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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아 이런사람 5 -공동체를 꾸려가는 행복한 농부 철학자 윤규병

by 이성근 2016. 5. 30.

 

 

 

 

 

 

사람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고 여럿이 도우며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정년이 보장된 대학교수 생활을 버리고 전북 부안군 변산에서 농사를 짓는 철학자, 윤구병. 변산공동체를 이끄는 수장이자 보리출판사 대표, 재활용 가게인 기분 좋은 가게와 유기농 식당 문턱 없는 밥집등의 공익사업을 운영하는 등 수많은 직함을 갖고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농사꾼으로 불리는 것이 좋다는 농부

 

 

 

1956, 전남 무안군 몽산면 명산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구병 선생(오른쪽 끝). 한국전쟁 발발로 학교를 그만둔 뒤 휴전이 되고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전쟁 때 6명이나 되는 아들을 잃은 충격에 아버지는 윤 선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 당시엔 다시 학교를 다니지 못할 줄 알았다.

 

어린시절가 성장환경

-1943년 전남 함평에서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첫째 형은 윤일병이고, 여덟 번째 형의 이름은 윤팔병. 아홉 번째로 태어나 제 이름이 구병이 된 것이지요.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대로 625 전까지는 교육열이 상당하셨던 것 같아요.

한국전쟁 전후로는 모두들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저희 집은 더욱 가슴 아픈 가족사를 겪었습니다. 그렇게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겠다며 집 팔고 논 팔아 서울로 이사했는데 형님 여섯을 전쟁에서 모두 잃었거든요.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 625가 발발했고, 14 후퇴 때 고향 근처로 옮겨 갔지만 전쟁 후엔 흉년이 들어 혹독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12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일곱째, 여덟째 형은 도시로 나가서 연탄 공장에 다니고 구두닦이로 돈을 벌었어요.

 

가난하고 배가 고팠던 그때 저는 허천병(가상허기증)’이라는 병에 걸리기도 했었어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그러다 먹은 걸 다 토해내게 되고, 손발과 가슴은 뼈가 앙상하고 궁둥이에 살이 하나도 안 붙어있고, 그런데 아랫배만 볼록한 어린 아이, 제가 그 모습이었어요. 밥이라도 얻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형편상 학교를 다니는 것은 꿈도 못 꿨고, 실제로 4년 간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625 때 형 여섯을 잃고 난 후에 아버지는 많이 변하셨어요. 아들을 잃은 것에 상처를 입고 남은 아들 셋은 그저 평범한 농사꾼으로 키워야겠다 결심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 고종사촌 형이 아버지께 구병이를 국민학교라도 다니게 해야 제 앞가림을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해 겨우 학교 문턱을 다시 밟아보게 됐지요.

 

3~4년 정도 뒤늦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어도 순탄치는 않았어요. 피란민이다 보니 해마다 이사를 다녀야 한 탓에 저는 국민학교도 다섯 군데나 옮겨 다녔어요. 중학교 때부턴 가출도 잦아서 고등학교 땐 퇴학도 당했습니다. 그래도 성적은 좋았어요.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긴 했지만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은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마침 학원장학회에서 서울대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준다고 해서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나중에야 서울대가 다른 대학과 차별성 있는 학교라는 걸 알았고 아버지를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교수도 되고 했지만, 제 자신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졌습니다.

 

전직 대학교수, 철학자, 농사꾼, 작가, 출판사 대표 등 선생님을 wlcdgksms 많은 직함 중에 어떤게 가장 마음에 드나요

-충북대 철학과 교수 시절이던 1985, 서울 화곡동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윤구병 선생. 15년간 재직했던 대학은 안정적이었고 철학 교수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윤 선생은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이었던 가르침과 배움에 회의를 느낀 끝에 1994년 학교를 떠나 변산공동체를 꾸린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긴 하지만 농사꾼이라고 불러주는 게 가장 좋아요. 대학교에서 15년 동안 철학을 가르치고 뿌리 깊은 나무편집장,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대표도 오랫동안 맡았지만, 18년 간 농사꾼으로 살면서 그렇게 불러주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더군요.

 

15년 간 몸담았던 교수직은 국립대 정교수로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됐었죠. 그야말로 철밥통 중의 철밥통이었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절실한 삶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활력을 느끼는데, 학생들은 졸업장 얻는 데만 매몰돼 있고 도통 질문을 하지 않더군요. 질문 없는 대답을 혼자 떠드는 게 계속되니까 불행해지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제 나름으로 행복하게 살 길을 찾자고 해서 철밥통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나 에너지들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면 안되겠다고 깨달았죠.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일러주는 길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과감히 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곤 농사꾼이 됐는데 지금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요. 그렇게 1995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설렘마저 느낍니다. 날마다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소설가 지망생으로도 알려 졌는데 그길은 왜 가지 않으신 거예요

-중학교 재학시절,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 산문을 보내면 가끔 실리곤 했어요. 대학 1학년 재학 시절에는 서울대학교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공모에 오뚜기라는 글로 공모해 당선이 됐어요. 그래서 소설가로 나서볼까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는 소설가잔소리꾼이라며 반대하시더라고요. ‘작을 소()’, ‘소리 설()’해서 소설가니까 잔소리꾼이다. 잔소리꾼은 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잔소리에도 취미를 붙여서 꾸준히 소설을 써왔어요.

