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문학협동조합 공동기획
여공의 배움… 계층상승 욕망 너머 인간다움을 꿈 꾸다
[진격의 독학자] <1> 70~80년대의 여공들 그리고 김진숙
이 시대 공부는 취업과 재취업을 위한 수험생 생활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평범하고도 비범한 독학자들
오늘날 한국사회는 불평등과 새로운 정치적 억압으로 앓고 있다. 이 병은 별로 낯선 것은 아니다. 정부 수립 시점부터 5공화국에 이르는 긴 독재정권의 기억은 여전히 뇌리 속에 박혀있다. 우리는 ‘박정희의 딸’ 덕분에 ‘다시 꾸는 악몽’ 같은 것이 상연되는 극장에 있는 것이다.
불평등과 부자유는 항상 깊이 연관되어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쓴 세계적인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말처럼 ‘자유’의 반대말은 ‘가난’이다. 불평등은 사회적 약자와 타자들에 대한 배제와 억압에 의해 재생산된다. 권력은 경제적 불평등을 유지ㆍ확대하기 위해 정치적 억압을 행한다. 여성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을 생각해보면 쉽다. 공부하고 알 권리는 정치 참여뿐 아니라 경제적 기회에 대한 권리인 것이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것은 대체로 불균등ㆍ불평등하게 분배돼 있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를 다닐 권리가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헬조선’의 개인들은 사실 언제나 피눈물나게 ‘노오력’해왔다. 그 ‘노오력’의 배후에는 ‘경쟁’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비상한 성실함으로 제약을 돌파해왔고, 독학자들은 특히 좋은 수저를 물려줄 부모를 만나지 못했음에도 학교 바깥에서 그런 일을 이뤄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헬조선’의 매우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독학자는 여성들이다.
치타 여사의 영어 실력
1960~80년대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은 전적으로 민중의 희생을 통해 달성됐다. 노동자와 농민은 저임금ㆍ저곡가를 감당했고 월남에서 피를 흘려 경제성장의 종잣돈을 벌어왔다. 그런데 세계 최장 시간 노동과 무노조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반공 독재와 인권침해는 여성들에게 더 강하게 부과됐다. 젊은 여성들은 가정에서의 남존여비를 견디며 교육 기회를 남동생이나 오빠에게 양보하고, 직장 내의 일상적인 성차별ㆍ성희롱을 견디며 산업 전사가 되어야 했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11회에는 정환이 엄마 ‘치타 여사’(라미란 분)가 알파벳으로 자기 이름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영어 문맹이라는 에피소드가 시청자들의 관심과 공감을 끌었다. 골목 전체의 리더격이며 누구보다 머리가 좋은 치타 여사가 사실 알고 보니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것이다. 이는 실제 사실을 반영한 것일 테다.
치타 여사 세대의 영민한 많은 한국 여성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없었다. 100% 믿을만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의 여성 문맹률은 1960년에 약 40%, 1970년에는 17.6%(국세조사보고, 13세 이상 여성)였다. 여성의 중학 진학률은 1966년 33%, 1970년 46.5%, 1975년 67%였고 고등학교 진학률은 1970년의 24.1%, 1975년의 35.5%, 1980년에 62.2%였다. 그러니까 치타 여성 세대 젊은 여성들의 경우엔 초졸~중졸 정도의 학력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어머니들은 그보다 훨씬 낮은 학력을 가졌거나 문맹자인 경우도 허다했다는 뜻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여성으로선 보기 드물게 용접공이 됐다. 그러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참혹한 노동현실에 눈을 떠갔다고 한다. 사진은 2012년 김신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김 위원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진숙의 공부와 삶
1960년생인 김진숙의 삶도 그 즈음 한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들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중학교까지 다녔고, 18세에 대우실업에서 여공 생활을 시작했다. 버스안내양, 우유 배달원, 신문 배달원 생활을 거쳤다. 수난과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월급이 좋다는 데 끌려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여성으로선 보기 드물게 용접공이 되었다. 그러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참혹한 노동현실에 눈을 떠갔다 한다.
그 과정에서 김진숙은 ‘배움에 대한 갈망’을 산업체특별학급과 야학을 다니는 것으로 채우려 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갖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 거의 잊혀진 산업체특별학급 제도는 박정희 정권이 1977년 3월부터 정규 중·고교의 배움에 목말라 있던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특별학급을 개설하며 시작됐다. 여성 노동자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특별학급이 있는 기업체를 일부러 선택할 정도로 이 제도를 환영했다. 야학은 공부가 필요한 노동자들을 위해 그 시절의 대학생들이 자원봉사 형태로 만든 자발적 교육기관이었다. 그 전통은 식민지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영화 ‘변호인’ 등에 조금 묘사됐듯, 야학은 70~80년대 정치적ㆍ문화적 노학연대의 산실이기도 했다.
김진숙은 제도권 밖 학교를 다니며 공부에 대한 허위의식을 버리게 됐다. 사진은 희망버스 1주년을 맞아 2012년 서울 종로구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를 찾은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함께 공부하는 삶
‘독학’의 의미가 단지 검정고시 같은 공인된 제도를 통해 대체 학력을 갖췄다는 것은 아니다. 독학자들은 스스로의 힘이나 또 다른 비제도적인 방법을 통해 고학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지성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러니 독학에는 ‘공학(共學)’도 포함시켜야겠다. 1970~80년대의 야학, 독서모임 등에서 행해진 일은 민중의 자기구제며 자기계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배움 자체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 학교 아닌 학교에서의 경험과 앎에 대한 서사는 많이 남아 있다. 노동사 연구자 유경순이 쓴 ‘나, 여성 노동자’란 책을 보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일을 하던 어린 청계피복 여성 노동자들이 옷 사이즈를 표시한 S M L XL 같은 영어 알파벳을 읽을 수 없는 건 물론 한글 문해력을 갖지 못한 경우도 있었기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한글반을 만들어 서로를 가르쳐준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나온다. 또 여공 생활을 하기도 했던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에, 아니 그보다 훨씬 절절하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석정남이 쓴 ‘공장의 불빛’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과 자기계몽의 서사가 있다.
