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저자 김성우, 엄기호|따비 |2020.04
저자 : 김성우 성찰과 소통, 연대의 언어교육을 꿈꾸는 제2언어 리터러시 연구자다. 말과 생각, 읽기와 쓰기, 언어와 사회 등의 관계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응용언어학을 공부했고, 학술적 글쓰기 발달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있으며, 대학에서 ‘언어와 사고’, ‘어휘와 문법지도’,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등을 가르친다. 《결정적 어휘력 콜로케이션》, 《영어교육과 IT》 등을 공동 집필했고, 《어머니와 나》, 《단단한 영어공부》를 썼으며, 전국영어교사모임이 발간하는 《함께하는 영어교육》에 ‘인지언어학 이야기’를 연재 중이다. 언어 중의 언어는 음악이 아닐까 생각하며 가끔 노래를 만들어 혼자 부르곤 한다.
저자 : 엄기호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과학자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과에서 문과로 ‘개종’한 후 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화연구를 공부했다. 유학을 준비하다가 “떠나라”는 명령을 듣고 한동안 국제단체에서 일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때 자본의 전 지구화에 의해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며 이를 인권의 언어로 증언하는 일에 몰두했다.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 기록하고 나누며 사회를 구축하는 역량에 대한 방법론으로서의 페다고지에 관심이 많다. 《단속사회》,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등을 썼다.
목차
시작하며
지금 여기에서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 김성우 8
Literacy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14
문해력? 리터러시? / 위기인가, 변동인가 / 문자로는 시험공부, 세상 보기는 영상으로 /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권력 / 이모티콘과 느낌표가 내용보다 중요하다 / 리터러시를 보는 또 다른 렌즈 / 다른 사람의 난독증을 문제 삼는 것 / 리터러시는 스펙트럼이다 / 리터러시가 바벨탑이 아니라 다리가 되려면
Literacy 2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74
읽기는 혁명이었다 / 문자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 개인의 탄생과 읽기 / 글이 영상보다 자유로운 이유 / 읽기/쓰기로만 가능한 것과 그 대가 / 우리는 읽기/쓰기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었다 / ‘시험을 위한 읽기’에서 ‘읽기를 돕는 시험’으로 / 리터러시의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 / 사유역량은 읽기의 특권인가 / 텍스트의 아우라와 진입장벽 / 리터러시는 사회의 역량
Literacy 3
읽기에서 보기로, 미디어와 몸 140
다른 매체가 다른 신체를 구축한다 / 세 줄 요약과 읽기의 호흡 / 보기가 만들어내는 몸 / 검색하면 다 나온다? / 리터러시가 다룸의 역량이 되려면 / 앎이 삶을 방해하는 역설 / 리터러시는 어떻게 윤리적 주체를 세울 수 있는가 / 개운하지 않아도, 담아두고 숙성시키기
Literacy 4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190
학교, 평가, 리터러시 / 공정성에 갇힌 평가, 시험 기술만 익히는 수업 / 평가의 공정성에서 배움의 공공성으로 / 미디어를 변환해보는 이유 / 과학 지식과 내러티브, 두 가지 앎 사이의 변환 / 삶을 두껍게 읽어내는 리터러시
Literacy 5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224
수업의 호흡이 길어진다면 / 독서토론으로 학교가 살아나다 / 자기 삶과 닿아 있을 때 글쓰기는 어떻게 바뀌는가 / 소통의 속도를 줄이고 리터러시의 방향을 잡다 / 성과로부터 자유로운 토론 / 자율성을 키워주는 구조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 리터러시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 / 조망, 일상, 반복, 관계, 윤리, 교차, 호흡 /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
마치며
말 걸기에서 응답하기로, 삶을 향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대담 / 엄기호 284
참고문헌 294
출판사 서평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문해력, 혹은 문식성이라는 번역어가 널리 쓰이고 있지만, 뉴스 리터러시, 미디어 리터러시, 환경 리터러시에서처럼 리터러시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빈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며, 이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사람들조차 제각기 다른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 문제적 단어, 리터러시(literacy)의 정의부터 먼저 살펴보자.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유네스코의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이라는 정의다. 