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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아 이런 사람 6 -법의학자 문국진

by 이성근 2016. 6. 26.

 

 

한국 법의학의 역사를 개척한 법의학계의 살아 있는 역사 문국진

자신의 무의식을 최대한 개방할 때 어떤 새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 법의학의 살아있는 역사, 문국진 박사. 우연한 기회에 접한 법의학을 운명이라 믿고, 스승 장기려 박사가 만류할 때도 단호하게 그 길을 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창립멤버이기도 한 그는 '부검은 곧 두벌죽음'이라는 잘못된인식 때문에 위협을 당하기도 했지만, 죽은 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온 청춘을 바쳐왔다.

 

1970년에는 고려대로 자리를 옮겨 법의학교실, 대한법의학회를 창설했으며, 국민에게 인정받는 법의학을 만들기 위해 수십 권의 책을 써왔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음성에는 아직도 설렘이 묻어난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평생 해 올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어떤 계기로 법의학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까

-아주 우연한 기회에 법의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외출을 했다가 우산도 없이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어요. 마침 헌책방이 옆에 보이더라고요. 비를 피할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법의학]이라는 일본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과대학 학생들도 법의학이라는 걸 잘 모를 때여서 의학이랑 법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별 생각 없이 펼쳐봤죠.

 

책 첫 페이지에 '사람에게 중요한 두 가지는 생명과 권리인데, 임상의학이 생명 존중의 의학이라면 법의학은 권리 존중의 의학'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어요. 문화인은 생명보다 권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법의학은 민주적인 문화 사회에서만 발달할 수 있다고도 적혀 있었어요. 그걸 보니 그만 가슴이 뛰지 뭡니까? 상당히 고상한 의학이구나 싶었어요. 책을 사와서 밤새 읽고 또 읽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먹었지요.

 

국과수이 창립멤버이십니다

-그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막힌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법의학자가 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공부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병리학 교실에 가서 주임 교수님께, "병리 공부를 하면서 법의학을 준비하겠습니다." 했더니 반기지는 않으시더라고요. 그랬는데 병리학 교실에 들어간 지 사흘 되었을 때 주임 교수님께서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이번에 나라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창립해서 의사가 필요하다는 공문이 내려왔는데 가겠나?"

 

우연이지만 참 필연처럼 느껴졌어요. 우연히 책을 통해 법의학을 접하고, 졸업하던 해에 국과수가 만들어지고, 그 공문을 제가 받게 되고 말이죠. 그렇게 국과수에 들어가서 1970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변사 사건은 거의 모두 제가 부검을 했어요. 하루에 많을 때는 8, 적을 때는 1구 정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법의학자하고는 말이 통합니다. 인권이 침해당하는 죽음이 없도록, 인간의 마지막 권리가 보장 받을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려고 했지요.

 

법의학자의 길을 걸어 가면서 절망적고 힘든 순간도 분명 있었을 텐데요

-우리나라에는 '두벌죽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있는 말이지요. 사람이 한 번 죽은 것도 억울한데 부검하면 두 번 죽이는 거라는 뜻이에요.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지요. 이렇게 국민들이 부검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어요.

 

한번은 고등학생이 산 위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맞은 자국이 많은 거예요. 시체를 가지고 내려올 수가 없어서 산으로 올라가서 부검을 하게 됐어요. 사과상자 위에 시체를 내려놓는데, 학생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칼을 대면 저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경찰이 겨우 말려서 할아버지를 내려 보내고 나서 부검을 시작했죠. 그런데 갑자기 바로 제 옆으로 도끼가 떨어지며 사과 상자 위에 꽝 하고 찍히지 뭡니까. 할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다시 온 거였어요. 경찰이 막지 않았으면 저는 그대로 죽었을 거예요.

 

그런 일까지 당하고 보니, 법의학 자체가 우리 국민이 반대하는 학문이 아닌가 싶었어요. 사인(死因)을 규명해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건데 오히려 맞아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때가 법의학한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예요.

 

어떻게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제가 학생일 때 '한국의 슈바이처'로 유명하신 장기려 선생님이 서울대 외과에 계셨어요. 무의촌 운동을 함께하며 저를 예쁘게 보셔서 "너는 체력도 좋고 끈질기니까 긴 시간 수술에도 제격이야, 나중에 꼭 외과 해라." 그러셨죠. 법의학을 결심하고 찾아뵈었더니 "이 사람아, 학문도 아닌 걸 하려고 해? 외과로 안 와도 좋으니까 법의학은 하지 마라."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뿌리치고 법의학자가 되었는데,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장기려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찾아뵙고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 이상은 법의학을 못 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외과에 받아주십시오." 그랬죠.

