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보다 오래된 문선희 지음·가망서사 2023.07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
문선희-현대사회와 역사의 모순을 직시하는 사진작가. 2015년에 발굴 금지 기간이 해제된 구제역·조류 독감 매몰지 100여 곳을 기록한 연작 《묻다》로 주목받기 시작했다.(2019년책 출간) 2016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자신의 언니처럼 초등학생이었던 광주시민 80여명의 기억에 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설치 작업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를 발표했다.(2016년 책 출간) 2019년에는 지난 15년간 고공농성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담아낸 작업 〈거기서 뭐하세요〉를 발표했다. 신간 《이름보다 오래된》의 밑바탕이 된 고라니의 초상 사진 연작 〈널 사랑하지 않아〉는 2013년부터 10년간 진행해온 작업으로, 2022년에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2021년 제22회 광주신세계미술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이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정서적이고 감각적이지만, 그 내부에 파고든 사회 정서적 서사는 그 무엇보다도 신랄하고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3년 제13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작가의 “유려한 감성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섬세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목차
인트로_구조 요청
어린 고라니의 초상
마주치다
마음의 잔상
야생의 삶
봄의 탄생
너의 이름들
경계의 전쟁
사라지는 숫자들
자연의 균형추
고라니에게 인간은
마주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틈새의 삶
여름의 어린 생명
연결된 시간들
비무장지대에서
드러나는 얼굴들
생사의 교차점
안녕을 위한 의식
어른 고라니의 초상
추천의 글
끝내 사랑하는 꿈, 눈이 찾는 빛_정혜윤
도착할 수 없는 편지는 사라지는가?_장혜령
세계와 연결되는 가장 인간적인 길_김산하
아우트로_생명의 편에서



책 속으로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 구제사업으로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는다.
2014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3만 6,296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2018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고라니 목에 내건 현상금은 3만 원인데, 2015년부터는 현상금으로 지급된 비용이 고라니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보다 많았다. -‘경계의 전쟁’ 중 p.63
모든 야생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산을 허물고 도시를 넓히고 도로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고라니의 생태는 존중되지 않는다. 고라니는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도 오히려 불청객으로 내몰린다. 인간의 허영은 고라니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농작물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먹기를 바란다.
생태계의 포식 행위는 균형 잡혀 있다. 육식동물들은 자신의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만큼만 사냥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다르다. 농민들이 화가 나서 달려가면 시스템은 가차 없이 작동한다. 징벌이 미진할 경우 농민들은 거듭 항의할 수 있지만, 징벌이 과도해도 고라니들은 항변할 수 없다.
고라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나직한 물음이 가슴께에 밀려들었다. -‘고라니에게 인간은’ 중 p.70
초여름이 되면 그해 봄에 태어난 새끼들이 어미를 잃어 구조센터로 밀려든다. 구조된 아기 동물들은 개체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을 매달고 비슷한 종이 모여 있는 방으로 배정된다. 고라니와 노루는 같은 사슴과라서 한 방이다.
구조센터에 들어온 아기 사슴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긴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으면 한데 뭉쳐 서로의 몸에 고개를 파묻는다. 고라니든 노루든 이질감 없이 섞여, 체온을 나누고 위험을 분산시킨다.
아기 사슴들은 인간의 손길을 두려워한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구조 상황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우유를 먹이는 일이 반복되면 그들은 차츰 상황에 적응해간다.
재활 관리사들이 따뜻하게 데운 젖병을 들고 들어오면 우유 냄새를 맡은 아기 사슴들이 모여든다.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는 녀석들도 있다. 직접 우유를 먹여보면, 젖병을 빠는 힘이 어찌나 좋은지 젖병을 들고 버티는 게 쉽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모두 같은 반응인 것은 아니다. 어떤 아기 사슴들은 유혹적인 우유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란에도 그대로 숨어 있었다. 끝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야생성을 간직한 아이들은 체구가 작다. 덜 먹기 때문이다. 재활 관리사들은 그런 개체들도 빠뜨리지 않고 우유를 먹인다. 겁에 질린 아기 고라니가 입을 닫은 채 계속해서 젖병을 밀어내면, 재활 관리사는 그 고라니를 살포시 품에 안고, 입을 살짝 벌려 입속으로 솜씨 좋게 젖병을 밀어 넣는다. 우유 맛을 본 아기 고라니는 그제야 입을 오물거리며 조금씩 젖병을 빤다. 인간의 관심과 정성으로 가녀린 생명이 이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름의 어린 생명’ 중 p.76
초코는 사랑이 많은 아이였다. 애정 표현에 거침이 없었고, 그만큼 예쁨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언젠가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초코를 마음껏 쓰다듬을 수는 없었다. 나는 스킨십을 하는 대신 초코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몸을 낮추면 초코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려다볼 때는 단춧구멍 같던 초코의 눈망울이 호수처럼 깊고 맑아 보였고, 턱밑을 감싼 솜털이 꽃받침 같아 한층 더 귀여웠다.