그러나 리터러시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그 방점이 다르게 찍혔다. 고대에는 ‘문학에 조예가 있는 학식 있는 사람’, 중세에는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자신의 모국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리터러시를 둘러싼 지금의 환경은 어떨까? 초등학생들이 숙제를 할 때 책이나 백과사전, 심지어 검색엔진도 아닌 유튜브를 검색한다고 한다. 책을 만지기 전에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조작해본 디지털 네이티브가 늘어나고 있다. 교과서와 ‘전과’를 중심으로 기초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정보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저자들이 리터러시의 위기라기보다 ‘변동’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리터러시에 대한 평가는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익숙한 이미지, 동영상이 아니라 여전히 기성세대에게 익숙한 문자매체에 기반해, 교과서와 선다형 시험을 통해 이뤄진다. 이런 평가는 젊은 세대(또한 문해력을 제대로 키울 기회가 없었던 노년 세대)에게 공정하지 않다. ‘공부할 시간을 반밖에 주지 않고 평가한 다음에 왜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비난’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를 정의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다. 이 권력을 특정 세대, 특정 계층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에서 이미지로, 읽기에서 보기로
근대 이후 리터러시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에 기반해왔다. 문자라는 매체와 읽기라는 행위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 체계성을 획기적으로 키워주었으며, 그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개인, 개인으로서의 시민’이 탄생했다. 저자들은 읽기/쓰기 행위가 가진 이런 장점의 핵심인 ‘추상성’이라는 진입장벽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책이나 신문 등을 진득하게 읽어내고 거기에서 의미 있는 지식을 뽑아내는 데는 기호체계의 습득, 태도나 의지, 주의집중 등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계급적으로 분배될 가능성이 높은 자원이다. 경제자본?문화자본이 풍부한 가정의 자녀들은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며 정보 습득, 학습, 엔터테인먼트 등을 위해 좋은 콘텐츠를 선별해서 활용하지만, ‘방치된’ 아이들은 웹을 떠돌며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기 일쑤다.
한편, 리터러시가 무기처럼 휘둘러지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최근 인터넷상의 논쟁이나 SNS의 댓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문해력/리터러시다. 서로를 “이런 문해력 딸리는 것들” “독해도 안 되는 주제에”라는 말로 조롱한다. 리터러시가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가 된 것이다. 리터러시가 있고 없음으로 혐오 또한 커진다.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 신문 좀 읽어라.” 같은 말에서 드러나듯이, 특정 집단의 지적 능력에 대한 비하를 통해 혐오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리터러시의 위기가 있다면 이런 성찰성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소통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다.
읽기에서 보기로? 멀티미디어 시대의 리터러시
유튜브로 대표되는 ‘짧은 동영상’에 빠진 어린 세대의 문해력 부족을 한탄하는 시선 반대쪽에는 읽고 쓰는 능력이 여전히 가치가 있느냐는 의문, 이제는 동영상 촬영과 편집까지 가르쳐야 하느냐는 조바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매체가 몸과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먼저 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책으로 읽을 때와 영화로 제작된 것을 볼 때 뇌가 활성화되는 방식이 다르다. 「슬램덩크」를 만화책으로 볼 때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것을 볼 때가 다르다. 이처럼 우리 뇌는 ‘같은 내용’뿐 아니라 ‘다른 매체성’을 경험한다.
다른 매체성은 ‘호흡’의 문제와 연결된다. 영상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양으로 보면 이전 시기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텍스트가 탑재된 매체와 플랫폼은 책이 아니라 모바일이다. 기성세대는 10~20대가 유튜브 영상만 보고 책은 읽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헤드라인만 보고 판단해버리거나 ‘세 줄 요약’만 읽고 내용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40~50대 또한 마찬가지다.