 

선생님께서 뚫어져라 저를 보시더니 "못된 놈. 의학이란 건 쉬운 데가 없어. 네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된다고 다른 걸 하면 또 똑같을 게다. 3년 넘게 쏟아 부은 네 노력을, 네 정열을 버리지 마라. 돌아가서 한 우물을 파라." 하시는데, 너무 강경하셔서 다시 터덜터덜 국과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열정적인 법의학자로 돌아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와중에, 행방불명 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죠. 분노가 극에 달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떼를 지어 청와대(당시 경무대)로 몰려오니까 경찰들이 총을 쐈어요. 그때 국과수가 중앙청 안에 있었으니, 청와대 바로 밑이라 다 보였죠. 데모대 가운데는 의대생들도 있었는데, 총에 맞아 흰 가운이 온통 피에 물든 채로 죽어가는 것도 봤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어요. 그 결과 4.19혁명이 성공했잖아요.

 

인습에 얽매어 두벌죽음을 그토록 반대하던 사람들이 불의의 죽음은 저렇게 못 참는구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구나 하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그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권을 이만큼 옹호하는 국민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법의학의 길을 계속 가자,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았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들려주세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해요. 그런데 말이죠,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게 만만치가 않아요. 시련을 꼭 만날 수밖에 없거든요. 저의 경우만 봐도, 제가 책에서 봤던 이상적인 법의학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어요. 제가 품었던 이상은 무참히 깨지고 또 깨졌지요. 그런데 그런 과정을 이겨내고 오랜 세월 동안 한 우물을 파다보면 어떤 일이고 노하우가 생기게 마련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정말 파고 싶은 우물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일이에요. 이때 '뭐 때문에'가 들어가면 안 돼요.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이렇게 '때문에'가 붙으면 안 됩니다. 의사를 예를 들자면, 세계 최고의 외과 의사가 되어야겠다거나,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어야겠다거나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시작해야지, 부모가 시켜서, 돈을 잘 버니까, 혹은 안정된 직업이라고 의사가 되면 오히려 직업에 선택당하는 꼴이 되는 거죠.

 

법의학을 시작할 때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꾸 생각하다보니 아지랑이 같은 설렘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그 설렘이 있으면 마려움이 생겨요. 미치듯이 하고 싶은 마려움, 그게 있어야 정열이 나와요. 그래야 어떤 역경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밑천이 만들어지죠.

 

법의학에도 국적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니다

-법의학이라는 것이 학문만 해서는 안 되고, 사회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법의학에 국적이 있다는 말은, 선진국의 법의학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도입한다고 관계자들이나 국민들의 이해도가 갑자기 높아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선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의사들을 교육하는 책을 스무 권 가량 썼어요. 또 국민들에게 법의학을 알리기 위해 제가 취급했던 사건 모음집과 같은 법의학 교양서도 틈틈이 냈죠. 나중에는 예술과 법의학을 접목시킨 책을 썼고요.

 

법의학이 국민의 지지 속에 자리 잡는 참다운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법의학은 인권과 관련된 학문이기에 그런 공감대가 꼭 필요하지요.

검사들에게 법의학에 대한 개념을 깨우쳐주기 위해 대법원장을 찾아가 사법연수원, 법무연수원에서 강의를 하겠다고도 했어요. 제대로 알면 태도가 바뀌리라 믿었으니까요. 그렇게 5년 정도 강의를 하자 법의학자를 대하는 검찰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최근에는 법의관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그 드라마를 유심히 봤는데, 법의관에 대해 왜곡해서 표현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마지막이 참 훌륭했어요. 생명을 바치더라도 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결론 앞에서는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지요.

 

그 드라마 덕분인지 작년에 법의관에 지원한 사람이 15명이나 되었어요. 이때까지 이렇게 많이 지원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것도 10명이 여자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쓴 50권의 책보다 드라마 한 편의 힘이 더 크구나 싶었어요. 하하.

 

그래서 이번 인터뷰도 흔쾌히 하겠다고 한 거죠. 법의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매스컴의 위력을 빌려야겠구나 싶더라고요.

 

제자들을 키우실 때 어떤 면을 중요하게 보시는지요

-지망생이 오면 꾀가 있는 사람은 택하지 않았어요. 대신 우직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을 선택했지요. 법의학은 불의와 타협하면 안 되니까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은 황적준 교수만 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죠.