 

그런데 황석영 작가 때문에 소설가의 꿈을 접었습니다. 나중에 황석영 작가가 사상계>[입석부근]이라는 단편을 쓰고 [객지]라는 중편소설을 쓴 걸 봤거든요. 보면서 ! 대단한 작가구나.’, ‘나는 석영이 같은 작가가 되지 못하니까 소설 쓰지 말자.’ 이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으니 소설을 쓰지 말자고 생각하고 접었죠.

 

뿌리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으로 지내셨습니다 거기서 어떤 일을 했나요

1976년 윤구병 선생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뿌리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선생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루어진 인사라고 본인은 겸손하게 얘기하지만, 윤 선생의 능력과 가능성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파격적인 구성과 시도로 잡지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뿌리깊은 나무>는 윤구병 선생의 작품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한국 브리태니커사에 입사를 했어요. 그리고 1976, 34살의 젊은 나이에 뿌리 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제 능력보다는 발행인이셨던 한창기(韓彰琪, 1936~1997, 출판인) 선생님께서 같이 있는 식구 가운데서 편집장을 맡아주면 일손을 덜겠다며 시켜주신 것 같아요.

 

뿌리 깊은 나무는 여러 모로 잡지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책이에요. ‘이러면 망한다.’는 금기 사항을 스무 개 이상 깨뜨리고 나온 책이거든요. 그때는 여성지도 세로쓰기를 하고 있었는데 가로쓰기를 시도했었어요. 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는 국한혼용체를 과감히 버리고 한글을 고집했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을 만들자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당시엔 남녀차별이라는 것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교양지를 만들 때면 구독 계층을 대학 이상 수준의 교육을 받은 남성들만을 대상으로 해서 책을 내야 했고, 여성들은 교양이 없으니까 여성지나 보고 거기에서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식들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렇게 남녀차별 의식이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남성 중심의 편집자들이 책을 내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었고, 초등학교만 나왔거나 시골의 노인들도 한글만 깨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잡지보다 얇고 여성지 크기로 크게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겨지는 금기를 20가지 이상 넣어 만들었지만 다행히 망하지 않은 잡지였지요.

 

출판사 대표이자 유명한 동화 작가입slek.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고집하는 이유라면

-권정생(權正生, 1937~2007, 아동문학가) 선생님은 읽고 좀 불편한 느낌을 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정말 정성 들여 만든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주는 책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정말 신중하게 골라서 책을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이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뒷받침돼야 하죠. 아이들은 사람의 자식이기 이전에 자연의 자식입니다. 자연과 만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면서 더 넓은 세계, 더 많은 생물들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돕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책을 만들 때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지부터 고민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이용해 만든 책 한 권을 읽으면 어린이들이 열 그루 이상을 심을 수 있는 마음이 들도록 하고 싶어요. 어린이들에게 좋은 책을 만들어주어야 그 어린이들이 커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지 않겠어요?

 

운영중인 출판사에 대해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 기획자로 나선 윤구병 선생의 첫 기획 작품이었던 [어린이마을]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1984. 윤 선생은 이후에도 [달팽이 과학동화], [올챙이 그림책] 등을 기획했다. 어린이 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윤 선생은 이후 보리출판사를 설립하고 어린이를 위한 책을 직접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쓴 저서로는 [똑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조그마한 내 꿈 하나], [실험학교 이야기] 등이 있다.

 

-보리출판사는 19889월에 설립되었지만 처음엔 기획 회사의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그 후 1991년에 출판사로 등록을 했죠. 기획 회사로부터 따지면 한 25년 출판하고 있는데, 교육서와 자연 친화적인 세밀화도감, 그리고 아동 영역에 집중하고 있어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살아오신 고() 이오덕(李五德, 1925~2003, 교사, 작가) 선생님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정직하게, 참된 삶을 가꾸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는 그분의 사상을 기본 정신으로 삼아 유지되고 있거든요. 서로 주고 받는 말이 참말이어야 서로 도우면서 살길도 열리니 정직한 글쓰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교육학자나 대학 선생, 그런 분이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 주로 초등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 사랑의 열매를 하나하나 글로 쓴 것을 모아서 책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교육 출판사로 출발을 했었는데, 보니까 아이 때부터 자연 속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행복하게 뛰놀면서 저절로 몸에 익히는 교육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것을 저희가 깨우쳤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라도 나중에 커서 자연과 가깝게, 자연에게 친근감을 느끼면서 산과 들과 바다로 뛰어나가서 놀 수 있는 아이들로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아이들 책을 하나 둘 묶어내기 시작했죠. 아이들은 감수성의 비약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감수성을 지니고 자라야 나중에 거기서 생겨나는 힘으로 건강한 실천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게 아이들에게 바른 통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자연에서 얻는 교훈, 이런 것들을 두루 일러주기 위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보리출판사의 초기 구성원들과 함께 이 책이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따지자. 그래서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책으로 묶자.” 이렇게 저희끼리 이야기를 했어요.