문자를 중심에 둔 리터러시는 상상력의 크기와 추상성이라는 유익을 준 한편, 현실을 다루는 힘은 약화시키는 제약도 준다. 저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매체를 익히고 다루면서 균형을 자븐 것, 즉 멀티리터러시(multi-literacie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멀티리터러시에는 미래에서 오고 있는 ‘보는 것’과 ‘가상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여전히 오고 있는 것, 끊임없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인 ‘말하고 듣는 것’의 리터러시, 즉 말귀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럴 때에야 리터러시를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다룸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
저자들이 나눈 이야기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로 요약할 수 있다. 말과 글, 영상의 효과와 가치를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탐색하며, 탑처럼 쌓아올려 개인의 경쟁력과 권력으로 귀속되는 리터러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다리를 놓고 소통의 기반이 되는 리터러시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저자들은 그것이 가능하려면 리터러시가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사회적 역량’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리터러시를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환경적 인프라를 갖출 뿐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리터러시 경험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두 저자는 이런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은 어떻게 가능한지, 학생들을 가르쳐온 자신의 사례와 일선 교육현장의 사례 등 구체적인 방법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읽기/쓰기 행위가 단지 시험 대비로 그치지 않도록 수업의 호흡을 늘리고, 독서와 토론에 비경쟁 원리를 도입해 성과에 얽매이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텍스트와 이미지의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타인의 말과 생각을 굳이 반박하지 않고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속으로
이게 외적인 변동이라면, 그 상황 속에서 일종의 자기 성찰성에 대한 긴박한 요구가 있는 거 같아요. 제도 차원에서 리터러시를 정의할 수 있고, 리터러시를 평가하는 도구를 선정하며 특정한 지표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지배적인 리터러시의 형태들을 체화하여 사회문화적 자본으로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상황, 이것을 리터러시 내부의 변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 p.54
뭔가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 같고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도만 세질 뿐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터러시를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한 상태에서 계속 강화만 되는 것은 비문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73
언어를 통해 머릿속에 내가 상상하는 그 무엇도 로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가능하죠, 상상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습니다. 로딩과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는 게 인간에게 커다란 자유를 줘요. 그런데 이걸 글로 하면 로딩과 시뮬레이션의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지는 겁니다. 구술 시대라면 방 안에 가구 몇 개 들여오기 정도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다면, 이젠 철학사도, 장편소설도, 시즌 10개로 이루어진 드라마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겁니다. 글이 있으니까요. --- p.99
반면 유튜브는, 처음엔 요거만 봐야지 하고 보기 시작하지만 ‘보다 보면’ 이것도 딸려오네, 저것도 재밌겠네 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거죠. 동영상을 보는 행위 하나하나는 읽기와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흐름은 우리가 읽기에서 처음에 상상했고, 또 읽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에요. --- p.121
같은 텍스트를 읽을 때라도 종이책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와 모바일 기기에서 웹소설을 읽을 때 눈의 움직임이나 손가락의 까딱임, 책을 넘기기 위한 제스처가 다 다를 수밖에 없죠. 결국 다른 매체의 사용은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해가는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뇌가,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뀌는 거죠. --- p.142
자기의 타당성과 정당성에 대해 쉽게 공격을 받고 쉽게 무너지는 상황이라 공부 자체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바뀐 듯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정당화해주는 말과 글만 선호하는 거죠. 그를 통해 다름을 생각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의 옳음을 확신하고 강화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성장의 기쁨, 배움의 기쁨이 없어요. --- p.219~220
시간에 대한 대중의 감각이 너무 짧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면 당장 말을 해야 될 거 같고, 내가 원하지 않는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글이 올라오면 당장 ‘참전’해야 될 거 같죠. 이건 소통의 속도에 관한 문제인데요. 뉴스나 소셜미디어 포스트가 업데이트되고 그것을 소비하는 속도, 그 속도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빨리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 p.245
이를 위해서 저는 각자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글과 책이 어떤 시대에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 수단이었고 그 사람들의 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지와 유튜브가 몸이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이자 말이며 변신 수단이 된 시대인지도 모르겠어요. --- p.277
유튜브로 통하는 시대, 문해력 높이기
7년째 매주 독서 토론을 하고 있다. ‘정답’을 찾으려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떤 다른 생각들이 있는지 궁금해서 만난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나의 책 속에 수많은 결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배우며 역량을 함께 발달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다리’를 놓는 즐거움이야말로 ‘두껍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반면에 여기저기서 “너 난독증이냐?”라는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습들을 자주 본다. 이해가 간다. 일부러 오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적당히 이해하고 참아가며 살아갈만한 공통의 세계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상대방의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서로 건널만한 다리가 없음을 고민해야 하진 않나.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리터러시’가 누군가를 깎아내리기 위한 용어로 쓰이는 시대에 읽어봐야 할 책이다. 리터러시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이 잘 모르는 매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역량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리터러시는 전통적인 문자 기반 정보뿐만 아니라 이미지, 영상 등의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해 소통하는 능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리터러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범위와 구성요소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저자들은 이제 리터러시의 핵심 토대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시대라 말한다.
