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07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다.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전3권)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 『루쉰 잡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일본 이데올로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지키는 연구를 하고 싶다.
목차
1. 프롤로그
지금 시대와 지난 시대
1990년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1990년대로 진입하는 방법
과거의 고민을 현재로 잇기
2. 문제적 시대로서의 1990년대
1990년대란 무엇인가
1990년대는 언제부터인가
1990년대 잡지계의 진용
1990년대와 1980년대
1990년대와 2000년대
3. 문학, 전장에서 시장으로
시련 이후 문학장의 형성
문학주의의 도래와 ‘문학의 위기’
문학 비평의 속사정
문학도 권력일 수 있는가
문언유착과 문단정치학
문학권력논쟁이 남긴 것들
4. 사상, 중심을 잃은 행방
혁명의 시대, 초월의 사상
사상지가 선언한 것들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등장 이후
지적 주체성과 탈식민화
분기하는 사상계
5. 문화, 대중성과 실험정신 사이에서
문화의 시대인가
범람하는 대중문화지
새로운 문화적 영토
문학을 넘어서야 할 이유들
대중문화가 싸움터다
주류 문화관 바깥에서
6. 세대, 혼란의 범주
신세대 논쟁의 등장
자유와 일탈 사이
보라, 신세대를
세대론들의 시작
단명한 신세대론, 장기집권하는 386세대론
7. 디지털, 가능해진 것과 가려진 것
정보화의 빛과 어둠
디지털 글쓰기와 통신문학
‘새로운 문학’은 도래하는가
사이버문학론이 멈춘 자리
인터넷 신문 그리고 포털의 시작
8. 지식인, 흔들리고 갈라지는
적이 사라진 시대의 지식인
지식인상은 왜 변화했는가
시장경쟁력과 신지식인
전통적 지식인의 출현
지식 기반 사회에서 지식인의 운명
지식인의 죽음인가
9. 진보, 재장전과 분열
진보와 혁명
진보와 개혁
중산층 이데올로기
진보의 재장전
안티조선과 적 앞의 분열
빼앗기는 진보의 말들
10. 국가, 억압하고 또 욕망되는
세계화, 일류국가화 그리고 종속화
박정희 신드롬이 뜻하는 것
욕망하는 민족주의
이주노동제도, 한국판 노예제
한국사회 속 미국과 일본
북한 인식의 이면
11. 통제, 사상에서 일상으로
병영국가와 병역 거부
여전한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
‘음란성’으로 규율하다
청소년을 보호하라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
일상이 파시즘의 전선인가
12. 여/성, 가장 첨예한 정치 영토
제1차 페미니즘 붐
여성주의 잡지가 제기한 물음들
여성적 글쓰기와 페미니즘 문학
커밍아웃의 정치학
노골적인 젠더 갈등이 시작되던 장면
페미니즘, 평등과 공정 사이에서
13. 생태, 그때 이미 사고했던 것들
생활세계 오염에 대한 각성
페놀 방류와 리우회의
개발주의 정부와 국토의 부동산화
쓰고 버리는 사회
생태 문제, 각론에서 총론으로
순환적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14. 위기, 지금 시대가 서 있는 토대
‘유연화’ 시대의 도래
개인이 무장해야 하는 사회
여성에게 요구된 것들
정신세계의 퇴락에 맞서
어떤 1990년대의 종언
15. 대중, 그들은 다음 시대를 열어냈는가
월드컵 논쟁
분출하는 하위문화활동
촛불시위의 등장
노풍과 탄핵 그리고 ‘오로지 경제’의 시대로
흐름으로서의 대중
국가, 자본, 시민사회와 대중
16. 에필로그
사라지는 잡지들
인터넷 시대 잡지의 운명
1990년대를 떠나며
사회적 사유와 시대적 사유를 위하여
미주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 1990년대 지성사를 그려, 지금 시대의 의미와 향방을 가늠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는 변화의 시기이자 현재의 한국 사회를 주조한 1990년대 지성사를 문예지ㆍ학술지ㆍ계간지ㆍ대중문화지 등 잡지 형태로 발간된 문헌을 통해 그려봄으로써, 2000년대 이후 지금 시대로 이어지는 정신사의 의미와 향방을 가늠한다. 이 책은 지금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고 긴밀하게 연관된 주제를 다루는데, 바로 ‘문학’ ‘사상’ ‘문화’ ‘세대’ ‘디지털’ ‘지식인’ ‘진보’ ‘국가’ ‘통제’ ‘여/성’(페미니즘) ‘생태’ ‘위기’ ‘대중’이다.
