 셋을 앉혀 놓고 약 뚜껑을 열었다. 쥐약을 먹이려고 하니까 애들이 눈치를 채버렸다. 내 태도가 이상했던 것이다. 큰아이가, "엄마, 그게 뭔데"하고 물었다. 그런 와중에서 쥐약이라는 걸 눈치 챈 애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안 먹어, 안 먹어! 우리는 안 먹을 거야. 왜 쥐약을 먹이려고 해.'
나는 막 울면서 애들에게 얘기했다.
'먹어야 돼. 이리 와, 이것 먹고 우리는 다 같이 죽어야 돼.'
그러면서 나는 애들한테 강제로 약을 먹이려고 했다. 애들하고 서로 울면서 실랑이를 벌이는데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내게서 약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전부 다 끌어안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씨 부인은 그 뒤 임인영씨 등 인혁당 가족과 양심 있는 성직자, 그리고 재야인사들의 위로와 관심으로 용기를 얻어 자신이 당했던 사실들 폭로하기도 하고 목요기도회에도 나오게 되었다.
죽을 힘 다해 관 내려친 이소선, 온몸이 떨렸다 14.11.11 오마이뉴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56] 6. 어둠을 가르는 몸짓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피맺힌 한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 관련 상고자 39명의 형량을 원심대로 확정했다. 이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8명(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은 사형을 확정 받았다. 대법원은 사형이 확정된 바로 이튿날, 이들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은 목요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소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요기도회에 참석했다. 어제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뜻에서 모두가 검은 리본을 달았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전창일씨 부인이 사건경위를 발표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석방운동을 해주셨는데, 우리 인혁당 사건 8명의 목에 기어이 밧줄이 걸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홍선씨는 가족면회도 한번 하지 못했습니다. 육영수를 죽인 문세광도 가족면회를 시키고 죽였다는데,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사형되기 전날까지 쫓아다녔는데, 우리도 그때까지 죽인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어떻게 생사람을 잡아다가 그렇게 전격적으로 죽일 수가 있습니까. 형이 확정된 바로 그 다음날 집행할 수밖에 없는 저들, 그들은 스스로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증명한 셈입니다.
어제 교도소로부터 통보가 와서 우리 가족들은 구치소로 갔습니다. 제가 어제 서울구치소로 갔더니 구치소 넓은 홀은 텅텅 비어 있고 정보부 요원들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놈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놀면서 돈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우홍선씨의 부인, 김용원씨의 부인은 개인적으로 시체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집이 대구인 다섯 분의 시체는 대구까지 모시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세웅 신부님과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의논한 끝에 함세웅 신부님이 계시는 응암동 성당에서 합동장례식을 갖고 명동성당 공동묘지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합동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시체를 탈취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고 대구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시체들은 다 빼앗기고 송상준씨 부인만이 시체를 빼앗기지 않고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응암동 성당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응암동 삼거리에서 경찰들이 앞뒤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가 말을 합니까? 저들은 죽여 놓고도 합동장례식마저 못하게 시체를 빼돌렸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하나 남은 시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가주세요!"
그녀의 호소는 애절했다. 피눈물을 토해가며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은 기도회에 자리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호소가 끝나자마자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응암동으로 향했다.
전창일씨의 부인이 얘기한 대로, 응암동 삼거리에는 사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한 어린 여학생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학생은 경찰들을 향해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소선은 그만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사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버스 막고 관 차 밖으로 끌어내
그때 마이크로버스 한 대가 막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들 일행 중 한 사람이 그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버스에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소선과 몇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가서 마이크로버스를 가로 막았다. 버스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나중에 알고 봤더니 시체를 태운 버스를 경찰이 빼앗아 화장터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소선은 멈춰선 차의 문을 발로 막 걷어차고 땅바닥에서 돌을 주워들어 유리창을 깨버리려고 덤벼드니까 차 안에 타고 있던 놈이 왜 그러느냐면서 문을 열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얼른 차 문을 열어젖히고 올라가니까 검정칠을 한 관짝이 놓여있었다. 그 관짝은 무슨 노끈 같은 것으로 두어 번 엉성하게 묶여 있었다. 이소선은 손에 들고 있던 돌로 관짝을 마구 내리쳤다. 너무 날치기 관이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관을 부술 수가 있었다. 관짝을 열어제끼니 죄수복을 입은 채로 죽은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버지 여기 있다!"
"○○○ 아버지가 맞다!"
이소선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서 관을 차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는데 그의 뒤에 있던 경찰이 차 밖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소선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면서 연신 "○○○ 아버지가 여기 있다"고 소리 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이크로버스를 에워쌌다. 그러자 기동경찰들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경찰들은 그들을 밀어내고 차를 뺏으려 들었다. 그들은 시체를 지키기 위해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한동안 차를 뺏으려고 경찰과 차를 지키려는 그들 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결국, 숫적으로 우세한 경찰은 그들을 밀어내고 차를 움직였다.