 

나무와 사람은 어떤 관계입니까? 목숨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생명(生命)’이라고 한자어로 쓰지만 우리말로 하면 목숨이거든요. 우리가 목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합해서 목숨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내쉬는 숨에 섞여 있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받아서 들이쉬어 자라고, 또 나무가 내쉬는 날숨에 섞여 있는 산소를 우리가 받아서 몸 놀리고 손발 놀리고 머리도 쓰게 됩니다. 그러면 나무와 우리는 서로 없으면 안되잖아요. 죽음이에요. 목숨을 나누는 사이니까. 그리고 목숨을 주고받는 사이니까. 이 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이 아이가 됐든 어른이 됐든 자연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나무 열 그루, 백 그루를 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책을 내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출판사에서는 출판하기 꺼려하는 책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책들이 있을 것이다. 그 책을 내서 우리가 출판의 빈 고리를 메워보자.’라는 생각이었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운다는 것은 문화의 아주 중요한 빠진 부분 하나를 메운다는 큰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이제까지 출판사를 운영해 왔기 때문에 다른 출판사에 견주어서 25년 간 출판 종수가 300종이 채 안됩니다. 어지간히 큰 출판사에서는 한 해에 500종 이상 내는 곳도 있어요. 우린 그들에 비하면 아마 1/10 정도 밖에는 안 될 거예요. ‘한 권 만들어서 3천 권 파는 것보다 열 달 걸려서 3만 권 팔릴 책을 만들자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거든요. 한 해에 어떤 때는 열 권도 만들고 스무 권도 만들고 이렇게 지내왔습니다.

 

보리출판사는 9시 출근 4시 퇴근 주 30시간으 근무제를 도입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우리 현실을 살펴보면 많은 노동자들이 세계에서 최장 시간에 이르는 근무를 하고 있죠? OECD 국가 중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국가가 우리나라라고 해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모님들이 장시간 근무에 휴일, 야근, 철야까지 일을 한다고 가정하면 되려 자녀들의 일자리가 없어져버리는 형국이 돼버려요. 건강과 가족 관계를 모두 해치는 거죠. 6시간 일하고 혹은 그보다 더 적게 일하면, 일을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사회운동 차원에서 6시간 근무, 즉 주 30시간 근무로 돌렸던 거예요. 제가 홍세화 선생님께도 여쭤봤더니 세계적으로 없는 일이래요. 그걸 1년 이상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옛날에는 건강한 생산 영역에서 사람들이 일을 했어요. 의식주 문제나 교육 문제나 건강한 생산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돈이 된다면 건강하지 않은 생산 영역도 마구 늘리고 있단 말이죠. 건강에 해로운 유해 식품 첨가물 공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첨단 무기 공장, 이런 데도 들어가서 일하지 않을 수 없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불건강한 생산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오랜 시간 일을 하고 더 많은 노동력을 생산에 바칠수록 인류의 건강도 해치고 평화도 깨지는 상황이 온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듯 불건강한 생산 영역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짧게 일할수록 인류의 건강이 지켜지고 전쟁의 위험도 그만큼 적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시간 몸도 해치고 가족 관계도 해치면서 노동을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렇게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사회 운동 차원에서 6시간 근무를 시작했고, 1년 이상 유지하고 있어요. 일터에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기가 사는 집, 지역 사회로 돌아가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다행히 회사 수익률이 낮아지지 않아 임금은 줄이지 않고 오히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해서 5%가량 인상할 수 있었지요.

 

출간 권수를 줄여서 노동강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애는 쓰고 있지만, 일의 절대량을 갑자기 줄일 수는 없으니 잡지 팀과 디자인 팀은 며칠씩 연장 근로를 하기도 해요. 물론 더 일한 만큼 대체 휴일이 주어지죠. 여전히 시간 활용 방안이나 결과는 직원들 자율에 맡기려고 합니다.

 

문턱 없는 밥집도 궁금합니다 어떤 이 일을 하시는건가요

-‘문턱 없는 밥집에 대해 설명하는 윤구병 선생. 문턱 없는 밥집을 비롯하여 보리출판사의 주 30시간 근무제까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선생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밥집은 보리출판사에서 하는 일인데요, 밥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장 건강을 해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어요. 그들에게 주머니 사정이 되는 대로 돈을 내고 유기농 농산물로 지은 음식을 대접하자는 취지로 2007년에 문을 열었어요.

 

최초의 아이디어는 박원순 현 서울시장이 내놓으셨죠. 천원을 내도 좋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내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대신 많이 가진, 여유 있는 사람들은 더 내주고요. 다만 밥값을 형편대로, 혹은 못 내는 대신 음식은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철칙이에요.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빈 밥그릇 운동까지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음식쓰레기 남기지 않게 고춧가루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드십시오. 이거 전부 건강한 음식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문턱 없는 밥집은 점심 때에는 이렇게 자율 계산 방식과 함께 빈 밥그릇 운동을 하고, 저녁 때에는 건강한 음식, 유기농 음식을 드시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제 가격을 받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음식과 함께 건강한 술도 마실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과 못 가진 이들 사이에 느슨하게나마 나눔과 연대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또 출판사의 6시간 근무제가 낳은 변화, 즉 영업이익이나 일자리 개수 등을 수치로 증명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래야 사회의 변화도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15년간 재직했던 교수직을 내려 놓고 농사짓는 변산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처음 주위 반응는

-그때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학생들 가운데 제가 학교를 관두고 일 년만 버티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폼 나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가족들에겐 십 여 년 전부터 농사짓고 싶다고 얘기해왔었는데 집사람이 그러라고 허락하더라고요. 헌데 막상 가겠다고 하니 딴 얘기를 해요. 애들 시집, 장가는 보내놓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도 전에 허락을 받았으니 가겠다고 내려왔죠. 그게 제 나이 53세 때였어요.