그런데 김진숙이 그 학교 아닌 학교에 다닌 과정은 계층상승에 대한 욕망과 공부에 대한 허위의식을 버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25살쯤에야 찾아 갔던 야학에서 전태일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아줌마가 가슴에 뭔가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우는 것도 궁상스럽고”, “제목에 ‘노동자’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들어 받아다 놓고는 펴 보지도 않은 채 먼지만 앉히고 있었”던 ‘전태일 평전’을 읽고는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며 깨달음을 얻게 됐던 것이다.
그 이후 김진숙의 삶은 우리가 잘 아는 바다. 그녀는 가장 헌신적이고 뛰어난 노동운동가의 한 사람이 되었고, 2011년 희망버스 운동의 주역이 됐다. 그녀의 배움은 자기만의 행복이나 계층상승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보편적인 가치를 향한 것이 되었다. 그녀의 책 ‘소금꽃 나무’에 실린 글들은 웬만한 제도 문학작품보다 더 강하고 진정한 지성을 담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공들. '외딴방'을 쓴 신경숙, '소금꽃 나무'를 쓴 김진숙처럼 이 같은 공장에는 여러 '김진숙'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치는 시민의 힘
1970~80년대의 여성 노동자들이 가졌던 앎과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는,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한국사회 발전의 자양이 되었다. 그 열망과 에너지는 물론 복합적인 것이라서 계층상승의 열망이나 허위의식도 있었겠다. 중요한 것은 그들 대한민국의 가난한 딸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그들이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해 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여성 노동자들이 참여한 1970~80년대의 노동운동에도 표현된 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또 불평등과 차별의 극복 자체가 바로 우리나라의 민주화나 근대화에 다름 아니다.
세습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신독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사회엔 지금 그런 극복이 또 필요하다. 그 힘은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치려는 시민의 의지에서 나온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6.1.14 한국
김진숙(1960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다. 현재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직으로 노동운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진숙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태생이다. 1981년 10월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용접공으로 일했으며, 1986년 2월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해 7월 어용노조 폭로 유인물을 배포해 해고되었다. 대한민국 여성으로는 최초의 용접공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12월 15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한진중공업 측이 생산직 근로자 400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결정한 것에 반발하여, 2011년 1월 6일부터는 한진중공업 내의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2011년 11월 10일, 노사 합의에 따라 309일간의 고공 농성을 마치고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라 고공 농성을 시작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노조 조합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1월 3일 아침, 침낭도 아니고 이불을 들고 출근하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새해 첫 출근날 노숙농성을 해야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겨울 시청광장 찬바닥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가장에게 이불보따리를 싸줬던 마누라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살고 싶은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고 싶은 겁니다.
지난해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한다고 합의한 이후 한진에서 3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잘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자르겠답니다. 하청까지 1000명이 넘게 잘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 된 시간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목숨들을 안주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배당금 176억 원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되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을 지킬 겁니다.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자 죽은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듯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 씨는…재규 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 김진숙 올림
김진숙이 '세시봉'을 보며 화가 났던 이유는…" 공선옥 소설가 2011.05.25.
나는 이곳 한국 땅에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내 직업은 그러니까, 작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다. 그러나 나는 소설만 쓰지 않고 이 글 저 글 닥치는대로 쓴다. 그러니까, 소설가이자 잡문가인 셈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글로 쓴다. 세상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당연히 나는 글 쓸거리가 없어 당장에 글쓰기를 멈춰야 할 것이다.
쓴다. 세상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당연히 나는 글 쓸거리가 없어 당장에 글쓰기를 멈춰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로서는 다행히도 세상에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셀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상불가였던 사건들 또한 셀 수 없이 터진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온갖 이야기들을 글로 써서 먹고 사는 나는 그래서 이 일만은 꼭 쓰고 싶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무도 의식하지 않거나, 의식하려들지 않거나, 모른척하거나, 모른척 하고 싶어 하는 일들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쉰을 넘긴 나이의 김진숙이라는 한 여성 노동자가 부산 영도에 있는 한 조선소의 35미터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또한 김진숙이라는 한 여성노동자가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이유를 알려고 하거나,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김진숙이 그 높은 곳에 근 140여일 가까이 올라가 있는 이유를 알아도 모른척하거나, 모른척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는 지금 그녀, 김진숙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이런 일도 일어나고 있다고. 그녀는 해고노동자였다. 18살에 조선소에 최초의 여성용접공으로 입사했다. 그녀는 하루 13시간씩 일을 했다고 한다. 김진숙이 트위터에 쓴 글 중에 '세시봉'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그들의 노래는 감미로웠다. 미풍처럼 실려나오던 자유의 바람이 나도 참 좋았다. 18살에 객지에 나와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타이밍으로 버티던 벌겋게 충혈된 눈에도 그들은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해 보였고 나는 그게 서러웠다. 해고되고 경찰서, 대공분실, 자리만 바꿔가며 징역을 살 때 몸과 영혼에 가해지는 학대가 일상이 된 시절에도 그들은 참 편안해 보였고 그땐 화가 좀 났던 것 같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거기에 오랜 세월 은둔하다시피 했던 가수 임재범이 나왔고, 사람들은 지금 임재범에게 열광하고 있다고 한다. 짙은 소울(soul)과 카리스마가 있다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임재범에게 열광하는 그 순간에도 또 어디에선가는 누군가가 임재범의 노래를 들으며 좋다고 여기면서도, 왠지 서럽고 왠지 화가 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김진숙은 자신이 세시봉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서러워하고 화가 났지만 이 시대 누군가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서럽고 화가 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 김진숙은 그런 세상을 위해, 누구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마냥 행복해하고 누구는 서러워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지금, 지상에서 35미터나 올라간 조선소 크레인 위에 지난 1월부터 올라가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런 사람에게는 이 한 마디 말은 들려주고 싶다. 김진숙은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사회는, 나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사람들이 아닌 다 같이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자기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라도 왔고 그마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왜 쉰이 넘은 해고노동자 김진숙이 지난 겨울부터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지,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궁금하다, 싶은 분들에게는, 오는 6월 11일 오후 6시 서울 시청 앞으로 나오시라고 권한다. 거기, 김진숙에게로 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하여 '희망의 버스'다. 당신이 '희망의 버스'를 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대답은 '희망의 버스'를 타고나면 저절로 주어질 것이다.