▲ 문정현 신부(2007. 10) ⓒ 민종덕
이 자리가 내가 죽을 자리다."
문정현 신부가 시동이 걸린 버스 앞으로 달려가 큰 대자로 누웠다. 경찰들은 버스 앞에 누워 있는 문정현 신부를 무시하고 버스를 움직였다. 버스 바퀴가 문정현 신부의 다리 위로 달려들었다.
이소선은 눈을 가렸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자 시뻘건 피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들 경악했다. 어떻게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버스를 달리게 한단 말인가. 그들은 앞을 가로막은 경찰들을 밀었다. 그러나 워낙에 수로 열세인 탓에 경찰들의 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집게차가 나타났다. 집게 차는 버스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그들이 발을 구를 새도 없이 집게 차는 화장터를 향해 사라져갔다. 이소선은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그의 몸은 와들와들 떨렸다.
직접 목격해놓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놈들은 사람 알기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희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문정현 신부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리를 크게 다치긴 했으나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그 피맺힌 한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이소선은 이 사건 이후로도 그 가족들을 보면 너무도 가슴이 아파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지만 능력의 한계 때문에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사법살인 그날, 인혁당 희생자 주검 탈취 현장을 지켜봤다 15.10.18 한겨레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8회 아, 인혁당
1975년 들어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박정희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야권과 재야는 불복종을 선언했다. 국민투표일인 2월12일 김대중(오른쪽)·이희호(왼쪽) 부부는 아침 7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체현시기도회에 참석해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기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쫓겨나고 한 달이 채 안 된 1975년 4월8일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여덟 명의 상고가 기각됐다. 대법원은 김용원·도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의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날 새벽 6시 사형수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고 18시간 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사형집행이었다.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야만의 사법살인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사형수들은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1974년 10월 인권활동을 하던 목사 조지 오글의 폭로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12월 오글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인혁당 관련 구속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던 중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죽이거나 풀어주거나 정권 마음대로였다. 인혁당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6국장이었던 이용택은 뒷날 “한창 수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일주일에 두 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언론에 밝혔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상고심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창자가 빠져버리는” 고문 들통날까 경찰은 영결식 가던 운구차 빼앗아 벽제 화장터에서 주검을 불태워버렸다
“얼마나 고문을 했으면 저렇게까지…” 이희호는 유족을 껴안고 울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유신헌법 개헌 운동에 연대를 약속한 직후인 75년 8월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해 10월5일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대강당에서 열린 ‘장준하 49재 추모의 밤’에서 김대중·이희호와 함께 참석한 함석헌(맨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다 풀려난 김지하는 1975년 2월17일 <동아일보>에 ‘고행-1974’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투쟁을 하고 있던 때여서 김지하의 글은 지면에 실릴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김지하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하고 관련자들이 당한 고문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낱낱이 알렸다. 김지하가 전한 고문 내용은 끔찍했다. 사형수 가운데 한 사람인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으로 창자가 다 빠져버리고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희호는 중앙정보부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가한 고문 내용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그때 명동성당에서 신부님들과 천주교인들이 저녁 여섯 시부터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자주 드렸어요. 나도 거기에 매번 참석했지요. 미사가 끝나고 나면 성모 마리아상 앞에 서서 제2부 모임으로 현실 고발을 했는데, 인혁당 사람들이 당한 고문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가 일어나 참을 수 없었어요. 촛불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요.”
박정희 정권은 잔혹한 고문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인혁당 사형수들이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막았다. 사형수들은 마지막날까지 가족 면회를 하지 못했다. 사형수의 부인들은 대법원 사형 확정이 난 다음날 남편을 면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새벽부터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부인들이 접한 것은 남편의 얼굴이 아니라 사형이 벌써 집행됐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유신정권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화장터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몸에 남은 고문 자국을 지우려고 저지른 또 다른 만행이었다. 이희호는 그날 운구차를 지키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날 목요기도회가 있어서 아침에 기도회장으로 갔는데, 인혁당 사형수들이 새벽 잠결에 모두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함세웅 신부가 시무하는 응암동성당에서 영결미사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응암동으로 달려갔지요. 송상진씨의 관을 실은 트럭이 녹번동 로터리에서 발이 묶인 채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어요. 나는 트럭에 올라가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을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경찰은 유족을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운구차를 빼앗았다. 운구차의 시동을 걸지 못하도록 누군가 껌을 씹어 열쇠 구멍을 막아버렸다. 경찰은 운구차를 끌고 가려고 크레인을 동원했다. 미국인 신부 제임스 시노트가 차 앞에 드러눕자 경찰이 발로 차고 개 끌듯 끌어냈다. 이희호는 현장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문정현 신부님도 차를 지키려고 차 밑에 들어가 몸으로 막았는데, 경찰이 차를 끌어내는 바람에 다리가 바퀴에 깔리고 말았어요. 그때 문 신부님이 다리를 다쳐 그 뒤로 내내 지팡이를 짚게 됐지요.” 크레인으로 운구차를 탈취한 경찰은 벽제 화장터로 끌고 가 주검을 불태웠다.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그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그랬던 거예요.” 정권은 인혁당 고문 조작 사실을 알리던 시노트를 4월30일 미국으로 추방했다.
