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자 어머니 조화순
“책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배웠어요. 그렇게 세상과 연대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인천에서 산업선교 활동을 하며 동일방직 노조 사건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 조화순 목사. 그는 이 땅의 힘 없고 가난한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여공(女工)들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찾아줄 수 있을까, 오직 그 고민으로 그들의 언니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살기 원했던 조화순 목사
●선생님의 어린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셨나요
-저희 집은 말(馬)을 키웠어요. 아버지께서 원래는 마부셨는데 주인한테 인정을 받아서 말을 사기 시작했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당시 집에 말이 열 두 필 있었어요. 요새 말로 얘기하면 운수업이고, 트럭 열 두 대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진 않았어요. 오히려 부유한 편이었죠. 항상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상고머리를 하고 유치원을 다녔으니까요. 제 나이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드물거든요. 유복한 가정 형편 덕에 노래, 무용, 연극 못하는 게 없었어요. 덕분에 성격도 활달했고 구김살 없이 자랐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착하고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대부분 제가 기독교 전통이 강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줄 알지만, 아버지께서는 처음에는 교회를 안 다니셨어요. 언니가 아팠는데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셨죠.
그런데, 교회를 다닌 그 순간부터 술과 담배를 끊으셨어요.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무식해서 아무 것도 모르지만, 성경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써 있더라. 그 말씀을 너희들을 위한 교육의 목표로 삼겠다.” 저희 육 남매는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께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은 기억이 없어요.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하는 것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조금 특별했던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우리 식구끼리만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가난한 사람, 거지들, 동네 사람들까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집에 와서 밥을 같이 먹었거든요. 제가 “엄마, 우리 식구끼리 한 번만 밥 먹어 보자.” 이렇게 얘기 할 정도로 객식구가 많았어요.
그리고, 집안 분위기가 좋으니 누구든지 우리 집에만 오면 돌아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부모님께서도 착하시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지를 못하신 거죠.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집에 냄새 나는 사람들도 많고 가진 것을 나눠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철이 들면서 ‘내가 복이 정말 많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이야 말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상록수가 목서ㅏ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그 책을 읽어셨ㄱㅎ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읽었는데, 읽고 눈물을 참 많이 흘린 기억이 나요.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가난한 걸까, 왜 우리는 일본에게 지배를 받으며 착취를 당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을 보며 ‘농민들을 계몽하는 것이 채영신이 민족을 사랑한 방법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됐어요. 세상 물정에 그리 밝지 못했던 사춘기 소녀의 감상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당시 저에게는 큰 사건이었던 거죠. 그래서 ‘아,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 농촌에 가서 농촌 계몽운동을 해야겠다.’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는데, 친구들과 모여 앉아 장래 희망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활달한 성격이었으니 제가 주도를 한 거죠.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저와 비슷하게 농촌 계몽운동에 대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 우리는 정말 진지했거든요. “농촌을 위해 너는 의사가 되고, 너는 교육자가 되라.”는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농촌을 그야말로 지상천국으로 만들자고 했죠. 그런 주제로 계속해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어요. 그렇게 아주 집요하게 꿈을 꾼 거죠.
●교편을 잡으신 것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서였나요 ?
내리교회 유년부 교사 시절의 조화순 목사.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인천 내리교회. 가족들과 함께 어려서부터 내리교회를 다닌 조 목사는 중ㆍ고등부 시절 부회장과 전도부장을 도맡으며 친구들과 함께 농촌계몽에 대한 꿈을 꾸었다. 유년부 교사 시절 교회 앞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이가 조화순 목사다.
-그 꿈의 일환인 거죠. 굉장히 부유하게 자랐는데 전쟁을 겪으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전쟁 통에 키우던 말들이 모두 죽었거든요. 집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팔아가며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에 갈 형편이 못 되었어요. 그때 저는 아버지를 따라 거리에 장사를 하러 다녔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노점상이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누가 알아 볼까봐 앞만 간신히 볼 정도로 얼굴을 수건으로 다 가리고 아버지 옆에 앉아 참외도 팔고, 속옷도 팔고 그랬어요.
