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보다 더 무서운 건 막지(莫知)예요
현기영 작가는 한평생 4·3항쟁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양민들의 한과 상처를 소재로 글을 써왔다. 최근 펴낸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에서 그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찾아온 자신의 노년을 아프게 고백하면서도 새롭게 발견한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다. 탐욕스런 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노련해지고 오만한 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후안무치해진다. 젊은 날의 상처는 더욱 예민한 치부로 남아, 겹겹의 가시울타리를 두른 채 윤색되고 포장된다. 연륜을 무기 삼아 삿되게 목청을 높이고, 권위를 지키려고 옹졸하고 편협해진다. 자신을 비우고 성찰하지 못하는 노년은 추하고 고독하다.
등단 후 40여년간 권력과 금기에 맞서 잃어버린 역사를 문학으로 되살리는 일에 매달려온 현기영(75) 작가가 최근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펴냈다. 제목과 달리, 그는 책에서 “도둑처럼 슬그머니” 찾아든 자신의 노년을 아프게 고백한다. “흔들리던 이빨이 두 개나 빠지고, 눈시울도 입꼬리도 아래로 처져서 우울하고 무뚝뚝한 얼굴이 되어버리는” 노경(老境)을 맞이하는 무기력함,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는 인생 끝자락의 두려움. 그러나 작가가 노년의 삶에서 새롭게 발견한 기쁨이 있다.
노경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전과는 좀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 제일 큰 것이 포기하는 즐거움이다. 이전 것들에 너무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흔쾌히 포기해버리는 것, 욕망의 크기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은 자유이다… 허리를 굽혀 앉은뱅이 노랑 제비꽃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유, 드넓은 초원에 가슴을 맞댈 수 있는 자유를 꿈꾼다.(<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작가의 말’ 중에서)
아이가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어른이 되기를 꿈꾸듯, 중년의 나는 “이다음에 늙어서” 행복한 노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적어도, 사위어가는 젊음을 어떻게든 붙잡아보려고 허우적거리는 극성스러움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아닐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격정적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가 노년이 되어 새롭게 발견한 ‘호젓한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잦아들어 잉걸불이 되었을 때, 조용히, 침착하게, 은근히 사위어가는” 노경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운 잉걸불이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 아니라면, 우리가 장작으로 타오를 때 품어야 하는 불씨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난 14일 경기도 분당으로 현기영 작가의 자택을 찾아갔다.
제주 토박이들은 모르는 제주의 역사
그의 집에는 제주 화가 강요배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잿빛 다랑쉬오름이 노르스름한 보름달을 품고 있는 그림이 거실 중앙에 걸려 있고 제주 4·3을 재현한 역사화와 제주 풍경 그림이 크고 작은 액자에 담겨 있다.
“다 진품은 아니고요. 이건 모작(模作)이에요. 허허….”
쑥스러운 미소로 그가 여기저기 걸린 강요배 그림들을 소개했다. 책과 그림, 제주의 수석과 소라패각, 하르방과 수수한 질그릇들이 가지런하게 놓인 그의 집은 그 자체로 작은 “제주향토전시관” 같았다.
현기영 작가는 1975년 단편 <아버지>로 등단한 이후, 한평생 4·3 항쟁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양민들의 한과 상처를 소재로 글을 써왔다. 1978년 발표한 <순이 삼촌>은 4·3 사건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문제작으로 1980년대 내내 판매 금지되었다가 1994년에야 재출간이 허락되었다. 일곱살 때 4·3을 목도한 작가의 기억을 되살려 자전적 성장소설로 쓴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4)는 1999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스테디셀러지만, 2008년 국방부의 불온도서로 지정되었다. 제주는 현기영 문학의 모태이자, 고난의 십자가다.