내가 바닥에 낮게 엎드리면 초코 쪽에서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같은 인간을 마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말갛게 영혼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꼭 마주 보지 않더라도 초코의 일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먹고 마시고 뛰노는 초코의 모습 위로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눈이 번쩍 뜨였다. 이리도 당연한 이치를 그동안 왜 깨닫지 못했을까?
처음 고라니와 노루를 비교해서 볼 때는 고라니들이 모두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초코라는 기준이 생기자, 마치 베일이 벗겨진 듯 고라니들의 얼굴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연결된 시간들’ 중 p. 80~81

고라니들의 얼굴에 오롯이 새겨진 고유성에 깊이 매료되었다. 모두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로 초대받은 소중한 생명들이라는 것, 당신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를 부품처럼 갈아 끼울 수 없듯이 모든 생명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생생하게 와 닿았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마치 은하수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은하수를 직접 보는 것이 차원이 다른 일인 것처럼. 고유성에 깃든 경이와 다양성에 깃든 장엄함을 생생하게 체험한 후, 나는 비로소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연결된 시간들’ 중 p.81
서로를 의식할 때 흐르는 긴장감과 떨림 속에서 고라니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고라니의 얼굴 근육은 사람만큼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개 무표정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라니의 전체적인 인상은 날씨를 느낄 때처럼 모든 감각을 통해 한꺼번에 다가왔다. 말로 표현하자면 복잡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한 일이었다.
그 겨울을 건너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중 p.92
다시 구조센터를 찾아갔을 때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흰색 트럭 옆에 가지런히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트럭 짐칸에 죽은 고라니 두 마리가 포개져 있었다. 텅 비어버린 눈과 빳빳하게 굳은 몸을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며 겨우 건너편 등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부들대는 팔을 끌어안자 온몸이 떨려왔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일, 나는 두 개의 우주가 사라지는 현장의 마지막 목격자였다. 이곳이 어린 생명들을 구할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싸늘한 주검의 숫자를 헤아리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라니들이 죽어간다. 고라니들의 입장에서 인간 중심의 세상은 마치 거대한 블랙홀 같지 않을까. 사방이 조여 오고 소용돌이에 한 번 휘말리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곳. 눈을 감으면 고라니들이 그 죽음의 시스템에 붙들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 떠오르곤 했다. -‘생사의 교차점’ 중 p.104~105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에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안녕을 위한 의식’ 중 p.107

묻다 문선희 저자 책공장더불어 · 2019년 03월
살처분 매몰지를 2년 이상 추적하고 기록한 유일한 사람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살처분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와 치유를 전한다
살처분 현장을 보며 사람들은 생명을 함부로 하는 불경함, 생명의 가치보다 경제성이나 합리성이 우선시 되는 냉혹함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고 두려워했다. 과연 지금의 대량 살처분 방식이 합당한지 의문도 가졌다. 이 책은 가축 전염병의 예방과 대처법, 살처분 방식에 대해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했던 작가가 살처분 매몰지를 기록한 경험을 사진과 함께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낸다.