물론 나도 간다. 누구를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 한심하고 악독한 세상에서 마냥 편할 수 없는 나를 구하러 간다. 그렇게 나와 우리를 구하러 오는 이들과 만나러 간다. 나는 광주에서 또 그렇게 마음이 닿는 사람들을 만나 또 한 대의 '희망의 버스'에 올라 탈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또 다른 지역에서 '희망의 버스'를 출발시켜주면 좋겠다. 조금은 다른 세계를 꿈꾸며 달리는 이 '희망의 버스'가 1대, 2대 늘어갈 때마다 '해고는 살인이다', '일터의 구제역, 비정규직'이라는 아픈 이야기 없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밝아져가는 것을 꿈꿔본다.
'김진숙'이라는 희망 프레시안 2011.6.24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되, 지배받지 않는다' 온 몸으로 입증"
김진숙이라는 이름은 이제 단순히 노동운동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진숙은 연대와 헌신과 희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내려진 해고를 철회하기 위해 35미터가 넘는 크레인 위에서 160일이 넘는 농성을 진행하고 있을 때 그녀는 노동운동가 김진숙을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었다.
김진숙을 한국사회의 희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명하다. 그녀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잊은지 오래인 가치들이 아직 소실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경쟁과 승리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구매력의 크기를 행복과 동일시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우승열패의 원리는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반면 타인과의 연대,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 사람 사이의 우애, 공존 같은 가치들은 한국사회에 너무나 희소하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이런 가치들을 불편해하고,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대, 희생, 우애, 공존 같은 가치들을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없었다. 공존 대신 경쟁을, 우애 대신 소비를 택해 삶이 풍부해지고 인생이 행복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한국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대체로 불행하게 살아 가고 있는데, 그게 꼭 경제적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의 결손에서 비롯되는 바가 더 크다. 요컨대 연대, 우애, 헌신, 희생, 공존 같은 가치들의 결핍이 한국사회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김진숙은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담하여 우승열패 신화에 기꺼이 무릎 꿇을 때 이를 홀로 거부하며 단호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투쟁은 경쟁, 승리, 효율에 맞서 연대, 우애, 헌신, 공존을 옹호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녀의 싸움이 단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라는 목표에만 갇혀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진숙의 싸움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들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옳다.
김진숙의 삶은 파란과 곡절로 점철됐다. 그녀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핍진한가를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생이 모욕이고 고난일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보고 알겠다. 그녀가 진정 존경스러운 것은 인간의 존엄을 유보하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도 그녀가 스스로를 오롯이 지키며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지배당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김진숙은 보여준다.
분명 김진숙은 조남호 회장보다, 허창수 회장보다, 이건희 회장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진숙은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깡보리밥에 쥐똥 섞인 도시락으로 버티던 그곳에서…" 송경동 시인 2011.06.10
아, 눈물이 난다.
위는 우리가 서울에서 마지막 '희망의 버스' 진행팀 회의를 하는 동안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1분전, 5분 전, 10분 전으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현장의 소리, 아비규환의 소리다.
'희망의 버스'가 뭐라고, 7개월여째 답 없이 절망의 나날을 보내왔던 현장의 노동자들이 다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다.
절망은 이제 정말 지겹다는, 체념과 낙담도 이젠 싫다는, 그래서 신나게 놀고 오자는 날라리 '희망의 버스'를 지키기 위해, 나를 위해, 지금 누구인가가 저 남도 끝에서 울부짖으며 '현대판 사제 용병'인 용역깡패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캠핑 가듯이 즐겁게 가자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건 연대의 마음 뿐이라고, 힘이 되지 않는 시와 노래와 춤과 그림 뿐이라고, 그거라도 힘이 된다면 함께 하자고, 가족들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인의 손을 잡고 소풍 가기 전날처럼 마음이 설렌 이 착하고 순박하기만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 자신의 절망만으로도 어깨가 무너지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싸우고 있다. 회의를 중단하고 트위터 상에 쉬지 않고 올라오는 실시간 글들과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며 모두의 눈이 충혈되고, 말이 없다.