일곱살 때 목도한 4·3의 비극 문학의 모태이자 고난의 십자가
할아버지·아버지 겪은 참혹한 일 자식세대 위해 극비사항 ‘쉬쉬’ 이주민보다도 토박이가 더 몰라
“문학을 도구로 4·3 진실 규명”
이제는 ‘나 4·3 작가다’ 그냥 인정 75살 나이에 2권 분량 장편 집필 중
매일 오전·오후 두 시간씩 매달려 지워진 기억 소환하는 “기억투쟁”
-제주에는 자주 내려가시나요?
“자주 가는 편이죠. 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면서 관공서나 도서관, 박물관 같은 데서도 강연 요청이 들어오고 해서.”
-전 선생님이 제주에 사시는 줄 알았어요.
“나 혼자 내려가긴 좀 그렇고, 이 근처에 손주들이 살고 있어서…. 집사람이 손주들하고 지내고 싶어 해요.”
거실 탁자 위에 올망졸망 늘어선 손주들 사진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현기영과 서울대 영어교육과 동기로 만나 평생의 문학적 동반자가 되어온 아내 양정자 시인은 어린 손주들을 돌보며 <아기가 살짝 엿들은 말>(2014)이란 시집을 내기도 했다.
-요즘 제주도로 이주하는 젊은 문화예술인이 많다고 하던데요.
“‘이주’가 아니라 ‘이민’이라고 하데. 바다 건너서, 자연환경과 풍습까지 다른 곳으로 가는 거니까(웃음). 그분들은 자연이 좋아서 내려간 거니까 제주도 자연이 훼손되는 걸 막는 데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요. 이주민들은 자기가 선택한 땅이라 제주도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고, 4·3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고 나한테 강연 요청도 합니다. 정작 제주 토박이들은 4·3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토박이들이 잘 모른다고요? 아직도 그렇습니까?
“자기 집안에서 일어난 일, 할아버지, 아버지가 겪은 참혹한 일들인데, 자식들이 알아서 안 좋을까봐 극비사항으로 쉬쉬해온 거죠. 손자세대가 따로 알려고 들지 않으면 이주민보다 더 모르는 (지식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아이러니네요.
“이제는 공무원사회나 학교에서도 교양강좌로 배우려는 분위기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중일 거예요.”
2014년 4·3 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국가추념일이 제정되었지만, 국가폭력에 의해 일어난 어이없는 횡사를 68년이 지난 지금까지 쉬쉬할 정도로, 제주 도민들의 가슴에 박힌 공포의 트라우마는 강렬하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1절 기념 집회에서 있었던 제주 경찰의 발포 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이후 1954년까지 대규모 무력충돌로 다수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현재까지 희생자로 신고 접수된 건만 1만4천명가량이지만, 전 가족이 몰살당한 경우나, 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있어서 실제 희생자 규모는 2만5천명에서 3만명 정도일 것으로 4·3기념재단은 추산하고 있다.
네루다처럼 쓸 거예요. 늙었지만…
-선생님 이름 앞에 ‘4·3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닙니다. 작가 입장에선 이런 타이틀이 거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아시네요.(웃음) 과거에 저의 목적은 문학이었어요. 예술로서의 문학이 목적이고 4·3은 그런 문학을 하는 도구(소재, 배경)랄까. 그런데 하다 보니 달라졌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문학을 도구로 해서 4·3(진실 규명)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고 할 수도 있어요.”
-‘문학을 위한 4·3’이 아니라 ‘4·3을 위한 문학’이라고요?
“독자들은 문학에 이데올로기가 들어가선 안 된다고, 정치적 주장을 담아선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문단의 잘못된 고정관념 아닐까요? 사람들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나를 4·3 작가라고 불러요. 나를 좋게 봐서 그렇게 부르는 경우도 있고, 문학에 이데올로기가 들어가면 문학이 아니니까 저건 문학이 아니다, 그냥 4·3 작가다, 이렇게 부르는 경우도 있고… 처음엔 기분이 나빴는데, 이젠 ‘나, 4·3 작가다’ 그냥 인정해요.”
