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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전쟁과 가족〉外

by 이성근 2023. 7. 16.

전쟁과 가족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창비 펴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제는 끝내기 위해

19537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올해가 정전 7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한국전쟁 관련 책을 읽기로 했다. 이런 식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면 그 무겁고 무서운 역사에서 계속 눈을 돌릴 테니까. 여러 책 중 인류학자 권헌익이 쓴 전쟁과 가족을 골랐다. 박완서의 소설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보고 쉬 읽겠지 했는데 웬걸, 300쪽을 읽는 데에 일주일이 걸렸다. 문학·역사학·철학·정치학·인류학 등을 넘나드는 저자의 너른 지식이 버겁기도 했고 무엇보다 소설·영화·일기·문집·증언 등 다양한 자료로 전하는 전쟁의 경험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책을 덮을 순 없었다. 지난 세기의 경험이 바로 지금 여기 나의 일임을 알았으니, 덮는다고 덮어질까.

한성원 그림

 

저자가 지적하듯이 세계는 일찌감치 탈냉전 시대로 들어섰으나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사람들의 일상과 정치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대적인 남북·북미 관계, 상시적인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다. 냉전이라는 양극화된 정치 질서가 사람들의 관계와 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권헌익은 이 사실을 친족이라는 오래된 공동체를 통해 드러낸다. 근대의 주체는 개인인데 왜 친족 공동체인가? 그에 따르면, 가족·친족 같은 관계가 한국전쟁이라는 전 지구적 내전의 주요 타깃이고 경험 주체여서다.

 

알다시피 근대 정치사상은 (전통적) 공동체와 (근대적) 사회를 나누고, 개인에 근거한 사회를 정치적인 것의 주체로 상정한다. 혈연·지연 같은 전근대적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은 근대성의 지표요 역사적 진보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서구 사회철학의 전통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삶의 문제에서 공동체를 사회와 대비되는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로 삶을 영위하며, “공동체가 근대성의 공간에서 정치적 수명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집단책임과 연좌제가 전쟁 이후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지속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권헌익은 한국전쟁이 통일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둘러싼 내전이자 전 지구적 갈등의 일부이며, 21세기 패권국가인 미국과 중국 간의 국제분쟁이었고 무엇보다 사회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역사학자 박찬승이 마을로 간 전쟁이라 표현했듯이, 한국전쟁은 지역·혈연 공동체 같은 친밀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소시에타스를 주된 대상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그 결과 무려 200만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가 생겨났다. 모든 전투원 사망자를 합한 것보다 많은 이 숫자는, 전쟁 특히 내전의 폭력은 친족과 같은 관계적 자아를 겨냥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20세기 그 어느 전쟁보다 높은 민간인 희생자 비율은 한국전쟁의 무차별적 살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처음부터 사회적 관계망이 공격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박완서의 소설, 김성칠의 일기 등은 이로 인한 지옥 같은 현실을 증언한다. 남북의 공방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사상을 의심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한 일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족이 했거나 했으리라 의심되는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도처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고 죽음의 진상은 침묵 속에 은폐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연좌제라는 전근대적 관행이 있었다.

 

국가가 허락한 애도

함께 앉은 친족이란 뜻의 연좌는 죄인과 그 식솔이 함께 형벌을 받는 봉건시대 법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전근대적 제도가 전시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 사회에서 계속 유지된 이유는 뭘까? 가장 흔한 대답은 한국 사회의 후진성, 봉건의 잔재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저자에 따르면, 연좌제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탈식민지 국가에도,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와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미국에도 존재했다. 이는 연좌제가 근대 정치와 그 위기라는 조건에서 효과적인 사회통제 도구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냉전 시대에 국가는 근대법을 무시한 채 개인에게 관계로 인한 죄를 물었다. 그리고 관계망에서 걸러진 이들에게만 국민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 사회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는 당연한 윤리조차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무고한 양민,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했다. 국가법과 자연법이 충돌하는 안티고네의 비극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이었으나 현대 한반도에선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 비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저자는 사회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상처 입은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대면하고 스스로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책에는 제주, 나주, 전남 구림마을, 안동 등,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사례가 여럿 등장한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건 제주에서 이루어진 4·3 추모작업이다. 한국전쟁이 세계 내전의 대표적 사건이라면, 4·3한국전쟁의 서막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가장 먼저 냉전의 폭력을 겪은 제주가 가장 먼저 이를 증언함으로써 사회적 평화라는 이상을 발현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더욱 놀라운 건 아래로부터의 소박한 실천을 통해 이루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4·3의 와중에서 쪼개졌던 애월 하귀리의 경우, 반목해온 마을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는 작은 실천으로부터 통합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세워진 마을 위령비에서 권헌익은 친족 세계와 정치적 세계의 소통, 평화의 시작을 본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하귀마을 4·3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 산 자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때다.