책은 매몰지를 찍은 사진을 사진전과 같은 형식으로 보여주고, 저자가 매몰지 촬영을 하면서 품었던 살처분 방식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공유하고, 사진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살처분이 남긴 상처와 치유를 전한다. 작가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묻고, 함께 안타까워하고, 화내고, 고마워했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동물 매몰지를 기록한 작가 덕분에 그간 우리가 먹는 동물을 대하는 방식과 그들이 아플 때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목차
그 해 겨울
물컹한 땅
비밀
수익
3년 후
내일의 문제
악몽
299
자연치유
예방적 차원
청정국
죽음 없는 무덤
공범
동물의 사정
다시, 구제역
비닐 아래
근면한 작물재배
부메랑
환삼덩굴
투고
묵묵부답
구토
메르스
묻다
그녀의 아버지
가격
제의
아이들
인큐베이터
행복의 조건
형벌
국가의 명령
마음들


1588
C-print_100x100cm_2014 ARTICLE03 | 문선희 (modoo.at)

책 속으로
★ 전국 4,799 곳에 매몰지가 조성되었다. 피로 물든 지하수가 논과 하천으로 흘러나오고, 땅 속에 가득 찬 가스로 인해 썩다 만 사체들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는 엽기적인 뉴스가 쏟아졌다. 3년 후, 전국 4,799 곳의 매몰지가 고스란히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
★ 어떤 매몰지는 물컹거렸고 어떤 매몰지는 단단했다. 어떤 매몰지는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고, 또 어떤 매몰지는 푹 꺼져있었다. 어떤 매몰지는 플라스틱 관이 몇 개 쯤 꽂혀 있었고, 어떤 매몰지는 그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설치된 플라스틱 관들은 터지거나 막혀 있기 일쑤였고, 지독한 악취를 뿜어댔다.
★ 구제역은 사람에게 옮기지도 않으며 식품의 안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0세기 초만 해도 구제역에 걸렸다 회복된 소 중에서 고품질의 고기와 우유를 생산해 상을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 모든 생명체는 태양과 땅, 물 그 외에 다른 생물들에게 빚을 진다. 자기가 쓸 에너지를 직접 만드는 건 식물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다고 사자의 도덕성을 비난할 수는 없다. 육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육식이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 매몰지에서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맣게 변해 죽은 풀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못했다. 다음 번 매몰지에서 끈적이는 액체를 토해내며 기이하게?죽은 풀을 보았다. 전문가에게?물으니 땅 속의 유독?물질에 풀의 뿌리가 닿았거나, 땅 밑에서 피어오른?유독 가스로 인한 변고 같다고 했다.?독을 내뿜는 땅,
★ 매몰지 옆의 깨밭은 트럭이 밀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밭 가운데의 깨들이 양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벼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거나 눈에 띄게 웃자랐다. 논에서는 벼와 잡초가 마구잡이로 섞여 자랐다. 물이 찬 논에는 날벌레가 들끓었다. 겁이 날 정도로 엄청난 밀도였다.
★ 매몰한 지 4년이 지났으니 대지가 회복 중일까?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버린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며칠 사이에 비닐 아래의 풀들은 새하얗고 투명하게 말라죽어버렸다. 아직 여기 동물이 있다. 대지는 삼킨 죽음을 토해내고 싶어 한다.
★ 2014년 강력한 고병원성 조류 독감으로 1,396만 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 했다. 2016년에는 두 배에 달하는 3,781만 마리의 가금류가 살처분 됐다.?이는 전체 사육 조류의?30퍼센트를 웃도는 숫자였다. 동일한 시기에 같은 바이러스로 조류독감이 발생한 독일, 프랑스, 덴마크는 100만 마리 이하의 동물을 살처분 했다.
★ 햇빛이 차단되어 자외선 살균의 우려도 없고, 환기가 되지 않아 오랜 시간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으며, 감염시키기 용이한 숙주들이 옮겨 다니기 좋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밀집사육 시설은 바이러스가 치명적으로 진화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인큐베이터였다.
★ 누군가는 갓 태어난 새끼들까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살아 있는 동물들 위로 흙을 쏟아 붓고 땅을 다지는 일에 투입되었다. 동물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을 직접 담당해야 했던 사람들. 무겁고도 무서운 기억에 짓눌려 잠 못 이루는 밤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독한 형벌을 받고 있을까?
★ 살처분에 동원된 공무원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자 2015년부터 정부는 용역업체에 살처분을 떠맡겼다. 이제 공무원을 대신해 가난한 청년과 외국인 근로자가 살처분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문선희 / 난다 2016년 5월
담벼락에 묻힌 5월 광주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는 5·18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들 80명의 구술을 토대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정치적이라기보다 정서적인 기억들이기에 특정한 관점으로 구조화시키지 않고 인터뷰한 순서 그대로 배열하였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기억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구술 내용에 다소간의 불일치가 있더라도 그대로 수록하였다.