그러다 제 인생에 대해서도 뭔가 대책은 세워야겠고, 형편이 안 되니 교사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준교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거든요. 그래서 저는 농촌에 내려가서 채영신처럼 살자고 의기투합한 친구들이랑 같이 시험을 봤어요. 재미있는 건 당시 저와 같이 시험 본 친구들이 모두 합격을 해서 용인군 남사면에 있는 남사초등학교에 함께 발령을 받은 거예요. 저는 가자마자 1학년 담임을 맡았어요. 원래 1학년 담임은 경험이 많은 선생님들이 맡는데, 제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온 데다 교회 주일학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제가 저학년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을 했고, 차차 가정방문을 시작했죠. 그러면서 농촌의 문제점들을 알게 됐어요. 가난도 문제지만 어른들이 매일같이 술과 노름에 빠져 지내더라고요. 노름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집들, 술에 취해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들이 대다수였어요.
거기서 제가 깨달은 게 ‘가난하다는 건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다. 정신을 차리도록 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걸 ‘정신혁명’이라고 했어요. 정신이 올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리 가르치려고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가 내린 결론은 신앙의 힘이었어요. 예수를 바로 믿어서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삼 년 동안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생활은 어떠셨ㅇ어요
-신학은 거의 고학을 했다고 봐야 돼요. 막상 신학교에 입학은 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가정교사도 하고 보모로도 일하면서 정말 어렵게 어렵게 학교 생활을 했어요.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지금처럼 전철이 많을 때도 아니어서 통학하는 데도 고생을 많이 했죠. 등록금 마련도 어려워서 휴학도 하고, 또 친구들이 조금씩 도와줘서 6년 만에 겨우 졸업을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남들 다 있는 남자친구도 한 명 없었으니, 정말 고생한 기억뿐이에요.
●노동현장과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셨늕 궁금합니다
달월교회 청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조 목사다. 신학교 졸업 후 농촌 교회를 찾아 다니던 조화순 목사는 두 번째 사역지로 시흥의 달월교회를 선택했다. 시골의 작은 교회였던 달월교회는 조 목사가 부임한 이후 스무 명도 되지 않던 청년들이 백 명이 넘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에 두 번째 파송지인 시흥의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때였어요. 농촌 목회가 꿈이었기 때문에 산으로, 들로 다니며 심방을 열심히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외국인이 저를 찾아왔어요. ‘조지 오글(George Ogle, 한국명 오명걸, 1929~)’이라고 하는 미국인 목사였어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찾아와서는 대뜸 산업선교회에서 함께 일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때 저는 ‘산업선교’라는 말도 몰랐고, 게다가 전혀 안면도 없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교회를 그만두고 가자고 하니 황당할 뿐이었죠.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어요. 그 당시 심방도 열심히 하고 청년 목회에도 열정을 쏟고 있던 때였고, 또 스무 명도 되지 않던 청년들이 제가 부임한 후로 백 명 넘게 부흥을 했을 때였거든요. 그러니 오글 목사의 제안이 당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요.
그런데 오글 목사가 사흘을 끈질기게 찾아 왔어요. 인천 지역에는 여자 노동자의 비중이 큰데 여자 목회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교를 하려면 공장에 들어가서 6개월 동안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만 나오면 하겠다고 했던 사람도 안 온다는 거였어요. 그 이야기를 네 번째 찾아왔을 때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저한테는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제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저는 화장실 청소도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에요. 그게 신앙인이 가져야 할 기본이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공장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오글 목사가 당부한 게 있었어요. “노동을 배운다고 생각해라. 선교를 하러 간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려라.” 그게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런 저한테 오글 목사는 “어느 사회든 질서가 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초등학교도 안 나온 무식한 노동자들이지만, 그 사회에도 질서가 있으니 노동자 사회의 질서를 배워라.”라고 말하는 거예요. 속으로 ‘희한한 목사 다 봤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네.’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순종하는 척 했지만,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하고 속으로 비웃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노동 현장에 간다고 하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반대가 심했어요. 한창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물러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한 거죠.