아, 이 가슴에 용광로의 화염처럼이나 뜨겁게 타오르는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이런 악독하고 예의없는 세상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어제는 다시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박00 조합원이 '노동탄압 중단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화장실에서 자결을 했다. 그렇게 죽어간 노동자들이 쌍용자동차 희생자 15분을 포함해 헤아릴 수 없다. 김진숙 선배가 지키고 있는 그 85호 크레인을 지키기 위해서만 김주익과 곽재규 열사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십수년 사이 그렇게 이 땅에는 '정리해고'라는 구제역이 창궐했다. '구조조정'이라는 쓰나미가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을 덮쳤다. 이것은 어쩌면 원폭보다 무섭고, 광우병보다 치명적이며, 조류인플루엔자보다 무서운 일상적인 테러이며 살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비정규직이라는 벼랑으로 내몰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는 살 수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용접슬러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용접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치덕치 부쳐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마냥 뒹굴며 살아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한진중공업은 몇 년전 필리핀 수빅에 수조원에 달하는 공장을 지을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 온 것은 무자비한 구조조정 뿐이었다. 2010년에만 비정규직 포함 3000여명이 잘렸고, 300명이 강제휴직을 당했고, 울산공장이 폐쇄됐다. 경영이 위기에 처했냐고. 천만의 말씀. 2011년 올해 270여명을 다시 희망퇴직으로 정리하고, 나머지 170여명을 정리해고 통보한 다음날, 대를 이은 조남호 사주 일가와 주주들은 174억의 고배당을 챙겨갔다.
한진중공업만 그러냐고? 김진숙 선배의 말 대로 '이병철 회장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가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다.
이미 900만에 이르는 노동자 서민들이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도 '사회적 살인'에 다름아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 공공부문 사유화 등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의 위기로 전가하는 구조조정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한진중공업엔 우리들만 다닌 게 아니라고 한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맘놓지 못했던 아내들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들도' 다녔던 공장이라고 한다.
도대체 수십년간 '일요일 날에도 특근 나가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우리가 어떻게 경영을 어렵게 했냐고 한다. '지 마누라, 지 새끼 옆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냐고 한다.
아, 어떻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회를 용인하며 살아야 할까.
우리는 모두 조세희 선생의 말처럼 바보인가, 아니면 모두 도둑놈의 편에서, 남의 생과 열망을 도둑질 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인가.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바꾸려 하지 않는가.
김진숙 선배의 말처럼 왜 '맨날 우리만 죽고, 맨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까.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먼 부산 바닷가 한적한 공장 앞에서 온 몸으로 지키고자 하는 '희망의 버스'는 잘 준비되고 있습니다. 근 1000여명, 부산 지역에서 연대하는 사람들까지를 합치면 근 2000여명의 '사람'들이 11일밤 어김없이 부산대교(신 영도다리)에 도착해서 전국 각지에서 고이 가슴에 품고 온 양심의 촛불, 연대의 촛불, 사랑과 평화의 촛불을 켜들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고운 손수건을 준비했고,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에서는 고맙다고 양말 선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장투닷컴에서는 따뜻한 한 모금의 술과 홍보물 전체를 내주었고, 우리 시대의 어른이신 문정현 신부님께서 저 먼 군산에서 국밥을 마련해 오신답니다.
시인, 소설가, 미술인, 사진작가, 어린이동화작가, 다큐감독들, 사진작가들, 가수들, 무용가들도 오십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수많은 사회단체들의 소중한 분들이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전국 각지의 철거민들, 해고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 시대의 절망을 함께 넘어보자고 부산으로, 부산으로 향합니다.
밤새워 노래와 춤과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농담과 해학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환대와 우애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힘이 될 거냐고요.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만큼 강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 이래 그 어떤 총칼과 억압과 배제도 '사람의 말들', '사람의 절규들', '사람이고자 하는 희망의 몸부림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때론 외롭고 힘들더라도 그 길에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든 빛이 비칠 것입니다.
늦었지만, 함께 이 '희망의 버스'를 지켜 주십시오. 함께, 저 절규하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켜 주십시오. 저 외로운 여성노동자 김진숙의 아픔을 지켜 주십시오. 그가 절망 속으로 뛰어들지 않게, 그들이 눈물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우리가 함께 버팀목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나를, 우리를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부산 지역 시민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내일이면 '희망의 버스'를 타야 하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의 전 오랜 벗 하나가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쌍용자동차 77일 투쟁 때는 다리를 다치기도 했던 친구입니다. 내가 기륭전자비정규직 투쟁으로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앞을 점거하고 있을 때, 그 어두운 의사당 정문 앞에서 싸워주기도 했던 동지입니다. 어제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들 농성장 새단장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고. 재능교육비정규직 유명자 지부장은 수술을 거부했다고, 가방에 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돕기 CMS 용지를 가지고 다니는 너무나 씩씩한 동지였는데, 너무 강인한 벗이었는데, 이 견딜 수 없는 절망들에 휩싸여 있는 게 너무나 힘들었던가 봅니다. 그 강인하던 눈에 눈물이 흐르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말은 안해도 얼마나 많은 절망과 패배가 쌓였으면 저럴까. 속으로 복받치는 이 분노 때문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절망을 넘어보자고, '희망의 버스'를 가장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게 되었습니다. 거기 수많은 마음들을 얹어주신 분들께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이제 나가 봐야 합니다. 오늘도 보신각에서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100만 행진> 세 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고, 그 자리에서 다시 <범국민 민족민주열사 추모 전야문화제>가 열립니다. 끝나고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등록금 없는 세상>이라는 손피켓을 들고, '반값 등록금'을 위해 동맹휴업을 하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에게 연대하러 가자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저 부산 한진중공업에서는 자신들이 수십년간 일해 온 공장에서 쫒겨나지 않기 위해 날을 꼬박 새며 울며 불며,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기 위해 싸우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 현대차 아산에서는 목을 매단 또 한 명의 김주익과 곽재규를 지키기 위해 착취의 라인을 멈춰 세우고, 눈물 흘리고 있을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오늘이 87년 6.10항쟁 24주년이 되는 날이랍니다.
슬프지 않습니까. 24년이 흐른 오늘의 이 상황들이.