박정희는 ‘긴조 9호’를 발동하고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을 조직했다
민주화의 숨통이 끊기려던 그해 8월 장준하가 김대중을 찾아와 민주세력 단일화를 논의했다. 보름 뒤 그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인혁당 사형수 가족들의 수난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됐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쓰고 온갖 수모를 당했다. 유족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었다. 사형수 우홍선의 아내는 1987년에 작성한 호소문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저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한 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후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꾸려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어 2007년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여덟 사람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희호는 청와대에서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족들을 다시 만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된 뒤 유족들을 청와대로 모셔서 만났어요. 그때까지 나는 운구차를 붙들고 함께 울었던 소복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라는 걸 알았어요. 그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의 사형이 확정된 그날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비방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체포·압수·수색할 수 있다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인혁당 사형수들이 끔찍한 고문 끝에 사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4월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는 성토대회가 열렸다. 그날 축산과 4학년 김상진이 등산용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했다. 김상진이 할복 전 읽은 선언문은 비장했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튿날 서울대 농대는 휴교령을 발표했다. 언론은 김상진의 죽음에 침묵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성명을 발표해 김상진의 죽음을 알렸고 신부들은 명동성당에서 김상진 추도 미사를 올렸다. 김상진의 할복자살은 민주화 시위에 불을 붙였지만, 4월30일 그 불을 꺼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월남 패망’을 정권안보의 호기로 활용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한껏 증폭시키는 반공캠페인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비보를 들은 함석헌은 말했다
“저놈들이 두 사람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명을 전격 사형시킨 박정희 정권은 고문 사실을 감추고자 주검마저 빼돌려 곧바로 화장을 시켜 버렸다. 4월9일 낮 서울 녹번동 사거리에서 문정현(왼쪽 둘째) 신부가 시노트 신부와 함께 경찰의 운구차 탈취를 막으려다 부상을 당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삼은 긴급조치 9호는 그전에 발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악랄한 조항을 한데 쓸어모은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을 금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신헌법의 개정·폐기를 청원·선동·보도하는 행위까지 모조리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해 사형시킬 수 있다는 최악의 반민주적 조처였다. 민주화 운동의 숨통을 끊고 뿌리를 뽑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긴급조치 9호 발동은 유신 쿠데타에 이은 또 한 번의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유신정권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4년6개월 동안 긴급조치 9호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했다. 그 기간 동안 800여명이 이 악법에 걸려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5월20일에는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도록 했다. 군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묶어놓고 길들이자는 것이었다. 7월8일에는 사회안전법·민방위기본법·방위세법·교육관계법을 포괄하는 이른바 ‘4대 전시입법’을 발표해 7월16일 새벽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나라 전체가 병영으로 바뀌었다. 정권은 이런 극단적 조처로 유신 반대 투쟁의 불길이 완전히 진압되기를 바랐지만 투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거듭 살아났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열흘이 안 된 5월22일 서울대에서 1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김상진 추도식을 열고 긴급조치 9호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기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에게 면담을 제의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제의를 수락했다. 두 사람은 28일 후인 1975년 5월21일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은 면담이 끝난 뒤 “국정 전반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며 당과 나에게 유익한 회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면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민당 대변인이었던 이택돈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김 총재는 특유의 어법으로 ‘요점은 이거야. 여당은 지가 하고, 야당은 나보고 맡으라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래서 ‘김대중씨는 어떻게 하고요?’라고 반문했죠. ‘김대중이는 끝났어’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선명투쟁을 접고 온건한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택돈은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김영삼이 제지하자 신민당 대변인직을 그만두었다.