■ 1990년대를 사유한다는 것은 시대와 사회를 함께 사유하는 일
1990년대는 시대적 단절과 변화와 연속이라는 특징을 모두 지닌 시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형식적 민주화와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진 시대이다. 따라서 1990년대를 사유한다는 것은 가까운 과거 또는 현재의 ‘근기원’을 성찰하는 일일 뿐 아니라, 지금의 한국 사회를 탐색하고 사유하는 일이다.
■ 다양한 사상과 이론이 목소리를 내다
1980년대 정치 현실의 대안으로 대학가에 널리 퍼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빠르게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의 포스트주의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외국 이론의 무분별한 수용에 대해 ‘지적 주체성’ 내지 지적 탈식민화의 목소리가 지식계 내에서 나오기도 한다(김영민ㆍ조한혜정). 1990년대 한국의 사상계는 여러 흐름으로 분기하는데, 저자는 이를 ‘사상, 중심을 잃은 행방’(4장)이라고 정리한다.
■ 문화의 황금기를 열다
영화와 대중음악 등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십대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주류로 올라섰다(6장. 문화, 대중성과 실험정신 사이에서). 1990년대에 성장한 한국 영화와 대중음악이 이후 전개될 한류 또는 케이컬처의 토대가 된다. ‘신세대’는 참신한 스타일의 잡지 편집위원으로서 대중성과 실험정신을 동시에 염두하며 때론 과감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펼쳐 보였다. 기성세대가 주입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도그마를 거부하는 도전적 선언이었다.
■ ‘개인’ ‘내면’ ‘일상’으로의 전회-1990년대 문학
1990년대 문학은 1980년대 문학을 반면교사로 삼기라도 한 듯 ‘개인’, ‘내면’, ‘일상’으로 전회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총체적 이념보다는 구체적 현실 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이다. 민족문학론의 거점인 『창작과 비평』, 문학적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문학과 사회』와 더불어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게 되는 계간지 『문학동네』가 등장하여 ‘작가’와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문학주의’를 이끌었다. 『문학동네』는 동명의 출판사가 한국 문학을 선도하게 되는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한다(3장. 문학, 전장에서 시장으로).
■ ‘개인이 무장해야 하는 사회’, ‘위기’가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
이제 한국 사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1997년 IMF 경제위기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 전반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노동의 ‘유연화’와 비정규직이 보편화되었고, 한국 사회는 ‘개인이 무장해야 하는 사회’, ‘위기’가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IMF 구제금융은 끝났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IMF 체제가 제시한 시스템 속에 있다(14장. 위기, 지금 시대가 서 있는 토대).
■ 세대론, 페미니즘, 생태주의의 시작
세대론과 페미니즘, 생태주의의 시작도 1990년대이다. 진정한 첫 ‘신세대’인 X세대는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 성장했으며, 이전 세대보다 자유와 개성을 중요시하고, 대중문화의 수혜를 누린 첫 세대이다. 이후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많은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그 시초에 해당한다. 지금의 MZ세대라는 표현 역시 X세대의 또 다른 변주이다. 젊은 세대를 정체화하려는 세대론은 시간이 지나며 빠르게 잊혔지만, 386세대만큼은 486, 586으로 업그레이드하며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저자는 이것이 386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지닌 정치사회적 헤게모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6장. 세대, 혼란의 범주).