-요즘 다시 소설 집필을 재개하셨다고요? 역시 4·3에 대한 건가요?
“그동안 4·3에 대해서 중·단편만 썼기 때문에 많은 얘길 못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 2권 분량의 장편을 쓰고 있어요. 그간 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힘들다고 느껴요. 역사적 사실을 장편으로 쓸 때는 내러티브 위주로 많이들 하는데, 역사적 사실과 미학적 형식을 맞춰보려고 하니 어려워요. 문체나 이런 게 잘 맞지를 않더라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시려는 거군요.
“파블로 네루다(칠레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가 이런 얘길 했어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만인 시인 또한 시인이 아니다’라고. 리얼리즘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거기 하나가 더 있어야지, 미학이….”
뒤이은 그의 말은, 혼잣말처럼 나직해서 하마터면 못 듣고 지나칠 뻔했다. 물끄러미 바닥에 시선을 꽂고 중얼거리듯 그가 말했다.
“그런 네루다의 말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늙었지만.”
만 75살에 2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쓴다는 건,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매일 오전과 오후, 각 두세 시간씩 집필에 집중하고, 중간중간 침침한 눈을 쉬게 하려고 5분간 짧게 눈을 붙이곤 한다. 매일 점심을 먹고 나면 동네 뒷산을 가볍게 산책하는데, 높이 오르려 애쓰지 않고 중간까지 천천히 다녀오는 완보(緩步)를 한다. 평생을 걸고 매달려온 4·3 항쟁의 장편서사를 위해서 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유 있고 유장한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
기억의 투쟁, 대가는 혹독했다
나의 글쓰기는 폐광 속에서 어둠을 더듬으며 광맥을 캐는 일과 같았다. 소각된 뒤 재건 안 된 채 버려진 고향마을, 지도상에서도 내 기억에서도 지워져버린 그 마을과 4·3 사건으로 피란 간 후 고3 때까지 살았던 성내의 생활을 작품 속에서 되살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 자주 고향에 내려갔는데, 유년의 기억은 아주 지워진 것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무의식의 지층에 곡괭이질 하는 나의 작업은 말하자면 돌에 피를 넣어 살리는 고고학자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며’ 중에서)
현기영은 자신의 문학을 가리켜 “기억의 투쟁”이라고 한다. 독재정권에 의해 “생존자의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기억의 타살행위”가 행해지는 동안 “너무 두려워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기억의 자살행위”도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기억들을 소환하고 진실을 구해내려는 “기억투쟁”의 기록. 그것은 동시에 “내 존재의 일부가 불타버린 듯한 기억상실”을 극복하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해명”하는 과정이라고 그는 썼다. 현기영은 잃어버린 4·3의 기억을 복구하는 투쟁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냈을까?
-<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나서 큰 고초를 치르셨죠. 그렇게 될 걸 각오하고 쓰셨나요?
“<순이 삼촌>은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처음 실렸어요. ‘잡혀가면 어떡하지’ 마음을 졸였지만, 그래도 젊으니까 한 거지. 근데 아무 반응도 없더라고. 그래서 이어서 두 편을 더 썼어요.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를 다른 잡지에 잇달아서 발표했죠. 그렇게 4·3에 대한 얘기를 연달아 하니까 제주도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내 주변에 모여들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 사투리 쓰면서 친목회처럼 한 1년 만났을 땐가, 1979년 11월에 책이 나왔어요.”
-<순이 삼촌>이 표제작이 된, 선생님의 첫 단행본 말씀이죠?
“그렇지. 그때 마침 그 모임이 있어서 책 가져가서 일부 나눠주고, 그 친구들이랑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집회에 갔어요.”
-와이더블유시에이 위장결혼식 사건(1979년 11월24일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한 집회)이요?
“맞아요. 거기서 내 책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잡혀갔어요. 그날이 토요일인데, 월요일날 내가 재직하던 학교로 성북서 순경들이 날 찾아왔더라고.”