이해 8월17일 민주투사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준하의 죽음은 동교동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을 당하기 전 7월말 장준하가 직접 동교동으로 김대중을 찾아왔던 터였다. “장준하 선생님이 그때 우리 집에 처음 오셨어요.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오래 했지요.” 장준하는 그해 3월부터 박정희 정권에 일격을 가하려면 민주세력의 단일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야권 지도자들에게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장준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3월31일에는 윤보선·양일동·김대중·김영삼이 모여 4자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세력 단일화 논의는 김영삼이 5월21일 청와대를 다녀온 뒤 투쟁 전선에서 이탈하자 깨지고 말았다. 장준하가 김대중을 직접 방문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장준하 선생님과 남편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었어요. 1971년 대통령선거 때 다른 야당 후보 편에 서서 남편을 공격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남편은 장준하 선생님이 운영하던 <사상계>에 예전부터 글도 쓰고 재정적인 도움도 주었어요.” 장준하는 김대중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남아 있던 앙금을 털어버렸다.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중요한 만큼 앞으로 김대중을 돕겠다는 말도 했다. 이날 두 사람은 등산을 화제로 올렸다. 장준하가 등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다며 그동안 오른 산 이름을 두루 이야기했다. 김대중이 걱정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다녀도 괜찮겠습니까?” “설마 놈들이 날 어떻게 하겠소.” “그래도 혼자서는 절대로 다니지 마십시오. 세상이 너무 험합니다.” 그것이 장준하와 김대중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4월9일 이희호가 운구 트럭 위에서 껴안고 울며 위로했던 사형수 송상진의 부인 김진생이 2012년 9월12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인혁당 망언’에 항의하고자 여의도 당사 앞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과 만나고 보름쯤 지난 뒤 1975년 8월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 등산하러 갔다가 계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검찰은 장준하가 실족사했다고 발표했다. 절벽에서 추락했다는데 장준하의 몸은 골절도 없고 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검찰의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사건이 나고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장준하의 묘를 이장하던 중 유골의 머리 뒤쪽에 지름 5~6㎝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자국이 발견됐다. 단순 추락으로는 생길 수 없는 정교한 함몰이었다. 동교동 비서였던 김형국은 장준하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김대중 선생님이 저더러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지키라 해서 사흘 동안 장준하 선생님 댁에 있었어요. 함석헌·계훈제·백기완 선생님이 함께 계셨지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실족사했다는 약사봉 계곡에 가봤어요. 거기는 산토끼도 다닐 수 없는 험한 곳인데 뭐하러 거기를 가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김대중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니까 ‘중대한 결행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러시면서 꺽꺽 우시더라고요.”
장준하는 본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박정희와 싸우면서 민족주의자로 거듭났다. 7·4 남북공동성명을 지지했던 장준하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1972년 8·9월호에 쓴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이희호는 장준하가 김대중과 손을 잡게 된 것이 박정희 정권에 압박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장준하 선생님이 남편과 만나 화해하고 일을 도모하자 박정희 정권이 두려움을 느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준하가 난데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두 사람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민주·통일운동 20여년…인혁당 연루 “내가 죽는 이유는 조국을 사랑한 죄” 11.11.21한겨레
그때 그 사람 민족통일의 선구자 이수병 선생
‘짓눌린 지초처럼/ 치솟는 해일처럼/ 그렇게 강인하고/ 그렇게 감격스런/ 새해를 또 맞으시기 바랍니다’(1974년 새해 아침 이수병)
이렇게 힘차고 당당하게 연하 편지를 보냈던 그는 불과 4개월 뒤 박정희 유신정권에 끌려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74년 4월18일 서울 종로 청진동 삼락일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이수병은 원장이자 친구인 김종대와 얘기하던 중 낯선 방문객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중앙정보부의 검은색 세단에 실려 끌려갔다. 같은 시각, 조금 전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던 김용원도 중정에 연행됐다. 당시 경기여고 물리교사였던 그는 박정희의 둘째딸 근영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대구에 있던 도예종·서도원·하재완도 이미 끌려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앞서 2월 이수병은 우홍선으로부터 중정에서 유신반대 학생 시위를 구실로 10년 전 인혁당 사건 때 뿌리뽑지 못한 혁신세력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어 4월16일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73년 말 대구의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서 학원으로 파견한 여정남이 체포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지만 사태를 낙관했던 그는 도피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75년 4월9일 새벽 4시30분 사형장으로 끌려온 이수병은 천천히 펜을 들었다. “내가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뿐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대책을 세워달라.”
37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에서 태어난 이수병은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댄 백산 안희제의 생가와 지척에 산 인연으로 그의 아들 안상록(1905~82)으로부터 일찍이 사회과학 의식을 배웠다. 53년 부산사범에 입학해 사회과학 토론모임 ‘암장’을 꾸려 활동한 데 이어 56년 부산대 교육학과에 진학해 혁신계인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에게 영향을 받았다.
59년 신흥대(현 경희대) 경제학과에 편입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암장 동지들과 ‘점등작업’이라는 강연회를 펼치던 60년 ‘4·19’를 맞았다. 11월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은 그는 61년 2월28일 진명여고에서 열린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조직)의 ‘3·1운동 강연회’에 학생대표 연사로 나서 주목을 받았다. <민족일보> 창간 첫 공채에서 수석합격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어 5월13일 민자통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자주통일 촉진 궐기대회’에서 그는 또 한번 학생대표로 나섰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배고파서 못 살겠다 통일만이 살길이다.”