 

당시 모두들 가장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제 발로 나온다고 하니 제 정신이 아니라는 반응들이었어요. 하지만 저에게 교수직은 밥벌이 도구였을 뿐이었고, 스스로 그 자리에서 앵무새 노릇만 했다고 생각했으니 행복한 삶은 아니었거든요.

 

제 스스로 선택해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지금은 살아 있는 시간을 내 몸과 마음 속에 깊이 빨아들이고, 내 삶의 시간을 살아 있는 다른 생명체의 시간과 함께 섞으며 지내고 있죠. 그야말로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연 속의 삶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요즘도 가끔 대학 교수보다 농부로 사는 게 진정 더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지만, 그때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변산 살기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농촌은 인류의 생명창고이며 농민은 그 생명창고의 열쇠를 쥔 사람이라는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어요.

 

변산공동체는 어떤 곳?

윤구병 선생은 일주일의 반은 서울에서 출판사 일을 보고 나머지는 변산공동체에서 손수 밭을 일군다. 이곳의 농사는 철저히 유기농 방식으로 지어진다. 또한 공동 명의의 땅에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고 남은 생산물은 판매해 수익금을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쓴다.

 

-1995년에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시작하고, 이듬해인 1996년에 생태주의 공동체 변산공동체를 꾸렸어요.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에서 출판사 일을 돌보고 나머지는 변산공동체에 집중을 했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 결과가 모여 모두에게 나눠주며 사는 생명체로 태어났고, 그러기 위해 서로 도와서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변산공동체는 생산 공동체이면서 대안 교육을 실시하는 교육 공동체이기도 하죠.

 

교육의 공공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뒤로 지금까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교육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딱 둘입니다. 하나는 사람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 남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그리고 그 힘을 얻는 것이 교육의 궁극 목표예요.

 

또 하나는 서로 도와서 사는 힘을 길러주는 것, 그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만 해결이 되면 나머지는 전부 곁가지예요. 저는 시대에 따라서 혹은 지역에 따라서 이뤄지는 교육들은 곁가지이고,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이 두 가지 힘만 길러주면 교육의 목표는 완성된다고 봐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자는 것이지요.

 

, 이곳에서는 공동 명의의 땅에 농사를 지어서 생산물로 자급자족하고 판매 수익금은 필요한 만큼 나눠 쓰는 생활을 해요. 농사는 철저히 유기농 방식으로만 짓고 있고요. 화학비료와 살충제, 제초제 등의 농약과 비닐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항생제로 키운 가축의 배설물로 만든 퇴비도 쓰지 않죠.

 

대안학교로 소규모의 초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산 살림, 들 살림, 바다 살림을 연구할 수 있는 2년제 살림대학도 설립 준비 중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사람뿐 아니라 대자연을 비롯한 우리를 둘러싼 착한 힘, 보이지 않게 돕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깨닫게 됐죠.

 

변산공동체의 규모는

-변산공동체의 시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싶다고 한 제 말을 들은 한 젊은이의 보채기에서부터 비롯되었어요. 집을 팔았다며 자금을 보낼 테니 농사지을 땅을 사서 시골로 들어가자고 숫제 협박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터를 잡게 됐습니다. 인류의 기초 살림인 산 살림, 들 살림, 갯 살림이 가능한 변산이 공동체를 꾸리기에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거든요.

 

1995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18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7000여 평의 논과 8000여 평의 밭을 일구며 한솥밥을 먹는 가족들은 20여 가구, 60여 명 정도 됩니다.

 

변산공동체의 일원이었다가 주변에 독립해 살고 있는 사람까지 더하면 100명이 넘어요. 누구라도 와서 34일 혹은 한 달 정도 체험하고 갈 수 있고요.

 

논과 밭에서는 100여 종의 작물을 심어 거두고, 산과 들에서 나는 100여 종의 약이 되는 식물들을 채취해서 효소도 담그고 있어요. 농촌 공동체의 부활,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꿈꾸는 변산공동체이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9년 변산공동체와 보리출판사가 함께 떠난 수련회에서. 이 두 단체는 윤 선생을 주축으로 돌아가며 한 가족이라고 봐도 될 만큼 끈끈한 사이다. 윤 선생은 매사에 낙천적이고 놀기를 좋아해 모임에서 인기가 높다.

 

처음 생각한 대로 운영이 되고 있나요

-저희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른 눈 믿지 말고, 부지런한 손을 믿으라고요. 눈으로 보면 언제 밭을 다 맬까 싶지만 손을 움직이면 금방 된다고 하셨어요. 변산공동체는 구성원들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으니 잘 흘러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성패를 말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한 공동체가 안착하려면 적어도 30년 이상, 한 세대는 걸린다고 보거든요. 공동체가 지속되려면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야 하니까 지금 공동체 꼬마들이 20대가 되고 결혼할 때까지 지켜봐야겠지요.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맏이가 지금 고등학생이거든요. 2세대들이 자라나 자리를 잡으면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돌림병처럼 퍼지지 않겠나 싶어요. 15년 후쯤을 기대해 보면 어떨까요?

 

누군가 저에게 손대는 일마다 다 성공했다고 신기해 하더군요. 저는 그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시골에는 과거만 있고 미래가 없어요. 마을 공동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도시 사람들의 음식 공급지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분명 재난입니다. 인류 역사상 도시 문명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거든요. 도시 사람들은 생명 에너지보다는 물질 에너지에 기대어 생활하고 있는데, 이제 물질 에너지가 한계에 이르렀고 지금처럼 사는 것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생명 에너지의 원천인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해야 하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선 이제부터라도 도농 간의 교류와 연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농촌 공동체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한 구절을 빌리자면, 농촌은 인류의 생명창고’,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지키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변산공동체 또한 그런 곳, 그런 사람들로 키워왔고 계속 지켜갈 겁니다.