-학생들 보는 앞에서 잡혀갔나요?
“그렇게는 안 하고. 교무실로 잡으러 왔길래, 나도 근사하게 얘기했지. ‘나 마지막 수업 하고 가겠다’ 하니까 기다리겠다고 하데. 수업을 하는데,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거야. 근데 수업 중에 시선을 엉뚱하게 돌리는 녀석이 있더라고요. 가만 보니, 이 녀석이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고 있는 거야. ‘야, 인마! 이 상황에서 뭐야?’ 했지.(웃음)”
-하이고, (웃음) 선생님은 비장한데, 물정도 모르고….
“그리곤 잡혀갔는데 바로 중부서 거쳐서 보안사로 인계하더라고. 난 해병대 출신이라 평소 ‘빳다’ 맞는 거엔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죠. <누란>에 나오는 게 그 상황이에요.”
제주 4·3에 대한 중·단편만 써온 현기영 작가는 두 권 분량의 장편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파블로 네루다의 말에 충실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미학적 형식을 맞추려는 이 작업이 “그간 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힘들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통은 참으로 혹독하다. 그 고통은 숨이 막히게 근육을 경직시키면서 지진에 의한 땅의 균열처럼 살 속 깊이 뚫고 들어가 뼈대와 내장을 찌르고 두개골의 골수를 흔들어대는 것이다… 죄수는 씨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한 한 마리의 똥개로 변하고 만다. 겁똥 싼 한 마리의 똥개, 군복바지에 지린 건더기 없는 물똥.(<누란>(2009) 중에서)
취조실엔 서거한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난 후유증은 컸다. 젊은 군인과 순경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1980년 5·18이 나고 또 잡혀 들어갔을 때는, ‘차라리 죽기’를 각오했다. 종로서 2층으로 끌려갔을 때, 창밖을 보며 ‘견디지 못하면 뛰어내려 죽어야지’ 작정했다. 요행히 몰매는 피했지만 밤샘취조 끝에 20일 구류를 살고 나왔다. ‘불온한’ 글을 쓴 죄였다.
1978년 ‘창비’에 발표된 <순이삼촌>
YWCA 사건 뒤 경찰이 찾아와 보안사 끌려간 뒤 며칠간 심한 매질
‘불온한 글’ 계속 쓴 죄 문제삼아 5·18 뒤 다시 잡혀가 20일간 구류
노년이 되면 욕망 줄어드는 게 당연 젊은이들과 겨루겠다 고집 마라
압축성장기 거친 우리 사회 70·80대
욕망·권력 집착하면 노여움만 쌓여 나이 들수록 자연과 친하게 지내야
하얀 소복의 여인, ‘기영아, 일어나라’
-왜 다시 잡아간 겁니까?
“날 때려서 내보내는 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한 달 만에 그 책이 동나서 재판을 찍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책이 유통된다고 누가 신고를 했다는 핑계로 날 잡아간 거지. 그러곤 책이 판금(판매금지)된 거예요.”
-기소도 안 되고요?
“국가보안법으로 걸면 재판정에서 4·3이 뭔지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여야 하는데, 그걸 두려워한 거지. 그래서 날 재판에 회부 안 하고 그냥 구류에 판금 조치만 한 거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누군가 귀띔해 주던가요?