작가의 말
이 작업은 기록이 아닌, 기억에 관한 것이다
5·18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광주 사람이니 잘 아시겠죠”라는 말이 붙는다. 그럴 때면 나는 “그때 저 죽을 뻔했어요”라고 농담처럼 답하곤 했다. 당시에도 나는 무등산 자락에서 살았다. 광주 시내가 봉쇄되는 바람에 우리는 우리대로 고립된 처지였다. 18개월 된 아기였던 나는 홍역에 걸렸고,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한다. 물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잖아.” 언니는 여덟 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니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 긴 바늘이 되어 푹, 하고 나를 찔렀다. 그때 국민학생이었던 언니와 오빠들은 지금 초등학생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이것은 5월 광주에 관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거대 담론에 대한 작업은 아니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의 기억을 수집하기로 했다. 대상은 마흔을 갓 넘은 이들로, 당시 초등학생의 나이로 한정했다. 2년에 걸쳐 해당 연령의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어렵사리 그중 80명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30년이 더 지난 일이다. 어떤 기억은 흐릿해졌고 어떤 기억은 덧대고 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남아 있는 어떤 인상들은 어제의 것처럼 생생했다. 그들의 기억은 어린아이들의 불완전한 기억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어렸지만, 5·18에 대해 듣거나 읽은 게 아니라 직접 보고 겪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기억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한 부분을 보여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내가 어린이들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들은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도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들의 증언 속에는 당시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 같은 숭고한 꽃들뿐만 아니라 혼란, 불안, 공포, 분노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까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증언 사이사이에 묻어난 그들의 철없는 아이다움에 한량없이 고마웠고, 그들의 이상하고 섬뜩한 어린 날의 파편에 속절없이 아파했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이 비극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이 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게다가 경험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 아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타인의 경험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그러니 완전히 전달할 수도 없을 터다. 그래서 노력했다.
나는 그들이 살았던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사라진 집들만큼이나 남아 있는 집들도 많았다. 그 엄혹한 열흘 밤낮 동안 누군가의 가족을 오롯이 품었을 집들, 오랜 시간을 견뎌내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를 지닌 벽들. 시나브로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내 안에서 용해되고 발효되었다. 그러자 골목 안의 벽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자란 작업을 위해 기꺼이 기억을 꺼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목차
서문-이 작업은 기록이 아닌, 기억에 관한 것이다 8
일러두기 10
〈쉿!〉 13
01 최지연(1980년, 8세) 14
02 김은영(1980년, 8세) 15
〈간첩〉 17
03 조승기(1980년, 10세) 18
04 이정록(1980년, 10세) 20
05 김용태(1980년, 9세) 21
〈퍽!〉 23
06 정제호(1980년, 8세) 24
07 김용선(1980년, 12세) 25