 

그리고 요즈음 제가 하고 있는 공부의 주제는 사랑이에요. 무슨 거룩한 종교적인 그런 사랑이 아니라 짝지어 씨를 퍼트려서 생명의 시간을 미래로 이어가는, ‘살아남는 길을 닦는 뜻에서의 사랑이요. 사랑 속에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숨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열쇠를 찾으면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1999년 변산공동체와 보리출판사가 함께 떠난 수련회에서. 이 두 단체는 윤 선생을 주축으로 돌아가며 한 가족이라고 봐도 될 만큼 끈끈한 사이다. 윤 선생은 매사에 낙천적이고 놀기를 좋아해 모임에서 인기가 높다.

 

농부가 되어 호미와 낫을 들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윤구병 선생. 상생의 길을 찾는 농사일처럼 현대의 도시인들이 여럿이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농사가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이란 말씀에 이해가 됩니다

-대장간 아시죠? 대장간에 찾아가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괭이나 호미나 낫을 마련하려고 가고, 또 하나는 사람을 죽이는 창이나 칼을 마련하려고 대장간을 찾습니다. 호미나 괭이나 삽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나가려고 그 연장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이나 창을 벼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빠르게 폭력적으로 해결하려고 그걸 찾는 것이지요.

 

농사는 서로 죽고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서로 살리는 길을 찾아요. 이를 테면 씨앗을 뿌리는데 사람의 손을 탄 씨앗은 다른 들풀에 비해 굉장히 약해서 사람이 그걸 돌봐줘야 해요. 사람이 뿌려주고 거둬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사람도 먹고, 쥐도 먹고 새들도 먹고, 일부는 간직했다가 이듬해 다시 씨 뿌린단 말이죠. 작물들의 씨앗은 2년만 묵혀두면 발아율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씨앗 구실을 못해요. 그래서 해마다 새로 뿌려주는데 벼, 보리, , 배추, , 이런 것들은 사람 때문에 오래오래 살아남은 거예요. 그들도 살고 사람도 그것을 먹고 살기 때문에 서로 함께 상생하는 거지요.

 

아이들이 그걸 꼭 배워야 해요. 도시 사람들은 살길을 잘 모르죠.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고 여럿이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도시에서는 그런 길이 주어져 있질 않아요. 도시에서는 서로 돕는 마음가짐보다는 경쟁을 부추겨서 경쟁하도록 가르쳐요. 그리고 몸 놀리고 손발 놀려야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에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는데, 머리만 굴리도록 만들고 있어요.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도 해야 하지만 여럿이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도시에서만 살면 그걸 익히기가 어렵죠.

 

저는 농사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을 찾으려고 해야 해요. 도시에서 산다 하더라도 머리만 굴리지 말고 탈춤이나 풍물이나 몸 움직이는 운동이라도 하면서 저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배워서 조금 더 활기차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농부가 되어 호미와 낫을 들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윤구병 선생. 상생의 길을 찾는 농사일처럼 현대의 도시인들이 여럿이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지향하는 궁국적인 목표는

-처음 교수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러 내려갔을 때는 잔명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미래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바꿀 문명사적 대전환을 모색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어요. 물론 그 실험도 변산공동체나 보리출판사를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겁게 살고 싶어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옛날부터 일흔 살까지 살아남는 것은 참 드문 일이었는데, 벌써 제 나이가 71살이에요. 곱게 살지는 못했지만 곱게 죽자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지금은 하루하루 즐겁게 힘 닿는 대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열심히 하면서 살자는 거지, 큰 목표는 없어요. 다만 제가 벌려놓은 일들이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 돈을 쓰는 일들이어서 이 살림들을 잘 추스르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은 열심히 일해야죠.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라 하셨는데, 정작 사회에서 즐겁게 사는 비법이라면

-즐겁게 산다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말하며 웃음짓는 윤 선생. 책을 만들면서도 경쟁하는 것을 피했다는 그가 꿈꾸는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보다는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세상이다.

 

저는 책을 만들면서도 경쟁을 피했어요. 농사는 당연히 서로 도와야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보리출판사 식구들도 다른 출판사와 경쟁을 한다는 생각을 버렸으니 6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여유롭게 지내겠지요. 경쟁 사회 속에서도 여기저기 둘러보면 경쟁을 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믿어요. 저희는 그런 영역을 찾았기 때문에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고요.