 

박종철 사건 당시 황적준 교수는 국과수 법의과장이었어요. 경찰 책임자가 '책상을 쾅 쳤더니 박종철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며 부검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저지했지만, 황 교수는 영장이 나오면 부검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죠. 부검해서 폐를 살펴보니 익사였어요. 호텔 욕조에서 고문을 했던 겁니다. 경찰과 정부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했지만, 황 교수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익사라고 발표했어요.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결국 6.29 선언이 이어졌고, 군사정권이 무너졌죠. 혹시라도 어용학자가 부검했더라면 심장마비로 사망원인을 발표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죽은 사람의 편에 서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법의학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어떤 원칙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관계 맺는 일, 참 힘든 거죠. 더군다나 법의학을 하면서 대하는 사람들은 대개 뭔가 걱정이 있고 수심이 가득 찬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든 장점이 있고 어떤 사람이든 모자란 점이 있어요. 장점은 거리낌 없이 배우고, 결점은 묻어주어야 해요. 그러면 쉬 친해질 수 있지요. 자기의 좋지 않은 점도 그냥 덮어주니까요. 친해진 다음에 그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진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건 정말 진심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는 용감하게, 내 모든 걸 걸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거죠. 그런 사귐이 진정한 사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법의학으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 고려대에 법의학 교실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셨습니다

-먼저 법의학이 우리나라에서 소홀하게 취급된 배경에 대해 잠시 말씀드릴게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 의료교육을 본떠 우리나라 대학에도 법의학교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해방 후 미국식으로 의료교육을 변경하게 되는데, 미국에 간 시찰단이 대학에 법의학교실이 없는 걸 보고 한국에 와서 법의학교실을 모두 없애버렸죠. 그런데 사실 미국은 국가 차원의 법의관(ME, Medical Examiner) 제도가 있어요. 대학 단위를 넘어선 거죠. 병리 전공의가 2년간 법의관의무원에서 공부해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법의관이 되죠. 국가에서 이들에게 죽은 사람의 권리를 찾아주는 지휘권을 줍니다.

 

그걸 모르고 법의학교실을 무작정 모두 없애버려 한국에서는 그 이후 30년간 대학에 법의학교실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해방 뒤에 사망진단서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의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죠.

 

국과수를 나와 1970년 고려대로 갔어요. 한국 전역의 변사체 부검을 국과수 한 군데에서 해서는 발전이 없다는 걸 알았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해야 되겠다는 것이 큰 동기가 되었어요. 1973년 미국에 다녀온 이후에 법의학교실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껴, 대학 당국에 강력히 호소했죠. 1976년 법의학교실이 열렸어요.

 

그러나 법의학을 공부하겠다고 들어온 제자들이 한두 번씩 검찰에 다녀오고 나면 못하겠다고 도망쳐버리더군요. 법의학에 대한 개념이 없던 검사들이 마치 범인을 취조하듯 법의학자들을 큰 소리로 위협하니 버틸 장사가 없었던 거죠.

 

우리나라 검시제도에 대해 끊임없 문제제기를 해왔는데요

-앞서 말했듯이, 미국에서는 변사 관리를 전부 법의관에게 맡깁니다. 사건 현장에 변사체가 있으면 법의관이 검시의 주체가 되죠. 부검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시체는 법의관의무원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나라는 의사가 부검하고 싶어도 검사가 부검하지 말라고 결정을 내리면 부검이 불가능해요. 게다가 검사 역시 부검을 결정할 때 판사의 허가가 필요하죠. 옛날에는 판사의 영장을 기다리는데 3일씩 걸려 시체가 다 썩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어요. 표면상으로는 과학 수사, 증거주의 재판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법관 만능주의였던 거죠.

 

한국인 의사로서 미국에서 법의관이 된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한국에 돌아왔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고는 모두 돌아갔어요. 그러면서 저더러, 왜 한국에서 법의학을 하느냐, 당장 미국으로 오라고 그러더군요.

 

그들 말대로 미국에 가면 좀 이상적ㅇㄴ 법의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가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법의학을 하기로 처음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안 하면 우리나라가 법의학의 불모지로 그대로 남을 텐데, 내가 편안한 것보다는 내가 느꼈던 아지랑이 같은 첫 설렘을 기억하자, 고통을 겪더라도 우리나라 법의학의 기초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누구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입니다. 재벌이나 정치인, 지식인과 같이 살아있을 때 자기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분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 없다며 울부짖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더 일찍 그걸 느꼈으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탁하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아등바등 많이 가지려고 했던 사람일수록 인생이 허무합니다. 끝이 없는 게 욕망이죠. 한 가지를 갖게 되면 또 다른 것에 욕심을 내는 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는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에 아무것도 필요 없어집니다. 이런 걸 생존 시에 깨닫는 교육을 좀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노하우를 일러 주신다면

-저는 언제나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나를 생각하고 인정합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심장보고 빨리 뛰어라 한다고 뜁니까? 위장더러 빨리 소화시켜라 한다고 그렇게 합니까? 다 때가 있는 거죠. 내 속의 내가 쉬고 싶다고 하면 그래, 알았다 하면서 타협을 해야 해요.