김이경 (작가) / 시사인

 

<기후를 위한 경제학>(김병권 지음) 착한책가게

 

생태사회적 한계, 화석자본주의, 포스트성장의 다양한 경로

[전환 시대의 경제학] <기후를 위한 경제학>을 읽고

1. <기후를 위한 경제학>은 하나의 사건이다

 

생태경제학 분야에는 이미 전문적 연구들이 많이 쌓여 있다. 영문책자를 비롯해 외국문헌으로 가면 각종 안내서들도 적지 않다. 나의 뒤늦은 생태경제학 공부도 이런 책에 많이 의존한다. 기후위기가 닥쳐오면서는 특히 기후문제에 집중한 연구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당연히 문제를 보는 시선과 대안 모색에서 여러 견해 차이들도 나타나고 논쟁도 벌어진다. 그럴수록 깨어있는 시민들은 좀 더 정돈된 지식에 목말라한다. 번역서가 쏟아지고 있다. 단편적인 글과 언론보도도 많다. 하지만 그런 목마른 시민적 요구에 부응해 한국인이 자기머리로 사고해서 직접 쓴 한국어책은 의외로 적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김병권 소장이 쓴 <기후를 위한 경제학-지구 한계 안에서 좋은 삶을 모색하는 생태경제학입문>(착한 책가게, 2023)3쇄를 거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저자가 보내준 책을 들추어 보았을떄 내가 읽고 배울 또 한권의 생태경제학 책이 세상에 나왔음을 알았다. 깨어있는 시민에게 보다 정돈되고 체계를 갖춘 생태경제학 지식을 전달할 뿐더러, 위기에 둔감한 시민도 생태적 성찰성과 감수성을 가질 수 있게 친절한 지적 도우미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전문학술서로서 얼마나 창의적 연구내용을 새로 보탰는지를 기준으로 따지면 아마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부응하는, 기후와 생태의 경제학 입문서로서는 아무 손색이 없는, 공들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태경제학 공부길을 밝혀준 사람으로 특별히 이제는 고인이 된 정태인소장과 허먼 데일리를 꼽고 있다(pp.391-392).

 

그간 주로 일선 정책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오래 학계에 몸담아 오지는 않은 이의 손에서 한국말로 쓰인 두터운 생태경제학 입문서라니, 이것 자체가 기후위기시대 한국에서 하나의 학술적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탈성장코뮤니즘을 주장하는 사이토 고헤이(2020)의 책이 한국시장에서도 인기가 대단하고 단순명쾌하긴 하지만 단순명쾌가 능사는 아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김병권의 <기후를 위한 경제학>에서 독자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고헤이의 책에 대해서는 커먼즈를 지배적 형태로 하는 대안체제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기후위기 비상사태에 과연 속도감있는 전환이 가능할지 비판한 대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pp. 277-279). 또한 만년 마르크스의 러시아론(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이 탈성장코뮤니즘을 가리키고 있다는 고헤이의 견해는 다분히 아전인수적 억지 해석이 아닌가 싶다(이병천 2023).