 

또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혹은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는가를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 중요하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 또한 부질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사랑은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이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지요. 나쁜 사회는 억압, 전쟁, 착취, 이기심, 탐욕, 증오심 같은 없을 것’, ‘없어야 할 것이 들끓는 사회고요. 제가 하는 일들이 없을 것은 있고, 있을 것은 없는사회를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세상으로 만드는 데 닿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은 무엇인지

-지인들은 저한테 애니미스트라고 합니다. 애니미즘, 즉 잡신을 믿는다고 말이죠. 제가 농사짓는 곳 근처의 계곡에 있는 당산나무에게도 할머니라고 하면서 극진하게 절을 하거든요. 또 바람에게도 덕분에 제가 숨을 쉽니다.’라고 절을 하고, 제 안에 흐르는 피가 다 물이고 농사에도 물이 꼭 필요하니 물님 고맙습니다.’하고 절하고, 제가 딛는 땅에도 해에게도 늘 감사의 절을 하면서 삽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그 어떤 종교도 아니고, 지인들이 제게 하는 말처럼 그냥 잡신을 섬기며 살아요. 이렇게 두루 섬기는 마음이 저를 지탱해주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세종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착할 선()’ 자 둘에 길 장()’ 자 하나, 그리고 나쁠 악()’ 자 둘에 짧을 단()’ 자를 써서 만든 선선장 악악단(善善長 惡惡短)’이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 말로 옮기면 착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나쁜 짓을 미워하는 마음은 빨리 잊어라하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그 말대로 늘 좋은 것, 밝은 것 보면서 살고 속상한 것들은 빨리 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불교에도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말로 옮기면 마음을 놓으십시오라는 뜻이거든요. 누구든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앞줄 가운데가 윤구병 선생이다. 학다리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윤 선생은 잦은 가출로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에 다시 편입한 후, 줄곧 성적 1등을 유지하며 모범생으로 변신했다.

 

1974,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첫 직장이었던 한국 브리태니커사에서 편집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의 윤구병 선생의 모습. 첫 사회생활이었던 만큼 열정이 넘쳤던 시절이다. 비록 소설가의 꿈은 접었지만 글 쓰는 일과는 연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절의 경험들은 훗날 출판사를 꾸리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윤구병 선생. 식후에 회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윤 선생, 뒷줄 가장 오른쪽은 윤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아동문학가이며 교육자인 이오덕 선생이다.

 

윤구병 1943년 전남 함평에서 아홉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와중에 여섯 형제를 잃은 가슴 아픈 가족사로 인해 뒤늦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잦은 가출에 퇴학도 당했지만,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은 결과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장을 지내며 파격적인 구성을 시도했고, 이후 동화 작가로 활동하면서 아동문학을 담당하는 보리출판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책 한 권을 내기 전에 과연 한 그루의 나무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따지고, 아이들에게 건강한 감수성과 바른 판단력,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일러주기 위한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15년간 몸담았던 교수직을 내려놓고 농사짓는 변산공동체를 만들어 농촌에서 인류의 미래와 생명의 근본 에너지를 찾고 있다. 농사지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하루 6시간 주 30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고 문턱 없는 밥집을 시작했고 나눔과 연대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2013.8.27. 네이브)

 

 

목차

- 2030세대 절반을 농촌으로 보낼 수 있는 대통령이 희망이다

1장 정치란 다사롭게 다 살리는 일

2장 하루 6시간 노동제 얼마든지 가능하다

3장 정치 잘못으로 형 여섯을 잃은 소년

4장 유신 선포될 때 머리를 박박 밀었다

5장 한국 민주주의, 지나친 낙관은 위험하다

6장 삼류 제국주의로 변해가는 대한민국

7장 죽이는 도시, 살리는 교육

8장 사랑의 진보와 진보적 사랑

 

출판서 서평

, 지금, 윤구병인가

혼탁한 공기와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 찬 대도시, 그 팍팍한 공간에서 삶은 점차 온기를 잃어간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는 도시 문명 속에서 삶은 불안하기만 하다. 생존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조차 안심하고 먹을 수 없고, 삶의 터전은 공해로 찌들었으며, 그 속에서 공동체적 유대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미래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 또한 병든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 아래, 협동보다는 경쟁을, 자유보다는 통제를, 창의성보다는 단편적 암기를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이러한 도시 문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윤구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산업화, 문명화의 대안을 실천적으로 고민해온 철학자이자 농부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한창 산업화에 매몰되어가던 1970년대에 뿌리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을 지내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 외래 상업문화에 밀린 토박이 민중문화에 물길을 터주는 소중한 역할을 했다. 15년간 일하던 대학의 철학교수 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농부로서의 삶을 살며, 위기에 처한 도시 문명의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가 그곳에서 설립한 변산교육공동체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자녀들에게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배우고 가르쳐왔다. 이러한 그의 인생 궤적은 곤고한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삶의 새로운 문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주는 동시에 희망의 단초를 제공해주었다. 도시 문명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 앞서서 공동체적 삶의 대안에 천착해온 원로학자 윤구병에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루 6시간 근무제를 실시하다

윤구병은 묵직한 혜안이 돋보이는 철학자이자, 여러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실천가이기도 하다. 이때 성공적인 조직 운영이란 단지 매출이나 이익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조직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된다. 그가 변산공동체를 통해 죽어가는농촌에서 그 구성원들의 삶을 살찌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 실천가는 도시라는 한계 안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하루 6시간 근무제가 그것이다.