 

내 속에 사는 또 하나의 나란 놈은 어떤 특성이 있냐 하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잘 안 들어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희망을 가지자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그런데 절망에서 빠져나온 경험이 있다면 그때는 희망을 선뜻 가지게 해주지요. 이렇듯 내 속에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서 잘 살피고, 그것과 타협을 하면서 살아가야 해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음 뿐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들과도 잘 지내야만 하는 군요

-그렇죠. 의식과 무의식을 두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할 때 의식은 최대한 집중하고, 무의식은 무한정 개방해야 합니다. 사람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갖고 있는 무의식의 부분이 있어요. 무의식의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쌓여져 있어요.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이완시켜 주었을 때,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위대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할 때는 눈에 불을 켜고 의식을 집중하고, 그게 안 될 때는 무의식에 맡겨버리라는 거죠. 온 몸의 힘을 다 푸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새로움을 얻을 수도 있는 겁니다.

 

평생을 일구어 온 학문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 도전핫는 모습이 대단하게 보여 집니다

-한 학문을 마스터한 후 다른 분야를 접하면, 그쪽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의학 지식을 가지고 그림을 보면, 이 기가 막힌 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 싶은 게 발견돼요. 이런 걸 융합과학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분야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이나 현역에 있는 후배들한테는 정열을 가지고 자기 일에 미치라고 이야기하고, 정년에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이모작을 준비하라고 말하죠. 평소에 연구했던 것을 토대로 다른 분야를 파고들면 무궁무진한 게 나온다고, 은퇴 후 놀지 말고 융합과학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실험을 할 데가 없잖아요. 의학은 실험을 못하면 끝이거든요. 그래도 법의학과 결부된 일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니, 시체를 부검해 사인을 알아내는 것처럼 책을 가지고 부검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른바 '책 부검'이지요. 신문을 보다 보면 어떤 음악가들은 사인이 일곱 개가 더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수집해서, 시체를 해부하는 식으로 책을 부검해 사인을 밝혀내야겠다고 결심했죠. 알아봤더니 이런 일을 하는 법의학자가 전 세계에 한 명도 없더라고요. 몰랐던 것을 아는 것만큼 기쁜 게 없죠. 지금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희열을 느끼면 거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런 이야기하니까 신이 나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허허.

 

인생에서 되돌아가서 새롭게 살고 싶은 순간이 있으십니까

-후회되는 순간이 있지요.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내 앞에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왜 돌아갑니까? 지금 하고 싶은 일도 다 못하고 죽을 텐데요. 하고 싶은 게 많아 저는 하루하루가 아까워요.(12.5.30 웅진 지식하우수

 

문국진 우연한 기회에 접한 법의학을 운명이라 믿고 법의학자의 길을 택한 문국진의 인생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한국 법의학의 역사가 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일했으며 한국에 법의학을 뿌리내리기 위해 고려대학교에 법의학교실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지금도 예술과 법의학을 접목시킨 책을 집필하면서 일반인들에게 법의학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이다. 1925년생으로 호는 도상(度想), 필명은 유포(柳浦).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과장,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 교수,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법의학 불모지에서 외롭지만 꿋꿋이 한길을 걸어, 오늘날 한국의 법의학이 여기까지 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과장 및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 법의학 교수,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일본 배상과학회 및 한국 배상의학회 고문, 한국의료법학회 고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자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상, 동아의료문화상, 고려대학교교수 학술상, 대한민국학술원상, 함춘대상,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법의학 전문서적으로 [최신 법의학], [고금무원록]을 비롯하여 18, 법의학 교양서적으로 [새튼이], [지상아] 13, 예술과 의학의 만남을 다룬 서적으로 [명화와 의학의 만남], [미술과 범죄] 18, 일본 저서로 [しき死體のサラン], [日本死體, 韓國屍體](공저), [賠償科學槪說](공저) 등이 있다.