 

서울 전역에 호우경보가 내려진 11일 오후 서울 시내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쓴 채 걷고 있다. 연합뉴스

 

2. <기후를 위한 경제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기후를 위한 경제학>이 갖는 내용과 의의를 내 나름대로 좀 더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은 생태경제학을 주류 환경경제학과 확연히 구분 짓고 있다(p.42). 주류경제학에서는 생태계의 구성요소와 가치가 시장경제의 구성요소로 포섭돼 그 지배 안에 들어온다. 따라서 생태계의 가치는 시장에서 돈벌이 관점과 기준으로 평가될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생태경제학 사유에서는 이와 정반대다. 오히려 인간경제가 지구 생태시스템의 하위 요소로 들어온다. 주요 질문은 생물리학적 관점에서 경제활동이 생태계의 수용능력을 넘어서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 문제의식과 인식 틀이 다른 만큼 당연히 처방도 달라진다. 주류경제학은 오늘의 기후·생태위기의 지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공범자다. 이제 인간경제는 칼 폴라니식으로 말하면 더불어 공존하는 살림살이 경제로 거듭나 지구생태계안에 뿌리를 내려야(embedded) 한다. 인간의 자유와 경제저 자유, 시장경제는 의존성과 거주가능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셋째, 독자는 이 책이 섭렵하고 풀어놓은 방대한 연구문헌과 다루는 주제의 폭넓은 범위를 보고 놀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장난이 아니며 오래 준비해야 나올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생태경제학의 역사를 쓰면서 먼저 한국에는 다소 낯선 인물, 프레더릭 소디에 의한 화석문명의 한계 및 금융자본주의, 불로소득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그런 다음 니콜라스 조르제스쿠-로겐의 엔트로피 법칙, 케네스 볼딩의 우주선 경제 등을 거쳐 허먼 데일리의 비어있는 세상'꽉찬 세상'까지 우리를 안내한다. 무엇보다 생태경제학을 다른 경제학과 구별 짓는 인간경제의 생물리학적 기초, 엔트로피법칙의 엄중함에 대한 설명이 중요하다(1, 2). 이어 비어있는 세상에서 꽉 찬 세상으로 진입한 인간경제에서 성장의 한계(3), 이 책의 중심주제이기도 한데, 성장시스템을 새롭게 바꾸기 위한 여러 해법들의 검토(4), 생태경제학의 분배정책(5), 그리고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하는 선상에서 경제개혁 전략과 정책(결론)이 이어진다.

 

<기후를 위한 경제학>은 생태경제학 입문서로서 수많은 문헌을 섭렵해 풀어쓰고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그것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문제를 보는 관점이나 대안에서 이 책은 특정한 입장에 서 있으며 이는 독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첫째, 저자가 줄 대고 있는 생태경제학의 흐름이 있다. 저자는 서론에서 자신의 관점이 "성장패러다임을 거부하면서도 생태거시경제적 접근법으로 정책설계를 도모하는 허먼 데일리나 탬 잭슨, 피터 빅터 등의 견해에 가깝다"(p.17)고 밝히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데일리의 핵심 주장, 즉 비어있는 세상과 꽉 찬 세상, 정상상태경제, 탈성장을 위한 10가지 정책대안과 같은 것들이 이 책 전체를 꿰는 붉은 실처럼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이 책이 데일리의 뼈대에 살을 두텁게 입히고 구체성을 더한 책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에 기반을 둔 생태적 거시경제학에서는 경제, 생태, 사회적 변수들을 통합해 장기추세를 시뮬레이션하는 연구들이 나와 있다. 이는 저자의 생태경제학 포토폴리오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또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pp.246-257). 다른 탈성장접근에서는 잘 접할 수 없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독자는 이 책이 기본선에서 데일리적 정상상태경제를 목표로 하면서 탈성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인데 탈성장의 흐름도 다양함을 같이 일러준다. 아주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생태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문제를 보는 방식, 대안비전과 전환정책에서 이 책을 특징짓는 매우 강력한 독자적 입장이라 하겠다. 생태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pp.271-281).