그러나 5월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체포된 그는 혁명재판소에서 서울대 유근일과 함께 학생운동 지도자로는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옥중에서 집필한 장편 대화체 소설 <수경 선생>은 74년 체포 직후 가족들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나 역시 그의 저서로 알고 읽었던 <만적론>은 사실 부산사범 동창 유진곤이 <민족일보>에 투고하려고 보낸 논문이었다.
68년 7년 만에 출소해 지물포를 운영하며 2남1녀 가정을 이룬 그는 71년 9월 종로1가 청진여관에서 부산의 이영석, 광주의 김세원, 서울의 우홍선 등과 모여 대구의 서도원을 좌장으로 ‘경락연구회’를 꾸렸다. 경락처럼 보이지 않는 점조직으로 각 지역에 민자연(민족전통의학 자연건강연구회-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을 구성하고, 근거지로 충무로에 지압시술소를 열기도 했다.
64년 ‘6·3사태’ 때 수감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생전의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옥바라지를 전담했던 김용원과 친구인 이영호와는 대학시절부터 가까이 지냈고, 그의 또다른 친구 최종국 그리고 박중기로부터도 그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는 내게 여전히 전설적인 변혁운동가로 각인돼 있다.
나는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그 가족들과의 인연으로 그들의 구명운동을 뒤에서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어설픈 구명운동이 혹여 그들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곤 한다.
박정희 독재 비판하면 빨갱이? 이상한 낙인 찍기 16.3.17 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0> 유신 체제, 여섯 번째 마당
프레시안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 체제를 다룰 때 빠지지 않는 사안이다. 그만큼 유신 체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표할 만한 사건으로 꼽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두 사건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두 사건은 발생 당시에도 사람들 머릿속에 커다란 사건으로 각인된 측면이 강한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서중석 : 민청학련 사건이 실제로 그렇게 큰 규모의 활동이 있었던 사건이냐, 학생들이 시위를 정말 그렇게 크게 벌인 사건이냐고 할 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도 유신 정권은 긴급 조치 1호보다 훨씬 엄혹한 긴급 조치 4호를 발동하고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국민들한테 겁을 주는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 1204명을 연행, 조사했다고 돼 있다. 그 당시까지 이게 최대 인원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는데,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중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해서 180명을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이 결국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것을 크게 키운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것을 여기에 곁들여서 마치 공산주의 세력이 박정희 정권을 뒤집어엎으려 한 것 같은 분위기를 더욱더 강하게 풍기는 발표를 했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을 기소하고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같은 사람들도 구속했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천주교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고, 변론하는 변호사까지 구속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의외로 굉장히 크게 주목받게 됐다. 심지어 도피 중인 학생들을 붙잡겠다며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 처음에는 현상금이 50만 원이었는데, 그걸 100만 원으로 올리고 다시 200만 원으로 올리더니 나중에는 최고 300만 원까지 올렸다. (당시 간첩 신고 포상금은 30만 원 선이었다. 유신 정권이 민청학련 사건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현상금 문제에서도 느낄 수 있다. '편집자') 그와 함께 서울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이런 것들도 사람들한테 굉장한 위압감, 두려움을 줬다.
10·2 시위 후 복학생을 중심으로 연결된 유신 반대 모임, 민청학련
프레시안 : 민청학련 사건부터 하나씩 짚어봤으면 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당시 무엇을 지향하며 활동에 돌입한 것인가.
서중석 : 학생 운동으로 유신 독재 반대 활동을 크게 해보려고 했다고는 하더라도, 조금 전 얘기한 것처럼 이 사건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중심은 군대 갔다 온 복학생들이었다. 1971년 위수령 사태 때 학교에서 잘려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유인태 같은 경우도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복학생들이 중심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1973년 10월 2일 문리대 시위라든가 그 이후의 학생들 움직임에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고 하면서 후배들, 즉 10·2 문리대 시위나 그 직후 이어진 법대와 상대 시위를 이끌었던 사람들하고 연결을 지었고 그러면서 11월 하순부터 여러 통로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울대 내에 있는 각 단과대를 연결시키고, 서울에 있는 주요 대학을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지방에 있는 여러 대학을 연결시켰는데 여기서 복학생들이 유리한 점이 있었다. 뭐냐 하면 복학생들은 1960년대 3선 개헌 반대 운동, 1967년 6·8 부정 선거 반대 운동, 1971년 교련 반대 운동 등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했던 선배들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서울이나 지방에 있는 후배들하고 연결을 짓고, 그렇게 서울과 지방의 여러 대학을 연결해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을 좀 더 성과 있게, 큰 규모로 같이해보자는 게 기본 취지였다.