●그렇게 직접 노동자가 되어 보니 어떠셨나요
동일방직 노동자 소모임에서. 조 목사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교회라고 말한다. 그는 평소의 신념대로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을 교회로 끌어모으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윗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조화순 목사다.
-부잣집 딸로 자라서 남한테 ‘야!’, ‘자!’하는 소리 한 번 들어본 경험이 없었어요. 목회를 할 때도 떠받듦을 받는 데 익숙해 있었죠. 그런데 공장 생활은 첫날부터 고생이었어요. 부서 배치를 받아 일을 하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 넷이었어요. 그래서 옆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한테 귓속말로 “몇 살이야?”하고 나이를 물어봤어요. 저는 분명 아주 조용하게 물어봤는데, 그 순간 어디서 “저 여자!”하고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치는 거예요. “저 여자 오늘 처음 왔는데 왜 이렇게 건방지게 말이 많아!” 제 일생에 사십 명 앞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당해 본 경험이 없었어요. 그땐 정말 죽고 싶었어요. 너무 창피해서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내일 당장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글 목사님이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려라’고 한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꾹 참고 오전 작업을 마쳤습니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됐는데, 서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오전에 저한테 소리쳤던 반장이 또 저한테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는 거예요. 똑바로 서서 일을 해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업대에 기대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게 눈에 거슬렸나 봐요. 저한테 다가와서는 어깻죽지를 흔들면서 “근무 태도가 틀려먹었어!”하고 소리치는데 정말 너무 창피한 거예요. 그래도 초등학교 교사도 하고, 신학교를 나와 담임 목사까지 해서 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어린 처녀들 앞에서 두 번이나 망신을 당한 거죠. 좋은 말로 타이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소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린 여성 노동자들 앞에서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반장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그런데 별안간에 마음 속에서 “네가 목사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 다음엔 “너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설교하면서, 네가 목사냐?”하더라고요. 신앙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은혜를 받은 거죠. 순간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받으면서도 사랑으로 다 용서했는데, 제가 잘못해서 지적 받은 걸 갖고 증오심을 품었다는 걸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성숙하려면, 목회자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들면서 눈물, 콧물이 비 오듯 흐르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였어요. 마음 속으로 “용서 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회개 기도를 했어요. 그 이후로는 오글 목사의 말대로 노동자들을 통해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6개월 동안 노동자로서의 경험을 하고 나서는 노동자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산업전도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죠. 공장에 가기 전에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게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동안 ‘기다림’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하고, 화도 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되레 제가 배우고 있더라고요. 기다리면 되는 건데 제가 그러지를 못했던 거죠. 씨만 뿌리고 기다리면 자라고, 열매 맺는 건 자연스레 따라 오는 건데,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하고 그랬던 거예요. 노동자들이 저한테 이렇게 많은 깨달음과 가르침을 줄 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당ㅅ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어땠나요
-당시 제가 받았던 일당이 120원이었어요. 다른 여성 노동자들은 저보다 덜 받았고요. 그 사람들은 거의 매일 새우젓만 놓고 밥을 먹든지, 아니면 맛나니 간장에 비벼 먹고, 제일 잘 먹는 날이 김치를 먹는 날이었어요. 영양실조가 안 걸릴 수가 없는 거죠.
한 번은 가정방문을 했는데, 저는 그때까지 모든 방이 네모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성 노동자들 집을 가봤더니, 삼각형 방도 있고 창고 같은 방도 있고 별별 형태의 방이 다 있어요. 집 구석에 조그만 틈이 있으면 엉터리로 방을 만들어 놓고는 세를 주고 있더라고요. 그런 방에 네 사람이 살고 있는 거예요. 네 명이 한꺼번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안되니까 교대로 잠을 자는데, 환경이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이야기가 나왔죠. 그래서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노동문제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노동자 의식을 갖게 하고,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라고 했어요. 그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화되기 시작한 거죠.
여성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조합에 참여해서 노조를 이끌어 나가다 보니 최초의 여성 지부장과 여성으로만 구성된 노동조합 집행부가 만들어졌어요. 그 당시엔 어떤 단체의 일을 총괄하는 직분을 여자가 갖는다는 게 쉽지 않았고 또 드문 일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하나의 사건이 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거죠.