문국진 박사의 저서들

 

문국진 박사는 고려대 재임 시절부터 우리나라 법의학의 발전을 위해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법의학 전문서부터 시작했는데, 법의학 전공서인 [최신 법의학]을 비롯해, [법의검시학], [생명윤리와 안락사], [임상법의학], [간호법의학], [생명법의학], [의료와 진단서], [진찰실의 법의학] 23권이 그 결과물이다. [しき死體のサラン], [日本死體, 韓國屍體(공저)], [賠償科學槪說(공저)] 등의 일본 저서도 있다. [日本死體, 韓國屍體]는 일본의 법의학자 우에노 마사히코 박사와의 대담집으로, 문국진 박사의 아들이자 법의곤충학자인 문태영 박사가 기록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시체 일본의 사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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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위해 수많은 현장을 누볐던 문국진 교수. 법의학이 인권을 보호하는 학문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한강 나루터 여인 살인사건을 꼽았다. 그를 통해서 듣게 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 한강 백사장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됐다. 문국진 교수가 사체를 감정해보니 턱과 가슴 등 치흔(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경찰은 변태적인 성범죄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당시 근처 공사장에는 약 50여 명의 인부들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들 중 범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소 수상해 보이면 무조건 잡아서 몽둥이질을 했다. 하지만 잡혀온 용의자 가운데 치흔과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여자의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됐고, 경찰은 문국진 교수와 당시 한 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에게 동시에 감정을 의뢰했다. 문국진 교수는 치흔이 남편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치과대학 교수는 불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정황상 남편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 치과대학 교수의 의견을 믿었다. 이에 문국진 교수는 치과대학 교수를 찾아가 서로의 감정방식을 비교했고, 치과대학 교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감정을 번복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미궁에 빠진 사건은 해결되고 신문에는 과학수사가 탐정수사를 능가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내가 치흔을 가지고 증명하지 않았으면 남편이 범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겠죠. 그러면 죄 없는 누군가는 또 고문을 당하고 누명을 썼을지도 모르지요. 사건을 잘 해결한 덕분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해서 법치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우리나라에 법치학이 시작되기도 했죠. 지금까지 잘 처리했다고 생각한 사건이에요."

문국진 교수의 법의학은 인권에서 시작해 인권을 지키는 것으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현장 일선에서 인권을 지키던 그가 학교로 돌아가 법의학 교실을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쓴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4.19 혁명 때 중앙청 건물에서 시위를 지켜본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나와서 데모를 하는데 기관총을 쏘더라고요.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는 이들을 보니까 대중들이 산더미처럼 달려들었어요. 산더미처럼 총을 쏴도 피하지 않더라고요. 이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은 불의의 죽음을 보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놓는구나,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식만 제대로 갖춘다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권이 발달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절대 법의학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로 경찰전문학교(현 경찰대학교)나 법무연수 등 원하는 곳이면 달려가서 강의를 했죠. 학교로 돌아와서 제자를 기른 것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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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그는 법의학으로 인권을 지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물론 그 방식은 조금 변화가 생겼다. 인권이 성장하듯 법의학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예전에는 법의학이 형사적인 것만 취급했지요.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인권이 많이 신장됐기 때문에 법의학도 형사 차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고의 판단과 합리적인 분배가 필요한 민사 법의학이 중요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났다고 합시다. 이제는 경찰이 개입하지 않고 의사의 진단서로 보험사끼리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법의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단 말이죠.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분배, 배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권의 문제인 것이죠. 민사로 법의학이 커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최근 십여 년 동안 문국진 교수가 가장 심취한 법의학 분야는 다름 아닌 문화. 법의학과 문화는 쉽게 연관되지 않는 분야처럼 느껴진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법의학은 법의병적학이라고 합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의 죽음을 그들의 서적이나 작품 등을 통해서 분석하는 것이지요. 당시 의사들이나 전기 작가들은 법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하니깐 사인(死因)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그런 경우 중요한 증거가 많이 남아있어요. 이 증거를 바탕으로 법의학적으로 예술가의 죽음을 파헤치는 거죠. 쉽게 말해 시체가 없기 때문에 결국에 남겨진 책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의미입니다. 북 오톱시(Book autopsy)라고도 하지요."

그렇다면 왜 그는 형사법의학에서 시작해 민사법의학을 거쳐 북 오톱시까지 연구하게 됐을까. 이 역시도 인권의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왜곡돼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아 예술가들의 인권을 살리겠다는 것이다. 고령의 법의학자는 여전히 뛰는 가슴을 안고 법의학에 천착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가들은 누구나 창조병을 앓아요. 특히 천재들은 더 그렇지요. 작품에 매달리면 두통에 시달리고 불면증이 오거나 환시, 환청에 시달리죠. 신기한 것은 작품을 완성하면 싹 사라지지만,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기존의 병과 합쳐져서 요절하는 경우가 많죠.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보는 이들은 그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술가들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의학으로 예술가들의 인권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출처-네이브케스트)

 

 

Norah Jones - Come Away With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