몇 해 전부터 페미니즘 붐이라고 할 만한 흐름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데, 1차 페미니즘 붐은 1990년대에 있었다. 『이프』 같은 선구적 잡지가 흐름을 주도했으며, 문학계에서도 1960년대생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삶과 일상을 작품화하고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 시기의 페미니즘 역시 ‘평등과 공정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을 낳았다(12장. 여/성, 가장 첨예한 정치 영토).
환경오염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생태주의가 싹텄다. 1991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을 계기로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가 설립되고, 이해 3월 발행인 김종철이 주도하는 『녹색평론』이 한국 지식장에 독자적 메시지를 내기 시작하여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생태주의운동을 이끌었다. 저자 윤여일은 『녹색평론』의 가치와 그 안목이 지금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13장. 생태, 그때 이미 사고했던 것들).
그 밖에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문명사적 전환(7장. 디지털, 가능해진 것과 가려진 것), 새로운 지식인의 양상(8장. 지식인, 흔들리고 갈라지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10장. 국가, 억압하고 또 욕망되는), 양면적 성격을 띤 ‘대중’의 정체(15장. 대중, 그들은 다음 시대를 열어냈는가)를 탐색한다.
지금 있게한 ‘近기원’… 1990년대를 성찰하다
위기와 불안이 만연한 요즘 많은 이들, 또는 각종 대중문화 장르가 ‘좋았던 그 시절’로서 가장 빈번히 불러내고 소환하는 과거는 바로 1990년대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는 억압하는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으로 들끓었던 1980년대를 지나서 드디어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문화를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았던 그 시절’로서만 1990년대를 바라보는 것은 반쪽짜리라고, 사회학자인 윤여일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지적한다. 1990년대야말로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들의 ‘근(近)기원’이라고 역설한다.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가 현재의 한국 사회의 큰 틀을 주조했다며 1990년대의 모습과 그 의미를 분석한 책이 나왔다. 사진은 1991년 소련 해체기 당시 시위를 주도하는 보리스 옐친.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러니까,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에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했다.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사회 변혁 운동도 막을 내렸다. 이에 앞서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민주화 운동으로 정치적 민주화라는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최초의 문민정부가 출현하고,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등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됐다.
1990년대 중반, 경제적 자유주의와 소비주의가 사회 전반과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급격한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질서가 전면화했다. 노동과 고용이 유연화했지만, 비정규직이 보편화했고, 바야흐로 위기와 불안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로 변했다.
19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공연에 열광하는 팬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 시기는 문화적으론 영화와 음악 등 대중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면서 지금의 한류와 K컬처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십대들이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주류로 올라섰고, 1990년대를 대학에서 보낸 X세대가 부상하면서 세대론도 본격화했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빠르게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등의 포스트주의 이론으로 대체됐다. 제1차 페미니즘 붐이 일었고, 여성적 글쓰기가 곳곳에서 모색됐다. 1991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충격을 주면서 환경문제와 생태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1990년대는 1987년 이후 변화에 대한 희망과 함께 역동적으로 시작됐으나 중반을 지나면서는 전환기를 통과할 때 생겨나는 들뜬 감정과 막연한 불안감이 교차했다. 세기말에 이르면서는 어떤 장구한 시간대의 끝자락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퍼졌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처럼 1990년대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이때의 변화들은 한편으론 구조적이어서 현재의 한국 사회의 틀을 주조했다. 따라서 1990년대를 사유한다는 것은 가까운 과거 또는 현재의 근기원을 성찰하는 일일 뿐 아니라, 지금의 한국 사회를 탐색하고 사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이에 따라 근본적 변화의 시기이자 현재의 한국 사회의 큰 틀을 주조한 1990년대의 지성사를 국가, 통제, 디지털, 위기, 문화, 문학, 사상, 진보, 대중, 세대, 지식인, 여성, 생태 등 13개 주제로 조감했다. 이를 통해서 2000년대 이후 지금으로 이어지는 현대 정신사의 의미와 그 향방을 전망하려고 시도했다. “이 책은 1990년대 사회적 변동을 고찰하고 정신적 행방을 유산화할 것이다. 그렇게 1990년대에서 지금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을 건져내고자 할 것이다.”