●목사님이 계셨던 동일방직은 ‘동읿장직 노조사건으로 유명한데, 그때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동일방직 노조는 1972년 5월 국내 최초로 어용의 남성 후보를 꺾고, 여성이 노조 지부장으로 선출된 작업장이다. 민주 노조가 되자 회사는 노조 집행부를 회사 측에 유리하도록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1976년 7월, 회사 측과 경찰 측의 노조 탄압에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 시위로 맞섰고, 회사 측의 ‘똥물 투척 사건’까지 불러오게 된다.
단식 농성을 벌이던 조화순 목사의 오른쪽으로 위로 차 방문한 윤보선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 쓴 사건이에요. 그게 알려진 ‘분뇨 사건’인 거죠. 동일방직 대의원회의를 앞두고 여성 지부장이 연행돼서 새 지부장 투표가 있던 날이였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비밀리에 대의원대회를 열어서 회사 측 사람을 지부장으로 뽑았어요. 당연히 공장에서는 농성이 벌어졌고, 회사 측에서는 공권력을 동원하기 시작했어요.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 저항까지 할 정도였으니 정말 대단했죠. 그럼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끝내 어용 지부장을 퇴진시켰고, 새로운 여성 지부장을 선출했어요. 그 후로도 회사 측의 회유와 탄압은 계속됐죠.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직원들이 새벽에 깡통에다 똥물을 담아와서 노조 사무실을 지키던 여성 노동자들한테 뿌렸어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여자 노동자들을 뒤쫓아가서까지 뿌렸으니까요. 투표를 무효화하려고 그런 거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어요. 단식 농성이 이어지자 교계 지도자들, 민주화 인사들,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찾아왔고, 정부와 협상을 벌여 문제를 해결하고 농성을 풀게 된 사건이었지요.
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동일방직 사건이에요. 십 대, 이십 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똥물을 뒤집어 쓰는 일을 지금 세상에서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어요. 문병을 갔더니 동료도 못 알아 볼 정도였어요. 저는 그때처럼 폭력을 저주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폭행과 강제 연행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죠. 단식 농성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은 농성이 끝나고 회사에 출근했을 때 해고 통보를 받았어요. 해고된 여성 노동자들은 일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다른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돼버렸어요.
●목사님께서도 그러한 과정에서 두 차례나 옥고를 경험하셨습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었던 탓에 면회도 허용되지 않은 채 독방을 썼다는 조화순 목사. 그 후로도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렀지만 조 목사는 ‘노동자를 선동했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고 했다.
한창 노동 현장에서 활동을 하던 때였어요. 어느 날 형사들이 찾아와 저를 연행해갔죠. 저는 노동자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고, 결국 불법 노동운동 혐의로 구속이 됐어요. 처음에는 노동자를 선동했다는 말이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좋더라고요.
조사가 끝난 뒤,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졌고, 거기서 독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갇혀 있던 독방의 감방 문에는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어요. 반공법에 걸리면 빨간 딱지, 사상범은 노란 딱지를 붙였거든요. 노란 딱지가 붙어서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석 달 동안 독방에만 갇혀 있었죠. 면회는 되지 않았지만 영치금이나 옷가지는 받을 수 있었는데, 인천 산업선교회에서도 옥바라지는 제가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나 봐요. 영치금도 다른 사람들은 몇 천원씩 들어오는데 저는 매번 오백 원만 들어오는 거에요.
그렇게 석 달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 날 교도관이 와서 보따리를 챙기라고 하는 겁니다. 알고 보니 국내외 교회 기관 관계자들이 정부에 진정서를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효과가 컸나 봐요. 특히, 외국의 교회 관련 단체들에서 보내온 진정서는 제가 3개월 만에 나오는데 큰 힘이 되었어요.
물론, 그 후로 또 구속된 적이 있었죠. 부산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동일방직 사태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하다 구속이 됐고요. 1년 만에 풀려 나와 보니 5ㆍ18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때도 운동을 하다 안기부로 잡혀들어갔는데 75일 만에 풀려났어요.