 

첫째, 자본주의의 무한축적 본성을 그대로 두고는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생태파괴도 막을 수 없다지만 이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다. 자본주의 범주 안에서도 분배수준과 방식을 둘러싼 스펙트럼은 북유럽 사민주의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장의존형 경제를 탈피하는 길 역시 다양할 수 있다. 둘째, 자본주의를 극복한다 해도 성장너머로 간다는 보장이 없고 비인간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 나가야 한다. 그런 학습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또 지금은 탈자본주의 생산체제가 무엇이 될지하는 문제도 여전히 모호한 상황이다. 셋째, 생태사회주의의 논리대로라면 기후위기 해결과 같이 시급한 지구적 과제 해결을 위한 전제가 글로벌 자본주의 붕괴여야 한다는 답답한 주장으로 갈 수도 있다. 탈성장론과 생태사회주의론은 서로 거리가 있었는데 근래에서 조금 가까워져 생태사회주의적 탈성장“(Löwy 2022)론까지 나와 있는 상황이다. 생태사회주의가 탈성장의 과제를 더 어렵게 할까 더 용이하게 할까. 물론 생태사회주의라 해도 여러 갈래가 있다. 아무튼 이것이 한가지 쟁점이 될 수 있겠는데 <기후를 위한 경제학>의 저자의 견해는 전자쪽인 셈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포스트자본주의의 길을 아예 불가능하다고 예단하거나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체제 전환의 실제적 내용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어떤 극적인 단절보다는 훨씬 덜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유체계의 개혁‘(p.276)에 두면서 여타 보다 급진적 입장에도 토론을 열어 놓고 있다.

 

3. <기후를 위한 경제학>에 대한 토론 -세 가지 논점

모든 저작들이 그러하듯이 김병권의 <기후를 위한 경제학>에도 토론해야 할 지점들이 없지 없다. 여기서는 세 가지 논점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나의 논평은 어디까지나 이 책이 더 널리 읽히고 기후위기시대 한국의 생태경제학이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는데 보탬이 되기 위한 것이다.

 

첫째, 저자는 자신의 관점이 데일리, 잭슨, 빅터 등의 견해에 가깝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특히 데일리가 비판받았던 논쟁적 부분도 언급한다. 정책대안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 그 방안이 빠진 게 데일리의 약점이라는 지적도 볼 수가 있다(pp.229-238). 그럼에도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평자의 경우 특히 요르고스 칼리스와 팀 잭슨의 데일리 비판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예컨대 바르셀로나학파의 대표적 탈성장론자 칼리스(Kallis 2015)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즉 데일리의 대안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정치경제와 사회적·정치적 과정의 역동성은 어떤 것인가? 이 칼리스의 물음은 생태·사회적 갈등 또는 적대의 표출지점들은 어디인지, 전환 주체는 어디에 있는지 하는 등의 물음도 포함하겠는데 이는 <기후를 위한 경제학>의 저자에게도 향할 수 있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뾰족할 수 있는 이유는 저자가 다음과 같이 묵직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사회안의 계급관계'보다 '인간사회와 지구생태계 관계'가 더 상위의 차원일 수 있다. 따라서 상위의 차원에 대한 질문인 '지구생태계를 넘는 무한성장이냐 포스트성장이냐'에 대한 해법을 먼저 구한 다음, 그 구체적 해법안에서 사회의 계급관계를 다양하게 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성장을 넘어서는 것(beyond growth)'이 어쩌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beyond capitalism)'보다 더 선차적일 수도 있다."(p.237)

 