제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공장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오늘 당신들이 겪고 있는 이 수모를 내일은 우리가 갚아 주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쫒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평지에서 밀려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는 저 하늘 가까이로 쫒겨 올라갈 수 없습니다. 쫒겨 나야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기업들입니다. 이 반사회적인 자본가들입니다. 그것을 지켜주고 있는 이 썩어빠진 정부와 체제입니다.
아무리 저들이 우리에게서 '희망'을 뺏어가려 해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웃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낙관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연대의 마음을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157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연설문 11.6.12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긴 왔군요. 이런 해방감들이 얼마만입니까.
8년전 김주익이 한 달 넘게 봉쇄된 공장이 마침내 뚫려 사람들이 이 85호 크레인 밑에 모이던날 그 소 같은 사람이 울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을 우리는 끝내 못지켰습니다.
어제 용역들에게 공장문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걸 보면서 볼트 한가마니를 올렸습니다. 저 혼자 남게 되더라도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습니다. 많이 보고 싶었고 애타게 기다린 만큼 만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오작교가 되어 등허리가 다 벗겨지더라도 우리 조합원들과 여러분들 꼭 만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조합원들 많이 다치고 귀때기 새파란 용역아이들한테 내동댕이 쳐지고 짓밟히는 걸 전 여기서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6개월을 집에도 못가고 불면의 밤들을 술로 견디며 깨진 어항에서 흘러나온 금붕어 처럼 숨을 헐떡거리던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우리의 싸움이 정당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조합원들 한번 봐주십시오. 평생일한 직장에서 아무 잘못 없이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퇴거압력에 손해배상 가압류에 경찰서 몇 번씩 불려 다니고 가족들 성화까지 견뎌가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저 지친어깨에 가족들 생계를 걸머지고 밤엔 절망으로 쓰러지고 아침이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희망을 찾아 기를 쓰고 버텨온 사람들입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가 목숨 던져 지켜낸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나를 버린다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수 없는 이유가 백가지도 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조합원들이 혁명적 투지로 무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키고자 하는게 아닙니다. 6개월 전까지 살아왔던 삶을 지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저녁이면 땀 냄새 풍기며 집에 돌아가 새끼들 끼고 저녁 먹고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누려왔던 그 소박한 일상들을 지켜내고 싶은 것뿐입니다.
술만 먹으면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저 못나빠진 사람들. 가슴 속 맺힌 한을 이제 그만 풀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8년을 냉방에서 살았던 저의 죄책감도 이제는 좀 덜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 다림의 애비, 고지훈, 김갑렬을 기억해주십시오. 짤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암으로 언제 운명하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정리해고로 무너지고 용역깡패에게 짓밟힌 저 사람들을... 조남호가 버리고, 언론이 버리고, 정치가 버린 저 사람들을 함께 지켜주십시오.
백기완 선생님, 문정현 신부님, 박창수 동지 아버님, 박종철 동지 아버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뜨겁게 고마운 여러분.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 여기까지 왔던 그 마음 그대로, 아흔 아홉 번 쓰러져도 결코 무릎 꿇을 수 없었던 그 마음 그대로, 굳건히 지켜내겠습니다.
기륭전자 동지들이 버텨왔듯이, 쌍차동지들이, 유성동지들이 버텨가고 있듯이, 그렇게 꿋꿋히 견뎌 나가겠습니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에게 감염된 인사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그날 부산 영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이계삼 밀성고등학교 교사 2011.06.17.
지난 주말,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다녀왔다. 지금껏 수도 없이 집회를 다녀왔지만, 정말 그런 집회가 없었다.
그날 그 야심한 시각에 방방곡곡에서 모여 날밤을 꼬박새운 1000명 넘는 사람들이 도무지 남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크레인 위에서 울려 퍼지는 김진숙의 연설을 들으며 나도 참가자들도 모두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좋았고, 작업복 입고 곳곳에 앉아있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을 얼싸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연대의 정이 뜨거워졌다.
그랬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는 일이 괴로웠다. 그래도 이곳이 사람 사는 세상인데, 이곳이 정말 사람이 사는 곳이 맞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않은가. 의로움에 목마르고, 진실에 굶주린 사람들이 그렇게 먼 데서부터 반도의 맨 끝자락으로 모여들었다. 그날 만난, 서울에서 기자 노릇하는 내 친구는 "취재가 아니라, 그저 김진숙 선생께 위로받고 싶어서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날 함께 한 많은 이들이 또한 그랬을 것이다.
새벽 네 시가 다 되었을 것이다. 김진숙의 우렁찬 목소리가 우리들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 군요~"로 시작하더니 "나의 등허리가 다 벗겨지더라도 꼭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던 조합원들을 가리키며 그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 달라고, 잘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 달라 했다.
귀때기 새파란 용역깡패들에게 내동댕이쳐지고, 언론이 버리고 정치가 버린, 평생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겨 공사판을 전전해야 할 운명에 놓인 이들의 이름을 그는 하나하나 불러 주었다. "저들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백 가지도 넘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리고 우리의 귓전을 뜨겁게 울리던 마지막 외마디 기다란 외침, "투쟁~~~."
그의 연설이 끝났을 때, 나도 우리 주변도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냥, 이 자리가, 그의 연설이, 그리고 함께 모인 우리들 스스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실이라는 것, 정의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언제나 수렁 속에서 출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시절에 김진숙은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2003년, 김주익이 129일을 버티다 끝내 세상을 버렸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이었다. 5년의 용접사 생활과 25년의 해고자 생활로 얼룩진 30년 한진중공업 노동자로서 마지막 결단이었다. 10년간 4000억 원이 넘는 흑자를 내면서도 수백 명을 퇴직시키고, 구조 조정에 관해 체결한 협약을 모조리 어기고, 끝내 170명을 정리 해고하는 회사, 그 170명을 자르면서도 자기들은 174억 원 배당금을 챙겨가는 회사,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해고자로 버텨온 30년 세월이었다.