제가 감옥에 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제가 기도원에 가 있는 줄 알고 계셨어요. 동생들이 차마 사실대로 말을 못했던 거죠. 부모님께서 “기도원 간 애가 왜 이렇게 안 온다니?”하시면 “이번에는 좀 오래 있겠대요.”하고 둘러대곤 했대요. 사실대로 아시게 되면 쓰러지실 분들이거든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사실대로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막 우시면서 “엄마라는 사람이 딸이 그런 일을 겪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늘 죄송하죠.
● 산업선교회는 언제 떠나셨어요 그 뒤로 어떤 활동에 매진하셨나요
-1983년쯤일 거예요. 산업선교회 총무직을 다른 목사에게 인계하고 노동 현장을 떠나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이제는 제가 지금까지 해온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 방향이 정립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됐다고 생각한 거죠.
노동 현장에서의 18년을 정리하고, 달월교회로 다시 돌아갈 때 교인들이 제가 오는 것을 무척 반대했다고 해요. ‘운동권 목사’라는 인식 때문이었죠. 그런데, 초기 달월교회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이 다른 교인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돌아간 자리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숱하게 다짐했죠. 정월 초하루면 한복을 입고 마을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고,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마을 주민들과 체육대회도 열었어요. 또 교회를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농민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먼저 찾아서 하기 시작하니 마을 주민들이 저를, 그리고 교회를 달리 보기 시작했어요. 저를 ‘빨갱이 목사’라고 손가락질 하던 게 6개월도 안 가더라고요. 오히려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변했죠. 나중에는 “우리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귀한 목사님을 얻었을까?”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어요. 먼저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것이 다 돌아오더라고요.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저에게는 오직 이 신념 하나뿐이었어요.
●목사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은 누구신지 궁금합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조지 오글 목사는 1974년 인혁당 사건 고문 조작설을 제기했다가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오글 목사가 강제 추방 명령을 받은 후, 경수 도시산업선교회 회원들과 오글 목사 가족이 모여 항의 예배를 드릴 때의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지 오글 목사의 부인, 맨 오른쪽이 조화순 목사다.
-저를 산업선교회로 인도하고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게 해준 조지 오글 목사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오글 목사님은 말로만 ‘예수’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늘 김치와 깍두기 반찬으로만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분이셨어요. 그래서 산업선교회 사람들이랑, 노동자들이랑 같이 먹는 거에요. 옷도 도저히 꿰맬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었어요. 오글 목사님의 부인께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사시는 거죠.
인혁당 사건 때도 국내에서 아무도 그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오글 목사님은 관계자와 가족들로부터 사건의 억울함에 대해 듣고 자료를 수집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뒤, 이를 폭로하고 구명 운동을 벌이셨어요. 그 때문에 목사님은 1974년도에 추방됐고, 인혁당 관계자들은 결국 억울하게 처형되었고요. 정말로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에요.
제가 오글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뵈려고 재작년에 미국을 찾아 갔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컨테이너 두 개를 연결한 집에 살고 계시더라고요.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고, 자신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요. 너무 힘들게 지내시니까 한 교회에서 성금을 걷어서 드리려고 찾아 갔더니 한사코 거절하셨대요. 그리고는 또 찾아올까봐 다음 날 컨테이너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셨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분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어요. 처음 공장에 출근해 모욕을 당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해주신 분이세요.
●치열한 삶을 사셨습니다. 지난 삶에 후회는 없으신가요
-제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생을 살았어요. 중학교 때 [상록수]를 읽고 감동을 받아 결심한, 그 결심 그대로 살아 왔거든요. 저는 생각을 오래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한 번 옳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격 때문에 농촌 계몽운동을 꿈꿀 수 있었고, 노동자로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을 책이 아니라 몸으로 알아들은 것 같아요. 몸으로 이해하고 깨닫고 감동을 받은 거죠. 그렇게 세상과 연대하고,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어요. 돌이켜보아도 후회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지금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거에요.