“구류 살고 나와서 늦은 아침을 먹는데, 보안사에서 날 고문하던 사람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현 선생, 나야!’ 하는데 딱 저승사자가 온 것 같더라고. ‘어쩐 일이세요?’ 하니까 ‘네가 하라고 했잖아.’ 생각해보니, 취조가 끝날 무렵 더 이상 안 때릴 것 같아서 ‘나가면 술 한잔 살 테니 전화하세요’ 내가 그랬던 거라.(웃음) 그래서 전화했다고. 근데 가만 듣다 보니 나한테 말끝마다 반말이야. 그래서 나도 딱 반말로 그랬지. ‘당신, 그때 해도 너무했어!’ 그랬더니 대뜸 ‘어, 이 새끼 봐라?’ 그러데. ‘아, 그런 게 아니고요…’(웃음)”
-꼬리 확 내리셨네요.(웃음)
“그때 들은 얘긴데 ‘그 책은 어떻게 됐어?’ 물어서 ‘재판 들어갔어요’ 했지. 그러니까 ‘어? 재판 안 하기로 했는데’ 그러는 거예요. 나는 초판이 다 나가서 재판(再版)찍었단 얘길 한 건데, 그 사람은 재판(裁判)에 넘겨졌단 얘긴 줄 알고… 하하하.”
-그렇게 치도곤을 당하고 나서 다시 글을 쓸 용기가 나던가요?
“그렇게 매 맞고 보니 어떻게 더는 못 쓰겠더라고요. 날 때린 이유는 더 이상 쓰지 말라는 거니까. 슬픔과 울분이 쌓여서 술만 퍼먹고. 그렇게 한 1년 절망에 빠져 지냈는데, 대낮부터 취해 있던 어느 날, 비몽사몽 중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나타난 거야. 밝은 빛이 비추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생생하게 나한테 다가와선 ‘기영아, 뭐 하고 있니? 허구한 날 술이나 취해서. 이제 일어나라’ 하고 손을 내미는 거예요. 난 신자도 아닌데 그런 신비체험을 하게 된 거지. 그 인물이 내가 만든 순이 삼촌이에요. 순이 삼촌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복합해서 내가 창조한 인물인데, 진짜 사람처럼 나한테 와서….”
-그 이전이나 이후에 그런 식으로 환영을 본 일이 있으세요?
“아니 없어요. 기독교 신자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런 경험을 한다는데, 아마도 ‘다시 일어나야지’ 하는 내 무의식의 반영이겠지.”
현기영은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그해가 가기 전, 구한말 제주민란을 소재로 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를 발표했다. 순이 삼촌은 작가 현기영이 만들어낸 작중 인물이지만, 그것은 공포에 찌든 작가의 자화상이자, 어떻게든 절망을 딛고 일어나려는 자기구원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35년간, 현기영은 때로 탄식하고 좌절하고 패배했으나 어느 한순간 시대의 우직한 기록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한 일은 없었다.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만난 현기영 작가(왼쪽)와 이진순씨. 강재훈 선임기자
늙을수록 쇠약해지고 추해지는 것이 인생인데, 놀랍게도 나무는 늙을수록 장대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니, 나무가 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몸에 파란만장한 서사시가 아로새겨져 있다. 끝없이 반복된 승리와 패배, 안식과 역경으로서의 한 생애, 가물, 폭풍, 혹한, 그 혹독한 시련이 나무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어놓았을 것이다.(<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132쪽)
강물에 몸을 맡겨 바다로 간다
-이번에 내신 책에서 “노년이 되면 자연을 재발견하고 기쁨을 얻는다”고 쓰셨어요. 젊어선 안 보이던 게 보이나요?
“이전엔 못 봤던 게 보이죠. 내가 책에서 ‘욕망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는 대신 얻는 것은 자유’라고 썼는데, 사실 그거 잘못 쓴 거예요.(웃음) 내가 일부러 욕망을 줄인 게 아니라 저절로 욕망이 줄어든 거죠. 나는 아직도 열망이 있고 젊은이의 의식이 있는 것 같은데 젊은이랑 겨루려고 하면 안 되거든. 그걸 담담하게 받아들여야지.”
-나이가 들면 저절로 현명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 든 분들이 자기 직관과 경험을 과신하면서 편협해지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특히 요즘 노인들의 정치적 완고함과 맹목성은 젊은이들을 질리게 합니다.