1997년 IMF와의 협상을 밝히는 임창열 당시 부총리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저자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변동을 조망하고 정신적 행방을 유산화하기 위해서 연대적 사건 기록과 해석뿐 아니라 고민과 모색까지 함께 담긴 주요 잡지들의 기획과 특집을 분석하는 방법을 택했다. 1990년대는 담론 생산과 유통에서 무엇보다 잡지가 큰 역할을 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3개 주제별로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1990년대 지형도를 그린 뒤, 이전 시대와의 비교하거나 현재에 미치는 영향력을 탐색하면서 분석을 심화해 나간다.
세계화 속에서 선진국을 꿈꾸다가 IMF 사태로 급격한 종속화와 신자유주의에 휩싸인 국가, PC통신과 인터넷 포털의 등장으로 본격화한 디지털 문명, 이념과 문학에서 문화로 바뀌면서 대중성과 실험정신 사이에 놓인 문화,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그 중심을 잃어버린 사상, IMF 사태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롭게 꿈틀대면서도 분열하는 진보 운동, 신세대 논쟁으로 촉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대론, 선명한 ‘적’이 사라진 시대에 흔들리고 갈라지는 지식인 사회….
윤 교수의 인상적인 분석 가운데 하나는 IMF 체제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대목이다. 1990년대를 민주화를 통해서 정치적 자유화를, 대중 소비를 통해서 경제적 자유화를 이룬 것으로 파악한 그는 IMF 사태가 두 영역간의 관계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IMF 경제위기는 경제가 사회를 규율하는 문법으로 자리잡고, 국가 권력이 으뜸가는 사회적 주재자 자리를 시장 권력에 넘겨 주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은 주제와 카테고리가 많아서 다소 산만하게 펼쳐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1990년대의 모습과 그 의미, 오늘날 한국 사회를 둘러싼 주요 분야의 구조와 위기의 체계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게 해 주는 미덕이 있다. 가히, 쉽게 그리고 새롭게 읽을 수 있는 1990년대 지성사가 될 수 있겠다. 혹시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을 수도.
“1990년대는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첫선을 보이고,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기가 출현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그려진 시대였다. 2020년대 속에서 1990년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줄어든 희망, 그렇게 90년대는 2020년대가 되었다
1992년에 데뷔했다가 1996년에 해체한 서태지와 아이들, 1994년과 1995년의 성수대교 및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구제금융 시기의 금 모으기 운동, 그리고 이 책 지은이가 장기 1990년대의 끝자락으로 꼽은 2002년의 월드컵 응원과 촛불시위 등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대는 과거의 시간이지만, 지금 시대는 민주화 이후,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소비사회 진입 이후, 경제위기 이후의 장기 국면에 속해 있다. 지금의 사회적 현상과 문제들은 1990년대로부터 기원한 것이 많으며, 그것들을 파고들다 보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야 할 일이 생긴다.”
사회학자 윤여일(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이 1990년대로 눈을 돌린 까닭이다. 그가 새로 낸 책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톺아보며 그것들이 지금 현실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를 헤아린다. 이를 위해 그는 1990년대의 잡지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1990년대의 특징 중 하나가 숱한 잡지의 명멸에 있다는 판단에서다. 문학, 문화, 사상, 세대, 디지털, 젠더, 생태, 대중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당시 잡지들의 기획과 특집에 비친 사회상을 추출한다.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제2장 제목이 우선 눈길을 끈다. ‘문제적 시대로서의 1990년대’. 1990년대가 문제적인 것은 그 시기에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들이 여럿 발생했기 때문이다. 국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변혁의 전망이 흐릿해졌다. 국내적으로는 최초의 문민정부가 탄생했고,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초고속 경제성장과 소비 지상주의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일거에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구제금융 이후 지표로서의 경제는 회복되었다지만, 그 사태를 계기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논리는 지금까지도 우리 삶을 옥죄고 있다.