●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인권’이란 무엇인가요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여교역자회 현판식, 조화순 목사는 1973년 여성 목사들과 감리회 전국여교역자회를 조직하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여교역자회는 결혼한 여자 목사는 담임을 계속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여성을 차별하는 교회 규정을 철폐하고 남성 중심의 교회 문화를 바꾸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87년 여성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민주화와 자주화,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 단체들이 연대하여 설립한 기구다. 조화순 목사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이 기구의 대표를 지냈다. 조 목사는 “여성성이란 함께 안아주고 끌어주는 따뜻한 마음과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이 이 땅에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차별 없이 주신 권리와 생명이지 사람이 준 게 아니거든요. 인간이 소유하려고 하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좌지우지하면 안돼요. 그래서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하는 거죠.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제가 강원도 봉평에 사는데, 노동 현장을 떠나 다시 교회로 돌아갔고, 십 년 넘게 사역을 하면서 제 운동의 종착점에 대해 깊이 고민했어요. 그때 땅의 문제, 환경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생각하게 됐죠. ‘아, 지나온 시간을 모두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게 어릴 적 [상록수]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제 꿈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노동 현장, 목회 현장을 떠나 여기 온 지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한 번은 마당에 나무를 옮겨 심다가 잘못해서 가지를 하나 부러뜨렸어요. 그 순간 제 팔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아픈 거예요. 소리를 지를 정도로요. 가지가 꺾인 나무의 아픔이 저한테도 전해진 것 같았어요. ‘나무도 하나의 생명이고 인격체구나.’하고 깨달은 거죠. 사람의 생명만 귀한 게 아니고 모든 생명은 다 귀한 거예요. 요즘은 그렇게 자연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노동 운동, 목회 활동을 하며 평등을 주장했는데, 이제 자연도 거기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어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과 마찬가지라는 걸요.
● 젊은이들에게 조언이나 당부를 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남기시겠어요
우리가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의심하고,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며 점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조화순 목사.
조 목사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선물.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무엇이 나를 여기에 있게 했는가’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매스컴에 의해, 사회적 상황에 의해, 가족에 의해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상황들이 만들어진 거지, 정말 스스로 생각하는 건 많지 않을 거에요. 그런데 이것이 마치 내 생각과 결정인 줄 착각하고 사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오늘은 제대로 살았나?’, ‘오늘 한 말은 제대로 한 건가?’, ‘잘못된 건 없나?’하고 항상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할 줄 알아야 해요. 저 역시 젊었을 때는 잘 몰랐던 부분이기도 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느껴요. 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삶을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 지금 제가 마주한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참된 목사의 모습인가, 어떤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일까?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려고 했던 조화순 목사.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하다 간 목사라고 기억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일방직 소모임 회원들
여성 노동자로 위장 취업을 하고 6개월의 노동자 생활에 들어간 조화순 목사. 그는 노동자로 생활하는 동안 동일방직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 뜨개질, 꽃꽂이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30여 개의 모임을 만들어낼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다. 사진은 그때의 소모임 회원들을 찍은 것으로 조 목사는 여기에 없다. 그러나 조화순 목사가 관여한 동일방직 소모임 활동은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을 신장시킨 노동운동의 모범 사례로 평가됐다.
아세아 여성 남북평화 세미나
1992년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란 주제로 평양에서 열린 ‘아세아 여성 남북평화 세미나’에 참석했을 당시의 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조화순 목사다. 첫째 줄은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북한 여성 대표인 고(故) 여연구 씨, 고(故) 이우정 박사, 김일성 주석, 오른쪽은 고(故) 이태영 박사, 이효재 전 교수다.
달월교회 담임 목사 은퇴를 결정한 뒤, 조 목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강원도 봉평의 태기산 자락에 거처를 잡고는 이곳에 흙집을 짓고 십년 넘게 살고 있다. 오랜 동안 노동 현장과 농촌에 머물렀던 조 목사의 시선은 이제 환경문제, 생명을 다루는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생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조화순
한국의 노동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한국 기독교사를 통틀어 아홉 번째 여성목사. 동일방직 사건을 통해 노동운동에 불을 지피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 찾기를 주도하다가 홀연 현장을 떠나 해발750 고지 봉평 태기산에 집을 짓고 십 년동안 혼자 살고 있다.