〈피가 모자랍니다〉 27
08 정상욱(1980년, 13세) 28
09 정광훈(1980년, 13세) 29
10 장OO (1980년, 13세) 30
〈아무것도 못 봤어요〉 33
11 소영환(1980년, 10세) 34
12 나용호(1980년, 10세) 35
〈그 눈빛을 나는〉 37
13 강신철(1980년, 11세) 38
14 문종선(1980년, 10세) 39
〈다 끝난 일〉 41
15 노상수(1980년, 13세) 42
16 박종식(1980년, 11세) 43
17 최창호(1980년, 9세) 44
18 박수미(1980년, 11세) 45
〈학교는 쉽니다〉 47
19 조호성(1980년, 11세) 48
20 윤일선(1980년, 11세) 49
〈오메오메〉 51
21 정지선(1980년, 11세) 52
22 김건(1980년, 11세) 53
23 박지민(1980년, 8세) 54
24 김원(1980년, 11세) 55
〈내가 봤어〉 57
25 홍성호(1980년, 12세) 58
26 정재운(1980년, 12세) 59
〈두근두근〉 61
27 이장곤(1980년, 10세) 62
28 이승희(190년, 10세) 63
29 박현민(1980년, 10세) 64
30 나상선(1980년, 10세) 65
〈군인은 원래 우리 편인데〉 67
31 정재명(1980년, 10세) 68
32 정명운(1980년, 9세) 70
33 박진홍(1980년, 10세) 71
〈나중에 괜찮을까?〉 73
34 강성경(1980년, 10세) 74
35 김이강(1980년, 12세) 75
〈우…와!〉 77
36 강선아(1980년, 12세) 78
37 문영학(1980년, 12세) 79
38 강채민(1980년, 12세) 80
39 나진근(1980년, 12세) 81
〈잊혀지지가 않아〉 83
40 곽은영(1980년, 9세) 84
41 송명재(1980년, 11세) 85
〈두두두두두두두〉 87
42 김강미(1980년, 11세) 88
43 서상석(1980년, 12세) 89
44 한서희(1980년, 12세) 90
45 김선미(1980년, 8세) 91
〈유언비어〉 93
46 차수진(1980년, 13세) 94
47 최혜경(1980년, 13세) 95
48 최혜원(1980년, 8세) 96
49 소유정(1980년, 7세) 97
〈우리나라, 만세〉 99
50 염수인(1980년, 8세) 100
51 이형석(1980년, 9세) 101
〈어째서?〉 103
52 정선화(1980년, 8세) 104
53 최귀성(1980년, 9세) 105
54 고성주(1980년, 9세) 106
55 김O O (1980년, 13세) 107
〈6?25보다 더〉 109
56 김현희(1980년, 13세) 110
57 정용재(1980년, 11세) 112
58 고정화(1980년, 11세) 113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115
59 김종원(1980년, 12세) 116
〈휴!〉 119
60 김옥희(1980년, 11세) 120
61 강석(1980년, 13세) 122
62 김정중(1980년, 13세) 123
〈도망쳐!〉 127
63 송민주(1980년, 13세) 128
64 주라영(1980년, 8세) 131
〈빨갱이, 새끼들〉 133
65 강혜련(1980년, 13세) 134
66 김현대(1980년, 12세) 136
67 정영남(1980년, 13세) 137
〈어떡하지?〉 139
68 정종민(1980년, 13세) 140
69 하형우(1980년, 13세) 141
70 문영란(1980년, 13세) 142
71 윤세영(1980년, 8세) 143
〈용기〉 145
72 박국희(1980년, 10세) 146
73 박상순(1980년, 8세) 147
〈탕!〉 149
74 김보수(1980년, 11세) 150
〈축제 아닌 축제〉 153
75 오진하(1980년, 11세) 154
76 김동훈(1980년, 11세) 155
〈도와주세요〉 159
77 차정섭(1980년, 9세) 160
78 배충환(1980년, 12세) 161
〈방탄솜이불〉 163
79 임재환(1980년, 12세) 164
80 최환석(1980년, 12세) 166
5·18 상황 일지 167
해설-골목, 기억의 틈을 메우는 목소리 송수정(독립큐레이터) 173
출판사 서평
1980년 5월 광주, 그날의 기억을 묻다.
2016년 5월 광주, 그날의 기억은 이렇게도 묻을 수가 없다……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이 한 권의 책으로 우리는 5월 광주의 새로운 오감도를 갖게 되었다!”
또다시 5월입니다. 5월이라 하면 이런저런 기념의 날 참 많기도 하다지요.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을 지내고 스승의 날을 거쳐 성년의 날을 보낸 뒤 그 언저리에서 며칠을 더 머물면 애도의 심정으로 달력 속 숫자 하나에 오래 시선을 두게도 된다지요. 18이라는 숫자. 5ㆍ18민주화운동기념일이라는 붉은 글씨. 잊지 말라는 나름의 당부가 그 붉음이라 하겠지요.
그날로부터 36년이 흘렀습니다. 직접 겪은 이가 아니고서는 그때 그날들의 특별한 그 ‘겪음’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저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터, 여기 한 사람의 젊은 사진작가가 그날의 기억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감을 신고해드리려 합니다.