위의 진술은 <기후를 위한 경제학> 전반에 걸쳐 가장 대담한 주장일지도 모른다. 많이 논쟁적인데 인류세 논쟁을 상기시킨다. 인류세 개념을 적극 옹호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Chakrabarty 2017)"기후변화 정치는 자본주의의 정치이상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해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이 때 그는 종으로서,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역사와 자본의 역사를 구분하고 양자를 교차해칭’(cross-hatching)시키자는 말을 한다.하지만 종의 역사가 자본의 역사보다 상위차원이라거나 자본주의 비판정치보다 성장주의 극복이 선차적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류세 개념을 옹호하는 브뤼노 라투르와 니콜라이 슐츠(2022)의 경우, 생산체계내부의 계급갈등과 거주가능조건을 둘러싼 계급갈등(지리-사회적 geo-social 갈등)을 구분한다. 이들은 생산패러다임에서 생성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후자의 지리-사회적 갈등이 우선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내가 볼 때 자본주의 넘어서기를 뒤로 돌리는 김병권의 성장넘어서기 선차성론은 차크라바르티나 라투르와 슐츠의 견해와도 결이 다른 것 같으며 잘 납득되지 않는다.

 

둘째, 앞의 문제에서 이어지는데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성장주의와 자본주의를 너무 가깝게 붙여 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면 반대로 저자는 둘 사이를 너무 멀리 떼어놓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갖는다. 나는 둘의 관계에 대해 생태사회주의자들처럼 보지는 않지만 저자처럼 멀리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저자도 지적했지만 생태사회주의까지 가지는 않는다 해도 '덜 자본주의적인'(less capitalistic)경제로의 전환의 길에서 영리기업의 수익률 하락은 불가피하며(p.257) 이는 필경 긴 쟁투적 전환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성장주의에 대한 생태적 비판과 복잡한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비판적 분석은 통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기후를 위한 경제학>을 읽으면 엔트로피법칙에 지배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균열과 자연을 전유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경제형태, 그 다차원적 비용전가 방식 및 생태·사회적 갈등을 통합적으로 파악, 분석한 역동적 장면들이 확연히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는 사회적 물질대사 분석에서 주로 '인간경제'를 말하지 자본주의 경제는 인색하게 말한다. 금융에 의한 지구생태계 위협은 책의 끝부분에야 나타난다(pp.355-360). 그렇다고 할 때 생태경제학입문서를 의도하는 이 책이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적 정치경제비판을 쓰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자신의 준거 학자로 삼고 있는 데일리 또한 자본주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 상당히 인색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본 개념은 분명하게 사용하지만 이때 데일리는 마르크스나 베블의 개념이 아니라 주류 경제학자 어빙 피셔의 자본 개념이 분석적으로 가장 명료하고 이론적으로 가장 만족스럽다고 쓰고 있다(Daly 1991, pp.31-32). 또한 데일리는 정상상태경제의 유지를 위해 분배제도를 포함한 세가지 제도적 기둥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안적 분배제도(소득과 부에서 최대 및 최저수준 설정과 집중 억제)가 시행되면 파업은 전면 금지될 것이고 노조가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pp.55-56).

 

셋째, 저자는 생태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라 해도 다 같은 자본주의는 아니며 북유럽 사민주의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까지 다양하다는 것, 따라서 포스트성장으 로 가는 전환의 길도 다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 다양성의 사고를 본격적으로, 일관되게 밀고 가지는 않은 듯하다. 책의 후반부에 한국경제의 포스트성장 전략을 논한 부분 (pp.282-292)이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압축성장 성공이 기후위기 후진국 또는 악당국가 멍에를 씌웠다. 하지만 오랜 성장관성 또는 중독증 때문에 성장패러다임에 도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처지이고 상대적 탈동조화조차 미흡한 수준이라며 그 만큼 기후위기 대응이 절실하다. 게다가 근래에는 저성장시대로 들어갔고 인구도 감소하고 있다. 매우 타당한 지적이지만 그 정도의 언급에 멈추고 있고 잘 기획된 탈성장길로 방향을 바꾸자고 했지만 구체성은 부족해 보인다.

 

한국은 세계10권 경제력의 압축성장 선진국이지만, 다면적 불평등과 권력불균형이 심한 나라, 재벌로 대표되는 거대자본의 위력적 지배력에 비해 이를 민주적으로 규율할 대항력이 취약한 나라, 사회적 합의의 축적경험과 조정능력이 얕은 나라, 기업체제와 노동체제에서 이중구조가 심각한 나라다. 이는 압축적 산업화 및 민주화 성공의 어두운 역설이다. 평자로서는 이런 열악한 전환조건을 가진 나라에서 정의로운 전환으로 대표되는 사회생태적 전환고개가 어떤 독특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 특히 생산영역의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어떤 각고의 노력과 혁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지, 그 긴장과 갈등은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지 등에 대해 얼마간 언급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었다. 물론 생태경제학 입문서에서 이것까지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수 있다.