1990년대 한국문학의 특징은 ‘전장에서 시장으로’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사회’로 대표되는 1970, 80년대 문학지들이 이론가와 비평가 중심 체제였다면 1994년에 창간된 ‘문학동네’는 작가와 작품에 집중하는 편집 방침을 들고나왔다. 문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부담을 덜고 작가와 작품을 앞세운 이런 방침은 독서 시장에서도 먹혀들었다. 기존 문학지들 역시 ‘문학동네’의 작가·작품 중심주의를 좇는 한편에서는 그에 수반되는 상업주의 및 문언유착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강력한 중심을 잃은 사상계에서는 개별자, 타자, 욕망, 차이, 감각, 해체 같은 말들로 대표되는 소문자 담론들이 활발히 오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되어 문학과 예술의 지형을 흔들었지만, “관념주의 내지 상대주의를 취해 철학적 세계로 도피할 위험성”이 지적되기도 했다. 잡지계에서는 문학 중심주의와 거리를 둔 ‘문화/과학’ ‘상상’ ‘리뷰’ 같은 계간지들이 나타나 대중문화 또는 하위문화를 진지한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적으로는 오렌지족 소동과 신세대 논쟁 등 세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언론은 신세대의 세련된 소비 문화를 추켜세우다가는 돌연 그들의 무분별한 사치와 퇴폐·향락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문화/과학’은 “탈역사화와 탈정치화와 탈사회화”를 부추기는 ‘신세대 신화’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신세대론 같은 젊은 세대 담론은 그 뒤 88만원 세대와 삼포 세대, 엔(n)포 세대 등으로 이름과 성격을 바꿔가며 이어지고 있지만,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1998년 월간조선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 최장집 교수의 6·25 전쟁관을 두고 “친북적이고 좌파적”이라며 비난하는 기사를 싣고 조선일보가 공격을 이어간 끝에 최 교수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44개 시민단체는 조선일보 취재 거부와 구독 거부, 보도자료 안 보내기 등 ‘안티조선운동’에 돌입했다. 이 운동은 지식인과 문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한 언론개혁운동으로 발전했다. “1990년 후반 사회비평 잡지계에서 조선일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화두였다.” 잡지 ‘인물과 사상’과 ‘아웃사이더’는 “언론개혁 및 안티조선운동과의 직간접적 연관 아래서 창간되었다.”
조선일보의 최장집 때리기나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공산당 신문·방송’ 운운에서 보듯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지배 세력이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다. 이런 사상적 검열과 함께 1990년대에는 외설성과 음란성을 구실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태도 빈발했다. 마광수 소설 ‘즐거운 사라’와 장정일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음란문서 제조죄로 처벌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한편에서는 가수 정태춘이 6년여에 걸친 음반 심의 거부 투쟁 끝에 음반사전검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영화사전심의 역시 비슷한 무렵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1999년 12월 헌법재판소에서 군제대자 가산점 법률제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자 헌법 소원을 낸 이화여대 졸업생들에 대한 신상 캐기와 온라인 성희롱이 만연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적 대결이 사회적으로 노골화된 거의 첫 번째 사례이자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표현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1년에 창간된 ‘녹색평론’은 반경제성장, 반자본주의, 반근대문명을 지향하며 농업을 중심으로 한 “순환론적 삶의 형식”으로 생태위기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인 만큼 비현실적 이상주의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기후위기가 가속화하면서 인간과 생물계의 공멸 가능성이 운위되는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앞서간 현실주의라 해야 옳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는 “고도성장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음과도 같았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생존과 경쟁의 각박한 논리가 지배하는 가운데 “몰락에 대한 공포가 대중의 삶을 덮쳤다.” 사회적 사유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위기였다. 위기는 전 사회적 징후가 되었고 “희망의 총량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1990년대는 2020년대가 되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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