“무지가 죄란 말이 있잖아요. 진실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종북좌빨이 뭔지도 모르고 무지한 사람들. 이게 무지로만 끝나면 그냥 순진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근데 완강하게 무지를 고수하려는 사람들,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이게 더 무서운 거야. 알게 되면 자기 신념에 손상이 올까봐 ‘쟤네 종북인데, 왜 아니라고 하지?’ 하면서 누구 말을 들으려고도 안 하고, 책이나 기사를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게 ‘막지’(莫知)예요. 아는 거를 금하는 거. 압축성장기를 거쳐온 우리 사회 70·80대들은 책도 잘 안 읽어요.”
-그 연배가 되면 자기가 잘못 알았다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집니까?
“두려움 때문이죠. 자기들이 바뀔 생각은 않고 기존의 신념을 교리처럼 섬기니까.”
-나이가 들면 신체적 노화만 오는 게 아니라 권력의 중심부에서도 서서히 밀려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세를 과시하려고 하고 ‘뒷방 늙은이’ 소리 들을까봐 노심초사하는 걸로 보여요.
“노년이 되면 집안에서 가부장으로서 가지던 권력도 쇠퇴하고 직장에서 누리던 권력도 다시 못 누리게 되죠.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면, 노여움만 쌓여요. 특히 이름과 명예에 연연해온 사람은 이름의 노예가 돼서 두 번의 죽음을 겪게 됩니다. 자기 이름이 잊히는 것 때문에 ‘죽음 같은 쓴맛’을 겪고, 뒤이어서 육체적 죽음을 맞는 거예요. 인생이란, 앞 강물, 뒷 강물 하면서 흘러가다가 하구에 이르면 바다로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난 바다로 안 갈래’ 하면서 버티면, 그게 웅덩이가 돼서 고이고 썩는 거지. 그러면 노년이 추해져요. 자연스럽게 강물 따라 흘러가 버리면 되는데 말예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연하고 잘 어울려야 해요. 자연 속에선 그게 다 치유가 됩니다.”
현기영 작가는 요즘 부쩍, 흙냄새를 맡으며 풀과 나무를 가까이하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흙으로 돌아가 내 몸을 구성했던 원소들을 초목의 뿌리에 내줄 때를 예감하기 때문”이라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그렇게 너나없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주어진 길을 꿋꿋이 헤쳐나갈 뿐, 누구라도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진 못한다.
광란의 들판에서 노인은 풀들과 함께 몹시 흔들렸다. 천지가 온통 흰 눈인데, 그 가운데에서 오직 노인의 흙빛 얼굴만이 유일한 색이었다. 아직 눈으로 덮이지 않은 한줌의 흙, 그러나 노인은 온몸으로 버팅기며 눈보라 속을 꿋꿋이 헤쳐 나갔다.(현기영 1994년 작. <마지막 테우리> 중에서)/ 녹취 김성희 626 한겨레
■ 현기영을 만든 시간들
우리의 첫아이 대학 영어교육과 동급생인 시인 양정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1972년 첫아이를 얻었다.
북촌 나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은 제주 함덕해수욕장 인근 마을인 북촌을 무대로 삼고 있다. 탈도 많고 말썽도 많았던 그 작품을 발표하고 치도곤을 당한 뒤 찾아갔을 때의 북촌 포구.
서울사대부고 내가 영어교사로 10년간 근무했던 그 학교는 반은 달리했지만 남녀공학이었다. 가을소풍의 즐거운 한때.
아지트 제주4·3연구소는 1990년대 집중적으로 4·3 유적지 탐사활동을 벌였다. 어느 겨울 ‘이덕구 산전’을 찾아간 연구소 회원들.
철야농성 1997년 1월, 작가회의 회원들은 ‘문학인 849인 성명’을 통해 안기부법·노동법 날치기 국회 통과를 규탄했다
.
1인 시위 2001년 4월 작가회의는 박정희 기념관 설립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면서 시청 앞에서 현기영, 이경자, 김영현, 김지하 순서로 1인 연쇄시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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