1월 6일 새벽이었다고 들었다. 김진숙은 준비해 간 쇠톱으로 세 시간 동안 톱질을 해서 자물쇠를 잘랐고, 바깥에서 들어올 수 없도록 안에서 출입문을 용접해 버린 뒤, 크레인으로 올라가 8년 전 김주익이 목을 매단 바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위에서 김주익의 129일을 넘어 여섯 달을 버텨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지만, 이제는 그가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 그에게 받았던 큰 위로를 깊은 감동을 시간이 흐르기 전에 기록해 두고 싶었고, 그가 호소한 연대의 힘이 더 커질 수 있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김진숙의 책을 함께 읽자고 제안한다. 나는 김진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가 목숨을 걸고 호소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심장한 한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여전히 주저되는 이들에게 그의 책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펴냄)를 소개한다. 단언컨대, 이 책은 <전태일 평전>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자신, 이 책에서 고백하듯, 그의 삶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전태일 평전>과의 만남이었듯, 이 책은 <전태일 평전>의 속편으로 읽히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이 당대의 현실은, 그 누구도 이렇게 정직하고 절절한 언어로 채록한 바 없기에 소중한 기록물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현실을 조금도 피해가지 않고 맞서 온,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홀로 맞서고 있는 한 정신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김진숙이 담아낸 당대의 현실
▲ <소금꽃나무>(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외람되지만, 그는 글솜씨('솜씨'라고 표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가 참으로 훌륭하다. 이 책 2부에는 그가 쓴 인물 르포가 실려 있다. 그가 부산노동자연합의장이던 시절, <연대와 실천>이라는 노동 운동 기관지에 현장 노동자들을 취재하여 소개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섬세한 관찰력도 그렇고, 문장에 강건한 힘이 있다. 적절하게 맺고 끊어가면서 핵심으로 육박해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참혹한 공장 시절에도 책꽂이에는 이상과 김춘수를 꽂아놓았다던 왕년의 "문학소녀"였던 그가 옮겨놓은 노동자들의 언어에는 판소리 사설 같은 펄펄 뛰는 구어 감각이 살아있다. 대우조선 노동자 권동기 씨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대목을 보자. 그러고 보니 정말, '노동자 판소리' 같다.
나 말이 고 말이랑께. 우린 밀가루 개떡도 못 주는디 회사에선 자꾸 찰떡을 갖고 눈앞에서 흔들어 쌍께 언 놈이 우리 뒤에 줄을 슬 것이요. 속궁합 잘 맞는 새신랑 새각시 배꼽 맞추대끼 조합원허고 집행부 허고 딱 딱 맞아떨어져야 아그도 겁나게 맹김시로 진 밤 짜른 밤 날 새는지 몰를 것인디, 못된 시엄씨가 가운데 딱 낑기 갖고 손도 한나 못 잡게 혀 붕께 참말로 환장을 혀 불제. 오신 짐에 저 시엄씨나 논바닥에 피 뽑대끼 싹 잠 뽑아 가 불씨요이. (…) 인자 에지간한 건 다 물어봤지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딱 허고 싶은 건 대우조선 노존 꼭 일어슨다. 그라고 이 권동긴 대우조선에서 뻴쭝맞은 사람이 아니라 표준이다. 요말만 딱 쓰시요이. 딴 말 다 빼 불고. 인자 나 말 끝. 딸꾹.
난 이 책을 읽으며, 노동 운동가이기 이전에 탁월한 작가 김진숙을 생각했고, 비슷한 시절 비슷한 체험을 그려낸 작가 신경숙과 김진숙의 결정적인 엇갈림을 생각했다. 전라도 정읍에서 서울 구로공단으로 갔던 신경숙과, 강화에서 부산 영도조선소로 온 김진숙은 그 방향의 엇갈림만큼이나, 끝내 그들 두 사람의 삶의 방식도 언어도 극단적으로 엇갈린 것 같다.
대체로 그 시절의 삶을 우리 문학은, 이 당대의 언중들은, 신경숙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둡고 슬픈 가계, 청춘
그의 가계는 어둡고 슬프다. "딸년이 빨갱이가 되어 있다'는 기관원들의 엄포에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열 시간 넘게 걸려 딸을 찾아온 아버지와 부산역 대합실에서 마주앉은 장면은 슬프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아버지의 손은 거북이 등껍질 같고, 마른 장작개비 같다. "다친 데는 없냐", "밥 굶지 마라" 딱 두 마디 하신 아버지는 다시 아픈 다리를 끌고 다시 강화로 돌아갔고, 얼마 뒤 쓰러졌고, 몇 년간 자리보전하다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에 딸만 줄줄이 나온 집안에서 그래도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아들은 연이은 실패 속에서 몸과 마음이 망가져버렸고, 노숙인이 되어 쪽방에서 소줏병을 끌어안고 죽었다. 가출에서 돌아온 조카는 몸과 마음이 이미 망가져 있었다. 동생이 죽어 가족들이 모였을 때, 강화 외포리 차부에서 점방을 하는 언니는 엄마를 대신해서 가게를 보던 딸이 전화로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물으면 통곡하다 말고 "큰 거? 짝은 거?"라고 묻고는 "짝은 건 820원" 대답하고는 다시 운다. 슬픈 가계, 우리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평균치를 밑도는, 어둡고 슬픈 가계도이다.