말의 시대에선 세계가 인간에게 거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했다. 그러나 문자를 발명하고 글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지식이나 진리,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이 변화했다. 세계는 대화의 당사자가 아니라, 읽어내야 할 의미가 있는 수동적 대상이 되었다. 근대 사회의 주체는 독자의 형태를 띠게 된다.
말의 시대에서 지식의 주체는 공동체였지만, 글의 시대에 지식의 주체는 독자 개인이다. 더 이상 해석을 대신해주는 ‘구루’나 ‘공동체’는 없으며, 부서진 구루의 빈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만이 남았다. 독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녀야 했다. 물론 그 덕에 지식은 체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저자들은 이제 리터러시의 토대가 글에서 영상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지금은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문자보다 영상이 편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시대다, 문헌을 검색하기보다, 문헌을 다루는 영상을 보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 리터러시란 ‘문해력’ 이상의 역량이다.
문제는 이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체계의 근간이 여전히 글의 시대에나 어울릴법하다는 데 있다. 그간 학교 교육과 사회의 역량은 주어진 문장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요구하고 이를 평가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다양한 해석에 대한 두려움과 정답에 대한 교조적 숭배가 공존하는 기묘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아직 이러한 평가 체계를 바꿀만한 권력을 쥐지 못했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역량과, 실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량 사이의 간극은 넓어졌다. 옛것은 갔으나, 아직 새것은 오지 않은 시대인 셈이다. 그러니 새로운 세대의 문해력이 낮다는 비판은 현재의 권력 불균형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대뿐만 아니라, 오래된 세대의 낮은 문해력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유튜브’에 휘둘려 깃발을 흔들고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들이 문해력을 탄탄하게 갖추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력 때문은 아니다. 그들에겐 사회적, 교육적 공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중화된 제도적 공교육, 발달된 대중매체의 수혜를 받은 세대가 이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픽사베이
물론 영상매체는 직관적으로 정동을 건드린다. 의미보다는 감정을 공유하기 쉽다. 특히나 지금처럼 개별 주체들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도약’없는 공감은 분명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이 리터러시의 위기인가. 단지 리터러시의 토대가 변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멀티-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저자들이 보기에 리터러시를 개인이 쌓을 수 있는 수치화된 역량으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인 양극화가 발생한다. 리터러시 교육에는 시간과 돈이 드는데, 이게 가능한 엘리트 계층과 다른 계층 사이의 간극은 벌어진다. 함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상대방의 말은 이해 불가능한 ‘소음’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지는 문제다.
저자들은 리터러시를 서로 이해하기 위한 공통의 사회적 역량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를 넘나들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고자 이 역량이 필요하지, 줄 세우고 갈라져 살고자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편 가르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세계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렵다. 내전에 준하듯 갈라져 싸우는 모습이 익숙해진 오늘날, 공동체니 교통이니 하는 말은 좀 한가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올바른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공도서관의 활성화나, 일상적인 독서 토론과 같은 수단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불가능하거나 무기력한 대안은 아니다.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은, 매체가 가져다주는 가능성과 한계를 파악하고, 가능한 한 수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매체가 우월한지 따지는 것이 더욱 한가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찾아갈지를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변화의 시대, 방송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영상을 다루지만, 개인들의 선호를 완전히 만족시키기엔 너무 거대하다. 역으로 이 특징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때 책을 집어 삼켰다는 비난을 뒤집어 쓴 ‘바보상자’가, 이제는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시대의 변화 아니겠는가.
만족스럽진 않아도 SBS <정치를 한다면>과 같은 프로그램은 리터러시 ‘교육’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이 프로그램은 정치에 뛰어들어도 보고, 정치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녀도 보면서 정치인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 순결함과 부패함 사이를 진동하며 혐오를 키우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를 높이는 것, 이것이 대중 매체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효용이 아닐까. 우리에겐 아직 ‘체험’과 ‘역지사지’의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오학준 SBS PD/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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