 

4. 결론- 전환경로의 다양성과 실험주의

복합위기 시대 포스트성장으로 가는 사회생태적 전환 길을 탐구함에 있어 다양성의 사고는 필수적이다. 권력양식, 제도형태, 문화와 습속, 세계체제속의 불균등한 위치 등의 면에서 국민적 다양성에 따라 나라와 지역의 포스트성장 전환의 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달라져야 하는지 하는 주제는 <기후를 위한 경제학>에서는 중요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평자의 관련연구는 2021 참고). 일반론적 이야기(주로 유럽이야기가 많다)를 넘어 한국의 고유한 맥락과 조건에 맞추어진 포스트성장의 전환경로, 그 디테일을 찾아가는 것은 우선적으로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집중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포스트성장 또는 탈성장의 길이 단순한 역성장과는 다르다면, 긴 전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의로운 전환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 조건은 어떤 것인지, 난관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나아가 대안적 경제양식과 복지양식, 좋은 삶의 양식이 발전해 탈성장이 초래할 수축경제를 어느 정도 대체해 나갈 수 있을지, 그러면서 전환정치가 사회적 힘을 얻으며 자본주의를 잠식’(라이트 2020)해 나갈 수 있을지가 핵심적인 두가지 문제로 대두된다. 그러한 능력구축 여하에 따라 다양한 경로가 나타날 것이다. 이 복합적 전환능력이 잘 구축되지 않는다면 새 전환의 길은 막히거나 녹색성장이 주도하거나, 홉스적 국가가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단절 경로에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생태적·사회적 한계, 그 이중의 도전과 마주한 우리 시대 포스트성장 전환의 길은 전대미문의 다양한 실험의 공간, 쟁투적인 '이중운동'(폴라니 2009)의 장이 될 것이다. 어떤 민주적 전환실험이 성공할지, 어디서 새로운 선도적 실험이 나타나 성장없는 번영의 모범을 보일지, 민주적 실험의 실패로 권위주의적 전환실험이 우세할지, 전진 없는 퇴행에 갇힐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럴수록 어떤 하나의 진리에 얽매이지 말고 겸허하게 다양한 실험주의로 우리를 개방하는 사유가 절실하다. 사람들은 <기후를 위한 경제학>의 밑바탕에 그런 개방적 정신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에릭 라이트 2020,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 유강은역, 이매진.

사이토 고헤이 2020, <지속불가능 자본주의-기후위기시대의 자본론>, 김영현역, 다다서재.

이병천 2021, 거대한 위기와 전환의 정치-생태복지국가의 길과 한국의 전환고개. 이병천

김태동 조돈문 전강수편저, <다시 촛불이 묻는다>, 동녘.

이병천 2022, 기후정의와 사회정의, 어떤 전환전략인가, <시민과 세계. 41.

이병천 2023, 생태경제학, 마르크스이후의 소디, 경향신문, 2023.7.10

칼 폴라니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역, .

Chakrabarty D. 2017,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 Is More Than the Politics of

Capitalism, Theory, Culture &Society, 34/2-3.

Daly H.1991, Steady-State Economics, 2nd Edition, Island Press.

Dryzek J.S. & Pickering J. 2019, The Politics of the Anthropocene, Oxford University Press.

Kallis G. 2015, Contribution to GTI Roundtable "Full-World Economics," Great Transition Initiative, June. http://www.greattransition.org/commentary/giorgos-kallis-economics-for-a-full-world-herman-daly.