김진숙은 열다섯 살에 가출을 했다. 가난한 살림과 청춘의 방황이 모두 도졌을 것이다. 입학식날 교복을 못 입고, 육성회비를 제 날짜에 못 내고, 송아지가 아파 학교를 못 갔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열다섯 살, 제까짓 게 외로움이나 패배가 뭔지 알겠나 싶은 그 나이에, 극렬히 외로웠고 번번이 시시각각 무참히 패배했다. 그때 외로웠노라는 말보다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전교조 선생님이 한 분이라도 계셨더라면, 나 같은 것도 어쩌면 한 날쯤은 빛나는 날이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구절이 내게 콱 박혀온다. "전교조 교사". 나를 포함한 지금의 전교조가 그의 기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말고도, 유년의 외로움과 패배의식에 대하여 "전교조 교사"들에게 기대를 거는, 사회 변혁에 대한 순정어린 희망에 마음 뭉클하다. 이것이 또한 김진숙이다.
이 깡마른 영혼의 소녀에게 남은 최후의 유일한 꿈은 결국 제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래서 부산으로 왔다. 하얀 벽 위로 새카맣게 기어오르던 빈대에 물어뜯기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가 태풍으로 쫄딱 망하기도 했고, 아침과 저녁에는 신문배달을 했고, 낮 시간에는 다방을 돌며 땅콩과 주간지를 팔았다. 귀찮도록 달라붙는다는 소리 들어가며. 우유 배달, 샴푸나 세제 외판원도 했다.
언제나, 하루 종일 걸었다. 한겨울에도 연탄불을 못 피운 방에서, "이불 하나로 한 자락은 깔고 한 자락은 덮어가면서" 3년을 살았다. 얼마나 악바리였는지, 친구 만나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새우깡 한 봉지가 아까워 만나는 친구 하나 없이 20대를 보낸 사람이 김진숙이다. 그러나 그 나이의 처녀가 책꽂이에 이상과 김춘수를 꽂아 놓기도 했던 문학소녀가 그렇게 강퍅한 심사로 버틸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점심시간, 줄 서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늘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울대가 뻣뻣하게 아파서 밥이 잘 안 넘어간다든지,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 줄만 써 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한진중공업에 들어가 처녀 용접사로 살던 시절, 산업재해를 당할 뻔한 순간이 있었다. 가용접해 놓은 철판이 터져버린 것이다. "이제 죽는다"는 직감 속에서 그 섬광 같은 찰나에 "이제 놓여난다는", 죽음에 대한 확신이 주는 편안한 느낌이 있었고, 또 하나 스쳐가던 그림이 있었다.
버스 안내양하던 시절, 배차 주임, 기사, 정비사들 따위 담배를 꼬나문 짐승들 앞에서 알몸 수색을 당하던 기억이다. 그 기억이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다.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 그들에게 자행된 악마적인 관행이었다. 나는 이 글을 두어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목이 멘다.
"갱찰 부리까?" 하는 사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쟈는 겡찰 불러야겠네. 단다히 꼬불칬는갑다." "겡찰서 저나하까요? 겡찰서가 멫 번이고?" "빙시야. 멫 번은 멫 번이고? 일릴리 누질리고 여게 도둑 잡았심니다, 하마 오지."
김진숙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열아홉이었다. "가방끈 짧고 생쥐 콧구녕에 틀어박을 돈도 없는" 아이가 홀홀단신 객지에 나와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일인지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은 뒤에도, 마주쳐야 했던 끔찍한 시간. 끝내 그들의 요구를 따라야했던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게 아니라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전태일과의 만남, 극적인 반전
김진숙이 이 지옥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고, 거기로 나 있는 외나무다리의 이름은 '공부'였다. 그는 정말 악바리였다. 남정네들도 견뎌내기 쉽지 않은 조선소 용접사가 되어 40킬로그램이나 되는 용접 홀더를 매고,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백척간두에 서서, 뇌수가 라면발처럼 흩어져 나뒹구는 주검을 지켜보며, 용접 불똥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막아가며 건너가고자 했던 '공부'라는 외나무다리.
그 열망을 안고 찾아간 야학에서 그는 전혀 뜻밖에도 전태일을 만나게 된다. 그가 갈급했던 것은 영어 단어, 수학 공식이었는데, 그런 건 가르쳐 주지 않고 "근로기준법이니 노동조합이니 하며 뭔가 불순한 냄새가 나던 그 강학이라는 것들을 경찰에 신고할까 망설이기도 했던" 반공 처녀에게 던져진 것이 하필이면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 이후로부터 벌어진 김진숙 삶의 반전은 또한 너무나도 극적이기에 그가 전태일을 만나던 순간을 서술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보려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로 보게 되었다.
그가 전태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은 작은 아파트 한 채에 승용차 한 대쯤은 굴리는, 퇴근 후에는 가끔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하는 창작 합평회를 들락거리기도 하는 주부가 되었거나, 자식들 과외비 학원비에 뼛골 빠지며 잔업에 특근을 자청하는 억척스런 아줌마 노동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전태일이 자신을 향해 던진 양심의 돌팔매를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온전히 다 맞았다. 그는 그 이후로부터 24년 동안 모리배들의 소굴이었던 어용노조를 바꾸는 일에서부터 대공분실 세 번, 부서 이동 두 번, 해고, 머리채가 한 움큼씩 빠지는 출근 투쟁까지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당장 복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여전히 그는 가난했고, 배가 고팠다. 그 시절을 묘사하는 글에서 눈물이 핑 도는 구절, "새벽 유인물을 뿌리러 달려다가다 어느 집 대문간에 내 놓은 사잣밥을 주워 먹으며 전날 진종일 굶은 허기를 메우던 날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만원이 생기면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니던 동지의 운동화를 먼저 사고, 천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그 가난한 사귐 속에서, 우정 어린 동지애 속에서 그는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을 싸우고도 그는 복직하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 "영제 형, 정식이 형"마저 2006년 복직했지만 그만 남게 되었다. 그의 복직을 한사코 반대한 것은 한진중공업이 아니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였다. 그 사이 그는 대한민국 총자본들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이 그는 세 명의 동료를 떠나보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2003년 가을, 김주익이 끝내 세상을 버린 뒤로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겨울에도 냉골에 불을 넣지 않는다. 지독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김주익의 죽음 이후 무렵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겁하고 무력했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혼자 있으면 울었고, 모이면 술을 마시고 급하게 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높은 곳에 서면 뛰어내리고 싶었고 낮은 곳에 앉으면 그대로 묻혀버리고 싶은 욕망이 시시각각 꿈틀거리던 그때.