각 대학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 있던 선배들과 연계하는 활동도 했다. 당시 원주 가톨릭 쪽에는 운동권 선배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등도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과거에 탄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활동한 분들이 그쪽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71년에는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부정부패 추방 운동을 원주에서 크게 벌이지 않았나. 그러면서 지 주교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지 주교를 중심으로 해서 원주 쪽에 있던 운동권 선배들과 연결을 지어서 같이 싸우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그쪽과도 연결하는 활동을 했다. 또 적극적으로 반유신 운동을 벌이고 있던 개신교 쪽하고도 연결을 지었고, 정보도 얻고 도움도 받을 겸 언론계에 있는 선배들을 만나는 활동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유인태, 이철이 일본인 2명도 만나게 됐다. 또 지방에서 경북대가 1973년에도 유신 반대 시위를 적극적으로 벌였는데, 이때도 여정남이 경북대 선배로 서울에 올라와서 유인태 등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4년 3월 초쯤 돼서는 일을 새로 분담하고 이제 유신 반대 시위를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그렇지만 조직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프레시안 : 왜 그런 합의를 한 것인가.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명칭을 가지면 반드시 박정희 정권이 반국가 단체로 몰아세우고 국가보안법 같은 걸 적용해 탄압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봤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게 되는데, 그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1974년 4월 2~3일경에 유인물을 뿌려야 했기 때문이다. 유령 단체도 아닌데, 아무런 이름이 없는 유인물을 뿌리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유인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안 되겠다. 뭐 하나 이름을 붙이자', 이렇게 해가지고 현장에 있던 몇 사람이 중심이 돼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유명한 민청학련 사건의 이름이 돼버린 것이다.
명칭 문제뿐만 아니라 '화염병 같은 것도 사용하지 말자', 이런 합의도 했다. 예컨대 1971년에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같은 사람들이 걸려든 서울대생 내란 예비 음모 사건만 해도 그 내용을 보면 별것 아닌데도 박정희 정권에 맞서 뭔가 꼼지락꼼지락한다고 해서 당국이 큰 사건으로 만들어냈던 것 아닌가. 그런 사례를 보더라도, 만약 화염병 같은 걸 만들면 유신 정권에서 틀림없이 학생 시위를 폭동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나중에 이철 등 몇 사람이 '화염병은 어떻게 만드나' 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만들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정권에서 엄청나게 트집을 잡고 그랬다.
하여튼 정부 당국은 학생들을 감시하면서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한동안 체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걸 느끼면서 학생들도 '우리를 키워서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이런 정도는 짐작을 했다. 그런 속에서 언론계 선배뿐만 아니라 과거에 운동권에서 일했던 여러 선배들도 만났다. 예컨대 조영래 변호사(<전태일 평전> 저자)는 학생들을 원주 쪽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고, 이현배 같은 사람은 사회 저명인사들과 연결해주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학생 운동권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다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규합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한 일이 뭐가 있느냐,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집권기 한국 사회 모순을 정면 비판한 민중·민족·민주 선언
프레시안 : 실제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실질적으로 한 일을 간단간단히 살펴보자. 학생들은 먼저 1974년 3월 11일 한신대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그다음에 경북대에서 더 크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한신대에서 투쟁이 성공하지 못했다. 경북대의 경우도 3월 21일 200명 정도가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제대로 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투쟁하는 학생들은 긴급 조치 같은 걸 무시했지만, 일반 학생이나 시민들은 투쟁 대열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워낙 얼어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런 상황에서 3월 28일 서강대에서 유신 헌법 및 긴급 조치 철폐를 위한 성토대회를 열었는데, 바로 검거 선풍이 불었다. 이 운동을 이끌어간 중심 세력이 대개 서울대 문리대였는데, 4월 1일과 2일에는 여기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연세대에서는 4월 1일 대강당에서 채플이 있을 때 송무호가 선언문을 읽다가 연행됐다.
사실 이때는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나도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서울대 문리대조차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한테 '이것 못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해봤자 크게 당하기만 하지, 일반 학생들이 가담하기가 아주 어렵게 돼 있다'고 그랬는데, 그런 의견이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소통이 어려운 상태에서 4월 3일, 약속된 그날 일제히 들고일어나자고 돼버린 것이다.
4월 3일 그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같은 데에서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서울대의 경우 4·19탑 앞에서 100여 명의 문리대 학생이 유인물을 살포했고 의대생들은 학교 바깥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경찰이 워낙 강하게 밀어붙여서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여서 성토대회를 하고 선언문도 낭독했지만 곧 해산당했다. 이화여대생 40여 명이 이날 저녁 청계천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이것도 바로 진압됐다. 그러면서 시위를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바로 체포됐다.