이병천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

 

 

 

지하 정원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학살·전쟁·혁명···근현대사 빗댄 똬리나무

철학도·소설가 홍준성의 비뫼 연대기두번째 작품

 

입헌군주제 11~12세기 식물학자 얀코의 비망록

유럽 대기근·미국 대공황·광주항쟁 등 녹여

지하 정원속 도시 비뫼는 엥겔스가 그려낸 런던을 닮았다. 입헌군주제 아래서 기아, 학살, 전쟁이 벌어진다. 은행나무 제공

 

 

홍준성의 전작 카르마 폴리스(2021)는 철학, 역사, 문학, 신화를 아우른다. 소설가이자 철학도인 홍준성은 칸트,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나 셰익스피어, 괴테, 카프카 같은 문인들의 책 내용을 인용하거나 변용했다. 출처를 밝힌 미주만 164개다. 배경 도시 비뫼에 관한 묘사는 프리드리히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 나온 런던을 참조했다.

 

신작 지하 정원비뫼 연대기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시공간은 카르마 폴리스에서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비뫼시다. 여성 식물학자 얀코의 비망록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비뫼 지하 똬리나무에 관한 진실을 찾으려는 얀코의 추적기를 중심축으로 입헌군주제하 기아, 학살, 전쟁, 혁명 같은 시대사를 엮어낸다.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1083’(이하 연도만 표시) 이후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가난한 사람들만 죽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불이 났을 때 감독관이 혼자 탈출하는 바람에 어린 여공들만 불에 타 죽었다. 사람들은 주거안정기준법이 의회에서 잠자는 동안 가스중독으로도 죽었다.

 

식량 가격도 폭등한다. 지배계급은 빈민들의 위 사정에 지나치리만큼 무신경했다. 위정자나 관료들의 인명 경시가 하나의 유행처럼 굳어진다. 이들은 마치 인구수를 줄여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듯 사람들을 죽인다.

 

빈민들은 권력자들과 싸운다. 그중 가장 유명한 빈민 저항 조직은 풀무형제단이다. 10924월 로벨토 거리의 곡물관리청을 점거한다. 권력자들은 계엄군을 내보내 진압한다. “1092년 식량 폭동 진압은 갑작스러웠고, 그렇기에 잔혹했다.” 이때 주인공 얀코의 아버지 두코도 죽는다. 그다음 달 얀코는 몬세라토 수도원 부속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고아들은 일종의 실험 재료이자 상품이다. 귀족들은 고아원을 순례하며 혈통이 좋은 강아지들 중 하나를 고르듯 사 갔다. 얀코는 하인학교를 거쳐 한 귀족 집안에 팔려 간다. 1102년 대학에 들어간다. 귀족 자제의 학위를 위해 대입 자격시험을 대리 응시하고, 대신 공부까지 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죽던 때 발견된 똬리나무의 정체와 진실을 밝히려 한다.

 

1092년 계엄군이 풀무형제단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간 곳이 똬리나무였다. 로벨토 거리 지하철 공사현장 지하에서 비뫼시를 떠받치는 거대한 똬리나무가 발견됐다. 이 나무는 이상했다. 발견 이후 주변에선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맨홀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황화수소에 중독됐다. 1106년까지 지반 침하와 균열에 따른 땅 꺼짐 현상이 빈번하게 이어진다.

 

발견 당시 똬리나무가 유적인지, 화석인지, 생물인지 알 수 없었다. 똬리나무는 생물학의 기본 법칙들을 모조리 무시한 것이었다. 단면에 나이테도 없었다. “물푸레나무를 연상시키는 넓은 잎사귀가 있되 그 색감은 거뭇했고 몸통은 생강과 같은 뿌리줄기로 보였다. 줄기는 죽은 나무처럼 퍼석퍼석했다. 햇볕이 없는 지하에서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자라났는지도 의문이었다. 과학보다는 전설로 설명하는 게 나았다. “혼돈을 뿌리로 감싼 뒤 그것을 양분 삼아 지상과 하늘을 떠받치는 나무 말이다.