그러나 그는 김주익의 죽음 이후로부터 나 같은 이에게도, 진실과 정의에 주린 이 땅 많은 이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그는 수없이 강연장에 섰고, 쫓겨난 이들, 기댈 곳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억울한 죽음이 있는 곳에서 제일 먼저 찾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갈수록 강퍅해져가는 이 노동 현실을 잊으려는, 힘없고 약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류를 향하여 가장 매서운 언어를 내리꽂는 논객이 되었다.
그의 강의를 들은 아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오늘날 대학이 김진숙 같은 이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이 입시철이 되어 대학에 제출하려고 준비하는 자기 소개서에 '김진숙'이라는 이름 석 자가 등장할 때, 김진숙으로부터 알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 등장할 때 나는 서둘러 그 대목을 수정해주면서도 번져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선생하는 보람을 느꼈다.
우리가 김진숙과 연대해야 할 백 가지 이유
그는 글 속에서, 그리고 연설할 때에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자주 불러준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처한 구체적 현실의 편린들을, 그들의 소박한 꿈의 목록들을 길게 나열한다. 그가 김주익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비통한 넋은 투혼이 되어 부활한다. 그가 김주익이 남긴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아이는 우리가 함께 키우고 지켜주어야 할 우리 모두의 아들이 된다.
그가 조합원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백 가지가 넘듯, 우리가 그와 연대해야 할 이유가 또한 백 가지가 넘는다. 이 싸움만은 정말, 꼭 이겼으면 좋겠다. 한진중공업 같은 자본이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이 어이없는 자본의 전횡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삶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내가 기르는 아이가 이 야만의 이빨 앞에서 결코 무사할 리 없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이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망한다.
지금 우리에겐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므로 한 번의 승리가 갈급하다. 그날 하룻밤 사이에 1000명이 넘는 낯선 얼굴들이 하나가 되었듯, 이웃을 발견하는 기쁨, 그들과 어깨 걸고 나아가는 낯선 행복감, 거기서 솟아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자.
잠시 인터넷을 끄고, 김진숙의 글을 함께 읽자.
<소금꽃나무>(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이미 2008년 여름, 국방부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다. 그가 김주익이 죽어 내려온 그곳에서 끝내 살아 이겨서 내려오는 그 순간, 우리 모두 모여 그의 연설을 듣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그의 연설을 들으며, 이 싸움에 어깨를 걸었던 우리들 모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자.
아름다운 김진숙, 힘내라 김진숙! 그와 우리들 모두의 승리를 위해 투쟁
35미터 고공의 노동운동. 309일 점거 농성 결실을 거두다
대한민국의 크레인 점거 농성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그녀의 목표를 달성했다. 부산의 조선소에서 해고된 94명의 노동자들의 재고용된다.
베를린 타게스차이퉁| 대한민국 부산 소재의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노조 관련자들은 금일 목요일 94명의 해고 노동자들의 재고용을 놓고 벌어진 교섭안에 일치를 보았다.
이 결과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309일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와 – 경찰의 호위 및 동행하에 –진료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다. 이 소식을 목요일자 대한민국 뉴스제공자인 연합이 전했다.
경찰은 이후 51세의 김진숙을 무단침입을 이유로 조사하고 체포한다는 방침이다.
„살아서 다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김진숙은 코리아 타임즈를 통해 전했다. „나는 단 한번도 조합원 여러분들을 신뢰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이 힘겨운 투쟁의 와중에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두 개의 거대 노조연맹 중 더욱더 맹렬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국 민주 노동 조합 총연맹(KCTU)의 지부 내부에서 의견불일치가 존재하기도 했다.
김진숙은 지난 1월 6일 35미터 고공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조선소 경영진에 의해서 자행된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해고된 노동자가 재고용 될 때야만이 내려가겠다며 점거 농성을 벌여왔다.
총 1,400명의 노동자 중 400명이 해고되었다. 이 중 1,1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선언했으나 이 파업은 지난 6월 농성 190일 째 협의안을 도출해내기도 했었다. 306명의 노동자들이 이 협의안에 찬성했으나 94명의 노동자들은 농성을 계속해왔다. 김진숙 역시 점거 농성을 계속 이어 나갔다.
금번의 교섭 합의안은 94명의 해고노동자들의 1년 안의 재고용을 담고 있으며 통화 환산에 따라 약 13,000유로에 달하는 금액의 생활비 보조금을 지급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임금이 더 저렴한 필리핀으로 조선소의 일부를 이전하고자 했다.
김진숙은 한 때 한진중공업의 용접노동자였으나 1986년 파업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김진숙은 이와 관련해 한 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민주노총의 지역지도의원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김진숙의 투쟁은 대한민국의 좌파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으나 노조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경찰은 김진숙의 투쟁에 연대하는 움직임에 개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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