 

윤구병이 2009년 복귀해 운영하고 있는 보리출판사는 최근 ‘9시 출근, 4시 퇴근이라는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이 회사 사람들은 오후 4시면 퇴근해 개인의 또다른 삶을 꾸려나간다. 모두 정규직이며, 월급 삭감이나 어떠한 근로 조건의 불이익도 없다. 이는 OECD 국가들 중 근로시간 1, 비정규직 1위라는 한국의 불명예스러운 현실에 충격을 주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 소식이 알려지자 주요 신문들이 앞다퉈 이를 보도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인 일자리 부족을 해소하고 여가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파격적인 화두를 던진 보리출판사의 실험은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단계다. 그것이 과연 경영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조직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을 약속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윤구병의 단안이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농촌이 희망이다

윤구병은 이 책에서 기성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보통의 지식인들의 비판과는 그 각이 사뭇 다르다. 그의 초점은 수구세력의 비판이나 민주진보 진영의 집권에 맞춰져 있기보다는, 더 근본적이고 원대한 차원, 즉 근대 산업사회의 극복에 맞춰져 있다. 그가 보기에 국회의원이나 지식인 가운데 산업사회의 대안인 농촌의 현실을 정확히 알고 이를 육성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권력투쟁이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갇혀 한 치 앞의 미래를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하지만 평화의 근거지이자 생명의 뿌리인 농촌 없이는 미래도 없다. 당장 식량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의 농촌 인구가 70, 80대의 고령층만 남아 고사해가는 사이, 다국적기업체들이 세계 식량시장을 장악했다. 더 문제인 건 한국 사람들의 입맛조차 여기에 길들여져 점점 우리 땅에서 생산된 곡물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이에 젊은 세대들은 더욱더 농촌에 가지 않으려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도시의 논리로 아이들의 교육을 망치는 것도 비관적이다. 농촌의 공동체적 합리성이 무너진 자리에 목전의 이익에 치중하는 도시의 합리성이 자리했다. 이런 환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은 지나치게 커진 두뇌와 하얀 손으로 어리석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윤구병은 이러한 현실을 단호하게 비판하며 산과 들과 바다와 해와 바람에서 신선한 상상력을 길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앞에서 겸허하고, 자연에게 배우고, 농촌이 사회의 중심이 될 때라야 비로소 미래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속으로

윤구병 있다? 없다라는 말, ‘이다? 아니다라는 말이 참과 거짓을 가리고 좋음과 나쁨을 가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을 그렇게 아껴 쓰고, 자주 쓰고, 그거 없으면 생각도 못하고, 우리 느낌을 전달할 수도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다 막혀버렸어요. 이렇게 쉬운 말로 우리 뜻을 드러내는 길들이 여기저기 다 막혀버렸어요. 지금 인문학 책들, 500, 700, 1,000쪽 가까운 것들? 보세요. 우리가 옛날에 이야기, 그냥 주고받는 말이라고 했던 걸 꼭 담론이라고 해요. 이런 이상한 말이 들어온 지 이십 년도 안 됐어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배웠다는 사람이 모두 자기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바른 말들, 쉬운 말들을 다 죽여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1장 정치란 다사롭게 다 살리는 일중에서

 

윤구병 옛날에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래도 서로 주고받고 나눠먹는 게 있었어요. 유기물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 썩어버리니까, 1년 이상 보관 못 하니까 그랬죠. 요즘에는 보관기술이 좋아져서 4~5년도 보관된다 그러지만, 유기물은 묵혀두면 다 썩어버려요. 그러니까 나눌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재산이라는 것이 유가증권이라든지, 돈이라든지, 귀금속이라든지 몇 천 년을 두어도 썩지 않을 걸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평생 동안 쌓아놓을 수 있단 말이죠. 유가증권 앞자리에 있는 숫자에 동그라미를 마음먹은 대로 붙여서 금고에 쌓아놓을 수가 있단 말이죠. 축적 대상이 유기물이냐 무기물이냐에 따라 벌써 국부에 대한 정의가 달라져버려요. ---#1장 정치란 다사롭게 다 살리는 일중에서

 

윤구병 지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러는데 그 만국의 노동자가 하고 있는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 최루탄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고, 무기생산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고, 대량살상에 쓰이는 화학무기, 방사능무기, 생물학무기 이런 것을 만들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꽉 찼단 말이죠. 그리고 식품에도 돈만 된다면 우리 몸에 해로운 첨가물까지 넣어 마구 생산을 늘린단 말이죠. 건강한 생산영역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사람을 죽이거나 건강을 해치는 생산영역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런 판국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정말 건강한 생산영역이 어떤 것이냐?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건 돈벌이가 되긴 하지만 불건강하고 인류 전체 평화를 해치고 건강을 해치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걸 축소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느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1장 정치란 다사롭게 다 살리는 일중에서

 

손석춘 6시간 노동 시행 뒤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우려할 만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는지요? 윤구병 네, 보리 식구들의 가장 큰 걱정이 임금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걱정 말라고, 임금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적어도 물가가 지난해 4퍼센트 이상 올랐으니 4퍼센트는 올리겠다, 살림이 어려우니까 더는 올려줄 수 없지만 생계비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는 보조를 해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경영진이 의논을 해서 어쨌든 물가인상 만큼 ‘4퍼센트 인상을 하자!’ 결정하고 임금인상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시간은 6시간으로 줄였는데 지금까지 걱정을 많이 했던 것과는 달리 6시간제가 빨리 정착되어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난해처럼 그렇게 급속하게 매출이 떨어지진 않습니다. ---#2장 하루 6시간 노동제 얼마든지 가능하다중에서

손석춘 우리 사회에는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는 데 회의적이거나 심지어 결사반대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윤구병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야근을 하고 특근을 하고 주말 근무까지 하면서 하루 12시간, 15시간 이상씩 일하고 있잖습니까? 생계나 자녀교육비 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장시간 노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하루 8시간, 5일이 정상인데, 그걸 넘어서 장시간 노동하는 걸 계속 방치하면 청년백수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2장 하루 6시간 노동제 얼마든지 가능하다중에서

 

손석춘 선생님 이름이 구병인 이유가 아홉 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글을 보았는데요. 형님들 이름이 일병, 이병, 삼병그러셨다면서요?