 

똬리나무는 정식 학명도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조사대원 중 하나가 밑바닥에 이런 게 똬리를 틀고 있었네!”라고 말한 것이 괴생명체의 이름처럼 굳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똬리나무가 비밀무기라는 음모론도 퍼져나간다.

 

소설은 미국 대공황과 실업 사태, 유럽 대기근에다 프랑스혁명, 공산혁명, 광주항쟁 같은 근현대사 여러 사건을 녹였다. 소설 속 ‘7월 대학살이 벌어진 1097년 묘사는 다음과 같다. “군대는 각지에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이어서 기병대까지 돌진시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내 소신파들도 있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평등당 보고서에선 이날 8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고 정부 측에선 1300여명이라 기록했다.”

 

소설은 국방비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지하려는, 이념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연대로 묶인 전쟁 국가의 문제도 다룬다. 비뫼시 원로원은 징병제를 실시하면 실업률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고 창고에 쌓인 무기들을 소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점령지의 동산들을 팔아서 채무를 갚을 수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주창한다. 입헌군주제, 의회 타도와 공화국 건설을 내세운 반란군도 등장한다.

 

홍준성은 전작에서처럼 사상가들의 생애와 철학을 변용한다. 한 예가 마르크스다. “금서 목록의 맨 꼭대기에 이름을 올린 어느 위험천만한 사상가는 공장의 기계들을 두고 흡혈귀라고 했다. 혼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오롯이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은 뒤에야 뜨거운 증기를 뿜어대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뫼시의 산업들은 살아 있는 석탄들, 결국엔 석탄 찌꺼기로 허공에 휘날리게 될 뜨내기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홍준성은 부산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세부 전공은 발터 베냐민이다. 비망록 형식 소설엔 철학적 아포리즘을 많이 넣었다. 얀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이어낸다. 뇌는 유지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말을 해도 배고픈 시대에 언어는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를 잃으면 그 언어로 이뤄진 세상도 잃게 된다.”

 

지배계급의 견적서엔 체제를 바꾸는 것보다 폭동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더 저렴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빈민들의 기억은 위 속에 기거하는지라, 허기가 채워지는 것만큼 투사들에 대한 기억은 창자로 밀려났다가, 끝내는 대변이 됐다.” 인간들은 언제나 탓할 거리를 필요로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느니 그 세계의 멸망을 택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족은 딱 두 가지뿐인데 그건 바로 부자와 빈자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허상이자 종교란 말이 덧붙여졌다.”

 

소설은 여러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내용은 연대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홍준성은 기자와 통화하며 자기 인생을 되돌아볼 때 시간순으로 떠올리지는 않는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얀코)의 메모라는 걸 의도했다고 말한다.

 

전작 카르마 폴리스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 1인칭 비망록 형식을 두고 신의 시점에서 인간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려는, 카르마 폴리스때 시도가 허위의식처럼 느껴졌다. 지하 정원에선 철저하게 개인 시선인 비망록 형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읽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철학적 아포리즘에 대해 작가의 생각과 주제를 직접 드러내 밀고 나가는 실험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제이슨 브레넌 지음홍권희 옮김아라크네

 

시민 대부분은 훌리건지식인 통치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들은 현재 대통령이 누구라는 것 이상은 잘 모른다.”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인 평가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그 수준이라면 그들이 민주주의적절차에 따라 내리는 판단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조지타운대 석좌교수인 저자는 악마의 옹호자(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선의의 비판자)를 자처한다. 시민의 유형을 호빗(무관심자), 훌리건(광신자), 벌컨(이성적 시민)으로 나누고 민주주의가 절대적 가치라는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다수의 시민이 벌컨이어야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분이 호빗 아니면 훌리건이기에 참여가 전반적으로 해롭다는 것이다.

 

지식 수준에 따라 투표권에 차등을 두는 등 대안으로 검토하는 에피스토크라시(지식인의 통치)는 현실에 당장 적용하기엔 급진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은 곱씹어볼 만하다. 민주주의와 참여의 이름으로 맹목적 팬덤이 극성을 부리고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한국의 현실이 겹쳐 보인다.

채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