오히려 이 4·3 시위와 관련해서는 그 당시에 나온 '민중·민족·민주 선언' 그리고 '민중의 소리'라는 두 가지 문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유인물이 더 나돌았는데 그중에서 이 두 문건이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이 시위 때가 아니라 나중이긴 하지만, 읽히고 그랬다.
프레시안 : 두 문건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4·3 시위 당시 나온 민중 담론이 1980년대를 풍미하는 민중 담론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1980년대 운동을 민족·민중·민주 운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그러한 민족·민중·민주가 1974년 4·3 시위 때 기본적으로 제시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4·3 시위 당시 제시된 민중은 1980년대 중반 '민중의 국가', '민중 민주주의' 식으로 쓰일 때와 같은 강한 의미의 민중은 아니었다. '지금 민중 수탈 체제, 외국 독점 자본에 예속돼 있고 매판 특권 세력이 강성하다. 그런 것들을 지켜주는 것이 폭력 정치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민중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4·3 시위 때는 이런 인식이 더 강했다. 그리고 1980년대와 같이 반미, 민족 자주 입장을 강하게 천명했다기보다는 외국 독점 자본, 매판 특권 세력 등을 비판하면서 이 땅에 지금 신식민주의자들이 밀어닥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서막을 여는 수준에 머물렀지, 그것보다 심화된 내용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족·민중·민주 중에서 민주는 유신 체제가 워낙 그것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한 숭고한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살라 바치려 한다", 이렇게 맺음을 했다. 이 시기에는 대일 경제 예속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고 빈익빈 부익부 문제도 아주 심각했다. 이건 나중에 1979년 부마항쟁은 물론 1980년대 초중반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민중·민족·민주 선언은 그 문제를 명확히 지적했고 그런 점에서 당시 사회를 잘 반영하는 면을 보여줬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선언문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유신 독재 반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은 4월 3일 밤 긴급 조치 4호라는 걸 발동했다. 긴급 조치 4호는 민청학련 및 그와 연관된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것에 가입하거나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한테 편의를 제공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학생들의 투쟁 같은 것을 방송, 보도, 출판 등을 통해 타인에게 알리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면서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 조치를 위반하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배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었다.
이처럼 긴급 조치 4호는 사형, 무기 징역까지 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긴급 조치 1호(최고 형량 징역 15년)보다 형량이 훨씬 무거웠다. 또한 긴급 조치 4호를 어긴 학생이 나오면 그 학교까지 폐쇄하겠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면 과연 그런 내용의 긴급 조치 4호까지 선포할 만한 상황이었느냐. 4월 3일 시위에 나선 건 몇 개 대학에서 몇 백 명의 학생뿐이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도 100여 명밖에 안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정도의 소수 학생들이 움직였을 뿐이고, 그나마 시위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경찰에 의해 바로 제압돼버렸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한 것이다. 아무리 유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것도 참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그것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한 그날 발표한 '긴급 조치 제4호 선포를 즈음한 대통령 특별 담화', 바로 그것이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눈길을 끌었다는 것인가.
서중석 : 이건 긴급 조치 4호를 왜 선포했는가를 얘기하는 담화였다. 기니까 그중 일부만 살펴보자. 이 담화에서 박정희는 "이른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 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 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들은) 민청학련이라는 지하 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인민 혁명의 수행을 기도하였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걸 발본색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정말 이상하다. 이 담화문이 나왔을 때 주동 학생들은 거의 다 안 잡힌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잡힌 사람도 중앙정보부에서 아무리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때였다. 한마디로,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다면, 민청학련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고 뭘 하려고 했는가 등에 대해 그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게 전혀 없는 시점에 특별 담화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특별 담화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이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적화 통일을 위한 "통일 전선"을 만들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것도 "초기 단계"라고까지 딱 얘기했다.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게 전혀 없는 때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초기 단계적 지하 조직"이라고까지 낙인을 찍어놨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또 "인민 혁명 수행", 이 말을 두 번이나 썼다. 나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생긴다는 점에서 더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도대체 학생들이 무슨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활동을 했느냐, 이 말이다. 학생들이 실제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앞에서 쭉 설명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반국가적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도 뭘 가리키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사건이 터지기 전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체포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당시 "이상하다. 우리를 왜 안 잡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그랬다. 그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 무렵 중앙정보부는 대학 내에 프락치를 많이 심어놓았다. 서울대 문리대 같은 경우 더더군다나 많이 심어놓은 상태였다. 학생회장까지 중앙정보부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나중에 신문에 나고 그러지 않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락치를 비롯한 그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건 그리 자세한 게 아니었다. '지금 몇 사람의 선후배가 만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정도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의 발표 내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던 사람은 곽성문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곽 전 의원은 정치권의 대표적인 친박 인사 중 한 명이다. 2008년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에도 "박근혜 지킴이 곽성문"이라는 문구를 새긴 명함을 돌렸을 정도다. 중앙정보부 프락치 의혹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4년 곽 전 의원이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장으로 내정됐을 때 크게 논란이 됐다. 당시 민청학련계승사업회는 "중앙정보부 프락치 곽성문 씨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내정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야당에서도 "곽성문 씨가 과거 중앙정보부 프락치였으며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다"며 내정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더해 야당은 "곽성문 씨가 중앙정보부 추천으로 MBC에 특채돼 승승장구했다는 증언도 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국회의원이던 2005년 '맥주병 투척 사건'을 일으킨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곽 전 의원은 프락치 의혹 등을 부인했고,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코바코 사장으로 취임했다. '편집자')