1978년생으로 사진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문선희. 광주 출신으로 무등산 자락에서 자란 그녀는 1980년에 18개월 된 아기였고, 홍역에 걸려 있었음에도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을 고비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스스로 떠올린 기억이 아니라 당시 초등학생이던 언니와 오빠들의 기억이 불러일으킨 사실이었다지요. 바로 이 부분을 힌트로 문선희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월 광주에 관한 작업이되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거대 담론에 의거한 ‘중심’이 아닌, ‘주변’의 기억을 수집하기로 한 거지요.
“특별히 내가 어린이들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들은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도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들의 증언 속에는 당시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 같은 숭고한 꽃들뿐만 아니라 혼란, 불안, 공포, 분노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까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증언 사이사이에 묻어난 그들의 철없는 아이다움에 한량없이 고마웠고, 그들의 이상하고 섬뜩한 어린 날의 파편에 속절없이 아파했다.” -서문에서
문선희 작가는 2년에 걸쳐 당시 초등학생이던 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80명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그들이 직접 겪은 그 일에 대한 증언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작가는 그들이 살았던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다행히 사라진 집들만큼이나 남아 있는 집들도 꽤 되었습니다. “그 엄혹한 열흘 밤낮 동안 누군가의 가족을 오롯이 품었을 집들, 오랜 시간을 견뎌내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를 지닌 벽들.”
〈간첩〉 〈탕〉 〈방탄솜이불〉
오래 쳐다봐주고 오래 만져주는 만큼 벽들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게 틀림없겠지요. 그래서 광주의 시인 임동확은 ‘벽을 문으로’라는 제목의 시를 일찌감치 피를 토하듯 써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문선희 작가는 80명의 증언에 30컷의 벽 사진을 한 묶음의 책 안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 벽 사진의 제목을 그들 증언에서 빌려오기도 하였고요.
이제는 사십대가 된 당시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비슷비슷한 듯해도 사사로이 다른데, 어린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이들의 불완전성은 “사건을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명하게 그 부조리함을 대변하기 때문”에 보다 귀한 사료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예컨대 다음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말이지요.
“그때 YMCA 근처에 수협이 있었고, 그 앞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거기로 가서 보여주셨어요. ‘이게 총알자국이야’라고.-김보수(1980년, 11세)
“그리고 아침에 형이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빡’ 소리가 났어요. 보니까 밖에서 날아든 총알이 벽에 박혀 있었어요. 형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고개를 들고 있었으면 형 머리에 맞을 뻔했어요.”-김용선(1980년, 12세)
“그 길 사거리를 건너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따다다다, 하고 총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내 옆에 가던 형이 쓰러졌어요. 나는 어떤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시 후퇴를 했고요. 총을 맞은 형은 그 자리에서 툭, 쓰러져 죽었어요. 죽은 형은 총을 머리에 맞았는데, 얼굴 절반은 형태가 없었어요. 그 바로 옆에 제가 있었고요.”-최창호(1980년, 9세)
“날이 더운데 할머니가 어디선가 솜이불을 해오셨어요. 총알이 솜이불을 못 뚫는다고요. 옛날 집들은 담이 낮아서 총알이 집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김이강(1980년, 12세)
“공수부대는 개구리복을 입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무조건 잡아갔어요. 대학생들이 주택가로 숨으면 무조건 찾아내서 질질 끌고 갔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공수부대원들은 돌도 안 피하고, 화염병도 안 피하더라고요.”-서상석(1980년, 12세)
“그때는 어렸으니까, 탱크나 장갑차가 지나가도 아스팔트 바닥이 깨지지 않는 걸 보고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문영학(1980년, 12세)
“우리한테 빨갱이라고 하니까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됐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났다고 했는데, 우리한테 빨갱이라니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됐어요.”-강혜련(1980년, 13세)
“우리 동네에 최미현이라고 나를 엄청 귀여워해주시던 분이 계셨어요. 남편은 인성고 교사였고, 그때 미현이 누나가 스물일곱인가 여덟인가 됐었는데 임신중이었어요. 남편을 기다린다고 밖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서 죽어버렸어요. 그때 손수레에 누나를 실어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식구들이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나중에 5ㆍ18 묘역에 가니까 미현이 누나 묘가 있더라고요.”-김동훈(1980년, 11세)
『묻고, 묻지 못하는 이야기』, 이 책의 탄생에는 “역사 저편으로 잊혀가는 기억의 조각을 발굴하기 위해 좁은 골목들을 찾아다닌” 문선희 작가의 노고와 사랑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말함의 불가능성’을 품은 채 최대한 정확히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려한 ‘80명 아해들’의 용기도 큰 몫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 ‘동일한 사건의 목격자’임은 분명한 까닭에 그들의 목소리 가운데 교집합으로 묶이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사실 너머 진실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바로 새겨줘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80년 5월 광주의 새로운 오감도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속으로
시체들을 많이 봤어요. 소방차 뒤에 시체를 실어가지고 왔다갔다하는 걸요.