윤구병 네, 우리 아버님이 좀 상상력이 없으셨어요.(웃음) 그래서 자는 돌림자, 항렬이고 아들 이름에 출생 순으로 일련번호를 붙이셨어요. 일병, 이병, 삼병팔병, 구병 이런 식으로 붙이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아홉 낳으시느라 참 힘드셨죠. 저로 끝나서 다행이지 열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면 이름을 어떻게 붙였을까, 걱정도 했지요.(웃음) ---#3정치 잘못으로 형 여섯을 잃은 소년중에서

 

손석춘 박정희가 잘못한 일만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시대의 경제성장은 인정하시는 건가요?

윤구병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박정희 때문에 경제성장이 됐는지 혹은 박정희가 없었으면 경제성장이 더 잘됐을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차관경제가 우리한테 꼭 필요했는지, 그게 좋은 것인지 여부도 그렇고요. 게다가 당시에 좌익은 이 남녘 땅에서 큰 피해를 당했지요. 제 형들만 봐도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알 바가 없었다고 보거든요.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개념이 전연 없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희생당했어요. 그런데 박정희가 또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가지고 희생시키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박정희가 못마땅했던 거죠. 제가 그렇게 형을 여섯이나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후로 학교 다니면서 정치와 경제에는 아주 까막눈이었어요. ---#3정치 잘못으로 형 여섯을 잃은 소년중에서

 

손석춘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셨는데요. 대학생 시절에 철학 공부, 재미있으셨어요?

윤구병 제가 워낙 바람 같은 사람이고, 수건 하나 목에 두르고 칫솔 하나만 꽂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가출하는 버릇은 대학교 때도 못 버렸으니까. 제가 대학을 졸업하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철학과에 간 것도 박영준이라고, 그때 연대 교수하면서 소설을 쓴 분이 있어요. 어느 날 문득 우연히 봤더니 소설 주인공이 철학과 학생이더군요. 그런데 주인공이 만날 술이나 먹고 강의실도 안 들어가고 그렇게 자유롭게 놀더라고요. ‘여기가 딱이다!’ 생각해서 철학과를 가겠다고 했거든요. 제가 철학서적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4장 유신 선포될 때 머리를 박박 밀었다중에서

 

윤구병 [뿌리깊은 나무] 창간할 때 초대 편집장을 맡았죠. 1976년에 창간된 걸로 제가 기억합니다. 2년 지나보니까 완전히 제 머리가 고갈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창기 사장을 찾아가서 그랬죠. “더이상 내 머리에서 나올 게 없습니다그랬죠. 그리고 그전에도 한 번 난리를 쳤어요. 제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하고 한 1년 됐나요? 전남 송광사로 들어갔어요. 당시 애 엄마가 첫째를 낳고 둘째를 배 속에 가지고 있었을 때인데 입산을 기도했어요. 그때 구산스님이 송광사에 계셨고 법정스님이 불일암에 계셨을 때인데, 나중에 들으니까 법정스님이 제가 거기 행자생활을 하러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저를 상좌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그러셔요. 원래 상좌를 둘 생각을 전혀 안 했던 분인데, 내가 절집에 머리 깎고 있으면 그럴 생각이 있으셨나 봐요. 거기 가서 잘 있었는데 그만 편지를 쓴 게 문제가 됐어요. 그곳에 송광사우체국이 있는데, 그 우표에 송광사 소인이 찍힌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집에다가 어쨌든 미안하다, 친정에 가서 애 키우고 그동안 전세금이라도 뽑아서 그걸로 잘 살아라하고 써 보냈는데 거기에 송광사 소인이 찍힌 거예요. 한창기 사장님이 전화로 확인을 한 뒤 떼거지로 몰려왔어요. 애 엄마, 애까지 데리고 와서 딱 포위를 하더니 차에 무조건 타!” 해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왔지요. ---#4장 유신 선포될 때 머리를 박박 밀었다중에서

 

윤구병 이명현 선생 같은 분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잖아요? 나중에 교육부장관도 했죠. 그때 만나니까 이제 정치 민주화가 될 수 있다. 박정희가 죽었으니까라고 하더군요. 이명현 선생은 김영삼한테 붙었고, 그래서 나중에 교육부장관까지 하죠. 그리고 이이화 선생은 DJ한테 기울었죠. 제가 두 사람을 각각 따로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야기했어요. ‘웃기지 마라. 민주화 봄 온다고? 안 온다. 박정희 집권만 해도 18년이고, 그 전에 이승만 집권까지 하면 실제로는 수구기득권 세력들의 뿌리가 단단히 내려 있다. 박정희는 그 나무에서 피어난 상징적인 꽃 하나다. 지금 내가 보기에는 민주화되지 않는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게 말했다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몰라요. ---#4장 유신 선포될 때 머리를 박박 밀었다중에서

 

윤구병 저는 표절 논의가 나올 때마다 속으로 조금 콧방귀를 뀌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문계의 풍습이 어떠냐면, 많은 사람이 읽은 논문이나 책을 그것도 몇 편만 가지고 여기저기서 베껴 쓰면 그건 표절이에요.

 


Emi Fujita - Desperado
노래 가져온 곳: 다음 블로그 아울렐리우스의 명상록