이철이건 유인태건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3번씩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누가 공산주의자로 보느냐, 이 말이다. 있을 수가 없는 얘기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수사를 받은 학생 중 어느 누구도 여기에 해당될 만한, 공산주의자로 얘기될 만한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이렇게 발표했다는 건 바로 '내 말에 맞춰서 수사해라. 내가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까지 찍어줬으니까 여기에 맞춰서 중앙정보부는 작품을 만들어라', 이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안 갖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을 했다고 특별 담화문에 두 번이나 썼다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째서 그런 말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과 관련해 이해가 안 되는 게 또 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대통령 특별 담화가 나온 다음 날(4월 4일) 청와대에서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서 박정희가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혹 어떤 사람들은 이번 긴급 조치 4호가 일반적인 학원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편법인 것처럼 오해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라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위 통일 전선이라는 걸 봐온 사람이라면 그걸 다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 조치는 사회 각계각층, 학원 곳곳에 들어온 공산주의 분자들을 초기 단계에 근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일보> 1면에 나온 나용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떻게 해서 그런 걸 알 수 있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도 이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박정희가 한 얘기에는 더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뭐냐 하면 정부·여당 연석회의가 열리면, '지금 학생들이나 뭔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중앙정보부장 또는 관계자가 보고하라'고 하고 그 보고를 들으면서 대통령이나 정부·여당 고위층이 질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일반적인 것인데, 이때는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쭉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고 있었다. 이것도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어라', 이런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박정희는 자신이 과거 남로당 프락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본다. 이 시기 박정희가 보인 모습을 살펴보면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이게 약발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크게 뭔가 하고 있다는 식으로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것을 엮어가려 했다는 판단이 들게끔 돼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저항 세력의 상당수마저 혼란에 빠뜨린 유신 정권의 색깔 공세
프레시안 : 그런 식으로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색깔 공세를 펼 경우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적어도 그 시점에는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정권 차원에서 정보를 통제한 사회였기 때문에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긴급 조치 제4호 선포를 즈음한 대통령 특별 담화'나 4월 4일 연석회의에서 박정희가 발언한 것에는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담겨 있었다. 그 당시 잡혀온 학생들, 재야인사, 그리고 특히 개신교 쪽이 더 황당했다고 그러는데 당국에서 이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몰랐지? 사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너희 몰래 다 한 거야. 그자들은 본래 위장해서 활동하는 자들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막 한 것이다. 사실이 전혀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지어낸 것이다.
당국은 그런 식으로 작업해서 학생들, 그중에는 이른바 주동자급들도 있었는데 그런 최고 주동자들조차도 '누군가 배후가 있었던 건가?' 하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그러면 누가 공산주의자이지?', 이런 식으로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신에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말 그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개신교 목회자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순수했겠나.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당신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국에서 분위기를 조성했을 때 그런 순수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나. 이처럼 당국의 그런 행위는 일반 서민뿐만 아니라 잡혀온 사람들 중 상당수에게도 처음에는 '이거 뭔가 이상한데? 우리가 뭔가 잘못됐나 보다', 이런 식의 사고까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종의 격리 조치를 취하면서 서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진 신고하라. 그러면 죄가 없는 걸로 해주겠다'고 한 점도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발언은 운동권이 분열하게 하고 유신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서로 의심하게 하는 면에서도 효과를 거뒀다. 그 점에서 어떻게 보면 탁월하다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건을 만들라고 할 수 있느냐고 볼 수도 있다.
하여튼 이때 유신 정권은 국민들에게도 '아 이런 무시무시한 민청학련이 다 있네' 하면서 공포, 두려움에 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생, 종교인, 재야인사 같은 사람들도 그런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전체 내용을 잘 아는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떨었다. 그때 감옥소 안에서 나도 그런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나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비화됐다. 그러면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상위 조직으로 또 조작되면서 나중에 8명이 처형당하기까지 하는 정말 끔찍한, 문명 국가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God Bless The Child - Billie Hol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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