그리고 옆집 살던 아저씨가 군대에서 기관총 사수였던가봐요. 트럭 위에 담요를 깔고 시
민군들에게 총을 쏘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증심사 올라가는 다리에서요. 평화맨션 앞 소태동 다리였어요.
밤에는 총소리가 엄청 났어요. 그래서 잘 때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면 총알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요. 탄피 가지고 친구들이랑 따먹기 놀이도 많이 했어요. 그때는 길에 분해된 총기들도 많이 버려져 있었어요.
설월여고 자리가 원래 밤나무숲이었는데 거기서 시내가 잘 보이니까 교전하려고 수류탄 찬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렸어요.
또 한번은 삼립 빵 차가 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시민군들이 협조 좀 하라고 빵 차를 세워가지고 사람들에게 빵은 나눠주고, 그 차를 가져갔어요.
사람들이 버스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물러가라” 노랫소리를 했고, 어디선가 “간첩이 나타났다!”고 소리가 들리면 동네 아이들이랑 막 쫓아다니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옥상에서 놀고 있었는데 헬기가 갑자기 문을 열고 우리 쪽으로 기관총을 쐈어요. 무서워서 얼른 엎드렸는데 형이 공포탄이라고 내려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침에 형이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빡’ 소리가 났어요. 보니까 밖에서 날아든 총알이 벽에 박혀 있었어요. 형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고개를 들고 있었으면 형 머리에 맞을 뻔했어요. 그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_ p25 「김용선 (1980년, 12세)」전문
어머니가 솜이불을 꺼내서 벽을 다 덮으셨어요. 그리고 창문 바로 아래쪽에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서 잤어요. 총알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창문 바짝 아래서 잔 거죠. 밤에 총소리가 많이 났거든요. 그때 양옥집 2층에 살았는데 화장실이 1층에 있었어요. 화장실에 가려면 밖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밤에 화장실 갈 때 보면 빨간 불빛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이 보였어요. 그 빨간 불빛이 인상적이었죠. 당시엔 어렸으니까 불꽃놀이 같기도 하고.
_ p48 「조호성 (1980년, 11세)」에서
남자들은 다 잡아가서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래서 밤마다 동네 남자들이 모두 우리집 지하실로 들어가 숨었어요. 우리집 지하실이 엄청 컸거든요. 남자들이 들어가면 여자들은 지하실 문을 닫고 문을 은폐하려고 그 위에 물건들을 쌓고 들어내지 못하게 하려고 엄청 큰 물통에 물을 받아서 올려놓기도 했어요. 그때 우리 오빠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독자여서 우리 엄마는 오빠까지 지하실에 숨겼어요. 행여나 죽게 될까봐요._ p74 「강성경 (1980년, 10세)」에서
제일 무서웠던 기억은 우리집 바로 옆에 골목이 있었는데, 그 골목이 막다른 골목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그렇게 안 보이는데 막상 들어가보면 길이 딱 끝나는 그런 골목이요. 밤에 도망치던 사람들이 거기가 뚫린 골목인 줄 알고 그 길로 들어가곤 했어요. 그 소리가 다 들렸어요. 막 도망치면서 “조심해!”라고 말하는 소리까지. 그런데 막다른 길이니까 거기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났어요. 잡혀버린 거죠. 그 사람들의 고함,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그 소리를 가족들이 전부 다 같이 들었는데 방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나요. 전부 다 잡혀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은 더 있었어요._ p84 「곽은영 (1980년, 9세)」전문
상처 입은 광주여, 코로나 앓는 인류여, 울지 말고 함께 꽃길을 걷자
옛 국군병원에 광주 작가들 모여
1980년 당시 기억 섬세히 가공
새로운 연대의 미학을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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