출판사서평
■ 일흔한 살 행복한 처녀의 자연일기
훌쩍 떠나온 지 10여 년, 그는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다. 도시에서 항상 누구와 함께 있다가 자신이 지은 흙집에서 홀로 지내기 시작한 처음에는 자연이 무서웠다고 했다. 바람소리가 무섭고 십여 분은 족히 걸어야 마을이 있는데 산짐승이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는 한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소리가, 이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이 만드신 거고 그 역시도 창조물에 포함된다는 것을. 그런 마음이 들자 그는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잊어버린 자연의 존재가 들어왔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작고 낯선 수많은 생명들… 그 속에서 자연이 주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이 그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돼지감자’라는 풀이 있다. 요즘은 당뇨 치료제로 쓰여 너도나도 키우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잡초로 여겨져 모두 뽑아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꽃이 너무 예뻐 오히려 돼지감자 주변을 솎아 주었다. 그러다 돼지감자를 잊고 다시 밭을 다시 매기 시작한 한 달 쯤 뒤 돼지감자를 살펴봤더니 돼지감자의 생명력이 너무 강해 주변의 잡초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천사만 있는 게 아니라 악한 세력도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선한 사람을 키우고 한데 모을 생각보다는 악을 제거하는 데만 신경을 써왔구나. 사회에 선한 세력이 많으면 악한 세력이 힘을 못 쓰겠구나. 앞으로의 운동은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 운동보다 선한 세력이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되겠구나.” - 72쪽
태기산이 주는 위로로 그는 현재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삶도 성찰한다.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의 현장에서 바쁘고 여유 없었던 자신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이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돌이켜 반성하고 지금도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춤을 추면서 살겠다.” 그가 태기산 자락에 와서 농사와 생명 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춤’이다. 미국 방문 때 성찬식을 춤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춤이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홍신자 씨를 만나 몇 번의 춤 세라피도 받았다. 춤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를 만나고 문제점을 알게 되고 또 다른 정신세계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일흔 하나.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이라고 그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빌어 말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생을 마무리할 시점이라고 하나 그는 다시 시작이라고 말한다. 죽음도 시작이라고 말하며 언제나 청춘인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조화순! 그의 제2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노동자와 함께 산 불꽃의 사람
조화순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나서였다. 여주인공 채영신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농촌계몽운동을 꿈꾸었다. 그 꿈을 좇아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고 인천 덕적도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인천에서 감리교산업선교회를 시작한 조지 오글 목사의 간청으로 산업선교에 발을 디뎠다. 처음 6개월 동일방직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먼저 노동자의 삶을 체득한 후 그는 동일방직을 근거로 하여 작은 모임을 꾸려나갔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동일방직에서 그는 한국 최초로 노조여성지부장을 탄생시켰고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렀다.
“사실 나도 노동조합이나 근로기준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나 노동문제 전문가들을 초빙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하나둘 의식이 변화되고 발전하면서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항의하던 그들이 여럿이 힘을 뭉치면 힘이 더 커진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다 직접 노동조합에 참여해 자신들의 손으로 노동조합을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최초의 여성지부장과 여성으로만 구성된 노동조합 집행부였다. 내가 산업선교회에 몸담은 지 6년 만인 1972년의 일이었다.” -140쪽
마음이나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다. 노동자들은 진짜와 가짜를 너무나 잘 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직접 몸으로 겪고 몸으로 당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조화순은 말한다.
조화순 목사의 별명은 감동이다. 남에게 감동을 잘 주고 또 그 자신이 주변의 사건에 쉽게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잘 흘릴 뿐 아니라 분노하는 힘 또한 대단하기 때문이다. 함께 슬퍼하고 더불어 기뻐하며 분노의 힘이 어우러지는 감동, 이것이 조화순 목사의 삶을 관통하였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 속에 결코 들어갈 수도 없고 그를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Stand By Me - Liz Mcc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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